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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올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면서,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극중 ‘강진 선생’으로 불리는 다산(류승룡 분)의 학자적, 철학자적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대 세상을 호령하던 고관대작(형조참의) 자리에 있다가, 머나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묵묵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정약용의 인품은 주인공 정약전(설경구 분)의 극중 비중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대선을 앞둔 최근엔 소설 ‘대통령 정약용’이 눈길을 끌고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현대로 온 다산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유쾌한 상상을 담았다. 대통령 다산이 추진한다는 ‘실학21’의 바탕이 된 1표2서(‘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땅, 강진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 보고 알았던 것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역사상 한반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다산은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실학을 주도적으로 연구했으며 행정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법학과 법의학을 두루 전공한 법률가였다. 또한 의학과 지리학, 건축학에 통달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게다가 언어학자, 아동 교육자, 걸출한 시인에다 차 전문가, 동서양사를 넘나드는 역사 철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조선은 만사‘다’통이었다. 다산을 거치면 안 될 게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다빈치처럼. 아, 공교롭게도 다산과 다빈치, 둘 다 이름 첫 자에 ‘다’자가 들어간다. 마침 다빈치도 유배는 아니지만 1516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궁에서 살며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겼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 내려왔다. 조용한 강진에 유배를 오는 바람에 그의 눈부신 업적이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도 맞겠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와 서간, 일화, 대한민국 차문화가 탄생했다. 당시 조선의 유형(流刑)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다. 죄의 경중에 맞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으로 올려가며 유배를 보내는 거다. 1리가 400m쯤이니 1000리면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전남 완도까지도 갈 수 있다. 조선에선 이런 거리가 나올 수 없는 터라 일부러 여러 지역을 거치며 행로를 늘렸다. 세종이 ‘실정에 맞게’ 600, 750, 900리로 조정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돌고도는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는 많은 것을 남겼다. 깡시골인 유배지로 한양의 높은 지식과 문화 산업이 수혈됐다.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때 이름난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다녀왔을 만큼 유배는 ‘일상’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하들과 시 짓기 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는’ 벌칙으로 인공 섬에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에서 ‘무인도’ 같은 의미다. 그만큼 유형은 고급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시에 능한 다산이 ‘인공 섬’에 유배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산을 친애하던 정조가 승하한 후, 정말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형을 떠나게 됐다. 그나마 강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축에 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형을 가기도, 여행하기도 딱 적당한 거리다. 프로야구의 옛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는 2군 구장을 강진에 뒀는데 당시 1군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유배간다”고 자조했다. 당시 몇몇 선수들은 강진에서 2군 생활을 경험하며 다산의 후예가 됐다.다산이 처음 도착한 곳이 강진읍의 사의재다. 다산의 인품을 알아본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주모의 호의로 여기서 4년간 생활했다. 다산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각과 외모, 말, 움직임을 네(四) 가지 덕목으로 삼아 마땅히(宜) 바로잡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의 일기에 따르면 1803년 겨울의 일이다. 초가 주막이던 본래 사의재 건물은 사라졌지만 2007년 강진군청은 이를 복원해 한옥체험 숙소,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도 강진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의재는 아욱국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행히 유배지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위리안치’는 아니었다. ‘강진 선생’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다 47세이던 1808년 봄에 귤동리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외가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윤단과 윤규로의 선처 덕분이었다.(해남 윤씨 윤선도는 무려 25년을 유배지에서 생을 보낸 ‘유배의 왕’이다.) 다산은 산정 초당을 고쳐 다산초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가르쳤다. 다산은 18년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머물며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한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 등 모든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 애초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 초당을 다시 지었다. 다만 원래 초당 건물이 아니라 목조 기와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글자 ‘丁石’(정석)이 새겨져 있으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켠에는 ‘약천’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지가 있다. 초당에 관어재(觀魚齋)란 현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봐, 연지에 잉어를 키웠을 것으로 유추된다.초당 뒤 가파른 길은 만덕산 백련사로 이어진다. 꿀럭꿀럭한 산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동백숲으로 유명한 고찰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이 길이 ‘사색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뤄진 길이다. 다산은 차와 바다를 찾아 백련사로 향했고 혜장은 스승과 책을 찾아 초당을 오갔다. 유배 와 제자를 가르치며 산중칩거하던 다산이 다른 철학(불교)을 통해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대의 학승 혜장 덕분일 수도 있다. 산중 차향은 그렇게 피어나 학문으로 승화됐다.다산은 강진의 아름다운 산(만덕산, 월출산)과 강(탐진강), 바다(강진만) 등 자연을 사랑했다. 특히 월출산 옥판봉을 바라보는 백운동 원림과 그 인근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를 각별히 좋아했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베트남이 아니다) 마을에 이르면 다산의 차를 재배했던 다원이 나온다. 전남 최대 가람이었던 월남사지 앞에 차를 재배하며 제다(製茶)해온 다부 이한영 가문의 생가 다향산방과 다원, 전통차문화원이자 시음장이 함께 있다. 이한영의 선조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다. 1830년 해배 후 광주(현 경기 남양주)로 올라간 다산은 제자 중 막내인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잘 받았다. 고맙다. 내 몸이 좋지 않아 오직 떡차(餠茶)만 의지하고 있는데 다시 곡우가 되었으니 차를 또 보내 달라”고 했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거칠었다. 반드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목민심서’를 집필한 ‘강직한 공직자’ 다산이었지만 제자에게는 단호하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자와 맺은 다신계(茶信契) 때문이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더라도, 제자들은 매년 공부한 글과 차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약속은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이한영이다. 평생 차를 위해 살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 차로 바뀌어 유통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고유 상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뜻이다. 그는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었고,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는 다시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 이현정 전통차문화원장에 이르고 있다. 다산이 즐기던 차가 바로 백운옥판차다. 사제 간의 다신계가 정녕 200여년 지속된 셈이다.생가 옆에는 백운동 원림(園林)이 있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전통 원림이다. 이곳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은 평소에도 백운동 원림을 찾았고 1812년에는 초의선사와 함께 백운동 12경을 방문한 후 각각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한 시(백운동 12승사)를 남겼다.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백운동도)을 묶은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홍옥폭,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 정선대, 운당원 등 백운동 12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다.람사르 협약 생태습지로 유명한 남포 습지에도 다산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강진만과 탐진강 물길이 만나는 남포마을은 제주, 완도 등 섬과 육지의 교역 중심지로 예부터 번성했는데 다산초당 만덕산에서 내려오면 닿는 곳이라 다산의 행차도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포마을의 옛 이름은 갈대밭이란 뜻의 갈밭마을.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하는 문구다. 다산은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세하기 위해 죽은 이와 갓난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횡포를 부렸다. 도저히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이에 항의하던 한 백성은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 거세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남겼다.‘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사연 호소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크게 포효하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간 방에 피가 흥건하고/ 남편은 스스로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애절양’ 시구는 강진만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남포호 전망대에 선명히 적혀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3282만㎡(813만평)에 이른다.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한 에코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정보와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덕인지, 강진에는 특이한 맥주 소비 트렌드가 있다. 인구 3만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신기하게도 술집마다 미국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를 팔고 있다. 서울 등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심지어 생맥주 체인점에서도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면 따로 내올 정도다. 20여년 전 강진에는 주류를 공급하는 회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이 회사가 상대적으로 고급제품이었던 버드와이저 마케팅을 펼쳤는데, 뜻밖에 이게 먹혀들어 누구나 버드와이저를 즐겨찾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진은 전남에서도 주류소비량이 높은 편이라 주류회사들의 주요 마케팅 대상지였다. 이런 시장 상황이 지속되며 버드와이저가 국산 맥주보다 좋다는 이미지를 남겼고 마침내 ‘군민 맥주’로 인정받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싱가폴 슬링’을 찾아 마시듯 무더운 여름날 강진에 간다면 시원한 버드와이저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될 듯하다. 다산이 18년이나 살며 많은 흔적을 남긴 강진 땅. 농가체험숙박 ‘푸소 프로그램’과 역사문화 체험, 청정 생태 여행 1번지로 변모한 이 청잣빛 푸른 땅에 스스로 ‘아름다운 유배’를 떠나보는 것도 역병으로 우울한 이 여름, 참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강진 여행 체크리스트 무엇을 볼까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의 재미있는 해설을 들으며 백운옥판차 등 다양한 전통차 시음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월남사지 잔디밭에 앉아 다식을 들며 차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민화박물관에선 민중의 삶을 그대로 녹인 민화를 통해 조상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에선 성문화를 표현한 한중일 3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다.뭘 먹을까 은행나무는 한정식 미향(味鄕) 강진에서도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반찬 그릇 위에 또 그릇이 올라가는 ‘강진한정식이층탑’ 별칭이 있을 정도다. 해물과 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음식의 면면이 훌륭해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것이 없다. 토종닭과 전복, 문어를 넣고 끓인 회춘탕(해천탕)도 여름철 복달임으로 좋다. 설성식당은 한 상 가득 돼지불고기 백반상을 받는 집이다. 조선 중후기 육군 사령부가 있던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맛 가득한 양념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곁들임 찬만 해도 12가지가 넘는다. 1인 1만원꼴로 값도 저렴하다.
  • [포토] 노란 유채꽃과 파란 하늘

    [포토] 노란 유채꽃과 파란 하늘

    20일 오전 서귀포시 안덕면의 한 유채밭을 찾은 관광객이 봄 정취를 즐기고 있다. 2021.4.20 연합뉴스
  • [포토] 울산 간절곶에 ‘유채꽃 활짝’

    [포토] 울산 간절곶에 ‘유채꽃 활짝’

    10일 오전 울산 울주군 간절곶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활짝 핀 유채꽃을 보며 봄 정취를 즐기고 있다. 뉴스1
  • [포토] 봄, 천천히 달려주렴

    [포토] 봄, 천천히 달려주렴

    29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녹산로 일대를 찾은 관광객들이 활짝 핀 유채꽃밭을 걸으며 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연합뉴스
  • [포토] ‘벚꽃 만발’ 제주

    [포토] ‘벚꽃 만발’ 제주

    제주 벚꽃이 개화한 17일 오전 제주시 아라동 제주대학교 인근 거리에 벚꽃이 만발해 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제주지방기상청은 이날 제주 벚꽃이 작년보다 일주일 빨리 개화했다고 발표하며, 평년보다 높은 3월 기온이 벚꽃의 이른 개화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뉴스1
  • [포토] ‘유채꽃 제주’

    [포토] ‘유채꽃 제주’

    맑은 날씨를 보인 15일 오전 제주시 함덕리 서우봉에 유채꽃이 만개해 관광객들이 봄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뉴스1
  • 詩랑 동백이랑, 붉게 물들어볼까

    詩랑 동백이랑, 붉게 물들어볼까

    어디에선가 시 한 편을 접했다. 제목은 ‘숙희이야기’. 이른바 ‘라떼 시절’에 경북 포항의 구룡포에서 벌어진 애사가 담긴 시다. 한데 시에선 여태 알던 구룡포와 다른,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기가 났다. 시를 쓴 이는 권선희 시인. 쉰여섯 생애 가운데 장성한 이후 20년 세월을 구룡포에서 살아온 이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구룡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룬 시집이 벌써 두 권째다. ‘구룡포로 간다’(2007)가 앞서고 ‘꽃마차는 울며 간다’(2017)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펴낸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까지 포함하면 세 권째다. 어느 곳엔들 저마다의 속사정이 없을까만, 이 마을엔 대체 무슨 사연이 이리 많은 건가. 주민이라야 7000명을 헤아리는 동네에서 말이다.“구룡포발 대구행 아성여객 차장이었을 때 숙희는 한 마리 비둘기였다지요 빨간 명찰 말년 병장 숙박계 날려쓰던 겨울 밤 싸나이 팔뚝에 머리 파묻고 처음 날개를 벌렸다지요 헐거운 여인숙 그 방을 두고 머리채 질질 반장 손에 끌려간 새벽은 세찬 바람으로 오래 울었다지요 태광호도 중심 잔뜩 부풀어 돌아오는데 아무튼 포장치고 회 뜨는 쉰 살 숙희 세꼬시 썰리듯 살아도 첫차처럼 올라탔던 싸나이는 여적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명치끝에 아예 눌러 붙었다지요” 시 ‘숙희이야기’의 전문이다. 초봄의 갯마을로 발걸음하게 만든 시. 실제 아성여객에 근무하던 차장(안내양)의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권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시들이 대부분 이랬다. 구룡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시가 됐다. 어찌어찌 권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에게 귀동냥이라도 해서 새로운 느낌의 구룡포를 만날 요량이었다. 사실 여행자에게 동해 바다는 늘 낭만과 포용의 공간이어야 했다. 삶이 무료해질 때마다 그 바다 앞에 나를 세우려는 이들이 모험과 충전을 위해 찾는 무대였다. 하지만 낭만 너머에는 누군가의 고단한 삶이 있다. 권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구룡포’는 그런 다양한 생의 시간이 머무는 공간이다. 시인은 구룡포 여정의 들머리로 선소(船所)를 권했다. 선소는 배를 만들거나 수리, 해체하는 곳이다. 배의 일생이 시작되고 끝을 맺는 자리란 뜻이다. 문제는 선소의 분위기가 여행자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 예전과 다르다고는 해도 선소는 여전히 걸걸한 사내들이 많은 일터다. 자칫 사진을 찍다 으르딱딱대는 선주와 마주칠 수도 있다. 될 수 있으면 눈으로만 살피며 빠르게 지나길 권한다. 선소 위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용의 대가리’ 용두산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언덕에 서면 구룡포항 일대를 얼추 굽어볼 수 있다. 구룡포항엔 위판장이 세 곳이다. 항구는 하나지만 위판되는 어종에 따라 구역이 나뉜다. 주민들은 이를 ‘판장’이라 부른다. 선소가 있는 남쪽부터 트롤선, 대게를 포함한 잡어선, 그리고 활어선(주로 오징어잡이배) 판장이다. 선소에서 잡어선 판장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구룡포 읍내다. ‘매월여인숙’부터 찾는다. 시 ‘숙희이야기’의 배경이었던 곳. 읍내 구룡포노인무료급식소 바로 옆에 있는데도 찾기가 쉽지 않다. 햇볕 한 줌 겨우 드는 골목을 지나야 나온다. 예전엔 이 일대에서 명자깨나 날리던 숙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여인숙’은 사라지고 낡은 건물만 남았다.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여인숙(‘매월여인숙’)은 이제 기억 속에 박제되고 만 거다. 읍내 고래고기 음식점에 전시된 고래 생식기처럼 말이다. 마을 골목골목엔 이 같은 사연들이 수없이 흐른다. 손 없는 집에 들어가 자식을 여섯이나 낳은 첩과 그 첩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받아낸 뒤 부산으로 가 광주리 장사로 먹여 살린 본부인 이야기(‘누가 더 불쌍한가’), 술추렴하다 “시발 문디 지랄 같은 기마 화딱 디비 엎어 뿔고 에이 시벌컥벌컥벌컥벌컥컥 컥”대던 사내 이야기(‘돌림노래’), “새끼 내삐리고 소식 는 둘째 놈” 탓에 “고래 새끼만도 몬한 내 손주 놈 가여버”하던 할아버지의 이야기(‘사램이 고래만 같으믄’)들이 항구 뒤편 골목에 가득 채워진다. “산 사람 덕분에 죽을 수 없는 개”(‘목포집 덩실이’)와 뭇 사내들에게 해체되던 고래(‘끝내주는 것’) 등 동물과 자연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강원 춘천 출신의 시인이 채록한 사투리들이 토속적 정취의 시어가 되어 주는 건 물론이다. 사실 구룡포 하면 TV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벌써 두 해 전에 끝난 드라마인데도, 촬영지를 둘러보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하다. ‘동백꽃 필 무렵’이 주로 촬영된 곳은 일본인 가옥거리(근대문화역사거리)다. 옛 다이토 여관이었던 동백(공효진 분)의 가게 ‘까멜리아’ 등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일본인 가옥거리가 해안가 평지에 있다면, 한국인들이 살던 집들은 그 뒤의 비알에 있다. 일본인 거리가 방구석 1열, 한국인 거주지는 방구석 3열쯤 되려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살았던 우리나라 해안 도시 어디나 비슷한 모양새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 비알에도 사연들은 빼곡하다. 우선 사라진 것부터. 권 시인에 따르면 비알에서 가장 먼저 없어진 건 용왕당이다.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고 옮겨간 것이다. 바다에 기대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이었을 텐데, 그 사연이 씁쓸하다.예전 용왕당은 드라마 속 ‘동백이네 집’ 옆에 있었다. 일제 때는 일본 사찰이 이 자리를 차지했고,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가톨릭 공소로 쓰였다. 현재 텃밭 가운데에 성모 마리아상이 어색하게 서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용왕당을 허문 이들은 인근 충혼탑 뒤에 크고 번듯한 용왕당을 새로 지었다. 그 탓에 조상 대대로 전해지던 기억의 공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충혼탑 주변으로 볼거리가 많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 사진이 촬영됐던 계단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동백이네집’, 과메기문학관, 아라예술촌 등에도 관심 두는 이들이 많다. 단층 폐가 위에 희망을 담아 세운 조형물 블루 프린트, 동백꽃담 등 거리 예술 작품들도 볼만하다.구만리도 찾았다. “청보리 수런대며 익어가는” 그 마을에 가면 “그렁그렁 차오르던 봄”(이상 ‘다시, 구만리’)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키 낮은 집들만 있던 시절엔 아마 청보리밭 끝이 바다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푸른 보리밭이 파란 바다로 풍덩 자맥질하는 모습이었겠지. 밭과 바다의 경계 어름에선 아마 아지랭이도 스멀스멀 피어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와 더불어 푸르렀을 청보리밭의 정취는 이제 찾기 어렵다. 키 높은 건물, 얼기설기 난 차도에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구만리 마을 초입, 공군부대 쪽에 있는 보리밭이 그나마 넓고 상쾌하다. 구만리에서 ‘호랑이 꼬리’를 넘어가면 풍경이 휙 바뀐다. 가수 최백호의 친구가 살았다던 영일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위로 ‘철의 도시’ 포항이 신기루처럼 떠 있다. 여기부터는 다른 공간, 다른 세계다. 글 사진 포항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겨울 견딘 봄처럼 온 옛 선인들의 그림

    겨울 견딘 봄처럼 온 옛 선인들의 그림

    길이 14m 추사의 ‘세한도’ 두루마리 청나라 문인 16인에 받은 찬사 눈길 미디어아트로 꾸민 ‘평안감사향연도’ 부벽루·대동강 화려한 향연 직접 체험 “삶의 고락 이기는 일상의 가치 발견”겨울 초입에서 옛 선인들의 그림을 통해 다가올 추위를 이겨 낼 기운과 따스한 봄날에 대한 기원을 담은 전시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4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 세한(歲寒)·평안(平安)’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필자 미상의 ‘평안감사향연도’를 테마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 낸다. 1부 ‘세한-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에서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가 전시된다.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그려 준 것으로, 한겨울 추위 속에 납작 엎드린 초라한 집 양옆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논어’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서적을 찾아 유배지로 보내 준 제자의 의리와 절개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이번 전시는 소장자 손창근(91)씨가 부친 손세기 선생에게서 물려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관리해 오던 ‘세한도’를 지난 9월 국가에 기증한 이후 처음 공개하는 자리다. 특별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이상적이 청나라 명사 16인에게 받은 찬사의 글과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 등 한국 문인 4명의 감상 글이 적힌 ‘세한도’ 두루마리 전체를 모처럼 전시장에 펼쳤다. 총길이 14m가 넘는 ‘세한도’ 전모가 소개되는 건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서거 150주년 특별전 이후 14년 만이다. ‘세한도’와 관련한 다양한 영상도 눈길을 끈다. 전시 들머리에 프랑스 영화 제작자이자 미디어아트 작가인 장 풀리앙 푸스가 이방인의 눈으로 추사가 겪었을 법한 감정을 담은 7분 분량의 영상 ‘세한의 시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박물관의 의뢰로 지난달 제주에서 2주간 촬영한 흑백 영상이 한겨울의 스산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밖에 손창근씨가 2018년 기증한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김정희가 동갑내기 친구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김정희 초상화 등 15점이 함께 전시된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세한도’는 처음 보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볼수록 진가를 알게 되는 그림”이라면서 “눈으로 한 번 보고, 마음으로 다시 한번 보면 새롭게 보인다”고 소개했다.2부 ‘평안- 어느 봄날의 기억’에선 평안감사가 부임해 부벽루, 연광정, 대동강에서 벌이는 화려한 향연 장면을 그린 ‘평안감사향연도’를 만난다. ‘월야선유도’,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 등 세 폭으로 구성됐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하지만 작품에 찍힌 낙관과 서명 방식이 달라 불명확하다. 전시는 미디어아트가 중심을 이룬다. ‘부벽루연회도’ 속 전통무용이 현대적인 퍼포먼스 영상으로 재현되고, 대동강에서 열린 밤의 잔치 장면을 그래픽 미디어아트로 구현해 당대 풍속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세한도’와 ‘평안감사향연도’는 조선의 관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과 가장 영예로운 순간을 상반되게 보여 주는 그림”이라면서 “삶의 고락이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겨 내고 기뻐할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준다”고 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추운 겨울 지나면 따스한 봄날 올지니…국립중앙박물관 ‘세한·평안’특별전

    추운 겨울 지나면 따스한 봄날 올지니…국립중앙박물관 ‘세한·평안’특별전

    겨울 초입에서 옛 선인들의 그림을 통해 다가올 추위를 이겨 낼 기운과 따스한 봄날에 대한 기원을 담은 전시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4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 세한(歲寒)·평안(平安)’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필자 미상의 ‘평안감사향연도’를 테마로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 낸다. 1부 ‘세한-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에서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가 전시된다.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그려 준 것으로, 한겨울 추위 속에 납작 엎드린 초라한 집 양옆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 네 그루가 서 있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논어’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서적을 찾아 유배지로 보내 준 제자의 의리와 절개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이번 전시는 소장자 손창근(91)씨가 부친 손세기 선생에게서 물려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관리해 오던 ‘세한도’를 지난 9월 국가에 기증한 이후 처음 공개하는 자리다. 특별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이상적이 청나라 명사 16인에게 받은 찬사의 글과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 등 한국 문인 4명의 감상 글이 적힌 ‘세한도’ 두루마리 전체를 모처럼 전시장에 펼쳤다. 총길이 14m가 넘는 ‘세한도’ 전모가 소개되는 건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서거 150주년 특별전 이후 14년 만이다.‘세한도’와 관련한 다양한 영상도 눈길을 끈다. 전시 들머리에 프랑스 영화 제작자이자 미디어아트 작가인 장 풀리앙 푸스가 이방인의 눈으로 추사가 겪었을 법한 감정을 담은 7분 분량의 영상 ‘세한의 시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박물관의 의뢰로 지난달 제주에서 2주간 촬영한 흑백 영상이 한겨울의 스산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밖에 손창근씨가 2018년 기증한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김정희가 동갑내기 친구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김정희 초상화 등 15점이 함께 전시된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세한도’는 처음 보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볼수록 진가를 알게 되는 그림”이라면서 “눈으로 한 번 보고, 마음으로 다시 한번 보면 새롭게 보인다”고 소개했다.2부 ‘평안- 어느 봄날의 기억’에선 평안감사가 부임해 부벽루, 연광정, 대동강에서 벌이는 화려한 향연 장면을 그린 ‘평안감사향연도’를 만난다. ‘월야선유도’,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 등 세 폭으로 구성됐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하지만 작품에 찍힌 낙관과 서명 방식이 달라 불명확하다. 전시는 미디어아트가 중심을 이룬다. ‘부벽루연회도’ 속 전통무용이 현대적인 퍼포먼스 영상으로 재현되고, 대동강에서 열린 밤의 잔치 장면을 그래픽 미디어아트로 구현해 당대 풍속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세한도’와 ‘평안감사향연도’는 조선의 관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과 가장 영예로운 순간을 상반되게 보여 주는 그림”이라면서 “삶의 고락이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겨 내고 기뻐할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준다”고 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설렘의 시간, 수줍은 고백

    설렘의 시간, 수줍은 고백

    거창과 이웃한 합천도 가을이 차분히 내려앉고 있는 모습이다. 합천의 가을은 황강을 따라 온다. 합천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강이다. 황강 주변만 차분하게 살펴도 하루해가 짧을 만큼 볼거리가 많다. 거리두기가 완화됐다고는 해도 아직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한 만큼 황강 변의 실외 공간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신소양체육공원으로 먼저 간다. 이름은 ‘체육’공원이지만 이 계절엔 합천읍을 통틀어 최고의 ‘풍경 맛집’으로 변한다. 핑크뮬리(꽃말 ‘고백’) 때문이다. 체육공원 평지에 동심원 형태로 핑크뮬리를 식재했는데, 이 풍경을 즐기려는 이들이 제법 많이 찾는다. 핑크뮬리는 사실 소개하기가 참 애매한, 계륵 같은 식물이다. 생태계 위해성 논란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분홍쥐꼬리새’로 번역되는 핑크뮬리는 ‘생태계 위해성 2급’ 식물이다. 강력한 제재는 하지 않지만 식재 자제가 권고되는 식물이다. 위해성 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식물인 것이다. 한데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여러 지방자치단체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핑크뮬리를 심고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7년 정도 된 핑크뮬리가 이제 우리의 가을 들녘을 온통 점령한 듯한 형국이다.핑크뮬리는 벼과 식물이다. 농부들이 애면글면 가꾸는 벼와 친척인 셈이다. 다만 벼와 달리 오로지 조경용으로만 식재된다. 벼는 가을에 노랗게 물들지만 핑크뮬리는 연분홍으로 물든다. 동심원의 미로처럼 꾸며 놓은 핑크뮬리밭을 보자니 상큼발랄한 느낌이다. 두 갈래로 머리를 땋은 ‘빨강머리 앤’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싶다. 체육공원 옆으로는 산책로가 나 있다. 핑크뮬리에 홀린 관광객들의 시선에서는 살짝 비켜서 있지만, 억새와 갈대가 익어 가는 강변 흙길을 걷는 정취가 제법 깊다.합천읍 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함벽루가 나온다. 1321년 고려 충숙왕 때 세웠다는 정자다. 비가 올 때면 낙숫물이 지붕 처마에서 황강으로 곧장 떨어지도록 지어졌다고 한다. 참 낭만적인 설계다. 들보 아래로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시가 적힌 편액이 마주 보고 있다. ‘경상 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쟁쟁한 두 인물의 시를 한자리에서 마주할 수 있다. 함벽루 뒤 암벽에도 우암 송시열이 쓴 ‘涵碧樓’(함벽루)가 각자돼 있다. 함벽루와 바짝 붙은 절집은 연호사다. 창건연대가 643년까지 거슬러 오르는 고찰이다. 합천을 대표하는 해인사(802년)보다 159년 앞서 창건된 셈이다. 함벽루에서 강 건너 맞은편은 정양레포츠공원이다. 인근에서 ‘내륙 바캉스’ 명소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바캉스’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듯, 공원 앞으로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신발을 벗고 발에 닿는 모래알을 느끼며 걷기 딱 좋다. 황강을 따라 왕복 6㎞ 길이의 황강은빛모래길도 조성돼 있다. 오토캠핑장, 경관조명 등의 시설도 갖췄다. 레포츠공원에서 보는 함벽루의 자태도 빼어나다. 새벽 물안개가 감싸는 가을이나 눈 내린 겨울이면 이를 담으려는 사진가들로 붐빈다. 합천 읍내를 살짝 벗어나면 합천호가 기다린다. 1988년 황강 물줄기를 막아 합천댐을 만들면서 생긴 인공호다. 호수 주변 둘레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호수와 산허리를 번갈아 끼고 도는 길이 약 40㎞에 걸쳐 있다. 호수 주변엔 벚나무가 많다. 호수 조성 당시에 조경용으로 식재한 나무들이다. 어느새 굵은 둥치의 나무로 자라 짙은 숲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봄에는 백리벚꽃길로, 가을철엔 단풍길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 물안개가 피는 가을 새벽이면 선경이라 해도 좋을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글 사진 합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자페스티벌’ 개최…추석 특별행사도 마련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자페스티벌’ 개최…추석 특별행사도 마련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하 수목원)은 11월 1일까지 45일간 ‘2020 봉자페티벌’을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대한민국 대표 우리 꽃 축제인 수목원 봉자 페스티벌은 봉화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활용한 축제라고 해서 ‘봉자 페스티벌’이라고 부른다. ‘백두대간 산촌의 결실’이란 주제로 열리는 올해 축제는 봉화지역 자생식물 40만본을 전시하는 언택트 축제로 마련된다. 축구장 3.5배(2만 5080㎡)크기인 수목원에는 현재 은은한 색과 향이 매력적인 구절초와 감국 등이 경관초지원과 잔디언덕에 흐드러지게 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수목원은 추석 연휴 기간인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특별행사를 진행한다. 추석 당일(10월 1일)은 제외된다. 다문화가정과 한복을 입고 수목원을 찾는 방문객에게는 무료 입장 기회를 주고, 성을 제외한 이름에 ‘추·석·한·가.위‘ 중 한 글자가 있는 방문객에겐 기념품을 제공한다. 다만, 다문화가정의 경우 가족관계증명서와 외국인등록증 등 증빙서류를 지참 해야 한다. 행사기간 수목원에서는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발열체크, 마스크 착용, 밀접 접촉 가능구역 제한 등 철저한 방역관리가 이뤄진다. 한국관광공사의 언택트 관광지로 선정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지난 봄과 여름에 봉자페스티벌을 개최해 1만 8000여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이종건 국립백두대간수목원장은 “봉자페스티벌에 사용되는 식물은 지역농가와 위탁계약해 재배해 국내 생물자원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고 농가 재배 기술 보급 및 소득 향상을 위해 추진하는 축제”라며 “수목원에서 깊어가는 가을 정취와 낭만을 만끽하길 바란다”고 했다. 봉화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고궁서 펼치는 언택트 전통공연… 집콕이 즐겁다

    고궁서 펼치는 언택트 전통공연… 집콕이 즐겁다

    명절에는 고궁 나들이와 민속놀이가 제격이지만 안전한 추석 연휴를 위해 이번만큼은 꾹 참자. 그래도 명절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문화재청이 마련한 비대면 문화유산 향유 프로그램을 안방에서 즐기는 건 어떨까. 궁능유적본부(본부장 나명하)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은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온라인으로 궁궐 특별공연을 개최한다. 지난 7월 비대면 공연인 ‘차 안에서 즐기는 고궁음악회’로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던 고궁음악회는 10월 1일과 2일 오후 7시 30분 ‘집콕하며 즐기는 가을밤 달빛공연’이란 이름으로 열린다. 공연 완성도를 높이고, 가을밤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취를 잘 전달하기 위해 사전 녹화 형식으로 진행된다.1일에는 민요 악단 ‘놈놈’, ‘허송세월’과 함께 대중음악과 민요의 경계를 허문 이희문의 오방신이 출연한다. 2일에는 국악기와 전통 음악인의 만남으로 역동적이고 신명나는 무대를 선보이는 ‘악단광칠‘,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출연한다. 3일과 4일 오후 7시에는 2010년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품격 전통공연으로 자리매김한 ‘덕수궁 풍류’의 특별 무대가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덕수궁 풍류는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정기적으로 펼쳐지는 한국 전통 ‘가(歌), 무(舞), 악(樂) 공연’으로, 추석을 맞이해 ‘소리 판타지아- 붉은 꽃’ 공연을 선보인다. 대한제국 근대 건축물인 석조전 앞에서 서양의 가곡, 오페라 아리아, 한국 전통 가곡인 정가, 판소리가 한 무대에서 어우러진다. 성악가 바리톤 양준모, 정가 하윤주, 소리꾼 정윤형이 신선한 조화를 보여줄 예정이다. ‘집콕하며 즐기는 가을밤 달빛공연’과 ‘2020년 덕수궁 풍류, 소리 판타지아- 붉은꽃’공연은 네이버TV 한국문화의 집(https://tv.naver.com/kous1720)과 문화유산채널 유튜브(https://www.youtube.com/user/koreanheritage)에서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http://royal.cha.go.kr)와 한국문화재재단 홈페이지(https://www.chf.or.kr)에서 확인하면 된다.조선 왕실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창덕궁을 살펴보고 싶다면 증강현실(AR) 애플리케이션인 ‘창덕 아리랑(AR-irang) 앳홈’을 실행하면 된다. 금천교부터 인정전, 희정당, 후원 입구까지 총 12개 관람 구역을 ‘해치‘의 안내로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서비스다.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gogung.go.kr)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유물을 통해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영상과 ‘新(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온라인 전시 및 관련 특강을 제공한다. 한편 진도의 대표 명승지 진도 운림산방을 배경으로 채상소고춤, 바라지, 손님굿 등의 다양한 무형문화유산 공연과 가수 송가인의 무대가 펼쳐지는 ‘코리아 온 스테이지’는 추석 당일인 1일 낮 12시 10분 KBS 1TV에서 만날 수 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층층 암봉·굽어보는 다도해·수평선 위 제주… 모두 多 힐링

    층층 암봉·굽어보는 다도해·수평선 위 제주… 모두 多 힐링

    줄곧 마음속으로 겨누기만 했던 산이 있다. 장흥 남쪽의 천관산(724m)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가을엔 억새꽃 핀 풍경이 그리 예쁘단다. 청태전 향기에 이끌려 내려간 이번 여정에서도 사실 작심하고 천관산을 오른 건 아니다. 꼭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망무제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지인의 부추김에 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가벼운 트레킹 말미에 만난 제주도라니. 이제 전하려는 얘기는 그 운 좋았던 날의 기록이다.지방 어느 도시를 가도 과거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애수의 말들이 전해 온다. 대표적인 게 ‘개가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것이다. 탄광 마을에 가면 석탄산업이 활황이던 시절에, 쇠락한 어촌 마을에 가면 물고기가 잘 잡히던 시절에, 거의 예외 없이 ‘동네 개들이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 실제 강원도의 한 지방자치단체에선 ‘만원짜리 물고 있는 개’ 동상을 세웠다가 개를 희화화한다며 애견가들의 질책을 듣기도 했다. 탁월한 전망을 강조하는 말도 흔하다. ‘맑은 날엔 제주도가 보인다’는 게 대표적이다. 남도의 산 가운데 어지간한 높이의 산이면 어김없이 이런 ‘뻥’ 같은 상찬이 전해 온다. 맑은 날 부산에 가면 쓰시마섬이 보이고, 울릉도에 가면 독도가 보인다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물론 수차례 지방 출장을 다녔어도 여태 그 ‘맑은 날’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이 장흥 천관산에서 실제 일어난 거다. 과장 좀 보태 낚시꾼이 ‘팔뚝만 한 멸치’를 잡았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싶다. 천관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천관산 동북쪽의 장흥 위씨 제각인 장천재에서 오르거나, 반대편 서남쪽의 천관산문학공원에서 오른다. 일반 등산객들은 대부분 장천재 쪽을 들머리 삼는다. 산행 거리는 다소 길어도 대형 버스로 접근하기 쉽고, 오르막 경사도 다소 완만하기 때문이다. 반면 승용차로 온 여행객이나 짧은 트레킹 정도로 만족하려는 이들은 천관산문학공원을 택하는 게 좋다. 곧장 바닷속으로 빠져들 만큼 바다와 인접한 구룡봉까지 빠르게 치고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트레킹 들머리인 탑산사 주차장이 이미 천관산의 허리쯤 되는 높이에 있다는 거다. 차로 주차장까지 오르고 나면 구룡봉까지 산행거리가 1.2㎞ 정도로 확 줄어든다.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남짓이면 닿는다. 다만 산행 거리가 짧은 만큼 비교적 급경사를 올라야 하는 건 필연이다. 탑산사 주차장 중간에 등산로가 나 있다. 여기가 들머리다. 경사가 급해 다소 힘은 들지만 고도를 높일수록 다도해의 속살이 조금씩 드러나는 게 매력이다. 코스 중간에서 만나는 암봉들의 자태도 빼어나다. 거대한 자연석이 층층이 쌓인 ‘아육왕탑’ 등 여러 암봉을 지나면 정상 능선의 동쪽 끝인 구룡봉이다. 거대한 너럭바위에 앉아 다도해를 굽어보는 정취가 그만이다. 공기가 맑은 덕에 시야가 확 트여 바다 위로 보석같이 박힌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멀리 수평선 근처 구름 아래로 거대한 섬 하나가 고래 등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떠 있다. 저 먼 곳에, 저만 한 크기의 섬이라면 딱 하나, 제주도다. ‘시골 사람들의 흔한 뻥’ 정도로 여겼던 일이 실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시야가 조금만 더 맑았다면 과장 좀 보태 한라산 부악까지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천관산은 이제 곧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 이른바 ‘명승’이 되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6일 천관산을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당시 문화재청이 밝힌 문화재 지정 근거는 이랬다. “산등성과 정상 부근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기암괴석 등의 화강암 지형경관, 억새군락 등의 식생경관, 정상부에서 조망할 수 있는 다도해 경관 등 다양한 경관이 탁월하게 연출돼 경관적 가치가 뛰어나고, 백제·고려와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가 치제를 지내거나 국방의 요충지로 활용된 역사성을 가지며, 일대에 천관사, 탑산사 등 사찰·암자와 방촌마을 고택 등 문화관광자원이 다수 분포해 역사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화재청이 밝힌 천관산 인근의 여러 명소들은 시간을 내서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트레킹 들머리의 천관산문학공원은 필수 방문 코스다. 이 지역 출신 문인과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글을 50여개 문학비에 각각 새겨 놓았다. 입구의 문탑(文塔)에는 구상, 박완서 등 작가들의 친필 원고 50여점과 연보 등을 캡슐에 담아 묻었다. 그 위로는 주민들의 가훈을 모은 가훈탑 등 돌탑 460여기가 세워져 있다. 글 사진 장흥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역사 속 조용하지만, 처절하게 버틴 여인들의 삶

    역사 속 조용하지만, 처절하게 버틴 여인들의 삶

    코로나로 미뤄져 5개월여 만에 공연6일 첫 무대 이후 매회 매진 인기몰이 안동 사투리·전통 소재들 마음 ‘뭉클’“자지 마라, 자만 안 된다. 언제 또 우리가 이클 모이 보겠노?” ‘잠이 들면 가만 안 둔다’는 막내의 귀여운 협박이 이토록 애잔할 수 있을까. 1950년 4월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 모인 여성 9명에게 그 하룻밤은 아주 소중했다. 역사 속 소용돌이의 한복판을 조용하지만 처절하게 지켜 낸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화전가’. 극 중 어딘가 위태로운 여성들의 삶처럼, 작품은 참 힘겹게 무대에 올랐고 아슬아슬하게 공연을 이어 가고 있다. 국립극단 70주년을 기념하고자 야심 차게 선보인 초연 작품이 어느 때보다 아련하게 기억되는 이유다. 오랜만에 모인 여인들의 봄맞이 화전놀이를 그린 ‘화전가’는 지난 2월 28일 봄과 함께 관객들과 첫 만남을 할 예정이었다. 배경이 된 안동 가일마을 고택을 제작진과 배우들이 답사해 정취를 담았다. 안동 사투리(동남 방언) 대사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2주간 안동 출신 배우(이원장)에게 특별 과외까지 받았다. 이후 8주간 연습을 마치고 드레스 리허설을 앞두고 의상이 도착한 날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공공시설 운영 제한 방침을 내리면서 공연이 잠정 연기됐다. 지난해 말 안동 워크숍 간 날에는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한 배우가 근처에서 타로카드 점을 보고 오겠다더니 10여분 만에 씩씩 대며 “우리 공연하지 말래서 기분 나빠 왔네. 7~8월에나 하라는데”라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마냥 ‘믿거나 말거나’ 황당한 이야기로 넘기지 못했다. 배우들의 기약 없는 날들은 얼핏 극 중 여인들의 처지와도 닮았다. ‘김씨’의 환갑을 하루 앞두고 고향집에 온 세 딸과 함께 살던 두 며느리와 고모, 행랑어멈과 그가 거둬 키운 딸이 모였는데 이 집안 남자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독립운동하러 가 소식이 끊겼거나 병으로 죽었고, 이북으로 넘어갔거나 감옥에 간 이도 있다. 돌아와야 할 이들이 있는 여인들은 누군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 화들짝 놀라고 또 설다. 작품은 지난 6일에서야 드디어 관객들과 만났다. 배우들은 5개월 남짓 만에 모인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터뜨리듯 합을 맞췄다. 대본엔 없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장면에서 목소리를 키우며 자기들만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품 속 여인들도 각자의 삶은 고됐지만, 함께 모이니 그저 들뜨고 즐거웠다. 미제 초콜릿과 커피, 설탕을 나눠 먹으며 천진한 웃음을 짓고 떠들었고 이따금 투닥거리고 울기도 하며 가족임을 드러냈다. 두 차례나 화엄사를 찾아 가져온 종소리와 풀벌레 소리, 새 소리와 무대 뒤편에 흐르는 빗줄기가 그리는 장면들은 여인들이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을 만도 하게 아름답다. “액씨요, 다리덜리 얼매나 말이 마은 줄 아니껴? 그 집이 낭팰레라. 뿔이 나가 낭팰레라”, “자만 가만 안 나둔다꼬 설치드이, 하매 꼽부라나?” 등 동글동글한 정겨운 사투리와 의상 디자이너도 생전 처음 들었다는 납닥생맹(고급 삼베 치마) 등 안동 고유의 전통 소재들도 곳곳에서 마음을 울린다. 기다림과 정성이 모인 작품은 매회 매진이 될 만큼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울과 경기 지역의 코로나19 확산에 정부가 16일부터 공공시설 제한 운영 방침을 결정하면서 아슬아슬함이 여전히 이어진다. 국립극단은 기존 객석 띄어 앉기 등을 유지하며 23일까지 예정한 공연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 주 사이 상황이 악화할지 몰라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됐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우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워서

    우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워서

    여행지에서 하룻밤 머물면 그곳이 더 잘 보인다. 야경까지 좋다면 금상첨화다. 한국관광공사가 7월에 가볼 만한 곳을 선정했다. ‘야간여행’이 테마다. 낮과는 사뭇 다른 매력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들이다.①달빛 아래 누리는 고궁의 정취-수원 화성행궁 경기 수원 화성행궁은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곳이다. 고즈넉한 고궁의 정취를 즐길 수 있게 야간에도 개장한다. 봉수당은 실내에 부드러운 빛이 어려 신비로움을 더한다. 낙남헌 앞에는 환한 보름달을 형상화한 ‘달토끼 쉼터’가 있다. 숲속에 들어앉은 미로한정 부근에서는 가지런한 궁궐 지붕과 현란한 도시 불빛이 어우러진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수원 화성도 밤이면 화려하게 변신한다. 도심을 감싸는 5.5㎞ 성곽에 조명이 들어와 더 웅장하다. 화성행궁을 등지고 서면 오른쪽에 아기자기한 공방거리가, 왼쪽에 나혜석 생가터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화성행궁 건너편에 오랜 명성을 이어온 수원통닭거리가 있다. 다만 수도권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두 곳 모두 한시적으로 휴관 중이다. 개장 일정을 확인한 뒤 찾는 게 좋겠다. ②백제로의 시간 여행 ‘부여 궁남지·정림사지’ 백제의 세련미와 애잔함이 가득한 충남 부여 궁남지와 정림사지는 한여름 야경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곳이다. 궁남지는 백제 왕실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여름에는 치렁치렁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거대한 습지에서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연꽃이 핀다. 밤이면 연못 안 포룡정 일대에 조명이 들어와 반짝반짝 빛난다.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사비성(부여)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그 중심에 세운 사찰이다. 인적이 뜸한 밤에 조명이 켜진 정림사지는 적막하고 고요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 아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석탑이 우주와 소통하는 듯 신비롭다. 드라마 촬영 명소인 서동요테마파크,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무량사, 많은 연인이 인증 사진을 남기는 가림성(성흥산성) 사랑나무 등도 둘러보자. ③열대야 잊어 ‘안동 월영교·낙동강 음악분수’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도시’ 경북 안동은 야경도 남다르다. 올해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야간 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월영교는 전통미가 아름다운 야경을, 역동적인 낙동강음악분수는 현대미가 두드러진 야경을 선보인다. 월영교는 길이 387m, 너비 3.6m 목책 인도교다. 밤이면 경관 조명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주말에는 분수를 가동해 시원함을 더한다. 월영교에서 자동차로 5분쯤 가면 낙동강음악분수를 만난다. 화려한 조명과 레이저, 음악이 어우러진 분수 쇼가 여름밤 무더위를 씻어 준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도 많다. 월영교 인근의 안동민속촌은 안동댐 수몰 지역의 고택을 옮겨 온 곳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종종 찾았다는 영호루,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 심찬양 작가의 작품으로 다시 주목받는 신세동벽화마을은 낙동강음악분수와 가깝다. ④한여름 밤의 피크닉 ‘강진 나이트드림’ 전남 강진에 가면 여름밤의 로맨틱한 여행이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강진의 인기 여행지를 둘러보고, 지역민이 참여하는 공연도 즐기는 ‘나이트드림’이다. 출렁다리로 유명한 가우도를 산책하고 저녁엔 읍내 사의재에서 마당극을 관람한다. 다양한 등장인물 모두가 지역민이다. 배우와 관객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마지막 목적지 세계모란공원에서 여름밤의 피크닉이 시작된다. 닭강정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지역 예술가들이 준비한 야외 공연을 관람한다. 지난봄 동백꽃이 흐드러졌던 정약용 유적에는 짙푸른 녹음이 내려앉았다. 유적 내 다산초당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백련사가 보인다. 강진만생태공원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에 눈도, 마음도 시원스럽다. ⑤감미로운 유혹 ‘통영 밤바다야경투어’ 미항(美港) 경남 통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경 여행지다. 통영관광해상택시를 타고 밤바다를 돌아보는 ‘통영밤바다야경투어’는 통영의 밤을 책임지는 최고의 선택이라 할 만하다. 도남항에서 출발해 통영운하를 따라 강구안과 충무교, 통영대교를 지나 도남항으로 돌아온다. 투어 시간은 50분 남짓. 입담 좋은 항해사가 들려주는 통영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금~일요일, 공휴일에 운항한다. 10인 이상 예약하면 평일에도 야경투어를 즐길 수 있다. 야경으로 만난 통영 앞바다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통영케이블카가 정답이다. 옥상전망대와 스카이워크가 마련된 상부역사에서 미륵산 정상까지 산책로가 조성됐다. ⑥화려하고 짜릿한 ‘부산 송도·초량이바구길’ 부산의 여름밤을 즐기고 싶다면 송도해수욕장이 제격이다. 해변 동쪽에 조성된 송도구름산책로는 출렁이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경험을 선사한다. 밤이면 송도구름산책로가 주변 야경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부산의 대표 도보 여행 코스인 초량이바구길도 밤에 가면 색다른 재미가 있다. 약 2㎞ 이어진 골목을 걸으며 부산의 근현대사를 엿본다. 초량이바구길의 명물인 168계단에 올라가면 옹기종기 모인 집과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빌딩이 근사한 야경을 선사한다. 아케이드가 설치된 시장 안에 먹거리가 많다. 암남공원은 청량한 숲길과 푸른 바다를 동시에 누리는 힐링 포인트다. 6월 초 암남공원과 동섬을 잇는 송도용궁구름다리가 개통됐는데, 벌써 부산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다.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 쏟아져 나온 시민들… 방심도 쏟아집니다

    쏟아져 나온 시민들… 방심도 쏟아집니다

    윤중로 벚꽃축제 취소에도 행렬 이어져 한강둔치선 마스크 벗고 배달음식 즐겨 공중화장실 긴 줄… 상춘객들 1020 많아 “사태 장기화로 경각심 느슨” 우려 목소리“실내보다는 안전하겠죠. 마스크 썼으니까 괜찮아요.” 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한강시민공원에서 배달음식을 건네받던 20대 김모씨는 코로나19가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입가에 걸린 마스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김씨는 7명의 일행이 기다리는 돗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마스크를 벗고 치킨을 먹었다. 벚꽃이 절정을 이룬 이날 여의도한강시민공원은 시민들로 북적였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윤중로 벚꽃축제가 취소되고 한강 주차장이 폐쇄됐음에도 사람들은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강 둔치로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경각심이 느슨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전날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 더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종교시설과 체육시설, 유흥시설, PC방, 노래방, 학원 등의 운영 제한도 19일까지 계속된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과 해외 유입이 지속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현재 100명 안팎인 신규 확진환자 수를 하루 평균 50명 내외까지 줄인다는 목표다. 하지만 계속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피로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늘면서 참여가 저조한 것이 문제다. 정부가 SKT 이동통신 기지국을 분석해 보니 코로나19 발생 4주차인 3월 1일 하루 인구 이동량이 849만건으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서서히 회복해 토요일인 3월 28일 1302만건으로 저점 대비 53.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한강공원을 찾은 상춘객 대부분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코로나19로 그늘막 설치가 금지되자 대신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담소를 즐겼다. 마스크를 벗고 벚나무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한강 편의점 앞에 걸린 사회적 거리두기 현수막이 무색하게 손님들은 라면 조리기계 4개 앞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라면을 끓였다. 여자 화장실 앞에도 긴 줄이 생겼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관계자는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지만 오후가 되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시에 따르면 3월 넷째 주 한강공원 이용객은 지난해 111만 9000명에서 올해 143만 4000명으로 약 28% 증가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떨림’ 그리움에 사무치다…‘울림’ 속세에서 피안으로

    ‘떨림’ 그리움에 사무치다…‘울림’ 속세에서 피안으로

    피안앵(彼岸櫻). 절집에서 자라는 벚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고단한 현실의 강 너머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나무란 뜻이다. 벚꽃 흩날리는 이맘때라면 대개는 벚나무 무리지은 명소를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올해는 방향을 달리해 보자. 벚꽃 몇 그루 핀 적요한 절집을 찾아 한나절 어슬렁대는 건 어떨까. 그렇게 피안앵이 아름다운 절집을 찾아 나선 길이다. 하필 벚꽃이 절정일 때 사회적 거리두기도 절정의 순간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벚꽃 성지’인 경남 창원 여좌천, 경화역 등이 폐쇄됐고, 서울 여의도 윤중로 등 내로라하는 전국의 벚꽃 명소들도 줄줄이 문을 닫아걸고 있다. 유명 벚꽃 관광지는 피하고 덜 이름났으면서도 나름의 빼어난 풍경을 가진 숨은 여행지를 찾아 전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은 셈이다.●배배 꼬인 둥치 위에 연분홍 꽃잎의 봄마중 봄이 오면 꼭 찾아보리라 별렀던 곳이 있다. 경남 양산의 극락암이다. 대가람 통도사에 딸린 열아홉개 산내 암자 중 하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한 상황에서 산문을 닫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직 문은 열려 있다. 극락암은 통도사에서 4㎞ 정도 떨어져 있다. 걷자면 한참이지만 자동차로는 금방이다. 예전 같으면 걸어 보시라 권했겠지만 요즘 같은 때엔 ‘드라이브 스루’가 당연해 보인다. 암자 초입엔 솔숲이 펼쳐져 있다. 늙은 소나무들이 춤을 추듯 늘어서 있다. 통도사 초입의 ‘무풍한송로’에 견줄 만큼 인상적인 모습이다. 솔숲을 나서면 곧 극락암이다. 어서 오라는 듯 늙은 벚나무 몇 그루가 활짝 가지 벌려 객을 맞고 있다. 산중 암자라 덜 여물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벚꽃은 거의 만개한 상태다. 이 늙은 고목에서 꽃잎이 분분히 날릴 때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가장 인상적인 건 작은 연못 옆에 있는 벚나무다. 실타래처럼 배배 꼬인 굵은 둥치가 살아낸 세월을 웅변하는 듯하다. 거무튀튀한 수피 위로 연분홍의 가녀린 꽃잎들이 겹겹이 매달려 있다.●무지개 다리 ‘홍교’ 건너 욕심도 노여움도 버리고 연못의 이름은 극락영지(極樂影池)다. 이름 그대로 연못엔 극락암을 둘러싼 영축산 풍경이 그대로 잠겨 있다. 연못 위로는 어여쁜 무지개다리, 홍교(虹橋)가 가로놓여 있다. 홍교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는 경봉(1892~1982) 스님이 1962년 조성했다. 다리의 크기는 작아도 담긴 뜻은 크다. 세속의 세 가지 독, 이른바 탐진치(貪瞋癡, 욕심·노여움·어리석음)를 버리고 극락에 이른다는 다리다. 연못, 벚꽃 등과 어우러진 자태가 속된 곳을 넘어 성스러운 세상으로 오르는 다리처럼 보인다. 홍교 너머로는 극락암 중심 전각인 무량수각(극락전), 설법전인 영월루 등이 주르륵 이어져 있다. 부속 암자라고는 해도 어지간한 사찰보다 큰 규모다. 경내 가장 오른쪽에 삼소굴(三笑窟)이 있다. 경봉 스님이 통도사 방장으로 30여년간 주석하며 기거했던 곳이다. 대가람의 방장이 머물던 집치고는 여염의 사랑채처럼 작고 아늑하다.무량수각 뒤는 단하각이다.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이다. 나반존자는 홀로 이치를 깨닫고 도를 이뤘다는 성자다. 단하각 가는 소로 주변엔 겹동백이 무시로 피었고, 늙은 산수유도 한껏 흐드러졌다. 찾는 이 드문 절집 뒤란에도 이처럼 봄이 무르익고 있다. 통도사 경내에도 벚나무가 몇 그루 있다. 절집의 오래된 당우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선사하고 있다. 일주문 옆 벚나무의 자태가 멋지다. 저물녘 범종 소리 울릴 때 꽃잎이 비처럼 흩날린다면 그야말로 선경이겠다.●말로만 들었던 쌍계사 십리벚꽃길 직관 하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말로만 들었던 십리벚꽃길을 ‘직관’하러 가는 길이다. 쌍계사가 목적지다. 사실 쌍계사는 피안앵이라 할 만한 벚나무가 없다. 대신 절집까지 가는 길이 빼어나다. 그 길이 바로 ‘십리벚꽃길’이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과 전남 구례를 잇는 섬진강대로(19번 국도). 총연장이 얼추 60㎞ 가까이 되는 이 도로의 가로수 대부분은 벚나무다. 봄의 이 길을 백리벚꽃길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 길은 아주 당연히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십리벚꽃길은 이 백리벚꽃길에서 떨어져 나온 1023번 지방도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 구간을 이르지만, 벚꽃길은 위로 칠불사 갈림길까지 한참을 더 이어진다. ●환장할 이 풍경 올해는 ‘드라이브 스루’로 화개천 양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졌다. 수령 40~50년을 헤아리는 늙은 벚나무들이 도로 양쪽으로 빼곡하다. 화개(花開)라는 지명처럼 길가의 크고작은 벚꽃들이 일제히 꽃술을 열었다. 객들에게 꽃을 뿌려 산화공덕이라도 하려는 건지. 이 풍경 보고 환장하지 않는다면 정말 사람도 아니다. 이제 꽃 피어 꽃 터널이 됐으니 조만간 꽃이 지면 꽃길이 될 터다. 이런 환장할 풍경이 십리나 이어진다. 그러니 벚꽃 필 무렵에 이 도로를 찾았다면 차량 정체는 각오해야 한다. 아쉽지만 이곳 역시 ‘드라이브 스루’로 즐기는 게 좋겠다. 워낙 풍경이 빼어나다 보니 운전을 하며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는 이들도 종종 본다. 촬영일랑 부디 블랙박스에 맡기고 운전에만 집중하시길.십리벚꽃길 끝자락에는 벚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집이 들어앉아 있다. 두 계곡의 물길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절집, 쌍계사다. ‘벚꽃길 엔딩’에 딱 어울릴 단아한 자태가 일품이다. ●쌍계사 문 하나씩 넘다보면 깨달음의 세계로 쌍계사는 개창 연대가 신라 성덕왕 21년(722)까지 거슬러 오르는 고찰이다. 나라 안 대부분의 절집이 그렇듯, 쌍계사 역시 임진왜란 등의 여러 전란을 거치며 무너지고 중건돼 오늘에 이른다. 쌍계사는 명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덕에 가람 배치가 조밀하고 단아하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절집 초입에 서면 비쩍 마른 벚나무 너머로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이 나란히 서 있다. 문 사이를 돌아 흐르는 작은 계곡 위엔 아담한 구름다리를 놓고 대숲도 조성했다. 문을 하나씩 넘다 보면 현실 세계에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쌍계사엔 신라시대 명필로 꼽히는 고운 최치원(857~?)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매표소 근처의 두 바위에 각각 새겨진 ‘쌍계’, ‘석문’ 글씨, 대웅전(보물 500호) 앞 계단의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의 비문 등이 그의 작품이다. 1200년을 헤아린다는 화개 차의 역사도 이 탑비가 근거가 됐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쌍계사 근처에 심었다는 기록이 이 탑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섬진강 ‘백리벚꽃길’ 화양연화 속으로 이들 외에도 하동 일대에 최치원의 고사가 전하는 곳이 많다. 범왕리 푸조나무는 최치원이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움이 터 자랐다는 노거수다. 둥치가 어른 여럿이 팔을 뻗어야 닿을 수 있을 만큼 크다. 푸조나무 건너편에는 세이암이 있다. 최치원이 벼슬아치들의 비루한 말을 듣고 귀(耳)를 씻었다(洗)는 너럭바위다. 하동의 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화개천변의 야생차밭이다. 이제 겨우 신록이 돋는 나무들 사이에서 야생차밭은 유난히 짙푸른 봄의 색을 펼쳐낸다. 벚꽃처럼 화사하지는 않아도 가지런한 조형미만큼은 일품이다. 쌍계사에서 칠불사에 이르는 구간에 야생차밭이 많다. 이제 섬진강의 화양연화를 즐길 차례다. 하동에서 구례까지 이어지는 길은 흔히 백리벚꽃길이라 불린다. 이 길 위에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악양 들판, 최참판댁, 하동송림(천연기념물 445호), 운조루 등의 명소가 매달려 있다. 요즘 하동 들녘의 주인은 배꽃이다. 매화가 진 자리마다 희디흰 배꽃들이 빼곡하다. 하동 쪽엔 섬진강을 따라 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이른바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다. 하동송림부터 섬진교까지 50㎞ 정도 이어져 있다. 허리춤에 섬진강을 매달고 벚꽃, 배꽃 만개한 길을 걷는 맛이 아주 각별하다. ●수양벚꽃 흐드러진 ‘화훼사찰’ 순천 선암사 순천 쪽에서는 선암사를 빼놓을 수 없다. 봄이면 ‘화훼사찰’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진다. 선암사가 사람들로 북적일 때는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등 늙은 매화들이 꽃을 피울 때다. 요즘은 굳이 사회적 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이맘때 선암사 무량수각 앞에는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벚나무들이 가지 끝에 연분홍 꽃등불을 매달았다. 볕 받아 반짝이는 꽃술들이 꼭 별을 닮았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와 마주한 송광사도 ‘꽃절집’이다. 진입로의 벚꽃터널이 볼만하다. 늙은 벚나무마다 거무튀튀한 가지 끝에 싱싱한 연분홍 꽃술을 매달았다. 송광사에서 주암호를 건너면 보성 땅이다. 호수를 따라 펼쳐진 해토머리 풍경이 그윽하다. 호수 중간쯤에 대원사로 드는 진입로가 있다. 이 길 역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름을 올렸다. 진입로 초입에서 대원사까지 5㎞ 남짓한 구간에 왕벚나무가 빼곡하다. 절정이라 하기엔 이르고 이제 막 꽃술을 여는 참이다. 벚꽃길 끝자락에 대원사가 있다. 송광사의 말사로, 머리로 치는 왕목탁 등 해학 넘치는 볼거리들이 많다. 절집 초입의 티베트 박물관은 티베트 불교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티베트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내년에도 경북 사찰에 꽃은 피리니 피안앵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절집들은 사실 경북 지역에도 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라 차마 찾아가시라 권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경주 쪽에선 기림사가 꼽힌다. 오래전엔 불국사를 말사로 뒀을 만큼 규모가 컸던 절집이다. 뜨락의 키 낮은 벚나무와 대적광전 등의 소박한 가람이 보기 좋게 어우러진다. 기림사 벚나무들은 꽃을 늦게 틔우는 편이다. 경주 시내 벚꽃들은 거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기림사의 벚나무들은 이제 겨우 꽃잎 몇 장 내민 정도다. 이번 주말이나 다음주 초반께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바이러스 창궐의 진원지 중 한 곳이었던 청도의 운문사도 절집 주변의 벚꽃 풍경이 빼어나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다운 정갈한 경내 풍경과 벚꽃이 어우러져 특별한 봄을 선사한다. 김천 직지사는 대항면사무소에서 직지사 공영주차장까지 사찰 진입로에 줄지어 흩날리는 벚꽃이 절경이다. 직지사 인근의 연화지는 밤 벚꽃놀이로 이름이 높다. 충청권에서는 서산 개심사 왕벚꽃이 많이 알려졌다. 대부분 지역의 벚꽃이 한풀 꺾인 뒤에야 꽃을 피우기 때문에 4월 중하순 무렵이 절정이다. 공주 신원사도 대웅전과 석탑 앞을 외호하는 듯 선 늙은 벚나무 세 그루가 특별한 정취를 전한다. 글 사진 양산·하동·순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십리벚꽃길 주변에 독특한 음식점들이 많이 생겼다. ‘찻잎마술’은 녹차를 활용한 한정식을 내는 집이다. 녹차 소스로 쪄낸 삼겹살찜 등이 별미다. 찻집도 많이 생겼다. ‘비주제다’, ‘윤슬당’, ‘쌍계명차’, 쌍계사 앞 ‘단야찻집’ 등이 알려졌다. 통도사 쪽에선 메밀국수를 맛봐야 한다. ‘삼정메밀소바’, ‘금호정’ 등이 유명하다. 선암사 정문 아래 ‘초원식당’은 보리밥이 맛있다. 2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맛볼 수 있는 저 유명한 굴목이재 ‘보리밥집’에 견줄 만큼 맛깔스런 보리밥을 낸다.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한 칠불사는 코로나19로 산문을 폐쇄했다. 이 일대의 봄 풍경은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아자방은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이나 갔다는 신비의 온돌방이다.
  • [길섶에서] 춘래불사춘/오일만 논설위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그 의미가 더욱 실감 나곤 했다. ‘춘래불사춘’은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 때문에 유래됐다고 한다.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는데 흉노와의 화친 정책에 의해 흉노왕에게 바쳐진 비운의 여성이다. 원제는 수많은 후궁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흉한 인물을 골랐는데 하필 그녀가 왕소군이었다. 뇌물을 받지 못한 화상이 앙갚음으로 그녀를 추녀로 둔갑시킨 것이다. 황제와의 이별연에서 왕소군을 처음 본 원제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화상의 목을 쳤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로 풀어냈다. 흉노 땅에 봄이 왔지만 고향 땅의 봄 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왕소군의 애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남녘에서 전해 온 벚꽃 소식이 서울까지 북상한 요즘, 아파트 내 벚꽃들이 하루 새 기지개를 켜는 봄날이다. 매년 이맘때쯤 벚꽃놀이 인파가 꼬리를 물었던 여의도 윤중로에 올해는 인적이 끊겼다. 봄은 왔지만 온전한 봄의 정취를 느낄 여유조차도 없다. 황량한 흉노의 봄을 맞는 왕소군의 마음이 어렴풋이 전해진다. oilman@seoul.co.kr
  • [포토] ‘봄이 왔다’

    [포토] ‘봄이 왔다’

    10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근처 유채꽃밭에서 관광객들이 훌쩍 다가온 봄 정취를 즐기고 있다. 뉴스1
  • 축제 취소에도 발길 이어지는 매화마을

    축제 취소에도 발길 이어지는 매화마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매화축제가 취소된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에 1일 오후 관광객들이 찾아와 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매화축제는 오는 6일부터 열흘간 개최할 예정이었다. 광양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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