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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8) 청송 관리 왕버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8) 청송 관리 왕버들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이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을 스위스 태생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책 ‘여행의 기술’에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아름다움을 제 안에 온전히 담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완성되는 사진보다 데생이 더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바라봐야 하기에 자연스레 마음 깊숙이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는 데에 근거한 이야기다. 그는 마침내 “그림을 배우기 위해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에 대한 에세이를 마무리했다. ●사라진 청송 지역의 자랑, ‘만세송’ “이 자리에 왕버들과 함께 서 있던 소나무가 청송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라는데 그게 없으니 아무래도 허전해요. 더구나 청송 지역의 상징이 소나무라잖아요.” 시간의 흐름을 그림에 담아내는 젊은 화가 이장희(39)씨가 청송 관리 왕버들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을 그림에 담아낸 뒤 던져 온 이야기다. 천연기념물 제193호인 청송 관리 왕버들은 그의 이야기처럼 바짝 붙어 있던 ‘만세송’과 함께 바라보는 느낌이 독특한 나무였다. 왕버들과 소나무를 그리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이 마을에서 두 나무의 어울림은 절묘했다. 넓은 품을 가진 왕버들 곁에서 소나무는 곧게 뻗은 줄기가 훌쩍 솟구친 채 개울가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왕버들이 초록 잎을 내려놓으면 소나무의 푸름이 도드라졌고 봄이 돼 왕버들에 물이 오르면 소나무는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잦아든 채 다소곳이 왕버들 가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처럼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문화재청에서 왕버들 앞에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근사한 입간판을 세우자 청송군에서는 ‘만세송’(萬歲松)이라는 소나무의 이름을 또렷이 새긴 비석을 소나무 앞에 보란 듯이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청송의 자랑이기도 했던 만세송이 싹둑 잘린 밑동만 남긴 채 왕버들 곁을 떠났다. 뎅그렇게 만세송 표지석만 남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풍경이 화가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 그리워 “2008년 봄이었죠. 만세송에 좀나무병이 들었어요. 반드시 살릴 생각으로 대여섯 달 동안 애를 썼지만 방법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베어냈지요. 만세송 표지석은 진작에 철거하려 했는데 아쉬움이 남아 미적거리다가 여태 그대로 두게 된 겁니다.” ‘군목’(郡木)으로 보호하던 나무를 잃게 돼 아쉽다며 청송군청 문화관광과의 문화재담당 우용훈(52)씨도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군청에서는 만세송에서 받은 솔씨로 후계목을 키워 만세송이 서 있던 자리 옆에 심어놓았지만 아직 어린 나무에 불과한 탓에 살아있을 때의 만세송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만세송의 부재가 더 안타까운 것은 왕버들과 한 쌍을 이루며 전해 오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 이 마을에는 채씨(蔡氏)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자 처녀를 좋아하던 한 총각이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기를 청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혼사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한 제안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총각은 처녀와 이별 인사를 나누며 이 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나무를 보며 자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심은 나무가 지금의 관리 왕버들이다. 처녀는 혼인을 위해 목숨까지 던진 총각의 열정에 감동해 그를 기다리며 왕버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나무는 부쩍부쩍 자랐고 얼마 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총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녀는 타오르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채 그새 훌쩍 자란 나무에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처녀가 죽은 자리 곁에는 얼마 뒤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처녀의 한 많은 죽음을 지켜주었다. 만세송이 그 나무다. 전설처럼 왕버들과 만세송은 처녀 총각이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한 인연을 나무가 되어 이루는 듯한 형상으로 오랫동안 사이좋게 그 자리를 지켜 왔다. ●원래 크기의 절반을 잘라낸 고통도 겪어 마을 어귀 길목에 서 있는 당산나무로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에 꼬박꼬박 당산제를 지낸 왕버들은 문화재청에서 공들여 관리하고 있다. 키 10.2m, 가슴높이 줄기둘레 6.5m에 이르는 관리 왕버들은 특히 사방으로 뻗은 가지에서 돋은 푸른 잎이 무성해 단아하고 무척 건강해 보인다. 그러나 이 나무 역시 만세송 못지않은 시련을 겪었다. 나무는 원래 이보다 훨씬 컸다. 1967년에 관리 왕버들의 키는 지금의 두 배 가까운 18m나 됐다고 한다. 당시 서쪽으로 난 큰 줄기에 들어찬 벌집을 제거하고 썩은 줄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무 줄기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그로 인해 키가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몇 차례의 수술로 건강은 회복할 수 있었다. 줄기 중심부에는 여전히 당시의 고통을 간직한 수술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나무 앞에 서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던 꽃다운 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처녀의 한을 달래듯 솟아오른 한 그루의 소나무도 떠오른다. 줄기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던 수난은 물론이고 곁에 붙어 있던 만세송을 떠나보내며 왕버들이 겪었을 이별의 깊은 통증도 느껴진다. 나무줄기를 따라 흩어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면글면하는 화가의 마음속 통증까지 더불어 느낄 수밖에 없는 관리 왕버들의 가을 풍경이다. 글 사진 청송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경북 청송군 파천면 관리 721. 중앙고속국도의 서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안동시 길안면을 지나 지방도로 914호선을 이용해 동쪽으로 16.5㎞ 남짓 가면 청송군에 닿는다. 국도 31호선과 만나는 청송교차로가 나오면 직진해 교차로를 건넌 뒤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개울을 건너서 청송시외버스터미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7㎞ 더 간다.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나오고 교차로 모퉁이의 빈터에 나무가 있다. 나무 바로 앞에는 자동차를 세울 수 없으므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동차를 세우고 걸어 나오는 게 좋다.
  • 장례비 없어 가족도 시신 포기… ‘쓸쓸한 죽음’ 는다

    # 지난달 2일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고시원 3층에서 백모(67)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뒤로 누인 모습이었다. 외상은 없었다. 백씨는 평소 기침이 잦았다. 담당 의사는 심혈관계 질환 등으로 인한 급사로 추정했다. 병원에 안치됐지만 백씨의 시신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죽을 때도, 죽은 뒤에도 철저히 혼자였다. 화장한 백씨의 시신은 경기 파주시의 서울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으로 보내졌다. 구에서 무연고 변사자 공고를 내고 유골 인수를 알렸지만 찾는 이는 없었다. # 지난 14일에는 성북구 하월곡동의 다가구주택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혼자 있던 송모(73·여)씨가 숨졌다. 24㎡의 반지하방이었다. 송씨는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남편은 2개월 전 폐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였던 송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를 여력이 없어 시신 포기 각서를 쓰고 구에 장례를 맡겼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자녀들과는 교류가 없었고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경찰은 송씨를 부검하고 화재 원인과 자살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 가족 관계 해체와 경제난으로 인한 도심 속 쓸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단상이다. 16일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서 발생한 무연고 사망은 301건으로 2009년 206건, 2010년 273건에 이어 꾸준히 늘고 있다. 무연고 사망이 발생하면 각 지방자치단체는 사망자의 배우자와 자녀, 부모 등의 순으로 연고자를 찾는다. 한 달이 지나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거나 가족이 시신 인수를 포기하면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한다. 이렇게 홀로된 시신은 매장이나 화장을 한다. 10년 동안 찾아가지 않은 시신들은 한데 모아 공동묘에 매장한다. 무연고 사망이 발생하는 이유는 전통적 가족 관계의 붕괴와 경제난이다. 시 장사문화팀 관계자는 “장례 비용이 없어 수습을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 간에 오랜 기간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가정사가 있어 시신 인수를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30일 충북 제천의 원룸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숨진 최모(36)씨 역시 유족이 가족 관계 단절을 이유로 시신 인도를 거부했다. 전문가들은 지역 사회망 복원을 강조한다. 현외성 경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족과 관계가 끊어져 혼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마을 단위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면서 “노인돌봄서비스 등 경제적, 제도적 지원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경 나사렛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고독사는 노인뿐 아니라 은둔형 외톨이 등의 청소년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장기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김용 세계銀 총재 “비관적 경제전망 벗어나는 유일한 대안은 연대”

    연대(Solidarity).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1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경제발전공유사업(KSP) 지식공유포럼에서 한 ‘개발의 필수과제와 결속·연대’란 연설에서 32번이나 쓰며 강조한 단어다. 그는 불확실성·상호의존성 시대에 비관적 경제 전망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 ‘연대’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절대빈곤율이 지난 10년간 매년 1%씩 줄다가 최근 경기침체로 감소세가 둔화하고 있다는 우려도 했다. 그는 ‘모든 공동체와 국가들은 상호 연결돼 한쪽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다른 쪽에도 영향을 준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발언을 들며 “경제 성장은 연대와 성장 중 택해야 하는 제로섬게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또 지난해 중동을 휩쓴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을 언급하며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글로벌 번영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은 사회보장프로그램을 도입해 불평등을 바로잡았고 브라질은 사회통합정책을 통해 지니계수를 줄였다.”면서 연대에 기반을 둔 경제개발정책을 제안했다. 일자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김 총재는 “일자리는 사람의 자존감이나 사회적 결속과 연결된 문제”라면서 “정부가 신뢰를 회복해 민간에서 원하는 일자리를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 총재는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세계은행 로고와 슬로건(Our Dream is a World Free of Poverty)이 새겨진 넥타이를 전달하며 한국어로 넥타이에 새겨진 로고의 뜻을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넥타이를 선물 받은 뒤 “가난이라는 단어가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편 세계은행은 내년 한국에 지역사무소를 연다. 우리나라가 국제금융기구를 유치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WB에 협력기금 9000만 달러를 출연할 방침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삼성·LG ‘40년 전쟁’] 이병철 “우리도 전자산업 할라카네”… 이 한마디로 ‘전쟁’ 불붙다

    [삼성·LG ‘40년 전쟁’] 이병철 “우리도 전자산업 할라카네”… 이 한마디로 ‘전쟁’ 불붙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인 삼성과 LG는 전자를 중심으로 통신, 화학, 금융 등 주요 사업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라이벌 구도를 이어 왔다. 두 그룹의 역사는 상대방과의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을 만큼 지난 40여년간 각 분야에서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펼쳐 왔다. ●구인회 회장, 삼성과 동양방송 동업관계도 끊어 그(이병철 회장)는 삼성전자의 설립 구상 단계이던 1968년 봄,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GC)에서 구(인회) 회장을 만났다. “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산업을 할라카네.” 이 회장은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가는 투로 한 마디 던졌으나 구 회장은 벌컥 화부터 내며 쏘아붙였다. “이익이 남으니까 할라 카는 거 아이가. 사돈이 논을 사믄 배가 아프다 카더마는 옛말이 그른기 하나도 없는 기라.” 이 회장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 속이 뒤집힌 구 회장은 작별인사도 없이 벌떡 일어서 등을 돌렸고 이 회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구 회장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먹서먹하게 돌아선 두 사람은 이후 동양방송(현 KBS2)의 동업관계도 끊고 말았다.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이용우 저) “그쪽에서 꼭 그리 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서로 자식을 주고 있는 처진데 우짜노 말이다. 한 가지 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점을 노려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것 같은 기라. 그러나 나는 내 할 일만 할란다. 나도 설탕 사업 할라카면 못 할기 있나. 하지만 나는 안 한다. 사돈이 하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 기다.”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구인회)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다. 동양방송을 공동 설립하고, 사돈까지 맺으며 인생의 오랜 시간을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1968년 삼성이 일본 산요와 합작을 통해 삼성전자 설립을 준비하면서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해 첫 국산 라디오 ‘A-501’을 히트시키면서 국내 가전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LG로서는 삼성의 도전이 달가울 리 없었다. 당시 LG는 “삼성이 일본 업체를 끌어들여 국내에 막 움트기 시작한 전자산업의 싹을 제거하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부는 “생산물량 전부를 해외에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허가했다. 흑백 TV 시장에서는 LG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삼성은 1981년 컬러 TV 시대 개막과 함께 절전형 프리볼트 TV인 ‘이코노빅’을 내놓아 승기를 잡는다. 전력난에 시달리던 당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제품을 내놓으며 삼성은 1984년 국내 TV시장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오르게 된다. LG는 이때부터 삼성의 신기술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서로 물고 물리는 혈투를 벌인다. 1992년 삼성전자가 위성수신 컬러 TV를 선보이자 며칠 지나지 않아 LG도 똑같은 기능의 제품을 내놓았고, 1993년 삼성이 원적외선 바이오 TV를 출시하자 한 달 뒤 원적외선에 음이온까지 발생시키는 TV로 맞대응하는 식이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대형 TV 수요가 생겨나던 1995년 삼성이 ‘명품’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내놓자 LG는 ‘아트비전’으로 응수했다. ●반도체·금융 분야에서 양사 명암 엇갈려 흑백 TV에서 시작된 양사의 40년 전쟁은 컬러 TV, 액정표시장치(LCD) TV,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 등을 거치며 지금은 전자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됐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새로운 라이벌전이 시작돼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모두 글로벌 1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올레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분야도 두 업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이렇듯 두 기업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며 경쟁하고 있지만, 현재 두 그룹의 매출 규모는 삼성(314조원)이 LG(142조원)를 두 배 이상 앞선다. 2003년 GS, LS, LIG그룹과 분리되고, 외환위기 이후 LG가 반도체 및 금융 사업 분야를 포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삼성전자가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 반도체 신화를 써 나가자 LG도 곧이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며 삼성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LG의 반도체 사업은 적자로 어려움을 겪다 외환위기 당시 ‘빅딜’을 통해 현대에 사업을 넘겨주게 된다. 금융 분야도 마찬가지. LG카드는 ‘위기가 기회’라는 판단에 따라 외환위기 당시 100만명의 신규 회원을 확보하는 등 저돌적인 경영에 나서 1998년 카드업계 1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신용카드 연체가 급증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닥쳤다. LG그룹은 이미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마친 뒤여서 LG전자·LG화학 등 계열사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LG카드 최대 주주인 구본무 회장이 직접 나서 자신이 갖고 있던 LG카드, LG투자증권, ㈜LG의 지분을 담보로 내놓고 나서야 어렵사리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 LG는 당시 사건을 계기로 금융 분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삼성이 치고 나가면 LG가 곧바로 따라붙어 삼성과 LG의 최근 양상을 살펴보면 ‘삼성이 먼저 치고 나가면 LG가 곧바로 따라붙는’ 식의 경쟁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첼시-풀럼) 후원과 프리미엄 브랜드 휴대전화(애니콜-싸이언) 개발, 제품별 개별 브랜드 전략을 통한 가전 마케팅(파브-X캔버스)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 vs LG 그들의 전쟁은 계속된다’의 저자인 박원규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는 “브랜드 전쟁에서는 일단 삼성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라면서 “외환위기 이후 삼성과 LG의 실적 차이가 마케팅·브랜드 투자의 차이로 이어지면서 격차가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가정이긴 하지만 일부에서는 LG가 외환위기 이후에도 반도체와 금융 분야를 계속 가져가고, 2003년 GS와 LS, LIG 등의 분리를 조금 더 늦췄다면 지금의 삼성과 LG의 구도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방은진 감독 “배우는 한마디 칭찬에 날개 다는 사람들 배우 출신 장점 최대한 살려야죠”

    방은진 감독 “배우는 한마디 칭찬에 날개 다는 사람들 배우 출신 장점 최대한 살려야죠”

    20대에도 그는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비련의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냘픈 체구에서 나온 울림 있는 목소리에는 강단과 카리스마가 묻어났다. 남다른 삶의 궤적에서 비롯됐을 터다. 여고 시절 그는 연극배우를 동경했다. 어린 마음에도 연극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울 것 같아 대학은 의상학과를 다녔다. 졸업하고 직장 생활도 했지만 사표를 던지고 민중극단을 찾아갔다. 스물네 살 되던 해 ‘처제의 사생활’(1989)로 데뷔했다. 연극영화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금방 주목받았다. 하지만 “연극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태백산맥’(1994)을 통해 충무로로 움직였다. 이듬해 박철수 감독의 ‘301·302’로 웬만한 여우주연상은 모두 휩쓸었다. “그때 상업 영화 출연 제안이 쏟아졌는데 마다했다. 외려 ‘지하철 1호선’ ‘햄릿’ ‘리어왕’ 등의 연극을 병행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대중의 사랑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고단한 길을 택했다. IMF 외환 위기가 오면서 출연하려던 몇몇 작품이 엎어졌다. 그사이 나이가 들었고 대단히 예쁘지도 않은 내가 여주인공을 하기에는 애매했다. 배우로서의 포지션이 흔들렸다.” 그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낯선 영화 연기를 잘하고 싶어 카메라와 렌즈를 가까이 하다 보니 연출이 눈에 들어왔다. 1999년 김진한 감독의 단편영화 ‘장롱’에서 주연은 물론 조연출을 맡아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깊이 빠져들었다. 박철수 감독이 조경란의 소설 ‘식빵 굽는 시간’을 건네며 각색과 연출을 권유한 것도 그 무렵이다. 또 다른 작품의 각색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상업 영화의 장벽이 이렇게 높은 건가. 의심과 후회의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출사표를 던졌는데 물러설 순 없었다. 원칙주의자라 자신과 타협을 못 한다. 한 작품이라도 완성해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정신적 지주인 이창동 감독이 “각색 말고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 보라.”고 권유했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감수해 주며 “급하게 생각하지 마. 넌 마흔이지만 난 마흔셋에 데뷔했다.”고 다독였다. 고진감래라고 2005년 영화 ‘오로라공주’를 내놓았다. 감독을 준비한 지 꼭 6년 만, 불혹의 나이에 바라던 입봉을 했다.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연출력은 평단의 지지를 끌어냈다. 또 94만여명의 관객을 모았을 만큼 대중 반응도 괜찮았다. 방은진(47) 감독 얘기다. 그가 7년 만에 ‘용의자X’(오는 18일 개봉)를 들고 관객들과 만난다. ‘용의자X’는 일본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셀러 ‘용의자 X의 헌신’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1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수학 천재였지만 평범한 고교 수학 교사로 사는 석고(류승범)는 이웃집 여자 화선(이요원)을 마음에 품는다. 어느 날 밤, 화선이 자신을 괴롭히던 전 남편을 우발적으로 죽인다. 석고는 화선을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한다. 빈틈없는 알리바이 때문에 고민하던 담당 형사 민범(조진웅)은 자신의 고교 동창 석고가 화선의 옆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범의 후각이 발동하면서 영화는 놀라운 결말로 치닫는다. 방 감독은 원작 소설의 팬이었다. “이 소설 죽인다. 누나가 했으면 좋겠다.”는 ‘오로라공주’의 최영환 촬영감독 말을 듣고 책장을 펼친 뒤 단박에 반했다. 얼마 뒤 일본에서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시나리오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명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준비하던 영화가 두 편쯤 투자 단계에서 엎어져 좌절하던 방 감독에게 지난해 봄 CJ엔터테인먼트가 연출을 제안한 것이다. 방 감독과 CJ의 기획1팀은 일본판 영화 ‘용의자X의 헌신’과 차별화하기 위해 원작 소설에 메스를 들이댔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석고)와 물리학자 유카와의 두뇌 싸움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 달리 방 감독은 석고의 화선에 대한 헌신적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다. 7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출산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영화 초중반 템포가 떨어진다거나 세 인물의 심리와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 정적으로 흘렀다는 지적도 알고 있다. ‘오로라공주’ 때와는 또 다른 완급 조절의 아쉬움이 있다. 처음 크랭크업 했을 때만 해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관객 반응이 두렵다. 후후후.” 배우 출신, 게다가 손꼽히는 연기파였던 만큼 배우들은 방 감독과 작업하는 것을 편하게 여긴다. “좀 다른 거 없을까.”, “한번 더 가볼까.”란 뜬구름식 주문이 아니라 딱 꼬집어 지시하기 때문이다. 조진웅은 제작 보고회에서 “선배라서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단점은 너무 긁어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에 대해 방 감독은 “배우들과 충분한 대화와 리허설을 하고 나서 촬영에 들어가면 순간에 나오는 감정을 담으려고 한다. 테이크를 더할수록 감정이 익어버려 기계적으로 나오기 쉽다.”고 설명했다. 배우 출신이라는 점은 양날의 칼이다. “‘오로라공주’ 때는 딱 보면 배우가 얼마큼 더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테이크(중간에 끊지 않고 촬영한 연속 화면)를 더 안 가고 끝내 버렸다. 그땐 연기자 출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 감독은 배우들의 최대치 이상을 끌어내야 한다. 당장은 징글징글해도 그래야 배우가 또 작업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배우 출신이란 꼬리표는 어떻게 해도 뗄 수가 없다. 연출만 했던 사람들의 막연한 디렉션에 비해 디렉션이 구체적이라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하지만 역으로 배우의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많이 배우들에게 물어봤다. ‘난 지금 컷이 괜찮은데 어때?’, ‘그럼 오케이한다’라고 배우를 신뢰한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줬다. 경험상 배우들은 한마디 칭찬에 날개를 달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배우 출신이란 걸 최대한 장점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활짝 웃었다. 충무로에서 입봉은 하늘에 별따기다. 더 어려운 건 두 번째 영화를 찍는 일이다. 하늘에 별 딴 사람끼리 경쟁하기 때문이다. 통상 감독들의 10~15%만 행운을 쥘 수 있다. 첫 영화까지 6년, 두 번째 영화까지 7년이 걸린 방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은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씨줄날줄] 청계천 소나기/임태순 논설위원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는 말이 있다. 양이 적어 별로 위력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윤초시 손녀딸의 풋사랑은 가을 소나기로 마감한다. 황금빛 들판을 가로질러 산 밑으로 간 소녀와 소년은 가을 꽃을 꺾으며 송아지를 타고 놀다 소나기를 만나 수숫단 속으로 피한다. 비가 그친 뒤 소녀는 불어난 도랑물을 만나 소년의 등에 업혀 건너다 옷에 물이 든다. 소년은 뒤늦게 가을 소나기에 병이 도진 소녀가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청량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소나기의 속성과는 달리 소설 속의 소나기는 묘한 여운을 남겨 더욱 기억 속에 남는다. 소나기는 짧은 시간 국지적으로 내리다 그치는 비를 말한다. 기상청은 그러나 강우 형태가 아니라 구름의 모양으로 소나기와 비를 구분한다. 비가 저기압의 비구름대에 의해 넓은 지역을 촉촉히 적신다면 소나기는 고기압 가장자리에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소나기구름에 의해 뿌려진다. 대기 불안정으로 내리는 소나기는 주로 여름에 발생하며 천둥, 번개를 동반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2007년부터 올해까지 최근 6년간 소나기는 모두 123회 내린 가운데 71%인 87회가 여름에 집중됐다. 반면 가을과 봄 소나기는 18, 17회로 엇비슷했으며, 겨울에는 2008년 한 차례밖에 없었다. 엊그제 서울에 가을 소나기가 내려 청계천에서 비상상황이 발생했다. 점심이 지나 15분 동안 12㎜의 폭우가 내리자 청계천 수문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물이 불어나 산책하던 시민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소낙비가 금방 그친 데다 소방대원들이 구조에 나서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비를 피해 다리 밑으로 간 시민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대피하라는 안전요원의 말에 “당신 같으면 나오겠느냐.”고 했다고 하니 만성화된 안전불감증에 걱정이 앞선다. 기상이변은 강수량, 적설량 등의 기록을 100년 만에 갈아치울 정도로 점점 극악스러워지고 있다. 가을 소나기는 지난해는 없다가 올해 처음 발생한 것이다. 기상이변이 심해지면 가을 소나기가 더욱 잦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청계천 출입통제는 여름이 아니라도 언제 어느 때든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민들은 물론 당국도 돌발적인 비상상황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가을비가 내리면 추워져 가을비는 내복 한벌이라고 한다. 차제에 겨울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김장훈, 싸이와 화해 이틀만에 “한국을…”

    김장훈, 싸이와 화해 이틀만에 “한국을…”

     지난 10일 싸이와 불화설을 딛고 전격 화해한 김장훈이 한국 땅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김장훈 측은 12일 “건강이 회복되면 타이완과 중국 상하이로 출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년 봄까지 한국 활동을 마무리한 뒤 미국과 중국에서 20여개 도시를 방문하는 투어 공연을 열 예정이다.   중국 최대 방송그룹인 상하이미디어그룹(SMG)이 김장훈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사업부 전체 연출 감독을 맡아 달라는 것이 SMG측의 요청이다. 김장훈은 한국을 떠나 활동할 생각이 없었지만 최근 일련의 사태로 인해 이 제안을 신중히 검토 중이다.  김장훈은 “만일 중국 방송사의 공연 연출총괄을 맡게 된다면 3년 정도의 외유를 생각하고 있다. 그 기간 안에 공연 인프라 기반을 잡고 떠나겠다. 중국의 공연 꿈나무들에게 나의 모든 노하우를 알려줘 연출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장훈의 소속사는 한국을 떠나 활동하려는 김장훈에게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싸이와의 화해로 앙금이 풀리면서 한국 활동을 계속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김장훈은 “내 인격의 한계와 바닥을 봤다. 자신에게 많은 실망을 했다.”면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계속 수면제 및 공황장애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년간이라도 떠나 마음을 비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을 떠나 있어도 독도 및 지속적으로 돌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관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중국과 미국 공연을 통해 공연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 것이며 자신도 있다. 공연과 나눔을 섞어 신개념 한국형 공연을 완성하고 돌아오겠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배용 역사산책]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이배용 역사산책]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요즈음 대선 주자들이 활발하게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정말 국가의 명운이 달린 최고지도자를 뽑는 만큼 신중하게 선택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르게 열어 가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임금이 즉위하면 종묘사직에 고한다는 말이 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여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종묘는 하늘에 올라가신 왕실의 조상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고, 사직은 사단과 직단의 두 단으로 조성된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즉, 사단(社壇)은 국토안보를, 직단(稷壇)은 풍년을 기원하는 네모난 단이다. 바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종묘를 통해서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곳이고, 사직을 통해서는 백성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국토안보의 임무와 오곡을 풍성하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는 두 가지 기능이 임금이 해야 할 필수 덕목인 점을 깊이 인식시키는 곳이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교의 이상과 정신을 가장 장중하면서도 소박하게 구현한 목조 건축의 우아한 절제미를 세계유산 심의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종묘에 들어가면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처음에는 태조와 현 왕의 4대조에 해당하는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4대가 넘어가면 정전 서편의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4대가 넘어도 공적이 뛰어난 왕들은 계속 정전에 모셨기 때문에 정전의 규모는 세월이 지나면서 늘어나 현재 정전(正殿)만 해도 19실 49위가 된다. 영녕전에는 16실 34위가 봉안되어 있다. 종묘의 대제(大祭)는 요즈음은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지내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러 제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사계절의 첫 달과 12월에 날을 잡아 1년에 5차례 지냈다. 사직의 제례로는 1년에 네 차례의 대향사와 정월의 기곡제, 가뭄 때의 기우제가 있었다.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이를 기리고 제례를 올려도 슬픔이 아니라 축제였다. 왜냐하면 하늘에 올라가신 분의 공적과 영혼이 이 땅에 이어져 나라의 번영을 이루어 준다는 기원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악의 장엄한 음악도 연주되고 문신의 춤, 무신의 춤도 이어진다. 종묘제례 때 줄을 지어 추는 춤을 일무(佾舞)라고 하는데 부드러움과 힘참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일무는 문덕을 칭송하는 문신의 춤인 보대평과 무공을 칭송하는 정대업으로 구분된다. 종묘제례악과 제례무는 유네스코 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종묘의 정전 앞 마당 끝에 공신당과 칠사당을 건립했다. 공신당에는 왕을 도와 공헌한 신하들의 신주가 83위 봉안돼 있다. 칠사당에서는 왕가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일 없이 잘 풀리도록 네 계절의 운행과 관련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봄의 사명(司命·삼명의 감찰을 주관)과 호(戶·출입을 주관), 여름의 조(?·음식을 주관), 가을의 문(門·출입을 주관)과 여(?·살벌을 주관), 겨울의 행(行·도로의 행작을 주관) 등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종묘와 사직에서 오늘도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은 조화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의 조화, 과거·현재·미래의 조화, 산 자와 죽은 자의 조화, 문무의 조화, 왕·신하·백성의 조화이다. 지도자는 하늘의 마음을 품고 순리의 정치를 해야 하며, 대자연을 통한 생명력의 존중과 백성의 삶을 챙기면서 꿈을 심어주는 책임의 정치를 구현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작은 것도 큰 것도, 약한 것도 강한 것도 함께 헤아리고 아우를 줄 아는 균형과 조화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 희망의 미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종묘와 사직에서 오늘도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은 조화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작은 것도 큰 것도, 약한 것도 강한 것도 함께 헤아리고 아우를 줄 아는 균형과 조화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 희망의 미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 산책로 순식간에 범람… 시민들 “두려웠다”

    산책로 순식간에 범람… 시민들 “두려웠다”

    10일 낮 서울 도심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청계천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산책하던 시민과 관광객이 고립되는 일이 발생했다. 청계천은 중국인과 일본인 등 서울을 찾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여서 예측 불가능한 기상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책이 요구된다. 관광객에 대한 대피 교육은 전무한 실정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청계천에 인접한 종로구 송월동 서울기상관측소의 측정 결과, 낮 12시 43분부터 오후 1시 10분까지 12.5㎜(시간당 25㎜)의 폭우가 내렸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비가 쏟아졌지만 인근의 빗물을 청계천으로 방류하는 수문이 열리면서 청계천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청계천 산책로가 범람했다. 갑자기 폭우가 내리자 청계천을 산책하던 시민과 관광객들은 광교와 광통교 등 청계천 다리 아래로 가 비를 피했다. 대부분의 시민과 관광객은 물이 계속 불어나 산책로가 잠기자 황급히 지상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고립됐다. 이날 오후 1시 5분쯤 청계4가 배오개다리 인근 청계천변 산책로에서 폭우로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청계천 물에 고립된 시민 5명은 서울시 직원 등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됐다. 서울시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3명이 구조됐다고 밝혔다. 회사원 최모(51)씨는 “청계천 산책로를 걷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광교 밑에 피해 있다가 마침 비가 그쳐 청계광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산책로가 물에 잠겨 시민들이 황급히 반대쪽으로 내달렸다.”면서 “오수와 섞인 빗물이 너무나 세차게 몰아쳐 두려울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경고방송 등은 나오지 않아 청계천 하류에 있던 시민과 관광객은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산책로가 물에 잠기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게릴라성 폭우는 주로 여름에 나타나지만 대기불안정으로 봄, 가을에도 가끔 나타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청계천 수문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비가 오면 지상의 빗물이 청계천으로 향하게끔 돼 있다.”며 “강수량이 많아 수압이 높아지면 수문은 자동으로 열린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문이 열릴 수 있다고 판단하면 대피 안내방송을 한다. 오늘은 짧은 시간에 수량이 급격히 불어나 안내방송 후에도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최씨는 “긴급히 대피하도록 하는 안내원들은 있었으나 대피방송을 듣지 못했다.”며 “위험천만한 상황이 갑자기 발생하는 만큼 경보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이태석 신부 ‘톤즈 브라스 밴드’ 한국공연

    작고한 이태석 신부의 ‘톤즈 브라스 밴드’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 밴드가 오는 16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한·아프리카 장관급 경제협력회의(KOAFEC)에서 ‘아리랑’과 ‘고향의 봄’ 등 관현악을 연주한다고 기획재정부가 10일 밝혔다. 아프리카 39개국의 장·차관 41명과 아프리카개발은행 카베루카 총재 등 국제기구 수장이 공연을 관람한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청계천이 두렵다…산책하던 시민 13명 갑자기

    청계천이 두렵다…산책하던 시민 13명 갑자기

    10일 낮 서울 도심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청계천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산책하던 시민과 관광객이 고립되는 일이 발생했다. 청계천은 중국인과 일본인 등 서울을 찾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여서 예측 불가능한 기상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책이 요구된다. 관광객에 대한 대피 교육은 전무한 실정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청계천에 인접한 종로구 송월동 서울기상관측소의 측정 결과, 낮 12시 43분부터 오후 1시 10분까지 12.5㎜(시간당 25㎜)의 폭우가 내렸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비가 쏟아졌지만 인근의 빗물을 청계천으로 방류하는 수문이 열리면서 청계천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청계천 산책로가 범람했다. 갑자기 폭우가 내리자 청계천을 산책하던 시민과 관광객들은 광교와 광통교 등 청계천 다리 아래로 가 비를 피했다. 대부분의 시민과 관광객은 물이 계속 불어나 산책로가 잠기자 황급히 지상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고립됐다. 이날 오후 1시 5분쯤 청계4가 배오개다리 인근 청계천변 산책로에서 폭우로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청계천 물에 고립된 시민 5명은 서울시 직원 등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됐다. 서울시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3명이 구조됐다고 밝혔다. 회사원 최모(51)씨는 “청계천 산책로를 걷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광교 밑에 피해 있다가 마침 비가 그쳐 청계광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산책로가 물에 잠겨 시민들이 황급히 반대쪽으로 내달렸다.”면서 “오수와 섞인 빗물이 너무나 세차게 몰아쳐 두려울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경고방송 등은 나오지 않아 청계천 하류에 있던 시민과 관광객은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산책로가 물에 잠기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게릴라성 폭우는 주로 여름에 나타나지만 대기불안정으로 봄, 가을에도 가끔 나타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청계천 수문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공단 관계자는 “비가 오면 지상의 빗물이 청계천으로 향하게끔 돼 있다.”며 “강수량이 많아 수압이 높아지면 수문은 자동으로 열린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문이 열릴 수 있다고 판단하면 대피 안내방송을 한다. 오늘은 짧은 시간에 수량이 급격히 불어나 안내방송 후에도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최씨는 “긴급히 대피하도록 하는 안내원들은 있었으나 대피방송을 듣지 못했다.”며 “위험천만한 상황이 갑자기 발생하는 만큼 경보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저비용항공사 고공비행] 국내선시장 점유율 50% ‘코앞’… 국제선도 늘린다

    [저비용항공사 고공비행] 국내선시장 점유율 50% ‘코앞’… 국제선도 늘린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저비용항공사(LCC)에는 통하지 않는다. 저비용항공사들이 출범 당시의 우려를 씻고 시장 점유율을 꾸준히 높여 나가면서 국내 항공시장 굳히기 작전에 들어갔다. 여세를 몰아 국제선 시장 점유율까지 끌어올리면서 단거리 국제 노선에서도 프리미엄 항공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 저비용항공 시장이 커지면서 해외 저비용항공사들의 국내 시장 입질도 시작됐다. 하늘색(대한항공)과 색동날개(아시아나항공) 일색이던 김포공항이 이제는 각양각색의 비행기로 가득하다. 두 대 중 한 대꼴로 저비용항공사 비행기다. 저비용항공사(Low Cost Carrier)는 대형 항공사들이 제공하던 기내식과 오락(TV·게임·음악), 공항 라운지, 마일리지 적립 등과 같은 부가서비스를 빼고 최소 서비스만 제공하는 항공사다. 각종 서비스 없이 운항 비용을 줄여 요금은 대형 항공사의 70~80% 수준이다. 주로 단거리 노선에 띄운다. 국내 항공시장에 저비용항공사가 진입한 것은 2005년. 하지만 초기에는 소비자들과 항공업계 모두 반신반의했다. 2005년 제주항공 이륙 초기에만 해도 “싼 게 비지떡 아니냐. 왠지 불안하다.”는 반응과 함께 “무모한 도전”이라며 시큰둥했다. 특히 안전에 대한 불신이 컸고, 정부도 검증되지 않은 안전 문제 때문에 운항 허가를 내주면서도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저비용항공사가 이제 국내 여객 시장 점유율을 지난 8월 기준으로 43.8%까지 끌어올렸다. 국내선을 타는 승객 10명 중 4명 이상이 저비용항공기를 이용한 셈이다. 10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5개 저비용항공사 비행기는 국내선 11개 노선(중복)에 주 625회를 날고 있다. 국제선도 36개 노선(중복)에 주 207회를 운항한다. 저비용항공사의 시장 점유율은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올 상반기 저비용항공사의 여객 수송 실적은 해외여행 수요 증가와 국제노선 신규 취항 및 항공기 추가 투입 등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80만명)보다 30.6% 늘어난 627만명에 이른다. 지난해 상반기 시장점유율은 40.5%였다. 국내 및 국제노선 전체 시장점유율도 지난해 상반기 16%에서 올 상반기에는 18.5%로 높아졌다. 눈에 띄는 것은 국제노선 이용객이 늘었다는 것. 154만명이 이용해 지난해 같은 기간(73만명)보다 112% 증가했다. 국민의 해외여행 증가와 중국·일본인 한국 방문증가, 취항노선 확대 덕분이다. 시장 점유율도 지난 8월 현재 8.3%까지 높아졌다. 반면 국내 대형 항공사들의 국제노선 시장 점유율은 큰 변동이 없다. 저비용항공사 점유율이 높은 곳은 김해~대북(68.7%), 제주~푸둥(59.5%), 김해~세부(36.4%), 인천~괌(21.8%) 노선 등이다. 저비용항공사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국제선 확충에 사활을 걸었다. 중국, 일본 등 근거리 노선에서 시작한 국제선은 이제 방콕, 호찌민, 마닐라, 괌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저비용항공사들이 짧은 기간에 비교적 연착륙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가격과 안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양성진 제주항공 상무는 “지연·결항률을 낮추고 부품 교환 등 운항 안전성을 높여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는 데 집중 투자한 결과, 고객이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경영 상태도 나아지면서 신규 투자 여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시각도 변했다. 이원중씨는 “중국 여행에 저비용항공사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짧은 거리라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며 “내년 봄 베트남으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저비용항공사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하반기에도 저비용항공사들의 국제노선 공급력 집중과 해외 여행수요 증가 추세 지속 등으로 국제노선을 중심으로 저비용항공사들의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朴 “전화위복…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자”

    朴 “전화위복…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10일 수도권에서 당내 결속을 다지며 화합을 강조했다. 경기와 인천을 잇따라 방문해 선대위를 출범시키고 비박(비박근혜) 주자였던 김문수 경기지사와도 만났다. 특히 최근 불거졌던 당내 갈등이 수습 국면에 들어가면서 내부 정비와 단결에 더욱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경기도당 선대위 발대식에서 “(당내에서) 여러 주장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조정되는 과정에서 당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면서 “이번 논쟁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또 통합과 쇄신, 경제민주화를 모두 강조하며 ‘안대희·한광옥’, ‘김종인·이한구’ 갈등에서 각자가 내세웠던 가치들을 모두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박 후보는 특히 정치를 처음 시작하게 된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 당시를 떠올리며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이 주춤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당시 선거 마지막날 여론조사까지 제가 두 자리 숫자로 지는 결과가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면서 “표현하지 않은 많은 국민이 조용히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 후보는 김 지사와 함께 경기도청에서 만나 20여분간 환담을 나눈 뒤 경기도에서 시행하고 있는 무한돌봄센터와 안심꿈나무학교를 살펴봤다. 김 지사는 박 후보에게 “선거법상 (현역 지사는) 마음이 있어도 말을 못하게 해 요즘 도 닦는 기분”이라고 농담을 한 뒤 경기도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박 후보가 지방발전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자 김 지사는 “대통령 되기 전에는 다 하겠다고 하면서 되고 나서는 안 하더라.”고 꼬집었다. 이에 박 후보는 “제가 실천왕이지 않느냐.”며 거듭 다짐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이야기] (97)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이야기] (97)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딱히 길 위에 나설 일도 없지만 며칠 만에 한번 길을 나설라치면 집 앞의 큰 나무가 걱정돼 발걸음을 재우쳐 돌아오는 한 노인이 있었다.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나무 앞에 오래 서서 ‘할배, 잘 있었소?’라고 안부를 물었다. 비가 적어 가뭄이 드는 때면 어김없이 나무의 혼령이 ‘목이 마르다, 물 좀 달라.’고 간절히 하소연하는 꿈에 시달렸다. 나무의 안녕은 곧 할머니의 평안이었고 나무의 영화는 할머니의 명예였다. 경북 안동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 앞 관리사무소에서 살아가는 월로댁 할머니 이야기다. ●‘월로댁’ 할머니 죽는 날까지 나무 곁에 한가위 명절을 지내고 서서히 나무도 가을 채비를 해야 할 즈음 월로댁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나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깊은 산골 용계리를 찾았다. ‘은행나무 기념관’이라는 문패가 돋보이는 나무 앞의 아담한 집 한편에 마련된 월로댁의 살림방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은행나무를 가족처럼 여기던 월로댁 할머니는 지난봄에 돌아가셨어요. 이제 공식적으로 나무를 관리하는 사람은 없지만 마을 분들 모두가 정성껏 나무를 보살피지요.” 천연기념물 등 안동시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예술과 이미선(43) 주무관은 마치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서운해하는 목소리로 월로댁 할머니의 부음을 알려줬다. 세상 누구보다 극진하게 나무를 지켜 왔던 나무 지킴이 월로댁 할머니가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나무 곁에서 살아왔고 나무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1987년부터는 아예 나무 앞 관리소에 보금자리를 잡아 죽는 날까지 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홀로 나무를 바라보며 살아온 명실상부한 ‘나무 지킴이’였다. 이태 전 가을에 만났던 월로댁 할머니는 외딴 골짜기에서 홀로 사는 게 무섭지 않으냐며 허투루 던진 질문에 ‘무섭긴 뭐가 무서워! 저리 큰 나무가 지켜주는데!’라고 당당하게 대거리했다. 그때만 해도 건강했건만 세월의 흐름을 따라 월로댁은 나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언제 보아도 크고 융융한 기세의 용계리 은행나무가 사뭇 쓸쓸해 보이는 것도 분명 곁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세월의 흐름을 함께 바라보던 월로댁 할머니의 부재 탓이리라. “어릴 때 제일 재미있었던 놀이가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이었죠. 원래 저 나무가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거든요. 제가 그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에요. 늘어진 굵은 가지에 매달리는 건 물론이고 저 줄기 위쪽에 나 있는 큰 구멍은 숨바꼭질할 때 숨어들기 가장 좋은 명당이었지요.” 월로댁 부재의 아쉬움을 메워 준 건 용계리 이장 권광협(49)씨였다. 수몰된 용계 마을에서 월로댁 할머니와 함께 자라온 그는 월로댁 못지않게 용계리 은행나무의 역사를 고스란히 바라본 산 증인이다. 천연기념물 제175호인 용계리 은행나무는 매우 특별한 나무다. 약간의 호들갑이 허용된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이만큼 특별한 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댐 건설 수몰 위기, 마을 청원으로 극복 권씨의 이야기대로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장의 운동장 한편에 서 있던 나무는 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평안을 지켜준 마을 당산나무이기도 했다. 평화롭게 서 있던 은행나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87년, 임하댐 건설 계획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댐이 완공되면 창졸간에 마을은 물속에 잠겨야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댐 근처의 동산 위로 옮겨 갔다. 그러나 고스란히 물속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된 나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집을 내놓은 사람들은 공사 담당자들에게 나무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나무는 쉽게 옮겨 심을 수 없을 만큼 컸다. 키 31m에 가슴 높이 줄기 둘레가 14m인 거목으로, 가슴 높이 줄기 둘레만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은행나무다. 끈질기게 이어진 마을 사람들의 간곡한 청원 끝에 공사를 맡은 한국수자원공사는 정부의 지원을 얻어냈고 나무 이식 공사를 결정했다. 정확히 하자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이식(利殖)이 아니라 높이만 들어 올리는 상식(上植) 공사라고 해야 한다. ●23억 투입 4년 공사 ‘나무 이식의 표본’ 무모할 정도로 큰 규모의 용계리 은행나무에 대한 상식 공사는 H빔 공법을 이용해 나무를 조금씩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마침내 나무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부터 15m 높이까지 들어 올려졌고 나무 주변에는 자연스레 인공 산이 쌓였다. 결코 빠르게 진행할 수 없었던 이 상식 공사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에 걸쳐 이뤄졌고 공사에 들인 비용은 무려 23억원이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를 살리기 위해 이 정도의 비용을 들인 예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공사를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 나무 이식의 표본으로 삼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공사 때 뿌리와 가지를 상당 부분 잘라냈어요. 여전히 큰 나무이기는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무척 왜소해진 겁니다. 그래도 물속에 갇힌 옛 우리 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나무가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수몰 위기를 이겨내고 우뚝 서 있는 고향의 당산나무를 바라보는 권씨의 선한 눈길에는 세상의 모든 고향, 혹은 이 땅의 모든 사람살이를 향한 지극한 애정이 한가득 담겼다. 글 사진 안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 중앙고속국도의 서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안동 시내로 들어선 뒤 반변천을 건너 국도 35호선으로 갈아타고 길안면으로 간다. 길안면사무소 앞에서 지방도로 914호선을 이용해 동쪽으로 3.5㎞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천지휴게소가 나온다. 고갯길을 2㎞쯤 더 가면 개울가에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좌회전해 마을길로 개울을 끼고 5㎞ 들어가면 임하댐이 나오고 건너편으로 나무가 보인다.
  • 무르시 “정치범 전원 석방”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이 지난해 민주화 혁명에 참여해 기소되거나 실형 선고를 받은 민간인 전원을 사면하기로 결정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대통령 공식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2011년 1월 25일부터 올해 6월 30일까지 1급 살인을 제외하고 혁명을 지원하거나 혁명을 이뤄낼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면 결정을 내린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1981년부터 이집트를 30여년간 철권통치해 오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지난해 발발한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으로 물러난 이후 무르시 대통령은 지난 6월 이집트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청년 시위대들과 이집트 민간 활동가들은 이집트 정부에 구속 기소된 민간인에 대한 군사재판을 즉각 중단하고 사면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무르시 대통령은 지난 7월 군사법원에서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민간인 457명을 석방한 바 있다. 대통령의 이번 사면 결정으로 풀려날 구체적인 사면 대상자 숫자와 석방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으나 민주화 시위 기간에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이거나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민간인 최소 1000명 이상이 석방될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는 민주화 시위 이후 1만 2000여명의 민간인이 군부에 의해 구금됐으며 이 가운데 9700여명이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무르시 대통령의 법률 고문인 무함마드 가달라는 “이번 결정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승리 중 하나”라며 “혁명 세력이 현재 권력을 잡고 정책 결정을 이끌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희선기자 hsncho@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글로벌 시대] 혼란의 중동, 모순 속 미국/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글로벌 시대] 혼란의 중동, 모순 속 미국/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독재자들을 쫓아낸 ‘아랍의 봄’은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관계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서방세계와의 대립과 긴장은 더 커졌다. 지난달 리비아 벵가지에서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피살 당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50여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쳤다. 이슬람 비하 영화에 대한 반발로 무장 공격과 시위 등이 이슬람 세계를 덮은 것이다. 사태는 잠잠해졌지만 갈등의 골과 충돌 위험성은 더 커졌다. 이슬람 비하 영화가 계기가 돼 촉발됐지만 그 원인과 연원은 깊고 오랜 역사를 가진 까닭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출범 이후 내걸었던 ‘새로운 중동정책’에도 회의가 높아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6월 이집트 카이로 방문에서 미국과 이슬람 간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미군의 이라크 완전 철수, 아프간에서의 단계적 철군 등도 이뤄졌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여전히 이스라엘에 기울어져 있고, 분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이란 핵무기 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미국의 무력 공격 가능성도 여전히 높다. 이슬람권의 반미 감정은 오히려 커졌다. 오바마는 집권 초 국제연합 안보리 결정에 따른 팔레스타인 사태 해결, 이스라엘 정착촌의 추가 건설 중지 등 긍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중동 각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간섭은 그치지 않았다. 오바마의 정책도 부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바마는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와 전략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아랍의 봄을 지원하고 이끌었다. 이 지역 국민들도 자유와 안정,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혼란과 갈등, 충돌과 불신을 더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일부 중동 맹방들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상호 지지도도 감소했다. 아랍의 봄 이후 중동에서 미국의 능력과 역할이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오바마의 중동정책은 여러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이집트와 리비아 등에서 독재자들이 쫓겨났지만, 대신 이슬람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다. 냉전 이후 미국 중동정책의 제1 교두보였던 이집트는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인 이슬람형제단이 권력을 잡았다. 지난 6월 말 취임한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은 미국에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과 이란을 방문해 친선을 다지는가 하면 16차 비동맹회의에 참석하는 등 전임자와는 전혀 다른 국제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태다. 아랍의 봄은 나날이 커지는 이슬람 중산층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또 이슬람 세계에 만연해 있는 빈곤과 부패, 빈부 격차와 경제·정치적 모순도 국민들의 기대를 어그러뜨리고 있다. 리비아의 경우 국가가 무장세력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장한 민병세력들이 각지에 난립해 중앙정부는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도 못하고 각 지역 세력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다. 아랍의 봄을 열었던 이슬람 세계의 평등과 민주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과 힘은 오히려 반미주의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이슬람과 서구세계와의 화해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오바마의 이상은 빛이 바래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생각과 지향점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서구와, 서구식 민주주의 및 언론자유를 강조하는 서구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그 같은 이상이 좌초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슬람의 오랜 역사와 전통, 드높은 자존심과 평등의식을 미국과 서구세계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최근 사태에서 보듯 문명의 충돌은 결코 빛바랜 명제가 아닌 듯하다. 서로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이해의 심화는 국제화된 세계 속에서 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최근 뜨겁게 벌어진 동북아시아의 영토 분쟁도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처럼 역사와 가치관, 자존심과 문화가 막후에서 작용하고 있다.
  • [열린세상] 진정한 다문화 사회를 향한 우리의 노력/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

    [열린세상] 진정한 다문화 사회를 향한 우리의 노력/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에 다니는 다문화가정 학생은 4만 7000여명으로 2014년에는 7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은 140만여명, 전체 인구의 2.8%를 차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추세다. 이제 다문화 사회는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닌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다문화 정책은 배우자와 자녀들의 생활 적응과 편의 개선에 집중되어 왔다. 언어, 교육, 의료, 주거, 복지 등 그들이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본환경 조성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 동화되기를 원하는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문화를 알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새로운 이주민이 살아왔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존중 측면에서 말이다. 2년 전 아세안 10개 회원국가들의 전통무용을 한무대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세안 국가들의 문화는 비슷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각 나라별 춤사위를 동시에 접하면서 서로간의 미묘한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한·중·일 3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듯이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경제의 침체 가운데서도 아세안의 약진은 단연 눈에 띈다. 올해 이들의 평균 성장률은 5%대다. 세계 평균보다 약 2% 포인트나 높다. 그뿐만 아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6억명의 아세안이 향후 10년 안에 10억명의 거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규모 면에서 아세안은 우리의 두번째 무역파트너이자 외국인 직접투자 대상이기도 하다. 경제교류 증가는 필연적으로 인적 교류도 수반한다. 작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아세안 국가 방문객은 124만명에 이른다. 부지불식간에 이들이 우리 사회 속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여름, 한·아세안 포럼 참석차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류 바람이 가장 거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만난 베트남 여성 외교관은 한국 아이돌 스타들의 면면을 훤히 꿰차고 있어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 한국 드라마가 전체 시청시간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놀랄 일도 아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젊은이들의 선망 아이콘이고, 지난 십년간 베트남으로의 수출은 8배나 증가하였다. 고무적인 것은 이 현상이 아세안 국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포럼에서는 한국과 아세안 간의 문화교류 세션이 열렸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한·아세안 간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에서 양방향적 문화 교류와 활발한 인적 교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무엇보다 공적 기관들이 문화 교류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민간 예술단체 간의 공동 작업을 지원하는 방식이 상호 이해 증진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상업적 측면에 치우진 민간의 일방적 교류는 오히려 역풍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을 수용하는 우리 국민들의 능력도 높여야 한다. 프랑스는 이슬람 등 문화 다양성에 대한 자국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화부 산하에 ‘세계 문화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소외되기 쉬운 제3세계 국가들의 공연을 연중 무대에 올리고 있다. 아울러 매년 두서너 국가와 상호 교류의 해를 지정해 상호 교차적으로 대대적인 문화교류 행사도 펼친다. 일례로 작년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면서 우리나라와는 2015년 가을부터 2016년 봄까지 상호 교류의 해를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다문화 사회는 분명 우리에게 기회다.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적 문화도시들이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다국적, 다민족, 다문화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다. 자국의 전통과 타문화의 장점을 결합시켜 진일보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창의적 유연성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풍요’를 만드는 힘이다. 조화로운 다문화 사회를 위해 각종 지원과 제도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도모하는 정부 차원의 미래지향적이고 심층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 9월 집값 8년만에 떨어졌다

    9월 집값 8년만에 떨어졌다

    봄 다음으로 이사가 많은 달인 9월 전국 집값이 8년 만에 하락했다. 불황에도 꺾이지 않았던 소형주택 가격도 떨어졌다. 3일 국민은행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9월 전국 주택 매매가격은 8월보다 0.2% 떨어졌다. 9월 주택가격 변동률이 8월보다 떨어진 것은 2004년 9월(-0.2%) 이후 처음이다. 9월은 가을 이사 수요 때문에 여름철보다 집값이 오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올해는 침체된 모습을 보였다. 이 조사가 시작된 1986년 이후 27년 동안 9월 주택가격 장기 평균 변동률은 0.6%다. 지역별로는 서울·인천·경기가 나란히 -0.4%를 기록하며 가장 많이 떨어졌다. 대전·강원·경남(-0.2%), 부산(-0.1%) 등 지방도 하락세를 보였다. 다만 충남처럼 정부기관의 세종시 이전 혜택을 받은 지역이나 주택공급 부족이 심한 경북에서는 집값이 0.5% 이상 올랐다. 실수요자들의 선호로 가격을 유지하던 소형주택 가격도 올들어 처음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소형주택(전용면적 62.8㎡ 미만)은 5월까지 매달 소폭 오르다 6~8월 석달 내리 보합세를 기록했지만 9월에는 0.1% 하락했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부고] 20세기 대표 좌파 사학자 홉스봄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1일(현지시간) 런던 로열프리 병원에서 별세했다. 95세.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계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1933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3년 뒤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당시 옛 소련의 강제 진압을 비판하면서도 공산당원 자격을 끝까지 유지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로 꼽힌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까지의 역사를 다룬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등 역사 3부작과 그 후의 역사를 서술한 ‘극단의 시대’ 등 유명 저작을 남겼다. 특히 ‘극단의 시대’는 40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적으로 폭넓게 읽혔다. 생의 마감기인 지난해에도 마지막 저서가 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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