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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치 않은 북한 동정(사설)

    우리는 최근 북한에 관한 두가지의 어두운 소식에 접했다. 하나는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쌀을 구걸하기 위한 외교행각에 나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김정일이 권력세습을 반대하는 「반당·반혁명분자」들을 적발,숙청했다는 소식이다. 북한의 내부사정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식량난으로 곤경을 겪고 있는 북한은 1월30일부터 지난 7일까지 연형묵 정무원총리를 태국·인도네시아·밀레이시아 등 동남아 3개국에 파견,싼값으로 쌀을 사들이기 위한 순방외교에 나섰으며 태국에서 올해안에 50만t,2∼3년안에 1백만t을 수입할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수입대금은 바닥이 난 외환사정 때문에 강철과 시멘트로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태국도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연총리의 순방외교와 때를 같이해서 북한은 제3국상사를 통해 한국산 쌀 10만t을 국제가격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t당 1백달러로 수입하겠다고 타진해 왔는데 우리 정부는 「직접적인 교섭」이 아니란 이유로 이를 일단 거부했으나북한당국이 직접 요청해올 경우 무상원조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김정일이 반당·반혁명 분자들을 숙청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지,누가 관련이 됐는지,또 숙청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북한의 권력층 내부에 균열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북한에서는 요즘 「하루 두끼먹기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한재외동포는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하루 두끼먹기운동」을 알리는 선전포스터와 플래카드를 직접 목격했으며 그나마 배급이 제대로 안돼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소련의 경제관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 왔으며 북한당국이 주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올해안에 기아사태나 식량폭동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해 왔다. 「반당·반혁명분자 숙청사건」도 북한의 반체제세력이 주민들의 고조된 불만에 편승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갖게한다.북한은 반혁명 음모를 분쇄했다고 하지만 식량난이 가중될 경우 민중봉기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북한이 루마니아의 재판이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처럼 절박한데도 북한이 제3국을 통해 식량난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같은 민족끼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까운 길을 두고 제3국이라는 먼길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 그같은 폐쇄적이고 편협한 자세는 버려야 할 때가 온것 같다. 북한이 현재 풀어야할 초미의 급선무가 식량난임을 인정한다면 허심탄회하게 우리 정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오는 25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이 문제를 의논해도 좋겠지만 고위급회담에서 논의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면 적십자회담이나 경제회담을 재개하는 방법도 있다. 북한은 84년 남쪽이 수재로 큰 피해를 입었을때 5만섬의 쌀을 조건없이 보냈고 우리정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바 있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형평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남북간에 이런 정신을 살려간다면 민족화해에도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된다. 폐쇄적인 체제논리 때문에 주민들의 먹는 문제를 더이상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 북한,“세습 반대세력 일소”/평양방송

    ◎“반당음모 분쇄… 「혈통계승」 해결” 【도쿄연합】 북한은 7일 평양방송을 통해 당내 반란분자를 일소하고 주체의 혈통승계가 해결됐다고 밝힘으로써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세습정치에 반대하는 체제저항 세력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 교도(공동)통신에 따르면 평양방송은 이날 「주체의 혈통을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우리 당의 불멸의 업적」이라는 제하의 논평을 통해 『김정일 노동당정치국 상무위원겸 서기의 지도하에 주체의 혈통을 순수하게 계승하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강조했다. 평양방송은 특히 『우리당은 당내에 숨어있는 반당·반혁명 섹트 분자나 반당 수정주의 분자들의 책동을 적시에 폭로,분쇄함으로써 혈통의 혼란을 초래하려 했던 일체의 이색적인 사상풍조를 극복,청산하고 주체 혈통의 순결성을 철저하게 보증했다』고 언급함으로써 당내에 체제반대 세력이 상당수 존재,숙청됐음을 암시했다.
  • 동북아 새 질서 태동 진단(서울신문 광복45주년 특집)

    ◎한반도에도 데탕트 기류 가속화/하야시 다케히코 일본 동해대교수/「4강 역학」 어떻게 변화될까/평화공존 10여년 거쳐 통일정부 수립 가능성/GNP 1만불 육박땐 「5극체제」 출현 예상 지금 세계는 동·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를 지양,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이행하려 하고 있다. 런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의 선언과 미 휴스턴의 선진 7개국(G7)정상회담의 선언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및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공산주의의 좌절선언에 지나지 않았다(프랜시스후쿠야마 「세계를 말한다」 산경신문 7월31일). 38도선의 북쪽에 「아웃 사이더 국가」 즉 북한이 존재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같은 세계변화의 큰 격랑속에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웃 사이더 국가를 포기한다는 것은,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의 룰을 받아들이는 국가로 되는 것이며,대내적으로는 「남반부 해방에 의한 통일」이라는 혁명노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상 세계정치의 본류를 우선 확인한 연후에 10년후 21세기초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전망할 경우,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시점에서의 남북 분단의 극복 상황이다. 거기에는 3가지 케이스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제1은 북한이 언젠가는 닥쳐올 김일성주석의 죽음을 계기로 분단의 현상을 받아들여 평양정권의 존속을 꾀하기 위해 남북한 교차승인과 공존체제를 인정하고 그 결과로써 「1민족 2정부」의 상태가 도입되어 꽤 장기에 걸쳐 지속하는 케이스이다. 제2는 노태우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통일안」에 따라 과도적으로는 남북 국가연합의 단계를 거쳐 통일국가의 형성을 지향하는 경우이다. 제3은 과도적 단계를 생략,동·서독일처럼 통일총선거를 선행시켜 일거에 통일정부를 발족시키려 하는 경우이다. 제1의 케이스는 72년 12월 국가간의 기본조약을 맺고 「1민족 2국가」의 체제를 작년 11월의 베를린장벽 붕괴로 연결시킨 동·서독일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동서독일형은 3월 실시된 동독의 총선거에서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동독시민이 과도적인 국가연합단계를 생략,「독일의 재통일」을 희구하는 중도우파연합을 압도적으로 지지한결과였다. 다시 한번 3가지 경우를 앞으로 예상되는 10년간의 한반도의 내외 정세추이에 맞춰볼 때 남북한도 다시 동서독 같이 남북공존체제의 제1의 케이스를 거친 뒤 점차 실현성을 갖게 되는 통일에 대한 남북시민의 실현의지의 강도가 동서독같이 「국가연합」의 단계를 생략시켜 제3의 케이스를 지향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여진다. 남북 공존체제를 통해 북한의 주민·민중들이 곧 알게되는 것은 남북 양체제의 우열이다. 그 우열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가속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합치하는 것으로써 북한민중들도 동독시민들이 베를린의 벽을 「시대의 흐름」으로 붕괴시켰던 것처럼 군사분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자연의 추세일 것이다. 여기서 좀더 대담한 예측을 해 본다면 앞으로 10년을 거쳐 21세기의 초장을 맞는 한반도에는 수도를 서울로 하는 통일국가,통일정부를 수립해 문자 그대로 선진국에 들어서려는 국가가 출현할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인구 7천만,국민 1인당 GNP 1만달러에 육박하는 국가의 출현이다. 인구 7천만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재통일을 이루려는 90년대 초의 동서독인구 7천7백만명에 필적하는 것이며 인구 규모로서는 선진 7개국중의 프랑스 이탈리아(양쪽 5천만명대)를 능가한다. 90년 현재 한국의 국민 1인당 GNP는 5천달러,북한은 1천달러(추정)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연간 7.2%의 성장률을 10년간 계속 확보한다면 1만달러 수준의 달성은 가능하다. 남북 공존체제는 북한경제의 개방체제를 더욱 촉진시켜 한국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남북 경제교류기금 2천∼3천억원의 운용과 북한합영법에 의한 남북 경제교류의 신장과 확대로 결국 남북통일에 앞서 북한경제의 한국형 경제에로의 수렴을 불가피하게 한다. 남북통일의 상징은 한국의 현대그룹이 계획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천연가스 수송을 위한 파이프 라인이다. 야크츠크로부터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나아가 평양을 거쳐 서울·부산까지 이어지는 4천㎞의 에너지 동맥이야말로 남북을 직결시키는 원동력이다. 파이프 라인 부설이 가져오는 주변의 경제개발이라는 파급효과도 시베리아·남북한을 통해 막대하다. 세계적 명산 금강산의 본격적인 관광개발사업도 남북 공동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며,그 공동사업이 초래하는 남북일체감 조성의 효과도 간과할 수 없다. 나아가 한국·일본·소련 사이에 최근들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일본해=동해신시대」(조일신문 7월6∼14일 연재)는 남북공존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북한이 참가하고 북한경유 「일본해=동해」를 연결하는 중국 동북부가 참여하게 됨으로써 21세기와 함께 동북아시아에 성립하게 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경제적 측면을 대표하는 신경제권으로 될 것은 확실하다. 인구 7천만,국민 1인당소득 1만달러국가의 출현은 경제적으로는 중·소를 압도하는 경제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기존의 미·소·중·일의 주변 4대국에 남북통일 한국을 첨가시켜 동북아시아에 5대국에 의한 오극구조시대가 대두한다는 것과 직결된다. 오극구조를 갖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세력균형의 이상적 체제와 위치를 부여한 것은 키신저박사(전미국무장관)의 연구성과였다. 물론 21세기 초엽 동북아시아지역에 통일한국을 축으로 오극구조가 성립된다는 것은 현단계에서 거대한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오극체제의 성립을 보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극의 한귀퉁이를 중·소가 각각 맡기 위해서는 중·소 자신이 더욱 개방체제를 추진하는 가운데 국가적 안정과 발전을 꾀해야 한다. 이 지역에 역사적으로도 가장 활발한 이해관계를 갖는 중·소 양국의 안정적 발전없이는 동북아시아의 오극체제는 그림의 떡이다. 이것은 남북 통일국가의 출현없이는 있을 수 없는 신국제질서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남북을 통한 한민족의 역량이며 영지이다. 제2차 세계대전후 45년,세계 격변의 시점에서 정말로 타의에 의하지 않는 민족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통일국가 실현의 지평을 여는 것이야말로 주변 4대국의 전면적인 협조와 협력체제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북아시아의 오극체제에 의한 안정적 신질서의 도래는 모든 것이 그 한가지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병익 통일연수원 교수/「통일시나리오」를 엮어보면…/체제공존→동질성 회복→총선이 합리적 수순/「4강 지렛대」로 북녘 개방 적극 유도 바람직 해방 45돌을 맞았다. 우리의 민족해방은 국제정치적 희생물로서 강요된 45년의 민족분단사로 이어져 우리 민족은 남북한체제의 갈등 속에서 끝없는 고통과 국가발전의 제약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은 국제적으로는 동·서 체제간의 긴장완화 추세,공산권전반의 개혁·개방정책,목전에 이른 독일통일,그리고 민족 내부적으로는 변화된 국제정세의 파장을 한반도에로 끌어들이려는 양국및 국민의 노력이 상승작용을 하여 통일을 앞당기려는 민족의 열망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또 「국제정세와 남북한 체제발전추세의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의 예상모형을 어떻게 상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민족통일운동의 방향모색을 위해서도,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 올바른 통일실현을 위해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분단국문제의 해결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분단쌍방체제간의 평화공존,교류·협력관계의 정착화를 통한 민족동질성의 회복 그리고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이 선택하는 통일국가의 수립만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방안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북한당국이 체제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한사코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통일문제 해결의 어려움이 있다. 북한당국은 통일로 가는 불가피한 과정인 남북한체제의 상호개방을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란 북한통치명분을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른바 「조선노동당시대의 기념비적 건조물」로 꾸며진 평양은 개방할 수는 있으나 「미제의 식민지」아니면 「거지소굴」로 선전되어 온 「남조선」을 북한주민에게 개방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당국은 서독체제로 흡수·통합되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남북한 체제개방의 결과를 예견하고 전율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이른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세우면서 『남북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그대로 두고연방제로 최종의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간의 연방구성안이 아니며,「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이란 「선남조선혁명,후통일」전략의 일환이다. 따라서 진정한 통일방안이라기보다 전 한반도의 공산화 방안임이 분명하다. 남북한 체제공존을 북한체제 전복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북한당국으로서는 「연방제 통일」의 주장과 함께 대남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체제수렴론」이 한반도의 통일방안으로 수용되지 않고 있는 현상황하에서는 결국 국민에 의한 「체제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정책을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인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등으로 위장을 하고 있으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적 한계성을 자인한 것임에 틀림없으며,따라서 우리는 아집이 아닌 인류문명사적 시각에서 민족통일을 위한 북한체제의 변화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유와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 통일국가의 수립을 표방하고 있으며 우리는 비록 마지막이 될지언정 공산권의 개혁·개방의 물결이 북한에도 와 닿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숙청으로 점철된 북한정치사 속에서 반김일성·김정일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이른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사」와 「주체사상」으로 세뇌된 신정체제하에서 조직적인 저항세력도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루마니아에서와 같은 인민봉기에 의한 체제변화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는 「위로부터의 변화」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북한당국은 남북한 경제발전의 격차를 의식한 나머지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대외개방경제정책을 제한적으로 시도하고,「경공업혁명」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비록 대남전략적 의도가 강할망정 종교활동을 선전하는등 제한적인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내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오히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표방,체제수호를 위하여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통일을 위한 당면과업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의 물결을 어떻게 북한체제에 불어넣느냐의 문제로 압축된다. 우선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미소등 한반도 주변강대국은 동·서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인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남북대화를 강력히 종용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은 북경 등지에서의 접촉과정을 통해 미국과 북한만의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는 북한에 분명히 거부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의 경제교류·협력을 강력히 바라고 있는 소련은 남북한 평화공존관계를 위한 「두개의 한국정책」 추진을 위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의 허구성과 김일성·스탈린의 「한국전쟁」 유발책임을 폭로하고,한소수교를 가시화시킴으로써 대남혁명전략에 따라 「하나의 조선정책」을 고집하는 김일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소수교는 궁색한 「정경분리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에도 정책선택의진폭을 넓혀주고 있다. 이런 배경때문에라도 북한은 「남북 고위급회담」등 남북대화의 마당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공존을 지향하는 남북대화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의 자리에 나온다 하더라도 대남전략적 발상의 주한미군 철수,군축,한반도의 비핵·중립화 등 상투적인 군사문제 선결입장을 계속 제기하면서 당국,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통한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의 관철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지향하면서 민족통일로 접근하려는 우리의 통일정책과 「남조선」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는 북한통일정책의 막판 승부의 장으로 급히 줄달음치고 있는 형국이다. 긴장완화와 공산권 전반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기울어진 인류문명사의 대세와 신정체제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북한체제간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또 북한체제가 고립화되면 될수록 북한당국은 더욱더 「남조선」 민중과의 「통일전선」 형성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은 「남조선 혁명」 전략에 따른 북한의 대남 제의를 우리가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오히려 북한사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시점이 언제냐에 따라 가까워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48년 단신 월북뒤 소망명 청년/전자계측권위자돼 금의환향(조약돌)

    ○…16살의 어린나이에 사회주의이념을 동경,지난48년 혼자 월북했다가 소련으로 망명해 수리학 전자측정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가 된 장학수박사(58ㆍ레닌그라드거주)가 27일 하오1시40분 소련 아에로플로트항공편으로 42년만에 그리던 고국땅을 밟았다. 장박사의 이번 방문은 자신의 젊은 시절 한 이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줄 자서전출간을 위해 문학사상사가 초청해 이뤄졌다. 현재 소련에서 「환경보전연구 및 생산합동체」의 화학담당부총장으로 있는 장씨는 공항에서 『환영속에만 간직해오던 조국땅을 다시 찾아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나의 인생역정을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만인의 평등사회」를 좇아 북한을 택했던 장씨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전국교원대회에 손수만든 무선조정선을 출품하면서 그의 과학적 두뇌가 북한사회에 널리 알려지자 당시 교육부 부부장이던 남일의 추천으로 소련 유학길에 올랐다. 56년 모스크바대학 무선공학부를 졸업하고 북한으로 되돌아 간 장씨는체신성중앙연구소에서 일하다 당시 북한에서 대숙청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체제에 환멸을 느껴 61년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소련으로 망명했었다. 이날 공항에는 장씨의 큰형이며 독립유공자인 낙수씨(77)부부가 조카 등 10여명이 나와 장씨를 맞았다. 5남4녀의 형제가운데 생존해 있는 세째형 득수씨(67ㆍ의사ㆍ미국거주)와 누나 정자씨(70ㆍ일본거주) 등 4남매와는 지난86년 한 언론사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
  • 북한 9기 인민회의에 비친 권력구조

    ◎「혁명2세대」부상… 김정일체제 구축/세대교체 가속… 50대이하가 55.8%차지/「세습」기반의 핵심… 정책집행 실무 도맡아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층의 55.8%가 50대 이하로 분석돼 김정일후계체제 중심의 점진적인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0일 당국이 지난 5월24일 열린 북한의 제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구성된 핵심권력층인 로동당 59명,최고인민회의 56명,정무원 88명 등 총 2백3명중 겸직을 제외한 1백47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연령은 50대 이하가 전체의 55.8%(50대 79명,40대 3명)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60대 51명(34.6%),70대 11명(7.5%),80대 3명(2.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특징을 보면 김일성 오진우(인민무력부장) 박성철(부주석)을 위시한 70대는 권력핵심에 위치,정책 결정분야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허담(외교위원장) 연형묵(총리) 등 주로 테크너크랫 출신인 60대는 정책결정과 행정집행기구의 실질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50대는 김강환(부총참모장) 김용순(당 국제담당비서) 등 친김정일세력이 대부분인 동시 세습체제를 대비한 다음 세대 핵심인물들로 이들의 출신성분이나 경력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신지역이 알려지지 않은 72명을 제외한 75명에 대한 출신지역별 현황을 보면 북한지역출신(평양 7명,평남 6명,평북 11명,함남 15명,함북 17명,황해 2명,개성 1명)이 모두 59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남한과 인접한 지역출신은 비교적 홀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남한출신은 양형섭(제주출신ㆍ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장) 여연구(서울출신ㆍ상설회의 부의장) 등 3명에 불과,그동안 남한출신 인물이 거의 숙청됐거나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밖에 중국출신 10명,소련출신 3명으로 밝혀졌다. 또 혁명세대별로는 주로 빨치산 출신으로 구성된 65살이상 혁명 1세대가 34명으로 전체의 23.1%를 차지하고 있으며 혁명 2세대(55∼64살) 71명(48.3%) 혁명 3세대(54살이하) 42명(28.6%) 등으로 나타남으로써 혁명 2세대가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60년대부터 행정계통에 등장하기 시작한 혁명 2세대는 김일성의 절대체제유지 강화 및 김부자 세습체제를 구축하는 주요기반이며 혁명 3세대는 73년 2월 조직된 「3대혁명소조」를 주축으로 한 신진세대로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아래 세습체제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해방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이끌어 온 최고지배층은 김일성중심의 족벌 인맥,항일 빨치산 세대를 포함해 모두 3백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돼 공산국가중 가장 세대교체가 폐쇄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재소한인동포 50명 해방후 북한서 처형/유족들 진상규명 요구

    【내외】 소련거주 한인동포들은 해방직후 북한의 요청에 따라 소련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에 파견한 한인동포 50여명이 현재까지 행방불명상태라고 밝히고 이들의 생사및 숙청여부를 즉각 확인해 줄 것을 최근 북한당국에 촉구했다. 한인동포들은 지난해 한인동포들의 청원에 따라 소련정부가 금년 1월3일자로 북한당국(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에 이에관한 해명과 사실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으나 5월말 현재까지 북한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지적하고 북한은 『침묵으로 이를 말살하지 말고 지체없이 사실 그대로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한민족 재결합의 돌파구 어디에(정담)

    ◎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6ㆍ25아픔」극복해야 「통일의 문」열린다/극우ㆍ극좌의 극단적 논리 지양할때/상호 실체 인정,「시각」의 재조정 시급/체제화합의 「예멘식 통일안」이 적절/경제교류ㆍ사회단체 접촉 확대가 선결돼야 해방과 함께 조국이 두동강 난지 45년. 6ㆍ25전쟁이란 동족상잔이 발발한지도 40년. 강산이 네번 바뀌고 일제가 이땅을 침탈했었던 36년 보다도 더 긴 세월. 이 세월동안 우리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전혀 다른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오면서 숱한 시련을 겪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단의 비극도 전쟁의 상흔도 치유하지 못한채 가슴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동서냉전의 틀이 깨지면서 동서독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남북예멘이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놀라운 변혁을 지켜보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6ㆍ25전쟁이 우리민족에게 던져준 진정한 교훈은 무엇이며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딛고 통일을 앞당길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6ㆍ25전쟁 40돌을 맞아 사회전반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고영복교수(서울대)와 북한의 사회변화를 예의 주시해온 도흥렬교수(충북대)그리고 분단의 현실에 고뇌하면서 그 현실을 다각적인 시각에서 작품화하고 있는 작가 김원일씨의 좌담을 통해 통일로 가는 바르고 곧은 길이 어디에 있으며 이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참석자 고영복(서울대교수) 도흥렬(충북대교수) 김원일(작가) ▲김원일=6ㆍ25전쟁이 우리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가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해방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남과 북이 외세에 의해 갈라지기는 했으나 이질화는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김구선생은 북의 김두봉정도의 인물을 만나 대화하면 38선도 허물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며 남과 북사이 사람들의 왕래도,편지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6ㆍ25전쟁으로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됐고 극우와 극좌라는 이데올로기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이게 됐습니다. ▲고영복=해방후 6ㆍ25까지 만해도 민족적 동질성은 유지돼 왔고 남과 북 각각의 영역에는획일화 되지 않은 여러 정치세력들이 다양한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통일의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6ㆍ25전쟁은 지리적 이동과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됐고 이 결과 기존의 민족적 동질성을 파괴하는 형태의 극한적 체제대립을 낳고 말았습니다. ▲도흥렬=보다 중요한 것은 6ㆍ25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한간의 평화공존의 길이 더 멀어지고 어렵게 됐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6ㆍ25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 실체는 뒷전으로 밀어둔채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의 논쟁만이 판을 친 느낌이 없지 않았고 남북 모두가 이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가령 북한은 김일성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이용해 왔으며 이에 따라 반제ㆍ반미ㆍ증오ㆍ우상화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반공문화가 생겨났으며 반공이데올로기가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북한은 「전쟁은 수단을 달리하는 정치의 연장」이라는 레닌의 전쟁론에 입각,6ㆍ25전쟁은 해방 후 남한정권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친일파숙청,토지개혁 등의 과제를 해소해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한 정의의 전쟁,통일전쟁이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원일=최근 6ㆍ25전쟁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 많은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6ㆍ25전쟁이 기존의 반공논리나 북한의 주장등과 같은 단순한 의미로써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의 전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고영복=6ㆍ25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세대교체도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결론없는 논쟁만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남과 북이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근 해외동포들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같은 제3자적 시각이 민족적 입장에서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최근 우리사회의 경우 국력의 축적으로 정치적인 자율성이 확보되면서 기존의 획일화된 반공논리를 비판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재소동포들사이에서도 북한지배세력의 논리를 반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멀지않아 6ㆍ25의 실체에 접근하는 민족적 입장의 해석이 확립되리라 기대합니다. 이럴 때만이 6ㆍ25의 상처를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도 열릴 것입니다. ▲도흥렬=최근 우리 대학생들의 이념동향을 조사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6ㆍ25전쟁은 분단극복의 의지가 표출된 전쟁」으로 보는 수가 점점 적어지는 반면 「반공이데올로기를 분단이념」으로 보는 비율도 높아지는등 최근 우리사회에는 이념의 다원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세대들의 통일후 체제에 대한 시각도 매우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방된 논의를 통해 어느 일방의 주장이 아닌 민족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통일상의 정립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김원일=그러면 6ㆍ25전쟁이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도흥렬=북한은 통일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쟁은 오히려 통일을 어렵게 했으며 분단을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의 문제는 대화와 교류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며 6ㆍ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또 재발해서도 안됩니다. ▲고영복=서로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는 단계는 지났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누구이고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 문제는 역사적 자료로서 규명해야 할 가치는 있으나 이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은 통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6ㆍ25를 일으켰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 왔던 책임있는 세대는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에 있으며 다음세대가 어떻게 앞날을 여는가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 피해의식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적지 않았으나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와 내적인 성숙으로 전쟁의 재발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역사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6ㆍ25전쟁의 비극을 통일의 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원일=우리는 오늘 이 시점까지 극우와 극좌라는 이데올로기에 억눌려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와 같은 극단적 논리는 지양돼야 합니다.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려하고 또 강요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해악에서 벗어날 때가 됐습니다. 남과 북은 50∼60년대의 냉전시대를 거쳐 72년 7ㆍ4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우리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6월 항쟁을 겪으면서 통일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흥렬=7ㆍ4공동성명은 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에 역사적인 의미가 컸던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은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이라는 이 성명의 3대원칙에 바탕한 통일방안을 내놓으며 이를 일관되게 활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방안에 있어서 뚜렷한 지침은 있었으나 일관성있게 논리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고영복=7ㆍ4공동성명은 6ㆍ25전쟁으로 빚어진 남북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려한 시도로서 비록 형식적이고 잠정적인 합의 도출에 그쳤으나 그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남과 북이 7ㆍ4공동성명에 합의했다는 것은 서로의 실체를 인정,대화와 평화의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선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80년대 들어서 우리 정부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대응,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해 접합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합니다. ▲김원일=국민적 합의와 같은 기반조성이 없었다는 점에서 7ㆍ4공동성명은 선언적 의미를 넘지 못했는데 이점이 아쉽습니다. 이 성명 발표 이후 북에서는 김일성우상화 작업이 더욱 가속화됐고 남에서는 유신체제가 들어서는등 체제를 보다 강화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문단에서의 경우 70년대까지만 해도 분단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80년대 들어 활발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논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 확산되고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정부에서도 새로운 통일방안을 내놓은등 남북간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시점에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고영복=동서독의 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최근 서독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합병식 통일방안이 한반도 통일의 한본보기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통일에 있어서는 독일식 방안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2차 대전 후 강대국에 의해 강제분할된 서독과 동독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있었으나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전통적 민족의식과 동질성 확보를 위한 민족적 공감대를 계속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 동질성이 40년의 분단기간을 통해 극도로 파괴됐으며 극심한 체제경쟁으로 이데올로기가 민족적 동질성 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습니다. 때문에 동질성 회복이 힘든 이 시점에 있어서는 예멘식 통일방안과 같은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남북이 대등한 위치에서 점진적으로 접근,하나의 체제로 화합하는 것이 우리 현실에 맞는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흥렬=6ㆍ25전쟁은 통일로 가는 길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6ㆍ25란 비극적 체험을 통해 남북에는 상호불신의 골이 깊어졌고 경쟁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방안은 이러한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독자적인 방안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독자적통일방안의 전제 조건으로는 다음의 3가지 선결과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남북간에 사실에 기초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시각의 재조정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념과 체제유지를 위한 고식적인 틀에서 탈피,있는 그대로의 상호 체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6ㆍ25로 인한 이질화 극복을 위해 남과 북은 각기 통일지향적 사회체제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특히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즉 한민족 한겨레라는 의식을 통해 민족공감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은 긴 여정속에서 이뤄지는 것인 만큼 남북은 상호접근을 위한 제안ㆍ조치 등을 일관성 있게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 비공식 민간교류의 확대는 통일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원일=민족동질성의 회복이란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독일은 강제분할을 겪으면서도 상호방문을 허용하고 이데올로기보다는 동질성확보를 우선으로 삼아 통일분위기를 조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다릅니다. 남에는 6ㆍ25의 원한세대가 적지 않으며북에는 김일성의 세대가 아직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영복=남과 북은 서로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같은 정치적인 대립으로는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현 체제상황에서는 비정치적인 경제ㆍ사회단체의 상호접촉을 이룩하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또한 각각의 통일방안을 고집하는 것보다 서로의 방안을 폭넓게 수용하는 보다 유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원일=민간교류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섣불리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금물입니다. ▲고영복=김정일의 권력세습이후 북한내부에 나타날 변화가 우리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나 이같은 변화가 통일여건을 성숙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남북공동의 장을 단계적으로 마련해 나가야 합니다. ▲도흥렬=역사의 흐름은 분명히 있으며 동구변혁의 물결이 한반도에도 미쳐 북한에도 변화가 오리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단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가 관심사 입니다. 북한이 언제 또 어떻게 변화하건 우리부터 성숙한 민주사회를 이룩해 긍정적인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통일은 어려운 목표이지만 서로가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건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 북한 고위관리 지낸 재소동포의 「6ㆍ25증언」

    ◎“김일성,6ㆍ25새벽 내각 소집… 남침비준 강요”/4월초 군관학교간부 전선에 미리 배치/전쟁 한달전 강동학원서 통치요원 육성/폐쇄적인 북한체제는 「수용소적 사회주의」로 불러야 한때 북한의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재소교포 18명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6ㆍ25전쟁 전후 북한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1인지배체제에 반발,소련으로 망명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부분이 70을 넘긴 고령인 이들은 22일 MBC시사토론에 참석,북한정권의 성립과 6ㆍ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날 토론에 나온 사람은 강상호(80ㆍ전 북한 내무성차관) 장학봉(71ㆍ전 북한 군관학교부교장) 박병률(82ㆍ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원장) 송진파(76ㆍ전 북한 문화성국장) 정상진(73ㆍ전 북한 문화성차관)등 5명이다. ­6ㆍ25당시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기전까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박병률=47년 12월부터 50년 6월25일까지 남로당원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훈련시킨 제자는 3천명에 이르는데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제주도 폭동주역인 김달삼도 포함돼 있다. ▲강상호=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ㆍ25당시 내무성 차관이었는데 북한의 내무성은 경찰권 탐정권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여러명의 차관중 당정치교양사업ㆍ문화사업을 맡았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성장관은 현사법상인 방학세였다. ○「김정권」수립에 참여 ▲정상진=6ㆍ25직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해방전에는 소련에 있었으며 45년 3월에서 8월까지 소련해병대원으로 5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련의 대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장학봉=군관학교부교장으로 군장교양성교육사업을 맡았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상좌(우리의 준장)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가했다. 1988년까지 남한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는데 포항제철,울산자동차공장 등을 둘러보니,경제ㆍ문화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조국임을 실감,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콘크리트장벽 없어 ▲송진파=북한의 문화성국장,잡지 「새조선」의 주필을 맡았고 망명후에는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주필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휴전선도 돌아보았을텐데 콘크리트장벽을 보았는가. ▲정상진=북한에서 선전하는 콘크리트장벽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데 대전차장벽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장벽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 장벽」이 문제이다. 몇년전만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해 정세를 바로 알게됐다. ­올해는 6ㆍ25발발 40주년이 된다. 6ㆍ25에 대한 연구도 많고 주장도 엇갈리는데 당시 내각에 참여한 사람으로 진상을 말해 달라. ▲강상호=그때 나는 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해있었으며 6월25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앙당비서가 그날 새벽전화를 걸어와 퇴원즉시 내각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인 최용건만 빠지고 전원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이 제안은 토론없이 1백%찬성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곧 원산행차에 올라 강원도당회의를 열고 전쟁에 대비한 과업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서울이 해방됐다는 소식과 함께 3ㆍ8선이 남의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가 있어 춘천으로 출발했다. 이때 나는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 이유는 첫째 3ㆍ8선을 넘어 산굽이를 돌면서 국군포대를 관찰해보니 국군의 포와 포탄이 흩어져 있었는데 탄피는 몇개 없었다. 북침을 했다면 숱한 사격의 흔적이,공격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전선지대의 이북 농촌에는 파괴된 집도 없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김을 매고 부녀자들은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국군의 포격이 있었다면 그럴수 있겠는가. 셋째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북침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딘소장이 포로가 될 정도로 전쟁초반에 패퇴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병률=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다.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이 전쟁발발 1개월전부터 강동학원장인 내게 보내져 집중 훈련을 받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몇시간전에 서울 함락후 서울시 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았던 이승엽이 『자기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강동학원을 떠났다. ○스탈린이 전쟁 묵인 ▲장학봉=당시 군관학교에는 인민군지도자 25명의 그룹반이 있었는데 50년 4월에 이미 이 그룹반이 해산돼 소속원들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다. 50년 8월까지 북한의 신문 라디오 등 모든 선전기관은 남조선이 북침을 했고,북한이 이에 반격을 가했다는 선전을 거듭했고 나 또한 전선에 나가지않아 이를 그대로 믿었었다. 8월초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정의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나오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이전에 스탈린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남조선해방과 전조선의 자유를 위해 남침을 호소했으나 스탈린은 남조선침입의 대가로 미국이 참전하면 다음은 소련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됐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후 6ㆍ25발발 5∼6일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 문제를 다시 스탈린에게 제기,스탈린은 「좋다 나쁘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묵인했다. 이와 관련,흐루시초프는 내가 스탈린의 입장이었더라도 작은 나라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해 어떠한 승인도 지시도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쟁이틀후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소련대표가 유엔군의 참전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퇴장한 것은 내막을 뻔히 아는 스탈린의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때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강상호=김일성일파가 만주에서 유격활동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했다. 김일성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강유역의 비밀지역에 있었고 해방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나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이어서 김일성을 해방전에는 본 적 없었는데 해방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김일성을 본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은데(일동 웃음)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진=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면서부터 정권에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개인숭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전당대회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 북한 노동당대표로 참석한 최용건이 돌아와 귀국보고를 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 당에는 과거 박헌영이란 개인숭배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숭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뒤 연안파 윤공흠 이필규 등이 반김일성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은 곧 숙청됐다. 이후 김일성은 「이단」숙청을 결심,대대적인숙청작업에 나섰고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6ㆍ25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군고위간부ㆍ당간부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반당분자로 몰렸고 이것이 우리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다. ▲박병률=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주체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북한체제를 「수용소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남측서 통일 주도를 ­북한에 있을때 남로당출신들을 많이 만났을텐데…. ▲정상진=당시 나는 문화성차관 및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어서 홍명희 이태준 김남천 임화 최승희 등 많은 남쪽예술인들과 알고 지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작곡가 김순남선생은 전쟁전 박헌영외상 취임 축하파티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이 죄가 됐다. 김순남선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되느냐」라고 탄식하면서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분은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된 채 숙청되고 말았다. ­마직막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장학봉=화해의 물결은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강상호=오늘날에는 무력으로 누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이 세계적 여론을 일으켜 북한측에 평화통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남북통일을 하루라도 지연시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며 우리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전 북한 반체제 인사·재소 교포 18명 어제 서울에

    강상호 전북한내무성차관 등 북한에서 고위층인사였던 재소교포 18명이 18일 하오4시55분 대한항공 703편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고위층인사로 지내다 숙청된뒤 소련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로 8박9일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철원일대의 격전지와 포항제철 등 주요산업시설을 돌아본뒤 오는 26일 모스크바로 돌아갈 계획이다. 문화방송의 초청으로 온이들 일행은 앞으로 강영훈국무총리 등 정부관계자를 예방하고 「MBC시사토론」 「통일전망대」 등 TV방송에 출연,6·25때의 숨은 비화 등을 공개증언할 예정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 인민군장성 심수철(69),전북한문화성차관 정상건(73),전북한 「새조선」잡지주필이자 전북한문화성국장 송진파(76),전북한내무성소장 박병윤(82)씨 등이 포함돼 있다. 또 현재 타슈켄트 농대교수로 있는 니콜라이(78),전소련모스크바건축대학부총장 김니콜라이(78),타슈켄트문화대학총장 한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57)씨 등 재소한인사회의 유력인사들도 함께왔다. 강전내무성차관은 이날 공항에서 『6·25가 남침이라는 역사적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왔다』면서 『이곳을 찾은 일행대부분은 지난 59년 스탈린격하운동당시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빨치산훈련소였던 전강동학원원장 박병윤씨도 이날 『김일성이 도발한 6·25의 역사적사실 대부분이 북한에서 날조,왜곡되고 있다』면서 『이번 방한기간동안 숨겨진 사실이 많이 폭로,증언될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한·소 정상회담이 통일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현재 소련에서는 각종 매스컴에 남한에 관해 자세히 보도되고 있다』고 전했다.
  • 알바니아 마저 변하는데… /서병철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세평)

    외부세계의 숨가쁜 변화가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폐쇄적인 나라는 알바니아와 북한이다. 그런데 최근 알바니아에서 과거의 완고하던 태도를 바꾸어 개혁정책을 채택하고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 내용이 더욱 우리의 흥미를 끈다. ○고립정책 탈피 서둘러 공산당 제1서기 알리아는 지난 4월 중순 당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알바니아가 유럽공동체와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경제ㆍ정치 이익을 얻고자 한다고 선언한 바 있으며 이어 5월8일에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공식발표하였다. 알바니아가 고집해온 고립정책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여러나라가 참여하는 국제기구 특히 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다국 모임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유럽공동체는 물론이고 공산주의 상호원조회의(코메콘)와의 공식접촉을 회피하고 심지어 주변국 모임인 발칸국가회의와 유럽안보협력회의 참여까지 거부해 왔다. 그 이유는 강대국들이 국제기구에서 지역문제에 간섭할 기반을 굳히며 강대국의 조작에 따라 회의가 운영되어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완강했던 알바니아가 국제기구와 관계를 맺기로 한 일이 북한으로 하여금 세계의 모든 나라가 참여한 기구에서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엔에 가입하도록 정책변화를 유도할 자극을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알바니아의 국부 호사에 이어 1985년 집권한 알리아는 정책 기본골격을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외교 노선을 수정하여 모든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오직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군사력 뿐만 아니라 차관과 기술독점을 동원하여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물가를 조작하기 때문에 상종못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소련이 인구 3백만의 조그만 이단국 알바니아에 경제 제재조치를 취하게 되자 이는 정치적 관계악화로 상승하였다. 그후 사회주의권의 결속을 이루고자 소련이 수차에 결쳐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알바니아는 『인간에게 고뇌를 가져오고 원자무기로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이를 단호히 거부해 왔다. 동서진영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높이 평가받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까지도 유독 알바니아에서만은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를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는 레닌과 스탈린의 이념을 해치는 반사회주의적 발상이며 글라스노스트(개방)도 부르주아 이념을 완성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알바니아는 최근 동서진영 강대국간에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군비축소와 긴장완화 추세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데 그 이유는 초강대국들이 패권주의와 군비경쟁이라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집스럽던 알바니아가 주변 공산국가들이 앞을 다투어 채택하는 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되었다. 알리아는 지난 4월19일 공산당중앙위원회 연설에서 동유럽공산국가에서 일어나고있는 사태를 고려할 때 미국및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가 긴급한 의제라고 백기를 든 것이다. ○인권존중,종교도 허용 알바니아는 서방측 국가들과 관계를 수립하고 유럽안보협력회의에 참여하려면 자연히 문제가 될 인권존중에 관한 조치를 5월9일 미리 취하는 선수를 썼다. 알바니아 의회는 국민들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기 위하여 형법규정을 완화시켰으며 폐지되었던 법무부를 복원하고 피의자가 법원에서 변호사와 상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사형죄에 속하는 항목을 대폭 축소하였으며 연약한 여성에게는 사형이 적용되지 못하도록 배려하였다. 국민들은 해외여행을 위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도 허용되었다. 종교를 설파하는 서적이나 유인물을 배포하는 죄에 대한 항목이 형법에서 제외되었다. 알바니아는 1967년 예배와 종교모임이 법으로 금지외어 마르크스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경고를 가장 충실히 받아들인 무종교 국가가 되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30%인 회교도,10%인 기독교는비공식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폴란드와 헝가리등 동유럽국가에서와 같이 레닌의 동상이 녹여져 교회의 종으로 둔갑하는 일이 가까운 장래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랫동안 금지되어 온 종교가 활기를 띠게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개혁이 자리를 굳힌 일부 사회주의국가에서는 교회의 종 만드는 데 필요한 쇳물은 충분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사람의 모양을 본떠 만든 동상은 불상이 가장 많고 다음이 레닌상이라고 하는데 동의 양으로 따지면 김일성의 것도 크게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알바니아의 고립정책은 수백년에 걸친 이웃국가들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린 역사적 교훈의 결과이며 특히 1912년에는 외세에 의하여 나라자체가 붕괴된 경험까지 갖고 있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44년이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결속시켜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단절시킨다는 명목으로 국민을 누르는 고유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알리아가 호사에 이어 집권한 후에도 전임자의 노선을답습하고 그의 업적을 높이 찬양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집권자가 정치기반을 굳히고 자신의 위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과거의 잘못을 무자비하게 파헤치거나 추종자들을 숙청하는 공산세계의 일반적 경향과는 다른 특징이었다. ○북한의 태도 주목거리 알리아는 호사와 같이 고립주의및 스탈린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알려져 왔으며 이에 곁들여 실용주의자로도 평가받아 왔다. 이제 알리아는 고립주의를 버리고 연간 1인당 국민총생산이 1천달러 미만에 조랑말과 자전거가 주 교통수단인 중세풍의 뒤떨어진 국민경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실용주의를 선택하였다.
  •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남북한 부문」

    ◎북한,정치범 10만5천명 격리 수용/기본권 박탈… 동창회등 「비정치」 모임도 금지/한국은 보안사범 증가… 전반적으론 개선 추세 미 국무부는 세계 각국별 인권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21일 의회에 제출했다. 다음은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가운데 한국과 북한에 관련된 내용의 요약이다. ▷북한◁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들은 주민 개개인에게 보안 등급을 매겨서 이에 따라 직업교육 의료시설 상점 등에 대한 접근과 노동당 입당 허용여부를 결정한다. 89년에도 여전히 북한은 주민들의 가장 기초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조직은 당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신뢰받는 간부에게만 외국 접촉이 허용됐다. 북한정부가 테러리즘의 사용을 포기했다는 증거는 없다. 탈출자들에 의하면 북한 정권은 일부 정치범들을 즉결 처형했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살해됐다. 인권단체인 아시아워치와 미네소타 법률가 국제인권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내 많은 수감자들이 고문ㆍ질병ㆍ기아ㆍ유기 등으로 인해 죽었다. 89년에 한국으로 넘어온 북한 사람들 추산에 따르면 최소한 10만5천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이 집단수용소에 억류돼 있다. 이들은 결혼이 금지돼 있으며 식량을 자급해야 한다. 북한이 오지의 수용소에 억류중인 정치범과 그 가족의 숫자를 한국정부는 약 1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북한에는 12개의 집단 수용소가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 가운데 4개소는 김정일 반대세력에 대해 숙청 작업을 벌였던 82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6천∼1만5천명의 새로운 정치범이 이곳에 수용됐다. 북한의 정치범은 재판없이 구금되며 면회나 통신은 한때 허용했었으나 다시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여행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개인여행은 가까운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국한된다. 정치적으로 믿을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강제이주 조치를 취하며 평양거주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해외여행은 관리,믿을수 있는 예술인,체육인,학자등에 국한되고 이민은 허용되지 않는다. 89년에 북한은 일본에서 열린 단기 세미나에 학생들을 파견했다. 이것 이외에북한이 학생들에게 공산권 밖 국가에서의 연수를 허가한 예는 없다. 지난해 동구 유학생 6명이 망명한후 북한은 해외유학생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지난 59∼82년 사이 북송된 재일교포 9만3천명에 포함된 일본인아내 6천6백37명 가운데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은 1명도 없으며 대부분이 소식불명이다. 대부분의 북송교포들은 북한에서 「주체성 없는 계급」으로 분류돼 곤궁한 의식주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는 1년에 단 며칠만 열리며 지도부에 의해 제안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것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북한에 자유선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장애자들의 평양거주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한국은 권위주의 시대를 떠나 민주화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전진중이며 민주제도와 관행을 강화하는 절차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강력한 공안기관의 활동은 88년에 뚜렷이 둔화됐었으나 89년 들어 다시 증대됐다. 공안합수부가 활동한 4월부터 6월 사이에 보안법 위반혐의로수백명이 체포됐다. 합수부가 해체된 후에도 체포는 계속됐다. 88년 2월 노태우정부 출범후 89년 8월말까지 공안관계 사범으로 2천94명이 체포됐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1천3백15명이 89년도에 체포된 것이다. 일부 보안법이나 노동법 위반 구속자에 대해서는 변호사 면회가 금지됐다. 믿을만한 고문 주장도 일부 있었다. 국회는 사회안전법을 폐지했으나 논란의 대상인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개정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모든것을 고려해 보면 한국은 과거에 비해 훨씬 관대하고 개방된 사회가 되었다. 인권관계자들은 89년말의 소위 정치범 숫자를 약 8백명으로 추산했다. 이 숫자는 정부시설을 화염병으로 공격한 폭력행위 관련자들도 포함하고 있다.
  • “김일성에 권좌 이양이란 없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퇴설」 분석

    ◎김정일의 호칭변경은 정치적 위상 부각조치/김일성 생존하는 한 일부승계는 큰 의미 없어 김일성의 은퇴설이 올들어 심심찮게 나도는 가운데 지난 16일 홍콩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가 또다시 김일성의 조기퇴진설을 들고 나왔으나 대부분의 국내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또는 가까운 시일내에 북한에서의 공식적인 권력승계가 가시화되리라고 전망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도 불구하고 폐쇄의 담을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있고 개방압력 또한 날로 점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일성이 죽기 전에 스스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아들 김정일에게 주석자리를 넘겨줌으로써 비판의 화살을 피하는 동시에 김정일의 권력관리 능력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세습체계를 더욱 확실히 다질 것이라는 가능성은 점칠 수 있으나 그 과정이 그렇게 빨리 이뤄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 국내전문가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김창순씨(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건강이 유지되는 한 김일성은 종신군주로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는 김일성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체제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북한의 원로그룹 등 측근들이 허용치 않을 것이며 또 신진세력 또한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체제 아래서 개혁정책을 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김정일의 호칭중 「경애하는」 또는 「친애하는」이라는 접두어를 「위대한」이라고 바꾼 것은 그의 정치적 인격을 격상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지도자」를 「수령」으로 지칭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성철교수(경희대)는 『북한정권이 권력이양문제를 신중히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이같은 조짐을 외부에 시사한 것은 외부적인 압력과 내부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호도하기 위한 선전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등소평의 은퇴에 비유해 김일성의 퇴진을 예측하는 주장 또한 등이 지난해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를 간과한 성급한생각』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국가주석ㆍ정무원총서기ㆍ당총비서ㆍ당군사위위원장 등 현재 누리고 있는 최고직위중 하나 정도를 조만간 김정일에게 승계할 수는 있지만 이 문제 또한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큰 의미가 없으며 북한권력 내부에 큰 변화가 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김갑철교수(건국대)는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방향제시,김정일의 정책수행 형태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후계체제를 바꾸려 해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구축되어 있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생일인 오는 4월15일 또는 가까운 시일내에 권력승계를 공식화할 조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경제정책의 실패 등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올해안에 노동당 전당대회가 열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지적하고 김일성이 나이가 80세가 되고 제3차 경제7개년계획이 끝나는 오는 92년쯤 제7차 당대회가 열릴 것이며 이때 가서야 김일성의 은퇴문제가 보다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김일성의 사망 또는 건강악화라는 우발적인 상황발생에 따른 김정일의 전면등장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한 외부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등소평식의 2선후퇴 등 김일성의 조기퇴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몇가지 예외가 있겠지만 김일성이 살아있으면서 실권을 이양하는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본사 논평위원인 서병철교수(외교안보연구원)도 『김일성 사후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국가의 권력승계 때 일어났었던 전임자의 격하,주변인물에 대한 숙청 등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막고 시대적인 흐름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김일성 스스로 은퇴하는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이 문제가 단시일내에 급격히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성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에 대한 호칭변화 ▲73년 9월 당중앙 ▲75년 6월 유일한 지도자 ▲83년 2월 영도자 경애하는 지도자 ▲83년 5월 최고사령관 ▲86년 2월 인민의 어버이 ▲87년 5월 위대한 영도자 ▲90년 2월 위대한 지도자
  • 박성철 공석에/북한 중앙통신 보도

    【도쿄 AFP 연합】 북한의 박성철부주석은 북한의 개방정책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숙청됐을 것이라는 외국 추측들을 일축,건재한 것으로 8일 공식 보도되었다. 박성철은 8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이 제안한 「생산증가와 관리개선을 위한 대중동원」 30주년 기념 모임에서 보고연설을 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 집회에는 오진우인민무력부부장,연형묵총리,몇몇 당정치국원들이 참석했다고 도쿄에서 수신된 중앙통신이 말했다. 중앙통신은 박성철이 아직 정치국원과 부주석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확인했다.
  • 북한 권력서열 큰 변동/개방 건의한 군 실력자등 대거 좌천

    ◎사상사업 명목,숙청작업 계속 【도쿄=강수웅특파원】 북한의 부수상을 지낸 정치국위원 박성철이 지난해 10월 모스크바를 방문,극비리에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와 면담했으며 『북한도 개방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고르바초프의 충고를 김일성에게 그대로 전달했다가 권력서열 상위랭킹에서 급전직하,밀려났다고 도쿄(동경)의 북한문제 전문소식통들이 23일 밝혔다.〈관련기사5면〉 소식통들에 따르면 당시 고르바초프­박성철의 면담은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것으로 경제협력요청이 주목적이었는데 박이 귀국후 보고석상에서 『개방과 개혁정책을 취하지 않는 한 석유를 비롯한 필요물자를 공급받을 수 없다』고 주장,북한권력층 내부에 개방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을 비롯,무역담당 책임자였던 계응태등 경제담당자들과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했던 최광참모총장등 군부실력자들이 좌천됐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소위 「사상사업」이라는 명목아래 지난해 10월부터 오는 2월14일까지 북한내의 불평ㆍ불만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적발ㆍ숙청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 북한 “개혁바람 재우기”대숙청 작업/권력서열 대변동의 저변

    ◎참모총장 최광등 군부친소파 몰락/김부자체제 견고히… 무명 김윤혁 6위 부상/페레스트로이카에 호응,박성철도 밀려나 북한 권력서열의 대폭적인 변화는 폐쇄ㆍ고립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내부에서도 개혁과 개방을 둘러싼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현재 개방ㆍ개혁의 주창론자들은 권력서열에서 하위로 밀려났거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나 개방욕구의 확산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북한에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이 되고 있다고 도쿄(동경)의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변혁의 불씨」남아 「북한 권력서열 변동표」가 보여주는 바와같이 북한의 권력서열은 상층부 30여명 가운데 김일성ㆍ김정일ㆍ오진우 3명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최근 1년 사이 전부 바뀌었다. 전혀 미지의 인물인 김윤혁이 6위로 급부상했는가 하면 11위를 고수하던 전병호는 명단에서 아예 빠져 버렸다. 외교담당 박성철은 88년 12월이래 4∼6위를 지켜왔으나 지난해 11월 18위로 급전직하했다. 박은 지난해 10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모스크바를 방문,극비리에 고르바초프와 면담한 사실이 있다고 일본의 북한문제전문가들이 밝혔다. 이때 박은 귀국후 보고석상에서 『고르바초프의 개방ㆍ개혁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한 석유공급을 비롯한 경제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북한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박의 보고는 이후 북한 내부에서 개혁을 둘러싼 여러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됐으나 결과적으로 박은 패배,서열 18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알바니아와 더불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골수 사회주의체제와 부자세습제를 유지하려는 북한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같은 개혁정책 건의는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지난해 연말 시거 전미국무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때 박은 이미 권력서열 하위로 밀려나 박대신 이종옥이 시거전 차관보를 접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의 패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경제관계 담당자 거의 전부에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소련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해 오던 군부에도 몰락을 가져왔다. ○이근모 강제수용소에 참모총장 최광은 김일성과 빨치산활동을 같이하던 동년배로서 최근 군수뇌로 기용된 인물이다. 14∼15위의 서열에 놓여있던 최도 개혁논쟁의 여파로 27위로 후퇴했다. 다만 서철은 자신의 지병 때문에 7위에서 10위로 밀려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때 북한측 대표였던 윤기복은 한때 권력서열랭킹에서 밀려나 있었으나 지난해 11월을 기해 20위로 복위했다. 북한에서의 이같은 대폭적인 권력변화는 70년이래 최대의 것이라고 일본의 소식통들은 밝혔다. 조총련이 발행한 1월18일자 「조선시보」에도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김일성주재로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제6기 17차총회」관련 중앙통신기사가 전재됐으나 권력서열의 변화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보도는 윤기복을 당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했으며 허극성을 당중앙위원후보로부터 위원에,주선성 김성규 이원재 김봉을 최기룡 주영훈 이대세 이학섭 등을 당중앙위원후보로 보선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또 김일성주석이 90년 새해를 맞아각국의 당ㆍ국가지도자들과 연하장을 교환한 명단을 발표,북한과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를 점칠 수 있게 했다. 발표된 명단에 따르면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이름은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을 비롯한 강택민총서기ㆍ양상곤국가주석ㆍ이붕총리ㆍ진운주임ㆍ만리전인대위원장ㆍ교석서기ㆍ요의림부총리ㆍ송평ㆍ이서환서기ㆍ이선염주석ㆍ왕진부주석ㆍ송임궁부주임ㆍ팽진 전 전인대위원장ㆍ등영초전주석 다음으로 16번째 기재되어 있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때 현재의 북한은 중국에 완전히 기울어져 있으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에는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불평불만분자 색출 이런 상황속에서의 박성철을 비롯한 경제담당자들의 개방건의,최광등 군부내 친소파의 관계개선주장은 김일성부자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져 권력서열에서 밀려난 것이라고 도쿄의 소식통들은 분석했다. 이근모전수상 등은 이미 88년 11월이전에 숙청돼 강제수용소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들은 말했다. 현재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평불만자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작업,소위 「사상사업」도 북한내부에 또하나의 정치적 회오리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도쿄의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주시하고 있다. □북한 권력서열 변동표 88년 89년 간부명 12월 4월 5월 9월 11월 비 고 o김일성 1 1 1 1 1 정치국상무위원 o김정일 2 2 2 2 2 〃 오진우 3 3 3 3 3 〃 연형훈 4 4 6 5 5 정치국위원 김윤혁 ­ ­ ­ ­ 6 박성철 5 5 4 6 18 정치국위원 이종옥 6 6 5 4 4 〃 서 철 7 7 7 7 10 〃 김영남 8 8 8 8 7 〃 o계응태 9 9 9 9 28 〃 o허 담 10 10 10 10 8 〃 o전병호 11 11 11 11 ­ 서윤석 12 12 12 12 22 정치국위원 강성산 13 13 13 13 26 〃 홍성남 14 17 17 17 19후 보 최 광 15 14 14 14 27 〃 o한성룡 16 15 15 15 21 〃 현무광 17 16 16 16 14 〃 김복신 18 18 18 18 12 〃 조세웅 19 19 19 19 24 〃 정준기 20 20 20 20 13 〃 강희원 21 21 21 21 16 〃 홍시학 22 22 22 22 25 〃 최태복 23 23 23 23 11 전종 비서 박남기 24 24 24 24 23 〃 서관희 25 25 25 25 25 〃 황장화 26 26 26 26 9 〃 허정숙 27 27 27 27 17 〃 김중린 28 28 28 28 15 〃 윤기복 ­ ­ ­ ­ 20 김 환 ­ ­ ­ ­ 23 (o표시는 당비서)
  • 「김정일 후계」 반대자 대거 수용/북한 정치범 왜 늘어났나

    ◎전 부수상 박금철ㆍ이근모 등 포함/군 고위층ㆍ북송교포까지 대상에/하루 5시간 잠자며 “종신 강제노역”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는 1956년에서 58년에 걸친 「8월종파」 사건 연루자와 가족들을 특정지역에 집단수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후 1958년에서 60년에 걸쳐 실시된 중앙당 집중지도와 1966년에서 70년에 걸쳐 계속된 주민등록사업 과정에서 반혁명 적대분자로 「위해하다고 지목되는 자」들을 색출,수용함으로써 본격화 됐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1개리 정도의 지역에 설치됐던 정치범 집단수용소의 규모는 점차 확대,수개 리를 합친 1개군 절반정도의 크기로 늘어났으며 그 수도 크게 증가했다. 특히 1973년부터 김정일 후계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치투쟁조직인 3대혁명 소조활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그 수용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규모도 더욱 확대됐다. 80년 10월 노동당 6차대회 이후에는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반대자 또는 방해자들을 「반당종파」라는 딱지를 붙여 계속 숙청했고 이 결과 82년 현재 8개지역에 약 10만5천여명이 사상개조사업이라는 명분아래 사회와 격리된 채 종신강제노역에 처해진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된 바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는 1월 현재 지난 82년 보다 그 수와 수용인원에서 각각 50%씩 늘어난 12개지역 15만2천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북한당국은 이들 12개지역 수용소에 대해 비밀번호를 부여,관리하고 있음도 새롭게 확인됐다. 이번에 확인된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 12개지역(지도와 별표참조)중 함경북도 온성군과 회령군 경성군에 있는 것은 전 부수상 박금철을 비롯,전 당비서 김도만ㆍ김광협,전 당정치국후보위원 유장식 등 주로 김일성ㆍ김정일 체제에 반대 또는 비판적 입장을 보였던 반당ㆍ반혁명분자를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자강도의 희천시ㆍ동신군등에는 전 국가보위부장 김병하,전 제7집단군사령관 김양춘,전 제3집단군사령관 정병갑 등 군부와 권력기관내의 불평ㆍ불만분자 등을 주로 수용하고 있으며 함경남도 요덕군,정평군 덕성군에는 대부분 휴전선에 인접한 황해도 강원도 주민을 비롯해 친일ㆍ반동분자로 분류된 자들을 집단이주시켜 사회와 격리해 놓고 있다. 이밖에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 있는 집단수용소에는 유사시 평양에 대한 위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주로 부화범등 잡범과 경미한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다. 정치범 집단수용소의 수용대상 및 수용생활 관리실태 등은 다음과 같다. ▷수용대상◁ 처음에는 주로 반당ㆍ종파분자 또는 반혁명분자ㆍ악질지주ㆍ친일파ㆍ종교인 등과 그 가족들이었으나 점차 노동당의 간부나 당원으로 있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정치인과 그 가족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희생된 정치적 피해자들이 수용인원의 주류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귀국한 북송교포 가운데 북한체제를 비판한 사람들도 상당수 수용되어 있다. ▷수용소생활◁ 수용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새벽 4시에 기상,6시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작업장에 들어가 작업량을 부여받고 7시부터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하오 8시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이들이 하는 작업은 주로 석탄과 광물을 캐는 갱도작업과 벌목,개간 등 중노동이며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하오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자기비판을 위주로 한 학습시간을 갖고 난뒤 취침에 들어간다. 이같은 일과는 휴일도 없이 연중 계속된다. 이들이 주거하는 주택은 통나무로 엮어 만든 귀틀집(4평정도)이나 토굴을 파서 살고 있으며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통나무로 만든 집단주택에 합숙토록 하고 있다. ▷관리 및 운영실태◁ 국가보위부가 수용소의 모든 업무를 총괄 관장,조정 통제하고 있으나 경비업무는 사회안전부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김정일 체제강화를 위해 김정일이 직접 실질적인 모든 권한행사를 총괄하고 있다. 정치범과 그 가족이 일단 수용되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는 공민증을 우선 압류하고 모든 기본권의 박탈은 물론 친지의 면회,외부와의 서신연락 등은 완전히 차단한다. 집단수용소는 표준시설로 외곽철책선,경계초소,내부철책선으로 탈주의 방지와 외부와의 격리를 목적으로 한 방호구조물을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는 관리소ㆍ수용막사ㆍ집단농장ㆍ사상학습소를두어 자급자족체계와 사상개조를 위한 기본적 요소만을 구비하고 있으며 처형장도 설치되어 있다. □수용중인 주요인사 ●성명:김도만 숙청 연월:1967.3 당시의직책:당비서 숙청 이유:당정책에 불만 ●성명:박금철 숙청 연월:1967.4 당시의직책:당정치위원,부수상 숙청 이유:당정책에 불만 ●성명:김창봉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부수상,민족보위부장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김양춘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7집단군 사령관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정병갑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3집단군 사령관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허봉학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대남사업총국장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김광협 숙청 연월:1970.11 당시의직책:당비서 숙청 이유:반당ㆍ종파분자 ●성명:유장식 숙청 연월:1975.9 당시의직책:당정치국후보위원비서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동규 숙청 연월:1977.10 당시의직책:부주석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병하 숙청 연월:1982.1 당시의직책:국가보위부장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경련 숙청 연월:1982.1 당시의직책:부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홍성룡 숙청 연월:1986.2 당시의직책:부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이근모(?) 숙청 연월:1988.12 당시의직책: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 일본의 북한전문가가 포착한 「새 기류」

    ◎“「냉전의 고도」 평양에도 지각변동 조짐”/「빨치산 3세대」인 젊은층서 개방 건의설/“변화는 불가피”… 북측 사회학자들도 시인/「체제모순」 언급 시작… 50년대 소 변신과정과 흡사 북한의 박성철을 비롯한 몇몇 당간부들이 최근 김일성에게 개방정책을 건의했다가 좌천됐거나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고 10일 도쿄의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분석했다.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북한에는 동구의 급격한 변화가 전달되지 못하고 있으며 독재체제 수호를 위한 사상통제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이같은 움직임은 90년대의 북한을 주목하도록 하기에 족한 것이라고 이들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복수의 북한문제 전문가에 따르면 개방정책의 건의는 빨치산 제3세대에 속하는 젊은층에 의해 주도됐으며 한때 북한의 권력서열 상위에 들었던 박성철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지난 88년 11월 조선노동당 정치국원 후보에서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던 전병호와 86년 4월 정치국원후보로 등장했던 이선실은 해임보도도 없이 숙청됐을 가능성이 크다고이들 전문가들은 말했다. 이들 가운데 박성철은 자신이 담당했던 「사업」이 계속 실패,평가절하가 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지난 11월19일 실시된 도ㆍ시ㆍ군 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때에는 당서열 제19위로 처져 있었으며 최근에는 이보다 더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지난해 선거당시 당서열은 김일성ㆍ김정일에 이어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가 제3위였으며 그 뒤를 이종옥 연형묵 김윤혁 김영남 허담 황장엽 서철 김복신 정준기 최태복 현무광 김중린 김창주 강희원 허정숙 박성철 홍성남 윤기복 한성용 서윤석 박남기 김환 조세웅 서관희 홍시학 강성산 최광 주응태가 잇고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동정이 보도된 것은 지난해 7월8일 평양에서의 세계청년학생축전 폐막식에 참석한 이래 4개월만이며 서철노동당 정치국원은 88년 6월24일 이래 1년5개월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지난 연말 동구권에서의 변혁의 와중에서도 북한은 충격을 감춘채 침묵하고 있으면서도 격동의 여파가미치지 않게끔 각종 조치를 취해 왔다. 세계 34개국 주재대사 및 동구권 유학생들의 긴급소환,자체내의 사상통제를 강화한 것 등이 그것이다. 루마니아 사태에 관해서는 12월24일 조선중앙통신에 영문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아제르프레스통신에 의하면 12월16일과 17일 루마니아의 티미시와라시에서 정치불안이 계속되고 있으며 21일 부쿠레슈티에서 반정부 집회와 데모가 행해졌다. 이같은 데모는 루마니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지금 약간의 폭력사태마저 보도되고 있다. 이 사태는 사회질서를 심히 혼란시키고 있다』고 이 통신은 말했다. 조선중앙통신의 이같은 보도는 대외선전용이어서 북한의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기는 하지만 그나마 루마니아의 정치적 대변혁이 된 군중데모에 관해 북한측이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22일에는 평양방송이 루마니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아제르프레스통신에 의하면 21일 루마니아 공산당서기장 차우셰스쿠동지 사회아래 행해진 당중앙정치집행위원회의 회의에서는 인민의 생활향상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차우셰스쿠동지의 제의에 따라 1백50만 이상의 근로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치로써 1990년 2월1일부터 최저임금을 2천레이로부터 2천2백레이로 인상키로 결정했다. 중앙통신은 25일 전날에 이어 루마니아정세의 제2보를 보도,구국전선평의회의 설치를 처음으로 전했다. 이 통신은 외국의 신문보도를 인용,소란이 돌발한 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긴장이 계속되고 23,24일 이틀간 각지에서 격렬한 포화가 교차되었다고 전하고 대부분의 가로가 봉쇄되고 공장은 조업을 정지했으며 상점은 문을 닫은 채 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앙통신은 차우셰스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처럼 북한은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또한 내부의 반대세력도 없으므로 동구권과 같은 변화발전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보아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의 김일성체제에 대한 개방압력의 움직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북한을방문했던 「저지 인 모스크바」(JUDGE IN MOSCOW)지의 소피 퀸 기자가 11일자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게재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사회과학자들은 잠재적인 변화조짐이 북한내에 있다고 시인하고 그 사회에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결국 변화는 회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특히 예전에는 사회주의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소련의 과정과 비슷한 것으로서 소련에서는 1955년부터 처음으로 소련내에 사회주의의 모순이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소피기자는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들 또한 올해의 북한을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 북한 박성철 숙청설/“김일성에 개방 건의 문책”/일 소식통

    【도쿄=강수웅특파원】 북한의 박성철을 비롯한 일부 당간부들이 최근 김일성에게 개방정책을 건의했다가 좌천 혹은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고 10일 도쿄의 북한 전문가들이 밝혔다. 동구의 변혁으로 사상통제등 체제수호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북한 내부에서 이같은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90년대의 북한을 주목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이들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들 전문가에 따르면 개방정책은 「빨치산 제3세대」에 속하는 젊은층에 의해 건의됐다는데 그중엔 북한 권력서열 상위권에 속했던 박성철이 포함됐으며 88년 11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승진했던 전병호와 86년 4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등장했던 이희실은 숙청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 전문가들은 전했다. 북한은 동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돼 있으며 내부에 반대세력도 없어 동구권과 같은 변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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