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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정윤수의 오버헤드킥] K리그 외국인 감독 ‘순조로운 출발’

    K-리그가 날로 흥미를 더하고 있다. 개막전 13골이 터진 데 이어 2라운드에서도 모두 20골이 터졌다. 역시 축구는 골 맛이다. 물론 시즌 초반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긴 하다. 초반에 승점을 확실히 챙겨야 한다. 주말에 정규리그를 치르고 봄철의 주중에는 컵대회를 치르기 때문에 경기 수가 부쩍 늘어나기 전에 선두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공격 축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순조로운 출발에는 3명의 외국인 감독들이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고 부산 시내를 누비면서 그라운드 바깥에서 팬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부산의 앤디 에글리 감독은 작년부터 화제였다.“비록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냉혹한 승부를 벌이지만 팬들만큼은 열정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쾌조의 스타트를 보이고 있는 포항의 파리아스 감독도 선수와 팬들로부터 바윗장 같은 신뢰를 얻고 있다. 사실 그는 2005년 부임 이후 선수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은 믿음을 지금 되돌려 받는 중이다. 투톱으로 맹활약하는 고기구와 이광재, 그리고 공격의 시발점이 되는 따바레스 등은 파리아스 감독의 믿음 속에서 인생의 아름다운 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그리고 서울의 세뇰 귀네슈 감독. 이제 겨우 세 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그는 모든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선수 교체 및 전술의 변화를 탄력적으로 선보여 ‘명불허전’을 실감케 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주목을 받는 건 현행 K-리그 운영에 관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경기 전날 9시에 엔트리 명단을 제출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축구는 ‘전쟁’이라고 표현한 그는 왜 하루 전에 전략을 노출해야 하며 만약 그것이 고칠 수 있는 ‘관행’이라면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일월드컵 직전에도 귀네슈 감독은 터키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었다. 당시 아디다스컵 예선이 치러지던 성남종합운동장을 찾은 그는 “왜 국내 경기에 대표팀 선수들이 보이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때문에 국내파 감독들이 조명을 덜 받아야 되는 건 아니다. 연속 우승을 노리는 성남의 지략가 김학범 감독이 있고, 귀네슈 감독 이상으로 리그 운영에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수원의 차범근 감독이 있으며 야심만만하게 팀을 조련하는 전북의 최강희 감독과 대구의 변병주 감독도 있다.그럼에도 틀림없는 사실은 그라운드의 풍운아(에글리)와 선이 굵은 보스(파리아스), 그리고 승리 후에 돌아서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취미라는 승부사(귀네슈) 등이 다채롭게 결합한 올해 K-리그가 확실히 전보다는 볼거리가 풍성해지고 있다는 점이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강원도 춘천 시내의 언덕 지대인 약사리 고개에 우뚝 선 죽림동 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54호·죽 림동 38)은 춘천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다. 신도들이 자생적인 신앙의 싹을 틔워 공소·본당에서 주교좌성당까지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희생이 따랐다. 지난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4000여명이 미사에 참석할 만큼 교세가 컸던 본당. 개발 바람이 불어 인근 지역에 아파트 단지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신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지금은 ‘주교좌성당’의 명맥만 근근이 이어가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태동기부터 고난의 신앙 역정을 모두 견뎌내고 묵직하게 선 ‘맏형’격 신앙터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죽림동 성당의 역사는 1920년 본당으로 설립된 곰실 공소로부터 시작된다. 당시만 해도 강원 중심 본당인 횡성 풍수원 성당의 신부가 이 지역의 작은 공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에서 동쪽으로 5㎞ 떨어진 외딴 곳의 곰실 공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도가 늘어나면서 본당 설립을 요청했고 마침내 1920년 본당이 설립돼 당시 풍수원 성당의 보좌였던 김유용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모셔왔다. 이후 신도들은 춘천 시내에 성당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없이 함께 가마니를 짜고 짚신을 삼아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지금의 성당 아래 골롬반의원 터와 아랫마당, 수녀원 터를 사들여 성당을 세운 게 1928년 5월이다. 지금의 성당은 이 부지에 보태 1939년 서울(경성)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분할되면서 부임한 구인란(Quinlan) 주임신부와 신도들이 약사리 고개 언덕의 도토리 밭을 추가로 매입해 마련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성당 모양새만 갖췄지 구조며 성물은 변변치 못했던 것 같다. 결국 1941년부터 새 성당을 지을 계획을 세웠는데, 성당 벽의 라틴어 초석이 말해주듯 일제의 살벌한 감시와 박해로 8년 뒤인 1949년 4월5일에야 착공할 수 있었다. 전남 광주의 ‘자’씨 성을 가진 화교 기술자가 설계와 건축을 맡았다.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석재를 날라다 외벽을 모두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어 내부공사를 하던중 6·25전쟁이 터졌다. 한쪽 벽이 모두 무너지고 사제관이며 부속건물이 대파되었는데 전쟁 중에도 복구작업을 벌여 1956년 6월 마침내 주교좌 성당 축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교구 설정 60년을 맞은 1998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가회 작가들이 힘을 모아 제대며 내부 성물들을 새롭게 꾸몄는데, 물론 외벽이며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성당은 명동성당의 옛 십자가와 똑같은 모습의 십자가와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이 작은 십자가는 서울대교구에서 갈라져 출발한 교구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려면 둔중한 청동 문을 지나야 하는데 성당 건립을 관할했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를 기리는 한 쌍의 아일랜드풍 십자문양이 새겨져 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주로 강원과 호남 지역을 관할했는데 죽림동성당에서도 1939년부터 30년간 모두 11대에 걸쳐 이 선교회 소속 신부가 주임을 맡았다. 지금도 성당 입구엔 이 선교회 소속 수녀원이 있으며 성당 아래쪽 병원의 이름도 여전히 ‘성골롬반 의원’. 지역 주민들에게 ‘성당 병원’이라 불리는 이색 공간이다. 고풍스러운 외벽과는 달리 내부는 현대식으로 가꿔져 대조를 이룬다. 양쪽 벽을 두른 정감어린 예수 고행 14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성당의 핵심은 역시 감심과 화강암 제대, 독경대, 주례석, 촛대로 구성된 중앙 제대 공간. 한국 천주교계에서 성미술과 전례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으로 정평난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인들이 뜻과 품을 모은 작품들이다. 요즘 새로 짓는 성당들이 모두 이곳에 와 그야말로 ‘한 수 배워간다’는 바로 그 이름난 전례공간이다. ‘파격의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성당 뒤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이내 낯선 광경을 만나게 된다. 이 성당에 몸을 담았거나 강원 지역에서 희생된 내외국인 성직자 유해 16구를 모신 성직자 묘역이다. 성당 본당에 바로 붙여 묘지를 쓴 흔치 않은 곳이다. 묘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전쟁기 북한으로 끌려가다 순교한 신부들. 전쟁 발발 당시 보좌신부였던 프란치스코 신부와 라바드리시오 신부, 고안당 신부, 진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눈에 띈다. 외국인 신부들 틈에 나란히 누운 한국인 이광재 신부는 원산까지 끌려가 어느 방공호에서 선종했다고 한다. 춘천교구는 해마다 11월 첫 주간을 ‘위령의 달’로 정해 이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된 사제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 ‘위령의 달’ 행사에는 춘천 지역 사제와 신도들이 모두 모인다고 한다. 6·25 전쟁 중 주요 인사들이 쇠사슬에 손이 묶인 채 북한으로 끌려간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서 기독교계도 숱한 희생자들을 냈다. 당시 교황 사절을 비롯해 외국인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 수백명이 평안북도 산골에 강제수용돼 34개월간 포로생활을 했는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성당이 건립될 때 주임으로 있었던 구인란 신부도 미사 도중 끌려갔으나 기적적으로 돌아와 주한 교황청 대사를 지낸 뒤 1955년 초대 춘천 대목구장에 부임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과는 아주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인 셈이다. 이 묘역 바로 뒤편에는 기이한 십자가가 나무에 기대어 서있다. 지난 2000년 대희년 6월25일 춘천교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를 열면서 제단에 설치했던 십자가다. 동해안 지역을 휩쓴 화마로 불 탄 소나무에 북한의 주목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분단 교구의 아픔과 신도들의 통일 염원이 서려 있다. 지금 죽림동 성당에 적을 둔 신도는 1600명. 대부분 오래도록 이 성당을 다닌 나이 든 세대들이다. 지난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3800명이 성당을 다녔다고 한다.2000년대 들어 춘천 지역엔 17개의 성당이 새로 생겨나 애막골, 퇴계동, 수무숲 성당같은 곳엔 신도 수가 3000명을 넘는다. 지난 2003년부터 주임을 맡고 있는 김현준 신부는 “지금 죽림동 성당은 옛날의 교세와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만 신도들의 자생적인 믿음에서 출발해 신앙 공간을 일군 흔치 않은 성당으로 한국 교회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kimus@seoul.co.kr ■ 죽림동 성당·춘천교구 ‘밀알’ 엄주언 죽림동 성당과 천주교 춘천교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지역에 신앙의 싹을 틔워 성당을 세워놓은 밀알인 엄주언(말딩·1872∼1955)이다. 한국의 천주교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없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특징을 갖는다고 할 때 춘천 지역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 한 가운데 바로 엄주언이 있는 것이다. 춘성군 장학리 노루목에서 태어난 엄주언은 19살때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천주교와 연을 맺었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발상지인 광주 천진암을 찾아 움막생활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영세하도록 인도했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천주학쟁이’로 몰려 따돌림과 온갖 수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화된 주민들이 차츰 모여들었으며 죽림동 성당의 모태인 곰실 공소를 마련해 예절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된 것도 순전히 엄주언의 공이다. 풍수원 성당과 서울의 명동 성당을 오르내리며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실이다. 본당 설립후 신도들의 애련회를 조직해 춘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서 결국 성당 터를 구입했으며 여기에 6대 춘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구인란 신부가 인근 밭을 매입해 지금의 죽림동 성당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성당 입구의 사제관과 연결된 말딩회관은 바로 춘천교구가 그의 공을 기려 지난 1997년 건립한 곳으로 춘천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공간으로 통한다.
  • 이스라엘 외교관 ‘만취 알몸 추태’

    이스라엘 행정부의 망신살이 뻗칠 대로 뻗쳤다. 모셰 카차브 대통령의 성희롱 스캔들이 이스라엘 정국을 강타한 지 얼마 안돼 고위 외교관들도 엽기적 추태로 국제사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외교부의 자하비트 벤 힐렐 대변인은 12일(현지시간) “주 엘살바도르 주재 대사인 추리엘 라파엘을 본국으로 소환, 전보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라파엘 대사는 2주 전 산 살바도르의 대사관저 마당에서 만취한 채, 나체 상태로 발견됐다. 입에는 고무공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두 손은 변태적인 성행위 때 사용되는 도구로 묶여 있었다. 대변인은 “이제까지 언론에 나온 보도가 아주 정확하며 라파엘이 법을 어긴 것은 없으나 외교관으로선 있을 수 없는, 전례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소환한다.”고 밝혔다. 라파엘은 여러 차례 해외 근무를 했는데 주로 실무파트에서 일했으며 6개월 전 엘살바도르 대사로 부임했다. 이스라엘 해외 주재 대사들의 추태는 최근 수년 사이 유형을 달리하며 계속돼 국제 외교가의 비웃음을 샀다.AP통신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주 프랑스 대사가 파리의 한 호텔에서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과 함께 있다가 심장발작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2005년에는 주 호주 대사로 발령난 한 외교관이 브라질 근무시절 현지 여성을 누드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일이 드러나 발령이 취소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역시 호주 대사인 나프탈리 타미르가 이스라엘·호주 관계를 설명하면서 “양국은 자매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노란 피부, 찢어진 눈을 갖고 있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가 인종차별 논란이 일자 교체됐다. 이스라엘 감사원은 최근 외교부의 인선위원회가 하고 있는 외교관 적임자 선발 과정이 불투명하고 시험도 부적절한 것이어서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 언론들은 13일 4명의 여성을 성희롱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모셰 카차브 대통령에 이어 그의 동생 리오르 카차브도 한 여성으로부터 성 관련 비행 혐의로 고발당해 경찰의 조사를 받을 예정이라고 보도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인왕산에 살면서 위항시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도와주던 임준원의 집에서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시인은 홍세태(洪世泰)와 유찬홍(庾纘洪)이다. 홍세태의 제자 정내교는 스승이 임준원의 집에 얹혀 살았던 이야기를 ‘임준원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유공(유찬홍)의 호는 춘곡(春谷)인데, 바둑을 잘 두었다. 홍공(홍세태)의 호는 창랑(滄浪)인데, 시를 잘 지었다. 이 두 사람의 명성이 모두 당시에 으뜸이었다. 유공은 술을 좋아했는데, 한꺼번에 몇말씩 마셨다. 홍공은 집이 가난해서 양식거리도 없었다. 준원은 유공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좋은 술을 마련해두고 양껏 마시게 했다. 또한 홍공에게는 여러 차례 재물을 주선해주어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었다. 유찬홍은 초기의 국수(國手)로 알려진 전문기사이다. 홍세태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까지 가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역관(譯官) 시인이다. 유찬홍(1628∼1697)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가장 가깝게 지낸 홍세태(1653∼1725)가 전기를 지어 주었다.(홍세태가 일본에 가서 역관으로 활약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소개한다.) 유찬홍은 9세에 병자호란을 만나 강화도로 피란갔다가 포로가 되어 청나라까지 종으로 붙잡혀 갔다. 집안사람이 돈을 주고 사온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다. 홍세태는 전기 첫줄부터 유찬홍의 암기력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암기력 뛰어난 천재… 훈장에 매 맞으면서도 바둑 몰두 유술부(庾述夫)의 이름은 찬홍, 고려 태사 금필(黔弼)의 후손이다. 이웃에 서당 훈장이 있었는데, 학생 수십명이 모였다. 술부도 그곳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빼어나서 외우기를 잘했다. 여러 학생들이 반을 나누어 과업을 받고 상벌(賞罰)을 계획 세운 뒤, 훈장이 여러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이소경(離騷經)’을 외우는 학생이 있으면 상을 주겠다.” 술부는 집으로 돌아와 ‘초사(楚辭)’를 찾아 옆에다 끼고, 학사 정두경(鄭斗卿)의 집을 찾아가 문지기에게 말했다.“들어가서 공을 뵙고 ‘유찬홍이란 자가 ‘초사’를 배우고 싶어 왔다고 전하소.” 정공은 평소에 약속하지 않고 만나는 것을 몹시 꺼렸는데, 이때 만나서도 매우 간단히 가르쳐줬다. 술부는 곧 돌아와서 ‘이소경’을 읽었다. 날이 밝자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술부도 소매에서 ‘초사’를 꺼내들고 훈장 앞에 나아가 돌아앉아 외웠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훈장이 크게 놀랐다. 술부는 자기의 재주를 스스로 믿고 다시는 공부에 힘쓰지 않았다. ‘초사’는 글자 그대로 초나라 풍의 노래를 모은 책. 굴원(屈原)의 글 25편을 중심으로 제자 송옥(宋玉)의 글 등 몇편이 더 실려 있다. ‘이소경’은 그 첫번째 노래이다. 경(經)이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시인들에게 존중받으면서도 까다롭기로 이름난 글이다. 훈장은 어린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내준 셈. 유찬홍은 겁도 없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정두경을 찾아가 숙제를 풀어 달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뜻도 모르고 그저 외우려 애썼지만, 유찬홍은 뜻을 알아야 외우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찬홍은 그 이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자기 신분의 한계를 이미 알았던 것이다. 정내교는 유찬홍이 국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그 솜씨를 다 배웠다. 아침에 강할 때마다 훈장은 목찰로 그의 오른쪽 손가락을 치면서,“너에게 글 읽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둑 두기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은 더욱 심해져서, 바둑 잘 두는 사람들과 겨루더라도 감히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일시에 국수로 치켜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전문적인 기사라든가 교육기관이 없었다.‘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배웠다. 그가 공부하지 않는다고 훈장에게 매 맞으면서도 바둑 배우기에 힘쓴 것을 보면 1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수를 인정하는 제도가 따로 없어, 자타가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이기면 하루아침에 역시 최고가 되었다. 정내교는 어떤 사람의 평을 빌려 “신기(神棋)로 이름난 덕원군(德源君)이 늙게 돼서야 윤홍임(尹弘任)이 겨우 이겼는데, 술부는 (소년 후배로서) 한창 강성한 때의 홍임을 압도했다. 술부야말로 덕원군의 맞수이다.”라고 했다. 바둑천재로 불렸던 이창호가 9세에 조훈현의 제자로 바둑계에 입문해 20세에 국수위를 스승으로부터 쟁취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유찬홍이 술을 잘 마시고 바둑까지 잘 두자 사대부와 고관들이 그를 불러 함께 놀았다.‘다투어 윗자리에 불러 바둑 두는 것을 보려고 해 그저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바둑돌을 하나 놓으면 사람들이 옆에 울타리같이 둘러서 구경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더욱 거만해지고 술만 취했다 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위항시인들의 모임에서만 그를 환영했다. 그럴수록 술을 더욱 즐겨, 집안사람과 살림도 돌보지 않았다. 술이 떨어지면 이따금 남의 집까지 들어가 술을 뒤져 마셨다. 술에 취하면 아무데나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하루는 술에 취해 이웃 여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소송당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귀양갔다. 홍세태는 ‘유찬홍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재주를 지녔지만 쓰일 곳이 없었으므로, 그 울적하고 불평스러운 기운을 모두 바둑과 술에 내맡겼다.(줄임)당세에 쓰였더라면 어찌 남들보다 못했으랴만, 가난하고 천한 생활로 괴로워하다가 끝내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슬프다.(줄임)술부로 하여금 자기가 전업했던 바둑을 바꾸어 원대한 사업에 힘쓰게 했더라면 볼 만했을 것이다. 어찌 이에서 그쳤을 뿐이겠는가?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사는 세상 오다 정내교는 천재 유찬홍이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지 못해 과거시험도 못보고 바둑이나 두며 살았던 것을 아쉬워했다.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은 생각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바둑을 하찮은 재주로 여기거나 심심풀이로 생각했다. 아무리 잘 두어도 ‘동네바둑’으로나 여겼다고 할까. 유찬홍 이후부터 국수로 인정받는 전문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둑은 병법이나 학문과도 관련돼 사대부들이 즐겼지만, 바둑을 소재로 쓴 글은 많지 않다. 기보(棋譜)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바둑을 소재로 한 글도 많지 않으며, 전문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도 몇편 되지 않는다. 김윤조 교수는 ‘조선후기 바둑의 유행과 그 문학적 형상’이라는 논문에서 순조(純祖)의 장인으로 대제학까지 지낸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예를 들어 바둑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소개했다. 수원유수(종2품)로 부임했던 그의 종숙부 김이도는 1813년 3월12일 공무를 처리하고 밤중까지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밀쳐두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김조순 자신은 1819년 동짓달 하순에 ‘기자(者) 김한흥(金漢興), 가자(歌者) 군빈(君賓), 금자(琴者) 익대(益大)’와 사냥꾼 한 사람을 데리고 봉원사로 놀러갔다. 그들을 ‘절기(絶技)’라고 불렀는데, 전문기사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동원되는 연예인이자 한시도 떨어져 있기 힘든 관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부터 6년 동안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던 심노숭은 ‘기장 고을에서 서울의 어느 귀인(貴人)에게 1년에 1000벌 이상의 바둑돌을 바친다.’고 기록했다. 심노숭은 그 부당성을 고발한 것이지만, 바둑 열기가 무척 뜨거웠음을 반증한 것이기도 하다. 유찬홍보다 선배였던 삭낭자(索囊子)는 상대가 고수건 하수건 한점만 이기는 삭낭자기법으로 손님을 끌어들여 먹고 살았다. 반면 유찬홍 이후의 국수들은 많은 상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았다. 보성 출신의 정운창(鄭運昌)은 국수 김종기를 꺾으러 평양까지 걸어가 사흘을 문밖에서 버티며 도전했다가 이겨, 순찰사에게 은 20냥을 상으로 받았다. 어느 정승은 그에게 상화지(霜華紙) 200장을 상금으로 걸기도 했다. 그러나 국수 유찬홍은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술을 마셨으며, 시를 지어 울분을 토했다. 한강 물로 술 못을 삼아 마음껏 고래같이 마셔봐야지. 그런 뒤에야 내 일이 끝나리니 죽어버리면 곧바로 달게 잠들 테지. 그대들도 보았겠지. 이 뜬 세상을 만사가 한바탕 꿈이란 것을. 그는 죽어야 신분 차별이 끝나는 중인이었기에, 술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부귀를 맘껏 누렸던 사대부들은 늘그막에 ‘만사는 일장춘몽’임을 느꼈지만, 그는 차별받는 이 세상이 차라리 ‘한바탕 꿈’이기를 바랬다. 국수가 돼서도 벽을 넘지 못했던 17세기 중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07일 TV 하이라이트]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세계 최대의 축제 가운데 하나인 인도의 ‘쿰브멜라’가 열렸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힌두교도들이 7000만명에 달한다. 축제기간 강물에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윤회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생방송 60분 부모(EBS 오전 10시) 충동조절이 안돼 화가 나면 타인을 물어뜯는 아이. 이 아이는 상대방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아 화가 나면 그 즉시 상대방을 물어버린다. 아이에게 물린 곳은 심하면 1주일 정도 피멍이 들 정도라고 한다.7살인 이 아이는 왜 화가 나면 타인을 물어버리는 걸까?   ●뉴스추적(SBS 오후 11시15분) 양미경(가명)씨는 오늘도 자신을 두 차례나 성폭행했던 가해자로부터 협박편지를 받았다. 마지막 법정선고를 앞두고 가해자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편지 때문에 그녀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늘 불안에 떨고 있다. 늘어만 가는 보복범죄의 실상과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의 실태와 그 대책을 다룬다.   ●거침없이 하이킥(MBC 오후 8시20분) 창동물산 주식을 더 사자는 순재에게 준하는 기막힌 정보가 들어와서 병건제약으로 갈아탔다고 한다. 순재는 또 망했다며 준하를 구박한다. 풍파고에 새로 부임한 육상부 코치 윤기원. 기다리기 답답하다며 부임 하루 전날 나와서 훈련을 시킬 만큼 성격이 급한 기원은 민정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달자의 봄(KBS2 오후 9시55분) 오달자는 드디어 고민 끝에 강태봉에게 조심스럽게 사랑을 고백한다. 태봉의 꿈을 위해 달자는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까지 풀어 아낌없이 지원해준다. 그런 달자가 마음이 아파 태봉은 책임감을 느끼고 결국 로펌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위선주의 곁에 웬 낯선 신사가 나타나고 세도는 바짝 긴장한다.   ●순옥이(KBS1 오전 8시5분) 복례는 기섭에게 전처로부터 낳은 찬호를 데려오겠다고 말한다. 미조는 순옥의 일로 인호와 싸우고 둘의 사이는 조금씩 악화된다. 기순은 용칠이 하는 일을 말하지 않자 바람을 의심하고, 병조는 명자한테 다시 시작하자고 하나 거절당한다. 미조는 인호의 회사에 가던 중 복례와 함께 오는 찬호를 만나게 된다.
  • [사고] 본사 박홍기 도쿄특파원 부임

    본사 박홍기 기자가 5일 도쿄 특파원으로 현지에 부임했다. 박 기자는 이춘규 특파원과 임무를 교대한다.
  • 프로가 인정받는 사회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한지 만 3년이 다 돼 귀국이 임박했다. 일본의 구석구석을 `탐욕스럽게´ 돌아다니고 사람을 만나며 ‘경제대국 일본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탐구했다. 최근들어 거의 연일 지인들의 송별식을 받느라 분주한 가운데서도, 특히 일본인 지인들과의 송별회 때는 일본을 강하게 한 원동력 찾기에 열중이다. 그 결과 ‘어느 분야라도 프로가 인정받는 것이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일본의 큰 원천’이라는 1차 결론에 이르렀다. 학력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각 분야의 최고가 적절히 인정받아,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길러졌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종신고용이 무너지며 구조조정이 확산되고, 장기불황 후유증으로 수십·수백년 된 기업과 가게들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무너지면서 적지않은 프로가 위기를 맞았지만, 대부분 일본의 프로들은 건재하다. 일본에서 프로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 400년 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 일본 통일의 기반을 다졌던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 칼, 찻잔, 종 등 각 분야의 기술자들에게 “천하제일의 물건을 만들면 인정하겠다.”라는 천하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분야별 프로들이 대접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프로들이 대접받는 기반이 된 ‘천하제일주의’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온리 원(Only One·단 하나)’의 정신이 돼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제조업을 유지시키는 힘이 됐다. 치열한 프로(장신)정신의 현장은 열도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업체인 도요타자동차의 아이치현 본사 공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프로들의 묵묵한 자기정진을 볼 수 있었다. 오사카 북구 산토리의 연구 현장에서도 불가능의 상징인 푸른장미를 만들어낸 프로연구원과 만날 수 있었다.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는 400년 이상 전통을 이은 수많은 프로들이 일본 프로요리사 90% 정도가 사용하는 최고의 사시미(회) 칼을 만들어 냈다. 도쿄의 중소기업 밀집지역인 오타구의 한 중소기업은 세계 최고수준의 항공기 핵심 부품을 만들어내 놀라움을 주었다. 이밖에도 반도체, 기타, 로봇, 안경, 도자기, 전통종이 등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중소기업의 프로들이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 생계 걱정을 하지 않으며 엄숙하고 치열하게 한 우물을 파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제조업 외에도 프로들은 즐비하다. 법조인 출신이 법복을 벗은 뒤 자신이 즐기는 횟집을 경영하며 행복해 한다. 프랑스에서 문학을 전공한 이가 운영하는 라면집에 가보는 건 유쾌하다. 부친이 숨지면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가업인 승려가 되는 일도 예사롭지 않다. 이처럼 가업이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프로들이 생존할 수 있는 풍토는 “프로를 프로로서 충분히 인정한다.”라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틀 전 한 프로요리사가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던 와세대대학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프로를 중시하는 일본사회도 최근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서구식 합리주의, 신자유주의 등이 급속히 침투하면서다. 인터넷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일본 사회의 변화 속도를 더욱 끌어올리는 것도 프로들의 존재공간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일본도 서구적 신자유주의 가치가 맹위를 떨치며 ‘한 우물을 파는’, 즉각적인 성과물을 내지 못하는 프로들이 설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아직까지 일본 사회는 프로들이 생존해가기에는 비교적 행복한 토양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런 일본에 비해 한국은 조금씩 개선 중이긴 하지만 프로들이 아예 인정받지 못하는 풍조였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그렇다. 한국사회도 이제는 프로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다양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길이다.taein@seoul.co.kr
  • 학교이사장이 교장에 ‘매질’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지방의 한 사립학교 이사장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장을 흉기로 마구 때려 파문이 일고 있다. 2일 전남 H중학교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달 20일 오후.H중·고를 운영하는 C학원 A(62) 이사장이 지난해 말 부임한 H중 B(62) 교장을 학교 내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교직원들이 퇴근한 것을 확인한 A이사장은 문을 걸어잠근 뒤 소파와 탁자를 치우고 B교장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 엎드려 뻗쳐.”라고 지시했다.B교장이 이를 거부하자 “무릎을 꿇으라.”며 미리 준비한 나무 막대로 온몸을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학교 앞 문구점으로 겨우 몸을 피한 B교장은 전치 3주의 부상을 입고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A이사장은 행정실장 징계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요구에 순응하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B교장을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알려지자 전남교육청은 진상조사를 벌이고, 일단 A이사장을 경고 조치했다. 이 학교 교직원 22명은 전남교육청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A이사장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조처를 요구했다. 학교운영위원들과 동문회, 지역 발전협의회장, 새마을지도자협의회 등 13개 지역사회 단체들도 관할 경찰서에 탄원서를 냈다. 법인 이사들도 이사장의 용퇴를 건의했지만 A이사장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번 사건을 심각한 교권침해 사건으로 보고 교육청과 검찰에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촉구했다. B교장은 지난달 23일 A이사장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이 학교 한 관계자는 “사립학교법이 개정됐지만 이사장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에만 교육감이 직권면직시킬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면서 “이렇게 심각하게 교권을 침해하는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한국체육 뿌리를 다지자] (7)강원도

    [한국체육 뿌리를 다지자] (7)강원도

    ‘부족한 재원, 갈수록 줄어드는 학교와 학생수….’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강원도 체육이지만 강원도교육청 체육담당 장학사들과 일선 체육교사, 지도자들의 열의는 다른 지역을 앞선다. 지금까지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중상위권을 유지하며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원도내 학교는 몇몇 중소도시를 제외하고는 벽오지에 산재해 있어 체계적인 체육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또 적은 인구만큼이나 선수층도 얇고 체육분야에 지원되는 재정은 타 도시의 2분의1에도 못미치고 있다. 하지만 우수선수 조기 발굴을 위해 해마다 12월에 소년체전 평가전을 거쳐 선수를 선발한 뒤 이듬해 4월초까지 동계훈련을 시켜 기초유망주들을 길러내면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 선발된 선수들에게는 월 50만원씩 연간 10억원의 훈련비가 지원되고 있다.5년 전부터 실시한 이같은 평가전으로 강원체육이 중상위권에 오르는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특히 수영·육상·체조 등 기초종목을 바탕으로 사격·역도·레슬링·복싱 등 전략종목을 육성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수영에서 거두는 성적은 대단하다. 소년체전에서 해마다 3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괄목할만한 성적을 냈다. 국가대표인 자유형의 정애현(남춘천여중3), 배영의 주니어 상비군인 서희(홍천여중3)선수 등이 든든한 기둥으로 꼽힌다. 이들은 군단위에 하나뿐이고 그나마 정식 풀장의 절반인 25m 레인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섞여 훈련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적을 내고 있다. 홍천초교·홍천여중 수영부는 학부모들과 지도자들이 수영교실을 운영하면서 만든 이익금으로 선수를 육성하고 있다. 특히 시설이 전무한 다이빙에서도 메달이 이어지고 있다. 강원도청 소속으로 국가대표선수인 권경민(26)·조관훈(24)의 싱크로다이빙은 지난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값진 동메달을 따냈고 소년체전 금메달 리스트인 윤승은(봉의초교6)도 꿈나무다. 매트 위의 다이빙 훈련이 기적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강원체고의 수구팀도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값진 우승을 얻었다. 강원도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기본종목으로 채택해 육성하기 시작한 육상종목도 활성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소년체전 등 전국단위 대회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지만 높이뛰기, 경보, 투포환, 중장거리 성적은 기대 이상이다. 지난해 소년체전 높이뛰기에서 은메달을 딴 김태학(동해 광희중2), 경보에서 금메달을 딴 원샛별(원주 상지여중3), 투포환 전국기록보유자 신보미(강원체육중2·여) 등이 유망주로 꼽히고 있다. 지난해까지 성적이 좋았던 800,1500,3000m 중장거리 종목의 경우 올 들어 기록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이 흠이다. 체조는 예년에는 국가대표선수까지 배출했지만 학교규모가 작아지면서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같은 기초종목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강원도는 역도·태권도·사격·레슬링 등 비인기종목을 전략종목으로 육성하고 있다. 사격은 강릉 사천중학교 여자부 권총사격팀이 4,5년 전부터 전국을 재패해오고 있다. 지도자의 열정과 과학적인 훈련방식이 먹혀든 결과이다. 사천중학교 사격부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워낙 좋아 모두 국가대표 후보로 올라 있다. 올림픽 은메달 리스트(권총)인 진종오 선수도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세계적인 선수인 장미란을 배출한 역도종목도 원주·홍천을 중심으로 걸출한 선수들을 많이 길러내고 있다. 장 선수 외에 사재혁(홍천)선수가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레슬링은 함상진(강원중2) 선수 등이 유망주로 꼽히고 있다. 강원도교육청 노경섭 장학사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이 체육분야 전문 지도자들이 불모지 강원도체육을 이끌고 있다.”면서 “행정당국의 꿈나무 체육에 대한 좀더 많은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강릉 사천중학교 사격부 “장비도 시설도 열악하지만 사격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전교생이 50명에 불과한 시골 중학교 여학생들이 전국 권총부문 사격대회를 휩쓸고 있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중학교 사격부원 8명이 주인공. 사천중학교는 지난 2003년 전국대회에서 2차례 우승하면서 혜성같이 나타나 소년체전 등 해마다 6∼7회의 전국대회를 휩쓸고 있다. 사실상 권총부문 전국대회를 평정한 셈이다. 사천중 여자 사격팀이 이처럼 전국대회를 석권하고 있는 것은 1998년 이 학교에 부임한 오병옥(44) 교사의 남다른 열정과 과학적인 지도방법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사격을 해왔던 오 교사는 우선 들쭉날쭉한 실탄의 무게를 갖고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 한발 한발의 무게를 달아 연습을 하게 했다. 실탄 한개의 무게가 5.1∼5.5g으로 보통 0.1∼0.2g의 미미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000분의1까지 잴 수 있는 저울을 이용해 똑같은 실탄만을 사용하게 했다. 권총 한발을 쐈을 때 배출되는 공기의 양을 일정하게 하게 했다. 실탄의 속도를 내게 하는 탄속도 항상 일정하게 할 것을 주문한다. 오 교사는 열악한 훈련비도 아낄 겸 이같은 과학적인 훈련을 위해 권총 수리까지 직접 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무조건 몰아치며 훈련시키는 방법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동원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훈련을 거친 윤보배(강원체고1·여), 최승희(사천중3·여), 김선아(사천중3·여), 최대한(사천중1)이 국가대표 후보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 최연소 국대대표선수인 셈이다. 이들 가운데 최대한 선수는 청일점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대부분이 시골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 모범이 되고 있다. 오 교사는 선수들을 아예 자신의 집에서 합숙시키고 손수 밥까지 해 먹이고 있다. 시골학교의 어려운 재정 형편을 이겨보려는 궁여지책이다. 훈련도 수업시간은 피하고 이른 아침이나 방과후에 실시하면서 학과공부도 충실히 하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봉사활동과 노래수화발표대회도 갖는 등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도 가지고 있다. 오 교사는 “이번 봄학기부터 정선으로 발령을 받아 사천중을 떠나야 한다.”면서 “그래도 주말마다 선수들을 관리하면서 맥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매트서 다이빙 연습해도 팀워크로 ‘수영 강원’ 빛내” “선수층은 얇지만 수영종목만큼은 전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수영 강원’의 명성을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을 통해 떨치고 있는 중심에는 강원도수영연맹 이택원(42) 전무가 있다. 이 전무는 2004년,2005년 전국체전에서 금 14∼15개를 따내며 준우승을 이끌고 지난해에는 3위를 기록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소년체전에서도 2005년 금메달 3개를 비롯한 11개의 메달을 따낸 것을 비롯해 지난해에도 금 3개 등 18개의 메달을 따는 데 산파역할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처럼 강원도 수영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우선 지도자들의 열의를 꼽을 수 있다. 강원도가 고향인 수영 지도자들이 박봉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향토사랑 하나만으로 지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무는 “다른 광역도시보다 재정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고 다이빙종목은 시설이 아예 없어 매트 위에서 연습하다 경기를 앞두고 겨우 서울 등으로 전지훈련을 가고 있지만 팀워크 하나만큼은 으뜸”이라고 말했다. 수영장 시설도 춘천 단 한 곳에만 50m 레인이 있는 등 열악하지만 강원도교육청이 그나마 수영종목 등 전략종목 지원에 앞장서고 있어 많은 힘이 되고 있다고 귀띔한다. 강원도 대표선수들은 해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도 교육감기 수영대회’를 거쳐 1차로 24∼25명을 선발, 한겨울 동안 집중훈련을 하는 것도 좋은 성적을 내는 비결이다. 이 전무는 “11월쯤 동계훈련에 돌입해 이듬해 5월 소년체전 때까지 유일하게 50m 레인이 있는 춘천 국민체육센터 수영장에서 함께 기량을 키우며 경쟁하는 것도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과학 한국’의 희망-국가석학에 듣는다] (5)’광분해질량분석기’ 개발 성공한 김명수 서울대 교수

    [‘과학 한국’의 희망-국가석학에 듣는다] (5)’광분해질량분석기’ 개발 성공한 김명수 서울대 교수

    “우리 몸의 효소처럼 원하는 부분의 단백질만 골라서 분해할 수 있다면 난치병 극복에도 신기원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을 일컬어 흔히 ‘미다스의 손’이라 칭한다.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김명수(59·화학부) 교수는 화학 연구 분야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만하다. 분자의 구조와 반응성을 규명하는 연구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놓고, 새로운 과학 측정기기도 스스로 제작해 세계 화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지난달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선정한 ‘2006 국가석학(Star Faculty)’으로 뽑혔다. ●세계 최고 성능 ‘광분해질량분석기’ 개발 김 교수는 분자의 구조 및 반응과 관련돼 ‘질량분석법’의 기초과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연구에 주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세계 최초·최고 성능의 최첨단 ‘광분해질량분석기’를 직접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기기는 레이저를 이용해 단백질을 분해, 구조를 분석하는 장치다. 지금까지는 가스를 이용해 단백질 구조를 분석했다. “이온화시킨 단백질에 레이저를 쏘여 잘게 쪼갠 뒤 질량분석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하면 아미노산이 어떻게 배열돼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백질은 상당수가 적은 양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김 교수가 고안한 질량분석법은 미량의 시료를 갖고도 유용한 분석이 가능하다. “기존에는 레이저를 한 번 쏠 때마다 1개 정도밖에 이온을 못 만들었어요. 그러나 우리 기술은 레이저 한 번에 1000개를 만들죠. 분석의 효율성면에서 비교가 안 됩니다.” 특히 김 교수는 ‘같은 물질이라도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 형태에 따라 화학반응이 달라진다.’는 가설을 50년 만에 최초로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이 연구결과는 영국의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 첫 ‘단백질 반응속도 계산·측정 기기’ 발표 예정 김 교수는 연구대상을 단백질이나 핵산 같은 생물고분자로 넓혀가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엔 단백질의 반응속도를 재는 측정기기와 그 속도를 이론적으로 계산해내는 소프트웨어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크기가 큰 단백질은 1개의 반응속도를 분석하는 데 최장 8년 정도 걸린다. 그러나 김 교수가 개발한 장치로는 단 15시간 만에 반응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다. 이 연구 성과는 곧 학계에 발표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시간을 5000분의1로 줄여 분석하는 새로운 수학체계를 개발했다.”면서 “결과는 똑같이 나타나면서도 오차가 5%밖에 안 돼 실용화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난치병 치료제 개발 기반 제공 김 교수는 “바이오기술이 발전하려면 생물분자의 질량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포속 미량의 단백질을 분석할 수 있는 연구기술이 확보되면, 의학적 응용연구에 활용돼 난치병 등 진단과 치료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단백질 등 세포 반응 분석을 통해 치료약이 제대로 먹혀드는지 파악해 약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면서 “만일 인공적으로 단백질을 합성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면 암 등 난치병 치료제 개발에 돌파구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자연대·공대 교수 20%밖에 지원 못받아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인적·재정적 자원은 응용분야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기술지원체계가 과학기술부 혁신본부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개인연구 지원은 학술진흥재단, 집단연구 지원은 과학재단으로 분리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개인연구 위주의 기초과학 연구비 지원 규모가 크게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과학재단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 자연계와 공대의 경우도 20%밖에 연구비 지원이 안 된다고 한다.”면서 “결국 올해는 지원을 받고 내년엔 못 받아 연구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아 ‘목적성’ 있는 기업체 지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며 개선을 당부했다. ■ 김명수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를 수석 입학해 1971년 수석 졸업했다.1976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쳤고, 코넬대와 케이스웨스턴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1979년 서울대 화학과 교수로 부임했다.1995년 우수논문상과 ‘제5회 한국과학상’을 수상했다.1995년부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글 사진 이영표 사진 유재림기자 tomcat@seoul.co.kr
  •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정희성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정희성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문단의 어른으로서 뜻하지 않게 후배들의 반발에 밀려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상황을 맞게 된다. 오직 한길로 35년을 봉직하던 교직에서 정년퇴임을 한다.’이런 상황이라면 시인이 아니라도 섭섭하거나 아쉽거나, 혹은 착잡해지거나 감회에 젖어 많은 말을 쏟아낼 것이다. 그러나 정희성(62)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이사장은 그러지 않았다. 작가회의 명칭 변경이 무산된 데나, 평생을 지켜온 일터를 떠나게 된 데 대해서 시인은 의외로 평화롭고 담담했다. 맑은 얼굴에 자분자분한 말투. 서울 아현동, 난방도 잘 되지 않는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난 정 이사장은 과작(寡作) 시인답게 말수도 적었다. ▶정관 개정이 무산됐는데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무산이 아니라 찬반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걸려 결정을 못한 것이지요.24일 임시이사회를 열어 명칭개정 소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거쳐 결론을 내겠습니다. ▶작년 1월 이사장에 취임했을 때는 ‘민족문학’이란 용어를 떼는 데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셨는데 그 사이 생각이 변한 겁니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분단 상황에 있기 때문에 민족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 측면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해 온 결과, 작년 10월 금강산에서 남북한과 해외문학인들을 포괄하는 ‘6·15 민족문학인협회’가 결성됐습니다. 민족문학에 분명한 전기가 마련된 셈이지요. 그래서 민족문학은 이 틀에서 다루게 두고, 우리는 명실공히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단체인 만큼 포용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침 젊은 작가들도 그런 생각을 해왔던 모양입니다. ▶‘민족문학’이란 이름으로는 전체를 포용할 수 없을까요. -작가회의는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출발했고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 지 2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해 온 이미지 때문에 국내에서는 ‘강성’‘좌파’로 몰리는 반면,‘세계작가와의 대화’ 등 국제교류를 할 때는 ‘내셔널’이란 명칭 때문에 극우 민족주의단체로 오해받아요. 또한 요즘 젊은 작가들은 ‘민족문학’개념으론 포섭될 수 없는, 너무도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수용해야 합니다. 총회 석상에서는 ‘문학은 포기해도 민족은 포기 못한다.’는 발언이 나왔지만, 문학이 민족문제만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또 문학을 버리고 어떻게 민족문제를 얘기할 수 있을까요. ‘민족문학론’을 주창했던 백낙청 상임고문이 명칭개정에 찬동하고 있는 이때, 일부 후세대 작가들이 이에 집착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 백 교수는 군사독재 시절 민족적 위기의식의 소산으로서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민주주의 쟁취와 민족통일을 양대과제로 내세운 한시적 개념이었다. 백 교수는 이제 진영개념으로서 민족문학론은 내실을 잃었다고 보고 새롭게 ‘한국문학론’을 제시한다. 민주화는 완수됐고,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으로 분단체제도 극복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진정한 국민문학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다는 것이다. 최근 프랑스에서 잠시 귀국했던 작가 황석영은 작가회의에 대해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라고 일갈하고,“분단체제는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라는 확장된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작가는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절차상의 문제도 있었던 만큼 심도있는 논의와 우편투표 등의 방법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 가겠다고 했다. ▶정든 교직을 떠나시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교직 35년, 문단 37년이니 두 경력이 비슷합니다. 그동안 제자 1만명, 시집 4권에 결혼하여 아이 둘을 길렀으니 행복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엄혹한 시기에 용의주도하게 살았다고도 생각됩니다.70∼80년대 주목받던 저항시인으로 1979년 세계시인대회 시위,1980년 지식인선언 등에 참여하거나 잡혀갔는데도 자신은 훈방되거나 해직되지 않았다. 아마 대학교수가 아니라 고교교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자신이 쓴 시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고무돼 시위에 나서고, 한 여고교사는 시 ‘아버님 말씀’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가 선동죄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괴로움이었다. 용의주도하게 살았다는 말은 이런 책임의식 때문인 듯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도 고교교사로 남겠다며 학위논문을 내지 않았다면서요. -대학교수가 희망이기는 했어요. 그러나 1972년 논문만을 남기고 상아탑에서 나왔을 때는 가파른 유신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문학적 관심이 걷잡을 수 없이 달라졌고, 이런 관심에 대한 해답이 아닌 다른 논문은 쓰고 싶지 않아 포기한 거지, 그렇게 깊은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문예창작과가 많이 생기면서 기회가 또 있었지만 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후회되지 않느냐니까 “대학교수가 되면 시가 안 좋아지더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사장의 시에는 그 시대의 현실과 급소가 생생하게 표출됩니다. 그런데 요즘의 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무뎌지신 건가요, 생각이 달라지신 건가요. -가파른 시대에는 쓰지 못했던 사랑에 관한 시들이 많아졌습니다.2000년대 9·11테러 이후에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많이 담고 있지요. 무뎌진 점도 있겠지만 관심의 확장으로 봐 주기 바랍니다. 독자들도 옛날 독재정치에 항거할 때처럼 주먹 쥐고 하는 얘기들은 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또한 현실 문제는 그 시대의 가장 젊은 문인들에 의해 잘 포착될 것입니다. 퇴임식 때 다섯번째 시집을 내 동료교사들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결국 편수를 못메워 싱거운 기념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백령도를 다녀와 40행이나 되는 시 ‘몽유백령도’를 썼다. 짧아지던 시가 예전의 호흡을 다시 회복해가는 듯한 느낌이라 기쁘다. 문학은 인간다운 삶을 살자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 이사장이 저항의 시를 썼던 것도, 이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것도, 작가회의가 명칭 변경을 논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히 진행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희성 그는… 1945년 경남 창원 출생(만 62세). 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충남, 대전, 이리, 여수를 다니며 살았다. 용산중고등학교와 서울대 국문과를 나왔다.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탁목조’가 당선돼 등단했다.1972년 서울 숭문고 국어교사로 부임해 35년간 재직하고 그제 정년퇴임했다. 글을 쓸 생각이면서 국문과에 입학한 것은 고전문학을 공부해 전통의 바탕에서 창작을 하리라는 계획에서였다. 첫 시집 ‘답청’(1974)’은 그의 생각대로 ‘고전적인 전아함’을 갖춘 시들로 꾸몄다. 그러나 1972년 유신체제에 접어들고 친구들의 해직과 투옥을 접하면서 완전히 다른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나온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에는 칼칼한 저항의 목소리가 담겼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로 시작되는 시 ‘저문강에 삽을 씻고’는 어두운 현실을 처절한 서정에 담아 형상화한 대표작이다.“증오에 대해서/나도 알 만큼은 안다/이곳에 살기 위해/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싸우다 죽은 내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란 시구처럼 ‘공격적이고 거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자신은 시대가 현실주의자를 만들었지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자라는 생각이다.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2001년)는 이런 면모를 엿보게 한다.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수상.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부터 반독재 문학단체에 몸담아 2006년 1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 되었다. yshin@seoul.co.kr
  • 세계은행, 부패연루 기업·개인 공개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세계은행(World Bank)은 6일(현지시간) 국제 개발사업 지원 과정에서 부패에 연루된 기업과 개인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고 발표했다. 세계은행은 이날 2년여에 걸쳐 계속해 온 부패 조사를 끝내면서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 업무와 관련,58개 기업과 54명의 개인이 부패에 연루됐다고 공개했다. 공개된 명단의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와 알바니아, 중국 등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는 개발도상국의 기업과 개인이었으며, 해당 국가들의 개발 사업에 참여한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의 기업도 포함됐다. 한국이나 북한의 기업이나 개인의 명단은 포함되지 않았다. 세계은행 고위관계자는 “한국은 선진국으로 분류돼, 북한은 국제금융제도에 편입되지 않아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세계은행은 블랙리스트에 공개된 기업과 정치인 등 개인 이외에 이번 조사로 세계은행 직원 33명의 비리도 드러났다면서 이들이 응분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과 개인은 앞으로 세계은행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패는 뇌물과 리베이트, 지원자금 전용,‘나눠 먹기’를 비롯한 입찰 비리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폴 울포위츠 총재는 성명에서 “지원금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데 대해 은행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지난 2005년 6월 미국의 국방부 부장관을 역임한 울포위츠 총재가 부임한 뒤 ‘거버넌스 강화’ 차원에서 부패 조사에 초점을 맞춰왔다.dawn@seoul.co.kr
  • [정윤수의 오버헤드킥] 모처럼 축구다운 축구… 감독몫은?

    모처럼 축구다운 축구였다. 대표팀 경기라서 유독 각별한 것이 아니라 국내 시즌은 두 달 가까이 휴식중이고, 모처럼 눈에 익은 선수들의 열정적인 모습 때문에 새벽이 지루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복기할 것이 많다. 핌 베어벡 감독이 꾸준히 실험해온 4-3-3 포메이션이 조금씩 기틀을 잡아가고 있고, 김남일-이호의 중원 장악도 단순히 상대의 흐름을 끊는 차원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경기 전체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선수로 말하자면 단연 이천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독특한 스타일과 튀는 언행으로 양면의 평가를 받던 터다. 뛰어난 스포츠 선수가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의 ‘스타’가 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스타라고 하면 결국 ‘이미지 놀이’에 다를 바 아닌데 이천수는 그러한 독특함으로 인해 팬도 많고 안티팬도 많다. 어쨌든 그는 이번 평가전에서 강력한 승부욕을 지닌 선수라는 것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골키퍼 김용대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승부욕’을 저돌적인 공격성이라는 점에서만 보면 김용대의 ‘범생이’ 같은 외모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벤치를 지켰다. 김병지, 이운재는 넘기 어려운 산이었고 네 살이나 어린 김영광은 과감한 스타일로 그의 위상을 훌쩍 넘어버렸다.지난해 8월 베어벡 감독이 부임한 뒤로 지금까지 김용대는 단 한 차례도 실력에 걸맞은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네 차례의 선방을 포함해 90분 동안 안정적으로 골문을 지킨 그는 이번 평가전의 확실한 수확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번 평가전의 최대 수확은 베어벡 감독의 몫이었다. 그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대표 선수 차출을 둘러싸고 K-리그 구단과 벌인 신경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그런데 이번 평가전이 생생히 증명하듯 굳이 잦은 차출과 긴 합숙 훈련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한국, 일본, 러시아 등에서 런던으로 속속 모여든 대표 선수들이 적절한 수준의 연습과 호흡으로도 충분히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선수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지난 몇 해 동안 부쩍 성장했다. 감독은 더 이상 맨땅에서 옥석을 골라야 하는 처지가 아니다. 이제 K-리그가 시작되면 베어벡 감독으로서는 합숙할 만한 시간도 별로 없고, 각 구단의 입장도 완강해서 여러모로 답답할 것이다. 그러나 K-리그가 길러낸 유능한 인재들이 그의 든든한 자산임을 이번 평가전을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리그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장한 소중한 구슬들을 자신의 소신대로 잘 꿰는 것이 베어벡 감독의 몫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대표팀 감독은 늘 그러한 역할을 맡는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특파원 칼럼] 단카이세대 소동의 함정/이춘규 도쿄 특파원

    기자가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한 2004년부터 일본에서는 ‘단카이(團塊)세대’의 ‘2007년 문제’ 소동이 일어났다. 단카이 세대는 일본의 1차베이비 붐 세대인 1947년생에서 49년생까지를 일컫는다. 여기에 해당하는 680만여명이 덩어리처럼 잘 뭉친다는 의미로 70년대 말부터 사용됐다. 이들이 순차적으로 60세 정년을 맞는 2007년부터 3년간 대량퇴직, 기술전승 불충분, 퇴직금 일시지급으로 인한 재무구조의 위기 등이 온다며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소동은 용두사미격으로 끝날 것 같다. 일시적 대량퇴직, 퇴직금 쟁탈전은 물론 없고 이들을 지방으로 유치하려는 지자체의 노력도 시들해졌다. 왜일까. 우선 통계상의 착시 문제다. 단카이세대는 650만∼700만명 정도다. 다른 연령대보다 최대 20%(약 20만명) 정도 많다. 그런데 같은 세대 일본 여성들은 이미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서 거의 퇴직했다. 따라서 실제 퇴직 대상은 절반인 300만명 정도에 그친다.300만명도 일시퇴직은 아니다.47년생 근로자는 100만여명인데 이들 가운데 농림수산업과 자영업자 등을 제외하면 숫자는 더 줄어든다. 지난해 4월 ‘개정 고령자고용안정법’이 발효돼 기업들이 올해부터 63세까지 고용연장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따라서 단카이세대들은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적어도 63세까지 일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도요타자동차(63세까지), 혼다(〃), 소니(〃), 닛산(65세까지), 마쓰시타전기(〃) 등 대기업은 퇴사자가 희망하면 재고용한다. 올해 실제 직장을 떠나는 47년생은 20만명 안팎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2007년 문제는 정작 2007년을 맞아서는 감지하기조차 어렵다는 얘기다. 바야흐로 단카이세대 문제는 ‘2010년 문제’나 ‘2012년 문제’로 연장됐다. 또 점진적으로 퇴직이 이뤄지기 때문에 단카이세대 문제가 착각이거나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단카이세대의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음모론마저 나온다. 일본의 정치·언론·문화·학계의 주도층인 단카이세대가 영향력을 동원,2007년 문제를 과장시켰다는 책임론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의 방조도 지적된다. 국민연금 수령 대상을 60세에서 65세로 올리면서 단카이세대 등의 연금지급 공백을 우려, 단카이 소동에 편승해 기업의 정년연장을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시에 대량퇴직’이란 2007년 문제의 대전제가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2007년 문제는 일본사회의 비정규직 문제 등 청년취업이나 구조조정, 실업자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조장됐다는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2005년 정부 기준 일본의 전 고용자 5047만명 중 비정규직은 1633만명으로 30% 이상이다. 비정규직이 35%를 넘는다는 민간통계도 있다. 이들의 연수입은 정규직의 반, 평생수입은 대체로 3분의1에 그치고, 노동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특히 비정규직은 ‘취직빙하기’를 거친 최대 500만명의 프리터(프리+아르바이터) 등 30세 전후가 주류다. 경기가 호전돼 신규 취업이 늘었다고 하지만 정규직은 45% 정도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일본의 청년취업·실업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년 연장으로 기업들이 신규 고용을 못 늘려 청년취업 희망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인건비 추가부담 등의 후유증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2007년 문제는 전체인구의 5%에 그치는 단카이세대를 위해, 근로자의 30% 이상인 비정규직, 특히 청년취업자를 희생시켰다는 책임론이 나온다. 지난 3년간 비정규직과 구조조정 실업자는 급증했지만, 단카이세대 소동에 묻혀 별 조명을 못 받았으니 말이다. 일본의 단카이세대 소동에 묻힌 청년취업난, 비정규직 급증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과잉에 묻혀 이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춘규 도쿄 특파원 taein@seoul.co.kr
  • LG생활건강 “잘 나가요”

    LG생활건강 “잘 나가요”

    LG생활건강의 최근 2년간 ‘실적 약진’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업이익은 2년전에 비해 두배 가까이 뛰었고, 주가는 3만원대에서 무려 12만원대로 올랐다. LG생활건강은 25일 지난해 매출 1조 328억원, 영업이익 945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6.7%,34.3% 증가했다고 밝혔다. 최근 2년 사이 영업이익은 73.7%(544억→945억원), 주가는 355%(2만 8000→12만 7500원) 급신장했다. 이같은 비약적 성장의 배경에 2005년 1월 ‘구원투수’로 투입된 차석용 사장이 있다. 업계에서는 차 사장의 경영 비결을 주목하고 있다.LG생활건강은 2004년에 마이너스 성장(매출 1조 571억→9526억원, 영업이익 694억→544억원)에 시달렸으나 차 사장이 부임하면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회사 관계자는 “차 사장은 부임 뒤 ‘선택과 집중’을 모토로 삼아 수익성이 없는 사업은 대거 구조조정하는 한편 고가 화장품 등 프리미엄 제품에 영업력을 집중하면서 실적 개선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레뗌 뜨레아 헤르시나 등 부실 브랜드를 단종시키고 화장품 직접판매을 중단하는 등 품만 많이 들고 수익이 나지않는 사업은 모두 정리했다. 대신 경쟁사들이 진입하지 않은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 브랜드 자산 축적에 열을 올렸다. 고가 화장품인 오휘(2005년 대비 2006년 매출 46%↑), 후(79%↑), 수려한(145%↑) 등 전략 브랜드들에 집중하면서 화장품 부문 매출이 급증했다. 생활용품 부문의 경우에서도 프리미엄 제품 매출 구성비가 최근 65% 수준까지 올라갔다.2006년 전체 매출은 전년 대비 6.7% 늘었는데, 이중 화장품 부문은 전년 대비 10.6%, 생활용품 부문은 전년 대비 5.5% 늘었다. LG생활건강은 올해에도 ‘오휘 더퍼스트’,‘후 진율’ 등 프리미엄 매출비중을 계속 늘려 매출 10% 이상, 영업이익 25% 성장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생활용품 부문도 프리미엄 모델을 정착시킨다는 포부다. 그러나 매출 성장에 비해 주가가 지나치게 높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교남동사무소에 수영장

    동사무소에 웬 수영장? 서울 종로구(구청장 김충용)는 25일 교남동사무소 청사 지하에 20m짜리 레인 4개를 갖춘 실내수영장을 만들어 다음달 1일 문을 연다고 밝혔다.요즘 웬만한 구청이나 대형 건물의 경우 수영장이나 헬스시설 등을 갖추고 있지만, 동사무소에 수영장이 들어선 것은 초유의 일이다. 종로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수영강습반 43개팀을 편성하고 국가대표급 코치진에게 수영 지도를 맡기기로 했다. 시설은 지하 1층에 탈의실, 샤워실, 사무실 등이 있고 지하 2층에 길이 20m×폭 9.6m×수심 1.2m의 풀장이 있다. 사실 수영장은 2년전 교남동사무소의 새 청사를 지을 때 함께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수영장 골격을 갖추고도 마땅한 운영사업자를 찾지 못해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7월 부임한 권종수 부구청장이 ‘꼭 수영장 운영을 공공사업자가 맡아야 하느냐.’며 민간 사업자로 눈을 돌렸고 결국 ‘국민생활체육 고양시 수영연합회’가 수영 보급의 명분을 살려 위탁운영자로 나서면서 문을 열게 됐다. 고양시 수영연합회는 2004년과 2005년에 주부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수영팀을 이끌고 울릉도∼독도 94㎞ 종단에 성공한 경력을 지닌 단체.1급 경기지도사 자격증을 지닌 국가대표급 강사들이 수영강습을 맡기로 했다. 일주일에 3회 강습이며 이용료는 월3만 5000원∼4만 5000원. 오는 22일부터 방문접수를 받는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단 한명도 학원 다니지 않는 학교 만들렵니다”

    “단 한명도 학원 다니지 않는 학교 만들렵니다”

    “단 한 명의 학생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올 3월 서울 묵동에 첫 개방형 자율고로 문을 여는 원묵고 공모교장으로 부임하는 박평순(56) 교장은 22일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지역사회가 원하는 학교를 만들어 보이겠다.”며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개방형 자율고는 학생선발권과 교원 인사권, 교육과정 편성·운영권에서 교장에게 자율권을 주는 형태의 학교다. 지난해 말 전국에서 선정된 자율고 4곳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 지역 학교다. ●철저한 맞춤식 수업… 과목별 강사 활용 박 교장이 밝힌 학교 운영구상은 단 하나. 학생과 학부모,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전인교육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가 인성교육을 시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다양한 인성교육을 통해 학습동기가 올라가면서 오히려 입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되, 이를 바탕으로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원하는 실력까지 갖추게 하겠다는 복안이다. 그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학교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 우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부터 개선할 생각이다. 학생 개개인 맞춤식 수업을 위해 영어와 수학 교과에는 상·중·하의 수준별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기초가 부족한 ‘하’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10명 안팎으로 구성해 철저한 맞춤형 개별지도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주요 교과는 수준별 보조교재를 만들어 활용하고, 학생들의 교과 선택권을 최대한 늘려주기 위해 과목별 강사도 대거 채용할 방침이다. ●전인교육 활성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인재로 전인교육도 활성화한다. 서울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축제와 체육대회 등 교내외 행사를 부활하고, 지방 농촌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어 농촌체험 및 봉사활동도 적극 펼칠 생각이다.‘공부벌레’가 아닌 실력도 갖추면서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취지다. 그는 학교 운영과 관련해 “다행히 지역사회의 관심이 커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그의 의욕을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공모교장으로 결정된 직후에는 중랑구 지역 주민들 모임인 ‘원묵고 좋은학교 만들기 추진위원회’의 요구로 비공식 ‘인사 청문회’까지 받았다. 당시 주민들은 “중학교 교장이 와서 뭘 하겠느냐.”며 부정적이었지만 “부모들이 원하는 학교로 만들어 주겠다. 단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 믿어달라.”는 박 교장의 말에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새로운 학교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박 교장에게도 고민은 있다. 바로 돈이다. 개방형 자율고로 지정돼 학교 운영비 외에 별도로 1억원을 지원받지만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에도 추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중복 지원은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랑구청에서도 적극 지원을 약속했지만 재정자립도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전폭적인 지원은 어려운 실정이다. 박 교장은 지난해 11월 1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모교장으로 뽑혔다. 서울대 사범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사대부고 교사,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상계고 교감 등을 거쳐 2005년 9월부터 용마중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다양한 인성교육을 강조하면서도 5·6차 교육과정 당시 수학교과서를 집필하고,10년 이상 진학지도를 맡아온 입시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글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중국은 편안한 이웃”

    닝푸쿠이(寧賦魁) 주한 중국대사가 적극적인 설득형으로 변신했다? 한국 부임 1년 5개월째를 맞는 닝 대사가 딱딱한 외교사절의 전형에서 벗어나 ‘친근한 이웃, 중국’을 선전하는 홍보맨으로 나섰다. 지난 18일 ‘21세기 동서포럼’(공동회장 김한규 전총무처 장관·오상현 손해보험협회 회장). 초청강사로 나선 닝 대사는 낮은 자세로 한국을 치켜세우고 두 나라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시간여에 걸쳐 유창한 한국말로 ‘편한 이웃, 중국’을 강조했다.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이날 강연 주제는 ‘15주년을 맞는 한·중관계.’“그동안 중국은 한국의 현대화 성과를 배우기 위해 힘을 다해 왔다.”고 운을 뗀 뒤 최근 고개를 든 중국위협론을 의식한 듯 중국 발전이 한국에 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느라 애를 썼다. 이날 초청 강연에는 박세직 재향군인회 회장,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 이은영(열린우리당)의원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특파원 칼럼] 중국에서 수(數)를 좇지마라/이지운 베이징 특파원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논어 구절에서 석 삼(三)자를 아라비아 숫자 ‘3’으로 받아들이는 중국인은 많지 않아 보인다.3인행(三人行)은 ‘여러 사람이 있으면’쯤으로 이해되곤 한다. 굳이 숫자로 표현하자면 ‘2이상의 여럿’이다.3은 그저 갖다붙인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 천길 낭떠러지나 석자 수염에서처럼. 중국에서 수를 수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많은 외국인이 ‘숫자’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베이징에 파견된 한 국내 유력 연구기관 연구원의 말.“부임 이후 본사에 서울과 같은 수준의 정밀한 보고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통계와 숫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사관 관계자나 공기업, 대기업을 비롯한 각계 각급 주재원들도 숫자에 우는 일이 많다. 기획기사를 준비하며 전화를 돌려보면,“미안하다. 그 통계는 우리도 구할 수 없다.”는 답변을 자주 듣게 된다.“본부에서 자꾸 통계와 숫자를 요구하는데, 매번 그런 건 없다고 하자니 혼자 바보되는 느낌”이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국 사람이 수에 둔감해서일까? 그건 오산이다. 수천년 주판을 사용해오며 ‘세계적인 상인’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다. 수와 통계를 줄줄이 꿰고 있는 관료는 한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누군가 수와 통계를 언급한다면, 그 관료는 상당한 ‘유력 인사’로 봐도 좋다. 만약 수와 통계를 물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상대방은 그에 답할 권한이 없거나, 아예 해당 정보로부터 제외된 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어떤 담당자들은 관련 통계를 알면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통계를 거론하는 것이 자기 상사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전문가는 분석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수와 통계는 ‘힘’과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중국에서의 수는 기묘하다. 십년여간의 국가 통계가 한순간에 뒤바뀌기도 한다. 지난해 이맘때쯤 1993∼2004년 경제성장률이 매년 평균 0.5%p씩 일률적으로 상향 조정됐다. 개인부문과 서비스산업 규모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설명과 함께. 얼마전에는 광저우(廣州)시는 국내총생산(GDP)이 1만달러를 넘었다는 기사가 나오자 즉각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주민을 포함하면 8000달러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과거 성과 과시를 위해 수를 부풀린 것과는 판이한 양상이다. 중앙의 ‘균형 발전’ 기조에 발맞추기 위한 겸손이다. 북한의 핵실험 국면에서 중국이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는 외신은, 그해 9월치 중국 해관(海關)의 관련 통계가 없었던 데서 비롯됐다. 한참 뒤에 9월에도 중유는 공급됐다는 기사가 뒤이었고, 진실은 묘연해진 가운데 중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정부 통계가 아무 이유없이 이빨 빠진 것처럼 빠지곤 하는데….”라고 했다. 진실을 뒷받침해야 할 숫자가 도리어 진상을 흐리게 하는 일은 이밖에도 많다. 지난해 처음으로 아파트 공실률이 공개됐다.‘베이징 미분양 주택 60%, 부동산 투자 낭패’라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 투자자들이 경악을 했을 터이나 60%라는 숫자는 공실률 개념차에서 나온 착시현상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의 아파트 분양은 개발상 마음대로다. 좋은 층수 방을 잡아놓고 있다가 값을 올려 파는 수가 많다. 중국의 부동산 정책 관계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높은 공실률 발표로 겁을 준 뒤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는 정부 정책에 호응하려다 보니 한쪽 눈을 감은 건 아닐까. 올 한해도 많은 숫자가 중국에서 쏟아질 터이다. 애써 수를 구하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수의 꽁무니를 좇는 일은 정말 위험하다. 이지운 베이징 특파원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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