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부대원들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주택정책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매매가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부산시장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종목 상승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04
  • 칠성산 괴물체 밤샘 추격전/무장공비­소탕작전 상보

    ◎주민신고로… 곳곳 간헐적 총격전/새벽녘 부스럭 소리에 일제사격도 22일 밤 조명탄을 쏘며 칠성산일대에서 밤새 교전을 벌였던 군수색대는 무장공비 소탕작전 6일째인 23일에도 하오7시부터 거동수상자에 대한 신고가 접수됨에 따라 간헐적인 총격전을 벌이는 등 밤새 추격전을 계속했다. 이날 하오 7시와 10시쯤 칠성산과 칠성산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지역에서 매복중이던 군수색대에게 괴물체가 출현했다는 신고가 접수됨과 동시에 주변에서는 수십발의 총성이 울리는 등 밤새 곳곳에서 교전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첫 교전은 이날 상오 6시4분쯤 칠성산 계곡에서 매복작전중 일어났다. 밤새 뜬 눈으로 은폐물을 이용해 매복중이던 육군 이기자부대 윤성오 병장(21)과 김대영 상병(20)은 전방 20여m 지점 『부스럭』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능선을 향해 풀섶을 헤치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무장공비다』 윤병장은 옆에서 소총을 겨누고 있던 김상병에게 소리쳤다.김상병은 재빨리 소총의 가늠자 사이로 어슴프레 보이는 괴물체를 겨냥했다. 윤병장이 매복중이던 부대원들을 향해 다시 『공비다』라고 외쳤다. 순간 부대원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고 수류탄도 작열했다.10여분간 교전이 지속됐다. 총성이 멎자 윤병장은 가슴에,김상병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모습이 동료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공비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날 상오 6시30분쯤 강릉시 강동면 칠성산 일대에서 공비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매복작전중이던 비호부대원들은 송이를 캐려고 작전지역안에 들어온 안상영씨(56·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4반)를 공비로 오인,일제사격을 가했다. 비호부대원들은 트레이닝복에 점퍼를 걸쳐 입은 안씨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작전지역을 들어서자 공비로 오인한 것이다.
  • 북 특수부대/정찰국·정보대지구국 양축

    ◎정찰국­첩보수집·간첩남파 등 대남 공작 전담/정보대지구국­병력 10만의 특전군… 북 최고의 전력 18일 동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들이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의 특수부대원인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북한의 특수부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의 특수부대는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산하로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정찰국과 유사시 후방침투를 목적으로 하는 정보대지구국(일명 교도대지구국)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 정찰국은 군사첩보 수집과 무장간첩남파·대남공작 등 특수임무를 담당한다.산하에 특수8군단,907군부대,198군부대,448군부대,특수해상공작부대 등 후방기습공격을 위한 특수부대들이 배속되어 있다. 이들의 임무는 각종 군사첩보의 수집과 요인암살·납치와 대동월북,기간산업시설 파괴 등 게릴라식 테러활동을 통한 대남공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보대지구국은 우리의 특전사에 비견될 수 있는 조직으로 북한군내 최고의 전력을 자랑한다.22개 특수여단에 병력만 10만여명으로 북한군 총전력의 16%에 달한다. 이들은 유사시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AN2기 등을 타고 후방 깊숙이 침투하는 역할을 한다. 산하 저격여단은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나 지대공·지대지 미사일기지 같은 전략목표물들을 타격,무력화시키거나 북한후방에 침투한 한국군 특수부대원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공군저격여단은 한·미양국 공군이 사용하는 상설비행장이나 항공기 이착륙이 가능한 일부 고속도로 구간,레이더 등 방공관제기지 등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주 임무로 창설된 부대다. 북한의 특수부대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여자들로만 구성된 자살특공대다. 지난달 13일 귀순한 북한 특수부대 출신 최승진씨(29)에 따르면 자신이 근무했던 38항공육전여단에 북한군 유일의 여자강하 소대가 편성되어 있으며 이 소대는 군사퍼레이드 등 공식행사를 지원이라는 당초 목적과는 달리 유사시에 한국군 여군복장으로 침투,정보수집과 주요시설물 파괴·요인암살공작을 수행한다. 그러나 북한의 특수부대는 소속은 달라도 유사시에는 남한 후방에 침투,언제든지 한국군 행세를 할 수 있도록 전원이 내무반생활에서부터 상용용어,심지어 「얼차려」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한국군식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적이다! 엎드려! 긴박의 15분/불사조부대 장병 공비사살 순간

    ◎공포 쏜 후 자수권유… 공비들 권총응사/포위망 좁혀 반격… 유탄 발사 후방차단 육군 산악군단 불사조부대 정하욱 소령(40)과 민원기(22)·번성훈 병장(23),안경복(22)·김용우 상병(22) 등 5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만덕산으로 향한 것은 상오 9시40분쯤. 송이버섯을 캐던 주민이 무장공비가 있다는 신고를 해온 것이다.상오10시쯤 만덕산 마을에 도착하자 한 주민이 『산 중턱에서 군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추가 신고했다. 그곳은 우리 군부대가 수색중인 곳이 아니었다.정소령은 5명의 인원으로는 불안하긴 했지만 운전병 번병장까지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지체없이 부대원을 이끌고 만덕산으로 올랐다. 1백50여m쯤 오른 상오10시15분쯤 나무 풀숲 사이로 짧은 머리의 남자 4명이 모여있는 것이 포착됐다. 정소령은 『적이다.엎드려라』고 소리쳤고 부대원들은 침착하게 일제히 나무와 바위 뒤에 엎드려 사격자세를 취했다. 공비들은 우리 군 부대원을 보고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정소령이 공중에 대고 3발을 위협사격하며 『총을 버리고나와라』고 소리치자 공비들은 권총으로 응사하기 시작했다. 부대원들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이 숨은 것으로 보이는 풀숲과 바위를 향해 일제히 총격을 퍼부었다. 『타타탕,쾅』 어렴풋이 한명이 도주하는 것이 보였다. 최고참 민병장이 후방차단을 위해 K-201 유탄발사기로 6발을 쏘았다.2명은 좌우로 돌아 공비들을 포위했다. 1인당 20∼30발정도씩 15분여정도 사격하자 적의 응사가 없어졌다. 상오10시30분쯤 부대원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수색을 시작했다.3명이 머리와 가슴 등에 총상을 입고 숨진채 바위뒤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소련제 TT 권총 1정과 탄피 20여개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총성을 듣고 달려온 지원부대는 이미 달아난 공비를 추격하고 있었다.
  • 강동면 일대야산 “그물수색”/무장공비 침투­사살 현장

    ◎공비소탕 막바지 작전/예상도주로 병력 집중투입/자수권유 전단 뿌려… 야간통금 경북 확대 무장공비 8명을 추적하고 있는 군·경은 19일 상·하오에 걸쳐 7명을 사살한데 이어 달아난 나머지 1명을 붙잡기 위해 예상도주로를 봉쇄하는 등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다. 군·경은 이 1명을 쫓는 한편 전날 생포된 공비 이광수가 처음에는 일당이 20명이라고 했다가 다시 25명이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는 점을 중시,나머지 잔당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색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공포의 밤을 지샌 강릉지역 주민들은 달아났던 무장공비가운데 7명이 사살되자 크게 안도하면서도 공비들이 모두 일망타진 되지 않아 이틀째 불안한 밤을 보냈다. ▷추적◁ 군·경은 무장공비의 은신가능성이 큰 강동면 임곡리 지역과 주요 차단지역에 병력을 집중 투입,다각적인 수색작업을 벌였다. 군의 한 관계자는 『공비들이 침투지역으로부터 25㎞이내 지역인 1차봉쇄선안에 포위돼 있어 작전이 비교적 쉬웠다』고 밝히고 『예상도주로를 완전히 차단한 만큼 도피중인 1명과잔당이 있다면 이들 역시 검거는 시간문제』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군·경은 공비들이 주민들에게 『태백산맥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은 점으로 미뤄 잔당이 있을 경우 이들이 오대산·설악산으로 이어지는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주요 차단로에 병력을 집중 배치,수색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무장공비들이 제대로 무장을 하지 않은데다 먹을 것이 없어 사기가 떨어졌을 것으로 보고 선무방송과 함께 자수를 권유하는 전단을 뿌렸다.야간통행금지도 영동지역에서 경북까지 확대했다. ▷사살◁ 군·경 수색대는 이날 날이 밝자마자 무장공비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된 강동면 언별리일대 깊은 계곡에 병력을 집중 투입,소탕작전에 나서 상오 10시20분쯤 해발 8백m의 만덕봉의 초입 부분에서 무장공비 3명을 사살했다. 이어 하오2시11분쯤 강동면 칠성산 일대를 수색중이던 특전사 비호부대원들의 투항권고를 무시하고 저항하던 무장공비 3명도 모두 사살됐다. 이보다 앞서 하오1시쯤 비호부대소속 김학성 중사(24)와 이재건 하사(22)는 바위가 많고 가파른 칠성산(해발 942m) 정상에서 아래로 1시간가량 내려오다 AK소총으로 무장한채 바위 뒤에 숨어있던 침투공작원 1명과 비무장의 승조원 2명을 발견했다. 대장인 임채탁 대위(31)가 『자수하면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며 10여분에 걸쳐 3∼4차례 투항을 권고하자 무장공비들은 『우리는 죽을 각오가 돼 있다.끝까지 싸우겠다』며 탄창을 AK소총에 끼우는 등 공격자세를 취했다. AK소총을 든 침투공작원은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나머지 2명은 10여m 아래로 달아나다가 사살됐다. ▷주민 반응◁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된 언별리 이장 이승재씨(47·농업)는 『갑자기 멀리서 총성이 들리는듯 하더니 헬기의 요란한 소리가 들려 무장공비가 우리 마을 가까이 나타난 줄 알았다』며 『18일 밤에도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지켜봤다』고 전했다.
  • 요르단 시위 수도 암만 확산/빵값 인상 반발

    ◎시민·경찰 3일째 충돌… 군부대 투입 목격 【암만 로이터 연합】 정부의 빵값 인상 결정으로 인해 촉발된 요르단 남부의 시위사태가 18일 수도 암만까지 확산됐다. 암만 중심가 빈곤 지역인 헤이 알 타파이라 주민들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해산하려는 경찰에 대항해 투석으로 맞서며 시위를 벌였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이번 사태는 지난 이틀간 카라크시를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가 처음으로 남부지역 외로 확산된 것으로 주민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자정 직전에 시작돼 밤새도록 계속됐다. 한편 카라크 시내를 취재중인 기자들은 일단의 장갑차 대열과 공수부대원들이 카라크시로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고 알려와 요르단 정부가 이번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대를 투입했음을 확인했다. ◎요르단 과격 시위 배경/주식 빵값 인상 항의 강경진압 발단/반정운동 비회… 야당 가세 “악화일로” 요르단 정부의 빵값 인상에 항의하는 남부 지역의 폭력시위가 정부 퇴진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16일 암만 남서쪽 1백50㎞ 떨어진 도시 카라크에서 시작된시위는 군중이 2천명으로 불어나면서 정부군이 투입되는 극한상황을 초래했다. 이번 사태는 빵과 동물 사료가격 2백% 인상에 항의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던 2백∼3백명의 군중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강경 진압하려한 것이 사태의 직접적 발단이었다.흥분한 시위대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뒤 공공건물과 민간은행 지점들에 방화하는등 과격행동으로 치달았고 시위는 인근 도시들로 확산됐다.시위대는 급기야 압둘 카림 카바리티 총리정부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체 인구 4백15만명 가운데 30%이상이 빈곤층인 현실에서 주식인 빵값의 인상이 가져올 파장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야당들은 의회와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빵값 인상을 추진한 현정부의 일괄사퇴를 요구하는 등 정치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르단정부는 빵값 보조금 정책이 재정적자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에 변함이 없다.무니르 수베르 공공조달 장관은 이미 지난 6월 정부 소관 위원회에서 빵 보조금철폐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인 처방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지난 89년이후 7년만에 최대 국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관측통들은 우려한다.
  • 「12·12」 「5·18」 26차 공판/증인신문 지상중계

    ◎“임무 받고 출동때 부대원들에 실탄 지급”·“차량통행 저지해도 계속 다가와 사격”­김광택 증인/“승용차에 대한 총격 어떻게 발생했나”­재판장 12·12 및 5·18사건 제26차 공판이 1일 서울지법 제417호 대법정에서 열렸다.지난 6월27일 제17차 공판이래 마지막 공판은 김광택 당시 20사단 61연대 2대대 6중대장에 대한 증인신문으로 시작됐다.채택증인 91명중 40명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날로 마무리 됐다. ○김광택 증인 ▲박봉식 검사=증인이 소속됐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6중대는 80년 5월21일 하오6시 광주와 목포간 도로를 봉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죠. ▲김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임무를 부여받고 출동할 때 실탄을 수령해 부대원들에게 지급했습니까. ▲김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5월21일 밤 10시10분쯤 효천역 부근에서 도로 차단임무를 수행하던중 목포쪽에서 차량 6대에 탑승한 시위대와 교전한 적이 있습니까. ▲김증인=있습니다. ▲박검사=5월22일 새벽 1시쯤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던중 광주쪽에서 버스 5∼6대를 타고 오는시위대와 교전한 적이 있습니까. ▲김증인=예. ▲박검사=5월22일 상오 8시30분쯤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쪽에서 오던 승용차 1대에 총격을 가해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사망케한 사실이 있습니까. ▲김증인=먼저 총을 뺐기때문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김영일 재판장=5월22일 상오 8시쁨 승용차에 대한 총격은 어떻게 발생했습니까. ▲김증인=사병이 차량통행을 막으려 해도 계속 다가와 사격을 했고 총격이 끝나고 가보니 승용차에 탄 4명이 모두 사망했으며 그중 1명이 총일 갖고 있었습니다. ○최규진 증인 ▲김상희 부장검사=당시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장이던 증인은 5월21일 하오 1시 전남도청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타고 돌진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최증인=알고 있습니다. ▲김부장검사=5월24일 하오 2시븜 증인의 부대가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던중 효천역 부근에 이르렀을때 매복중이던 보병학교 병력이 증인의 부대에게 90미리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했습니까. ▲최증인=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당시 보병학교병력이 신분확인이나,사전경고를 했습니까. ▲최증인=폭도로 오인해서 사전경고는 없었습니다. ▲김부장검사=증인은 보병학교 병력의 당시 총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최증인=잘못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익원 변호사=사병들에게 실탄을 분배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최증인=구체적으론 기억이 나지 않으나 5월 21일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균 증인 ▲박태식 검사=당시 20사단 62연대 2대대 5중대장이던 증인이 소속돼있던 2대대는 80년 5월21일 하오 광주 서구 화정동소재 광주통합병원 앞돌고개로 출동해 시위대와 대치한 사실이 있지요. ▲이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다음날인 22일 하오 연대로 부터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통합병원쪽으로 이동하던중 이를 저지하던 무장시위대와 민가지역에서 교전한 사실이 있나요.또 당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병력들은 응사를 하면서 통합병원으로 이동했나요. ▲이증인=교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대장의 발포지시가 있었던것이 아니고 상대편에서 발포함에 따라 병사들이 스스로 자위권을 위해 총을 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익원 변호사=5월22일 돌고개 작전 전후에 자위권 발동 지시나 관련지침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이증인=총기 사용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 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또 출동에 앞서 중대장과 병사들의 작전에 임하는 자세애 대한 설명도 있었습니다. ▲서변호사=당시 총기를 일체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만 있었고 총기사용 허가는 22일 통합병원으로 이동할 당시 이후의 일이지요. ▲이증인=그렇습니다. ○박종규 증인 ▲이부영 검사=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이던 증인은 3공수여단 병력이 5월22일 새벽 0시40분 광주교도소 앞에서 시위대와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의 서종덕등이 총상으로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박증인=알고 있습니다. ▲서익원 변호사=광주에 있을 동안 정호용 특전사령관이나 상급부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받거나 계엄사령관의 자위권천명 방송을 본적이 있습니까. ▲박증인=지시를 받거나 방송을본적은 없었고 광주교도소로 이동하고난뒤 교도소에 뿌려진 삐라를 보고 알았습니다. ○박준병 증인 ▲이부영 검사=당시 20사단장이던 증인은 5월22일 광주 효천역앞에서 20사단 병력이 승용차에 총격을 가해 민간인 3명을 사살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박증인=알고 있습니다. 시신을 광주 국군 병원에 인계했습니다. ▲이검사=5월26일 광주 재진입 지시는 최종적으로 누가 했습니까. ▲박증인=전교사령관이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세동 증인 ▲김수연 변호사=달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증인은 광주사태 기간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수행해서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있습니까. ▲장증인=세차례 수행했습니다. 5월21일과 23일,26일 세차례 내려가 각각 다음날 올라왔습니다. ▲이부영 검사=7공수여단장이 전교사에 머문 사실을 알고 있죠. 7공수 33대와 35대대는 31사단에 작전배속돼 여단장에게는 작전 지휘권이 없는데도 7공수여단이 전교사에 상황실을 만든 사실은 틀림없죠. ▲장증인=상황실인지 여단장의 통신축선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황판과 무전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 철원 육군 최전방부대 산사태 참사현장

    ◎새벽 단잠 자다 “꽝”… 아수라장/내무반 형체조차 없이 부서져/흙더미에 깔려 “살려달라” 비명 25일 밤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장대비로 변한 26일 상오 4시25분쯤.강원도 철원군 대마리 육군 5사단 29연대 2대대 병영은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동안 부대원들이 전방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자주찾던 뒤편 무명동산의 붉은 토사가 무너져 내려 순식간에 1·2내무반 막사 2개동을 덮쳤다. 곤히 잠든 전우들을 보살피며 불침번 근무중이던 김현우 상병(23)은 갑자기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내무반 건물이 해일에 밀리는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자 무너져내린 막사와 흙더미에 깔린 전우들이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전우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어둠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김상병은 함께 불침번을 섰던 하태웅 일병(21)과 함께 맨손으로 정신없이 흙더미를 헤쳐 나갔다. 가건물 내무반의 부서진 조각들과 흙더미속에서 내무반의 고참으로 제대 날짜만을 기다리던 이완희 병장(22)의 사체를 맨 처음 발견했다.울음도 나오지 않았다.곁에서는 3내무반원들과 선임하사·중대장도 억수같은 장대비 속에서 울부짖으며 흙더미를 헤치며 부하들을 찾고 있었다. 3시간여가 지난 7시30분쯤 장비가 도착했다.민간인 포크레인 1대와 공병 포클레인 2대 불도저 2대 덤프트럭 4대가 고작이었다. 장비가 동원됐다 해도 맨손으로 동료들을 찾아 헤매기는 매 일반이었다. 최일병·이일병·전일병 그리고 부대의 막내인 윤일병등의 사체가 속속 발굴됐고 앰뷸런스가 달려와 후송이 시작됐다.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부대 막사로 오는 길이 끊기고 빗줄기가 줄지 않아 당초 예상했던 헬기를 동원한 후송이 없었던 것이 아쉽기만 했다. 하일병과 함께 불침번을 서던 정들었던 1내무반은 아예 형체조차 없이 흙속으로 사라졌고 2내무반은 새벽의 참담함을 말해주듯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단지 내무반옆에 우뚝 서있던 아름드리 아카시아나무 1그루만이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무너진 내무반에는 제대후 영국유학이 꿈이라고 말했던 신일병의 유학안내책과 토플책 그리고 지난밤 누군가가 먹다남긴 건빵부스러기만이 흩어져 있었다. 『조국을 위해 전방고지에서 젊음을 함께 한 전우들이었는데…』 오열하는 김상병의 얼굴에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철원=조한종·박용현 기자〉 ◎야산 깎아내 “참사 자초”/산아래 불과 10m 거리에서 막사 설치/형식적 안전점검으로 사고 못막아 26일 새벽 발생한 강원도 철원군 군 부대 내무반 산사태 매몰사고는 해빙기나 여름철 장마때 철책선 부대에 상존하는 위험이 현실화 됐다는 점에서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군은 철책선 부대의 경우 통상 막사를 적의 수류탄 투척 등에서 보호하기 위해 산 남쪽 뒤쪽에 짓고 있다.사고가 난 육군 모부대 본부대대도 2백65m 고지의 야산을 깎아 내고 본부중대와 통신대 등의 막사를 설치했다. 더욱이 이 야산은 경사 45도 가량의 가파른 산이어서 집중호우가 내릴 경우 산사태에 속수무책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으로 지적된다. 특히 이날 새벽 강원도 지역에 3시간 남짓안에 1백78㎜의 폭우가 내렸고 산사태가 시작된 9부능선은 작전을 위해 일부 깎아낸 것으로 알려져 폭우가 시작된 25일 밤부터 산사태 여부를 지속적으로 관찰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가 난 부대는 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에서 5백m∼1㎞ 남짓 남쪽에 위치한 최전방부대로 이날 상오 2시30분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직후 상급부대로부터 『안전점검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육안으로 산의 상태를 점검하는 선에서 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산사태로 매몰된 막사가 이처럼 취약한 야산 아래에서 불과 10m 거리에 설치된 점도 인명피해가 커진 이유로 꼽힌다. 한동안 수작업으로 매몰자 구조작업을 벌인것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난 이유로 꼽혀 이래저래 천재와 인재가 겹친 보기 드문 군 대형참사로 기록되게 됐다. ◎사고 난 부대는?/철책 전투병력 후방 지원부대/대부분 통신·정훈·취사 등 “특과” 산사태 매몰사고가 난 군부대는 중대단위로 전방철책선 일대에 투입되는 전투병력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통상 철책선 근무자라 하면 비무장지대내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에 있는 전방초소(GP)나 높은 지대에서 적의 동향을 살피는 관측초소(GOP) 근무자를 일컫는다.이번에 사고를 당한 사병들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주로 통신·정훈·의무·취사·대대본부 등이 있으며 철책선 근무는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전방투입부대에 대한 지원업무와 함께 전방에서 올라오는 상황을 상급부대에 보고하는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이 때문에 적을 바라볼 수 있는 전방의 남방한계선 일대에서 근무하는 전방투입부대와는 달리 부대위치도 적 전방에서 관측되지 않는 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병력수도 철책선에 투입돼 6개월동안 내려오지 않는 전투부대에 비해 적다.〈황성기 기자〉
  • 「12·12」 「5·18」 23차 공판 지상중계

    ◎전씨 시국수습방안 수립 직접 지시·대통령 선출방법 전씨가 간선제 최종결정­권정달씨/“광주 기관장들 시위진압 과격하다” 항의­최웅씨 ▷권정달 전보안사 정보처장 증인신문◁ 김상희 검사=증인은 80년 3월 이상재 준위가 작성한 「K­공작계획」에 대해 전두환피고인에게 결재받았나. 권=그렇다. 송찬엽 검사=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보안사 참모들과 2,3일간 수시로 만나 논의한끝에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나. 권=논의를 거쳐 초안을 작성했다. 송검사=보안사 참모들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유학성,황영시,차규헌,노태우,정호용 피고인 등 신군부측 장성들과도 만나 논의했나. 권=그렇다. 80년 5월4일 무렵 청와대 근처 궁정동 중앙정보부장 안가에서 논의했다. 송검사=실행시기를 앞당긴 건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들이 5월22일 이후 전국규모의 시위를 계획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계엄해제문제를 논의할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나. 권=그렇게 알고 있다. 송검사=증인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개최되는 5월17일 오전 전두환피고인의 지시로 주영복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시국수습방안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제로 상정하여 결의한 다음 대통령에게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나. 권=그렇다. 송검사=전두환 피고인은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보도통제지침 결재과정에서 보도지침에 위반하는 경우에는 계엄사보도처에서 폐간조치하라는 취지로 「위반시 보도처 폐간」이라는 문구를 기재한 사실이 있는가. 권=그렇게 알고 있다. 송검사=육사 11기생인 김영균 변호사가 국보위설치령 초안을 작성한 후 5월22일 이원홍 청와대민원수석비서관에게 조문화 작업을 하게 했는가. 권=그렇다. 송검사=국보위 위원중 임명직은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전피고인과 협의해서 결정했나. 권=예. 송검사=분과위원은 보안사에서 존안하고 있던 자료를 중심으로 해 증인과 허화평,허삼수,이학봉 피고인 등이 선정해서 국보위에 통보했나. 권=그렇다. 송검사=증인은 80년 7월전씨에게 국보위 법사위원인 박철언 우병규씨를 보안사로 불러서 개헌작업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나. 권=예. 송검사=증인은 80년 7월 중순 전두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노태우 피고인과 정도영 보안처장,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허문도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등이 모인 자리에서 박철언 우병규씨가 만들어 준 개헌안 골격을 보고한 사실이 있나. 권=있다. 송검사=그 자리에서 대통령선출방법에 대해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간선제를 주장하고 허삼수 피고인만 직선제를 주장했으나 전두환 피고인이 최종적으로 간선제로 하기로 결정했다는데 사실인가. 권=예. 송검사=대통령의 임기는 허화평,허삼수 피고인 등이 6년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전피고인이 우병규,박철언씨에게 7년으로 하도록 지시했다는데. 권=6년이 너무 짧아 7년으로 늘리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송검사=80년 8월 21일 개최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피고인을 국가원수로 추대결의할 때 보안사 정보처에서는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읽은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것을 전군적 합의로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작성해준 사실이 있는가. 권=그렇다. 송검사=증인은 80년 7월 이상재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해 온 해직언론인 명단을 이광표 문공부 장관에게 건네준 사실이 있는가. 권=그렇다. 송검사=증인은 80년 6월 하순 보안사령관실에서 이종찬,윤석순,이상재씨 등과 함께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신당창당 작업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는가. 권=예. 김헌무 변호사=시국수습방안에 대한 토의가 처음 이뤄진게 5월 4일쯤이라고 진술했는데. 권=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허와평 비서실장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영일 변호사=시국수습방안의 초안을 작성하고 브리핑까지 한 증인이 오히려 핵심인물로 보이는데도 검찰의 기소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권=말하기 어려우나 검찰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진강 변호사=5월17일 오전 9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앞서 증인은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 안건을 전달했는데 이것은 증인이 단독으로 보고한 것이냐 아니면 전 보안사령관의심부름인가. 권=심부름이었다. 허화평 피고인=당시 모든 참모가 바쁠때이고 더구나 비좁고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비서실장실에서 증인과 나를 비롯해 5명의 참모가 2∼3일간 모여서 논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령관의 별도 지시가 있었나. 권=사령관의 지시는 없었지만 당시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전과 보고 뒤에 항상 참모들이 의논하고 상의하는 체계였다고 생각한다. 유학성 피고인=육군 대령이 군사령관,참모차장,육사교장,특전사령관을 소집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권=소집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왔으면 좋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유피고인=궁정동 안가모임의 연락을 담당했다는 허화평 피고인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겠는가. 권씨=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말한 것 뿐이다. 정호용 피고인=본인은 궁정동 중정안가에서 열렸다는 시국수습방안 논의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시국수습방안이 마련됐다고 가정하고 이는 업무상 필요한 방안이 마련된것이지 집권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잖은가. 권씨=초기에는 없었다. 그러나 나중의 일에 대한 최종판단은 사법부가 할일이라고 생각한다. ▷최웅 전11공수 여단장 증인신문◁ 김검사=5월 18일 시위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실을 사후 보고받아 알고 있었는가. 또 19일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에 참석,시위진압 방식이 과격하다고 항의를 받았던 적이 있는가. 최=그렇다. 김검사=20일 낮12시부터 다음날 오후4시까지 도청앞에서 시위대와 공방이 있었고 21일 오후 1시쯤 시위대에 발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최=20일 오후부터 시위군중에 포위돼 공방보다는 일방적으로 밀려났으며 21일의 발포사실은 사후 보고받았다. 김검사=21일밤 자위권 발동을 지시받고 실탄을 배급한 사실이 있는가. 최=사전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부대원의 안전을 위해 철수와 동시 자위권발동을 건의,21일 오후 4시에 철수와 자위권 발동,자위권 행사지침을 지시받았다. 당시 이미 시위군중이 무장화돼 있었고 전날밤 경찰관 4명이 사망했던 상태였다. 김검사=20일 오후 정웅 31사단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전교사에서 만나 광주상황을 보고하고 윤흥정,정웅등 광주지역 지휘관들의 우유부단성을 지적,대책마련을 건의한 사실이 있는가. 또 광주에 내려와 있던 정사령관과 상황에 대해 여러차례 논의한 적이 있지 않는가. 최=교체 건의는 아니었고 어려움을 하소연한 사실은 있었다. 정사령관에 대해서는 친정부모 같은 생각에 고충을 토로했던 것이다. 김검사=당시 전교사에 특전사 상황실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 사실인가. 최=그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한다.당시 모든 작전이 대대­여단­전교사­육본 체제로 이루어졌고 각종 정보계통을 통해 상황이 보고되고 있었는데 상황실을 따로 둘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김주상 변호사=20일 낮12시부터 11공수여단 일부 병력이 시위군중에 포위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당시 안부웅 61대대장이 증인에게 병력철수 명령을 내리든지 아니면 자위권 발동을 지시하든지 조속한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증인에게 건의했는가. 최=그렇다. 김변호사=시위가 갈수록 악화되자 증인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부대원의 안전을 위해 병력철수를 지시하거나 자위권 발동지시를 내려줄 것을 건의,21일 오후 4시부로 자위권 발동을 지시받은 사실이 있는가. 최=여단장으로서 부대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교사령관에게 그같은 건의를 해 승낙을 받고 실탄을 분배했다. 김변호사=도청 재진입작전은 소준열 사령관의 자체지시에 의한 것 아닌가. 최=소사령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정리=함영훈­조철현 기자〉
  • 「12·12」 「5·18」 21차공판/증인신문 지상중계

    ◎“「공수단 기죽이지 마라」 전씨메모 받았다”·정호용씨와 광주 재진입작전 협의­소준렬 증인/공수부대에 실탄배분한 사실 없어­윤흥정 증인 11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21차공판에서는 윤흥정·소준렬 5·18당시 전교사령관 등 증인 6명에 대한 신문을 계속했다. ○윤흥정 증인 ▲이부영 검사=31사단과 공수여단장에게 발포명령을 내리고 실탄을 배분한 사실이 있나요. ▲윤증인=없습니다. ▲이검사=상부에서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나요.있다면 어디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까. ▲윤증인=2군사령부로부터 받았습니다. ▲이검사=일선에서는 자위권발동지시를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윤증인=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검사=전교사사령부내 특전사 상황실 무전기를 통해 정호용 피고인이 보고받고 지휘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윤증인=전교사를 통하지 않고 특전사의 활동상황이 보고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증인에 대한 검찰측 증인신문이 끝나자 국선변호인인 김수연 변호사의 증인신문이 이어졌다. ▲김변호사=당시 자위권발동이 시민들에 대한 발포명령으로 인식된게 사실입니까. ▲윤증인=잘 모르겠지만 자위권은 원래 각 부대에 내려져 있는 것이어서 자위권 발동명령이 시달됐다면 이를 촉구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정호용 피고인의 요청으로 정 피고인의 변호인인 김주상 변소사가 윤증인에 대한 증인신문을 계속했다.) ▲김주상 변호사=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증인은 계엄확대에 반대했습니까. ▲윤증인=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김변호사=전군 주요지회관 회의에서 계엄확대외에 국회해산의 국보위설치 등이 논의됐습니까. ▲윤증인=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김변호사=진종채 2군사령관이 두번째 광주에 내려와 시위대의 도시게릴라식 난동에 대비해 과감한 조기분산 타격을 지시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윤증인=진사령관이 지시한대로 정웅31사단장에게 지시했습니다. ▲김변호사=정웅 31사단장은 증인에게 경찰병력만으로도 시위진압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증인이 세차례에 결쳐 병력출동을 독촉해 정사단장이 마지 못해 출동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윤증인=사실입니다. (김영일 재판장이 윤증인을 상대로 직접 신문을 했다.) ▲김재판장=당시 증인은 직접 예하부대장들에게 진압방법을 지시한 적이 있습니까. ▲윤증인=대대장들이 알아서 판단해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어 김재판장이 피고인들에게 신문기회를 주자 허화평 피고인이 일어나 윤증인을 상대로 신문했다.) ▲허피고인=상황일지는 부대상황을 그때그때 시간대별로 기록하는 것으로 특히 고급지휘관들의 통화내용의 경우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기재가 되질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증인은 통화내용을 상황일지에 기재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나요. ▲윤증인=그렇습니다. ▲정피고인=당시 보안사령관이 31사단이나 특전사에 작전지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윤증인=없습니다. ○소준렬 증인 ▲이부영검사=5월20일 황영시 피고인으로부터 전두환 피고인과 협의하여 증인을 전교사령관에 임명키로 했고 9월 중장으로 진급시킨다는 전화통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소증인=있습니다. ▲이검사=증인은 5월22일전교사령관에 취임한 이후 광주시민 수습대책위원회와의 간담회도중 군의 과잉진압 사실을 인정했습니까. ▲소증인=그렇습니다. ▲이검사=정호용 피고인이 광주 전교사 감찰참모실에서 무전기를 통해 공수여단장들과 진압대책을 논의한 사실을 알았습니까. ▲소증인=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검사=5월23일 광주로 내려온 정호용 피고인으로부터 「소선배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고 공수부대원의 사기를 죽이지 마십시오」라는 내용과 전두환피고인의 친필 메모를 전달받은 적이 있습니까. ▲소증인=메모지는 전달받았지만 공수부대원들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내용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검찰조사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이검사=증인은 5월24일 15시경 전교사령관 사무실에서 정호용피고인과 광주 재진입작전에 대하여 협의하던중 정피고인이 증인에게 「도청에는 3공수여단을,사직공원에는 7공수여단을,전일빌딩에는 11공수여단을 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까. ▲소증인=있습니다. ▲이검사=황영시 피고인이 5월25일 오후 김재명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와 증인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전달했습니까. ▲소증인=그렇습니다. ▲전창렬 변호사=검찰조사에 따르면 정호용 피고인이 광주에 있는 동안 증인의 지휘권에 자주 간섭하고 광주비행장에서 3공수여단을 직접 지휘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있는데 사실인가요. ▲소증인=통제나 간섭을 한 것은 아닙니다.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간접적인 도움을 받았고 적어도 내가 부임한 이후에는 「지휘권 이원화」란 얘기는 맞지 않습니다. ▲김재판장=전두환 피고인이 정호용 피고인을 통해 메모를 전달한 것은 증인의 지휘권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던 것 같습니까. ▲소증인=공수부대원들 사기 죽이지 말라는 내용에 감정이 약간 상했지만 지휘권에 영향을 주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정호용 피고인=제가 5월23일 상오 서울에 있다가 하오에 내려와서 선배님께 공수부대를 철수시켜야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언제 메모지를 건네줬습니까. ▲소증인=메모지는 확실히 받았습니다.
  • 화랑무공훈장 43년만에 주인품에/노 일병 김일온씨 눈물의 전달식

    ◎“상신” 통보받고 제대… 세월지나 포기/현역 소령 아들 추적끝 “미지급” 확인/당시 소속사단서 전달… 무동타고 감격 6·25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빛나는 일등병」이 43년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되찾았다.현역 육군 소령인 아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덕이다.호국보훈의 달 6월에 옛 소속 부대에서 아들의 군복을 입고 훈장을 전달받았다. 지난 10일 창설 기념행사가 열린 제7사단에서는 노구의 김일온씨(69·농업·경남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526)가 군복 차림으로 8연대 1대대 1중대원의 무동을 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부대원들은 김씨의 43년 후배.자랑스런 「화랑무공훈장」도 가슴에 안았다. 육군 ○○부대 민심참모로 복무 중인 아들 김정태소령(40)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김소령은 아버지로부터 6·25 당시 훈장을 받았지만 손에 쥐지는 못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통보를 받으면서 제대했기 때문이다.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포기하고 말았다. 김소령은 지난 2월 같은 말을 듣고 훈장을 찾는 것이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여동안 기록을 뒤진 끝에 지난 5월 육군 부관감실 상훈과와 총무처 상훈과에서 화랑무공훈장이 미지급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훈장을 확인한 것이다.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 김씨는 훈장을 타기는 했지만 무슨 훈장인지는 알지 못했다. 김소령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씨의 투철한 군인 정신 때문이었다.김씨는 평소 『내 생일은 잊을 수 있지만 생사의 기로를 함께 하던 전우들과 군번(9241580)은 잊을 수 없다』며 43년전의 전역증과 병역수첩 등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김소령은 훈장을 확인하자 아버지의 옛 소속부대였던 7사단 사단장에게 아버지가 정식으로 신고한 뒤 훈장을 받도록 해달라는 서신을 보내 허락을 받아냈다.전역 후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도 6·25때의 공적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준 것이다. 김씨는 52년 9월에 입대해 53년 전역 때까지 7사단에 소속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날 행사를 마친 뒤에는 당시 격전지였던 화천댐 주변을 둘러봤다.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에 중국군의 공격도 치열했고 국군의 희생도 컸던 곳이다. 휴전 이틀 전 김씨의 바로 옆에 박격포탄이 떨어졌으나 나무뿌리 사이에 박히는 바람에 불발,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김씨는 후배들에게 『군인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라며 『생전에 통일을 볼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사람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강충식 기자〉
  • 대전국립묘지에 1천5위모셔

    ◎6·25때 전설의 유격대/켈로부대원 위패 봉안/휴전가지 4,445차례 전투/기습작전으로 7만여명 살상 6.25전쟁때 군번도 계급도 없이 북한 및 38선 접경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 숨져간 유격대원 1천5위에 대한 위패봉안식이 대전국립묘지 현충탑에서 15일 하오 「한국유격군전우회 총연합회」회원및 국방부관계자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한국유격군전우회 총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50년6월 북한군이 남침하자 공산집단에 맞서 일어선 청년,학생등 유격대원들은 4만여명에 이른다.이들은 38선 접경 동·서해연안 30여개 도서에서 해상침투와 적후방교란 등 기습작전에 참여했다. 이번에 봉안된 1천5위의 혼령들은 이들중의 일부다. 이들은 그동안 시신이 없으면 국립묘지에 봉안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 그대로 방치돼오다 40여년만에 안치됐다.지난해 6월 2천4백10위의 위패가 대전국립묘지에 봉안된데 이어 두번째다. 흔히 「켈로부대」라고 불린 유격부대중 「돈키부대」와 「울프 팩」등이 특히 유명했다.이들 부대는 백령도와 강화·교동도에 각각 1만2천여명,속초·주문진에 6천여명,영도·덕소에 1천여명이 활동했으며 지역별로 「구월산」 「백호」 「백마」 「커크랜드」 「타이거여단」 「활민」 등 별도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들은 휴전때까지 모두 4천4백45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7만여명의 적을 살상했다. 유격부대원들은 휴전후인 54년2월 7백53명이 장교로,1만2천여명이 사병으로 입대하는 등 우리 육군에 편입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권승훈 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사무국장은 『6.25기간중 모두 1만여명의 유격대원들이 전사 또는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때늦은 감이 있지만 국립묘지에 안장돼 고인들에 대한 짐을 던 것같다』고 말했다.〈구본영 기자〉
  • 북의 “대남 철저보복” 발언 왜 나왔나

    ◎한국인 납치·테러 움직임 심상치 않다/유학생·상사원 등 인적사항 상세파악/중·러 등에 특수공작팀 파견… 기회노려 김정일의 전 동거녀인 성혜림 여인의 탈북사건과 관련,북한의 한국에 대한 보복차원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돼 경각심을 높여주고 있다.북한은 한국인이 많이 찾는 중국·러시아 등에 특수공작팀을 극비에 파견,한국인 테러·납치를 위해 공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최근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이 이와 관련된 정보와 첩보들을 입수,중국에 체류중인 유학생·상사원 등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지난 20일 북경을 방문한 공로명 외무장관도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북한측의 한국인 납치·테러 가능성을 상기시키면서 한국인들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이에앞서 북측은 성여인사건이 우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남조선은 우리 최고지도부를 악랄하게 헐뜯는 전대미문의 대죄를 저질렀다.필요한 시기에 수단과 방법을 다해 무자비하고 철저한 보복을 취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비단 이러한 협박이 아니더라도 현재 북한이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이나 그동안 북측이 자행한 여러차례의 테러와 납치에 비추어 중국에서의 만행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우리 공안당국의 분석이다.북한의 대남 테러·납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가깝게는 지난해 7월엔 중국 연변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안승운 목사를 납치한 바 있다. 북한의 납치·테러가 다발적이며 치밀한 계획아래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은 최근 북한인들의 탈출과 귀순사례가 급증하고 있는데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특히 망명·귀순이 당간부의 자녀와 외교관등 특권층으로까지 확대됨에 따라 북한의 대남보복심리는 현재 극에 달하고 있을 것이다.여기에 성여인의 탈출 보도는 가뜩이나 궁지에 몰린 북한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현재 북한측이 한국인 테러·납치를 위해 특수공작조를 파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중국·러시아등 한국인의 왕래가 잦으면서 북한 공관이 있고 북한과의 관계가 비교적 좋은 곳들이다.중국의 경우 1만8천여명의 한국인이 있어 북한이 제일 눈독을 들이고 있을 공산이 크다.지역별로는 북경에 유학생 3천2백명을 포함해 약 5천2백명,길림성 연변지역에 3천여명등 동북 3개성에 많이 체류하고 있다.특히 북한과 인접한 중국의 연길등은 지리적으로 북한의 특수공작조가 활동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그래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인들은 요즈음 외출할 때 각별히 조심하고 있는 실정이다.중국이나 러시아외에 아프리카나 중동지역등 북한 공관이 있는 지역등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의 주의가 있기 전에도 북한은 1개팀에 4∼5명으로 구성된 5개조 내외의 특수공작팀을 해외에 파견했다는 정보가 입수된 바 있다.북한의 특수공작팀은 특수부대원들로 이들은 최근 MBC­TV에서 보도된 바와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테러·파괴훈련을 받은 자들이다.이렇게 맹훈련된 북한 공작팀은 해외에 나와있거나 해외여행이 많은 우리 기업인이나 상사원들의 인적사항,숙박호텔,단골음식점,주요 접촉인물등을 상세히 파악해놓고 대북교역이나 합작알선등을 구실로 접근,납치를 기도하는 수법을 쓸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공안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 공작원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중국이나 러시아등지에 여행할 상사원·관광객등과 현재 체류하고 있는 유학생·교민·상사주재원등에겐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체재국 당국의 신변보호에 앞서 각자 스스로가 북한 특수공작팀의 납치나 테러대상이 되지않도록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 체첸반군 어린이·부녀자인질 전원 석방

    ◎러측선 현장주변 장갑차 등 추가 배치 【페르보마이스카야·소비에츠코예(러시아) AFP 로이터 연합 특약】 러시아 페르보마이스카야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체첸반군 게릴라들은 억류중인 인질중 부녀자 17명과 어린이 6명등 부녀자와 어린이 23명 전원을 석방했다고 다게스탄 경찰청장이 12일 밝혔다. 알리 알리예프 하사뷰르트지역의 경찰청장은 그러나 인질들이 협상의 일부로서 석방된 것인지 무조건 석방된 것인 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인테르팍스통신은 체첸게릴라들은 아직도 1백50명의 민간인 남자들과 37명의 경찰관을 인질로 삼고 있다고 다게스탄 경찰이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반군게릴라는 이날 재개된 러시아와의 인질석방협상에서 러시아측에 대해 인질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체첸으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모든 인질을 즉각 석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군은 반군이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페르보마이스카야 주변에 장갑차등 병력을 보강하고 있다.러시아군은 이날 군용트럭,장갑차등을 추가로 배치하고 헬기가 선회비행하고 있는 마을상공에는 하오부터 러시아군 항공기 1대도 추가로 투입했으며 위장복을 입은 특수부대원들을 마을에 근접 배치시켰다.러시아군은 또 사태가 악화될 경우에 대비,페르보마이스카야에서 5㎞ 떨어진 소비에츠코예마을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대피시켰다. 러시아 보안군 대변인은 무력사용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 오늘 12·12 16돌… 순직 정선엽 병장 모친 한점순씨

    ◎“군인본분 지킨 아들명예 회복됐으면”/공수부대 국방부 난입때 “초소 사수” 『장한 내 아들 선엽아!이제는 편히 잠들거라』 11일 하오 2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23묘역 38315호 「육군 병장 정선엽」의 묘비앞. 지난 79년 12·12사건 때 국방부청사를 지키다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은 정선엽(당시 23세)병장의 어머니 한점순(73·관악구 신림본동)씨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아들의 묘비를 어루만졌다. 한씨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사건 주동자들이 사건발생 16년만에 군사반란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으며 역사적 단죄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12·12 다음날 『아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전남 영암에서 상경,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려간 한씨는 피투성이가 된 아들의 차디찬 시신앞에서 혼절했다. 정병장은 조선대 전기공학과 2학년에 재학하다 입대,제대를 3개월 남기고 있었다.5남매 중 넷째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돌연한 아들의 죽음앞에 한씨는 충격을 받아 한때 불면증에 시달렸고 악몽을 잊기 위해 아들의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 한씨는 『신군부측이 처음에는 아들이 「반혁명군」이라며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었다』고 회고하고 『결국 국립묘지에 안치시킬 수는 있었지만 이제서야 제대로 명예회복을 하게 돼 너무나 다행』이라며 울먹였다. 정병장의 갑작스런 죽음 뒤 가족들은 모두 기독교에 귀의했다.하지만 어떻게 유명을 달리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그러다 6년전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로부터 「죽음의 진실」을 전해듣고 또한번 통곡했다. 국방부청사 사수명령을 받고 후문을 지키고 있던 정병장은 공수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하며 난입하자 대부분 초병들이 달아났지만 끝까지 저항하며 청사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한씨는 『숨지기 일주일전쯤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던 아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 통일대비 남북화폐 통합 연구/국정감사 정부 답변

    ◎북,한두개 핵탄제조 플루토늄 보유/전역군인 취업학교 설치 적극 추진 국회는 27일 재정경제·국방위 등 12개 상임위별로 25개 소관부처 및 산하기관을 상대로 사흘째 국정감사를 계속했다. 홍재형 경제부총리는 재정경제위의 재정경제원에 대한 감사에서 『남북교류 협력이 늘어나 경제통합 단계에 이르게 되면 화폐통합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고 전망하고 『아직 남북관계가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현재 관계 전문기관에서 화폐통합 문제에 대해 연구차원의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 부총리는 이어 『본격적인 남북경협에 대비,교역대금을 결제하는 청산계정을 설치하기 위해 설치기관과 계리방법,차액 결제방법 등에 대해 관계부처에서 연구 중에 있다』면서 『인적교류에 따른 환전 방법은 북한 화폐와 직접 환전하거나,필요한 다른 국가의 화폐와 환전하는 방법 등 두 가지가 있으나 달러화로 환전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국방위의 국방부에 대한 감사에서 이양호국방부장관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협상과 관련,『대미 무역역조와 경수로 및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지원등 전반적인 한미관계속에서 협상하는 전략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이장관은 또 『북한은 한두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으며 원시적 핵폭발장치를 제조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수준으로 판단된다』면서 『그러나 완전한 핵무기를 개발했을 가능성은 의문시된다』고 답변했다. 이장관은 5·18 문제에 대해 답변하면서 『군검찰 조사결과 주남마을 양민사살은 공수부대원들의 오인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현 김동진합참의장이 지휘관으로 있던 20사단 61연대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전역자 취업대책과 관련,이장관은 『현재 추진중인 군인복지기금법에 예비역지원방안을 포함할 계획』이라며 『국방부 산하에 취업학교와 전역군인지원회 설치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날 재정경제위의 재정경제원에 대한 감사에서 유준상·박태영 의원(국민회의)등 야당의원들은 『일반회계에서 올해의 49조9천8백79억원보다 16%가 팽창한 58조31억원의 초팽창예산안을 편성한 것은 총선을 의식한 선심용이 아니냐』면서 팽창예산이 물가에 미칠 영향 등을 추궁했다. 또 서청원 의원(민자)등 여당의원들은 『전직대통령 비자금설 같은 근거없는 유언비어가 나도는 이유가 금융실명제의 허점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실명제의 철저한 시행을 통한 금융관행의 개혁을 촉구했다.
  • 미 「힉컬슨 문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포로처리 싸고 첨예대립 입증/한국측 일방적 북 포로 석방에 미 당황/반공포로 중립국 송환위 이양도 검토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의 소개는 한국전쟁 연구의 실증성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서울신문 발굴 관련자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북한군 포로문제는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1950년 7월4일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당국에 자신의 부대에 의해 포획된 북한인들은 『문명국가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대우받을 것』을 보증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그는 포로가 된 그의 부대원들에게도 같은 대우를 기대하는 경고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950∼19 51년간의 문서에는 북한군 포로명단,포로중 장교명단,포로사망자 명단등을 비롯해 북한군 포로에 대한 심문,중공군 참전 이후 포획한 중공군 포로 처리문제,1.4후퇴 이후 북한군 전쟁포로의 철수문제등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아울러 공산군이 행한 포로잔학행위에 대한 항의문서,전쟁포로들이 유엔사무총장에 보내는 탄원서,전쟁포로 석방문제등까지 언급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시기 북한군과 중공군측도 미군과 유엔이 포로를 학대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이에대해 미군측은 미군포로를 위한 국제 적십자활동의 강화,북한 점령지역내 한·미간의 항공수송협정,한일간의 어업분쟁,미군·유엔군 포로에 대한 구조,원호문제등을 검토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또한 공산군측의 포로학대 비난에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대한 중립국의 검사방안을 신중히 검토했고 이에따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1952년 하반기가 되면서 포로문제는 정전협정과 맞물려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1952년 10월1일 발생한 제주도의 중공군 포로문제를 필두로 거제도포로수용소 폭동은 이들에 대한 처벌여부를 둘러싸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정전협상이 궤도에 오르면서 전쟁포로의 송환,교환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해서 포로 전반에 대한 송환,교환문제가 제기되었다. 1953년 초반부터 판문점에서 벌어진 정전협상에서는 이들 포로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중국 공산측과 미국·유엔군측이 날카롭게 대립했음을 문서들은 보여준다.한편 정전협상의 고비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 북한포로 석방으로 미국측이 혼비백산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이와함께 반공포로를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기는 문제도 적극 검토되었으며 특히 인도가 중립국 감시단에 참가하는 문제가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결국 이같이 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전쟁이 전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포로수용소와 포로문제를 둘러싼 선전전,심리전의 일환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이 포로관계 문서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불 핵실험 임박”… 무루로아 주변 표정

    ◎남태평양 130개섬 주민 “핵공포”/“어족 감소” “암 발병” “섬 수몰” 위기감/타히티 등 불령도서국 항의 주도 시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남태평양의 1백30개 섬 주민들은 요즘 프랑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무루로아섬에서 실시할 프랑스의 핵실험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프랑스는 오는 9월부터 내년 5월까지 이곳에서 8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할 계획이다. 식민 종주국에 대한 규탄 진원지는 무루로아섬에서 북서쪽으로 1천㎞ 떨어진 타히티 섬.호주·뉴질랜드와는 달리 타히티 주민들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고 방사능오염에 대한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과거 핵실험뒤 무루로아섬에서 보트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무인도 근처에서 잡은 상어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숨졌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특히 각종 어류의 먹이가 되는 산호충이 인근 해역에서 점차 줄어 들고 있어 21만여 주민들의 생계 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이곳 어민들은 울상을 짓는다. 하지만 프랑스당국은 해양오염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을뿐 핵실험장 종사자들에 대한 건강통계를 발표한 적은 없다.반면 주변 쿠크제도 의료진들은 오염된 물고기를 먹은 연안지역 주민들에게 백혈병과 암질환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하라 사막에서 지난 66년2월에 남태평양으로 핵실험장을 옮긴 이래 프랑스는 대기권 핵실험 44차례를 비롯,1백20여차례의 지하핵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68년 한 해에 히로시마 원폭의 1백50배를 능가하는 핵실험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청정해역에서 뛰노는 풍부한 어족자원을 지키자』 프랑스의 핵실험이 임박해지자 타히티,쿠크,솔로몬,마샬등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주민들간에는 한동안 수그러들었던 독립운동 열기도 되살아나고 있다.특히 타히티 수도 파페에테에서는 원주민들이 북소리와 함께 요란한 민속악기를 울리며 연일 프랑스 규탄시위가 한창이다.『마오리족에 의한 「마오리의 나라」를 만들자』는 게 이들의 외침이다.환경보호를 내세우는 그린피스회원들의 지원도 만만치않다. 1백50년간 프랑스가 폴리네시아를 통치해 왔지만 이들 지역의 실업률은 현재 25%에 이르고 있다.반면 향수·포도주·자동차등 값비싼 프랑스제품은 시중에 넘쳐 흘러 1인당 무역적자액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다.이 지역의 경제규모는 보잘 것 없고 「관광산업」과 어업이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지역 주민들은 30여년전 굉음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높이 치솟은 이래 무루로아섬 주변은 「콘크리트 정글」로 변했다고 강조한다.섬전체는 그동안 수많은 핵실험으로 움푹 꺼진 곳이 많아 마치 벌집을 방불케 하고 있다.핵실험이 있기전 프랑스 외인부대원들은 각종 장비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현장을 콘크리트로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실험이 끝나자마자 군인들은 떼죽음을 당해 해변가로 밀려든 바닷가재·물고기등을 치우는등 신속한 뒤처리에 들어간다.섬이 조각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균열이 생긴 곳을 찾아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로 시멘트를 만들어 철제빔을 넣고 메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핵실험이 계속될 경우 폭발음 진동으로 인해 무루로아섬이 통째로 바닷속으로 가라 앉을지 모른다고 우려한다.초승달처럼 생긴 이 섬은 전체길이가 40여㎞에 불과하고 해수면보다는 불과 3∼5m 높을 뿐이다.
  • 나카소네 일 전총리/“군 복무때 위안소 설치”/전쟁체험기 발견

    【도쿄 연합】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 전일본총리가 태평양전쟁 때 해군중위로 복무하면서 자신이 부대원들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고 밝힌 전쟁체험기가 발견됐다. 이 전쟁체험기는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대표 황정신일)가 지난 93년 10월부터 일본국회도서관 소장도서를 중심으로 일본군 관계자의 전쟁체험기와 부대사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나카소네씨는 지난 78년 출판된 「끝나지 않은 해군」(송포경기 편저·문화방송개발센터 출판부)에 실려 있는 체험기에서 23세의 나이에 필리핀·인도네시아 설영대 경리장교로서 3천명의 대부대를 지휘하면서 겪은 상황을 기술하면서 당시 위안소를 만든 사실을 자랑처럼 밝히고 있다.
  • 5월20일/시위진압때 4명 총격 사망/검찰수사로 재구한「5·18」

    ◎휴교항의 전남대생 18일 공수단과 첫 충돌/21일 무장시민군 도청 접수… 최소 38명 희생/시민군 23일 “무기회수”… 군27일 도청점령 “끝” 상오10시 전남대앞에서 휴교조치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과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간에 충돌.하오2시40분쯤 학생·시민들이 금남로로 진출,진압에 실패한 경찰이 군병력 출동을 요청해 7공수 33·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섬.이 과정에서 첫사망자 발생.시위대 2천여명으로 불어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 시위.하오5시50분 11공수 61대대 진압에 투입됨.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 금남로 일대에서 화염병·투석 시위.상가대부분 철시한 상태에서 11공수 61·62·63대대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연행함.하오2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서 과격진압항의및 연행자 전원석방요구.하오5시 11공수63대대 장교가 M16소총으로 시위대에 첫발포.하오11시 육본이 3공수 5개대대에 추가투입명령. 전남도교위 광주시내 중고교에 임시휴교조치.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17정을 시위대가 탈취.하오4시 금남로일대에 시위군중 2∼3만명 운집하고 택시·버스·트럭 등 차량이 시위에 합세.하오9시45분 진압상황 보도요청을 거부한 광주문화방송국 방화.하오10시30분 진압군에 실탄지급.M60등으로 공포사격.하오11시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을 시위대가 장악.광주역일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총격사망. 20사단 61·62연대 추가투입.시위대들이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 등지로 진출,나주경찰서등에서 총기4천9백여정·실탄13만여발·수류탄2백70여발 탈취해 무장.정오 전남대·도청등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무장시위 벌임.하오1시30분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하오1시35분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하고 진압군 자위권 발동.하오4시30분 전남도청·도경을 시민군이 접수.최소 38명이 총격사망. 광주외곽지역 총격전으로 수십명 사망.상오9시 지역유지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하오3시 도청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개최. 상오9시35분 수습위 시민군들 상대로 무기회수 시작.상오10시 11공수 62대대 병력이 매복한 주남마을 부엉산아래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타고있던 여고생등 10여명 총격사망.하오3시 도청앞 광장에 5만시민이 운집해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개최. 상오9시55분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부대복귀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진압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병3명 사망.하오1시55분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총격전을 벌여 9명 사망. 강경학생·청년들이 수습위를 대신해 무력대항결의.무기반납도 백지화.상오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수립지시해 작성됨.하오5시30분 최규하 대통령 광주방문,담화문발표. 상오10시30분 소준렬 전교사령관 주재로 진압작전 지휘관회의 개최해 27일 새벽 작전개시키로 결정.하오6시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쟁 주장하는 강경파 2백여명이외에 시위대 해산함. 상오4시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병력이 전남도청 후문으로 들어가 1시간21분만에 도청점령.7공수33대대 8·9지역대 병력도 상오5시6분 광주공원 점령.11공수61대대 4중대 병력은 상오4시46분 도청주변 주요건물 점령.20·31사단은 상오7시15분쯤 광주시내 진입완료하고 10분만에 모든 작전완료.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과정에서 시위대 16명,계엄군 3명 총격사망. ◎고소·고발인 향후 대응방향/「검찰 결성」 불복땐 어찌될까/항고·재항고 기각땐 헌법소원내야/헌법재판소서도 「결정번복」 힘들듯 1년2개월 가량을 끌어온 「5·18」 고소·고발사건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고소·고발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법률적 대응이 주목된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대응방안은 3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해당 검찰청인 서울지검을 통해 상급청인 서울고검에 항고하는 것.항고가 기각되면 대검에 재항고를 할 수 있으며 재항고마저 기각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길이 열려 있다.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검이나 대검이 1차 결정 당사자인 서울지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사전조율결과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고·재항고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해도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이 관철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인용」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용결정이 곧바로 검찰의 기소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헌법소원을 통해 검찰의 결정을 뒤엎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우선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안이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자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재가 검찰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린 뒤 시효만료일 이전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돼 2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점으로 미루어 시간상 공소시효와 본안에 대한 판단을 함께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이 헌재에서 다뤄질 경우 검찰이 유보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여부에 대해서도 심판해야 하므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다.종래 통치행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헌재의 헌법판단대상이라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헌재의 인적 구성이나 12·12사건 당시 보인 소극적 자세 등을 감안할 경우 헌재가 8월초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여부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소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소·고발인들의 향후 법적대응은 실익보다는 검찰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불복」차원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장윤석 공안부장 일문일답/“어떤 비판 제기돼도 최선다한 결정”/고소인 주장 입증할 증거 발견못해/양민학살한 계엄군 처벌도 어려워 「5·18」고소·고발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8일 하오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 상당한 국민적 반발과 파장이 예상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해야할 고유의 일이지만 시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80년 8월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과정과 발포경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입증자료가 없다」고 발표한 것은 검찰수사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충분한 자료수집과 검토를 했지만 고소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전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날 시기를 전후해 강압과 불법행위는 정말 없었는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최전대통령은 서면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또 세간에는 이 과정에서 김정렬 전총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는데 김씨 역시 사망해 강압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없었다. ­80년 4월 권정달·허삼수·허화평씨 등이 모여 국보위 설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권찬탈등의 의도가 있었다는데. ▲조사결과 4월 당시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80년 8월 최전대통령이 하야하고 간선제를 통해 전전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두사람간에 강압이 없었다는 말인가. ▲최전대통령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으며 전전대통령의 경우 「당시 최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답변서만을 냈다. ­광주시민등 양민학살 부분의 책임자들에 대한 개별적 처벌은 가능하지 않은가.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지역에서 총격을 가해 주민 2명을 사망케 한 일이 있었으나 발포자와 구체적 경위에 대해 특정되지 않는등 행위자를 가리기 어려워 처벌이 어렵다. ­12·12사건 때는 군형법상 반란죄등 혐의를 인정했는데 5·18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12 사건의 경우 소장급 장성이 별넷인 장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군형법상 반란죄 인정이 가능했지만 이번 사건은 통치권 찬탈을위한 사전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당시 전씨가 모든 과정에서 부단히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므로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엄군에 의한 주민학살만이라도 처벌할 수 없는가. ▲공소시효 5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군형법상 군지휘계통을 들어 책임자를 처벌하기도 어렵다.구체적 행위자등 기본적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데 입수했나. ▲입수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서였을 뿐 정권찬탈 음모는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전전대통령 정권창출위한 기초행위/「5·18」수사 사태의 성격

    ◎계엄확대는 강력한 정국주도의 표현/국보위를 5공 탄생의 산실로 삼아 위헌·위법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행위는 외형적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즉,최전대통령은 중앙정보부 기능의 효율성을 위해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고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재가했으며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을 국가보안목표에 투입하고 정치 목적의 옥외집회·시위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 소요조종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법에 따라 신중하게 조사토록 당부했으며 합수부는 주요 정치인과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 이와함께 대통령을 보좌하고 내각과 군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국보위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하고 전전보안사령관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최전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이거나 국가 긴급권과 법령에 근거한 집행행위들로서 외형적으로는 최전대통령의 국가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확대,정치활동의 금지,국보위의 설치등은 전전사령관이대통령의 지시없이 추진한 조치들로서 정권 창출의 기초행위로서의 실질도 갖고 있다. 먼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정보를 장악하고 각료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집권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계엄 확대는 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하게 되고 비상기구의 설치나 국회의 해산,정치활동의 규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야 하는데도 전전사령관이 참모들에게 입안하게 한뒤 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국장악 의사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데도 전격 추진,집권한 사실에 비춰 전전사령관은 계엄 확대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다. 특히 정치활동 금지는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았고 정치권을 배제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사가 강력히 시사된 것이다. 더욱이 가택연금은 법적 근거도 없고 불법구속·가혹행위 시비가 야기되고 재산헌납·공직사퇴도 정국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제거한 것으로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전국 비상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행정을 관장하게돼 있음에도 국보위상임위가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내각을 통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또 전전사령관은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자 헌법개정안을 작성,개헌작업에 반영하는 등 국보위를 5공화국 탄생의 산실로 삼았다. 결국 국보위는 자문기구로서보다는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부를 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돼 전전위원장이 실질적 주도자임을 과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전대통령의 국사행위의 외관을 갖고 있어도 실지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 공백기에 12·12 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전사령관이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과 국군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다. 다만 광주민주화시위의 발단이 된 전남대와 도청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기습적 대학점령 등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씨 등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부의 체포에 반발,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식의 강경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하자,남녀노소나 시위가담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가격하거나 체포하는 강력한 공격적 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자들을 반라로 만들어 기합을 주기까지 하여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또 보도통제로 악성 유언비어가 발생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과 격렬한 저항감을 야기,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에 공수부대에 차량돌진을 감행했고 공수부대가 발포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시민들도 무장저항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5·18사건 수사 일지 ▲94·5·13=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7·13=서울지검,피고소인중 현역군인 14명 국방부에 조사의뢰. ▲10·19=한완상씨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22명,전·노 전 대통령등 10명 고소. ▲10·28=장기욱·이부영의원 등 민주당 「민주개혁 정치모임」소속 의원 29명,전·노 전대통령등 신군부 인사 23명 고발(이에 따라 피고소·고발인은 모두 58명으로 늘어남). ▲10·31=5·18관련 고소고발 사건 조사 착수. ▲11·23=정동년씨 소환조사. ▲11·30=장기욱의원 조사. ▲12·1=5·18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의장 이신범씨 조사.국방부 검찰부,5·18 관련 현역군인 90여명 수사착수. ▲12·2=KNCC 인권위원장 김상근목사 조사. ▲12·5=5·18 당시 31사단장겸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정웅씨 소환조사. ▲12·1∼16=당시 전교사 사령관 소준렬·윤흥정씨 소환. ▲12·17=피고발인중 차달숙씨등 3명 무혐의 처분. ▲12·19=신현확전총리 조사. ▲94·12·21∼95·1·20=당시 공수부대등 진압부대의 대대장급 군간부 소환조사. ▲95·1·25=이희성씨 소환. ▲2·1=국방부 검찰부,김동진합참의장 등 현역군인 12명 조사착수. ▲2·9=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씨 소환조사. ▲2·15=당시 내무장관 김종환씨 소환조사. ▲2·17=남덕우 전국무총리,신병현 전부총리등 국보위위원 17명 서면조사. ▲2·21=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소환조사. ▲3·21∼4·7=당시 20사단장 박준병의원에 대한 소환조사를 시작으로당시 보안사 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국장 이학봉전의원,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의원,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의원,특전사령관 정호용의원 소환조사. ▲4·11=당시 3공수여단소속 상사 첫 소환. ▲4·14=민주당 김옥두·한화갑의원,전두환 전대통령 등 10명을 내란혐의로 고소. ▲4·14=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씨 재소환. ▲4·22=당시 보안사언론팀장 이상재의원 소환. ▲4·26=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재소환. ▲4·29=전·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서 발송. ▲5·11=「헬기 총기난사」주장 미 피터슨 목사 조사. ▲5·19=노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2=전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7=최전대통령,검찰 방문조사 불응 통보. ▲7·18=최종 수사결과 발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