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부잣집
    2026-06-09
    검색기록 지우기
  • 삶의 질
    2026-06-09
    검색기록 지우기
  • 투표소
    2026-06-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17
  • 李·朴 ‘민심잡기’ 행보 가속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용해서 갈 것이다.”(이명박 후보) “큰 대의를 위해 뭉친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박근혜 후보)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경선 후보는 5일 대구·경북 지역 선대위 발대식에 참석하는 등 이틀째 영남 지역 당심잡기에 나섰다.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는 아침 일찍 춘천 강원도청을 찾아 도민들을 위로하고 오후에는 특보단 간담회를 가졌다. 이 후보는 대구·경북 지역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경선에 당선되면 (대운하 공약에) 반대하던 의원들도 다 지지로 돌아설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도 다 포용해 하나로 같이 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단호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대꾸할 필요가 없다.”며 청계천 복원 당시 반대 목소리를 예로 들었다. 일부에서 도심으로 접근하는 차량 20만대를 걱정했지만,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도심을 관통하기만 하는 차량 15만대를 위한 대체도로를 만들어 오히려 도심 차량속도를 빠르게 했다는 설명이다. 이 후보는 “저는 권력자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찬물에 손넣지 않고 살 수 있는 부잣집에 태어나지도 않았다.”며 박 후보와 차별화를 꾀했다. 동석한 김광원 선대위 부위원장은 “이 어려운 나라를 공주님께서 살릴 수 없다.”며 박 후보를 겨냥했다. 박 후보는 여의도 선거 사무소에서 열린 특보단 간담회에서 “시대정신을 꿰뚫어 알고, 대의를 위해 뭉친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이어져 왔다. 큰 대의를 위해 뭉친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했다. 이 자리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자 1세대 인권변호사인 고 홍남순씨의 셋째아들 기섭씨와 13대 민자당 국회의원 문준식씨의 둘째아들 성용씨가 박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박 후보는 앞서 이날 오전7시40분쯤 강원도청에 도착해 태극기를 흔들고 파도타기를 하며 평창을 응원했다. 유치 실패 소식이 들리자 박 후보는 “이번에는 꼭 될 줄 알았다.”며 여러 차례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곧 “강원도민이 한 마음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 또 한번 도전할 것이고, 반드시 더 멋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했다. 한편 박 후보 캠프의 최원영 공보특보는 이 후보측의 ‘공주님’ 발언과 관련,“표현이 너무 지나치셨다. 상대후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논평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박노해 시인의 눈을 통해 본 레바논

    작명자의 권력은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그 대상의 본질을 규정해 버린다는 데 있다. 국제사회가 헤즈볼라를 ‘무장테러조직’이라 부르는 순간, 헤즈볼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평화의 파괴자로 굳어졌다. 레바논인들이 헤즈볼라를 ‘평화와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든, 조직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레바논의 체 게바라’로 평가하든 상관없다. 시인 박노해는 헤즈볼라를 다시 부른다. 헤즈볼라는 35명의 국회의원과 2명의 장관을 배출한 ‘합법정당’이고 ‘레바논 최대의 대중정당’이다. 일자리 창출과 국민 복지를 중시하는 정치가이고,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는 존경받는 기업의 경영자다. 성숙한 국제감각을 가진 레바논 ‘정부 안의 정부’이자 ‘레바논 유일의 정부’다. 지난해 7월13일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자국 병사 2명을 헤즈볼라가 납치했다는 이유였다. 박노해는 레바논으로 날아갔고, 폐허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울고 있는 레바논인들의 삶을 기록했다. 박노해의 글과 사진으로 꾸며진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펴냄)엔 한국 언론이 접근하지 못했던 헤즈볼라의 면면이 담겨 있다. 2006년 8월, 박노해가 물었다.“쿠리아가 UN평화유지군으로 레바논에 전투병 파병요청을 받고 있다.” 헤즈볼라 나와프 무사위 국제국장이 대답했다.“레바논 땅에서 레바논 민중과 헤즈볼라의 평화의지를 거스르며 무장해제를 시도한다면 그 어떤 군대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2007년 7월19일, 한국은 레바논으로 군대를 파병한다. 한국군 파병에 대한 헤즈볼라 지도부의 답변은 참혹한 회고이자 끔찍한 예견이다. 이라크에서 사망한 김선일씨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은 윤장호 병장을 회고하게 만들고, 또 다른 김선일과 윤장호를 예견하게 만든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 그 후’다. 고통과 슬픔은 전쟁 후부터 본격화되고, 죽은 자는 산 자의 가슴 속에서 매일매일 죽는다. 박노해는 “전쟁은 인간성의 좌표를 드러내고 우리의 인간성을 끊임없이 비춘다.”고 말한다. 레바논의 참혹함을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군대까지 보내는 잔혹한 ‘국가적’ 인간성은 ‘평화유지’란 이름으로 은폐되고 미화된다.“쿠리아 좌누비아?(남한) 쿠리아 샤말리아?(북한)”라 묻는 레바논인들에게, 박노해는 ‘좌누비아’라 답하며 그들의 눈을 마주보지 못한다. 전쟁은 불평등하고, 폭탄에도 눈이 있다. 박노해는 “이스라엘 폭탄은 참으로 정밀하게 기독교 마을과 부잣집들을 비껴갔다.”면서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것은 가난한 레바논 남부 무슬림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폭탄의 상흔 너머 보이는 부촌의 평화스러운 모습에 박노해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별적 자비인가, 레바논의 모순인가.”라며 자문한다. 열 살도 채 안 된 레바논 아이들의 입에서 ‘성전’‘순교’‘영원한 승리’란 말이 한국 아이들이 ‘스타크래프트’ 게임용어 읊듯 무심하게 흘러나오게 하는 전쟁. 박노해는 시로써 외친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1만 30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는 중인이 맡을 관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신분은 호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버드대학의 와그너 교수가 1663년에 작성된 서울 북부 호적을 분석해 보니 양반 신분의 호주가 16.6%, 평민 신분의 호주가 30%, 노비 호주가 53.3%였다고 한다. 양반은 현(顯), 평민은 작(作), 노비는 천(賤)이라는 표시로 구분되어 있다. 평민 호주도 171호 가운데 67호가 비(婢), 즉 여종을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다. 노비의 비율이 이렇게 많은 것은 양반이 많이 사는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중인은 워낙 적어 평민 속에 묻혀 있었다. ●중인들은 직업상 성안에 많이 살아 규장각에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이란 책자가 소장되어 있다. 이 호적 첫 줄에는 ‘강희이년계묘식년북부장호적(康熙二年癸卯式年北部帳戶籍)’이라는 제명이 쓰여 있는데,‘3년마다 작성하는 관례에 따라 1663년에 작성한 서울 북부지역 호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북부는 사대문 안의 북부가 아니라 사대문 밖의 북부이다. 사대문 안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5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도성 밖 10리를 성저(城底)라고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북부 주민들이 이 호적에 실려 있다.16개 마을의 681호가 152장 분량으로 정리되었다. 망원정계(망원동) 141호, 연서계(역촌동) 96호, 합장리계(합정동) 89호, 성산리계(성산동) 57호, 여의도계(여의도동) 44호, 증산리계(증산동) 41호, 수색리계(수색동) 43호, 가좌동계(가좌동) 39호, 신사동계(신사동) 32호, 세교리계(서교동) 23호, 말흘산계(홍제동) 20호, 홍제원계(홍제동) 16호, 연희궁계(연희동) 16호, 양철리계(대조동) 11호, 아이고개계(아현동) 10호, 조지서계(홍제동) 3호 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섞여 있다. 조지서(造紙署)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데, 인왕산에서 창의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있었다. 호수가 많다고 반드시 큰 마을은 아니다. 양반들이 사는 마을은 아무래도 집이 크기 때문에 호수가 적고, 노비들은 몰려 살다 보니 호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군역(軍役)을 지고 있었는데, 북부 평민의 군역은 보병(步兵) 3호, 마병(馬兵) 29호, 포수(砲手) 27호, 보인(保人) 7호, 한량 4호에 정병(正兵) 21호, 내금위(內禁衛) 등 12호, 무과 급제자인 출신(出身) 7호 등이 있었다. 군역 이외의 특수직역으로는 역리(驛吏) 38호, 어부 4호, 서리(書吏) 2호, 장인(匠人) 1호, 봉수군(烽燧軍) 1호가 있었다. 관직이나 품계 보유자로는 내시(內侍) 9호, 관직 보유자 20호, 품계 보유자 3호, 율학교수(律學敎授) 1호가 평민으로 분류되어 있다. 내시는 평민으로 분류되었지만 양반 색채가 짙으며, 모두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 와그너 교수는 서리와 어부의 아들도 모두 역리라고 밝혔는데, 서대문에서 홍제원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연서역(延曙驛)이 있었기 때문에 역리가 많았다. 이 마을은 지금도 역촌동(역마을)이라 불린다. 평민 가운데 서리 2호와 녹사 1호, 율학교수 1호가 중인 집안이다. 양반 출신의 처는 씨(氏), 평민 출신의 처는 조이(召史·이두식 표기), 노비 출신의 처는 비(婢)라 불리는데, 상류층 양반의 처는 대부분 씨로 표시되었지만 하류층 양반과 중인의 처는 씨, 조이, 비가 섞여 있어 중인이 양반과 평민 사이의 신분임이 드러난다. ‘북부장호적’만 가지고 서울의 중인 비율을 계산할 수는 없다. 한성부 북부는 성안에 9개방, 성밖에 3개방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자료에는 성밖 마을 호적만 남아 있다. 중인들은 직업상 관청이 많은 성안에 살기 때문에, 성밖 마을 자료만 가지고 전체 비율을 짐작할 수는 없다. 호적에는 4대조가 기록되기 때문에 중인들이 어느 집안과 혼인하여 전문직을 세습하는지 알아보기 좋다. 북부 호적에 나타난 중인의 직역으로는 율학교수, 산학훈도(算學訓導), 산학별제(算學別提), 역관(譯官)이라는 기술직과 녹사(錄事), 서리라는 행정직이 있다. ●수색에 살던 중인 율학교수 가족 수색리에 살던 율학교수 김익상(金益祥)은 전형적인 중인이다.‘용궁’이라는 본관부터 중인임을 나타내며, 외가인 오산 박씨도 역시 중인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산학(算學) 훈도와 별제였다. 장인 송인남도 율학교수여서, 전문직끼리 혼인하는 습관을 보여준다. 중인 전문직을 선발하는 과거가 잡과인데,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의 네 종류만 실시하였다. 격이 떨어지는 산학(算學)은 화원(畵員)같이 취재(取才)라는 시험으로 선발했다. 문과는 각도에서 1차시험을 치렀지만 율과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여 18명을 뽑았으며,2차시험인 복시에서 9명을 추려 선발했는데 형조(刑曹)에서 주관하였다. 문과같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3차시험 전시(殿試)는 따로 없었다.‘대명률(大明律)’은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 외었으며, 당률소의(唐律疏議)·무원록(無寃錄)·율학해이(律學解)·율학변의(律學辨疑)·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펴놓고 읽게 하였다.‘무원록’은 글자 그대로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부검(剖檢)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이고,‘경국대전’은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의 순으로 편집된 조선의 종합 법전이다. 율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백패(白牌)를 주고,1등에게 종8품계,2등은 정9품계,3등은 종9품계를 주었다. 율관은 종6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형조에서는 법률·소송·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는데, 율학청(律學廳)에서 법률을 가르치는 책임자가 바로 종6품 율학교수이다. 형조에서 중인으로는 가장 높은 관직이며, 그 아래 종7품의 율사(律士)와 정9품의 율학훈도를 두었다. 율과시험에 응시하려면 율학청에서 법률공부를 해야 했는데, 법률문서가 한문과 이두(吏讀)로 복잡하게 쓰여서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율학생의 정원은 형조에 40명을 비롯해 전국 부(府)·목(牧)·군(郡)·현(縣)에 배정되었으며, 검률(檢律 종9품)이 각 지방에 파견되어 법률 해석과 교육을 담당하였다. 망원정계에 살았던 녹사 고승길(高承吉)과 서리 김자순(金自順)·오영철(吳英鐵)은 행정직 중인인 경아전이다. 조선 초에는 과거에 응시할 실력이 없는 양반들이 행정 말단에 녹사로 서용되어 기한을 채우다가 지방 관직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17세기 이후에는 양반에서 완전히 탈락하여 중인의 일자리가 되었다. 고승길의 증조부는 통정대부였지만 부친과 조부, 그리고 외조부까지 모두 충순위(忠順衛)나 충의위(忠義衛)라는 특수 군역을 지녔으니 말단 양반에서 탈락한 중인이다. 처 오씨도 씨(氏)로 표기되었으니 양반 출신이다. 서리는 녹사에 비해 격이 떨어지며 인원도 많다. 김자순과 오영철의 부·조부·증조·외조 가운데 서리가 없었으니, 세습직이 아니다. 김자순의 부친은 어부였는데, 조이(召史) 처에게서 낳은 아들은 천역인 역리(驛吏)가 되었다. 오영철이 사비(私婢) 처에게서 낳은 아들은 사노(私奴)가 되었으니, 재산을 축적하여 중인 신분으로 자리잡는 서리들과는 거리가 멀다. 천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03년 성안 3개 지역에 중인 호주 1명뿐 갑오개혁 이후에 호적제도가 바뀌자 1903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신호적 양식으로 조사한 호구표가 일본 교토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2만 4000장 분량이다. 이 많은 분량을 모두 조사 분석할 수 없으므로, 조성윤 교수는 성안 3개 방(坊)과 성밖 3개 방을 선정해 분석하였다.240년 전의 호적과 크게 달라진 점은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폐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4조와 외조를 기록하는 법은 여전하였다. 조교수는 6개 방에 양반 호주 903명, 중인 호주 1명, 평민 호주 1390명, 근대직업을 가진 호주 98명이 살았다고 통계를 냈다. 성안 3개 방에 중인 호주가 1명뿐이라는 것은 뜻밖인데, 갑오개혁으로 정부조직이 달라져 근대직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성윤 교수는 다른 자료를 통해 19세기 중인의 비중을 보여 주었다. 첫째는 ‘속대전’에서 서리 정원을 1400명 정도로 규정했는데 그 가족을 합치면 상당한 규모라는 점이다. 둘째는 1882년 임오군란에 파괴된 중인 부잣집만 해도 70여채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1801년 서울에 거주한 천주교인이 양반 73명, 중인 75명, 평민 103명, 천민 27명이었으니 그 가운데 중인이 27%나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숫자들은 특수한 자료지만, 중인의 존재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다음 호에는 중인들의 족보를 통해 전문직이 어떻게 세습되었는지 밝혀 보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佛 희극 ‘사랑과 우연의 장난’ 국내 첫 공연

    佛 희극 ‘사랑과 우연의 장난’ 국내 첫 공연

    18세기 프랑스 희극의 대표작가 마리보의 ‘사랑과 우연의 장난’ 이 국내에서 처음 공연된다. 귀족 젊은이와 하인이 신분을 서로 맞바꾸어 맞선을 보면서 일어나는 사랑의 소동이 ‘사랑과 우연의 장난’이다. 주인공인 귀족 청년 도랑트 역은 연극, 드라마, 영화, 뮤지컬을 오가며 연기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석훈이 맡았다. 김석훈은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비밀남녀’에서도 부잣집 아가씨와 맞바꿔 맞선에 나온 가난한 여성을 사랑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피에르 마리보의 희곡은 섬세하고 활달하며 감칠맛 있는 대사가 넘친다. 그의 이런 문체를 프랑스에서는 ‘마리보다주’라고 불렀다. 우아하면서도 고답적인 ‘마리보다주’는 연애 심리의 세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희곡장르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극은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이는 빈부격차가 계급을 낳아 재벌은 재벌끼리만 결혼하는 한국사회와 다를 바 없다. 김석훈(35)은 “연애를 할 때 궁금하면서도 보통 상대방의 사생활과 과거를 캐는 것이 치졸하게 느껴져 그냥 믿고 만다.”면서 “이 연극은 ‘역할 바꾸기’를 통해 젊은이의 연애 심리를 보여줘 무척 재미있다.”고 말했다. ‘사랑과 우연의 장난’은 1955년 유치진의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한 임영웅(71)이 연출을 맡아 주목받고 있다. 임영웅은 연극이 “결혼을 앞둔 모든 청춘 남녀에게 좋은 지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응석받이 귀족처녀 실비아(이민정)는 도랑트(김석훈)와 결혼을 앞두고 불안한 맘에 하인 리제트와 신분을 바꾼다. 하지만 도랑트 역시 하인 아를르캥과 역할을 바꾼다. 청춘남녀들은 위장 사랑에 넋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해도 사랑만을 택하겠노라고 외친다. 결국 네명의 젊은이는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해피엔딩이다. 김석훈은 1999년 국립극단의 ‘친구들’ 공연에서 처음 연출가 임영웅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젠 유명해져 혹 역할을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는 임 연출가에 대해 김석훈은 “무섭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실제로는 천진난만하고 소년 같은 면모가 있다.”고 말했다. 6월13일∼7월1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1만 5000∼3만5000원.(02)580-13000.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부산아가씨들이 전국 머슴아에게”

    참석자<가나다 차례> <부산(釜山)여자대학> 김관순(金寬順) <경영과 2년> 노영숙(盧瑛淑) <관광과 2년> 박수자(朴壽子) <관광과 2년> 심정옥(沈貞玉) <영문과 2년> 이선경(李仙卿) <가정과 2년> 무뚝뚝해도 감칠맛 넘쳐 인정도 많고 고집도 센편 朴=얘들아… 모처럼「선데이 서울」에 우리 이름이 오르게돼서 영광이다, 그제…. 沈=가만, 이왕 우리 이름이 오를바에야 우리 학교 선전부터 해야 할거아이가? 우리 학교로 말하면 64년에 설립,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부산에서는 유일한 종합여자대학으로서…. 李= 야 이제마 그만해 둬라마, 너 애교심 강하다는거 세상이 다 아는일 아이가. (웃음) 盧= 우리 경상도 하고도 부산 아가씨로 말할 것같으면 우선 솔직 담백한게 으뜸가는 자랑일기다. 金= 와 아이라 옳다 옳아.(웃음) 李= 오늘 우리의 얘기는 어디까지나 대체적인 흐름의 경향을 말하는 거니까 약간의 예외가 있다는 것쯤 독자들이 다 알겠제 그쟈? 우리 부산 아씨 중에서도 처녀 아씨들은 주체성이 강한 반면 고집 하나는 전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기다. 沈= 그런데 흔히들 서울 아가씨 하면 애교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째 아이가-. 그런데 그건 언어가 부드럽고 여자답기 때문일기다. 말씨 하나는 나도 여자지만 반하겠더라. 『아니예요 호호』(폭소) 朴=경상도 말이 확실히 무뚝뚝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감칠맛 있는 언어가 얼마나 많노. 가령 부정의 뜻을 지닌『그쟈』와 같은 말은 불란서 언어가 예쁘고「리드미컬」하다곤 하지만 아마 뺨칠기다. 沈= 그런데 아까 서울말이 참 예쁘다고 했는데 남자들이 서울말 쓰는건 좀 간지럽더라. 난 서울 남자와 결혼 할맘 없다.(웃음) 朴=너 항의오면 어쩔나노? 沈= 항의하려면 하라카지, 어쩔기고마. 李= 그게 바로 경상도 기질인기라. 난 서울남자 개않더라. 사람 나름 아이가. 盧=서울 남자들 너무 싹싹해 여성다와 보이기 때문인지 박력이 좀 없어 보인단 말이다. 朴=그 대신「에티키트」하나는 최고 아이가. 李= 아마「무드」조성엔 천재인기라. 잘한데이.(폭소) 金= 너 당해봤구나? 李= 와 이라노. 안당해 보면 모르나. 난 척하면 3천리 내다 볼줄 아는기라. 朴=우리 부산아가씨, 나도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인정 많은걸로 정평이 나있지. 그대신 생활력은 좀 약한편인것같아. 1일 생활권으로 단축돼 지방 특색 없어질까 서운 金= 우리 부산 아가씨와는 사귀기가 대단히 힘이들지. 그대신 한번 사귀었다하면 이건 찰떡보다 더 착 달라붙는 성질이 있지. 우유부단 간에 달라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줄을 모르는 우직성이랄까 그런게 있는 것 같아. 李= 그러니까 잔꾀를 부려야 사는 요새 세상에는 좀 맞지 않는다고 볼수도 있쟈. 朴=경상도엔 미인이 많지. 쭉쭉 뻗은게 아주 탐스럽잖아. 대체적으로 경상도 사람들이 남자고 여자고 좀 큰 편이쟤. 부잣집 맏며느리감 상당히 많다고 볼수있다. 李= 왓다, 니 노골적으로 선전하네. 가만 보니까 날 데려가 주소 하는 심보 아이가?(웃음) 金= 쟤 가만히 보면 좀 엉큼한데가 있는기라.(폭소) 朴=너희들 이렇게 인신공격하기가? 이따 보자. 沈=그런데 요새는 지방마다의 특색이 점점 없어져가는 것 같아. 마 부산과 서울이 하루 생활권내에 들어버려 시간적으로 단축 된 건 대단히 환영할 일이지만 지방색이 사라져 간다는건 못내 서운한 일인기라. 金= 앞으로는 언어도 잡탕으로 혼합된 언어가 쓰일 전망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쟤. 그렇게 되면 참 무미건조할 것 같다, 그쟈? 盧=그렇게되면 당신 고향이 어디요? 라고 물을 필요가 없게 되겠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서울 남자가 반죽이 되어 나오면 정말 이상적인 남성형이 형성될 것 아이가.(웃음) 朴=또 우리 여성도 좀 무뚝뚝한 경상도 아씨와 서울 아씨의 반죽형이 나오게되면 그런데로 쓸만 할기다.(웃음) 李= 그런데 요새 우리 젊은 여성들이 서울이고 부산이고간에 그저 정신의 성숙없이 마구 아무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상당히 우리 여성 스스로가 반성해볼 문제라고 나는 보고있어. 좀 더 정신의 성숙을 위해 안간힘을 쓴후에야 여성의 권위니 뭐니 찾을 수 있지 않겠어? 金= 네말이 바로 공자 말씀이다. 이번에 더벅머리 삭발령 어떻게들 보고 있노?(웃음) 盧=참 잘한기라. 그거 뭐야 불결하게. 무슨 철학자인양 더벅머리를 해 가지고 말이다. 沈=그런데 우리「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를 법조문을 적용, 즉결재판 운운한건 상당히 옳지 못하다고 봐. 「미니아가씨」이거 얼마나 경쾌하고 발랄해 보이냐 말이야. 李= 나도 지금「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지만 다들 보기좋다고 하더라. 몰라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진 몰라도.(웃음) 그런데 이번 당국의 처사는 좀 섭섭해, 그쟈…. 朴=너무 짧아 시선을 어지럽게 한다는건 사회 질서를 위해 우리 여성 스스로가 할 일이겠지만 이 문제까지 당국이 신경과민이 된다는건 좀 너무한 것 같더라. 앞으로 우리 아가씨들에겐 좀 너그럽게 보아주었으면 좋겠어. 지방색 따지는건 큰모순 “합심해 근대화 힘씁시더” 盧=가만, 이거 우리가 대화주제와는 좀 빗나간 얘기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李= 아이고마. 빗나가긴 뭐이 빗나갔노? 그저 결론은 빤한거 아이가. 우리 부산의 아가씨들은 다 현모양처감으로는 최고니까 전국의 남성 여러분, 잘부탁 드립니다 하는 바로 이거 아이가.(폭소) 金= 사실은 그렇지만 우리들로서도 약간의 반성은 있어야겠지. 인간이라는게 원래 완전한게 있을수 없으니까. 沈=구태여 꺼낸다면 우리 경상도 아가씨들은 너무 보수적이고 은둔적이라고 할까? 그런건 안있겠나. 李= 또 고집이 너무 센 편인데 약간 늦추어 애교부리는 연습이 필요하겠지. 몸을 요렇게 배배꼬면서 미안합니더 흐흐…. 盧=왓다, 그러니까 도리어 안 어울린데이. 그저 천성대로 행동하는게 낫겠다마, 『이거 뭔교 …노소』(웃음) 朴=그래도 우린「논개」나「아랑」낭자의 절개를 물려받은 후예 아이가. 마 애교는 없어도 서울남자들 경상도 아가씨 제일 좋다카더라. 金= 조그만 영토에서 도별담 운운하는 자체가 모순인기라. 그저 합심해서 조국근대화의 역군이 되는기다.(웃음) 李= 끝으로 내 한마디 할란다. 우리 경상도 아가씨 잘봐주이소 예- 야 니도 한마디 해라. 盧=부산 좋심더. 놀러오이소 예. 싱싱한 칼치(칼치는 고기 이름인데 요새는 이상하이 생각 하더라) 많심더-. 갈매기 훨훨날고 뱃고동 뚜- 하모 얼매나 낭만적이라꼬. 沈=나도 한마디 할란다. 전국의 총각 여러분, 앞으로 결혼은 경상도 아가씨와 꼭 하이소 예-.(폭소) [선데이서울 70년 9월 27일호 제3권 39호 통권 제 104호]
  • 득남 핑계로 소실 두었지만 딸쌍동이

    득남 핑계로 소실 두었지만 딸쌍동이

    8월24일 하오 부산시 B병원 앞에서 색다른 부부 싸움이 벌어져 행인들이 모여들어 소동. 딸 셋을 둔 전(田)모씨(39·부산시 중앙동)는 아들을 둘 욕심으로 소실을 두었는데 이 날 소실 K여인이 B병원에서 해산을 하고보니 딸 쌍동이. 이에 화가 치민 전씨의 부인이 병원으로 달려와 전씨의 멱살을 부여잡고 『공연히 소실을 보아 딸만 둘 더 늘어났다』고 싸움을 벌였던 것. [선데이서울 70년 9월 6일호 제3권 36호 통권 제 101호]
  • [이용원 칼럼] ‘개천의 龍’ 다시 날게 하려면

    [이용원 칼럼] ‘개천의 龍’ 다시 날게 하려면

    올들어 전개되는 갖가지 교육 논쟁에 접할 때마다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교육 문제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3불정책·대학입시·외국어고·고교평준화 등 제도에 관련된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본질은 ‘교육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귀결된다. 가난한 집 수재가 교육을 통해 신분이동을 할 기회는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부잣집 아이는 능력을 넘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잡게끔 구조화하는 것이다. 교육이 ‘계층의 세습화 도구’로 악용된다는 뜻이요,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을까. 그 근원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이유는 학생의 능력·노력보다는 사교육에 따라, 곧 부모가 돈을 얼마나 쏟아붓는가에 따라 대학 진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공교육이 제몫을 한다면 굳이 빚 내가면서까지 아이를 과외로, 학원으로 내몰 까닭이 없다. 그럼 공교육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 현장에서 경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은 왜 사라졌는가. 단언컨대 그것은 고교평준화 제도 때문이다. 사립고교 운영자나 교사들 중에는 요즘처럼 ‘학교 장사’하기가 좋은 때는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생은 나라에서 알아서 채워주지, 공부는 학원에서 다 시켜주지, 내신 성적이 위력 있으니 학생들 말 잘 듣고 학부모는 굽실굽실하지 신경 쓸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엉터리 교육자만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고 애쓰는 교사가 많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한계를 하소연한다. 한 반에 있는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한쪽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강의를 열심히 듣는 아이들 위주로 수업하는데 그 숫자가 한반에 열명이 채 안 된다고들 한다. ‘공부 못하는 학생의 권리’를 강조하는 교사들도 있다. 강북의 한 사립고에서 20년 넘게 근무 중인 한 교사는 고교평준화의 가장 큰 희생자가 공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라고 주장한다. 평준화 이전 세대인 그는 “옛날에는 3류 고교를 다녀도 그들끼리 우정을 나누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며, 공부도 수준에 맞게 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의 평준화한 고교 교실에서 가난한 집 공부 못하는 아이는 교사·친구 모두에게 철저히 소외될 뿐이라고 했다. 그는 평준화 정책의 수혜자는 돈 많은 집 아이요, 피해자는 가난한 집 아이라고 단정한다.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평준화가 30년 넘게 유지돼 온 지금, 공교육은 죽었고 사교육은 갈수록 비대해진다. 평준화 정책이 오히려 교육 기회의 평등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따라서 교육 현장을 되살리려면 평준화를 폐지해 고교 간에 경쟁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각 고교가 아이들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을 학교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아오르지 않는 사회는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가난한 집 수재가 마음 놓고 공부하는 사회가 되게끔 우리사회는 뒤틀린 교육 정책을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여자전/김서령 지음

    어쩜 이리 기구할까…. 책을 읽다 보면 한숨과 때로는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여자전(김서령 지음, 푸른역사 펴냄)’은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할머니의 인생을 인터뷰로 녹여냈다. 누구나 내 인생을 글로 하자면 소설책 10권도 모자란다고 하고, 전쟁을 겪은 한국의 모든 가정에는 드라마틱한 사건 하나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8명의 여성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어느날 전쟁터 한복판에 휩쓸렸다가 다음날 꿋꿋하게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살아간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난 고계연 할머니는 헤어진 아버지와 오빠를 찾으러 산에 갔다 빨치산이 된다. 동상으로 썩은 발가락을 스스로 부러뜨리고, 이불장사를 하며 조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 김후웅 할머니는 북으로 간 남편을 50년간 기다리며 안동의 명문가를 지켰다.2003년 금강산에서 남편을 상봉한 이후 지금도 통일을 기다리며 종가를 지킨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기차에 탄 17살의 김수해 할머니는 중국 목단강시에서 위안부란 지옥 같은 수렁에 빠진다. 도망치다 몸에 인두자국이 새겨졌고, 임신을 하자 병원에서는 아예 자궁을 도려내 버린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남편과는 ‘남자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쉰이 넘어서야 결혼을 한다. “남자라 카믄 근처에만 가도 군지럽고 숭실시러운데 같이 살 수가 있어야제.”라고 할머니는 상처를 말한다. 양평 바탕골예술관의 박의순 대표는 안기부도 욕으로 제압한 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이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얼굴에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쳐난다. 대학로 바탕골소극장에서 우리나라 소극장 문화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스스로 무당이 되어 1987년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씨의 9일장을 치른다. 그저 여린 여성의 몸뚱이 하나로 역사의 질곡을 건너온 이들의 삶은 말과 글을 초월한다. 이제는 웃음과 여유로 지나온 삶을 들려주는 할머니들 앞에서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할 용기와 지혜가 넘쳐난다.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섬뜩한 동작…적개감으로 가득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섬뜩한 동작…적개감으로 가득

    “너희들은 내 피를 보겠다고 결정한 거야.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어. 내겐 한 가지 선택밖에 없어. 너희가 이렇게 만든 거야. 당신들은 절대 씻겨지지 않을 피를 손에 묻히게 된 거야.” 미국 NBC방송이 18일 공개한 조승희(23)씨의 동영상 비디오와 43장의 사진,1800자 분량의 ‘성명서(manifesto)’는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사전에 계획된 범행임을 드러낸다. 조씨가 우편물을 발송한 시간은 사건 당일인 16일 오전 9시1분. 최초 총격(오전 7시15분)으로 2명을 살해하고, 재차 범행(오전 9시45분)에 나서기 직전이다. 조씨는 동영상과 사진에서 ‘스킨헤드(극우주의자)’처럼 짧은 머리에다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권총과 흉기, 망치 등 살인 도구를 든 채 의식을 치르듯 다양한 동작을 취했다. 입으로는 적대감과 분노에 찬 증오심을 뿜어냈다. 조씨는 직접 찍은 10분 분량의 동영상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씨는 “내가 그들을 위해 저질렀다. 이제 시간이 됐다. 내가 했어야 했다.”고 기숙사에서의 총격을 시인했다. 그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떤 기분인지, 목구멍에 쓰레기를 밀어 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너희가 아느냐.”며 뿌리깊은 원망도 드러냈다. 중간 중간에 사회적 약자, 십자가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또 “벤츠도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냐.”고 부유층의 쾌락적인 삶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그의 기숙사 방에서 발견된 ‘부잣집 아이들’,‘방탕’이라는 메모에서 드러낸 적개심이다.NBC뉴스는 조씨가 특히 ‘쾌락주의(Hedonism)’ 혐오와 ‘기독교 신앙(Christianity)’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김정일, 오사마, 부시’ 언급 조씨는 자신이 ‘PDF파일’로 보낸 43장의 사진 곳곳에 메시지를 넣었다. 그는 김정일,9·11테러의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언급하며 “너희들이 나를 이런 사람들로 만들었다.”며 “행복하냐.”고 비아냥거렸다. 그가 보낸 사진 중 여느 평범한 청년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은 2장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진들은 마치 살육을 앞둔 전사처럼 권총을 겨누고 칼과 망치로 위협하는 섬뜩한 동작들이 연속됐다. 자신의 머리에도 총을 겨눈 채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들은 조씨가 오래 전부터 범행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차량 안과 실내외가 모두 사진 배경이 됐고 옷차림도 조금씩 달랐다. 그가 시차를 두고 미리 사진들을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조씨 ‘유나보머’ 모방했나? 미국내에서는 조씨가 우편물을 통해 범행 동기를 밝히고 합리화하는 것이 마치 ‘유나보머’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씨의 성명서와 우편물 발송 수법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나보머(Unabomber) 사건은 1970∼80년대 현대 문명과 기술을 경고한 버클리대 교수 출신의 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가리킨다. 카진스키는 직접 만든 소포폭탄을 발송하는 수법으로 사망자 3명 등 26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그 역시 ‘유나보머 선언문’이라고 불리는 ‘산업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를 언론에 보내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조승회 성명서 요약 너희(You)는 오늘을 피할 수 있는 많은 방법과 기회가 있었다. 너희는 내 피를 쏟기로 결정했다. 너희는 나를 구석으로 몰고 내게는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았다. 그 결정은 당신들의 것이다. 너희는 절대로 씻겨지지 않을 피를 손에 묻혔다. 너희는 내 마음을 파괴했고, 나의 영혼을 강탈했으며, 나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너희는 소멸시킨 것이 한 애처로운 소년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당신들 덕분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단 한 방울의 고통도 느껴본 적이 없다. 너희는 원했던 모든 것을 가졌다. 메르세데스 벤츠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는 금목걸이로도, 신탁예금,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속물들아. 유흥과 환락으로도 부족했느냐. 그 모든 것들도 너의 쾌락주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순 없다. 이제 시간이 됐다. 나는 행동했다. 그래야만 했다.
  •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조승희 행적으로 본 범행동기 분석

    |블랙스버그(미 버지니아주) 이도운특파원|버지니아 공대 총격 참사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 조승희씨는 그의 자살 가능성을 우려한 룸메이트의 신고로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경력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자살 우려 정신병원 치료도 웬델 플린첨 버지니아 공대 경찰서장은 18일 기자회견에서 그의 정신병력을 공개하고, 지난 2005년 두 여학생에 대한 스토킹으로 경찰조사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씨가 이 여학생들을 전화와 이메일로 스토킹했으며, 당시 여학생들이 조씨를 정식 고소하지는 않았지만 조사결과 대학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었다고 밝혔다. 그의 비정상적인 대학 생활은 그가 기숙사 방에 남긴 메모와 기숙사 룸메이트, 교수들의 증언을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조승희씨가 방에 휘갈긴 메모에는 “내가 일을 저지른 건 너 때문이야”(You caused me to do this)”,“부잣집 아이들”,“방탕”,“기만적인 허풍쟁이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내가 본 학생 중 가장 심각한 외톨이, 분노와 위협으로 가득 차”룸메이트와 교수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 사인을 보여 줬다.”고 증언했다.2005년 가을 학기 조씨의 창작 수업을 담당했던 루신다 로이 교수는 그가 쓴 괴기한 내용의 희곡을 읽은 뒤 경찰과 학교에 알렸으나, 구체적인 위협이 없다며 묵살됐다고 증언했다. 조씨를 따로 만날 때 신변 안전까지 걱정했다는 로이 교수는 “그의 작문에 대해 우려하는 이메일을 보냈으나 돌아온 것은 또 다른 장문의, 앞뒤 맞지 않는 분노로 가득한 표현이었다.”며 결국 다른 학생들을 조씨에게서 떼어내 1대1 수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책상 아래서 여성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2명의 룸메이트도 “우리는 일찍이 조씨가 학교 총격 사건을 일으킬 것이란 걱정을 나누곤 했다.”면서 “그는 너무 조용했고, 마치 그림자 같았다.”고 했다. 신입생 때 강의를 함께 들었다는 한 학생은 조씨가 첫 수업시간 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교수가 이름을 적으라는 종이를 돌리자 물음표(?)만 표시해 교수로부터 “네 이름이 물음표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조씨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아 친구들 사이에 ‘물음표 키드’란 별명이 붙었다고 말했다.●힐스처와의 관계 미스터리 조씨는 범행 당일인 지난 16일(현지시간) 오전 버지니아 공대 남녀공용 4층 기숙사를 찾아갔다. 목격자들은 그가 한 여학생과 심한 언쟁을 벌였다고 전했다. 조씨는 7시15분쯤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4040호실에서 에밀리 제인 힐스처(18)를 살해하고 총격을 제지하던 대학원생 라이언 클라크(22)에게도 격발했다.현지 언론들은 조씨가 기숙사에서 두 명을 살해한 직후 “내가 일을 저지른 건 너 때문”이라는 메모를 남겼다며 치정 살인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힐스처의 룸메이트는 “힐스처와 조승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상반된 증언을 했다. 게다가 힐스처의 전공이 동물학인 데다 학년도 달라 폐쇄적인 성격의 조씨가 백인 여성과 사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조씨는 범행 한 달 전인 지난 3월13일 대학 부근 로아노케의 한 총기상에서 신용카드로 571달러를 지불하고 9㎜ 권총 1정과 50발짜리 총알 한 상자를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총기를 처음으로 구입한 시점부터 범행을 구상했을 것이라는 게 경찰 당국의 분석이다. 또 다른 22구경 권총 1정의 매입 경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모두 버지니아주에서 산 것으로 추정된다.dawn@seoul.co.kr
  • 소극장서 만난 뮤지컬

    잘생긴 남자 배우 2명과 피아노 한대. 오는 5월13일까지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쓰릴미’의 전부다. 하다 못해 공연 중 박수소리도 없다.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며 관객들에게 자제를 당부했다. 1924년 시카고에서 발생한 악명높은 범죄를 바탕으로 만든 ‘쓰릴미’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해 범죄를 즐기고, 우정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친구의 범죄에 동조하는 또 다른 젊은이. 게다가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최근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괴이다. 부잣집 자제였던 이들의 범죄 이유는 단지 스릴을 느끼기 위해서. 범죄를 소재로 한 것임에도 관객의 98% 가까이 여성인 것은 배우의 힘이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뮤지컬 배우로 손꼽히는 류정한. 아직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지만 강한 매력을 발휘하는 김무열. 두 배우가 뿜어내는 기운에 공연장을 두세 번 찾는 여성팬들이 늘고 있다. 공연이 끝나면 극장에 마련된 공연소개 게시물을 읽는 관객이 장사진을 이룬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인 줄 모르고 공연을 관람했던 이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희대의 명문이 극 주인공들의 재판과정에서 나온 것을 알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화려하면서도 힘있는 피아노 선율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배우의 치밀한 심리전과 놀라운 반전이 궁금하다면 ‘쓰릴미’에서 즐겨 보시길.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지 올해로 꼭 120년이 됐다.1887년 3월 초 저녁 경복궁 내 건천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개화의 바람을 타고 온 문명의 빛은 그 후 국가경제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시련을 딛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역사와 과제, 전망 등을 살펴본다. 전기에 대한 고종 황제의 사랑은 각별했다. 고종의 지대한 관심은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는 황실에서 출자한 국영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오늘날 한국전력의 모태가 됐다. 경복궁에서의 시등(始燈)이 조그마한 자가발전설비로 이뤄진 것이라면 한성전기 설립은 본격적인 전력사업의 시작을 의미한다. 초기의 전력사업은 전차사업으로 나타났다.1899년 5월4일은 전차가 동대문과 흥화문(옛 서울고 자리) 구간을 시험운행한 역사적인 날이다. 한성전기는 이어 전등사업에도 관심을 돌렸다. 최초의 민간전등은 1900년 4월10일 종로네거리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 가로등에서 켜졌다. 이날을 기념해 지난 1966년부터 해마다 4월10일을 ‘전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전력사업은 해방 후 큰 위기를 맞았다. 발전설비의 약 90%가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6·25전쟁을 거치면서 전력난은 더 심각했다. 공장을 돌리기조차 어려웠다. 민간 가정에서 전깃불은 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 남한에는 조선전업 등 전력 3사가 있었으나 만성적인 적자운영으로 전력난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1961년 7월 한전이 창립됐다. 한전은 1964년 4월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을 실시했다. 해방 후 되풀이됐던 전력난이 해소됐다. 한전은 1965년 12월부터 농어촌전화(電化)사업에 매진,1979년 98%의 전기보급률을 달성했다. 부잣집의 전유물이던 전기가 거의 모든 일반 가정으로까지 보급된 것이다. ‘국내용’이던 전력사업은 1990년대부터 세계 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한전은 1995년 2월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 성능복구 사업을 따냈다. 이듬해에는 필리핀 일리한 복합화력발전소 건설·운영사업 수주에도 성공했다. 전력수출시대를 연 해외사업은 순항 중이다. 중국, 레바논, 미얀마, 리비아, 캄보디아, 우크라이나 등에 진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남과 북의 전기도 하나로 이었다. 한전은 2004년 12월 북한과 개성공단 전력공급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2005년 3월 개성공단에 전기를 공급했다.1948년 5월 전력교류가 단절된 지 57년 만에 분단의 벽을 넘는 쾌거였다. ●세계 수준으로 성장한 전력산업 이 땅에 전등이 밝혀진 이후 120년간 우리나라의 전력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경제성장의 버팀목이었던 한전은 세계가 인정하는 전력회사로 성장했다. 글로벌 종합에너지 그룹으로 비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한전의 전기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당 정전(停電)시간은 2006년 18.8분. 타이완(30분), 미국(122분), 프랑스(51분)보다 휠씬 짧다. 규정전압 유지율은 99.9%, 주파수 유지율은 9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전은 지난해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파이낸셜 타임스가 꼽은 500대 기업, 포브스지 2000대 기업에 모두 선정됐다. 미국 에너지 분야 전문기관인 플래트(Platts)는 한전을 전력산업 부문 세계 6위, 아시아·태평양 최고의 전력회사로 선정했다. 이원걸 한전 사장은 “‘글로벌 한전’이 될 수 있도록 첨단 전력기술 개발과 해외전력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전기 역사 120년 발자취 -1887:경복궁 내 건천궁에서 시등(始燈)-1899:대중교통의 혁명, 첫 전차시대 개막 -1964:전력 무제한 송전, 한강의 기적 -1978:제3의 불, 원자력발전시대 개막 -1979:농어촌전화(電化)사업 완료 -1995:전력도 수출역군, 필리핀 말라야 발전소 운영 -2005:남과 북의 전기 하나로 잇다. 개성공단 전력공급 개시 자료:한국전력공사
  • 노대통령 “3不 무너지면 교육 위기온다”

    노대통령 “3不 무너지면 교육 위기온다”

    노무현(얼굴) 대통령은 8일 대입 본고사·기여입학제·고교등급제 금지 등 3불(不)정책이 무너지면 교육 위기가 올 수 있다며 일부 사립대와 정치권 일각의 3불 정책 폐지 주장에 제동을 걸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교육방송(EBS)을 통해 방영된 ‘본고사가 대학자율인가’라는 주제의 특강에서 “3불 정책을 무너뜨리려는 사회적 흐름이 계속 있는데 이 점을 우리가 잘 방어해 나가지 못하면 진짜 우리 교육의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대학별 본고사 부활 주장과 관련,“학교마다 어려운 시험을 내게 되면 아이들을 자꾸만 학원으로 보내게 되지 않겠느냐.”면서 “공교육이 완전히 붕괴해 버리고, 사교육이 넘쳐 학부모는 등이 휘고 아이는 코피가 터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특수목적고인 외국어고에 대해 “입시기관화되어 있지 않으냐.”라고 반문한 뒤 “외국어 전문가를 기르는 교육제도로 만들어 놓으니까 전문가 양성할 생각을 안 하고 입시학원처럼 입시 학교가 되어 가지고 그 사람들이 지금 본고사 하자고 자꾸 흔들어서 우리 학교의 근간을 오히려 흔드는 세력이 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본고사로 가버리면 부잣집,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은 대학교를 가고 아닌 사람은 못 가고, 그렇게 해서 몇몇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만이 한국내 모든 요직을 독점하는데, 국제 경쟁력은 뚝 떨어져 버리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고교등급제 도입 논란에 대해 “학력과 시험 중심의 사회를 자꾸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은 창의력 교육을 붕괴시키고 주입식·암기식 교육, 시험 이것밖에 못하는 것이 되어 교육목적에도, 인성교육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고교등급제가 되면 고교입시제도를 부활시킬 수밖에 없고, 중학생들이 입시 공부를 해야 하고, 초등학교에서 또 중학교 입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여입학제와 관련, 노 대통령은 “국민 정서가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국민이 좋아하지 않는데 굳이 한두 개 대학을 위해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생기는 문제 제도를 채택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이날 오후 대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대구시약사회 특강에서 “현 정부의 3불정책으로는 훌륭한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박찬구 김지훈기자 ckpark@seoul.co.kr
  • [깔깔깔]

    ●반장 선거 반장 선거날, 세명의 후보들이 소견발표를 한다. 첫번째 후보, 모범생 김응석.“내가 반장이 되면 학급성적을 올리마.”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두번째 후보, 부잣집 한봉태. “내가 반장이 되면 우리반 간식 급식을 모두 해결해주지.” 아이들은 괜찮은 조건이라며 박수를 쳤다. 세번째 후보, 반에서 제일 인기 없는 깡패 왕거리. 왕거리의 한마디에 엄청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반장이 되면…, 전학 가준다.”●장모와 사위 여행길에 오르는 장모가 찾아와서 사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시계를 보던 장모는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맙소사, 벌써 3시가 됐으니 이거 열차를 놓치게 생겼잖아.” 장모는 급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손녀가 달려와 말했다. “할머니, 서두를 것 없어요. 아빠가 있잖아요 시계를 두시간 빨리 가게 해 놓았단 말이에요.”
  • 존 리드 평전/로버트 A.로젠스톤 지음

    ‘혁명’을 꿈꾼 미국인,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안장된 미국인. 전혀 미국인 답지 않았던 미국 언론인 존 리드(1887∼1920)의 일생을 다룬 책 ‘존 리드 평전’(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아고라 펴냄)이 나왔다.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생생했던 역사의 현장을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기록했다. 이 작품은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와 함께 세계 3대 르포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세계대전과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존 리드는 펜 하나를 들고 세계를 누빈 기자였다. 레닌의 벗이기도 했다. 미국 포틀랜드의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존 리드는 급진적 잡지 ‘대중’의 기자로 파업과 전쟁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노동자들의 편에 서게 됐다.1차 세계대전 때는 유럽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그때 남긴 한마디는 아직도 회자된다.“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볼셰비키 혁명후 소비에트 선전국에서 일했던 존 리드는 미국에 돌아와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러시아에 갔다가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러시아 볼셰비키들은 그의 혁명적 사상을 받들어 혁명전사들이 묻힌 ‘붉은 광장’에 미국인 최초로 그의 시신을 안치했다. 격동의 20세기 초, 시대를 마음껏 향유한 ‘자유로운 영혼’ 존 리드의 일대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1981년 워렌 비티가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영화 ‘레즈(REDS)’로 제작돼 전세계에서 상영됐다. 하지만 이 책이 존 리드의 혁명사상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돈과 여자, 명성 때문에 울고 웃었던 평범한 모습도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돈 때문에 가끔 쓰기 싫은 기사를 써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자신과 아내 루이즈·극작가 유진 오닐의 삼각관계를 괴로워 하고, 자신이 과연 혁명의 대의에 헌신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인간의 얼굴이 담겨 있다. 캘리포니아공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독자들이 나름의 렌즈로 존 리드의 생애를 되돌아보기를 당부했다. 각자의 관심사와 가치관에 따라 이 책은 해석을 달리할 것이라는 얘기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안착되고 있는 지금, 한·미 FTA에 맞선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100여년 전 존 리드가 고민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701쪽,1만 9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김희준(金喜俊)아씨-5인의 신랑(新郞)감 준결선(準決選)

    김희준(金喜俊)아씨-5인의 신랑(新郞)감 준결선(準決選)

    조용한 「아씨」 김희준(26)이 요란스레 밀려드는 혼인줄로 고민 중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가에서부터 실업인(實業人), 현직 검사(檢事), 의사(醫師)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이름들의 청혼이 밀어닥친 것. 「비운(悲運)과 눈물의 아씨」(TV극)는 현실(現實)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는 이야기. 금년 봄부터 청혼 잇따라 어머니, 언니가 1차 심사 김희준에게 중매가 줄을 잇기 시작한 것은 올 봄부터. 주로 집안을 통해서 은밀히 청혼이 들어오고 있는데 대부분 연예계와 관계가 없는 인사들. 김양의 어머니와 언니가 주동이 되어 청혼을 맡아처리(?)하고 있는데 평소 연예계통의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공언해 온 김양이기 때문에 어머니나 언니가 김양에게 권하는 「신랑후보」씨들은 한결같이 비연예인뿐이라는 것. 중매가 들어오면 어머니와 언니가 1차로 심사(?)를 해서 거기에 「패스」된 사람이라야 김양에게 넘어간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김양에게 어머니와 언니가 추천한 후보는 5명 정도. 현재 정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소장 정치가, 현직 유명 검사, 의사, 모 방송국 상무의 동생 그리고 얼마전 미국에서 돌아온 사람등. 이들 중에서 모방송국 상무 동생의 경우는 꽤 구체적인 데까지 진전이 있었다는데 신랑쪽 집안에서는 이미 결정된 혼사나 다름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와 한동안 김양이 궁지에 몰린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 그때까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김양이 직접 중간에 나섰던 상무를 만나서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중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쟁쟁한 신랑후보들의 청혼을 받은 김양은 한창 고민중. 누가 보아도 침을 삼킬만한 탐나는 신랑감들인데 그들의 집안이 한결같이 너무 부자들이고 보면 별로 유복하지 못하게 자라온 자신과 비교해서 걸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철없는 아가씨라면 부잣집에 시집가는게 어디냐고 생각하겠지만 차분한 「아씨」인 김양의 생각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말씀. 『사람에겐 각기 자기 분수라는 것이 있는게 아니겠어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몇사람의 하인을 두고 대궐같은 집에서 호화롭게 사는 사람에게는 그나름의 생활신조랄까 주의가 있는 것이고, 저같이 소시민적인 사람에게는 또 그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이 있는 거죠. 어쩐지 부잣집에 시집을 간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요』 미국서 돌아온 신랑감과 맞선까지 보았다는 소문 이런 「아씨」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아 청혼이 들어온 후보들 중에서 가장 「아씨」의 마음에 편함을 주는 사람이 미국에서 갓 귀국했다는 남자. 들리는 소문으로는 양쪽 집안 어른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맞선까지 보았고 또 서로 「싫지않은 마음」이라는 것인데 김양이나 그 사람이나 모두 몹시 수줍어 하는 「타이프」라서 결정적인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7월 초에 갑자기 단행된 TBC-TV 「탤런트」출연료 인상 때 김양은 자기의 대우가 너무 소홀하다는 이유를 들어 「탤런트」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비친 적이 있었다. 즉 자기가 받는 출연료가 C급대우 밖에 안된다는 것. 기별(期別)로 정해진 급수에 따라서 그만한 대우를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원칙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김양의 주장이었다. 열심히 하면 그만한 보답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 김양의 「탤런트」 은퇴의사는 그뒤 TBC의 모 중역이 직접 김양을 불러 장래를 약속한 모종타협을 해서 무마되었지만 그때 김양이 다른 방송국으로 가지 않고 그만두겠다고 한 말속에는 결혼을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추리할 수도 있다. 이와같은 추리를 뒷받침할 만한 것으로 평소 김양이 다른 연예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결혼과 동시에 「탤런트」계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이번 기회에 TV를 떠나 그「마음에 드는 분」과 결혼을 할까하는 생각을 갖지 않았느냐는 것. 김양은 6·25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서울 종로구 관훈동 141)에서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파편에 맞아 직공 5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은 집안은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했고 김양이 고등학교(명성여고)를 졸업할 때 쯤에는 오빠 김희경씨(金喜慶·경제학박사·현재 미국 「휴스턴」에서 대학교수)가 미국유학을 갔기 때문에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한 형편. 성격이 워낙 온순한데다 집안 형편마저 어려운 처지라서 순순히 형편을 따라 집안살림에 앞장을 서게된 것. 또한 김양의 어머니는 전통적인 한국여인으로 예의와 범절이 바르고 곧은 부인. 김양이 「아씨」에서 보여주는 몸가짐이 깍듯하고 정통적 예의범절 그대로라는 것도 이와같은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는 공론이다. 결혼·공부·탤런트 생활중 어느것 하나 버릴수 없고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김양은 배움에 대한 미련 또한 결혼만큼이나 비중을 두고 있다. 김양이 공부하겠다는 전공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주부로서 도움이 될만한 것을 택하겠다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공부하겠다는 어디까지나 「아씨」적인 소견이다. 그러고 보면 김양은 지금 세갈래 갈림길에 서 있는 셈. 결혼, 공부 그리고 「탤런트」생활. 김양으로서는 이 세가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행복하게 딱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한가지만 전념을 해야 승부를 가릴 수 있는게 아니겠어요? 두가지를 한꺼번에 이루려고 욕심을 냈다가는 모두를 그르치고 만다는 것을 전 잘 알고 있어요. 지금 내 생각으로는 이왕 「탤런트」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것에만 전념하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그 생각이 결정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운이 있다. 조용한 말씨라든가 착한 마음씨 그리고 다소곳한 몸가짐등 바로 「드라머」속의 「아씨」 모습 그대로인 김희준의 현실은, 마음은 그러나…. [선데이서울 70년 7월 19일호 제3권 29호 통권 제 94호]
  • [한승원 토굴살이] 말(言)과 말(馬)에 대하여

    [한승원 토굴살이] 말(言)과 말(馬)에 대하여

    입으로 뱉는 말과 타는 말은 비슷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 길은 열리고, 말이 끊어진 자리(絶望)에서 새 진리는 싹터난다(言語道斷)고 말하는 선승들은, 말로써 진리가 안 풀릴 때 ‘악(喝)!’하고 소리치며 주장자를 내리친다. 술에 취하여 조는 김유신을 애인 천관녀의 집으로 태우고 갔다가, 깨어난 그의 칼에 목이 잘려 죽었다는 말 이야기는 많은 뜻을 내포한다. 제주도에 취재차 가서, 평생 말과 더불어 살았다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말은 쓸개가 없는 짐승이라 강물도 가시밭길도 무서운 줄을 몰라. 그런데 헛것을 보았다 하면, 주인을 싣고 있거나 수레를 차고 있거나 상관없이 후닥닥 달아나. 그때는 주인이 다쳐.”하고 말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동물학자에게 확인해 보지도 않고 ‘말은 쓸개 없는 짐승’이라고 내 사전에 기록해 놓았다.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제자들하고 함께 제주엘 갔다가, 모두들 말을 타고 즐기는데 나는 타지 않았다. 내가 마장에 갔을 때, 말을 다루는 기사는 말의 머리를 오랫동안 품에 안은 채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볼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그 볼에 자기 볼을 비비기도 했다. 기사들은 자기의 말과 친해지기 위하여 당근을 숨겨 두었다가 꺼내주곤 한다고 들었다. 그 기사가 말 타기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자기와 자기의 말을 믿고 타라고 권했지만 나는 끝내 타지 않았다. 몸이 강단지고 얼굴이 거무튀튀한 기사의 흑갈색의 눈과, 적갈색 말의 한없이 깊은 검푸른 눈 때문 아니었을까. 그들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시퍼런 강물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동시에 추락의 공포가 나를 말에게서 뒷걸음질치게 했다. 기사가 나를 자기 말 등허리에 태운 다음, 걸으라고 명령하거나 달리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움직거리는 말 등허리의 율동과 내 엉덩이의 율동이 어우러지지 않아서 곤욕을 당할 것 같고, 그러다가 땅으로 추락하게 될 것만 같았다. 추락을 예방하기 위해 “천천히 달려!”하고 내가 말을 해도, 말은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아이고 겁쟁이’ 하고 비웃으며 자기 마음가는 대로 달려 버릴 듯싶었다. 나는 짐승인 말을 믿을 수 없듯이 혀끝이 만들어내는 말도 믿을 수 없다. 내 혀끝이 만들어낸 말로 인해 절망을 한 경우가 한두 번 아니다. 중학시절, 자취를 하던 나는 점심을 굶곤 했는데, 나보고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말을 한 부잣집 친구에게 도리질을 하며 “너나 먹어라.”하고 말했다가 심하게 다투었다. 불행히도 그 친구에게서는 노린내가 심하게 났는데, 그것을 아는 친구는 유다르게 몸을 청결하게 하곤 했다.“더럽단 말이야?”하고 거절의 이유를 따지는 친구의 말에, 나는 “무슨 소리야? 우리 반에서 너처럼 깨끗한 아이가 어디 있는데?”하고 말을 했는데, 친구는 “이 자식아, 놀리지 마!”하고 말한 것이었다. 내가 뱉은 말이 나를 배반하고, 그 배반한 말을 달래려고 뱉은 말이 더욱 나를 곤혹스럽게 배반했다. 전달기능과 더불어 배반의 기능도 가지고 있는 말은 쓸개가 없는 말을 닮았는지 모른다. 아, 말이 하루 천리를 달려가듯이 입으로 뱉은 말도 천리를 달려간다.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평생 금배지를 달고 살겠다든지, 지자체의 장을 말뚝 박아놓고 해먹겠다든지 하는 사람들과, 고위 관리들, 판검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말과 말을 바꾸곤 한다. 잘못을 줄줄이 저지르고 자기를 배반한 간사한 말의 목을 치는, 진짜로 난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 말들을 감싸주곤 한다. 자기와 세상을 배반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은 절망을 모른다. 쓸개가 없는 말의 성정을 가진 까닭일 터이다.呵呵呵.
  • [09일 TV 하이라이트]

    ●사이언스+〈천년의 종이, 대반란을 꿈꾸다〉(YTN 오후 1시40분) 책, 벽지, 쇼핑백, 종이접기, 편지지 등 기록하고 접는 데에만 쓰였던 종이. 그런 종이가 과학을 만나 새롭게 변신, 깜짝 놀랄 만한 것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얇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한 장의 종이가 어떻게 탈바꿈하는지 종이의 대변신 속으로 떠나본다.   ●생방송 60분-부모(EBS 오전 10시) 낯가림이 심하고 예민한 큰아이, 날 때부터 설사병이 심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작은아이 때문에 은주씨는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지칠 대로 지쳐 사소한 일로 큰아이에게 화를 내고 다그치게 되는데…. 오은영 신경정신과 전문의와 함께 은주씨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과 배경을 찾아본다.   ●신동엽의 있다! 없다?(SBS 오후 6시50분) ‘영웅본색’‘첩혈쌍웅’‘페이스 오프’‘미션 임파서블 2’. 흥행 대박 영화로 주목받는 영화감독 우위썬이 한국 여배우를 주연으로 제작한 영화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본다. 만약에 그런 영화가 있다면 우위썬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여주인공은 과연 누구인지 확인해 본다.   ●거침없이 하이킥(MBC 오후 8시20분) 빨래를 하던 중 갑자기 쓰러진 문희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해미가 정신 차리라고 자신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며 괘씸해한다. 한편 유미는 CD가 잔뜩 담긴 쇼핑백을 들고 민호를 찾아온다. 유미는 엄마가 낸 음반인데 쫄딱 망했다며 제작비라도 건져야 하니 좀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어릴 적부터 잘난 언니에게 치이며 살아온 하경. 어느덧 결혼적령기가 된 하경은 부잣집 아들에 의사인 재훈을 만나 행복하기만 하다. 그런데 하경을 바래다주던 어느날 집 앞에서 진경과 마주친 재훈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된다. 졸지에 하경의 첫사랑은 형부가 되고 마는데….   ●아시아의 창(KBS1 밤 1시10분) 1000위안을 버는 전기 기술자인 우. 아내가 더 부유한 남자를 만나 자신을 떠난 뒤 우는 결혼정보회사와 광고에 돈을 퍼붓는다. 우는 결혼 정보회사의 소개로 아이린이란 여자를 만나게 된다. 더 좋은 조건의 생활을 위해 외국인들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는 우 같은 남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로 팔도 누빈 윤팔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로 팔도 누빈 윤팔도씨

    # 질문1‘엿 먹어라.’가 왜 욕이 됐을까.1964년 12월 전기 중학입시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 중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정답으로 채점된 것은 ‘디아스타제’. 하지만 보기 중에 ‘무즙’이 있었는데 무즙을 정답으로 표기했다가 낙방한 학생의 어머니들이 법원에 제소하는 등 집단항의에 나섰다. 급기야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관련기관 등에 찾아가 “엿 먹어라! 무즙으로 만든 이 엿 먹어봐라!”하며 엿을 들이댔다. 결국 당시 한상봉 문교부차관과 김규원 서울시교육감이 사표를 냈고 무즙을 답으로 썼다가 낙방한 38명은 정원에 관계없이 경기중학에 합격했다. # 질문2 엿장수는 1분에 가위질을 몇번이나 할까.‘초딩’시절, 시골동네에 ‘엿장수’가 찾아와 가위질을 하며 “엿 바꿔먹으라.”고 소리칠 때 여러번 들었던 추억의 문제다. 초롱초롱 눈알을 굴려가며 애써 답을 생각하다가 “야, 그거야 엿장수 맘대로지.”라는 답을 듣고 허탈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릴 적 가장 반가웠던 손님은 뭐니뭐니 해도 ‘엿장수’였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절겅대는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약속이나 한듯이 다들 쪼르르 달려가 엿장수의 뒤를 따랐던 그 때 그 시절. 오는 날짜도, 가위질 하는 것도 ‘엿장수 맘대로’였지만 늘 반갑기 그지 없었다. 다 떨어진 고무신 한쪽, 망가진 양은 냄비 조각, 심지어는 누나의 긴 머리카락까지 내밀면, 엿장수는 끌과 가위로 탁탁 잘라주며 “옜다, 엿먹어라.”하며 던져주곤 했다. 가끔 “쟤는 왜 많이 주고 저는 쬐금만 주나요?”라고 항의하면 “야, 엿장수 맘이여.” 하며 꿀밤을 맞기도 했다. 윤팔도(81) 할아버지. 어쩌면 어렸을 적 동네에서 한번쯤 만났을 법한 추억의 할아버지다. 지난 66년의 세월동안 ‘엿장수’라는 외길인생을 살아오면서 전국 팔도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다. 원래 이름이 석준이었지만 ‘팔도(八道)´로 바꾼 것만 봐도 그의 인생역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한때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엿장수들이 모인 엿가위질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국가대표로 인정받기도 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기에 최장수 ‘엿장수’이자 살아 있는 ‘엿가위 예술의 달인’으로 꼽힌다. 더욱 눈길 끄는 대목은 그의 막내아들이 5년 전에 아버지와 합류했고 최근에는 손자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3대째 ‘엿장수 집안’이 된 셈이다. 설날이 가까워오면 자연스럽게 정겨운 시골추억이 생각나기 마련, 그래서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일산의 한 백화점 앞에서 엿장사로 가업을 잇는 이들 3부자를 만났다. 청주에 살고 있는 이들은 때마침 백화점측의 초청으로 설 대목 행사에 참석해 길거리에서 흥겨운 엿판을 벌이고 있었다. “일락 서산에 해 떨어지고 이내 목판에는 엿 떨어졌구나. 청춘 과부 잠못 잘 적에 먹는 엿이요, 큰애기 허벅지맹키로 희건 엿이 왔어요. 부산 동래 사탕엿, 울릉도에 호박엿, 전라도 봉산의 생강엿, 강원도 금강산 생청엿….” 윤 할아버지의 구성진 엿타령이 길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들과 손자는 엿가위로 어깨를 들썩들썩 하며 척척 장단 맞추는 모습에 절로 흥이 돋아난다. 잠시 짬을 낸 윤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81세의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게 보였다. 비결을 물었더니 “즐겁게 사는 거여.”라며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다. 지나온 인생살이가 간단치 않을터.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8세 때 남사당패에 들어갔다. 왜소한 체구 ㅜ때문에 주로 3층 꼭대기에 올라가는 역할을 맡았다. 잘못되는 날엔 매맞기 일쑤였다.3년 뒤에는 창극단에 들어가 노래를 배웠다.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 14세되던 겨울, 그는 호구지책으로 엿장수로 나섰다. 동네 어른을 통해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경씨가 1000명 산다는 마을)에 위치한 엿방(엿공장)에 취직했다. 이때부터 하루 밥 세끼를 먹게 되면서 엿장수 생활에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엿방에 갔더니 장작불 지펴놨지, 엿물로 밥지어 먹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비록 머슴 신세나 다름없었지만 남사당 가락으로 가위질 하며 용돈도 벌었어.” 19세되면서 세상 보는 안목이 넓어지자 홀로 독립한다. 음악을 알고 재주가 남달라 자신감이 더욱 생겼던 것. 우선 몽둥이만 한 엿을 만들었다. 이어 리어카를 구입하고 엿가위 두 개를 장만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어린 아이들은 “몽둥이 엿장수가 왔다.”며 떼지어 몰려들었다. 윤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날이면 “자, 엿먹어라.” 하며 길다란 몽둥이 엿을 몇개씩 집어주기도 했다. 서른 한살 때 군복무를 마친 어느날, 충남 광천의 시골에서 엿판을 벌일 때였다. 창극 노래, 트로트 등으로 이어지는 흥겨운 놀이마당이 한바탕 끝나자 어여쁜 처녀(김종숙·70·지금의 부인)가 다가와 뒤따라가겠단다. 가만 보니 부잣집 딸이었다. 고생 바가지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처녀의 진심을 알고는 친척이 사는 논산으로 함께 야반도주했다. 결국 연산면 살포리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엿장수한테 누가 딸을 주겠나 싶어 결혼 생각을 안 했지. 허긴 엿가위 장단에 처녀들이 담 넘어 올 정도로 꽤나 인기를 모았어. 생각보단 결혼을 일찍했지만 부인은 늘 독수공방이었지. 리어카 끌고 집을 나가면 1년만에 돌아왔으니까 말야. 그러면서 하나 둘 낳은 아이가 나중에 5남매가 되더군.” 1969년 어느날이었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큰 엿공장을 운영하는 한 부자의 주최로 서울 신당동에서 전국 엿가위질 경연대회가 벌어졌다. 호남의 송산갑, 부산의 김항구, 경기·인천의 백대가리, 서울의 윤팔도 등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였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쌍가위’를 들고 출전한 윤팔도가 최우수상을 차지, 전국 최고수임을 입증했고 부상으로 쌀 20가마를 받았다. 1985년 12월이었다.KBS 전국 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인기상을 받고 방송국 정문을 나서는데 “오라버니 타세요.” 하면서 누군가 승용차 문을 연다. 얼굴을 보니 코미디언 배연정씨였다. 그 길로 간 곳이 서울 돈암동의 유흥업소. 곧바로 무대 위에 올라 ‘물레방아 도는 내력’‘고향무정’‘돌아가는 삼각지’등 세 곡을 불렀다. 그랬더니 50만원이 든 봉투를 받았다. 며칠 뒤에는 MBC 차인태의 ‘출발 새아침’에 초대받았고 이 방송을 본 신소걸씨한테 연락이 와 2년동안 밤무대에 출연했다. 낮에는 엿장수, 밤에는 가수로 활동했던 것이다.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이북을 제외하곤 전국 안 가본 데가 없지. 엿가락 길이로 따지면 지구 수십번은 돌았을 거야. 그런데 요새는 엿가위 만드는 곳도 없어지고 뭔가 아쉬워.” 지난 2003년이었다. 윤 할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막내 아들 일권(36)씨가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쓰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일권씨는 “60여년동안 일해온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만약 돌아가시면 엿불림(구전 판소리)도 끊길 것 같았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일권씨는 2년 전 아버지와 함께 ‘엿불림 음반’(대표곡 ‘엿가위 인생´)을 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가업을 이은 아들은 초보답지 않게 2005년에는 2억원, 작년에는 3억원을 벌어들여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해마다 명절 때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엿판시합이 벌어진다는 일권씨는 “도저히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아울러 “이제는 초콜릿 대신 우리의 전통 엿을 사랑해야 한다.”면서 폐백이나 입학·졸업시즌에 애용되는 엿을 건강식 웰빙 스타일로 바꾸고 있다고 귀띔했다. “엿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인정을 나눠주는 메신저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가 해온 66년과 제가 합류해 100년을 꼭 채우겠습니다. 또 제 아들이 100년부터 다시 어어가겠죠.” 손자 경식(13)군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엿가위를 잡아 엿불림을 구성지게 부른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경식군은 휴일과 방학을 이용, 할아버지를 돕겠다며 활짝 웃는다. 인물 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6년 충남 논산 출생 ▲34년 남사당 입문 ▲40년 엿장수 생활 ▲69년 전국 엿장수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85년 KBS전국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인기상 수상 ▲2002년 윤팔도 전통엿집 개업(충북 청주시) ▲현재 사단법인 전통식품연구회 고문
  •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1.첫째, 그는 돌출적인 행동과 무분별한 발언으로 항상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둘째, 그는 우물 안 개구리요, 핵 장난의 위험을 외면하는 철부지다. 셋째, 그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언제 무슨 깽판을 벌일지 모른다. #2. 신체 허약하나 두뇌 명철함. 행동은 불안한 거동이 많으며 악화의 우려조차 엿보임.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여 타(他)와 비협조적임. 진작 이 경구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사회 변혁을 외치는 화려한 언술 뒤로 잔뜩 응어리진 분노와 독선, 그 유아독존적 아집을 흘려보지 말았어야 했다. 노무현 변호사를 정계에 입문시킨 선배 변호사 김광일 전 국회의원이 2002년 12월 대선 직전 기자회견에서 내지른 외마디(#1)를, 이보다 훨씬 앞서 노 대통령의 중학교 3학년 생활기록부에 담임교사가 조심스레 남긴 글귀(#2)에 한번쯤 귀와 눈을 열었어야 했다. 경구는 현실이 됐다.“대통령 못 해먹겠다.”로 시작한 ‘무분별한 발언’은 “미국이 없었더라면 북한 수용소에 있었을 것”에서 “미국 엉덩이 뒤에서 형님만 믿는다고 하는 게 자주 국민의 안보의식이냐.”“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으로까지 나갔다. 형용모순의 ‘좌파적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정책 행보 또한 왼쪽 오른쪽 광폭으로 넘나들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까지 갔다. 국민들은 그런 감정의 기복과 명철한 두뇌와 불안한 거동의 부조화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이조차 맛보기였던 모양이다. 지난 연말 두 팔을 내지르던 민주평통 연설이 예사롭지 않더니 새해 들기가 무섭게 노 대통령의 입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할 말 꼬박꼬박 하겠다.”며 국민들의 평가부터 내동댕이쳤다. 공무원들에게는 “가장 부실한 영역이 미디어”라며 언론과의 일전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를 권력의 정점에 세우고도 등을 돌리게 돼 괴로운 국민들에게 ‘앞으론 당신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겠어.’라고 외치는 노 대통령에게서 40여년 전 경남 김해시 진영 시골마을의 소년 노무현이 오버랩된다. 고무와 천으로 만들어진 부잣집 아이의 책가방을 칼로 북북 찢어댔고,‘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고’, 잘 사는 읍내 아이들에 맞서 가난뱅이 시골 아이들의 대장이 됐던 노무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뿌리칠 수 없는 그 피해의식이 마구 터져 나오는 듯하다. 임기말 대통령의 숙명도, 권력의 무상함도 아니다. 편가르기 정치, 뺄셈정치의 잔해일 뿐이다. 하나를 갈라 반을 얻고, 이를 또 쪼개 그 반을 취하고, 다시 나누고, 홀로 남고, 결국엔 자신마저 갈라 놓는 정치 말이다. 그 정치가 지금 국민 10명 중 9명을 등지게 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언론마저 돌려 세운 것이다. 그런 정치이기에 언론이 국민과 자신을 가르는 불량품이 되고, 그런 불량품에 속아 소비자 주권을 망각하는 불량국민이 되는 것이다. 여당의 많은 인사들조차 노무현 때리기에 나선, 고립무원의 노 대통령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부질없을 듯 하다. 들을 의사도, 여유도 없거니와 덧셈정치에 익숙지 않아 실천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차라리 국민들이 움직이자. 그는 결코 ‘왕따’가 아니며, 지난 4년 많은 것을 이뤘으며,2008년 2월24일 자정까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을 일깨우도록 하자. 따뜻한 편지 한 통을 보내자. 그의 친구가 되자. 경구를 흘려 들은 모두의 책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