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少年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청소년은 누구이고,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영어로 틴에이저(Teenagers) 또는 영 어덜트(Young Adult)라고 하는 청소년은 연령으로는 13~19살, 아직은 어른(Adult)이 아닌 사람이다. 어른들은 생각이 채 여물지 않았겠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을 어떻게든 뚫고 나온 어른들이 청소년기의 자신으로 돌아가 보면, 자신이 미성숙하거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에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에 자신들은 충분히 성숙했다고 착각했을 터이고, 무한한 가능성은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켰을 테니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각별하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17세 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3·1만세운동을 조직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들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의 학생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은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다. 지난해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촛불시위도 시작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젊은 사진작가 9명 8개월간 작업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8월23일까지 ‘과연 청소년은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청·소·년’ 사진전을 연다. 미술관은 2006년 한국의 시각문화 사진전을 시작으로, 2007년 건축과 공간에 나타난 새마을운동, 2008년 산업현장을 돌아본 공장 등을 주제로 사진전시를 열었으며 청소년을 주제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학교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을 든 중·고등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로 유의미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미술관과 9명의 젊은 사진작가가 만나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8개월간 작업했다. 여기에는 전업 사진작가도 있지만 학원 수학 강사, 대안학교 관계자, 교사 등 아마추어 작가들도 참여했다. 청소년을 자주 만나거나 그들의 문화에 최소한의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다. 강재구, 고정남, 권우열, 박진영, 양재광, 오석근, 이지연, 최은식, 최종규 등이 그들이다. 29살에서 45살의 작가들은 청소년들의 문화, 생각, 생활, 주변환경까지 섬세한 눈으로 잡아냈다.
일민미술관의 양유진 큐레이터는 “작업 초기에는 작가들이 모두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청소년이기에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청소년의 모든 것은 대체적으로 우울하고 어두침침한 것”이었다며 “서너 차례의 회의를 통해 우울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도록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청소년 사진전은 다소 우울하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학창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내고, 윤색하고, 그때의 기억에서 현재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개선됐는지를, 또는 세월과 무관하게 똑같은 것이 무엇인지를 잡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진전 속의 청소년들은 교실에서 여러 개의 의자를 붙여 놓고 대학 소재지가 표시된 전국지도 앞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가 하면,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MP3와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있다(이지연 작). 롱다리, S라인이 확실하다는 교복의 소비자(강재구 작)이자, 소녀시대, 동방신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 코스튬 플레이로 만화 주인공을 흉내낸다(박진영 작). 학원 수학 강사인 작가는 청소년들이 낙오되는 현장을 지켜본다. 낮엔 학교에서, 야간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근로 청소년의 어려움도 묵묵히 바라본다(권우열 작).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폭주족이 됐지만 뒤에 태울 여학생이 없어 강아지인형을 매달고 다니는 남학생의 모습은 정말 귀엽다(오석근 작).
●청소년 문화·생각·생활 섬세하게 렌즈에 담아
40대의 한 직장인은 최악의 악몽은 학력고사장에서 답안을 밀려 쓰는 꿈을 꿀 때라고 말했다. 벌써 2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인데도 스트레스가 고조되면 반복적으로 그런 꿈을 꾼다고 했다. 정신적 상흔, 트라우마다. 그래서 깜깜한 밤하늘에 형광등이 환하게 빛나는 고3 교실의 야간자율학습 사진(최은식 작)을 지켜보는 마음은 처연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학생들을 경쟁에 내몰고 있다고 불평하지만, 실제로 청소년들의 그 많은 학원순례를 끊어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자녀들을 타이르며, 20~30여년 전 고통을 세습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겪었던 일이니 너도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당연시하는 것은 어른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아닐까.
전시회를 돌아본 한 청소년은 오히려 “사진 속의 청소년은 우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악몽’에 시달린다면 빨리 깨어나야 하니 말이다. (02)2020-2055.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