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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바이든 회담 사흘 전, 美 “쿼드 확대계획 아직 없다”

    文·바이든 회담 사흘 전, 美 “쿼드 확대계획 아직 없다”

    커트 캠벨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이 18일(현지시간) 반중 전선으로 평가되는 쿼드(미국·일본·인도·호주)의 확대 계획에 대해 “현시점에서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캠벨은 한미 정상회담을 사흘 앞둔 이날 서면 인터뷰에서 “쿼드는 민주주의가 각국 국민과 더 넓은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함께 내놓을 수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 설립됐기 때문에 확대한다면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인도·태평양 지역의) 역내 협력을 계속 확대할 방법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그 대상으로 한국, 아세안 등을 꼽았다. 코로나19 백신 및 기후변화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쿼드에 부분 참여하는 방안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것이라는 전망과 맥을 같이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달성이 목표”로, “우리의 노력은 이전 정부에서 마련된 싱가포르 및 다른 합의 위에 구축될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보고 반응하려는 듯 미국의 접촉에 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읽힌다. 이에 더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존중한다”는 발전된 표현이 포함되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합의에 명시된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가 대화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2030에 통일 강요 말아야… 中과 척지는 게 옳은지 잘 판단을”

    “2030에 통일 강요 말아야… 中과 척지는 게 옳은지 잘 판단을”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과 척지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면서 “맹미우중(盟美友中)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중 한 국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계속 친구로 지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장관은 지난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의 ‘초월적 외교론’에 공감한다며 “한미동맹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가치동맹적 성격을 평화동맹으로 확장하면 미중 간 패권 경쟁이 동북아 평화를 둘러싼 경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출신으로 통일운동을 이끌어 온 이 장관은 “통일 체제에 대한 비전을 바로 제시하기보다 평화의 시간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졌다”면서 “우리(세대)가 통일을 강요해선 안 된다. 지금의 20~30대가 평화의 시간을 잘 보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창구 정치부장과의 대담.-미국이 대북정책 발표를 앞두고 있는데, 어떤 내용이 담길 거라고 보나. “나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비핵화 해법에 있어서 단계적 접근을 하면서 비핵화 진척에 상응해 제재 문제도 유연성이 발휘될 가능성이 꽤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원칙적 입장을 강조하는 만큼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주의 협력 문제도 일관되게 추진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싱가포르 합의와 같은 명시적인 언급이 없더라도 실질적 해법에 접근할 가능성이 꽤 있을 것이다. 문제는 속도다. 관여 정책이나 외교적 해법 모색이 조기에 진행돼야 북미 간 실질적인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과 밀착하며, 대중 봉쇄 전략을 펼치는 건 우리로선 매우 안 좋은 상황 아닌가. “미국 민주당 정부는 전통적으로 인권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 예상을 벗어났다면 악화된 것이지만 예상 범위 안에 있다. 바이든 정부는 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도주의 협력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안보적 상황과 연계시키거나 속도조절하지는 않을 거다. 인도주의 협력 문제에 있어선 트럼프 행정부보다 좋아진 측면도 있다.” ●대북전단금지법 과대하게 의미 부여돼 -지난 15일(현지시간) 미 의회에서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까지 열었는데 예상했나. “그렇게까지 예상하진 않았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이 법을 반대하는 일부의 의견에 과대하게 의미부여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석지침을 통해 접경 지역의 문제로 한정하고 있음에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확대해석했는데, 표현의 자유나 제3국에서의 대북 활동 자유를 제한한 게 아니다.” -대북전단금지법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있는데. “북한 주민들의 알권리를 제약한다고 하는데, 대북전단이 아니라 평화가 인권의 전제 조건이며 더욱 실질적인 인권 증진을 이룰 수 있는 길이다. 교류 왕래가 많아질수록 이를 통해 더 자연스럽게 북한의 인식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 “코로나19 방역 등 보건의료 협력, 쌀과 비료 등 민생 협력 같은 인도주의 협력이 제재나 북미관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남북 간 협력할 수 있는 지점이다. 비핵화 협상 진행에 따라 비상업용 공공 인프라 같은 건 유엔 제재 속에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더 나아가 비핵화 협상이 충분히 진행되면 제재의 본령인 금융·철강·석탄·섬유·노동력·정제유 등 6가지 분야에도 단계적 해제를 검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북한은 우리의 인도주의 협력을 ‘비본질’이라고 얘기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은 적대관계 청산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도주의 협력을 비본질이라고 표현했겠지만, 그렇게 격하될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표현했던 엄혹한 시기부터 민간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이념이나 정치·군사·안보 문제와 별개로 일관되게 진행돼야 한다.” ●동북아 질서, 평화적 관계로 재편이 美도 이익 -그러나 북한이 계속 거부하고 우리도 실익이 없는데, 그걸 이상적으로만 끌고 나가야 할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자존심까지 다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자존감 속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세니 하명이니 하는 비난은 프레임일 뿐이다. 북미 대화는 그것대로 지지하고, 남북 대화는 이것대로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도 우리의 신념이고 의지다.”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평화동맹으로 확장하는 것은 실현 가능한가. “우리가 미중 간 극단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하나만 선택하는 건 손쉬운 선택이고 잃을 게 많다. 미국도 동맹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동북아 질서가 평화적 관계로 재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 2030세대는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나. “통일에 대해선 이견이 있어도 평화에는 공감한다. 그래서 20~30대 젊은이들과 평화의 시간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기성 세대가 머리를 맞대면 충분히 일치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20대 때 가졌던 통일론을 가지고 30년을 온 것처럼 지금의 20대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통일론, 평화론으로 앞으로 20~30년을 밀고 가야 한다.” -통일론이 아닌 평화론을 얘기했는데, 통일은 포기한 것인가. “통일 방안보다 이제는 거기까지 가는 로드맵이 훨씬 중요해졌다. 1단계 교류와 협력, 투자 촉진과 활성화, 2단계 산업과 자원의 연합, 3단계 화폐와 시장의 공유 또는 통합, 4단계 재정과 정치의 통일 준비 단계가 있다. 굳이 얘기하면 시장통일론인데, 1민족 2국가 2체제 1시장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2개의 시장으로 경쟁적 구도가 되면 남쪽이 북쪽을 수탈하는 형태가 되지만, 유럽연합처럼 하나의 협력적 시장 구도를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삶에서의 통일’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 상태 유지를 원하는 세대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지금의 20~30대는 남북문제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북이 경제적으로 연합하거나 협력하면 남쪽 경제적 성장에 0.5~1.0% 포인트의 추가 성장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후배들이 우리 세대 이겨 내면 세대교체 될 것 -다음주면 4·27 판문점선언 3주년이다. “종전선언은 평화 정착의 입구이자 비핵화의 촉진제로서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제재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도 비핵화의 촉진제가 될 수 있다. 판문점선언 비준안의 국회 동의를 다시 추진하려고 하는데, 국민의 공감대와 남북관계, 야당과의 협력 등 전략적으로 판단할 부분들이 있다.” 4선 국회의원에 여당 원내대표를 지낸 이 장관은 정치 현안에 대한 질문에는 거리를 두면서도 소신을 밝혔다. 정권 재창출에 대한 질문에는 “평화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을 유지하는 데 어떤 상황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한 판단은 분명하다”고 답했다. -4·7 재보궐선거에 대한 평가와 586 퇴진론에 대한 생각은. “코로나19, 부동산, 검찰개혁 등 세 가지 상황 때문에 어려웠는데 진심으로 겸손했어야 했고, 좀더 전략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세대 교체에서 제일 멋있는 건 후배들이 우리 세대를 이겨 내는 것이다. 자리를 안 내주려는 완고한 선배의 얘기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내주고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文 “바이든 즉각 北과 대화 나서야…트럼프 비핵화 변죽 울리고 실패”

    文 “바이든 즉각 北과 대화 나서야…트럼프 비핵화 변죽 울리고 실패”

    “하노이 회담에서 북미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토대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 나간다면 양측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핵화 방법론으로는 동시·단계적 접근이 현실적이며, 단계별로 미국의 양보가 맞아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불가역적’ 비핵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중 갈등이 격화된다면 북한이 갈등을 유리하게 활용하거나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다”며 미국이 북한은 물론 기후변화 등을 고리로 중국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외교적 진전이 2년 동안 멈췄고 심지어 후퇴한 지금, 바이든 대통령이 협상에 시동을 걸어 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를 한반도의 ‘생존의 문제’라고 표현했다. NYT는 다음달 바이든 대통령을 만날 예정인 문 대통령은 다시 중재자 역할에 나설 준비가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의 비핵화 협상에 대해 “변죽만 울렸을 뿐 완전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마주 앉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거듭 밝혔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실제적이고 불가역적인 진전을 이룬 역사적인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2018년 싱가포르 합의를 폐기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트럼프 정부가 거둔 성과 토대 위에서 진전시켜 나간다면 그 결실을 바이든 정부가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북측이 유일한 협상카드를 잃지 않기 위해 핵무기들을 한 번의 합의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단계적 접근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현실적이라는 취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협상의 관건을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로드맵을 고안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NYT는 ‘북한과 관련해 이룰 수 있는 진전에 대해 문 대통령은 기대하고 있지만, 북미 간 깊은 불신을 감안하면 큰 돌파구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美 블링컨 국무 “대북정책 전반적 검토, 추가 제재도 수단”

    美 블링컨 국무 “대북정책 전반적 검토, 추가 제재도 수단”

    “北 향한 외교 인센티브 물론동맹과 조율된 추가 제재 포함”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을 전반적으로 다시 살펴보고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와 외교적 인센티브도 언급했다. 블링컨 장관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 NBC방송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이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국가안보팀이 대북 정책을 전반적으로 다시 살펴볼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 수단에는 북한을 향한 외교적 인센티브는 물론 동맹들과 조율된 추가 제재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답했다고 NBC는 전했다. 블링컨 장관이 추가 제재 가능성까지 거론한 것은 북한이 도발행위 등을 할 경우 대북 강공책을 꺼내들 수밖에 없고 북미 간 갈등 고조가 불가피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연초 노동당 8차 대회 이후 대북 제재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고 ‘강 대 강, 선 대 선의 원칙’을 제시하며 미국의 반응을 보겠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 상태다. 다만 북한이 극력 반대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3월초 열릴 예정인 것으로 알려진 상황 등을 고려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을 향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이 어떤 외교적 인센티브를 제시할지, 북한이 그때까지 도발하지 않고 미국의 반응을 기다릴지 등이 변수로 꼽힌다.청문회서도 “北 비핵 접근법 재검토,나아지지 않고 실제로는 더 나빠져” 블링컨 장관은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도 대북정책을 전반적으로 다시 살펴보고 있다면서 어떤 선택지가 있고 이 선택은 북한이 협상에 나오도록 압력 증대 측면에서 효과적인지, 다른 외교적 계획이 가능할지 등이 검토 대상이라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인준청문회에서 북한의 비핵화 문제와 관련한 질문에 “전반적인 접근법을 재검토할 것”이라면서 “이것은 행정부마다 괴롭혔던 어려운 문제이고 나아지지 않았던 문제다. 실제로는 더 나빠졌다”고 언급했다. 그는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는지, 북한에 압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하는데 유효할지, 다른 외교적 계획이 가능할지 등이 검토 대상이라고 밝혔다. 블링컨 지명자는 “그러나 이는 우리의 동맹과 파트너,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나머지와 긴밀히 상의하고 모든 권유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블링컨 장관은 또 인준청문회 인사말에서 미국은 더 큰 선을 위해 지구상 누구보다도 다른 나라를 동원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서 “이런 원칙으로 인도된다면 전염병 대유행을 극복할 수 있고 중국과 경쟁에서 우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핵심 동맹을 재활성화할 수 있다”면서 “함께 하면 러시아, 이란, 북한이 제기한 위협에 대응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훨씬 더 나은 위치를 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대북전단법’ 우려에… 강경화 “표현의 자유 절대적 아냐”

    ‘대북전단법’ 우려에… 강경화 “표현의 자유 절대적 아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최근 국회를 통과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일명 대북전단금지법)과 관련해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국민 생명권 보호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 장관은 16일(현지시간) CNN 방송에 출연, 미국 의회 내에서 문제 삼고 있는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표현의 자유는 너무나 중요한 인권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북전단 살포로 접경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표현의 자유도 양보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는 유엔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ICCPR)에도 표현의 자유가 법률에 의할 경우 제한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미 공화당 측 인사가 “ICCPR 의무를 명백히 위반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 성격으로도 풀이된다. 강 장관은 또 2014년 북한이 대북전단 풍선을 향해 고사포를 발사하고 우리 군이 대응사격을 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접경지 주민들도 전단 살포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국내외 언론 매체를 통해 “표현의 자유에 기초한 행위에 대해 징역형(최대 징역 3년)을 부과하는 것은 과도하다”며 “법 시행 전 민주적 기관이 적절한 절차에 따라 개정안을 재고할 것을 권고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통일부는 17일 입장 자료를 내고 “킨타나 보고관이 ‘민주적 기관의 적절한 재검토 필요’를 언급한 것에 유감을 표한다”고 반발했다. 정부가 국제기구의 책임 있는 인사의 발언에 대해 즉각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문제가 북한 인권과 결부되면서 자칫 본질(국민 생명권 보장)과 다른 방향으로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다만 통일부의 강력한 반발과 달리 외교부는 “킨타나 보고관 등 유엔 측을 포함해 국제사회와 지속적으로 소통해 나가도록 하겠다”며 수위를 조절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친형 “사명감 투철했던 동생 월북 어림없어”

    친형 “사명감 투철했던 동생 월북 어림없어”

    지난 21일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뒤 북한에 의해 피격된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A(47·서해어업지도관리단 8급)씨의 지인들은 그가 월북을 시도할 사람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다만 최근 가정불화를 겪는 등 개인사로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서울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전남 완도 수산고를 졸업한 A씨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근무하다 2012년 선박항해원 채용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서해어업단이 위치한 전남 목포의 관사에서 동료 2~3명과 함께 생활했지만 조용한 성격이라 활발히 어울리진 않았다고 한다. 부인과 두 자녀는 경남 양산의 자택에서 살고 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A씨를 잘 아는 한 동료 공무원은 “두 자녀 중 하나는 늦둥이라 아직 어리다”며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자 공무원으로 월북을 시도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가끔 술자리도 함께했지만 편향적인 이념 성향을 보인 적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A씨는 지난 14일 자신이 승선하는 지도선인 무궁화호 10호의 1등 항해사로 발령 났다. 다만 한 차례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부인과 최근 다시 이혼해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료 공무원들로부터 2000만원이 넘는 돈을 빌렸으며, 사채까지 썼다는 말도 나온다. 일부 동료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 법원에 A씨 급여 가압류를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형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소연평도 해역에서 실종된 내 동생이 지난 22일 북측 해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전날 오후 기사로 알기 전까지 국방부 등 정보 당국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전혀 없다. 느닷없이 북측 해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담하고 황당했다”면서 “대연평도에 우리 군 경계 초소가 엄청나게 많은데, 실종자가 북측 해역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군이 동생의 ‘자진 월북’을 계속 주장하며 동생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언급하는 것은 자신들의 경계 소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A씨 형은 또 “동생은 사명감이 투철했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단속 업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월북이라는 비극적인 생각을 할 정도의 동생이 전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서울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목포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아베 “조건 없이 김정은 만날 결의 변함없다”

    아베 “조건 없이 김정은 만날 결의 변함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산케이신문 인터뷰 “납치문제 해결 노력은 계속하는 중다양한 루트로 모든 방법 강구할 생각코로나19 대응 불만은 당연한 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일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아베 총리는 우익성향인 산케이신문과의 이날 단독인터뷰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과 관련한 질문에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 위원장과 직접 마주한다는 결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대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이(납치문제 해결)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 다양한 루트로 찬스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결의로 모든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북미 정상 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된 지난해 5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김 위원장을 조건 없이 만나겠다는 뜻을 처음으로 밝힌 뒤 국회 연설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같은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은 해결할 납치 문제가 없다면서 아베 총리의 제안을 무시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6월 2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대변인 발언을 통해 “우리 국가에 대해 천하의 못된 짓은 다 하면서도 천연스럽게 ‘전제 조건 없는 수뇌회담 개최’를 운운하는 아베 패당의 낯가죽 두껍기가 곰 발바닥 같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아베 총리의 주장을 일축했다. 아베 총리는 코로나19 대응이 부실하다는 비판에 대해선 “여러 면에서 자제를 강요당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나 일로 인한 삶의 불안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뭣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는 것은 당연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팩트에 근거해 평가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모범답안이 있을 리 없어 비판이나 불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비판을) 국민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문정인 “김정은, 살아있다…13일부터 원산 머물러”

    문정인 “김정은, 살아있다…13일부터 원산 머물러”

    美 폭스뉴스 인터뷰서 “의심스러운 움직임 없어”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건강이상설’에 휩싸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 “살아있고 건재하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26일 보도된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은 4월 13일부터 원산에서 머물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특보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며 “지금까지 의심스러운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미국 CNN방송은 지난 20일 김 위원장이 수술 후 심각한 위험에 빠진 상태라는 정보를 미국 정부가 주시하고 있다고 보도해 전세계로 건강이상설이 확산했다. 로이터는 지난 23일 공산당 대외연락부 관계자를 인용해 김 위원장이 위독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보도한 뒤 25일에는 중국이 김 위원장에 관해 조언하기 위해 의료 전문가를 포함한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했다고 전했다.다만 로이터는 중국 의료진의 북한 파견이 김 위원장의 건강과 관련해 어떤 것을 시사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아사히 신문도 26일 중국 공산당 관계자를 인용해 301병원에서 의료전문가팀 약 50명을 23일 또는 그전에 북한에 파견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김 위원장 경호요원 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김 위원장이 평양을 떠나 원산으로 피신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도쿄신문은 지난 23일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원산 별장에 체류 중이라면서 김 위원장의 경호요원 중에 코로나19 감염자가 나와 경비 태세에 불안을 느낀 것이 원산 피신의 이유라는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금강산 南시설 철거 압박 속 김연철 첫 방미…금강산 관광 트나

    금강산 南시설 철거 압박 속 김연철 첫 방미…금강산 관광 트나

    한반도국제평화포럼서 기조연설‘올림픽 휴전 제안’에 미측 반응 주목WP 인터뷰서 “도쿄올림픽 계기로北 발사 유예·한미 훈련 유예” 제안북한이 금강산 관광단지 내 노후한 한국 시설에 대해 철거하겠다며 연일 압박을 해오는 가운데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17일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앞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만나 금강산 관광 문제를 논의한 김 장관은 이번 방미 중에 한반도 관련 주요 미국 인사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금강산 관광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에 따르면 김 장관은 17∼23일 한반도국제평화포럼(KGFP) 참석을 위해 워싱턴DC,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한다. 오는 20일 미국평화연구소(USIP)에서 열리는 KGFP는 통일부가 주최하고 USIP와 세종연구소가 공동주관하는 행사로, 김 장관은 이번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김 장관은 이번 포럼 참석을 계기로 미 연방정부 및 의회 주요 인사들과 만나 남북관계 주요 현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최근 미국 국무부 부장관에 지명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등 한반도 관련 주요인사들과도 연쇄 접촉할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북한이 금강산 시설 철거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는 등 남북경협이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번 미국 방문은 금강산 관광 문제 협의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최근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나 “금강산 관광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있고 한미 간에 협의해야 할 문제도 있다”면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같은 경우는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할 때 일부 제재 면제 절차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 입장을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의 ‘올림픽 휴전’ 제안 등에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관심이다. 김 장관은 최근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북미간 신뢰 구축 조치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들고 워싱턴에 가겠다면서, 내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미사일 시험을 유예하고 미국은 한국과의 연합 군사훈련을 유예하는 방식을 거론했다. 또 미국이 북한에 친척을 둔 한국계 미국인을 위해 북한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것도 제안했다. 이밖에도 김 장관은 워싱턴DC 스팀슨센터 및 LA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한국학연구소를 찾아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과 북한 비핵화 견인 및 한반도 평화체제구축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21일에는 USC에서 ‘한반도 평화·경제’를 주제로 공개 특강도 진행한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노영남 인터뷰 일시 1998년 2월 16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치과원장 / 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우리 가족의 수난 내가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일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동구 화수동이었으며 그때 우리 형님이 인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있었는데 6·25사변이 일어나고 인천이 북한 공산 괴뢰군에 점령당했을 때 우리 집은 경찰 가족으로 감시 대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나하고 아래 윗집에 붙어서 살았던 그림 잘 그리는 인천중학교 5학년인 이흥주와 같이 강화도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도 지방 빨갱이들의 득세로 그곳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인천 집으로 돌아와 그때 친구들이 파 놓은 땅굴 속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땅굴 속에서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될 때까지 무사히 넘기고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된 나와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인천 동구 지역에서 인천학도치안대(후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지대장 : 류문길)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남쪽으로 출발할 때 같이 따라서 남하(南下)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남하 이때 안양을 거쳐서 수원까지 걸어갔다. 수원에서부터는 각자 개인행동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때 나는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과 기차 곳간 차 지붕 위로 올라앉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내려가다 들으니까 우리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경상남도 아래 끝 통영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날을 곳간차 위에서만 추위를 견디려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경상북도 청도역까지 와서는 일단 곳간차에서 내려 남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걸으면서 통영 가는 길을 물으니까 통영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청도에서 부산으로 내려간 대원들도 있었다. 내려가는 도중에는 남기라는 곳도 경유하게 되었는데 남기는 땅콩이 많이 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남기를 거쳐서 통영에 도착한 나와 우리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수용하게 되었다.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에서 국민방위군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경계가 심해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수용소에서 주는 식사는 날 김에 뭉친 주먹만한 밥 한 덩어리에 소금을 얹어주면 그것이 한 끼 식사였다. 그 당시 수용소 울타리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으며 그 철조망 바깥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리들을 상대로 김밥을 팔려는 장사꾼들이 많았으며 그 김밥을 사 먹으려는 수용소 안의 우리들과 수용소 경비 간에는 실랑이도 많았다.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하여 합격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인천에서 같이 떠난 학도의용대원들은 계속 수용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수용소에 들어오는 한 대원이 하는 말이 “지금 마산에서 해병대모집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해병대는 세라복도 입는 아주 멋진 군인인데 우리 해병대로 가자.”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와 같이 4명이 방위군수용소를 탈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 수용소를 탈출한 우리들은 통영 부두까지 나와 마산 가는 배를 타려고 동정을 살피니까 배는 아침 9시에 출발한다는데 부두 근방에는 이미 방위군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해 온 우리들을 잡으려고 순찰을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다른 탈출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몸을 숨기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9시가 되어 배가 막 고동을 울리며 떠나려고 할 때 숨고 있던 장소에서 막 뛰어 배에 올라타 통영을 무사히 빠져나왔다.해병대 5기 입대 통영을 빠져나와서 마산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 장소인 어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인천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신체검사 받고 진해로 가서 해병대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육이 끝나고 나는 다시 포병학교에 입교해 6개월 교육받고 해병대 포병이 되었다. 이후 나는 해병 1연대 3포대 소속으로 서부전선 장단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후 1955년 11월에 만기 명예제대했다.전사한 친구 임경선(군번 : 9210577) 임경선은 나하고 친하게 지냈으며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루는 부대 전방에서 ‘펑’ 하고 무슨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바깥에 얼른 나가 알아보았더니 지뢰가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전방 OP(관측소)에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죽었다 하더니 좀 있으려니까 미공군 헬리콥터가 와서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그때 임경선이 그 지뢰 폭발로 전사했는데 임경선은 그 지뢰로 몸체가 흩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있던 관측소와 사고지점과의 거리는 불과 100m 거리였다. 임경선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나하고 친하게 지낸 사이이며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임경선 생각이 떠난 날이 없었다. 꽃다운 나이에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간 내 친구 임경선! 부디 편안히 지내기를 빌 뿐이다. 1933년 중구 전동 336번지에서 태어난 임 경선(林景善)은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으로 호국활동을 하다가, 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생으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자원입대하여 해병 제1 포병대대 3중대 소속으로 1952년 3월 31일 포병대 근무 중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묘지 : 동작동 국립묘지 서16-971)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노영남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 ▲해병 5기 입대 (군번 : 9210583) 1933년 12월 4일 인천 중구 전동 출생 1950년 9월 18일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를 창립하고 호국활동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 1951년 1월 24일 마산에서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중에 해병 5기로 지원입대하여 해병대 포병으로 참전 1955년 11월 17일 입대 4년 10개월만에 만기 제대
  • 볼턴 “김정은 ICBM 발사 않기로 약속…트럼프 예의주시”

    볼턴 “김정은 ICBM 발사 않기로 약속…트럼프 예의주시”

    일각선 “美 대북정책 변화 배제 못해” 日 “중대 위협이자 심각한 과제” 반발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에 대해 미국은 ‘상황을 주시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페루 리마를 방문 중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6일(현지시간) 오전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더 긴 사거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기 않는다는 합의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있다”면서 “대통령이 매우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번 발사체도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라 북미 정상 간 약속 위반은 아니며 따라서 미국 정부가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발사를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은 간접 경고 메시지로 읽힌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앞선 두 차례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두고 북미 정상 간 합의 위반이 아니라고 언급해왔다.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미 의회와 조야에서는 북한의 잇달은 미사일 발사를 비판하고 있다”면서 “이를 트럼프 정부도 계속 못 본 척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이날 미국의 반응과 달리 ‘중대한 위협’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은 이날 기자들에게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가) 우리나라(일본)에 중대한 위협이자 심각한 과제”라고 강조했다고 교도통신 등이 전했다. 일본 정부는 총리 관저의 북한정보대책실을 중심으로 북한이 쏜 발사체의 종류와 비거리 등 정보 수집과 분석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트럼프, DMZ 북미회동 일주일전부터 준비했나

    트럼프, DMZ 북미회동 일주일전부터 준비했나

    주초 인터뷰서 “DMZ서 김정은 만날 수 있어”극적 효과 위해 즉흥 제안 형식으로 공개한 듯지난 29일 트위터를 통해 북미 정상간 비무장지대(DMZ) 회동을 깜짝 제안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소 일주일 전부터 이런 가능성에 대비했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리얼리티 TV쇼 진행자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즉흥 제안 형식으로 전세계의 눈과 귀를 쏠리게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기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DMZ에서 만나고 싶다는 트윗을 공개하면서 “오늘 아침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주 초 이미 김 위원장과 만남에 대해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깜짝 제안이 즉흥적으로 불쑥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사전에 염두에 두고 준비해온 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미 정치전문매체 더 힐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4일(현지시간)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관련 내용을 언급했다고 뒤늦게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힐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방문할 곳 중에 하나”라며 DMZ 방문 계획을 알렸고, ‘김정은이 만나자고 제안한다면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다만 더 힐은 지나치게 사전에 대통령의 일정이 공개될 경우 생길 수 있는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백악관이 비보도를 요청함에 따라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 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기자들에게 이번 순방 기간 김 위원장을 만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와 이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여운을 남긴 바 있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DMZ에서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는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한달여 앞둔 지난해 4월 30일 트위터 글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후보지로 판문점을 언급했다. 판문점이 제3국보다 더 대표성을 띠고 중요하며 지속 가능한 장소일 것인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문한 바 있다. 그 상징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다만 이번 DMZ 회동 가능성에 대해 극소수의 참모들만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트윗이 아시아의 외교단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에게도 허를 찌른 것이었다며 “DMZ에서의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의 만남을 위한 진지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 불허’를 좋아한다”고 보도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트럼프 “김정은, 핵시설 5곳 중 1~2곳만 폐기하려 했다”

    “金 제안에 다른 3개 어떻게 할 거냐 물어” 하노이회담 결렬·교착상태 北 책임 강조 핵시설 숫자 특정 등 구체적 내용 첫 공개 “北에 협상 재개 조건 언급한 것” 분석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한 내 핵시설 5곳 중 1~2곳만 폐기하려 했다고 밝혔다. 하노이 회담 결렬 및 현재 교착상태의 책임이 북한에 있음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의 핵시설 수를 5개로 특정한 것은 처음이어서 협상 재개의 조건을 언급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폭스뉴스에서 ‘이란의 핵보유를 용인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면서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핵시설 1~2개만 없애길 원하기에 내가 ‘다른 3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며 “김 위원장에게 ‘당신은 협상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 ‘그건 좋지 않다’고 했다”면서 “협상을 할 거면 ‘진짜 협상’을 하자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간 김 위원장은 일부 대북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제안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외 시설까지 폐기하라’고 요구하며 하노이 회담이 결렬됐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협상 조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건 처음이다. 북한의 핵 관련 시설은 플루토늄 재처리시설, 우라늄 농축시설, 고폭 시험장, 우라늄 광산 등을 포함해 30곳이 넘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특정한 핵시설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한미 군 당국은 영변 이외의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북한 황해북도와 평안북도에 각각 1곳씩 있다고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6월 미국 국방정보국(DIA)이 2010년 강선으로 알려진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를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평양 외곽 천리마구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이 인정한 적은 없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원심분리기를 강선을 포함한 여러 시설에 분산해 두었다는 분석도 있다. 원심분리기 약 1000개를 1년간 가동하면 핵무기 1기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우라늄 약 25㎏를 확보할 수 있는데, 단지 지하 공간 180여평(600㎡)이면 이 정도 시설을 구축할 수 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비핵화 조치를 하노이 회담에서 거론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이 없애겠다고 했다는 한 두 곳은 영변 핵시설과 풍계리 핵실험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북미는 최근 교착 상태의 책임이 서로에게 있다고 번갈아 주장하고 있다”며 “트럼트 대통령의 언급은 북한 책임임을 강조해 미국 내부 여론을 관리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그들(북한)은 지난 2년 동안 어떤 실험도 하지 않았다”며 “차트를 보면 실험 24건, 22건, 18건, 그리고 내가 취임하고 나서 잠깐은 꽤 거친 말을 주고받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실험이 없었다”고 외교 성과를 강조했다. 서울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文대통령 2주년 대담] 사전질문지 조율도, 대역도, 리허설도 없어 ‘파격’

    깜짝 질문·설전 장면도 이례적 연출 ‘독재자’ 주장 질문엔 엷은 미소 비쳐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내 언론 인터뷰는 형식 면에서 파격이었다. 9일 청와대에 따르면 이른바 ‘성역 없는 질문’을 위해 방송사 측과 사전 질문지를 조율하지 않았고, 흔히 ‘가게무샤’(대역)를 두고 진행하는 리허설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국민소통수석실 중심으로 현안별 비서관실마다 실무회의를 진행한 뒤, 문 대통령이 취합 자료들을 열독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 대기도 제1부속비서관 정도로 최소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진행자에게 외빈 접견에 사용되는 한옥인 청와대 상춘재를 소개하며 “이 계절이 가장 아름다울 때인데 밤이 아름답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답변 자료도 들지 않았고 프롬프터도 없었다. 초반엔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여유를 찾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왼손 제스처를 써 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자연히 ‘깜짝 질문’과 설전 비슷한 장면도 이례적으로 연출됐다. 대통령이 질문에 혼선을 빚으면 사회자가 재차 묻거나, 대통령 발언 도중 끼어드는 대목도 있었다. ‘판문점 정상회담 때 도보다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어떤 얘기를 했는지 풀어 주실 수 있나’라는 질문에 문 대통령은 “저도 사실 그때가 참 좋았다”고 공개했다. 야권의 ‘독재자’ 주장 질문에는 대통령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쳤고, ‘선 적폐청산 후 협치’ 발언 진위 질문에는 설명하며 두 손을 번쩍 들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맞지 않는 얘기다. 촛불로 탄생한 정부를 좌파 독재로 규정하는 것은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다”고 답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최저임금 인상 질문에는 짧은 한숨을 쉬며 “답변 자체가 조심스러운데요”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운정호수공원과 북한산 조망 가능한 ‘야당역 파크뷰테라스’ 분양

    운정호수공원과 북한산 조망 가능한 ‘야당역 파크뷰테라스’ 분양

    근래 부동산시장에서는 조망권 확보 여부가 시세의 가늠자 역할을 하고 있다. 주거 쾌적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조망권의 가치가 커지며 부동산 임대형 상품 매매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주택산업연구원이 2016년에 발표한 ‘미래 주거 트렌드 연구’ 자료에 따르면, 미래 주거 선택의 주요 요인으로 교통 편리성, 생활 편리성, 교육 환경을 제치고 ‘쾌적성’이 1위를 차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너스산업개발이 야당역과 5분거리에 위치한 운정호수공원 인근인 경기도 파주시 야당동에 `야당역 파크뷰테라스’의 분양에 나서 눈길을 끈다. 대지면적 2603.400㎡, 건축 연면적 2만 5067.360㎡, 지하 1층~지상 20층 규모의 생활형숙박시설 총 416실과 상가 30실이 공급된다. 특히 전체 416세대가 7층부터 19층에 배치해 시원한 개방감과 우수한 조망권을 확보했다. 북측 세대는 72만㎡의 아름다운 운정호수공원 전용뷰를 지니고 있으며 동측 세대는 탁 트인 황룡산 전망과 멀리 북한산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남측 세대는 일산 신도시의 일몰을 배경으로 야경의 환상적인 경관을 볼 수 있다. 입주자 편의를 위한 20층 스카이라운지와 루프 탑 옥상정원에서 사방으로 탁 트인 아름다운 뷰를 감상할 수 있으며, 휴게공간과 쉼터로 활용할 수 있다. 층고는 4.2m에 달하며 지상 2층부터 6층까지 주차시설은 447대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다. 공급 주택형은 전용면적 기준 A타입(21.112㎡) 351실, B타입(24.960㎡) 52실, C타입(36.646㎡) 13실로 구성돼 있으며, 광폭테라스(1.5m)를 적용해 공간 효율성을 강조했다. 다락과 테라스를 합친 실사용 면적(서비스면적)은 A타입 14.507㎡(구 4.39형), B타입 16.340㎡(구 4.95형), C타입 25.142㎡(구 7.61형) 등 서비스 면적이 넓은 편이다. 운정 최초로 전 실이 복층과 테라스를 탑재해 희소가치가 부각되며 공간 효율과 개방감이 돋보이는 평면 설계로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복층형 상품은 상대적으로 공실률이 낮고 프리미엄도 큰 편이라 투자자나 임대 수요자 모두에게 선호도가 높다. 복층은 공간 활용도가 높아 실용성이 크다는 특징을 지닌다. 복층은 대부분 서비스 면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는 분리 공간으로 계단 하부 공간 벽면은 다양한 수납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고, 2층은 드레스룸이나 침실, 작업실, 메이크업 룸, 짐을 보관하는 용도 등 다양한 활용으로 여유롭고 아늑하게 생활할 수 있다. 야당역파크뷰테라스는 풍부한 임대수요도 확보할 수 있다. 세계 최대 파주 LG디스플레이 공장증설 확장과 가까이에 일산 킨텍스, K컬처밸리, 파주출판단지, 고양테크노밸리, 파주산업단지, 롯데세븐페스타, 한류월드, 방송영상콘텐츠밸리, 장항지구개발예정 등 풍부한 배후시설이 임대수요를 지원한다. 단지 주변에는 운정이마트, 운정홈플러스, 롯데프리미엄아울렛, 운정스포츠센터와 메가박스, 관공서와 법조타운 등의 생활 인프라가 완비돼 있다. 홍보관은 경기도 파주시 경의로 에펠타워에 위치하며 관련 문의는 대표전화를 통해 하면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김탁수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11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김탁수(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대원)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어머니의 죽음 1950년 5월 3일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하였던 그해, 6월 25일 사변이 터졌다. 내가 당시 살던 곳은 금곡동이었으며 10남매의 장남인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살았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전함들은 인천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함포탄은 우리 집 근방에도 날아왔으며 급기야는 우리 집에도 함포탄이 떨어져 그때 피란을 안 가시고 홀로 집을 지키시던 어머니께서 그 함포탄 파편 때문에 돌아가셨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창설 이때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나의 모교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의 군악대로 창설되어서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원으로 9월 말일부터 활동하게 되었다. 그때 군악대는 인천학도의용대 지대 창립식에 동원되었으며 위문행사와 선무공작 등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통일이 되는 줄 알았던 우리나라가 갑작스런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또다시 시국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들리는 소식은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과 겨울철로 접어들어 우리 국군의 전투력 부족으로 인하여 국군과 UN군은 날마다 밀리고 있다는 뉴스만 들리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드디어 인천학도의용대가 부산을 향해 남하(南下)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군악대원들, 윈자호 수송선 타고 남하 1950년 12월 24일, 전황은 더 급박(急迫)하게 움직여 군에서 마련해준 윈자호라는 수송선으로 우리 군악대 25명과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같이 지금 인천역에 있는 파라다이스(오림포스)호텔에서 가까운 부두에서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다. 3박 4일을 배 안에서만 지낸 우리들은 1950년 12월 27일 부산항 부두에 도착했다. 이날 축 늘어진 모습으로 부산부두에 올라선 우리들은 부산극장 옆에 있는 어느 큰 창고에 여학생들과 같이 묵고 있다가 동대신동에 있는 육군통신학교 부속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잠자리는 해결이 되었는데 며칠 동안은 각자 가지고 간 돈으로 먹는 것은 해결하였지만 그 돈이 떨어지니까, 이제는 끼니를 때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1951년 1월 초 그렇게 고생스럽게 부산 생활을 하던 중에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占領)당하게 되었다.군악대원 모두 육군종합학교 군악병 입대 오갈 데가 없게 된 우리들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 심유권 소위였다. 그때 심유권 소위가 말하기를 “지금 육군종합학교에는 군악대가 없어서, 군악대가 필요한데 너희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는 갈 곳이 없으니까 숙식(宿食)이 해결되는 육군종합학교 군악대로 입대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12일이었다. 그때쯤은 이미 고향 인천은 인민군에게 또다시 점령당해 돌아갈 수도 없어 군에 들어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육군종합학교에 입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인천에서 수송선을 타고 같이 남하했던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육군통신학교에 계셨던 인천상업중학교 은사님이신 신봉순 교육대장님 배려로 부산육군통신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래 육군종합학교에서의 군악대 생활 육군종합학교로 간 우리들은 10여일 간 간단한 제식훈련만 받고 1951년 1월 23일 자로 군번을 받았다.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군인이 되어 바로 육군종합학교 행사에 동원되어 군악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때의 행사는 주로 장교후보생을 졸업시켜 소위로 임관시키는 임관식과 간부후보생 입교 행사였다. 당시는 전방에 장교가 부족해서였는지 매주 월요일에는 입교식이 있었으며 임관식은 토요일마다 있었다. 1951년 12월 육군종합학교는 전 부대가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목포로 갔으며,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 새터를 잡아 학교 명칭도 육군보병학교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광주 상무대에서 군악대 군악병 생활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는 육군보병학교, 육군통신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기갑학교, 77육군병원 등이 집단으로 주둔하였으며 이 5개 부대를 통틀어 상무대(尙武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상무대는 육군의 교육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육군 교육총감부 직속하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악대의 명칭도 상무대 군악대로 바뀌었으며, 행사 범위가 커지면서 상무대 군악대의 바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1955년 2월에 나는 상무대에서 서울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로 전속되었다. 그곳에서 2년 가까이 군악대 생활을 하다가 길고 긴 6년 8개월의 군 생활을 육사에서 마치게 되었다. 동생 김윤수, 무전기 찾아 나오다 전사 내 동생 김윤수(金潤洙·큰 사진 빨간 원안)는 1934년 5월 11일 용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부산까지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통신병(군번 0240856)으로 자원입대하였다. 무선통신병으로 강원도 전투지역인 5사단 35연대에 배치되었다. 그때 오대산 누그미 전투에서 609무전기를 등에 지고 전투하며 전진하던 중에 적의 기습으로 갑작스런 후퇴로 잠깐 땅에 내려놓았던 무전기를 미처 간수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후방에 와서 보니까 지휘관이 큰 소리로 “군에서 전투 중 통신병이 통신기재를 분실하면 즉결처분으로 총살이다!”라고 고함치니까 내 동생 김윤수는 다시 그 지역으로 가서 그 무전기를 찾아가지고 나오다가 적의 총탄에 맞고 전사했고, 유해는 그만 찾지 못하고, 무덤도 없이 동작동 국립 현충원 봉안관에 위패(6-7-118)로만 봉안되어 있다. 감사의 말과 남기고 싶은 말 이상이 내가 걸어온 중요한 줄거리이다.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채 피지도 못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간 내 동생 김윤수의 넋이 편안하게 잠들기를 빌 뿐이다. 무덤도 없는 동생의 행적을 글로나마 남기게 해주어 무겁던 내 마음을 다소나마 덜어 준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에게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21회를 마치며 69년 전, 인천에 형과 아우가 살았었습니다. 해방이 된 지는 5년 만에, 정부 수립 3년 만에 국가 멸망의 위기가 닥쳐서 2형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형은 하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동생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2형제는 부산에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동생은 중학교 3학년 16살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생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은 동생에 대한 형의 슬픔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가 있겠습니까?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김윤수는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에 전사(戰死) 학생(學生)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0회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송성환 어머니·친형 인터뷰 일시: 1999년 2월 15일 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271-5 장간란 씨 자택 대담: 장간란(전사학생 송성환 어머니) 송종환(전사학생 송성환 친형)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송성환은 전쟁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친형의 인터뷰로 대신합니다.친동생 송성환에게 부모·집 지키라고 당부 6·25사변 때 나(송성환의 친형 송종환)는 철도공무원으로 철도국에 다녔다. 1950년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우리 인천이 또다시 북한괴뢰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자, 그해 12월 초에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소집통지서가 나한테 왔다. 1950년 12월 17일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에 모인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과 같이 남하하였다. 나는 남하하는 전날 밤 내 동생 성환이에게 너는 아직 어리니까 부모님 모시고 집을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하루 50㎞씩 걸어 국민방위군 수용소 도착 1950년 12월 17일 날 나는 인천에서부터 걸어서 내려가서 이듬해 1951년 1월 3일이 되어서야 경상남도 통영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때 하루에 120리(약 50㎞) 길을 걸었을 때도 있었는데 내려가는 도중에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문경새재도 걸어서 넘어갔으며, 고생고생하며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하였다. 그때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곳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제3 수용소였으며 그곳이 마지막 집결지였다. 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친동생 송성환 만나 그때 막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도착하였는데 “형”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까 거기에는 생각지도 않게 내 동생 송성환이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동생 성환이가 “형이 인천에서 내려간 이튿날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여 여기 통영까지 오게 되었는데 와서 보니까 인천에서 떠난 국민방위군(제2국민병)이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형님이 이곳에 오지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이러한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성환이는 자기가 갖고 있던 양담배 채스타 한 갑과 끼고 있던 은반지를 내게 빼 주면서 “형, 나는 아직 쓸 돈이 남아 있으니까 염려 말고 이것 받아요. 우리들은 곧 부산에 있는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들어가니까 형 몸조심하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친동생 송성환이 준 은반지 팔아 밥 사 먹어 그때 나도 동생에게 “군에 입대하더라도 몸조심하고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때 내 동생이 준 은반지를 팔아서 허기를 달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통영 방위군 제3 수용소(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3월까지 수용되어 있다가 제주도로 건너가 육군 제1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 060 군번을 받고 육군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육군 보충대를 거처 강원도 전투지역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5사단장은 민기식 준장이었다. 그때 내가 간 전투부대가 5사단 27연대 2대대였다. 이때 3대대에는 인천학도의용대로 인천에서부터 같이 온 내 아우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그때 우리 5사단이 속해 있는 군단이 포위되면서 후퇴할 때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인제 전투에서 당한 손 부상으로 명예제대 그때 포위당해 매일 걸어서 후퇴하는데 며칠 몇 밤을 잠을 못 자고 후퇴만 하니까 그때는 ‘잠 한번 실컷 잤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 그때 내가 인제 전투에서 손에 부상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인데 며칠을 후퇴하면서 전투하느라 씻지를 못해 손을 치료해야 하는데 손에 때가 많이 묻어 있어 간호사한테 손 내밀기를 주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 해 1951년 10월에 그 부상으로 인하여 나는 상이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친동생 송성환의 전사 사실 뒤늦게 알아 이렇게 제대를 하여 인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내 동생 성환이의 전사통지서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 전사통지서를 받으신 우리 아버지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속이 상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전사한 동생 때문에 한이 되시어 상심하시다가 동생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2년 뒤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사단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거의 같은 날에 동생은 전사하고 나는 부상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대한 후에야 알게 되었으며 제대하기 전 5사단에 있을 때 내 동생 친구들은 동생이 전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송성환 어머니 “전사 아들 생각 때마다 눈물” 우리 성환이는 6년제 공립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이었던, 사변 나던 해(1950년) 겨울 집을 떠날 때 전쟁에 나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떠났어…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전쟁놀이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시늉을 할 때는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쓰러지곤 하였는데 끝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쓰러져 전사했어. 49년 전에 전사한 아들이지만, 그 전사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1회 계속 ■ 참전기 20회를 마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중학교 3학년 16살에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전사한 아들을 49년간 그리워하면서 슬퍼한 어머님의 눈물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인천상중 밴드부와 함께 남하… 나 따라 참전한 심재민 전사 ‘애통’”

    “인천상중 밴드부와 함께 남하… 나 따라 참전한 심재민 전사 ‘애통’”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8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장인석 인터뷰 일시 1999년 3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이규원치과 1층) 대담 장인석(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실종된 인천 중학생들 1950년 6월 25일날 6·25전쟁이 일어났다. 며칠 후 우리 인천이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는데, 많은 중학생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는 비극이 벌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유엔군의 9·15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이 된 후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조직 내가 살던 화평동에서도 뜻이 맞는 내 또래 학교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분대 본부는 지금의 인천극장 근방에 있었던 화수관이라는 빈 술집을 접수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화평분대를 조직한 우리들은 인망이 두터웠던 인천중학교 5학년 김영배를 분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치안 유지·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 당시 화평분대 조직원은 화평동에 사는 학생들은 물론 화수동에서 사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것은 당시 화수분대 본부는 화도진 고개 넘어 괭이 부리에 있는 화수조합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화수동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화평분대 본부에서 가까운 학생들은 대부분 화평분대로 가입해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 명단 아직까지도 기억이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장과 대원들은 7명이다. 대장 : 김영배 인천중학교 5학년 해병 6기 대원 : 장갑석 해성중학교 5학년 해병 6기 손홍근 인천상업중 5학년 해병 6기 손정기 인천영화중 4학년 해병 6기 장인석 인천상업중 4학년 해병 6기 이윤우 해성중학교 3학년 해병 6기 신명호 인천상업중 3학년 해병 6기 심재민 해성중학교 2학년 해병 6기1950년 12월 18일 후배 심재민과 같이 남하 이렇게 조직하여 호국 활동을 하는 가운데도 시간은 흘러 그 해도 다 저무는 1950년 12월 중순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천학도의용대 본부로부터 12월 18일날 인천학도의용대는 모두가 남하(南下)하니까 화평분대는 남하할 준비를 하고 18일날 축현국교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12월 18일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들은 화평 분대 본부 앞에 전원 모여 인원 점검을 마치고 집합장소인 인천축현국민학교(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운동장에 모였다가 수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날 우리들의 남하 행렬 맨 앞에는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행진곡을 연주하였다. 첫날 우리들은 지치기 시작하였으며 졸면서 걸어 도착한 곳이 안양이었다. 안양에서 하룻밤을 지낸 우리들은 이튿날 수원을 향하여 또 걷기 시작했다. 수원에서부터는 기차를 이용했다. 당시 기차는 서울서부터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어서 화물차 칸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 우리들은 기차 화물차 칸 지붕 위에 올라앉아 내려갔다. 전쟁의 국가 위난 시기라서 어느 역에 정차하면 몇 시간에서 심지어 며칠 동안 기차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화평분대 대원 마산에서 해병 6기에 모두 입대 이렇게 우리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들은 인천에서부터 마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잘 도착하여 대기 중일 때 고향 인천 소식을 들으니까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마산에서 해병대 모집이 있어 우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하고 전원 모집장소인 어느 학교 운동장을 찾아갔다. 그날 전원 해병대에 합격한 우리들은 그날로 진해 경화국민학교에 있는 해병훈련소로 걸어가 입소하였다. 이때 내 바로 위 형님(장갑석·해성중학교 5학년 재학 중)도 같이 입소하였다. 해병 6기는 대부분 우리들 인천 학생들이었다. 이후 해병대 전방 전투지역에 배치된 나는 도솔산 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후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며칠 뒤 제대하였다.지금도 기억나는 전사한 동네 후배 심재민 심재민은 나하고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며, 나이는 나보다 3살 어린 15살이었다. 나와 같이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소속 대원으로 함께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 활동을 하다가 마산까지 같이 남하하여, 해병 6기에 자원입대하였다. 우리 화평분대에서 가장 어린 나이여서 마산까지 남하할 때는 내가 꼭 심재민을 열심히 챙겼었다. 훈련소에서 같이 훈련받았으나, 배치될 때 헤어졌었다. 6.·25 당시 심재민이 살았던 집은 화평동과 화수동 경계지점인 화평동 163번지였으며, 우리 집과는 한집 건너였다. 내가 심재민의 전사 소식을 알게 된 것은 1951년 7월 해병 제1연대 본부인사과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 육군이 맡고 있던 강원도를 우리 해병대가 맡아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는 사상자 실태 파악을 하는 중에 전사자 명단을 보니까 심재민이 전사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재민이 어떻게 전사했나 하고 친구들에게 알아보니까 대대장 연락병으로 도솔산 전투에 참전하여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49년이나 흘렀지만 나를 따라서 15살에 자원입대하고 16살에 전사한 한동네 후배 심재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장인석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소속 해병대 6기 <군번 9210466> 1932년 2월 6일 : 인천 화평동 125번지 출생. <인천서림국민학교 졸업(2회)> 1950년 9월 15일 : 인천학도의용대 화평분대 대원으로서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의 호국(護國) 활동. 1950년 12월 18일 : 인천상업중학교 4학년생으로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남하를 시작. 1951년 1월 24일 :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후 도솔산 전투 등에 참전. 1953년 7월 30일 : 만기 제대.
  •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류문길 인터뷰 일시 1997년 10월 17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치과 3층) 대담 류문길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내고향 평안남도 순천 나는 1933년 1월 15일날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8·15해방(解放)을 맞으면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인천에 살고 있는 이모님을 찾아 어머니와 나는 인천 화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6·25 사변과 3달간의 땅굴 생활 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은 인천에 쳐들어와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던 좌익 학생들이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청소년들과 중학생들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로 잡아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때 숨을 곳을 만들기 위해 허용환, 김유득, 정명돌 등의 친구와 나는 지금 자유 공원의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곳에 땅굴을 파서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을 시작하였다.9·15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심선택 해병 소위 1950년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 할 때 UN군의 함포사격으로 인천 시내가 많은 피해를 보았다. 9월 16일이 돼서야 우리 해병대가 참전하여 상륙한 것을 알게 되었고, 수색하면서 들어온 해병대에서는 아침 8시쯤에 지금 즉시 주민들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송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심선택 해병 소위가 중학생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전시하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훈시를 하였다. 심선택 해병 소위님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시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시다가 뜻한 바 있어 교직을 사직하시고, 해병 사관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950년 7월 31일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신 분이었다. 심선택 소위님의 훈시 내용 (부탁의 말) ①학생들은 통일 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이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되어야 한다. ②금번 통일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게 맡기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여야 한다. ③학생들은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자치 단체를 구성하여 호국활동을 하여야 한다. ④학생들은 경찰이 복귀할 때까지 군(軍)의 지시를 받아 치안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심선택 해병 소위님의 전사 소식 나는 나중에 “심선택 소위님은 자원입대를 원하는 제자 몇몇을 해병으로 입대하게 하고, 같이 북진(北進)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후퇴하는데,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한 사실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북부지구 학도치안대의 창설 심선택 소위의 훈시를 들은 우리들은 그 즉시 모임을 만들어 명칭을 북부지구 학도치안대(學徒治安隊)라 짓고 본부는 송현국교 교실 하나를 이용하였다. 우리 학도치안대의 활동 지역이 경인선을 경계로 북쪽 지역이어서 북부지구 학도치안대라고 정하였다. 매일 인천 주둔 해병대 사령부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전달받으며, 치안 유지 및 학생 선도 그리고 피난민 안내 등의 호국 활동을 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명칭 변경 그 후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창립되어서, 명칭이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바뀌었다. 이때가 1950년 10월 초였다. 이후 인천학도의용대 본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인천학도의용대 가입을 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탈선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중공군 참전으로 헌병 10기 입대 10월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참전 뉴스는 나를 허탈하게 하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곧 남북통일이 되면 내 고향 평안남도 순천에 찾아가려고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허사가 된 것 같아 나는 어쩌나 하고 있을 때인 1950년 10월 중순에 서울에서 헌병(憲兵) 10기생 모집이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주억재와 같이 서울에 가서 그 헌병모집에 지원하여 1950년 10월 20일 합격하였다. 국군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에서 내가 헌병 10기생으로 전방으로 전속되어 간 곳이 강원도 전투지역에 있는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이었다. 그 6사단 7연대에 배치된 나는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훈장(武功勳章)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6사단 헌병대원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군 생활은 최전방에서만 있다가 1963년 10월 1일 날 군 복무를 시작한 지 13년 11개월만에 명예제대하였다. 북구지대 중학생들의 자원입대와 참전 1950년 12월 18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모두가 부산을 향하여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1951년 1월 10일 우리 북구지대 지대원들도 거의 대부분 자원입대하고 참전하였다. 그중 몇 명은 전사하였다는 비보(悲報)를 전해 들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출신 전사 학생 박명호 인천공업중 3학년 전사 이중수 인천영화중 4학년 전사 이화식 인천동산중 4학년 전사 조순범 공립인천중 1학년 전사 최춘국 인천상업중 4학년 전사 황하삼 인천해성중 2학년 전사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발굴 소식을 듣고 내가 6·25 사변 때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에서의 활동은 내 평생 최고로 보람된 일로 내 가슴 속에 곱게 품고 지내오고 있었지만 그 한쪽 구석에서는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활동이 전혀 기록으로 남아있지 못하여 늘 마음에 걸렸었다.이규원 치과 원장이 6·25 사변으로 인하여 청소년기에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참전한 아버지(이경종·16세 참전)와 아버지와 같이 참전했던 인천학생스승의 6·25 참전역사를 발굴기록하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를 편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명을 받았다. 오늘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창설배경과 활동 과정 그리고 자료를 들고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방문하여 이규원 치과 원장을 만나서 자료 일체를 기증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 해병 소위 고 심선택은 해병 소위 심선택(위 큰 사진 빨간 화살표)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교직을 사직하고, 해병 사관후보생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제주도에서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인천에서 현지 입대한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된 것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 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전사하였다.
  • [단독]“하원 잃은 트럼프 정치적 타격…재선 위해 북미협상 속도 낼 수도”

    [단독]“하원 잃은 트럼프 정치적 타격…재선 위해 북미협상 속도 낼 수도”

    민주당의 연방 하원 탈환 및 공화당의 예상 밖 선전(善戰)으로 귀결된 지난 7일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북한 비핵화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서울신문은 8일 방한 중인 재미 정치학자이자 북한 전문가인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미국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른 한반도 정세 전망을 물었다. 박 교수의 바쁜 일정 탓에 인터뷰는 강연을 위해 지방으로 가는 KTX 열차 안에서 이뤄졌다.→미국 중간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이 상원은 수성했지만 하원은 민주당에 빼앗겼다. 변화된 미국의 정치 지형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정책과 북·미 협상에 어떤 영향 미칠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는데 이번 선거에서 하원을 잃게 돼 간신히 다진 입지가 흔들리게 됐다. 하원은 탄핵안 제출이나 정책 입안을 하고 상원은 주로 이를 인준하는 역할을 하기에 트럼프 입장에서 하원을 민주당에 빼앗긴 건 정책 주도권을 상실한 셈이다. 정치적 타격이 크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간선거보다는 2년 후 있을 대선이 더 중요하다. 2020년 대선에서 재선 가능성을 높이려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에서 점수를 따서 이번 중간선거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북·미 협상에 속도를 내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려고 할 것이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의원이 하원의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강경파인 펠로시 의원과 트럼프 대통령의 사이는 너무 안 좋다. 펠로시 의원 이하 민주당의 하원의원들이 대북 정책을 포함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든 정책을 달갑게 생각 안 하고 방해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의 다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하원과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원이 공화당 수중에 있었던 지난 2년 동안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 중간선거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연내 남·북·미 종전선언이 지연되거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쉽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은, 특히 공화·민주당을 포함한 미국 의회는 북한과 정상적 국교 관계로 나아가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종전선언이든 평화협정이든 아무것도 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특히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려면 북·미가 회담 의제부터 합의해야 하는데 북한은 국교 정상화에,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도 국교 정상화와 평화협정은 지금 상황에서 받기 어렵다는 입장이기에 북·미가 정상회담 의제를 정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핵미사일 시험장을 폐쇄했으니 미국이 대북 제재 완화 등 상응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미국은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북·미 입장 차이를 줄일 수 없나. -무엇보다도 북·미 입장 차이는 근본적으로 ‘비핵화’에 대한 합의된 개념이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미국은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지금은 FFVD(완전하고 최종적이며 검증된 비핵화)를 주장하는데 두 개념 모두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완전한 비핵화’라면 우선 북한이 핵무기·시설을 자발적으로 신고하고,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한다. 그런데 미국이 핵 활동이 의심스러운 장소가 있다며 북한에 추가 사찰을 요구할 거고 북한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추가 사찰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사찰과 검증 단계부터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불가역적 비핵화’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한이 모든 핵무기·시설을 폐기한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3~4개월 안에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핵 과학자도 있고 핵 개발 경험도 축적돼 있고, 핵무기 재료인 우라늄·플루토늄도 있기 때문이다. 북·미가 비핵화의 구체적 개념과 내용에 합의하려면 서로 신뢰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북·미 협상과 타결을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미 협상이 장기적이고 단계적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러려면 타결이 안 되더라도 대화와 협상의 창은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미국이 북한에 양보할 시점이다. 북한은 이미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핵미사일 시험장을 폐쇄했고 이곳의 사찰도 받아들였다. 영변 핵시설 사찰도 가능하다고 했다. 미국에 현재 양보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 것이다. 또 북한은 미국의 상응 조치로 대북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며 요구 사항도 분명히 했다. 문제는 미국이다. 북한의 양보에 상응해 미국이 양보해줄 것이 마땅치 않다. 특히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동의가 필요한 대북 제재 완화·해제나 평화협정 체결을 협상 카드로 쓰기 어렵다. 하지만 북한이 한 발자국 나가면 미국도 한 발자국 나가야 한다. 대북 제재 완화는 아니더라도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등은 미국이 생각해볼 수 있는 협상 카드다.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와 상응 조치를 주고받게 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미국이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내가 직접 북한을 가보고 김정은 위원장을 세 차례나 만나봤는데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독재자가 아닌 현실주의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지도자라고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트럼프 대통령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와 여론도 북한을 협상 대상자로 인정하게 된다.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다가 미국의 견제와 대북 제재로 인해 제동이 걸린 모습이다. 한국 정부가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남북관계 진전은 결국 미국의 의지, 구체적으로 미국의 대북 제재 완화에 달려 있다. 북한과의 경제협력은 평화와 통일에 필수라고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미국이 제재 완화를 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 아닌 동반자라고 재설정해야 한다. 이는 한국 정부가 지난 70여년간 고수한 한·미 동맹 중심의 대미·대외 정책을 전환한다는 의미다. 정책 기조의 대전환 없이 남북관계의 전반적인 진전은 어렵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북·미 관계 설계자’ 박한식 교수…카터·클린턴 2명 방북 주선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미국 내 손꼽히는 북한학자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1년부터 조지아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쳤다. 조지아 주지사 출신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덩샤오핑을 만났고 덩의 도움으로 평양 땅을 밟은 이후 50여 차례나 방북했다.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중재한 것은 물론 2009년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도 주선해 북한에 억류된 미국 기자 2명의 석방을 이끌어 내면서 ‘북·미 관계의 설계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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