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신운동은 「신사고」로/송복 연세대교수(세평)
회사를 하나 설립하는데 미국은 9개 서류제출에 27일이 걸리고,일본은 27개 서류에 3백일,한국은 35개 서류에 1천일이 걸린다는 비교가 있다.
한 나라의 관료제가 얼마나 효율적인가,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대국민 봉사업무를 수행하는가의 비교는 여러 면에서 할 수 있다. 기준을 어디다 잡느냐에 따라서 비교의 내용도 갖가지로 달라진다.
○2중압박 고충은 이해
회사설립이라는 기준도 그 중의 한 척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 한·미·일 세나라를 비교할때 그 차이는 대단하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 회사를 하나 설립하는데 1천일이 걸린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설혹 그렇다 해도 이 세나라의 관료제 기능수행의 비교는 좋은 시사가 된다.
회사를 하나 설립하는데 미국은 9개 서류만 제출하면 되는데 한국은 35개,일본은 27개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면 적어도 관의 민에 대한 통제가 한국은 미국에 비해 거의 4배나 많고 일본에 비해서도 1.3배나 많다는 것이 된다.
그 설립기간 역시 미국이 27일 걸리는데 우리가 1천일,일본이 3백일이라면 관료제기능의 효율성면에서도 한국은 미국의 37분의 1밖에 안되고,일본에 비해서도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비교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 관료는 대국민 통제는 많이 하는데 업무수행은 미국 일본에 비해선 아주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고,따라서 국민이 하는 일에는 큰일 작은일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정작 해주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태만하다는,혹은 무사안일하다는,혹은 타성에 젖어있다는 지탄에서 또한 벗어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아예 비교조차 안되는 미일과 우리를 같은 선상에 놓고 우리 관료가 통제성이 많다느니 비효율적이라는 등의 비교 자체가 전혀 가당치도 않는 조치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60년대와 70년대는 물론 심지어 80년대까지도 관이주도해서 1인당 GNP 5천달러선까지 우리 경제를 올려 놓았다면 그 관료야말로 효율적 관료라는 진단이 나오고도 남음이 있다고 반론할 것이다.
물론 그 면에서 우리나라 관료는 신생국 어느 나라 관료보다 효율적이었고 혁신적이었으며 발전행정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더구나 먼저 발전한 나라들의 관료에 비하면 비교조차되지 않는 봉급을 받으면서 땀은 몇배로 더 흘려야 했던 것은 차치해 두고라도 윗사람들의 재촉과 국민들의 독촉 사이에서 감내해야 했던 2중압박은 세계 어느 나라 관료에 비해서도 우리 관료가 특히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난날의 일이다. 관료공직자에게 있어 현재는 있어도 과거는 없다. 공직자에겐 현재의 지탄만 있을 뿐 과거의 성과는 거론되지 않는다. 과거의 성공을 회상하는 관료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관료다. 그런 관료는 관료로서 자격상실의 관료가 된다. 「우리 부서의 업적,혹은 우리 관내의 업적 운운」하는 관료는 정년을 앞둔 관료이거나 아니면 해임직전의 관료다.
○지난시대 사고 버려야
이유는 간단하다. 공직자는 언제나 딜레마에 봉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 딜레마는 사적인 딜레마가 아니라 공적인 딜레마이다.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딜레마다. 한 사회가 발전하느냐 침체하느냐의 딜레마 일뿐 아니라 갈등 상태에 들어가느냐 화합하는상태에 들어가느냐의 딜레마다. 크게는 국가사회의 존속유지에 관계된 딜레마이고 작더라해도 많은 사람들의 이해에 직결된 딜레마이다.
하나의 딜레마를 해결하면 다음 딜레마에 또 부닥친다. 마치 해변을 때리는 파도처럼 공직자에게 딜레마는 언제나 밀려온다. 과거의 성과를 들먹일 여유가 없고 봉급의 과다,일부담의 경중을 따질 여가가 없다. 그것을 논할 때 벌써 공직자는 무사안일에 빠지고 비리가 쌓인다.
공직자 새 정신운동을 전개한다고 한다. 부정부패를 처벌하고 기강을 쇄신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60년대 이래 지난 30년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다. 그 어느 해고 부르짖지 않은 때가 없다. 6공들어 공직자 기강이 말할 수 없이 흐트러져 있다 해도 이 흐트러짐은 서릿발같은 유신때도,5공때도,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똑같이 나온 소리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때도 그러했고,미상불 고려때도 신라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기나긴 세월동안 그토록 부르짖고 그토록 단속을 하는데도 그 공직자 기강은 공직자들의 생활에서도,그들의 행동에서도 멀어져 있었을까. 그 기강이 왜 유독 공직자에게 생활화가 되지 않고 행동화가 되지 않았을까.
왜 공직자에겐 그런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나고 있을까.
그 이유 역시 명백하다. 신분보장도가 낮고 생활보장도가 낮기 때문이다.
신분보장도는 요즘 와서 결코 높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렇다고 낮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생활보장도다. 일부의 공직자는 인사청탁도 받고 이권도 차려서 유족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이고 절대다수의 공직자는 그 봉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렵게 돼 있다.
도시가계의 월평균 소득이 이미 80만원선을 넘어서고 있다. 공직자 중에서 그 선 가까이서 봉급을 받는 수가 몇%가 되느냐. 도시가계의 월평균 지출도 70만원 선을 넘어선지도 이미 오래다. 공직자 중에서 몇%가 그 지출선 가까이에서 봉급을 받고 있느냐.
문제는 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다. 작년 한해 더 거둬들인 세금만 해도 2조원이 넘는다고 했다. 공직자 새 정신운동과 더 거둬들인 세금의 용도는 무관하기만 할 것인가.
○소명의식을 잊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크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직자의 소명의식이다. 과거에는 적어도 명분상으로라도 혹은 가치상으로라도 소명의식이 생활의식에 앞서 있었다. 설혹 공론이었다 해도 집단의식이 개인의식을 압도했고,국가관·애국심을 제창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가 공직자가 됐든,내심으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외연으로도 그렇게 부르짖지도 않는다. 생활에서 벗어난 소명의식은 위선이고,개인에게 봉사하지 못하는 집단은 존속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제발 이번의 공직자 새 정신운동만은 가버린 시대의 행위와 사고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운동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