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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출회의 부활 잘한일(사설)

    통상산업부가 대통령주재의 수출대책회의를 부활시키기로 한 것은 이 시점에서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막대한 외채를 차질없이 갚아나갈 수 있는 수단이 현재로서 수출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그러나 수출촉진의 효율적인 수단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수출입국정신의 재현이 필요하고 수출업체는 물론이고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출의지의 다짐이 새롭게 있어야 하며 그 시작이 대통령주재의 수출대책회의가 돼야 한다고 본다.사실 대통령이 수출회의를 주재한다고 해서 수출촉진을 위한 묘책이 기대되는 것은 아니다.다만 정책의지를 보이는 효과는 크다. 세계무역기구(WTO)출범이후 직접적인 수출지원은 엄격히 규제되어 있다.모든 수출촉진행위가 국제규범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수출대책회의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그러나 그건 그렇지가 않다.수출하자는 분위기조성 그 자체로 대책회의의 존재의의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분위기의 고양이 수출업체에 대해서는 큰 힘으로작용할 수도있는 것이다.수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성원이야말로 수출드라이브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3월부터 부활되는 수출대책회의는 수출분위기의 조성이 1차적인 목표가 돼야 할것이다.이와함께 수출애로요인의 해소를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제공되도록 운용되어야 할 것이다. 수출대책회의는 통상부처차원에서 처리하기 힘든 과제들,이를테면 금융·외환·노사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미국도 지난 92년 수출촉진법에 따라 부통령과 관계장관들로 구성된 무역진흥조정위원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이 위원회의 중요한 기능은 수출장애요인의 해소다.수출대책회의의 명칭은 과거 수출확대회의를 무역확대회의로 바꾸었듯이 통상마찰의 빌미는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대이 대화 지지 전면 부인/이란 부통령

    【테헤란 AFP 연합】 마수메 에브테카르 이란부통령(36)은 1일 자신이 이란인과 이스라엘인간의 대화를 지지했다는 이스라엘 신문 예디오트 아로노트의 회견기사를 전면 부인했다.
  • 클린턴 사임 위기 고조

    ◎미 언론 67%­“거짓말 드러나면 사임해야”/전 백악관 비서실장­고어 대통령 승계 공개 거론/르윈스키­면책조건 27일 정사 시인 가능성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외신 종합】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 원르윈스키양과의 섹스 스캔들이 클린턴을 사임의 궁지로 급속히 몰아넣고 있다.미 언론의 여론 조사 결과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면 대통령직을 자진 사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미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으며 클린턴 1기 행정부의 비서실장이 클린턴 대통령의 사임과 앨 고어 부통령의 승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까지 했다. 미 ABC방송은 24일(미 동부시간)지난 23일 밤 성인 505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이틀전 조사 때에 비해 크게 떨어졌으며 특히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관계에 대해 위증을 했다면 사임해야 한다는 대답이 67%나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조사결과 클린턴 대통령이 거짓말을 사주했다면 ‘사임해야 한다’가 64%,‘탄핵받아야 한다’가 54%,위증을 했다면‘사임해야 한다’가 67%,‘탄핵받아야 한다’가 55%로 각각 나타났다. 클린턴 1기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던 리언 파네타는 24일 미 새너제이 머큐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스캔들에 뭔가 있다면 그것은 클린턴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상황하에서 만약 고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새로운 메시지와 인물들이 나온다면 민주당으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고어 부통령의 승계 가능성을 거론했다. 한편 스타 특별검사는 클린턴 대통령이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새해 국정연설을 발표하는 오는 27일 르윈스키가 화이트워터 재판 담당 대배심에서 선서 진술을 하도록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25일 알려졌다. 24일 하오(미 동부시간) 르윈스키의 변호인 윌리엄 긴스버그 변호사는 소추면제특권의 제공을 전제로 정사 사실 등을 털어놓을 것을 종용하고 있는 케네스 틀별검사와 벌이고 있는 협상과 관련,“르윈스키가 소추면제 특권을 보장받는다면 진실을 말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수잔 맥두걸 처럼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며 대화를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CNN은 클린턴이 급박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미키 캔터 전 미 재무장관 등 절친한 친구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상담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클린턴의 친구들은 클린턴이 르윈스키와 관계를 가졌을 거라고 믿고 있으며 사임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 얼룩진 헌정(대한민국 50년:4)

    ◎52년 첫 개헌… 87년까지 9차례 뜯어 고쳐/이승만 이어 박정희도 종신집권 노려 헌법손질/69년 3선 개헌­72년 유신 선포… 대통령 간선 고착/전두환 쿠데타 집권… 87년 6월 항쟁 직선제 확립 이승만은 1954년 2차개헌으로 종신집권에의 길을 텄다.그러나 이는 몰락을 재촉했다.1960년 4·19혁명은 마침내 이정권의 무한권력 추구를 좌절시켰고 6월15일 3차 개헌을 가져왔다.큰 골격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다.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유보조항을 손질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정리하는데 촛점을 맞췄다.그러나 내각제 도입으로 3·5부정선거범 등에 대한 처벌근거인 정·부통령선거법이 소멸되자 혁명 주체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학생들의 의사당 난입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집권민주당은 11월29일 이승만 정권하의 반민주행위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근거규정을 헌법 부칙에 설치하는 4차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수난은 갈수록 심화됐다.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군사쿠데타는 헌정파괴라는 극단적사태를 몰고왔다.국회는 즉각 해산됐다.이듬해 12월16일엔 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5차 개헌이 단행했다.이 개헌안은 인권규정을 보강하고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3권분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핵심 골자는 부통령제 폐지와 정당설립 규제 등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6차 3선개헌 날치기 처리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부활된 새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중임제한 규정에 부닥치자 전에 이승만이 걸었던 전철을 답습했다.영구집권의 획책한 것이다.중임제한 폐지 개헌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디ㅊ치자 1969년 10월21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3선개헌으로 불리는 6차개헌이 그것이다. 개헌뒤 실시된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박정희 634만표,김대중 539만표로 나타난 개표결과는 영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그래서 영구집권을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이것이 바로 헌정 수난의 절정판인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유신은 1972년 7월17일에 선포됐다.이날은 아침나절 약간 흐렸으나 낮부터는 전국적으로 맑았다.시민들의 생활은 평온했으며 각 관청들만 막바지에이른 국정감사로 다소 부산했다.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국체변혁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를 위한 시나리오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됐다.상오9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우시로쿠(후궁호랑)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약 20분간 요담한데 이어 10시 15분부터는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와 40분간 요담을 가졌다. 유신을 통보한 자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나 하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울 소공세무서에 대한 국정감사를 행하던 재무위에서는 “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회가 해산될지 모른다”는 협박투의 발언이 여당의원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날 상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는 박정희 주재로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박정희는 둘러앉은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응시하다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모두 한번씩 읽어보고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하오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헌법 정지,국회 해산,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개헌,….’달리 의견이 있을수 없었다.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어 외무장관 김용식은 하오5시 주한외교사절 23명을 불러 유신단행을 설명했다. 계엄선포 H아워를 1시간 앞둔 하오6시 청와대에서는 영문도 모른채 소집돼온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령을 의결했고 같은 시간 시내 전역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계엄군이 포진하기 시작했다.중대뉴스가 예고된 하오7시,라디오에서는 헌법의 효력을 2개월간 중지시키겠다는 박정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신이 일단 선포되자 개헌작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작업은 신직수 법무·이경호 보사·서일교 총무처장관과 유민상 법제처장,헌법학자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하지만 실상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으로 구성된 일명 ‘기획소위’가 건네준 골자를조문화하는 것에 불과했다.이때 심의회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이 헌법의 기본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댈 수 없습니다”고 한 신직수의 발언이 입증하고 있다. 개헌안은 유신선포 25일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3분의1과 대법원장 등 전법관 임명권 보유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의 무한권력 창출이었다.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은 종신집권을 담보해주는 안전판이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종말로 향하는 단초이기도 했다.국내 상황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았고 최대우방 미국과도 갈등이 깊어갔다. ○80년 8차개헌 간선제 유지 서울신문이 최근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한미관계의 조사’라는 보고서는 당시 한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돼 갔음을 보여준다.유신 직후인 73년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를 토대로 국무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서 이미 미국이 경제원조 중단과 미군철수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결국 안팎으로 시련을 겪던 유신은 끝내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또한번의 헌정중단 및 개헌을 초래했다.공백상태의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1980년 10월27일 복지규정 보강 등으로 위장한 8차 개헌을 실시하지만 권력획득의 핵심인 대통령 간접선거는 그대로 유지했다.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 통치로 일관하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상징되는 전국민적 저항에 굴복하고 말았다.그래서 87년 6월29일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이 9차 개헌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헌정 50년을 맞는 올해는 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정권을 인수인계하는 뜻깊은 해다.하지만 헌법은 또다시 개정의 고비를 맞고 있다.내각제 공약을 내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미,73년부터 “유신철회” 압박/본사특별취재반,미 하원보고서 입수 확인/“주한미국 철수” 일방선언­‘코리아게이트’ 돌출 유신이 절정을 이뤘던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1977년 3월9일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일방선언했고 6월에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불거졌다.한국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한국정부의 항의가 거세자 미국은 박동선 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코리아게이트를 돌출시켜 한국정부를 더욱 옥죄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철회를 겨냥한 미국정부의 압박전술이었다.그런데 미국은 이처럼 유신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태도를 보이기 훨씬 전부터 유신의 몰락을 예견한 교포들의 지적들을 주목했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도 강구했었음이 최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이 문건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한미관계의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것으로 1973년 9월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건은 김대중 등 미국내에서 반한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과 교포들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문건은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으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점차고립되는 상황이고 대미관계에서도 원조와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문건은 이어 “한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공조아래 경제원조 및 권사지원 철회로 압력을 가할 경우 박정희 정권은 급격히 붕괴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미국내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대한 FBI의 사찰이 강화됐다.이와 더불어 한미 정부간에 인권침해와 내정간섭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됐던 사실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큰 작용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자연보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미국의 대통령 문화:9)

    ◎도약의 20세기 연 ‘공익의 조정자’/트러스트 해체 등 대기업 부당행위에 철퇴/포츠머스 조약 중재… 미 최초의 노벨상 수상/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 등 저서 38권 남겨 【메도라(미 노스다코타주)=나윤도 특파원】 ‘컬러드(colored canyon) 캐년’.미중부 대평원 북단 노스다코타주의 서쪽끝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국립공원 초입에 위치한 이 거대한 골짜기는 이름 그대로 형형색색의 띠를 두른 바위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신비의 조화를 이룬다. 남북 다코타주의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주리강의 지류인 리틀미주리강을 따라 색동 바위의 군무를 연상케 하는 비경이 루즈벨트 컨트리가 된 내역은 이 공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인구 100명의 소읍 메도라에 들어서면 이내 알 수 있다. 루즈벨트가 3년간 머무르던 ‘말티즈크로스’통나무집 앞에 세워진 그의 기념관에는 자연보호 대통령인 그의 생활에 관한 자료들과 함께 미국의 자연보호역사가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 다코타의 황량한 벌판을 달려온 여행객들에 컬러드 캐년의장관과 함께 위대한 대통령과의 만남이라는 기쁨을 선사해 주고 있다. 미 26대 태통령으로 미 역사상 도약의 시대인 20세기를 연 그는 저술가,언론인,등산가,카우보이,전쟁영웅,노벨 첫 수상자 등 미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타이들을 보존하고 있을만큼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그같은 루즈벨트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다코타에서 시작하는 것은 젊은 시절 이곳에서의 경험이 그의 정치철학이던 ‘공익정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 출신인 루즈벨트는 1884년 2월14일 발렌타인데이에 23세의 젊은 부인 앨리스와 부친을 한날 병으로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컬러드 캐년으로 훌쩍 떠나 왔다.이곳 목장에서 카우보이 생활을 하며 갖게 된 자연의 애착과 그것들이 방치된 채 손상돼가는 안타까움이 후에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국립공원 시스템을 창안하게 했다는 것이다.이는 오늘날 미국이 많은 자연을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또 엄청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의 공익정신이 유명해진 원인은 취임후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대기업 조정정책 때문이었다.남북전쟁이후 급격한 산업발전은 미국의 경제를 과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팽창시켰고 문명기기의 발달로 국민생활을 몰라보게 바꿔놓았지만 그 발전의 뒤안길에 만연돼 가는 각종 병폐는 미국 사회를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당시 가장 크게 대두된 문제는 대기업들의 횡포였다.철도 철강 석유 등 분야에서 통합과 독점을 통해 경제권을 장악한 기업인들은 정치인들과 언론까지 돈의 힘으로 매수,자신들에 유리하게 이끄는 등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협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내에는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 일소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지고 있었다.루즈벨트의 공익정신은 이같은 시대적 요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당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01년 9월14일 대통령의 암살로 예기치 않게 대통령이 된 그는 “연방정부는 어떤 특별한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다.바로 공익의 조정자가 돼야만 한다.또한 대통령은 바로 이같은 조정자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대기업 병폐의 치유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것을 천명했다. 루즈벨트의 정책 핵심은 대기업들의 부당행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힘을 정부가 갖도록 하는 것으로,우선 악명높은 몇몇 기업의 통합을 해체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첫대상은 철도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던 북부증권회사였다.당시 미 최대의 금융가 J.P 모건과 철도업자 제임스 힐이 공동으로 만든 막강한 파워를 가진 이 회사에 대해 손을 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과감하게 법무부에 이 회사에 대한 셔먼 트러스트 금지법위반 여부 조사를 명령했다.모건과 힐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나 루즈벨트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결국 2년후 대법원의 판결로 해산명령이 내려지게 됐다.그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트러스트 해체에 나섰으며 반발하는 기업인들에게 “만일 대기업들이 정부가 불법이라고 간주한 무엇인가를 행해 왔다면나는 그것을 끝까지 척결해 버릴 것이다”,“부패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패기업들에도 칼이 필요하다”는 등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그동안 노사분규시 일방적으로 고용주 편을 드는 것으로 돼 있던 정부의 입장을 노동자의 입장도 동동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이같은 그의 온건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과격한 변화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을 만족시켰으며 1904년 압도적 지지로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위상을 제고,국제사회의 지도국으로 부상케 했다.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분리독립시키고 파나마 운하를 완성시킨 것은 중요한 그의 업적의 하나로 지적되며 1905년에는 러·일 전쟁 당시 양국 대표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불러 평화조약을 중재하기도 했다.이같은 그의 국제평화 노력은 이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미국에 첫 노벨상 수여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858년 뉴욕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한 루즈벨트는 24세때 뉴욕주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뉴욕경찰국장,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했다.또 1898년 미·스페인 전쟁 발발시에는 의용기병대 대장으로 참전,산 후안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후 뉴욕주지사에 당선됐으며 1900년 선거에서 매킨리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부통령이 된 후 8개월 만에 42세의 나이로 미국 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했다.그는 21세때 첫 저서인 ‘1812년 해전’을 발간한 이래 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책 등 38권을 펴내 미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또 대통령 퇴임후 10년간 ‘The Out look’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등 언론인 생활도 하고 아프리카 사냥여행,브라질,정글 탐험을 했으며 새로운 정당을 결성,정치적 재기를 꿈꾸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도을 하다가 1919년 60세의 나이로 롱 아일랜드의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는 종합순위 5위를 나타내 2위를 기록한 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12촌간)와 함께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수잔 사르나 루즈벨트박물관 큐레이터/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애칭 딴 ‘테디 베어’ 곰인형 인기/미국 이상적 남편·아버지의 전형 【오이스터베이(미 뉴욕주)=나윤도 특파원】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적지인 사가모어 힐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사저와 박물관,당시 농장건물 등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이곳 박물의 수잔 사르나 큐레이터는 “아직까지 그가 대통령같다”며 설명에 들어갔다. ­루즈벨트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 19세기말 30여년 대통령들이 지나치게 무능했고 기업들에 매수되다시피해 땅에 떨어졌던 대통령직의 권위를 되살렸기 때문이다.그리고 부통령에서 승계한 대통령의 경우 그때까지는 대부분 잔여임기만 때우는 식이었는데 그는 그같은 관행을 종식시켰다. ­그가 애칭으로 많이 불리는 이유. ▲미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고 또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으로 친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래서 TR이라는 이니셜도 처음으로 사용됐다.또 애칭 테디(Teddy)가 광범위하게 불렸으며 그를 딴‘테디 베어’라는 곰인형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유명하다. ­루즈벨트의 가족관계는. ▲첫 부인 앨리스와 1녀,소꿉친구로 두번째 부인이 된 에디트와 4남 1녀를 두었다.무척 자상한 성격으로 미국의 이상적 남편,이상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특히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해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그후 큰 아들이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전사,1,2차 대전에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버지가 됐다. ­그의 성품은 어떠했는가.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통령 취임직후 백악관 첫 손님으로 흑인 지도자였던 부커 워싱턴을 초청했던 것은 유명하다.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을 놓고 남부 정치가들로부터 반감을 사 고전하기도 했다.그는 사냥 등산 등 야외생활을 좋아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으며 6천여권의 장서를 남겼다.
  • 인니 수하르토 7선 도전/집권 골카르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자카르타 AP AFP 연합】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은 집권 골카르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정식으로 수락했다고 하르모코 당 의장이 20일 말했다. 하르모코 당 의장은 이날 페이잘 탄중 총사령관,요지에 메메드 내무장관 등과 함께 대통령궁에서 수하르토 대통령과 만난 후 “수하르토는 기꺼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부통령이 매우 중요한 만큼 정보,연구 및 기술분야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 후보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고 하르모코 의장은 전했다. 올해 76세인 수하르토 대통령의 나이로 보아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는 부통령직에는 바츠루딘 주수프 하비비에 연구·과학장관,지난드자르 카르타사스미타 국가개발계획장관,라덴 하르토노 정보장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수하르토 퇴진 요구 시위/메가와티 지지자 한편 야당지도자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여사의 지지자 2백여명이 19일 의회 밖에서 수하트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이날 ‘메가와티를 대통령으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의회격인 국민협의회 의원 1천명에 대해 오는 3월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시 수하르토 대통령의 7번째 연임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 무기사용훈련 전국민 참가 촉구/이라크,대미 성전 초강수

    【바그다드·워싱턴 AFP AP 연합】 미국이 유엔무기사찰을 거부하고 있는 이라크에대해 군사적 응징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가 18일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국민들에게 전쟁훈련 참가를 촉구함으로써 이라크사태는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라크 국방부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자원병 동원령을 내린지 하룻만인 이날 전국민에 대해 오는 2월1일부터 시작되는 무기사용훈련에 지원하라고 촉구했다.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부통령은 관영 INA통신과의 회견에서 이라크는 90년 8월 쿠웨이트침공에 따른 “경제제재를 해제하기 위해 성전(지하드)을 치를 결심이 돼 있다”며 이번 훈련에는 모든 연령대와 사회계층의 남녀 1백여만명이 자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5선 케냐대통령 모이(뉴스의 인물)

    ◎1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정적 철저 제거… 국정전권 장악 【나이로비 AFP 연합】 5선에 성공한 모이 케냐대통령(73)은 지난 19년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아프리카에서 몇 안남은 구세대 권력자중의 하나. ‘평화,사랑,단합’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정적들에 대해서는 “쥐잡듯이 없애겠다”고 위협을 가하는 냉혹한 면모가 권좌를 유지해온 큰 비결로 꼽히고 있다. 78년 이후 20년에 가까운 철권통치 기간중 핵심 국가 중대사는 모두 단독결정해왔으며 헌법개정을 통해 총리도 두지 않고 재판관,군지휘관,각료,고위공직자 등을 혼자 지명할 수 있도록 국정전권을 장악하고 있다. 교사를 거쳐 31세에 당시 영국 식민통치기구인 입법위원회 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63년 케냐 독립후 조모 케냐타 초대대통령 휘하에서 67년 부통령으로 지명됐으며 78년 그의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이후 82년 공군주도의 쿠데타를 진압하는 등 정적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왔다.
  • 올 주목받는 세계인물 김대중 당선자 등 꼽아/일 아사히신문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아사히(조일)신문은 1일자 신년호에서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를 올해 세계에서 주목되는 주요인물의 한사람으로 꼽았다. 신문은 올 세계정세를 전망하는 특파원 특집기사에서 오는 2월25일 한국의새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김 당선자가 경제위기 극복과 남북 대화에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고 지적했다. 아사히는 이와 함께 ▲올 봄 총리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되는 주용기 중국부총리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후보로 선출될 지가 주목되는 앨 고어미 부통령 ▲러시아 개혁파의 기수인 보리스 넴초프 제1부총리 ▲온건파 아랍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한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등을 올해의 주목인물로 소개했다.
  • 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연표로 본 대한민국 50년

    ◎36년만의 주권 회복… 6·25 상흔 딛고 산업화 대장정/시련속에 꽃피운 민주화운동… ‘문민시대’ 열며 개혁의 길로 ▷48년 정부수립 과정◁ ◇정치 ▲1월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방한 ▲5월10일 남한 총선거 실시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6월10일 국회의장에 이승만 박사 선출 ▲7월17일 제헌절 제정 ▲7월20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통령 이시영 선출 ◇사회·문화 ▲1월7일 의무교육제 실시 ▲4월3일 제주도 무장폭동 ▷제1공화국◁ ◆정치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미군정폐지 ▲ 〃 9월13일 행정권의 한국 정부 완전이양 ▲ 〃 11월30일 국군조직법 공포 ▲ 〃 12월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승인 ▲50년 6월25일 6·25동란 발발 ◇경제 ▲50년 12월10일 한·미 경제원조협정 조인 ▲55년 8월8월 증권시장 개장 ◇사회·문화 ▲48년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 ▲50년 6월1일 6년제 의무교육 실시 ◇체육 ▲50년 4월12일 한국,보스톤 마라톤대회 제패 ▷제2공화국◁ ◇정치 ▲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실시 ▲ 〃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 〃 4월28일 과도정부 구성 ▲ 〃 8월12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 의원 선출 ▲ 〃 8월19일 초대 총리에 장면 의원 ▷제3공화국◁ ◇정치 ▲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 〃 5월20일 장도영 중장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출범 ▲62년 4월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62년 12월26일 헌법개정(대통령책임제) ▲63년 12월7일 제3공화국 출범(박정희 대통령 취임) ▲70년 12월23일 정부종합청사 준공 ▲72년 10월17일 박대통령,국회해산 및 계엄선포 ▲ 〃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대의원 선거 ▲ 〃 12월27일 유신헌법 공포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3호 선포 ▲ 〃 1월15일 고위공직자 숙정 ▲ 〃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경제 ▲62년 1월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66년 1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회·문화 ▲68년 11월29일 서울시내 전차철거 ▲ 〃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72년 4월10일 문교부,지명의 로마식 표기공표 ◇통일·외교 ▲65년 1월8일 월남파병 결정 ▲68년 1월23일 미 푸에블로호 북한에 피납 ▲68년 11월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출현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71년 3월27일 첫 미군 철수 ▲ 〃 9월20일 남북적십자사 이산가족찾기 첫 예비회담 개최(판문점) ▲ 〃 12월27일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 〃 8월30일 남북적,본회담 평양서 개막 ▲74년 1월30일 한·일 대륙붕협정 체결 ▲ 〃 8월15일 서울지하철 개통 ▷제4공화국◁ ◇정치·행정 ▲75년 2월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률 73.11%)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 ▲ 〃 1월6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 ◇사회·문화 ▲75년 6월30일 예비군 창설 ▲ 〃 9월2일 학도호국단 발단식 ▲ 〃 9월22일 민방위대 발대식 ▲76년 4월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로 지정 ▲ 〃 8월1일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첫 금메달 획득 ▲77년 9월15일 한국등반대 에베레스트 정복 ▲78년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 〃 4월21일 대한항공기 소련 무르만스크강제착륙 ▲ 〃 10월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경제 ▲76년 6월18일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77년 6월19일 국내 최초 고리원자력1호 발전기 점화 ▲ 〃 7월1일 부가가치세 실시 ◇통일 외교 ▲75년 4월29일 주월 한국대사관 철수 ▲76년 8월18일 북한군 판문점에서 집단도끼만행 사건 ▲77년 11월7일 한미연합사 사령부 발족 ▷제5공화국◁ ◇정치·행정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 〃 7월9일 2급이상 고위공무원 232명 숙정 ▲ 〃 7월15일 3급이하 공무원 4천760명 숙정 ▲ 〃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 〃 8월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대통령당선 ▲83년 1월1일 공직자 윤리법 발효 ▲ 〃 7월13일 입법예고제 첫 실시 ▲ 〃 10월8일 아웅산 테러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공직자 17명 사망 ▲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대통령직선제 선언 ◇경제 ▲80년 11월8일 경제활성화대책 발표 ▲81년 8월21일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5년 7월4일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0년 7월30일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 8월2일 컬러TV 시판 ▲ 〃 11월1일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81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개최확정 ▲82년 1월5일 야간통금 해제 ▲83년 3월2일 중고생 복장자율화 ▲ 〃 6월30일 KBS 이산가족찾기운동 ▲ 〃 9월1일 KAL기 격추 ▲86년 1월13일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88년 2월15일 예술의 전당 개관 ◇통일·외교 ▲84년 2월1일 팀스피리트 훈련개시 ▲85년 7월23일 남북 국회회담 첫 예비접촉 ▲ 〃 9월20일 남북고향방문단 서울·평양에 도착 ▲86년 1월20일 북한,남북회담 일방연기 ▲87년 11월29일 북한,KAL기 추락 ▷제6공화국◁ ◇정치·행정 ▲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하계 올림픽 개최 ▲ 〃 11월23일 전두환 대통령 재산헌납 발표 ◇경제 ▲91년 11월12일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9년 1월1일 해외여행제한연령 완전철폐 ◇통일·외교 ▲90년 6월5일 한소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 〃 9월4일 남북 첫 총리회담 개최(서울) ▲ 〃 10월16일 2차 남북총리회담(평양)▲ 〃 9월18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1년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선언 ▲ 〃 12월31일 남북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92년 한중 수교합의 발표 ▷문민정부◁ ◇정치·행정 ▲93년 2월27일 김영삼 대통령 재산공개,국무위원 등의 재산공개 당부 ▲ 〃 8월9일 정부 공직자윤리위 가동 ▲95년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5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선거,김대중 후보 당선 ◇경제 ▲93년 5월26일 신경제 5개년 계획발표 ▲ 〃 8월20일 경부고속도로 차종 TGV 확정 ▲ 〃 12월13일 쌀시장개방 합의 ▲94년 5월16일 금융실명제 실시 ▲96년 12월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97년 12월3일 IMF자금 요청으로 ‘IMF시대’ 도래 ◇사회·문화 ▲93년 4월6일 종합유선방송 허가 발표 ▲ 〃 8월20일 제1차 대학수학 능력시험 실시 ▲94년 1월6일 대입 본고사 14년만에 부활 ▲ 〃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96년 5월31일 한·일 2002년 월드컵공동개최 결정 ◇통일·외교 ▲94년 7월2일 남북정상회담실무절차 합의 ▲95년 6월29일 대북 경수로지원 합의 ▲97년 8월19일 대북경수로 부지공사 착공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음베키 남아공 부통령 ANC 차기총재에 선출

    【마피켕 AFP 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집권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17일 타보음베키 부통령(55)을 넬슨 만델라 대통령(79)을 승계하는 차기총재로 선출했다. 단독 출마한 음베키 부통령은 이날 3천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ANC 전당대회에서 기립박수를 통해 만장일치로 차기 총재에 선출됐다.
  • ‘온실가스 감축’ 불투명/미,2012년까지 90년수준 감축 주장

    ◎기후협약 교토총회 개막 8일 일본 교토(경도)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 총회 각료회의에서 미국이 기존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온실가스감축협상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엘 고어 미국 부통령은 이날 상오 각료회의 개막연설에서 “미국은 온실가스를 2012년까지 90년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면서 종전입장을 되풀이했다. 고어 부통령은 “이러한 목표도 전체적으로는 온실가스를 30% 정도 줄이는 효과가 있다”면서 “실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 약속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윤여준 환경부 장관은 이날 하오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은 앞으로 산업정책과 에너지정책을 연계해 산업구조를 환경친화적이고 에너지 저소비형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은 미·일 등과는 동일한 감축목표를 적용하되 다른 선진국들은 차별화된 목표를 가질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 클린턴·고어 특검임명 거부 배경

    ◎미 연방법 ‘모금전화’처벌엔 한계/청사내 사적인 장소까지 법적용은 무리/공화반발 불구 실무진 수사서 매듭될듯 재닛 리노 미 법무장관이 2일,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의 불법모금 행위 가담 여부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 임명에 거부키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게는 가재 편’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는 예상돼온 바이지만 공화당의 끈질긴 요구와 행정부 내에서도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간의 이견이 노출되는 등 지난 1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 귀추가 주목돼 왔다.그러나 리노 장관의 이번 결정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은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줄곧 그들을 괴롭혀온 대선자금 불법모금 의혹으로부터 일단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국정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공화당은 이들의 이른바 ‘백악관 모금전화’가 명백한 위법행위라는 전제에서 특별검사를 임명,민주당의 불법모금 의혹과 정·부통령의 위법가담 여부를 광범위하게 밝혀낸다는 전략 아래 강공을 퍼부어왔다.특히 리노 장관은클린턴과 고어에 대한 예비조사 실시에 동의,공화당측의 기대를 한층 높였었다. 그러나 이날 리노장관은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이 백악관에서 대선자금 모금을 위한 전화를 했다는 혐의와 관련,이 모금전화가 연방법이 적용되는 영역 밖,즉 백악관 내라 할지라도 사적인 처소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연방청사 건물내에서 공직자들이 정치적 모금을 요청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1883년 제정 미 연방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같은 리노 장관의 결정이 발표되자 공화당은 거센 반발을 보였으며 그녀에 대한 해임,탄핵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이 제기됐다.또한 댄버튼 하원 정부개혁감시위원장은 내주중 리노 장관과 특별검사 임명을 찬성해온 루이스 프리 FBI국장을 소환,청문회를 실시하겠다고 밝혀 문제의 소지를 남겼다. 그러나 미상원이 이미 아시아계 모금책이었던 존 황 등 핵심증인들의 의회 증언 거부에 따라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두지 못한채 청문회를 중단했으며,하원 정부개혁감시위원회도 별다른 위법행위 증거를 밝혀내지못하고 있어 미 대선자금 의혹은 앞으로 클린턴,고어 등 핵심표적이 제외된 채 민주당의 모금담당자 등 실무진들에 대한 위법행위 여부를 조사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 선진국,온실가스 차등감축 절충/기후협약 교토총회

    ◎EU 7.5%­러 5%­미·일 2.5% 적용 논의/미 상원 개도국 참여 강력 주장 【교토 교도 AFP 연합】 유엔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 총회 이틀째인 2일 주요협상국인 유럽연합(EU)과 일본,미국 등이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 차등 설정을 놓고 타협적 입장을 보임에 따라 부분적인 진전이 이뤄졌다. 특히 미국이 금주 말에 행정부 내에서 환경문제에 관한 강력한 목소리를 내온 앨고어 부통령을 교토에 파견키로 결정해 이번 회의에서 긍정적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는 기대가 고조됐다. 미국은 그러나 상원 대표단을 통해 개발도상국이 포함되지 않은 조약의 비준을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개도국의 참여 문제에 대해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다. 일본의 다나베 도시아키 환경담당 대사는 이날 회의에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EU와 비EU 2개 그룹 등 3개 그룹으로 나눠 차등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한 소식통은 일본이 EU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7.5%,러시아와 동구 및 옛소련공화국은 5.0%,미국과 일본에는 2.5% 감축 목표치를 적용할것을 제안한 것으로 전했다. 일본은 이미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 이같은 계획을 알렸으며 미국은 일본측에 5.0% 이내의 범위에서 목표치를 설정하겠다는 점을 비공식 통보해왔다고 회담 소식통은 전했다. EU 대표단의 한 소식통 역시 EU와 미국,일본 등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가진 단일 감축 목표치가 적용돼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으나 정치적인 절충안도 가능하다면서 유연한 입장을 나타냈다. 일본측 제안은 미국이 단일 감축목표치 설정 요구를 철회하고 차등 목표치 설정에 대한 수용 의사를 나타낸 뒤에 나왔다.
  • 리노,특검 불임명 방침/대선 불법모금 관련

    ◎FBI국장 반발에 결단 못내려 【워싱턴 연합】 재닛 리노 미법무장관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를 임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부적으로 정해놓고 있으나 루이스 프리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법정시한인 2일 아침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날 워싱턴 정가의 관측통들은 리노 장관이 루이스 프리 FBI국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무부 조사팀의 권고를 받아들여 특별검사를 임명하지 않는다는 최종결정을 내릴 경우 FBI의 반발은 물론 공화당의 정치적인 대공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리노 장관은 특별검사 임명여부를 연방항소법원에 통보해야 하는 법정시한 하루전인 1일 밤늦게까지 법무부 조사팀 소속 검사들 및 참모진과 숙의를 가졌으나 프리 FBI국장의 반대 때문에 확고한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리노 장관은 이날 “여러가지 각도에서 검토,확인하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2일 아침 프리 국장을 만나 협의를 갖겠다”고 말했다. 한편 프리국장은 특별검사가 임명돼야 한다는 견해를 서면으로 작성,지난주 리노 장관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 클린턴·고어 불법모금 조사/특검 임명여부 오늘 판가름

    ◎워싱턴정가 “임명 않을것” 분석 지난해 미국 대선 과정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이 백악관 전화를 이용,선거자금 모금운동을 벌인 것이 불법인지를 가리는 특별검사의 임명 여부가 2일 판가름난다.재닛 리노 미 법무장관은 관계법률에 따라 그동안 정·부통령에 대해 벌여온 예비조사 결과를 토대로 공정한수사를 하기 위해 특별검사를 임명할지를 이날까지 결정,대법원에 통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검사의 임명 여부는 우리나라 기준에서는 아주 사소한,클린턴과 고어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외부로 정치자금 기부를 요청하는 통화를 한 행위가 연방정부 건물 안에서 정치자금 모금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선거법 위반행위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어는 최소한 40여회에 걸쳐 통화를 했다고 시인했으나 클린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워싱턴 정가에서는 리노 법무가 특별검사를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특별검사의 임명은 클린턴에 의해 법무장관에 오른 리노 법무가 클린턴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입힐수 있는데다,지난 1883년 제정된 법률에 따라 정·부통령의 전화모금 행위를 수사하기는 어려우며,기타 선거자금 문제에 관한 법의 개정은 의회안에서 다뤄질 사안이라는 것이다.바니 프랑크 민주당 의원은 “특별검사의 소임은 광범위한 수사가 아니라,형사법과 관련된 특정 불법혐의를 조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특별검사 임명 문제를 놓고 클린턴과 리노 법무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온 데다 불법행위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증거도 확보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공화당의 오린 해치 상원 법사위 위원장은 “불법 행위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백악관이 거액의 선거자금 기부자들에게 다과회를 베풀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민주당이 외국인 기부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는지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기 위해서도 특별검사의 임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클린턴/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지난해 이맘때 재선의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던 때의 표정과 요즈음의 표정은 사뭇 대조적이다.대외적으로 이라크는 미국의 경고를 무시한채 계속 바락바락 기어오르고 있으며,대내적으로는 지난주 일부 주지사·시장 선거에서 참패를 하는 등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자신이 공을 들여왔던 신속처리권이 자당인 민주당의원들의 반대에 의해 상정조차 못되고 아예 내년으로 연기된 사실은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기도 하다. 신속처리권은 행정부가 대외통상협정을 신속하게 해나갈수 있도록 의회가 내용 수정없이 가부간 승인여부만을 지정된 기한내에 처리토록 하는 법안으로 대통령의 통상외교정책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제도인 것이다. 94년 종료된 후 선거관계로 보류해오던 이 제도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확대문제,세계무역기구(WTO)후속협상,아태경제협력체(APEC)분야별자유화대상 선정 등 클린턴 행정부의 주요 통상현안 처리를 위한 절대적인 필요성 제기로 재추진됐던 것이다.그러나 이는 대외무역에 노동및 환경문제를 연계시켜야 한다는 리차드 게파트 원내총무가 이끄는 민주당내 진보세력의 반대에 부딪혔고,오히려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옹호해온 야당인 공화당측으로부터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435명 하원의원중 과반수인 218명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게임에서 공화당측이 일찌감치 150명 확보를 통보,민주당에서는 소속의원의 3분의1선인 70명만 찬성하면 통과되는 것이었다.그러나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상정시한으로 잡은 9일 자정까지 40여명 확보에 불과,승산이 없자 법안처리 자체를 보류케된 것이다. 자유무역정책의 강력한 추진으로 자신의 주요 치적(legacy)을 삼으려던 클린턴 대통령의 계산이 빗나간 것은 물론,24일부터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APEC정상회의에서 신속처리권을 무기로 2010년까지 환태평양국가간의 무역자유화를 몰아부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더우기 당의 심각한 분열로 내년의 중간선거도,고어 부통령의 차기 지명도 불투명해졌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의사에 따르는 집권당 의원이 고작 20%에 불과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 클린턴·고어 ‘불법모금’ 조사받아/법무부 조사관 개별 신문

    ◎고어 “96년 재선때 헌금 권유” 시인 【워싱턴 AP AFP 연합 특약】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이 선거자금 불법 모금과 관련,법무부의 조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백악관이 12일 밝혔다. 마이크 맥커리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은 지난 94년과 96년 선거자금 모금과 관련해 법무부 조사관들로부터 각각의 개별적인 장소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두사람에 대한 조사는 11일 미 하원 소식통들로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 진영이 지난 96년 재선운동 당시 출처가 의심스러운 후원금을 합법화하기 위해 돈세탁을 했다는 증언이 나온 뒤여서 더욱 주목되고 있다. 법무부의 이들에 대한 조사에는 담당 변호사도 배석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조사는 주로 이들이 선거운동을 위한 모금을 하면서 헌금을 권유했는가에 대해 이뤄졌다. 이에대해 클린턴은 그가 헌금을 권유했었는지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힌 반면 고어는 헌금을 내도록 권유했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그러나 두 사람 모두는 “백악관 내에서의 이같은 전화는 불법이 아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지난 1883년 입안된 미 선거법에는 선거운동을 위해 공공건물을 이용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백악관측은 전화는 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무부는 앞으로 이들에 대한 조사에 독립된 특별검사를 임명할 것인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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