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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만세운동·일제 만행, 사진·글로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3·1만세운동·일제 만행, 사진·글로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1920년 초 대구감옥. 스코필드는 누워 있는 김마리아를 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악랄한 고문을 받아 반신불수가 된 채 수감 중이었다. 스코필드는 혹한의 날씨에도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 마리아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 스코필드는 서울로 올라온 즉시 사이토 총독을 방문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지난달 12일은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의 서거 50주기였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묘소가 있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라 작은 추모식도 열리지 않았다. 스코필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에 앞서 잊어서는 안 될 독립운동가다. 그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협력을 요청받은 유일한 외국인이다. 또한 그 참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 5500여명 중 순수 외국인은 스코필드를 포함해 70명이다. 장제스, 쑨원, 베델도 들어 있고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든 후세 다쓰지 변호사, 박열과 옥중 결혼한 가네코 등 일본인도 훈장을 받았다.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럭비의 발상지인 영국 워릭셔주 럭비시에서 태어났다. 1907년 캐나다로 홀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수의대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세균학 강사로 일했다. 스코필드가 한국에 온 것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에비슨으로부터 “한국과 같은 외딴 나라에서 굳은 의지와 정열로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편지 한 통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스코필드는 대학생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와 팔이 불편한 몸이어서 주변에서 말렸지만 뿌리치고 1916년 11월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스코필드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부터 지었다. 철석같은 의지(돌 석),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호랑이 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울 필)을 뜻한다고 말하곤 했다. 3·1운동 전날 저녁 세브란스의학교 제약주임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로 있던 스코필드를 찾아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는 현장 사진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또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 정책에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지하던 스코필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드디어 3월 1일. 스코필드는 자전거를 타고 파고다공원으로 나가 만세 부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스코필드는 외발로 자전거를 몰아야 했다. 대한문, 왜성대, 숭례문, 서울역까지 군중을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 역사적인 현장을 촬영했다. 사진을 잘 찍으려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에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리는 봉변도 당했다. 남아 있는 3·1운동 현장 사진 대부분은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다. 스코필드는 보고 들은 것들을 사진과 함께 외국 신문에 기고했다. 스코필드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 등 만행 사진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됐다.스코필드의 두 번째 활약은 일제의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일이다. 경기도 수원(현재 화성) 지역 만세운동의 보복으로 일본군은 수촌리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항의하는 주민을 총칼로 제압하고 죽였다. 또 발안 시위의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 30여명을 교회 안에 가둔 뒤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고 이웃 고주리에서도 천도교인 6명을 총살했다.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기차와 자전거를 이용해 현장으로 달려가 진상을 눈으로 보고 보고서를 썼다. 수촌리 사건은 ‘수촌리 만행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미국 장로회 기관지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 1919년 7월 26일자에 보도됐다. 제암리 사건은 ‘제암리 대학살’이란 제목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상하이 가제트’ 1919년 5월 27일자에 게재됐다. 스코필드가 아니었다면 일제의 만행은 한동안 파묻혔을지도 모른다. 스코필드는 김마리아와 같은 수감자 인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서울프레스’라는 영자신문이 서대문형무소를 ‘서대문요양소’, ‘서대문직업학교’라고 보도하자 직접 형무소를 찾아가 진실을 확인했다.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 등을 만나 끔찍한 고문이 있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총독부로 찾아가 하세가와 총독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총독부 간부들을 만날 때 반드시 명함을 받고 사진을 찍어 둬 방해하는 일경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스코필드는 1919년 8월 일본에 건너가 극동 선교사 800여명 앞에서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하라 총리를 만나 비인간적인 만행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각국 언론과 접촉해 일본을 비난하는 글도 계속해서 실었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와 캐나다 ‘글로브’ 등에는 기고문을 보내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중단하고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세브란스의학교 제자들은 스승 스코필드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용설, 김문진, 김명수, 배동완 등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부 양성소를 다니던 정종명, 박덕혜, 노순경, 이정숙, 이성완 등은 만세운동에 참가하거나 애국부인회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특히 세브란스의학교 1917년 졸업생 안사영은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군의과장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일제에 스코필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라 영국계 캐나다인인 스코필드를 추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국을 종용하도록 세브란스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넣었으며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스코필드는 결국 세브란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1920년 4월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도 스코필드의 한국 사랑은 식지 않았다. 공개편지를 국내로 보내 한국을 자신의 고향이라고도 하고 자신은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말했다. 1954년 스코필드는 온타리오수의대에서 은퇴했고 1957년에는 부인 엘리스가 사망했다. 한국 친구들은 스코필드가 한국에 오기를 바랐다. 마침내 1958년 8월 스코필드는 국빈 자격으로 38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스코필드는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돕는 봉사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정부가 작은 아파트를 내줬지만 그는 우편료가 비싸진다며 편지의 여백을 가위로 자를 만큼 검소하게 살았다. 그가 만년에 한국에서 생활한 12년은 독재의 시대였다. 스코필드는 독재와 부정을 비판했고 당국은 그의 강의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굴하지 않았고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끊임없이 바른 소리를 했다. 1968년 정부는 스코필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스코필드는 1969년 초부터 천식이 심해졌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병상에서도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영면했다. 캐나다에는 스코필드의 손자와 손녀가 살고 있고 몇 차례 할아버지가 묻힌 한국을 방문했다.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스코필드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했고 한국을 자신의 조국보다 더 사랑했다. 우리가 그를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서민금융진흥원, 봉사·재난지원금 기부

    서민금융진흥원, 봉사·재난지원금 기부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임직원 24명이 18일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발달장애인 자립 지원시설 푸르메 스마트팜을 찾아 자원봉사를 했다. 임직원들은 발달장애 청년들에게 금융 교육을 하고 농장 일손을 도왔다. 이계문 원장 겸 위원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긴급재난지원금도 기부했다. 이 원장은 “앞으로도 어려운 분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복지공백 없는 관악… 강감찬종합사회복지관 임시 운영

    복지공백 없는 관악… 강감찬종합사회복지관 임시 운영

    서울 관악구가 문 닫은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을 대신해 복지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강감찬 관악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한다고 18일 밝혔다. 강감찬 관악종합사회복지관은 구에서 임시로 설치한 종합사회복지관으로 기존의 민간 운영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법인 사정으로 이달 폐관됨에 따라 복지서비스를 이어 나가기 위해 조성됐다. 관악구는 지난 2월부터 2억 7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면적 842㎡ 규모의 임시공간을 리모델링했으며 강당, 경로식당, 프로그램실, 자원봉사실 등을 마련했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은 현재 휴관 중이며, 구는 향후 코로나19 동향을 파악해 경로식당 및 소규모 프로그램 등 복지사업을 단계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구는 2023년 상반기까지 사회복지관·체육시설·생활문화센터를 한 곳에 모은 복합화시설 ‘관악문화복지타운’(가칭)을 새로 건립할 예정이다.박준희 관악구청장은“현재는 임시공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신규 사회복지관을 건립해 주민이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복지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여군 대위, 소아암 환자 위해 머리카락 기부한 이유

    여군 대위, 소아암 환자 위해 머리카락 기부한 이유

    모발, 항암치료 아이 위한 가발로 제작 해군 대위가 4년간 길러온 머리카락을 기부했다. 18일 해군 제7기동전단 소속 72전대 소속 김현아 대위가 4년 동안 기른 모발을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했다. 2015년 6월 군 생활을 시작한 김 대위는 임관 후 4년 동안 기른 45㎝의 모발을 아이들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김 대위는 ‘어머나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나 운동은 ‘어린 암 환자들을 위한 머리카락 나눔 운동’의 줄임말이다. 김 대위가 기부한 모발은 ‘어머나 운동 본부’를 통해 항암치료 중인 아이들을 위해 가발로 제작될 예정이다. 김 대위는 “감사하는 마음은 나눔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며 “군인으로서 나의 작은 행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면, 언제든 그 나눔의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 대위는 지난달 20일부터 29일까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금융지원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군 복무 중에도 헌혈과 대민지원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 계속해서 참여해왔다. 72기동전대장 이동길 대령은 “김 대위는 평소 감사함을 자주 표현하며, ‘함께하는 나눔’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전우다. 계속해서 초심을 잃지 않고 군 생활을 이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코로나19 와중에도 ‘관심끌기’ 바쁜 美 20대…잇단 민폐 논란

    코로나19 와중에도 ‘관심끌기’ 바쁜 美 20대…잇단 민폐 논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관심끌기에 여념 없는 몇몇 20대가 미국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한 20대 남성은 필수 인력만 남은 뉴욕지하철에서 우유에 만 시리얼 한 통을 모두 엎어 경찰이 조사에 착수했다. 15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뉴욕에 사는 조시 팝킨(23)은 일주일 전 자신의 SNS에 기이한 영상 하나를 공유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대형 플라스틱 용기에 부은 시리얼 한 통을 우유에 말아 먹는 영상이었다.지하철 좌석에 앉아 다른 승객의 시선을 즐기며 시리얼을 퍼먹던 그는 잠시 후 플라스틱 통을 들고 지하철 한가운데에 섰다. 그가 혹시 먹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며 통을 들어 보인 순간 안에 있던 내용물이 지하철 바닥에 쏟아졌다. 놀란 승객들은 펄쩍 뛰며 자리를 피했고 당황한 팝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쏟아진 우유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뉘우침은 없었다. 다들 멀찍이 떨어져 사진을 찍기만 하고 자신을 돕지 않았다며 다른 승객을 책망했다. 논란은 거셌다. 코로나19로 필수 인력만이 남은 뉴욕지하철에서 청소노동자들의 일거리만 늘린 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곧 영상을 삭제했지만 이미 여기저기로 퍼진 영상은 6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메트로폴리탄교통공사(MTA)도 즉각 반응했다. 공식 트위터에 해당 영상을 공유한 MTA 측은 “참신한 저급함”이라며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어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 고생하는 필수 노동자를 우롱하는 것”이라면서 “비열하다”고 다그쳤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며칠 후 팝킨은 사과 영상을 내놨다. 그는 “어두운 시기 웃음을 주려 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완전히 틀렸고 부적절했다. 무례했다”라고 말했다. 뉴욕지하철 관계자와 필수 노동자들에게도 사과의 뜻을 전했다.그러나 여론은 싸늘했다. 한 네티즌은 “당신은 뉴욕에 있다. 이 나라에서 코로나19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 중 한 곳”이라고 지적하며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돌면 차라리 자원봉사를 해라”고 꼬집었다. 해당 영상으로 얻은 수익금 전액을 코로나19 관련 단체에 기부하겠다는 팝킨의 사과도 소용없었다. CNN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뉴욕 경찰도 조사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자가격리 지침을 무시하고 관광지를 활보한 20대도 있다. 15일 하와이 경찰은 관광객 의무격리 지침 위반 혐의로 뉴욕 출신 대학생 테리크 피터스(23)를 체포했다.현지언론은 그가 11일 뉴욕을 떠나 하와이 오하우섬에 도착했으나 2주간의 의무격리 지침을 어기고 곧바로 관광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해변을 활보하던 그는 자랑삼아 SNS에 올린 ‘인증사진’에 덜미가 잡혀 체포됐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철없는 20대의 민폐 속에 17일 현재 미국 내 코로나19 확진자는 152만7664명 사망자는 9만978명으로 늘었다. 51개주 가운데 피해 규모가 가장 큰 뉴욕주는 확진자 35만9847명 사망자 2만8325명으로 집계됐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원격의료? 의료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원격의료? 의료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원격의료 얘기가 나온지 10년이 됐습니다. 전화통화로 상담하는 비대면 전화상담 말고 국민건강권에 도움이 되는 걸 하나라도 내놓은게 있습니까?” 정형준(45)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1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시도하던 원격의료를 문재인 정부에서도 꺼냈다는 게 착찹하다”면서 “기획재정부가 대통령과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경기도 구리시 원진녹색병원에서 일하는 재활의학과 전문의인 정 위원장은 환자들을 만나는 속에서 시간을 쪼개 보건의료단체연합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 등 의료공공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의사 겸 보건의료운동가가 원격의료 비판에 앞장서는 이유를 들어봤다. -최근 정부에서 원격의료 확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13일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 비대면 전화상담 확대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 수석 발언은 코로나19라는 비상상황에서 시행하는 비대면 전화상담에 관한 것이다. 홍남기 기재부 장관과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침소봉대하는 원격의료와는 다른 범주다. 다시 말해, 기재부가 말하는 ‘원격의료’는 김 수석이 말한 ‘비대면 전화상담’이 아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에서 반대하는 건 비대면 전화상담이 아니라 원격의료다. 기재부에 자꾸 ‘비대면 전화상담=원격의료’로 호도하며 국민들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원격의료 얘기가 나온지는 사실 10년이 넘었다. “시작은 노무현 정부 당시 민간보험회사에서 꺼낸 ‘건강관리 서비스’였다. 미국식 건강관리서비스를 본따서 질병 예방과 건강관리 보험상품을 출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싶어했다. 보험회사에서 건강관리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건강정보를 보험회사에서 수집하고, 처방 약제 관련 정보를 확보하고, 의료진이 상담을 하는 게 가능해야 한다. 그 세가지가 갖춰져야만 보험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당연히 현행 국민건강보험 정책과 충돌한다. 당시엔 민주당에서도 의료민영화 방안이라며 반대했다. 건강관리 서비스가 벽에 부딪치니까 등장한 게 ‘원격의료’다.” -원격의료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건강관리 서비스를 위해 민감한 건강정보를 민간 보험회사에 제공한다고 하면 거부감이 크니까 그걸 우회하기 위해 민간 보험회사가 편의성을 강조하는 원격의료를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본다. 민간 보험회사와 의료기기 관련 업체, 스프트웨어 업체 등으로 이해관계자 집단이 형성됐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원격의료는 지금 이순간에도 기술은 물론 임상 등에서도 효과가 검증된 게 없다. 박근혜 정부조차 원격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시범사업까지 했지만 건강개선 효과는 물론 비용대비 효과도 입증을 못했다. 환자에게 도움이 돼야 도입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할 것 아닌가.” -코로나19 이후 시행한 비대면 전화상담은 꽤 효과를 봤다는 평도 있다. “몇차례 시범사업에서 효과가 입증된 건 딱 하나, 당뇨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건강관리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건강보험료 수가 책정이 돼 있다. 비대면 전화상담은 의사와 환자가 대면해서 진단을 이미 한 상태에서 별도로 진단할 게 없는 만성질환을 대상으로 한 보완적인 의료행위로 정리할 수 있다. 가령 전국민 주치의 제도를 시행하는 유럽에서는 이미 전화상담을 시행한다. 기재부에서는 뭔가 대단한 원격장비와 스프트웨어로 대단한 혁신이라도 할 것처럼 떠들면서 정작 근거로 들이미는 건 전화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비대면 전화상담이다.” -첨단기술이 의료를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이 존재하는 게 사실인 것 같다. “공상과학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면 안된다. 의료는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이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그럴듯한 첨단기술이라도 안전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 비싼 최첨단 영상장비조차도 전문 의료진이 판독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인공지능이니 로봇수술이니 하지만 현재 의학기술 수준은 자율주행에 비유하면 기찻길 위를 달리는 것조차 사고 위험이 있는 정도다. 더 중요한 건 공공의료제도다. 삼성만 해도 간이 체외진단기기로 해외시장 뚫어보려고 유럽에 진출했는데 실패했다. 의료전달체계가 갖춰진 곳에서는 그런 기계가 필요가 없으니까. 주치의에게 상담받으면 되는데 그런 기계를 돈주고 살 이유가 없는 거다.” -원격의료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는 양상은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당연하다. 의료산업화만 놓고 보면 다를게 없으니까. 포장지만 창조경제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달라졌다. 지난달 29일 정부가 발표한 혁신 10대 과제 중 하나가 건강관리 서비스 활성화였다. 내년에는 법안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금융감독원은 ‘건강증진형 보험상품’도 허용해줬다. 문재인 정부에게 간곡히 조언하고 싶다. 지금이 원격진료와 같은 뜬구름잡는 한가한 얘기나 하고 있을 때인가. 당장 에크모나 PCR 같은 의료기기 비축과 국산화, 고도화가 더 시급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도입하려던 원격의료 반대운동을 문재인 정부 들어 또다시 하는게 착찹하다.” -원격의료 문제는 결국 국민건강정책의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인 것 같다. “의료란 공공재다. 헌법에서도 강조하는 건강권을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 환자를 진료할 때는 눈에 보이는 증상 몇개만 보면 안된다. 그 환자의 노동환경, 경제상황, 가족관계까지 살펴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 의료계는 너무 상업화돼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 원격의료 얘기가 나온다. 국민 주치의 제도가 뿌리내리고, 행위별 수가제를 총액 수가제로 개혁하면 원격의료 논쟁도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것이다. 국민건강을 위해서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1차 의료기관이 잘 작동하는게 가장 중요한데도 국가정책에선 뒷전이다.” -의사협회는 원격의료는 반대하지만 의료공공성은 등한시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국에서 의료가 공공성이 있고 의료전문가주의가 좋은 측면에서 작동한다고 하면 보건의료단체연합이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하는 일을 의사협회가 다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사협회가 공공의과대학은 반대하면서 원격진료도 반대한다고 하니 국민들에게 신뢰를 못 받는다. 의사로 일하면서 보건의료운동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의료의 문제를 보여준다. 한국 의료 공익성 강화돼 의사협회가 의료공공성을 운동을 하고 나는 조용히 의료봉사활동이나 하는 세상이 오기만 바랄 뿐이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포토] 트와이스 쯔위, 유기견과 함께 ‘천사 미소’

    [포토] 트와이스 쯔위, 유기견과 함께 ‘천사 미소’

    트와이스 쯔위가 17일 경기도 포천시 유기동물보호소 애린원에서 열린 블루엔젤봉사단의 유기동물 봉사활동에 참석해 유기견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0.5.14 뉴스1
  • [취중생]힌츠페터 통역 도운 미국인들…“광주 정신, 늘 삶과 함께”

    [취중생]힌츠페터 통역 도운 미국인들…“광주 정신, 늘 삶과 함께”

    [편집자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취중생’(취재 중 생긴 일)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사건팀 기자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에 도착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대학생 무리를 만납니다. 그 중 영어를 할 줄 알던 대학생 재식(류준열 분)이 얼떨결에 힌츠페터의 통역을 맡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힌츠페터의 번역을 맡은 학생이 있습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원덕기. 바로 미국에서 온 평화봉사단 팀 윈버그입니다. 그는 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돼 광주 전남대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기자들을 위해 통역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단원들은 현장의 목격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해는 커져만 갔고, 군대는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1987년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최용주 5·18기념재단 자문위원 번역)에 그가 본 비극을 적었습니다. 최초의 영문으로 5·18민주화운동을 분석한 보고서였습니다. 일요일이던 5월 18일에는 시민들이 휴일을 즐기기 위해 시내를 찾았지만, 시민들은 곳곳에서 군인들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했습니다. 팀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중국집 배달원을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다”면서 “19일에도 부상당한 사람들을 의사와 함께 들것을 이용해 일하던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5월 22일. 팀은 영국과 네덜란드 출신 기자와 동행하며 통역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딜 가든 자신들이 무슨 일을 봤는지 알려주려는 인파에 휩싸였다. 특히 시민들은 지역 방송사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크게 분노했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했다. 우리는 기독병원으로 가서 한 부상당한 학생과 얘기를 나눴다. 서울대학교 학생인 그는 담양에서 광주로 오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고 함께 했던 30명 가량의 사람들 중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했다.” 팀은 5월 23일에는 타임지 기자 로빈 모이어, AP통신 기자 테리 엔더슨 등 외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그의 동료 폴 코트라이트도 호텔에서 팀이 독일 기자와 호텔에서 했던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코트라이트는 그의 저서 ‘5·18 푸른 눈의 증인’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팀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학생을 군인들로부터 빼냈다고 한다. 그는 구타 당하고 있는 학생들이 잘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말렸고 그 학생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을 도운 것이다. 말을 마친 팀은 기자에게 이름과 소속은 빼고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이라고만 밝혀 달라고 당부했다.” 팀은 “26일 뉴욕타임즈 기자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설득해 광주를 폭격하는 것을 저지시켰다고 말했다”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날 밤 군대가 다시 도시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만연했고, 사람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했다”고 적었습니다. 팀의 동료 데이비드 돌린저도 “26일 도청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날이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에게 도청에서 밤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몇몇은 내게 우리가 아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회상합니다. 27일 오전 3시. 그는 데이비드 돌린저 등 동료와 함께 포탄 소리에 잠에서 깹니다.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진압을 시작하자, 전남도청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며칠 전 함께 그와 말을 나눈 한 학생은 2층 창가에 불에 탄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윈버그의 이야기는 그의 글과 동료들의 증언, 각종 사료로만 전해집니다. 1993년 2월 7일, 그는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윈버그는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팀이 부상당한 시민을 다른 시민들과 함께 이송하던 장면은 보안사가 채증을 위해 찍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코트라이트는 팀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팀은 사려 깊고 결코 오만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그는 광주에서 평화봉사단의 영웅이자 리더였습니다. 그의 한국어는 모든 단원들 가운데 제일 뛰어났고, 우리 누구보다도 광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봉사단에 허락된 일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광주와 시민들을 사랑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광주에 있던 미국인들에게도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또 다른 동료 데이비드 돌린저는 “불행히도 팀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늘 팀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다”면서 “5월의 그날들이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고, 광주 정신이 제 삶을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와 팀은 광주에서 만나 친구가 됐고 불의와 기꺼이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살고자 늘 다짐한다”고 전했습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손흥민 영국으로 출국…‘해병대 군사훈련’ 마치고 토트넘 복귀

    손흥민 영국으로 출국…‘해병대 군사훈련’ 마치고 토트넘 복귀

    해병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손흥민(28)이 소속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 합류하기 위해 16일 출국했다. 손흥민은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 병역특례 대상이 된 손흥민은 지난달 20일 제주도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해 3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 기간 동안 손흥민이 해병대의 팔각모에 군복을 입은 모습, 소총을 들고 사격장으로 이동하는 모습, 기초군사훈련 성적 1등 소식 등은 코로나19로 중단된 리그 재개를 기다리는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안겼다. 손흥민은 향후 34개월간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544시간의 봉사활동을 이수하면 병역의 의무를 마치게 된다.프리미어리그는 아직 확정 전이지만 다음달 중순쯤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와 사투 중인 영국 정부가 시즌 재개에 긍정적이라는 현지 보도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손흥민에게는 코로나19로 리그가 중단된 시간이 병역의 의무를 완수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토트넘의 다음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현재 토트넘을 이끄는 조제 모리뉴 감독은 앞서 맨유의 지휘봉을 잡은 바 있어 ‘모리뉴 더비’로도 관심이 모아진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울산 다함께돌봄센터 2022년까지 30곳으로 확대

    울산 다함께돌봄센터 2022년까지 30곳으로 확대

    울산지역 다함께돌봄센터가 오는 2022년까지 30곳으로 확대된다. 16일 울산시에 따르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상시·일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울산지역 다함께돌봄센터를 오는 2022년까지 30곳으로 확대한다. 다함께돌봄센터는 지역 특성에 맞는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부족한 초등 돌봄을 지원한다. 또 경력단절 여성의 일과 육아 병행에 도움을 준다. 이 사업은 민선 7기 공약사업 중 하나다. 시는 2017년 1곳을 시작으로 지난해 5곳, 올해 11곳, 2021년 5곳, 2022년 8곳을 추가 설치해 총 30곳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다함께돌봄센터는 공공체육시설, 주민센터, 마을회관 등 공공시설과 종합사회복지관이나 노인복지관, 경로당 등 사회복지시설, 단독주택과 아파트 주민공동시설 등 지역 주민이 접근하기 쉽고 개방된 안전한 시설 공간을 리모델링해 활용한다. 특히 자원봉사와 교육 기부, 노인 일자리 사업 등 다양한 자원을 활용해 지역 맞춤형 초등돌봄 체계로 운영된다. 5월 현재 7곳(158명)이 운영 중이고, 연말까지 17곳으로 확대해 운영한다. 구·군은 10곳을 추가로 운영하기 위해 공간과 운영계획을 마련하는 등 준비하고 있다. 시는 연말까지 10곳을 더 확대하면 민선 7기 공약인 ‘온종일 돌봄체계 구축으로 방과 후 초등돌봄 사각지대 해소’와 ‘2022년까지 다함께돌봄센터 7곳 설치’ 공약을 2년 앞당겨 달성한다. 이형우 시 복지여성건강국장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 키우기 좋은 울산 만들기에 복지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구·군별로는 지역 여건에 맞는 통합 돌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아무이슈]이용수 할머니만 할 수 있었던 그 말 “왜 위안부 팔아먹느냐”

    [아무이슈]이용수 할머니만 할 수 있었던 그 말 “왜 위안부 팔아먹느냐”

    [명희진·김희리 기자의 아무이슈] 정의연 논란에 전문가들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얼굴이었던 이용수 할머니의 ‘고백‘을 신호탄으로 정의연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놓고 갑론을박이 뜨겁다. 정의연은 “개인적 자금 횡령이나 불법 유용은 절대 없다”고 반박했지만 단체의 성금 횡령 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에도 피해자 할머니 33인이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성금 횡령 의혹을 제기한 적 있다. 단체와 할머니 간의 갈등은 앞으로의 한일 관계 풀이법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일본 매체도 이번 사태의 전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7일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 직후 한 일본 기자는 “정대협은 곧 이용수 할머니라고 알고 있었다”면서 “단순한 돈, 서운함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주장한 그동안의 ‘오류’는 무엇이었고 앞으로의 풀이법은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을 겨냥해 ‘왜 위안부 문제를 마음대로 팔아먹느냐’는 말은 피해자였던 이용수 할머니니까 할 수 있었던 지적이죠. 외부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국민감정과 친일증오 프레임을 앞세워 자기들끼리만 해왔어요. 그만큼 성역(聖域)화된 단체였습니다.”정의연은 외부인 개입 어려운 성역화 된 단체 박인환 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 위원장(전 건국대 교수·사법연수원 16기)은 15일 “정의연이 할머니들을 ‘돌본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의연은 사실상 피해자 할머니를 모시고 살지는 않는다”면서 “사실상 할머니를 모시는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 같은 곳인데, 정의연은 이를 모호하게 해 국민에게서 기부금을 받아 연명해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단체가 기부금에 의존하는 구조이다 보니 ‘봉사단체’처럼 할머니들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박 전 위원장이 4년간 몸담았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는 2010년 3월 발족한 총리실 산하 행정기관이다. 위원회는 2004년과 2008년 각각 설립된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와 ‘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를 통합, 일제강제동원의 진상 규명과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출범해 2015년 12월 말 폐지됐다. 박 전 위원장은 ‘팩트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2015년 합의 당시 외교부도 (위원회) 자료만 받고 상의 한번을 하지 않았다”면서 “진실을 찾겠다면 돈을 받지 말고 수미일관한 팩트를 제시해 일본의 양심을 움직여야 한다. 돈만 받아 할머니에게 주면 (이 문제가) 다 끝나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그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흥분하는 지점은 (정의연 등이 세운) 기림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3만 내지 40만명’이라는 표현이다. 뉴저지주 기림비에는 ‘수십만명의 성 노예’라는 모호한 표현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우리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40명(생존 18명). 그는 “피해자임에도 죄인처럼 숨어 지내야 했던 할머니들의 숫자를 고려하더라도 이 같은 모호한 표현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2015년 합의에 아쉬운 점이 많지만, 국가 간 합의를 계속 거부하고 소녀상 등 감성적인 부분만 강조해서는 일본의 우경화된 역사수정주의에 힘을 쏟아주는 결과밖에 안 된다”고 주장했다.“팩트로 무장해 일본의 국격과 양심에 호소해야” 박 위원장은 또 “가해자가 죽고 없는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해’의 실감이 없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계속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라면서 “독일-이스라엘 관계처럼 팩트로 무장해 일본의 국격과 지식인의 양심에 호소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에 진정한 사과를 받는 길”이라고 말했다. 지원 단체의 ‘대표성’ 문제도 앞으로 남은 과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일본전문가는 “우리 사회의 위안부 지원단체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다만 그동안 (정의연이 해온) 위안부 운동의 의의가 훼손되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일종의 인권운동이자 여성운동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전문가는 “(윤 당선인과 이 할머니 간의) 소모적인 폭로전이 계속 될 경우 일본 우익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다”면서 “진실공방에서 점점 사적인 의견 충돌의 부분으로 공방이 번지고 있다. 두 분 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아무 : [관형사] 어떤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를 때 쓰는 말’. 아무이슈는 서울신문 기자들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취재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간입니다.
  • 마포구립 망원청소년문화센터, 청소년 긴급돌봄 ‘꿈터’ 개시

    서울 마포구는 코로나19로 인한 개학 지연과 학부모들의 돌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구립망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 프로그램인 ‘꿈터 긴급돌봄’ 서비스를 5월부터 운영한다고 16일 밝혔다. 새롭게 선보이는 ‘꿈터 긴급돌봄’ 서비스는 기존의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 참여 청소년뿐만 아니라 서부교육지원청과 협력해 발굴한 지역 내 긴급돌봄이 필요한 청소년으로 그 대상을 확대해 운영한다. 대상은 관내 거주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학생이며, 서비스 시간은 매주 월~금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다. 제공되는 돌봄 서비스는 VR, PC, 도서 등 콘텐츠 제공과 온라인 학습지원, 학습 멘토링, 독서 활동 지원, 자기개발 프로그램(만들기, 음악, 생활체육 등) 지원, 생활관리(안전교육, 석식 도시락· 귀가차량 제공) 지원 등이다. 특히 한국장학재단과 연계해 선발된 대학생 청소년교육장학생 선배들은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활동을 위해 미술, 음악, 사진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전수하며 차별화된 돌봄 서비스를 펼칠 예정이다. 구는 코로나19로 인한 감염에 대비하기 위해 철저한 시설 방역과 함께 마스크, 손소독제, 살균티슈 등 방역물품을 비치하고 모든 참여 청소년과 봉사자, 직원을 대상으로 발열 검사를 진행,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참여를 원하는 청소년 및 학부모는 망원청소년문화센터 청소년사업팀(02-332-2541)으로 유선 문의 후 신청하면 된다. 유동균 마포구청장은 “휴관 중이던 구립망원청소년문화센터를 얼마 전 재개하며 학부모들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한 돌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라며 “주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란다”라고 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양천구, “착한소비, 착한동행에 동참 하시죠”

    양천구, “착한소비, 착한동행에 동참 하시죠”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울 텐데, 한분 한분의 작은 정성으로 시작된 착한소비로 저희는 정말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는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착한소비에 동참해 소상공인의 재정적인 어려움도 돕고 침체된 지역상권도 살리기 위한 ‘착한소비’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한 캠페인에 나섰다고 15일 밝혔다. 첫 스타트로 지난 14일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관내 마트에 방문해서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으로 휴지 등 생필품을 구매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용해 달라며 양천 푸드뱅크 마켓에 전달하는 착한소비에 동참했다. 또 김 구청장은 본인이 받은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60만원의 2배인 120만원을 전통시장, 미용실, 음식점 등 동네 단골가게에 방문해 미리 결제하는 착한소비로 소상공인들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구는 그동안의 착한소비 미담사례를 SNS(블로그, 페이스북)를 통해 보다 많은 지역주민들과 공유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홍보할 계획이다. 구는 지난 3월 23일부터 ‘착한소비 캠페인’을 시작, 구청장을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지역주민과 각종 직능단체장, 봉사동아리 회원 등 각계각층 구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확산으로 관내 소상공인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또한, 많은 언론매체 및 지자체로부터 문의전화를 받는 등 우수사례로 꼽히며 나비효과를 일으켜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 김 구청장은 “착한소비 캠페인이 시작된 후로 작게나마 힘이 되고 싶다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민들의 모습 등을 보며, 선한 영향력의 힘에 다시 한 번 놀랐다”며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다시 한 번 착한소비 분위기를 확산해, 지역소상공인들 도와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을 함께 극복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양천구민의 날 기념식’ 오늘 개최

    서울 양천구는 15일 오후 3시 양천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제27회 양천구민의 날 기념식 행사’를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구는 그동안 1000여명의 구민과 함께 기념식을 개최하던 것과 달리 올해는 생활 속 거리두기에 동참해 참석 인원을 최소화해 100여명이 참석한다고 전했다. 또한 구는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구민들을 위해 행사 후 공식 유튜브 ‘양천TV’에 영상을 게시할 계획이다. 이번 기념식에서는 지역 발전, 주민화합, 봉사, 효행·선행 등 8개 분야에서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구민의 귀감이 된 8명에 대한 ‘양천구민상’ 시상도 함께 진행한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100일 넘게 함께 노력해 준 구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영상으로나마 함께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안경사 기득권만 보호 역차별” “눈 건강 위해 법인 안경점 제한”

    “안경사 기득권만 보호 역차별” “눈 건강 위해 법인 안경점 제한”

    안경사 개인만 안경업소를 낼 수 있도록 하며 ‘법인 안경점’ 개설을 금지한 법 조항을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공개 변론이 열렸다. 헌재는 14일 오후 대심판정에서 옛 의료기사에 관한 법 12조에 대한 위헌제청심판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을 갖고 양측의 입장을 청취했다. 안경사 허모씨는 안경테 도소매업과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기 위해 세운 법인 명의로 안경업소 9곳을 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허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과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선고받았고, 법인에는 벌금 2000만원이 선고됐다. 이날 허씨 측 참고인으로 참석한 정광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당 조항은 기존 안경사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을 처벌까지 하며 차별하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보건복지부 측은 “국내 안경 시장이 포화 상태에 있고 해외에서 저렴한 가격에 안경을 살 수 있는 등 법인 안경점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며 “국민 눈 건강과 소비자 후생에 끼칠 부작용도 크다”고 반박했다. 대한안경사협회 윤일영 윤리이사도 “안경사 업무는 눈 건강 악화를 예방하는 보건의료 서비스의 일환”이라고 복지부 입장을 거들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할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 윌리엄 에이머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 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돌아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 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평화봉사단원들은 5·18 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단원 중 한국어를 가장 잘했던 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머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에이머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코트라이트는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단독] ‘5·18 헬기 사격’ 푸른 눈의 목격자 “한국 국민 위해 재판 증언 하겠다”

    [단독] ‘5·18 헬기 사격’ 푸른 눈의 목격자 “한국 국민 위해 재판 증언 하겠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미국인이 억울하게 죽어 간 광주 시민을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재판에서 증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렀던 데이비드 돌린저(64)는 14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광주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직접 재판에 출석해 증언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부처님오신날 헬기 탄 군인 사격 모습 봤다”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헬기 사격을 거듭 부인하는 전씨 측에 맞서 헬기 사격을 목격한 돌린저를 증인으로 신청한 바 있다.돌린저는 당시 헬기 사격 장소와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부처님오신날이던 5월 21일 광주에서 헬기에 탄 군인이 총을 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 시내로 가는 길에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도망쳤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헬기가 전남도청 바로 앞 금남로 위를 맴돌고 있었다”면서 “헬기의 열린 옆문으로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문밖으로 총을 겨눴고 총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다음날 응급실서 총 맞은 청년 만나” 헬기 사격의 피해자를 만난 사실도 떠올렸다. 돌린저는 “헬기 사격 다음날인 22일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헬기에서 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며 총알이 왼쪽 어깨 윗부분에서 오른쪽 엉덩이까지 관통한 엑스레이를 보여 줬다”면서 “헬기에서 쏜 총에 맞은 청년도 직접 만났다”고 주장했다. ●7월께 방한… 코로나로 원격 증언도 검토 돌린저는 오는 7월 한국을 방문해 전씨 재판에 출석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전 세계에 확산한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다.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돌린저는 최근 영국 북동부 뉴캐슬어폰타인에 머물고 있다. 돌린저는 원격 영상을 통해서라도 증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재판부의 허락이 필요하다. 고 조비오 신부 측 법률대리인인 김정호 변호사는 “돌린저가 7월에 출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해외에 체류 중인 증인을 위한 원격 영상 재판이 열린 적은 없다”면서 “재판장의 해석이 필요한 문제”라고 답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5·18 참상 목격한 미국인, 전두환 재판서 “헬기사격 증언하겠다”

    5·18 참상 목격한 미국인, 전두환 재판서 “헬기사격 증언하겠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던 미국인이 전두환씨의 형사재판에서 헬기 사격에 대해 증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4일 5·18 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 자격으로 국내에 체류했던 데이비드 돌린저(67·David L. Dolinger)씨는 재판에 출석해 헬기 사격 목격 경험을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 동안 6차례, 20명의 증인신문을 통해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하거나 헬기 파견부대에 근무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확보한 검찰은 지난 13일 재판에서 돌린저씨를 향후 재판에서 증인으로 신청했다. “5월 21일 금남로서 헬기 사격 목격” 돌린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돕고 도청에서 활동했다. 그는 결혼식 참석을 마치고 5월 18일 근무지인 전남 영암으로 돌아가려다가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5월 21일 다시 광주에 가게 된 돌린저씨는 매일 전남도청에 가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5월 21일 금남로 일대에서 군인들이 헬기에서 사격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며, 어깨에 총상을 입고 총알 출구가 엉덩이 쪽에 나 있는 시신을 병원에서 봤다고 증언한 적 있다. 영국에 체류 중인 돌린저씨는 기념재단 측에 한국에 방문해 재판에 출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했지만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구체적인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오는 6월 1일 재판에는 광주 전일빌딩 탄흔을 감정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와 5·18 연구소 교수가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고 22일 재판에는 피고인 측 증인신문이 진행되는 만큼 7월에 출석할 가능성이 있다.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김정호 변호사는 “피고인은 부인하지만, 학생·간호사·성직자·군인 출신은 물론 외국인도 헬기 사격을 직접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돌린저씨가 재판에 출석해 진실 규명에 보탬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푸른 눈의 증인들 “5·18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다”

    푸른 눈의 증인들 “5·18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외신기자들 입과 귀 돼준 美 평화봉사단원들“헬기 사격 똑똑히 봤다…언제든 증언할 것”“5·18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진실 기억해야”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을 남겨 국내 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한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윌리엄 에이모스(William Amos)의 이야기를 소개한다.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Tim Warnberg)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고 했다.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 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rubbish)라고 말해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 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 그러나 돌린저는 전남도청에서 하룻밤 머물렀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강요당했다. 평화봉사단은 1981년 돌연 해산되면서 단원들은 한국을 떠나야 했다. 에이모스는 “한국 정부는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광주의 진실을 말하고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작업도 멈추지 않았다. 원버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민주화운동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1987년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1993년 작고한 그에 대해 코트라이트는 “단원 중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하던 팀은 평화봉사단에게 허락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광주 시민을 진정으로 보호하려고 애썼다”고 기억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모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The Seed of Joy)을 썼다. 에이모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코트라이트는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 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단독]“광주 헬기 사격 있었다”…푸른눈 목격자, 전두환 재판 증언 나선다

    [단독]“광주 헬기 사격 있었다”…푸른눈 목격자, 전두환 재판 증언 나선다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미국 평화봉사당원데이비드 돌린저, “전두환 재판 증언 나서겠다”“헬기 탄 군인이 총 쏘는 것 봤다”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외국인이 억울하게 죽어간 광주시민을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재판에서 증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렀던 데이비드 돌린저(사진·64)는 14일 서울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광주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직접 재판에 출석해 증언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헬기 사격을 거듭 부인하는 전씨 측에 맞서 헬기 사격을 목격한 돌린저를 증인으로 신청한 바 있다. 돌린저는 당시 헬기 사격 장소와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부처님 오신 날이던 5월 21일, 광주에서 헬기에 탄 군인이 총을 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 시내로 가는 길에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도망쳤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헬기가 전남도청 바로 앞 금남로 위를 맴돌고 있었다”면서 “헬기의 열린 옆문으로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문밖으로 총을 겨눴고 총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헬기 사격의 피해자를 만난 사실도 떠올렸다. 돌린저는 “헬기 사격 다음 날인 22일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헬기에서 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며 총알이 왼쪽 어깨 윗부분에서 오른쪽 엉덩이까지 관통한 엑스레이를 보여줬다”면서 “헬기에서 쏜 총에 맞은 청년도 직접 만났다”고 주장했다. 돌린저는 오는 7월 한국을 방문해 전씨 재판에 출석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전 세계에 확산한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다.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돌린저는 최근 영국 북동부 뉴캐슬 어폰타인에 머물고 있다. 돌린저는 원격영상을 통해서라도 증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재판부의 허락이 필요하다. 고 조비오 신부 측 법률대리인인 김정호 변호사는 “돌린저가 7월에 출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해외에 체류중인 증인을 위한 영상원격재판이 열린 적은 없다”면서 “재판장의 해석이 필요한 문제”라고 답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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