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74)-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0)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0)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이 무렵의 과거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생들이 마실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선접꾼)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마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부문 앞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 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어느새 머리털이 허옇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거나 압사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온화하게 예를 표하여 겸손해야 할 장소에서 강도짓이나 전쟁터에서나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므로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과거장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의 생생한 묘사처럼 율곡은 ‘부문 앞에서 당한 횡액’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하고 마침내 아수라장을 벗어나 거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협관은 율곡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붓주머니를 뒤져 붓통 속까지 훑어 보았다. 많은 거자들이 반드시 휴대하여야 할 붓 대롱 속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커닝 페이퍼를 말아 놓고 들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수협관은 율곡이 입고 있는 옷의 소매 속까지 검사하였다. 이는 혹시 옷소매 속에 수진본이 들어 있을까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수진본(袖珍本).
이는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암기용, 혹은 휴대용 학습서로 유생들이 자주 이용하던 일종의 메모노트였는데, 몰래 거장 안으로 갖고 들어가 시험을 볼 때 틈틈이 훔쳐보기에는 안성맞춤의 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수협관은 율곡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많은 거자 중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 속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예상 답을 적은 종이를 말아 끼우고 입장하는 부정행위가 적발되는 사례도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수협관에게 발각되면 6년간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는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유생들은 수협관을 ‘저승사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모든 수색을 끝낸 율곡은 마침내 반수당 안으로 들어섰다.
시험장인 명륜당 뜨락에는 이미 입장한 거자들이 여섯 자의 거리를 두고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시험장은 일소(一所)와 이소(二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부자, 형제, 혹은 가까운 친척들이 한자리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형제들이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볼 경우 각기 다른 장소에서 치르게 하기 위해서 구역을 두 개로 미리 갈라놓은 것이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하였는데, 율곡이 앉은 자리는 이소 중에서도 자연 가장 후미진, 지금도 남아 있는 은행나무의 밑둥이었다.
율곡이 자리를 잡고 앉자 동시에 부문이 닫혔다.
율곡으로서는 운명적인 과거시험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