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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 주변 경찰1천명 포위/오늘 새벽… 학교측 요청따라

    ◎수업 방해학생 출입 차단/주동학생들,한양대서 철야농성/오늘이 유급시한… 막판협상 실패 10일로 문교부가 제시한 유급시한을 맞게되는 세종대사태는 이날새벽 경찰 1천여명이 학교주변에 배치돼 수업재개를 막는 학생들의 출입을 봉쇄함에 따라 수업정상화를 통한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됐다. 경찰은 이날 0시30분 경찰 2개중대 3백여명을 학교 정문과 후문에 배치한데 이어 상오4시쯤 4개중대 6백여명을 추가배치,이날상오 등교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거부학생들을 철저히 가려내기로 했다. 경찰은 이날에도 계속해서 수업이 정상화되지 않을경우 학교측의 요청을 받아 강의실 주변까지 경찰력을 배치해 수업방해를 막을 방침이다. 세종대 이중화총장은 이에앞서 9일 하오5시30분쯤 관할동부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사태해결의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경찰투입을 공식 요청한다』고 밝혔으나 경찰은 수업거부 주동학생 대부분이 학교를 빠져나감에 따라 학교안까지의 병력투입을 일단 유보했다. 학생들은 이날 낮 교문앞 등에서 화염병ㆍ쇠파이프 등을 들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다 공권력이 투입될 움직임을 보이자 이 가운데 주동학생 3백여명이 하오6시쯤 한양대로 장소를 옮겨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처음 이웃 건국대에서 철야농성을 하려고 집결했으나 다시 한양대로 농성장을 옮겼다. 세종대는 공권력투입요청에 앞서 학교측ㆍ학부모ㆍ학생들이 대화를 갖고 사태해결방안을 논의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세종대는 유급시한일을 맞아 「선수업정상화」를 위해 교직원 2백30여명 전원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10일 상오6시30분까지 출근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문교부는 10일까지 수업정상화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이날하오 세종대로부터 지난달 25일 임시휴업조치 해제이후의 출석부를 넘겨받아 수강학생명단을 확인하고 각 학과별로 담당교수의 재량에 따라 출석을 인정해줄 수 있는 학생의 명단을 파악하는 등 유급학생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문교부는 당초 10일부터 수업정상화가 안될 경우 전원유급이 불가피함을 통고했으나 그동안 수업을 계속해온 학과의 학생들은 구제되어야마땅하다는 판단에 따라 선별유급으로 방침을 바꿨다. 세종대는 이날 학생 1천여명이 등교했으나 수업거부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곳곳에서 집회를 벌이고 교수들은 방관적 자세로 일관한데다 학교측ㆍ학부모ㆍ학생들과의 막바지 대화마저 타협점을 찾아내지 못해 정상수업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날 수업이 이뤄진 학과는 전체 27개학과 가운데 무용과ㆍ체육학과ㆍ가정학과 등 그동안 수업을 계속해온 4∼6개학과 정도에 불과했다. 세종대는 이날 낮12시쯤 대강당에서 이총장 등 학교측 대표,김인석씨(61) 등 학부모 5백여명 및 학생 8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타개책마련을 위한 대화를 가졌다. 이총장은 이 자리에서 『7월10일이 지나면 아무리 좋은 타협안도 의미가 없어지므로 유급을 막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수업을 재개해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학생들은 『지난 88년11월 합의했던 총장직선제 등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한 유급을 각오하고라도 계속 수업을 거부하겠다』고 맞섰다. 또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유급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하므로 학교측과 학생들은 모두 사회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라며 수업재개를 촉구했으나 일부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주장부터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다른 의견을 제시,학부모끼리도 이견을 보였다. 학생 가운데서도 수업재개를 주장하는 그룹의 대표 강석훈군(29ㆍ경제학과4년)이 토론회장 연단에 올라 의견을 발표하려 했으나 반대학생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연단으로 몰려가 밀어내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들끼리 몸싸움도 벌어졌다.
  • 스탠퍼드대 「한반도 학술회의」지상중계

    ◎“남ㆍ북한「선 신뢰구축ㆍ후 군축논의」바람직” 미스탠퍼드대 국제안보ㆍ군축연구소가 주관하는 「한반도평화와 안보에 관한 학술회의」가 남북한 및 미국학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일부터 동대학서 열리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 군축문제와 관련,3국관계자가 한 자리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것은 처음있는 일로서,이번 회의는 커다란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에는 한국측에서 정종욱교수(서울대),북한측에서 이형철 평화군축연구소 군축연구실장,미국측에서 존 루이스교수(스탠퍼드대) 등 3국의 주요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참석자들이 3국의 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이어서 이번 회의의 비중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취재는 물론 기자들의 접근마저도 봉쇄된 채 진행되고 있는 회의의 토의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측 참석자들은 남북한간에 군축과 관련,상당한 인식차가 있음을 확인했으며,북한측 이형철씨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관해 종전보다 적극적이고 솔직한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군축과 관련해서 이번 회의에 임하는 3국의 입장을 정리해 본다. ◎한국의 입장/교류확대ㆍ군사정보 공개등 투명성 강조 남북한 군축에 대한 우리측 입장은 기본적으로 「선신뢰구축 후군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남북한체제가 어느 기간동안은 그대로 존속되는 것을 전제로 한 군비통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모두 현재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여 평화공존하는 정치적 신뢰구축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며,기초적인 신뢰조차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측의 기본시각이다. 이러한 인식위에서 우리측은 그동안 군사문제 논의는 유보,일반적 신뢰구축을 위한 인적ㆍ물적 교류의 선행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정부는 남북한간에 군사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내용으로서 군사적 신뢰구축을 제시했다. 또 군사문제를 지칭하는 용어도 「군축」이라는 말보다 포괄적 개념인 「군비통제」라는 말을 씀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이 선행돼야한다는 기본인식과 군축이라는 말이 일부 국민과 군에 줄 수 있는 거부감을 줄이려는 고려를 보이고 있다. 우리측은 이러한 「군비통제」의 개념아래 첫단계로 불가침협정 또는 기본협정 체결,상호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등 기초적 여건을 조성하며 2단계로 공격적인 무기의 배치 및 수량제한을 거쳐 파기문제까지 논의한다는 것이다. 우리측이 군사적 신뢰구축의 단계에서 상정하고 있는 기본개념은 「투명성」이다. 즉 양측이 군사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상대방이 공격의사를 갖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우리측은 이를 위해 군사훈련의 상호통보 및 참관,연대 또는 사단급 이상의 배치ㆍ이동에 대한 정보교환 등을 제의해 왔다. 우리측은 이밖에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화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설치 ▲군인사 상호교류 등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 나가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상호군사정보를 공개하는 「투명성」을 보장하고 군사훈련을 억제하는 군사적 신뢰구축 과정을 거쳐야만 실제로 병력과 무기를 감축,폐기하는 군비축소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의 기본입장인 것이다. 군축의 시기에 대해서는 우리측의 입장은 유동적이다. 기본적으로 신뢰구축이 선행돼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만큼 1단계가 얼마만큼 빨리 진척되느냐에 따라 2단계 3단계의 시기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측의 기본입장은 통일방안에서 기능주의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군축문제에 대해서도 군사적 신뢰구축을 거쳐 실질적인 군비축소로 이행하는 점진적 군비통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입장/검증기구 없이 단기간내 병력감축 주장 북한은 분단이후 계속 군축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우리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남조선해방」논리를 버리지 않아왔기 때문에 우리측은 그것을 「선전공세」로 일축해 왔다. 우리측이 군축의 선결조건으로 군사적 신뢰구축을 강조하는데 반해 북한은 직접적인 군축을 주장하고 있다. 신뢰구축조치의 선행 없이도 곧바로 군비축소에 돌입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북한은 3단계에 걸쳐 최종병력을10만명으로 줄이자는 파격적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실현성이 의문시되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기만 충분히 있으면 병력은 단기간내에 모을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 군비축소의 개념은 바로 무기의 폐기,특히 공격용무기의 폐기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설령 남북한이 병력감축에 합의한다 해도 현재로서는 이를 감시하거나 검증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북한이 내놓고 있는 군축제안은 사전에 이를 검증할 만한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들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 실현가능성은 그리 크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남북관계자들은 그러나 지난 5월31일 북한이 중앙인민위원회ㆍ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ㆍ정무원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군축방안에서 북한측의 입장이 다소간 유연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측의 제안은 ▲남북신뢰조성 ▲남북무력감축 ▲외국무력의 철수 ▲군축과 그 이후의 평화보장 등 4가지의 내용을 담고있다. 이 제안에서 북한은 군축우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미군철수및 남북군축의 시기를 못박지 않고 「신뢰조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등 과거보다 한결 진전된 자세를 보였다. 또 미국을 포함한 3자회담 이전이라도 군축문제을 토의해아 하며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고위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설치 ▲군사연습 상호통보 등 우리측의 제의와 비슷한 내용도 제시됐다. 정부는 그러나 북한측의 조치들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으며 회담장이 아닌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발표한 사실 때문에 아직은 북한측의 진의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북한의 경제력으로 더이상 남한과 군비경쟁을 계속할 수 없는 현실과 국제무대에서의 고립심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군축협상에 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인들이어서 북한이 앞으로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군축에 적극적인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의 입장/정상회담ㆍ평화협정 등 거쳐 통일 이룩 한반도의 군축과 평화를 위한 미국의 입장은 제임스 굿비교수가 6일 주제발표를 통해 밝힌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5단계 방안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의 제네바군축회의 대표를 역임한 굿비교수는 한반도의 안보와 협력을 정치적 조치와 군축방안으로 나눌수 있으며 완전철수와 핵무기 배치금지 조치이후에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굿비교수의 논지를 보면 정치적 조치는 상호신뢰 구축을 위한 것으로 고위급 회담개최,상호비방 선전중지,교류확대,불가침과 무력사용 중단선언,평화협정체결 등이 포함된다. 군축방안은 「군사적 작전통제」와 「구조적 군사통제」단계로 상정했다. 먼저 군사적 작전통제에는 특정군사활동에 대한 사전통보ㆍ병력규모 배치ㆍ장비 등에 관한 기초정보자표의 상호교환,위협적인 군사활동의 금지 등 조치가 있어야 한다. 구조적 군사통제에서는 군사작전통제단계보다 다음과 같은 높은 수준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포괄적 감축협정을 통해 여러 단계에 걸쳐 남북한 모든 형태의 병력을 현수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감축해야 한다. 둘째 포괄적 군사감축 계획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 셋째 한반도에서 핵무기 배치를 금지시켜야 한다. 이러한 정치적 조치ㆍ군축방안과 관련,여러문제들을 협의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남북 대표간의 대화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합의를 위한 틀을 만들기 위한 몇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남북한간에 신뢰구축 및 제반법적 조치들이 합의되고 쌍방이 이 과정에서 책임있는 입장을 천명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남북한과 제3국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킬 조치들을 군사작전통제 및 구조적 군사통제와 병행시키는 단계이다. 셋째는 남북한관계의 정상화를 더욱 확대하고 군사작전통제 및 구조적 군사통제에 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는 단계이다. 넷째는 남북한의 경제통합조치와 정치기관들의 연계,보다 높은 단계의 구조적 군사통제의 제반조치를 실행하는 단계이다.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실행가능한 군축실현의 순서를 총괄,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남북정상회담 및 정례적인 남북각료회담,서울∼평양간 통신확대,이산가족 방문,군사훈련 참관▲제2단계=남북불가침,군사력 사용반대 선언,특정군사 활동의 사전통보 ▲제3단계=지상군의 첫단계 감축,주한미군감축,군사훈련의 규모와 형태제안 ▲제4단계=평화협정체결,미군철수,핵무기배치금지,검증 ▲제5단계=통일 한편 미국은 자국의 경제회복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예산절감을 위해 한반도의 군비통제를 환영하는 것과 함께 그동안 동북아에서 누려온 주도적인 지위가 상실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한반도의 군축문제에 적극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 문공위 폭력소동/여야,방송관계법 상정­저지 격돌

    ◎김영진의원(평민),명패던져 최재욱의원 부상/민자,“강력징계” 요구 국회는 7일 문공위를 열어 방송법등 3개의 방송관련법안을 상정할 예정이었으나 이에 반대하는 평민당측이 문공위소속이 아닌 의원까지 동원해 회의진행을 실력으로 저지,폭력유혈사태까지 발생하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문공위는 이에따라 이날 개의를 하지 못하고 오는 9일 회의를 열어 법안을 상정,심의할 예정이나 법개정과 관련한 여야간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는 한 또다시 격돌이 예상된다. 이날 폭력사태는 낮 12시5분쯤 이민섭의원(민자)이 회의장에 입장,개의를 선포하려는 순간,평민당측이 『법안상정을 위원장에게 일임키로 한 사실이 없으므로 여야합의에 의한 회의개최에 동의할 수 없다』며 의사봉을 뺏는 등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빚어졌다. 10여명의 여야의원들이 심한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최재욱의원(민자)이 농수산위 소속인 평민당의 김영진의원이 던진 명패에 얼굴을 맞아 입술등이 찢어져 6바늘을 꿰매는등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고려병원에 입원했다. 민자당은 이날 불상사가 빚어진 뒤 즉시 총무단회의를 소집,국회의사당내에서 폭력을 행사한 김의원에 대해 강력한 징계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오는 9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최종대응방안을 결정키로 했다. 이민섭위원장도 박준규국회의장 앞으로 사건경위서를 보내 김의원에 대한 제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위원장은 국회의장에게 보낸 사건경위서에서 『이미 지난 5일 여야 간사회의등을 통해 법안상정문제는 위원장에게 일임한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평민당이 이를 어기고 회의자체를 봉쇄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국회교체위는 이날 상오 영등포역사 롯데상가 분양의혹설과 관련,진상조사소위(위원장 권달수)를 영등포역사 건설현장에 보내 현지조사활동을 벌였다. 소위는 이날 영등포역사 공사사무실에서 장성원롯데쇼핑사장으로부터 상가분양과정등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분양자명단 공개를 요구했으나 롯데측이 분양자들의 사생활보호를 이유로 이를 거절,명단입수에 실패했다. 롯데측은 『상가분양과 관련,정치권이나 권력층의 압력을받은 사실이 없었으며 정부측이 발표한 이외의 정치권 또는 권력기관 관련자가 분양과 관련된 사실도 없다』고 밝히고 『분양자 명단은 분양자들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절대로 공개할 수 없으며 명단공개와 관련,검찰 또는 타기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말했다.
  • 알바니아 “탈출자” 급증/서독대사관등에 2천여명 몰려

    ◎당국,외국공관 봉쇄 해제… 민주화개혁 조짐/당중앙위 소집… 지도부 개편 가능성 【파리 로이터 연합】 해외로 탈출하려는 알바니아인들이 비자를 얻기위해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외국대사관에 쇄도해 약 2천명이 각국 대사관에 진을 치고 대기중이며 이같은 이주희망대열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파리의 서방 외교소식통들이 6일 말했다. 이 소식통들은 티라나의 서독대사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약 1천5백명이 대사관에 머물러 있으며 프랑스대사관에 2백30명,체코와 폴란드ㆍ헝가리대사관 등에 2백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또 해외이주 희망자들에 대한 여권발급 방침을 밝힌 알바니아정부가 이주희망자들의 외국대사관 출입봉쇄를 해제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으며 시가지 경계에 나선 경찰들이 오히려 이들에게 길안내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탈리아 외무부 대변인은 티라나의 외국대사관 지구에 대한 알바니아경찰의 봉쇄가 해제된 것은 「새로운 자유화 방침의 시작」일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서독과 프랑스ㆍ이탈리아대사가 알바니아 당국에 외국 이주희망자들의 안전출국 보장을 촉구하는 EC의 요구를 이날 늦게 알바니아측에 서면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다시노 데르비치 이탈리아주재 알바니아대사는 알바니아 집권공산당의 정책결정기구인 중앙위가 이날 회의를 소집,당지도부를 개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당중앙위 회의 개최일정이 이번 알바니아사태 이전에 정해졌다고 말했다. 이에앞서 5일 한 유럽 고위외교관은 지난 1일부터 촉발된 소요사태로 약20명에서 50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 북의 「판문점개방 발표」 왜 나왔나

    ◎대외선전 대남교란의 “복합적 카드”/8월 범민족대회 전민련등 참가 유인/고위급회담 때맞춰 의미축소도 노려/“선언적 의미에 불과” 상투적 전략 분석하기도 북한이 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의 성명을 통해 오는 8월15일부터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내 북한측 지역을 일방적으로 개방한다고 발표하자 정부는 북한측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각적인 검토작업과 함께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북한측의 이번 조치가 오는 8월13일부터 3일동안 판문점에서 열기로 돼 있는 「범민족대회」에 전민련·전대협 등 우리측 재야단체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사전포석의 일환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일 제7차 남북 고위급 예비회담에서 남북 쌍방이 본회담 의제및 대표단 구성·회담형식 등 모든 실무문제에 합의,제1차 본회담의 8월중 서울개최가 확실해진 이 시점에서 북한측이 우리 정부가 꺼려하는 범민족대회 개최를 굳이 들고나온 배경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한측의 이번 제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범민족대회 개최주장의 연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게 통일원 당국자의 설명이다. 범민족대회는 지난 88년 9월 우리측의 전민련이 남북공동 서울올림픽 참가를 명분으로 먼저 북한측에 제의했으나 당시에는 북한측의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강경파인 김중린 대남 담당비서가 중용되면서 오히려 북한측에서 자주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이후 북한은 남북대화가 중단될 때마다 이를 들고 나오는 「주기적인 습관」을 반복해 왔다는 것이 이 당국자의 분석이다. 더욱이 북한측은 지난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김일성이 조국평화통일 5개 방침을 밝힌 이래 이에따른 후속조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정부측은 보고 있다. 따라서 북측 제의는 조국통일 5개 방침중 제5항인 「전민족적 통일전선형성」의 후속조치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즉 북측은 이 방침에 따라 남북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하는 민족통일협상회의와 범민족대회 개최가 남북통일의 지름길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해왔다는 얘기다. 정부내에서도 북측의 이번 제의를 놓고 강·온 양론이 엇갈리고 있는 것같다. 먼저 북한측 제의는 고위급회담의 서울개최에 합의는 했지만 의외로 대북 개방유도등 우리측 공세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고위급회담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강경론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측에서 계속 거부하고 있는 전민련등의 범민족대회 참가를 고집함으로써 이 대회의 개최를 고위급회담의 전제조건화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북측은 고위급회담까지 성사되는 마당에 우리 정부가 전민련등의 범민족대회 참가허용여부를 놓고 고심하는 모습을 「선전용 카드」로 이용하겠다는 전략을 드러낸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재야단체를 보낼 수도,안 보낼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정부가 처할 딜레마이고 북측은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겠다는 계산을 했음직하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만약 전민련등이 범민족대회 참가를 강행하고 우리 정부가 이를 원천봉쇄한다면 많은 수의재야인사가 구속될 것이고 북측은 이들의 석방을 명분으로 고위급회담의 무기한 연기를 통보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이럴 경우 8·15이후에 개최될 것으로 예상되는 고위급회담은 설령 개최되더라도 처음부터 암초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측 제의는 우리측을 상당히 비난하는 내용이 많아 이해할 수 없는 예상밖의 일이라는 것이 강경론자들의 해석이다. 북측이 또 통일논의를 위해서만 접촉과 왕래의 의미가 있다고 제안한 것은 그밖의 다른 분야,즉 경제 학술 체육 등 제반교류에는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반면 온건론자들은 북측 제의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다. 범민족대회 개최자체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그동안 여러차례 제기한 습관적인 문제인 만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다. 북측이 이 대회개최를 강행,특별한 성과를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조국평화통일 5개 방침에 따른 북측 나름대로의 후속조치를 선언적 의미에서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결국 온건론자들은 『대내외선전용으로 한번 제의해본 것에 불과하다』고 북측 제의를 일과성으로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 것 같다. 고위급회담도 이에따라 범민족대회 개최예정일인 8월15일을 피해 이후에 열린다면 아무런 물의없이 성공적으로 개최될 것으로 이들은 예상한다. 이들은 또 북측이 제의하는 것마다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할 경우 남북 관계개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양론에도 불구,정부는 모처럼 마련된 남북 화해분위기를 이어나간다는 방침아래 우리측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용할 수 있다는 전향적인 자세로 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된다면 북측의 이번 제의는 상당한 홍역을 치르지 않고 「찻잔속의 태풍」에 그칠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한종태기자〉 ◎북의 「일방 발표」… 전문가의 시각/“대외선전용의 상징적 개방… 북의 진의 파악을” ▲유석렬교수(외교안보연구원)=남북한 전면개방및 자유왕래를 주장한 김일성신년사의 후속조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판문점의 북측 지역을 개방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시행된다는 의미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선전적 차원에 불과하다. 가령 북한이 군축회담 의때 군대를 일정 규모 일방적으로 감축했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없듯이 특정지역을 개방한다는 것 또한 대외적인 개방압력에 맞서 북한도 앞장서서 남북교류에 대처하고 있음으로 과시하는 것일 뿐이다. 북한은 대미관계의 개선,대소관계의 유지 등을 위해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전향적인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최평길교수(연세대)=북한의 선전적 선언에 대응하는 우리측의 반응이 보다 중요하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북한은 동구식의 개혁과 개방조치를 취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때문에 북한은 자체내의 변화를 극소화하는 조건하에서 대외적인 선전공세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번 선언 또한 그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우리측 지역만을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을 몇곳 선정,이를 개방하겠다는 식의 역선언을통해 북한측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신철균교수(통일연수원)=국제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북한이 상징적이며 대외선전차원에서 내놓은 선언임에 분명하지만 남북 관계의 진전으로도 볼 수 있다. 북한은 곧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한소수교를 비롯,북경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강화될 수밖에 없는 한중관계등을 고려할 때 과거와 같은 정치적 선동만을 되풀이 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다. 따라서 남북 총리회담및 국회회담등 각종 회담에 있어 북한의 자세는 보다 적극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남북교류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경제교류등이 이뤄져야 하지만 이같은 개방이 초래할 체제위협을 잘 알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남북관계를 급진전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번 조치는 「8·15 범민족대회」의 개최를 겨냥하는 동시에 앞으로 열릴 총리회담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정치·군사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기 위한 분위기조성 노력을 가시화하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정용석교수(단국대)=종래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다. 그러나 비무장지대의 진정한 비무장화와 같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북한측 지역만 개방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북한측의 이번 선언은 우리 사회내 일부 급진세력의 주장을 옹호하는 한편 오는 8월13일부터 3일동안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인 「8·15 범민족대회」의 성사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보다 농후하다. ◎판문점 운영 현황/출입허가·경비·대북접촉 등 유엔사서 관장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의해 생긴 판문점은 남북이 군사분계선상에 걸쳐 있는 지름 8백m가량의 원형 구릉지대로 남북이 공동으로 경비하고 있다. 면적은 약 15만평 정도이다. 판문점 주변은 1m높이의 시멘트말뚝 1백26개가 10m간격으로 둘러쳐져 있고 남쪽의 경비는 유엔군사령부 비서처가 관장하는 독립부대가 맡고 있다. 판문점공동경비구역의 출입통제와 경비·운영은 휴전회담 당사자인 유엔군사령관이 관장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일직장교회의·비서장회의 등을 통해 공산측과 접촉하며 군정위 본회담을 준비한다. 유엔사는 한국 정부의 신청을 받아 공동경비구역안의 내·외국인 출입을 허가해 주고 있다. 한국인이 단체로 판문점을 관광하려면 정부 관계기관의 허가와 승인을 받은 뒤 유엔사에 신청,시간배정을 받아 자유의 다리를 통과,방문할 수 있다. 한국정부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내무부나 공보처·통일원·적십자사 등 관계기관의 추천과 신원조회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공동경비구역안의 출입자명단을 북한측에 통보할 필요는 없다. 유엔사는 남북한간의 대화·접촉을 지시하고 있어 한국 정부의 방문신청을 거부한 일이 없다. 북한이 공동경비구역안의 북한측 구역을 일방적으로 개방한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으면 유엔사측은 이곳의 출입을 허가할 수 없다.〈김원홍기자〉
  • 임야 6백5평이상 거래/매매증명서 첨부 의무화/산림법 개정

    ◎14일부터 투기 원천봉쇄 오는 14일부터 2천㎡(6백5평)이상의 임야를 사고자 할때는 반드시 임야매매증명을 발급받아야 한다. 5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개정된 산림법 시행령에 따르면 보안림과 천연보호림을 제외한 임야를 2천㎡이상 매수하고자 할 때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의 임야매매증명을 발급받도록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14일이후 임야를 매수하는 자는 임야매매증명을 첨부해야만 소유권이전등기가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경매임야의 경락자나 담보임야를 취득하는 금융기관 등은 매매증명이 면제된다. 산림청은 당초 토지거래허가지역 및 신고지역내의 임야로서 거래면적이 3천평이상인 경우에만 임야매매증명을 발급받도록 입법예고했으나 임야투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에 따라 확정과정에서 대상면적을 확대했다. ◎임야매매 허가제 문답풀이/실수요자 입증돼야 이전등기를 허용/매입목적 불이행땐 과태료 5백만원 ­임야매매증명이란 무엇인가. ▲임야의 매수자가 특정한 임야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 실수요자임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등기의 원인을 입증하는 서류로서 소유권이전등기를 할 때 이를 제출하지 않으면 소유권이전등기가 허용되지 않는다. ­매매증명이 면제되는 경우는 없는가. ▲있다. 보안림과 천연보호림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ㆍ정부투자기관ㆍ체납처분등 강제집행되는 임야의 취득자,공공사업시행을 위한 임야취득자,담보임야를 취득하는 금융ㆍ보험기관ㆍ산림조합등도 면제된다. 그러나 전국임야 6백50만㏊중 보안림은 24만㏊,천연보호림은 1만5천㏊에 불과하는등 면제대상이 극히 제한되고 있어 사실상 전국의 모든 임야가 발급대상이 되는 셈이다. ­7월14일 이전에 매매계약을 체결했으나 아직 등기를 못했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14일 이후 체결되는 계약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이 경우는 매매증명 없이도 소유권이전 등기가 가능하다. ­매매증명을 발급받지 아니하고 임야매매계약을 체결했을 때에는 어떻게 되나. ▲매매계약 자체는 유효하다. 그러나 매매증명없이는 소유권이전등기가 불가능하므로 실질적인 권리행사가 어렵게 된다. ­매매증명을 발급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매수자가 제출한 사업계획의 타당성과 매수목적의 실현가능성이 발급기준이 된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데 지방의 임야를 살 수 있는가. ▲사업계획의 내용이 타당하고 관계법령상 토지이용제한이 없을 때에는 타지역 거주자라 하더라도 매매증명발급이 가능하다. 발급기준에 거주지 제한이 들어 있지 않다. ­매매증명을 발급받은 후 매수목적대로 이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산림경영 목적으로 임야를 매수한 자가 산림을 방치할 때에는 시장ㆍ군수가 당초 매수자가 제출한 산림경영계획서대로 대집행하게 되고 산림경영 이외의 목적으로 사들인 자가 목적대로 이용하지 않거나 1년이내에 목적사업에 착수하지 아니한 때에는 5백만원이하의 과태료를 물게된다. ­임야를 매수한후 5년이내에는 전매할 수 없다고 하는데 5년이내에는 절대로 팔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5년이내 단기전매하는 임야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선매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시장ㆍ군수가 이러한 임야를 관보에 공고한후 6개월이 경과해도 선매희망자가 나서지 않을 경우에는 산림소유자가 임야를 매도할 수 있다.
  • 화물트럭 3백대,도로점거 시위/군산ㆍ옥구 한때 교통마비

    ◎운송업자들,요금인상 요구 【전주=임송학기자】 전북 군산 옥구지역 화물운송업자들이 이 지역업계에 운송요금인상을 요구하며 4일 새벽부터 집단운행거부와 함께 군산시내 주요 도로를 화물차량으로 봉쇄하고 농성을 벌여 이날 하룻동안 시내 교통이 완전 마비됐다. 군ㆍ옥지역 화물운송업자들은 지난 1일부터 운송요금 현실화를 요구하며 집단농성을 벌여 군산지역 기업체에서 생산되는 화물유통이 4일째 중단되고 있는 가운데 4일 상오4시부터 3백여대의 차량을 동원,팔마분수대부근 공단ㆍ외항입구ㆍ전군도로 등 군산시내 주요 도로와 외부연결 도로를 모두 봉쇄해 시내ㆍ외버스와 고속버스 등 외지로 운행되는 모든 교통이 두절됐다. 경찰은 4개중대 1천여병력과 도내 자동차 정비업체 등의 견인차ㆍ크레인 등 장비를 동원,도로를 봉쇄했던 트럭들을 모두 소개시키는 한편 이날 하오3시30분쯤 농성중인 차주ㆍ기사들에게 최루탄을 발사,강제해산시켜 하오 늦게 시내도로가 정상소통됐다. 한편 경찰은 이날 시위와 관련 군ㆍ옥 화물운송협의회회원 이진기씨(35ㆍ군산시 경암동 677) 등 12명을 연행조사중이며 이들 연행기사가족 50여명이 이날 하오4시쯤부터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 유고 코소보주 독립 선언/알바니아계의원 전원/민족분규 재연조짐

    【프리슈티나(유고슬라비아)로이터 연합】 유고슬라비아 코소보자치주의 알바니아계 의원들은 2일 유고 최대 세르비아 공화국으로부터 코소보주의 독립을 선언했다. 코소보주의회는 선언문을 통해 코소보주가 『유고연방내에서 다른 공화국들과 균등한 헌법상의 지위를 갖는 독립적이고 동등한 개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주적 통치를 향한 이같은 움직임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코소보주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려는 세르비아 공화국당국의 노력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지난해 코소보주에서는 자치권 요구를 둘러싼 폭동이 발발,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코소보주의회의 결정은 지난 수십년간 서로 갈등을 빚어온 1백70만명에 달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과 20만의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계 주민들간의 분열을 악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1백14명의 알바니아계 의원들은 이날 주의회 건물밖에서 경찰에 봉쇄당한채 회의를 갖고 만장일치로 이 선언문을 채택했는데 1백80의석으로 구성된 코소보주의회에서 대부분의 결정에는 단순 과반수를 필요로한다. 이 선언문은 지난 89년 통과됨으로써 코소보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알바니아계주민들의 폭동을 야기시킨 세르비아 공화국의 헌법수정안을 폐지시켰다.
  • 동ㆍ서베를린 지하철 재개통

    【베를린 연합】 동독이 서독과의 경제통합과 모든 국경통제 철폐를 축하하는 가운데 동베를린의 17개 지하철 노선중 한때 전베를린시를 운행했던 8개의 지하철노선이 1일 재개통됐다. 월터 몸퍼 서베를린 시장과 티노 치비르지나 동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의 동부지구 중심부인 알렉산데르프라츠역의 플랫폼에서 거행된 이날 개통식에 참석했다. 몸퍼시장은 이날 지난 1961년 8월13일 베를린장벽의 설치와 함께 폐쇄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운행된 첫 지하철열차를 환송하기 위해 흰색의 작은 깃발을 흔들며 『오늘은 베를린 통일의 날』이라며 기쁨을 표시했다. 지난 1961년 베를린장벽 설치와 함께 이들 지하철역 입구는 봉쇄되어 철문이 세워졌었다.
  • 남북 물자ㆍ기술교류 전면개방/「대 사회주의국가 경협기금」 설치

    ◎저소득층 「세금공제제」 꼭 마련/부동산거래 실명화 법률 제정/노대통령 「6ㆍ29」 3돌 국민과의 대화 노태우대통령은 29일 『남북한간의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북한을 통해 들어오는 항공기와 선박등 운송수단과 물자의 반입을 무제한 허용하겠다』고 말하고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공동번영을 위해 경제협력기금을 설치,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상호비교우위에 있는 생산요소를 결합,제3국에 대한 합작진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이날 6ㆍ29선언 3주년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각계대표 1백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발전과 국민통합의 90년대를 향하여」라는 제목의 서두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90년대의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한 정부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면서 조영황변호사등 대표토론자 12명과 국민관심사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우리는 민족성원 모두의 행복과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경제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제분야는 정치성을 초월해 남북한간에 서로가 필요로 하는 물자ㆍ기술ㆍ자본을 교류하고 경제협력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국민 각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오는 가을 세제개혁을 통해 집이 없는 저소득근로자에 대한 특별공제제도를 마련,전ㆍ월세값 인상에 따른 근로자의 부담을 덜고 의료공제비 혜택을 넓혀 서민의 의료비부담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영세농ㆍ어가의 복지확충을 위해 농외 취업 직업훈련 확대와 함께 추곡등 정부수매를 이들 농어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제도화하며 92년까지 사회복지분야 대학졸업자 등 전문요원 4천명을 채용,저소득층 밀집지역 읍ㆍ면ㆍ동에 배치해 가구별로 자립책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또 병실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병원의 신ㆍ증설을 금융ㆍ세제를 통해 지원해 향후 3년간 2만개의 병실을 늘리도록 하고 응급환자가 언제 어디서나 즉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내년까지 응급치료체제를 완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또 『부동산투기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근절되도록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고 부동산거래를 실명화하는 등기의무화등의 관계법률을 제정해 투기행위를 제도적으로 봉쇄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민주주의와 번영,그리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이 바로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는 바탕』이라고 강조하고 번영과 국민화합을 위해 ▲통일에 대비한 경제체제완비 ▲모든 경제주체에 대한 역할분담 ▲국민의 삶의 질향상 ▲계층간ㆍ부문간 갈등해소 ▲국민이 안심하는 사회조성 등 5가지 과제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은 약 2시간30분동안 일문일답식으로 진행됐으며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동시에 중계됐다.
  • 새 실록 6ㆍ25 김학준:하

    ◎“핵투하도 불사”… 미 으름장에 DMZ설정 동의/“휴전 지체할 수 없다”… 투르먼,맥아더 해임/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 방위조약약 가조인/아이크 대통령 당선ㆍ스탈린 사망후 「정전협상」급진전 ▷제4기◁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맥아더는 과감한 보복조치를 마련했다. 그는 50년 12월30일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에 대해 ①중국해안의 봉쇄 ②중국본토의 군수산업시설 폭격 ③장개석 군의 파한 ④장개석 군의 중국본토에 대한 견제공격을 건의했다. 그는 미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전면철수한다면 중국군의 침공위협은 보다더 중요한 지역에 대해 가중될 것이며 그 결과 보다 많은 전력의 투입이 요청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합참은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 보존에 주로 유의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라』고 답변할 뿐이었다. 맥아더는 이 답변을 「명백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국련군의 전면철수를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든지,아니면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보존을 위해 한반도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51년 1월13일 『공산군의 침략행위가 시정될 때까지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침략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세계에 밝혀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최악의 경우 국련군은 제주도와 같은 남한 연안의 섬으로 철수해 전투를 계속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임에 리지웨이대장 맥아더와 본국정부 사이에 이견이 오가는 사이 국련군은 전세를 수습하고 공세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국련군은 51년 3월 초순 이후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3월30일께까지는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국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전황이 국련군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무엇보다 전전원상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이면서 국련에서는 다시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서방진영의 국가들도 국련군의 38도선 재북상에 반대하면서 만일 미군이 단독으로라도 재북상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들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마저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은 중국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휴전을 성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3월20일 맥아더에게 그러한 취지의 성명이 가까운 장래에 발표될 예정임을 통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이 결정을 좌절시키기로 결심하고 3월24일 본국정부와의 아무런 협의없이 중국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는데 중국대륙에의 전면적 확전으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트루먼이 추구하려는 중국과의 협상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이 성명에 뒤이어 맥아더는 4월5일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조세프 마틴의원이 자신에게 보낸 3월2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공개하여 트루먼을 더욱 격분시켰다. 아시아 중시정책을 강조하면서 논평을 요구한 마틴의 서한에 대한 이 답장에서 맥아더는 우선 트루먼의 유럽 중시정책을,그리고 유럽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시아를 경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결론적으로그는 『우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3월24일자 공식성명을 보고 그의 해임을 결심했던 투르먼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4월10일 라디오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한반도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제한전에 의한 제3차대전의 방지』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8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됐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휴전을 향해 움직인다는 명백한 의사의 표시였다. 한편 공산군은 51년 4∼5월 춘계대공세를 폈으나 인명의 큰 손실을 겪었을 뿐이고,이 시점에서 전선은 완전히 교착됐다. 전선이 교착된 51년 5월 중순부터 미국과 국련에서 휴전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5월17일 에드윈 존슨 미국 상원의원이 국련이 휴전을 이끌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이 제의가 소련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된 것을 계기로 휴전논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예컨대 국련에서 리 사무총장과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 외무장관 및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각각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선에서의 휴전안을 제의했다. 소련도 드디어 6월23일 국련대표 말리크의 연설을 통해 휴전에 동의했다. 통일을 염원하던 남­북의 한인들에게는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쌍방의 참전국가들의 거의 예외없이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제5기◁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의 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7월8일 개성의 중심지 북방에 있는 지난날 유명했던 유곽에서 국련군쪽과 공산군쪽의 연락장교단에 의한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어 7월10일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다. 국련군쪽의 수석대표는 미해군 극동사령관 조이 제독이었다. 리지웨이 총사령관이 직접 뽑았다. 정전회담에서 공산군 대표들이 국련군 대표들을 자극해 국련군 대표들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화를 내게 하여 회의장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충동작전」을 쓰거나 정반대로 몇시간씩 끌면서 지치게 만드는 「권태전술」을 쓸 것이라고 계산한 리지웨이는 따라서 국련군 수석대표는 어떠한 도발적 언동에 대해서도 침착하면서도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판단했다. 즉 『6시간정도 앉아 있으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줌누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협상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리지웨이에게 조이는 적임이었다. 조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ㆍ소에 “전면전”통첩 조이 수석대표를 보좌할 대표로 리지웨이는 2차대전의 베테랑들로부터 뽑았다. 유럽전선에서 보병연대를 지휘했었고 이때 미8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호지스 소장,북아프리카에서 공중전을 지휘했었고 이때 미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크레이기 소장,태평양전쟁에서 구축함전투를 대담하게 지휘해 용맹을 떨쳤었고 이때 미극동해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버크제독이 선발됐다. 한국군으로부터는 제1군단장 백선엽소장이 선발됐다. 공산군쪽 수석대표는 남일중장이었다. 남일중장을 보좌하는 북한군대표는 전선사령부 총참모장 이상조 육군소장이었다. 정전회담에서 그는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고 앉아 「강철같은 자기억제」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 한 사람의 북한군 대표는 북한 육군 제1군단 총참모장 장평산 소장이었다. 중국군에서는 사방 소장과 등화 중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 사방이 사실상의 수석대표였고 남일은 이름이 수석대표였지 실제에 있어서는 사방의 지휘를 받는 것 같다고 국련군 쪽에서는 보았다. 회담도중 그는 동료 대표들과의 상의없이 발언했고 선전적인 문구 같은 것도 사용함이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양쪽 대표단들은 신경전을 거쳐 7월26일 다음과 같은 의제에 합의했다. ①전투행위를 정지하는 기본조건 아래 양군 사이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 ②정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하여 정전을 성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들을 결정짓는 문제. ③포로에 관한 결정. ④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에 권고하는 문제. 의제에 대한 합의와 더불어 7월28일 첫번째 의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합의가 쉬울 것 같아 버크 제독 같은 이는 본국의 아내에게 『가을이 되어 사과가 익었을 때는 나는 과수원이 있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는데 회담은 길어지면서 10월25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긴다는 것 정도에 겨우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이 이렇게 길어지면서 서방 참전국들은 초조해졌다. 이점을 간파한 공산군쪽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국련군쪽 대표들에게 모욕적인 용어마저 썼다. 호지스 소장을 「거북이 알」이라고 불렀고 조이 수석대표에 대해서는 『이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수석대표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지웨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나오는 적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비단보다 강한 쇠가 필요하다』라고 본국정부에 호소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에게 『공산군쪽이 협상에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은 만주의 공산기지를 폭격하고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여 필요하다면 소련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공갈」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트루먼은 중국에 대해 핵무기를 쓰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강경한 자세를 보면서 공산군쪽은 한발 물러서 『현재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아래 앞으로 체결될 정전협정이 지정하는 시간에 쌍방은 이 분계선으로부터 2㎞씩 철수하여 그 지역을 정전 동안 비무장화 한다』는 국련군쪽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때가 52년 1월27일이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에 관한 합의가 일단 이루어졌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전체 흐름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사분계선 문제에 매듭이 지어지면서 쌍방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들에 권고하는 문제」를 다뤄 나갔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쉽게 이뤄졌다. 즉 정전회담 발효 3개월 안에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사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기로 한 것이다. 정전의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52년 5월2일 양쪽은 스웨덴ㆍ스위스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의 네 나라로써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산군쪽은 소련을 중립국이라고 우기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포함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나머지 문제는 포로교환의 문제였다. 정전이 성립되면 포로교환은 당연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이 마당에 이 문제는 빨리 매듭지어져 정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으로 기대됐다. ○2년 1개월만에 매듭 국련군쪽은 우선 「자발적인 송환」의 원칙을 제의했다. 국련군에 포로로 잡힌 공산군에게 돌아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쪽은 「자동송환」의 원칙을 내세웠다. 모든 포로들은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공산군쪽은 이 원칙을 관철시켜야 국련군쪽에 잡혀 있는 자신들의 장병들이 서방세계를 선택하지 않고 전원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오래 끌면서 공산군쪽은 국련군쪽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는 선전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사령관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이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련군쪽은 북폭을 강화하기도 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52년 11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져 「조기정전」을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이로써 53년 1월 공화당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휴전협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53년 3월 스탈린이 죽으면서 정전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정전협상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자 이대통령은 통일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실망감 속에서 6월19일 국련군에 수용되어 있는 공산포로들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5천여명을 극비의 작전을 통해 과감하게 석방했다. 이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파한했으며 이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게 했다. 한­미간의 합의가 성립됨으로써 정전협정의 체결을 위한 길은 완전히 열렸다. 그리하여 7월27일 휴전협정은 판문점의 「평화의 천막」안에서 조인됐다. 2년 1개월 여의 긴 시간동안 5백75회의 공식회의를 갖고 1천8백여만 단어를 소비한 다음에야 매듭지어진 것이다.
  • 통일기대에 부푼 베를린 현장을 가다(이제 독일은 「하나」:1)

    ◎「냉전의 벽」넘어 게르만이 새로 난다/경제ㆍ사회 통합따라 동독 “국가해체”가속/「정치통합」남았지만 「분단아픔」역사속에/「거대국가」출현에 이웃나라선 경계의 눈초리 동서독이 7월1일부터 발효되는 경제ㆍ사회통합을 시작으로 「새로운 유럽 평화질서의 창조」로 의미되는 독일 재통일의 장도에 들어섰다. 타의에 의해 갈라섰던 동서독의 이같은 하나됨은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돼온 동서 냉전체제의 종언을 알리는 첫 신호이자 동구개혁의 값진 열매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본지는 김진천 파리특파원을 독일에 급파,현재의 뜨거운 통일에의 열정과 그들에게서 배워야할 교훈을 발굴하는 긴급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통일」,거의 반세기에 걸친 독일 민족의 염원이 드디어 실현된다. 1990년 7월1일­ 남의 뜻에 의해 나뉘어지고 등돌려 살아오던 동서독 국민들은 이날을 기해 양독간의 경제ㆍ사회통합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민족분단의 비극 45년만에 처음 느끼는 감격이며 베를린 장벽을 쓰러뜨리고 공산정권을 몰아낸지 7개월만에 이룩해낸 쾌거다. 완전통일까지는 아직 정치통합이라는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하나로 묶인 양쪽 시민들의 경제ㆍ사회생활에 있어 나머지 순서는 그리 대수로울게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통일에의 마지막 수순인 정치통합이 올해안에 실현될 것이 거의 틀림없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때 보다는 양독간에 통일을 위한 공식적인 첫 조치가 취해지는 이날 7월1일을 「통일의 날」로 하자는 성급한 주장이 진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날부터 시행되는 경제통합은 동독의 경제주권 상실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동독화폐의 가치와 효력이 소멸되고 서독의 마르크화가 단일통화로써 유통되게 된다. 또한 동독에서도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고 자유경쟁ㆍ자유물가 제도가 실시되며 노동ㆍ자본ㆍ상품 및 용역의 수급에 있어서도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특히 이와 같은 통합원칙에 맞지 않거나 사회주의국가 및 사회기반을 형성해 온 동독의 헌법조항들이 사문화된다. 통화통합에 따른 발권은행은 서독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이며 이 은행은 앞으로 동서독 전체의 통화공급과 여신수준을 총괄한다. 사회통합은 노동3권의 보장,사회복지제도 등 서독이 시행하고 있는 각종 제도를 동독에서도 함께 실시토록 했다. 이번 조치를 동독쪽에서 보면 국가해체작업의 착수를 의미한다. 국가기능의 유지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부분적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 또한 경제주권이 서독에 이양됨과 아울러 각종 사회제도가 서독과 합쳐진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분야에서 국가로서의 동독은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가 사라지는 마당에 종전에 이나라를 지배하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발붙이지 못하게됐음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여러차례 민족이 갈라졌고 주변 나라들에 의해 통일을 방해받아온 독일민족으로서는 이번 조치가 45년만의 분단해소 착수라는 단순한 감격과 흥분의 차원을 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금세기안에는 불가능한 것만으로 그리고 1년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동서독의 통일논의가 촉발된 것은 바로사회주의 경제의 몰락과 공산독재정권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지난해 11월의 동독 국민들의 시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서독의 경제ㆍ사회통합 실현은 독일의 재통일이라는 측면외에 동서의 냉전체제가 실질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첫 신호음이며 동구개혁의 값진 열매로 치부되고 있다. 전후 냉전시대를 상징해온 베를린 장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독측은 이번 경제ㆍ사회통합조치의 실현에 맞추어 이달들어 지난 61년 베를린장벽 설치로 단절됐던 동서독간의 모든 도로망의 복원작업을 펴왔으며 오는 2일까지는 양독 연결도로를 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모두 제거된다. 동서독의 경제통합은 바로 「경제대국 독일」의 출현을 의미한다. 게르만민족에 의한 피침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안고 있는 이웃나라들은 통독에 따라 다시금 독일민족의 세력 확대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일의 비대는 자칫 유럽의 세력균형을 흔들 수 있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유럽통합을 주축으로 한 EC(구주공동체)의 기능 강화를서두르는 것도,폴란드가 국경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속셈도,소련이 통독의 나토 잔류를 반대하는 이유도 모두 거대 독일에 대한 두려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동서독 국민들은 이날부터 실질적인 통일을 경험하며 「한나라」로의 완전통일을 향해 다시 남은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ㆍ사회통합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한두가지가 아니며 양쪽의 지도자나 국민들이 겪게 될 어려움도 만만치가 않다. 이러한 장애요인들을 여하히 극복하느냐가 마지막 남은 통일작업의 수순을 결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베를린=김진천특파원〉 □동서독 주요일지 ▲45. 5. 8 나치독일 항복. 미ㆍ소ㆍ영ㆍ불 독일분할통치 ▲48. 4. 소,서베를린 봉쇄 ▲49. 5.23 서독 정부수립 ▲49.10. 7 동독 정부수립 ▲55. 5. 서독,나토가입. 동독,바기구 가입 ▲61. 8.13 동독,베를린장벽 구축 ▲72. 양독,외교관계수립 ▲87. 호네커 동독공산당서기장 첫 서독방문 ▲89. 1. 8 동독인들 대량탈출 시작 ▲89.11. 9 베를린장벽 붕괴. 동독국경 개방선언 ▲90. 2. 6 동독,비공산연립정부출범 ▲90. 2.13 동서독 통화단일화추진합의 ▲90. 3.18 동독총선. 기민당승리 집권 ▲90. 4.23 서독,화폐 1대1교환 동의 ▲90. 5.18 양독,경제ㆍ사회통합협정조인 ▲90. 6.17 동독 국가해체작업 시작 ▲90. 7. 1 동서독 경제ㆍ사회통합 실현
  • 노대통령 「국민과의 대화」 서두연설

    ◎“민주ㆍ번영ㆍ국민통합이 통일의 바탕”/북한물자 직반입 전면허용/불로소득ㆍ상속재산 중과세/복지요원 4천명 배치… 저소득층 자립지원 3년전 오늘,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뜻을 받들어 「6ㆍ29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발로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민주화의 과정은 법질서가 흔들리고 지켜져야 할 가치와 권위마저 훼손되는 전환기적 현상을 거쳐야 했으나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북한변화 대비할 때 앞으로는 자율에 따라 전개되는 새로운 상황을 새로운 의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사회전반의 변화가 이루어졌으며,밖으로 한국은 거리낄 것 없는 민주국가로 세계속에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동유럽의 많은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를 하고 지난날 생각할 수 없던 한소 정상회담도 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제 소련과 중국,사회주의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열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90년대는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는 연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변화와 통일의 전기가 어느때 우리앞에 닥치더라도 이에 대비할 태세를 이제 구축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민 각 계층의 갈등을 해소하여 화합된 사회를 이루는데 모든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우리가 90년대에 이 두가지 과제를 성취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통일과 21세기 우리 민족의 장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90년대 한 단계 더 높은 발전과 국민통합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해내야 합니다. 첫째,평화적 통일을 지향하고 통일에 대비하는 경제체제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성원 모두의 행복과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경제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경제분야에 있어서는 정치성을 초월하여 남북한간에 서로가 필요로 하는 물자ㆍ기술ㆍ자본을 교류하고 경제협력을 추진할 것입니다. 이를위해 북한을 통해 들어오는 항공기와 선박을 비롯한 수송수단과 물자의 반입을 제한없이 허용할 것입니다. 소련ㆍ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의 경제협력은 우리의 통일과 번영을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도록 지원,권장해 나갈 것입니다. ○물가상승 한자리로 둘째,우리 경제가 정부주도의 개발단계를 벗어남에 따라 기업ㆍ근로자ㆍ소비자와 정부 등 모든 주체가 역할을 분담하여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정부는 물가상승률을 한자리수에 머물게 하는데 정책의 우선을 두고 건실한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정책적인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번영을 이루는 주체는 민간부문의 기업이며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국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첨단ㆍ선진산업과 기술ㆍ인력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해나가야 하며,근로자는 생산성을 향상해야 합니다. 이처럼 기업과 근로자 그리고 정부가 힘을 모아 경쟁력을 강화하여 수출을 늘리고 연간 8∼9%의 건실한 성장을 해가면 1997년까지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경제의 앞날은 산업평화에 달려 있습니다. 셋째,발전의 기반을 확충하고 국민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과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해가야 합니다. 경부선의 고속전철화 사업,교통혼잡을 빚고 있는 경인ㆍ경수간 등의 고속도로 확충,서해안 고속도로 건설 등은 국민생활의 편익뿐 아니라 경제발전을 위해 당장 해야할 일입니다. 넷째,이 사회의 계층간ㆍ부문간 갈등의 요인을 해결하여 국민의 통합기반을 튼튼히 하지 않고서는 더이상의 발전이 어렵다는 인식하에 땀흘려 일하는 모든 국민에게 더 밝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희망의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정부는 자유시장경제의 창의와 효율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규제와 간섭은 대폭 축소하면서 시장기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분배와 사회정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위해 정부는 불로소득과 상속재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도록 세제를 개혁하고 주택ㆍ의료ㆍ교육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해나가는 한편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올 가을 세제개혁을 통해 근로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줄이는 대신,땀흘리지 않고 번 소득과 상속재산등에 대하여는 세금이 무겁게 부과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세제개혁에는 집이 없는 저소득 근로자에 대한 특별공여제도를 마련하여 전ㆍ월세값 인상에 다른 근로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의료비 공제혜택을 넓혀 서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주택문제가 우리 근로자와 서민들의 가장 절실한 소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로자주택등 공공부문에서 짓는 90만호의 서민주택 입주가 올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어려운 계층의 주택사정은 눈에 띄게 나아질 것입니다. 국민들이 집값이 올라 어려움을 겪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부동산투기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근절되도록 하겠습니다. 대기업이 내놓은 불요불급한 부동산은 반드시 처분이 되도록 하고,기업이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처해 나갈 것입니다. 현재 강력한 대책으로 부동산 투기가 진정되었다고 정부는 방심하고 있지 않으며,부동산 거래를 실명화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투기행위를 제도적으로 봉쇄할 것입니다. 작년부터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된 이후 국민의 의료복지는 획기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병실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앞으로 3년간 2만개의 병실을 늘리도록 민간병원의 신증설을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하고,응급환자가 언제 어디서나 즉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내년까지 응급의료체제를 완비하겠습니다. ○응급의료체제 완비 잘사는 농어촌을 만들기 위한 종합발전대책은 작년에 발표하여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영세농어가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이들의 농외취업 직업훈련을 확대하고 추곡등 정부수매는 이들 농어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실시할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의 어려운 소외계층을 돕는 일은 국민화합의 바탕입니다. 오는 92년까지 대학에서 사회복지 분야를 전공한 전문요원 4천명이상을 채용,전국의 저소득층 밀집지역 읍ㆍ면ㆍ동에 배치하여 가구별로 실정에 맞는 자립책을 지원할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소외됨이 없는 복지사회는 우리 사회가 안정위에서 발전을 이룩하는 굳건한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남은 임기 2년반동안 복지사회의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해도 반드시 균형된 사회의 바탕은 이룩해 놓을 것입니다. 다섯째,국민이 안심하고 생활을 영위하며 신뢰를 나누는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민생치안확립 다짐 정부는 민생치안의 확립을 다짐하고 범죄와 폭력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고 있으나 전환기를 거치면서 아직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국민 각계의 거침없는 목소리로 부정과 비리는 그 설 자리가 좁아졌으나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 지난날의 타성이 잔재해 있습니다. 정부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로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이 모든 사회적 불안을 제거해 가는데 있어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환경속에서 국민의 참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이같은 일을 해결하여 선진국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사회 각계의 의식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기의 몫을 주장하기 전에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고 자제하고 협조하여 그가 맡은 직분을 다할 때 민주주의와 발전,국민의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년동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느냐,없느냐… 통일을 이룰 수 있느냐,없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저의 임기 절반에 가까워 옵니다만,저는 남은 임기,저의 모든 것을 바쳐 겨레의 소망을 이루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 「자주국방과 국방비 수준」안보 토론회

    ◎“미군철수땐 국방비 한해 37억불 더 부담”/공군 방공망 확충ㆍ해군전력 강화 급선무/방위비 30% 늘려야 북한도발 억제가능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소장 권문술교수)는 28일 하오 대학원 복지관에서 「자주국방과 국방비적정수준」에 대한 안보학술토론회를 가졌다. 이 토론회에서 안보문제연구소 박춘삼교수는 「남북한 군사비의 비교」,단국대 정용석교수는 「주한미군철수대비 전력증강방안으로서의 추가국방비 소요분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정교수의 발표논문요지는 다음과 같다. 폴 월포위치 미국방차관은 지난 4월19일 주한미군 3단계 철수계획을 의회에 보고하면서 1단계(90∼92년)에는 7천명을 감축하고 2단계(93∼95년)에는 2사단의 병력구조를 재조정 감축하며 3단계(96∼2000년)에는 한국군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미군은 지원적지위로 물러선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의 철수에 따른 전투력보강을 위해서는 한국의 국방비 추가부담이 요구된다. 주한미군의 한국주둔소요경비산출은 3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 주한미군유지를 위해 미군이 연간 부담하는 비용을 산출하는 방법으로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4만3천명의 주한미군을 위해 26억달러의 유지비가 든다고 보도했다. 이는 급료ㆍ수송비ㆍ시설유지비 등에 소요되는 비용만 계산한 액수로 89년도 한국 국방예산 90억달러의 4분의1에 해당된다. 둘째 보유자산과 서태평양지역 미군유지비까지 합쳐 산출하는 방법으로 주한미군 자산 45억달러와 서태평양유지비 3백억∼3백50억달러중 주한미군의 활동과 관련된 비용 1백억달러와 유지비 26억달러를 합한 1백71억달러이다. 셋째 유럽주둔 미군의 총체적 유지비와 비교하는 방법인데 30만 유럽주둔 미군을 위해 연간 1천5백억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유럽주둔 미군의 7분의1에 해당하는 주한미군의 수에 대비하면 1백5억달러가 소요된다.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산출방법이 상이하며 철수분에 대한 전력보강 산출도 상이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주한미군이 철수할때 한국은 적어도 북한의 군사력만큼 신속히 한국의 전력을 증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전력증강은 전쟁재발 예방을 위해요구되는 힘이며 북한과의 화합과 평화통일의 길로 유도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화합과 평화통일은 오직 양측의 군사력균형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군사력균형이 파괴될때 우세한 쪽이 약한 쪽을 무력으로 흡수통일했다. 6ㆍ25동란이 그랬고 베트남에 의한 자유월남의 무력화가 그 예이다. 반대로 분단 쌍방의 군사력이 대등할때 상호협력과 평화통일의 길이 열린다는 발전법칙은 동서독의 경우와 남북예멘의 통합에서 실증되고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군사력을 포함해서 전력지수가 북한의 70%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현 군사력 수준에서는 취약한 군사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군이 철수하면 제7공군이 통제하고 있는 조기경보체제도 철수하게되고 전술항공통제본부도 빠져나가 한국의 방공망에 큰 구멍이 뚫리게된다. 또 제7함대의 지원을 즉각 받아 낼 수도 어려워지게 되며 후방상륙작전이나 항만봉쇄작전같은 해군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렵게 된다. 주한미군의 철수로 GNP대비 방위비부담률이 5%에서 8%로 증가한다면 경제성장률은 연간 8%에서 5%로 둔화하게될 것으로 예상된다. 부족한 병력과 전투력을 보강하기 위해 현재병력의 30∼50%를 증원해야 한다. 사병의 의무복무기간은 30개월에서 48개월로 늘어나야하며 예비군복무연령도 35세에서 40세까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무기와 장비에 있어서 30% 떨어지고 있는 현 수준을 균형시키려면 89년기준 국방예산을 연간 30%씩 증가시켜야 한다. 장비와 무기에 있어서의 30%부족은 병력의 차이 극복처럼 단순히 30%의 방위비증감으로 메울 수 없다는데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족한 30%의 무기와 장비는 수백억달러에 해당하기 때문에 현금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미지상군 가운데서도 최강의 정예부대로 꼽히는 2사단은 기계화율이 90%에 이르는 중무장사단이다. 2사단이 철수하는 경우 한국군이 화력을 보충하려고해도 3개 보병사단,1개 특공연대,1개 포병여단,1개 기갑여단,1개 방공포대대 등을 거느리는 1개 군단을 창설해야 한다. 한국국방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89년 현재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앞으로 5년간 5백85억달러가 추가로 요구된다고 한다. 지상군증강비로 1백50억달러,공군증강비 1백억달러,해군증강비 1백억달러,경보체제 및 통신장비 35억달러,추가운영비 2백억달러로 세분되어 있다. 주한미군은 육군전력에 있어서는 한국군의 5.5%밖에 안되지만 공군에 있어서는 30%에 해당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해군은 한국에 상주하고 있지는 않으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 지원해올 병력은 한국해군 50%이상의 전력에 이른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총체적 유지비가 1백71억달러에 해당된다는 계산도 있다고 앞서 밝힌 바 있다. 이 액수에 준거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떠나버린 미군의 전력효과를 메우기 위해 한국은 1백71억달러를 투입해야 한다. 5년으로 나누어 분할 한다고 해도 연간 37억달러의 국방비를 추가해야 한다. 이 경우 한국의 국방예산은 지금보다 30%이상 증대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국내외정세의 피상적 흐름으로 방위비축소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6ㆍ25남침때나 지금이나 적화통일야욕에 있어 크게 변화하지않고 있다. 주한미군철수가 어려운 안보환경을 새롭게 제기한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 방려지 출국허용과 이철영 방일의 의미

    ◎“경제봉쇄 풀기”… 중국의 실리외교/일 총리와 친한 이,56억불 차관교섭 추진/“서방에 경원재개 설득”요청할 듯 중국당국이 지난해 6ㆍ4 천안문사건 이후 서방세계에서 자국에 대해 취하고 있는 경제봉쇄령을 풀도록 하기 위해 요즘 들어 다양한 외교전략을 숨가쁘게 구사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5일 북경의 미국대사관에 1년이 넘도록 피신해 있던 반체제물리학자 방려지부부의 출국을 허용,서방국가들로부터 일단 환심을 사는데 적잖이 성공을 거둔데 이어 오는 30일엔 국무위원 이철영을 일본에 보낼 계획이다. 이의 방일계획이 발표된 것은 지난 21일이었지만 사실은 중국정부가 방교수부부의 출국허가를 이미 결정,이 조치의 파급효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부드러운 분위기속에 놓이게 될 것을 미리 계산하고 이의 방일날짜를 30일로 잡았을 것이란 지적이 유력하다. 또 시기적으로도 24일이 강택민이 당총서기에 취임한지 한 돌이 되며 7월들어 곧 서방선진 7개국(G7) 정상들이 모여 대중관계정상화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져 중국으로선 이번 기회에 서방세계의 경제제재가 종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번 일본행에 나서는 이철영의 경우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가 비록 대외적으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중국권력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부총리와 장관 사이의 직급으로 모두 9명뿐인 국무위원직을 맡고 있는 것 외에도 이철영은 최고정책결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당중앙정치국의 14명 위원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함께 국가교육위원회 주임(장관급)도 겸임하고 있다. 그러나 직함외에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의 등소평 친자설이다. 등은 지난 30년대 중반 권력투쟁에 패해 심한 곤경에 빠졌을 때 두번째 부인 김유영(사망)과 이혼했으며 당시 등의 반대파였던 이유한(사망)과 재혼한 김이 얼마후 낳은게 이철영이라는 것. 따라서 이가 빠른 속도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보이지 않는 등의 뒷받침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번 일본행도 등의 특명을 받은 밀사자격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는게 관측통들의 지적이다. 그러면 지난해 6ㆍ4 천안문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중국고위층인사인 이가 지닌 임무는 무엇일까. 크게 세가지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는 7월9일부터 11일까지 미 휴스턴에서 열리는 서방 7개 선진국(G7)정상회담때 일본이 다른 국가들에 세계은행(IBRD) 차관동결을 비롯한 각종 대중국제재조치를 풀도록 설득해줄 것을 요청하는 일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본의 가이후(해부)총리는 지난해 총리가 되기 전 같은 문교행정을 맡은 장관으로서 이와 절친했고 당시 이에게 일본방문을 요청한 사실도 있고 해서 이번에 가이후ㆍ이회담은 당연히 이뤄질 전망이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가 일본에 대해 종전에 이미 중일간 계약이 체결된 56억달러 상당의 엔화표시 장기저리 차관을 하루 빨리 공여해주도록 촉구할 것이란 점이다. 이 엔화공공차관은 중국이 90∼96년에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재원이다. 그러나 6ㆍ4사건이후 서방선진국들이 공동으로 취한 대중국 경제제재조치 때문에 이 차관제공계획도 동결된 상태이며 중국은 철도ㆍ항만ㆍ발전소시설 등의 건설계획이 큰 차질을 빚음에 따라 고통을 겪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가이후가 중국을 대신해서 미부시대통령에게 중국수출상품에 대한 미측의 지속적인 최혜국대우(MFN)조치를 요청해 주도록 바랄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가 1년시한부 연장의사를 밝힌 이 조치는 현재 미의회에서 중국의 인권문제와 관련,찬반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이 조치가 중단될 경우 연간 1백억달러 가까이로 예상되는 중국의 대미무역흑자는 10분의 1정도로 격감되고 경제운용은 말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또 일본으로선 중국의 총외채 4백13억달러 가운데 그들몫이 35%나 되는데다 다른 나라에 크게 앞질러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므로 자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대중국제재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장기화할 경우엔 오히려 일본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일본측은 중국과 자국의 이익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다른 서방국들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같다. 가이후총리가 7개국 정상회담 직전에 단독으로 부시대통령과 만날 것으로 전해지는 것도 일본이 중국을 위해 단단히 총대를 메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철영의 이번 방일은 중국과 서방의 관계회복에 도움을 주고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의 교류에도 융통성이 주어질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다.
  • 미,6ㆍ25 계기로 초강대국 부상/WP지,「한국전 40년」재조명

    ◎국방비 지출 3배ㆍ병력수 6배 늘어나/외교정책 반공으로 선회… 냉전 본격화 미국에서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진다.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아 오래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세계전략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고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전 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회고했다. 다음은 EJ 다이오네 기자가 쓴 이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 처럼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지만 월남전 처럼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았다. 초기를 제외하면 한국전은 특별히 인기있는 전쟁도 아니었고,또 월남전처럼 극심한 국론 분열도 야기 하지 않았다. 결말도 나지 않고 인식도 잘못된 한국전은 그후 미국이 50년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뻗어 나가자 재빨리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버렸다. 한국전은 미국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정치,대통령권한에 대한 이해,군의 지위,그리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은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고,또한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깔아 놓았다. 어느 면에서 이 잊혀진 전쟁은 미국 전사상 가장 긴 파장의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도 좌파 정책연구소의 리처드 바네트는 『장차 한국전은 월남전보다 더 중요하게 회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역사가들 사이에서 토대를 넓혀 가고 있다. 몇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전은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사비 지출은 49년의 1백40억달러에서 53년엔 4백40억달러로 늘어났다. 한국전이 터진 50년 6월 미국은 59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된 53년에 이 숫자는 3백60만명이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침공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의 실존」증거를 제공했다. 역사학자이며 50년대에 출간된 「미국 전성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오닐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2차대전 후 조지케넌이 제창한 대소 봉쇄정책의 골간 수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을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겨 주었다는 비난 속에 대소 자세를 경화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한국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한국 파병 결의를 내세워 전쟁 선포에 관한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냉전의 중요한 선례가 된 이같은 처사는 월남전 기간중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은 또 미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고립주의에서 반공으로 바꾸게 했으며,이러한 변화속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공산주의 탄압 입장을 강화시켰다. 역사학자 존 패트릭(캘리포니아대)은 매카시즘을 『전쟁의 성취도가 결여된데 따른 심리적ㆍ정치적 좌절의 소산』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냈을때 전쟁을 종결했다면 미국은 신속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것이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때까지 한국전에서 미국인 남녀 3만3천6백29명이 죽었고 10만3천명이 부상했다. 한국전 종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휴전이라는 모호한 결론을 성립시킨후 『우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이뤘을 뿐 세계 평화는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한국전이 후에 월남전까지 이어진 긴 냉전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한반도에도 신데탕트 바람 분다/미ㆍ유럽서 본 「한국통일의 전망」

    ◎미국의 시각/동구변혁이 분단해소의 촉매로/평양 폐쇄주의가 장애물… 자유왕래 실현돼야 일찍이 공산주의의 멸망을 예고했던 미국의 석학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교수는 『유럽문제가 해결되면 국제적 관심이 한반도에 쏠려 한반도 통일 논의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한반도 통일은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체제의 승리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카터 미행정부에서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의 이같은 낙관론은 지난봄 동북아 문제협의회에 참석한 한국 의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피력된 것이다. 브레진스키는 『2차대전후 인위적으로 분단된 한­월­독 가운데 월남과 독일은 어느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이겨서 분단문제를 해결했다』고 상기시키며 『남북한 통일문제가 한 체제에 대한 다른 체제의 승리 방식으로 수렴될 것인지,아니면 타협형이나 제3의 방식으로 수렴될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북한 공산체제는 살아 남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과는 뻔하다』면서 한반도에서 독일식 통일의 재현 가능성을 강력히 예견했다. 북한을 압도하는 남한의 경제력과 인구도 이같은 예견의 바탕에 깔려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남북한문제 전문가 가운데 소련의 개혁과 동구공산주의의 몰락이 앞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촉진시키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도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통일의 당사자인 남북한간에 기초적인 교류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운위 한다는 것이 시기상조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의 견해도 한반도 통일의 긴박성을 역설했다기 보다 세계적 변화의 맥락에서 통일 여건이 호전 됐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스티븐 로젠펠드는 『2차대전후 해방된 한반도를 통일국가로 건설하는데 실패했던 미국과 소련은 이제 냉전 종식과 더불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독일과 동구의 산 경험을 토대로 한반도 통일과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시장 경제체제로의 전환 방안에 관한 미소의 공동 연구가 지금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이 일을 바로 추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정책은 무엇인가. 국무부의 리처드 솔로몬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환영한다. 우리는 남북한 대화가 통일달성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통일을 촉진시킨 최근 사태들은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분단된 지역의 대표들과 분단 정부의 관계관들이 긍정적인 대화를 할 경우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기반 위에서 통일의 기초가 마련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독일에서 터득했다.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사태 발전이 있기를 우리는 고대하고 있다』 솔로몬의 답변이 시사하듯이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통일의 기초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시각이다. 한반도가 통일 되려면 우선 남북한 사이에 긴장이 완화되고 자유 왕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미국은 말하고 있다. 또한 신뢰구축 조치가 이룩되면 북한이 통일의 최대 장애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추가 감군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문제들을 논의할 남북대화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판국에 어떻게 먼 통일의 시기와 방법을 예측할 수 있겠느냐고 미정부 관계자들은 반문한다. 최근 뉴욕 타임스지는 『지난해 독일 통일의 돌파구를 열었던 신뢰구축 조치가 한반도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며 남북한의 극적인 통일 가능성을 배제했다. 타임스는 그 이유를 『남한과의 서신 교환 및 전화통화를 봉쇄하고 무역도 거의 하지 않는 북한의 폐쇄주의』에 돌렸다. 저명한 아시아통인 로버트 스칼라피노교수는 통일문제 접근과 관련한 남북한 정부간의 대립,즉 남쪽은 경제 및 문화 접촉의 증진을 통한 신뢰 분위기 조성을 선호하는 반면 북쪽은 처음부터 광범위한 정치 군사 협정을 요구하고 있는 이견의 해소를 선결해야 할 큰 과제의 하나로 지적했다. 한반도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북한의 변화가능성에 대해 미국의 전문가들은한결같이 낙관론을 펴고 있다. 특히 78고령인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의 변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다. 미국무부의 북한문제 전문가 존 메릴은 『북한이 사회주의 세계에 충격을 준 민중소요를 피하려면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 시키기 위한 노력을 증대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문제는 북한이 모방할만한 경제개혁의 모델이 사회주의 세계에는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일의 관건인 북한의 변화는 이처럼 돌파구 없는 경제문제에 의해 촉발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각/「신뢰의 장」 넓힐 유연한 자세 필요/독일과는 달리 한반도문제는 예측못할 난제 한반도문제를 보는 유럽의 시각은 대체로 두가지로 분류된다. 그 첫번째는 최근의 국제정세가 한반도문제해결에 어느때 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한 긍정론이다. 이 견해는 대세의 흐름에 힘입어 한반도문제도 이미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으며 통일이라는 좋은 열매를 기대해 봄직도 하다고 사뭇 희망적인 전망에 인색치 않다. 그러나 또다른 쪽에서는 한반도문제는 여전히 앞을 내다 보기 힘든 난제중의 하나로 판단하고 있는 신중론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남북한의 분단해소문제는 동서독의 그것과는 기초부터 다를 뿐만 아니라 분단상황이나 북한정권의 특수성 등으로 미루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동서진영간의 해빙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한반도만이 예외지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부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 유럽사람들의 인식이다. 파리대학의 기 소르망교수는 『한반도의 분단이 얄타체제의 산물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념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얄타체제가 붕괴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당연히 한반도의 분단해소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전제,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국제정세변화는 분단해소작업의 착수를 위한 좋은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전문가들은 절차만 남겨놓고 있는 소련의 한국승인,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개선노력,미국과 북한과의 접근 움직임등은 동북아평화정착에 필수조건들이며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 하나씩 충족되어 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한반도통일작업의 시작단계로 보아야 마땅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폴란드 국제문제연구소의 레세크 스즈크박사는 한국정부가 기울이고 있는 대북한 대화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주 가까운 시기」에 그러한 노력의 성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이같은 견해들은 한반도통일문제와 관련한 외적요인 또는 주변환경변화추이를 토대로 한 분석들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최근 북한의 자세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지난달의 미군유골 인도,미국에 대한 비난 중단,대서방접근 노력강화 등은 전례없는 온건노선의 표방으로 받아들여진다(프랑스ㆍ르몽드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움직임은 그들의 2대동맹국인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관계개선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참아내기 힘든 국제고립화 현상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역대 어느 정권보다훨씬 차원 높은 대외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한껏 고양되어 있는 한국으로부터의 외교적 도전에 대처해야만 하는 북한은 어쩔수 없이 온건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고 개방을 준비해 나가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동ㆍ서독과는 달리 직접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좌ㆍ우익의 극심한 대립의 상처를 안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해소문제는 상호불신의 제거작업에서부터 착수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국 리즈대학의 에이든 포스터카터교수도 북한에 있어서 「변혁」이나 「개방」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이른바 「주체사상」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정권유지의 틀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급격한 변화는 기대하기가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말하자면 변혁과 개방을 전제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는 북한이 쉽사리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공산주의 또는 스탈리니즘의 패퇴,이데올로기의 가치전환으로 표현되고 있는 동구의 변혁과 같은 이념적 전환이 북한에서도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관계전문가들은 북한의 이같은 자세와 입장을 고려해 가면서 모처럼 성숙되고 있는 국제정치질서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적절한 대응책을 세워나갈 때 한반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에 곁들여 한국은 동구나 소련ㆍ중국과 국교를 트고 나면 북한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에서 벗어나 민족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상호신뢰와 양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이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는 충고가 뒤따르고 있다.
  • 소 몰다비아공도 주권선언/최고회의/유엔가입 추진 결의

    ◎루마니아인 수만명 월경 축제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소련 몰다비아공화국은 러시아및 우즈베크공화국에 이어 공화국 영토에 대한 주권및 소 연방헌법에 대한 자체법의 우위를 선언했다. 이번 선언은 몰다비아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독립국가로 격상시키며 루마니아와의 접경지대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소관영 타스통신이 전함으로써 크렘린에 가하는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풀이된다. 공화국 최고회의는 선언과 함께 몰다비아가 「주권국가」로서 유엔회원국이 돼야 한다는 내용도 승인했다고 공화국 현지언론이 전했다. 【알비타(루마니아)AFP 연합】 수만 여명의 몰다비아계 루마니아인들이 24일 문화단체들이 조직한 「국경개방」이란 행사의 일환으로 루마니아와 소련국경 경비대의 저지를 뿌리치고 소련영내 2㎞ 지점까지 진입해 1시간동안 머물며 이를 환영나온 소련의 몰다비아인들과 형제애를 나눴다. 몰다비아계 루마니아인들은 이날 소련 경비대원들에 의해 강제로 국경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1시간여동안 소련영내에 머물렀으며 국경이 봉쇄된 뒤에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축제를 벌였다. 문화단체들은 다음달 1일 루마니아와 소련의 몰다비아인들이 「인간사슬」을 형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분단 45년… 북한의 생활상 어떻게 이질화됐나

    ◎다른 길로 달린 「남과 북」… “한핏줄의 이방인”/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한핏줄의 남북한은 하나의 역사,하나의 언어,그리고 공통된 생활관습 등을 지켜왔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길로 들어선 남과 북은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최대의 비극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됐고 이 결과 전쟁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삶의 모든면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왔다. 최근 동서독이 통독의 길로 나아가는등 세계의 냉전구조가 타파되면서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되고만 한반도에도 냉전의 장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는 변혁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 제각기 달려온 남과 북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됐고 이질화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언젠가는 맞이할 통일에 대비해 서로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삼고자 한다. ◎문화ㆍ예술/인간개조의 도구화… 순수예술 명맥 끊겨 지난해 우리는 두개의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그 하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지만 북경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한 남북단일팀 구성논의에서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데 양측이 비교적 손쉽게 합의,문화적 민족정서의 공유가능성을 확인한 일이다. 또 하나는 남북이산가족의 재회를 무산시킨 이른바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피바다」 공연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 실감했던 남과 북의 현저한 문화ㆍ예술관의 차이다. 이렇듯 남과 북의 문화ㆍ예술은 공감대를 같이하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분단이후 45년간 서로다른 이념과 사회체제 속에서 이질화의 과정을 밟아옴으로써 오늘의 남과 북사이에는 엄청난 높이의 문화적 장벽이 가로놓이게 됐다. 한국의 문화정책이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구상처럼 『후기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따른 세대간ㆍ계층간ㆍ지역간ㆍ성별간의 이질화와 갈등현상을 문화의 힘으로 치유』하는데 놓여져 있다면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주체사상과 3대혁명에 입각한 공산주의적 정치사회화의 수단적 목적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초하에 체제보위 및 최고통치자에 대한 우상화 및 공산주의적 인간개조를 위한철저한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전통적 순수예술의 성격은 물론 대중예술과도 거리가 먼 주체예술ㆍ혁명예술ㆍ이데올로기예술로 변모돼 있다. 가령 북한가요 45년사에서 3대명곡으로 꼽히고 있는 「조선의 별」,「김일성장군의 노래」「동지애의 노래」 등이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시작 「묘향산의 가을날에」,80년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는 「강선의 저녁노을」 등은 모두가 김일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북한의 문화ㆍ예술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사상성이 좋고 ▲가사가 좋으며 ▲선율이 부드럽고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후의 「혁명송가」라는 「조선의 별」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투쟁을 할때 그의 추종자들이 김일성을 흠모해 지었다는 노래이며,「동지애의 노래」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촉구한 노래이다. 「강선의 저녁노을」은 남포시 강선제강소를 소재로 김일성을 찬양한 조선화이며 주체예술의 상징인 5대혁명가극의 하나인 「피바다」는 항일혁명투쟁을 주제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앞세운 목적극이다. 특히 6ㆍ25전쟁 전까지 순수예술과 목적예술간의 대립속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지 못한채 주로 소련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전쟁중 전쟁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전쟁영웅 형상화에 몰두,목적예술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전후복구와 「주체」의 슬로건 등장등 상황적 요청에 따라 문예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에 역점을 두는 새로운 전형을 형상화하는 한편 소련식 문화활동에서 탈피,김일성체제를 뒷받침하는 혁명전통확립과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양을 주제로 한 창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또한 자연만을 노래하거나 예술지상주의 태도는 반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문화예술이라는 인식하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당성ㆍ계급성ㆍ인민성의 구현이 모든 창작활동중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으로 대두됐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러한 문화예술의 원칙과 과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작가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무용가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을 망라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란 조직이 결성돼 있으며 당은 이 조직을 통해 각 분야 종사자들에게 창작 및 공연활동계획서의 제출을 강요,▲혁명전통(30%) ▲전쟁(30%) ▲사회주의건설(20%) ▲조국통일(20%) 등 4개 주제별로 창작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의식구조/어휘마다 정치색… 전투ㆍ파괴적 성격 강조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과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로서 오늘 남조선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데 쓰이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다. 우리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오늘 평양말은 서울말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 김일성이 1969년 평양말을 「문화어」로 삼은 이유를 설명한 교시의 내용으로 북한의 언어정책을 잘 보여준다. 김일성은 또 「표준말」이란 용어 대신 「문화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도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이해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되지만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다』 특히 북한은 「언어를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힘있는 무기」로 보는 언어관을 토대로 일찍부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언어정책을 펴옴으로써 분단 45년이 지난 현재 남북한간에 벌어지고 있는 언어의 이질화는 단순한 언어 자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사고와 행동양식 및 의식구조의 이질화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실제 북한에서는 언어를 씩씩하고 힘있는 무기로 다듬는다는 명분하에 『미제의 각을 뜨자』『돌탕을 쳐 죽이자』는 등의 살벌하고 소름끼치는 말들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음을 감안할때,북한의 이같은 극단적인 언어관과 언어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북한주민자신을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잠재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언어이질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의 언어정책은 1949년에 단행된 한자폐지와 이에 따른 한글전용정책에서 시작된다. 문맹퇴치와 인민대중의 조속한 사상교육을 목표로 추진된 한자폐지는 결과적으로 한글전용화로 이어졌고 이결과 북한의 각급학교 교과서 문예작품 신문 및 대중매체에서 한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한자교육은 통일후 남한문헌을 읽기 위해 또한 고전연구를 위해 하나의 외국어처럼 전공과목으로서만 남게됐다. 한글전용에 이어 가로쓰기도 시행되었으나 한자어의 어원을 가진 낱말을 한글로만 표기,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말다듬기운동」이 새로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일제하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조선어철자법」이 생겨났고 1966년에는 「조선말규범집」과 함께 「문화어」라는 새로운 개념의 어휘까지 등장했다. 문화어의 등장은 남북한간 언어이질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고 말았는데 그 성격은 서울말을 배격하고 평양말을 토대로 다듬은 그들의 공용어를 표준어로 삼는 데 있다. 한편 한자폐지와 한글전용,말다듬기운동의 결과 새로운 사전의 편찬이 불가피하게 됐는데 1968년 나온 「현대 조선말사전」의 경우 18만어휘가 수록됐던 「조선말사전」(61년)에 비해 어휘가 5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한자가 하나도 없고 옛말 사투리 고유명사 및 이른바 「퇴폐적 사상표현」등을 완전히 제외했기 때문. 또 어휘마다 정치성이 담겨져 있어 김일성의 인용구는 굵은 활자에 별표까지 달아놓았다. 현재 남북한의 언어는 발음의 차이,리듬의 차이,억양의 차이 등과 같은 음성학적인 차이를 비롯해 어휘ㆍ문법ㆍ의미ㆍ문체 및 맞춤범 등 언어전반에 걸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차이는 어휘부문에서 나타난다. 예를들면 산책길→유보도 채소→남새 화장실→위생실 고기잡이→추어전 개고기→단고기 도시락→곽밥 레코드→소리판 대중가요→군중가요 투피스→동강옷 커튼→창문보 그룹→그루빠 소년단→삐오네르 주제→쩨마 등이다. ◎경제생활/「남농북공」무너져 GNP 남한의 12%/생필품 부족… 암시장 쌀값 배급의 18배 8ㆍ15해방 당시 남북한의 산업배치는 「남농북공」으로 일컬을 만큼 지역적 보완관계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남북분단으로 이같은 보완관계는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6ㆍ25가 남과 북 모두의 각종 산업시설을 파괴,경제활동의 토대조차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은 40여년간 천연자원 및 산업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악조건속에서 통합적 발전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분리적인 발전을 계속해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굳어진 한국과 북한은 각기 다른 경제질서를 형성ㆍ유지하면서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여왔고 이 결과 88년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액(GNP)의 차이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8배나 앞서는 비교우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한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개발도상국에서 일약 중진국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1960년 1백달러 미만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은 89년말 현재 5천달러에 육박해 있다. 반면 6ㆍ25로 인해 공업생산 수준이 1949년에 비해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했던 북한경제는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56년)과 뒤이은 5개년계획(1957∼61년)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으나 그후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70년대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비해 부분적인 비교우위내지는 형평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부터는 전분야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체제가 다른 북한의 국민총생산액등 각종 경제지표의 개념은 우리와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국토통일원이 북한의 각종 선전자료를 검토ㆍ분석해 추정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국민총생산액은 88년을 기준으로 2백6억달러로 우리의 1천6백92억달러에 비해 8분의 1 수준이며 1인당 GNP는 9백80달러(한국 4천40달러),자동차 생산능력은 연간 2만대(한국 1백70만대),TV보유율은 10%(한국 1백%),전화는 7%(한국 67%),냉장고는 6.5%(한국 79%) 등이다. 한편 북한주민의 의ㆍ식ㆍ주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평등한 방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직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는 임금과 그 임금에 따른 불균형한 소비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임금은 당간부 및 고위직 군인의 급료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사무직보다는 기술직이 높다. 또 경노동 보다중노동이,중노동 가운데도 위해노동종사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85년부터는 「사회주의적 노동보수제」가 도입돼 동일직종이라도 숙련도나 생산성 등 노동의 질에 따라 급수를 달리하는 「차등임금제」가 실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같은 화폐소득의 차이를 완화하기 위해 보건ㆍ교육분야를 국가예산으로 충당하는 한편 대중소비물자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사치품의 가격을 높게 매기고 있다. 이에 따라 쌀ㆍ채소ㆍ옷감ㆍ비누ㆍ치약 등 생필품의 경우 아주 싼값으로 공급되는데 가족수와 연령,직업에 따라 품목과 수량,종류가 정해진 구입카드에 의해 국영상점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먹는 문제」의 해결이 최우선 과제이듯이 국가에서 싼 값으로 공급하는 생필품의 배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부족분을 구하기 위해 1㎏당 8전에 불과한 쌀을 「장마당」이라고 부르는 암시장에서 이 가격의 18배가 넘는 1㎏당 15원에 구입하려해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택은 협동적 소유로 행정당국에 의해 직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배분되며 그 보급율은 70% 안팎. 북한은 주택건축률이 경제발전을 대변하는 전시적 기능이 크고 남북한 사회비교의 중요한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평양ㆍ남포ㆍ원산ㆍ함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현대식 고층아파트를 신축하는 한편 농촌의 문화주택을 2층 3가구용,3층 5가구용으로 다양화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등 주거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지난 40년간 중공업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 주민들의 소비생활이 크게 압박을 받아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를 「경공업의 해」로 지정하는 등 최근 경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활풍습/“봉건잔재 없앤다” 관혼상제도 통제ㆍ규격화 북한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예의범절에 대해 『봉건지배계급이 착취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규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 고유의 예절이나 유교적 도덕관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와 당의 이익에 맞도록 변형되어 있다. 또 관혼상제를 포함한 전통적인 민속과 세시풍속 등도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변질됐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철저히 동지적이고 혁명적인 관계에 의해 이뤄지며 일생을 동지로서 당과 수령께 충성할 수 있는 정신적 풍모가 조건이 된다』고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결혼연령도 노동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남자 29세 여자 26세로 제한해 놓고 있으나 불만이 많아 80년대 이후에는 조혼추세가 묵인되고 있다. 배우자선택은 중매(60%)와 연애(40%)가 병행되고 있으나 최근 북한의 남녀대학생들은 서로 손을 잡기도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등 연애결혼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계층의 남녀가 만나는 채널은 연애보다는 부모 친척 등을 통한 중매가 지배적이다. 신랑감으로는 직업에 관계없이 평양거주총각이 최고의 배우자로 꼽히고 있으며 길흉을 가리는 결혼의 택일 풍습은 사라져 대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치러진다. 회갑이나 생일,돌잔치는 50년대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와 식량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일체 금지되었으나 60년대 후반기부터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60청춘 90회갑」이라는 구호아래 공식적인 회갑잔치는 거의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고위간부의 경우에만 김일성이 하사하는 일정한 규격의 회갑상을 받는다. 장지는 지정된 공동묘지만을 쓰도록 돼있다. 상복은 따로 만들어 입는 것이 없고 머리에 건을 쓰고 팔에는 검은 천을 두른다. 장례식과 매장은 도시의 경우 녹화사업소,편의협동조합 등이 맡아서 처리해 주며 직계존속이 사망했을 경우 상주에게는 3일간의 공식휴가와 장례보조금 10원,쌀 1말이 배급된다. 제사도 다른 풍습과 같이 6ㆍ25전까지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으나 휴전후부터 단속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부터 추석에 성묘하는 것과 직계존속에 대한 탈상까지의 제사는 묵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60년대 중반까지 「봉건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추석등 고유의 세시풍속을 공식명절에서 제외하고 김일성의 생일,김정일 생일,북한정권 창건일,노동당 창건일,사회주의 헌법제정일 등을 「사회주의 명절」로 지정,공휴일로 해왔으나 지난 88년부터 추석 음력설 단오 한식 등을명절로 부활시켰다.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인민복,검은 통치마 차림이었던 주민들의 옷차림이 두드러지게 바뀌기 시작해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남자는 양복이나 잠바,여자는 양장이나 짧은 치마차림이 보편화됐으며 머리모양이 다양해지고 화장을 한 여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던 주민들의 부분적 여행자유화 조치가 전면 보류됨으로써 일반 주민들의 북한내 여행 및 휴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금강산ㆍ묘향산 등 유명관광지의 이용자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며 주민들의 경우 공장ㆍ직장별 단체관광 정도일 뿐 가족단위의 여행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의 주요한 오락수단은 TV와 라디오이다. 또 최근 바둑협회가 새로 결성되고 실내 골프장이 생기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으나 대중이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주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는 주패놀이로 불리는 서양식 카드놀이와 장기이다. 가정생활은 지난 80년 『셋은 양심이 없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하나가 좋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이후 가족계획이 보편화되기 시작해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 형태로 옮아가고 있다.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는 등 남녀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으나 실제로는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며 여자들이 가정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남편들이 봉급을 타서 여자들에게 넘겨 주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언론ㆍ교육/비판기능은 무시… 선전ㆍ선동의 매체로 활용 최근 북한은 소련언론들의 잇따른 대북한 비난보도에 대응,소련의 평양주재 기자들에 대한 취재봉쇄조치를 취한데 이어 타스통신기자 1명을 추방함으로써 내외의 관심을 끌었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 혁명을 지지하는 기사를 쓰라,그러면 당신들의 요청이 충족될 것』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소련언론들은 북한언론들의 보도태도와 관련,「목적지향성」보도에만 집착할뿐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북한과 소련의 언론관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현재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노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과 정무원기관지인 「민주조선」을 비롯해 도단위 일간지 등 모두 30여종. 방송은 TV의 경우 「조선중앙TV」(평양TV)「만수대TV」「개성TV」 등 3개가 있고 라디오는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구국의 소리방송」「평양인민 FM방송」 등이 있다. 북한에 있어 언론이란 「김일성의 교시와 당의 정책을 해설ㆍ선전하며 그것을 철저히 비호ㆍ관철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일층 강화하여 인민들을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정치사전(73년도판)의 규정처럼 정치선전도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기사가 아닌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써 사람들을 교양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1960년 11월)에 따라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범죄나 비행ㆍ사고 등의 기사는 신문ㆍ방송 등 언론매체에 일체 실리지 않는다. 우리의 언론들이 사회의 비리ㆍ부조리 등을 파헤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긍정적ㆍ모범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계도하겠다는 언론관을 고집하고 있다. 또 북한의 언론은 자본주의언론이 중시하는 속보성보다는 매스미디어의 이념적 이용,즉 당의 정책적 선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정론성」과 「당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정론성이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ㆍ선동ㆍ조직ㆍ교육ㆍ동원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하여 「사실」을 각색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북한의 방송은 정무원직속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지도아래 운영되고 있는데 이 기구는 조직ㆍ편제상 정무원에 속해 있지만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어 사실상 2원화 되어 있다. 북한의 새 학기는 우리와 달리 9월에 시작된다. 북한은 지난 75년부터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과정으로 된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의 취학연령은 만6세. 그러나 만4세부터 시작되는 2년과정의 유치원교육중 「높은반」부터 의무교육기간에 포함되므로 실질적인 의무교육은 만5세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11년제 의무교육기간에는 수업료는 물론 면제이며 교과서ㆍ교복ㆍ학용품이 무상 또는 일부 부담으로 지급된다. 16세부터 시작되는 고등교육단계로는 2∼3년 과정의 고등전문학교와 교원대학(3년),종합ㆍ단과ㆍ사범ㆍ공장대학(4∼6년) 등이 있다. 현재 북한에는 인민학교 5천여개,고등중학교 4천2백여개,전문학교 5백여개,대학 2백70여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은 80년중반부터 낙후된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각 시도별로 「제1고등중학교」를 세우는 한편 기술계 대학의 수를 크게 늘리고 있다. 학생들은 또 「한가지 이상의 기술과 기능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예능 또는 실업 등의 실기과목을 배우고 있으며 소년단이나 사로청 등의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단체활동을 한다. 특히 의무노동이 중시돼 인민학교는 연간 2∼4주,고등중학교는 4∼8주,대학교는 12주정도씩 생산현장노동에 참여한다.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것을 주체적,창조적으로 적용했다는 「주체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고있다. 또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인간」이,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기술적 인간」이,전쟁승리를 위해서는 「체력이 튼튼한 인간」이 바람직하다는 「이상주의적인 인간상」때문에 정치사상교양 및 과학기술교육,그리고 국방체육이 북한교육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발트국 배치 핵탄두 소,러시아공에 이동

    【뉴욕 연합】 소련정부는 발트해 공화국에 산재한 핵탄두들이 불순세력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으며 그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러시아공화국으로 옮기고 있다고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지가 22일 미국의 전략전문가들 및 소련전문가들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그동안 미국방부 관리들과 의회 군사위원회 소속의원들간에 소련의 핵탄두들이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발트해 소수민족 공화국들의 반체제그룹에 넘어가 악용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어 왔다. 소련정부는 또 핵탄두문제를 잘못 다룰때 중앙정부의 권위가 크게 손상될 뿐아니라 내전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핵탄두들을 러시아공화국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저널지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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