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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영호 “‘김정은 국가수반’ 헌법 수정 안됐다. 내가 잘못 봤다”

    태영호 “‘김정은 국가수반’ 헌법 수정 안됐다. 내가 잘못 봤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국가 수반으로 명기하는 내용으로 북한 헌법이 수정되지 않았다며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 본부장의 반박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 이번 주 북러 정상회담이나 다음달 중러 정상회담이 뜻대로 풀려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업게 되면 김정은은 하반기까지 버티기를 계속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북한 경제가 외부 분석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태 전 공사가 지난 15일부터 21일까지의 북한 동향을 살펴보며 주목한 세 가지를 가다듬어 소개한다. 문장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긴 내용을 조금 줄였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정리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지난 11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최룡해 상임위원장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들어가고 지난 주 북한언론들이 김정은에게 ‘조선인민의 최고대표자’ 라는 새로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북한 헌법이 수정됐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주 김정은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주석, 베트남 주석에게 답신을 보내면서도, 짐바브웨와 콩고 대통령들에게는 최룡해를 내세워 축전과 위로 전문을 보내게 한 것을 보면 여전히 상임위원장이 헌법상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해외에 파견되는 북한 전권대사들의 신임장도 최룡해의 이름으로 나가고 외국 대 사들의 신임장도 최룡해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권력구조를 수정하는 헌법수정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 없다고 본다. 지금까지 국무위원회에 당, 내각, 군, 보안(경찰), 보위, 외교 분야의 책임자들이 망라됐지만 입법 및 주권기관 책임자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수령 절대권력 체제라 해도 공화제 국가에서 행정과 입법을 분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룡해가 국무위원회 제 1부위원장직을 차지한 것은 국무위원회가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까지 지도하는 것으로 헌법이 수정되지 않았는지 다시 의문을 품게 한다. 만일 이렇게 헌법이 수정됐다면 결국 형식적으로나마 분리돼 있던 행정과 입법이 하나가 됐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김정은이 포스트하노이 전략 실현의 1단계를 올해 상반기로 정하고 미국과 남한에는 강경 모드로, 중국과 러시아에는 각도있게 다가가는 ‘우군 확보’ 전술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정은이 ‘장기전에 대비한 자력갱생’을 외치고 있지만 김정은의 포스트하노이 전략은 여전히 미국과 3차 정상회담을 성공시켜 핵미사일을 유지하면서도 일부 제재를 해제하는 ‘핵 굳히기’ 전략이다. 그러나 북한은 현 시점에 미국이나 한국과의 대화에 쉽게 나서면 오히려 제재 해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약점을 노출시킬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장기전’ 엄포를 놓고 있다. 이번주 김정은 본인은 군사 행보를, 최선희와 권정근을 내세워 미국 관료들을 겨냥해 비난하면서 의전 담당 김창선 부장 일행을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내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하게 하고 중국 해군 창립 70주년 행사에 해군사령관을 파견했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에 따르면 평양시 곳곳에서 학생들의 집단체조 연습이 시작되고 일부 주민 사이에 다음달 시진핑 주석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란 소문도 나돌고 있다. 최근 북녘 언론들이 김정은 시정연설의 역사적 의의를 해설하는 논설들을 연이어 내보내면서도 4·27 판문점선언이나 9월 평양선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점도 눈에 띈다. 이에 따라 다음 주 판문점선언 일주년 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치를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일 김정은이 푸틴을 만나 핵과 미사일실험에 대한 모라토리움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올해 말 추방 위기에 놓인 수만명 북한근로자들의 체류 연장을 받아내고 5월중 시진핑의 북한방문이 이루어지면 6월까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힘들게 돼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김정은에게 산소호흡기를 붙여 준다면 김정은의 대미대남 강경 모드는 연말까지 갈 수 있으나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충분한 경제적 후원을 얻지 못하면 하반기에는 슬슬 남북정상회담을 넘겨다 볼 것이다. 셋째로, 북한 내부 사정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은 21일 ‘위대한 당을 따라 총진격 앞으로!’라는 제목의 정론을 발표했는데 현재의 상황을 북한의 역사에 가장 힘들었던 1956년과 비교했다. 물론 6·25전쟁이나 90년대 후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수령 지위가 내부적인 파벌집단에 의해 공개적으로 도전 받았던 것은 1956년뿐이다. 당시 김일성이 소련 등 동유럽을 순방하고 있는 사이에 중국 모택동의 지시 아래 팽덕회가 최창익을 우두머리로 하는 ‘연안파’를 내세워 김일성을 반대하는 조직적 음모를 꾸미게 했으며 이에 ‘소련파’도 가세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김일성은 급히 귀국해 당전원회의를 열어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빨치산파가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했다. 이에 따라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을수 없게 된 김일성은 자력갱생을 외치면서 천리마운동을 벌여 난국을 겨우 수습했다. 1956년과 지금의 북한이 비슷하다면 내부 사정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이다.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임정 요인 유해 봉환 1순위 돼야… 김원봉보다 의열단이 더 중요”

    “임정 요인 유해 봉환 1순위 돼야… 김원봉보다 의열단이 더 중요”

    올해 1월부터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해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12회)과 1919년 3·1운동의 성과와 의의를 담은 ‘3·1운동 100년’(12회) 기획을 선보였다. 이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시리즈를 결산하고자 지난 15일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서 ‘새로운 100년 대한민국의 과제’를 주제로 전문가 대담을 가졌다. 2005년 국내 최초로 김원봉(1898~1958년) 평전을 출간한 소설가 이원규(72)씨와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가장 큰 의의는 어디에 있나. 이원규 “3·1운동의 결과로 임정이 생겨났다. 1919년 여러 임정이 하나로 합쳐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 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갈등과 분열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적은 힘이나마 항일 투쟁에 매진한 독립운동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임정을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대결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김주용 “임정에서 활동한 김창숙(1879~1962)이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중국 광저우에서 쑨원(1866~1925)을 만나 ‘조선 청년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쑨원은 “(제국주의 세력의) 노예적 삶을 살다가 10년이 채 못 돼 대혁명(3·1운동)을 일으킨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드문 일”이라며 “조선의 독립이 없으면 중국의 독립도 없다”고 극찬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우자 신규식(1880~1922)도 임정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노력이 쌓여 한인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에서 조선인 군장교를 육성할 수 있게 됐고, 이들은 훗날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등으로 성장했다.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1898~1976) 등은 자신들의 항일 투쟁에 기꺼이 동참한 조선의용대에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3·1운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항일 노력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고 이는 결국 독립에 이르는 기초가 됐다.”-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김주용 “북한과 중국 등에 산재된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사업이 1순위가 돼야 한다고 본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정을 계승했다며 임정 수립 100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피흘리며 헌신한 임정 국무위원들에 대한 유해 송환 작업에는 손을 놓고 있다. 최우선 과제인데도 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정 요인 수십명이 잠들어 있는 중국 충칭의 허상산 한인묘지는 버려진 상태다. 일부 유해는 국내로 봉환됐지만 나머지는 발굴조차 못했다. 이젠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해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중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해 DNA 분석이라도 해야 한다. 아직도 지하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임정 요인들이 있다.” 이원규 “임정 요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이를 기리려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 사고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진정성을 보이면 주변국도 이해해 줄 것으로 본다.” 김주용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되고 정확히 1년 뒤인 1950년 허베이성 한단에 우리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진기로예 열사릉을 세웠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팔로군 소탕전에 맞서다가 희생된 조선의용군 윤세주(1901~1942)와 진광화(1911~1942)의 묘도 거기에 있다. 중국은 국가를 세우자마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부터 모셨다. 우리가 아니면 임정 요인들을 과연 누가 기억하고 챙길까.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인 올해가 지나면 이들에 대한 관심 또한 식을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이런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한다.” -임정 100년을 계기로 학계나 우리 사회가 좀더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원규 “현재 우파 위주로 진행된 독립운동사 연구의 범위를 민족 전체로 넓혀야 한다. 특히 남과 북으로부터 버림받은 ‘연안파’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 연안파는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을 말한다. 김원봉(1898~1958)이나 김두봉(1889~1961) 등이 해당한다. 이들은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김주용 “이제 대한민국이 김원봉을 품어야 할 때가 됐다. 단순히 ‘북으로 올라간 사람에게 서훈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60년 삶의 절반가량을 일제와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라는 영화 대사 정도로 인식하기에는 너무도 큰 일을 한 인물이다. 김원봉은 다른 월북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지 않다. 그가 숙청을 당한 탓에 북에서도 우리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김원봉을 인정하는 것은 통일 이후 대한민국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김원봉 재평가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원규 “2005년 우리나라 최초로 김원봉에 대한 평전을 출판했다. 글을 쓸 때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다(웃음). 하지만 의외로 김원봉 평전에 대한 평가는 진보나 보수 세력 모두 우호적이었다. 김원봉이 누군지 잘 몰랐던 시절이기에 좌우 모두 그의 업적만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서훈 논란이 편가르기로 격화돼 안타깝다. 이념의 잣대로 그를 보기에 진영에 따라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린다. 최근에는 일부 보수언론이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띄우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사회 전반에 퍼지자 이를 막아보려는듯 하다.” 김주용 “김원봉에게 반감을 가졌던 대표적인 이로 장준하(1918~1975)를 들 수 있다. 그는 한국광복군 시절 후방에 배치돼 있었는데, 당시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인 김원봉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런 인식이 해방 이후 출간된 ‘사상계’ 등에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제언할 것이 있다면. 이원규 “최근 정부나 언론이 유관순 등 몇몇 인물을 부각시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는 느낌이다. 과거 정부도 그랬지만 이번 정부도 독립운동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것 같다.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3·1혁명’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하는 것 등이 그렇다. 김원봉도 마찬가지다. 그가 중요한 건 맞지만 더욱 중요한 건 그가 활동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이다. 의열단 용사 가운데 이종암(1896~1930) 같은 분은 탁월한 능력을 보였음에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김주용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본 청년 10여명이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무장투쟁단체를 세웠다. 이들은 21살짜리 애송이(김원봉)를 리더로 세웠다. 4년 뒤인 1923년 상하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의열단이 1000여명 규모로 성장했다고 적혀 있다. 별다른 지원도 없이 시작한 의열단이 그렇게 빨리 성장한 것은 지금 역사학자의 눈으로 봐도 경이롭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축인 의열단에 대해 언론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아 아쉽다.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많은 조선인이 그곳에 있었고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줬지만 박정희(1917~1979)가 만주국 장교 출신이다보니 그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돼 왔다.” 정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에 불을 붙인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학계에서는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 1순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을 복권할 수 없다’, ‘김일성도 반일투쟁을 했다는데 그에게도 훈장을 줘야 하느냐’며 극단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 항일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을 평가하는 지금 우리는 분단의 결과물인 ‘이념’을 잣대로 들이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늘 배제돼 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김원봉, 항일투쟁 업적에도 월북해 논란 “공산당 활동을 하고 월북한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겠다고 한다. ‘뼛속까지 빨갱이’였던 이를 서훈하겠다는 이 정부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나.” 지난달 26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보인 반응이다. 피 처장은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인가’라는 정태옥 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 기준으로는 (서훈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북한과)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고 해서 (서훈 수여를) 검토하지 말라고 하는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과 6·25전쟁을 치렀지만 그런 부분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한국당은 피 처장의 발언을 문제삼아 해임결의안을 추진 중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의열단장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일제는 김원봉을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방 뒤 월북 행적 때문이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숙청될 때까지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했다. 사회주의자인 이동휘(1873~1935)와 한위건(1896~1937), 김두봉(1889~?)도 업적에 비해 저평가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분단 특수성 이유 사회주의자 대부분 저평가 한위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을 지냈다. 1920년 일본 유학 당시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연루돼 검거됐고 이듬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 시위 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5년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초기 학생 조직을 만드는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1907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됐고, 안창호(1878~1938)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운동 전면에 나섰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1913년 시베리아·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무관 양성에 앞장섰고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박한용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동휘는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며 “그의 활동에 비해 우리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적다보니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을 진행한 한글학자 김두봉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40년대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했고 북한 정권에서 최고인민회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1958년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중노동을 하다가 1960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김구나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사회주의계열 인물들이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분단 상황 때문에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 주의 택한 것은 독립운동 위한 한 방법” 사회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제에 맞섰지만 지금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과 김두봉은 현행법에선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를 소위 ‘붉은 국가’로 만들고자 치밀한 계획을 갖고 항일투쟁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조국 독립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동휘조차도 “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고백했다.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는 “일제 침략 시기에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제국주의 폭압에 맞서는 대안 이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에는 이런 사정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연안파는 6·25전쟁 뒤 김일성이 중심인 빨치산파에 의해 북한 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돼 남북한 양측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연안파는 중국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 세력을 뜻한다. 조선의용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 치열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조직이다. 일부는 임정과 손잡고 한국광복군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방 뒤 남쪽에선 좌파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쪽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사라졌다. 우리부터라도 ‘비운의 독립군’으로 불리는 이들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광복 이전 독립운동 했다면 유공자로 봐야” 역사학계에서는 1948년 이후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니라 1945년 8월 광복 당시 행위를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로 활동한 보훈혁신위원회가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을 했다면 독립유공자로 봐야 한다”는 권고도 같은 맥락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기준보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맞춰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1945년을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임정 바로 보기’로 새로운 100년 연다

    ①남북서 외면 김원봉·김두봉 재평가 ②사초부터 확보, 숱한 논란 종식해야 ③분당·송도 등 일제 용어 잔재 청산을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역사학계에서는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의 재평가, ‘임정 수립일’이 논란이 될 정도로 부실한 임정 사초 찾기, 여전히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 청산 등을 꼽았다. 그동안 건국절 논란을 비롯해 이념적 대결 갈등에서 벗어나 ‘임정 바로 보기’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민감한 사안이라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임정 관련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판결문을 보면 ‘김일성 장군의 활약에 감동받아 항일투쟁에 나섰다’는 구절이 나와요. 생각지도 않은 내용이어서 저희도 놀랐죠.” ‘판결문에 담긴 임정의 국내 활동’을 출간한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10일 이렇게 털어놨다. 당시 임정의 활동에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우파 위주로 진행된 독립운동사 연구의 범위를 민족 전체로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남과 북으로부터 버림받은 김원봉과 김두봉 등 ‘연안파’에 대한 재평가 주문이 많다. 연안파는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을 말한다. 독립운동연구 전문 이원규 작가는 “이들은 일제와 무력으로 맞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해방 뒤 남한에서는 ‘빨갱이’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숙청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1990년부터 임정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기념해 오다가 올해 4월 11일로 바꿨다. 최근 발굴된 증거를 볼 때 실질적으로 내각을 구성한 날짜가 11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임정 수립 기념일을 다시 정한다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과 각원을 선출한 9월 6일이나 이동휘 등 주요 각원이 취임한 11월 3일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임정 관련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임정 자료가 거의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부는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사라진 임정 자료부터 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이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르고 쓰는 용어를 정리해 임정 수립을 통한 독립의 참뜻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경기 성남시 분당은 조선총독부가 ‘장터’(盆店·분점)와 ‘당모루’(堂隅里·당우리) 지역을 억지로 합친 뒤 앞글자만 따 만들었다. 인천 송도 신도시도 러일 전쟁 때 침몰한 일본군함 마쓰시마(松島·송도)호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김정은, 삼지연군 6개월 만에 시찰… ‘중대 결심’ 임박했나

    김정은, 삼지연군 6개월 만에 시찰… ‘중대 결심’ 임박했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양강도 삼지연군 건설현장을 6개월여 만에 다시 방문했다. 김 위원장이 과거 중대 정치·외교 일정을 앞두고 백두산과 삼지연군을 찾았다는 점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의 대내외 노선을 결정·공표할 시점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조선중앙통신 등은 4일 “김정은 동지께서 삼지연군을 현지지도했다”며 “삼지연군 읍지구 건설현장을 돌아보면서 공사진행 정형과 실태를 요해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이번 삼지연군 방문은 올해 첫 경제 시찰이다. 김 위원장은 2013년 11월 백두산 방문 이후 고모부인 장성택 숙청에 나섰고, 2016년 9월 5차 핵실험 두 달 후 백두산을 방문한 뒤 이듬해 신년사에서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지난해에는 1차 북미 정상회담 한 달 후인 7월과 평양 남북 정상회담 한 달 전후인 8월과 10월에 삼지연군을 시찰했다. 이에 김 위원장이 11일 제14기 최고인민회의 1차 전체회의를 앞두고 핵·미사일 실험 중단(모라토리엄) 유지와 북미 비핵화 협상 지속 여부 등에 대해 모종의 결심을 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이 신년사에서 강조해온 부분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편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임박했다는 관측과 관련해 북한은 아직 러시아의 김 위원장 초청에 회신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보좌관은 3일 타스통신 등과의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초청장을 전달했다. 김 위원장의 방러 일정을 조율할 것”이라면서 “북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구체적 답은 없다”고 밝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좌익 경력 298명 포함 여성·의병 독립운동가 적극 발굴

    국가보훈처가 좌익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포상 보류자’를 일부 포함해 여성·의병 독립운동가를 적극 재심사해 발굴하겠다고 밝히면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가들이 포함될지 관심이 쏠린다. 보훈처가 13일 해외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면보고한 ‘2019년 업무보고’에 따르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계기로 광복 후 좌익활동 경력자 298명을 포함해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실시한다. 우선 여성 및 의병 독립운동가 중 미포상자 1892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적심사를 실시한다. 전체 2만 4737명인 포상 보류자에 대해서는 수형 기준 미달자 3133명과 광복 후 좌익활동 경력자 298명 등을 재심사하기로 했다. 보훈처는 지난해 광복절에 수형최저기준 3개월을 완화하고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로 논란이 된 김원봉 선생은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올해 재심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의 포상 기준에는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독립운동가 포상 기준은 국무회의나 국회를 거치지 않는 내부지침이다. 따라서 향후 심사기준이 개정되면 김원봉 선생이 재심사 대상이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김원봉 선생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히 일제 수탈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 암살 등으로 투쟁을 했다. 1930년대부터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며 중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고,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키도 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지만 1948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다. 이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1958년 숙청됐다. 이외 보훈처는 기존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전수조사해 친일 행위 등이 확인되면 서훈을 취소할 방침이다. 특히, 심사가 미흡했던 1976년 이전 서훈자부터 단계적으로 검증한다. 우선 검증 대상자는 587명으로 오는 7월에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약산 김원봉 조카 “수많은 친일파·민족반역자에 서훈”

    약산 김원봉 조카 “수많은 친일파·민족반역자에 서훈”

    한국 찾은 차남 “기념사업회 11월 발족” 재평가 필요한 독립운동가 1순위 꼽혀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항일 무장독립투쟁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기념사업회가 사후 61년 만인 오는 11월쯤 발족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했다.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숙청돼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불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렸다. 서울신문이 역사학계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가장 먼저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로 김원봉이 꼽혔다.<2019년 2월 25일자 1면> 지난 24일 약산의 11남매 가운데 막내인 김학봉 여사가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미국에 살던 차남 김태영(62)씨가 25일 귀국해 경남 밀양의 모친 빈소를 지켰다. 김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는 11월쯤 서울에서 (외삼촌인) 약산 기념사업회를 발족할 것”이라며 “이만열·한홍구 교수 등과 의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 속에서 연좌제 고통을 비롯해 모진 가족사를 온몸으로 겪은 김씨는 2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맨손으로 사업을 일궈 백인 주류사회의 신뢰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훈장을 많이 받았다. 수많은 민족반역자한테도 서훈했다”고 말했다. 이어 “훈장은 국민을 위해 뭘 했는지, 진실이 뭔지를 보고 주는 것”이라며 “약산이 서훈 된다면 친일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산이 월북한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에 남겨진 가족 가운데 약산의 형제 4명, 사촌 5명이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총살당했다. 김 여사의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별세했다. 김 여사의 남편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본인도 경찰에 연행돼 심문을 받았다. 김태영씨 형제들은 고아원에 맡겨져 어렵게 학교에 다녔고 연좌제가 풀린 뒤에야 겨우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씨줄날줄] 약산 김원봉/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약산 김원봉/이두걸 논설위원

    조승우와 이병헌. 한국 영화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배우들이다. 이들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모두 동일 실존 인물을 연기했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바로 그다. 조승우는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내가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로 짧지만 굵은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병헌은 이듬해 ‘밀정’에서 강인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약산을 보여 준다. ‘암살’은 최동훈, ‘밀정’은 김지운 등 한국 영화계의 거장들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문화계가 바라보는 약산은 이미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거인이다. 오는 5월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TV 드라마도 방영된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義烈團)과 따로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의열’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1919년 11월 결성한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군부, 친일파 등을 주적으로 삼고 폭력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의 행동강령은 1922년 단재(丹齋)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혁명선언’에 집약돼 있다. 단재는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고,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고 설파한다. 종로·부산·밀양경찰서 및 총독부 폭파 사건, 일본 도쿄 황궁 니주바시교 폭파 사건 등이 의열단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약산은 이후 조선의용대 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다. 그를 빼놓고는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사가 설명되지 않는다. 일제는 백범 김구 선생보다 두 배 많은 100만원의 현상금을 그의 목에 걸 정도였다. 해방 뒤에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다가 1948년 북으로 넘어갔다. 여운형과 김구가 암살되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된 이후였다. 친일파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은 게 월북의 계기라는 분석도 있다. 북에서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지만 1958년 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남과 북 모두 김원봉이라는 이름을 지우려 한 까닭이다. 2015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페이스북에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고 남겼다. 국가 중심 보훈혁신위원회도 최근 김원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권고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현행 서훈 기준이 바뀌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독립운동에 대한 최종적 평가 기준은 1945년 8월 15일 시점”이라는 혁신위의 권고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일생을 민족해방에 바친 신산(辛酸)했던 그의 삶을, 해방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부인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 “김정은 한성렬 및 대미 외교 반대파 등 수십명 숙청”

    “김정은 한성렬 및 대미 외교 반대파 등 수십명 숙청”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신이 추구하는 미국 및 남한과의 대화를 반대한 정적들을 추방하거나 투옥, 또는 처형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9일(현지시간) 전했다. WSJ은 탈북민 단체 북한전략센터의 보고서를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김 위원장이 북한의 부유한 엘리트층 50∼70명을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전했다. 북한전략센터는 전·현직 북한 고위 관리 20명을 인터뷰해 이번 숙청 작업이 불법으로 부를 쌓은 고위직 간부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보고서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시작된 숙청 작업은 북한 기득권층이 모은 외화 몰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현재까지 수백만 달러를 거둬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반부패 슬로건을 내건 이 작업은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 하에서 반대파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김정은 정권의 재정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대북 제재로 수출이나 국제 금융망 접근이 막히면서 전통적인 외화 획득이 어렵게 되자 숙청 후 자산 몰수로 필요한 재정을 보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 숙청에는 김 위원장의 선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손을 대지 못했던 북한 호위사령부가 포함된 것이 가장 눈길을 끈다. 호위사령부 고위 간부들이 지난해 말 수만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운용한 혐의로 숙청됐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호위사령부 비리가 적발된 뒤 올해 신년사에서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북한전략센터는 2011년 김 위원장 집권 후 모두 400여명이 숙청됐다고 밝혔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러한 숙청 작업이 북한의 정치적 위기를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라면서 “김 위원장의 장악력이 여전히 단단하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다만 대북 제재의 여파로 가까운 미래에 김 위원장이 외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별도로 김 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수의 최고위 외교관들을 숙청하거나 교체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참모들로 대미 협상팀을 새로 꾸렸다는 분석도 나왔다. 로이터통신은 20일 이와 관련해 한성렬 전 외무성 미국 담당 부상이 미국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하고 돈을 챙긴 혐의로 숙청됐다고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워싱턴 싱크탱크 스팀슨센터 북한 전문가 마이크 매든은 북한 소식통으로부터 “한성렬은 간첩 혐의를 받고 있으며 지난해 7월 이후 사라진 상태”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도 한 전 부상이 노동교화소에 수용됐거나 아니면 이미 처형을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한 전 부상은 2013년 귀국 전까지 여러 해 동안 이른바 ‘뉴욕 채널’을 담당한 대표적인 대미 외교통으로 지난해 2월 북한 매체에 등장한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이밖에 태 전 공사의 망명,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의 잠적 등 사고가 잇따르면서 김 위원장이 선친 때부터 활약한 베테랑 외교관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있다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대신 4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를 대미특별대표로 임명하는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신진급 외교관을 협상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국 정부 관리는 로이터에 “북한의 많은 외교관이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경험 탓에 이념적 충성을 의심받고 있다”며 “김혁철도 직업 외교관이기는 하지만 충성 테스트를 통과해 북미 협상의 포인트맨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정은, 軍 없이 김정일 7주기 참배… 비핵화 협상 의식

    김정은, 軍 없이 김정일 7주기 참배… 비핵화 협상 의식

    당 간부만 대동…“정상국가 이미지 과시” 참배 동행 부위원장 11명 명단도 비공개 사진 속 박태성·최룡해 등 일부만 포착 “인사·숙청 등 인적 개편 단행” 분석도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7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노동신문 등이 17일 보도했다. 예년과 달리 이날 김 위원장은 군부를 대동하지 않았고 당 간부만 대동해 국제사회에 정상국가 이미지 과시와 함께 비핵화 협상을 의식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아울러 이날 참배에 동행한 부위원장 11명의 명단이 발표되지 않아 인사나 숙청 등 ‘인적 개편’을 단행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노동신문은 “김정은 동지께서는 민족 최대의 추모의 날에 즈음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았다”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들과 부장들, 부서 책임일군들을 비롯한 당중앙위원회 간부들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금수산태양궁전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 위원장의 참배 사진에도 당 간부만 등장할 뿐 예년과 달리 군복을 입은 군 간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김정일 6주기 때는 혼자 참배했으며 정주년인 2016년 5주기 때는 당과 정부·군 간부, 2015년 4주기 때는 군 간부들만 대동했다. 이에 김 위원장이 내년에도 올해와 마찬가지로 당을 중심으로 경제 건설 총력 노선을 유지하며 북·미 비핵화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참배에 당 간부들만 참가했다는 것은 당 우위의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정상국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당이 중심이 돼서 선대 유훈인 경제 건설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이날 노동신문 사설에서도 김정일의 대표 노선인 선군정치나 핵·경제 병진노선으로의 회귀 등 강경한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정일의 사상 노선과 혁명 원칙을 고수하고 유훈을 관철하자는 내용은 매년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라며 “노선 전환 등 추모 이상의 새로운 메시지가 담겨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 참배 보도에는 김 위원장의 핵심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당 중앙위 부위원장의 명단이 등장하지 않았다. 노동신문에 게재된 사진에서 부위원장 11명 중 박태성·오수용·김평해·최룡해·리수용 부위원장 등만 확인된다. 지난 2월 16일 김 위원장이 김정일 생일을 맞아 참배했을 때는 노동신문 등이 참배에 참가한 부위원장 11명의 이름을 모두 소개했다. 홍 실장은 “인사가 진행 중이라 부위원장 이름이 열거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저돌적 추진력과 성취욕… 김정은 ‘정상국가’ 위상 과시 노린다

    저돌적 추진력과 성취욕… 김정은 ‘정상국가’ 위상 과시 노린다

    30대에 절대권력…통치·체제 자신감 10대 유학파로 ‘은둔형’ 김정일과 달라 美엔 비핵화 신뢰감… 제재 완화 노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은 물론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실행하지 못한 서울 방문을 과감히 결심한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북·미 비핵화 협상의 얽힌 매듭을 풀어야 할 필요성 등 외부적 요인 못지않게 김 위원장의 성장 과정과 개인적 성향, 통치 스타일 등 내부적(심리적)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할 것으로 분석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9일 “김정은의 최고를 지향하는 태도, 과감하고 저돌적인 추진방식,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달성하고야 마는 성취욕 등이 아버지 김정일과는 다른 측면”이라며 “이런 성향이 과감한 답방 결심의 동력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이 답방 합의 때 보인 태도부터가 아버지와 달랐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답방 제안에 흔쾌히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임 전 장관이 “날짜를 확정하지 않고 편리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비로소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김 위원장은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뜻 ‘연내 답방’을 약속했다. 김 위원장의 이런 성향은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다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이 부재한 절대권력의 안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정일은 50대 들어서야 김일성이 사망해 의욕적으로 ‘김정일 시대’를 펼칠 시간이 물리적으로 적었던 반면,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초고속으로 ‘김정은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고모부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 등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거물들을 제거하고, 잇단 숙청으로 견제세력을 제압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답방을 배포 있게 결단할 동력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일은 ‘은둔형 지도자’였지만, 김 위원장은 10대 때 스위스 유학을 통해 서방 세계를 체험한 경험이 있는 점도 큰 차이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와 달리 국제사회와의 외교를 통해 정상국가 지도자가 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가령 김 위원장은 15살 때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에게 “외국의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보니 어디를 가나 식품들로 넘쳐나서 놀랐다. 우리나라 상점은 어떨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하고 평양 순안공항을 국제공항으로 새 단장한 것도 정상국가를 지향하려는 김 위원장의 욕심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김 위원장이 리설주 여사를 대동해 부부 정상외교를 하고, 역사상 최초로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한 것도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를 추구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번 답방 또한 정상국가로서의 위상을 과시할 기회로 삼을 것이란 관측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김 위원장은 연내 답방 약속을 실제로 지켜 국제사회에 ‘약속을 지키는 인물’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이를 통해 자신의 비핵화 약속에 대한 미국 내 신뢰를 높이는 것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신뢰도가 높아지면 북·미 관계 개선과 제재 해제 여론을 조성하는 데도 유리하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2030 세대] 두 왕자 이야기/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3학년

    [2030 세대] 두 왕자 이야기/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3학년

    국가를 막 다스리기 시작한 젊은 지도자가 있다. 국가는 극도로 폐쇄적이고 정권은 억압적이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모두 오늘 내일하는 노인들이었다. 자신이 헤쳐나가야 할 수십년 미래를 생각하는 젊은 지도자는 이 상태로는 국가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닫고 개혁에 착수한다. 선대가 보여주지 못한 파격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존 노인 지도부와의 갈등은 심해지고, 결국 피의 숙청이 이어져 새로운 젊은 엘리트들이 대거 진입하게 된다. 북한의 김정은 이야기다.공교롭게도 똑같은 사람이 아시아 반대편에 한 명 더 있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이다. 그가 다스리는 사우디는 철저한 이슬람 보수주의인 와하비즘으로 국민을 옥죄어온 절대왕정 국가다. 물론 북한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사우디는 세계 제일의 석유 매장량을 바탕으로 물질적 차원에서 국민의 불만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부와 뇌물에 기대 유지하는 현시대 북한 엘리트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젊은 왕세자 빈살만은 김정은과 비슷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젊은 세대는 더이상 와하비즘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다. 라이벌 이란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었고, 셰일 오일로 사우디의 석유 시장 지배력도 큰 타격을 받았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이벌 왕자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고 보수파의 불만을 억누르며 과감한 개혁 개방 행보를 보였다. 가장 상징적인 제스처는 여성에게 운전의 제한을 해제한 것이었다. 문제는 정권의 생존을 위해 도입한 자유화가 막대한 불안정성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사회 구성원들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막혀 있던 정보가 유통되며 불만이 쉽게 만들어져 공유된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이, 자유화, 폐쇄, 줄타기, 붕괴의 갈림길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한다. 최근 있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도 이 맥락에서 보면 더 잘 이해된다. 왜 사우디는 터키에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나? 사람이든 국가든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는 내면의 불안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살만 왕세자는 스스로의 권력이 통제 불가능한 자유화, 혹은 보수파의 반동에 휩쓸리지 않을까 늘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이 줄타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었지만, 산전수전 겪은 노인과 33세의 젊은 왕자가 같을 수는 없다. 사우디의 사례는 김정은을 바라볼 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북·미 협상이 잘 끝나서 북한이 개혁 개방에 안착하더라도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이야기다. 개혁 개방을 진행하면 미국의 위협에서 해방될 수는 있지만, 대신 인민의 위협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때 마주칠 ‘북한의 카슈끄지’ 중 하나는, 모든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블랙스완이 될 수도 있다.
  • ‘노쇼 논란’ 여야 3당 대표 김영남 만나…김정은 직접 지시

    ‘노쇼 논란’ 여야 3당 대표 김영남 만나…김정은 직접 지시

    ‘노쇼’(No Show) 논란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탄핵 요구까지 나온 우리 측 정당 대표와 북한 고위급 면담이 19일 우여곡절 끝에 성사됐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정동영 민주평화당·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김영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났다. 한 차례 불발 후 이뤄진 면담에서 이 대표는 “정권을 빼앗겨 남북관계가 단절됐다”며 “저희가 다시 집권했기 때문에 오늘 같은 좋은 기회가 다시 왔다”고 강조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대표직에 올라섰다는 희소식이 전파하자 다시금 통일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됐다”고 화답했다. 전날 남측 정당 대표는 북측 최고인민회의 관계자와의 면담에 사전통보 없이 불참했다. 갑작스러운 면담 불발에 3당 대표가 김 위원장이 아닌 안동춘 부의장이 나선 데 대해 격이 맞지 않아 불만을 나타냈다는 해석이 나왔다.이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평화의 걸림돌이 된, 여야 3당 대표를 탄핵하도록 도와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와 하루 만에 4만 5000여명(오후 4시 기준)의 추천을 받았다. 평양 동행 초청을 거부한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도 비판에 가세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애초에 대통령 수행에 나선다는 게 격에 맞지 않은 것임에도 수행을 자처한 것 아니냐”며 “급과 격을 따지려면 제대로 따져 주길 바란다”고 비꼬았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한발 더 나아가 “들러리를 서러 간다는 걸 알고 있다면 화끈하게 들러리를 서 줘야(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마 측근이 사고 치는 것은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며 “북한에서 실제로 그랬다면 숙청된다”고 했다.논란이 일자 이 대표는 “당 대표만 따로 만나려고 했는데 그게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돼 불발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대표는 “전날 연회장에서 이렇게 됐는데 오늘 면담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당연히 하셔야 된다’고 즉석에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지시를 하셨다”고도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경제인 평양 동행을 누가 추진했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지속됐다. 북측 관계자가 “우리가 오시라고 했다”고 하자 청와대는 “경제인 방북은 전적으로 우리가 결정한 일”이라고 거듭 부인했다. 이는 국제사회 대북제재 국면에서 자칫 남북 경협 문제를 둘러싼 오해가 발생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평양공동취재단·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여운형 계열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워 자본주의적 퇴폐풍조 모더니즘 작품 함께 월남한 가족들 두고 홀로 北으로김기림은 해방 공간에 북한으로 간 것으로 돼 있다. ‘간 것으로 돼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190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 이후 스스로 북행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치돼 북으로 끌려갔다는 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납북설이 유력하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건으로 좌익으로 분류되면서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해금된 1988년 이전까지는 자진 월북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기림 연구자인 서울대 국문과 김유중 교수는 “최근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게 다수 의견”이라는 학계 분위기를 전한다. 좌익단체에 몸담은 것은 사실이나 순수 좌익이라기보다는 여운형 계열의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웠던 점, 가족과 더불어 월남했고 북으로 갈 때도 가족과 동행하지 않은 점, 이미 북한에서 지주 계급이라는 이유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는 점, 북에서의 행적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른 월북 문인들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대우받은 흔적조차 없는 점, 결정적으로 임화나 김남천 등 좌익 문인들이 남로당 불법화 이후 북행길에 올랐을 때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도 월북하지 않았던 점 등이 그 이유라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김 교수는 신문 보도, 탈북자 정보, 김기림을 아는 지인의 얘기 등을 종합할 때 그의 북한 행적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가 1958년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간첩죄로 체포된 북한군 정치부사단장 출신의 증언이다. 증언에 따르면 김기림, 정지용은 북한에 가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집필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본다”고 했다.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했으며, 자본주의적 퇴폐풍조로 분류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 창작활동을 한 그를 북한 당국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가 김기림이 북한에 가자마자 교도소 수감 생활을 했는데 친척, 지인, 제자들이 탄원서를 내 풀려났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한 차례 숙청을 당한 몸이라 좋은 보직을 얻지 못하고 평양에 있는 극장의 말단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남편과 별거 중인 극장 아나운서와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숙해도 못마땅할 놈이 부화뇌동해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당국의 눈총을 받고 재수감되었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까지 붙어 있다. 김기림은 7살 때인 1915년 임명 보통학교에 입학, 서울로 와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1930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와 시론들을 집중 발표했다. 문인과 기자로서 한창 명성을 얻던 1936년, 신문사를 휴직한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홀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졸업 이후 조선일보에 복직한 그는 학예부로 소속을 옮겨 보다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개시를 전후하여 신문사가 폐간되고, 총독부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그는 고향인 성진으로 가 한동안 인근의 경성(鏡城)고보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간간이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해방과 더불어 문단에 복귀한 그는 모더니즘의 실질적인 청산을 선언하며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한다.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 조선대 등에서 강의했다. 1930년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신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진출하였고, 시집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와 수필집 ‘바다와 육체’(1948), 시론집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49) 등을 냈다. 상당 기간에 한국에서는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의 시집의 소지조차 금기시됐으나 1988년 해금 조치되면서 출간이 잇따르고 연구도 활발하게 됐다.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나는 북파 공작원, 암호명은 ‘흑금성’…남북합작 애니콜 CF광고 성사시켜

    “나는 북파 공작원, 암호명은 ‘흑금성’…남북합작 애니콜 CF광고 성사시켜

    북파 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공작’의 실제모델 박채서(64)씨를 만났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북한 핵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채 중국과 북한을 무대로 활동한 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이다. 1997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으며 이효리, 조명애가 나온 최초의 남북합작 광고도 성사시켰다.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과 영화 등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27일 본사 9층 대회의실에서 했다.→영화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아내와 큰딸이 교도소로 면회 와서 내 얘기를 CJ에서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고 하더라. 처음에 거부했다. 단순 용기만 갖고 할 수 없는 일 아니냐. 그런데 이미경 부회장이 원치 않던 외유를 나가야 할 정도로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도 영화 제작을 하겠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수감 중 작성한 노트기록이 토대가 됐다. →리 참사(영화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의 실재 인물)는 어떤 사람인가. -리철은 북한의 몇 안 되는 자본주의 전공자다. 김일성대를 졸업했으며 박사논문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다. 1954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라 쉽게 친구가 됐다. 리철은 아들이 둘이고, 나는 딸만 둘이다. ‘사돈 맺자’는 농담도 했다. →2005년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나오는 남북합작 광고인 애니콜 사업 전에 추진하던 ‘남남북녀 결혼작전’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지금 못지않게 힘들었다. 대량 탈북자가 나오고, 이에 북한이 반발해 미사일을 쏘는 등 대화가 안 됐다. 햇볕정책을 계승했는데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자문요청이 오더라. 북측은 미사일 쏘다가 평화 모드로 가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며 이벤트를 만들자고 하더라.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와 한국에서 인기 있던 조명애를 내 지인 중 한 분이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한 게 생각나 추진하게 됐다. 베이징에서 양가 상견례도 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방해했다. 신랑 어머니를 만나 ‘조명애는 기쁨조인데 결혼이 웬 말이냐’고 한 것이었다. 이벤트 무산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3일 뒤 고영구 원장이 기관보고를 했던 것 같다. 비슷하게 나를 비난하는 보고에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이 사건으로 원장은 강력경고 조치를 받고, 나머지 주요 간부들은 인사조치됐다. →결혼 무산으로 애니콜 광고는 힘들었겠다. -공작 실패에 대비해 늘 예비 계획을 세운다. 남남북녀 결혼작전이 무산되면서 내가 하면 또 국정원이 방해하니 청와대가 나서야 한다고 해 애니콜 광고는 성사됐다. 삼성을 소개받았다. 다 돼 있더라. 감독이 차은택씨였다. 모델은 이효리고. 최고기업, 최고상품, 최고모델 콘셉트였다. 나머진 북한 몫이었다. 그런데 제동이 걸리더라. (광고 촬영지인) 상해로 갔는데 조명애가 도저히 촬영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 결혼이 미뤄진 충격으로 밥도 안 먹고 말이 없더라. 마음병을 앓은 것이다. 조명애는 ‘평양의 신데렐라’였다. 갑자기 남쪽으로 시집가야 하는 상황에 가족회의를 열고 “나 하나 시집가서 우리 가족이 잘산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더라. 그런데 남자를 만나 보니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딱딱한 북한 남자와 달리 함께 놀러 갈 때 손도 잡아주는 등 싹싹한 매너남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은 핸드백, 신발, 바바리 코트 등 온갖 명품을 다 사줬다. 가족 용돈도 따로 준비하고 예술단 단장, 부단장 선물도 따로 줬다. 조명애가 예비 시아버지를 만난 다음날 무용단에 출근하면 그날 오전 업무는 마비된다고 하더라. 서로 옷 입어 보느라고 말이다. 예술단 부탁으로 20인승 출퇴근 버스도 사줬다. 2년간 쓸 타이어와 유류비도 지원했다. 촬영이 힘들 것 같아 시아버지가 될 뻔한 사람을 급히 오라고 했다. 이 양반이 오자,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던 조명애가 벌떡 일어나 달려가 우는데,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우리도 다 울었다. 촬영은 일주일 동안 약 먹이고, 알로에 바르고, 얼굴 뾰루지 등은 화장술로 커버해서 끝냈다.→조명애는 그 이후 결혼했나. -소설 잘 쓰는 언론에서 북한군 장교와 결혼했다는데 거짓말이다. 완전히 폐인 됐다. 원래는 광고 찍고 나서 식당 같은 것을 마련해 중국에서 살게 할 계획이었다. 제가 2010년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들은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가. -1997년 6월에 만났다. 유순한 편이다. 예능을 좋아해서인지 독하지 못하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정할 때, 자기 닮아 순한 김정철 대신 독한 김정은을 시켰다. →한·미 합동부대 있을 때 미군과 업무 협조는 잘됐나. -처음 3개월간은 많이 싸웠다. 양주 선물 등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한·미공조의정서에 따라 원칙대로 일했다. 오산공군기지는 통제가 안 된다. 전용기가 아무거나 싣고 온다. 나 보고 골프용품 거저 줄 테니까 하라고 하더라. 당시 골프채 등은 비쌌다. 안 했다. 결국 미군이 나를 인정해 미 대사관 등 우리나라의 어떤 미국시설도 24시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통행카드를 주더라. 이게 네 장뿐인데 대통령, 국방부 장관, 안기부장과 내가 받았다. 미국이나 북한을 나쁘게 버릇 들인 건 우리다. 우리나라에 ‘까만 눈 미국인’이 많더라. 미국에 가지도 않고 시민권은 갖고 있더라. 거래하기 위해서다. 각계각층에 다 있더라. 대학원 석사과정 때 일인데 조선 주둔 일본대위가 쓴 일본어로 된 비망록을 봤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회유작전에 바로 서약서 쓰고 넘어와 실망하게 되는 반면,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굽히지 않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존경한다고 적고 있더라.→북한의 정보수집력은 어떤가. -신상옥·최은희가 1978년에 납북됐다가 8년뒤 탈북했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물었다. 베를린영화제 참석 때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북 정보력에 겁이 나 애기 못 했다고 했다. 하루 전 남한 대통령이 결재한 것이라며 서류를 보여 주는데 실제로 그 날짜에 결재한 서류였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를 믿어야 할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는 거다. 사례를 더 들자면 1999년 평안북도 금창리에 숨겨진 지하 핵시설이 있다고 보도되면서 난리 난 적이 있다. 우리 공작원이 조선족을 시켜 흙을 파니, 우라늄이 검출됐다는 것인데 미국도 이를 믿은 것이다. 미국이 현장사찰을 했으나 핵 관련 움직임은 찾지 못했다. 빈 동굴뿐이었다. 왜 그랬냐. 북한 역공작에 당한 거다. 북한에서 돈 주고 우라늄을 넣어준 거다. →1994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사업에 미국의 공작이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북 핵무기 개발 자료를 1992년에 내가 입수했다. 미국 장비 등의 지원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이라 미국에 보고했다. 난 당연히 그 사항이 김영삼(YS) 대통령에게도 보고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 됐더라. 당시 YS는 북한에 쌀을 주려고 난리 칠 때였다. 만약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았다면 막았다고 본다. 이어 1994년에 북핵 위기가 벌어진다. 북한의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데 재원의 70%인 32억여 달러를 우리가 부담한다. 여기엔 미 중앙정보국의 공작이 있었다. 평양을 다녀왔다는 한 재미목사가 YS에게 긴급 보고를 한다. 북이 서해 5도를 잠수함으로 봉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YS는 재미목사를 잘 만났다. 대통령이 놀라 해군참모총장을 긴급호출하고 제주도가 제일 취약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어 북측의 회담 요구를 받아들여 경수로 건설사업비를 떠안는다. 미국이 YS가 재미목사를 잘 만나주고 위기의식, 안보 개념이 없다는 걸 알고 공작한 거다. 서해 5도는 수심이 낮다. 잠수함 봉쇄가 말이 안 된다. 첩보 가치도 없었다. 보안이 최고 생명인데 어떻게 재미목사가 기습공격을 아느냐. →이명박 정부 시절, 북에서 대남파에 대한 공개 처형이 많았는데 우리 측에서 움직임이 있었나. -대남파는 빨치산세력에 맞설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30~40명씩 공개 처형 등 다 숙청됐다. 숙청 자료를 우리 정보기관에서 줬다. 과거 10년 동안 남북교류하면서 뒷돈 준 자료를 다 준 거다. 한 예로 본명이 권민인 권영욱이라는 김일성대 나오고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항상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온 유연한 사고의 실용주의자, 그 친구도 날짜별로 돈 받은 게 나와 숙청됐다. 사는 아파트 바닥을 파 보니 비닐에 쌓인 8만 달러 꾸러미들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대남파들이 결딴나면서 북한 내 강경파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난 절대 국정원이 자의적으로 그런 자료를 주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무대책·무대응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을 통한 정책이었다.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전에 북한에서 정책실패는 한 번도 없었다. 화폐개혁은 가진 자들의 돈을 뺏으려고 한 거다. 장성택도 모르게 말이다. 20분의1로 화폐가치를 낮췄다가 한 달 만에 원상복귀했다. 기득권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다. 개혁 전에는 베이징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김정일이가~”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반발했다. 그러데 화폐개혁이 되자 “개XX” 등 욕이란 욕은 다하더라. 뭘 의미하느냐. 화폐개혁 실패라지만, 기득권이 흔들린 거다. 볼셰비키 혁명, 중국 공산당 혁명 주도세력은 노동자나 농민이 아닌 엘리트다. 모택동은 호남성 제일갑부였다. 형식만 노동자, 농민이지 가진 사람, 엘리트 그룹이 주도했다. 북한의 엘리트 변화를 우리가 뒷받침해야 한다. →3차 남북 정상회담 전망은. -미국은 북이 비핵화하면 제재를 풀겠다는 것인데 북은 점진적으로 비핵화하자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못 받겠다고 한다. 일방적 행동 강요는 강압이다. 북 강경파들이 절대 받지 않는다. 김정은이 맘대로 못한다.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정식 후계자 교육을 받고 17년간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 당·정·군의 인사를 다 했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후 주석궁에 바로 못 들어갔다. 왜냐하면 호위총사령부는 자기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후계자 내정 2~3년 만에 아버지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권력을 승계해 지지기반이 약하다. 빨치산 세력은 손 못 대고 군부, 문화계 등 분야별로 중간층 중심으로 100인 그룹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그룹이 200인으로 늘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 눈에 벗어나면 김정은은 죽는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을 주도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협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는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남재희(84)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정치평론가로 손꼽힌다. 서울신문 주필 등 언론인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과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관 재임 당시에도 노동계의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면서 ‘비판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웅숭 깊은 진보적 색채의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에서 만난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북핵 등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에 대해 막힘 없이 고견을 풀어냈다. -요즘 북·미 회담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 하는 광대를 눈 앞에 둔 듯 하다. 연일 냉·온탕을 오가고 있는데 어떻게 될까. =미국이나 북한이나 최고도의 전략 전술을 발휘하는 거다. 미국은 회담 과정에서 두 개의 목표가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핵의 제거다.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직후 일본 국제정치학자가 ‘북한 문제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할 시도는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핵 장착 미사일의 제거이고, 그 다음이 북핵일 것’이라고 분석하던데 맞는 이야기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ICBM 해결은 끝난 것 같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활용할 카드가 생긴 셈이다. ‘내 업적은 ICBM을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계속 북핵 협상에 낙관적인 이유다.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유일한 밑천이다. 마지막 카드를 내놓는 건데 최고가로 흥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불가침협정, 수교, 원조 등 여러가지를 다 해결해야 한다. 협상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1년 간 전쟁이 벌어진 뒤 나머지 2년 간은 협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공산권 협상은 전쟁과 협상이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이뤄진다. 공격하면서도 대화하고 대화하면서도 공격을 가하는 ‘타타담담(打打談談) 담담타타(談談打打)’가 그것이다. 나라도 마지막 카드는 쉽게 버리지 않을 거다. -판이 아예 깨질 가능성은 없나. =트럼프가 ICBM을 이용해 중간선거를 막더라도 여러 난제들이 있다. 북핵 말고도 이란·시리아 등 중동 문제도 복잡하다. 동북아 전체로 봐서도 러시아와 중국 등과 해결할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러니 북한 문제가 추가적으로 악화되는 걸 원치 않는다. 쾌도난마 식으로 북한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없다. 북한도 판을 뒤엎을 처지가 못 된다. 국제 사회의 공론도 무시 못한다. 북한을 괴멸시키는 대신 북한의 생존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뀐 상태다. 그러니 결국 북미 긴장이 풀리는 방향으로 갈 거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우호적이라는 점도 북에게는 큰 힘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북한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쿠바의 경우 결국 카스트로 형제들이 다 물러나고 다른 이들이 집권하고 있다. 쿠바 모델이 북에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주한미군 주둔 인정 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도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이야기한 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심증을 가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미리 인정하지는 않을 거다. 주둔의 불가피성은 이해하지만 바겐 포인트를 스스로 버릴 이유가 없지 않냐. 협상할 때는 미군 철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국제정치의 큰 흐름으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중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디스 맨’이라고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는 ‘이 자’에 해당한다.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해 ‘크레이지(Crazy)’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 식으로는 ‘괴짜’ 정도에 해당한다. 노 전 대통령이 미국 입장에서는 까다롭고 불쾌했다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강경화 외무장관 등을 계속 특사로 보냈다. 그 덕분에 아직 미국과의 관계는 부드러운 것 같다. 다만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국익이라는 미국 정부의 기본 라인은 건드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6월 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100호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태평양아시아학과 교수의 진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맥코맥 교수에 따르면 2000년대 말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외교를 시도했다. 그때 나온 말이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이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제국주의 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인이다. 방한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까지 꿇은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 정권의 단명은 미국 외교라인과의 마찰이 한 요인이 됐다는 게 국제정치학계의 정설이다. 일본보다 외교력이나 경제력이 약한 한국은 더 말할 게 없다. 미국을 벗어난 자주 외교는 쉽지 않다.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다. 사대에 대해서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대는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조선은 사대 정책을 펴왔지만 그걸 욕하기는 어렵다.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외교를 이끈 변영태 외교부장관이 퇴임 뒤 사석에서 “중국 주변국 중 화교가 자리를 못 잡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리 조상들의 사대외교가 능수능란하고 현명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설명하더라. 노예근성을 갖자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미 관계에서도 자존심만 내세울 건 아니다. 현실감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였다가 전향했던 박진목씨가 과거에 언론인들과 친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평양 밀사로 가서 이승엽 당시 국가검열상과 협상을 벌였던 인물이다. 박씨의 지론은 “과거 남로당이 생각을 잘못 했다. 그 막강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물리친 미군을 상대로 남로당 몇몇이 ‘물러나라’고 투쟁했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중국이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정세를 일컬어 ‘빙하를 움직이는 일’(Moving Ice Glacier)라고 표현한다. 강대국 입장에서 빙하는 한반도다. 빙하가 움직이려면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린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출범 초에 혁명적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니 혁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는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는 혁명적 상황을 비혁명적인 해법으로 일관했다. 군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방치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최소한 반 정도는 혁명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 조류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반 쯤은 혁명적인 색깔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기무사 해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쿠데타의 원조인 기무사를 이번 기회에 해체해 개편해야 한다. 최근 경제가 안 좋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최저임금 상승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인 경기 하락이라는 해외 요인이 더 크다. ‘삼성 투자 구걸’ 논란도 일종의 소아병적 반응이다. 대범하게 바라봐야 한다. -지방선거 압승 이후 여당의 탈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보수가 강하다. 이는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는 북한에서의 상층 인텔리들이 월남을 하면서 남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개신교만 해도 평안도 출신의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가 주역이 되고, 함경도 기반의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는 소수가 됐다. 예장을 대표한 한경직 목사도 보수적인 색채가 매우 강했다. 미국의 영향력도 엄청났다. 미국이 길러낸 군, 학자, 언론 등 분야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 문화가 압도적이다 보니 보수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 진보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단 궤멸됐다가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사형당하면서 더 위축됐다. 4·19 혁명 이후 잠시 머리를 들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또 다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정도가 진보의 명맥을 이은 것이다. 정치 지형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온 것이다. 진보 정부라도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닌 약한 진보다. 김대중 정부는 아주 약한,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조금 약한 진보 정부다. 이에 반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강한 보수였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박근혜 정부가 완전히 망치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막말정치를 일삼으면서 보수가 힘을 못 쓰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한국당은 연옥을 거쳐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엄청난 자정 노력 숙청, 반성 등 재생을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했지만 연옥을 안 거치니 안 되는 거다.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점잖게 나가고 있지만 위기에 부딪혔을 때 어떤 행태를 보일 지 지켜봐야 한다. -그렇기에 평소 협치를 강조한 게 아닌가. 청와대도 협치내각을 구상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인 이해찬 의원 관련 기사를 가리키며) 이 의원이 자꾸 말을 잘못 한다. 협치하자고 하면서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고 이야기하면 되겠냐. 여당이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면 야당을 슬슬 구슬러야 한다. 같은 표현이라도 ‘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이렇게 자극하면 될 일도 안 된다. 한국당과의 협치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더라도 그런 입장을 취해야 한다. 끌어들이지 못할 망정 도발하는 건 맞지 않다. 이 의원은 문 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껄끄러운 관계로 가면 안 되는데 문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나(이 의원)는 (예전에) 총리였고 넌(문 대통령) 민정수석이었고, 난 (운동권) 선배고 넌 후배’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개헌을 통한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활발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10년 전 쯤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전 세계 인구 대비 적정 의원수는 우리나라가 500명 정도이고, 단원제를 감안하면 350명 정도가 적정한 것으로 나온다. 의원수를 현재보다 늘리는 데 대해 국민들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다.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의원이 정치 일성으로 의원수를 줄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안철수는 끝났다’고 주변에 이야기했다. 의원 수를 줄이자는 건 정치를 전혀 모르는 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유럽식 선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15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것이다. 나도 국회의원에 5번 출마해서 4번 이겼다. 상대방보다 약간의 표만 먹으면 권력의 전부를 먹는 거다.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다. 이건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게 정치학의 기본 아닌가.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서는 4년 중임제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5년 단임제 역시 무리하게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1987년 개헌 과정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유력 정치인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속내로 5년 단임을 지지한 측면이 강하다. 지금은 속도가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젠 10년이 아닌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내각책임제는 우리 현실에서는 절대 안 된다. 국회의원들이 서로 자리다툼에 골몰해 내각이 몇 개월 만에 무너지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싸움하다가 볼일 못 볼 수 있다. 제2공화국 당시에도 헌법에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분명히 구분돼 있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면 전 총리는 권력을 놓고 서로 암투를 일삼았다. -경제 면에서는 빈부격차 심화가 사회정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의견도 많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헨리 조지를 언급하며 강조한 것처럼 지대추구의 특권이 용인되는, 곧 땅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건 큰 문제다. 일본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은 “땅은 공기나 물과 같다”고 말했다. 하늘이 주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땅을 독과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땅의 독점을 통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면 당연히 정부 정책으로 해결돼야 한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많이 올리지도 않았지만 종부세 인상으로 벼락을 맞았다. 속도는 알게 모르게 해야 한다. ‘오리털 뽑듯이 올린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원래 오리털은 펜촉으로 쓸 용도로 뽑았다. 오리털을 뽑으면 상처는 안 나지만 오리는 매우 아파한다고 하더라. 그래도 오리털은 뽑아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프레시안)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썼다. =노 의원보다는 심상정 의원과 더 가깝다. 하지만 노 의원과도 술자리를 갖는 등 잘 어울려 다녔다. 내가 인정하는 ‘구라’는 3명이다. 소설가 황석영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리고 노 의원이었다. 구라는 과장과 재치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황석영은 소설가로 1급, 유홍준은 미술평론으로 1급, 그리고 노 의원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1급이었다. 한국 정치 언어의 품격을 높인 그가 그런 선택을 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北, 개방 없는 개혁 닻 올려… 관리되는 시장으로 급성장”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北, 개방 없는 개혁 닻 올려… 관리되는 시장으로 급성장”

    “북한은 이미 확고하게 개혁·개방 초기 단계에 진입했다. ‘관리되는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이춘복(42) 중국 난카이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이 국가전략 차원에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며 이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작년 11월을 비롯해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남북을 모두 이해하는 한·중, 북·중 관계 전문가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북한 변화상을 어떻게 평가하나. -김정은은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큰 그림을 그릴 줄 안다. 성과관리를 강화하고 제도화한 게 가장 눈에 띈다. 김정일 때까진 현지지도가 현장 방문해 좋은 말 하고 가면 끝이었다. 김정은은 현지지도에서 지시한 사항을 점검하러 다시 온다.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되 당과 내각, 군 사이에 분업이 이뤄지도록 국가운영 시스템을 회복한 것도 특징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세대교체가 많이 된 것 같다. -교체 폭이 엄청나다. 특히 김정일 사망 당시 100명이 넘던 군부 장성급들을 대부분 사퇴시키고 당·내각 중심으로 경제관리를 일원화시켰다. 한국에선 이들이 모두 ‘숙청’된 걸로 오해하지만 실제 그런 사례는 기득권을 지키려 저항하던 군의 리영호와 당 행정부장 장성택뿐이다. 김정은을 보좌하는 핵심 엘리트들은 매우 유능하고 실용적이다. 이들은 자기들 약점을 솔직하게 말한다. 이들 사이에서 김정은 지지기반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걸 평양 방문할 때마다 느낀다. →북한에서 경제정책이 차지하는 위상은. -‘선군’에서 ‘선경’으로 이동했다. 상당한 혁신이 이뤄졌다. ‘개방 없는 개혁’은 이미 시작됐다. 가령 농업에선 사실상 가족농을 인정하는 포전담당제로 바꿨고 그 이후 식량 생산량도 늘고 배급 상황도 좋아졌다. 기업에도 사회주의 생산책임제라는 이름으로 자체적으로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을 줬다. 공장장이 생산실적을 높이기 위해 다른 기업 노동자를 스카우트하기도 한다. 국영기업 간 경쟁시스템이다. 기업에서 생산한 물품 20%는 반드시 다른 지역에서 팔도록 한 것도 기업끼리 경쟁을 촉진하는 동시에 균형발전과 전국 유통망 발전을 촉진한다. →시장화는 김정일 당시부터 있던 것 아니었나. -김정일은 시장을 이용하다가 힘이 커진다 싶으면 억누르길 되풀이했다. 김정일이 2009년 화폐개혁을 시도했다 실패했다. 그게 김정은에겐 엄청난 반면교사가 됐다. 김정은은 시장을 억눌러서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 자율권을 주면서 시장을 이용해서 국가 능력을 키우려 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시장이 발전하고 있다. 수입대체산업도 육성한다. 대북제재 속에서도 신발과 의류 등 경공업은 상당부분 자체 생산이 가능해졌다. 북에서 만든 빵을 먹어봤는데 품질도 괜찮았다. 식당도 많이 늘었다. 경제부처 등 각 기관, 심지어 외무성에서도 식당을 열어서 서로 경쟁할 정도다. →김정은의 역할모델은 덩샤오핑이라고 보나. -2016년 7차 노동당대회에서 김정은은 “사회주의 위업을 완수하자”고 했다. ‘강성국가’에서 ‘강’(强)은 해결했지만 ‘성’(盛)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건국과 강국(强國), 덩샤오핑은 부국이다. 북한에선 김일성은 건국, 김정일은 강국과 위국(衛國)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핵개발을 시작했다. 김정은은 강국과 부국이다. 강국의 토대 위에 경제를 발전시켜 진정한 강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다. →북한이 생각하는 경제입국은. -아직 안 나왔다. 북에서도 계속 고민 중이라고 본다. 중국은 개혁·개방 초기 ‘돌을 더듬으면서 강을 건넌다’는 말을 했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노동당이 중심을 잡으면서 ‘관리되는 시장’을 발전시키려 할 것이다. 옌지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일본 기자가 맞춰 본 ‘김정은’이라는 퍼즐

    일본 기자가 맞춰 본 ‘김정은’이라는 퍼즐

    김정은/고미 요지 지음/배성인 옮김/지식의숲/296쪽/1만 5000원“현명한 조선인민 국군 육해공군 및 전략로켓군 장병 여러분….” 2012년 4월 15일 오전 10시 15분 평양 김일성광장.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을 맞아 열린 인민군 열병식에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검은 인민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은 듯 그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연설 중 몸을 흔들어댔다. 100㎏에 이르는 체구에 옆으로 바짝 치켜 깎은 머리는 과거 김일성 주석을 연상케 했지만, 몇 가닥 내려온 머리카락이 그의 앳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줬다. 김정일의 뒤를 이은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이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다. 지난해 미사일 개발과 핵실험으로 한반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가더니, 돌연 올해 1월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하겠다고 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 같은 행보다. 도쿄신문 편집위원인 고미 요지가 ‘김정은’(지식의숲)으로 그를 분석했다. 고미 요지는 김정은에게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이복형 김정남과 생전에 인터뷰하고 2012년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중앙M&B)를 낸 이 분야 전문가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김정은을 잘 아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각종 보고서와 단독 입수한 자료를 더했다. 베일에 가려진 김정은의 어린 시절부터 권력 장악, 그리고 갑작스러운 북한의 최근 변화에 이르기까지 김정은을 비롯해 그의 주변과 북한 정세를 심도 있게 다뤘다.저자가 보여 주는 권력 승계 과정의 일화는 김정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 김정일은 “더는 세습에 의한 권력 승계는 없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008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일어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김정일의 후계자 후보로 김정은의 형인 김정철과 김정남이 있었지만, 둘 다 부적합했다고 고미 요지는 설명했다. 김정철은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자유롭게 살기 원하는 김정남 역시 후계자감은 아니었다. 반면 셋째였던 김정은은 10대 때부터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야심이 넘쳤다. 김정일이 가족회의에서 “후계자는 정은이가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히자, 그의 고모인 김경희가 “분별도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기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크게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 번은 여동생 김여정이 김정은을 “작은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내기도 했다. 김여정은 그때부터 김정은을 “큰 대장 동지”라 부르게 됐다. 김정은이 제멋대로의 행보를 보이는 이유도 여러 사례로 분석했다. 저자는 이와 관련, “20년 동안 천천히 지도자로서 착실히 바닥을 다져 온 김정일과 달리 몇 년 만에 승계한 점, 생모인 고용희가 일본에서 태어난 귀국자라는 사실을 비롯해 후계자로서 여러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집권 초반 고모부 장성택, 현영철 인민무력상(국방장관) 숙청의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던 일화로 설명한다. 예컨대 장성택이 쓰러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이대로 두면 나라 망한다”는 말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일, 현영철이 집에 도청장치가 설치된 것도 모른 채 “젊은 지도자를 모시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렸다가 김정은의 미움을 샀던 일 등이다.핵무기와 운반용으로 사용하는 탄도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분석도 흥미롭다.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가 등장하는 실록소설 ‘야전열차’를 비롯해 북한의 핵연료봉 추출 시기를 다룬 ‘영생’과 같은 소설, 그리고 한국에서 경호를 받는 주요 탈북자들과의 인터뷰 내용 등을 함께 수록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까지 핵무기를 카드로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에 관해 저자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김정은이 펼치는 ‘핵과 미사일 정책’, ‘경제 정책’, ‘대외 관계 정책’ 등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면밀하게 파헤친다. 일본인 시각으로 서술한 부분들이 다소 불편하지만, 현재까지 파편으로만 알려졌던 김정은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구성한 책으로 꼽을 만하다. 김정은의 행보 덕분에 그에 관한 경계가 잠시 무뎌졌지만, 저자는 여전히 김정은이 불안한 독재자라고 강조한다. “한반도에서 살얼음판 위를 신중히 걷는 듯한 위험한 날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저자의 경고도 새삼 다가온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6·12 북미 정상회담]정상국가 지도자 각인시킨 김정은… 세계외교 ‘록스타’ 데뷔

    [6·12 북미 정상회담]정상국가 지도자 각인시킨 김정은… 세계외교 ‘록스타’ 데뷔

    방중·남북회담 부부동반 격 갖춰 도보다리·군사분계선 월경 ‘파격’ 서구 경험, 체면보다 실용적 선택 경호단 등 美에 밀리지 않는 모습 싱가포르 명소 돌며 과감한 행보 셀카 찍고 손 흔드는 등 여유 보여 “앞으로 세상은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김정은(34)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한 말이다. 이날은 ‘은둔의 독재자’로 알려졌던 김 위원장이 마치 ‘록 스타’(연예인)처럼 떠들썩하게 세계 외교무대에 데뷔한 순간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상국가’ 지도자임을 과시했다. 우리 정부 고위관계자는 “은둔형 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김정은 위원장은 세계 외교 무대에 정상국가 지도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은 위원장은 그간 북한을 세계 무대에서 정상국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지난 3월 중국을 비공개 방문할 당시에는 부인 리설주 여사와 공식수행원인 참모들을 대동하며 정상외교의 격을 갖췄고,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선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와 함께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당시 13시간 가까이 언론에 생중계된 김 위원장의 모습은 그간 내부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문 대통령과 함께한 ‘도보다리 회담’에선 30여분간 배석자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사전에 계획됐던 도보다리 회담은 잠시 머물다 오는 정도였다”며 “그렇게 긴 대화가 이뤄질 줄은 문 대통령도 몰랐고 김 위원장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다”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 스위스 유학을 통해 서구 사회를 경험했던 김 위원장은 명분과 체면보다는 실용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싱가포르행에선 안전을 위해 중국 전용기를 임차했을 뿐 아니라 경호 목적으로 3대의 비행기를 동원하는 용의주도함도 보였다. 특히 김 위원장은 올해 들어 처음 나선 정상 외교무대에서도 상대 정상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북·중, 남북, 북·미 정상회담장마다 북한 국무위원회 문양이 새겨진 방탄 경호차량 메르세데스벤츠 S600 풀만 가드를 공수했고, ‘방탄경호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북한 974부대 소속 경호원들은 차량 주위를 밀착 경호하며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30대의 젊은 지도자인 김 위원장은 전날 밤늦은 시각에 싱가포르 식물원 ‘가든 바이 더 베이’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의 스카이 파크 전망대 등 관광 명소를 돌아보는 과감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을 수행한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외무장관과 여당 유력 정치인인 옹예쿵 전 교육부 장관은 함께 웃으며 셀카를 찍어 화제를 모았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관광객과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드는 등 여유를 보였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과감한 행보는 지난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상에서 문 대통령과 처음 만나 문 대통령을 북쪽으로 이끄는 모습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지난해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을 당시 국면을 전환할 것이라 예측은 했지만, 판문점 선언만큼 나아갈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며 “이번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과감하게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은 올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정상화에 나선 데 이어 고립됐던 북한 외교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현 한반도 정세 변화를 계기로 북·중 혈맹 관계를 복원시킨 데 이어 러시아, 쿠바, 이란, 베네수엘라 등 기존 우방 국가와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러시아 국경일인 ‘러시아의 날’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북·러 간 전략적·전통적 관계도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양국 국민의 이익에 맞게 더 강화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고 타스 통신은 전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정상국가의 지도자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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