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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부여 취수장 원수서 악취

    【전주=임송학기자】 전북지역 7개 시군 60여만명이 식수로 사용하는 금강광역상수도 부여취수장에 유입되는 원수에서 악취가 나 수자원공사가 원인 조사에 나섰다. 수자원공사는 12일 하오 2시30분쯤 부여취수장8㎞ 상류인 부여읍 저성리 탄헌 원수에서 암모니아성냄새가 나는 것을 감지,환경청대전지청에 수질검사를 의뢰했다고 13일 밝혔다. 전북도는 정확한 악취원인은 알 수 없으나 대전시나 공주지역등 금강 중·상류지역에서 무단방류된 분뇨가 가뭄끝에 비가 내리자 씻겨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악취가 나자 수자원공사는 대청댐의 방류량을 초당 35t에서 70t으로 늘리고 정수장에 분말활성탄을 투입하는등 비상정수체제에 들어갔다.
  • 분명한 백제악기들(백제를 다시 본다:3)

    ◎5인 소악상은 「일본후기」 기록과 일치/네줄 현악기 거문고원형 분명/3줄의 원함은 밴조와 꼭 닮아/고구려·신라보다 빈약한 음악사 한계 극복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김동용봉봉래산향로의 상단부에 조각된 5명의 주락상은 백제음락사연구에 결정적인 사료라고 할수 있다. ○보름달 같은 모습 5명의 주락인이 연주한 악기는 비파와 피리 북 현금 소로 발표되었다.이 가운데 비파로 본 현악기는 원함이 분명하다.비파와 완함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몸통과 목부분에서 발견된다.비파는 물방울 모양의 몸통과 짧은 목을 지녔지만 완함은 보름달처럼 둥근 몸통과 긴 목을 가지고 있다.이런 모양의 완함은 조선조에 씌어진 「낙학궤범」에서는 월금으로 소개되고 있다. 완함의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는 안악3호분 벽화(357년)를 시작으로 통구 삼실총(4∼5세기) 및 강서대묘(7세기경)등 주로 고구려벽화에서 나타난다.삼실총의 완함은 4줄짜리지만 나머지는 줄이 몇개인지 불분명하다.완벽한 실물이 전하는 일본 정창원의 완함 역시 4줄이다.그러나 금동향로의 백제 완함은 3줄짜리라는 점에서 독특하다.서양의 밴조와는 쌍둥이라 해도 좋을만큼 닮았다.둥근 몸통을 가슴부분에 밀착시킨 가운데 왼손으로 목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퉁겨 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그리고 발표 당시 소개된 현악기는 세가지 관점에서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악기를 연주자의 무릎위에 얹어 놓았다는 것과 왼손을 줄위에 얹고 오른 손으로 줄을 퉁기는 모습에서 찾아진다.또 줄이 네가닥이라는 점도 거문고의 원형에 접근한다. 악기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양손을 줄위에 얹은 거문고의 전형적인 연주모습은 안악3호분과 대성리1호분(4세기경),통구의 무용총(4∼5세기),장천1호분(5세기경),집안17호분(6세기경)의 벽화에서 발견된다.거문고가 본래 4줄이라는 사실은 무용총에서만 확인될 뿐이고 나머지는 불분명하다.백제향로의 거문고가 4줄이라는 점은 고구려의 거문고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단서의 하나이다. 다만 백제 향로에서 석연치 않은 것은 거문고를 한쪽 무릎이 아닌 양쪽 무릎에 얹어놓았다는 사실이다.이점은 충남 연기군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673년)에 나타난 거문고의 연주모습과 흡사하다.「일본서기」에 군후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백제의 거문고가 금동향로에 나타나는 거문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몸통이 굵고 길어 피리로 소개된 관악기는 피리처럼 세로로 부는 종적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피리로 보기는 어렵다.피리는 입술에 문 두겹의 떨림판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반해 향로에 나타난 악기는 연주자의 입술에서 떨어져 있다.또 피리는 몸통이 매우 가늘고 길이도 아주 짧으나 향로의 그것은 아주 굵고 길다.그것을 피리로 보기 어렵다면 단소의 일종으로 「악학궤범」에 나오는 동소와 비슷한 장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단소보다 긴 장소의 전형적인 연주모습은 안악3호분과 장천1호분,그리고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에서 발견된다. ○삼국서 함께 사용 삼국시대 음악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타악기의 하나가 바로 북이다.북은 어떻게 놓고 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이 붙는다.둘이서 메고 치면 담고,앉아서 치면 좌고등이 그 실례이다.고구려의 고고학 자료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북은 현재의 장고처럼 허리가 잘록한 요고이다. 그러나 백제향로의 북은 요고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마치 물동이위에 손을 얹은듯한 연주자의 자세는 다른 고고학자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굳이 예를 찾으려면 멀리 인도의 대표적인 타악기 가운데 하나인 타블라의 연주자세와 아주 비슷한 것이다. 처음 소로 소개된 관악기는 작은 관을 나란히 묶어서 만든 배소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다.서양의 팬파이프처럼 생긴 배소는 역시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악기는 북(고)과 각,공후,쟁,우,지,적등 일곱개이다.이 가운데 공후,쟁,우,지,적등 다섯가지는 중국의 청상락에서 쓰인 악기이다.백제가 중국의 북조가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수 있다.또 「일본후기」권17에 의하면 횡적 군후 막목등 3종의백제악기가 일본궁중에 소개되었다.이 악기들이 「북사」나 「수서」에 전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백제악기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제조품 확실 횡적은 비암사의 삼존석불에서도 발견됨으로써 백제악기임이 더욱 분명해진다.또 백제향로에 나타난 거문고는 군후이고 막목은 장적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만약 군후와 막목을 그렇게 해석할수 있다면 백제향로의 주악상에 나타난 악기들은 「북사」나 「수서」의 백제악기보다는 「일본후기」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싶다.이는 특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제음악사는 그동안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그것은 음악사료의 절대적인 부족 때문이었다.백제향로에 나타난 주악상은 백제음악사연구에 큰 획을 그을 자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백제와 일본의 악기 혹은 음악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음악사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는 우리음악사의 해명에 큰 진전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겠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더 많이 남겼다.주악상이 연주한 음악은 과연 어떤 종류였을까,그 음악문화는 백제 멸망후 어떻게 계승됐을까,통일신라가 백제악기나 음악을 수용했을까 등의 의문이 그것이다. ◎백제의 음악/6세기 들어 큰 발전… 일에 전파/악공교육기관 정부에 있었던듯 백제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체제를 갖춘 4세기경까지는 상고사회에서 행해졌던 음악문화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농업사회의 굿판에서 벌어진 노래와 춤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왕권의 확립과 함께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이웃나라와 음악교류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귀족계층의 문화수준도 높아져 민요 정도의 단순한 노래에서 악기의 반주나 기악독주곡의 형태가 요구됐다. 음악사학자들은 고구려음악이 서역계의 음악적 요소를 지닌 중국 북조의 음악과 관련을 맺었다면 백제는 남조의 음악문화와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고 있다.4세기 이후 고와 각등 타악기와 관악기 위주였던 백제음악이 남조음악의 유입으로 6세기 즈음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갔다.이렇게 형성된 백제악은 일본의 흠명천황 5년에 해당하는 554년 음악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삼국중 일본의 음악문화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백제악의 양상은 「구당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이 책에 소개된 백제악은 당의 중종(684∼710)에 이은 개원(713∼741)때에 묘사된 것이다.그래서 백제 멸망 이후의 상황으로 보고 있다.이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당시 백제악은 고구려와는 또다른 독특한 음악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이를테면 전문연주가인 악공이나 무용수의 교육을 관장했던 음악기관이 백제의 중앙관제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백제의 민속악 또한 당시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다만 「고려사」낙지에 「백제속락」으로 전하는 선운산등의 노래이름이 당시 일반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민속악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금동향로」 보존대책반 구성/문체부,녹상태 분석뒤 공개시기 결정

    문화체육부는 20일 지난해 12월 12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심한 청동병을 앓고 있는 점과 관련,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 전문가 6명으로 「향로특별대책반」을 구성해 정밀조사 과정을 거쳐 공개시기를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특별대책반은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을 반장으로 박물관측에서 이상수보존과학실장,문화재관리국측에서 장경호문화재연구소장·김동현보존과학실장등 6명으로 구성되었다. 문체부는 이와함께 문화재위원등 관계전문가와 원자력연구소등 과학연구소가 참여하는 「보존·전시자문단」을 구성,특별대책반의 보존처리 현황이나 연구결과,앞으로의 보존대책과 전시계획에 대해 직접 자문하도록 할 계획이다. 한편 특별대책반은 금동향로의 청동병 원인인 녹상태를 정밀분석함과 동시,다른 전문기관에도 의뢰해 현재의 녹이 청동의 보호막을 형성하는 안전한 녹이라고 판단되면 불활성 가스를 충전한 특수 진열장을 이용해 계획대로 오는 2월21일 일반에 공개하고 만일 활성화된 불안전한 녹이면특수보존처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뒤 전시하도록 할 계획이다.
  • 유등천 합류로 금강 오염 가속/신음하는 금강수계 긴급진단

    ◎낙화암밑 취수장은 3급수/악취 진동해 창문도 못열어/대전주변 공장·축산폐수 그대로 유입 예로부터 산과 물이 좋아 사시사철 행락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무주구천동. 장장 3백96㎞에 이르는 금강이 시작되는 이곳은 절경으로 알려진 어제의 무주구천동이 아니라 이대로 가다간 금방 각종 폐수에 찌들 것이 뻔한 하천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생활하수 쏟아내 「산 높고 물이 길다」는 금강의 발원지 전북 장수군에서 물줄기를 뻗기도 전에 만나는 무주리조트가 자리한 곳.물맑기로 소문났던 금강은 여기서부터 벌써 썩어가기 시작한다. 3백30만 충청및 전북지역 주민들의 젖줄인 금강이 발원지부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무주리조트의 호텔·여관등 집단시설에서 흰거품을 내면서 쏟아지고 있는 생활하수는 이 지역주민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자연을 더럽힌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오는 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를 무주리조트에서 치르게 돼 있어 1천실이 넘는 콘도와 각종 시설이 들어설 뿐만 아니라 영동 물한계곡을 비롯,제2금강휴게소가 들어서면 오염이 더욱 심해질 것은 물론이다. 맨 위에서부터 생활하수에 찌들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공장폐수와 축산폐수로 멍이 드는 금강은 이제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어 그 이름이 아까울 지경이다. 무주리조트를 빠져나온 물은 하루 3천여대의 차량과 3만여명의 인파가 들락거리는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와 만나 이곳에서 토해낸 오수와 뒤섞여 대청댐으로 흘러든다. 그나마 이 휴게소가 있는 충북 옥천의 수질은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 1.3ppm으로 대청댐의 1.8ppm보다는 훨씬 맑은 편이다. 대청댐은 충북 보은·영동·옥천등 주변 9백46곳 공장과 축산단지,24곳 가두리양식장등에서 나온 4만8천여t의 폐수가 쏟아지기 때문이다.축산단지에는 아예 정화시설이 없다. 지천 가운데 옥천천과 군서천이 만나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거리 하천은 흰 거품으로 뒤덮인채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며 줄기차게 대청호로 흘러든다. 이같은 오염으로 대청호는 지난 92년에는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이 2.1ppm을 넘어섰고 매년 여름이면 부영양화(부영양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청댐은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충남 부여·논산군과 전북 전주·이리등 8개 시군에 하루 25만t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부여취수장은 말이 아니었다. 오염이 극심한 유등천등 대전 3대 하천과 공주에서 흘러나온 폐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낙화암밑의 이 취수장의 수질은 3급수로 떨어진지 이미 오래다. ○정화시설 “전무” 이 취수장의 현재 수질은 BOD 3.2ppm으로 공주의 3.5ppm과 같은 수준이어서 정수처리를 한다해도 얼마나 깨긋해질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10년 전만 해도 백마강은 물을 직접 떠 마실 정도로 깨끗했다』는 원공희씨(70·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는 『지금은 각종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고 바닥이 안보일 만큼 더러워졌다』며 한숨지었다. 대전천 주변은 염색업소등 무허가 공장이 무더기로 들어서 있고 갑천도 둔산지역 대규모 아파트에서 토해낸 생활하수로 더러워진채 하천바닥에는 짙은 회색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하천바닥 안보여 유등천도 대전피혁등에서 쏟아낸 폐수로 붉게 물들어 있다.주민들은 『여름철이면 악취가 코를 찔러 문을 제대로 열어놓을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쯤에서부터 금강은 이미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변한 상태다.더구나 충북 청주 무심천,음성·진천지역 소하천 물을 받아들이는 미호천은 이미 썩어버린지 오래여서 금강중류를 더욱 더럽히고 있다. 자체취수시설을 갖춰 금강물을 끌어다 쓰는 54개 지역의 수질은 더욱 형편없는 실정이다. 대전시를 비롯,상류유역의 모든 공장폐수와 생활하수,축산폐수는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마음대로 흐르고 있는 금강. 금강을 지키기 위해 대전지방환경청이 있지만 인력·예산·장비부족으로 오염을 막기에는 벅차다.환경당국이 대전·청주·천안·온양등으로 보내지는 대청호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쏟은 노력은 조류제거선과 수중폭기장치를 설치한 것이 고작이다.
  • “백제인 정수해 마셨다”/부여 쌍우물 유적서 침전시설 발굴

    ◎윗우물서 이물질 가라앉혀 가득차면 홈통따라 아래로 2차침전후 윗물만 떠마셔 낙동강의 수질오염 파동으로 온 나라가 물 걱정에 휩싸여있다.공해가 없던 그 옛날에도 우리 조상들은 깨끗한 물을 찾는 노력을 했을까.「그렇다」는 대답은 최근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읍 구아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백제시대의 정수시설에서 찾아냈다. 이 정수시설은 백제시대의 고찰인 천왕사 옛터로 전해지는 부소산 아래에 있다.조사팀은 여기서 2개의 우물로 이루어진 침전시설을 발굴했다.가로 1백65㎝·세로 1백85㎝ 크기에 석축으로 쌓아올려진 윗우물은 부소산의 옹달샘에서 흘러내려 오는 냇물을 받아 가라앉힌 침전시설.1차 정수된 물이 윗우물에 가득차 넘치면 가로 20㎝·세로 20㎝에 뚜껑에 달린 목재 홈통을 타고 3백60㎝ 떨어진 아래쪽 우물에 모이도록 설계되었다. 아래우물은 가로·세로 1백57㎝ 크기로 둘레에 석축을 쌓은뒤 상단에는 목재를 둘렀다.물이 이 아래우물에 모이면 다시 2차 침전이 일어나고 이 우물의 주인은 표주박으로 살며시 위에 고인 맑은물을 떠먹었을 것이다.일종의 상수도였던 셈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이 우물의 축조시기는 백제말.우물이 축조되기 전 아래부분에서 발견된 기와가 6세기 중반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판단하고 있다. 쌍우물이 발견된 곳은 바로 부소산 밑.삼국시대 당시에는 완벽한 무공해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그럼에도 마시는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천왕사 터 쌍우물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물을 대하는 마음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식수오염시대에 더욱 돋보일수 밖에 없다.
  • 금강 오염심각/수질 계속 악화… 3급수 전락

    【전주=임송학기자】 전북지역 70만 주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상수원인 금강중류의 수질이 3급수로 크게 오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전북도와 대전지방환경청에 따르면 전북지역에 공급되는 수돗물을 취수하는 충남 부여읍 저성리 백마강취수장은 대전·청주·공주등 충남북지역에서배출되는 생활하수와 축산폐수등으로 지난 89년부터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가 3㎛을 넘어 3급수로 떨어져 도민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금강중류의 수질은 지난해 평균 BOD가 평균 3.1㎛이었고 89년 3.5㎛,90년 3.1㎛,91년 3.0㎛,92년 3.2㎛등 대전·청주지역 상수원인 대청호에 비해 크게 오염됐다.
  • 새달 21일부터 백제향로 전시/중앙박물관서

    문화체육부는 13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지난해 12월12일 발굴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를 오는 2월21일부터 3월1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 백제향로/보존처리 늦어 녹슨다

    ◎박물관측 “청동병은 긴세월 매몰로 인한것”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출토 김동용봉봉래산향로(서울신문 93년 12월 23일∼25일자보도)가 보존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동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12일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진 이 청동향로의 표면에는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의 녹이 슬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는 지난달 28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기까지 보존처리시설이나 보존장치가 없는 국립부여박물관에 16일동안 보관되었기 때문이다.특히 향로의 족대부분이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특히 발굴 직후 향로 표면에 붙어 보호막 구실을 했던 진흙등의 이물질을 모두 물로 닦아냄으로써 녹이 빨리 번진 것으로 보고있다.표면의 이물질은 거푸집용 점토와 같은 유기질 물질은 물론 당시 자연환경을 밝히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고고학 분석자료 하나는 상실된 것으로 지적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에따라 현재 이 향로를 온·습도가 자동조절되는 수장고(에어 타이트 보관장)에 보관하고 있으며 오는 2월말쯤 예정된 특별전시 때에도 이 방법을 이용할 계획이다. 이 금동향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산업과학기술연구소,문화재연구소의 첨단장비를 빌려 올해말쯤 완전 복원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측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청동병은 긴 세월동안의 매몰로 인한 것으로 발굴당시부터 문제되었던 사항』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문화재연구소 등 관계연구기관과 합동으로 펼치고 있는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고고학적 증거자료물 보호조치 및 분석실험,표면부식 이물질 제거,청동병 유발성분 추출 등 내부 부식인자 처리,도금표출,청동병 예방 및 활성억제 처리,방식코팅등을 통한 항구적 보호피막처리 등을 통해 완벽하게 보존하겠다』고 밝혔다.
  • 백제시대 벼농사터 발굴/부여 궁남지/목제농기구·복숭아씨도 나와

    【부여=서동철기자】 충남 부여에서 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 이어 29일 삼국시대 최초의 벼농사 농경유적과 함께 새모양의 목제 조각품등 1백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어 사비성시대 백제문화상이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유물은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신광섭)이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84일대 궁남지(사적135호)제3차 발굴조사대상지역에 포함된 백제 농경유적인 논(수전)유구에서 발굴됐다.출토유물은 새모양 조각품,가공목제품,발목,목선 조각,바가지등 60여점의 목제품을 비롯,삼토기,녹유기조각등 20여점과 무문벽돌,평기와등 기와류 10점으로 되어 있다.이밖에 복숭아씨,추자씨,밤껍질,씨앗등 당시 식생물연구자료가 될 수 있는 자연유물 10여점도 함께 출토됐다. 목제유물의 경우 단단한 나무를 소재로 사용했으며,특히 새모양의 목조각품은 사실성을 묘사한 솜씨가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됐다.그리고 나머지 목제품은 농기구나 궁남지 연못에 띄웠던 소형 목선의 부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물들이 출토된 논유구는 지표로부터 50∼1백50㎝ 아래에서 발굴되었는데 논 생김새는 15∼30㎠ 넓이의 장방형 또는 부정형을 이루었다. 이와 더불어 너비 1백∼2백30㎝,길이 30∼1백20㎝의 수로가 발견되는 한편 수조둑 보호를 위한 방천시설로 판목과 자갈,나뭇가지 등을 확인했다.
  • “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불교·도교사상에서 신앙·풍속까지 포용/“퇴폐로 내부붕괴” 기존의 시각 완전 불식/정밀투시촬영 통해 명문 찾아내면 획기적 자료 고대왕국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는 무녕왕릉에 이은 백제강역 최대의 고고학발굴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특히 백제 후기 시대사연구의 귀중자료로 부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및 음악사·사상사·민속연구 등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학계는 전망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이 향로의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학자의 대담을 마련해보았다. ▲최몽용교수=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부여에서 소위 박산로가 하나 나왔습니다.삼불 김원용선생이 돌아가신 것과 함께 올해 역사·고고학계의 큰 일로 기억될 것같습니다.이 박산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리라는 마지막 도읍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해외에 내보내도 정말 손색이 없는 유물 하나를 건진 셈입니다.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의 경사입니다.그러나 나온 물건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박산로가 나온 배경도 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말기의 분위기는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그런데 문화는 국력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백제말기에 이런 탁월한 공예품이 나왔다는 점에 미루어보면 백제가 노쇠기에 접어들어 내부붕괴가 가속화되는등 지리멸렬해져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고구려의 경우도 말기인 6·7세기의 벽화를 보면 웅혼한 기상이 살아있어요.국력이 쇠퇴하면 미술이나 공예도 타락상을 보이는 법입니다.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특히 백제의 경우는 비록 전성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창 국력이 뻗어나가려는 즈음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교수=중국 한대에 박산로는 왕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었습니다.태자를 지명할때 박산로를 주었지요.또 박산로는 귀족도 아닌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됐습니다.이렇게 볼때 비록 7백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능산리 박산로는 백제의 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박산로가 출토된 곳은 나성의 동문밖입니다.발굴유구를 보면 이 박산로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곳에 묻혀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이때문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주하다가 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당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교수=이 박산로의 제작시기는 6세기후반이라기보다는 7세기전반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 만들어놓고 오랫동안 간직했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백제말기에 해당하는 무왕과 의자왕시대는 사원의 건축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공예도 융성했던 시기였습니다.박산로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같습니다. ▲최교수=어떻습니까.이 향로가 앞으로 여러 방면의 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습니다.얼핏 생각해도 역사학과 미술은 물론 수많은 주악상은 우리 음악사를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여기에 불교와 도교사상등 신앙과 풍속까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향로 하나가 수많은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최교수=얼마전 스위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미이라 하나가 생활연구에서부터 해부학까지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하군요.이 박산로로 또 「백제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백제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은 서산마애불과 산경문전 뿐이었어요.백제인의 얼굴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지요.부처님 얼굴이었으니까요.그런데 이 박산로의 인물상을 보면 악기를 타면서도 얼굴표정이 약간은 경색되어 있어요. ▲이교수=향로의 제작연대 추정과 무관치않은 지적입니다.그 시기는 결국 삼국항쟁의 마지막 고비였어요.장기간에 걸친 전란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는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문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니까요. ▲최교수=한대 박산로가운데는 한사군설치의 주역인 무제의 형인 중산정왕의 능에서 1972년에 발굴된 것이 있습니다.기원전 154년에 즉위했다가 기원전 113년에 죽었지요.이것을 하한으로 이후 것은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력자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박산로가 있습니다.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요.한대 박산로와 능산리의 그것은 약 7백7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둘은 몸체는 비슷하지만 뚜껑 위쪽의 봉황과 다리부분의 용은 완전히 다릅니다.그렇다해도 앞으로 능산리 박산로가 백제 것이냐 수입품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결국은 백제가 그 주역으로 결론이 내려지리라는 생각입니다만.백제의 공예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교수께서 깊이 연구하셨지요. ▲이교수=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장인은 왕이나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신라의 경우에도 성덕대왕신종이나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전문기술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할 만큼 우대했어요.그들은 당당한 관인이었습니다.마르크스는 이들 기술자를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제가 알기로는 백제의 경우는 공예가들에 대해 더욱 남다른데가 있어요.백제하면 와당이 떠오르지요.일본측 기록을 보면 6세기말 백제의 와박사와 노반박사를 초청했다는 대목이 있어요.노반박사는 뛰어난 금속공장에 대해 국가가 부여한 지위입니다. ▲최교수=사실 신라는 백제기술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이교수=신라의 1급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백제의 도움을 받았지요.황룡사탑을 백제의 아비지가 세웠다는데서도 알 수 있지요.경주의 안압지도 사실 사비성시대 부여의 궁남지를 모방해 만든 것입니다. ▲최교수=결국 그같은 백제의 기술자육성정책이 뛰어난 박산로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군요.이제부터 문제는 박산로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지만 그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느냐는 겁니다.냉정하게 백제문화가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것이고 외부로부터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수=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그 지리적 위치입니다.육로로는 고구려를 통해 북방문화를받아들이고 바다로는 중국 특히 양자강이남 오·월의 문화를 받아들였어요.중국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북쪽의 야성적인 호주의 문화와 우아하고 섬세한 한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시켰어요. ▲최교수=박산로에서도 백제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요.연화문과 산경문이 특히 그렇습니다.이것들은 백제의 심벌과도 같은 것이지요. ▲이교수=이 박산로를 보면 도교신앙이 의외로 백제의 민간이나 지배층에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고구려의 경우 연개소문이 도교에 깊이 빠지는등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나 신라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요.그러나 백제에서 도교가 성행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추측만을 했을 뿐이지요.근초고왕의 북진의욕에 대한 막고해장군의 『분수를 알고 나아가지 말자』는 진언이 그것입니다.또 무령왕릉 지석의 「불종율령」도 좋은 예가 되지요.「불종율령」은 「왕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치 「수리수리마수리」와 같은 상투적인 도가적 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일본의 우에다교수같은 학자는 일본의 고대도교도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하더군요.능산리 박산로는 그 관계를 밝히는 유력한 물적자료가 될 것입니다.이처럼 사상적으로 볼때에도 이 향로는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최교수=무령왕릉은 발굴결과 기록과 부합되었지요.이 향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교수=아직은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다지요.그러나 명문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칠지도와 일본 하치망의 인물화상경에서도 뒤늦게 명문이 발견됐지요.일본에 있는 가야의 환두대도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금속제품에는 이처럼 명문은 새기는 것이 상례입니다.능산리 박산로도 꼭 정밀투시촬영을 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명문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미술뿐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데도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긴급대담◁ □이기동 ◇서울대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졸업 ◇경북대교수 ◇현 동국대교수 ◇저서:「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등 많음 □최몽용 ◇서울대문리대 고교학과 동 대학원졸업 ◇미하버드대 대학원(석,박사) ◇현 서울대교수 ◇저서:「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등 많음
  • 금동향로에 기마인물상 등 다양한 조각/1400년전 백제인모습 생생

    ◎정교한 공예… 왕실유물 추정/학자들/“의자왕이 패망후 묻은듯”/부여능산리 발굴현장 【부여=최홍운기자】 백제의 마지막 도성 사비성 옛터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되어 22일 하오 공개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백제인의 사상과,또 그들의 얼굴을 가장 잘 표현한 유물이다.국운이 다했던 시대의 백제 후기 유물이라는 점에서 흘러간 구슬픈 가요 「백마강」과도 결코 무관치 않은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향로는 금동제 제의유물로 일명 박산로라고도 불리고 있다.주목되는 부분은 향로에 돋을새김(양각)한 선경인물도.여기에는 홀을 든 인물,책상다리한 인물,기마상,기마수렵상,책을 읽는 인물,코끼리를 탄 인물,절하는 인물,지팡이를 든 인물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이들은 백제인이 틀림없기 때문에 1천4백여년전 백제인들의 얼굴과 표정하나까지 복원할수도 있게 되었다. 신라인들의 얼굴은 기왓장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왔지만,지금까지 백제의 얼굴로 떠올린 것이 있다면 불상이 고작이었다.이를테면 여래와 보살상이웃음을 띠고있는 충남 서산 마애불의 상호 정도를 백제의 얼굴로 여겨왔다.그러나 이번에 출토된 금동향로의 인물상들은 백제인의 모습을 여러각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인물이 갖는 여러가지 표정만으로도 도록 한권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금동향로의 존재로 백제의 사상과 종교를 엿볼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물론 불교를 숭상하면서 도교를 받아들인 백제는 제의만큼은 도교식을 채택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공예미술의 가치로 보아 왕실 소유의 유물이 틀림없는 금동향로는 사직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 아주 귀중한 유물.그래서 학계는 나당연합군에 쫓긴 의자왕이 도성을 황망히 떠나면서 묻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유물은 평지성으로서의 도성인 부여 나성 동문자리 밖에서 출토되었다.나성의 동문은 오늘날 논산 땅인 황산으로 가는 길목.문을 나오면 왼쪽이 청마산성이고,오른쪽이 벽화고분으로 유명한 능산리고분군이다. 그리고 들녘을 사이에 둔 멀지않은 거리에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아래로 사자수 옛물이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렀다.그 사비성시대(AD538∼660년) 백제사직의 유물이 오늘 슬픈 역사이야기로 다시 들려오고 있다.
  • 동양최고의 걸작 백제금동향로 출토

    ◎5인의 주악상 등 문양 1백개/높이 64㎝/부여능산리 집터서/6세기유물 4백50점 발굴/“빠른 시일내 국보지정”/문체부 【부여=최홍운기자】 문화체육부는 22일 국립부여박물관이 발굴중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백제시대 집터에서 우리나라 고대사의 신비를 풀어줄 김동용봉봉래산향로를 비롯한 4백50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민섭장관이 현지발표를 통해 이날 공개한 유물은 김동용봉봉래산향로와 김동인동문광배편,금동제방울,원반형장식,풍탁초,김동투조장식구등의 금동제품과 금제구슬·유리구슬·칠기·철기류·기와류·토기류등으로 되어있다. 특히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출토된 향로 가운데 최고의 미적 수준을 나타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전체 4개부분으로 구성된 이 향로의 뚜껑장식은 한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펼쳐 비상하는 모습이며 그 아래의 뚜껑에는 비파·피리·북·현금·소를 연주하는 5인의 인물상·동물상·기마상·기마수렵상·화염문등 1백여개의 화려한 문양이 배치되었다. 향로의 몸통에는 24개의 연꽃잎이 3단으로,또 각 연꽃잎과 그 사이에 물고기·가릉빈가·천인등 각양각색의 신격화된 부조상들을 배치했다.대족부는 한마리의 반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형상으로 위의 몸통을 입으로 받들고 있다.아래쪽은 서운과 인동을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장식함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들 문화유산은 1972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고고학이 거둔 최대급 성과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물론 동아시아 고대문화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 백제왕족 신위·유품 부여 귀환/일서 1천3백여년만에/오늘 귀환행렬

    ◎동경 등 17점 엑스포 전시/일 미야자키현서 향토신으로 모셔 【부여=최용규기자】 서기 6백60년에 망국한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백제 마지막 왕족의 신위와 유품들이 1천3백여년만에 백제의 고도 부여 품에 다시 안겼다. 대전엑스포조직위는 25일 일본 미야자키(궁기)현과 공동으로 「백제촌」으로 불리는 미야자키현 난고(남향)와 기조초(목성정)에서 향토신으로 모시던 백제의 왕족 정가왕과 복지왕의 신위를 백제의 옛터로 봉환해왔다.이날 하오 5시쯤 2백여명의 일본인 봉환단과 함께 부여에 도착한 신위와 유품들은 3천궁녀의 넋이 서린 낙화암이 바라다보이는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 입구 부여객사에 안치됐다. 「백제왕위신위 고국방문환영위원회」(위원장 유재갑·63)는 26일 부여 능산리 백제왕릉에서 귀국보고제사를 지낸뒤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에서 구드레나루까지 귀환행렬을 갖는다. 이날 행사에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유민이 구드레나루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던 행렬이 1천3백여년만에 재연된다.귀환행렬에는 부여 주민 3백명과 일본인 2백50명,은산별신제행렬과 사물놀이패·농악대행렬이 참여해 돌아온 백제왕족의 원혼을 달래게 된다. 두왕의 신위는 오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엑스포장 문예전시관 제2전시실에서 일본에서 백제왕족 유품으로 보존돼온 구리거울·말방울 등 17점의 유물과 함께 일반에 공개된다. 이번 봉환은 지난 89년부터 난고촌 주민들이 「백제마을가꾸기사업」을 추진하면서 부여의 여교사와 사물놀이 강사를 초빙,한글과 국악을 배우는 등 우리나라와 민간교류를 해오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됐다.난고촌 주민들은 또 일본서기나 고사기등 일본역사에 백제왕족이 6백60년 오사카,나라 등을 거쳐 당시 휴카국으로 불리던 규슈지방의 미야자키현에 정착했다는 기록에 따라 왕족의 신위와 유품을 봉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여겨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백제왕족과 유민들은 발달된 백제의 문화와 농업·의학을 현지에 전했으며 복지왕은 기조정에 정착,같이 피난온 백제유민들과 마을을 이루며 산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찬란한 백제문화 한자리서 감상/신축 국립부여박물관 내일 개관

    ◎국립박물관등에 분산 전시되던 유물 귀향/한·일 문화 교류 보여주는 일유물전도 새로 지은 국립 부여박물관이 6일 문을 연다. 삼국시대 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는 지난 71년 국립박물관이 처음 세워졌으나 전시공간이 좁은데다 최근에는 시설마저 낡아져 매년 30여만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이에따라 박물관측은 지난 90년 12월 옛 박물관 부근인 부여읍 동남리 16의1 일대에서 신축공사를 시작해 2백16억원을 들여 2년7개월여만에 새 박물관을 갖게 됐다. 새 박물관은 부지 1만9천84평에 건평 2천5백38평,전시실 면적 6백40평으로 옛 건물에 비해 부지는 3배,건물은 6배,전시실은 3.5배 늘어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실은 선사실·역사실·불교미술실·기획전시실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선사실에는 한국 청동기문화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부여 구봉리,예산 동서리 출토 청동기등 4백여점과 부여 송국리 유적을 전시한다. 역사실은 백제의 왕궁터및 부소산성,부여 능산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품·철제품·토기류등 2백여점을,불교미술실은 불상류와 기와·벽돌류및 부여지역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꾸며진다. 이밖에 박물관 야외공간에는 보물 제1백94호인 부여석조등 90여점의 석조물이 곳곳에 자리잡았다. 특히 박물관 신축을 계기로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던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물 제343호인 연대귀문전을 비롯 광주·전주·청주박물관등지에 분산전시돼오던 백제계 유물들이 이 곳으로 옮겨졌다. 이에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은 국보 1점,보물 7점을 포함해 모두 7천8백67점의 소장품을 갖게 돼 소장품및 박물관 규모면에서 명실상부하게 백제문화권 박물관을 대표하게 됐다. 한편 기획전시실에서는 한·일 고대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일본 후지노키및 다카마쓰 고분 출토품 29점이 개관기념 특별전으로 오는 10월31일까지 선보인다. 전시품중 말안장꾸미개인 금동안금구와 말띠꾸미개인 금동행엽은 그 형태나 무늬가 백제·신라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다까마쓰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의 사신도및인물화도 사진으로 확대 전시되는데 고구려·백제의 고분벽화와 거의 흡사해 고대 일본이 삼국의 문화를 이어받았음을 보여준다.
  • 철문 잠겨 모두 참사/논산정신병원 화재/방마다 불탄사체 엉켜 참혹

    ◎약제실서 발화 가건물 전소/담뱃불에 의한 실화로 추정 【논산=임시취재반】 34명의 목숨을 삽시간에 앗아간 충남 논산읍 서울정신병원 화재현장은 정신질환자등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병원의 무사안일및 관리소홀을 항변한 참혹의 극치였다. 뼈대만 남은 가건물병동 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사체가 형체도 알아볼수 없게 뒤엉킨채 흩어져 있어 밖에서 굳게잠긴 출입문 쪽을 향해 절규를 쏟아내던 환자들의 처절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발화◁ 가건물 입원실 병동 간호사실옆 약재실쪽에서 불이 일어나 약품과 서류등을 태운뒤 입원실과 홀쪽에 쌓아둔 이불등에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건물전체로 번졌다. ▷경찰수사◁ 경찰은 화재현장에 대한 감식결과 여자 병실앞 사물함 부근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루어 담뱃불에 의한 실화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또 병원측이 이날 대부분의 환자에게 수면제 등 약물을 투여했기 때문에 환자들이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이와함께 이 병원이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특수기관인데도 시설이 완전하지 않은 조립식 건물에서 적정규모인 25명을 훨씬 넘는 45명을 수용한 경위등도 캐고 있다. ▷화재현장◁ 불이난 병동은 내부시설을 구별할수 없을 정도로 전소됐다. 잠긴 출입문을 뜯고 진화작업에 나섰던 소방관들에 따르면 여자입원실에 11명,남자입원실 2곳에 각각 8∼9명,홀바닥에 2명,화장실에 4명이 뒤엉켜 숨져있었다. ▷희생자주변◁ 환자들은 대부분 알코올중독환자로 평소에는 다른 정신질환자들과는 달리 정상상태로 있다가 종종 발작을 일으키는등 비교적 온순한 질환자로 알려졌다. 숨진 사람은 남자23명,여자11명으로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링게르호스등에 손과 발이 묶인데다 출입문이 잠겨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변을 당했다. ▷유가족주변◁ 서울 신경외과 화재현장과 사망자가 안치된 논산 백제병원은 참사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며 통곡하는등 크게 혼잡을 빚었다. 이날 새벽 뉴스를 보고 달려 나왔다는 임순덕씨(51·여·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현하리)는 알코올중독증세로 입원했던 남편 이태휘씨(50)가 숨져 백제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울음도 잊은채 정신없이 발길을 영안실로 돌렸다.
  • 정신병원 화재 사망자 명단

    ◇남자(23명) ▲최호철(41·논산읍 화지리 41) ▲이경률(33·경기 용인 수지면 신봉리) ▲노현호(19·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496) ▲정중선(20·논산읍 대교리 198) ▲왕진호(23·논산군 은진면 방축4리 628) ▲이태휘(50·부여군 부여읍 구아3리 420) ▲김근철(46·성동면 삼산리 228) ▲맹창호(38·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수영(46·전주시 완산동 효자동1가 593의8) ▲남상덕(40·노성면 하도리 15의6) ▲오덕운(45·전북김제군 성덕면 남포리 401) ▲박갑성(62·논산읍 화지리 120) ▲배한숙(66·논산군 가야곡면 두월2리) ▲이완종(38·경기 의왕시 오전동) ▲백주현(32·노성면 읍내리 96) ▲김학중(45·전북 익산함열면 남당리 732) ▲장준화(30·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 270) ▲도인성(55·서울 종로구 숭인동425)▲전재형(32·전북 정읍군 영원면 풍월리299) ▲이도희(27·경기 가평군 설악면) ▲정진희(45·서산면 죽성리243) ▲나승균(39·논산군 선천읍 화성리433) ▲이석오(66·전주 완산구 평화3가) ◇여자(11명) ▲박정옥(25·논산군 은진면 성평3리 402) ▲장영현(23·논산군 광석면 산동리 517) ▲유순옥(40·부여군 홍산면 남촌4리 16) ▲남기순(48·공주군 우성면 응봉리 492) ▲서종숙(27·논산군 논산읍 대교리 248) ▲안미희(25·논산군 논산읍 중화리 336) ▲신숙정(62·전북 익산군 황동면 구지리 123) ▲김현자(22·부여군 구룡면 논티리130) ▲김개봉(34·논산군 연무읍 황화2리) ▲이복휘(38·〃 상월면 신충2리) ▲김혜영(26·서산군 지곡면중왕리686의2)
  • 금강 취수장 송수관 파열/8개 시·군 12시간 단수

    【부여=이천렬기자】 6일 낮12시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금강광역상수도 취수장 진입로앞 송수관이 파열돼 충남·전북 8개 시군지역의 수돗물공급이 12시간여동안 중단됐다. 이 사고로 충남 부여·논산군과 전북 전주·이리·군산시,옥구·익산·완주군등 8개 시·군의 50만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끊겨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금강광역상수도 관리사무소는 긴급복구작업에 나서 이날 자정쯤 수돗물 공급을 재개했다. 관리사무소측은 『이날 단수사고는 지하 2m에 매설된 직경 1·5m의 수도관 이음새에 끼워진 고무패킹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빠지면서 일어났다』고 밝혔다.
  • 고도 부여/백마강 굽이굽이 백제향기 물씬(주말여행)

    ◎부소산 오르니 낙화암이 반기고/절경에 취하면 3천궁녀 환영이…/정림사지5층석탑 이르면 여심은 절정 산이 거기에 있어 산을 오른다지만 거기에 있는 건 산이나 자연만이 아니다.강토의 옛 왕궁과 왕국이 여기저기서 우리의 발길을 기다린다. 잊었던 역사의 고도를 찾아가는 길은 산을 탈 때보다 평탄하다.그러나 백제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길잡이가 되어줄 유물 유적이 다른 왕조에 비해 드물고 조촐한 까닭이다.그러나 백제가 우리에게 잃어버린 왕국일 리는 만무하다.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이 자리잡았던 충남 부여읍을 찾는다.그럴사한 복제품을 빚어볼 밑바탕마저 대부분 멸실된 형편이지만 흔적과 흔적을 이어가면 백제의 숨결이 모아진다. 이 숨결은 희미하나 분명 복제품이 아니었다.부여읍에서 북쪽으로 30여㎞ 위에 있는 공주시내를 가로지르는 금강이 이 애잔한 숨결의 첫 판막을 연다.고구려에 금싸라기 한강유역을 뺏긴 백제는 475년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538년 사비(부여)로 재천도 했다. 부여땅을 적시면서 금강은 백마강으로 불린다.660년 신라·당 연합군에 패망하기까지 후기백제는 금강에 운명의 닻을 던졌지만 이 닻은 백제를 권토중래시키기엔 힘이 모자랐던 셈이다. 그래선지 금강은 한강에 비해 속절없이 부드러운 인상이다.부여 사비왕궁의 진산인 부소산과 맨살을 부딪치며 흐르는 백마강에 이르러선 이 느낌이 극도로 고양된다.부드러움이 극에 이르면 젊은 꽃잎이 스스로 떨어질 수도 있으리라.여기가 낙화암,3천 궁녀가 강물로 투신한 곳이다. 부여에 입성하면 누구나 맨먼저 부소산 절벽의 낙화암에 발을 디뎌보고 백마강 유람선에 오른다.부소산은 높이가 고작 1백6m에 그치고 군데군데 가설된 영일루 반월루 백화정 사비누 등의 누각은 일제시대나 해방후 작품이지만 백마강과 낙화암의 전설적인 만남이 있기에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그러나 부여에는 왕궁은 물론 흔한 중창 사원건축 한동 없다.커다란 초석이 즐비해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소산 남쪽 기슭에 대신 국립부여박물관이 번듯하게 서있다.고대 건물을 하나도 닮지 않은 외양이 처음엔 눈에 거슬리지만 한참 지나면 원형이 멸실된 백제건축이나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 잡혀질 듯하다. 박물관 전시품은 눈여겨 볼만하다.특히 도기류의 독특함과 기와·전 문양의 선진성에 주목하라고 전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부소산에 등을 돌리면 부여읍이 널찍하게 펼쳐진다.읍내 외곽에 위치한 능산리 고분군과 동남리 궁남지가 손짓한다. 뭔가 미진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읍내 중심지에 위치한 정림사지 5층석탑을 참관한다.통틀어 3기뿐인 삼국시대 제작 탑파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아 1천4백년전 건립당시의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거기에 정림사터는 담장을 두른 경내가 1만평에 달하지만 5층탑과 고려시대 불상외에는 다른 건조물이 일체 없다.삭막하고 허허롭게 여겨지던 넓은 공지가 5층탑의 건축미에 공명돼 꽉 차오른다. 1천년을 건너뛴 백제와의 교감이다 ▷길잡이◁ ○…서울∼부여행 버스는 양재동 남부터미널에서 20분마다 출발한다.천안 대전 논산 등의 터미널에서도 부여행 버스가 5∼10분 간격으로 있다. ○…부여박물관은 일요일에 문을 여는 대신 월요일 휴관한다.
  • 14살 소녀에 윤락 강요/「티켓다방」에 넘긴 한패 2명 영장

    서울 동부경찰서는 17일 14세 소녀를 속칭 「티켓다방」에 소개시켜 윤락행위를 하도록 한뒤 다방주인들로부터 소개비조로 1천6백여만원을 뜯어낸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제2직업안내소 총무 김복희씨(36·여·충남 논산군 논산읍 대교리 29)등 2명을 부녀매매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강신애씨(37·여·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13)등 다방주인 5명과 이 직업안내소 소장 박해련씨(59·여·충남 논산군 논산읍 반월리 62)등 6명을 같은 혐의로 입건하는 한편 유재숙씨(40·여·충남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175)등 다방주인 3명을 수배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등은 지난 5월14일 집을 나와 충남 서천군 지하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있던 고모양(14·서울 양천구 신월2동)에게 『월급을 많이 받게 해주겠다』고 꾀어 속칭 「티켓다방」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녹 다방」주인 강씨에게 넘겨주고 소개비조로 1백45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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