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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안정된 도시/개성/가장 타락한 도시/혜산(북한 이모저모)

    ○경제·범죄율 등 분석 ○…북한의 지방도시 중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도시는 「개성시」이며,가장 타락한 도시는 「혜산시」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입수된 북한관련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각 시·군에 대한 주민들의 성향및 경제실태·범죄발생률 등을 분석한 후 이같은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이 자료는 북한은 개성시를 평양 다음으로 안정된 지역으로 간주,식량 등의 물자를 타 도시에 비해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있으며,거주 주민들이 직장을 무단으로 결근하거나 싸움질 등 조그마한 문제만 야기시켜도 지체없이 타 시·군으로 추방하는 등 안정화 지속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성시가 북한의 지방도시 중 가장 안정된 지역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은 수차에 걸친 성분조사 사업을 통해 6·25전쟁 피해자 등 소위 성분양호자 20% 정도만을 남기고 전 주민을 타 시·군으로 강제이주 시킨데 이어 휴전선에 인접한 도시라는 이유로 「승인번호제」를 도입,일반인의 개성시 출입을 억제 시킨데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함께 1955년 개성시를 직할시로 승격시키면서 지방공업을 육성한 관계로 모든 물품의 공급이 타 시·도에 비해 비교적 잘 이뤄져 시민들의 생활이 다소 낫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양강도 혜산시는 중국과 인접한 관계로 밀수 등 각종 범법행위가 만연,북한이 가장 골치아픈 도시,타락한 도시로 여기고 있다. 일례로 생전의 김일성도 혜산시의 타락상에 대해 『혜산시 청년들은 주체사상보다 자본주의 사상에 더 물들어 있다』고 비판을 가하였다는 것이다. ○획일적 찬에 식상 ○…북한주민들 사이에서 시리즈 영화 「민족과 운명」을 외면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친북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체제를 「이상향」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특히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나아가 「예술적 자질」을 선전하는 도구로도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북한주민들에게는 관람이 거의 「의무사항」이 되고 있는데 주민들은 대부분 이에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즉 획일적인 김일성 김정일체제 찬양물이라는데 흥미를 잃어 의무적인 관람때에도 잠을 자거나 여러가지 핑계로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민족과 운명」시리즈는 현재 21부까지 공개됐다.
  • 북 3·1절 왜곡(외언내언)

    1919년3월1일 정오.민족대표 33인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3·1운동이 점화됐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할수없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러나 북한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마음대로 왜곡·날조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의 아버지인 김형직선생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청년들과 함께 평양에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떨쳐 나선 것을 시발로 하여 3·1인민봉기는 삽시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북한의 「근대조선역사」(84년)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바꾸었고 민족대표 33인을 김형직으로 둔갑시켰으며 3·1운동의 발원지도 평양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3·1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대중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해놓고는 『모든 인민이 지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 절절한 염원을 받들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민족 앞에 나서게 됐다』고 터무니 없는 선전을 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왜곡과 날조는 3·1운동에 그치지 않는다.제너럴 셔먼호 격침사건의 주동자를 김일성의 증조부로 변조했고 조부모인 김보현·이보익,부모인 김형직·강반석,삼촌 김형권,전처 김정숙 등 일족을 모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위대한 애국자」로 떠받들고 있다.또 이들을 위한 정례적인 기념행사까지 치르고 있다.최근에는 고고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단군릉까지 만들어놓고 김일성부자의 우상화놀음을 더욱 거세게 펼치고 있다. 김일성 가계의 혁명전통을 미화하는 한편 김일성부자세습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어쩔수없는 궁여지책이겠지만 이쯤되면 할 말을 잃게 된다.역사적 사실을 왜곡·날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반민족적 범죄인가를 모르고 있단 말인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당 수법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북은 지하의 애국영령들을 제발 더이상 모독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 연변동포작가 류연산씨 한·중 국경르포(두만강 7백리:1)

    ◎화룡 8순노인 “강 건너 뼈 묻었으면”/중국땅에 이주했지만망향의 한 때문에 못떠난다/강너머 들려오는 고국 기차소리… 그리움 사무쳐 사연많은 두만강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북으로 달려 7백리.이름하여 두만강이다.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으로서 중국 조선족과 북한 동포들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국적을 지닌채 살아 가고 있다.서울신문은 그 강 유역에 얽힌 사연들을 현지 연변 조선족 작가 류연산(38)씨가 엮는 「두만강 7백리」를 새로 연재한다.두만강 양안(양안)에서 한쪽은 변화의 회오리 바람속에 놓여 있고 다른 한쪽은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이 시리즈 집필을 위해 작가 류연산씨는 2개월 남짓 두만강 7백리를 답사했고 사진은 본사 김윤찬 차장이 촬영했다. 배낭을 등짐삼아 두만강 7백리를 굽이굽이 돌아 가노라니 깊은 정회가 가슴에 스며들고 마음은 곧 애수에 젖는다.나뭇잎이 져 버린 산야가 사뭇 허전한데 밤새 강물도 꽁꽁 얼어붙었다.물결이 넘실댈 두만강의 봄은 아직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 선생의 흐느끼는 목소리에 얹혀 한민족 가슴에 설움을 심어준 이 노래는 답사길에 오른 내 가슴을 적신다.이주민 3세인 젊은 심정이 이러할진대 그 당시 조상들이 살아온 고난의 시대를 구태여 말해서 무엇하랴. 광복전 김정구 선생이 연변공연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자 장내는 눈물바다로 변했다.그 이튿날 도문(오늘의 연변조선족 자치주 도문시)에서는 한 여인이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기약도 없이 돈벌이를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여인이 삶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그만큼이나 한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가에서 모진 삶을 살았다다.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화용시 노과진 노과촌)을 찾았을 때 조창렬(85·함경북도 경선군 주을면 봉파리 태생)노인은 피맺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주었다. 『부모님이 낳은 지 일곱달되는 나를 업고 이곳으로 이사왔디요.그때 증조부님은 굶어 죽더라도 조상산소를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불호령을 쳤다지 뭡니까.막무가내로 자식의 등허리에 업혀 고향을 떠나온 노인은 운명을 앞두고 조상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수다.사람이 팔십이면 쌀벌레라는데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지 못할 걸 생각하면 나는 잠이 안오우다.저 강이 야속하고 인생이 원통할 뿐이외다』 아버지 시신까지는 귀향시키고 외롭게 떨어져 늪골(노과의 원명)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쓸쓸해 보였다. 『삐익』 그 집앞 두만강건너에서 증기기관차가 끄는 열차가 기적을 뽑는다.노인은 그 쪽에 망연한 눈길을 주고는 한숨 짓는다.열차는 조선 삼형제굴을 지나 남촌굽이로 뱀같이 구불구불 흘러온다.애달프다.저 기찻길은 서울도 통하고 중국도 통하건만 고국 땅 허리의 군사분계선과 국경선이 발목을 잡고 있다. 두만강에 얽힌 32년전 19 63년 12월27일의 이야기 하나를 꺼내고자한다.무산쪽으로 달리는 99 31호 열차에서 청년 둘이 뛰어 내렸다.쇠처럼 굳은 언 땅에 나뒹굴던 그들은 벌떡 일어서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강쪽으로 달려갔다.그들은 얼음장이 둥둥 떠내리는 물에 서슴없이 첨벙첨벙 뛰어들었다.바로 조선 청진철도국 백암열차구 차장 김형호와 함북 무산 임산사업소 공무직장 선반공 최상현이었다.이수촌(지금의 노과진 이수촌)에서 5백여m 떨어진 두만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자 아이들을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때 물에 빠졌던 여자 아이 가운데 하나가 지금 중국 화룡시 팔가자진(화용시 팔가자진) 부진장의 부인인 한친선(원명 한순자·45)이다. 19 64년 1월9일 화룡인민영화관에서는 중조 인사 7백여명이 김형호·최상현의 살신성인적 용기를 기리기 위한 대회를 거행했다.이 자리에서 한순자의 부친 한창도는 구명은인한테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딸의 이름을 한친선으로 고쳐 부를 것을 약속했다.그날 저녁 연변가무단은 김형호·최상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각색한 가극 「친선의 물결」을 공연했다. 이러한 옛날 일을 회상하는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30여년전 이른바 중조 친선의 미담은 오늘날에 와서 많이 퇴색해 버릴만큼 세월이 변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십년 대동란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한때 중국과 북조선관계에 틈이 생겼다.조선의 은인들과 빈번한 편지거래를 가졌던 한친선은 처녀시절에 수정주의 조선간첩 혐의를 받기도 했다.중조관계가 완화된 후엔 연락처를 몰라 문안편지 한장 전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는 지난 연말 두만강 답사길에서 북조선에 사는 김형호 소식을 들었다.용정시 백금향(용정시 백금향)의 최몽필(48)문화잠장이 북조선에 갔다가 그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다. 『재작년 가을 웅기로 친척방문을 가게 됐드랬습니다.도문해관을 넘어 북조선 남양에 이르렀더니 뉘엿뉘엿 해가 지더군요.그곳에서 밤을 나고 이튿날 웅기행 열차를 탈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디요.기래서 짐들을 보관시키고 갖고 간 쌀과 고기며 술을 가방에 넣고는 무작정 아무 집이나 찾아갔습니다.남양군 남양읍 42반이라고 쓴 벽돌집이었는데,방에 앉아 유심히 집안을 뜯어보다가 깜짝 놀랐댔시요.북조선 정부에서 발급한 라성교(조선전쟁 당시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희생된 중국 지원군 병사)식 영웅이라는 훈장과 중국 정부에서 발급한 상장들이 액틀속에 정히 넣어져 벽에 걸려 있었댔습니다.그 전에 두만강에서 우리 조선족 처녀들을 구해준 김형호 그 사람이었습네다.우리는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네다. 나는 김형호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화룡시 팔가자진에 사는 한친선 여인에게 전했더니 퍽 감격스러워 했다. 오늘 우리는 도문에 가면 중조교두를 마주하고 선 친선탑을 볼 수 있다.문화대혁명시기 이 자리에는 모택동 사상이 조선에 비치라는 의미에서 조선쪽을 향해 선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었다.문화대혁명이 끝난 70년대 말에 모택동 동상을 폭파하고 거대한 두 손이 악수하는 모양의 친선탑을 세웠다.자초에는 중국과 조선의 혁명적 친선을 상징하는 뜻이었으리라.하지만 시대의 발전에 따라 이제는 그 이미지가 폭을 넓혀 두만강 건너 한반도전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연변의 친선탑은 군사분계선에 의해 대립된 남북한 통일의 그날을 고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작가약력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출생 ▲연변대 조선어문학부 졸업 ▲중산대 철학부 연수 ▲단편소설「푸른매」로 문단데뷔,「아 쪽박새」「인생숲」 등 중·단편소설 60여편 발표 ▲「해란강」「청춘무대」등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 우수도서 편집상 수상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연변조선족 문화연구회 회장,연변 인민출판사 문예부 편집위원
  • 김정일 찬양가,어린이 한글 교재로(북한 이모저모)

    ○“한국 청년들의 작품” 선전 ○…북한에서는 최근 어린이들의 한글공부까지도 철저하게 김정일 우상선전과 결부돼 학습되고 있다. 한글의 자음학습때 사용되는 이른바 「자음가」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자음가」에는 곡이 붙여져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인 「송가」의 하나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북한은 이 노래가 한국의 청년학생들이 김정일을 「흠모」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조작해 선전하고 있다. ○42년2월 김정일 나던날/백두산 기상자료 공개 ○…북한의 기상과 기후관측을 담당하는 기관인 조선기상수문국과 평양천문대는 이미 53년전인 1942년2월의 백두산을 비롯한 북한지역과 세계 각지의 기상상태와 천문현상을 기록해두었다는 자료를 공개.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한데 따르면 『당시 백두산지역에 천변만화의 자연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이는 이때가 바로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시기여서 당시 『백두산천지에서 천둥이 우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등 악천후가 계속됐으나 15일 밤부터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밤하늘에 별무리가 반짝였다』면서 김의 「신격화」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
  • 세계화 과제/외국어 조기교육 등 19개로/「추진위」 잠정선정

    ◎정부정책 개선대상은 37개 세계화추진위원회는 18일 정부종합청사에서 이홍구 국무총리와 김진현 공동위원장 주재로 제4차 회의를 열어 「법률서비스 향상과 사법시험제도 개선」등 6개분야,19개 중점추진 과제를 잠정 선정했다. 추진위는 이와함께 세계화추진 관련위원회나 정부 부처가 시행방안을 작성,위원회에 제출할 과제로 「미래산업구조에 대응한 산업인력 양성체제 개선」등 37개를 선정했다. 추진위는 오는 21일 제5차회의를 열어 추진과제를 확정한 뒤 25일 김영삼대통령주재로 열리는 제6차회의에 보고한다. 추진위는 3월까지 분야별 소위원회를 가동,과제별로 구체적인 추진정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이날 잠정 선정된 중점추진과제와 위원회 상정과제는 다음과 같다. ◇중점추진 과제 ▲외국어 조기교육실시등 효과적인 외국어교육▲외국에 대한 이해증진을 위한 교육강화▲청년들의 세계봉사와 입시제도 연계▲행정·교육·복지분야의 정보화 촉진▲법률서비스 향상과 사법시험제도 개선▲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경제규제 철폐▲노사제도및 관행의 합리화▲세계촌 운영방안▲기업지배 구조의 개선▲세계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공무원의 국제감각 함양을 위한 교육훈련제도 개선▲행정전문성 제고를 위한 고급공무원 임용 육성체제 개편▲지방자치제하의 지역균형개발추진▲세계화에 부응한 지방자치단체 역할증대▲한반도 주변4강 조사연구체제 구축▲국제기구 참여확대▲해외동포사회 활성화▲자율적 민간운동의 활성화와 각종단체 운영의 합리적 개선▲국가이미지 일류화(해외여행문화 개선,한국형 적십자운동 전개 ◇위원회 상정과제 ▲창의력과 인성중시 교육제도 개선▲미래산업구조에 대응한 산업인력 양성체제 개선▲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사회 각분야의 정보화 촉진▲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및 연구개발 활동의 세계화▲출연연구기관의 관리체계 효율화▲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정보통신서비스 산업의 경쟁 촉진▲행형제도 개선▲치안서비스 개선▲경제환경변화에 대응한 경제운영방식 개선▲징세제도 개선▲외국인노동자 종합대책▲농어촌의 세계화▲연금·의료·고용보험제도 발전▲식품·의약품안전관리체계 선진화▲금융·외환개혁의 가속화▲세계무역기구체제 출범에 대응하는 산업지원체제 개편▲도로 공항 항만 고속철도 확충▲시민정치의식의 세계화▲감사제도 확립▲공무원간 직급 불균형 시정▲공직자 경쟁풍토 조성을 위한 인사제도 개선▲공무원 사회의 긍지제고와 부정부패 척결▲지방재정의 확충▲국가와 지방정부간 재정및 정책연계성 제고▲통일에 대비한 남북한 이질성 해소▲실리외교의 추구▲신해양질서 형성에 적극 참여▲21세기 환경 비전과 추진방안▲한반도 환경보전을 위한 국제협력 강화▲우리 문화예술의 세계진출과 외국문화의 합리적 수용▲세계인상 제도 도입▲기초질서 확립과 국민생활 개혁▲문화예술 공간의 확충▲문화와 관광연계▲지식 문화산업의 경쟁력 제고
  • 뮤지컬(브로드웨이 “새바람”:5)

    ◎「팬태스틱스」 35년째 공연 “세계최장”/작년 내한 「캐츠」도 13년째 막올려… 인기는 여전/감미로운 선율·치밀한 구성에 관객 갈채/서쪽 소호·그리니치 빌리지 지역 소극장 몰려/연기·노래·춤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 워싱턴 스퀘어(광장)를 중심으로 한 그리니치 빌리지의 겨울 낮 동안은 매서운 추위와 수북한 눈덩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하다.그러나 날이 저물면 밤의 열기로 거리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남쪽으로 커낼 스트리트에서 북쪽으로 14 스트리트에까지 이르는 브로드웨이 서쪽의 소호와 그리니치 빌리지는 수많은 화랑과 소극장·라이브 하우스들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예술의 거리를 이룬다. ○예술기행의 필수 코스 브로드웨이의 예술은 뮤지컬로 대표된다.워싱턴 스퀘어 아래쪽 설리번 스트리트의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팬태스틱스」는 브로드웨이 공연예술 기행의 필수 입문코스다. 『9월을 기억해 보세요,생명이 서서히 익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풀은 파랗고 곡식은 누렇게 변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당신이 부드럽고 가냘프던 때를/기억해 보세요,기억이 나거들랑 그대로 따르세요…/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상처가 없는 가슴은 공허 뿐인 것을/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우리를 익게 한 9월의 열기를/12월이 깊어지면 우리의 가슴은 기억해야 해요,그리고 따라야 해요』 이 뮤지컬의 극중 해설자인 로버트 스미스가 고음으로 부르는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Try to Remember)의 감미로운 선율은 눈덮인 브로드웨이의 겨울에 한송이 눈꽃으로 피어 있다. 그리니치 빌리지 한 모퉁이에서 19 60년 공연을 시작하여 세계 최장수 뮤지컬의 명성을 얻고 있는 이 극은 극장이 위치한 설리번 스트리트 도로표지판 위에 팬태스틱스 레인(골목)이라는 표지판을 하나 더 달게 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시골의 한 마을에 사는 16살의 소녀와 20살 청년의 사랑이야기인 단순한 내용에 등장인물 8명으로 오프 브로드웨이(브로드웨이 외각을 뜻하며 이곳의 소극장들은 브로드웨이 극장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다)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평범한 뮤지컬임에도 한 장소에서 한 세대를 뛰어넘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설리번 스트리트 플레이하우스는 10m도 채안되는 폭에 길이 50여m의 작은 극장.관람석은 둥그렇게 무대가 자리잡은 중앙부분에는 세줄 밖에 놓일 수 없고 양쪽 옆으로 놓인 7∼8줄을 포함,모두 1백52석에 불과하다.브로드웨이 대형극장의 오케스트라 역할은 무대 뒤와 옆에 놓인 피아노와 하프 한대가 맡는다. 세트는 네개의 쇠기둥이 달린 마루판과 소품을 꺼내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드나들기도 하는 커다란 검은 상자 두개와 의자 하나가 고작이다.좁은 무대에서의 공간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극에는 검은 옷에 마술사 모자를 쓴 무언배우(Mute)가 등장,유연한 몸짓으로 담장이 되기도,나무가 되기도 하며 눈도 뿌리고 배우들에게 소품을 공급해주는 등 바쁘게 오간다. 반대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들과 딸의 결합을 원하는 양측 아버지들이 연극을 꾸며 극적인 해피 엔딩의 결합을 가져오게 하는 이 극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루젤」과 「캐츠」의 주연으로 활동한 바 있는 소녀역의 리자 메이어와 「오클라호마」,「쇼보트」 등에서 명성을 날린 해설자역의 로버트 스미스 등으로부터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의 신인인 남자역의 조시 밀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의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제곡 40여명이 불러 이 극은 또 35년동안 공연해 오며 온갖 기록을 보유한 브로드웨이의 산 역사로 남아 있다.70여개국 1천여회의 외국 공연을 포함,모두 1만4천여회를 공연했으며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들 대부분이 이 극을 거쳐갔다.소년의 아버지 허클비로 나오는 65세의 고든 존스는 브로드웨이 최고령 배우이며 늙은 배우 헨리역의 브리안 헐은 한 극에서 14년 연속출연이라는 진기록을 지니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9명의 역대 미국대통령이 관람한 기록도 갖고 있는 이 극은 특히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와 「곧 비가 내릴 거야」(Soon It’s Gonna Rain)를 에드 에임스,앤디 윌리엄스 등 40여명의 가수들이 레코드로 취입,공전의 히트를 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이 극장의 2층은 조그만 박물관으로 각종 사진자료들과 4달러에서 현재의 33달러에 이르기까지의 입장료 변천사 등이 진열돼 있다. 61년부터 이 극에 출연,뮤트역과 인디언역 등을 거쳐 현재 무대감독을 맡고 있는 제임스 쿡씨(58)는 『이 극의 제작자인 탐 존스와 하베이 슈미트는 50년초 서로 시기를 달리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편지를 통해 대본과 음악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전쟁에의 공포가 없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서 『젊은층과 노년층,미국인과 외국인,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내용과 제한된 상황에서의 치밀한 무대 구성이 장수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일본에는 세차례나 가서 공연했는데 한국은 막상 한차례도 갈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고 덧붙였다. 「팬태스틱스」 다음으로 현재 공연중인 작품 가운데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통틀어 장수의 기록을 갖고 있는 작품은 「캐츠」다.지난해 한국에서도 공연된 이 작품은 1982년의 첫공연 이래 13년동안 브로드웨이 50 스트리트의 윈터 가든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지금 그리고 영원히」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아직도 그 인기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9월29일 5천회 공연기념으로 맨해튼의 국민학생 1천명을 초청해 기념공연을 가진 「캐츠」는 지금까지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기록을 갖고 있는 슈버트 극장의 「코러스라인」(6천1백37회)과 에디슨 극장의 「오! 캘커타」(5천9백59회)의 기록을 깨는 것이 시간문제로 돼있다. ○일정한 대사없이 진행 뮤지컬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로버트 웨버의 대표적인 영국 뮤지컬인 「캐츠」는 시 「황무지」로 유명한 티 에스 엘리엇의 고양이에 대한 단편들을 모아 각색한 것이다.관람석을 포함한 무대 전체를 타이어 등이 쌓이고 지저분한 쓰레기가 널려 있는 폐차장으로 꾸민 무대장치에서 파격미가 느껴진다.일정한 대사도 없고 20여곡의 노래로만 진행된다. 제각기 독특한 의상을 차려 입은 의인화된 고양이들이 매력적인 춤과 노래로 재미 있거나 때로는 슬픈 과거를 회상하는 이 뮤지컬에는 하루종일 앉아 있기만 하는 늙은 굼비,신비의 힘이 있는 매캐비티,철도변에 사는 스킴블레생크,바지선을 타고 여행하는 난폭한 그롤티거,매력적인 그리자벨라 등 수많은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무대 벽면이 앞으로 내려와 거대한 배로 변하기도 하고 또 바퀴와 기관·연통 등을 제각기 갖고 나와 기차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무대변화가 극의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그리자벨라가 올라탄 타이어가 로켓처럼 불을 뿜으며 공중으로 치솟아 하늘에서 내려온 계단과 연결돼 그리자벨라가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다양한 현대 무대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자벨라 고양이로 분한 리즈 콜라웨이가 두차례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뮤지컬의 주제곡 「메모리」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주디 콜린스가 이 노래로 음반을 제작,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의 최장수 뮤지컬의 주제가는 공교롭게도 아름다운 회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그러나 연기와 노래와 춤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의 메카 브로드웨이는 끊임없는 변신의 몸부림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대민족회의 관련/남한에 편지공세/북한

    【내외】 북한의 조국전선·사로청·천주교인협회·불교도연맹 등은 8일 「대민족회의」소집 및 8·15공동경축과 관련해 접촉을 제의하는 편지를 한국의 남북민간교류협의회·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민주청년단체협의회·천주교중앙협의회·전국불교운동연합 등 관련단체에 각각 보냈다고 중앙방송을 인용,내외통신이 9일 보도했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김정일 후계체제 유동적”입증/북한「신년사」 신문사설 대체의 배경

    ◎김일성노선 답습… 당분간「유훈통치」계속/대남 적대감 여전… 사회주의 고수 역력 『북한은 김정일이 아니라 여전히 죽은 김일성의 망령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당보·군보·청년보」등 북한의 3개 기관지 공동사설로 대체된 95년 북한 신년사를 정밀분석한 한 정부당국자의 잠정적 결론이었다.이번 신년사의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본격적인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알릴 만한 아무런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같은 논평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사실 1일 상오 「중대방송」으로 발표된 북한의 올 신년사는 형식부터 퍽 이례적이었다.「노동신문」과 「조선인민군」 및 「노동청년」 등 3개 신문의 공동사설로 예년의 김일성 신년사를 가름했다는 것 자체가 선례가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신년사를 직접 발표하는 대신 북한체제의 핵심 기득권 집단의 집체적 의사를 공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일단 그가 국가주석과 당총비서 등 최고권력직을 승계치 않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김일성 사후 김정일 후계체제가 아직도 유동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김정일이 직접 신년사를 낭독하지 않은 것은 권력장악력의 부족이든,아니면 건강상의 이상 때문이든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까닭이다. 과거 김일성은 해방 직후 46년 첫 신년사를 발표한 이래 당시 북한헌법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격이었던 66∼71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차례도 이를 거르지 않았다.전쟁중이던 지난 52·53년에도 북한 인민군들에게 보내는 「축하문」형식의 신년사를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신년사의 내용도 지난해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해 천명한 대내외 노선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종전의 김일성노선에 대한 아무런 차별성도 제시하지 않고 김일성의 「유훈」를 계승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생전에 결정된 농업·경공업·무역 등 3대 제일주의와 「자력갱생·간고분투」의 정신을 동시에 강조했다.이는 일단 중공업 및 군수산업 위주의 산업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조는 유지하되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도 「체제보호형 개방」이라는 김일성노선을 고수할 뜻을 분명히 했다.즉 개혁·개방을 지향하는 국제적 조류 속에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보다는 당분간 체제안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 내정 개혁이 없는 최소한의 개방만을 추구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대남 측면에서도 국가보안법 철폐와 김일성이 제시한 바 있는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수용 등 진부한 주장을 되풀이했다.특히 예의 연방제통일론을 거듭 들고 나오면서 우리 정부당국에 대한 적대감도 계속 여과없이 드러냈다. 이같은 북측의 대남 자세는 올해 남북관계의 불길한 전도를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면서도 체제유지를 위한 의도적 긴장조성을 위해서 남북대화보다는 대남 비방에 열을 올린 지난해의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신년사는 김정일이 아직 김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만큼 김정일체제의 정착여부도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 죽은 김일성 통치의 북한(사설)

    지난 1일 당기관지인 「노동신문」,군보인 「조선인민군」,청년보인 「노동청년」등 3개 신문의 공동사설로 발표된 북한의 새해 시정방침은 우리를 또한번 실망시켰다. 새해를 맞으며 김정일이 신년사를 직접 발표할 것인지,발표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고 주시해왔다.그러나 김정일은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으며 공동사설의 내용은 북한핵문제타결 등으로 고조되고 있는 남북대화재개나 경협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한 채 우리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반정부투쟁 선동만 늘어놓고 있다. 김정일은 새해 첫날 군부대를 방문,그의 건재를 과시했지만 그것이 군부를 완전장악한 증거로는 보이지 않는다.그보다는 그의 위상이 아직은 불투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지난해 연말 미국과의 헬리콥터 송환협상에서 보여주었듯이 북한군부와 정무원간에 강온파 갈등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사설에서 나타난 북한의 새해 정책방향은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김일성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시대역행적인 메시지들로 가득차 있다.북한이 공동사설을 발표한 직후 김일성의 지난해 신년사전문을 육성으로 녹음방송함으로써 올해의 신년사를 김일성의 지난해 신년사로 사실상 대체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지난해 『남조선의 문민정권이란 허울뿐이고 실지로는 역대군부독재정권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었다.올해의 공동사설도 4천만 한국인이 뽑은 민선의 김영삼대통령을 「역도」라고까지 지칭하면서 『사대매국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반통일적인 증오의 대상』이라고 매도했다.정치·경제부문에서도 지난해 김일성신년사를 되풀이하고 있다.다른 것이 있다면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뿐인데 이것은 우리정부를 배제한 채 핵문제를 포함한 모든 현안을 미국만을 상대로 협상하고 대화하려는 그들의 집요한 정책을 올해도 답습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자의든 타의든 상당기간 「김일성시대」를 연장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말하자면 죽은 김일성이 북한을 다스리는 이른바 「김일성유훈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기간동안 김정일체제의 안정기반을 구축해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남북관계는 냉각될 수밖에 없고 실질적인 대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남북대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은 북한의 대외정책과 표리관계에 있는 만큼 형식적으로나마 대화에 응할 수는 있을 것이다.그러나 생산적인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남북간의 안정과 평화는 우리만이 기대하고 노력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단호하고도 확고한 대응책을 강구해나가야 할 것이다.
  • 김정일 신년사 발표없이/3개사 공동사설로 대체/북한

    북한은 1일 95년도 신년사를 김일성 생전에 최고권력자가 발표하던 관례를 깨고 노동당 당보인 노동신문과 「조선인민군」,「노동청년」등 3개 기관지 공동사설을 통해 발표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위대한 당의 영도를 높이 받들고 새해 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자」라는 제하로 중앙 및 평양방송을 통한 「중대방송」형식으로 33분간 발표된 사설을 통해 지난 한해를 회상하고 각 분야의 새해 과제를 제시했다. 이 공동사설은 『전당·전국·전군에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위의 영도를 확고히 보장할 것』이라는 등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촉구했으나 지난해와 뚜렷이 다른 대내외 정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당국과 민족통일연구원 등 연구기관들은 특히 북한이 이례적으로 김정일이 직접 신년사를 발표치 않은 사실과 관련,김일성 사후 북한체제의 불투명성을 보여주는 징후로 주목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김정일이 공식석상에 등장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김일성 사후 완전한 김정일체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있거나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유경호텔(외언내언)

    평양의 옛이름은 서경과 유경.개경(개성) 동경(경주)과 함께 고려시대 삼경중의 하나이다.북한이 평양의 보통강구역 서장지구에 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1백5층짜리 초대형 호텔을 짓기 시작한것은 87년4월.김일성이 직접 평양의 옛 이름을 따 「유경호텔」이라고 명명했다. 평양도심에 공룡처럼 서있는 이 호텔은 모양도 삼각형으로 특이하지만 시설규모 또한 세계적이다.부지가 50만㎡고 높이는 3백23·3m이며 객실은 3천개.이처럼 어마어마한 호텔을 짓기로 한것은 정치적인 속셈때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89년의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내세우기 위한 전시용이었다.평양축전 개막과 동시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시공을 맡았던 프랑스업체가 공사비를 못받게되자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골조와 외벽공사만 끝낸채 「유령의 집」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92년 홍콩의 화재투자유한공사와 내장공사및 호텔운영권을 놓고 상담을 벌이다 실패했고 마카오의 카지노재벌 여유오락유한공사에 호텔의 카지노 운영권을 맡기려 했으나 그것도 무산되고 말았다.세계은행에 7억달러의 차관도입을 신청했지만 북한의 국제적 신인도가 워낙 낮아 이마저 거부당했다. 그렇다고 이 거대한 건물을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외화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조금씩 공사를 진척시켜 지금은 1백5층중 46층까지의 객실내장공사를 마쳤다고 한다.그러나 공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되자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발상이 완공된 1천여개의 객실을 사무실로 임대하고 그 자금으로 나머지층의 공사를 마무리짓겠다는 것. 유경호텔 사무실 분양권을 한국의 부동산 전문업체 코리아랜드가 따냈다고 해서 화제다.내년 1월16일 정식계약을 체결,2월부터 분양하는데 한국기업은 입주대상에서 일단 제외됐다고 한다.그러나 한국기업을 제외하면 입주희망자가 몇이나 되겠는가.우리가 할 걱정은 아닌지 모르지만….
  • 평양 유경호텔 국내기업이 임대/「코리아랜드」 새달 정식계약

    ◎객실 1,000개 사무실 전용… 2월부터 분양 국내 부동산업체가 북한 유경호텔의 임대권을 따냈다. 부동산중개법인 코리아랜드(사장 강영수·서울 삼성동 44의 10)의 강경란(단동지사장·여·43)이사는 지난 7일 중국 단동에서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고민발)의 이성록 회장과 만나 1백5층짜리 유경호텔의 임대권을 북한으로부터 위임받는 약정서를 교환했다고 28일 밝혔다. 코리아랜드가 임대권과 광고활동의 전권을 지니며 내년 1월16일 정식계약을 체결,2월부터 분양한다.입주는 내년 12월부터 시작된다.한국기업은 입주가 불가능하다.북한이 남북간의 정치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대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객실은 3천개로 이중 1천개를 사무실로 전용한다.최소계약기간은 1년,최소단위는 객실 5개다. 임대료는 세계의 1급호텔 요금인 하루 1백50달러로 5개의 객실을 빌리면 연간 임대료가 27만3천7백50달러다.1천개 객실이 모두 나갈 경우 북한의 연간 임대료수입은 1억4천만달러다.이 돈은 호텔 건설에 쓰인다. 유경호텔은 지난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비,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시의 서장지구에 짓다가 자금부족 등으로 한때 공사가 중단됐다.40층까지의 내·외장공사는 마무리됐고 나머지 65층의 내장공사가 진행중이다. 코리아랜드는 35명의 직원에 해외지사 5개 및 국내에 30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다.
  • 중국여행객/탈북자 행세 조선족 “조심”

    ◎“도피자금 도와 달라” 금품 사취­구걸 【북경 연합】 중국으로 탈출해오는 북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최근 중국에서는 일부 조선족이 탈북자를 가장,이곳을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상대로 사기구걸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사기꾼은 특히 탈북자들의 은신처인 동북지방의 대도시 중심가에 있는 호텔 등을 무대로 한국인 여행객에 접근,도피자금및 생계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고 있는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현지 조선족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러한 조선족 사기꾼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김성일(29)이란 이름의 청년. 김은 이달초 업무차 심양을 방문해 심양시내 중산호텔에 머물고 있던 국내 중소기업대표 김모씨에게 접근해 자신은 함흥시 사로청 위원장으로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껴오던 중 평양TV 방송의 국제보도 시간에 한국내의 각종 시위 장면을 보고 자유가 보장된 나라임을 알게돼 지난 11월29일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중국으로 탈출해 왔으며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서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이에 김모씨는딱한 생각이 들어 기차표를 사는데 보태라며 김성일에게 2백위안(약 1만9천5백원)을 쥐어줬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성일은 이밖에도 올 1월부터 중산호텔을 배회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내가 함흥시 사로청 위원장인데 휘하에 2만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반김쿠데타를 모의하다 사전정보가 누설돼 몰래 도망쳐 나왔다』『북한에서 탈출해온 군인인데 배가 고파 죽겠다』고 호소하며 3백∼5백위안 정도의 금품을 사취해왔다고 이들 소식통은 전했다. 동포소식통들은 『김성일과 같은 몇몇 사기꾼들 때문에 이곳 동포사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자꾸 나빠지는 것 같다』면서 『이들은 주로 호텔이나 열차 등을 무대로 상습적인 사기구걸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 건설현장 투입 「청년 돌격대」/절도 행위·무단이탈 급증

    ◎건축자재·공구 부족해… 식량난에 탈출자 속출 북한의 각종 건설현장에 투입돼 있는 청년돌격대원들의 절도 및 조직 무단이탈 현상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 월남한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돌격대원들의 절도행위가 늘고있는 것은 건축 원자재 및 작업도구의 지원이 월활치 못한 상황에서 할당된 공사를 지정된 기한내에 끝마치기 위해 중(소)대장들이 대원들의 절도행위를 공공연히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군인에게 있어 무기는 생명과 같은 것이며 돌격대에게는 삽,곡괭이 등 작업도구가 바로 무기』라면서 작업에 필요한 공구와 원자재를 절취해 올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따라 돌격대원들은 주간의 현장작업에 절도행각을 빗대어 「야간작업」으로 부르며 인접 중대 물품보관창고나 민가에서 간부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닥치는대로 훔치고 있다. 이때문에 도로나 다리 등의 건설에 돌격대가 투입되면 예외없이 돌격대원들 상호간 또는 공사주변 주민들과의 집단 난투극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돌격대원들의 무단이탈은 배고픔과 간부들의 빈번한 구타 등이 주원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돌격대원들의 조직이탈은 신참 돌격대원이 배치되면 『소대장등 간부를 제외하고 돌격대원 전원이 한번 정도는 무단이탈 한 경험이 있다』는 농담을 거리낌 없이 전해줄 정도로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와관련 돌격대지휘부에서는 「무결자대책회의」등을 통해 이탈자 방지에 주력하는 한편 소대장 등 직속상관으로 「추격조」를 구성,탈출자를 체포한 후 과거의 사상비판에서 강제노동대에 1∼2개월 입소 시키는 등으로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이 각종 건설현장에 투입하고 있는 「청년돌격대」란 74년3월말 사로청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이 「속도전」을 지시하고 청년들이 이에 앞장설 것을 결의함에 따라 조직된 것으로 75년2월16일 최초로 「속도전청년돌격대」란 이름으로 조직됐다.현재 특별시,직할시,도별로 총 12개가 조직되어 있으며 각 돌격대는 여단­연대­대대­중대­소대­분대 등 군사조직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 동독군의 「백기통합」(통독 4년의 명암:3)

    ◎동톡무기 미그29만 남았다/동·서독군 같은 비율 감축… 동독군 6만/전비밀기관 밀고자 15% 가려내 예편 독일통일은 동서독간 대등한 통일협정 체결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서독에 의한 동독의 일방적 흡수통합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시간이 흐르고 통일작업이 하나씩 추진돼가면서 더욱 분명해졌다.더욱이 동서독 군대의 통합과정을 보면 마치 동독이 서독에 「무조건 항복」을 한듯한 인상마저 받게된다. 통일직후 동독지역에 최고사령관으로 파견돼 동독군의 「민주시민군으로의 전환작업」을 완료한뒤 지난 10월 예편한 베르너 폰 셰벤장군(육군 중장)을 포츠담근교의 자택에서 만났다.2차대전후 포츠담선언으로 유명한 포츠담은 서베를린과 인접한 구동독지역으로 셰벤장군의 고향이었다. 『남북한 군대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동서독군 사이에도 적대감정이 있는게 사실이고 또 공산주의 사상교육의 영향도 있고해서 동독군의 강한 반발등 부작용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평온하게 통합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탈냉전시대라서 긴장관계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반세기 가까이 서방측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 공산권 바르샤바조약기구군으로 대치해온 동서독군의 통합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을까?셰벤장군의 2년에 걸친 동독군의 「서독군 편입」과정 설명을 듣고는 그같은 의문은 사라졌다.통합과정은 동독군의 해체절차로 진행됐지만 병력감축등이 양측에 비슷한 비율로 이뤄졌기 때문에 동독측이 반발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통일독일의 병력은 34만명.통일과정에서 전점령군이던 미·영·불·러시아와의 합의에 따른것이다(정원은 37만명). 통일직전 서독군은 약49만,동독군은 약17만명이었다.여기서 절반 가까운 감군이 이뤄진 셈인데 현재의 34만병력의 20%선인 6만여명이 동독군출신이고 28만여명이 서독군출신이다.결국 통일로 서독군 21만,동독군 11만명 가량이 군복을 벗게된 셈이다. 동독군이 의외로 규모가 작았던 것은 동서독 인구(서독 6천3백만,동독 1천7백만명)와 동독지역에 45만의 러시아군이 주둔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94년말까지 철수키로 돼있던 러시아군은 일정을 앞당겨 지난8월 완전 철수했고 서베를린에 주둔했던 연합군도 지난9월 철수,독일은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이 됐다. 현재 독일군 장비는 군복에서부터 장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서독군당시의 것들이다.동독군의 「유품」으로는 구소련제인 미그29전투기가 유일한 예외로 현역에 남아있다. 『통일 이틀전 동독의 민선정부는 동독군 소속의 장성 전원을 예편조치했죠.통일후 대령이하 나머지 동독장교 3만2천명 가운데 2만4천명이 서독군에 편입됐는데 또 그중 절반이 90년말 군을 떠났습니다.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 떠난 것이죠.그래서 1만2천명의 장교가 남은 셈이죠』 독일정부는 2년근무 조건의 계약을 맺어 이들을 개별적으로 서독군 기성부대에 6∼8주간 배치해 특별훈련을 하면서 성분과 자질검사를 실시했다.그래서 통일독일군으로 살아남게된 동독군출신 장교는 당초의 6분의 1인 5천명.청년층인 사병들은 8만여명이 제대하고 5만5천명이 군에 남았다. 『구동독당시 비밀경찰과 군정보기관의 신상관련 비밀문서를 관장하는 신설조사기관 「가우크」 조회결과 15%의 군인들이 동료를 감시·밀고하는 역할을 했더군요.이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과거 베일속에 가려 국민을 위압하던 군에서 민주시민군으로 체질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셰벤장군은 또하나의 문제로 다른 공무원이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동독군출신은 생산성·효율성원칙에 따라 서독출신 동료들보다 20% 적은 봉급을 받고 있다. 예컨대 독일군은 NATO군의 일원이어서 반드시 공용어인 영어를 할줄 알아야 한다.그러나 동독출신은 영어는 모르고 러시아말을 배웠기 때문에 새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이런 것이 모두 비효율로 지적되는 셈이었다.
  • “내년 평양 스포츠·문화축제/북,외국인 5천명 초청”

    ◎방북 일 프로모터 【도쿄 AFP 연합 특약】 북한은 내년 4월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스포츠·문화축제에 약 5천명의 외국인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일본의 한 프로모터가 12일 밝혔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사의 기획감독인 나가시마 가추지는 최근 평양을 방문,김용순 노동당서기를 비롯한 북한관리들을 만난뒤 이같은 계획을 알게됐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앞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사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번 축제에 세계헤비급복싱챔피언인 조지 포먼과 전직 프로레슬러인 안토니오 이노키를 포함한 외국프로레슬러와 복싱선수들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89년 7월 북한은 정치적색채를 띤 「국제청년학생축제」를 개최,1백79개국에서 1만5천여명의 방문객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로인해 이미 어려움에 빠진 북한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 외국특파원이 본 YS정부/구로다 가쓰히로 일 산경신문 서울지국장

    ◎“여론 의식많는 개혁 추구해야”/대북정책 서두르지 말고 차분한 대응을 한국사회에는 한가지 유교적 재해관이 있는 것 같다.가뭄이나 홍수등 자연재해에도 또 큰사고·사건등 인재의 경우에도 위정자에 대해 「인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 책임을 묻기도 한다.최근 성수대교사고·충주호 유람선 사고등 대형 사고가 연발하자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교적 재해관 존재 그 결과 김영삼 대통령은 성수대교 사고후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일부러 『대통령으로서 부덕을 통감하고 있다』고 국민에게 사과했다.사고에 대해 대통령이 부덕을 사과한다는 것은 아주 한국적이다.동시에 권력집중이 심한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위정자는 언제나 민중과 직접 대치하면서 긴장상태에 있다.정말로 「대통령은 고달프다」.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간관리층의 옆으로부터의 자기혁신과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것을 절감하고 있다』고 했는데위에서 아무리 개혁의 깃발을 휘날리려해도 옆이나 밑에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실제는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옆이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대통령의 책임이 아닐지도 모른다.김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우리는 이제 「빨리빨리」를 최선으로 여기는,성급함과 졸속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적당히」,「그냥」이 없고,부실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외국 기자가 보기에는 이런 「적당주의」나 소위 「괜찮아 정신」은 국민들의 사고방식의 문제다. 성수대교 사고도 점검·관리·유지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그런 것들을 가볍게 여기는 한국문화(!)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이것은 또 점검·관리·유지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일을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이것은 위도 옆도 아래도 구별없이 한국인 모두의 문제다. ○한국인 모두의 문제 나는 매일 좌석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버스안에서 일어나는현실을 볼 때 한국은 아직 개혁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예를들면 버스 운전사는 손님을 무시하면서도 자기가 아는 동료 운전사가 지나가면 길 한가운데 버스를 세우고 다정하게 잡담을 한다.손님은 금연인데 운전사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직업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걸까.이러다가는 또 다리가 무너지지않을까. 자가용도 택시도 신호를 무시하고 또 서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양보 받아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내탓이오」정신도 「형님 먼저,아우 먼저」정신도 볼수 없다.이것은 사람들이 「개혁」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여전히 한국에서는 민주화도 개혁도 남이 하는 것이고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제까지의 개혁은 여론의 박수 갈채를 받아왔다.이것은 사람들이 개혁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즐긴 결과일지도 모른다. ○반정부 압력 없어야 그러나 정말 개혁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여론의 지지율이 높을 때는 여론이 아직 사태를 진지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을 때다.김영삼 대통령은 이제부터 여론의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없는 재미없는 개혁을 해야 한다.그것은 국민에 아부·영합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국민을 꾸짖으며 국민에게 자율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인기없는 정치다. 여론에 영합하지 않고,여론으로부터 오히려 불만 또는 비판받는 정치인이 후에 그 업적을 평가받을 때가 많다.물론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은 여론의 비판을 많이 받는 정치를 했지만 사후 높게 재평가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은 내치에 있어서는 비교적 순조로웠다고 해도 좋겠다.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 조직적인 반정부 압력에서 벗어난 최초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는 문제가 있는 듯하다.너무 여론 영합적이다. 예를 들면,대북 경제교류 재개를 성급하게 발표한 것은 분명히 국내 여론용이다.북미합의 과정에서 심각한 소외감을 맛봐 온 여론을 달래는 의미가 강하다.서둘러야 할 일은 하나도 없는데….그 결과 소외감을 경제교류 발표로 안이하게 해소해 버렸다.이 기회에 대북 관계 혹은 대북 교섭의 어려움(남북통일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이한 태도로 대응한 것같다. 한국에서는 「중무장 비밀 국가」인 북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같다.정부도 여론도 이쪽이 민주화·문민화가 됐으니까 북한도 부드러워지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한국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쪽이 원하면 상대도 그렇게 될거라는 낙천주의가 특징이지만 북한은 그런 나긋나긋한 상대가 아니다.물론,일본도 대북 교섭을 서둘러 재개할 필요는 없고,한국도 차분히 북의 태도를 주시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좋다.경제나 군사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힘을 충분히 기르면서 북한에 대처해야만 한다. ○내부화합·단결중요 여기서 정치적·사회적 힘이란 최병렬씨의 서울시장 기용같은 폭넓은 거국적인 인재 등용등을 예로 들 수 있다.세습독재인 김정일 체제가 노·장·청년층을 모두 규합한 새로운 철벽체제로 나오려고 하는 이 때,한국이 내부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된다.오래된 이야기이면서도 새로운 과제이지만 남북관계에 앞서 남남화합·단결이 더 중요할 것이다.
  • “유익한 세번째 만남” 한비정상 환담(김대통령 순방여로)

    ◎서울서 마닐라까지/비의 6·25참전 한국발전 큰 기여/김 대통령/한·비 평화와 자유위해 함께 가자/라모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 참석및 아·태지역 3개국 공식방문길에 오른 김영삼 대통령은 10일 하오 첫 방문지인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말라카냥궁에서 열린 공식환영식과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만찬◁ ○…피델 라모스대통령 주최로 이날 저녁 말라카냥궁에서 열린 공식만찬은 부대행사를 포함,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3시간동안 진행. 이날 저녁 말라카냥궁에 도착한 김대통령 내외는 라모스 대통령내외와 기념촬영을 한 뒤 참석인사들을 접견한 데 이어 라모스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훈장인 라자(RAJA)훈장을 수여받고 서로 선물을 교환. 김대통령은 청자와 칠보세트를,라모스 대통령은 필리핀 고유의 식탁보와 내프킨세트,차탁자를 선물로 전달. 라모스 대통령은 만찬사에서 『두나라는 자유를 위해 싸운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면서 『앞으로도 평화와 자유를 위해 함께 나가자』고 인사. 김대통령은 답사에서 『한국이 북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청년장교로 참전하신 라모스 대통령과 7천여 필리핀 장병들이 흘린 피와 땀은 오늘 한국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감사를 표시. 김대통령은 이어 필리핀 민속공연을 관람. ▷정상환담및 접견◁ ○…김대통령 내외와 라모스대통령 내외는 이날 마닐라의 말라카냥궁 주회의실에서 경제협력문제등을 화제로 환담. 라모스대통령은 자리를 잡자 『지난해 5월 방한 때 극진한 환대를 받은 것이 기억난다』고 인사를 건넸고 김대통령은 『각하가 취임한 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필리핀의 정치가 안정되고 부정부패가 척결되고 있으며 「필리핀 2000」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이라고 화답. 라모스대통령은 『필리핀은 이제 확실한 발전의 길로 접어들고 있으며 한국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도움을 요청. 이에 김대통령은 『한국과 필리핀은 상호 협력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원을 약속. 김대통령이 이어 『사람은 세번째 만남이 아주 유익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이 세번째』라고 말하자 라모스대통령 부인은 『지난해 5월 세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니 아주 유익하고 인상깊었다』고 동감을 표시하는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라모스대통령과 환담을 마친 김대통령은 숙소인 마닐라호텔에서 안가라 상원의장과 베네치아 하원의장등 상·하 양원 간부들을 잇따라 접견하고 환담. 김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투쟁연합」 당수인 안가라 상원의장등 상원간부들의 예방을 받고 『한국에서의 야당생활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하고 『어디서나 독재체제 아래서 야당하기는 어렵지만 현재의 필리핀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닌 것으로 안다』면서 필리핀 정치발전을 평가. ▷마닐라공항도착◁ ○…김대통령내외는 서울출발 3시간50분만인 이날 하오 1시20분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2박3일간의 필리핀 공식방문 일정에 돌입. 김대통령은 이어 교민 화동으로부터 꽃다발을 증정받은뒤 환영나온 교민 1백여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고 숙소인 마닐라호텔로 직행. ▷특별기 기내◁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서울공항을 출발한지 45분쯤 지나 특별기 기내를 한바퀴 돌며 공식수행원,비공식수행원,수행기자단,승무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 김대통령은 기내를 돌다 수행중인 기업인들을 만나자 『수고하겠다』고 인사를 했고 기업인들은 『기업을 도와주어 고맙다』고 답례. 김대통령은 기내순회를 마치고 조종실로 들어가 김상록 기장에게 『지금 어디쯤 비행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김기장은 항공지도와 전자계기판을 보여주며 『제주도상공을 지나고 있다』고 답변. 김대통령은 조종석내의 첨단장치에 관심을 표시하면서 김기장등 조종사들에게도 『수고한다』고 말했고 김기장은 『기상이 전반적으로 좋은 상태』라고 설명. ▷출국환송식◁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지구의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각오로 이번 방문에 임하고 있다』고 출국인사. 김대통령은 그러나 당초 인사문에 있던 『오늘의 국제사회에선 적도 없고 친구도 없고 오직 경쟁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대목은 삭제. 옥내에서 치러진 환송행사에는 황낙주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등 3부요인 내외와 김종필 민자당대표 내외를 비롯한 행정 사법 입법부 정당및 주한외교단 주요인사 60여명이 참석했으며 민주당에선 신기하 원내총무와 김병오 정책위의장이 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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