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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문제 풀기 대북 적극공세/적십자회담 제의 배경과 전망

    ◎국제여론 고조시점서 대화압력 가중/북 새체제 혼조로 화답여부 불투명 강영훈 대한적십자사총재가 이번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납북자문제와 이산가족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구체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지난달 30일 국제사면위가 고상문씨 등 납북인사들이 북한내 정치범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이후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정부의 첫 정공법적 대응으로도 볼 수 있다.즉 우리측으로선 북한측이 껄끄러워하는 사안이라도 남북간 인도적 차원의 현안이라면 정면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측으로선 어차피 납북자문제에 관한한 문제제기를 뒤로 미루더라도 북측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래서 공신력있는 국제기구가 북한에 정치범수용소의 실재를 확인하고 남한 출신 인사 11명이 구금돼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인권문제제기의 명분이 극대화된 시점을 택해 공세적 대북제의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는 한때 남북당국자간 회담을 북측에제의하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하지만 북측이 최근 남북연락관 명단통보를 위한 우리측 전화통지문 접수마저 거부하고 있는 점을 감안,일단 민간차원의 협상을 선행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후문이다. 이같은 방침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후계체제가 공식화되는 등 북한권력 내부가 정돈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말하자면 김의 당총비서 취임 등 북한의 후계권력구도가 안착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납북자가족들이 국제적십자사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의 조치로 국제여론이 고조된 시점에서 남북간 직접협상을 제안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지난 71년 8월부터 23년 동안 1백여차례 회담을 했으나 85년 한차례씩 고향방문단을 교환한 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이처럼 별다른 결실을 거두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북측이 체제붕괴를 두려워해 매우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측이 남북적십자회담사상 처음으로 총재 또는 부총재급 회동형식의 새로운 협상을 제안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이는 전통문 접수거부 등 최근 노출된 북한의 대남 지휘체계의 혼선을 감안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당장 우리측의 제의에 화답할 공산은 극히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이산가족이나 납북자문제 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던 북한의 입장이 달라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당국이 최근 고상문·유성근씨 등 국제사면위가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고 발표한 인사들을 대남방송의 「무대」위에 올려 「의거입북」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등 더욱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또 납북자문제로 인한 수세를 벗어나기 위해 김인서·함세환등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다시 제기,구태의연한 「맞불작전」을 펴고 있는 것도 불길한 조짐이다. 다만 북한도 미·북 3단계회담에서 경수로 지원과 대미관계개선 등의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려면 남북관계를 형식적으로나마 진전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말의 호응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영훈 한적총재 일문일답/“북의 새 체제 맞춰 새 형식 제의”/“미전향자 송환 요구엔 인도차원서 대응” ­이번에 총재 또는 부총재회담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제안을 하게된 배경은 무엇이고 성사전망은 어떤가. ▲성사전망은 전적으로 북측에 달려있다.그러나 이번이 과거와 다른 점은 국제사면위가 납북자들이 혹독한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는 것이다.우리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자들이 송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외에도 각국 적십자사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과거와 또 다른 점은 북한 권력구조가 변하고있다는 점이다.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체제의 출범으로 북한지도자들이 새 정책노선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있어 새 형식의 회담을 제의하게 된 것이다. ­납북자송환이란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해 북측 대응을 기다리는 한편으로 총재가 직접 국제적십자사를 방문,도움을 요청할 의사는 없는지. ▲지난 1일 고상문씨 가족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이어 2일 국제적십자 총재에게 고씨의 생사여부와 소재를 확인해줄 것과 하루속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발송했다.또 다른 가족들로부터도 탄원서를 받아 이들에 대한 관계서류를 국제적십자사에 보냈다.대한적십자사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인사의 생사여부와 소재지를 확인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노력을 하고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힘쓸 것이다. 국제적십자사엔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갈 생각이다. ­북측의 반응이 신통치않을 경우 또다른 제의를 할 용의는 없는가. ▲지난 71년 회담개최를 제의한뒤 오늘까지 우리는 기회있을 때마다 이산가족문제와 납북인사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북한에 촉구해왔다.앞으로도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북측이 김인서,함세환등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앞으로 총재 또는 부총재급회담에서 이들과 납북자들을 맞바꿀 것을 고려하고 있는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있으나 납북자와 비전향자 문제는 일면 정치적 측면이 있으므로 정부당국과긴밀히 협조를 해야한다.우리는 어디까지나 인명의 존귀함을 생각하고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비전향 장기수 2명은 전쟁때 남파돼 지리산에 들어가 살상 파괴를 자행한뒤 구속된 사람들이다.국내법에 따라 형무소에서 각각 형기를 살다 특사에 의해 풀려나와 여기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을 송환하라는 북한의 주장과 요구는 억지일뿐이다. ◎남북적십자회담 일지 ▲71·8·12 한적,남북적회담 제의 ▲71·9∼72·8 판문점 예비회담 25회 개최 ▲72·8∼73·7 본회담 7회 개최 ▲73·8 북측,모든 남북대화 중단 발표 ▲84·9·29∼10·4 북적 제공 수재물자 인수 ▲85·5∼12 본회담 재개,3회 개최 ▲86·1 북측,팀스피리트 훈련 구실로 회담 중단발표 ▲85·9·20∼9·23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및 예술공연단 교환(서울·평양) ▲89·9∼90·11 제2차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및 예술공연단 교환과 제11차 본회담 재개위한 실무대표접촉 8회 개최…결렬 ▲91·4·2 한적,제11차 남북적회담 5월초순 개최 제의 ▲92·5·7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합의 ▲92·6·5∼8·7 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및 예술단 교환 ▲92·8·8 한적 총재,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 무조건 이행촉구 ▲92·10·29 한적,제11차 남북적회담 재개촉구,11·3 북적거부 ▲94·5·9 한적,회담재개 촉구 ▲94·8·12 한적,남북적책임자 회담 제의
  • 중국 국제예술제 서울예술단 참가(문화단신)

    서울예술단이 오는 14일부터 27일까지 복경등 3개 도시에서 열리는 제3회 중국국제민간예술제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참가한다. 이 행사는 중국문학예술연합회 주최로 2년마다 열리는 것으로 올해는 미국,일본,뉴질랜드 등 14개국에서 3백80여명이 참가,각국의전통예술을 공연한다.서울예술단은 북경,혜주,심천등지에서 농악 사물놀이 북소리사위 솟을제 등 우리의 전통가락과 춤을 선보인다.또 18일에는 1천3백여석 규모의 북경 보리극장에서 전통예술인 태평무 사물놀이 농락 천도 등과 「민들레 왕국」「자매」 등 창작작품을 단독 공연할 예정이다. 한편 1,2회 행사에 참가했던 북한이 이번에는 불참할 것으로 알려져 남북한 예술인들이 같은 무대에 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60년 북송 재일동포 오페라가수 김영길씨도 북수용소에

    ◎조총련문제전문가 장명수씨 「명단」 보고 확인/부인·세 딸과 함께 북송선 타/2∼3년뒤 숙청 소식 전해져/사위는 부모가 헌금보내자 수용소 풀려나 【도쿄=이창순특파원】 1960년1월29일 하오 일본 니가타(신석)항.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부두에서 재일동포 오페라가수인 김영길씨가 『조국에 바친다』며 「오 솔레미오」를 열창하고 있었다.그러나 눈발에 휩쓸려 바다위로 흘러가버린 그의 「조국에 바친 노래」는 훗날 자신과 북송교포및 일본인가족들의 슬픔과 비극의 서곡이 돼버렸다. 당시 나가타 겐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유명한 오페라가수이던 김영길씨는 그날 제6차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그리고 그는 평양에서 화려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땅에선 비극적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화려한 영접을 받은 지 불과 2∼3년 뒤 숙청당했고 영영 소식도 끊겼다. 30여년전 이렇게 사라진 김씨가 아직 생존해 있음이 30일 국제사면위원회가 공개한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명단을 통해 확인됐다.「승호정치범수용소」 수감자명단속의김영길(Kim Yong Kil)이란 이름이 북송됐다 행방불명된 오페라가수 김영길씨일 것이라고 일본의 조총련문제전문가 장명수씨는 말한다. 장씨는 34년전 김영길씨가 눈내리는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떠나기 직전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살아 있어 다행이지만 지옥같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니…』하고 안타까워했다. 북송당시 40대초반이던 김영길씨는 해방전 일본에서 유명한 「후지하라가극단」의 테너가수로 데뷔했다.해방후 그는 북한출신 재일동포들로 구성된 「중앙문선대」의 일원이 됐다.55년 조총련이 결성된 후 「제1조선중앙예술단」이 창단되며 단장을 맡았다.그후 그는 북한에 오페라극장이 만들어졌으니 와서 북한오페라를 이끌어달라는 초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북한으로 가기 직전인 60년1월21일 도쿄에서는 그를 위한 환송리사이틀까지 열렸다. 운명의 날인 1월29일.그는 일본인 처,3명의 딸과 함께 북송선을 탔다.1월31일 청진에 도착,안기옥·최승희 등 인민배우들의 화려한 영접을 받았다. 김영길은 북한에도착한 후 「조국」으로부터 문화주택과 훌륭한 피아노를 받고는 부인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으며 당시 북송사업책임자인 김주영은 선전용으로 그의 편지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3월25일엔 공훈배우칭호까지 받았다.그는 수여식 답사에서 『조국의 품에 안겨 당과 혁명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당과 조국의 번영을 위해 나의 예술을 더욱 높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답사는 순수예술가로서의 마지막을 알리는 조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북송 2∼3년후 숙청당해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김일성에게 일본인인 처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요구한 일,그리고 자살한 북송동포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당국에 강력히 항의한 사건등으로 숙청됐다는 소문이 있다고 장명수씨는 말한다. 그후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그의 딸이 도쿄에 살다 북송선을 타고 귀국한 청년과 북한에서 결혼했으나 강제이혼당했다는 소식이 있었다.또 김영길의 일본인 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일본의 부모들이 헌금한 후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김영길씨는 아직도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이다.화려하던 동포 오페라가수의 비극은 생명과 인권을 유린당한 북송교포 모두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 북한 주체예술/세습 정당화 도구로 이용

    ◎60년대 김정일이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속도전 이론 접목/혁명가극­집단창작 통해 김일성 신격화/김정일 직접지도… 후계자능력 인정받아 김정일은 지난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주체사상을 선전·선동하는 방편으로서 북한의 문예활동을 선도해 왔다. 73년 9월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로 선출되면서 그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각됐으나 이미 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각종 문화분야에서 이른바 「지도」를 본격화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이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관을 북한 특유의 주체문예관으로 변경시켜 김일성의 신격화운동을 직접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먼저 연극분야에서 1970년대초 김정일은 『연극혁명을 일으켜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연극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가극의 시대를 개척했다. 항일 유격대원의 이야기를 다룬 가극 「피바다」를 71년 초연하기위해 김정일의 지도가 있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의 당시 북한 권력층 원로들이 이 「피바다」 공연을 보고 김정일의 능력을 크게 평가,후계자로 정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김일성 신격화 작업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일은 1980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미술 부문은 1970년대에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주체미술의 대전성기를 맞았다고 북한은 선전해 왔다. 그때까지 역사적 사실 속의 한 인물로 형상화되던 김일성이 70년대 북한의 회화에서는 현실적이며 인민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혁명적 기념비 미술은 거의 김정일의 업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 노동당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왕재산대기념비」의 경우 김정일이 비행기까지 동원하는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70년대의 「평양 지하철 벽화」,「삼지연 대기념비」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주체사상탑」,「개선문」등 80년대의 혁명적 기념비 미술로 이어진다. 음악의경우 혁명가극 「피바다」가 혁명의 무기로 생산 현장에서 공연됐다. 김정일의 음악관이 비교적 늦게 정립된 탓인지 87년 「행복의 노래」와 88∼89년 평양예술단이 창조한 민족가극 「춘향전」등이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무대공연 형식으로 발표됐다. 김은 오케스트라연주중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지적할 정도로 조예가 깊다. 김정일은 또 4.15창작단,왕재산창작단,백두산창작단등을 만들어 문학분야에 집단창작제를 제도화시켜 「조선의 별」등의 대하소설을 기획하게 했다. 그는 『우리가 건설해야할 새로운 혁명문학은 명실공히 수령을 형상화한 문학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무용에서도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가극 「피바다」에서 구사된 수법이 정형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에서 4대 명무용의 하나로 꼽는 「키춤」은 원래 「피바다」의 3장 2경에서 물방아간 가무로 나오는 것을 떼어 내 72년에 군무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처럼 북한의 각종 예술활동을 지도해온 김정일은 특히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속도전이론등을 가미한 새로운 문예이론을 만들어 부자 세습에 대비한 신격화운동에 문화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 가능성 높은 체육·문화교류(남·북한 화해시대:9)

    ◎올림픽 단일팀·예술단 교환 등 추진/언어통일 위한 학술자료 교환도 기대/평양측의 정치적 결단이 성사의 열쇠로 문화와 스포츠는 남북관계에서 무엇보다 교류가능성이 높은 부문이다. 남북한이 현격한 시각차를 보여온 정치·군사문제의 해결을 포함,통일을 위한 광범위한 논의가 정상회담에서 다루어지는 마당에 순수한 민족동질성을 확인하는 교류는 보다 쉽게 합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이미 예술·스포츠를 통해 한핏줄이 어우러진 감격을 맛본 바 있다. 지난 85년 남북의 예술공연단이 고향방문단을 따라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한 이래 90년10월 평양에서의 범민족통일음악회,같은 해 12월 서울에서의 송년음악회등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될 때마다 예술교류는 전면에서 민족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축전을 울렸다. 지난 92년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교류협력공동합의서에는 남과 북의 사회·문화교류를 전담할 공동위원회의 구성까지 약속해놓고 있다. 축구와 탁구등 스포츠부문에서 남과 북이 살을 부딪치며 하나된 「코리아」의 감격을 세계앞에 과시한 것도 불과 3년전 일이다. 91년5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에서 남북은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코리아」라는 하나의 유니폼을 입고 7천만 겨레의 가슴에 통일의 골을 선물했다. 유남규·현정화·김성희·이분희선수등이 활약한 「코리아」 탁구단일팀이 일본에서 땀에 젖은 라켓으로 우리 모두를 열광시킨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 것도 같은 무렵이었다. 이같은 감격을 되살려 민족의 숨결을 하나로 묶자는 움직임이 정부와 민간에서 활발히 일고 있다. 정부는 오는 2002년 월드컵축구의 공동개최와 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단일팀 구성,그리고 지난 55년이후 중단된 경평(서울∼평양)축구전을 부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명절 또는 8·15광복절의 문화예술단 교환방문,문화재 교환전시,손기정씨등 원로체육인들의 고향방문등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개방화의지와 맞물려 있는 문제여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바로 무슨 결정을 내린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북 사이에 평화공존의지가 확인되는대로 실현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협의해간다는 것이다. 문화체육부는 이밖에도 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난 9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종합국어대사전」 편찬작업에 북한학자를 참여시키고 남북한 국어학계의 대표적 인사 10명으로 구성되는 「국어학자회의」를 여는등 언어통일을 위한 기초자료의 교환과 학술분야의 교류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에서 발간된 「리조실록」의 출판계약권을 우리 법원이 인정한 것을 계기로 「저작권쌍무협약」을 체결하는 것도 남북한 학술교류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아시아·태평양환경 비정부단체 한국본부」(이사장 권숙표)도 오는 9∼10월 국제회의를 열어 비무장지대 생태계공동조사,UN후원아래 생태계공동보존구역설치등을 북한을 포함하는 국제환경환경운동방안으로 제의할 계획이다. 올해 「국악의 해」를 맞아 추진하고 있는 남북 국악기 교환전시와 북한의 연구가 상당부분 진척돼 있는 발해사연구 공동학술회의등도 우선 시작할 수 있는 문화교류방안으로 제시되고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대체로 정치와는 별 상관없는 분야인데도 결국 남북간의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문화·체육부문의 교류도 정치적 신뢰의 회복정도와 궤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 적십자회담 재개 바람직하다(사설)

    이 지구상에서 인도주의에 입각한 적십자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한반도일 것이다.남북한은 동주상잔의 비극을 치르고도 근 반세기동안이나 분단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살아오고 있기 때문이다.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제 강영훈대한적십자사총재가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북측에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 재개를 촉구했다고 한다.강총재는 기념사를 통해 『동진호선원을 비롯한 우리측 납북자 4백여명의 조속한 귀환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노부모방문단 교환사업등의 이행을 위해 그동안 중단된 남북적십자회담이 조속히 재개돼야 할 것』이라며 『북측이 이에 적극 호응해줄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지극히 당연한 촉구요 희망이다.우리는 적십자회담의 조기재개가 실현되기를 강력히 바란다. 남북한은 지금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갖고 1천만 이산가족의 만남을 추진해왔다.더욱이 2년전엔 분단의 상처치유를 위한 「남북한기본합의서」까지 발효시켰었다.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는 중단됐고 한반도엔 여전히 화해와 협력 대신 갈등과 반목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북한이 한국과의 대화를 계속 외면하고 핵개발고집등의 적대적인 행동을 계속하고 있기때문이다.특히 남북적십자회담의 경우는 85년12월 제10차 서울회담에서 이듬해 2월 평양에서 11차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으나 북측이 팀스피리트훈련을 구실로 중단시켰다.어디 그뿐인가.남북이산가족 노부모방문단및 예술단 교환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대표접촉은 92년8월 중단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정말이지 불행하고도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당국은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위한 우리의 적십자회담재개 촉구에 적극 호응해야 한다.정치와는 상관이 없는 이 사업이야말로 인도적 입장의 차원에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1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은 남북 어느 한쪽 만이 아닌 민족공통의 것이다.우리는 숭고한 적십자정신으로 하루속히 돌아가야 한다. 적십자정신이야말로 오늘의 동결된 남북한관계를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힘있는 원동력도 될 것이라고 믿는다.비록 지금은 남북한이 정치·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해도 적십자 인도주의정신만 발휘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한당국은 적십자본연의 정신에서 이산가족문제해결에 한층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이산가족들의 재회와 결합은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천륜의 문제다.북한의 흔쾌한 적십자회담재개 호응을 거듭촉구한다.
  • 「위대한 배우」/이정연(시론)

    평양시 전체를 촬영세트로,주석궁을 주무대로,「82세의 한 위대한 노배우」를 주연으로 한 잘 연출된 논픽션 드라마(?)의 일부를 17일 미국의 CNN방송을 통해 잠시 볼수 있었다. 금지된 지역에 각별히 초대받은 각국의 엑스트라(학자·언론인등)들은 자신들만이 가질수 있게된 행운에 감사하는듯 「노독재자」의 연기와 대사에 귀를 기울이며 감격하는 듯한 표정으로 둘러 앉아 있었다. 노배우는 이런 대사도 읊었다.『우리 공화국에는 거렁뱅이도 없고…』『우리 국토는 좁아 핵무기 실험을 실시할수도 없고』『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까지 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핵심대사에서는 『군사시설은 어느나라도 공개 안하는 것』이라는 말로 추가 핵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그러고 나서 노인다운 분위기로 돌아가 『나는 사냥과 낚시,그리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며 멧돼지 사냥이 특히 즐겁다는 투의 말도 했다.그는 또 「서울 불바다 발언」은 잘못 전달된 것이라며 뒤늦게 해명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뛰어난(?)변신의 연기를 지난 50여년 가까이 봐온 터라 별로 놀랄일은 아니나,「그래 내가 핵을 들고 문명세계를 상대로 불장난을 할만한 노인으로 보이냐」는듯 화사한 모습으로 화면에 비치면서 「사냥과 낚시」얘기를 할때 그의 연기는 과연 「명우」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보면 위선과 속임수의 천재인 이 노인의 「낚시」얘기는 진심의 일단을 말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그의 옛 공산독재동우회 멤버들은 거의 모두 쫓겨났거나 맞아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이웃 중국동지들조차 의리없이 남쪽에 걸음을 자주하는 상황에서 치매증상을 예감하는 나이에 미국에라도 한번 가봤으면 하는 심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싶다. 그의 주변 신하들은 「주석님」에게 이번 회견이 대단히 성공적이며 미국조야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보고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아니 세계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케 될 것이다.「거렁뱅이가 없다」니 물론 주석궁 근처에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두만강을 건느는 굶주린 유민,「시베리아 벌목장을 탈출한 북탈 조선인」은 이제 세계 문명사회뿐 아니라 지난날의 동지인 러시아,중국정부에서도 동정어린 눈으로 해결책을 우리와 협의하고 있는 터요,영변인근의 핵시설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단이 이미 상당한 증거를 잡고 최종 확인작업을 위해 추가 사찰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을 1백70여 유엔회원국이 알고 IAEA회원들이 알고 중국을 포함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이미 사찰을 위한 합의된 성명을 내놓고 다음단계 조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서울 불바다」사건은 주석궁 주변의 연출자가 준비해준 대사를 박영수라는 사람이 판문점이라는 지정된 장소에서 감정을 넣어 대독했을 뿐임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단지 불행한 일은 잘되면 「수령」공이나 그렇지 못하면 퇴락하듯 판문점을 드나든 연형묵전총리나 김달현전부총리처럼 나팔수 박영수의 임무도 이제 끝난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아마도 그가 놀란 것은 「불바다 발언은 한국고위층 위협용으로 일반공개를 못할 것으로 본듯」(고영환전북한외교관)하나 이 파문이 확산되면서 한국민의 동요는 커녕 패트리어트미사일배치를 비롯,한국과 미국의 군사적인 강경대응조치도 서슴지 않는데 있는것 같다. 이제 노배우가 주연하고 있는 「평양 커넥션」은 막을 내려야 할때가 그리 멀지 않은듯 하다. 백성은 배고프고 숨이 막혀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고,시베리아 벌목장에라도 가는게 낫다며 돈 써가며 「북조선」을 탈출하고 경제는 피폐해 공장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터에 일인 독재,일가 전제로 지난 48년간에 걸쳐 「빈곤의 유토피아」를 북한에 건설한 김주석이 최후의 만찬이라도 하듯 해마다 생일날이면 40여개국 50여 예술단을 초청,잔치상이나 벌이고 그 나이에 새 친구를 사귀고 사냥이 하고 싶다는 넋두리나 늘어놓는 통치자를 위대한 수령으로 계속 떠 받들어야 하고 그런 체제가 계속 굴러간다면 그것은 비극일수밖에 없다.
  • 13살 바둑신동 이봉일,일 아마대회 파견예정(북한 이모저모)

    ◎조각­기념물 수출·현지제작… 외화획득 열올려 ○중국유학중 단연 두각 ○…북한 바둑계에 새로운 유망주가 나타났다고. 재일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에 의하면 북한은 바둑인재 양성을 위해 지난해 5월21일부터 11월30일까지 6개월동안 문영삼(남)·최은아(여)등 8명의 나이 어린 소년·소녀 기사들을 중국에 유학보냈는데 이들중 열세살난 이봉일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 아마 5단수준인 이봉일은 유학기간중 중국 프로2단의 실력을 인정받은 현 북한바둑계 최강자 문영삼과의 2차례 대국에서 잇따라 불계승을 거두는등 8명의 유학생중 최고의 성적을 올림으로써 올해 5월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에 북한대표로 참가하게 될 예정이라고. 북한 바둑계에서는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문영삼이 6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들어 이봉일이 올해 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만경대 체육대회 시작 ○…김일성 생일행사의 하나로 매년 열리는 만경대상 체육대회가 부주석 박성철과 당비서 김중린을 비롯한 당간부들과 주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4일 김일성경기장에서 개막됐다고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 지난 69년부터 시작된 만경대상 체육대회는 지난해의 경우 4월1일 개막돼 평양과 지방에서 분산 진행됐으며 김정일의 생일체육행사인 「백두산상체육대회」와 함께 북한의 주요 체육행사다. ○만수대 창작사서 전담 ○…북한은 최근 조각작품이나 기념물을 해외에 수출하거나 현지에서 직접 제작함으로써 외화획득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에서 발행되는 영문잡지 「포린 트레이드」 최근호에 따르면 이러한 조각품 수출 및 해외제작은 만수대 창작사에서 전담하고 있는데 에티오피아·부르키나파소·자이르등 아프리카 친북국가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열흘간 예술축전 개최 ○…북한이 김일성 생일 행사의 일환으로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제12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이 오는 9일부터 19일까지 열흘간 진행된다고 중앙방송이 3일 보도. 각국의 예술단체들과 예술인,해외교포 예술인 등 수백명이 참가하는 이번 행사에는 중국과 태국의 문화대표단을 비롯해 모두 5개 대표단이 참석한다고.
  • 개혁 3백65일 성과와 과제/본사취재부장 좌담(문민정부 1년)

    25일로 김영삼대통령이 취임한지 한돌이 됐다.32년만에 부활된 문민정부는 신한국 창조의 기치아래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의 실시등 쉴새 없는 개혁조치들로 군사문화의 잔재를 씻어내느라 숨가쁜 한해를 보냈다.아울러 쌀등 농산물시장 개방,대형사건·사고,북한핵문제등 시련도 많았다.서울신문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국제부등 5개 부서 부장들의 방담을 통해 그동안의 변화와 개혁을 평가하고 문민정부 2차연도의 과제를 짚어본다. ◎“「한국병」 과감히 수술… 성역 없앴다”/공직사정 서슬에 경기회복 지연 아쉬움/폭력시위 줄었지만 집단이기민원 늘어/총독부건물 철거 등 민족정기 회복 노력 ▲이중호정치부장=김대통령은 취임하자 바로 본인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하고 정치자금의 단절을 선언함으로써 신한국 창조를 위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습니다.여기서 비롯된 「공직자 재산공개 태풍」은 숱한 인사들을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는등 정치권이 자기 살을 베는 아픔을 격기도 했지요. 또 「5·16」과 「12·12」를 「구데타」등으로 규정함으로써 군사정권과 단절하고 헌정질서를 제자리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깨끗한 정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치관계 입법도 새 정부의 개혁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인치법치논쟁 유감 김대통령이 개혁을 주도하면서 한때 「인치 법치」논쟁이 일었던 것은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여기에는 정치권이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개혁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활발했던 정상외교는 문민한국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올해는 일본과 중국 순방등을 통해 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를 추진해나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고요. ▲정신모경제부장=김영삼대통령은 취임후 격주로 과천청사를 찾았습니다.경제도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챙기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정치적 발상이었다고나 할까요.그러나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아래 추진된 1백일 계획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기는 합니다만. 전격적으로 단행된 실명제와 2단계 금리자유화 조치는 처음 우려와는 달리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특히 실명제는 정면돌파를 특기로 하는 김대통령 아니면 실시가 불가능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쌀등 농산물시장 개방을 가져온 우루과이라운드(UR) 태풍으로 어지간히 시끄러웠지요.농어촌특별세가 도입돼 연간 1조5천억원씩 10년동안 15조원을 농어촌에 투자한다는 계획이 착실히 추진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올들어 경기가 회복되고 있습니다만 여러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특히 사정활동의 강화는 그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투자활동을 위축시켜 결과적으로 경제에 주름살을 지웠지요.기업인들의 불안감을 신뢰로 바꾸는 연구가 부족했던 결과가 아닐는지요. ○노동법개정 늦어져 ▲이기백사회부장=사회적으로는 광범위한 부정부패 척결이 이뤄지면서 「한국병」의 실체를 파헤쳤지요.군의 인사비리·율곡사업비리 감사,동화은행 비자금 수사,슬롯머신등 과거 정권에서 성역시 되던 분야에 대한 과감한 수술은 「표적」시비를 낳기도 했지만 높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열린 사회,열린 마음」의 의지는 청와대 앞길 개방,인왕산 개방,청와대주변 안가 철거 및 시민공원 조성,지방 청와대의 시민 편의 시설 전환등 군사문화의 잔재일소로 나타났고요.전격적인 군인사와 숙군작업은 문민우위의 원칙과 군의 정치불개입 원칙을 확인시킴으로써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게 했고요.대규모 사면·복권과 가석방,수배해제,복직등 국민대화합을 위한 조치도 뒤따랐습니다.폭력시위가 줄어든 대신 집단이기주의적인 민원이나 시위가 늘어난 것도 큰 변화이지요. 지난 한해는 자율에 입각한 노사관계로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각종 압력·이익단체에 강력 대응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인 아쉬움도 남겼습니다.노동관계법 개정이 늦어지고 있는 점이나 「무노동 무임금」같은 주요 정책추진에서도 일관성을 잃은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김정열문화부장=문화분야에서는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단행한 국립중앙박물관 건립과 옛총독부건물 철거등이 주목됩니다.오는 2000년이면 건국이후 처음 우리 손으로 지은 박물관이 용산가족공원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굴욕의 상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겠지요. 경복궁의 강녕전,창덕궁의 인정전 행각과 인정문 복원사업등 문화재의 원형복원작업도 새 정부의 「작품」입니다.해외에 산재한 문화유산의 보존·전승대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이밖에 「민중미술」「민예총」등 재야예술단체의 제도권수용은 문민정부의 진전된 의식전환의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전당을 비롯한 큼직한 문화공간이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소프트웨어의 개발및 공급부족으로 제구실을 못해 안타깝습니다. ▲황병선국제부장=외국에서 바라본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극찬」 그 자체였습니다.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금융실명제의 실시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를 앞다퉈 소개했고 개발도상국들은 『우리들이 사는 길은 한국의 개혁사례를 본받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새 정부의 강력한 개혁드라이브가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은연중 높이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한예로 중국의 신화통신·광명일보·북경일보에서는 「국수 한그릇」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대통령의 검약정신과 개혁마인드를 소개하며 중국관리들을 질타하기도 했었지요.러시아·헝가리등 동구권 국가들도 김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관심,경의표시는 마찬가지였다고 보입니다.미국의 비즈니스 위크지 최신호에서는 새 정부의 경제부문에 대해 B학점을 매겼는데 경제규제 완화조치,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등 획기적인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불황과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꼽았더군요. ▲이정치부장=북한핵문제는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요.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갈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입니다. 곧 마무리지어질 정치개혁입법을 현장정치에 접목시켜 「깨끗한 정치」를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것입니다.이는 95년의 4개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이라는 시험대를 통해 가름되겠지요.국회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 강구되고 있지만 정치인 스스로의 의식전환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정경제부장=최근물가정책의 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정책에 정치논리가 개입되는 것 역시 고쳐져야 겠지요.물가문제는 결국 소비자가 인상분을 부담하거나,공공서비스에 있어서는 세금을 올려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데 무작정 눌러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미봉책 때문에 결국 왜곡이 심화된다는 사실을 실감할 날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군 효율성 제고 시급 ▲이사회부장=일선 경찰관들의 금품수수에다 무사안일주의 등은 근절되어야 합니다.떼강도사건 등의 재발방지등 민생치안의 강화를 위해 경찰의 사기진작이나 장비의 과학화등이 함께 추진되어야 하고요.교육개혁을 반드시 이뤄내고 교육개방에 대비해야 하는 것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군문제와 관련해서는 장군서열 조정,낙후 병영시설 개선,부대운영의 비효율성 개선등도 필요합니다. ▲김문화부장=지적재산권을 비롯한 국제화,개방화에 대비한 적극적인 지원책이 시급합니다.국민들의 문화향수 욕구에 부응한 폭넓은 프로그램 개발등이 아직 미진한 것도 숙제로 지적되고 있고요.이같은 맥락에서 영화,연극등의 기술요원을 포함한 문화예술 전문인력의 양성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문화전문인력 양성 ▲황국제부장=주변강대국들은 김영삼정부가 해결해야 할 최대과제로 경제회복문제 보다 북한핵문제 같은 것을 꼽고 있습니다.김대통령이 올 신년사를 통해 밝힌 것처럼 북한의 핵개발로 야기된 일련의 문제를 지구촌차원에서 더욱 관심을 갖고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자세를 촉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 “북,사찰거부땐 안보리회부 불가피”/한 외무,당정회의 보고

    한승주외무장관은 1일 북한 핵 문제와 관련,『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개시가 불가능하면 한스 블릭스 IAEA사무총장은 안전조치의 단절을 선언할 것으로 예상되며,그 경우 유엔안보리 회부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장관은 이날 하오 서울 여의도 민자당사에서 열린 외무관련 당정회의에서 보고를 통해 이같이 말하고 『한국과 미국 두나라는 3단계 북·미접촉이 IAEA사찰및 남북특사교환 실시후에만 가능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 했으며 특히 남북특사교환을 통한 핵문제의 실질대화가 긴요하다는 데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밝혔다. ◎“북핵 21일 전후가 고비”/이영덕부총리 이영덕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1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가 열리는 오는 21일 전후가 북한핵문제 해결의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북한이 IAEA사찰을 수락하도록 한·미·IAEA간 삼각협의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이날 하오 민자당사에서 열린 통일정책 당정회의에 참석,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위협한 북한 외교부대변인의 지난달 31일 성명내용을 분석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이같이 밝혔다. 이부총리는 『IAEA가 핵안전조치의 계속성 훼손을 선언,북한핵문제가 유엔안보리에 회부되는 시나리오와 IAEA사찰이 실시돼 대화를 통한 핵문제해결이 본격적인 단계로 진입하는 두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상정할 수 있다』면서 『중국의 대북 영향력행사가 북한측 태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 진전없으면 안보리에 회부/미 국무부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미국무부는 31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유보결정을 철회할수 있다고 경고한데 대해 『이미 밝힌바 있는 것 처럼 핵문제 타결에 진전이 없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할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핵 안보리회회부 막게 중국서 북한설득/황 주중대사 밝혀 황병태주중대사는 1일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가 유엔 안보리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북한에 대해 강한 설득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하고 『중국은 핵문제를 비관적으로 보고있지 않다』고 밝혔다. 해외공관장회의 참석차 일시 귀국한 황대사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지난 92년 8월 한·중수교로 소원해졌으나 최근 북한 예술단을 보내는등 완전히 회복돼 김일성의 방중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북서 시간끌면 협상 전면중단/IAEA대변인 【도쿄=이창순특파원】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금주중에 나올 것으로 보이는 핵사찰 수용에 대한 북한측의 회답이 부정적이거나 시간끌기 작전으로 간주되면 협상을 중단할 것이라고 일 도쿄(동경)신문이 데이비드 키드 IAEA 대변인의 말을 인용,1일 빈발로 보도했다.
  • 헐뜯으면 신뢰 쌓지못한다/유은걸(데스크 시각)

    사대매국노,민족반역자,인간추물,정치매춘부,식민지 주구,허수아비,문민파시스트,정치간상배,괴뢰도당…. 최근 북한은 연일 방송과 신문을 총동원해 이렇게 김영삼대통령을 원색적으로 인신공격하고 있다.이 뿐인가.깡통중의 깡통,함량미달,역도,돌대가리,무식쟁이,전쟁광신자등 욕설의 종류가 무려 60여개가 넘는다니 아연해진다.통일원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중 김대통령에 대한 비방은 무려 2백49회에 이르렀고 올들어 그 강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 ○무차별 대남비상 북한측은 지난해 김대통령 취임직후와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노인을 송환한 3월이후 몇개월간은 눈에 띄게 비방을 자제해왔다. 그러다가 김대통령이 『핵무기를 갖고있는 나라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핵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천명한 6월부터 표변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측이 왜 이처럼 대남비방을 강화하고 있는지 웬만큼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는 저간의 속사정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북과남이 입장을 한번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우리쪽에서 김일성주석에 대해 갖은 욕설을 퍼붓고 북한의 체제를 강도높게 비난하고 나온다면 북한쪽은 어떨까. 「우리식대로 한다」고 강변하며 나올 지 모르지만 북한이 정녕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한국의 국가원수를 인신공격하거나 체제비방을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한반도가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호신뢰구축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남북한합의 위배 또 비방은 서로 헐뜯지않기로 한 남북한 합의사항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쌍방은 지난 72년에 발표된 「7·4공동성명」에서 상호비방을 중지하기로 합의한 바 있으며 가까이는 92년 2월에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이를 재확인한 바 있지않은가. 김대통령을 파시스트라고 매도하고 문민정부를 파쇼정부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대목이다. 김대통령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뽑혀 북한쪽에서 파쇼정부라며 타도를 외치던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정통 문민정부를 세운 사실을 북한측도 잘 알 것이다.또 우리언론과 정부당국은 김주석에 대해 북쪽의 공식직함대로 「주석」이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일체 비방을 하지않고 있다.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이나 비난은 외교적으로 큰 마찰을 일으킨다. 최근의 사례만 보더라도 지난해 10월 호주총리가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총회에 불참한 말레이시아 총리를 「고집쟁이」라고 한마디 한 것이 화근이 돼 양국이 상당히 불편한 관계로 까지 비화된 일이 있음은 북한에게 시사하는 바 많을 것 같다. 북한은 이제 터무니없는 비방을 중단하고 하루빨리 대화의 장에 나와야 한다. 북한측의 주장대로 핵무기를 개발하지도 않았고 개발할 의사도 없다면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빨리 특사교환에 임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전면 핵사찰에도 응해야 할 것이다. 김주석이 95년까지 달성하겠다고 공언한 통일이 진정한 평화통일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즉각 대화 나서라 남북대화를 시작한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동안 이뤄낸 것이라곤 단 한 차례에 그친 이산가족 상호방문과 예술단 교환공연,그리고 얼마 안되는 교역 뿐이다. 통일을 향해 갈길은 멀고 할일은 많은데 대화마저 중단되고 비방으로 아까운 시간들이 허송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올해엔 꼭 북한의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싶다.
  • 남북한관계 개선전기 연내 마련될듯/통일원 업무보고 요지

    ◎판문점에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추진 ◇남북관계전망=▲북한은 심각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및 주민동요등 체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책전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임.▲대내적으로는 김정일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하면서 제한된 범위의 개방정책 추진이 예상됨.▲대남비방을 계속하고 있지만 대미접근 필요성으로 남북대화에 호응해 올 것으로 보임.▲올해는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됨. ◇3단계통일방안의 구체화=▲북한도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는 세계적 조류에 호응해 통일조국의 이상을 우리와 함께 지향해 나가도록 변화를 유도.▲화해협력단계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이행토록 추진. ◇북한의 정책전환에 대비한 방안강구=▲김정일체제의 권력기반과 북한주민의 의식변화등 북한실태를 분야별로 점검.▲북한지도층의 정세관과 리더십등 위기관리능력 평가.▲정치 외교 경제 사회등 부문별 변화속도와 양상에 대한 평가및 변화유형별 중장기 시나리오 작성. ◇남북회담추진=▲특사교환에 대비,서울·평양 행사대책등 종합대책 수립.▲남북회담은 통일원 주관하에 관계부처와 협조,일관성있게 추진.▲서울과 평양에서 열리는 회담의 원활한 운영 위해 회담기획통제부와 회담종합상황실을 공동운영. ◇교류협력의 확대=▲판문점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추진,제3국 통한 가족상봉,서신교환지원.▲적십자 유엔등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이산가족 재회촉구노력 계속.▲북한핵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되면 기업인의 방북허용및 제3국 공동진출추진.나진­선봉지역 개발참여.예술단교환등 사회문화교류사업 추진.94아시안게임 남북단일팀구성 협의.▲남북교류본격화에 대비, 남북경협관리규정과 대북투자지침등 마련. ◇통일대비 교육·홍보 강화=▲북한자료의 공개확대 추진.▲청소년과 고령이산가족들을 우선 대상으로 판문점 방문인원을 연간 2만5천명에서 5만명으로 확대.
  • 시베리아 벌목장 북한노동자 25시(오늘의 북한)

    ◎착취·고문 횡행 “생지옥 방불”/탈출 벌목공 「충격의 고발수기」/2년간 번개 TV 1대·솜 50㎏밖에 안돼/“남한상품 쓴다”… 반동취급 6일간 매질/뇌물 안주면 헌한 산지행… 안전원 수탈 극심 서울신문사는 지난 88년부터 5년간 시베리아의 하바로프스크주 체그도민 일대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 지난 92년 카자흐스탄으로 탈출한 ㅇ모씨의 수기를 타시켄트 소재 한인교회에 의료선교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의사를 통해 최근 입수했다.중노동에 시달리는 벌목공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사회안전부 요원들의 착취및 인권유린사례를 고발한 이 수기는 2백자 원고지로 2백50장이 넘는 분량이나 지면사정으로 요지만 간추렸으며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처리했다. 88년 5월11일 그리운 가족과 헤어져 청진역을 떠나 23일 소련땅인 체그도민에 도착했다.열흘간 신대원강습소에서 일하는 동안 시계와 단복을 요구하는 지배인의 등살에 시달려야 했다.사회안전부에서는 마약단속이라는 핑계를 대고 손짐검사를 한 뒤에는 신발과 트렁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아무것도 내놓지 않자 가장일하기 힘든 산지중대로 배치됐다.그곳에서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아침 6시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고 나면 온몸이 땅속으로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6월 한달간 버티다 중기계 양성소로 옮겨 석달간 교육받은 후 경리지도원을 만나 첫 월급인 6월치 노임을 달라고 하니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끝내 주지 않았다. 1년남짓 뼈빠지게 일하다 89년 10월 벌목장 인근 튀르마에 있는 현지인 상점에 치약과 비누를 사러 들어갔다.여기서 이남 상품이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사려 하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사회안전부 요원들이 사지 못하게 가로막았다.이들과 옥신각신하다 결국 안전부에 끌려가서 구타와 취조를 당하고 벌금 1백60원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튿날 소련 사람을 통해 겨우 이남의 리도치약과 럭키비누를 구했다.이를 통해 이남의 발전상을 잘 알게 되었고 이 때부터 남쪽의 경제와 생활상에 대한 책을 얻어 몰래 탐독하기 시작했다. 89년 황해남도 예술단이 공연차 들렀는데 여자 단원들이 밤에 몰래빠져나와 벌목공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돈벌이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90년 4월 험한 산지작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과에 현금 6백루블을 찔러주고 「목편중대」로 내려왔다.한달에 식비 35루블을 제하고 나면 생활비가 겨우 1백50루블 밖에 남지않는데 그나마 이것도 현금 대신 전표로 이북에 빼돌려졌다.우리 벌목공들이 번 외화는 김일성부자의 심려를 덜어드린다는 명목으로 종종 「다른데」에 뜯기기 일쑤여서 90년도에는 아예 돈표조차 찾지 못했다.그래서 2년동안 번 것이라곤 1백80루블 짜리 텔레비전 1대와 60루블에 상당하는 솜 50㎏ 밖에 없었다. 92년 3월중순 귀국할 때 갖고 가려고 삼엄한 경계를 피해 상표만 떼고 이남 치약과 비누를 각각 20개씩 구해 침실 잠자리 밑에 보관해 놓았다.그런데 사회안전부에서 내가 밤에 이남 방송을 몰래 듣는다는 낌새를 채고 호출한뒤 잠자리를 수색하는 바람에 들통나고 말았다.이 때문에 사회안전부 구류소서 6일간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 이남과의 관계를 대라는 취조를 당했다. 어쨌든 이곳의 방송과 출판물을 통해 내가 35년간 살아온 이북보다 이남이 훨씬 더 잘산다는 점을 전세계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런데도 벌목공들이 이남 상품만 쓰면 마치 반동분자나 되는 것처럼 닥달을 하면서 정치범으로 잡아 넣었다.또 이곳의 당간부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노동자들을 상대로 사기행위를 일삼고 있으며 김일성부자에게 기쁨을 준다는 명목으로 피땀 흘려 번 돈을 빼앗고도 눈하나 깜짝 안했다. 그래서 내 생명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여기서 악랄하게 자행되고 있는 노동자 착취와 인권유린을 세계에 알리고 고발하기 위해 92년 7월 마침내 탈출을 결심했으며 탈출에 성공했다.
  • 김정일 우상화작업 본격화

    ◎주민과 혈연적 유대강화 「경애하는 어버이」로 호칭 격상/찬양문예물 대량 제작… 올들어 125편 보급/완벽한 세습체제 구축위해 친위세력 보강 올들어 북한내부에 김정일의 후계구도 구축을 위한 우상화작업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김일성세습체제의 완벽한 정착을 위한 정지작업은 김정일에 대한 대내적 선전차원의 우상화작업과 북한정권내부에서 김정일 친위세력 보강작업이라는 이원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김정일에 대한 호칭이 올들어 「경애하는 어버이」로까지 격상되는 등 김일성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까지 올라 주목을 끌고 있다.최근 평양방송과 노동신문 등 매체들이 김정일과 주민들의 관계를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로 선전하면서 「혈연적 유대의 강화」를 역설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에 대한 호칭은 후계자옹립작업이 물밑에서 이뤄지던 70년대초에는 주로 「당중앙」으로 불렸었다.그후 김이 지난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정치국원겸 비서,당군사위원 등에 기용되어 명실공히 후계자 반열에 오르면서 호칭도 「친애하는지도자」「위대한 영도자」「최고 사령관」「원수」등으로 차츰 격상됐었다. 물론 이전에도 김정일에 아부하는 연형묵전총리 등 일부 인사들에 의해 「어버이」라는 호칭이 간헐적으로 사용된 적은 있다.그러나 북한정권의 공식매체에 의해 이번처럼 집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에 발맞춰 북한의 각종 예술단체들도 김정일 찬양작품을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다.북한의 문예창작단체인 조선문학창작사는 올들어서만도 1백25편의 시를 비롯해 김정일을 찬양하는 다양한 장르의 문예물을 대량 창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요란한 권력승계 선전작업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일 친위세력 부식작업은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진행되는 양상이다.북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판독할 수 있는 공식행사 석상의 당서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정권창립 45주년 기념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한 주석단의 서열을 보면 김부자에게 양다리를 걸친 인사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즉 김일성·김정일·오진우를 제외하고 4위 강성산정무원총리에서부터 박성철부주석,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최태복당비서,김용순당비서,최영림부총리,홍성남·강희원·김달현(이상 부총리),김중린당비서,윤기복·서관희·황장엽·박남기(이상 당비서)김복신·김윤혁·김환·장철(이상 부총리),양형섭최고인민회의의장,전문섭국가검열위원장 등의 순이었다. 이들의 면면을 볼 경우 지난 당 제6차대회에서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 지위에 오르면서 심어 놓은 측근 세력들은 대부분 건재하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김용순,최영림,박남기,김환,전문섭 등 핵심측근 인사들이 상위서열을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용순의 경우 올들어 당의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김일성의 친동생으로 김정일과 한때 치열한 후계경쟁을 벌였던 김영주전노동당조직지도부장이 지난 7월 숙청된지 18년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사실도 부자 세습체제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외견상 김정일체제가 강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북한문제 전문가들은한결같이 김정일시대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밤이 깊을수록 새벽 또한 멀지않다는 얘기다.
  • 이민섭장관에게 듣는 문화체육정책(국정탐방)/대담=김정태 문화부장

    ◎“청소년 함께 뛰노는 수련활동 제도화”/문화·체육 생활화… 신바람나는 사회로/도서관기금 신설·기업 예술투자 유도/국민체육 5개년계획 수립… 스포츠공간 넓힐 계획 문화체육부가 발족해 문화·예술과 체육·청소년문제를 하나의 정책목표아래 집행한지 두달이 됐다.그러나 체육청소년부에 속했던 부서들이 문화체육부 건물에 정식입주한 것은 지난달 말이므로 명실상부한 통합은 이제 막 이루어진 셈이다. ○「레포츠문화」 개발 그동안 「한지붕 세살림」이라는 새로운 틀의 정비를 끝내고 비로소 통합정책의 시동을 건 것이다. 통합부처의 초임장관이자 집권당의 4선의원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맞고 있는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을 만나 정책운용방안을 들어봤다. ­이장관은 취임이후 『문화와 체육이 한데 어우러지는 정책을 적극 개발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그 구체적인 방안부터 듣고 싶습니다. ▲「건강한 육체,건전한 정신」이란 말이 있듯이 문화와 체육은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보완적인 것입니다.또 문화와 체육정책이 모두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므로 둘을 잘 조화시키면 문민정부의 목표인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 구현」에 밑거름이 될 겁니다. 이를 위해 생활문화와 스포츠를 접합한 격조높은 「레포츠문화」를 적극 개발하겠으며 전국의 체육시설을 보완해 공연장이나 전시장으로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 구현」방안을 좀더 설명해 주시지요. ▲문화와 체육은 기본적으로 생존에 관한 문제는 아닙니다.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이지요.그러나 우리 사회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 삶의 질에도 큰 편차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 누구나가 질높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국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범국민 문화예술및 체육중흥 정책이 고려돼야 합니다. 신바람나는 사회는 이 점이 해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이같은 환경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야말로 문화체육부의 핵심작업이 될 것입니다. ○문예진흥기금 확충 ­그러나 올해 총예산액 가운데 문화·체육부문의 예산액은 0.58% 수준인 2천2백27억원에 불과한실정입니다.이같은 재정규모로는 문화·체육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예산배정이 적다는 것을 인정합니다.그러나 국가재정 형편상 특정부문 예산을 한번에 대폭 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오는 97년까지 문화·체육부문 예산을 1%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입니다.대통령의 공약사항인 만큼 꼭 지켜질 겁니다. 물론 예산이 늘어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그래서 다각도로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어떤것들입니까. ▲기업체로 하여금 문화예술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데 우선 주력하겠습니다.대통령 말씀을 자주 해서 안됐습니다만 그분이 취임초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으니 기업들이 그 돈으로 문화·예술사업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업체들도 그 뜻에 공감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체육부의 입장에서는 첫째로 기업들이 자체 문화재단을 통해 문화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책을 세우겠습니다.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문화행사를 도와달라고 권유할생각입니다.기업들이 특정 예술가나 예술단체와 결연을 맺어 지속적인 도움을 주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겁니다. 이밖에 문예진흥기금을 확충하고 도서관진흥기금도 신설하겠습니다.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문화부터 수출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문화교류 없는 수출증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바꿔 말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아야 수출의 길도 넓어진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수출대상 지역이 대부분 선진국인만큼 고성능·고문화상품을 만들지 않고 수출을 늘린다는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은 것이 작금의 실정입니다.상품을 단순한 산업디자인의 차원을 넘어선 예술디자인의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를 기업에 응용하는 산업­예술,즉 「산문협동」사업을 적극 밀고 나갈까 합니다. 국제문화교류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활성화시키겠습니다. ­문화예술진흥법·국민체육진흥법등 문화체육부 관련법령이 많습니다.그러나 개중에는 부실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선언적 의미만 있을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법령도 있습니다.민주화·자율화시대에 부응,과감히 정리할 뜻은 없는지요. ▲문민시대에 걸맞도록 국민주도에 의한 문화예술 활동이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관련법령의 제정·개정을 추진할 계획입니다.올해 안에 모두 9개의 관련법령을 고칠 예정인데 이중에는 지방문화육성방안과 기업의 문화지원을 용이하게 하는 법안등이 포함될 겁니다. ­이달은 청소년의 달입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청소년문제를 우려하는 국민이 많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는 실정입니다.주무장관으로서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21세기 통일세대의 주역인 오늘의 청소년들은 마음과 몸이 모두 튼튼해야 합니다.그러나 청소년문제는 대학입시와 밀접하게 연계돼 그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입시지옥이 존재하는한 청소년의 인격도야,전인교육은 불가능합니다.그래서 청소년문제에 대해 교육부측과 논의하는 상설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1년에 1∼2차례 유스호스텔등지에서 수련회를 갖게 하고 그 결과를 내신성적에 필수로 넣는 방안등이 이 협의체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요. ­체육부문으로 이야기를 돌려볼까요.그 동안의 체육정책이 「엘리트체육」위주였다는 비판이 제기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새정부가 체육진흥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몇년동안 정부가 86·88 양대회에 대비해 대표선수 양성등 엘리트체육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올림픽이후로는 정책방향도 생활체육진흥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이 상충한다고 보지 않습니다.황영조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조깅인구가 크게 는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생활체육이 활성화되면 체육인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따라서 우수선수가 많이 발굴될 겁니다. 「국민체육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생활체육 공간을 확대하고 다양한,또 건전한 생활체육및 건강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보급하고자 합니다. ○「풍요공동체」 구현 ­2년전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여자단체전 우승을 차지해 7천만 겨레를 감격시켰습니다.그러나 오는 11일 열릴 예정인 42회 대회에 대해서는 남북간에 단일팀을 구성하는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못했습니다.남북 체육교류를 활성화할 복안을 갖고 계신지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뒤 남북간의 모든 대화가 중단된 상태입니다.현재로선 대화가 재개될 때에 대비,북한측이 수용할 수 있는 사업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현직의원으로서 장관직책을 수행하다보면 장단점이 있을텐데요. ▲국가정책 수행의 성패는 국민의사를 얼마나 잘 수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이 점에서 여러 계층의 소리를 늘 듣는 정치인이 장관직을 수행하는 것은 장점이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앞으로도 각계 전문가의 조언과 지식을 충분히 받아들여 문민정부의 목표인「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 구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 중국,사절안보내

    【북경=최두삼특파원】 중국정부는 근년들어 처음으로 북한 김일성주석의 생일행사에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15일 밝혀졌다. 오건민 중국외교부대변인은 이날 주례뉴스 브리핑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의 생일에 중국정부를 대표해서 어떤 사람이 파견됐는가』『지난해에는 양상곤국가주석이 평양을 방문했는데 중한수교이후 처음인 이번 김일성생일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은데 대한 북한측 반응은 무엇인가』등의 질문에 『중국예술단이 현재 평양을 방문중』이라고만 대답,중국대표가 파견되지 않았음을 확인해주었다.
  • 김일성 81회 생일행사 시작/치적선전 등 사진·미술작품전 열어

    【내외】 북한은 6일 4·15경축 중앙사진전람회와 미술작품전시회 개막을 시발로 본격적인 김일성 81회생일 행사에 들어갔다. 이날 상오 인민문화궁전서 개막된 「4·15경축 중앙사진전람회」에는 지난해 김일성 80회생일행사 사진을 비롯해 ▲김일성·김정일의 군창건60주(92년4월25일)열병식 장면 ▲김일성의 현지지도 모습 등 지난 한햇동안 김일성의 활동상을 담은 80여컷의 사진들이 전시,오는 10월말까지 진행되며 이날 하오 「조선미술박물관」서 열린 미술작품전시회에는 김일성의 「치적」및 북한식 사회주의 「우월성」선전을 위한 각종 그림들이 전시됐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서 북한부총리겸 문화예술부장 장철은 「개막사」를 통해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우리인민의 제일생명』이라고 강조,전체 예술인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고취를 촉구했다. 한편 김일성 생일행사의 일환으로 연례적으로 개최해온 제11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도 총리 강성산,부총리겸 문화예술부장 장철(축전조직위원장),평양시당채겸 인민위원장 강현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7일 평양 2·8문화회관에서 개막됐다고 북한방송들이 이날 보도했다. 이번 행사는 개막식에 이어 8일부터 평양의 만수대예술극장·평양대극장·동평양대극장·평양노동자회관·평양교예극장 등과 지방의 강원도예술단극장및 남포시예술단극장 등에서 오는 18일까지 조별로 분산진행된다.
  •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문예총/「유일체제」떠받들기 47년(오늘의 북한)

    ◎그산하 단체와 활동내용을 알아보면/작가·예술인 사상교육… 당노선 홍보에 활용/작가동맹/창작주제까지 할당… 혁명정통물만 30%/미술가동맹/조각작품의 80%가 김 부자의 입상·흉상/음악가동맹/최근 우상화일변도 탈피,관객동원 신경 북한의 대표적인 문학예술단체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하 문예총)이 지난 25일로 결성 47주년을 맞았다. 문예총은 북한의 모든 직업예술인을 조직·통제하고 문학·예술을 총괄하는 단체로 해방 이듬해인 지난 46년 3월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가동맹」을 모체로 발족됐다.문예총은 북한의 여타 문화단체가 그러하듯이 공산주의적 대중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김일성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은 46년 10월 각 부문별 동맹을 두기 위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개칭됐으며 이후 당적인 문학예술 창조의 길에 들어서면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북한공산정권 초기의 정책선전활동에 적극 이용됐다.6·25전쟁 중에는 전후방에서 주민들을 전장에 동원하는 역할과 함께 북한군의「영웅적 전투」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그러나 휴전을 전후한 시기에 불어닥친 숙청 바람을 타 53년 9월 해산됐다.그후 북한은 작가동맹,작곡가동맹,미술가동맹 등 몇몇 부문별 조직만 필요에 의해 두고 있다가 60년대 들어 김일성 유일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통일적 조직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다시 결성,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위원장은 한설야가 맡았었으며 그뒤 이기영을 거쳐 현재는 백인준(제9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맡고 있다. 문예총의 주요임무는 ▲당의 노선과 정책의 관철을 위한 문학예술토의 ▲작가예술인들에 대한 사상교양 ▲문학예술의 대중적 발전 등이다.문예총은 이를 위해 작가·예술인에게 당의 문예정책을 홍보,이의 관철을 위한 지도·통제사업을 하고 작가·예술인들의 창작사업을 지도하는 한편 문예계의 등용과 축출 등을 결정한다.주요연맹의 조직 및 활동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가동맹=소설·시·희곡·아동문학·평론·고전문학·외국문학 등의 분과위원회가 있으며 산하기관지발행기구로서 「문학신문사」와 「조선문학」「청년문학」「아동문학」「현대문학」「시문학」「국문학」「외국문학」「고전문학」 등의 각 잡지 편집부가 있다.북한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설문학은 창작내용에 있어 당이 할당해준 주제에 입각하도록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창작주제 할당은 혁명전통물 30%,조국통일물 20∼30%,사회주의 건설물 10∼20%이다.신문학·아동문학·고전문학 등도 소설문학과 같은 상황이다. ▲미술가동맹=회화·동양화·무대미술·조각공예·평론 등의 분과위원회가 있다.동양화는 산수 등을 그리는 고대의 동양화가 아닌 노동자·농민의 작업환경을 테마로 한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조각작품의 80%가 김일성 및 김정일의 입상과 흉상이며 나머지 20%는 천리마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무용가동맹=민족무용·현대무용·평론 등의 분과위원회로 나누어져 있다.우리 고전무용의 형식에 구소련 무용의 동작을 혼합한 형태의 동작이 주류를 이룬다. ▲영화인동맹=연기분과위원회·연출분과위원회·장치분과위원회·효과(녹음)분과위원회·평론분과위원회가 있고 다른 동맹과는 달리 지방조직이 있다.조선예술촬영소·조선기록영화촬영소·2·8영화촬영소 등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가동맹=보도사진·예술사진·평론 등의 분과위가 있으며 영화인동맹과 같이 지방조직은 없으나 사진의 선전효과 때문에 북한의 이 부문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순수사진 예술작품의 창작은 허용되지 않는다.이 분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사진 제작이다. ▲음악가동맹=민족음악분과위원회·현대음악분과위원회·작곡분과위원회·민족음악연구소가 있다.최근 들어 김일성우상화선전 등 정치색 일변도에서 탈피,음악·무용·곡예·단막극 등 공연종목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등 관객동원에 신경을 쓰고 있는 점이 눈에 띄고 있다.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서해갑문∼과일군간 수로공사 추진(북한 이모저모)

    ◎총208㎞ 2단계로 나눠 ○…북한은 지난 5월 서해갑문∼은률∼과일군간 기본수로(1백4㎞)를 완공한데 이어 최근 2단계 공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21일 중앙방송이 보도. 서해갑문∼은율∼과일군간 수로공사는 지난해 10월 김일성이 과일군 과수원 관개공사 지시에 따라 착공했는데 서해갑문의 물을 남포시 와우도 구역에서부터 끌어 은율군의 서해리·철산리·도포리등을 거쳐 과일군 일대의 과수원에관개용수로 공급하는 총 연장수로 2백8㎞(기본수로 1백4㎞)의 방대한 공사라고 중앙방송은 전했다. 북한은 우선 기본수로공사를 추진해 지난 5월4일 완공,통수식을 가진데 이어 최근에는 2단계로 은율군과 과일군의 각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지선수로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21일 현재까지 토량공사와 26㎞구간의 수로파기 공사를 완료했다고 중앙방송이 보도. ◎김정숙 찬양작품 7백여편 쏟아져/24일 출생 75주 맞아 ○…북한은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출생 75주(12·24)를 맞아 김정숙을 찬양하는 7백여편의 문학예술작품과 다수의 미술작품들을 창작,발표했다고 중앙방송이 23일 보도. 북한의 조선문학창작사에서는 단편소설 「크나 큰 사랑」「한주일」,서정서사시 「폭풍속에 피는 꽃」,서사시 「새싹이 움틀 때」,동시 「오산덕」등을 발표했으며 군문예창작실과 사회안전부 창작실에서도 시 「빛나는 고향」등의 작품을 내놓았다고 이 방송은 전언. 이밖에도 전국의 예술단체·선전대들을 비롯,공장·기업소·협동농장 근로자들과 군부대내의 아마추어 창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창작했는데 이들은 주로 김정숙의 ▲반일애국사상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 ▲후대교육사업등을 소개한 것들이라고 이 방송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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