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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삼성그룹(하)] 최지성, 이 부회장의 경영수업 ‘멘토’… 4대 사업 요직 두루 거쳐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삼성그룹(하)] 최지성, 이 부회장의 경영수업 ‘멘토’… 4대 사업 요직 두루 거쳐

    3세 체제를 맞아 삼성그룹은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삼성 ‘토박이’와 외부 인재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삼성전자, 해외 사업부, 핵심 계열사에 고루 분포해 있다. 이 부회장 스타일에 맞게 국제 감각을 겸비한 ‘해외파’들도 뜨고 있다. 최지성(63) 미전실장(부회장)은 3세 체제를 상징하는 이 부회장의 대표 측근이다. 2010년 1월 삼성전자 대표이사(CEO·사장)를 맡아 최고운영책임자(COO·부사장)였던 이 부회장과 삼성전자를 투톱 체제로 이끌었다. 2012년 6월부터 미전실장을 맡아 매끄러운 3세 승계를 위한 마무리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올 5월 이건희 회장 입원 이후 매일 아침·저녁 두 차례 병상을 찾아 의식이 없는 이 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할 정도로 삼성그룹과 삼성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2001년 이 부회장이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돌입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해 ‘멘토’, ‘가정교사’로도 불린다. 이 부회장은 2007년 1월 미국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최지성 당시 정보통신총괄 사장의 기자간담회 자리에 깜짝 방문해 친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삼성 특검 결과가 발표된 2008년 4월 이후 이 부회장의 ‘백의종군 시절’에도 해외 출장에 동행하며 줄곧 옆을 지켰다. 최 실장은 삼성전자의 4대 사업분야인 반도체, 모바일, TV, 디스플레이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무후무한 경력이다.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1981~1985년 회장 비서실(현 미래전략실) 기획팀에서 근무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삼성전자로 소속을 옮겨 삼성전자 반도체판매사업부장(1996~1998년), 디스플레이사업부장(1998~2003년), 디지털미디어 총괄(2003~2007년), 정보통신총괄(2007~2009년)을 맡았다. 외유내강형으로 승부근성이 독하기로 유명하다.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1000 페이지에 달하는 반도체 기술교재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해 반도체 10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는 일화도 자주 회자된다. 세계 각지에서 디지털 제품을 판다고 해서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최 실장 밑에는 이른바 ‘부산고 3대 천재’라는 장충기(60)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있다. 장 사장은 그룹 내 기획과 정보수집, 분석 등의 업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실무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삼성 컨트롤타워의 핵심이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삼성전자의 이상훈(59) 경영지원실장·이인용(57) 커뮤니케이션 팀장·김상균(56) 법무실장 등 경영지원파트 3인방은 이 부회장 ‘친위대’다. 삼성전자의 곳간을 책임진 최고재무책임자(CFO) 이상훈 사장은 1982년 삼성전자 경리과에 입사해 주로 재무파트에서 근무한 ‘재무통’이다. 1999년 2월~2002년 1월 삼성전자 북미총괄 경영지원팀장을 맡아 당시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던 이재용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전무를 단지 2년 만인 2007년 부사장, 2010년 사장으로 고속 승진해 삼성 3세 체제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다. 이 부회장의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인 이인용 사장은 MBC기자 출신으로 2005년 홍보팀장(전무)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올 5월 현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실시된 사장단 인사에서 김상균 사장과 함께 미전실에서 삼성전자로 옮겨왔다. 보통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일정은 미전실 커뮤니케이션팀에서 챙겼지만, 올 8월 올림픽 후원 연장, 9월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등 이 부회장 일정을 삼성전자 커뮤케이션팀에서 맡고 있다. 이 사장은 대외 소통을 강화해 삼성 비자금 사건 등으로 추락한 그룹 이미지를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 등을 맡아 성과를 내고 있다. 22년 판사경력의 김상균 사장은 2005년 부사장으로 삼성에 발을 들여 삼성특검에 대응한 측근이다. 김용철 전 구조본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이후 인선이 까다로워진 법무조직 책임자를 10년째 맡고 있다. 김 사장이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이후 법무실은 국내법무팀, 해외법무팀, 준법지원팀을 비롯해 IP센터까지 산하조직으로 거느리게 됐다. IP센터는 2010년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과의 특허 전쟁을 담당하고자 대표이사 직속으로 만들어졌다. 이종석(51) 삼성전자 북미총괄(부사장), 박재순(54) 중국총괄(부사장), 데이비드 은(47) 오픈이노베이션센터 부사장 등 ‘해외파’들도 뜨고 있다. 이 부회장이 국제감각을 중시하고 있어 앞으로 요직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사장은 올 7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린 ‘앨런앤코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동행하는 등 이 부회장의 북미 지역 동선을 함께하고 있다. 미국 코넬대 출신으로 P&G(샴푸제조사), 캘로그(시리얼제조사), 존슨앤드존슨(제약사) 등에서 근무하다 2005년 삼성전자에 합류했다. 박재순 부사장은 삼성전자 미국판매법인 상무를 맡고 있던 2007년 삼성전자 CCO(최고고객책임자)였던 이 부회장이 미국 등 해외 유력인사들과 교류할 때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입사한 데이비드 은 부사장은 이 부회장과 하버드대 동문으로 타임워너 통신그룹장을 맡았다. 이 부회장의 야심작으로 2012년 신설된 오픈이노베이션센터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계열사 사장단 중에는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이 부회장 시대 가장 각광받을 사람으로 꼽힌다. 멕시코, 미국 등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유학파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이듬해 그만뒀고, 제너널일렉트릭(GE)에서 18년간 근무했다. GE에너지서비스 글로벌 영업총괄 사장 등을 지냈다. 2007년 삼성전자 고문으로 복귀한 뒤, 삼성전자 프린팅 사업부문, 삼성SDI, 삼성카드에 이어 삼성물산에서 네 번째 사장직을 지내고 있다. 삼성카드로 있을 때 ‘숫자 카드’를 출시해 파란을 일으킨 삼성의 대표 혁신가다. 미전실에서는 정현호(54) 인사지원팀장이 눈에 띈다. 이 부회장과 1990년대 말 함께 미국 하버드 대학을 함께 다녔다. 올 초 총장추천제로 지역차별 등의 논란을 일으키며 삼성그룹 채용제도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직후인 올 5월 인사지원팀장에 임명됐다. 주로 감사·재무 파트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슈틸리케호’ 골키퍼 패스 연습이 우선

    중동 원정이면 도착한 날 휴식을 취하는 게 축구대표팀이었다.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에서 55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슈틸리케호는 달랐다. 11일(이하 현지시간) 낮 12시 요르단 암만에 여장을 푼 대표팀은 오후 5시 45분부터 암만 근교 자르카의 프린스 무함마드 국제경기장에서 울리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 첫 원정 훈련을 소화했다. 30분 몸을 푼 선수들은 후반 30분 골대를 하나만 두고 수비와 공격으로 나눠 미니게임을 소화했는데 몸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다. 손흥민(레버쿠젠)과 기성용(스완지시티)을 제외한 유럽파의 입지가 줄어든 데다 국내파에 박주영(알샤밥), 남태희(레퀴야), 조영철(카타르SC) 등 중동파가 가세한 탓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이 원점에서 평가하겠다고 공언하며 홍명보 전 감독의 황태자나 다름없었던 박주영, 홍정호(아우크스부르크)도 ‘계급장’을 뗐다. 달라진 훈련 모습 하나는 김승규(울산)와 김진현(세레소 오사카) 두 골키퍼가 흰색 조끼를 입고 필드 플레이어들 사이에 선 것. 둘은 최종 수비를 넘나들며 동료들과 빠른 패스를 주고받았다. 왼쪽 풀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모두 볼 수 있는 박주호(마인츠)가 요르단 입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했다.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이 면제됐지만 행정 절차를 마무리해야 했는데 소속팀 일정 때문에 절차를 밟지 못했던 것. 이에 따라 여권 만료일이 6개월 미만이 됐고 출입국 절차에 걸림돌이 됐다. 외교부의 협조로 14일 요르단과의 평가전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이란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대한축구협회조차 18일 이란전 출전을 지레 포기했다. 이에 따라 두 골키퍼의 필드 플레이어 가담은 단지 박주호의 빈 자리를 하루 메우는 것이 아니었다. 신태용 코치는 브라질월드컵 때 독일 대표팀의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 예를 들어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가 골문만 맡는 존재가 아니라 빌드업(공격 전개)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임병선 전문기자 bsnim@seoul.co.kr
  • “우리 사회 빈부 격차 심화… 소외 이웃 도와야”

    “우리 사회 빈부 격차 심화… 소외 이웃 도와야”

    “달동네는 없어졌지만 가난한 사람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에요.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받고 내몰리고 있습니다.” 제26회 아산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달동네 주민의 대부’ 안광훈(73·본명 브레넌 로버트 존) 신부는 11일 “상 받을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받아 미안하고 쑥스럽다”며 “우리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그는 “상금(3억원)은 소외된 이웃들을 돕는 일에 쓰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안 신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1965년 호주 시드니 골롬반신학대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왔다. 이때부터 50년 가까이 한국에 살며 철거촌의 저소득층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 ‘달동네 벽안(碧眼)의 신부’로 불린다. 1969년 강원도의 대표적인 탄광촌인 정선으로 부임한 안 신부는 고리대금과 사채 피해로 고통받는 저소득 주민들의 삶을 마주했다. 1972년 30명이 100원씩 출연해 3000원으로 정선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주민들이 사채 고리를 끊는 데 일조했다. 정선신협은 현재 예탁고 400억원이 넘는 탄탄한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안 신부가 도시 빈민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서울 목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으면서다. 목동 신시가지 계획이 발표되고 성당 근처 안양천변에 살던 서민들이 용역 깡패에게 쫓겨나는 모습을 보며 철거 반대 운동에 나섰다. 1992년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강북구 삼양동으로 온 안 신부는 철거 예정 지역에 전셋집을 구해 빈민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전셋집을 세입자 대책위원회 회의실로 제공하고 세입자 권리 보장과 임시 거주지 마련을 정부에 요구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성균관대 총장에 정규상 법대 교수

    성균관대 총장에 정규상 법대 교수

    성균관대 총장에 정규상(62) 법과대학 교수가 선임됐다. 학교법인 성균관대는 지난 6일 열린 이사회에서 정 교수를 제20대 총장으로 선임했다고 7일 밝혔다. 정 신임 총장은 1976년 성균관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 성균관대 교수로 부임해 학생처장과 법과대학장 등을 거쳤다. 2013년부터 인문사회과학캠퍼스 부총장으로 재직해 왔다.
  • 큰 돈보다 더 큰 뜻…카이스트에 100억 기부한 익명의 할머니 하늘로

    큰 돈보다 더 큰 뜻…카이스트에 100억 기부한 익명의 할머니 하늘로

    2010년 1월, 카이스트 교무처장인 이광형(현 미래전략대학원장) 교수에게 모 은행으로부터 “기부를 원하는 할머니가 계신데 한번 만나보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 교수와 마주 앉은 여든다섯의 할머니는 평범했고 수수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재산이 좀 있는데, 좋은 곳에 쓰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주위에 맡길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맡기면 딴 데 쓸 수도 있어서 재단을 만들까 고민 중”이라고도 했다. 이 교수는 “재단은 떠나시고 나면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면서 “한국의 미래는 과학에 있으니, 과학 인재를 위해 그 돈을 쓰자”고 설득했다. 그해 여름까지 7~8차례의 만남이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카이스트에 기부를 약속했다. 이때만 해도 기부금이 얼마인지 짐작도 못했다. 같은 해 7월 14일 카이스트에 전달된 돈은 현금 100억원이었다. 할머니는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만 내걸었다. 서남표 당시 카이스트 총장과 이 교수가 “기부는 알려야 확산된다”고 설득한 끝에야 가명으로 기부 사실만 발표할 수 있었다. 가명은 할머니의 성 ‘오’에 호인 ‘이원’을 썼다. 워낙 자신을 숨기다 보니 이 교수나 카이스트 발전기금 관리자들조차 오이원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카이스트 관계자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신 분”이라면서 “남편이 의사였는데 20년 전 사별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대부분 채권을 사 모으면서 큰 돈을 벌게 됐다고 하더라”면서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손자 손녀들을 돌보는 검소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셨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측도 나중에 알았지만 100억원은 할머니의 전재산이었다. 기부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가족 간의 잡음도 없었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동의했고, 손자들도 좋아했다”고 전했다. 오 할머니는 기부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지만, 훈장조차 가명으로 받았다. 카이스트는 기부금으로 할머니의 호를 딴 ‘이원 조교수 제도’를 만들었다. 갓 부임해 기반이 없는 젊은 조교수의 연구비로 1인당 3년 동안 600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다. 2011년 3명으로 시작해 올해는 수혜자가 20명으로 늘었다. 앞으로도 매년 20명씩의 ‘이원 조교수’를 뽑을 계획이다. ‘이름 없는 기부천사’인 오 할머니는 지난 3일 숙환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89세. 카이스트는 교내에 빈소를 만들어 오 할머니의 숭고한 뜻을 기렸고, 학생과 교직원들의 애도 발길이 이어졌다.이 교수는 “만날 때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하려면 카이스트가 발전해야 하지 않느냐’고 당부하셨다”면서 “그 뜻이 이뤄지는 것을 하늘에서라도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하프타임] 조호성 서울시청 사이클팀 코치로

    [하프타임] 조호성 서울시청 사이클팀 코치로

    한국 사이클의 맏형 조호성(40)이 27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시청 사이클팀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지난 1일 서울시청 코치로 부임한 그는 5일 강원 양양에 있는 서울시청 사이클팀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지도자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정태윤 서울시청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을 예정이다.
  • 이제항 가스公 본부장 첫 시집

    이제항 가스公 본부장 첫 시집

    이제항(57) 한국가스공사 강원지역본부장이 늦깎이로 첫 시집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4일 가스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강원지역본부장으로 부임한 이 본부장은 종합문예지 지필문학 제36회 신인공모전 시 부문에 당선돼 지난 6월호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후 공기업 고위직으로는 드물게 첫 시집 ‘삶 속에 흐르는 노래’를 펴냈다.
  • 리퍼트 美대사, 韓국방장관 예방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마크 리퍼트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4일 국방부에서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한·미 관계를 좀 더 강화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일할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 밝혔다.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안보 전문가인 리퍼트 대사가 양국 군사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와 주한미군의 고(高)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 문제 등 한·미 동맹의 군사 현안에 대한 미국의 적지 않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리퍼트 대사는 이날 오전 국방부 청사를 방문해 한민구 국방장관을 예방한 자리에서 “국방부에 들어와서 오랜 친구들을 만나게 되니 영광”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한 장관은 “2주 전 워싱턴에서 (리퍼트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한국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표명한 데 감명받았다”고 환영했다. 한 장관은 “올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를 기점으로 한·미동맹이 앞으로 포괄적인 동맹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아 훌륭한 대사를 모시고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앞서 리퍼트 대사는 지난달 31일 윤병세 외교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일관계 개선에 대해 양측이 협력하도록 조용히 독려하고 있다”고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은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군 당국은 리퍼트 대사의 국방부 방문이 단순 부임인사차 들린 것뿐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가 평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해 왔다는 점에서 군사 부문에서 한·미·일 삼각 동맹을 위한 사전 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화 퇴출된 이종범,KIA 코치 거부하더니 결국…

    한화 퇴출된 이종범,KIA 코치 거부하더니 결국…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사령탑에 오르면서 경질된 이종범 전 한화 코치가 TV 프로야구 방송 해설자로 전향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범 전 코치는 최근 한 스포츠 매체와의 인터뷰네서 “방송 해설자로 방향을 잡았다. 관계자들을 만나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종범 전 코치는 지난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KBS 해설위원으로 나선 바 있다. 야구 스승인 김응용 감독이 2012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이종범 전 코치는 지난 2년간 한화에서 작전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이번 시즌이 끝나고 김성근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송진우·강석천 등과 함께 물갈이 대상이 됐다. 이종범 전 코치가 한화에서 나온 뒤 그의 거취는 프로야구계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친정팀인 기아 타이거즈로의 복귀를 점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종범 전 코치는 오랜 고향 선배인 김기태 신임 KIA 감독으로부터 코치진 합류를 요청받았으나 스스로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범 전 코치는 인터뷰에서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어느 곳을 가든 야구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해설자 역시 여러 구단을 두루 살펴보고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다”면서 “한화 코치직은 완전히 떠났고, KIA는 일단 (코치직 없이) 그냥 지나갈 듯 싶다. 야구 전문 해설위원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근우 “김성근 감독 오셔서 훈련 강도 높아질 것” 한화 코치진 보강에 이종범 거취는?

    정근우 “김성근 감독 오셔서 훈련 강도 높아질 것” 한화 코치진 보강에 이종범 거취는?

    ‘김성근 정근우’ ‘한화 코치진’ ‘한화 이글스’ ‘이종범 거취’ 한화 이글스 김성근(72) 신임 감독 복귀 소식에 한화 내야수 정근우(31)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근우는 25일 스포츠서울과의 전화통화에서 “김성근 감독님이 오시게 됐다는 소식을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 김 감독님의 복귀로 팀이 좋은 쪽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근우는 SK 소속 시절 김성근 사단의 핵심멤버였다. 센스있는 플레이와 수준 높은 작전 수행 능력, 빠른 판단력으로 김성근 감독의 작전 야구를 진두지휘했다.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로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정근우는 김성근 감독 밑에서 국내 최고의 내야수로 성장했다. 김 감독과 정근우의 인연은 김 감독이 SK로부터 경질 통보를 받은 2010년에 멈췄다. 그리고 4년 만에 한화에서 감독과 핵심 선수로 다시 만나게 됐다. 정근우는 “김성근 감독님이 오셔서 참 좋다.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해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화가 좋은 팀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바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성근 감독의 부임으로 다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분명히 훈련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훈련에 익숙해져있다. 수 년동안 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크게 나쁘지 않다”며 웃었다. 한편 한화 이글스는 계형철 투수코치를 비롯해 한국·일본 출신의 코치 6명을 영입했다고 3일 발표했다. 계 코치와 함께 니시모토 다카시 투수코치가 합류했고, 쇼다 고조 타격코치, 후루쿠보 겐지 배터리코치, 다테이시 미쓰오 수비코치, 이홍범 트레이닝 코치 등이 이날 한화 코치진으로 발탁됐다. 이날 합류한 코치진은 ‘김성근 사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이다. 앞서 정민철 코치의 사퇴로 공석인 투수코치에 정민태(44) 전 투수코치를 영입했다. 한편 김성근 감독 취임 뒤 한화에서 경질됐던 이종범 코치의 거취도 거의 정해졌다. 야구 중계방송 해설자로 나서는 것. 이종범 전 코치는 한 스포츠매체와의 통화에서 “방송 해설자로 방향을 잡았다. 관계자들을 만나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종범 전 코치는 김기태 신임 KIA 감독으로부터 코치진 합류를 요청받았으나 스스로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미 소통 한층 강화… 군사위주 쏠림 가능성도”

    “한·미 소통 한층 강화… 군사위주 쏠림 가능성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최측근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부임하며 한·미 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심이 쏠린다. 정부는 41세의 최연소 주한대사가 부임하며 보다 ‘젊은’ 한·미동맹을 기대하고 있지만, 군사 분야의 핵심 참모를 대사로 임명한 오바마 대통령의 의중을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시각도 있다. 전문가들은 한·미 간 직통라인이 강화됐다는 점에 대해 대체로 긍정했다. 리퍼트 대사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만큼 앞으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 및 동북아 전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40대 초반의 젊은 대사에게 외교적 역동성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한·미 간 소통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린치핀’(구심점)으로 보고 한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주요 공관에 직업외교관이 아닌 정치인 출신을 보낸다는 점에서 한국과 백악관 간의 채널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수훈 경남대 정치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의 주한대사가 ‘상징형’이었다면 워싱턴과 긴밀한 소통이 가능한 리퍼트 대사는 ‘실무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서 “정부는 주한대사와의 긴밀한 관계 설정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리퍼트 대사가 한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에 전달하는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왔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은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있고, 미국으로서는 일본이 가져다줄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에 리퍼트 대사가 한·일 관계에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없으면 한·일 관계 개선은 어렵다는 입장인데, 리퍼트 대사는 이러한 한국 내 분위기를 잘 파악해 미국에 전할 수 있다”면서 “정부로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일 관계와 관련, 리퍼트 대사는 31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예방한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양측이 협력하도록 모두를 조용히 독려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그가 주한대사에 임명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궁극적으로 동북아 문제에서 군사와 안보 분야에 더욱 경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 한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편입 관철 등을 염두에 둔 인사라는 시각이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이 국방부와 관련된 고위직을 대사로 보낸 것은 처음”이라며 “리퍼트 대사의 부임으로 미 국방부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한국에 투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외교적 기동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한·미 관계와 한반도가 지나치게 군사 위주 전략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 등 문제에서 우리가 미국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는데 미국은 이를 직접 요구할 수 있다”면서 “이번 주한대사의 부임은 그 징표”라고도 해석했다. 리퍼트 대사가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군사협력 정책에 관여한 인물이란 점에서 이번 부임을 궁극적으로 미국의 대(對)중국 포위전략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그는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군사력 강화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김흥규 아주대 정외과 교수는 “현재 한·중 관계는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고, 워싱턴에서 이를 우려하는 시각도 대단히 강하다”며 “더불어 오바마의 대중국 정책이 비판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리퍼트 대사가 한국에 부임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미국은 한·미·일 간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되는 점을 강조하고 자연스럽게 중국과 거리를 두는 효과를 가져오려 할 것”이라며 리퍼트 대사의 부임을 이 같은 대중국 견제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이번 임명에 지나치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시각도 제기됐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과거에도 워싱턴의 실세가 주한대사에 임명됐지만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서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 문제에 대해 직접 나서지는 않는 상황에서 대사가 직접 나서서 역할을 하기는 어려운 구도”라고 진단했다. 신시내티의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난 리퍼트 대사는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학 학·석사를 취득했다. 스탠퍼드대 대학원 재학 중 중국 베이징대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중국어를 배웠다. 1999년에 톰 대슐 상원의원과 상원민주당정책위에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2000~2005년 패트릭 리히 상원의원을 보좌하고 상원세출위원회에서 정책 경험을 쌓았다.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외교·안보 정책 입안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정책담당 부국장을 거쳐 백악관에 들어와 국가안전보장회의 대통령 부보좌관,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롯데 자이언츠 신임 감독에 이종운 감독…이종운 감독 프로필 보니

    롯데 자이언츠 신임 감독에 이종운 감독…이종운 감독 프로필 보니

    팀 내부 문제로 속을 앓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가 이종운 감독(48)을 신임 감독으로 결정했다. 3년간 8억원의 계약 조건이다. 이로써 지난 17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전임 김시진 감독이 자진 사퇴한 뒤 공석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 자리가 채워지게 됐다. 27일부터 마무리 훈련에 들어간 롯데는 선수들과 구단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많은 우려의 눈길을 받아왔다. 이종운 감독은 부산 감천초와 대신중, 경남고를 졸업하고 동아대 거쳐 롯데에 입단한 프랜차이즈 스타다. 1997년 한화 이글스로 이적할 때까지 롯데에서만 9시즌을 뛰었다. 1998년 은퇴할 때까지 10시즌 동안 타율 2할7푼2리(2132타수 580안타)에 9홈런 212타점 98도루를 기록했다. 은퇴 후 이 감독은 고교 야구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 2003년 모교 경남고 감독으로 부임해 2013년까지 경남고를 고교야구의 강팀으로 올려놨다. 2008년에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감독으로 선수들을 이끌어 우승을 쟁취하는 등 이름을 알려왔다. 이종운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았다. 모두가 합심해서 팀을 이끌고 나가도록 해야할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1부) 신흥기업 넥센] 아내바라기 강 회장… 큰 사위는 차관보, 아들 절친은 정의선

    [재계 인맥 대해부 (1부) 신흥기업 넥센] 아내바라기 강 회장… 큰 사위는 차관보, 아들 절친은 정의선

    넥센은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됐지만 넥센 히어로즈의 메인 스폰서 강병중(75) 넥센타이어 회장의 가족만큼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강 회장은 1966년 9월 동아대를 졸업한 뒤 김양자(72)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경남 진주 이반성면 길성리에 살았던 집안 어르신들이 사돈 맺기를 합의하면서 이뤄졌다. 부부는 동아대 동문이기도 하다. 남편은 동아대 법학과(17기), 아내는 동아대 화학과를 나왔다. 부인 김씨의 부친이 4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일본에 건너가 성공을 거뒀었다. 장인은 귀국해 정미소도 하고 논밭도 사들여 부자가 됐다. 부인 김씨는 삼촌 두 분이 고향에 세운 이반성중학교에서 학교를 관리하면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처가 덕을 톡톡히 보며 사업의 시작과 밑천을 마련했던 강 회장은 아내 없이는 못 사는 공처가다. 측근들에 따르면 강 회장은 애정 표현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6년 전 유방암에 걸려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강 회장은 매주 비행기로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르내리며 간병했다. 온천이 피로 회복에 좋다고 해서 부산 동래구에 있는 이름난 H온천장에 회원권을 끊어 거의 매일 아내와 함께 목욕을 하며 지극 정성으로 기분을 풀어줬다는 전언이다. 강 회장의 노력 덕분인지 김 전 감사는 지금 병이 완치된 상태다. 강 회장은 아내를 위해 핑크리본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골프장도 같이 다닌다. 주로 가는 곳은 경남 김해 가야 컨트리클럽 골프장이다. 강 회장 내외의 골프 실력은 95타 정도. 부부 실력이 비슷해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자주 같이 친다고 한다. 두 부부는 불심이 깊기도 하다. 강 회장 부부는 아들 호찬(43)과 신영(49), 소영(46) 등 두 딸을 뒀다. 큰딸 신영씨의 배우자는 행정고시(28회) 출신인 정은보(53) 기획재정부 차관보다. 대일고-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정 차관보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 재직 때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에 파견돼 새 정부 금융정책의 밑그림 구상에 참여했다. 2011년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으로 있을 때 관치 논란이 일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시장에 보낸 소신파로 유명하다. 신영씨와 정 차관보는 지난해 34억 6389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19억여원 상당의 건물과 예금 자산만 14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재원(23)양이 있다. 넥센타이어를 이끌고 가는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은 홍콩에서 활동했던 국제변호사 출신 아내와 2008년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있다. 강 회장은 8년간 경영수업을 시켰던 외아들을 2009년 넥센타이어 대표이사 사장에 임명하면서 후계 구도 작업을 본격화했다. 2012년 말에는 넥센의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아들에게 최대주주 자리를 내주며 재산 승계도 이뤄졌다. 당시 강 사장이 주식 공개매수를 통해 12%였던 넥센 지분율을 50% 이상 끌어올리자 세금을 회피한 꼼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재 넥센타이어와 넥센테크의 최대주주인 넥센은 강 사장이 50.51%, 강 회장 7.4%, 김 전 감사는 2.38%로 오너 일가가 60.27%를 차지하고 있다. 넥센타이어는 65.33%, 넥센테크는 73.61%, KNN은 60.29%가 오너 일가의 주식이다. 부산고,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온 강 사장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강 사장이 2007년 해체된 야구단 현대 유니콘스를 껴안은 넥센 히어로즈의 후원자라서 더욱 친해졌다고도 한다. 실제 넥센타이어는 완성차업체인 현대차에 타이어를 대량 납품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가고 있다. 강 회장의 차녀 소영씨는 2005년 의사와 결혼했지만 5년 뒤 이혼했다. 강 회장의 친척으로는 씨름선수 출신 방송인 강호동씨가 있다. 강호동은 강 회장의 사촌인 강태중씨의 아들로 5촌 관계다. 강 회장은 “아버지가 4형제였는데 그중 막내 삼촌이 호동이 할아버지며 호동이하고 저는 5촌 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강호동은 명절 때마다 강 회장과 만나 함께 성묘하러 가는 사이다. 강 회장의 최측근은 9촌 조카인 강호기 KNN(부산·경남 방송) 문화재단 이사다. 강 이사는 KNN 방송 회장인 강 회장의 곁을 항상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다. 강 회장이 넥센타이어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데는 전문 경영인 3명의 도움이 컸다. 1999년부터 5년간 넥센타이어를 끌어온 이규상(66) 전 부회장은 외환위기 시절 국내 기업들이 외면했던 넥센타이어의 전신, 우성타이어 인수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이다.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의 이 전 부회장은 우성타이어의 법정관리를 조기 종결해 경영정상화 기틀을 닦았다. 2000년 넥센타이어로 사명을 바꾸고 초고성능(UHP) 타이어사업을 추진해 현재 고수익 사업구조의 기반을 마련했다. 2005년 바통을 넘겨받은 홍종만(71) 전 부회장은 연세대 경제학과, 삼성자동차와 삼성코닝정밀유리 대표이사 출신이다. 중국 칭다오에 첫 해외 공장을 건설하면서 세계시장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듬해 영업이익 16.3%를 기록하는 등 뚝심 있는 경영능력을 보여줬다. 야구단 넥센 히어로즈의 후원을 시작한 2010년 부임한 이현봉(65) 현 부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삼성전자 스페인법인장 및 생활가전 총괄사장을 맡은 경력으로 회사의 해외 판로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본인 유골까지 기증... 아낌없이 준 스승의 사랑

    본인 유골까지 기증... 아낌없이 준 스승의 사랑

    학생들의 질 높은 수업환경 조성을 위해 사후 본인 유골을 기증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뉴욕포스트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여전히 학교학생들의 보다 발전된 교육환경을 위해 고민했던 한 루마니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감동적인 사연을 22일(현지시간) 소개했다. 루마니아 남동부 프라호바 주(州) 푸체니 모스네니 초등학교 과학수업 시간은 사뭇 이색적이다. 해당 학교 학생들은 유리관이 씌워진 실물 크기 인체 해골을 통해 보다 정밀하고 세밀한 생물수업을 받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해골이 실제 사람 유골이며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오래 전 해당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알렉산드르 그레고르 포페스쿠이기 때문이다. 지난 1908년에 해당 학교 교원으로 첫 부임했던 포페스쿠는 총 50년이 넘는 세월을 교사로 보냈다. 재직 기간 중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지거나 늦은 것이 없었다는 전설이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로 포페스쿠는 학생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했으며 교육열정이 남달랐던 인물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특히 퇴임 10년 전부터 포페스투는 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는데 당시 그는 “내가 죽은 후에도 유골을 학교 과학 실습실로 보내 학생들의 생물 수업에 도움이 되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이 유언은 포페스쿠 사후 실현돼 1960년대부터 푸체니 모스네니 초등학교 과학수업 시간에는 해당 유골을 통한 실습이 이어졌다. 하지만 과거 잠시 이 유골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루마니아 보건 당국이 학교 감사 과정에서 이 유골이 실제 사람 해골이라는 것을 발견한 뒤 혹시 모를 감염 위험이 학생들에게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 위생상태 점검을 이유로 압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큰 이상이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온 뒤 해당 유골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다만 튼튼한 유리케이스에 넣어져 보관은 물론 안전성 역시 강화된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현재 푸체니 모스네니 초등학교 교장인 비올레타 바데는 “포페스쿠 선생은 사후에 컴컴한 관에 넣어져 지하에 묻히는 대신, 계속 교실에 머무르며 학생들과 호흡하기를 원했다”며 “마지막까지 그는 비록 유골의 몸일지라도 교실 뒤편에 서서 사랑하는 학생들을 지켜보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교 학생들 역시 40년여 전 한 교육자가 남긴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장래희망으로 의사, 약사 등 의료인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포페스쿠의 유골을 남다르게 받아들인다. 해당 학교 학생 중 한 명은 지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포페스쿠 선생님은 우리가 더 나은 생물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기증했다. 우리는 실제 골격을 보고 공부하기에 책만 보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유벤투스 최강 공격수 테베스, 3년만에 아르헨 대표팀 복귀

    아르헨티나의 축구 스타 카를로스 테베스(30·유벤투스)가 3년만에 대표팀에 복귀한다. AFP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헤라르도 마르티노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은 28일(한국시간) 11월 평가전에 나설 대표 명단을 발표하면서 테베스의 이름을 불렀다. 테베스는 2006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7시즌을 뛰며 정규리그에서만 84골을 기록했다. 2007-2008시즌부터 두 시즌간 박지성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솥밥을 먹어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이 익숙하다. 2013년 이탈리아 리그로 무대를 옮기고 나서도 첫 시즌 총 21골을 몰아넣었고 올시즌에도 정규리그 4경기 4골로 유벤투스의 무패 행진을 뒷받침하고 있다. 꾸준히 정상급 기량을 자랑해왔으나 지난 2011년 코파 아메리카 대회(남미축구선수권) 8강 우루과이전에서 승부차기 슛을 놓쳐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게 대표팀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이 대회 뒤 부임한 알레한드로 사베야 감독은 테베스를 중용하지 않았다. 테베스는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한편,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와 세르히오 아궤로(맨체스터 시티), 곤살로 이과인(나폴리), 앙헬 디마리아(맨유) 등이 이번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내달 12일 영국 런던에서 크로아티아와, 18일 맨체스터에서 포르투갈과 평가전을 치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주한 美대사 취임 선서식에 오바마 ‘깜짝 등장’

    주한 美대사 취임 선서식에 오바마 ‘깜짝 등장’

    24일 오후 2시(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국무부 외교접견실 ‘트리티룸’. 오는 29일 한국에 부임하는 마크 리퍼트(41)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존 케리 국무장관과 아내 로빈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선서식 행사가 끝날 때쯤 70여명의 참석자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예고 없이 깜짝 등장한 것이다. 선서식에 한국 측에서 유일하게 참석한 인사는 안호영 주미 한국대사였다. 안 대사는 이날 저녁 대사관저에서 열린 리퍼트 대사 취임 축하 리셉션에서 기자들과 만나 “리퍼트 대사에게 인사하려고 기다리는데 행사장 내에 갑자기 소란이 일어 돌아보니 오바마 대통령이 와 있었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안 대사를 발견하고는 손짓했고, 이에 안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다가가 악수한 뒤 “오늘 저녁 관저에서 리퍼트 대사 취임 리셉션을 주최하는데 대통령을 초청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자 오바마 대통령은 “(저녁 리셉션 때) 리퍼트 대사에게 불고기를 많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선서식은 신임 대사가 공식 부임 전 갖는 의전 행사로,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는다. 한 소식통은 “대통령이 국무부에서 열린 대사 취임 선서식에 참석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리퍼트 대사에 대한 애정과 신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상원의원 시절 보좌관을 맡았던 ‘최측근’이다. 선서식에 이어 열린 축하 리셉션에는 그를 비서실장으로 뒀던 척 헤이글 국방장관 등 오바마 정부 주요 인사 50여명이 참석했다. 헤이글 장관은 “나는 리퍼트 대사보다 더 자질 있고 준비돼 있으며 완벽한 주한 대사 감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 리퍼트 대사의 부인 로빈은 임신 6개월째로, 한국에서 출산할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신흥기업 (8)서울반도체] 특허소송때 담배 끊고 1년여 머리도 안자른 ‘집념의 승부사’

    [재계 인맥 대해부 신흥기업 (8)서울반도체] 특허소송때 담배 끊고 1년여 머리도 안자른 ‘집념의 승부사’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이정훈(61) 서울반도체 대표가 대학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주 듣던 말이다. 이 대표의 부모는 그가 학업에 소홀하다 싶으면 “공부를 그렇게 허투루하다가 사회에 나오면 세상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오로지 등산 동아리에만 심취해 했던 이 대표가 발광다이오드(LED) 업계의 거물로 성장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자세한 가정사 등을 일절 공개한 바 없는 이 대표의 가맥과 인맥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1953년 경기 광명에서 나고 자란 그는 광명에서 알아주는 만석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어머니 고 박순여씨는 그를 끔찍이 아꼈는데, 서울반도체 인수 당시 “조그마한 구멍가게 인수해서 뭐하러 고생하느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이 대표의 어머니는 2001년 5월 암으로 작고했다. 이 대표는 고려대 물리학과 71학번이다. 1975년부터 2년간 ROTC로 복무한 뒤 1979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땄다. 1981년 제일정밀공업 과장으로 입사해 회사 경험을 쌓다 1983년 오클라호마대 MBA 대학원에 진학했다. 1985년에는 둘째 형인 이정인(65)씨가 운영했던 삼신전기 임원으로 합류한다. 당시 삼신전기는 자동차부품업체를 생산했던 중소기업으로 액정식 계기판과 히터컨트롤박스 오염방지 장치 등을 생산했다. 이 대표는 삼신전기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영업부터 기술 연구 부문까지 전 영역에서 경영 감각을 키웠다. 정인씨는 1987년 회사 경영권을 현 삼신이노텍 김석기씨에게 넘겼고, 1991년까지 부사장으로 있던 이 대표는 1992년 눈여겨보던 서울반도체를 인수했다. 3남 2녀 가운데 막내인 이 대표의 첫째 누나 이정자(76)씨는 노창희(76) 전경련 고문과 결혼했다. 노 고문은 전 유엔대사를 지낸 인물로 이 인연은 농심가까지 연결된다. 노 고문은 노홍희 신명전기 전 사장의 아들로 신격호 회장의 둘째 남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과도 혼맥으로 이어져 있다. 신춘호 회장의 3남 동익씨(농심유통계열사 메가마트 부회장)가 바로 노재경씨와 결혼했는데 재경씨는 노 고문의 조카다. 정자씨와 노 고문 사이에는 노재령(51·여) 국립현대미술관후원회 상임이사, 노재호(48)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가 있다. 첫째 형인 이정환(67)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은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내 대표적인 농업경제학계의 학자가 됐다. 1946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홋카이도대학원에서 농업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농촌 경제연구원에서 연구 활동했다. 2005년 연구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정환씨는 민간 연구기관인 GS&J 인스티튜트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농업 통상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한·미FTA 자원위원회 위원, 농업농촌 특별 대책 위원회 통상협의회 의장을 맡는 등 대외활동도 왕성하다. 둘째 누나인 고 이정신은 수필 문학가로, 전 감리교 전국여선교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3월 작고한 정신씨의 남편 천광남씨는 고층 비상탈출 장치로 1984년 제네바 국제 발명 신기술 전시회에 참가할 정도로 주목받았던 엔지니어다. 컨베텍 기술 고문을 지냈다. 경기 안성에서 중앙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천승희씨가 장남, ‘언플러그드 보이’ 등 독특한 화법으로 신선한 돌풍을 불러일으켰던 만화가 천계영(45·여)씨가 정신씨의 차녀다. 이 대표는 카리스마 넘치는 화법과 치밀한 경영 스타일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지금도 영업 전방에서 왕성하게 뛰고 있다. 호방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리더라는 평이 많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기술개발과 경영을 두루 섭렵한 그는 한번 마음먹은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기업설명회(IR) 등에서 다양한 국가의 LED 산업에 관한 질문에도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 일벌레로도 유명한데 명절에도 회사에 나와 근무를 하는 등 일년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다. 세계 5개 법인, 40개 대리점을 챙기느라 분주한 그는 직원과 소통하는 데도 열심이다. 분기별로 임직원과의 토크쇼를 열고, 패밀리 데이 등 직원들의 가족까지 살뜰히 챙기는 따뜻한 리더다. 한번은 임직원 수십 명에게 자비로 주식을 사서 나눠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 대표의 영업성공률은 80~90%로 비즈니스 영업의 귀재”라면서 “비즈니스 정도와 예절에 능숙하다. 매우 세련됐다”고 평했다. 또 “일에서만큼은 엄격하고 직원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데도 탁월하다”면서 “한번 본 사람은 이 대표의 열정과 씀씀이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에서도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임원들이 부진하다 싶으면 특단의 조치도 내린다. 아예 회의를 시작부터 끝까지 서서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집도 세다. 실적이 부진했던 2007년에는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 이 대표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이발소를 찾지 않았다. 이때가 바로 세계 1위 LED 기업인 일본 니치아화학공업으로부터 특허 관련 소송을 당했을 때다. 애연가였던 이 대표가 담배를 끊었던 때도 이쯤이다. 건강해야 잘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대표는 결국 골리앗이었던 니치아화학공업을 이겼다. 호시탐탐 LED 연구인력을 빼가려는 대기업과 맞선 것도 이 대표의 뚝심이 컸다. 연매출 1000억원 때부터 그는 대기업들과 ‘부정경쟁방지법’을 근거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 대표는 스스로 “인맥은 거의 없지 않나”라고 말하지만 그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이채욱 CJ그룹 부회장 등 거물급 인사와 친분이 남다르다. 이 중 한 전 총리는 서울반도체 사외이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데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각각 장관 자리에 올라 정·관계 영향력이 크다. 때문에 이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한 전 총리를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국무총리 시절 녹색성장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고효율 친환경 LED 사업을 추진하는 서울반도체와 통한다. 이채욱 부회장은 GE코리아 사장과 GE아태지역 헬스케어사업을 총괄하는 GE아시아성장시장 총괄 사장,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 부회장도 과거 서울반도체 사외이사를 지냈다. 제일기획 대표이사, 삼성물산 사장 등을 거쳐 야후 코리아 경영고문을 지낸 신세길 서울반도체 회장도 이 대표가 어려울 때마다 조언을 얻는 최측근이다. 신 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2002년 서울반도체 회장으로 부임했다. 이 대표는 알아주는 등산광이다. 부인 김재진(60)씨도 대학교 등산 동아리 활동을 통해 만났다. 슬하에는 아들 민호(34)씨와 딸 민규(27)씨가 있다. 그는 엄격한 자식 교육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인생은 드로잉’이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가르친다고 한다. ‘인생은 다시 지우고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려간다’는 말로 신중하게 첫 단추를 잘 끼우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말이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독일 MF 프링스, 베르더 브레멘 수석코치 부임

    독일 MF 프링스, 베르더 브레멘 수석코치 부임

    현역시절 11시즌을 베르더 브레멘에서 뛰었으며 독일 국가대표팀 선수로 79경기에 나섰던 미드필더 토르스텐 프링스가 자신의 친정팀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더 브레멘 수석코치에 부임했다. 베르더 브레멘은 25일(현지시간)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로빈 두트 감독의 경질 소식과 함께 U23팀 코치를 맡고 있던 빅토르 스크리프니크 신임 감독의 선임 소식을 알렸다. 스크리프니크 감독 역시 138회의 리그 경기 출전한 바 있는 베르더 브레멘 선수 출신이다. 또 베르더 브레멘은 토르스텐 프링스를 수석코치(Assistant coach)에 선임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렸다. 프링스는 플로리앙 코펠트와 함께 수석코치로서 스크리프니크 감독을 보좌하게 됐다. 프링스는 선수시절 많은 인기를 누렸고 특히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기록한 멋진 중거리 골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바 있다. 친정팀의 수석코치가 된 그의 앞으로의 지도자 생활에 많은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성모 객원기자 London_2015@naver.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inlondon2015트위터 https://twitter.com/inlondon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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