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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이계백 인터뷰 일시 1997년 6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이계백(인천상업중 5학년때 자원입대)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이규원 치과원장(6·25 편찬위원장)내가 겪은 6·25 사변(事變)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나는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생이었으며, 북한 인민군의 학정으로 인천송림국민학교 정문 앞 친구 유은성 집에서 몰래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 인민군이 그냥 구둣발로 막 들어와 대뜸 “너, 이계백이지!” 하면서 나를 인천상업중학교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인천상업중학교는 인민군 본부였고 그곳에는 좌익 빨갱이 학생들로 들끓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고, 방망이로 나를 쳤다. 이유는 아버지(우익 인사)와 형님(우익 학생)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 씩 고문을 하고, 몇 일이 지났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고문을 당하고 나니까 몸은 이미 말도 못하게 망가져 갔었다. 미국 남북전쟁과 한국 6·25 사변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죽음보다 더 혹독했던 빨갱이들의 고문 며칠 뒤 인민군 장교가 “이놈의 반동분자 즉결처분 해야겠구먼!” 하며 권총을 빼들고 나를 겨누는 것이었다. 친구 유은성이는 그 후 친구인 내가 걱정이 되어 면회를 와서 도시락을 넣어주고 그랬었는데 그날도 또 면회 왔다가 이 권총 장면을 보고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내 곁에 와서는 “친구를 살려 달라!”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장교는 “저놈부터 죽여야 하겠구먼!” 하면서 권총을 내 친구 유은성한테 겨누면서 막 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저 친구는 사상(思想)은 모르며 학업에만 열중하는 학생인데 저 친구가 나 때문에 죽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며 애원을 했더니 인민군 장교는 조금 수그러지면서 내 친구 은성이는 풀어 주고 나 또한 그 위기를 겨우 면하고 며칠 뒤 석방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 괴뢰군이 후퇴하여 인천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우익 활동을 하셨던 형님(이계송·고려대 2학년)은 인천학도의용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6·25 사변 때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바뀌는 세상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사람에 대한 조사, 피란민 안내, 요소요소 경비, 학생선도 등 중요한 일을 인천학도의용대가 했다. 6·25사변 때 인천에서 그때 중·고등학생들은 큰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있었기에 인천학도의용대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950년 12월 18일 내 생애 운명의 날 11월이 들어서자 중공군참전으로 UN군과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본부에서 남하할 준비를 하고 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또 남았다가 북한 괴뢰군(傀儡軍) 점령하에서의 그 몸서리 처지는 고통을 당하기 싫어서였다. 1950년 12월 18일날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도(先導)하여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열초등학교)를 목적지로 삼고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도원고개를 넘어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 행진곡에 발맞추어 구월동을 지나 계속 걸어가서 밤 늦게 안양에 도착하여 1박을 한 후에 계속 걸어가서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을 지나 대전, 대구, 청도를 거쳐서 삼랑진을 지나 마산역 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7일 만이었다. 나는 대구를 지나 경산, 청도, 밀양을 걸어가면서 논밭에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의 얼거나 굶어 죽은 시체를 많이 봤다. 내 친구 유은성과 나는 다른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처럼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3훈련소(통영충렬국민학교)로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역에 머물렀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해병 6기 신병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때마침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모집이 있었다. 친구 은성이가 해병 6기 신병모집에 같이 지원하자고 하기에 같이 지원했다. 해병 6기는 인천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인천출신 중학생(4~6학년, 현재의 고등학교 1~3학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합격 후 진해해병교육대에 가게 되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4일이었다. 이날부터 해병(海兵)교육을 받는데 교육은 빳다를 맞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때 빳다 맞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북한 공산 괴뢰군(傀儡軍)의 고문으로 악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때 20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 해병이 되는 것이어서 빳다를 못 견디고 도망가기도 했다. 참기 힘들고 모진 훈련이 다 끝나고 드디어 정식 입대 날짜가 다가왔고, 1951년 1월 24일 정식해병이 되었다. 5년 2개월 간의 해병대 군복무 나는 진해해병학교로 배치되었다. 아마 신상명세서에 인천상업중학교 출신이 참고된 것 같았으며, 해병학교에서 1년 3개월을 보냈다. 그때쯤 전후방 교류가 있어 전방을 지원했다. 해병여단이 창설되어 금촌에 있는 여단본부에 전속되어 1956년 3월 22일 만기 제대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6·25 사변이 발발하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북한 괴뢰군의 치하에서의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지옥(地獄)이었다.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의 긴 시간이었다. 우리들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발자취와 전사한 인천학생들과 전사(戰死)하신 스승님의 기록을 남겨서 후대에 전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경종·이규원 2부자(父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로 고마워하는 나의 마음을 전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6회를 마치며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현 인천고교 2학년) 학생 이계백은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지원입대하였다. 이계백처럼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학생은 2500명이고 그 중 208명이 전사하였다. 6년제 중학교 2~6학년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208명 인천학생들을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은 인천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에도 인천학생들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기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치과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강철비’ 정우성·곽도원, 이토록 친절한 아재들을 봤나...화제의 ‘초터뷰’

    ‘강철비’ 정우성·곽도원, 이토록 친절한 아재들을 봤나...화제의 ‘초터뷰’

    영화 ‘강철비’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배우 정우성과 곽도원의 ‘초터뷰’ 영상이 화제다.9일 유튜브 채널 딩고 스튜디오 ‘초터뷰’에 올라온 ‘정우성, 곽도원 강철비 인터뷰’ 영상이 사흘 만에 100만 뷰를 돌파했다. 지난 6일 공개된 ‘초터뷰’에는 영화 ‘강철비’의 두 주인공인 배우 정우성과 곽도원이 초등학생과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다. 영상 속에는 초등학생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두 배우의 표정과 함께 친절한 답변을 해주는 모습이 담겨 재미를 주고 있다. 영상은 대기하고 있는 정우성과 곽도원에게 초등학생이 나타나 요구르트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기소개를 마친 초등학생이 “아저씨들은 누구세요?”라고 묻자, 곽도원은 “아저씨는 19금 영화만 해가지고...”라며 어색해했다. 이어 두 배우가 초등학생에게 “두 아저씨 중에 누가 더 잘 생겼어?”라고 물었고,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어린 학생의 모습은 큰 웃음을 자아냈다. 특히 곽도원의 진지한 모습과 반대로 정우성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정우성 쏘 스윗...미쳤다”, “곽도원 당황한 표정 웃겨. 연기인 줄”, “초등학생 귀여워...나도 만나고 싶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 딩고 채널(https://www.youtube.com/watch?v=a9mvreKDN8U&feature=youtu.be)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정우성과 곽도원이 호흡을 맞춘 영화 ‘강철비’는 북한 내 쿠데타가 발생, 북한 권력 1호가 남한으로 긴급하게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첩보 액션 극이다. 오는 1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튜브 딩고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퍼블릭 뷰] 실질적 남북경협지원책, 1000개 기업 희망고문 끝내는 계기로

    [퍼블릭 뷰] 실질적 남북경협지원책, 1000개 기업 희망고문 끝내는 계기로

    1998년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에는 2008년까지 총 193만명의 관광객이 다녀왔고 이 기간에 기업이 투자한 규모는 약 3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북한 병사의 총격으로 우리 관광객이 사망했고 정부는 7월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중단했다.# 금강산 관광·교역 중단 조치로 ‘잃어버린 시간’ 확장일로를 걷던 남북 간 교역은 2010년에 교역액 19억 1200만 달러, 교역 건수 약 8만 4000건의 규모로 성장했다. 2010년 3월 북한의 천안함 폭침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는 5월 24일 남북 간 모든 교역·방북·투자를 중단하는 일명 ‘5·24 조치’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짧게는 7년, 길게는 9년이라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이후 북한의 네 차례 핵실험 등 한반도 긴장 조성 행위가 이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금강산 관광 중단 조치와 5·24 조치로 인한 기업들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 어느 곳보다도 피해의 흔적이 선명한 곳은 1000여개에 이르는 남북경협기업의 삶의 자리였다. 영세한 남북경협기업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로, 선택의 기회도 없이, 갑작스런 정부의 조치로 경제적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었고 1000여개의 아픈 사연은 계속되고 있다. 법·제도는 미비하고 사업환경은 열악하며 예측하기도 통제하기도 어려운 대북 사업의 험준한 길을 걸어왔던 남북경협기업이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사업에 대한 의지가 정부의 조치로 꺾인 셈이다. # 투자·유동자산 피해액 실태조사 후 지원키로 더 나아가 남북경협이 곧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남북 관계의 변화를 바라보는 기다림이 기업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정부는 그간 세 차례의 특별대출과 한 차례의 긴급운영경비를 지원한 바 있다. 다만 기존 지원이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번에 새로운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북한에 투자한 투자자산과 유동자산 등 기업들의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해 실질적인 지원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지원 결정에 담긴 원칙은 국가의 책임성 제고와 형평성이었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인식하에 지난 조치들로 입은 기업의 어려움에 대해 정책적 지원을 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지난해 개성공단 전면 중단과 함께 개성공단기업을 지원할 때의 근거였던 경협보험제도의 틀을 이번 남북경협기업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남북경협기업의 투자자산에 대해 실태조사 확인 피해액의 45%를 35억원 한도로 지원하고 유동자산에 대해 실태조사 확인 피해액의 90%를 70억원 한도로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기업의 운영·관리상 피해에 대해서도 기업별 투자와 교역 실적을 고려해 최소 500만원에서 최대 4000만원까지 차등을 두어 지원할 예정이다. # 정부·기업 갈등 매듭짓고 같은 미래 설계해야 이번에 결정된 지원 방침이 빠른 시일 내에 실제 집행돼 남북경협기업의 경영이 정상화되는 결실을 맺도록 필요한 후속 절차를 조속히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정부는 이번 지원을 통해 정부와 기업 간 오랜 갈등을 종결짓고, 더 나아가 정부와 기업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남북경협의 미래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남북경협이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신혜성 통일부 남북경협과장
  • ‘보석’을 만났다

    ‘보석’을 만났다

    일주도로 따라 한 바퀴…몬블랑 정상서 굽어본 전경에 빠지고…보발롱 해변 일몰에 반하고 아마 개성 강한 신이었지 싶다. 인도양의 섬나라 세이셸을 설계한 이가 있다면 말이다. 그에게 예쁘기만 한 산호섬이 늘어선 풍경은 단조로웠을 거다. 그래서 남성적인 산도 만들고, 파스텔 톤의 다양한 물빛도 안배했을 거다. 해변 여기저기에 땀띠약 같은 분말 형태의 모래와 거친 질감의 모래를 섞어 놓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겠지. 이처럼 세이셸에선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현실과 줄곧 마주하게 된다.세이셸의 첫인상. 사실 기대한 건 몰디브 등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예단이었다. 세이셸은 산호섬이라기보다 킹콩이 사는 해골섬 ‘스컬 아일랜드’에 가깝다. 지형적 특성상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낄 때가 잦은데 이때 느낌이 특히 그렇다. 세이셸은 형성 과정이 여느 열대의 섬과 사뭇 다르다. 1억 5000만 년 전, 곤드와나대륙이 유럽과 아프리카 등으로 분리될 때 파편처럼 떨어져 나왔다. 등 돌리면 화강암 산, 등 돌리면 인도양인 건 이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양이라는 낯선 바다가 주는 지리적 이질성도 신비감을 부채질한다. 풍경도 낯설다. 한낮의 하늘 위로는 갈매기 대신 흰꼬리 열대새가 난다. 저물녘 하늘은 과일박쥐의 차지다. 당신이 선 곳이 아프리카라는 걸 확연히 느끼게 하는 건 음악이다. 음식점은 물론이고, 국제행사장에서도 아프리카 특유의 흥은 빠지지 않는다.세이셸은 원주민이 혼혈인, 즉 크레올(Creole)이다. 초기 정착자인 아프리카와 유럽을 비롯해 인도, 중국 등 다민족이 얽혔다. 기록의 시대 이전의 세이셸은 무인도였다. 프랑스인이 정착해 산 건 1742년부터다. 우리로 치면 조선 영조(18년)가 통치하던 때다. 이 무렵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온다. 물론 일꾼으로 쓰기 위해서다. 이후 19세기 초 아프리카 영토 분할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이 새로운 섬의 주인이 된다. 이후 영국의 속국으로 지내다 1976년 독립했다. 세이셸 사람들의 자부심이 남다른 건 이 때문이다. 언어 역시 크레올어다. 프랑스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과의 소통을 위해 간소화한 언어다. 영어도 광범위하게 쓰이긴 하지만 ‘나라말’의 개념으로 보면 아무래도 불어가 더 가깝다. 하긴 나라 이름 자체가 18세기 프랑스 재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 더 말할 게 없겠다.‘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허니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 유수의 셀럽들과 아랍의 부호들이 선택한 휴양지’. 세이셸 관광청의 홍보 문구다. 맞다. 지금도 마헤섬의 산꼭대기엔 아랍에미리트 칼리파의 별장이 있다. 적지 않은 한류 스타도 허니문 여행지로 세이셸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부유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란 인상도 굳어졌다. 요즘은 다르다. 장삼이사들에게도 그리 먼 낙원은 아니다. 지난해 세이셸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은 1900명 정도였다. 10년 전 20여명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세다. 세이셸은 115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그중 방문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세 섬이다. 수도 빅토리아가 있는 마헤섬을 체류지 삼고, 프랄린섬과 라디그섬을 여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장 큰 섬은 마헤다. 면적은 약 150㎢. 충남 태안의 안면도보다 좀더 크다. 수도 빅토리아는 우리의 인사동 거리처럼 작다. 비좁은 면적 안에 영국의 빅벤을 모티브 삼은 ‘스몰벤’ 시계탑, 셀윈 클라크 마켓 등 볼거리가 빼곡하다. 세이셸 인구 약 9만 3000명 가운데 90% 이상이 몰려 살다 보니 혼잡하기도 하다.출발 전 세이셸관광청 한국사무소에 조언을 구했다. 꼭 체험해야 할 것들을 꼽아 달라고 했다. 첫째는 보발롱 해변에서 일몰 보기다. 마헤섬에서도 손꼽히는 일몰 명소라니 이건 뭐 두말 말고 찾아야 한다. 둘째는 라디그섬에서 자전거 타기. 셋째는 코코드메르 열매 만져 보기다. 행운을 가져다 준단다. 이건 프랄린섬의 발레드메 국립공원에 들어가야 체험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보존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국립공원 밖에서는 구경조차 쉽지 않다. 넷째는 빵나무 열매 먹기. 다시 세이셸로 돌아오게 해 준단다. 다섯째는 알다브라 자이언트 거북에게 먹이 주기. 세이셸을 상징하는 동물과 교감을 해 본다는 의미가 있겠다. 여섯째는 보물 찾기다. 프랑스에 편입되기 이전의 세이셸은 해적들이 발호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해적들은 약탈한 보물을 가져와 섬 깊은 곳에 숨겨 두곤 했다. 거기가 바로 마헤섬 북쪽의 벨옴 해변과 보발롱 해변 사이다. 요즘도 보물 추적자들이 이 해역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니 안 가 볼 수 없다. 우리야 어려서부터 보물 찾기 놀이로 실력을 키워 오지 않았던가.그리고 크레올 축제 엿보기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퍼레이드다. 빅토리아 시가지 전체가 크레올들의 현란한 춤과 땀, 그리고 열기로 가득 찬다. 지치지 않고,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과 흥을 만끽할 수 있다. 앙수시 로드의 산자락에서 일몰 보기는 버킷 리스트로 남았다. 보발롱 해변의 일몰은 물론 명불허전이다. 다만 영화에서 많이 봤던, 그러니 어쩌면 익숙한 것일 수 있다. 추측컨대 앙수시 로드의 일몰은 이와 다를 것이다. 너른 인도양 위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활활 타는 장면과 마주할 수 있지 싶다. 이번 여정의 핵심은 ‘렌터카’다. 누구에게든 열병과도 같은 로망일 터다. 차는 여행자를 자유롭게 한다. 가장 빠르게 낙원을 돌아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헤섬엔 일주도로가 잘 놓여 있다. 다만 서북쪽 폴로네 해양국립공원과 벨옴 해변 사이의 짧은 구간만 찻길이 없다. 섬 가운데에 등뼈처럼 솟은 산을 넘으려면 산간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산길은 대략 네 개다. 그 가운데 몬세이셸 국립공원을 지나는 상수시 도로와 라미제르 도로 주변 풍경이 아주 빼어나다. 이번 여정에선 라미제르로 넘어가 상수시로 복귀하는 것으로 코스를 꾸렸다. 오전 중에 마헤섬 전경을 보고 오후에 저 유명한 보발롱 해변의 일몰을 감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마헤섬 전경 감상의 최적 시간은 오전 9시 이전이다. 먼지 한 톨 없는 청명한 공기 덕에 가장 명징하게 마헤섬 구석구석이 드러난다. 라미제르 도로의 동쪽 들머리는 에덴섬이다. 마헤섬 오른쪽에 있는 몇몇 간척지 중 하나다. 몇 개의 회전교차로를 지나면 길은 곧 산자락으로 향한다. 풍경도 바뀐다. 길은 좁아지고 원주민 집들이 길을 따라 대롱대롱 매달렸다. 첫 번째 전망 포인트는 라루이스 전망대다. 표지판은 없지만 과일장수 몇몇이 좌판을 깔고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 전망대에 서면 에덴섬과 수도 빅토리아 등 마헤섬의 동쪽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몇 뷰 포인트를 지나면 곧 서쪽 해안에 닿는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쪽, 그러니까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앙스 부알로 등의 해변 마을이 이어진다. 관광지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원주민들의 소박한 삶의 공간들이 펼쳐진다. 차를 몰아 북쪽으로 계속 오르면 포로네 해양 국립공원이다. 토파즈 색감의 물빛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변이다. 저 유명한 보발롱 해변이 우리의 해운대라면 여기는 청사포쯤 될까. 유명세는 덜해도 그만큼 한가롭고 적요하다. 낙원 드라이브의 서쪽 종점은 폴로네 비치다. 이후로도 편도 1차선 길이 좀더 이어지지만 결국 막힌다. 상수시 도로는 낙원 드라이브의 백미다. 들머리는 서쪽 해안의 포글로 마을. 작고 예쁜 갯마을이다. 끝자락은 빅토리아다. 길은 몬세이셸 국립공원을 관통하며 지난다. 앞으로는 열대우림이, 뒤로는 인도양의 보석 같은 바다가 번갈아 펼쳐진다. 상수시의 자랑 중 하나는 몬블랑 트레일이다. 전체 거리는 편도 1㎞. 들머리는 상수시 도로의 티 팩토리다. 들머리와 정상의 고도 차는 270m 정도지만 계속 오르막이어서 제법 힘이 든다. 짧은 구간인데도 안개와 비, 햇살이 교차할 정도로 날씨 변화도 심하다. 트레일의 끝자락은 전망대다. 해발 700m 정도. 우리 북한산 인수봉을 닮은 거대한 암봉 위에 조성돼 있다. 들머리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린다. 몬블랑 정상의 조망은 단연 압권이다. 마헤섬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해변 전체가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져 있다. 보석 같은 해변이 줄줄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마을들은 구슬처럼 바다에 매달려 있다. 신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액세서리를 만든다면 아마 저 모양이지 싶다. 그 보석 같은 풍경 위로 흰꼬리 열대새가 유영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는 너른 인도양이다. 수평선 너머엔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있겠지. 신화를 믿는 사람에겐 예서 1600㎞ 떨어진 아프리카가 신기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산 길은 매우 미끄럽다. 빠르게 내려오겠다고 객기 부리다간 낭패를 겪을 수 있다. 글 사진 마헤(세이셸)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6·25 전쟁 발발과 심선택 선생님 나(정태원)는 일제 때 인천창영국민학교를 33회로 졸업하고,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인천상업중학교에 다닐 때 야구선수였으며 6학년 때는 주장을 했었고 그때 야구부 코치는 해병 소위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던 심 선택 선생님(본 참전기 3회 참고)이셨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갑자기 인천에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얼마 지나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면서 길에서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의용군으로 끌려가면 개죽음당한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연수동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 해 지옥 같은 여름을 인민군 치하에서 보내고서 9월이 왔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물러나고 인천은 다시 자유를 찾았다. 우익학생들을 주축으로 인천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는데 대원들은 중학교 학생들이었고 간부들은 대부분 대학생으로, 연대장이 이계송(고려대 2학년)이었는데 이계송은 나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과 나와의 인연 나는 대학생이었고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 이계송이 대장으로 있어서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단체로 남하한다는 소식이 내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인민군 치하의 지옥 같은 생활이 기억나 또다시 인민군이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인천학도의용대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남하할 때 같이 남하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중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려는 내 결심을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동네 후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 우리도 형하고 같이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까지 따라오신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부모님들은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뵌 어머니 모습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약 2500명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였는데,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어머니께서 경동파출소 정문에서 나를 보시고는 손을 흔드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행진하는 대열 속에서 손을 흔들면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날 뵌 어머니 모습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었으며 이듬해인 1951년 4월 15일 내가 진해에서 해병대의 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훈련 중일 때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들은 걸어서 행군하여 수원, 대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17일만인 1951년 1월 3일, 최종 목적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가까운 마산에 도착하였다. 인천에서 마산까지 17일간 걸어서 남하 행군하면서 우리들은 전쟁의 참상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중에도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남하하던 많은 국민방위군 젊은이들이 굶거나 얼어 죽은 소문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기도 했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내가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에 무사히 도착한 날은 인천을 출발한 지 17일째 되는 1951년 1월 3일이었다.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로 15명의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에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인 1951년 1월 4일, 고향 인천에서 같이 내려온 동네 후배 이의범(인천상업중 3학년)이 해병 신병 모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후배들을 데리고 해병 6기 신병모집소로 가서 그 신체검사에 응하였다. 1951년 1월 6일 진해에서 해병 6기 입소 다음날 1951년 1월 5일 아침에 해병 신병 신체검사 결과를 보러 해병신병 모집소에 가니 해병 신병 모병관이 “신병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은 진해까지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진해를 향하여 창원고개를 넘어 진눈깨비를 맞아가며 야간행군으로 밤늦게 자정 넘어서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전원 합격되어 옷을 벗고 새 미군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들은 1951년 1월 6일부터 해병대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해병 6기(인천 기수) 대표로 입대 선서 6기 입대식은 1951년 1월 24일이었다. 6기 입대식 날 나는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6기생 대표로 해병 입대 선서문을 읽었다. 흔히 해병 6기는 인천 기수라고도 말하는데 정말로 6기는 대부분 인천 지역 중학생들이었다. 1951년 2월 10일 해병대 6기로 신병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보병과 포병으로 나뉘어 보병은 즉시 전방 전투지역으로 출동하게 되었고 포병은 그 날로 진해에 새로 생긴 제1포병대대에 배치 받았으며 당시 대대장은 고길훈(高吉勳)중령이었다. 당시 해병대에는 포병부대가 따로 없었으며 처음으로 창설된 해병대 포병대대에 인천 지역 중학생 출신 해병 6기생들이 포병대 창설 요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해병대 제1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참전 해병대 제1포병대대가 창설된 지 얼마 후 우리 부대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출동하여 펀치볼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해병 포병대대는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 장단 고랑포 쪽에 포진하여 장단지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나는 1950년 12월 18일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고, 사병으로 참전한 지 3년 9개월 15일이 되는 1954년 10월 20일 만기 제대하였다. 평생 잊지 못한 말… “우리 아들 부탁하네!”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떠날 때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부모님들이 나에게 하신 “정태원 군,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말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형으로서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같이 자원입대하고, 함께 사병으로 군복무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자부하며 나는 살아왔다. 그러나 15명 중에서 2명은 전사하였고 그 어린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전사는 지금도 나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함께 참전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2500여명 인천학생들이 20일간 마산이나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였고, 그중에서 208명이 전사했다는데 오늘까지도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기록이 없는 것을 형으로서 동네 후배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무쪼록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찾는 일을, 인천상업중학교 후배 이경종과 그 아들 이규원(치과 원장) 두 분 부자가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라며, 인천학생들의 애국심과 애향심이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4회를 마치며 숲에서 시끄러운 소리 내면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지나간 뒤에 숲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다. 정태원 님은 대학생이었지만 장교임관도 포기하고 고향 인천의 중학생 후배들을 데리고 국민방위군을 따라 18일간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끌려간 50만여명의 젊은이 중 약 10만명이 얼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마산까지 무사히 이끌어 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섭섭해하지 않았던 형이 인천에 살았었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해 주신 정태원 님께 글로 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정태원 ▲해병대 6기 ▲성균관대학교 2학년 1930년 3월 15일 : 인천광역시 중구 유동에서 태어남. 1943년 :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입학·졸업. 1950년 12월 18일 : 성균관대학교 2학년생으로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18일간 걸어서 내려감. 1951년 1월 4일 : 국민방위군 참상을 본 후 통영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인천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동네 중학생 후배들과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함. 1951년 1월 24일 : 해병 제6기 입대식날 6기 대표로 입대 선서문을 읽음. (군번 9210161) 1954년 10월 20일 : 대학생이기 때문에 장교임관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장교임관을 포기하고는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서 3년 9개월 15일을 군 복무하고 만기 명예 제대함. ■ 정태원 인터뷰 일시 1998년 7월 28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정태원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 이규원 인사말 안녕하셨습니까? 정태원 님! 저는 6·25 사변 때 인천학생 2500명이 부산이나 마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고 208명이나 전사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꼭 기억해야 할 귀감이라 생각합니다.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정태원 님과 오늘 인터뷰는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1998년 7월 28일 오늘까지도 참전 기록이 전혀 없었던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리라 생각합니다.
  • ‘강철비’ 12월 개봉 확정, 웹툰 연재 시작 ‘정우성X곽도원’ 싱크로율 보니

    ‘강철비’ 12월 개봉 확정, 웹툰 연재 시작 ‘정우성X곽도원’ 싱크로율 보니

    영화 ‘강철비’(감독 양우석 배급 NEW)가 12월 개봉을 확정 짓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제작한 웹툰 ‘강철비: 스틸레인2 FULL STORY’를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 동시 연재를 시작한다. 2017년 12월 개봉을 확정 지은 영화 ‘강철비’는 첫 번째 행보로 웹툰 ‘강철비: 스틸레인2 FULL STORY’의 연재를 시작했다. 개봉 전, 보다 많은 관객들과의 만남을 예고한 ‘강철비’는 가까운 미래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북한 쿠데타로 북한의 권력 1호와 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가 남한으로 피신하면서 벌어지는 일촉즉발 한반도 최대 위기를 그린 이야기다. 웹툰 ‘브이’,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스틸레인’, ‘봉이 김선달’ 등을 통해 이미 웹툰 작가로서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양우석 감독은 2011년 연재한 ‘스틸레인’에서 당시 북한 권력 1호였던 김정일의 사망을 예측한 데 이어 이후 벌어질 북한 사회의 붕괴 및 한반도의 위기상황 등을 예언하듯 그려낸 것은 물론, 하루 조회수 1,000만뷰를 돌파하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기도 했다. 웹툰 ‘강철비: 스틸레인2 FULL STORY’는 ‘강철비’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양우석 감독이 웹툰 제작 전반에 참여한 동시에 영화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웹툰이 제작됐다. 웹툰 속에서 현재의 남북을 둘러싼 전 세계의 정황과 앞으로 펼쳐질 예측불허의 상황 등을 실제보다 한 발 앞서 그려낼 예정으로, 양우석 감독의 놀라운 통찰력과 날카로운 예지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양우석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보고 고민할 때, 이 작품이 냉정한 인식과 상상력의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영화 및 웹툰에 대한 기획 의도를 밝혔다. 또 9월 25일 예고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될 웹툰 ‘강철비: 스틸레인2 FULL STORY’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 동시 연재되며 개봉 이후에도 장기 연재를 예정하고 있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낼 전망이다. 한편 ‘강철비’는 2017년 현재, 북한의 핵 미사일 도발에 미국, 중국, 일본 등 세계 열강들의 관심이 한반도에 초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전 세계의 정세를 뒤집을 극적인 상황들을 영화 속에서 그려낼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대표 배우 정우성이 북한의 권력 1호와 함께 쿠데타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정예요원 엄철우 역으로 분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미지 변신과 강도 높은 액션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여기에 곽도원은 ‘변호인’에 이어 양우석 감독과의 두 번째 호흡을 맞추며 청와대 안보 수석 대행 곽철우 역을 맡아 정우성과 함께 색다른 남북 케미스트리와 열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 뿐만 아니라 김갑수, 김의성, 이경영, 조우진 등 충무로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과 안미나, 원진아 등 신예들이 의기투합한 연기 열전은 스크린을 더욱 뜨겁게 달굴 것이다. 오는 12월 개봉 예정.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퍼블릭 뷰] 초불확실성의 한반도… 그래도 확실한 평화의 길은 ‘통일’

    [퍼블릭 뷰] 초불확실성의 한반도… 그래도 확실한 평화의 길은 ‘통일’

    최근 회자되는 ‘초불확실성’은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 같다. 올 4월 초 미국이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자 핵실험을 예고한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도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급기야 한반도 위기설로 이어졌다. 특히 지난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자행하자 한반도의 전쟁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커지는 대북 적대감… 남북 대립 악순환 우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그나마 기대했던 남북대화는 북한 측이 호응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이 2017년 핵보유국의 기술적 조건을 완성하고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남북 대화의 공간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관련국 간 갈등도 증폭되고 있고,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전술핵 재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도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201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이상 국민의 약 44%가 북한을 경계와 적대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북 적대감의 증가는 남북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 필자가 맡은 통일교육 관련 강의에서 ‘저렇게 도발적인 북한하고 통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교육생들의 질문이 늘고 있다. 특히 북한 6차 핵실험 이후 부쩍 늘었다. 나아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에서 전쟁 불안감이 확산됨에 따라 남북한간 통일보다 ‘평화적 분단’을 선호하는 국민도 늘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올해 7월의 통일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6%가 평화적 분단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평화 의지 결집만이 비극적 역사 되풀이 막아 우리 사회 내에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 또는 적대적 의식 확대는 자칫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인식론으로 작동하기 쉽다. 이러한 적대적 인식론은 새로운 적대와 대결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낼까 우려된다. 이럴 때일수록 평화 지향의 담론과 대안을 통해 북한의 핵 야욕과 과대망상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북한이 극단적인 도발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평화 지향의 노력 이외에는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경험하지 않았는가? 체제 생존 위기를 핵을 통해 해결하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포기하기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공감대 확산과 평화에 대한 의지를 결집시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통일교육으로 한반도 평화 에너지 쌓아야 현 시기의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한반도에 평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 바로 통일교육이다. 평화 지향의 통일교육은 대결과 대립, 전쟁과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해 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격화되고 한반도의 전쟁 불안감마저 퍼지고 있는 상황 에서도 평화 지향적인 통일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文대통령, CNN 인터뷰서 “北 평창올림픽 참여, 평화 만들 계기”

    文대통령, CNN 인터뷰서 “北 평창올림픽 참여, 평화 만들 계기”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까지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경우 남북 간에 결정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1일 공개된 미국 CNN방송과 문 대통령의 인터뷰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이같이 말하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고,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열리는 올림픽”이라며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열린 올림픽에 동·서 양 진영의 모든 국가가 참가했다”고 했다. 이어 “서울 올림픽은 동·서 양 진영의 화해, 그리고 냉전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도 전 세계 인류의 평화와 화합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서 2020년 도쿄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리고 2022년에 북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면서 “2년 간격으로 한국, 중국, 일본에서 올림픽이 연이어서 열리게 되는데 이것을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그런 통 큰 구상을 함께 해보자고 동북아 지역의 모든 지도자에게 제안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의 CNN 인터뷰는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진행됐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내용은 인터뷰 당일 보도됐지만, 평창 동계올림픽과 관련한 내용은 이날 처음 공개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文대통령 “핵개발·전술핵 동의 안 해”

    文대통령 “핵개발·전술핵 동의 안 해”

    “핵으로 맞서면 평화 어려워 한·미 FTA 폐기 언급은 성급” 문재인(얼굴) 대통령은 14일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해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해야 한다거나, 또 우리가 전술핵(무기)을 다시 반입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미국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미국 조야(朝野)와 국내 정치권은 물론 60% 안팎에 이르는 지지여론을 엎고 고조된 전술핵 재배치 논란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전술핵 재배치 요구와 자체 핵무장론에 관해 문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특히 핵개발과 전술핵 재반입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대응해서 한국의 국방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면서도 “북한의 핵에 대해서 우리도 핵으로 맞서겠다는 자세로 대응한다면 남북 간에 평화가 유지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핵 경쟁을 촉발시켜서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할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12일 이낙연 국무총리와 송영무 국방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이상철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이 일제히 “전술핵 재배치를 검토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음에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과 관련, “한·미 FTA를 조금 더 호혜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미국의 희망에 대해 동의하고, 열린 자세로 협의해 나갈 용의가 있다”면서 “협상이 이제 시작됐는데 제대로 협의도 해 보지 않은 가운데 미리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거나 폐기를 얘기하는 것은 성급하고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배넌 “美·中 11월 정상회담서 북핵 담판해야”… 장외서 역할?

    배넌 “美·中 11월 정상회담서 북핵 담판해야”… 장외서 역할?

    “北핵보유 인정, 미·중 정상이 판단…양국 모두 치명타 무역전쟁 피할 것” 오는 11월로 예상되는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의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으며 북한의 핵보유를 일부 인정할 것인지도 미·중 정상의 계산에 달렸다고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주장했다.투자포럼 참석차 홍콩을 방문 중인 배넌은 13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북핵 문제를 풀려면 중국과 미리 담판을 지어야 할 것”이라며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배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던 인물로 지난달까지 백악관 수석전략가로 활동해 왔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전략 폭로, 백인우월주의 두둔 논란 속에 백악관을 떠났으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직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배넌은 “미국에서는 군사적 해결책과 관련한 말들이 점점 많아지기도 했으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비롯해 북한과의 잠재적 대화 쪽으로 나아가려는 이들도 역시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리(미국)가 가장 먼저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북한을 두고 중국과 일대일로 교섭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소수의견이었는데 행정부 내에서 그들은 잠재적으로 북한과 모종의 대화를 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며 “그런 대화에는 내가 그냥 양자관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당사자가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배넌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계산해야 할 문제”라고 답했다. 그는 전날 홍콩에서 열린 글로벌 금융기관 CLSA 주최 투자자포럼 연설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 시 주석과의 협상을 통해 양국의 무역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배넌은 “미국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조사 결과를 정상회담 전에 발표한 뒤 일련의 협상을 통해 상호 무역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라면서 “양국 모두에게 치명타가 될 무역전쟁은 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차이를 좁힐 수 있다면 상호 유대관계는 더욱 강해지고 북한이나 남중국해 같은 잠재적 갈등 요인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내 친구 3명은 결국 고향 송마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 친구 3명은 결국 고향 송마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임시로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 1명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000명과 참전 스승(심선택 소위, 신봉순 대위)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이용화 인터뷰 일시 1997년 10월 12일 장소 인천보훈회관 대담 이용화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아들)자원입대한 이용화와 그의 친구들 임면기 인천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 후 17살에 전사 문병열 인천상업중 4학년 때 자원입대 후 17살에 전사 이하수 인천해성중 4학년 때 자원입대 후 17살에 전사 이용화 김포중학교 4학년 때인 17살에 자원입대 후 12년 3개월만에 만기 제대 1947년 6월 25일 : 송마리 4명의 친구 대곶국민학교 졸업 1950년12월 21일 : 이들은 나이가 어려서 국민방위군 소집대상이 아니었지만, 인민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가기 싫어서 국민방위군을 따라 부산진 국민방위군 제2수용소를 향해 걸어서 남하를 시작함 1951년 1월 11일 : 송마리 4명의 친구는 함께 20일간 걸어 부산진 국민방위군 제2수용소에 입소하였으나 김포에서 부산까지 20일 동안 걸어 내려갈 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고생을 함 1951년 1월 24일 : 송마리 4명의 친구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국민방위군 제2수용소에서 나와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하여 육군으로 자원입대함 1951년 2월 20일 : 이들 송마리 친구는 훈련소와 동래 보충대까지 함께 있었으나 대구 보충대에서 서로 헤어짐 1951년 5월 22일 : 4명의 친구 중에서 문병열이 1번째로 전사함 1951년 8월 12일 : 4명의 친구 중에서 이하수가 2번째로 전사함 1951년 9월 20일 : 4명의 친구 중에서 임면기가 3번째로 전사함 1963년 4월 20일 : 4명의 친구 중에서 이용화만 혼자 살아남아서 자원입대한 지 12년 3개월만에 명예제대함●나의 아름다운 고향 송마리 내(이용화)가 태어나 살던 김포시 대곶면 송마리 동네는 서해가 가까운 매우 아름다운 시골이었고 당시 80여 가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4명의 동생이 있었다. ●내가 겪은 6·25와 인민군 6·25 전쟁이 일어난 일요일은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 밭에서 보리를 베고 있을 때인데 새벽부터 유난히 북쪽에서 ‘쾅,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그때까지도 계속 들려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학교에 갔는데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렇게 지나는 동안 어느 틈엔가 우리 동네에 인민군이 들어오고 어린 학생들까지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피난 생활 나는 위급함을 느끼고 급히 경기도 고양시에 계신 고모님 집으로 피신해 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두 달을 숨어 지냈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물러가자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공부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군이 또 밀리게 되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또 피난을 가야 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1950년 12월 18일이 우리 집 막냇동생 돌날이라 돌떡을 먹는 중에 우리 부모님께서는 피난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심하시는 것이었다. ●4명의 친구 국민방위군을 따라서 남하 1950년 12월 중순경에 국민방위군 영장이 동네 청년들에게 나왔는데 1950년 12월 21일날 국민방위군들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문병열·이하수·임면기·이용화)도 따라가기로 하고 김포에서 출발하였다. 그때 우리는 중학교 4학년으로 어려서 국민방위군 소집대상이 아니었지만, 송마리 3명 친구와 나는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함께 20일간을 걸어서 부산까지 내려갔다. ●국민방위군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하여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군대였으나 1951년 1·4 후퇴 때 국민방위군 50만명 중에서 9만명이 굶거나 얼어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총사령관 김유근 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부산 국민방위군 제2수용소에 입소 송마리 동네 4명의 친구는 6·25 사변 초기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어린 학생들까지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로 끌고 간 것을 알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을 따라서 남하한 것이었다. 인민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던 학생들은 결국 실종됐다. 최종 목적지는 부산진 국민방위군 수용소였으며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국민방위군들이 수용되어 있었던 부산지 국민방위군 수용소에서 약 2주간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국민방위군 수용소는 범일동에서 해운대 가는 쪽에 있었다. 국민방위군은 아니었지만 국민방위군을 따라서 남하한 우리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하여 크나큰 배고픔과 추위의 고통을 당했었다. 고향이 또다시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당해 있어서 우리 송마리 4명의 친구는 나이가 어리지만 군에 자원입대하기로 결정했다. ●17살에 육군 제2훈련소에서 자원입대 송마리 4명의 친구는 함께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교)로 입소하여 약 2주 동안 망가진 일본식 장총으로 열심히 훈련받았으며 사격훈련은 M1소총으로 실탄 6발을 쏘고 수류탄 투척 등으로 마지막 훈련을 마쳤다. 그런 다음 군번을 받고 정식 군인이 된 후에는 동래 보충대를 거쳐 대구 보충대로 갔다. 대구 보충대에서 우리 송마리 4명의 친구는 모두 헤어졌고 나는 당시 대구에 있던 8사단 10연대 2대대 6중대 본부에 배치되었다. 당시 대구에 있던 8사단은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병력 손실을 당하고 대구에 와서 재편성하는 중일 때 내가 배치됐던 것이었으며 그때 한 달 동안 재교육받고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전투 지역은 지리산 일대였으며 그때 2달 동안 공비토벌을 통해서 실전을 경험한 후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이동할 때에는 화물열차에 1개 중대씩 태우고 이동하였는데 이동할 때는 주먹밥도 제대로 못 먹어 많은 고생을 하였으며, 제천을 거쳐서 진부령까지 올라가서 1주일 정도 쉬다가 다시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에서 수도사단과 교대를 했다. 그때 그곳에서 3개월간 여름 장마를 겪으면서 맡은 전투는 1031고지 전투였는데 처음 1차 공격은 야트막한 무명고지였으며, 2차 공격은 854고지이고, 3차 공격이 마지막 목표인 1031고지였다. 처음 공격 시작했을 때는 울창했던 산림이었는데 탈환하고 보니까 함포사격까지 가세하여 1031고지 정상이 7m나 낮아지고 나무가 없는 운동장으로 변하였다. ●송마리 4명의 친구 17살에 자원입대하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이 밀리면서 1950년 12월 21일 우리 동네 인천상업중학교 문병열, 인천해성중학교 이하수, 인천중학교 임면기 등 3명의 친구와 함께 나는 어리기 때문에 국민방위군은 아니었지만 국민방위군을 따라 걸어서 남하하였다. 우리 4명은 송마리, 영등포, 수원, 안성, 괴산, 문경, 의성, 영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 김해, 구포를 20일간 같이 걸어서 지나갔고 부산에서 한날한시에 함께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다. ●17살에 전사한 송마리 고향 친구 임면기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임면기는 부모님께는 효자이고 또한 학구열이 강해 학교에서는 1등을 하는 수재였으며 인천중학교 4학년 때 같이 부산까지 내려가 자원입대하여 8사단에 배치되어 1951년 9월 20일 연기에서 전사하였다. ●17살에 전사한 송마리 고향 친구 문병열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문병열은 정의감이 강해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으며 토론을 할 때도 조정자 역할을 잘했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해내는 친구로 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하여 제5사단 35연대에 배치되어 1951년 5월 22일 전사하였다. ●17살에 전사한 송마리 고향 친구 이하수 국립묘지에 위패만 있는 이하수는 부모님이 늦은 연세에 낳은 외아들로 귀하게 자랐고 항상 명랑한 장난꾸러기로 인천해성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하여 8사단 16연대에 배치되어 1951년 8월 12일 강원도에서 전사하였다. ●강원도 백암산 전투 참전 우리 사단은 지리산 공비토벌 후 강원도 양구 쪽으로 이동해서 약 20일간 재편성을 한 다음 전투지역인 양구군 반상면 문등리 북방 백암산 전투지역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이 지역 전투를 마치고 그간의 병력 손실을 정비하기 위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재투입 되었으며 그곳에서 공비토벌 하면서 재정비하고 이듬해에 다시 854전투 지역으로 재투입되었다. 이후 막바지 휴전회담이 진행 중일 때 쌍방 간에 한 치라도 더 땅을 차지하려는 전투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게 되었다. 휴전이 된 이후에 나는 장기 군 복무를 신청해 각 부대를 전전하면서 국방의무에 충실하였다. ●3명의 친구는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내가 군 복무 연장을 신청했던 이유는 인민군 치하의 쓰라림을 같이 겪다가 1950년 12월 21일 함께 남하하여 군에 입대하였으나, 같이 자원입대한 3명의 친구인 인천상업중학교 문병열, 인천해성중학교 이하수, 인천중학교 임면기가 전사한 것 때문이었다. 나만 홀로 살아남아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군에 그대로 남을 결심을 했던 것이었다. 1950년 12월 21일 날 송마리 4명의 동네 친구는 조국을 지키려고 고향을 떠나 부산진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함께 1951년 1월 10일에 입대하였으나 나 혼자만 1963년 4월 친구들이 함께 자원입대한 지 12년 3개월만에 파란 많은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3명의 이름 영원히 기억되길 기억해보니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4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름이지만 내 가슴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친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병열, 이하수, 임면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3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해주려는 이경종·이규원 부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3회 계속 참전기 2회를 마치며 대곶면 송마리에서 태어나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부산진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한 중학교 4학년이었던 동네 친구 4명이 있었다. 비록 고향 송마리 그 어디에도 전사한 3명의 중학생을 기억해주는 추모비는 없지만 먼 훗날에도 중학교 4학년 학생들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우리는 인천에서 내려오는 학도의용대입니다”

    “우리는 인천에서 내려오는 학도의용대입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임시로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 1명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000명과 참전 스승(심선택 소위, 신봉순 대위)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권유상 인터뷰 ●일시 1998년 1월 19일 ●장소 인천 부평외국어고등학교 교장실 ●대담 권유상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아들)[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회] ■권유상 인천학도의용대 제3대대장 서울대 사범대학 2학년생1928년 12월 21일: 인천 화수동 출생 1942년: 인천송림국민학교 5회 졸업 1948년: 인천공업중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입학 1950년 9월 20일: 인천학도의용대 제3대대장 취임 1950년 12월 18일: 경남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를 향해 남하 1951년 1월 10일: 국민방위군 사건을 듣고 최종목적지를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서 부산의 육군 제2 훈련소로 변경 1951년 1월 15일: 23살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이어서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중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 자원입대 1956년 2월 25일: 5년 1개월을 복무하고 만기 제대 #나와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1928년 12월 21일 인천 화수동 147번지에서 태어난 나(권유상)는 인천송림국민학교와 인천공업중학교(현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때 6·25 사변이 일어났다. 9·15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지역은 북한 인민군치하에서 학정에 시달리던 우익학생들이 모여서 인천학도의용대를 만들어 활동 중이었고 그 본부는 용동에 있었다. 1950년 9월 20일쯤 인천학도의용대에서 나를 3대대장으로 임명하여 나는 인천주안국민학교를 대대본부로 정하였다. 우리 3대대 구역은 남구, 남동구, 연수구였고 대원은 약 1000명이었다. 우리 3대대의 대대부관은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조태휘였고 1중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권용훈, 2중대장은 인천중학교 6학년 이용구, 3중대장은 고려대학교 2학년 최수보였다.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 통영을 향해서 남하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이 밀린다는 소문이 들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의 전 대원 3000여명이 인천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여서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에서 파견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의 인도에 따라 경상남도 통영의 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목표로 남하 행진을 시작했다. 그 날은 함박눈이 왔고 국도를 따라서 수원, 대전, 대구, 청도, 밀양, 삼랑진을 거쳐 통영의 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매일 25㎞(동인천역에서 영등포역 거리 정도)씩 20일간 500㎞ 거리를 인천지역의 6년제 중학교 학생들 약 3000명이 대학생 형들을 따라 도보로 남하했다. #“우리는 인천학도의용대입니다”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걸어서 내려가다가 밤이 되면 농업조합(당시 농민을 위한 기관)을 찾아가 “우리는 인천에서 남하하는 학도의용대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면 밥을 해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우리는 인천을 떠난 지 20일 만에 최종 목적지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 가까운 마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가는 걸 주저한 채 마산에 있으면서 인천학도의용대(대장 이계송) 본부에 보고했다. #국민방위군과 국민방위군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군대였으나 1951년 1·4 후퇴 때 국민방위군 약 9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고향 인천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 1951년 1월 초 우리 3대대 부관 조태휘가 나에게 마산의 해병대 6기 모집에 관하여 보고했다. 대부분의 우리 3대대 대원들이 해병대에 지원했고 해병 신체검사가 끝난 후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6기 해병대원은 대부분 인천 지역 6년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이었다. 나는 우리 3대대의 합격자들에게 “해병대에 가더라도 인천학도의용대의 긍지를 잊지 마라. 그리고 다시 고향 인천에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해병6기는 거의 인천출신 중학교 4~6학년 학생 그때 해병 6기 모집에 합격한 대원은 6년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이었고 탈락한 대원들은 2·3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때 나도 해병대로 자원입대할까도 생각했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작아서 탈락한 대원들 때문에 도저히 해병대에 입대할 수 없었다. 탈락한 어린 대원들이 우리를 버리지 말라는 아우성에 나는 “너희들과 같이 행동 할 테니 우리 다 같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기자”며 어린 중학생들을 달랬다.#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갑자기 군인으로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향하던 인천학도의용대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하여 부산 육군 제2 훈련소로 입소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고 우리들은 마산항에서 배를 타고 약 8시간 걸려 부산항에 도착하여 육군 제2 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 날 입소했다. 부산진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 제2 훈련소에 입소한 날부터 인천학도의용대란 존재는 사라졌고 갑자기 중학생에서 군인이 되었다. 그 후 부산 동대신동 육군통신학교로 가라 해서 많은 인천지역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나를 포함하여 통신병 교육을 받고 통신병이 되었다. #인천 여학생들의 은인, 신봉순 대위님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같이 내려왔던 많은 여학생 대원들은 오갈 데가 없어서 매우 어려웠었다. 그때 부산육군통신학교의 신봉순 대위님은 여학생들을 통신학교 행정보조 업무를 하게 하며 보살폈고 4개월 뒤 여학생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통신병으로 신봉순 대위님은 8·15 해방 후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시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장으로 있었는데 많은 인천학생들을 통신학교로 입교시켰다. 신 대위님은 지휘관 옆에 있는 통신병이 좀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어린 중학생들을 통신병으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 대대장님 누룽지 드세요” 어느 날, 여학생 몇 명이 누룽지를 가져와서 ‘대대장님 드세요’라고 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서로를 감싸주고 생각해주는 따뜻한 마음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에 남아 있다. #육군 중위 장교임관을 거절하고 사병으로 입대 1951년 1월 10일 나는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거절하고 어린 중학생들과 함께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고 1956년 2월 만기 제대하였다. 국가위난의 6·25때 나라를 지키겠다고 뭉친 인천의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은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 입대 후 참전하여 청춘을 채 펴 보지도 못하고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전선에서 보냈다. #“내가 이끌었던 3대대 대원들도 많이 전사”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인천학도의용대 3대대장으로서 어린 중학생들을 인천에서 부산까지 내 나름대로 판단하여 한 점 부끄럼 없이 이끌었지만 너무나 큰 국가 위기로 인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힘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3대대 1000명 중에서 100명 정도 전사했다는데 시국이 너무 급박하여 형으로서, 대대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직까지도 한(恨)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 아무쪼록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발굴 작업이 성공하기를 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2회 계속 참전기 1회를 마치며… ●이경종 위원이 전하는 말 권유상 옹은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거절하고 어린 중학생들과 함께 23살에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5년 후 28살에 만기 제대한 인천지역 어린 중학생들의 훌륭한 형이었다. ●이규원 위원장이 전하는 말 살아 계시다면 올해 90살이 되신 권유상 인천학도의용대 3대대장님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1·4 후퇴 때 인천에 남아있었으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거나,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서 굶거나 얼어 죽을 운명의 인천학생들을 안전하게 부산까지 이끌어서 훌륭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208명이 전사하여 제대 후 고향 인천에서 전사 학생 부모님들로부터 “우리 아들 전쟁터 데려가서 죽었다”라는 비탄의 말을 들었고, 일평생 동안 동생 같았던 전사 학생들을 가슴에 담고 살았던 참전 대학생 형들이 인천에 있었다.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저의 아버지(이경종)를 안전하게 부산까지 이끌어주신 권유상 3대대장님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文대통령 “원래는 올해 사드 1기만 배치 합의”

    文대통령 “원래는 올해 사드 1기만 배치 합의”

    “나머지 5기는 내년 배치였는데 탄핵 후 알수없는 연유로 빨라져 국내법·절차 지키는 것이 중요” 한·미 회담 앞두고 파장 클 듯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대통령이 된 후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원래 한국과 미국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합의할 때 금년 말까지 미사일(발사대) 1기를 야전배치하기로 했다”면서 “나머지 5기는 내년에 배치하기로 합의됐었다”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내법과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탄핵 국면에 들어서고 난 이후 이런 절차들이 서둘러졌다. 그런 가운데 환경영향평가라는 반드시 거쳐야 될 절차가 소홀하게 다뤄졌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매우 충격적(very shocking)”이라고도 표현했다. 지금껏 한·미 간 합의는 지난해 7월 양국 정부가 “늦어도 내년(2017년) 말까지” 사드를 배치한다고 밝힌 게 전부다. 구체적 일정에 대한 합의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한·미 정상회담(29~30일)을 앞두고 외신을 통해 미국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의 우리 정부가 최초 합의를 깨고 의도적으로 ‘과속’을 하면서 국내법 등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됐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새 정부는 촛불혁명에 의해 출범한 정부인데, 촛불혁명은 이전 정부가 무너뜨린 민주주의를 되살려서 절차적 정당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면서 “환경영향평가라는 당연히 거쳐야 될 절차를 밝힌 것은 국민 여론에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중국이 북한의 추가 도발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지만,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할 여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음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희망한다”면서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직면한 사드 배치에 따른 보복성) 모든 제재 조치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하겠다. 이것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은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 탑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는 기술을 머지않은 시기에 확보하게 될 것”이라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거나 6차 핵실험을 실시할 경우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은 양국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뒤 “군비 증강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文대통령 “北 ICBM 발사나 6차 핵실험 강행시 강력한 제재 부과돼야”

    文대통령 “北 ICBM 발사나 6차 핵실험 강행시 강력한 제재 부과돼야”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북한이 머지 않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배치할 기술을 손에 넣게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미국 대통령이 북핵 이슈를 계속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한미가 북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번 인터뷰는 오는 28일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 CBS 방송, 워싱턴포스트에 이어 세 번째로 한 외신 인터뷰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이슈를 그의 외교 어젠다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결단을 해준 데 대해 매우 기쁜 마음이다.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크다”면서 “양국 정상이 북한을 우선순위에 올려놓은 것이 북핵 이슈가 해결될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북한이 ICBM을 시험 발사하거나 6차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추가 도발을 억제하고 북한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달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제재가 부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에는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진행하고 있지 않다. 비핵화를 향한 의미있는 결과가 보장될 때에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문제에 중국이 더 관여할 여지가 있고 중국 측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일각의 해석에 “공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문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의 추가 도발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아직 체감할 수 있을 만한 결과는 없다. 중국이 북한 위기 해결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할 여지가 더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우방이고 북한에 대부분의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나라”라며 “중국의 도움 없이는 제재가 결코 효력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사드 보복 논란과 관련해서는 “곧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기를 희망한다. 시 주석과 만날 기회를 갖는다면 이 모든 제재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하겠다.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의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치·군사적 이슈를 경제·문화 교류와 연계한다면 이는 한중 간 우호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G20에서는 시 주석 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정상과 최대한 많이 만나 북핵 관련 논의를 주요 의제로 끌어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또한,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일본과 더 수준 높은 정보 공유를 희망한다”면서도 “일본이 전시 과거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거나 군비 지출을 늘리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일본이 과거사를 돌아보고 그런 행위가 결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심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국은 물론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가 훨씬 진전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많은 한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부정적 시각을 나타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은 양국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독도 문제에 관해서도 “일본이 계속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 대통령 “시진핑 주석에게 직접 사드 제재 해제 요청하겠다”

    문 대통령 “시진핑 주석에게 직접 사드 제재 해제 요청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달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제재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22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사드 보복 논란과 관련해 “곧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시 주석과 회담하기를 희망한다”면서 “시 주석과 만날 기회를 갖는다면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직면한) 이 모든 제재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하겠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의제”라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G20에서 시 주석 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정상과 최대한 많이 만나 북핵 관련 논의를 주요 의제로 끌어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또 북한이 머지 않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 탑재 ICBM(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할 것이라고 내다보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 이슈를 계속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한미가 북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려면서 “북한이 ICBM을 시험 발사하거나 6차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강한 제재가 부과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오는 29~30일(현지시간)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대가 크다”면서 “양국 정상이 북한을 우선 순위에 올려놓은 것이 북핵 이슈가 해결될 가능성을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에는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진행하고 있지 않다”면서 “비핵화를 향한 의미 있는 결과가 보장될 때에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의 추가 도발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아직 체감할 수 있을 만한 결과는 없다”면서 “중국이 북한 위기 해결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할 여지가 더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인터뷰는 오는 28일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 CBS 방송, 워싱턴포스트에 이어 세 번째로 한 외신 인터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케네스 배, CNN인터뷰서 “웜비어, 고문당했을 가능성 있다”

    케네스 배, CNN인터뷰서 “웜비어, 고문당했을 가능성 있다”

    북한에 최장기간 억류됐다 풀려난 케네스 배씨는 최근 북한에서 석방되고 엿새 만에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와 관련해 “그가 협박당하거나 물리적으로 고문·폭행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케네스 배는 21일(현지시간) 미국 CNN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당하지 않았다”면서도 “그러나 그런 일이 (다른 억류자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케네스 배는 “북한에 억류된 동안 ‘복종하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닥칠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다”며 “오토 웜비어에게 일어났던 일을 고려하면 현시점에서 북한 억류자들이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는 지난해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한 혐의로 체포돼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18개월 만인 지난 13일 그를 석방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고 미국 집으로 돌아온 지 엿새 만에 사망했다. 북한은 웜비어가 재판 이후 식중독 보툴리누스 중독증에 걸렸으며 수면제를 복용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웜비어를 치료한 미국 의료진은 보툴리누스 중독증에 걸린 증거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특히 심폐기능이 정지하면서 뇌 조직이 죽을 때 나타나는 광범위한 뇌 조직 손상이 발견되면서 웜비어가 구타 및 고문을 당했다는 의혹도 짙어졌다. 다만 웜비어 유족이 부검을 거부함에 따라 그의 사인은 미궁에 빠지게 됐다. 웜비어의 장례는 22일 치러진다. 한편 인터뷰 말미 케네스 배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웜비어의 생명도 소중하다. 지금 북한에 억류된 자들과 끔찍한 북한 정권 밑에서 사는 2400만 북한 주민들도 그렇다”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북한 정부에 대한 입장을 취하라. 북한 내 인권 유린에 대응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서연 기자 wk@seoul.co.kr
  • [美웜비어 사망] 文대통령 “北 비이성적 정권… 조건 없는 대화 언급한 적 없어”

    [美웜비어 사망] 文대통령 “北 비이성적 정권… 조건 없는 대화 언급한 적 없어”

    북한에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돌아온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사망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 기조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문 대통령은 20일 미국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는 대화를 언급한 적이 없다”며 “먼저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불과 닷새 전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사를 통해 “북한이 핵과 미사일의 추가 도발을 중단한다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었다. 대화 기조는 유지하되 웜비어 사망 사건에 대한 미국 내 부정적인 기류를 인식해 대화의 전제조건 수위를 다시 높인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당시 6·15 기념사는 북한이 고강도 군사도발을 중단하기만 하면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남북대화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웠던 기존 입장보다 한층 진전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날 CBS방송 인터뷰는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핵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확실한 신호를 보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특히 문 대통령은 “대화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라며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동안 유지해 온 “대북 제재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기조와도 차이를 보인다. 다만 6·15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핵과 미사일의 추가 도발 중단’이 곧 핵 동결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대화 기조에서 크게 벗어난 언급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웜비어 사망으로 미국 내 대북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연일 대화 메시지를 내보낸다면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론이 작용했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미국의 정책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게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라는 점에서 전략적 판단에 따른 일시적 ‘톤 다운’이란 분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이 “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제사회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서 해 왔던 제재와 압박만으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대목에서 대화 기조를 이어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외교부는 웜비어의 죽음이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악영향을 사전 차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심에 빠진 고인의 유가족 그리고 미국 국민과 정부에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면서 “정부는 북한 당국이 현재 억류돼 있는 우리 국민들과 미국인들을 포함한 모든 억류자를 조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부 장관과 통화가 이뤄지면 웜비어의 죽음에 대해 위로와 애도의 뜻을 재차 전달할 예정이다. 강 장관은 틸러슨 장관과의 통화 이후 별도의 방미도 추진할 방침이다. 그럼에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세부적인 한반도 평화 실현 정책을 조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 정부가 6·15 기념식을 기점으로 대북 대화에 힘을 싣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웜비어 사망 사건 이후 다시 제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방미 중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 합동 군사연습 규모 축소를 거론하면서 미국 조야에서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전에는 이번 회담에서 대북 대화에 대한 조건을 양국이 조율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봤지만 문 특보 발언과 웜비어 사망 사건 이후로는 미국이 당분간 북한과 대화의 문을 닫고 제재 강화 기조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에 대한 미국 측의 협조를 얻지 못할 경우 정부의 대북 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발 빠르게 조치에 나섰지만 인권에 예민한 미국은 북한에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보상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며 그 경우 우리 정부도 이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면서 “북한과 핵·인권 등을 두고 큰 틀의 합의를 하지 않는 한 정부의 운신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태영호 北 가족 “태는 짐승만도 못하다” 맹비난

    태영호 北 가족 “태는 짐승만도 못하다” 맹비난

     지난해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55)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가족들이 미국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를 맹비난했다. 3일(현지시간) 방송된 인터뷰에서 태 전 공사의 누나인 태옥란(57)씨는 남한 망명자의 가족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는 소문을 ‘100% 거짓 선전’이라고 부정하면서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 정부의 주선으로 이뤄진 이번 인터뷰에서 누나 태씨는 “모든 가족이 그(태 전 공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한으로의 망명이 그를 ‘짐승만도 못한 더러운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누나 태씨와 동생 태영도(53)씨는 “그는 이제 남한의 선전도구로 전락했으며, 우리 가족에게 수치만을 안겨줬다”며 그들이 태 전 공사와 절연한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을 가족 묘비에서도 지웠다고 밝혔다. 동생 태씨는 “그가 스스로 이 죄를 씻을 수 없다면 나의 아들들과 후손들은 이 죄를 갚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CNN은 평양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씨 남매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강한 신념과 존경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동생 태씨는 “김정은 동지는 계속 전진하고 있으며, 핵 개발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CNN이 인터뷰한 북한 한 퇴역장교도 “우리는 두렵지 않으며,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긴 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위협을 총력전과 핵 공격으로 물리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아내,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한 태 전 공사는 한국에 온 역대 북한 외교관 중 최고위급이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트럼프 저격수 된 클린턴 “김정은과 만남? 말도 안돼”

    클린턴 “내가 대선 패배한 이유 FBI 국장·러 해킹·女혐오 때문” 트럼프 “선거 패자 변명일 뿐” 지난해 대선에서 패배한 뒤 대외 활동을 자제하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을 비판했다. 클린턴 전 장관은 2일(현지시간) CNN에 출연해 “중국과 일본, 한국이 북한 정권에 압력을 넣어 북한을 현실적 변화로, 대화 테이블로 끌어오는 광범위한 ‘전략적 틀’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제의를 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또 “외교 협상은 중대한 일”이라며 “협상은 광범위한 전략의 일부여야지 어느 날 아침 (북한과의 협상 등 외교 사안을) 트위터에 툭 던져 놓을 일은 아니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적절한 상황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북한과 대화할 시점이 아니라 압박을 더욱 강화할 때”라고 말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도 “미국 대통령으로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궁극적인 정당성을 주는 것”이라며 “세상에서 정말로 고립된 이 녀석을 정당화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화당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오자 매슈 포팅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한 토론회에서 “그런(비핵화) 선택을 할지는 북한에 달렸지만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북한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더 큰 고통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갖고 “북한의 매우 위험한 상황 해결책에 대해 협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클린턴 전 장관은 CNN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선 패배의 원인을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러시아해킹, 여성혐오 분위기 등으로 돌렸다. 그는 “코미 국장의 서한과 러시아 위키리크스의 결합이 지난해 10월 28일 나에게 투표하려고 기울었다가 겁을 먹은 이들의 마음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는 내가 승리의 길에 서 있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해커가 민주당전국위원회 전산망을 해킹하고 이를 건네받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뒤 대선 11일 전인 10월 28일 코미 국장이 클린턴 전 장관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재수사 계획을 의회에 서한으로 통보하면서 판세가 역전됐다는 것이다. 클린턴 전 장관은 “만약 대선이 10월 27일 있었다면 내가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확실히 우리 대선에 개입했다. 나에게 타격을 줬고 자신의 적수(도널드 트럼프)를 도왔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의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 그게 작용했다. 여성혐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형의 큰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전 장관의 언급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과거에 클린턴이 나쁜 짓을 많이 하도록 코미 국장이 자유통행권을 줬다는 견지에서 볼 때 (이메일 재수사를 지시한) 코미 국장 사태는 클린턴에게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러시아 이야기는 민주당원들이 선거 패배를 정당화하려고 변명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문재인, WP 인터뷰서 “트럼프 합리적 인물로 생각”

    문재인, WP 인터뷰서 “트럼프 합리적 인물로 생각”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가 2일(현지시간) ‘한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확실시 되는 후보가 미국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존중하라고 요청했다’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문재인 후보는 미국 정부가 한국 대선을 앞두고 지난 달 26일 밤 경북 성주에 사드를 기습 배치한 것을 두고 “미국이 (대선에 영향을 주려는)목적을 갖고 있다고 보진 않지만 그런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으며 이어 “한국 정부가 대선을 앞둔 지금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민주적 절차나 환경 조사, 공청회 등도 없이 사드를 서둘러 배치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미국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했겠느냐”고 되물었다.문재인 후보는 “만약 한국에 (사드 배치와 관련해) 민주적으로 처리할 시간이 더 많다면 미국은 한국인들로부터 더 높은 신뢰를 얻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양국간 동맹은 더 강력해질 것”이라고 했다. WP는 “문 후보가 (사드 강행 처리와 같은) 미국의 행동이 한국내 반미 감정을 키우고 국가 안보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문 후보는 당선 후 한·미 동맹에 변화를 주려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양국간 동맹은 우리 민주주의와 안보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한다”면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중국간 대화를 한국이 뒤에서 지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 동맹과 관련 문 후보는 “양국간의 동맹이 우리 외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믿는다. 한국은 미국 덕분에 안보를 세울 수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나는 한국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는 평양을 비롯해서 어디든지 가겠다. 김정은과 앉아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만나기 위해 만나지는 않을 것이며 핵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이 해결돼야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의 ´대북 전략적 인내 정책 실패´에 동의” 문 후보는 “(버락)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트럼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욱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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