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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50돌 경축 남산 봉화/김태균 사회부기자(현장)

    ◎독립의 기쁨 통일염원 되어 전국에 퍼져 『봉화를 올려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온 겨레에 알립시다』 15일 상오 11시30분 서울 남산 팔각정 앞 「목멱산(남산)봉수대」의 5개 봉화는 오랫동안 고여있던 우리 민족의 응어리를 씻어내려는 듯 힘찬 연기를 하늘로 뿜어올렸다.일제로부터의 광복을 상징하는 환희의 신호였다. 같은 시각,부산의 황령산봉수대·광주 갈두산봉수대·경기 수원성봉수대 등 전국 22개 봉수대에서도 일제히 봉화 연기가 피어올랐다. 민족적인 경사가 있을 때,또는 환난이 닥쳤을 때 가장 빨리 전국에 이 소식을 알렸던 우리민족의 불꽃인 봉화­.이날 봉화 점화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이 50년 전 오늘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펼친 「독립운동 유적지 및 봉수대 트래킹」 행사의 절정이었다.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주최로 열려 5백여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를 지켜봤다. 봉화가 피어오르자 앉아있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일제히 일어나 환호를 올렸다.몇몇 어린이들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는지 눈물까지 흘렸다.이어 2부 행사에서는 민족대표 33인,만세를 외치는 조선사람들,일본순사 등으로 분장한 70여명이 나와 3·1운동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거사 등 항일독립운동을 재연했다. 간단한 소품연극이었지만 어린이·청소년들은 민족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동안 일본경찰의 총·칼 만행이 자행되자 함께 분노했다.윤봉길의사가 일본군 장성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폭탄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다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손뼉을 쳤다. 일본군 순사로 분장한 박병용(15·서울 청량리중 2년)군은 『윤봉길의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어려 일본군역을 맡아 아쉽다』면서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일제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되찾는 것을 직접 연기해 가슴이 뿌듯하다』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1시간쯤 지난뒤 연극도 막이 내리고 타오르던 봉화도 꺼졌다.잦아드는 봉화연기를 바라보는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이제 광복이 아닌 통일을 알리는 봉화가 분단을 넘어 한반도의 하늘에 세차게 솟구쳐 오르기를 기대하는바람이 가득 들어있었다.
  • 삼한시대 유적발견/안성 망이산성서 돌칼 등 나와/단국대 중앙박물관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금산리 망이산성에서 BC 1세기이전의 삼한시대 유물과 집터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단국대 중앙박물관(관장 윤내현교수)은 2일 상오 발굴현장에서 지도위원회를 열고 『삼한시대 질그릇 수 점과 간돌칼 1점,집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낙수물자리 등이 나왔다』고 밝혔다. 지난 80년부터 3차례에 걸쳐 망이산성과 봉수대를 발굴해온 단국대 발굴팀은 높이 4백72m의 봉수대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의 아랫부분에서 삼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치는 유물층을 발견했다.
  • 조선시대 통신수단 집중연구/“순천∼서울 「봉수」에 7시간 소요”

    ◎청주대박물관 박상일씨/해안선 연결한 62개 봉수대 총800㎞/왜적 육지 침범하면 「5거」로 소식전달 봉수는 횃불(봉)과 연기(수)로 급한 소식을 알리던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주요 통신수단이었다.우리도 삼국시대 이래 역대 왕조가 이 봉수제를 운영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조선시대 변방에서 일어난 변란이 봉수제를 통해 조정에 알려지려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서울나들이」를 주제로 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향토사연구 전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순천에서 서울까지의 봉수제 운영」이라는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이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박씨에 따르면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세종대에 정비되어 큰 변화없이 유지되다 1895년 봉수군이 해체되며 폐지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크게 다섯개 노선으로 운영된 것으로 전한다.제1거는 함경도 경흥에서 은성 북청 안변 철원 양주,제2거는 경상도 동래에서 영천 순흥 충주 광주,제3거는 평안도 강계에서 의주 평양 개성,제4거는 의주에서 삼화 장연 해주를 각각 거친다.제5거가 바로 순천에서 출발하는 노선으로 모든 노선의 종착점은 서울 목멱산(남산)이다.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따르면 순천(여수) 돌산섬에서 서울 남산까지 소식을 전달하려면 모두 62개의 봉수대를 거쳐야 했다.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나주 목포 무안 함평 영광 부안 옥구 서천 보령 홍주 서산 태안 해미 당진 면천 양성 수원 남양 안산 인천 김포 강화 교동 통진 양천이 대표적인 중개지점이다.서남해안의 해안선과 섬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임을 알수 있다. 한편 제5거는 옥구 점방산에서 또 하나의 노선으로 갈린뒤 임피 함열 은진 공주 천안 아산을 거쳐 양성에서 다시 해안을 따라 올라온 노선과 합쳐진다.이 내지봉수는 전라도 지방의 소식을 복잡한 연변봉수를 거치지 않고 빨리 조정에 전달하기 위해 세웠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62개의 봉수를 거치는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서울에서 여수까지의 직선거리는 4백㎞ 정도이다.그러나 봉수는 해안선을 끼고 도는데다 굴곡 또한 심해 제5거의 경우 8백㎞ 정도는 된다는 것이 박씨의 추정이다.봉수는 대략 1시간에 1백10㎞ 가량 전달된다고 한다.그렇다면 소식을 순천에서 서울까지 7시간 정도가 결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씨는 그러나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통신수단이었고 중앙집권적 군주국가 시대에 중앙정부의 권위를 상징하던 봉수유적이 이제 황폐화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고 개탄했다.봉수대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에 있었던 만큼 봉수를 파괴하고 군사시설 통신·방송 중계소 등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그는 이제부터라도 정부와 학계가 봉수터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연구를 벌이고 보존대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 뛰어난 축성술(백제를 다시본다:18)

    ◎토성 쌓는 판축기법 5세기에 발달/진흙·마사겹겹이 다져… 노동력 절감/통일신라에 전수… 일본에도 전해져/후기 들어 돌·흙 함께 사용… 안팎겹쌓기 등 공법 다양화 백제는 처음 창례성에 도읍하였고,이어서 하남창례성 혹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반기까지 였다.이후 웅진(오늘날 공주)과 사비(오늘날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익산지역에 별도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낭군과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또 한군현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축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 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것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이러한 강안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잦은 외침에 대비 백제가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침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내놓고 새로이 마련한 도읍이 웅진이었다.지금의 공산성이 그것으로 후대의 보수와 개축이 있었음에도 백제 도읍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공주에서 공산성의 외곽인 시가지까지 나성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도성제도가 있었는지는 학자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계획된 천도에 의해 서기 6세기 전반에 마련된 사비도성은 산에 의지한 산성과 거기서 뻗어내려 온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나성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성곽 발달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것임이 확인된다.이러한 나성을 가진 도성제도는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을 쌓은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어쩌면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결합한 도성제도는 백제인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경우 산성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가진 뒤에도 그 외곽에 또다른 산성을 쌓아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한 도성제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굳건한 방어망이 백제인들에게 안일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후세에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백제의 성곽들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하여 흙으로 켜쌓기하는 이른바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한 것들이 많다.본디 이 판축기법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전된 것이다.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구간마다 칸을 마련하여 진흙과 마사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길다란 대나무로 일일이 다져쌓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는 최근에 조사된 여러 개의 성들에서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많이 확인되었다.특히 처음에는 다지다가 차츰 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만든뒤 구간 사이에 돌로 가장자리를 쌓아 기단을 만들어 그 위를 판축하는 특유의기술이 공산성이나 부여의 나성,그리고 지방의 커다란 성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산성등서 확인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내외겹축)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외축내탁)이 확인되고 있다.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먼저 백제의 판축기법은 거의 그대로 통일신라로 이어졌다.신라는 돌로 겹쌓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으나 백제의 판축기법을 받아들여 낮은 위치나 험하지 않은 산성에 그대로 적용했다.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흙으로 쌓는 성은 돌로 쌓는 성보다 공사비가 약 3분의 1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크고 웅장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이 공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추세는 더욱 후대에까지 이어졌다.고려시대 주요한 지역에 축조된읍성들은 거의 전부 판축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또 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한양도성도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흙으로 쌓아졌으며 세종 때에야 돌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뒤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수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또 서기 665년8월에 달률(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시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대야·연이라는 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김전)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대야성)·미즈키(수성)·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고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으로 고고이시(신총석)란 것이 있다.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역설과 한국식 산성설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임이 확인되었다.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백제성곽 유적/한강·금강유역에 많이 남아/풍납동 토성·부여산성등이 대표적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 토성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 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에 이른다.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목책 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위례성의 주성,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 이성산성은 풍납동 토성,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 아차산성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광장동에 있다.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 및 나성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환산성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예산의 임존성은 백제가 망한뒤 유장 흑치상지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꾀했던 곳이다.이곳에서 흑치상지는 한때 나·당연합군을 깨뜨려 잃었던 옛땅을 한 때나마 되찾기도 했다.이곳은 또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와 견훤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통신수단:상(서울 6백년만상:21)

    ◎봉화 19세기까지 가장 빠른 연락망/변방서 수도까지 12시간 걸려/근대우편제 1884년 도입 서울에 「벙거지꾼」이 모습을 나타낸것은 1884년 4월 22일. 벙거지꾼은 우체부를 가리키는 옛말로 신식 우편제도의 도입과 함께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부터 장안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편제도는 갑신정변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전자정보화시대에에 들어선 요즘도 그 역할과 중요성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초창기에 『양반집 사랑과 규방에까지 들어가 우편물을 전달하려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1897년 7월3일자)에 실리기도 했으며 각 가구마다에는 요즘같은 지번이 없던 관계로 편지봉투에 「경문밖 청패고개 나쥬셔 올라온 양천허씨댁 입랍」이라고 쓰는등 주소가 불분명해 우편물이 잘못 전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우체부는 보부상조합이나 한강 물지게꾼조합에서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했다. 갑오개혁 직후만해도 보름동안의 서울시내 우편물은 1백37통에 불과했으나 그 편리함이 점차 알려지면서 이들은 들일 하는 곳에 점심도 날라다 주고 친정집에 물건을 전달해 달라는 아낙네의 청을 들어주고 식사를 대접받는등 「인정배달부」역할을 겸하는등 대중속에 자리잡았다. 근대식 우편제도가 도입되기전 한양의 중요 통신수단은 봉화였다.19세기말까지만 해도 서울 남산타워 자리에 있던 봉수대를 중심으로 변방까지 이어졌던 봉화야말로 지역과 지역간의 교신을 가장 신속히 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대는 국가의 기간통신망이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인편뿐이었다.그 당시로서야 농경사회였던 만큼 서민들로서는 요즘처럼 다급히 소식을 전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급하다 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서울로 정했을 때 먼저 시작한 일 가운데 하나가 왜구와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한 봉수대를 새로 만들고 정비하는 일이었다. 세종때에 와서야 완료된 봉수대정비사업은 서울 목멱산(남산)봉수대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군사적 요충지 6백50여곳에 세워졌으며 봉화를 올리는 방식도 4거에서 5거로 늘어 났다.예를 들어 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1거,나타나면 2거,해안에 접근하면 3거,아군과 해안에서 접전하면 4거,육지에 오르면 5거를 올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매일 올려지는 봉화가 변방에서 서울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시간.전보나 전화가 없던 시절 이보다 더빠른 통신수단은 없었다. 서울에서는 강서구 방화2동 개화산,성동구 광나루북쪽 아차산,강남구 원지동 청계산의 봉수대터등에서 아직도 봉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봉화가 국방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시호통신이었다면 우역은 우편·통신기능과 숙박시설을 겸비한 동시에 개인의 이용이 가능했다. 선조 30년(1597년)에 도입된 파발제도는 통신만을 위주로 한 조금은 진전된 통신수단이었으며 말을 이용한 기발과 사람을 이용한 보발로 나눴다.기발은 25리마다,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다.이로써 교지를 알리거나 장계를 올리는 공문의 빠른 전달이 가능하게 됐다.은평구의 역촌동이나 구파발은 바로 파발제도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 전쟁기념관 6월에 문연다/서울 용산에…개관 앞두고 마무리단장 한창

    ◎디오라마·영상시설 갖춰 입체적 전시/군사유물,6·25 무기 등 7만여점 확보 서울 용산의 옛 육군본부 자리에 국내 최초로 건립되는 전쟁기념관이 오는 6월 개관을 앞두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88년 특별입법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90년 9월 착공한 이 기념관은 지난해 12월까지 건축공사를 완공하고 현재 6개 전시실 가운데 4개실의 전시품 비치등 내부단장을 마무리했다.나머지 2개 전시실도 오는 4월까지 전시품을 모두 제자리에 진열한뒤 전 전시관의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기념관은 대지 3만5천평 위에 연건평 2만5천평의 지하 2층,지상 4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과 전우회관·간이식당·지하주차장·수장고·사무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졌다.6천1백59평에 이르는 전시실은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대형 장비실과 아직 완공되지않은 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 등 6개실과 비행기·탱크 등을 전시한 옥외 전시실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군사유물과 한국전쟁 참전 16개국등 각국의무기와 장비·복식·군기·문서 등 7만8천35점이 전시되며 현재 83%를 확보했다. 이 기념관의 특징은 정적이고 폐쇄적인 지금까지의 전시방식에서 탈피,생생한 체험적 전시가 될 수 있도록 디오라마와 영상시설을 많이 설치,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한 점이다. 우선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설치된 호국추모실은 호국의 의지를 담은 서울대 미대 한운성교수의 천장화와 동양화가 박정규씨의 「단장의 산하」,통일을 상징하는 윤동구씨 등의 작품 「빛과 물」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이어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외침에 맞서 싸웠던 주요 대외항쟁과 각종 무기·장비·복식·기치·군사제도 등을 문헌자료와 조각·그림·사진 등으로 전시했다.특히 살수대첩과 한산대첩·귀주대첩·처인성전투·매소성전투·진주대첩·행주대첩 등의 전투상황은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했으며 안시성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은 기록화에 담아 선보이고 있다.이와함께 성곽과 봉수대·거북선·조선시대의 범선과 병선,대한제국의 신식군대 훈련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했으며 서구열강의 당시 군사력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6·25전쟁의 발발배경과 남침·반격·중공군 개입·전선교착·휴전 등으로 구분해 6·25를 객관적인 사실로 보여준다.전선에서의 장병들의 전투상황은 물론 후방 국민들의 전시생활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보여준다.특히 전후세대들을 위해 「전쟁체험실」을 설치,전쟁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해외파병실은 우리 국군의 파병배경과 의의 그리고 월남에서의 활동상을,국군발전실은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창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의 발전과정을 각각 실물·사진·그래픽·모형 등으로 소개한다. 강의용전시본부장은 『우리 민족은 전쟁의 영향을 그 어느 민족 보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직 전쟁박물관 하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번듯한 기념관을 갖게돼 다행』이라면서 『국민에게 전쟁의 교훈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산교육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대마도의 백제산성(일본속의 한국문화:5)

    ◎1,300년전 축조… 전형적인 “한국식”/하도북쪽 만속에 자리… 돌로 쌓은 천혜요새/백제장군이 라당연합군 침공 막으려 급조 오늘은 대마도의 백제산성을 구경하러가는 날이다.우리들 일행이 묵은 곳은 대마도 태초의 백제수도로 알려지고 있는 기치(계지)국민숙사이다.이 기치에는 2백기가 넘는 고대왕묘(전방후원분)가 남아 있어서 한일양국 학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이들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론 일본인 학자들은 한국측의 백제인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이 기치를 방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을 백제성이라 부르면서 기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백제인이 아니라면 말이 안된다.그러나 말이 안되는 것을 말이 되도록 꾸며내는 것이 일본고대사학자들의 주된 임무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양심적인 일본학자들은 사석에서나마 자기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한다. 백제산성을 가노라면 배를 타야 한다.길이 없는 것이다.배는 전세를 내야 하고 하루 온종일 타고 가는 강행군이다.그러나 바다는 고요하고 좀처럼 파도가 일지 않는 아사마만이다. 「아사마」라고 하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아사마는 본시 아사뫼 즉,단군이 정도하였다고 전하는 아사달에서 유래된 말이다. ○배타고 한참을 가야 아사달의 「달」은 뫼 즉,산을 지칭하는 우리 고유어다.이곳에서 「아사마」를 한자로 천○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그 뜻을 몰라서 이곳 향토사학자들 사이에 아사마논쟁까지 벌였다는 말을 듣고 내심 고소를 금할수 없었다. 대마도는 그 중간 허리에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넓은 만을 이루고 있는데 이 만은 한국 쪽으로 열려 있고 일본 쪽으로는 육지로 닫혀 있다.따라서 이 만연안에 정착한 태초의 이주자들이 한국 쪽에서 온 것이 확실하고 이 일대에 남긴 고분이라든지 그밖의 여러 유적들이 모두 고대한국인 특히 백제인들의 것임이 확실하다.그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백제산성이다. 지도에 보면 백제산성은 대마도의 상도와 하도중 남쪽의 하도 맨 북단에 위치하고 아사만을 내려다 보고 있다.러­일전쟁때 일본 해군이 이 산성에 포대를 설치하여 귀중한 산성의 망루와 봉수대를 파괴하여 버렸다고 하니 그 위치가 고금을 통해 군사적 요새지임을 알 수 있다. 배가 백제산성(여기서는 단지 성산이라고 부르고 있다)어귀에 닿자 높이 40m에 이른다는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 보이고 그 아래 좁은 수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이 절벽을 「톱으로 썰어낸 듯한 바위」라 하여 거할암이라 명명하고 대마도 제일의 명소의 하나로 자랑하고 있다.참고로 말해두지만 대마도의 산세나 지질이 모두 우리나라의 연장이다.그래서 낯설지가 않다. ○산성 높이는 6∼7m 이 수문을 통과할때 탐방단 학생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지금으로부터 1천3백여년전 우리 조상이 이런 아름답고 험한 곳에다 산성을 쌓았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수문을 통과하면 약간 넓은 또 하나의 만이 나오고 오른쪽에 산성이 보이는데 선착장이 없다.만일 안내해 준 영류구혜씨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배를 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아슬아슬하게 배를 바위 틈에 대고 모두가 상륙해서 산성으로 올라갔다.수풀속을 헤치면서 2백∼3백m 산을 올라갔을까 높이 6∼7m나 되는 백제산성 제3문의 웅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놀라운 광경이었다. 일본속의 한국문화유적지를 많이 보아왔지만 이토록 가슴을 친 순간은 없었다.도대체 이렇게 험한 산속에다 무슨 힘으로 바위를 깨뜨리고 돌을 깎아 차곡차곡 성벽을 쌓아 올렸을까.사진에서 보는대로 네모나게 툭 튀어나온 부분은 소위 각대라고 하는 것인데 이 각대만은 수직으로 쌓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만일 이 각대를 여느 성벽처럼 경사지게 쌓는다면 성의 방어기능이 반감되고 만다.또 각대와 각대 사이의 거리는 화살의 사정거리에 맞추어 쌓게 되어 있는데 제1,제2,제3의 성문거리가 정확하게 이 군사원칙에 들어맞고 있다.이것만 보더라도 이 성을 쌓았다는 백제장군의 군사지식이 당대 제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감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지금 유명한 정다산의 「민보의」에 나오는 축성법을 읽고 대마도의 백제산성을 논평하고 있는 것인데 1천3백년전의 백제장군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지금까지의 정설에 따르면 6백60년 백제가나당련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자 이곳 백제군(위군)이 가장늦게 백제구원차 출동하게 되는데 6백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전멸당한다.그래서 이곳 백제인들은 나당련합군의 침공을 두려워해서 이듬해인 6백64년에 이 산성을 급조했던 것이다. ○백제멸망 직후 건립 우리나라는 자고로 산성의 나라로 유명했다.전국에 2천개,지금 남한에만도 1천2백개의 산성이 있는데 그중의 많은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이고 일본에까지 뻗어서 대마도와 일기도,그리고 북구주에 우리식 산성들이 산재해 있다.대마도의 성산 일명 김전산성 이 그 대표적인 백제산성이다.워낙 산세가 험하고 바다를 앞에 두고 쌓은 천연의 요새가 되어 여간해서는 가보기가 어렵다.그래서 대마도라고 하면 이 산성 하나만 보아도 본전을 뽑았다고 할 정도로 가보기 어려운 곳이다. 우리나라 산성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설명하겠으나 그 속에 우리 민주문화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일본속의 한국문화 제1번지가바로 이 대마도의 김전산성이란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 한국 전기통신 1백년사 한눈에/「통신 사료전시관」내일 개관

    ◎용산전화국내 전시… 1천8백점 일반에 공개 1885년 서울∼인천간 전신개통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전기통신 1백8년 발자취를 한눈에 보여줄 「한국통신 사료전시관」이 28일 용산전화국내에서 문을 연다. 통신역사를 재조명하고 21세기 고도 정보화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건립한 사료관은 4백20평에 제1·2전시실,사료보관실,영상실 등을 설치,각종 통신사료 1천8백여점을 전시한다. 제1전시실은 고대통신부터 전기통신 도입까지 복식의 변천,전신·전화기의 발달,통신교육기관의 변천 등 7개 코너로 꾸며졌다.여기서는 고대 통신수단인 솟대와 신호용 연·북·마패·봉수대 등과 전기통신 초기의 통신기기를 볼 수 있다. 제2전시실에는 1898년 처음으로 도입된 자석식교환기부터 공전식교환기,기계식교환기,전전자교환기의 실물이 전시되며 관람객들이 실제로 작동도 해볼 수 있다.또 1904년 처음 깔린 해저케이블과 무선통신,위성통신 등에 이르는 각종 통신시설도 보여준다. 한국통신은 평일 상오 9시부터 하오 5시까지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통신문화를 확산시키고 사료수집을 계속해 전문 통신박물관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 선사시대서 조선까지 생활사 한눈에/국립민속박물관 17일 확장개관

    ◎4천3백여점 시대순 분류전시/경복궁 중앙박물관자리/입체음향·영상 등 특수기법 선보여 국립민속박물관이 경복궁안 동쪽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서 17일 개관식을 갖고 문화부 직속기관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새 민속박물관은 1만2천8백40평의 부지에 연 건평이 4천4백54평으로 순수 전시면적만도 2천2백44평에 이른다.이 것은 옛 민속박물관 시절 부지 2천9백60평에 연 건평 1천2백63평,전시면적 6백24평이었던 것에 비해 3∼4배 이상 커진 것이다.이에따라 전시품도 2천4백여점에서 4천3백여점으로 크게 늘어나 내실있는 전시가 가능해졌다. 민속박물관의 전시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야외전시장을 갖추었다.상설전시실은 다시 「한민족 생활사」를 담은 제1관과 「생활문화와 민속」을 담은 제2관,「한국인의 일생 및 사회제도」를 담은 제3관으로 나누어진다. 「한민족 생활사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민족의 생활사를 시대순으로 배치해 이해를 돕도록 했다.선사시대의 각종 생활도구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고구려의 생활문화,백제의 제사유적,신라의 왕경도,가야의 야철공방,고려의 인쇄 및 청자문화,조선의 한글창제와 과학기술 등 주로 정신세계와 관련된 자료들이 복원 전시된다. 「생활문물과 생산민속관」은 생업자료 및 농경문화와 세시·수렵·어로·수공예를 비롯해 우리 전통사회의 의·식·주 생활을 엿볼수 있도록 꾸몄다.고대 에서부터 근래까지 쓰였던 각종 농기구와 정월 대보름놀이 등 농경 세시의례를 비롯해 각종 옷과 장신구,부엌 세간 및 세시음식과 일상음식,각종 가옥의 모형 등을 전시하게 된다.이 밖에 양반 사대부의 생활과 내면세계를 살펴볼수있는 안방과 사랑방,칠기와 화각공예품이 전시되며 옹기가마도 복원해 놓았다. 「한국인의 일생과 사회제도관」은 한국인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거치는 통과의례와 오락,사회제도 및 종교에 관한 것들을 담았다.득남을 비는 풍습과 선바위,서당,향교,관례 및 혼례,회갑연,상청과 제례상,사당,주막,굿청,각종 놀이모습이 전시된다.또 문방구류,악기,화폐와 교통·통신과 관련된 봉수대,조운선 등이 모형으로 재현된다. 이들 전시는 모두 디오라마,모형,입체음향과 영상매체를 이용한 특수 전시기법을 적극 활용해 관객들의 즐거움을 더하고 이해를 높이도록 했다.한편 중앙홀에서는 개관을 기념하는 「한국의 건축문화」특별전이 열린다.여기에는 신라의 안압지와 황룡사 9층탑,백제의 미륵사,고려의 다실,조선의 근정전,동십자각,사랑방 등의 모형이 포함됐다. 야외전시장에는 귀틀집과 원두막,솟대 등 생활문화가 원형의 크기로 들어섰다.이 밖에 영상실 및 2백52석 규모의 강당이 들어서 사회교육 기능을 담당하게 되며 기념품 판매대도 마련했다.
  • 신정연휴/도심 한산… 관광지 북적/전국스키장에 사상최대 30만인파

    ◎차량 대혼잡… 숙박업소 동나/수월한 귀경길… 영동고속도만 체증 올해 신정연휴는 어느해보다도 큰사건·사고없이 차분하고 조용했다. 모처럼만의 사흘연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고향을 찾아 가족·친지들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으며 전국의 스키장과 산·온천장등 유원지도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신정연휴기간동안 강원도 설악산과 경포대·평창군 용평스키장과 고성군 알프스스키장·무주리조트등 관광지에는 30여만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스키장등 유원지 주변도로는 행락객들이 타고온 차량들로 혼잡을 빚기도 했으며 호텔과 여관방이 동이나 민박을 하기도 했다.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들도 임진각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찾아 북녘땅을 바라보며 이산의 아픔과 실향의 슬픔을 달래고 조국통일을 기원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가족과 함께 가정에서 조용하게 휴일을 보내거나 가까운 친지들을 찾아 새해인사를 나눴다. 서울도심지는 연휴기간동안 상가들이 모두 문을 닫은 가운데 발길이 뜸한 모습이었지만 시내 극장가에는 영화를 보려는 인파가 이른 아침부터 몰려 매진 사태를 빚기도 했다. 새해 첫날인 1일 서울 남산 팔각정 앞뜰에서는 제2회 통일기원 남산봉수대봉화식이 있었으며 한강고수부지에서는 연날리기대회도 열렸다. 신정연휴 마지막날인 3일 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역,김포공항등에는 귀경객들이 분산해 상경한 탓으로 큰 혼잡을 빚지는 않았다. 귀경객과 행락인파는 예년에 비해 30%이상 늘었으나 예년과 같은 정체현상은 없었다. 특히 지난해말 양재∼수원구간과 수원∼천원구간등 병목현상을 빚던 길이 1차선씩 확장된 경부고속도로는 더욱 원활한 소통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하오 늦게부터는 귀경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고속도로 차량속도가 떨어지고 일부구간에서는 체증을 빚기도 했다. 왕복 2차선인 영동고속도로의 경우는 신갈기점 45㎞지점인 가남휴게소주변이 이날 하오2시부터 심하게 막히는등 다른 도로보다 비교적 교통체증이 심했다.
  • 외언내언

    고작 서른 아홉해를 살다간 신동엽시인.「4월은 갈아엎는 달」을 노래했던 사람이다.공교롭게도 그는 4월(7일)에 눈을 감는다.그 「갈아엎는 달」에.◆요맘때의 농촌에서는 쟁기질을 하여 땅을 갈아엎는다.흙들이(객토)를 하기도 하고.신시인은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과 『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를 거기 빗댄다.그러면서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을 갈아엎었으면』한다.『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보리를 뿌리면/비단처럼 물결칠,아 보리밭』.그는 『산천은 껍질을 벗고 속잎 돋아나는』4월을 예찬한다.그 4월이 오늘부터 열린다.◆하루가 다르게 봄옷을 입어가는 산야.싱그러운 섭이의 질서를 보여준다.그것은 계절을 갈아엎는 모습이기도.하지만 어찌 산천만 껍질을 벗어야 한다 하랴.우리들 마음속의 응어리진 껍질도 벗어야 하는 달 4월.속잎 또한 초목에서만 솟아나야 하는 건 아니다.우리들의 심성에서도 솟아올라야 할 아름답고 진취적인 기상.4월은 그렇게 마음을 갈아엎으라고 이르는 양하다.◆올해의 4월은 역사를 숙연히 되돌아보게 하는 달이기도 하다.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백년이 되는 해의 달이기 때문.1592년 4월13일 가덕도 응봉 봉수대에서 왜군 병선이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온다.그 다음날인 14일에는 부산성이 함락되면서 무풍지대를 가듯 북상해 갔던 왜군.4백년 전의 조선의 4월은 잔인했다.조총소리 속에 짓밟히며 숨져 갔던 우리의 조상들.그런데 오늘에 또다른 조총소리를 듣는 것 같다.환청일까.◆멀리 이국땅에 나가 있는 가족·친지에게 편지를 띄우자.거기 4월의 향기를 담자.껍질을 벗고 속잎 돋아난 4월의 마음을 실어 보내자.모두가 보람찬 4월을 엮어 나갔으면 한다.
  • 대규모 「지사과학단지」 연내 착공/부산시 업무보고 주요내용

    ◎순환도로망 1백㎞ 연차적 구축/녹산공단 2백여만평 올해 조성/남항 앞바다 해상신도시 건설 추진/부산포승전 4백돌 기념축제 예정 부산직할시는 올해 시정의 목표를 도시교통의 획기적 개선과 지역경제육성기반의 조성에 두기로 했다. 또 서민주택건설사업을 확대해 서면편익과 복지 증진을 꾀하고 주택가 공해공장을 이전,맑고 밝은 생활환경을 조성키로 했다. ▷도시교통의 획기적 개선◁ 도로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TSM사업과 체증도로 개선 및 11개소의 터널을 건설하고 공영 2천2백12면(14개소)과 민자 1천31면(2개소)의 주차시설을 확충한다. 대중교통 편의 제고를 위해 도시 통근열차의 증편과 해상페리 신규운항(광안∼연안부두)을 실시하며 9개 노선 1백19.7㎞의 도시순환도로망을 2003년까지 구축하고 10개년 계획으로 10개 노선 75.3㎞의 항만배후도로를 확충한다. 또 5개 노선 1백38.5㎞의 지하철 1호선(서대신동∼신평)의 연장과 2호선(호포∼좌동) 건설을 97년까지 완공한다. ▷지역경제의 육성기반 조성◁ 물가안정을 당면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선거를 틈탄 경제질서 교란행위에 적극 대처해 시민경제생활을 보호한다. 또 신평·장림협업단지 조성(59만평)과 녹산공단(2백21만평) 신호공단(89만평) 등을 조성,산업입지 확충을 꾀하고 중소기업 지원과 신발산업 육성 등 지역경제 관리능력을 제고하며 농산물 도매시장과 동남개발연구원설립 등으로 유통구조 개선 및 중추기능을 강화한다. 특히 강서구 지사동 2백만평에 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추진,2001년에 완료한다. ▷도시기능의 발전적 개편◁ 21세기 국제화에 대비,새로운 발전축의 「신부산」 건설을 위해 서낙동강권과 해안권 내륙권 도심권 등 4대권역 균형개발을 추진키로 하고 ▲서낙동강권 종합개발은 명지·녹산지구 개발(3백53만평·주거 및 공단)과 가덕도 종합개발(1천85만평)을 추진,신국제공항을 유치키로 하고 ▲해안권 개발로는 남항 앞바다에 2백60만평(인공섬 1백88만평) 규모의 해상신도시 건설을 추진키로 하고 도시개발 공사를 발족했다. 내륙권 개발로 92만평 규모에 3만3천가구,12만평을 수용할 수 있는 해운대 신시가지를 95년까지 건설키로 했으며 ▲도심권 개발로 화명2지구(44만평),금곡지구(13만평) 등 대규모 택지를 개발하고 오는 96년까지 1천6백30억원을 들여 동래구 연산동 2만4천평에 시청·의회·경찰청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청사를 이전키로 했다. ▷자치시대의 봉사시정구현◁ 지방의회의 원활한 운영협조와 자치행정의 기능보강 등으로 지방자치의 발전적 수행을 유도해 나간다. 컨테이너세 과징과 숨은 세원발굴,효율적 집행을 위해 민자유치를 확대,자치재정을 확충한다. 또 「동주임제」를 시행,동기능을 보강하여 일선봉사의 원활화를 통하여 행정신뢰를 구축한다. ▷복지증진과 환경개선◁ 복지기반시설 확충과 저소득주민 돕기 등으로 저소득시민 생활안정을 구축하여 2001년까지 서민주택 31만8천가구를 건설,주택보급률을 89.2%로 올리며 양질의 수돗물 공급과 하수처리장 건설 및 쓰레기의 원활한 처리를 위한 대단위 해양매립장 확보와 1일 2백t 처리규모의 소각장 건설 등 생활환경을 개선한다. ▷시민생활 함양과 문화창달◁ 「시민의 날」을 발전시켜 운영하며부산자랑 순회예술제 등을 통하여 화합·애향·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용두산공원 일원에 문화의 거리 조성과 가야문화유적 보존 및 해양박물관 건립을 추진한다. 특히 금년은 부산포승전 4백주년을 맞아 동래줄다리기,봉수대 점화식 등 기념축제를 가진다. ▷새질서 새생활 실천정책◁ 호화사치·낭비풍조를 추방하고 범인성 유해환경업소를 근절하며 범죄소탕을 위한 「대범죄 전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사회안정 확보를 위해 불법·폭력시위에는 엄정대처하고 안보 및 치안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차량 10부제를 확대하고 「교통사고 줄이기운동 5개년 계획」을 적극 추진한다.
  • 조선 정도이후의“영산” 일제,“정기말살”수난도/“남산6백년” 약사

    ◎일,아카시아 심어 소나무 밀어내/호텔등 들어서며 녹지 크게 잠식 남산은 옛날 조선초기 도성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목멱산 또는 인경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남산은 해발 2백56m로 높은 산은 아니다 북서쪽으로는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여기저기 계곡이 깊고 그윽해 서울도심의 명산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같은 남산은 이미 조선초기 태조때 그 영험함을 인정받아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산신을 모셔 제사를 지냈으며 남산의 동쪽 기슭에 무학대사 사당을 안치하면서 국사당으로 불렸다. 또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도 커 능선을 따라 성곽이 세워졌으며 5개의 봉수대가 있어 전국각처의 봉화신호가 이곳에 모아지기도 했다. 후기에는 청계천쪽 남산기슭에 가난한 양반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남산골 딸깍발이」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의 유래를 낳기도 했다. 일제시대이전의 남산의 모습은 소나무가 전체 수목의 70%를 차지,애국가의 가사처럼 「철갑을 두른듯」 소나무가 무성했다. 그러나일제때 민족정기말살을 위해 유럽산 변종 아카시아가 심어지고 신사건립등으로 제모습을 잃기 시작했으며 6ㆍ25동란과 해방을 거치면서 훼손이 가속화됐다. 57년 이태원 산 1의 7 일대 3만3천㎡(1만평)가 외국인주택단지 건설을 위해 공원에서 해제된 것을 시작으로 58년 동국대 건립,63년 월남난민주택과 중앙공무원교육원,67년 군장교주택,69년 외인아파트 건립을 위해 공원이 잠식되어 왔다. 70년대에 들어서는 하이아트호텔(71년),신라호텔(75년) 등 재벌들의 호텔건립으로 공원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로써 남산은 1940년 3월 총독부고시로 남산도로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현재까지 총 36회에 걸쳐 공원일부가 잠식된 기록을 남겼다. 남산은 지난 84년 건설부고시에 의해 도시계획공원으로 지정된 뒤 동서 2.7㎞,남죽 1.2㎞ 89만6천평의 면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에는 현재 1백93종의 식물과 꿩ㆍ다람쥐 등 63종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소나무는 대부분 3년생으로 60년생이상은 1백84그루에 불과하다. 약수터 8개소를 비롯,전망대ㆍ도서관ㆍ식물원 등을 찾는 시민은 하루평균 3만7천6백70여명에 달하고 있다.
  • “그리운 혈육 만나려나”… 설레는 실향민

    ◎“남북왕래”선언… 온국민이 “대환영”/이북5도청등 문의전화 “빗발”/“북서 거부”소식에 다소 실망도 노태우대통령이 남북자유왕래를 허용하는 「민족대교류기간」을 선포한 20일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날 대통령의 담화내용이 온국민의 염원인 통일의 길을 앞당기는 획기적인 조치라고 환영하며 북한측의 반응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국민들은 북한측이 노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번 광복절때 남북교류가 이뤄지면 그것을 계기로 교류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고 나아가 통일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날 하오 북한측이 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실망하는 모습들이었다. 특히 이북5도민회 등 북녘에 가족과 친지를 두고온 실향민들은 『이번에야말로 남북왕래가 실현돼야 할 것』이라면서 북한측이 노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을 간절히 바랐다. 이날 이북5도청사무국과 1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회에는 방북신청절차 및 필요한 서류ㆍ준비사항 등을 묻는 실향민들의 성급한 전화가 빗발쳤다. 일부 시민들은 그러나 북한측의 폐쇄정책 등으로 미루어 이번 조치가 기대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정부의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후속조치를 기다렸다. 정부의 시책에 늘 비판적이던 「전민련」과 「전대협」 등 재야 및 학생운동단체에서까지 이날 노대통령의 담화를 『통일의 실현을 위한 전진적인 조치』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러나 『남북간의 실질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문익환목사ㆍ임수경양 등을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재야단체들은 이번 담화에 따라 다음달 13일부터 15일까지 판문점에서 열 계획인 이른바 「범민족대회」에 대한 정부의 불허방침이 사실상 철회된 것으로 보고 『이 대회를 실현하기위해 곧 정부여당ㆍ평민당 등과 구체적인 실무접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각계의 소리/“민족화합기반 구축의 대결단/경제협력등 실질방안 따라야/거부 예상했지만 기대 못버려” ▲전경련=대통령의 선언은 남북한 인적왕래를 특정기간 개방함으로써 민족화해의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통일을 위한 신뢰와 전망을 밝게 해 이를 촉진하려는 결단으로 환영한다. ▲조동영씨(67ㆍ1천만 이산가족재회 추진위원회 사무총장)=51년 1ㆍ4후퇴때 혼자 월남했다. 북에는 부모님이 계시는데 꿈속에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살아계실 지도 모르겠다. 이번 방문이 성사돼 한명이라도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에 갈수 있게되길 바란다. ▲조영황변호사=노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독일통일 등 국제적 정세에 맞춰 한반도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획기적인 조회로 크게 환영한다. 앞으로 남북간의 경제협력이나 상호방문 등 점진적이고도 실제적인 교류방안을 모색하는 등 제도적인 뒷받침이 따라야 할 것이다. ▲어수영교수(51ㆍ이화여대 정치외교학)=이번 담화는 7ㆍ7선언보다 진일보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북한측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의문이지만 인도적 입장에서 북한이 이를 수용,판문점을 통한 자유왕래가 실현된다면 통일로가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신신묵목사(한강중앙교회담임)=북한이 우리 제의를 받아들여 판문점을 열면 그들이 평양에 세웠다는 봉수대교회에서 예배를 올리고 싶다. 그렇게 되길 기도하겠으며 몇 안되는 북한성도들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박현성스님(서울도선사주지)=우리 불교계는 지금까지 여러 채널을 통해 여러가지 방법의 교류를 모색해 왔다. 이번 특별담화로 명절때만이라도 남북합동법회가 열리고 더 나아가서 북한불교유적을 복원하는데 참여할 수 있길 희망한다. ▲김성재씨(66ㆍ황해도중앙도민회 사무국장)=지난 47년 황해도 장연에서 월남한 뒤 한시도 북에 계신 부모님을 잊어본 적이 없다. 이번 선언이 현시화돼 모든 실향민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했으나 예상대로 북측이 거부하고 나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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