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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P 총리인준 반대”/한나라,당론 확정/여야 갈등국면 심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로 확실시되는 새정부 첫총리 국회 인준을 놓고 한나라당측이 20일 반대당론을 확정함에 따라 여야 갈등국면이 심화되고 있다. 여야3당은 이날 하오 총무회담을 갖고 인준문제에 대한 절충을 시도했으나 오는 25일 하오 2시 본회의를 열어 인준동의안을 처리한다는 원칙외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IMF사태로 인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총리임명동의안이 부결될 경우 새정부 초반부터 국정공백이 우려되고 있어 여야간 물밑접촉을 통한 돌파구마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나라당은 이날 하오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새정부 초대총리 임명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결의문을 채택,김종필 총리 인준 반대를 표결없이 당론으로 확정하고,당론 관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25일 국회본회의직전 의원총회를 다시 열어 논의키로 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에 따라 이날 상오 국회 국민회의 총재실에서 ‘8인협의회’를 열어 한나라당측의 인준거부 가능성에 대비해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한나라당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이날 하오 마포불교방송 대법당에서 국민회의 연등회와 자민련 불자회 공동주최로 열린 ‘경제난극복과 국민화합을 위한 기원법회’에 참석 ,“한나라당은 큰 결심을 해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의 총리인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강조했다.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총리 인준 타협하라(김호준 정치평론)

    ○여야 모두 절박한 입지 타툼 새 정부 출범일이 다가오면서 ‘JP총리’ 인준문제를 둘러싼 정치권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거대 야당 한나라당은 ‘JP총리 반대’를 당론으로 굳힐 태세다.반면에 신여권은 “난국타개에 야당이 협조해야 한다”고 한나라당을 압박하며 ‘JP총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여야는 새 대통령 취임일인 오는 25일 국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격돌할 판이다.만일 국회가 JP총리 임명안을 거부한다면 정치권은 물론 온 나라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신여권은 ‘JP 총리’는 지난 12·18 대선에서 이미 국민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DJP 공동집권을 대선 최대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기 때문에 JP총리 임명동의는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다.그러니 야당은 군소리 말고 JP총리 임명안을 지지하라는 것이다.아니면 각개격파하겠다는 것이 신여권의 으름장이다. 물론 한나라당측 입장은 그게 아니다.‘JP총리’는 DJP의 내부합의일 뿐 존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더구나 3김청산을 대선공약으로 내건한나라당이 IMF 시대에 역행하는 구태의연한 ‘JP총리’를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한나라당의 대통령제 고수 입장도 내각제 추진공약을 내건 JP를 거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헌정사를 돌아보면 총리가 국회에서 인준을 거부당한 사례가 몇차례 있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총리는 2인자인 때문에 임명안이 부결되면 제2,제3의 대안을 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JP총리’가 거부될 경우 대통령만 있고 총리와 내각은 없는 기형적인 정부가 일시 존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새 정권은 DJ와 JP의 공동정권이다.‘JP총리’는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를 받는 ‘대독 총리’가 아니라 독자적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파트너이다.공동정권의 한 축인 JP가 무너지면 DJ의 국정운영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은 물론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절박하기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물론 이 경우는 역의 상황이다.JP총리의 등장은 한나라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지금 구여권에선 신여권으로 이적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다만 국민회의로 바로 가기엔 정서가 맞지 않아 주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그런 참에 JP총리가 등장하면 때를 만났다는 듯 자민련행이 밀물을 이룰 것이란 전망이다.특히 충청권과 TK지역의 동요가 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JP총리’인준문제는 단순히 총리로서의 적격여부를 확인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다.여야 모두에게 사활적 문제가 걸린 입지 다툼이라고 보아야 한다.부결되면 DJP 정권이 흔들리고,통과되면 한나라당이 와해위기에 몰리는 제로섬 게임과도 같은 것이다.따라서 이 문제는 우리가 다당제를 인정하는 한 여야 모두의 입지와 공존을 보장하는 바탕에서 원만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은 ‘IMF 해법’ 찾을때 특히 지금은 오직 ‘IMF 체제’극복에 국력을 결집할 때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강력하게 형성돼 있는 때다.이런 국난극복의 뜨거운 의지 때문에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도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고있다.만일 여야가 대결정치의 재연으로 이 분위기를 깨뜨린다면 그처럼 망국적인 행위도 없을 것이다.정치권은 경제난 타개에 모아진 국민 의지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행동할 때다.그러자면 우선 정치권의 최대현안인 ‘JP총리’문제를 격돌없이 처리하는 지혜부터 발휘해야 할 것이다. ‘JP총리’문제의 원만한 해법으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JP의 초대 총리직 사양이다.물론 그 대안은 한나라당이 수용할 수 있는 자민련 인사라야 할 것이다.그래야 DJP의 약속도 지켜지고 새 정부의 출범도 순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앞으로 정계개편이 자연스럽게 진행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다수당으로 부상하면 그때 JP를 총리로 옹립하라는 것이다.그러나 이 방안은,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과연 다수당이 될지도 두고 볼 일이려니와 당사자인 JP가 그럴 뜻이 없고 신여권도 이미 ‘JP총리’임명 강행방침을 굳혔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각제 유보’ 천명 고려를 둘째는,DJ가 “JP총리’임명과 내각제 추진은 무관하다”고 내각제 유보를 천명하는 것이다.DJ의 진의가 무엇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JP총리 임명은 지난 대선때 DJT연합이 공약한 내각제 개헌으로 가는 수순으로 받아들여 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지금 내각제 개헌론이 부상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권은 금방 격렬한 찬반공방과 어수선한 이합집산으로 벌집 쑤셔놓은듯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또 DJ는 취임초부터 레임덕 현상에 부딪칠지 모른다.이렇게 되면 정치안정과 국민화합을 전제로 한 IMF체제 극복노력은 내부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내각제 추진 유보는 한나라당에 대해 입장선회의 명분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난국타개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고려할 만한 대안이라고 하겠다.이런 대안이 성립하려면 한나라당도 ‘JP총리 반대’를 경직된 당론으로 굳히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 적대적 M&A 시기 늦춘다/재경위

    ◎즉각 허용 유보… 새정부가 연내 결정 국회 재경위는 13일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즉시 허용방침을 유보,구체적인 시기를 새 정부가 올해중 결정토록 했다. 또 대부분 비상장 법인인 언론기관 인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 법인 양도·양수때 세제지원 대상범위에 일간신문 발행법인을 포함시키도록 하는 조세감면규제법 개정안을 처리했다.이에 따라 최근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문사에 대한 인수가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경위는 이날 상오 전체회의를 열어 2월 법률 공포 직후 즉각 외국인의 적대적 M&A를 허용토록 돼 있는 외자도입법 개정안을 수정,법률 공포 이후최고 10개월까지 시한을 두고 대통령령으로 구체적인 시행시기를 정하기로 의결했다. 재경위는 법률안 수정이유를 통해 “원화가치와 주가 하락으로 국내기업이 저평가돼 있는 점을 감안,국내 여건을 봐가며 시행시기를 대통령령으로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재경위의 이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외자도입법 개정취지가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위한것인 만큼 새 정부에서 허용시기를 최대한 앞당길 것으로 전망된다. 재경위는 또 주식회사 외부감사법 개정안도 심의,증권선물위원회가 결합재무제표 작성 대상 기업을 확정하던 것을 증권선물위가 대기업의 신청을 받아 대상기업을 승인토록 했다. 재경위는 이밖에 오는 2000년 정부 소속의 세무대학을 폐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세무대학설치법 폐지법안을 다수 의견으로 부결시켜 전체회의에 상정했다.
  • 한나라,JP 총리 거부전략 고심

    ◎이탈표 막게 본회의장 철수 신중 검토 한나라당이 JP(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총리 국회인준안을 거부하는 쪽으로 당론을 모아갈 태세다.인준안 상정 직전의 의원총회에서 당론이 결정되겠지만 현재 기류로 볼땐 거부가 거의 확정적이다.조순 총재와 이한동 대표도 이같은 당 분위기를 반영,지난 11일 여야 수뇌부회동에서 JP총리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특히 초·재선의원 등 소장파와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 강도가 심한 것같다.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결집된 당론을 일사분란하게 표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유용태 의원 등 초선그룹은 아예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말자고 제안한다.이탈표를 막겠다는 이유에서다.사실 충청권 출신의원들은 지역정서를 감안,투표장에 들어가면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이 경우 한나라당 소속의원이 162명 이므로 이들이 모두 투표에 불참하면 인준안은 의결정족수 미달로 자동폐기 된다.거론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본회의장에는 입장하되 모두 기권하는것이다.찬성표 미달로 인준안이 부결됨은 물론이다.이 방법은 국회의원의 직무포기라는 비판여론을 피한다는 장점은 있으나,이탈자가 생길 수 있는 약점이 있다.때문에 보장 장치로 당론을 어긴의원의 당기위 회부를 언급하는 인사들도 있다.나머지 방법은 본회의장에 모두 들어가 자율적으로 투표하는 것이나, 안전장치 미흡으로 채택가능성은 희박하다.이같은 한나라당의 강공 드라이브는 당 외부로 화살을 돌려 당내 분열을 막고 입법권 장악을 바탕으로 내심 정국주도권도 쥐어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인준안 거부에 따른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갈등 기류도 염두에 둔 것 같다.그러나 인준 거부가 당론으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아직도 변수가 적지 않다.거부시 국정공백 초래의 비난을 온통 뒤집어쓸 수가 있고,그때까지의 정국상황 전개도 예측키 어렵기 때문이다.
  • 미,인간복제 영구 금지법안 부결

    【워싱턴 AFP 연합】 미 상원은 11일 미국이 의료 및 과학연구분야에서 장차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속에 인간복제 영구 금지법안을 반대 54,찬성 42로 부결시켰다. 이 법안은 인간복제는 금지하고 있으나 동식물의 유전공학을 위한 복제는 허용하고 있다. 다이앤 파인스타인(여·민주) 의원은 의학발전을 위한 세포 복제시술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으나 복제된 세포를 여성의 자궁에 삽입해 인간복제를 시도하는 데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 민노총 “13일 총파업”/비대위 구성

    ◎노사정합의안 재협상 요구/서울 지하철 “12일 파업”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10일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법제화 등이 포함된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을 재협상하자고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낮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6일 타결된 노사정 합의안은 노동자에게 일방적인 고통 전담을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재벌총수 퇴진 등 철저한 재벌개혁과 실질적 고용안정을 위해 노사정의 재협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9∼10일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킨 뒤 배석범 직무대행 등 상근직 임원 5명을 사퇴시켰다.이어 민주금속연맹의 단병호 위원장(49)을 ‘고용안정 쟁취 등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 단위원장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우리측 협상단은 민주노총으로부터 교섭권만을 위임받았을 뿐 체결권은 없었다”면서 “합의안에 정식으로 조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재협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기존 협상안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될 때는 13일 하오부터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1,12일 단위노조별로 총파업을 결의한 뒤 12일 낮 12시 국민회의 당사에서 집회를 가질 계획이다. 12일 상오 4시로 예정된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은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 민주노총 노사정 합의안 부결/대의원 투표

    ◎“노동계서 고통전담… 수용 불가” 주장/시한부총파업 예상속 한 위원장 “최대한 설득 노력” 지난 6일 타결된 노사정 합의안이 9일 제8차 전국민주노조총연맹(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투표에서 부결됐다. 민주노총은 이날 하오 8시50분쯤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승인여부를 놓고 기립투표를 실시한 결과,대의원 250명 가운데 184명이 반대했다. 민주노총은 투표가 끝난 뒤 “정리해고와 근로제 파견제 등 노사정위원회에서 타결된 합의안은 노·사·정이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안”이라며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배석범 직무대행이 이끄는 현 지도부가 퇴진한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총파업에 돌입할 것으로 보여 큰 파장이 예상된다. 민주노총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10시 중앙위원회를 열어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승인문제를 대의원대회의 안건으로 상정키로 의결했다. 이날 대의원대회는 찬반투표 여부,기립 및 무기명 투표 등 투표방법을 놓고 대의원간 격론이 벌어져 3차례나 정회됐다. 한편 국민회의 한광옥 노사정위원장은 민주노총의 노사정 합의안 부결과 관련,“지난 6일 합의는 3자 대표간 합의인 만큼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민주노총측을 설득하면서 고용조정 법제화를 예정대로 추진할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한위원장은 또 당초 이날로 예정됐던 합의문 조인식이 노동계 사정으로 무산된데 대해 “이미 합의한 만큼 현재도 합의의 효력은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꼭 조인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국무회의(대한민국 50년:6)

    ◎48년 첫각의 단기냐 서기냐 갑론을박/50년대 미 기록 “이승만 독주로 요식행위에 불과”/5·16후 한동안 일요일 빼곤 매일 열어… 시국 반영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꼭 열흘전인 1948년 8월5일 중앙청 2층 이시영 부통령실. 이범석 전 민족청년단장을 비롯해 장택상 윤치영 김도연 이인 조봉암 유진오씨 등 당시의 ‘거물’들이 한사람씩 들어섰다.이승만 박사가 7월20일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뒤 지명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었다.신임각료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대통령이 들어섰다.장관들은 예를 갖춘뒤 회의에 들어갔다.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대통령이 주재한 사상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이대통령과 각료들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일제 때의 독립운동,미군정하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초대 11부3처장관 출범 국무회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흥분을 삭이고 국무위원들이 다룬 의제는 구미지역에 특사파견문제.신생국가에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외국의 국가승인을 위한 외교가 절실했던 탓이다.미국과 구라파지역에 특사로는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임명됐다.특히 조박사의 임무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계획을 저지하는데 모아졌다.조박사의 노력에도 미국 설득이 여의치 않자 이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초대 11부 4처의 장관을 맡은 국무위원들은 각 정파의 분배를 고려한 연립내각으로 이뤄졌다.이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은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이청천 무임소장관 뿐이었고 김도연 재무장관은 김성수씨의 한국민주당,임영신 상공은 여성국민당수,김병연 총무처장관은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다.그외에 장택상 외무장관은 전수도 경찰청장,이인 법무장관은 전검찰청장,민희식 교통장관은 전군정청 운수부장,조봉암 농림 구영숙 보건장관은 무소속이었다.대학별로도 철저한 균분이 이뤄졌다.안호상 문교(서울대교수),유진오 법제처(고려대교수),이순택 기획처(연세대교수),정인보 고시위원장(국학대학장) 등이었다. 연립내각 구성은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의 진통때문이다.이대통령은 7월27일 정부 공보 1호로 초당적이고 이북을 대표할 이윤영 조선민주당부위원장을 총리로 임명하는 추천서를 국회에 제출했다.반대세력인 국회의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은 토의조차 거치지 않고 부결시켜 버렸다.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국회의 첫 비토였던 셈이다.한민당은 김성수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범석 민청단장을 총리로 지명했다.이초대총리는 한민당이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인준됐다.국회는 그러나 민희식 유진오씨 등의 신임각료에 대해 친일논쟁을 제기하는 동시에 대통령에게 숙청을 건의해 최초 국무위원들은 첫걸음부터 삐꺽였다. 이대통령은 이런 논란끝에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며 미군정은 이날 자정을 기해 군정해제를 선포했다.해가 바뀐 49년의 첫국무회의는 1월3일 월요일 하오 3시30분 부통령실에서 열렸다.이대통령은 간단히 개회만 하고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이 사회봉을 이어받았다.법원조직법·검찰청법·변호사법 등 3건을 심의했고 이총리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한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한다고 통보했음을 알렸다.당시로서는 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국가 승인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남기고 있는 50년대 국무회의에 대한 평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대통령의 독주아래 힘 한번 쓰지 못하는 허수아비 회의라는 얘기다.사실 이대통령 때 뿐 아니라 대통령제하의 국무회의는 의례통과일 수 밖에 없었다. ○고 총리 ‘각의 활성화’ 마련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는 외국순방후의 설명,97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동의안 같은 주요사안을 심의할 때 뿐이다.의사봉은 대부분 부의장인 국무총리 몫이 됐다.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서슬 퍼런 전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은 절절 매야 했다.행여 전대통령이 질문을 하면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은 혼쭐이 났다.결국 국무회의 개최장소는 청와대를 떠나 정부세종로청사 19층으로 되돌아 왔다.국무회의는 헌법(88조,89조)상 국정의최고심의기구이지만 실제 운영은 법령안·조약안을 심의,의결하는데 그친다.법안심의도 이미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됐기 때문에 토론도 거의 없다.고건 총리가 지난해 3월 부임하자 ‘국무회의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사실도 국무회의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역대 총리는 이범석 초대에서부터 고건 총리까지 모두 30명.여기다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10명의 총리서리까지 합치면 모두 40명이었지만 총리에 따라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군·학자·법관·행정관료 등 출신 배경에 따라 국무회의 진행방식도 달라졌다.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는가 하면 매끄럽게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혼란기때 가치 빛나 국정의 최고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혼란기에 더욱 그 가치가 빛났다.4·19의거,5·16혁명,80년 신군부의 등장….합법성을 가지려면 국무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60년 4월19일 상오 9시 중앙청 3층 국무회의실.이대통령과 허정 외무·권승열 법무장관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학생데모대 사태가 보고됐다.경비계엄선포·비상계엄선포 등의 안건도 의결됐다.하루만인 4월20일 또다시 국무회의가 열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반영했다.데모사건 피살자의 장례비를 한사람당 50만환씩 지급하기로 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5·16 혁명이 일어난뒤 국무회의는 며칠동안 열리지 못했다.23일 하오 5시 국무회의에서는 ‘군사혁명에 따른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것’을 의결했다.총리가 배석자를 나가달라고 주문하면 국무위원 총사퇴 결의를 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국무회의는 대외관계를 중단하지 않도록하고,성행하던 유언비어 단절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국무회의는 혁명이후 당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국정을 다뤘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옹/“이 대통령 개별 설득 단기 채택”/“한글전용법 제정 제의했으나 모든 장관 반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50년까지 3년간 장관직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옹(96). 안전장관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세운 초대내각 11부4처의 국무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당시 안전장관이 제안한 제도·법 등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관은 “첫번째 국무회의로 기억하는데 국가 연호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어요.갑자을축의 육갑파도 있었고,서기연호를 쓰자는 사람도 있었죠.또 임시정부수립연도부터 쓰자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전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뒤 이승만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사용을 설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대통령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 다음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그러나 단기사용은 5·16 이후 서기로 바뀌었다. 또 한문세대가 지배적이었던 그 당시 안전장관이 발의한 한글전용문제도 국무회의의 큰 관심거리였다.이 문제로 회의에서는 장관들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자고 했더니 모든 장관이 반대했어요.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공격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무식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침묵만 지키고 있던 이대통령이 안되겠던지 ‘과하니 그만하시오’라면서 중단시켰어요”. 이처럼 하나의 안건을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들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안전장관은 또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각료들도 돈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초대내각에서 제일 먼저 사임한 민희식 교통부 장관은 철도사고에 책임을 지고 40일만에 물러났으며 전진한 사회부 장관은 공무원노동조합을 금지한데 대해 화를 내고 그만두었다.또 무임소장관이던 이청천씨는 “싹을 보니 틀렸다”는 말만 남기고 각의에서 물러났다.이 모두가 내각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안전장관은 전했다. □특별취재반 이경형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홍 정치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희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사시 합격자 400∼500명 적당”/대협,새 정부에 건의키로

    대한변협(회장 함정호)은 20일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매년 400∼500명 선으로 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내부결론을 내리고 이를 새정부에 건의키로 했다. 변협의 이같은 견해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사법개혁과 관련,대국민 법률서비스 향상을 위해 당초 계획대로 사시 합격자 수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것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 제헌헌법 탄생과 훼절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3)

    ◎48년 7월17일 대통령제·단원제 공포/48년 5·10총선후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 출범/대통령제­내각제·단원제­양원제 17차례나 격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 50년’이 지니는 가장 값지고 유별난 의미는 그것이 헌정의 역사라는데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그 탄생부터 굴절과 훼절로 출발했고 이는 곧 헌정의 비극,나아가 국가와 국민의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은 정부수립 작업에 탄력을 붙여놓았다. 그 선거를 통해 개원한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날부터 무엇보다 급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초안을 만들어낼 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을 선출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다음날 기초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10명이 선정됐고 6월 1일에는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헌법학자 유진오 등 전문위원 10명도 위촉됐다. 헌법 초안 작성의 중추역을 맡은 유진오는 양원제,내각책임제,농지개혁,중요 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한 안을 내놓았다.이때 미군정 사법부장이던 전문위원 권승렬이 예고없이 독자안을 제출,위원회는 두 안을 각기 원안과 참고안으로 삼아 심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헌법 굴절의 역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1차독회 국회 부분에 이르러 한민당계와 조봉암이 양원제 반대론을 폈다. 이어 곧바로 다수위원의 반대로 확산,양원제는 졸지에 단원제로 바뀌었다. ○기초위선 내각제 원안 통과 여기서 유진오의 헌법초안 작업 참여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국회가 공식으로 제헌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김성수의 한민당 등 정부수립의 3대 주축세력으로부터 각각 초안작성을 의뢰 받았다. 이때 그는 앞의 중요 골자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3대 세력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놓은 터였다. 따라서 기초위의 단원제 채택은 의원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묵시적으로 담합한 성격이 강했다. 유진오안이 근본적인 변질의 길로 들어선 것은 6월 16일 제2차 독회때부터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이날 부의장 신익희를 대동,심의장소인 중앙청 회의실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유진오의 내각제 옹호설명을들은 뒤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자신은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며 반드시 대통령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마친뒤 휭하니 나가버렸다.바로 한달전 신익희를 통해 유진오에게 “내각책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할 일이 적어지지만 부득이한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각책임제가 대세였다. 오히려 내각제 반대를 주장하던 허정도 지지쪽으로 돌아설 정도였다. 이승만의 뜻에 관계없이 기초위는 관련조항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잠시 유진오 등을 상대로 회유에 나서봤지만 여의치 않자 며칠뒤 다시 기초위에 찾아와 협박을 가했다. 단순한 반대 표시가 아니라 만일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채택되면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 말을 던진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에 기초위원들은 허정과 유진오,전문위원 윤길중을 이화장에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는 등 내각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버팀목은 이내 무너져갔다. 한민당이 먼저 굴복했다. 22일 계동 김성수의 집에 모인 백관수 김도연 서상일 조병옥 등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초안수정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 수정안은 이튿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본회의는 17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가 이미 이승만쪽으로 기운데다 핵심 골간이 결정된 터여서 대통령중심제가 우세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안건상정 20일만인 7월 12일 내각책임제는 만세삼창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만장일치로 공화국 헌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만장일치라는 이승만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날 표결방법은 기립이었다. 당시 대동청년단 소속의원이던 생존 제헌의원 김인식(현 제헌동지회장)은 “이문원 의원이 의원석 중간쯤에 기립하지 않고 끝까지 앉아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제를 택할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확실시되는 사실상의1 인 권력자였다. 대중적 지지면에서 그와 겨룰수 있는 김구와 김규식은 5·10 총선을 거부,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어떠한 정치행위에서도 입지가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윤길중은 나중 “제헌당시 한 사람의 고집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것이 그후 우리 헌정사에서 독재,장기집권,정통성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어떻든 대한민국 헌법은 7월 17일 이승만의 서명 공포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그탄생의 내력은 윤길중의 증언처럼 장차 전개될 헌정사의 불행을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승만 고집 대통령제로 이를 입증하듯 1952년 7월 7일 제1차 개헌이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달여 전 총선 참패로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의 자유당은 직선제를 시도했다. 그것도 국회제안 개헌안과 행정부제안 개헌안 가운데 일부를 발췌,국회에 공포분위기를조성한뒤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1954년 11월 29일의 2차개헌(사사오입 개헌)도 헌정사에 얼룩을 덧칠했다. 자유당은 직선제의 문은 열었지만 대통령 중임제한규정에 부딪치자 이 벽을넘기 위해 다시 개헌을 꾀했다. 국회 투표결과는 의원정수 203명중 가결에 필요한 찬성표가 136명에서 1명 모자라는 135표로 나왔다. 부결이 선포됐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계산원리를 끌어들여 가결로 밀어붙였다. ◎증언/“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 요소 많아”/김인식 제헌동지회장 1948년 7월 제헌헌법의 탄생과정을 지켜본 제헌의원은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중 3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은 김인식 제헌동지회장(85) 등 둘뿐이다. 김회장은 당시 헌법이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책임제로 급변한 상황을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본회의에서 헌법초안축조토론을 많이 했지만 대통령제에 대한 토의는 활발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이박사(이승만)가 고집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지요.” 김회장은 그러나 제헌헌법은 문제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으며 의원들의 자부심도 컸다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적 요소가 많이 가미돼 권력집중을 막을수 있었어요. 실제로 제헌국회때는장관도 국회에서 불신임 가결만 하면 곧바로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정기적으로 국회에 나와 국정에 대해 설명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2대국회 중간쯤부터 이대통령이 국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헌법도 자기 뜻에 맞춰 갈아치우기 시작하더군요.” 김회장은 우리 헌정사의 불행의 출발이 바로 여기서부터 싹텄다고 지적했다. “평범한 개인도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는 애착이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자기가 지은 멀쩡한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물었어요. 나라의 장래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그 생각이 맞아들어갔어요.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김회장은 제헌의 주역으로서 헌정사 5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정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만들던 그때의 건국정신과 제헌정신만 지켰다면 그런 불행들은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호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경제살리기 ‘공직사회가 앞장’ 다짐/정부·정치권 시무식 이모저모

    ◎고 총리 “고통 크지만 마직막 기회”/대수술 앞둔 재경원 분위기 착잡 청와대와 정부는 3일 일제히 시무식을 갖고 IMF시대를 맞아 경제살리기에 공직사회가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2급 이상 비서관들로부터 신년하례를 받는 것으로 새해 업무를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문민정부 5년동안 여러가지 보람도 있었지만 아쉬움도 많이 있었다”면서 “남은 임기동안 혼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대통령은 “올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를 안정시키고 안보를 튼튼히 하며 민생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와대는 이어 김용태 비서실장 주재로 별도의 시무식을 가졌으며 김실장은 청와대직원들의 불안감을 고려,“다음 정부측과 협조해 신분상의 불이익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총리실◁ ○…이날 상오 세종로 청사에서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위원 및 1급이상 중앙부처 공무원 1백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무식을 갖고 새해 업무를 시작했다. 고총리는 시무식에서 현재의 경제난에 대해 “IMF와의 합의에 따른 과제들을 단기간 내에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지만 진정한 선진화로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번을 절대절명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새출발을 다짐하는 새해 벽두에 우리 공직자 모두는 겸허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어 각 부처별로 시무식을 가졌으며 차관 이하 국장급 공무원들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재정경제원◁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데다 재경원의 해체가 초읽기에 들어가는 등 상황이 어둡기 때문에 이날 시무식은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임창렬 부총리는 “IMF와 미국 등 선진국으로 부터 긴급자금을 조기에받는 조건으로 구조개혁 일정을 대폭 앞당기게 됐다”면서 “철저한 구조개혁을 이뤄 국제 금융사회의 신뢰를 회복하자”고 강조했다. 임부총리는 “우리가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었는 지,올바른 판단을 했는 지,성실하고 건실하게 행동했는 지를 되돌아 보자”는 말로 끝을 맺었다. 임부총리가 고 존 F케네디 미국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이러한 구절은 앞으로 경제청문회를 염두에 둔 것처럼 들리는 대목이다. ◎2야 “지방선거 승리 재도약 계기 삼자” 이틀간의 신정 연휴를 마친 한나라당과 국민신당은 3일 시무식을 갖고 지난해 대선 패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반면정권창출에 성공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주요 핵심 당직자들이 정국 구상을 가다듬느라 5일 시무식을 갖기로 하는등 다소 여유 있는 표정이다. ▷한나라당◁ 이날 상오 여의도 당사에서 김태호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무식을 갖고 야당으로서의 체질개선과 5월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내부결속을 다짐했다. 김총장은 “야당으로서의 힘든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대선 패배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3월 전당대회와 보궐선거,그리고 5월 지방선거를 재도약의 결정적 계기로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한나라당 사무처 직원들은 그러나 조만간 단행될 기구축소에 따른 감원 등이 걱정되는 듯 대부분어두운 표정들이었다. 한편 이한동 대표는 시무식이 끝난 뒤 식장에 들어와 사무처 직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국민신당◁ 이날 상오 여의도 당사에서 이만섭 총재 서석재고문 박범진 총장과 당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무식을 갖고 새출발의 의지를 다졌다. 이총재는 “3월 보선과 5월 지자제 선거에 대비해 유능한 인재 를 많이 발굴해 나라에 기여하자”고 강조했다.
  • 하시모토 정권 어둠만 쌓이네

    ◎경기부양책 발표 불구 증시는 곤두박질/미군기지 이전 차질로 외교안보도 불안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하시모토 정권의 앞날이 시계불명이다.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총리는 최근 가라앉고 있는 경기부양을 위해 법인세를 중심으로 한 8천5백억엔의 감세,10조엔 규모의 국채를 이용한 금융안정화 대책,규제완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기대책,2조엔 규모의 특별감세안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도쿄 증시는 지난 주말 1만6천포인트대를 단숨에 회복하고 엔화도 일시 1달러당 125엔 수준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지난 22일 도쿄 증시와 외환시장은 하시모토 총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곤두박질치고 말았다.증시는 지난 주말에 비해 니케이평균주가가 515.49포인트가 빠져 1만4천7백99.40으로 떨어졌다.평균주가가 1만5천 이하로 떨어진 것은 2년5개월만의 일이다.외환시장에서도 엔화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130엔대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대해 야당측은 22일 특별감세 등에는 이론이 없지만 그동안 재정재건을 내세워 경기 부양책을 기피해 온 정책 잘못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당인 사민당의 도이 다카코(토정たか자) 당수도 이날 하시모토 총리와의 회담에서 “독단,대책 지연,찔끔찔끔 내놓는 대책이었다”고 면전에서 화살을 겨누었다. 하시모토 총리와 회담하고 나온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지위화부) 서기장은 “힘도 없고 자신도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하시모토 총리가 집권후 제일 자신감을 보여온 것은 대미외교와 안보.그러나 지난 21일 오키나와현 나고시가 후템마 미 해병비행장의 나고시 앞바다 이전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했으나 결과는 반대 다수로 나타나고 말았다. 주민투표는 참고 재료일 뿐 결정력은 없지만 나고시 시장,오키나와현 지사 등이 주민투표 결과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하시모토 총리로서는 이들이 주민 투표 결과를 뒤엎고 이전에 찬성해 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22일에는 중앙정부가 미는 오키나와현 부지사 요시모토 마사노리(길원정구) 부지사의 재임안이 오키나와현 의회에서 부결되고말아 손을 두번데고 말았다.대미관계와 안보분야의 득점에 이어 경제에도 손을 댔지만 하시모토 총리의 솜씨도 점차 마비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 미군 일 나고헬기장 건설 무산/주민 절반이상이 반대 투표

    【도쿄 교도 연합】 일본 오키나와 나고(명호)시 주민들은 21일 실시된 주민투표를 통해 나고시에 미군해상 헬기장 건설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부결시켰다. 3만8천100여명의 유권자중 82.45%가 참가한 이날 투표에서 3만800여표를 개표한 결과 반대가 1만6천631표,찬성 1만4천252표로 나타났다. 미·일 양국은 지난해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들을 축소하고 후텐마 비행장을 폐쇄키로 합의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대신할 헬기장을 나고시 주둔 미 해병대 슈와브 캠프 인근 해상에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 대출금리 크게 오른다/실세금리 급등여파

    ◎시은들 우대금리 인상 추진/한은 “은행 수지악화 방지위해 불가피” 시중 실세금리의 급등에 따라 시중은행들이 수지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대출금리를 대폭 올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시중은행들은 특히최근 회사채 유통수익률 등 시중금리가 폭등하는 추세에 맞춰 시장금리와 동떨어져 있는 우대금리(초우량 기업에 적용되는 금리) 자체를 높일 움직임이어서 기존 대출금의 금리인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7일 금융계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은행계정 대출 우대금리(프라임레이트)를 8.95%에서 11.75%로 2.8%포인트,신탁계정의 대출 우대금리는 11.2%에서 12.75%로 1.5%포인트를 각각 올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시중 실세금리가 계속 치솟고 있어 수지악화가 우려됨에 따라 우대금리를 올리는 방안을 검토했다”며 “다른 은행들도 우대금리를 인상하거나 최소한 가산금리 변동 폭 조정 등으로 대출금리 인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우대금리를 올리면 기존 대출금 금리도 높아지게 되며 우대금리에 일정 수준을 더하는 가산금리를 조정하면 신규대출에만 적용된다. 하나은행은 이와 관련,이날 하오 ‘긴급 보도자료’를 배포,실무팀에서 은행계정과 신탁계정의 우대금리 인상안을 검토한 것은 사실이나 최종 결재 단계에서 부결됐다고 해명했다.하나은행은 이에 앞서 지난 19일에도 은행계정과 신탁계정의 대출 우대금리를 0.2%포인트씩 인상,각 8.95% 11.2%로 조정한 바 있다.한국은행 관계자는 “시중금리가 치솟고 있는데다 MMDA(시장금리부 수시 입출식 예금)형 상품 등 신규 상품의 수신금리를 경쟁적으로 올리면서 은행들은 수지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시장금리와 동떨어져 있는 우대금리 인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시중은행들은 그동안 금융당국의 금리하향 안정대책에 의해 대출금리 인상에 대해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한편 한국은행이 27일 발표한 ‘10월 가중평균금리 동향’에 따르면 은행권의 평균 가계대출금리는 지난 9월 연 12.42%로 8월에 비해 0.12%포인트 오른데 이어 10월에도 0.03%포인트가 상승하면서 12.45%를 기록했다.가계대출금리는 지난 2월 12.07%에서 3월에는 12.03%로 떨어졌다가 4월에는 12.07%로 오른뒤 10월까지 7개월째 오름세가 이어졌다.
  • 영장실질심사제 막판 공방/법원·검찰간부 국회 나와 치열한 로비

    법원과 검찰은 17일 국회 법사위가 피의자가 요청할 때만 영장실질 심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형사 소송법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여부를 놓고 찬반논의를 계속하는 동안 각각 개정안 유보 및 통과를 위한 막바지 공방과 로비를 벌였다. 법원은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에 대비해 한 때 윤관 대법원장 명의의 반대 성명 발표까지 검토했으며,검찰도 김태정 총장이 밤늦게까지 법사위 회의결과를 기다리는 등 온종일 긴장된 모습이었다. ▷법원◁ ○…대법원은 이날 상오 안용득 법원행정처장과 변재승차장 등 법원행정처의 실·국장 등 모든 간부들을 국회로 보내 법원입장을 담은 자료를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게 일일이 돌리며 개정 불가 입장을 재확인.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개정안은 피고인이 재판을 받겠다고 신청해야 재판이 열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한 뒤 “현행법에서 판사가 임의로 피의자 심문 여부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개정안은 현행법보다 더 후퇴한 것이어서 위헌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다”고 주장. 법원측은 그러나 이날 하오 법사위가 투표로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을 결정지으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위원장을 제외한 전체 14명 의원 가운데 검찰출신이 8명이기 때문에 진 것이 아니냐”며 한때 허탈하기도. ▷검찰◁ ○…법무부는 김종구 장관,원정일 법무차관과 최경원 검찰국장 등 수뇌부가 모두 국회를 찾아가 막바지 로비전. 대검찰청도 매주 월요일 갖던 주례 간부 모임을 보류하고 주요 간부들을 국회에 파견,검찰 출신 의원들을 상대로 개정안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총 공세. ○…김총장과 이원성 차장은 이날 밤늦게까지 검찰청사를 지키며 법사위 회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챙기는 등 형소법 개정안 통과여부에 시선을 집중. 이 차장은 “형소법 개정안의 통과여부가 검찰의 초미의 관심사인 마당에 귀가하는 것보다 남아서 진행상황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부결이 되든 가결이 되든 검찰이나 법원 모두 이번 사태로 빚어진 양측간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게 됐다”고 안타까운표정. ○…서울지검 특수부 박영관 부부장 등 1백여명의 검사들은 이날 상오 11시 40분쯤부터 점심도 거른채 긴급회의를 갖고 현행 구속전 심문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내일중으로 검찰총장에게 제출할 예정.
  • 내각제 개헌·노령,건강문제­TV토론 쟁점

    ◎내각제 개헌/의결종족수 확보위해 정계개편 시사/“개헌 시간 충분… 집권초 혼란 없을것” 13일 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TV 3사 합동토론회에서는 자민련 김종필 전 총재와의 이른바 DJP 합의가 핵심 쟁점이었다.내각제 개헌약속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김총재는 내각제 약속의 진실성과 이행 가능성에 대한 패널리스트들의 집요한 문제 제기에 특유의 반어법을 섞어가며 방어전을 폈다.우선 “집권을 해도 15대 국회에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내각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 약속한 게 아닌가”라는 질문에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말씀”이라고 일단 농담으로 받아넘겼다.그리고는 “여권내에도 내각제를 하면 협력하겠다는 지도자가 있다”고 말해 정계개편을 통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뜻을 시사했다. 김총재는 이어 99년말까지 내각제를 추진하려면 당장 집권 초반부터 공청회등으로 정국혼란이 야기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엔 “99년부터 서서히 해도 하나도 급할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이어 DJP합의에 따라 자민련과 국민회의를합쳐도 소수 여당인데 JP총리 인준이 가능할 것이냐고 묻자 “대통령이 자기가 필요한 총리를 지명하는데 국회가 이유없이 반대하면 국민이 용납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과거 여소야대 시절에 김총재의 평민당이 6공초기에 노태우 대통령의 정기승 전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지 않았느냐는 추궁에는 “그렇게 부결시키기 보다는 가결시킨 사례가 더많다”고 비켜나갔다.그는 또 DJP단일화 이후 (여론조사 등에서) 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더 많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앞으로 전국을 돌면서 국민에게 호소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핵심을 피해 나갔다. ◎노령·건강문제/“당뇨·고혈압은” 질문에 “걱정 고맙다”/6개월일정 수첩 보이며 “문제 없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건강문제를 파고드는 패널리스트들의 질문에도 시달렸다.고희를 넘은 나이에도 무리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의례절차였다.김후보는 예상했다는듯 때로는 정면돌파로,때로는 비켜가기로 노련하게 대처했다. 패널들의질문은 ‘유력한 후보’라는 전제아래 시작됐다.김후보는 “제일 유력한 후보”라며 웃음을 유도하며 긴장하지 않으려는 준비성을 선보였다. DJ(김후보)는 “지금 보청기 끼고 계시죠”라고 묻자 “예”라고 먼저 시인을 했다.“그 나이에 당뇨나 고혈압이 걱정되는데”라고 묻자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그리고는 “문제가 없다.의사의 진단결과를 밝히겠다”고 공개의사를 밝혔다. 김후보는 호주머니속 수첩을 꺼내 “6개월동안 매일 다닌 일정이 적혀 있다.건강이 나쁘다면 어떻게 기자들이 매일 따라다닌 이렇게 많을 일정을 보내왔겠느냐”고 ‘건강이상설’을 반박했다.대선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하면서 ‘엔돌핀’때문에 왕성한 활동을 하는게 아니냐고 꼬집어도 마찬가지로 대처했다. 항간의 건강이상설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며 부인하는 적극적인 대처로 나왔다.DJ는 “제게 치매기가 있다느니 집사람이 그렇다느니 별 얘기가 다있다.회의를 하다가 신기하 의원을 찾았다는데 멀쩡한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하는 분들이 정신적 치매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역공했다. 그러나 서울대 부속병원 등 제3의 의료기관에서 공개 검진을 받을 용의를 묻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그는 “10년 이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주치의가 있는데 굳이 서울대병원에서 받을 이유가 있느냐”며 비켜갔다.
  • 고교 흡연실(외언내언)

    경기도 성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대학 수능시험이 끝나는 오는 12월 19일 이후 교내에 흡연실을 만들기로 해 찬·반 논란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다.학교측은 이미 상당수 학생들이 담배를 피고 있는 현실에서 무조건 흡연을 막기 보다 더욱 효과적인 금연교육을 위해 흡연실을 설치키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이 흡연실에는 폐암수술 장면 등을 보여주는 TV모니터 및 금연 관련 잡지와 서적 등을 비치해 학생들 스스로 담배의 해악을 깨달아 끊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많은 학부모와 교육 관계자들은 학생들에게 흡연을 양성화해 주는 조치라며 우려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획기적인 방안’이라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남고생의 35.3%,여고생의 8.1%가 담배를 피고 있는 심각한 현실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반응이라 하겠다. 지난 90년 미국 워싱턴 인근의 소도시 탈버트에서 10대 청소년들의 성문제를 놓고 교육위원회가 격렬한 토론을 벌여 시선을 끈 적이 있었다.고교생들에게 아예 피임기구인 콘돔을 학교에서 나눠주자는 안건이었다.당시 이 도시의8학년(한국의 중2) 학생의 21%,9학년의 29.6%,10학년의 36.5%가 한달에 최소한 한번 이상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 조사됐다.이같은 현실을 받아들여 원치않는 임신을 막고 에이즈(AIDS)등 성병을 예방하자는 것이 찬성측의 주장이었다.그러나 절제를 가르치던 학교가 ‘안전섹스’를 권장하는 곳으로 바뀌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반대주장도 만만찮았다.결국 3대3 가부동수에서 교육장의 반대로 부결됐지만 우리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교육장은 반대이유로 “섹스에 적극적인 학생들에게 콘돔을 건네주는 것은 그렇지 않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복합적인 메시지를 보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교육정책을 선택하는 가는 학교장의 권한에 속한다.그렇지만 교내 흡연실 설치와 같은 첨예한 문제는 광범위한 중지를 모아 결정하는 것도 좋을듯 싶다.고교생들은 아직 자기판단력이 모자는 미성년자들이다.학교가 흡연을 권장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우리도 지혜를 모아보자.
  • 대한성공회 신임 관구장 정철범 대주교

    ◎“영·미처럼 여성사제도 배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도 개혁해야 합니다.특히 평신도가 교회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겠습니다.또 영국과 미국교회처럼 대한성공회에서도 여성사제를 배출할 계획입니다” 지난 27·28일 서울 중구 정동 서울주교좌 성당에서 열린 대한성공회 정기관구의회에서 제4대 관구장에 선출된 정철범 대주교(57)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장래 구상을 밝혔다. 정대주교는 “교회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한국기독교도 이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어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성공회가 운영하고 있는 나눔의 집 부설의 가출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청소년센터로 확대하고 내년에 강화도에 국내 최대규모의 장애인직업학교를 건립하겠다”고 말했다. 대한성공회 관구회의는 평신도 집사제도 도입과 교단명칭 변경은 부결시켰으나 100여년 계속 사용해온 기도문과 각종 예배절차를 개정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맞는 헌장을 개정했다.지난 1889년 영국에서 들어온 대한성공회는 현재 전국에 80여교회에 5만3천여명의 교인이 있다. 정대주교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71년부터 성공회 사제생활을 시작,동대문교회와 대학로교회를 거쳐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성공회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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