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사회를 만들자]제2부 학벌타파 (5)해외에서는 - 실무중심의 독일교육
사회로 나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어야 한다.길이 하나밖에 나있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오직 그 길만을 찾는다.학력 중심의 사회는 다양한 길을 닦아 놓지 않는다.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만을 좇게 만든다.시험은 유일한 수단이다.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능력도 대학 때문에 묻어 둬야 한다.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어도 갈 수 없다.사회로 연결되는 통로와 제도가 차단돼 있는 탓이다.공업 선진국인 독일은 ‘다양한 기회가 인재를 만든다.’는 말을 교육철학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글·사진 본 김재천특파원|지난 17일 오전에 찾아간 통일전 독일의 수도인 본 외곽에 있는 레이놀드 하겐 스티프퉁 재단.20평 남짓한 강의실에서 학생 10여명이 문제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습문제를 모두 푼 학생들은 옆 방으로 가서 직접 만들어보세요.” 교사 하인즈 요제프 브로이어(50)의 지도에 따라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바로 연결되는 작은 실습실에서 직접 회로를 만들기 시작했다.기계 작동을 성공시킨 학생들은 신기한 듯 반복해서 실습을 했다.잘 풀리지 않는 학생들은다시 문제와 답안지를 꼼꼼히 살폈다.이론교육은 곧바로 실습으로 연결돼 학습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있었다.
이곳은 정식 학교가 아닌 실무훈련기관이다.독일에서는 ‘초기업적 직업훈련센터’로 불린다.실습 기자재가 부족한 일부 중소기업을 대신해 실무훈련을 시키는 사설 교육기관이다.브로이어는 “독일 전역에 이같은 공·사립 시설이 군(郡)단위마다 1∼2개씩 있다.”고 말했다.학생들은 실업학교를 마친 뒤 기능공으로 취업해 일을 하면서 매주 사흘씩 이곳에서 이론교육을 받고 실습을 한다.
●일하면서 배운다 ‘듀얼시스템'
직장인이 학생처럼 교육을 받는 듀얼시스템(Dual System)은 독일 교육체계의 핵심이다.그야말로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다.학교와 직장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이론과 실무를 함께 익히도록 하는 제도다.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이론과 실무교육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 독일의 교육철학이다.
독일의 전통과 사회 분위기는 간판(학벌)보다 실질을 중시한다.학생들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면 진로를 결정,직업교육을 받는다.진로 결정에는 담임교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다.학부모들은 교사의 결정을 믿고 따른다.교사만큼 아이들의 진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수능 점수에만 맞춰 좋은 대학에만 가려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본인이 원하면 자유롭게 진로 변경
독일 교육체계는 매우 복잡하다.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공통이지만 이후부터는 (직업)기본학교와 실업학교,우리나라의 인문계 중·고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일반·실업교육을 함께 받을 수 있는 종합학교,장애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 등 5가지로 나뉜다.이를 졸업하면 직장에 취업,마이스터 전 과정인 기능공으로 일하면서 일주일에 절반은 이론교육을 받거나 직업전문학교,전문고교,김나지움 상급과정,종합학교,직업·전문김나지움 등에 진학할 수 있다.
대학에 가려면 우리나라 수능에 해당하는 일반대 진학자격증이나 전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전문대 진학자격증을 따면 된다.실무교육은 김나지움을 제외한 모든 교육기관에서 일반교육과 비슷한 비중으로 계속된다.독일 연방직업교육연구소(BIBB) 디트리히 숄츠 연구원은 ‘복잡한 교육과정이 비효율적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인데 어떻게 행정 편의만을 고려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교육체계가 복잡하지만 진로를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교에 입학한 뒤에는 진로 변경이 어려운 우리나라와는 달리 학생들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진로를 변경할 수 있다.그만큼 다양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겐 재단에서 실무훈련을 받고 있는 데니스 부시(20)도 대학에 가기 위해 김나지움에 진학했다가 진로를 바꿔 중등학교 졸업자격을 딴 뒤 부동산전문회사에 취업했다.안드레아 막센(20)은 김나지움을 졸업했지만 중소기업에 취업,기능공으로 일하고 있다.막센은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 전문대에 진학,자동차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다.교사 브로이어는 “독일에서는 진로를 쉽게 바꿀 수 있는데다 실무훈련을 통해 다양한 직업경험을 할 수 있어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소개했다.그는 “가르치는 아이들이 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우리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길 열어줘야
주 독일 한국대사관 본 사무소에서 9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종화 교육관은 한·독의 교육체계를 고속도로에 비유했다.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 되돌릴 길이 없어 멈추지도 못하고 계속 달려야 하는 것과 같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고속도로 곳곳에 다른 도로로 연결되는 진출로가 거미줄처럼 구성돼 있어 안전하게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그는 “독일의 교육부는 교육의 전체 정책방향과 직업교육만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지역에 맡겨 다양성과 융통성을 추구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주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patrick@
■독일 유학생 정양훈씨
“저 친구가 너무 부럽습니다.”
15평 남짓한 아담한 작업장.해부된 피아노 앞에서 한참 작업에 열중하던 정양훈(鄭楊勳·31)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막내동생뻘보다 나이가 적은 동료 필립 마이어(15)에게 활짝 웃어보이면서도 그의 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손가락은 항상 피아노와의 전투에 시달리는 듯 반창고 투성이였다.
지난 15일 독일 남서부의 작은 도시 트리어.정씨를 만난 이곳은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피아노 제작소인 휘브너 피아노하우스다.피아노 제작 분야 ‘한국인 마이스터 1호’를 꿈꾸는 그는 이곳에서 6개월째 일을 배우고 있다.
그의 일은 피아노 수리와 조율에서 제작에 이르기까지 피아노의 모든 것을 배우는 것.매일 독일인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피아노의 제작·수리에 구슬땀을 흘린다.독일의 기능공 교육과정이다.
그는 “한국에서 피아노 조율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설명했다.“여기는 한국과는 달리 피아노 현 하나를 만들기 위한 기구가 다 갖춰져 있어요.한국에서는 배울 기회가 턱없이 부족해요.그에 비하면 여긴 없는 것이 거의 없지요.”
그는 독일의 초·중등 직업학교 과정인 레알슐렌을 다니고 있는 필립이 부럽기만 하다.2주간 견학 차원에서 일을 돕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내 자신과 중학교때부터 마음껏 기회를 찾아나설 수 있는 필립이 너무 비교된다.”고 했다.
중앙대 음대 관현악과에서 트럼본을 전공한 정씨는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 선배를 만나면서 피아노와 인연을 맺었다.피아노 조율의 매력에 흠뻑 빠져 한국피아노조율사 자격증까지 딴 뒤에는 유학을 결심했다.피아노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렵게 시작한 만큼 반드시 피아노 마이스터 자격을 따 한국의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연방직업교육연구소 숄츠씨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의 힘은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시스템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독일 본에 있는 연방직업교육연구소(BIBB) 마이스터 과정 전문연구원인 디트리히 숄츠(63)는 독일의 경쟁력의 원천을 독특한 교육체계에서 찾았다.듀얼시스템으로 불리는 학교와 산업체의 합동교육체제가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설명이다.BIBB는 독일의 직업교육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우리의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해당한다.
그는 “독일에서 기능인이 대우받고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분야든 실무교육이 학위나 타이틀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사회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제품의 품질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술이지 학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교육시스템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몰두하고 있다.세계적으로 지식산업으로 산업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독일의 직업교육을 현실에 맞게 수정할 필요를 느껴서다.그는 “수공업 마이스터의 경우 중세 때부터 내려온 장인정신의 영향으로 현대 벤처기업처럼 쉽게 설립하기 어렵다.”면서 “배타적인 수공업 분야를 완화시켜 벤처로 육성할 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숄츠는 독일의 경쟁력은 앞으로도 낙관적이라고 했다.다양한 기회와 실무를 중시하는 교육체계가 이번에도 변화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