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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개입(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3)

    ◎모택동,전쟁초기부터 중국군 파병 준비/미군 38선돌파 대비 목단지역에 병력 12만 집결/소에 “공중호위” 지원요청… 스탈린 “즉각제공” 통보 모택동은 전쟁준비단계에서부터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고 나아가 필요시 중국군을 직접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수차에 걸쳐 한바 있다.그러나 모택동은 김일성이 전쟁계획을 구체화시키면서 스탈린을 주의논 상대로 삼은데 대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가졌음을 알수 있다.이런 양상은 결국 모택동으로 하여금 중국군 파병을 여러 차례 거부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초기부터 중국이 한 역할을 살펴보자.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 1일 북경주재 로신 소련대사는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이 중국정부의 분위기를 보고했다.(로신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중략…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조선 괴뢰들은 완전한 패배를 겪고 있음.남조선당국은 미국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음.트루먼이 조선에 대한 군사개입을 명령한 것은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라기 보다는 좌절감의 표시임.극동에서 패배를 경험한미국은 유럽뿐 아니라 중근동에서 마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데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음.이런 점으로 미루어 미국은 소련이 이끄는 평화·민주진영과의 대규모 군사대결을 벌일 태세가 안돼있음을 알 수 있음』 ○김·스탈린 밀착에 불만 이튿날인 7월 2일 주은래는 로신 대사를 불러 한국전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로신대사는 면담직후 곧바로 이를 전문으로 보고했다.(로신의 본부보고.전문번호N1112­1126)『중국정부는 미국이 막강한 일본점령군 12만중 6만명을 한국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이들은 부산,마산,목포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이용,북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음.따라서 인민군은 남진을 서둘러 이들 항구를 점령해야함. 모택동은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인천(제물포)지역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음.본대사는 주은래에게 일본군이 개입을 준비중이라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음.중국은 그런 정보를 갖고있지 않다고 답했음.주은래는 또한 만약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중국인민해방군이 조선군인으로 변장해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음.이를 위해 중국지도부는 이미 목단 지역에 3개군,총12만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밝혔음.주은래는 소련공군이 이 병력을 위해 공중호위를 제공할수 있는지 물었음. 주은래는 한국전 상황에 언급하며 북조선이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고 강조했음.모택동이 49년 5월부터 개전당시까지 줄곧 이 점을 지적했는데 북조선이 이를 무시했다고 함』 한편 이 전문을 본 스탈린은 7월 5일 중국이 한국전에 병력을 파병할 경우 이들을 위해 공중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스탈린이 주은래앞으로 보낸 전문.N3172)스탈린은 주은래에게 『귀측이 적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의용군으로 북조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9개 중국군 사단을 중·조 국경에 즉각 집결시킨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생각됨.우리는 이 병력들에 공중지원을 제공키 위해 노력하겠음』이라고 밝혔다. 7월8일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평양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김일성의 뜻을 대신 전달했다.(전문번호N3231).스탈린은 『조선동지들이 조선에 아직 중국대표부가 없다고 불평함.제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고 통신을 원할히 하기 위해 중국대표부를 조속히 파견해줄 것을 희망함』이라고 밝혔다. 7월13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군 9개 사단의 국경집결문제에 대해 재차 문의하고 소련공군 지원의사를 거듭 밝혔다.(전문번호N3805).『소련대사앞.다음의 전문을 주은래와 모택동에게 전달할 것. …중략…우리는 귀하가 9개 중국군사단을 조선과의 국경에 배치키로 결정했는지 모르고 있음.배치키로 했다면 우리는 제트전투기 1개사단,1백24대를 이 병력의 공중지원을 위해 보낼 준비가 돼있음.우리는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계획임.그 다음 모든 장비를 귀측 조종사들에게 넘기겠음.상해주둔 항공사단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겠음』 ○부산 등 항구점령 촉구 중국군 참전시 소련기의 공중지원뿐 아니라 중국군 조종사들의 훈련 및 공군장비 일체를 공급키로 약속한 것이다. 한편 로신 대사는 7월 13일 본국으로 보낸 정보보고를통해 당시 영국대사관의 브라이언 참사관이 한국전쟁에 대해 말한 견해를 보고했다.브라이언 참사관은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작으로 일으켰다는 황당무계한 분석을 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브라이언 참사관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과 미국이 연합해 한국전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미군의 본격개입과 그에 대비한 중공군의 참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후일 형식적으로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모택동을 설득,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이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스스로 중국군 파병에 대한 결심을 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8월19일 모택동은 소련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유딘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가졌다.유딘은 공식적인 방문목적이 모택동의 이론서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모택동의 의중을 탐지키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유딘은 후일 중국대사를 지냈다.로신대사는 두사람의 대화내용을 이튿날인 8월 20일 스탈린 앞으로 보고했다. 『한국전상황에 대해 모택동은 2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했음.(1)미군이 지금같은 전력으로 계속 전쟁에 임할 경우 그들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밀려나 다시는 남조선문제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물론 모택동은 이를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강조했음. (2)미국이 한국전에서 승리하려면 최소한 30∼40개 사단이 필요함.그럴 경우 북조선군은 자기들 힘만으로는 현재의 전황을 지속시킬 수 없고 중국의 지원이 필요함.중국이 지원하면 미군 30∼40개 사단은 「분쇄할 수 있다」고 모택동은 말했음.그러면 3차세계대전은 뒤로 미루어지고 소련,중국 모두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이와함께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난선전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음』 ○미 참전 비난선전 강화 8월 29일 모택동은 유딘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이 만찬석상에서 모는 한국전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소련대사관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8월 28일) 『모택동은 최근 상황에 비추어 미국이 남조선파병 병력을 크게 증가시키기로 결정한 것같다고 말했음.모는 따라서 8월 19일 유딘과 면담시 언급한 시나리오중 두번째 시나리오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음.미국은 이미 중·조국경지역을 공습,중국에 도발하고 있다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8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북한대표단을 접견하고 그들과 한국전 상황에 대해 협의했다.여기서도 모는 한국전이 기본적으로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전제,이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9월 2일 주은래는 로신대사를 불러 모택동과 북조선대표단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했다.다음은 9월 3일 로신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고한 전문. 『모택동은 두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음.최상의 시나리오인 첫번째는 인민군이 미군을 패배시켜 몽땅 바다로 쓸어내는 것임.두번째는 장기전으로 가는 것임.이 경우 미국은 대구∼부산을 사수하기위해 총력전을 펼 것임.이렇게 되면 그들은 인민군 주력을 이곳에 묶고 상륙작전을 비롯해 다른 여러 지역에서 자유롭게 작전을 벌일수 있게 됨. ○김일성에 장기전 권유 모택동은 북조선대표단에게 이 두번째 유형에 대비,전력을 모으고 제물포∼서울,진남포∼평양지역의 경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주문했음.모는 이와함께 적군과 중국인민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조선군은 전략상 실책을 범했다고 지적했음.즉 작전의 목적을 적의 전력을 궤멸하는 데 두는 대신 전력을 전전선에 공평하게 배치,적을 밀어내고 영토를 점령하는 데 두었다는 것임.그리하여 적이 쉽게 이를 간파,반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임. 덕분에 미군은 쉽게 후퇴,대구∼부산지역에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음.모택동은 인민군을 전전선에 배치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신속한 후퇴도 생각해야한다고 강조했음.아울러 새전선으로 전력을 이동시키는 문제도 고려하자고 주문했음.결론적으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음』 모택동은 미군의 대응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북한측에게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심각히 받아들이지않고 기존의 전면공세를 계속했다.그러던 차에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돼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국군 조종사 훈련·장비양도 약속”/스탈린,중국참전 유도 끈질긴 노력 우리는 이번 회를 통해 전쟁이 모스크바­북경­평양의 긴밀한 협의하에 치러졌으며 그 협의의 중심축은 모스크바­평양,모스크바­북경의두 채널이었지 북경과 평양간에는 이에 준하는 협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북한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북한측의 의사도 스탈린을 통해서 중국에 전달될 정도였다. 중국측은 이에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이 이번 자료에 밝혀져 있다. 다음 회에 보듯이 인천상륙작전조차 중국은 보도를 통해서 알 정도였다. 또한 중국의 참전의사가,50년 10월 참전 직전의 혼선과는 달리 전쟁 초기에는 의외로 확고하였으며,그것은 소련측의 확실한 공군지원의사로 인해 가능하였음이 밝혀져 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중국군참전시 공중 지원에 대해 분명하게 지원할 것임을 수차례 걸쳐 확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지원확인에 앞서 중국군의 조·중국경 집결문제에 대해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참전의사가 어느 정도인자,실제로 병력을 국경지역에 이동시켜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스탈린식 조심성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이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것』이라든가 『그 다음에는 모든 장비를 중국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내용은 이번 자료에는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들인데 이는 자신들은 참전치 않으면서 중국측으로 하여금 참전케하려는 그의 끈질긴 노력이었다. 또한 최초의 전쟁결정에서 처럼 그는 가장 깊숙이 개입하였으면서도 끝까지 소련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으려했음을 알 수 있다.
  • 대북한 경수로 공급 한국 중심역할 촉구

    ◎미 하원,북 지원 규제안 결의 【워싱턴 연합】 미하원은 8일밤(미국시간) ▲대북한 경수로 공급에 있어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촉구하고 ▲한반도에너지기구(KEDO)나 북한에 대한 지원은 반드시 의회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규제하는 내용 등이 첨부된 국무부 종합수권법안을 의결했다.하원은 이 수정안에서 ▲남북대화의 재개 등 한반도의 긴장완화여건이 선행되지않는 한 연락사무소 개설을 넘어선 대북한 관계격상이나 추가적인 대북경제규제 완화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북한이 5메가와트 원자로에 연료봉을 장착할 경우 미­북한 기본합의문에 들어있는 모든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게 「의회의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일련의 대북한 관련조항들은 당초 비라이터 하원 아·태소위원장 등이 대북한 결의안으로 추진했으나 의회심의과정에서 국무부수권법안,국무부 조직개편안,대외원조법안 등을 모두 포괄하는 국무부 종합수권법안(일명 길먼법안)의 수정안으로 첨부됐다. 수정안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의무와 관련,▲모든 폐연료봉은 북한 밖으로 반출되어야 하고 ▲대북한 경수로 건설에 있어 핵공급자그룹지침에 의해 통제를 받는 부품을 제공하기 전에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의 핵폐기물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포함,전면사찰을 수행해야한다고 지적했다.
  • 버스차선제·지하철 수송확대 한목소리

    ◎서울시장후보 「빅3」 10문10답/최우선 과제/교통문제 해결에 행정력 집중­정원식/시정 공개·교량­도로 안전점검­조순/시직원 부시장 발탁… 인사쇄신­박찬종/지하철 파업/「시민의 발」 볼모 삼을땐 단호대처­정/노조주장 타당하면 적극적 수용­조/충분한 대화로 사태악화 막겠다­박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민자당의 정원식,민주당의 조 순,무소속의 박찬종 후보 등 「빅 3」은 이번 선거전을 정책대결의 국면으로 이끌기 위해 연일 새로운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세 후보의 주요 정책공약 내용과 구상 등을 10문 10답을 통해 알아본다.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원식=산적한 현안이 많지만 우선 교통문제 해결에 행정력을 집중하겠다.대중교통 수단의 이용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라면 과감히 수용하겠다. ▲조순=시민 참여와 시정 공개로 시민과의 거리부터 좁히겠다.또 지하철·교량·고가도로 등의 안전진단을 실시하고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는 과감히 뜯어고쳐 상식이 통하도록 하겠다. ▲박찬종=시공무원 중에서 부시장을 발탁하는 등 인사쇄신책을 단행하겠다.안전비상령을 발동,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굴착공사를 중단한 상태에서 전면적인 안전진단을 실시하겠다. ­서울시 교통난 해소를 위한 구상이 있다면. ▲정원식=단기적으로는 버스전용 차선의 확대 실시,지하철과 버스의 효율적인 연계방안 모색을 통해 버스의 이용효율을 제고할 방침이다.중·장기적으로는 지하철의 수송분담률을 높일 계획이다. ▲조순=서울교통종합본부를 설치,지하철·버스·택시 등을 일괄하는 교통정책을 수립하겠다.버스 전용차선을 확대 실시하되 출퇴근 시간 이외에는 택시의 진입도 허용하겠다. ▲박찬종=지하철 배차간격을 줄이고 버스전용차선제를 확대 시행하며 굴곡노선을 직선화하여 임기내에 대중교통수단의 평균 주행속도를 35㎞ 이상으로 높이겠다. ­서울시 공무원에 대한 인사구상은. ▲정원식=서울시 행정쇄신 시민위원회를 구성해 시조직을 전반적으로 검토,인력을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한편 유휴인력은 시민의 편익을 위한 일에 배치할 계획이다.또 봉사요원의 수를 늘리고그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 ▲조순=인사위원회 등 객관적인 능력평가제도를 도입하겠다.서울시의 여성국장은 1명,여성과장은 2명에 불과하다.따라서 각 분야에 여성을 많이 채용하겠다.물갈이식 인사보다 각자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을 만들겠다. ▲박찬종=시공무원 중에서 부시장을 발탁하여 분위기를 일신하고 민원과 현장부서 등 「3D」 부서가 긍지를 갖도록 유도하겠다.공무원의 기존 질서를 흔들기 보다는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공무원들이 따르도록 만들겠다. ­지하철노조가 파업에 돌입한다면. ▲정원식=시민의 편에 서서 노조와 대화로 타협점을 모색하겠다.시민의 발을 볼모로 집단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일삼는다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 ▲조순=하루에 7백50만명의 시민이 이용하는 지하철에 불안요소가 있어서는 안된다.서울 지하철이 해마다 분규가 있는 데 노조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시민을 위해서라도 수용해야 한다.공사의 경영을 합리화하고 노사간 대화를 유도하되 교섭의 자율권을 보장해 줄 생각이다. ▲박찬종=평소 충분한 대화를 통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겠다.분규가 일어나더라도 당사자나 제삼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합의를 이끌어 내되 시민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만전의 대책을 강구하겠다. ­내년 총선이나 내후년 대선에서 선거운동에 나설 용의는. ▲정원식=민선시장은 시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시정에 몰두해야 한다.선거지원이란 시민정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조순=시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싶을 따름이다.지금으로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박찬종=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시장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소홀함이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수도권의 인구 및 경제력 집중 억제를 위한 복안이 있다면. ▲정원식=서울은 도쿄에 비해 면적은 4분의 1에 불과하나 인구는 엇비슷할 정도로 이미 포화상태다.따라서 수도권의 자치단체장들과 협의해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는 대책을 강구하겠다.또 권역별 발전대책을 수립,서울시 내에서도 인구가 고르게 분산되도록 하겠다. ▲조순=정부 차원에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지방자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고 지역 발전의 균형을 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박찬종=중앙정부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결정해야 하나,인근의 자치단체와 수도권 공동개발협의회를 구성해 지역 특성에 맞게 인구와 산업을 분산 배치할 계획이다.수도권을 환경·주거·산업·관광 특구 등으로 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용산 미군기지가 반환되면 활용대책은. ▲정원식=서울 시민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면적은 시 전체면적의 1.8%에 불과하다.따라서 용산 미군기지 부지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런던의 하이드 파크,도쿄의 히비야 공원과 같은 대규모 공원으로 조정,시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 ▲조순=용산미군기지는 시민공원으로 육성돼야 한다.녹지를 만들고 의자도 놓아 시민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하겠다. ▲박찬종=시민가족공원과 자연박물관,시민 문화센터,저렴한 결혼식장 등을 건립,시민이 문화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 ­대기오염 등 환경대책은. ▲정원식=서울시환경정책의 총체적 대안으로써 「신 그린정책」을 선언한다.북한산과 관악산,난지도와 뚝섬을 잇는 교차점인 용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환경공간을 조성하겠다.또 디젤차량에 여과장치를 부착토록 하는 등 환경 감시감독을 강화해 나가겠다. ▲조순=대기오염 수치를 시민앞에 솔직히 공개하겠다.대기오염의 주범인 자동차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해 경유사용 자동차에 배기가스 정화장치의 설치를 의무화하고 단속을 한층 강화하겠다.상수원을 보호하고 40%가 누수되고 있는 상수관을 교체하겠다. ▲박찬종=환경오염의 주범은 수송,제조,발전의 순이다.따라서 차량으로 인한 대기오염을 방지하는 것이 시급하다.서울대기 정화조례를 별도로 제정하고 대기오염 감시체계를 강화하며 기존의 청소사업본부는 환경관리본부로 개편할 생각이다. ­당선 가능성과 득표 목표는. ▲정원식=유효 투표의 절반 가량을 얻어 반드시 당선될 것으로 확신한다.안정적인 개혁을 원하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고 확신한다.서울시는 다른 자치단체와는 달리 중앙정부와의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인데,그런 측면에서 여당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조순=부동층이 많아 정확하게 예상하기 어렵다.유효표의 40% 이상을 얻으면 당선 안정권으로 본다.정정당당하게 페어 플레이를 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당선이 가능하리라 본다. ▲박찬종=35∼37%가 당선 가능권이고 40%가 당선 안정권이라고 본다.현재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당선 안정권에 충분히 안착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 인천상륙작전 전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0)

    ◎스탈린,소 군사고문단에 “작전 실책” 추궁/“병력 이동­탱크사용 전술 결정적 과오” 격노/김일성,연합군 「38선 진격」 당황… “소 개입” 요청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시와 지원하에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0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평양주재 슈티코프대사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 마트비예프장군 앞으로 보내는 지시문 채택을 승인했다.이 지시문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해 서명한 것이었다.여기에서 스탈린은 서울을 비롯,남동부전선에서 전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대한 작전변경을 결심했다. ○병력철수 작전 못마땅 스탈린은 작전부진의 주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의 실책으로 몰아붙였다.다음은 이날 당 정치국 회의록에 기록된 지시문의 내용.(19 50년 9월7일.당 정치국회의록 N78.조선전쟁문제회의록p.1) 『최근 수일간 전선상황이 심각해졌음(서울과 동남부전선 모두).이는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병력지휘부 특히 전술분야의 병력구성분야에서의 중대한 실책으로 야기됐음. 소련군사고문단들은 이들 실책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우리 고문단들은 4개 사단을 주전선에서 서울외곽으로 철수시키는데 있어 총사령관의 명령을 제때 충실하게 이행치 못했다.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그 결과 7일을 허비해 미군이 서울 이남에서 큰 전술적 이득을 획득케 했다.만약 이들 사단의 철수가 제때 이루어졌더라면 서울 이남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임』 스탈린은 이와함께 탱크사용 전술이 크게 잘못됐다는데 대해 격노했다. 『탱크를 투입할 때는 사전에 박격포공격을 통해 탱크가 진격할 길을 치워야 하는데 최근 이 원칙도 지키지 않고 탱크를 투입했다.이 때문에 우리 탱크들이 쉽게 적에게 파괴됐다』 스탈린은 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며 군사고문단들이 이에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슈티코프대사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프라우다신문 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며 『이런 전략경험의 미숙,맹목성이 남부의 병력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의문을 야기시켰다』고 질책했다.이와함께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장군에게 인민군사령부가 병력을 동남부로부터 신속하고 질서있게 이동시켜 서울 동·남·북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그는 병력이동시 작전수칙 8개항을 직접 지시했다. ○「8개 수칙」 직접지시 『①주력군 철수는 강력한 후방지원하에 시행할 것.경험많은 전투사령관들이 후방지휘를 책임질 것.대전차포부대,탱크가 후방방어를 지원할 것.②후방방어는 지뢰등을 이용한 장애물을 설치,이중삼중의 방어선을 만들 것.주력군 철수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후방방어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돼야함.③주력사단은 분리이동이 아니라 전체가 이동해야 함.주력군 선두는 포,탱크부대를 앞세워 전투태세를 갖춘상태에서 나아가야 함.④탱크는 반드시 지상군과 함께 투입하되 사전에 포공격을 한 다음 투입할 것.⑤선두부대는 주력군이 도착하기 전 교량,교차로,주요도로 등을 점령해야 함.⑥철수시 정보수집과 부대간 통신유지에 특별히 신경을쓸 것.⑦방어선 구축시기에는 병력의 전선배치를 피할 것.공격작전 개시 전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⑧인민군사령부와 병력간 통신시 무선암호를 사용할 것.…중략…이미 지시한 바대로 군사고문단은 단 한명도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할 것』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전세는 북한측에 더욱더 어렵게 전개됐다.스탈린은 김일성과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의 긴급요청을 받고 마침내 소련공군 부대를 북한에 주둔시키기로 동의했다.즉각 관련부대에 대한 명령이 소련군지도부에 내려졌다. 50년 9월 21일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11 72SS)『①평양방어 임무를 맡은 「야크­9」전투비행여단의 전속에 관해 보고함.이 여단의 전속배치를 위해 연해주 보로실료프시 인근에 주둔중인 147비행사단 전력에 의존할 것을 제의함.전투기의 이동배치시 안동­평양지구에서 공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중략… ②북조선내 비행단 정비인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위에 언급한 여단의항공기술대대 1개를 안동 경유 철도를 이용,평양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음.동시에 북조선이 탄약,연료가 부족하다면 이를 평양에 공급할 것임.③북조선이 공군관제기술과 공중경보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장비를 공급해 주어야 함.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공군기들이 활주로에서 적군기의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가 높음.…』 이틀 뒤인9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위한 최종계획을 보고했다. 바실리예프스키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아군 조종사들이 평양부근에서 1차 교전만 가지면 미군기들에 의해 즉각 정체가 탄로날 것임.왜냐하면 공중전에서 조종사들간 무선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임』이라며 이 부분에 각별한 신경을 써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소련공군기의 참전태세가 완료된 즈음,북한군의 전세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스탈린으로부터 전황파악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간 마트베프 장군은 9월27일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60 0262sh) 『서부전선(서울)과 동남전선(부산 방향)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매우 불리함.미군은 인민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음.제물포에 상륙작전을 폈고 이곳으로부터 북쪽과 대구 북서방향으로 진격중임. ○김,6개사단 창설 계획 미군은 강력한 공군력의 지원을 엎고 인민군의 후방과 전방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가하고 있음.미군은 수원 동쪽과 동남쪽 25∼30㎞까지 진격했음. 9월 25일 19:00,김일성은 서울일원과 북부전선과 동남방향의 제2군에게 최선을 다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음.9월 26일 소련군고문단들이 김일성을 만났음.이 면담에서 김일성은 전시 총사령관과,전쟁상 직을 자신이 모두 맡겠다고 밝혔음.김일성은 특히 남쪽으로부터 동원가능한 최대인력을 데려와 이들로 6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겠다고 말했음.중국철도가 조선으로 오는 군수품 때문에 크게 붐기기 때문에 이들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 수송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했음.이 면담에서 우리는 김일성과 다음 사항에 합의했음.①효율적인 병력통제체제 확립.②물자,기술공급,수송,도로이용을 원활하게 할 것.③방어선 구축.북조선군은 운전병이 부족함.김일성이 중국측에 운전요원 1천5백명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임.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전선상황을 브리핑했음. 슈티코프대사가 전한 바에 따르면 김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마트베프 장군은 9월 30일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계속했다.『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이같은 요청에 대해 자기는 현재 인민군의 정확한 위치,사정을 알지 못해 충고할 수는 없으나 38도선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함. 김일성은 본인에게 적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음.본인은 이에 대해 그것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38도선의 방어선 구축은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싶다고 말하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그러나 만약 적이 38도선 넘어 진격해올 경우 새로운 사단창설은 물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했음. ○모에도 공군지원 요청 김일성은 이와 관련,스탈린동지께 서한을 보내 충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음.본인은 이와 관련,들려줄 충고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음.김일성은 이 서한에 공군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음.최근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부탁이 포함돼 있었음.본인 판단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매우 초조해 있음.당황하고 비관적이었음.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음.서울이 함락됐음.38도선을 향해 신속히 진격하는 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저항을 펼수있는 병력이 없음.정치상황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김일성은 마침내 강경한 어조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9월초 “인천상륙작전 대비” 지시/「소 공군 투입계획」 중 공군 참전에 확정 9월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직접 지시문을 채택하였다는 점은 소련이 한국전쟁을 지도부 전체 수준에서 논의하였음을 보여준다.즉 그것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이날의 지시문에서는 작전 부재의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직접 묻고있다.서울부근에서 지체한 것도 소련고문단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심지어 사령부와 예하부대와의 협조 및 통신 연락미비 탱크사용전술에 있어서의 오류 등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까지 직접 지시하고 있다.다른 한가지 새로운 점은 스탈린이 이미 9월초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서울부근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고까지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거대한 전쟁을 여러 번 치렀던 스탈린으로서는,특히 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함께 치렀던 그로서는 이미 미국의 고전적인 상륙전술을 깊이 인지하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공산진영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거의 알고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세번째로 소련공군의 참전방침이 이미 중국군의 참전 이전인 9월에 결정되었다는 점이다.이 역시 아주 새로운 사실로서 지금까지 소련공군참전결정은 10월에 중국군의 참전교섭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통설의 부정인 것이다.또한 흥미있게도 조종사들에 의한 러시아어무선교신의 위험성을 이미 지적하고있다는 사실이다.이는 실제로 소련공군이 참전한 후 위장을 위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점에 비추어 그러한 위장의 계획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을 알게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북은 납북어선 즉각 송환하라(사설)

    북한경비정이 우리의 비무장어선에 총격을 가해 선원을 살상하고 납북한 것은 반민족적이며 비인도적인 행위다.납북된 제86우성호가 나침반 고장으로 항로를 잘못잡아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 배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꽃게잡이보조어선에 불과하고 납북지점이 북한영토에서 12해리이상 떨어진 공해상이었다는 점,그리고 이런 정황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대낮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사상자를 낸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이 아닐 수 없다.북한당국은 이같은 불법적인 과잉대응을 솔직히 시인·사과하고 납북어부들을 지체없이 송환해주기 바란다. 북한에 의한 우리어선 납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56년 제3선진호가 동해에서 피랍된 것을 시발로 16차례에 이른다.이중 87년1월15일 서해 백령도근처 공해상에서 납치된 제27동진호 선원 12명을 포함,25명의 어부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그뿐 아니다.휴전이후 강제납북돼 지금까지 억류돼 있는 사람은 4백29명이나 된다. 우리정부는 인도주의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문제나 핵문제와 연계시키지 않고 어떤 남북현안보다도 이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왔고 그동안 여러차례 남북적십자회담의 재개를 촉구해왔다.이번에도 우리정부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어부들을 조속히 송환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그러나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직은 불투명하다.북한은 최근 정전협정의 무력화를 꾀하며 비무장지대 정찰병사들에게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을 고의적으로 침범케 하는등 일련의 무력시위를 벌여온만큼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우려도 없지 않다.그럴 경우 북한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정부는 최근 아무 전제조건 없이 북한에 쌀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따라서 북한당국도 조건 없이 납북어부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남북이 인도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어간다면 신뢰는 쌓이게 될 것이고 민족화해에도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북한당국의 성의 있는 반응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 납북선원·어선 조속 송환 촉구/한적,대북 통지문

    대한적십자사 강영훈 총재는 31일 북한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이성호 위원장대리 앞으로 보낸 대북 방송통지문을 통해 북한에 납북된 어선 및 선원의 즉각적인 송환을 촉구했다. 강 총재는 방송통지문에서 『이번 사건은 선장 김부곤씨등 8명의 어부가 중국 산동성 영성항에서 인천항으로 귀환하는 도중 항로착오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즉각 송환을 요구했다.
  • 우성호 북 경비정 피납 이모저모/나침반 의존귀항…북방한계선 넘은듯

    ◎우성수산 직원들 “무슨 날벼락” 한숨/선원 연락처 몰라 피랍소식 못전해 ○…86 우성호(선장 김부곤)의 선사인 우성수산 직원들은 30일 인천 어업무선국으로부터 피랍 소식을 통보받고 망연자실.이 회사의 관계자는 『86 우성호가 중국에서 풀려나 귀항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85호도 조만간 풀려날 것으로 기대했는데,무슨 날벼락이냐』며 한숨. ○…86 우성호는 지난 27일 하오 4시쯤 85 우성호(선장 김수원·선원 9명)와 함께 산동반도 동남방 13마일 해상에서 조업하다 불법 어로 혐의로 중국 경비정에 의해 나포돼 영성항으로 끌려갔었다. 중국측은 벌금으로 미화 4만달러를 요구했으나 현금이 없자 85호를 인질로 잡고 86호만 석방한 것으로 알려졌다.우성수산 대표 한씨는 『85호 선장 김씨가 「중국인들이 총을 겨누며,서명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으나 버티고 있다」며 「외교 경로를 통해 빨리 해결해 달라」고 어업무선국을 통해 전해왔다』고 전언. ○…해양경찰청과 우성수산은 86 우성호의 피랍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연락을 취하고 있으나 선원 명부에 기록된 연락처와 실제 거주지가 다른 사람들이 많아 혼선. 선원 신흥광씨(37)의 경우 승선자 명단의 주소는 인천 중구 선화동 30의 4이나 지난 93년 12월 30일 주민등록지를 인천 중구 중앙동 2가 17로 이전했으며 실제 거주지는 김포군으로 확인됐다. ○…해경은 중국으로부터 풀려난 피랍 어선이 나침판에 의존해 인천항으로 귀항하다 북방 한계선을 침범한 것 같다며 『낮 12시 45분쯤 북한 경비정의 총격으로 선원 1명이 쓰러졌으며,곧 경비정이 배 옆에 와 붙었다』는 선장 김씨의 교신을 끝으로 통신이 두절됐다고 전언. ▷80년이후 어선피랍 일지◁ ▲80.1.26=해왕6,7호 서해상에서 선원24명과 함께 납북 ▲80.9.8=제2남진호 동해상에서 납북(19명) ▲80.12.2=태창2호 서해상에서 납북(17명) ▲81.6.11=제1공영호 서해북방한계선에서 납북(21명) ▲82.7.6=성진5호 울릉도 동북방에서 나포미수 ▲82.7.13=제5마산호 동해울릉도 동북방 공해상에서 납북(35명) ▲85.2.5=제12광남호,제2동주호 백령도 서해상에서 납북(21명) ▲85.10.6=제2계영호 백령도 서해상에서 납북(12명) ▲87.1.15=제27동진호 백령도 서북방 공해에서 납북(12명) ▲87.10.7=제31진영호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경비정에 피침(11명사망) ▲89.1.28=제37,38 태양호 백령도 서해상에서 납북(21명) ▲89.5.7=명성2호 옹진군 대청도 근해서 납북(4명) ▲91.2.5=서해에서 한중(한중)합작어선 남해006호 납북(18명) ▲91.2.9=제2승용호 백령도 부근에서 납북(2명) ▲93.9.16=영복호 서해상에서 선체 나포(선원2명구출) ▲95.5.30=제86 우성호 서해상에서 북경비정에 피격,납북
  • 북 경비정,우리어선 총격 납북/8명 탄 「제86우성호」

    ◎“2명 사망·1명 부상”/인도차원 송환 요구/정부/중국서 풀려나 귀환중 국방부는 30일 낮 중국에 나포됐다 풀려나 인천으로 돌아오던 우리 저인망 어선 1척이 북한경비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은뒤 북으로 피랍됐다고 발표했다. 피랍된 어선은 인천 우성수산(대표 박원순·77)선적의 제86호 우성호(1백3t)로 이날 낮 12시50분께 서해 북방한계선 이북 28.8㎞(백령도 서북방 40㎞)해상에서 북측의 공격을 받은뒤 나포됐다.이 배에는 선장 김부곤씨(34·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906)등 선원 8명이 승선중이었다. 피랍과정에서 북한측 총격으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했다는 첩보가 접수됐으나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이와관련,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성명미상의 선원1명이 부상당한 사실은 86우성호와의 마지막 교신에서 확인됐으나 2명이 피살됐다는 첩보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86 우성호는 지난 27일 하오 4시께 중국 산동반도 동남방 중국영해상에서 조업중 중국어로통제선에 의해 명성항으로 나포됐다가 이날 사흘만에 풀려나 인천항으로 복귀하던중 서해북방한계선을 넘는 바람에 피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86 우성호와 함께 중국에 나포됐던 85 우성호(선장 김수원·30)는 아직 중국측에 의해 억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발생후 우리군은 즉각 인근 해역의 어선을 복귀토록 조치했으며 즉각 대응태세에 돌입했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이와관련,국방부의 한 소식통은 피랍직전 86우성호가 우리측과의 교신에서 『북한배가 쫓아온다.몇명이 당했는데 배가 격침될 것 같다』고 타전한뒤 교신이 두절됐다고 전했다. 한편 정부는 30일 납북된 인천선적의 우성호와 선원들의 송환을 인도적 차원에서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적십자측에 촉구키로 했다. 정부는 이날 하오 송영대 통일원차관 주재로 긴급 유관부처 간부협의를 갖고 납북어선과 선원들의 송환을 위해서는 우선 적십자사를 통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대한적십자사(총재 강영훈)는 31일 강총재 명의의 대북 전화통지문 또는 대북 성명 및 국제적십자사에보내는 협조요청문등을 통해 납북 어선과 선원들의 송환을 촉구하는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북한으로 피랍된 선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선장 김부곤 ◇기관장 이병소(38·인천 남동구 구원동 1279) ◇선원 ▲이일용(59·경남 마산시 합포구 산호동 334) ▲김용하(36·경남 하동군 악양면 진동리 611) ▲윤경춘(31·인천 남구 학익동 산 91) ▲박재열(44·인천 중구 항동7가 27) ▲심홍광(37·인천 중구 중앙동 2가 17) ▲심재경(35·전남 여수시 남산동 350) ◎북,나포 확인 북한은 30일 하오 중앙방송을 통해 북한 『영해를 불법침입한 정체불명의 선박을 나포했다』고 밝혔다. 북한 중앙방송은 이날 하오 5시 보도에서 『낮12시40분 서해 영해를 불법침입한 정체불명의 선박을 나포했다』고 전하고 현재 『해당기관에서 이 선박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도쿄로부터 전해졌다. 중앙방송은 불법침입한 이 선박에 대해 『인민군 해군경비정이 강력한 자위적 조치로 예고사격을 했으나 계속 도주해 결정적 조치로 나포했다』고 말했다.
  • 본격적인 전쟁준비(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8)

    ◎새로 밝혀진 사실들/김,방중전에 “6월말 공격개시” 확정/조작논란 「3단계 작전」 6월 15일 수립 한국전쟁 발발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번 8회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이 포함돼 있다.특히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정부에 넘겨준 문서에는 19 50년6월 상황을 담고 있는 문서가 거의 빠져있는 사실을 감안할때 긴박한 순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번 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중의 하나는 김일성이 50년5월중순 모택동을 만나기위해 중국을 방문하기전부터 공격개시일을 6월말로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는 남침에 임박해서야 전쟁개시일을 7월에서 6월로 앞당겼다는 그동안의 일반적인 주장과 해석을 뒤엎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하나의 사실은 6월15일에 확정된 3단계작전이다.그동안 오랫동안 조작논쟁을 불러일으켰던 3단계작전이 진실임이 밝혀졌다.일부에서는 전쟁후 한국과 미국에 의해 공개되어 남침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 3단계작전이 조작됐다는 주장이 있었다.그러나 3단계작전은 지금 워싱턴에 보관중인 러시아어로 된 인민군 작전명령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이번 회의 내용으로 볼때 위싱턴에 있는 자료가 조작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으며 6·25는 남침임이 결정적으로 증명됐다. ◎작전개시직전 국지전서 전면전으로 전환/김일성,50년 5월12일 방중전 공격일 소 통고/북­소 49년 6월4일 무기지원 「특별협정」 체결 전쟁개시에 대한 3자간 합의가 마무리되자 막바지 전쟁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전쟁준비의 두 축은 소련과 북한이었다.하지만 김일성의 전쟁준비는 이미 1년전부터 본격화됐다.소련에 대한 무기지원요청이 이어졌고 소련역시 이를 충실히 도와주었다.김일성은 49년5월1일자로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전문을 스탈린앞으로 띄웠다.그는 49년5월까지 기계화부대 증설을 비롯,공군을 제외한 모든 군의 개편문제를 마무리짓고 9월까지는 공군개편을 끝내고 싶다며 추가무기지원을 요청했다. ○추가 무기지원 요청 슈티코프대사가 보낸 이 전문에 의하면 김일성 ⓛ2개 탱크연대를 거느린 탱크여단 ②독립 탱크연대③각 사단에 박격포부대 추가창설 ④공군사단 ⑤엔지니어링 대대 ⑥박격포 여단의 창설을 건의했다.이와 함께 장문의 필요한 무기목록을 덧붙였다.스탈린은 이 요청을 90%정도 집행해 주었다.이를 위해 북한·소련 양국은 49년6월4일 『소련은 북조선정부의 무기 및 군사기술장비 지원요청을 전부 만족시키는 데 동의한다』는 요지의 특별협정을 체결했다.이 특별협정에는 북한에 제공될 소련무기 목록이 첨부됐다.주요목록은 다음과같다. ▲공군장비:IL­10기(30대) WIL­10기(4대) YAK­9기(30대) PO­2기(4대) YAK­18기(27대) YAK­11기(6대) ▲기갑장비:탱크 T­34(87대)장갑차 BA­64(57대)장갑차 SU-76(1백2대)모터사이클 M­72(1백22대) 이외에도 소련은 각종 포탄·대구경총·자동화기·저격용 소총·전함·상륙정·지뢰·도하장비·무전기·전화선·어뢰정·대잠함을 비롯,북한이 요청한 탄약 일체를 인도키로 약속했다.이들 무기원조에 대해 북한은 쌀을 비롯한 곡물과 광물로 갚기로 동의했다. 김일성은 49년12월말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50년도분 추가무기지원 1억1천2백만루블어치를 소련정부에 요청했다.상환방법은 보석류 및 비철금속으로 갚는다고 했다.슈티코프 대사가 50년1월1일자로 본국에 보낸 전문에 나타난 추가요청내역은 다음과 같다.1개 모터사이클연대 창설,기존 1개 보병여단을 사단에 편입시키고 무기보강,최근 창설한 해군보강을 위한 전함 2척. 50년3월14일 김일성은 51년분 차관을 50년도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모스크바에 요청했다.전용목적은 무기·탄약 및 군사기술장비 구입이었고 필요한 무기목록을 전문 뒤에 별첨으로 보냈다.육해공군의 각종장비,탄약을 망라,수백종에 이르는 물품이었다.김일성은 전문에다 별도로 『북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소련정부가 신생국 조선공화국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요청한 물품을 조속한 시일내에 보내줄 것을 기대합니다』라는 서신을 첨부시켰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50년4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은 남조선에서 빨치산으로 활약하던 김달삼이란 사람이 평양으로 넘어왔다는 전문보고를 본부에 보냈다.이 전문은 『남조선언론들이 정부군의 토벌작전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그는 지금 평양에 와있으며 방문목적은 남조선내 빨치산활동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남침개시를 앞두고 남한내부 혼란을 가속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북경방문 출발 하루 전인 5월12일 슈티코프 대사를 불러 전쟁개시일을 6월로 잡겠다는 최초의 언질을 주었다.『본인은 이미 남조선에 대한 공격준비 명령을 총참모장에게 내렸음.전쟁계획은 이미 짜여졌음.준비가 예정대로 마쳐질지 모르지만 공격개시일은 6월로 잡겠음』.슈티코프대사는 즉각 이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북경방문을 마치고 온 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예정대로 진행시켜나갔다.5월29일 슈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전쟁준비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6월8일 병력이동 『김일성은 공격준비상황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음.모스크바회담에서 지원키로 합의한 무기 대부분이 도착했다고 함.김일성은 새로 창설한 사단을 시찰한뒤 6월말 공격개시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함.김일성의 명령을 따라 인민군총참모장이 공격작전을 수립했음.인민군 총참모장과 소련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장군이 이 작전계획을 김일성에게 보고,승인을 받았다고 함.군편성은 6월1일까지 완료예정.6월 전투개시에 아무런 차질이 없다고 함.김일성은 작전개시일을 6월말로 잡고있다고 함.더 늦출 경우 첫째 작전계획이 남조선측에 유출될 우려가 있고 둘째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음.김일성은 6월8∼10일 사이 병력이동을 시작하겠다고 했음』. 같은날 슈티코프 대사는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포스트니코프 장군과 만나 의견을 듣고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두 장군은 처음에 김일성의 6월말 공격개시에 반대했다.작전준비가 제대로 갖춰지려면 7월이라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이 두사람도 결국은 장마 때문에 6월말외에 다른 방안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슈티코프 자신도 장마철 공격개시는 너무 위험하다며 김일성의 생각이 옳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이렇게 해서 공격개시일은 6월말로 확정됐다. 마침내 운명의 6월이 왔다. 북한은 3단계작전중첫번째인 평화공세를 시작했다.6월10일 북한은 남측에 대해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키 위해 전조선민주연합전선 중앙위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슈티코프는 이튿날 6월11일 남한의 반응이 나오자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남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했음.공격계획을 예정대로 진행시켜 나가야겠음.병력을 38도선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추가 평화통일제의를 하겠음』. 6월12일 슈티코프는 13일부터 38도선 10∼15㎞지역으로 인민군의 병력이동이 시작된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총참모장 주재로 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 회의가 열려 구체적인 임무가 하달됐다.6월15일 3단계로 나누어진 최종작전계획이 확정됐다.슈티코프는 6월15일 이 작전계획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작전개시는 6월25일 이른새벽에 시작됨.1단계작전은 옹진반도에서 국지전형태로 시작한 뒤 주공격선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감.2단계 작전은 서울과 한강을 장악함.동시에 동부전선에서 인민군은 춘천과 강릉을 해방.이에 따라 남조선군 주력은 서울일원에서 포위당해 궤멸됨.마지막 3단계작전에서는 여타지역 해방.적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주요 인구밀집지역과 항구를 점령함』. 여기서 알수있듯이 김일성이 세운 당초 작전계획은 전전선에 걸친 전면공격이 아니라 옹진반도를 시작으로하는 단계적 공격이었다.이것이 그뒤 작전계시직전에 전면남침으로 바뀐 것이다. ○소련병력 승선거부 이렇게 최종작전계획을 수립해놓은 뒤에도 북한은 평화선전공세를 계획했다.6월16일 북조선인민최고회의가 남한국회앞으로 평화통일 제의를 내놓았다.이 평화제의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는 슈티코프의 전문보고를 인용해본다. (19 50년6월16일.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조선동지들은 이 평화제의와 이에 대해 남조선이 보일 부정적인 반응(반대할 것이 쉽게 예상됨)이 갖는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예의주시하고 있음』. 6월20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상륙작전에 쓸 전함의 추가지원을 소련측에 요청했다.동서해안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감행,적을 포위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었다.김은 전함을 보내면서 『인민군내에 전함운용 요원이 없기 때문에 상륙선을 운행할 소련해군 요원을 함께 보내줄 것』도 요청했다.스탈린은 21일 답전을 통해 전함추가지원은 받아들이되 적에게 개입명분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소련병력 승선은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21일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중대한 메시지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작전변경에 관한 건의였다. 『김일성은 남조선 방송청취 및 정보보고에 의거,남측이 인민군의 작전계획내용을 입수한 것같다고 말했음.이에 따라 남측이 전투력 강화,방어선 강화,옹진반도 방향에 병력추가배치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함.이같은 상황변화로 인해 원래의 작전계획변경이 불가피하다고 함.김일성은 전면공세 전 옹진반도를 기점으로한 국지전 시작 대신 6월25일 전전선에서 전면공격을 감행하자고 제의했음』. 스탈린은 이 작전변경 건의를 이의없이 승인했다.6월25일 새벽 전전선에서 공격개시로 최종확정된 것이다.
  • 50년 「만찬장 사건」(모스크바 새 증언:3)

    ◎김일성 “개전 수일내 서울점령” 호언/“옹진반도 공략을” 소대사에 간청/“스탈린 다시 만나게 해달라” 졸라/「남침승인」 늦어지자 모택동 들먹이기도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50년 1월 17일 저녁 박헌영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다.김일성,박헌영,김두봉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인사들과 소련대사,공사,중국대사,무역대표부 인사들이 대거 초대됐다.슈티코프대사는 1월 19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이날 만찬장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식사가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의 이그나테프와 펠리센코 두 참사관에게 다가갔다.그리고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중국해방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은 남조선동포들을 해방할 차례라고 떠들었다.그리고는 남조선 인민들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북조선의 군사원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빨치산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 없다.북조선에는 훌륭한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이렇게 떠들어대던 김일성은 『요즈음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못잔다.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과업을 더 늦추면 나는 조선인민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통일 늦출 수 없다 그런 뒤 김은 자신의 모스크바방문 때 스탈린이 남침을 먼저 시작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언급하며 『하지만 이승만이 북침공세를 시작하지 않고 따라서 남조선해방통일과업이 자꾸 미뤄지고 있으니 내가 스탈린 동지를 다시 찾아가 남침개시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말했다.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여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느니,스탈린 동지의 명령이 자기한테는 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했다고 슈티코프 대사는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는 또 만약 스탈린동지를 만날수가 없다면 모택동동지가 모스크바방문을 마치는 대로 그를 찾아가 만나겠다고 말했다.그는 모택동이 중국내전만 끝나면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모택동을 들먹이며 협박조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소련대사관의 두 참사관은 그의말을 가로막고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그 다음 상황을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같이 적고있다.『그러자 김일성은 내게 다가왔다.그리고는 이승만 군대에 대한 공격개시문제를 비롯,한반도상황을 논의하도록 스탈린 동지를 만날수 없겠느냐고 물었다.만약 스탈린을 못 만나면 모택동 동지를 만나겠다고 했다.그리고는 왜 옹진반도 공격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내게 따져물었다.인민군은 3일이면 옹진반도점령을 끝내고 수일내 서울까지 밀고갈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본인은 그에게 스탈린동지를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답했음.그러나 옹진반도 공격은 안된다고 잘라 말하고는 그를 피해 만찬장을 떠났음』 이날 김일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는 『스탈린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나는 자나께나 남조선해방만 생각하고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슈티코프 대사는 보고서 끝머리를 이렇게 마쳤다.『만찬이 끝날 즈음 김일성은 취한 상태였음.그의 모든 대화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본인은 그의 이날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우리의 입장을 타진해보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함』 이 보고서 한통을 통해 우리는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남침의욕에 가득차 있었는지,그리고 당시 소련지도부의 눈에 비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짐작할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49년 여름으로 잠시 거슬러올라가 보자.김일성이 스탈린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기남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슈티코프대사를 8월 12일,14일 연이어 만났다.남침 불가피론을 설득키 위한 목적에서였다.다음은 슈티코프대사가 1차면담 뒤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대통령문서소.슈티코프대사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록) 『두사람은 남조선이 조국통일민주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부했으므로 무력남침 외에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자기가 지금 남침을 개시하지 않으면 조국통일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고 말했음』 그해 6월 25일을 기해 김일성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몇차례에 걸쳐 대남 평화공세를 펼쳤다.6월 30일에는 평양에서 남북노동당 연합회의를 열어 남북노동당을 합당,조선노동당으로 발족시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박헌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한 바 있다. ○선제공격 필요성 강조 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요청에 대해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뚜렷한 무력우위를 확보치 못했다며 스탈린이 거부했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켰다.김일성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 주둔 미군이 물러난 마당에 38도선 분할규정을 지킬 아무 의미가 없다.스탈린동지가 남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해올 경우에만 대응공격을 하라고 했지만 남조선은 이제 북침계획을 연기시킨 것 같다.남조선은 2차대전 전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고수하려했던 것처럼 38도선 고수에 총력을 쏟고있다.따라서 스탈린동지가 권유하신 대응공격 기회는 없어졌다』며 선제공격 필요성을 되풀이했다.김일성은 이와함께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무력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슈티코프도 지지않고 두사람의 현실파악이 너무 낙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한발 물러나 강원도 삼척지구에 해방지구 건설전략을 제의했고 슈티코프는 『그것까지 막을수는 없지만 신중한 분석과 준비를 거친 뒤 실행에 옮길 것』을 권고했다.하지만 해방지구건설은 애당초 김의 목표가 아니었다.8월 14일 김은 슈티코프를 만나 다시 무력남침 필요성을 역설했고 슈티코프는 계속 불가입장을 되풀이했다.그러자 김이 들고나온 전략이 바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사람은 두가지 사항에 합의했다.『첫째,북조선에 소련제 무기를 긴급히 추가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김일성은 전군에 지급할 2∼3벌의 탄약풀세트 지원을 요청.둘째,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을 목표로한 국지전개시를 제의.옹진반도 점령시 38도선 방어선을 1백20㎞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추가 공세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수 있다고 김은 강조』 슈티코프는 『모든 작전은 북조선군의 작전능력과 전반적인 정세파악을 확실히 한후에만 실행에 옮길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슈티코프대사는 8월27일 이 대화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보고문에 남침계획이 매우 무모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그는 『첫째,현재 한반도에 실제로 2국가가 존재하며 남한은 미국등 여러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따라서 남침시 미국이 무기·탄약뿐아니라 병력을 직접 파병할 것임.둘째,미국이 소련에 대한 악선전의 기회로 활용할 것임.셋째,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군사우위 미확보.넷째,남조선은 강한 군·경찰군을 창설했음』등을 남침불가의 이유로 들었다.슈티코프대사는 대안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옹진반도 점령은 권할만함.그러나 남조선군의 반격능력이 강할지 모르고 그 경우 장기전이 될수있음』이라고 덧붙였다. ○소대사 “계획 무모하다” 슈티코프 대사가 본국휴가를 떠난 뒤 김일성은 대사대리인 툰킨공사를 만나 옹진반도 작전계획을 재차 설명한 것이다.툰킨 공사가 김의 이 요청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이 소련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전면남침은 물론 옹진반도 작전까지 금지시킨 것은 전편에서 이미 기술한 바있다. 당시 소련 당정치국의 남침불가 결정은 소련외무부,국방부가 북한군전력을 종합적으로 평가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대통령문서소에는 9월23일자로 그로미코 외무장관,불가닌 국방장관이 스탈린에게 제출한 이 정치국결정의 초안이 보관돼있다.정치국결정의 내용은 거의 이 초안과 일치한다.다만 스탈린이 결재과정에서 몇군데 흥미있는 손질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스탈린은 초안말미에 『…북조선은 남측의 무력공격개시시 이를 격퇴하고 북조선정부의 영도아래 조선통일을 이루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한다…』라고 쓴 부분을 만년필로 긋고 『남측이 도발할 경우 북조선은 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고쳐썼다.「무력통일」운운한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그외에 북한의 무력증강 필요성이 언급된 부분들도 스탈린은 모두 그 표현을 완화하거나 삭제하는 등 끝까지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려했다.그러던 차에 앞서 기술한 김일성의 「만찬장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 남침야욕 노골화(6·25 내막/모스크바 새증언:2)

    ◎김일성,“개막 두달내 남한점령” 장담/49년9월 소 공사에 남침구상 처음 표명/“전쟁 허락해 달라” 집요하게 스탈린 설득/“국지전·전면전” 선택권은 크렘린에 맡겨/평양,빨치산 지휘자 8백명 남파… 게릴라전 지도 김일성의 구체적인 남침구상이 최초로 문서로 드러난 것은 1949년 9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툰킨공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극비보고전문이다.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대통령문서보관소) ○스탈린 관심 표명 김일성이 밝힌 이 최초의 구체적 남침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일단 관심을 표명했다.그리고는 9월 11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한반도정세에 관해 다음의 항목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⑴남조선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규모·무기·전투능력등. ⑵남조선내 빨치산운동상황.개전시 그들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지. ⑶)북조선이 전쟁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인민들이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⑷남침시 미군이 취할 입장 ⑸북조선의 군사력·무기·전투능력.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툰킨공사는 곧바로 12∼13일 양일간 김일성·박헌영을 면담했다.재미있는 것은 툰킨공사와의 면담에서김일성의 태도는 이전의 남조선의 군사적 위협에서 대남 무력침공이 성공할 수 있다는 쪽으로 급변했다는 것이다.다음은 9월14일 툰킨공사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김과의 면담내용. 『⑴남조선군은 장교들의 훈련수준이 아주 낮다고 함.김일성은 38도선에서 벌어진 몇차례 교전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평가했음.김은 현재 남조선군 거의 모든 부대에 북한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했음.그러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실제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음. ⑵김일성·박헌영은 현재 남조선에 1천5백∼2천명의 빨치산이 활동중이라고 했음.김은 그러나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했음.남한출신인 박헌영은 김과 다소 다른 견해를 밝혔음.그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음. ⑶북한이 선제공격을 시작할 경우 남한국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말했음.김은 금년 봄 모택동이 북조선대표 김일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지금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중국내전이 고비를 넘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음』 그러나 바로 이튿날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전날과 달리 북조선이 군사작전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국민들도 이를 환영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불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를 통역으로 나온 허가이(편집자주:재소한인으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비서)의 영향탓이라고 분석했다.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김일성은 다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따라서 전면전 대신 옹진반도와 반도동쪽의 개성까지 남한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작전이 좋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일성은 북조선군이 남조선군과 비교해 강점으로는 탱크·박격포·비행기등 기술적인 면과 훈련·사기등에서 앞서고 약점으로는 조종사의 숫자 및 훈련부족·군함부족·탄약부족·대구경총의 전투태세 미흡등을 들었다.김일성은 먼저 옹진반도를 공격,그곳에 주둔중인 남한군 2개연대를 궤멸시키고 반도를 점령한 뒤 동쪽의 남조선영토 일부를 점령하면 일단 공격을 중단하고 상황을 살피겠다고 했다.남한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계속 남진하되 그렇지 않으면 옹진반도를 확고히 해 방어선을 3분의1 정도 줄이겠다는 계산이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밝히면서도 스탈린의 의중을 알기 위해 끝까지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았다.물론 남침의사를 내비친 것은 스탈린이 원칙적으로 이에 동의할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남한 군사력에 대한 평가,국지전을 할지 전면전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입장이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스탈린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툰킨공사는 이 보고전문 말미에 김일성·박헌영과는 다른 견해를 덧붙이며 전쟁개시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력통일밖에 없다 『김일성이 제의하는 국지전은 필히 남북한간 내전으로 발전될 것임.현재 남북한 지도부내 내전 지지자는 극소수임.현단계에서 북조선이 내전을 시작하는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야 함.본인은 현명치 못한 판단으로 생각함.북조선군은 남쪽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신속한 작전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못함.빨치산과 남조선인민들의 도움을 가정하더라도 신속한 성공을 기대하기 힘듦.내전으로 확대되면 정치·군사 양면에서 북조선에 불리함.첫째로 전쟁확대는 미국에 이승만정부를 지원할 명분을 줌.미국은 중국에서 패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남조선문제에 개입하려 함.또한 전쟁피해가 커지면서 남조선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 측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것임』 그는 이 전문과 함께 남북한의 정치경제·군사 관련장문의 보고서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진 당시상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용치 않기로 한다.다만 한가지 툰킨공사가 이 별도보고서에서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갖고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그는 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 가능성은 없어졌고 무력에 의한 통일의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도 툰킨공사는 남침시 미군개입과 반소선전에 악용될 가능성등을 들어 전쟁개시에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그는 전쟁보다 남조선내 빨치산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는게 보다 현명하다는 견해를덧붙였다. 이같은 보고를 접한 크렘린은 9월24일 당중앙위 정치국 이름으로 북조선의 남침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북한지도부에 전달케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정치국결정.회의록 N191).이 결정에서 크렘린은 군사적으로 인민군이 장기적인 작전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어 지금 작전을 시작하면 적을 패배시킬 수도 없을 뿐아니라 북조선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고 못박았다.이 결정은 「조선인민들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의 견해에는 동의한다.그러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무엇보다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을 강화하고 대규모 반정부 기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옹진반도 점령작전에 대해서도 소련지도부는 『이는 남조선과의 전면전 초기단계로서 시작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빨치산운동 강화를 1차 면담에 이어 두번째로 김일성의 개전허가요구를 거절한 것이지만 스탈린의 이 결정은 좀더 확실한 승리를 위한 작전지시문 같은 느낌을 준다.아울러 김일성과 스탈린 두사람간 전쟁개시에대한 공감대는 이 무렵을 전후해 확고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0월4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들고 김일성·박헌영을 다시 만났다.그리고는 바로 그날 저녁 스탈린앞으로 다음과같이 이 면담결과를 보고했다.『김일성과 박헌영은 우리의 통보를 냉담하게 받아들였음.김일성은 「좋다」는 한마디만 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논리가 옳다고 수긍한 뒤 남조선에서 빨치산운동이 확산되기를 기다리는게 좋다고 동의했음.현재 남조선에서는 북조선에서 파견한 8백명이 빨치산운동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음』 소련의 이같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굽히지 않았다.이듬해인 50년 1월17일 평양에서는 박헌영외상이 주최한 한 만찬이 열렸다.1월10일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한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이 만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취한 김일성은 소련·중국 대표들을 붙들고 자신의 남침의지를 다시한번 강하게 나타냈다.이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을 한 것이다.
  • 등이후 한·중 협력의 긴요성(사설)

    한·중 우호협력관계가 착실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김영삼 대통령 방중과 이붕 총리 방한에 이어 이홍구 총리가 중국을 방문중이다.강택민 중국공산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첫 방한도 확정되었다.수교전 이붕총리는 「물이 흐르면 개울이 생긴다」(수도거성)고 한 적이 있지만 지도자들의 빈번한 교류가 양국관계의 꾸준한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홍구총리 방중은 양국 관계가 경제협력차원을 넘어 정치·외교·군사협력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한반도 정전체제의 존속에 대한 중국의 확고한 지지를 확인받았으며 고위장성을 포함하는 군사교류의 실질적 확대 합의도 이루어졌다.한국의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지지약속을 받았으며 원자력공동위 설치도 합의했다. 단순한 우호협력차원을 넘는 양국 관계의 긴밀화를 보여준다.남북 등거리에서 한국 근거리로 다가오는 중국을 느끼게 한다.이붕총리도 지적했듯이 한중 관계는 바야흐로 최적의 시기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중국의 북한특파원 추방과 국경경비강화,북한의 중국어선 나포 및 대만전세기 평양취항 등 사사건건 부딪치는 최근의 북중 관계의 소원함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다.작년 교역량 1백17억2천만달러에 한국기업의 대중투자가 4천5백40건 39억8천8백만달러에 달하고 있는 경제관계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중국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우리 경제파트너가 될 것이 틀림없지만 통일안보 차원에서도 우리는 중국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중국을 우리 통일의 후원자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중국은 한반도 안보통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평화와 안정은 한반도의 그것과도 직결된다.그런 점에서 중국의 평화와 안정은 우리의 중대 관심사이기도 하다.등소평이후의 중국도 현재와 같은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동시에 한중협력도 더욱더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가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 중­북한 관계 악화 조짐/중 “밀무역 근절”국경에 경찰 증강

    ◎북은 서해서 중 어선 나포 최근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앞으로 출범할 김정일 체제의 장래와 관련해 높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0일 정부의 한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측은 최근 북한의 밀무역 행위를 막기 위해 북·중 국경지역에 여단급 규모의 3개 무장경찰 부대를 증강·배치하는 등 북·중 관계가 올들어 급속히 냉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종전에는 국경에 여단급 규모로 추정되는 1개 경찰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중국측은 또 지난 1월 전인대 상무위를 통해 자체 수급사정을 이유로 북한에 대한 쌀등 식량 무상지원은 물론 수출까지 금지하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측도 최근 서해상에서 조업중인 중국 어선 한척을 영해 침범을 이유로 나포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다른 당국자는 북·중 관계의 변화조짐과 관련,『김일성이 사망한데다 중국의 실권자 등소평이 고령으로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한 가운데 이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지난 92년 한­중 수교 이후 북·중관계는 「혈맹」관계에에서 상호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관계로 계속 변모해 왔다』면서 『북한과 중국에서 이른바 「혁명 1세대」가 퇴진하면서 북·중관계가 더욱 소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 “식량난 덜고 외화부족 해결하자”/어획고 증대에 안간힘

    ◎수산법 제정… 어부절 맞아 생산력 강화 결의/유류난에 장비 낙후… 출어율 30%선/수산물 생산 매년 급감… 93년 109만t 북한당국이 최근 수산업 생산력 강화에 안간힘을 쏟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의 선전매체들도 최근 자주 이같은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3월22일 「어부절」을 맞아 북한의 수산관계자들과 어부들이 『김정일 영도아래 「주체적인 수산업」을 발전시켜 나갈 것을 결의했다』는 보도가 대표적 사례이다. 북측이 최근 수산분야 자원보호를 비롯한 제반산업을 규정하는 수산법을 제정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이처럼 북측이 수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당면한 식량난과 외화부족을 다소나마 완화하기 위한 고육책임은 물론이다. 사실 북한은 수산업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한난류가 교차하는 동해어장에는 명태·청어등 6백여종에 달하는 각종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부유생물이 풍부해 산란장소로 적합하다는 서해 어장에도 조기·민어등 2백50여종이 서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최근 어획고는보잘 것 없는 형편이다.이는 산란기 어류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연근해 정착성 어자원이 감소하고 있는 데다 어로장비와 기술이 열악한데 일차적으로 기인한다. 북한은 그동안 군사력 확충에만 심혈을 기울여 오느라 어선 건조실적이 극히 빈약한데다 질적 측면에서도 극히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무동력선을 포함해 전체 보유어선 수가 총4만척에 불과한데다 그나마 15∼20마력급 소형어선이 태반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심한 유류난으로 출어일수가 줄어든게 수산업 생산량 감퇴의 주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90년대 들어 출어율이 30%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때문에 북한의 최근 수산물 생산량이 90년 1백45t,91년 1백20만t,92년 1백14만t,93년 1백9만t으로 매년 급감하고 있다는 추정이다. 또 북한당국이 최근 수산업분야의 생산증대를 독려하고 있는 것은 이윤동기가 없는 국영수산으로 어부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지고 있는데 따른 자구책의 성격도 강하다. 그러나 외화부족과 유류난이라는 빈곤의 악순환에따른 낮은 출어율이 쉽게 해결될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 이같은 노력동원 방식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북한당국도 최근 이점을 의식한듯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하고 있다.이를테면 대일본 수출전략상품인 김 다시마 따위 이외에 게 고둥 등 정착성 어패류의 양식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 48년 UN임시위원단 활동(새로쓰는 한국현대사:17)

    ◎소군이 입북막아 남북한 총선거 계획 무산/「단독선거」 이승만 적극환영… 김구·김규식은 반대/단정수립 5·10선거 감시 1948년 1월8일 군용 비행장인 김포공항에 비행기 한대가 착륙했다.이윽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위원인 KPS 메논 인도대표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등 3개국 대표가 트랩을 내려 한국땅에 첫발을 디뎠다.위원단 일행은 서울로 들어오는 동안 길가에 늘어선 25만∼30만명의 한국인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가능하면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나 중앙정부를 수립하도록」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대표환영 시민대회 열려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모두 한국에 왔다.중국대표는 호세택 서울총영사가 그 임무를 맡았다.당초 유엔총회가 선정한 위원국에는 우크라이나사회주의공화국이 포함됐으나 소연방국인 우크라이나는 참여를 거부했다. 서울 수도호텔에 숙소를,덕수궁에 사무실을 정한 위원단은 12일 첫회의를 열어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했다.이틀 뒤 이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밤에는 덕수궁에서 리셉션이 개최됐다.극진한 환대 분위기 속에서 위원단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당시 메논 의장은 『우리 위원단은 38선을 인정하지 않으며 한국은 결코 분단돼서는 안될 나라』라고 강조하고 『미·소의 양 제도를 체험한 한국인은 그 장점만을 살려 한국적인 정치체제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자신만만하게 피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난관은 곧 닥쳤다.위원단은 1월30일 미군정 연락장교를 평양에 보내 소련군정측에 입북(입북)을 신청했다.이에 대해 소련군사령관 참모장인 샤닌소장은 『우리는 위원단을 인정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소련정부의 입장은 유엔총회 토의과정에서 분명히 밝혔으므로 위원단 입북을 주둔군으로서는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임시위원단은 입북에 실패하자 유엔 사무총장에게 소련측의 비협조를 제소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소련정부의 「부정적 입장」뿐이었다.위원단은북한지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2월6일 공식발표한다. ○“식민지화 음모” 매도 이에 앞서 김일성은 유엔임시위원단을 극렬하게 비난함으로써 애당초 위원단 입북을 허용치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1월12일 발표한 이 성명에서 김일성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으로 왔다』고 매도하고 『한덩어리로 뭉쳐 열렬히 투쟁하자』고 선동한 바 있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처음 계획이 틀어지자 위원단은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해야 하는지를 놓고 미군정,남쪽의 정치지도자들과 연속회담을 벌였다.우파들은 대부분 적극 환영하며 즉시 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그러나 우파인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좌파세력,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는 통일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다.미군정은 물론 단독선거 실시에 찬성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김구·김규식은 정치적으로 완전결별한다.결과는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다.해방공간에 돌아온 직후부터 미군정과 마찰을 빚어가면서 공산주의를 통렬히 비난한 이승만은 우파진영을 이끌고 단선 참가로 나아가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위원단 내부에서도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에 부합되는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결국 위원단은 단독선거 실시에 대한 결정을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2월19일 열린 소총회에서 미국대표는 『예견하지 못한 사태가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위원단은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도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한국인 가운데 3분의2가 선거에 참여해 중앙정부를 성립하면 북한도 이에 참여하기 위해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소총회 투표에서는 미국의 입장이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채택됐다.반대표를 던진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는 『남한에 수립되는 정부는 북한과 대립하게 될 위험성이 짙다』고 지적했다.그는 만약 북한이 한국정부에 위협을 가하게 되면 유엔은 스스로 수립한 한국정부에 대해 적극 원조하든가,모든 책임을 포기하는 난처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소련은 이 회의에 아예 불참했다. 유엔 소총회에서 단독선거의 합법성을 인정하자 한국임시위원단은 선거준비에 박차를 가한다.2월28일 위원단은 『접촉이 가능한 지역에서 늦어도 5월10일까지는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그러나 임시위원단에게는 선거를 주관할만한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었으며 스스로도 선거를 감시하고 그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는 정도를 가능한 일로 받아들였다.이는 곧 선거를 관리하는 주체가 미군정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위원단 발표에 이어 『총선을 5월10일 실시하겠다』고 공표했고 위원단은 이를 추인했다.선거는 1947년 8월 과도입법의원이 통과시킨 선거법에 따라 시행하기로 했다.위원단은 선거기간동안 30명의 인원으로 전국을 돌며 선거과정을 감시했다.「5·10선거」가 끝나고 위원단은 6월25일 선거결과를 평가하는 회의를 열었다.그들은 『1945년 5월10일의 선거결과는 한국민의 3분의2를 차지하는 주민들이 자유의사를 합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렸다. ○북도 서둘러 단정 구성 위원단은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그해 9월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 보고했다.회기 막바지인 12월12일 총회는 보고서를 승인,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인정했다.이와 함께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임시위원단의 업무를 대신 수행할 「유엔 한국위원단」을 설치한다고 결정했다.이로써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의 단독선거를 감시·평가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활동은 1년여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북한은 임시위원단 입국후 단독정부 구성을 서둘렀다.1948년 5월1일 조선인민위원회는 「헌법」을 발표하고 8월2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렀다.이어 9월7일 북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스스로 전한국을 대표하는 정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내 활동을 개시한 뒤 정국은 「유엔 감시아래 남한 단독선거­남한 단정 수립­이에 대응하는 북한정권 등장」이라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나갔다.이는 한반도를 점령한 미·소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일찍부터 예견된 이데올로기적 정치구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북,인민정부 세우려 민의조작/「유엔한위문서」가 밝힌 단선저지 움직임/“남한단독선거 반대 349만 시위” 주장/“「소련식 헌법」추천서 4만건 접수” 선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자 북한정권은 이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1948년 미군 정보부대가 작성,기밀문서로 보관돼 오다 지난 85년 비밀해제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관계문서」는 당시 북한 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북한당국의 의도는 임시위원단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고 남한 단독선거 실시를 막자는 것이었다.이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 소련식 인민정부를 수립하고자 조작된 민의를 총동원했다.평양방송이 3월 한달동안 대남방송한 내용을 보면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이북에서 3백49만9천4백63명이 시위등 항거에 나섰고 ▲항의편지가 1만6천3백57통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전국에 걸쳐 소련식 인민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주장 아래 소련것을 본떠 마련한 「헌법」에 대한 추천서가 4만건이나 접수됐다고 선전했다.이밖에 인민군이 「임시위원단 반대」행진을 벌였다거나,남한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단체 그리고 북한에서 「헌법」을 토의·찬성했다는 집회 명칭을 쉴새없이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서 끝에 붙은 미군 971방첩대(CIC)보고서는 이같은 선전들이 북한주민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크게 다르다고 보았다.이 보고서는 『북한 사람 대부분은 임시위원단에게 큰 기대를 가졌다.이 기대는 비록 위원단의 입북이 거절된 뒤 많이 사라져가긴 했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도 유엔임시위원단 또는 남한 단독정부가 한국 전체를 통일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 장애벽 허문“동심 만세”/서울·경기지역 11개 특수교 129명초청

    ◎서울 재동국교생 「장애친구」들과 한마당/손에 손잡고 “가위 바위 보…”/서로 땀 닦아주며 “우리는 하나” 『같이 공부하고 함께 뛰어 놀고 싶어요』 15일 하오 서울 종로구 재동국민학교(교장 소정자·56) 운동장에서는 이 학교 4학년 어린이 1백29명과 서울·경기지역의 11개 특수학교및 특수학급에 다니는 장애어린이 1백29명이 어우러져 포근한 봄바람을 한껏 마셨다. 시민단체인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공동대표 홍성우변호사 등 3명)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사장 김성재 한신대 교수)가 함께 마련한 「어깨동무 놀이 한마당」은 바로 동심이 하나되어 장애의 벽을 허문 감동의 현장이었다. 장애어린이와 일반어린이가 짝을 이뤄 1개조에 13∼14쌍씩 모두 10개조로 나뉜 어린이들은 2시간 남짓 우리의 8가지 전통 겨루기놀이를 즐겼다.「여왕벌 어린이」를 쓰러뜨릴 때까지 닭싸움을 벌이는 「여왕벌 닭싸움」,콩 주머니를 들고 자기편 양동이에 많이 집어넣는 경기인 「석전」등 경기가 거듭될수록 어린이들은 한덩어리가 되어갔다. 하나가된 함성과 깔깔대는 소리는 온 운동장에 넘쳐흘렀다. 「우리 집에 왜 왔니,왜 왔니,꽃을 사러 왔단다.…가위,바위,보」「꽃따기 놀이」에서는 서로서로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둥근 원을 그리면서 강강수월래를 외치자 구경하던 학부모들도 함께 뛰어들었다.이어 2백58명의 어린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손에 손에 소망을 가득 담은 갖가지 색깔의 풍선을 일제히 봄바람에 날려보냈다.이날 놀이마당의 절정이었다. 이날 첫짝이 된 심상덕(17·은평복지학교 중학1년)군과 백서현(10·재동국교)군은 처음엔 서로 멋적은 표정이었으나 이내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도 하고 땀도 닦아주었다.한명희(15·은평복지학교 중학 2년)양도 짝인 김선화(10·재동국교)양의 손을 잡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이날 행사는 장애어린이와 일반어린이를 어릴때부터 한데 어울리게 교육을 시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장애인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특히 놀이마당에 앞서 장애아동과 일반아동 대표들은 「우리모두를 위하여」라는 통합교육선언문을 낭독해 주위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오는 20일 장애자의 날을 앞두고 여린 이날 행사에는 재동국민학교 동문인 서상목 보건복지부 장관과 학부모 70여명,자원봉사자 80여명,놀이연구회 「놂」의 놀이선생님등 2백여명이 나와 뜻깊은 사랑의 나눔을 격려했다. 한편 한국휠체어 테니스단은 이날 상오 70여명의 장애 휠체어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올림픽테니스장에서 「휠체어테니스」 대회를 열었다. 서울시립뇌성마비 종합복지관에서도 이날 한국뇌성마비복지회가 주관하는 「다함께 노래부르기 대회」가 열려 5백여명의 뇌성마비인들이 가족 친지 등으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고 북한산 도선사입구에서는 통일염원 장애인 등반대회가 열렸다. 또 16일에는 상계6동 상계 근린공원에서 7개 단체 10개 팀이 출전하는 뇌성마비인 축구대회가 열리는등 장애인과 일반인이 하나가 되는 각종 행사가 잇따라 열릴 예정이다.오는 18일에는 오금동 오금 근린공원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인들이 일반인과 어울려 각종 스포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서울곰두리체육센터」(관장 신창현)가 개관된다.
  • 북은 벼량까지 갈것인가/다시 중대고비 맞고 있는 북핵문제(사설)

    북한핵문제가 작년 10월 미·북제네바 핵합의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려하고 있다.북한이 남북대화재개는 물론 한국형 경수로 수용합의 이행을 거부하고있기 때문이다.북한은 합의자체의 파기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한 파국은 불가피하다.정부는 물론 국민도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한 확고하고도 단호한 각오와 대비가 있어야 할 사태전개다. ○정부 한국형 관철의지 단호 북한은 최근의 베를린실무회담에서 자칭 「획기적」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20억달러 추가원조및 미국회사에 의한 한국형의 설계변경 요구등 우리는 물론 미국도 받아들일수 없는 10여개 조건들을 요구했다.책임을 한·미에 떠넘기면서 한국형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선전용에 지나지않는 타협안이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형외 대안이 없음을 알고있는 북한의 완강한 한국형거부와 이같은 행태는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북한은 처음부터 핵문제를 해결하고 화해와협력에 나설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지금의 북한이 정말 원하는 것은 핵무기개발과 보유이며 미국과의 협상은 오로지 김일성사후의 체제안정을 위한 시간벌기와 한·미·일 이간을 위한 것이며 벼랑외교도 결국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연막전술 아닌가. ○월말 북핵위기 불가피하다 북한은 그 모든 것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도 우리는 결코 용납할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특히 한국형경수로는 우리의 미·북핵합의 수용의 양보할수 없는 절대적 조건이었다.그것을 북한의 억지에 밀려 또 양보하고 끌려가는 것은 결국 북한의 함정에 빠지고 놀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더우기 그것으로 북핵문제 완전해결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우리는 이미 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북의 페이스에 말려들 위험성을 보이고 있는 미국은 특히 이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이례적으로 확고하고도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옳고 당연한 일이다.북한이 합의이행을 끝내 거부할 경우 세계의 응징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한푼의 재정부담도 않을 것이라는 수차의 경고는 말하자면 배수의 진이라 할수 있다.누구도 소홀히 들어선 안될 것이다.한국형경수로를 끝내 거부할 경우 유엔을 통한 제재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며 옳은 방향이다.그럴 경우 있을지도 모르는 북의 도발가능성에 즉각 대처할 만반의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육참총장의 특별지시 또한 마찬가지다. ○범국민적인 초당대처 긴요 북한이 벼랑끝외교를 한다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특히 이번에는 우리가 유리한 고지다.절대적인 관건인 돈주머니를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한국형 관철결의는 70%를 넘는 국민여론의 압도적 지지도 받고있다.정부는 양보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입장이다.한국형경수로 관철은 정부만이 아닌 범국가적 과제이며 온국민의 초당적 지원과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벼랑끝 외교의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경수로계약 체결 시한인 오는 21일 이후의 한반도 긴장고조는 필지다.결코 바람직한 상황전개는 아니나 피할수 없다면 중요한 것은 현명한 대처다.경제파탄과 권력승계 과도기의 북한도 도발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단호한 의지에 광범위한 국민여론 결집의 뒷받침이 절실하다. ○탈출구 「기본합의서」 복귀뿐 우리를 위해서는 물론 북한을 위해서도 대결과 긴장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북이 잃을 것이 더 많다.뉴스위크 최근호는 이번엔 북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 같으며 벼랑전술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평가했다.북의탈출구는 미국이나 일본아닌 한국에 있다.한국과의 관계개선이 체제안정과 미국및 일본으로 가는 첩경임을 북은 명심해야 한다.「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미,“수입장벽 낮춰라” 대한 포문/하원 청문회 증언 요지

    ◎“식품 유통기한 문제 등 WTO 제소마땅/의료장비 수입규제 대응조치 강구 필요” 미하원 국제관계위는 29일 하오 아태소위와 국제경제정책및 무역소위 합동으로 한미경제관계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이번 104대 의회출범이후 한국의 시장개방,통상문제만을 단독주제로 하여 청문회를 개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클린턴행정부에 이어 공화당 지배의 의회에서도 한국에 대한 통상압력이 가중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다음은 이날 청문회에 나온 인사들의 증언요지­. ▲리처드 알렌 미 헤리티지아시아연구소장(전백악관안보보좌관)=한국의 김영삼대통령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경제의 자유화,국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외국인의 직접투자부문도 많이 개선되었고 외국투자회사의 토지소유,각종행정규제및 인허가의 완화,지적재산권의 보호강화등이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기업환경과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북한의 상황이 하나의 변수다.북핵문제는 앞으로 수주 혹은 수개월이 어려운 시기인데 또 다시 핵위기가 고조될 경우 한국의 투자환경은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다. ▲폴 딜링험 미전자협회대표(크레이연구소 부회장)=한미간에 최근 타결된 양국통신협상은 미업체가 한국의 텔레콤에 직접 입찰할 수있는 길을 열게해주었다.한국은 투자환경 개선에도 최근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다만 미국상품의 수입을 더욱 촉진토록할 필요가 있다. ▲폴 로젠탈 미돈육생산자협회,전국목장주협회,미육류협회 합동대표=한미간에 마찰을 빚고있는 식품유통기한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미국의 승산이 있는 것은 물론 미국에 유리한 판정만 받더라도 육류 뿐 만아니라 다른 농산물의 한국수출에도 크게 도움을 줄것이다. WTO에의 제소와 함께 미행정부가 미통상법 301조 아래서의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필요할 경우 일방적 보복조치를 취해야할 것이다. ▲스티브 저지 미증권협회 수석부의장=한국은 자본시장개방계획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외국회사에 대해서는 완전한 내국인대우를 해주지 않고있다. 한국은 현재 상장회사의 외국인 소유권을 3%,총 12%로 제한하고있고 외국투자자들은 중소기업의 주식들만 보유할수있도록하고있다. 외환거래에 대한 각종 제한을 함으로써 미증권회사들의 한국시장진출이 크게 제약을 받고있다. 미국기업이 한국시장에 들어가서 한국기업과 동등한 기업활동을 할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한다. ▲에드워드 로진스키 보건산업제조협회 부회장=한국의 보건복지부의 의료장비에 관한 각종 규정이 공공건강을 증진시키기보다는 무역장벽을 조장하고있다.금년 1월부터 의료기수입에 새로운 규제를 시작하고있다.의료기 수입에 있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검사기준을 적용하고 애매모호한 등록요구 조건을 내세워 규제함으로써 수입을 방해하고 있다.시장조사 결과 의도적이든 아니든 차별대우가 있으며 이의 시정을 위해서는 이같은 차별적 수입정책에 대응하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이의 방법의 하나로 한국에서 수입하는 의약품에 대해서 FDA허가를 지연시키는 것이다.
  • 북한/대남비방 왜 극렬한가/경수로협상 시한 앞두고 연일 포문

    ◎「한국형」 회피·대내결속 다목적 포석 최근 북한의 대남 중상비방공세가 갈수록 극렬해지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측의 대남비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하지만 대북 경수로 공급협정 1차 시한(4월21일)을 앞두고 그 강도가 「최고 수위」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역도」등 갖가지 저열한 표현을 써가며 연일 타도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북한당국은 28일에도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김 대통령과 문민정부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적개심을 고취하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대화분위기에 찬물 북·미합의에 따른 남북대화에 응해올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감정의 골을 깊이 파는 「독설」로 대화분위기 형성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자세도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북측이 핵동결을 해제할 수 있다고 위협한 것도 그 일환이다.즉,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우리측이 한국형경수로 제공을 내세운다면 제네바 북·미합의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엄포가 그것이다. 비난의 대상과 소재가 전례없이 무차별적이라는 점도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지난 23일 우리측 운동권을 겨냥,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부추기는 식의 종래의 공세보다 훨씬 강도높은 「안기부 폭파」를 선동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근거없는 대남 중상비방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이를테면 우리측의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계획을 그들에 대한 핵위협이라고 강변하고 있다.지난 23일 서해상의 대청도 인근 우리 수역을 순시중이던 우리 해군함정이 어선납치를 목적으로 북한수역으로 침입했다고 날조 선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굴업도계획 맹비난 이처럼 북측이 「막가는」식으로 대남 비방공세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다목적 노림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게 당국과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식량부족 사태를 비롯한 총체적 경제난에다 김일성사망후 과도기적인 체제위기 상황에 따른 조건반사적 행태라는 해석이다.대내 결속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대남 긴장분위기를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 쟁점만들기 둘째로 제네바합의에 따른 남북대화 이행조항을 우회하기 위한 계산된 선제공격이라는 지적이다.말하자면 남북대화 지연의 책임을 우리측에 돌리고 한국형경수로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새로운 쟁점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다. 핵문제와 아무관계가 없는 굴업도문제를 계속 문제삼고 있는 것 자체가 과거 콘크리트장벽을 이슈화해 대화를 기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 유사하다는 점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 「이달의 전쟁영웅」 고 김백일 장군

    ◎6·25당시 1군단장으로 38선 돌파 지휘 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전 예비역중장)는 28일 조국과 민족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이달부터 전쟁영웅 가운데 1명씩을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차례로 선정,추모행사를 갖기로 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이에 따라 3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6·25당시 1군단장으로 북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고 김백일 장군을 선정했다. 김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5사단과 12사단이 탱크를 앞세우고 낙동강 부근까지 진격해 왔을 당시 1군단 예하 제3사단을 지휘,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물리치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19 50년 10월1일 연합군으로서는 처음으로 38선을 넘는 쾌거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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