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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진진 견문기] 화강암 병풍에 새겨진 4·19혁명… 우리 사회 성찰한 시간

    [흥미진진 견문기] 화강암 병풍에 새겨진 4·19혁명… 우리 사회 성찰한 시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과 손장난을 하고 놀았던 어린 날의 추억이 아직 생생하다. 이 노래는 윤극영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반달’이라는 제목의 동요다. 우리는 도미니코 수도원을 거쳐 윤극영 가옥에 들렀는데 이곳은 선생님께서 작고했을 때까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집안에는 선생님께서 생전에 작곡하셨던 곡들의 노랫말들이 벽 한편에 걸려 있었고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윤극영 선생님은 방정환 선생님과 함께 한국 어린이문화운동을 이끌었으며 색동회를 창립했다. 또 일제강점기 때 우리의 민족정신과 미풍양속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까워 ‘설날’을 시작으로 600곡 이상의 동요를 만들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윤극영 가옥을 지키고 관리하는 가옥지기가 ‘설날’, ‘반달’, ‘고기잡이’, ‘우산’, ‘나란히’, ‘기찻길역’, ‘어린이날 노래’ 등을 한 곡씩 불러줬는데 어렸을 때부터 즐겨 부른 동요 대부분이 선생님께서 지은 곡임을 알게 됐다. 선생님이 쓰신 곡을 잘 살펴보면 암울한 시대였음에도 노랫말이 참 밝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밝은 노랫말을 아이들이 부르면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바라보고 멋진 미래를 만들어달라고 노래를 통해 부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극영 가옥에서 나와 4·19민주묘지로 향했다. 4·19민주묘지는 1960년 4·19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 분묘다. 희생자들께 감사와 추모를 올리기 위해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앞에서 참배를 드렸다. 화강석으로 된 병풍에는 4·19혁명 당시 모습들이 새겨져 있고 그 뒤편으로 희생자의 묘가 있다. 4·19혁명에 앞서 4월 18일에 벌인 고려대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은 4·19 총궐기의 기폭제가 됐다고 한다. 우리는 4·19민주묘지에서 북한산 둘레길 2코스를 걸어 유림선생 묘역에 도착했고 옆에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쳤다.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우리 사회에 정의는 살아 있는가’라는 고민과 의심이 많았던 시기에 이번 답사는 나에 대한, 또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해볼 수 있게 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원서영 고려대 지리교육과 3학년
  • 우이동 먹거리마을 새 이름 찾습니다

    서울 강북구가 우이동 먹거리마을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새 이름을 공모한다고 19일 밝혔다. 우이동 먹거리마을은 북한산 자락에 있어 수려한 자연환경과 옛 정취를 간직한 곳이다. 우이신설 경전철 종점인 북한산 우이역에서 우이령길 쪽으로 약 1.2㎞ 구간에 속해 있다. 구의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이기도 한 먹거리마을에서는 도로 확장, 가족캠핑장 건립, 옛 파인트리 공사 재개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17년에 우이신설 경전철이 개통돼 접근성이 향상되면서 방문객도 줄을 잇는다. 이번 공모는 식도락에 국한된 ‘먹거리마을’이라는 기존 이름의 한계성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에 구는 ▲누구나 찾고 싶은 친근함 ▲주변 관광자원과 음식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참신함 ▲어감을 고려한 간결함 등을 주요 심사 기준으로 정했다. 강북구 주민으로 1인 1점 응모할 수 있다. 다음달 1일부터 10일까지 구 홈페이지에서 접수한다. 수상작은 내·외부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최우수 1점(상금 30만원), 우수 2점(각 10만원)을 선정한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공모를 통해 역사문화관광의 도시 강북구 명소에 걸맞은 특색 있는 이름이 선정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우리 고장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공모에 주민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차 정릉천 따라’ 편이 추석 다음날인 지난 14일 성북구 정릉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추석 연휴 주말을 북한산의 맑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정릉천에서 보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 집결, 경국사에 들어가 고찰의 향기를 즐겼다. 주말이라 문을 열지 않는 명원민속관(한규설 가옥)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릉천변은 1950~1970년대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하며 살던 ‘문예촌’이었다. 화가 이중섭·박고석·한묵·박세원·김병기, 소설가 박경리·박화성·박연희·박계주·최정희·계용묵, 시인 고은·조영암·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작곡가 금수현·김대현, 극작가 차범석, 시사만화가 김성환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린 주부 참가자들에게 피로를 씻어 주는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정릉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 가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고, 담벼락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과 책 표지가 길손을 안내한다. 그러나 ‘보국문로 29가길 11’이라는 도로명주소판이 붙은 집엔 서글프게도 ‘박경리’ 문패가 아니라 ‘서울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낯선 대안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서울시가 예산 부족으로 매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가자들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을 자꾸 서성거렸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속 댄스장이자 고급 요정이었고, 한때 신혼여행지였던 옛 청수장을 개조해 사용하는 북한산탐방안내소에 들어가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북한산 정릉골은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된 뒤 2007년 내부순환도로 국민대입구 램프가 추가 개통되기 전까지도 백악산~보현봉 자락이 장벽처럼 막아서서 개발의 손길을 거부하는 청정의 숲이었다. 청수장으로 대표되는 정릉유원지는 추억과 안식의 공간이었다. 정릉천을 따라 청수장으로 가노라면 경국사가 나타난다. ‘경국사적기’에 따르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봉 아래에 있다고 해서 청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릉의 옛 지명이 ‘살을 에듯 추운’ 사을한리이고, 정릉천이 청수라고 불리고, 청수장이 정릉유원지의 랜드마크가 된 배경에는 모두 청봉이라는 자연 지명의 힘이 작용했다. 청암사는 1546년(명종 1년) 문정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라고 개명했다. 1669년(현종 10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흥천사, 봉국사와 함께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지정돼 부흥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정릉이라는 능이 사라졌다가 26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능을 지키는 3개 원찰의 이름이 모두 바뀌는 변고를 겪었다. 봉국사는 본래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사였지만 현종 때 ‘나라를 받든다’는 봉국사로 개명해 명맥을 이었다. 또 1409년 정릉이 정동을 떠나 정릉동으로 이장됐을 때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신흥사로 개창, 원찰로 삼았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이름을 바꿨다.조계종 본산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처음 묻혔던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17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태조가 죽은 지 9년 만에 능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고, 1510년 유생들이 이단을 없애 버린다며 불을 질러 폐사의 비운을 맞았다.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종 이방원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만 모시고, 계모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의 앙갚음에 정릉동 정릉은 황폐화했다. 172년이 흐른 1581년(선조 14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받고자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 정릉의 위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았다. 1669년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종묘에 배향되고, 능의 위상을 되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소낙비가 내려 정릉골을 흠뻑 적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준 ‘세원우’라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사실상 첫 왕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흥천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흥천사는 조선 첫 왕비와 마지막 왕비가 동시에 깃든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정릉의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박고석이었다. 1955년 정릉에 자리잡은 박고석을 따라 부산 피난 시절 삼총사를 이뤘던 이중섭, 한묵이 가세했고, 청수장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이중섭이 죽자 유골은 삼등분됐는데 일부는 일본의 부인(이남덕)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시인 구상에 의해 망우리 묘지로 갔다.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뿌려졌다. 북한산행의 기점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되다가 1945년 해방 뒤 민간인이 인수해 사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엔 특수부대 훈련 숙소로 사용됐다. 그 후 고급 요정 ‘청수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댄스홀로 등장한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 4월 2일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에 편입됐다. 개축 공사를 거쳐 2001년부터 북한산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유럽풍 카페를 연상케 하던 청수장 본관만 남겨 두고 등산로와 맞닿아 있던 담과 부속 건물은 허물어 아담한 정원으로 꾸몄다.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 살던 박경리(1926~2008)는 1965년부터 2002년까지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서 1969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원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삶의 터전이었다. 이웃사촌 박고석이 삽화를 그린 ‘노을진 들녘’은 1961년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총 250여회를 이어 나갔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한 뒤 대표작 토지 1부 집필에 들어갔다. 정릉은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고통도 담긴 곳이다.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정릉 집은 차라리 유배지였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선생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수수께끼는/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뼈가 으스러지게/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아 참, 그 얘기는/저승에나 가서 풀어놔야지/그 끔찍한 사실들을/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정릉시대의 쓰라린 편린이다.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 2017년 간)에 실린 김형국의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문학’에 따르면 “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 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 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썼다. 실제 통영 박경리기념관 선생의 묘소에는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2차 서울의 문학3(윤극영의 반달)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21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흥미진진 견문기] 고려 때부터 시작된 동네 역사… 곳곳서 느껴지는 예술혼 숨결

    [흥미진진 견문기] 고려 때부터 시작된 동네 역사… 곳곳서 느껴지는 예술혼 숨결

    추석 연휴인 토요일, 시원한 물줄기와 푸른 북한산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정릉천 문학과 예술의 여정을 시작했다. 정릉에 사는 사람들은 정릉동이라는 명칭 대신 ‘정릉 산다’, ‘정릉 살아요’라는 말로 자부심과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해설을 들으며 고려시대부터 역사를 함께해 온 경국사로 향했다. 정릉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정릉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삼각산경국사’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장마가 살짝 가셔서 그랬을까, 안개가 자욱이 앉은 경국사의 모습은 시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고즈넉했다. 은은한 목탁 소리와 함께 일행은 목각탱화를 간직한 대웅전과 목각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성전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정릉천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초가을 날씨가 무색하게 살짝 더위가 느껴질 때쯤 정릉은 역사적 공간만이 아닌 음악, 미술, 문학에 이르기까지 예술혼이 깃든 장소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박경리, 최만린, 이중섭, 김대현 등 문화예술인들이 정릉에 자리잡고 주변의 다른 이웃 문화예술인들과 교류를 했다 하니 그들이 산책하면서 얻었을 영감에 정릉천이 새삼스레 멋있게 느껴졌다. 소설가 박경리의 집터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대안학교로 쓰이고 있지만, ‘토지’를 집필한 이곳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옥살이했을 때 지었던 시 한 편을 듣고 나니 작가의 한이 느껴졌다. 정릉천의 막바지를 따라가니 이번에는 정릉 촬영장과 영화배우 김지미의 옛집이 근처에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영화에 한 획을 그었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그녀의 이야기에 다시 열기를 되찾고 마지막 코스인 옛 청수장 자리로 향했다. 1950~1960년대 신혼여행지였다는 청수장이 지금은 북한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로 바뀌어 있었다. 가수 조동진이 청수장에서 고은 시인을 만나 ‘작은 배’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정릉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예술적으로 버릴 곳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고 느끼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김미선 책마루연구회 연구원
  • [미래유산 톡톡] 많은 문예인 둥지 틀었던 정릉…‘박경리 가옥’ 보존방법 찾기를

    [미래유산 톡톡] 많은 문예인 둥지 틀었던 정릉…‘박경리 가옥’ 보존방법 찾기를

    북한산 자락의 정릉천은 넓고 깨끗한 바위들 사이로 시원한 물길이 이어진다. 경국사 담장을 따라 맑은 물소리를 노래 삼아 걷다 보면 ‘우리가 거닐고 있는 정릉천은 오래되지 않은 과거, 많은 문화예술인이 거닐었던 바로 그 아름다운 길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그들의 흔적이 있는 공간을 표시한 안내판 ‘정릉천변 문화가 있는 산책로’를 볼 수 있다. 북한산의 능선과 보현봉이 시야에 들어오는 주택가 어디쯤에서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을 만날 수 있다. 정릉동 768-2, 정릉 골짜기 한적한 곳으로 선생은 이사를 왔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까지의 대장정을 담은 대표작 ‘토지’는 정릉동 집에 살던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이곳 정릉에서 ‘김약국의 딸들’, ‘토지’ 등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됐다. 현재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길엔 작은 안내판이 있고 초입의 담벼락에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지만, 박경리 가옥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나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이 집이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인 대하소설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가 생전에 거주했던 곳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앞으로 보존 방법을 찾게 되길 희망해 본다. 선생은 정릉에 머물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다. 소설 ‘노을진 들녘’의 삽화는 이웃이던 화가 박고석이 그렸다. 추상화가 한묵은 부산에서의 인연으로 박고석이 먼저 자리잡고 있던 정릉으로 왔고, 이중섭 역시 한묵이 있던 하숙집 옆방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해 나갔다. 이중섭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며 그의 유골이 뿌려진 곳이기도 하다. 1950년대 부산 피난살이를 끝내고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던 많은 문화예술가가 정릉에 둥지를 틀었고 화가와 조각가,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 작곡가가 이웃으로 지내며 작품 활동과 우애를 나눴다. 정릉은 상처 입은 문화예술가들이 깃들기에 가장 적당한 동네였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홍릉 없는 홍릉길… 숲내음과 연구단지가 공존하다

    홍릉 없는 홍릉길… 숲내음과 연구단지가 공존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0회 홍릉숲길 산책’ 편이 지난 7일 동대문구 청량리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한반도를 강타한 제13호 태풍 ‘링링’의 북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려대역에 집결했다. 이날 코스는 정릉천~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홍릉수목원(국립산림과학원)~KAIST 경영대학~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세종대왕기념관 순이었다. 그러나 역대 태풍 중 최대 순간 풍속 5위를 기록한 링링의 맹렬한 기세 앞에 홍릉수목원은 폐장됐고, 정릉천 입장도 통제됐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작 KIST 본관과 옛 농촌경제연구원 건물은 공사 중이어서 직접 볼 수 없었다. 전북 나주로 이전한 옛 농촌경제연구원 건물은 서울바이오허브로 변신하기 위해 마무리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참석자들은 홍릉수목원 해설을 위해 특별 초빙한 임혜란 숲 전문가에게서 듣는 숲과 생태 이야기로 아쉬움을 달랬다.1922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제1세대 수목원 홍릉수목원이 자리한 동대문구 청량리는 조선시대 흥인지문(동대문) 밖 청량리계에서 기원한다. 신라 말에 창건된 고찰 청량사에서 이름을 땄다.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 등 옛 문헌에 따르면 청량사는 삼각산 아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홍릉수목원과 영휘원 일대가 옛 절터였다. 명성황후가 묻혔던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비켜났다.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조선시대 흥인지문과 혜화문, 광희문에서 중랑천까지 10리를 동교라고 불렀다. 이 중 성북천과 정릉천, 석관천을 낀 청량리에는 왕실소유의 논(적전)을 두고 왕이 농사를 짓는 선농단과 국립 구휼기관이자 공용숙소였던 보제원을 뒀다. 용두동, 제기동, 전농동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청량리는 제례의 공간이었다.청량리는 능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선왕의 무덤을 찾아가는 능행은 ‘조선 최대의 정치쇼’였다. 왕은 능행을 통해 선왕의 권위를 물려받기를 원했으며, 백성들은 능행에서 왕의 존엄을 실감했다. 청량리는 왕실 최대의 묘역 동구릉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행차 구경 기회가 많았다. 능행길은 대개 창덕궁~흥인문~우장현(장위동 고개)~안락현(봉화산 뒷길 화랑로)~동구릉으로 이어졌다. 통상 3000명에서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됐으니 동시대인에게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다. 그 장관과 화려함은 청계천변 광교와 삼일교 사이에 조성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청량리는 명성황후의 홍릉과 더불어 유명세를 떨쳤다.명성황후가 비명에 간 지 2년째 되던 1897년 11월 21일에야 국장이 거행됐다. 이날 새벽 4시 100개의 황등롱과 2600개의 홍등롱, 40개의 대철촉롱 불이 밝혀진 상태에서 상여는 경운궁(덕수궁)을 출발했다. 상여는 청계천 신교~혜정교~이석교~초석교를 차례로 지나 흥인문을 통과한 뒤 동관왕묘(동묘)~보제원(안암동 로터리)~한천교(중랑천 다리)를 거쳐 청량리 홍릉에 도착했다. 1907년 10월 7일 순종의 능행기록에는 오전 8시에 경운궁 대한문을 나서 종로~흥인문~안감천(성북천)~용두리~청량리를 거쳐 홍릉에 도착했으며 오후 6시에 환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9년 고종 국장 때 명성황후의 능이 남양주 금곡 홍유릉으로 이장돼 합장될 때까지 22년간 능행 때마다 청량리 일대는 인파로 북적였다. 홍릉의 신화는 짧았지만 강렬했다.청량리의 장소성은 전차의 등장과 함께 변모했다. 1899년 개설된 청량리선 전차는 1911년 경원선, 1939년 경춘선 및 중앙선 철도 개통과 함께 청량리의 장소성을 서울 동부지역 교통요충지로 바꿨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또 한 번의 변신이었다.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연결하는 8.1㎞ 구간의 청량리선 전차는 고종의 능행 편의와 능행 비용을 줄이려고 부설한 것이었다. 정작 고종은 전차가 상여를 닮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꺼렸다. 실제로 고종이 전차를 타고 홍릉에 행차한 기록이 거의 없다. ‘독립신문’ 1899년 10월 17일 자에 “금번 능행하실 때 전차를 타신다는 말이 있다더라”는 기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1994년에 발간한 ‘동대문구지’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질 무렵 혜화동 주민 홍태윤이 자비를 들여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길의 양편에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이 가로수는 성 안팎을 통해 유수한 가로수길로 손꼽혔다고 한다. 아쉽게도 1933년 도로를 넓히면서 모두 베어 버렸다. 1917년 ‘신문계’ 제5권 제2호에 발표된 ‘경성유람기’라는 글에 함경남도 금성에 사는 이승지가 평양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내린 뒤 전차 편으로 종로까지 가는 행로가 그려져 있다.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가 쓴 ‘홈즈의 동방나들이’에도 옛 청량리 전차풍경이 일부 묘사돼 있다. 정류장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 사고가 빈발했다고 한다. ‘홍릉시대’는 옛말이 됐다. 동대문~신설동 로터리~경동시장~청량리 로터리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이름은 홍릉로가 아니다. 1966년 시내 35개 주요 가로의 이름을 정하면서 1908년 13도에서 모인 항일의병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한 의병장 허위의 호를 따 왕산로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던 홍릉은 축소됐다. 지금의 흥릉길은 왕산로와 청량리 로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하면 나타나는 500m의 샛길에 불과하다. 명성황후가 떠난 홍릉에는 임업시험장, 영휘원(순헌황귀비 엄씨의 능)과 숭인원(영친왕의 맏아들 진의 능)이 스며들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1966년), 세종대왕기념관(197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1978년), 한국국방연구원(1979년), 카이스트 경영대학원(1996년), 한국콘텐츠진흥원(2009년) 등 각종 기관단체가 속속 들어서면서 교육과학안보연구단지로 변모했다. 문학작품 속의 청량리는 어떤 모습일까. ‘벙어리 삼룡’의 작가 나도향은 1924년 ‘개벽’에 실린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에서 “오늘은 동대문서 청량리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 시골 나무장사와 소몰이꾼들의 ‘어디여, 이놈의 소’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탑골승방 영도사 또는 청량사 들어가는 어구는 웬일인지 전보다 더욱 쓸쓸해 보인다”고 1920년대 어느 전차 차장의 시선을 통해 한적한 시골동네 청량리를 묘사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도 1935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성 간의 우정론’이라는 글에서 “… 날도 따뜻합니다. 우리 청량리로 산보나 가십세다. … 맑고 푸르고 높은 늦은 봄날 오후에 청량리 공기는 시원하였다”라고 청량리를 예술가들의 인기 산책코스로 소개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은 1932년 ‘동광’에 실린 ‘청량리의 가을’에서 “청량리를 나가서 지금 경기도 임업시험장이 된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 내가 이곳을 처음 간 것이 작년 가을인데 미상불 서울 근교에서 하루의 산책지! 더욱이 가을날로는 매우 좋은 곳인 줄 여겼습니다”고 청량리의 가을을 예찬했다. 1960년 ‘사상계’에 연재된 황순원의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는 “… 청량리 밖 떡전거리에다 양계장을 꾸며 놓은 것은 지난해 이른 봄이었다. … 후생주택을 비롯해 인가들이 들어서서 한 해 동안에 일대가 아주 변모해 버렸다. … 양계장에서 가깝대야 회기동 파출소 앞까지 한참 나가야만 다방이 있는 것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50년대 후반 공공주택의 공급과 함께 양계장에서 주거지로 조성되기 시작하는 청량리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1차 정릉천 따라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14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서경대)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
  • 강북, 지역 관광기념품 공모 7건 선정

    서울 강북구는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관광기념품을 개발하기 위해 실시한 공모전에서 수상작 7건을 선정했다고 9일 밝혔다. 선정된 작품은 ▲샤이닝 강북(텀블러·손거울) ▲강북구 역사 기념 배지(배지) ▲4·19 민주묘지, 북한산 기념품 배지(배지) ▲우리는 강북의 홍보대사(그림엽서) ▲책갈피시리즈(책갈피) ▲강북구 역사 문화 관광을 담은 나만의 탐방코스 BUS시리즈(인테리어 소품) ▲달빛 머금 북한산(무드조명) 등이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올가을 설악산 28일부터 물든다

    올가을 설악산 28일부터 물든다

    온난화로 단풍 시작시기 매년 늦어져올해 첫 단풍은 강원도 설악산에서 오는 28일 시작될 전망이다. 민간기상업체 ‘케이웨더’는 “올해 첫 단풍은 설악산에서 평년보다 하루 늦은 9월 28일에 나타날 것”이라고 9일 밝혔다. 첫 단풍은 산 정상부터 20%가 단풍이 들었을 때를 말한다. 일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면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9월 상순 이후 기온에 따라 단풍 시작 시기가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기온이 낮을수록 빨라진다. 기상청에 따르면 추석 이후 9월 중순부터 하순과 10월 날씨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기압골 통과 후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 기온 변동이 크겠지만 대체적으로 평년보다 다소 높은 기온 분포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설악산에서 시작된 단풍은 하루 20~25㎞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해 중부지방은 9월 28일에서 10월 20일 사이, 남부지방은 10월 11일에서 24일 사이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산 정상부터 80%가 단풍이 드는 단풍 절정기는 단풍 시작 시점부터 2주 정도 지난 뒤다. 첫 단풍과 단풍 절정기는 늦어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상승 때문으로 해석된다. 2009~2018년 최근 10년간 9월과 10월 평균기온은 1990년대에 비해 0.5도 상승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와 비교했을 때 최근 10년간 첫 단풍 시기는 북한산은 1일, 내장산은 3일 늦어졌으며 단풍 절정기도 지리산은 3일, 월악산과 무등산은 4일이 늦어졌다. 케이웨더 관계자는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한라산과 계룡산은 첫 단풍이 9일이나 늦어졌으며 무등산은 6일, 북한산, 월악산은 5일이나 늦어졌을 정도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올해 첫 단풍은 설악산에서 9월 28일에 시작

    올해 첫 단풍은 설악산에서 9월 28일에 시작

    올해 첫 단풍은 강원도 설악산에서 오는 28일 시작될 전망이다. 민간기상업체 ‘케이웨더’는 “올해 첫 단풍은 설악산에서 평년보다 하루 늦은 9월 28일에 나타날 것”이라고 9일 밝혔다. 첫 단풍은 산 정상부터 20%가 단풍이 들었을 때를 말한다. 일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면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9월 상순 이후 기온에 따라 단풍 시작 시기가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기온이 낮을수록 빨라진다. 기상청에 따르면 추석 이후 9월 중순부터 하순과 10월 날씨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기압골 통과 후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 기온 변동이 크겠지만 대체적으로 평년보다 다소 높은 기온 분포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설악산에서 시작된 단풍은 하루 20~25㎞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해 중부지방은 9월 28일에서 10월 20일 사이, 남부지방은 10월 11일에서 24일 사이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산 정상부터 80%가 단풍이 드는 단풍 절정기는 단풍 시작 시점부터 2주 정도 지난 뒤다.첫 단풍과 단풍 절정기는 늦어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상승 때문으로 해석된다. 2009~2018년 최근 10년간 9월과 10월 평균기온은 1990년대에 비해 0.5도 상승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와 비교했을 때 최근 10년간 첫 단풍 시기는 북한산은 1일, 내장산은 3일 늦어졌으며 단풍 절정기도 지리산은 3일, 월악산과 무등산은 4일이 늦어졌다.케이웨더 관계자는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한라산과 계룡산은 첫 단풍이 9일이나 늦어졌으며 무등산은 6일, 북한산, 월악산은 5일이나 늦어졌을 정도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태풍 ‘링링’ 접근에 위기경보 ‘경계’로 격상

    북상 중인 제13호 태풍 ‘링링’이 6일 오후부터 제주도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정부가 위기경보 ‘경계’를 발령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가동해 범정부 대응에 나선다. 행정안전부는 이날 재난관리실장 주재 상황판단 회의를 열어 오후 2시부로 태풍 위기경보를 ‘주의’에서 ‘경계’로 중대본 비상단계를 1단계에서 2단계로 각각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위기경보 ‘주의’와 중대본 비상 1단계를 발령했다가 오후 1시부로 제주지역에 태풍주의보가 발효됨에 따라 경계 수위를 높였다. 정부는 이에 따라 관계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자체 비상 근무체계를 강화하고 태풍 대응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달라고 요청했다. 각 지자체와 기관에서는 강풍에 대비해 교량 통제, 낙하물 안전대책, 해안시설 대비책 등을 강화하도록 했으며 특히 도서 지역에서는 주민 외출 자제를 요청하고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은 마을회관으로 사전대피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소규모 어항 등지에 대피한 선박을 철저히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침수나 월파(높은 파도가 제방을 넘어 들어오는 현상) 위험지역에 대한 사전통제도 강화하도록 했다. 아울러 피해 발생 시 가능한 모든 인력·장비·물자를 응급복구에 동원해달라고 강조했다. 이날 오전 11시 중대본 집계 기준으로 북한산·설악산·다도해 등 10개 국립공원과 270개 탐방로의 출입이 통제됐다. 또 부산∼제주와 인천∼덕적도 등 12개 항로 여객선 12척도 운항을 멈췄다. 기상청에 따르면 ‘링링’은 이날 오후 2시 현재 제주도 서귀포 남남서쪽 약 470㎞ 부근 해상에서 시속 19㎞로 북상하고 있다. 중심기압은 945헥토파스칼(hPa)로 중심 부근 최대 풍속이 초속 45m(시속 162㎞)에 달한다. 자동차와 선박이 뒤집히고 나무가 뿌리째 뽑힐 수 있는 수준이다. 이 태풍은 7일 오전 3시쯤 제주도 서귀포 서남서쪽 약 150㎞ 해상, 오전 9시쯤 전남 목포 서쪽 약 120㎞ 해상을 지나 오후 3시쯤 서울 서남서쪽 약 140㎞ 해상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진영 행안부 장관은 “국민들도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는 등 강풍 대비 행동요령을 숙지하고 외부활동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강북 ‘랑랑랑 탐험대’ 독립선언서를 완성하라

    서울 강북구가 오는 21일 오전 10시부터 북한산 일대에서 역사체험 프로그램 ‘너랑나랑우리랑 역사야 놀자’를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역사야 놀자’는 3·1독립운동 100주년 및 한국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됐다. 우리나라 근현대 유물·유적지를 엮어 구가 2017년 조성한 ‘너랑나랑우리랑 스탬프 힐링 투어’ 산책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질 예정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역사야 놀자는 이동형 추리 역할게임(RPG)이다. 일명 ‘랑랑랑 탐험대’인 참가자들이 독립운동가가 돼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식으로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된다. 올해 탐험대 메인 미션은 ‘독립선언서를 완성하라!’다. 시작점인 근현대사기념관에서부터 우이동 만남의 광장까지 기점별 관문을 통과하면서 미완의 독립선언서를 완성하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초등학생 이상으로 역사에 관심 있으면 참여할 수 있다. 모집 인원은 400명으로 9일부터 20일까지 서울시 공공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사전예약하거나 행사 당일 현장접수도 가능하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프로그램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웠던 열망이 쉽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금요칼럼] 고궁박물관,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려면/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고궁박물관,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려면/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충남 예산의 가야산에는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잘 알려진 남연군의 무덤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기 연천에 있던 아버지, 곧 훗날 고종의 할아버지가 되는 남연군의 무덤을 1844년(헌종 10년) 백제사찰 가야사 터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보덕사가 있다. 비구니 수도 도량답게 깔끔한 보덕사에서 인상적인 것은 극락전 앞 대방(大房)의 존재다. ‘원스톱 불공’이 가능하도록 수행 공간과 생활공간 등 다양한 쓰임새를 부여한 전각이 대방이다. 보덕사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 무덤의 수호사찰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방을 두고 흔히 조선 후기 유행한 염불 수행을 위한 복합 법당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서울 돈암동 흥천사와 경기도의 고양 흥국사와 남양주 흥국사 등 왕실 원찰에 대방이 집중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염불수행은 염불수행이지만 한마디로 극락왕생과 현세발복을 비는 왕실 여인들의 기도공간이었다. 파주 보광사 만세루나 화성 용주사의 쌍둥이 전각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다루어야 영역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다 뜬금없이 보덕사와 대방의 존재를 떠올리게 됐다. 경복궁 내부에 자리잡은 고궁박물관은 최근 주목받는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열리는 ‘문예군주를 꿈꾼 효명’ 특별전은 2007년 개관 이후 가장 성공적으로 젊은 세대의 눈길을 사로잡는 기획이 아닐까 싶다. 효명세자는 2016년 방영된 TV드라마에서 배우 박보검이 연기해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역시 조선왕실의 안태(安胎)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호평을 받았다. 지난 3·1절에는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이라는 작은 전시를 가졌다. 오는 10월에는 ‘18세기 화장문화’를 주제로 흥미로운 국제학술대회도 연다고 한다. 그럴수록 너무 권력의 한복판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도 하게 된다. 고종시대 왕실사무를 담당한 궁내부에는 일반적인 행정기관 말고도 음악을 다루는 장악원, 의약을 맡아보는 내의원,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 의복과 일용품 등 공급하는 상의원, 마필과 목장을 관리하는 태복시, 이전에는 내명부라고 불린 명부사, 내시와 관련된 일을 맡은 내시사, 전각을 관리하는 전각사 등이 있었다. 생활 및 의례를 담당하는 모든 기능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고궁박물관의 탐구 대상은 아직 왕과 왕비의 공간에 머물고 있다. 그러니 대방만 해도 불교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 불암산과 북한산, 관악산 자락 등에 남아 있는 궁녀들의 무덤인 마애부도 역시 다르지 않다. 서울 창동과 월계동에 걸쳐 있는 초안산의 내시 무덤군(群)도 조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있다. 왕실용 그릇을 굽던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가마터 수백 곳 역시 왕실 문화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팔당호 수변 분원은 사옹원 분원이라는 기관 이름이 그대로 땅이름이 된 것 아닌가. 분원은 또 기관 운영을 위해 한강을 지나는 모든 뗏목에서 세금을 징수했으니, 도성 장작값 인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고궁박물관이 복원해야 할 삶의 모습은 왕과 왕비에 그치지 않고 상궁과 내시는 물론 도공과 마부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같은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이전 계획으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고궁박물관도 언젠가 좁은 궁궐 내부에서 벗어나 넓은 바깥으로 나서야 한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고궁박물관이 작은 특수 박물관으로 역할을 가두지 말고 왕실 문화, 나아가 왕조 문화 전반을 다루는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 좋겠다. 그렇게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경쟁할 때 우리 박물관 문화도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울을 호흡하는 색다른 방법, 100㎞ 울트라트레일러닝 10월에

    서울을 호흡하는 색다른 방법, 100㎞ 울트라트레일러닝 10월에

    서울을 달리며 새롭고 완전히 다르게 호흡하는 국제울트라 트레일러닝대회 ‘서울 100K’가 10월에 열린다. 대한산악연맹과 서울특별시가 공동 주최하고 대한산악연맹과 서울특별시체육회가 주관해 올해 처음 열리는 이 대회는 10월 19일(토)부터 20일(일)까지 서울광장에서 개최된다. 인왕산, 북한산, 서울 둘레길, 한강 등 서울의 주요 명소와 스카이라인을 달리며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 가운데 최대 규모로 진행된다.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10K 코스와 국제 트레일러닝협회(ITRA) 공식 포인트를 딸 수 있는 전문 선수들이 참가하는 50K와 100K 코스로 나뉘며, 국제산악연맹(UIAA) 산하 국제스카이러닝연맹(ISF)의 공식 코스 인증도 받을 예정이다. 10K 부문에 2500명, 50K 부문 300명, 100K 부문 200명 등 모두 3000명이 달리게 된다.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대회 공식 홈페이지(http://www.seoul100k.com)를 통해 사전 접수가 진행되며, 이때 신청하면 참가비의 20%를 할인 받을 수 있다. 10K 시티 트레일러닝은 19일 오전 8시 출발해 11시 시상식이 진행되며 참가비는 3만원이다. 50K 스카이 트레일러닝은 같은 날 오전 5시 30분 출발해 오후 6시 시상식이 진행되며 참가비는 12만원이며 ITRA 포인트는 3점 주어진다. 100K 울트라 트레일러닝은 50K와 같은 시간 출발해 다음날 오전 8시 30분 시상식이 진행된다. 참가비는 20만원, ITRA 포인트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한편 이번 대회에는 스포츠클라이밍 볼더링 대회, 축하공연, 산악영화 상영, 체험프로그램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진행돼 참가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즐거움과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민중사 100년 성지, 잊혀진 강북 자부심 세울 것”

    “민중사 100년 성지, 잊혀진 강북 자부심 세울 것”

    “3·1운동부터 4·19민주화혁명까지 근현대 민중사를 보려거든 서울 강북구로 오세요.”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지역의 역사문화 자원을 꿰어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라는 강북의 보배를 만들었다. 높은 빌딩숲 개발에 집착하는 대신 3·1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 민주화의 성지인 국립 4·19민주묘지, 건국의 초석을 다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6위의 묘역 등 지역에 있는 역사문화 자산을 토대로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를 구축하면서 강북을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관광 도시로 자리매김시킨 것이다. 3선 가도를 거침없이 달려오면서 역사문화관광벨트 공정률도 70%에 달한다. 역사문화관광벨트의 핵심 사업지 중 하나로 독립자금을 댔던 최부잣집 관련 전시가 한창인 근현대사기념관에서 23일 박 구청장을 만났다. -역사문화관광벨트를 정의한다면. “역사문화관광벨트 대상지는 미아뉴타운 인근 북한산생태숲부터 시작해 우이동계곡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우이동과 수유동 일대 약 18만㎡ 부지에 봉황각, 4·19민주묘지, 애국지사 16위 묘역 등 각종 역사 시설들이 즐비하다. 도선사, 화계사 등 전통사찰과 청자가마터, 근현대 자수역사가 전시된 박을복 자수박물관, 소나무 1000여 그루가 울창하게 늘어선 솔밭근린공원 등 문화 시설도 많다. 강북구의 자산이다. 이 일대에 12개 지점으로 이뤄진 역사문화관광벨트 건립 작업이 착착 진행 중이다. 작년에 개관한 이곳 근현대사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벨트 종착역에 가족 캠핑장도 만들고 있다. 역사문화 자원을 조명해 강북의 문화 정체성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을 높였다고 자부한다.”-역사문화벨트 완성도는. “북한산 역사문화 관광벨트는 총 12개 지점으로 이뤄져 있다. ▲우이동 만남의광장 ▲윤극영가옥 ▲청자가마터체험공간 ▲근현대사기념관 ▲냉골문화체육커뮤니티 ▲미양주민쉼터 ▲우이동가족캠핑장 ▲소나무숲길만남의광장 ▲진달래도시농업체험장 ▲예술인촌 ▲빨래골암석공원 ▲삼양체육과학공원 등이다. 이 가운데 ▲만남의광장 ▲윤극영가옥 ▲근현대사기념관 ▲미양주민쉼터 ▲삼양체육과학공원 등 5곳이 완성됐다. 나머지도 사업도 진행 중이어서 공정률이 70%에 육박한다고 볼 수 있다.” -민선 5기 구청장이 된 2011년부터 역사문화관광 도시의 완성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 사업을 추진했는데. “2002년 처음 구청장 선거에서 떨어진 뒤 8년간 야인 생활을 하면서 매일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가 우리 동네에 영면 중인 순국선열 애국지사 16명(묘)을 다 만났다. ‘땅속에서 있으면 묘지일 뿐이지만 끄집어 내면 완벽한 근현대사로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역사문화관광벨트를 구상했다. 첫 구청장 임기인 민선 5기 당선 이듬해인 2011년 박원순 시장에게 강북의 이 같은 역사문화 특성을 살려 근현대사박물관을 지어달라고 제안했고 역사에 조예가 깊은 박 시장께서 기념관 건립이란 아이디어로 화답하면서 사업이 빛을 보게 됐다. 아마 2002년 구청장 선거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북한산 역사문화벨트사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웃음)”-민선 7기 들어 추가로 진행하는 역사문화관광벨트 사업이 있다면. “조선시대의 브리태니카라고 부를 수 있는 임원경제지를 실학자인 풍석 서유구 선생이 강북구 번동에서 쓰셨다. 이에 해당 지점에 임원경제지 체험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또 우이 구곡(九曲) 명소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제1곡인 만경폭부터 적취병, 찬운봉, 진의강, 세묵지, 월영담, 탁영담, 명옥탄, 재간정까지 9개의 명소가 있다. 강북구 우이동 산 68-1 일원으로 우이동 계곡 약 2.3㎞ 구간이다. 1762년 조선 정조 당시 대제학을 역임한 풍산 홍씨 가문의 홍양호(1724~1802) 선생이 이름 붙인 뒤 가꾸기 시작한 곳이라고 한다. 1곡은 사업의 복원설계 용역을 마치고 지난해 착공에 들어갔으며 8~9곡에 해당하는 부분은 복원사업을 마친 상태다. 사업이 완성돼 캠핑장, 도선사, 봉황각 등 주변 관광자원과 어우러지면서 관광벨트를 완성할 것이다. -역사문화관광이 강북의 정체성이자 먹거리라면 도시개발 사업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도시재생과 역세권 개발 투트랙으로 가고 있다. 우선 강북구는 우이신설 경전철 역사뿐 아니라 기존 수유역, 미아역, 미아사거리역과 같은 지하철 역사를 중심으로 한 역세권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또 수유1동, 인수동, 4·19거리를 포함한 우이동, 송중동, 번2동 등 지역을 도시재생 활성화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수유1동은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됐고 인수동과 4·19사거리 일대는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에 이름을 올렸다. 인수동에 총 100억원, 4·19사거리 일대에 200억원, 뉴딜사업에 선정된 수유1동에 연계사업비까지 총 772억원을 투입한다.” -지역에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우리 지역에 재개발 재건축이 해제된 곳이 많다. 출구 전략 때문에 해제된 곳에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 주차장, 여가문화활동공간 등 주민편익시설을 대거 구축해야 한다.” -3선 이후 계획이 궁금한데. “서울 시민들이 강북구의 역사문화관광벨트를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갖도록 사업을 마무리 짓는 데 전념하겠다. 구청장 이후의 계획은 구청장 임기가 끝나는 3년 후에 다시 고민하겠다. 남북 통일과 동북아문제에 관심이 있다.” -강북구만의 장점이라면. “우리 구는 전체 면적의 약 60%가 숲이다. 건강도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미세먼지가 북한산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에 흡착돼 다른 지역보다 공기가 좋다. 실제로 북한산 둘레길 1구간이 소나무숲길인데 지리산 덕유산보다 피톤치드(살균성 물질)가 더 많다는 연구도 있다. 강북에 오셔서 깨끗한 공기와 함께 강북의 역사문화관광 자원을 만끽하길 바란다.” 진행 주현진 부장 jhj@seoul.co.kr정리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강북서 지역정치 입문… 뚝심으로 무장한 ‘3선’ 구청장

    강북서 지역정치 입문… 뚝심으로 무장한 ‘3선’ 구청장

    박겸수(60) 강북구청장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더불어민주당에서 오랫동안 몸담은 당직자 출신이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말이 시원하고 성격이 호방하다. 광주 광산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대 정외과(76학번) 재학 중 광주민주화운동 시민군으로 뛰던 대학 선배의 영향을 받아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군사정권에 맞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결성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들어가 청년위원으로 일했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 평화민주당(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당직자로 일하던 1995년 첫 동시 지방선거 때 강북구 시의원으로 출마해 지역정치를 시작했다.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에서 구청장에 당선된 뒤 내리 세 번 연달아 선출됐다. 지난해 치른 민선 7기 지방선거 때 득표율은 64.7%다. 사무실에 큼지막하게 써 붙인 인생철학인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구정 모토로 삼아 구민에 대한 봉사를 천직으로 알고 산다. 뚝심과 근성이 장점이다. 매일 아침 새벽 5시 30분이면 북한산에 올라 주민을 만나는 일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민주당이 거듭 분열하던 중에도 당적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박겸수 강북구청장 약력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조선대 부속고·조선대 정외과 졸업,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민주화추진협의회(1986), 평화민주당(1987) 당직자 ▲김대중(1997)·노무현(2002) 대통령 후보 강북갑 선대위 부본부장·위원장 ▲민주당 중앙당 기조실장(2008) ▲4~5대(1995~2002) 서울시의원 ▲민선 5·6·7기(2010~2019 현재) 강북구청장. 부인 최종임(62)씨와 1남 1녀
  • “日 방위백서, 北 핵무기 소형화·탄두화 실현 첫 명기”

    한국 안보협력 순위 네 번째로 낮춰 일본 정부가 다음달 확정할 올해 ‘방위백서’ 초안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 ‘소형화·탄두화를 이미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명기됐다고 요미우리신문이 21일 보도했다. 지난해 방위백서에서는 ‘핵무기 소형화·탄두화의 실현에 다다랐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고 기술했던 것에 비해 좀 더 확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요미우리는 “북한의 기술 진전이 예상됨에 따라 올해에는 지난해보다 더 나아간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며 “핵무기 소형화에 의해 탄도미사일 탑재가 가능하게 되는 데 대한 위기감을 정부가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의 군사 동향에 대해 “중대하고 절박한 위협”이라는 인식은 지난해와 똑같이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또 자위대 초계기의 위협비행을 둘러싼 한일 레이더 갈등 등을 거론하며 “한국 측에 재발 방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어 미국을 제외한 각국·지역과의 안보협력 순위와 관련해 한국을 호주, 인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이어 네 번째에 위치시켰다. 호주에 이어 두 번째였던 지난해에 비해 한국의 우선순위를 낮춘 것이다. 한편 북한산 석탄의 부정 수출에 관련돼 지난해 8월 한국으로부터 입항 금지 조치를 받은 화물선 4척 중 3척이 이후 1년간 일본에 최소 8회 기항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이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는 선박 모니터링 국제조직 ‘도쿄MOU’ 데이터베이스를 인용해 “북한산 석탄 수출을 금지하는 유엔 제재 조치를 위반한 선박들이 일본을 방문했고 그 전후 러시아나 중국 등의 항구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북한이 제재를 회피하는 우회 수출 통로로 일본 항구를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통일로 정체, 길 찾는 은평

    통일로 정체, 길 찾는 은평

    서울 서북부를 남북으로 잇는 통일로가 출퇴근 시간대 극심한 교통 정체를 빚는 데 더해 창릉신도시 조성 계획까지 발표되면서 은평구가 교통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에 구는 신분당선 서북부연장선과 서부선 경전철 조기 착공, 제2통일로(은평새길) 착공을 염원하는 50만 구민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펼친다고 7일 밝혔다. 목표 인원은 15만명이다. 구는 올 하반기 안에 구민들의 뜻을 담은 서명지를 모아 서울시,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에 전달하면서 교통 해결책 마련을 요구할 예정이다. 최근 은평구는 취약한 교통 기반 시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통일로는 상습정체구역이 돼 가지만 2007년 은평뉴타운, 고양시 택지개발사업 추진 당시 수립된 제2통일로(은평새길) 조성은 10여년이 되도록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교통 수요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통일로 녹번역 주변과 홍은동 일대에 8000여 세대에 이르는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는 등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의 재개발, 신도시 조성 등으로 18만 5800세대가 입주할 예정이다. 은평성모병원 개원, 국립한국문학관 유치, 북한산 등산객, 둘레길 이용자 증가 등으로 수요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문화가 흐르는 은평구, 한여름 밤 ‘미디어파사드’ 축제

    문화가 흐르는 은평구, 한여름 밤 ‘미디어파사드’ 축제

    서울 은평구가 구민들에게 한여름 밤 자연 풍광과 함께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은평구는 사비나미술관과 함께 오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저녁 8시 진관동 사비나미술관 야외무대에서 ‘미디어파사드’ 를 선보인다고 26일 밝혔다. 미디어파사드는 건축물의 외관을 뜻하는 파사드와 미디어를 합친 말로, 건물 외벽을 스크린 삼아 영상을 펼치는 기법이다.작품은 미디어아티스트 김창겸 작가의 ‘푸른 나비의 꿈’이다. 멸종 위기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존과 화해가 주제인 만큼 북한산이란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자원 순환 도시를 지향하는 은평구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평이다. 3D 애니메이션, 영상, 회화 등을 결합한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김 작가는 “이번 작품은 생태계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고요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적 세계로 감상자를 이끌 것”이라고 감상 포인트를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사비나미술관의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서도 라이브방송을 볼 수 있다. 구 관계자는 “이번 문화 행사가 구민들에게 문화 다양성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비나미술관은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 시대를 마감하고 은평구 진관동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울 속 별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나올 만하네

    서울 속 별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나올 만하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3회 부암동 능금나무길’ 편이 지난 20일 종로구 부암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태풍의 북상을 알리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없이 집결지 윤동주 문학의 집에 모였다. 시인의 언덕~무계원(오진암 이전지)~현진건 집터(무계정사 옛터)~환기미술관~능금마을~백사실(추사 김정희 별서)~백석동천 바위~부침바위(부암) 터~석파랑을 거치며 부암동을 주름잡았다.이날 코스에 서울미래유산은 석파랑 한 곳뿐이어서 코스 기획에 애로가 있었지만 진행하길 잘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왜냐하면 부암동은 ‘일당백’이니까. 풍파를 이겨 내고 살아남은 한옥 한 채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했다. 투어를 이끈 정순희 해설자는 한여름 부암동 산골과 도시골목의 추억을 참가자들의 가슴에 새겨 줬다.부암동 능금마을은 서울 속 산골이다. 광화문에서 직선거리로 2~3㎞에 불과한 이 마을 어귀에 들어선 순간 지리산 골짜기로 시간이동한 듯했다. 굳이 멀리 떠날 필요가 있을까. 서울에서 옛사람의 별서(별장)터와 요즘 사람의 별서를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 그만이다. 부암동 능금마을엔 능금밭이 없다. 능금나무 몇 그루뿐이다. 그래도 이 마을을 능금마을, 이 길을 능금나무길이라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인평대군, 中서 능금나무씨 가져와 심었다는 설 능금마을의 유래는 여러 갈래다. 토종 사과가 열리던 이곳에 조선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이 중국 땅을 11차례 드나들면서 능금 씨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주민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능금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매년 봄이면 능금마을 아래 백사실 계곡에는 알을 깨고 나온 도롱뇽이 꼬리를 흔들고 다닌다. 산개구리, 버들치, 가재가 꼬물거린다. 부암동은 북한산 문수봉·보현봉·비봉과 백악산, 인왕산이 첩첩을 이룬 산중마을이다. 흘러내린 물은 세검정계곡을 따라 홍제천을 이룬다. 6세기 신라 진흥왕이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고 7세기 장의사, 8세기 승가사가 들어섰다. 신라의 전설이 깃든 계곡이다. 부암동에는 ‘무계동’, ‘백석동천’, ‘삼계동’이란 바위 각자가 남아 있다. 15세기 안평대군이 집(무계정사) 뒤 바위에 새긴 글이 무계동이다. 청계동천의 입구이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여기서 탄생했다. 백석동천 바위각자는 ‘흰 돌이 많은’ 백사실 계곡에 붙인 이름이고 삼계동은 석파정 암벽에 새긴 이름이다.●안평대군 추종자들 따라와 무계동·삼계동 생겨 인적이 없던 계곡에 안평대군의 추종자들이 들어와 살면서 무계동, 부암동, 삼계동, 백석동이라는 자연부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문신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도성 밖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세검정초등학교)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무이정사(무계정사)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 올린 수각이 있다”고 적었다. 17세기 문인화가 겸재 정선은 ‘청송당’, ‘취미대’, ‘백악산’, ‘청하동’(자하동), ‘청풍계’, ‘수성동’, ‘인왕산’, ‘세심대’ 같은 장동팔경 진경산수화를 남겨 그때 그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창의문은 이름이 무려 다섯이다. 4대문, 4소문은 모두 별칭을 갖고 있지만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 장의문, 자하문, 자문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이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이미지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창의문은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움푹한 고갯마루에 세웠고, 본래 문루가 없었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군을 한양에 진입하게 한 공이 있다고 하여 영조 17년(1741) 비로소 문루를 세우고 반정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다.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됐다. 1970년대 평창동과 구기동에 택지가 개발됐다. 1971년 북악터널, 1980년 구기터널, 1986년 자하문터널이 각각 뚫리면서 거주 여건은 좋아졌지만 풍광은 무너졌다. 부암동은 1936년 고양군에서 서울 서대문구가 됐고 1975년에 종로구에 편입됐다. 2007년 백악산 개방 이후 창의문도 개방됐다. 창의문 밖은 세검정을 중심으로 부암동,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이 펼쳐진다. 개발광풍 앞에 옛 흔적은 지워지고 푯돌 몇 개만 남았다. 부암동이라는 지명을 낳은 집채 크기의 ‘곰보’ 부침바위는 도로확장과 함께 사라졌다. 사진 한 장이 유일한 흔적이다. 부암동경로당 앞에 부침바위 푯돌이 있다. 그나마 남은 별서와 별서 터가 위안을 준다. 총융청(신영)이라고 하는 북쪽을 지키는 군 주둔지가 개발제한구역, 군사보호구역, 청와대경호구역으로 이어진 덕분이다. 창의문을 중심으로 부암동 서쪽 인왕산 자락은 청계동천이요, 동쪽 백악산 자락은 백석동천이다. 백석동천에 백사실 별서 터가 있다면 청계동천에는 무계정사 터가 있다. 무계정사 위쪽으로는 반계 윤웅렬의 부암정이, 무계정사 아래쪽에는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이 살아남았다.● 석파정 별당·석파정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 부암동을 찾는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를 혼동한다. 첫째는 석파정과 석파랑의 구별법이다. 둘째는 무계정사와 무계원을 헛갈린다. 셋째는 백사실 별서 터의 주인이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장동 김씨 세도가 김홍근으로부터 강탈한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 언덕인 이 집의 이름을 석파정이라고 짓고, 자신의 호도 석파라고 정했다. ‘대원군 별장’으로 통한다. 2012년 서울미술관이 들어선 이 집은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이다. 동명의 한정식집으로 쓰이는 석파랑은 세검정 삼거리에 있는 소전 손재형의 별서이다. 별서 위쪽 언덕배기에 자리한 ㄱ자 구조, 맞배지붕 한옥이 대원군이 머물던 ‘석파정 별당’이다. 석파정이 고아원과 요양원으로 쓰이면서 훼손 위기에 처하자 1958년 소전이 통째 자신의 집에 옮겨 놓았다. 석파정 별당과 석파정은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와 26호로 지정됐다. 무계원은 익선동에 있던 조선의 마지막 내시이자 수집가 이병직의 집이었다가 1953년 서울음식점 제1호로 등록된 한정식집 오진암을 2014년 옮겨 놓은 문화공간이다. 안평대군의 옛집인 무계정사 가는 길 초입에 있다고 하여 무계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백석동천의 주인은 누구인가. 별서 터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부속 건물의 초석이 열주처럼 늘어선 아늑하고 고즈넉한 숲속이다. 별서 아래 남쪽엔 타원형의 연못과 ‘백석정’이라고 알려진 6각 정자의 주춧돌이 놓여 있다. 백석동천과 월암이라고 새긴 각자바위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2에서 ‘폐허의 미학’이라고 지칭한 그곳이다. 백석동천의 다른 이름이 백사실이어서 한때 백사 이항복의 별서라고 알려졌으나 사실무근이다. 영조 때 문인화가 허필의 별서로 지칭되기도 했다. 2012년 한국전통문화대 최영성 교수가 발표한 논문 ‘백사실 별서에 대한 고찰’에서 추사 김정희가 구입해 소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사의 ‘완당전집’에서 “나의 북쪽 별서를 말한다. 백석정의 옛터가 있다”는 설명을 찾은 것이다. 이 별서는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화보에 ‘북악8경’ 중 ‘백석곡 8각정’이라고 소개됐다. 사진에는 “창의문을 나서 백석곡을 찾아 아늑한 산골짝에 드니 조그만 8각정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6각정을 8각정이라고 오인한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탔다. 별서는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1967년에 간행한 ‘동명(洞名)연혁고’에 건재한 것으로 기록됐으나 1970년 허물어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4회 서울의 대중가요2(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일시 및 집결장소: 7월 27일(토) 오후 6시 마포역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 (www.suci.kr)
  • 조선 사릉 ‘채석장’ 서울시 문화재 된다

    조선 사릉 ‘채석장’ 서울시 문화재 된다

    서울시가 강북구 수유동 구천계곡 일대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왕릉 채석장을 시 문화재로 지정한다. 조선왕릉 채석장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중 하나인 사릉(단종비 정순왕후의 릉)을 조성할 당시 석재를 채취했던 채석장을 서울시 기념물 제44호로 지정한다고 22일 밝혔다. 사릉 석물 채석장은 그동안 정확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던 조선왕릉 채석장의 소재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채석장 확인은 한국산서회 회원들이 일대에서 당시 기록을 새겨 넣은 바위를 발견하면서 이뤄졌다. 본래 경기 남양주에 있던 사릉은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묘였으나 숙종 24년(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능으로 격상됐다. 이에 따라 격식에 맞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현재의 북한산 구천계곡 일대에서 석재를 채취하고, 인근 바위에 ‘사릉부석감역필기’라는 글과 함께 그 업무를 담당했던 관리들과 석수의 이름을 새겨 그 사실을 기록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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