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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친구 유주X업텐션 선율 ‘보일 듯 말 듯’ 호흡 어떨까

    여자친구 유주X업텐션 선율 ‘보일 듯 말 듯’ 호흡 어떨까

    걸그룹 여자친구 유주와 보이그룹 업텐션 선율이 콜라보레이션 신곡을 내놓는다. 업텐션은 7일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듀엣곡 ‘보일 듯 말 듯’(Cherish)의 티저 영상을 올렸다. 공개된 25초 분량의 영상은 여자친구 유주와 업텐션 선율이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하얀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등 봄날의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면들로 연출됐다. 특히 우주와 선율, 둘의 호흡은 두 사람이 신인 그룹의 메인 보컬이라는 공통점과 고음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모은다. 한편 유주와 선율의 콜라보레이션은 업텐션의 소속사 티오피미디어 대표와 여자친구 소속사 쏘스뮤직 대표의 15년 지기 우정의 결과물이다. 이른바 ‘절친社 프로젝트’다. 유주와 선율이 함께한 듀엣곡 ‘보일 듯 말 듯’은 오는 11일 자정 공개된다. 사진·영상=유주(GFRIEND), 선율(UP10TION)_보일 듯 말 듯_(Cherish) TEASER/유튜브 영상팀 seoultv@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라일락에 최루탄에 눈물겹던 그 봄날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라일락에 최루탄에 눈물겹던 그 봄날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던 어느 봄날이었다. 서울 종로 고려당 제과 2층에서 만난 그녀가 내민 한 권의 책이 불씨가 된다. 프란츠 파농(1925~1961)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벌써 서너 번을 만난 그녀는 얼마 전 하숙집 선배가 주선한 미팅에서 처음 봤다. 목포에서 올라온 그녀의 낯설고도 고운 남도 사투리는 모차르트처럼 들렸다. 파농을 같이 읽고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으음, 여자친구와 독서토론이라…. 한마디로 황홀한 제안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주고받았다. 그러나 달콤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숙집에 돌아와 펴 본 책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10대 성장기, 클래식으로 분류되던 책들을 몽땅 탐독했다고 자만했던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난해한 개념들이 가득했다. 파농은 당시 운동권에 벤치마킹 대상이던 인물. 서인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난 치열한 흑인 혁명가를 내가 알 리 만무했다. 총 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만날 날은 다가오고, 요즘 말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몇날 밤을 손가락으로 볼펜만 360도 빙그르르 돌리다가 잠이 들었다. 따스했지만 결기에 찬 눈빛으로 ‘파농’을 건네주던 그녀의 기대치에 나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결국 그녀와의 만남은 삼월에 시작해 장미향이 스멀스멀 퍼지던 오월에 끝나게 된다. 그녀는 언니, 오빠까지 소개해 주며 나에게 열심이었지만 그만 만나자는 말은 막상 내가 먼저 했다. 내려다보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점차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스스로 차인 것이다. 충격적인 그날 이후 나는 내 또래의 누구라도 그랬듯이 이념서적을 손에 쥐게 된다.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8억 인구와의 대화’, ‘민중과 지식인’, ‘민족지성의 탐구’ 등은 단골화제가 되었다. 아, 그리고 또 있다. ‘난쏘공’이다. 가상의 공간인 은강시를 배경으로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 시절 우리들의 필독서였다. 문제는 이 같은 이념서적들과 내가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술자리에 가면 늘 ‘말빨’이 달렸다. 강촌, 대성리나 송추, 일영 유원지에서 보낸 MT의 밤은 힘들었다. 담배연기 가득한 좁은 방에서 독한 소주에 고추장 멸치, 꽁치 통조림을 갖다 놓고 밤새 벌이는 격론에 나는 늘 꿀 먹은 벙어리였다. 뒤풀이 시간에 잠시 빛을 발했지만 결국 이 같은 모임과는 멀어지게 된다. MT의 목적보다는 MT 분위기를 즐거워하고 데모를 하기보다는 데모하는 상황에 가슴이 흥분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기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거워하던 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나날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예를 든 책들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같은 시공간에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이념서적을 옆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내 지식 지도에 불모지대였던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보게 되는 기제가 된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시절은 일정 부분 ‘이념 과잉’의 시대였다. 비판이론 책은 사방에 널렸고 사계절, 돌베개 등등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상표였다. 책들은 필독서가 되었고 80년대를 강타한 학생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된다. 봄은 최루가스와 함께 왔다. 눈물과 함께 왔다. 도서관 주변은 늘 긴장감이 흘렀다. 누군가가 유인물을 한 움큼 뿌린다. 유인물은 작은 새처럼 춘삼월 봄바람에 팔랑거렸다. ‘짭새’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모여든 학생들이 구호를 외친다. 하나 둘, 마침내 한 무리 대열이 꾸려진다. 대열은 교문을 향해 움직인다. 구호는 노래가 되고 함성이 되고 마침내 절규가 되었다. “선봉에 서서 하늘을 본다 / 고향집 하늘 위엔 굴뚝 연기가 / 투사가 되어 조국의 내일 / 이 몸과 이 혼으로 다져나가리” 그러나 정문과 담장은 넘사벽, 페퍼포그 차량에서 불을 뿜는다. 최루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아내면서 대열은 순식간에 흩어진다. 유인물을 뿌린 학생은 사복 경찰에게 질질 끌려간다. 속칭 백골단으로 불리던 서울시경(현 서울경찰청) 1081, 1082 중대 무술경찰들이 마지막 남은 시위 학생들을 낚아채기 시작한다. 유도와 태권도를 합치면 10단이 넘는다는 무술경관들 앞에서 학생들은 가랑잎처럼 가볍다. 지켜보는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른다.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노래는 서서히 그리고 짧은 시간 잔불처럼 사위어 간다. 험악했던 시절. 시커먼 무전기를 움켜쥔 짭새들이 캠퍼스를 제 집처럼 활보했고 신촌, 종로통의 골목골목에는 중무장한 전경들이 넘쳐 났다. 모두가 주변을 힐끗거리며 술을 마셨다. 세상은 회색빛이었다. 학교 앞 주점에는 시국토론의 핏빛 목소리가 가득했다. 행사가 끝나면 자체 반성의 합평회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대 상황은 자연스레 ‘낭만 결핍’의 시대를 의미한다. 당연히 축제 문화도 영향을 받았다. 세탁소에서 옷을 빌려 입고 때 빼고 광내고 참가했다던 선배들의 쌍쌍파티의 추억은 대동제 앞에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파쇼 타도”란 구호와 깨어진 보도블록, 최루탄이 오월에 흩어졌다. 봄은 개나리, 진달래에 앞서 전경들의 군홧발 소리와 함께 왔다 멀어져 갔다. 그러나 꽃다운 20대, 시국과는 무관하게 혼자 보내는 대학생활은 감미로웠다. 난생처음 집을 떠나 혼자 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자유만만세! 술도, 담배도, 외박도, 연애도 맘대로였다. 밤새워 포커를 즐기고 춤을 추고, 한마디로 맘대로 인생이었다. 가벼운 신열에 들떠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미팅은 활기를 띠었다. 이성교제가 엄격하게 규제되는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기대욕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미팅은 해방구로 나가는 통과의례였다. 가끔은 낮은 목소리로 고팅이 들려왔다. ‘개빙고’(개강을 빙자한 고팅) 등의 말들이 눈치 보듯 들렸다. 질색하던 비판적 골수 운동권 친구들도 가끔은 얼굴을 보였다. 대학가만이 아니다. 공장이 몰려 있는 구로동과 영등포 일대에도 고고장은 성업 중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지탱되던 미팅 문화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라던 시구절처럼 질풍노도 같던 80년대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80년대 초 명동 고고클럽 마이하우스쯤으로 기억된다. 본격적으로 밴드 연주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20여명의 잘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교수 몇 분을 모시고 때늦은 사은회를 하고 있었다. 그땐 사은회란 게 있었다. 어느 순간 누가 일어나 댄스 타임에 앞서 한곡을 뽑기 시작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미오” 영화 ‘형사’ 주제곡이다. ‘죽도록 사랑해’라는 뜻의 ‘시노메 모로’란 제목보다 ‘아모레 아모레’라는 가사가 더 유명하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홀 안으로 몰려드는 여자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던 중에 들리던 노래였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노랫소리는 너무 슬프고 애잔해서 먹먹했다. 나는 작업하던 눈길을 접고 잠깐 동안 그 여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필이 꽂힌 것이다. 한마디 말도 건네 보진 못했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추억은 아쉬움으로 인해 더욱 또렷해져 온다.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마알간 목소리에 아찔했던 오늘 같은 봄밤이었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 맥주와 예술과 토론과 책… 베스트셀러만 빼고 다 있다

    맥주와 예술과 토론과 책… 베스트셀러만 빼고 다 있다

    동네 책방들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저마다 독특한 ‘북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동네 책방들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예술 전시회와 작가와의 만남, 독서 모임 등을 기획하며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골목길 사이 동네 모퉁이에 자리잡은 동네 책방에서는 주인과 손님들이 추천하는 책과 독립 출판서적들을 만날 수 있다. 동네 책방에서 책과 만나는 오후는 여유 있고 따뜻한 봄기운에 취하는 사색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서울 홍대 인근에 있는 땡스북스는 2011년 문을 연 동네 책방이자 카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종종 찾는 곳이다. 디자이너인 책방 대표 이기섭씨는 베스트셀러보다는 편집이 창의적인 책 위주의 큐레이션을 선보인다. 책마다 개성이 묻어나고, 장르별로도 잘 정돈돼 있다. 충북 괴산에서 가정식 서점인 ‘숲속작은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백창화·김병록 부부는 땡스북스를 가리켜 “텍스트에 익숙지 않은 젊은이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글과 그림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크리에이티브한 책들은 적당히 고독하고, 고단하며, 슬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퇴근길 나 홀로 즐기는 책과 맥주·와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맥주나 와인을 파는 서점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 북바이북과 책바다. 북바이북과 책바는 일반 서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퇴근길에 맥주 한잔을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북바이북은 작가와의 번개, 독서 콘서트 등을 열어 책과 소통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책바는 대표인 정인성씨가 큐레이션한 시집과 소설, 독립 서적 등을 판다. 고독을 존중하는 공간으로 1인석이 많다. 정 대표는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들르는 사람들이나 새벽 1시에도 와인과 책을 동시에 즐기는 손님이 많다”고 밝혔다. 서교동 골목길에 있는 유어마인드는 독립 출판물을 직접 제작하고 파는 책방이다. 오후 2시에 문을 연다. 대형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찾기 어렵다. 소자본, 개인에 의한 출판물들을 소개하고 각종 사진집과 일러스트북, 비정기 간행물, 인디 음반도 있다. 책방은 건물 꼭대기 5층에 자리잡아 탁 트인 천장이 있는 편안한 다락방 분위기다. ●예술가 스튜디오로 운영… 매달 전시 열려 혜화동에 위치한 얄라북스도 주목받는 독립 책방이다. ‘얄라’는 아랍어로 ‘함께’, ‘가자’라는 뜻인 동시에 우즈베키스탄어로는 ‘노래하다’라는 의미다. 사진을 공부한 양은하 대표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책방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술 작가들의 작업 공간인 스튜디오와 같이 운영돼 각종 전시회와 세미나가 매달 1차례씩 열린다. 예술서적과 다양한 독립 출판물을 제작한다. 이대 인근 주택가에 자리잡은 일단멈춤은 여행 전문 책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인 ‘먼 북소리’나 사진집, 에세이, 여행하며 읽기 좋은 인문서와 소설, 그리고 독립 출판물들이 놓여 있다. 작은 공간에 갤러리가 있어 전시 작품도 볼 수 있고 여행 작가들의 강연과 토론회 등도 연다. 책방 한편에 놓인 큰 여행 가방이 눈에 띈다. 지난해 10월 이태원 해방촌에 문을 연 문학 전문 책방 고요서사는 소설과 시, 에세이, 인문사회 예술 위주로 재미있고 쉬운 책을 큐레이션한다. 출판사 편집자 출신인 차경희 대표는 유럽 여행을 하다 동네마다 작은 책방이 있는 것을 보고 책방을 열게 됐다. ●문학 전문·독서 모임 추천 인문서 모은 곳도 책과 독자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강남의 대표적 책방은 북티크다. 10여개가 넘는 독서 모임에서 추천한 책들과 인문서, 스테디셀러 등으로 큐레이션돼 있다. 매주 금요일은 24시간 문을 열어 밤새 책을 읽을 수 있다. 서점지기인 박종원 대표는 “책을 즐길 수 있는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독서 모임을 기획하고 작가 강연도 연다”고 말했다. 출판사 북극곰과 함께 운영되는 그림책 전문 서점 프레드릭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책방이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간이다. 동화작가 이루리(정용후) 대표가 운영하는 프레드릭은 큐레이션되는 그림책들을 예술의 장르로 끌어올린 책방이다. 정 대표가 펴낸 북극곰 코다 시리즈는 이스라엘어와 터키어 등 6개국 언어로 출품됐다. 정 대표는 “매일 그림책을 읽고 놀다 가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어느 날 문득 더이상 미루지 말자고 결심하고 책방을 열었다”고 밝혔다. 프레드릭에서는 그림책 강의도 들을 수 있다. ●전국 동네 책방 정보 망라한 책 출간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동네 책방 정보를 담은 책도 나와 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펴낸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와 북노마드의 ‘우리, 독립 책방’은 각 지역에서 문화 명소로 주목받는 책방들을 다채로운 사진과 글을 통해 안내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겨울의 스산함은 사라졌지만, 새봄의 훈풍은 아직 깃들지 않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정호승(66) 시인이 성당 앞 계단을 부지런히 내려왔다. 환갑보다는 고희에 더 가까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맑은 얼굴을 하고서였다. 신자들에게 강연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요즘 ‘주’(시)와 ‘객’(강연)이 바뀐 것 같아 강연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워낙 와달라는 요청이 많아 생각처럼 줄지는 않는군요.” 이날도 평생 그의 시를 관통해온 ‘사랑’에 대해 강연을 했다는 그는 성당 앞 카페에서 3시간 동안 시와 인생, 세월과 나눈 사랑 얘기를 들려주었다. -1963년의 어느 봄날. 까까머리 중2 교실에 짝짝짝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에 서 있던 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호승이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시(詩)라는 걸 난생처음 써봤던 그때, 국어 선생님은 내가 지은 시 ‘자갈밭에서’를 반에서 가장 잘된 작품으로 골라 낭독을 시키셨다. 그게 내가 시와 맺은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내가 다닌 대구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 등 문단의 거목들을 많이 배출한 영남 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교사들 중에도 현역 문인들이 꽤 있었는데 국어를 가르쳤던 김진태 선생님도 등단한 수필가셨다. 시 낭송이 있고 얼마 후 담임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교내 백일장에 누가 나가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국어 수업의 기억이 또렷한 반 아이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나를 지목했다. 솔직히 난 그때 백일장의 뜻도 몰랐다. ‘백일 동안 어딜 좀 다녀오는 건가?’ -학교 운동장 너머 솔숲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불’을 주제로 시나 산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등불’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 ‘스스로 발광체인 나’로 시작했는데, 발광체는 바로 며칠 전 물상 수업에서 배웠던 단어였다. 덜컥 장원이 됐다. 상으로 학교 매점에서 쓸 수 있는 1000원짜리 종이표를 주었다. 그 맛있던 30원짜리 삼립 단팥빵을 30개나 사고도 돈이 남았다. 친구들에게 크게 한턱을 내고 나니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공짜 빵을 계속 먹을 수가 있겠구나’ 매월 교내 문예원고 모집 때마다 시를 써 보냈고, 그때마다 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공책도 사고 체육복도 사면서 든 생각. “이걸 평생의 일로 삼을 수도 있겠구나.” -당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백일장 장원의 여세를 몰아 ‘석의 심정’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보냈더니 우수작으로 뽑혔다. 이후 고교 시절까지 계속 글을 보냈고, 그때마다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박남수, 박목월, 박두진 등 쟁쟁한 시인들이 직접 나의 시에 대해 평을 해 주셨다. 그분들의 평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그런 식으로 시를 스스로 공부했다. -우리 집안의 뿌리는 대구다. 아버지는 대구농림전문학교를 나와 은행원이 되셨는데, 이 지방 저 지방 전근이 잦으셨다. 내가 6·25 전쟁이 터지기 몇 달 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것도 아버지께서 상업은행 하동지점에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경기 평택 등지에서 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에 완전히 정착을 했다. 그때 명동 상업은행 본점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서울이 싫다며 고향으로 오셨다. 한참 후에 집안이 쫄딱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오게 됐는데, 만약에 그때 일찌감치 서울에 정착했더라면, 그래서 내가 계성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해준 ‘가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내가 중3 때 사업을 하겠다며 은행을 나오셨다. 하지만 마음만 앞섰지, 경영에 대한 감이나 수완은 없으셨다. 이를테면 당신이 운전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 말을 듣고 택시회사를 차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1년 만에 퇴직금을 전부 날리고 커다란 빚을 졌다. 난생처음 가난을 맛봤다. 부지런한 어머니 덕에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기마다 학비를 내는 게 벅찰 정도였다. -1967년 고3이 됐다. 대학엔 가고 싶은데, 앞이 안 보였다. 공부라도 잘해야 빚을 내서 대학 등록금 마련할 생각도 해볼 텐데, 내 성적은 딱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경희대 문예장학생 제도였다. 경희대가 주최하는 백일장이나 전국고교생문예현상모집에 장원으로 당선되면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경희대 백일장에 나갔다. 하지만 나는 장원은커녕, 차상도 차하도 아닌 참방(參榜)에 머물고 말았다. 장려상쯤 되는 건데 그걸로는 문예장학생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후일에 내 스승이 되신 조병화 선생은 “상위권에 올리자니 문제가 있고, 떨어뜨리자니 아깝다”고 평하셨다. 대구로 내려오는데 기차 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직 고교생문예현상모집이 남아 있었다. 시 부문을 포기하고 평론 부문으로 종목을 바꿨다. 원고지를 100장 이상을 써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팔자에 없는 거짓말을 담임 선생님에게 해야 했다. “우리 호승이가 몸이 너무 아파서 1주일간 학교를 쉬어야겠네요.”(나중에 꾀병임을 알게 된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맞아야 했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나의 첫 평론 ‘고교 문예의 성찰: 고교시를 중심으로’를 완성했다. 그게 최우수작이 됐고, 1968년 3월 나는 당당히 경희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입학 장학금의 유효기간은 단 1년이었다. 장학금 규정상 2학년 이후에도 계속 받으려면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신나게 놀 때 나는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자취방에서 도서관에서 시를 썼다. 그러나 당선의 문턱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한 해 휴학까지 했는데도 등단이 안 됐다. 친구들보다 군 입대를 일찍 했던 것도 등록금이란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군에서도 신춘문예에 계속 투고를 했다. 제대하기 직전인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당선이 됐다. “이제는 학비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겠구나.” -사람들에겐 막연한 선입견 같은 게 있다. ‘시인은 가난과 가깝고, 일상을 방기하곤 한다’는 인식이다. 난 그게 싫었다. “시인이라도 열심히 일하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40대 초반까지 잡지사 기자 생활을 열심히 했다.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야 시 창작을 위한 시간도 더 내고 공부도 더 많이 하면서 결과적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시인’은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안 된다. 아주 잘 팔리는 시집을 1년에 한 권씩 내더라도 생활이 안 된다. 나만 해도 시집 판매량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수준까지 벌지 못했다. 그래서 잡지사 생활 때 열심히 저축을 했고 그걸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술도 자제했고, 밥은 회사 식당에서 먹었다. 운전도 못하고, 골프는 채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굶기지는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고, 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서울에서 50명을 뽑는데 8등을 했다. 뒤늦게나마 내가 공부에 잠재력이 없진 않았구나 생각해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교사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3년 정도 가르치다 잡지사 기자로 전환했다.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월간조선’ 등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에 치여 1987년까지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가 1982년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에 써 놨던 작품들을 책으로 엮어내기만 한 것이었다. -1991년 월간조선에 사표를 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기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소설가에 대한 욕망이 한층 커져 갔다. 이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로 당선된 적도 있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상태여서 우리 아들 이름으로 냈지만. 그때 가진 생각이 “10년 뒤에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에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서울대 근처의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런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문장에 물기가 없었다. 변변한 수입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니 생계도 어려워졌다. ‘내 문학적 기질은 소설이 아닌 시’라는 걸 깨닫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잘못하면 시도 못 쓰겠다” 싶은 두려움에 1996년 나는 소설을 떠나보냈다. 소설에 파묻힌 5년 동안 틈틈이 적어놨던 메모를 바탕으로 5개월 동안 시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6개월 만에 10만부 이상이 팔렸다. 마음에 편해졌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나는 스스로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미당을 통해 한국 시의 전통적인 문학성과 가락성 등을 배웠다. 군 복무 시절 친구로부터 서정주 시선을 빌렸다. 춘천 시내에 가서 좋은 노트를 산 뒤 시집의 맨 앞표지부터 맨 뒤 판권 기록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리고 필사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 필사본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抒情)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시대상황의 반영과 서정성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내놓은 작품들이 ‘슬픔이 기쁨에게’, ‘맹인부부가수’,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이다. 이 시들은 지금도 대중 속에서 살아있다. 20대에 목표로 삼았던 미당과 김수영의 결합이 어느 정도 성공하지 않았나 싶어 다행이라 여긴다. -내 시는 노래 가사로도 많이 쓰였다. 대중가요와 가곡 등 합쳐 60여곡 정도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가수 안치환씨와는 몇 해 전부터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콘서트를 한 달에 한 번꼴로 열고 있다. 가장 처음 노래로 나온 건 이동원씨가 부른 ‘이별노래’다.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그 곡에 가장 애착이 간다. 안치환씨가 불렀던 ‘풍경 달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도 좋아한다. 김광석씨가 불렀던 ‘부치지 않은 편지’, ‘수선화에게’ 등도 기억에 남는다. -‘시는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감각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 시는 철저히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100번이고 200번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건 그래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인간의 삶 등을 접하고 그 이면을 보려면 자신만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라는 산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야 한다. 내가 시라는 산을 찾아야 산에 있는 나무를 껴안을 수 있고, 산길도 걸을 수 있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가 나에게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난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다. -신의 도움이 있다면 10년 뒤에도 열심히 시를 쓰고 싶다. 지금 가슴 속에 시상(詩想)이 많다. 생의 마지막에 ‘이걸 다 쓰지 못하고 죽어서 아쉽다’는 생각은 안 하고 싶다. ‘전(前) 시장’이나 ‘전 국회의원’은 있어도 ‘전 시인’은 없다. 시인은 언제나 현직이다. 항상 시를 써야 시인이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정호승 시인은 김소월, 서정주 등을 잇는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초·중·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20여편 실려 있고,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도 지금까지 세 편의 시가 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대와 현실의 목마른 척박함에 발을 대고 서 있지만 위로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김승희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자세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김수영의 참여 정신을 서정의 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별들은 따뜻하다’ 등의 따뜻한 시로 힘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손길을 건넸다. 대표 시선(詩選)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다. ▲대구 계성중·대륜고 ▲경희대 국문학 학사·석사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1973년) ▲소월시 문학상(1989년) ▲정지용 문학상(2000년) ▲한국가톨릭문학상(2001) ▲상화시인상(2006) ▲공초문학상(2008년)
  • 봄날 같은 그들의 노래, 눈앞에서 들어볼까

    봄날 같은 그들의 노래, 눈앞에서 들어볼까

    라디, 12일 데뷔 첫 단독 콘서트 정준일, 4~6일 공연 ‘너에게’ 개최 빌리어코스티, 19일 ‘사랑한다는 한마디’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음악으로 무장한 감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봄을 재촉하고 있다. 최근 인터넷 음원 사이트에서 듣기 편하고 감수성을 자극하는 이지 리스닝 계열의 음악이 각광받고 있는 가운데 3월 공연계에도 열풍이 이어질 것인지 주목된다. 감성파 싱어송라이터의 대표주자 라디는 오는 12일 서울 중구 신당동 공감센터 공감홀에서 데뷔 15년 만에 첫 단독 콘서트 ‘라디 콘서트 어바웃 러브’를 개최한다. 2002년 1집을 내고 데뷔한 그는 히트곡 ‘아임 인 러브’가 피겨선수 김연아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앞다퉈 무대에서 부르는 등 특유의 감수성 깊은 음악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승기, 2AM, 아이유, 가인 등 많은 가수들과 함께 음악 작업에도 참여한 그는 자신의 독립 레이블인 ‘리얼 콜라보’를 통해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다. 라디는 “이번 콘서트를 15년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전환점으로 삼겠다”면서 “대중적으로 시류에 휩쓸리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려는 진심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지난해 소극장 공연을 매진시킨 저력을 보여 줬던 정준일은 4~6일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너에게’라는 제목의 공연을 개최한다 ‘고백’, ‘안아줘’ 등의 호소력 짙은 발라드로 탄탄한 마니아층은 물론 뮤지션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그는 이소라, 이문세, 신승훈, 윤상 등 소수의 대중 가수들만 무대에 섰던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펼친다. 지난 1월 발매한 미니 앨범 ‘언더워터’의 타이틀곡 ‘플라스틱’을 비롯해 ‘너에게’, ‘아니야’ 등의 히트곡을 처음으로 라이브로 선보일 예정이다. 정준일은 “26명의 연주자와 최고의 공연장, 음향, 조명, 스태프들이 한데 어우러진 최고의 공연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인디음악계에서 감성 싱어송라이터로 통하는 빌리어코스티도 19일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는 이날 오후 7시 강남구 삼성동 백암아트홀에서 ‘사랑한다는 한마디’란 타이틀로 무대에 오른다. 2013년 싱글 ‘쉬고 싶어’로 데뷔한 빌리어코스티는 2014년 정규 1집 ‘소란했던 시절에’와 지난해 정규 2집 ‘보통의 겨울’을 발표했다. 소속사인 디에이치플레이엔터테인먼트의 구자영 대표는 “봄과 사랑을 다룬 20곡을 엄선해 봄의 시작을 알리는 감성적인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36] 닭서리의 건강학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36] 닭서리의 건강학

    지금이야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에 절도 혐의로 잡혀가겠지만, 옛날에 닭서리는 겨울을 나는 일종의 ‘동과의례(冬過儀禮)’였습니다. 비록 지금처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활공동체로서의 이해와 결속이 단단했고, 인심이 순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또 지금처럼 기업형으로 닭을 기르는 양계가 아니라 일용할 고기를 얻고, 달걀을 얻기 위해 집집마다 닭을 길렀던 까닭에 거기에서 얻는 이득도 과외의 소득이라 여겼습니다. 지금이야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지천에 널린 게 달걀이지만 예전에는 달걀이 제법 근사한 선물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집마당에서 암수탉이 어우러져 낳는 유정란은 요즘의 그것보다 크고 맛도 좋았는데, 이걸 열 개씩 모아 지푸라기로 엮은 것을 한 줄로 쳤습니다. 그걸 장터에 가져가 돈을 바꾸기도 했고, 만만한 곳에는 선사품으로 전하기도 한 것이지요.  달걀로 소통했던 사회 달걀이 무슨 선물이 되느냐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제조업이 낙후해 물산이랄 것도 없었던 60∼70년대에는 달걀 한 줄이면 탄원서를 대신 작성해 준 읍내 행정서사나 면서기에게는 뇌물이라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드는 답례품이었고, 부잡한 아이들 학교로 불러모아 가르치시는 고마운 선생님에게 드리는 스승의 날 선물도 달걀 한 줄이었습니다. ‘달걀 두 줄이면 쌀이 한 말’이라는 당시의 통념이 이걸 입증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딸아이 혼례 후 시댁으로 보내는 신부의 이바지에도 석작에 차곡차곡 쌓아 넣은 달걀과 닭을 통째로 곱게 삶은 닭이 빠지지 않았는데, 석작에 들어가는 달걀이 좋이 쉰 개는 되었던 터라 혹여 깨어질까봐 집검불을 치대 부드럽게 만들어서 달걀을 하나 하나 싸 넣던 이웃 어르신의 자상한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분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필자가 살던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10리 길이었습니다.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길을 밟아 학교를 다녔는데, 시골 국민학교 전교생이 물경 1000명을 헤아렸고, 우리 마을에도 1∼6학년 학생이 어림잡아 40∼5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날 좋을 때면 끼리끼리 까불면서 오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았는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그 길을 오가기가 정말 곤욕이었습니다. 황당한 얘기지만, 그 때는 우산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비가 내리면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학교 앞 우체국이며 방앗간 추녀 밑에서 우두망찰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쾌재를 부를 횡재는 마침 지나가는 버스가 그 많은 아이들을 태워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고작 예닐곱 번 오가는 시골 버스 기사의 선심이 어린 아이들의 동심에 온기가 된 것이지요. 운전 기사는 마을 앞에 차를 세워 애들을 모두 내려주었는데, 그 때는 한바탕 소란이 입니다. 애들이 저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내리니까요. 마을 사람들은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그 기사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이장이 하루는 동네 사람들 뜻을 모아 마을앞 정류장에서 그 기사가 모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때 이장이 건넨 것도 달걀 한 줄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달걀은 요즘과 확실히 달랐고, 그런 달걀을 생산하는 것이 닭이었으니, 그게 ‘한 마리’라고 찍어서 쉽게 주문해 먹은 요즘의 치킨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생산성을 처음 가르쳐 준 닭 그리고 달걀 다른 가축과 달리 닭은 키우고 번식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달걀을 열댓개 모았다가 알 낳는 둥지에 깔아놓으면 암탉이 알아서 그걸 품어 병아리가 깨곤 했지요. 이른 봄에 그렇게 알을 깔아두면 날이 풀리는 봄날 쯤 마당을 노란 병아리들이 누비고 다녔는데,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하는 동요만 불러봐도 그런 풍경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 닭을 키우고, 달걀을 모으는 일은 애들 몫이었습니다. 아침에 닭장 문을 열어 닭들을 풀어놓고, 때맞춰 모이를 주고, 해거름에 다시 닭장으로 불러들이는 일이야 시골 애들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지요. 한낮에 암탉이 닭장에서 홰를 치고 나서면 달걀을 낳았다는 것도 애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막 낳은 달걀을 거머쥐면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달걀을 모으고, 모은 달걀이 다시 돈이 되고, 인사치레가 되고, 병아리가 되는 이 기막힌 생산성의 선순환과 상생의 가치를 시골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체득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닭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그런 닭이 또한 훌륭한 육류 공급원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닭고기는 쇠고기, 돼지고기 등 이른바 ‘붉은 살코기’와는 다른 ‘흰 살코기’, 즉 육류 중에서는 효용 대비 부작용이 가장 적은 고기로 꼽힙니다. 단백질의 경우 일반적으로 닭고기(가슴살)에는 23.0g이, 쇠고기 우둔살에는 22.3g, 쇠고기 안심에는 21.0g, 돼지고기 안심에는 14.1g이 함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방은 닭고기 1.2g, 쇠고기 우둔 4.6g, 안심 7.1g, 돼지고기 13.2g 정도입니다. 얼른 봐도 닭고기가 사람에게 유용한 단백질 함량은 가장 많고, 지방 함량은 가장 적은 양질의 육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왜 싼 닭이 비싼 쇠고기, 돼지고기보다 훨씬 만족도가 높은 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고기 맛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동과의례’ 그 닭이 ‘서리’라는 ‘동과의례’의 중심이었던 이유도 금방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봄부터 가을까지 애, 어른 없이 농삿일에 내몰리느라 힘들게 지내고 맞는 겨울은 ‘농한기’였습니다. 농촌에서는 제법 한가한 철이라는 뜻이지요. 겨울 농한기가 되면 치르는 관행적인 습속이 있습니다. 눈 덮인 산골짜기를 훑는 토끼몰이나 마을 사람들이 추렴해 돼지를 잡는 일이 그런 일인데, 여기에 닭서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돼지는 심심파적으로 삼기엔 너무 크고, 토끼몰이야 재수가 좋아야 한 마리 잡히는 것이니 그 중 확실한 것이 닭서리일 밖에요. 그렇다고 산적질 하듯 아무 집이나 난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오 내오 없이 다 삼이웃인데 낯뜨거운 짓을 할 수는 없지요. 서리 대상을 꼽을 때 가장 맞춤한 방법은 또래 동무를 꼬드겨 그 집 닭을 서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까닭이 있습니다. 유순한 농경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떼지어 출몰하는 화적과 외침에 의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낮은 토담을 높여 성벽을 쌓는 건 정서에 부합하지 않고, 누군가가 밤새워 불침번을 설 수도 없으니 집집마다 똥개를 키워 밤낮 없이 집을 지키는 파수로 삼았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똥개가 볼품은 없어도 주인 섬기는 충성심 하나만은 대단합니다. 밤중에 이웃에 마실 한번 가려 해도 왈왈대는 똥개 때문에 주인이 몇 번씩 달래야 진정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 개 무서운 줄 모르고 닭서리하겠다고 대들었다가는 십중팔구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그 집 아들이 서리꾼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 주인이 한 걸음 먼저 들어가 똥개를 달래고, 그 틈에 한 놈이 닭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닭 한 마리 낚아채 나오기란 식은 죽 먹기지요. 그렇다고 물색없이 덤벙거리다가는 산통 깨기 쉽습니다. 닭이 의외로 겁이 많아 조심해야 합니다. 한겨울 찬 손으로 거머쥐려다가 닭이 놀라 푸드덕거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그러니 미리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따뜻하게 덥혀둬야 합니다. 닭을 거머쥘 때도 마치 그림자처럼 다가가 양손으로 목덜미와 날개죽지를 잽싸게 싸잡아 횃대에서 들어내립니다. 이 순간에 버벅대다간 다른 닭들이 놀라 순식간에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날개죽지와 목덜미를 한 손에 거머쥐면 끝입니다. 손에 들린 닭이야 발버등을 쳐봐야 소리가 날 일도 없고, 목덜미가 잡혀 옴짝달싹 못하니까요. 남은 일은 미리 점 찍어둔 골짜기로 줄행랑을 놓는 일입니다.  잡식의 운명 ‘육탐’ 이제 호궤할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들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골짜기로 들어가 꽝꽝 언 소나무 가지를 툭툭 꺾어모아 불을 지핀 뒤 불땀이 달아오를 때 잉걸불 속에 닭을 묻어두고 히히낙락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닭털이 불길에 오그라붙어서 불길 속에 그렇게 던져둬도 살이 타는 법이 없습니다. 속살이 먹을만 하게 익었겠다 싶을 때 꺼내 부지깽이로 툭툭 터럭만 털어내면 먹음직스럽게 익은 뽀얀 속살이 이내 드러나니까요. 남들 눈길 피해 서리 하는 떠꺼머리들이 손 날랜 숙수가 아니니 솜씨 부릴 일도 없습니다. 죽죽 찢어낸 살집을 깨소금에 찍어 나눠 먹은 뒤 입 씻고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다음 날, 친구 집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밤에 족제비가 들었는지 살오른 씨암탉이 종적도 없다”면서 어른들이 입맛을 다시면 친구 녀석은 “족제비 그걸 가만 둬서는 안 되겠다”고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을 것입니다. 잘 사네, 못 사네 해도 농투산이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는 육류 섭취량이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뼈 빠지게 일을 하지만 힘의 원천인 지방과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살집이 쪼르그라들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럴 나이가 아닌 데도 주름이 자글자글 겉늙어보였습니다. 농사 짓고 산다고 맛있는 걸 분별 못할 리는 없습니다. 그들도 쇠고기, 돼지고기가 먹고 싶지만, 읍내 푸줏간까지 나가 통 크게 쌈지를 열 엄두가 안 나니 그냥 고봉밥에 김치로 주린 배를 채우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이 겨울 농한기에 동네 사랑에 모여 노닥거리다가 입 맞춰서 닭 한 마리 서리하는 일은 흔했고, 설령 닭을 잃어버렸다 해도 그걸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 오른 암탉 한마리 해치우고 나면 얼굴에 기름이 오릅니다. 아침까지도 뱃골이 든든한 게 ‘이래서 고기, 고기 하는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이야 조석으로 고기 먹는 게 일상이라 ‘못 먹어서 얼굴에 버짐 필’ 일도 없고, ‘고기 맛 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소증 걸린 지 오래’라는 푸념을 뱉을 일도 없지만, 예전에는 항용 하는 말이 ‘이밥에 고기’였습니다. 쌀밥에 고기 한번 실컷 먹는 게 또한 일상의 바람이기도 해서 명절 앞두고 부침개 지져낸다고 번철에 올린 돼지기름 닳아서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회가 동하곤 했습니다.  섭생의 균형을 위한 원초적 일탈 ‘닭서리’ 그 시절엔 고기를 통해 얻는 모든 영양소가 결핍 상태이니 누구라도 고기에 ‘껄떡신’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육류 섭취를 제한하라는 둥, 동물성 지방을 줄여야 한다는 둥 그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을 하지만, 너무 잘 먹어서 문제가 된 ‘식탁 혁명’이 완성된 것도 실은 20∼30년 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명색 잡식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줄창 곡류와 채소류만 먹다가 가끔 고기를 탐한다고 이상할 것은 없는 일입니다. 가장 좋은 섭생은 음식을 균형 있게 먹는 것입니다. 좋다고 줄창 고기만 먹을 일도 아니고, 싫다고 아예 채소류를 외면하고 살 일도 아닙니다. 이 균형이 깨어지면 당장이야 표가 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고장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몸이지요. 요즘 흔히 듣는 ‘잘 먹고 잘 살아서 생긴 병’이 꽤나 됩니다. 비만이 그렇고,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그렇고, 당뇨도 많은 경우 췌장 혹사가 원인입니다. 이런 질환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바로 그 섭생 균형이 깨져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아는 일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먹고 싶은 것’을 먹지만, 여기에 ‘먹어줘야 하는 것’을 더해야 건강한 식생활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닭서리도 살펴보면 ‘균형 있는 섭생’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의 발현이었고, 거기에서 비롯된 우리 식의 일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사회적 관점에서 권장할 미덕은 아닐지라도 관용의 틀 안에서 ‘그럴 수도 있는 일’로 통용되었고, 그런 섭생의 균형 추구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돼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jeshim@seoul.co.kr
  • 前여친과 인연 이어준다던 ‘재회 컨설팅’과의 악연

    환불 규정조차 없어 피해자 속출 “떠나간 여자친구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데, 돈 280만원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돈은 돈대로 깨지고, 마음은 더욱더 찢겨 버리고. 저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나요.” 지난해 12월 20일 여자친구를 떠나보낸 김민수(29·자영업)씨는 헤어지고 4일 뒤 한 재회 컨설팅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2년 가까이 사귀었던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업체의 도움을 받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져 보고 싶었고, 상담을 통해 여자친구와 맞지 않았던 자신의 성격도 바꿔 볼 참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이 업체의 서비스료는 전화 상담 1시간에 4만원. 하지만 절실한 마음에 그 돈이 아까울 리 없는 김씨였다. 상담이 끝나자 업체가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하루 10건 정도의 상담 중 재회 가능성이 높은 고객을 한 명 골라 ‘회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김씨가 선정됐다는 것이었다. 단, 프로젝트 비용은 3개월에 280만원. 김씨는 비용 부담에 망설였지만 “우리만 믿고 따라오면 충분히 여자친구의 마음을 되돌려 드리겠다”는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김씨가 받은 서비스는 ‘카카오톡 지시’가 거의 전부였다. 성격 유형 검사를 받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질투심 유발을 위해 메신저 상태를 ‘봄날’로 바꿔 놓으세요” “여자친구가 카카오톡에 반응을 하면 이렇게 답하세요” 따위의 조언 외에는 뾰족한 비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이 업체와 승강이를 벌이는 사이 김씨의 여자친구에겐 다른 애인이 생기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환불 과정에서 발생했다. 환불을 받고 싶었지만 업체가 제시한 명확한 환불 규정 자체가 없었다.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아 어떤 상황에서 환불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조차 없었다. 김씨는 10일 “환불을 받고 싶었지만 환불 규정도 없고 괜히 환불을 요구하면 거절당할까 봐 속앓이만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재회 컨설팅’을 내건 다른 업체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국여성소비자연합 관계자는 “재회 컨설팅업체는 신생 업종인 만큼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조차 없어 관리 피해자 구제 사각지대인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말러의 거장’ 새해 첫 작품은 거인

    ‘말러의 거장’ 새해 첫 작품은 거인

    임헌정의 ‘거인’이 온다. 국내 최초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을 지휘하는 대장정으로 ‘임헌정=말러’라는 공식으로 통하는 임헌정 코리안심포니 예술감독이 새해 첫 작품으로 ‘거인과의 만남’을 선택했다. 오는 22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코리안심포니의 첫 정기 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선보인다. 20대 청년 시절 말러의 젊음과 패기,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화려한 승전가로 마무리되며 새해를 힘차게 여는 기분을 선사한다. 말러는 오케스트라 가곡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날 공연에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바리톤 유동직의 목소리로 말러의 가곡도 감상할 수 있다. 유동직은 깊이와 무게를 두루 갖춘 특유의 음색으로 말러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들려준다. 특히 봄날 아침 들판을 걷는 시골 청년의 순정한 기쁨을 담은 두 번째 곡 ‘나는 오늘 아침 들판을 걸었네’가 성악가의 정교한 표현력과 만나 무대에 뿜어낼 시너지가 기대된다. 공연을 즐기기 전 배경지식으로 무장하고 싶다면 19일 ‘프리콘서트 렉처’에 먼저 들러도 좋다. ‘말러 전도사’로 통하는 김문경 음악평론가가 한 시간 동안 작곡가와 곡에 대한 해설, 뒷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1만~6만원. (02)523-6258.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옻칠·한지의 한국적 서정

    옻칠·한지의 한국적 서정

    서울 한남동에 새로 문을 여는 갤러리 조은이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주목하는 한국의 인기작가 김덕용과 전병현의 작품으로 개관 초대전을 갖는다. 15일부터 열리는 ‘기억 속에 피어난 백화-봄날 오는가’전에서 두 작가는 각기 다른 결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두 작가는 동양화와 서양화 전공으로 각각 출발점은 다르지만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업 세계를 공유한다. 김덕용은 나무, 옻칠, 자개, 단청 등으로 깊이 있는 색채뿐 아니라 나무 특유의 결에 아련한 추억과 따스한 기억을 담아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펼쳐낸다. 전병현은 30여년간 한지를 재료로 한국적 서정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려 왔다. 이번 전시에는 미발표 정물화와 소품 신작을 선보인다. 전시는 2월 26일까지. (02)790-5889.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6) 봄날의 문무대, 그 겨울의 병영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6) 봄날의 문무대, 그 겨울의 병영

    중대 막사 지붕에 흰 눈이 쌓였다. 달빛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밤이었다. 멀건 육개장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침상에 쪼그려 TV를 보던 중 어디선가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뒤편에 집합하라는 고참의 명령. 다섯 명의 입대 동기들은 부리나케 맨발로 뛰어나가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5분쯤 지났을까? 술에 불콰해진 고참병 둘이 나타나 “솔직히 말하라, 고향 생각이 나느냐”고 엉뚱하게 물었다. 고향 생각, 나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간절한 긴긴 겨울밤이었다. 이구동성 “네”라고 대답했다. 순간 여기저기서 무섭게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등병들이 군기가 빠져 군대 와서 집 생각하고 있다니, 고향 생각 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고함과 함께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어디서 들은 대로 다치지 않게 요령껏 맞는답시고 모두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바빴다. 잠시 뒤 다른 선임병이 부드럽게 물었다. “고향 생각이 나느냐“는 똑같은 질문이다. 어, 누구를 바보로 아나. “아닙니다”고 악에 받쳐 대답하자 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군기가 빠져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등병이 벌써부터 군기가 빠져 거짓말을 하면 이 나라 이 강산은 누가 지키느냐’는 훈계와 함께 구타는 한 시간가량 계속되다 끝났다. 세면장에 가서 터진 입술을 씻고 침상에 누우니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린다.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 시작했다. 입대 동기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 또한 울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지금의 군대가 아니다. 80년대 어느 겨울밤 내가 경험한 군대 풍경이다. 80년대는 군인의 시대였다. 1979년 12·12로 권력을 틀어쥔 군사 정권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힘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불만을 갖거나 반발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험악했던 시절, 군대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가혹한 통과의례였다. 휴머니즘을 포기한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친절한 구타 등등…. 군 시절을 되새기면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들이다. 그래서 군은 이 땅의 중년에게 젊은 날의 상처쯤으로 존재한다. 군대 이전의 군대도 있었다. 문무대다. 봄은 문무대와 함께 왔다. 입학한 지 한 달,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이면 신입생들은 성남에 있는 학생중앙군사학교, 즉 문무대로 5박 6일 병영집체 훈련을 가야 했다. 우리는 그저 간단하게 남한산성 간다고들 했다. 그리고 남한산성이란 말이 육군형무소를 상징하는 무서운 의미가 있다는 것은 훗날 입대해서 알았다. “남한산성 한 번 가면 그뿐이야.” 걸핏하면 야전삽 자루로 우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고참병을 통해 그 말의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서슬이 퍼렇던 시대였지만 젊은 문무대는 늘 시끄러웠다. 군사훈련을 거부하며 시위하는 일이 발생하면 주동 학생에게는 어김없이 강제 조기징집의 보복이 따랐다. 문무대 입소가 남학생에게는 무서움과 혐오의 대상이지만 여학생들에게는 일주일 휴강이라는 큰 떡을 안기게 된다. 문무대 입소에는 사연도 많다. 같은 과 여학생들은 저마다 맘에 드는 남학생에게 선물을 안기기도 하고 입소 중간에 하루 있는 면회를 이용해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입소 전 여학생에게 받은 초콜릿과 담배의 양으로 인기를 가늠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과는 아예 추첨을 통해 남학생과 여학생 간에 파트너를 정해 위문품을 들고 면회를 가게 하기도 했다. 남학생들만 득실대는 공대생들이 가장 서럽다는 때가 바로 문무대 입소 시절이었다. 단순 면회 목적의 짝짓기도 때로는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문무대 커플이란 말까지 등장한 시절이 80년대다. 군 생활은 힘들었다. 1990년 보안사 윤석양 이병과 보병 제9사단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에서 드러나듯 80년대 군대는 암흑의 시기였다. 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중대장 앞에서 여당 표를 찍었다. 지금의 민주화 시대에는 감히 상상조차 힘든 풍경쯤 된다. 그 시절 군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의 아들 대 어둠의 자식들’ 논쟁이다. 백 있고 돈 있는 집의 아들들은 군을 빠지거나 면제받았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결혼 초 아내에게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는 “왜 자기만 현역이냐”는 것이었다. 아내 친구의 잘난(?) 남편들은 현역 출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대장 위에 병장이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래서 지금도 청문회나 하마평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의 병역 편법을 들을라치면 화가 뻗치게 된다. 큰 국제경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가 앞장서 부자 프로스포츠 선수에게까지 병역혜택을 남발하고 엄청난 포상금을 안긴다.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으므로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힘들게 군대생활을 한 지금의 중년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된다. 군대가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만 가는 곳처럼 인식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병장 콤플렉스가 아니냐고 놀린다. 백사(白蛇)를 뽀얗게 고와 중대장에게 상납한 덕에 GP(감시초소)에서도 매달 휴가를 나왔다는 선배가 실은 동사무소 방위병을 일컫는 ‘똥방위’ 출신임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 주말마다 외출증 끊어 이대 앞을 주름잡았다는, 부모를 잘 둔 신의 아들이 들려주는 허풍에 기죽었던 기억들이 여전히 긍정적인 군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 병영 풍경은 중년에게는 씁쓸달콤한 기억으로 살아 있는 생물이다. 여친이 왔다는 전갈에 속눈썹이 휘날리도록 위병소로 뛰었던 기억, 들기름에 잰 고추장에 찍어 먹던 양파의 매서운 맛 등등은 갈수록 새록새록하다. 가끔 술자리에서 들려지는 선후배들의 신산했던 군대 얘기는 일순간 좌중을 숙연케 한다. 그런 밤 귀갓길 생각나는 옛 노래가 있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 상처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나….” ‘전선을 간다’라는 애창 군가다. 논산훈련소 30연대 훈련병 시절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의 ‘진짜 사나이’를 줄곧 불렀지만 너무 직설적어서 세련미가 떨어진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우리는 이제 군 내무반이 등장하는 TV광고를 바라보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소주잔을 들이켜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기성세대가 됐다. 그리고 그때의 군번은 아내 몰래 꼬불쳐 둔 통장의 비밀번호로 사랑받는다.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결혼해도 아들만은 절대로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절, 그래도 가끔 돌이켜 보면 소중한 추억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 처절하고 쓰라렸던 그 시절도 문득문득 토첼리의 세레나데처럼 ‘우리 기쁜 젊은 날’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새해다. 그 겨울 폭설 속에 행군하며 부르던 군가가 문득 생각난다.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이 고지 저 능선에 /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 ‘사나이 한목숨’이다. 둥근 보름달이 터질 듯이 환하던 그 밤 ‘어머님의 고운 눈길’을 부르면서 우리 모두는 목이 메었다. 그리고 그날의 꽃다운 청춘들도 이제는 늙었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l.com
  •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1) 강원 동해 묵호등대마을·논골담길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1) 강원 동해 묵호등대마을·논골담길

    걷기에 이은 먹기 열풍, 그다음은 뭘까. 몸 튼튼해지고 배와 입이 채워지니 정신적인 무언가를 자극하고 채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찾아 나선 것이 예술마을로 떠나는 여행이다. 예술마을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재능 있는 이들이 소외된 지역에 자리잡고 뭔가를 하자 동네가 달라졌고 주민들이 행복해졌다. 덩달아 여행자들도 즐겁다. 예술마을로의 여행은 물질이 가져다주는 외향적인 포만감 너머 ‘사람답고 싶은’, ‘아름답고 싶은’ 본능을 일깨운다. 예술마을기행은 더불어 살고 싶은 세계에서 보내는 또 다른 초청장이다. 강원 동해 묵호등대마을은 묵호 바다를 비추는 하얀 등대 아래 올망졸망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마을이다. 골목은 사람 한두 명이 겨우 지나칠 만큼 좁다. 언덕에 깃든 집들 또한 방 두어 개를 둔 작은 규모다. 차가 다닐 수 없으니 주민들은 아직도 짐을 직접 들고 골목을 오르내린다. 그나마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끝날 만큼 골목이 길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묵호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가 삼척과 양양 등에서 나오던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항구가 되면서 크게 발전했다. 명태와 오징어 잡이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는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만큼 부자 어촌으로 이름이 났다. 전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희망의 불씨를 피우기 위해 정착하던 곳이어서 ‘삶의 마지막 기항지’라 불리기도 했다. 한때 반짝 호황을 누리던 도시는 그러나 석탄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고 오징어, 명태 잡이도 예전만 못해지면서 급속도로 쇠락했다. 빈집이 생기고 어르신들만 남아 삶을 꾸리는 마을도 늘어났다. 작은 묵호항을 중심으로 6만~7만명이 살던 도시는 이제 동해시 전체를 합쳐도 10만명이 안 된다. 묵호등대마을은 이러한 묵호의 흥망성쇠를 모두 안고 있는 동네다. 그러던 마을이 ‘예술’을 매개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4~5년 전부터 머물기 시작한 젊은 예술가들이 골목 사이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기 시작하면서다. 전국의 흔한 벽화마을 중에서도 묵호등대마을의 벽화는 진정성과 참신성, 지속성으로 주목받는다. 지역의 삶과 이야기를 진지하면서도 위트 있게 담았고 무엇보다도 꾸준히 관리해 온 것이다. 그 진정성을 알아본 여행자들이 열렬히 화답했다. 이 때문에 차이를 둬 이곳의 벽화를 ‘담화’, 이 길을 ‘논골담길’이라고 부른다. 논골담길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등대오름길과 논골1~3길이다. 묵호항 부근에서 각각 시작된 길은 등대에서 모두 만난다. 보따리를 이고 골목 언덕길을 오르내리던 할머니는 원더우먼이 됐고, 만원짜리 물고 다니던 강아지 만복이와 지게를 지고 골목을 오르내리던 할아버지도 담화의 주인공이 됐다. 또 다른 집 담벼락엔 물고기만큼 많은 별이 담긴 묵호의 밤하늘과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가 담겨 있다. 어느 귀퉁이엔 과거 묵호의 번화가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 그림들은 눈부신 바다 풍경과도 어우러져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낸다. 이 담화를 5년 전부터 진행하고 관리해 온 프로젝트미터의 유현우 작가는 “그림에 앞서 동네 주민들과의 소통에 더욱 힘썼다”고 했다. 동해문화원의 공모사업에 의해 시작된 작업이었지만 작가들은 그리기에 앞서 무작정 동네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그림 소재를 찾았고 주민들과 친해지면서 동네를 진정 사랑하게 됐다. 젊은 작가들의 정성이 통했는지 벽화에 다소 부정적이던 일부 주민들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논골담길 담화들이 좋은 반응을 얻자 작가들은 아예 거주지를 동해로 옮겼다. 지난해 하반기 담화를 새로 단장하면서는 지역 토박이 작가들도 새롭게 참여해 새 볼거리를 입혔다. 사실 논골담길을 첫 기행지로 꼽은 이유는 어떤 볼거리에 있지 않다. 논골담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낯선 이방인들을 경계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 나눠 준 동네 주민들이었다. 쇠락한 동네에 생기가 돌면서 주민들은 활력을 얻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이 동네를 바꿀 수 있다는 자부심에 희망을 가졌다. 희망이 실종된 시대에 조심스럽게 ‘희망’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마을은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였다. 지난 12월 중순 마을의 청년 작가들은 동해예술문화회관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작가들의 전시를 담당해 온 곳은 원래 논골담길 입구의 갤러리 ‘묵호짬뽕’이었다. 하지만 논골담길의 상징과도 같았던 ‘묵호짬뽕’은 3년여의 짧은 실험을 마치고 최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해시에서 건물을 사들인 뒤 이를 헐고 주차장으로 만든 것이다. 작가들은 또 다른 전시공간을 찾고 있지만, 예년에 비해 5~6배나 뛰어 버린 부동산 가격은 가난한 청년 작가들에게 큰 부담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역 주민들과 살갑게 아침 인사를 나눈다. 오고 가는 미소에 흐믓한 기분이다. 묵호등대마을에 해가 뜬다. 이때가 논골담길을 돌아 보기 가장 아름다운 때다. 2016년을 시작하기 딱 좋다. 글 사진 여행작가 enkaykim@naver.com ■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승용차로는 묵호항수변공원 주차장 또는 묵호등대 주차장(동해시 해맞이길 289 묵호항로표지관리소)을 찾아간다. ‘뚜벅이’라면 묵호역에서 등대 방면 또는 묵호항수변공원 방면으로 걸어 등대오름길(일출로 97)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함께 가볼 곳:묵호역에서 동해를 보며 달리는 바다열차(정동진역~삼척역)가 하루 2회(주말 3회) 왕복 운행한다. 묵호등대도 관람할 수 있다. 등대에 오르면 동해바다와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등대 주변의 삼본 아파트는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가 탄생한 주요 배경이 된 곳이다. 등대 넘어 출렁다리를 지나 20여분 걸으면 어달해변이 나온다. 짧은 길이지만 겨울 바다를 만끽하며 걷기 좋다. 등대마을 아래 묵호역 방면에 동해중앙시장이 있다. 강원도 토속 먹거리를 푸짐하게 맛볼 수 있다. 이 시장에서도 벽화 작업이 한창이다. 아울러 추암해변, 무릉계곡, 천곡동굴, 망상해변 등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맛집:묵호항 수산물유통센터에서는 활어회를 직접 골라 이층에서 먹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곰치를 넣고 시원하게 끓인 곰치국도 유명하다. 아침이나 점심 식사로 그만이다. 묵호항 쪽 식당도 좋지만 어달항 주변에 곰치국 유명한 식당이 많다. 서울신문은 새해를 맞아 ‘김남경의 예술마을기행’을 새로 연재합니다. 여행작가이자 여행 콘텐츠 제작사 ‘스토리발전소’ 대표인 필자가 발로 뛰어 취재한 전국의 예술마을을 격주로 전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자어로 본 금융권 수장들의 ‘2016 화두’… “위기 가운데 혁신·변화 온다”

    한자어로 본 금융권 수장들의 ‘2016 화두’… “위기 가운데 혁신·변화 온다”

    ‘산류천석, 제구포신, 능서불택필….’ 금융권 수장들이 새해를 맞아 꺼내 든 한자 성어들이다. 올해는 유난히 ‘위기’를 언급하는 얘기가 많았다. 미국 금리 인상, 중국 경기 둔화, 신흥국 위기 확산, 저유가 등 우리 경제에 영향을 줄 대외 변수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계·기업 부채 증가, 내수경기 회복 지연 가능성 등 녹록지 않은 국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강한 위기감 속에서도 혁신과 변화를 독려하는 주문도 많았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3일 신년사에서 ‘산류천석’(山溜穿石)을 인용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듯 끈기 있는 작은 노력으로 어려운 일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임 위원장은 당나라 시인 이가우의 ‘야도화쟁발’(野渡花爭發) 시구도 인용했다. 봄날 들판 나루터에 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것처럼 금융개혁의 꽃을 만발케 해 국민 체감도를 높이자는 의지에서다.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제구포신’(除舊布新)을 거론했다.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펼친다는 뜻으로 금융인들이 구시대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변화와 혁신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인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을 인용했다. 황 회장은 “시장 여건이 어렵더라도 유능한 조직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며 당당한 도전을 강조했다. 장남식 손해보험협회장은 빈틈없는 계략을 의미하는 ‘기략종횡’(機略縱橫)을 제시했다. 격변하는 보험산업의 환경 변화에 치밀하게 대응하자는 의미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정성을 다하면 그 뜻이 하늘에 닿는다는 ‘일념통천’(一念通天)의 정신으로 새해에는 “손님(고객)의 기쁨을 찾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김용환 농협금융 회장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불위호성’(不爲胡成)으로 응대했다. 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달성할 수 없다는 뜻으로, 중장기 계획 마련에 따른 직원들의 실천을 독려한 발언이다.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인심제 태산이’(人心齊 泰山移)를 제시했다.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태산도 옮길 수 있다는 의미로 성공적인 민영화 완수 의지를 담았다.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응변창신’(應變創新)을 얘기하면서 “변화에 한발 앞서 대응하고,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자세로 창조적 성장을 해 나가자”고 독려했다. 원숭이해를 맞아 ‘원비지세’(猿臂之勢)를 인용한 수장도 있었다. 원비지세는 원숭이 팔의 형태를 뜻하는 말로, 형세가 좋을 때는 나아가고 나쁠 때는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곽범국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원숭이해를 맞아 항상 유연하고 혁신적인 기관이 되자”며 이 말을 인용했다. 유재훈 예탁결제원 사장은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마부정제’(馬不停蹄)라는 옛말이 있다”며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했다. 김한철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은 “율곡 이이 선생이 ‘혁구습 일도결단근주’(革舊習 一刀決斷根株)라고 말했는데, 나쁜 옛 습관을 혁파하고 한칼에 뿌리까지 끊는다는 뜻”이라며 업무 혁신에 총력을 쏟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윤이상 ‘예악’·차범석 ‘산불’ 20세기 대표 한국 공연예술

    윤이상의 ‘예악’(1996), 차범석의 ‘산불’(1962), 김매자의 ‘춤본Ⅰ, Ⅱ’(1987, 1989), 사물놀이팀의 ‘사물놀이’(1978), 이상규 대금협주곡 ‘대바람 소리’(1978)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예술에 선정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는 지난 10월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 4개 장르별로 10명씩 모두 40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20세기를 대표할 한국 예술 3개 작품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7일 발표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윤이상의 ‘예악’이 전문가 10인 중 3인의 표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 관현악을 위한 ‘예악’은 1966년 독일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윤이상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다. 강준일 ‘마당’(1983), 김성태 ‘코리안 카프리치오(한국기상곡)’(1944), 안익태 ‘한국환상곡’(1937)이 공동 2위에 올랐다. 연극 분야에서는 차범석의 ‘산불’이 4표를 얻어 1위로 선정됐다. 오영진 ‘맹진사댁 경사’(1942), 오영진 ‘살아있는 이중생각하’(1949), 오태석 ‘자전거’(1983), 오태석 ‘태’ (1974), 유치진 ‘토막’(1933), 이강백 ‘봄날’(1984), 이윤택 ‘문제적 인간 연산’(1995), 최인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 등 8개 작품이 공동 2위였다. 무용 분야에서는 김매자의 ‘춤본 Ⅰ, Ⅱ’가 3명의 지지를 받아 1위를 했다. 배정혜 ‘타고 남은 재’(1977), 배정혜 ‘유리도시’(1987), 송범 ‘도미부인’(1984)이 2표씩을 얻어 공동 2위에 올랐다. 전통예술 분야에서는 사물놀이팀(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의 ‘사물놀이’와 이상규 대금협주곡 ‘대바람 소리’가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김영동의 ‘매굿’(1981), 황병기의 ‘침향무’(1974)는 공동 3위에 선정됐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세밀화 추상화…간송미술문화재단 ‘화훼영모… ’展

    세밀화 추상화…간송미술문화재단 ‘화훼영모… ’展

    ‘내 지금 생물을 바라보며 하늘의 마음을 보았노라.’(我今觀物見天心)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을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인식했다. 보고, 기르고, 나아가 글과 그림으로 옮겨 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성정을 함양하고자 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수장 작품 중에서 동식물을 소재로 한 전통 회화작품들을 시기별로 선별해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을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고 있다. 화훼영모(花卉翎毛)란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킨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년에 두번씩 열던 소장품전을 DDP 개관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여온 뒤 여는 다섯 번째 기획전으로, 그림을 통해 시대 정신과 기법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오세창 선생이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던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이양도’(二羊圖)부터 조선왕조 말기의 이도영(1884~1933)이 그린 ‘백령식록’(百齡食祿)까지 550년의 기간 동안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 90여점이 출품됐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백인산 연구실장은 “선조들은 동식물들을 통해 도덕적 이상과 더불어 무병장수나 입신출세, 부귀영화 등과 같은 현세적 욕망을 담아내곤 했다”며 “시대별 화법의 변화와 각 소재들이 담고 있는 상징, 문화적 코드를 맞춰 가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 말 조선 초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정착 시기에는 중국 남방 화풍의 강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김안로의 막내아들 김시(1524~1593)가 그린 ‘야우한와’(野牛閒臥)에서 보듯이 배경은 우리 산수지만 소는 남중국의 물소다. 주자와 송설이 남중국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선성리학을 이뤄내면서 그림에도 진경산수화가 출현하고 화훼영모화의 소재로 우리 주변의 동식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화훼영모화는 진경시대에 이르러 겸재 정선(1676~1759)에 의해 독자적 사생 기법이 완성되고 현재 심사정(1707~1769)이 시도한 조선남종화풍으로의 반전을 거쳐 조선 고유색이 다양한 형태로 극대화된다. 패랭이꽃이 피어 있고 참개구리와 나비가 모여든 한여름의 오이밭 풍경을 담은 ‘과전전계’(瓜田田鷄·오이밭의 참개구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70대 후반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풍의 사생 기법을 계승한 변상벽(1730~1775), 김홍도(1745~1806), 김득신(1754~1822)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표암 강세황(1713~1791),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청조문인화풍의 함축된 생략 기법을 화훼영모에 도입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문화 노쇠 현상과 맞물려 사생력이 후퇴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옛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우는 연을 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군자를 떠올렸다.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높았던 강세황의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은 두 포기의 연으로 청정한 자태를 담아냈다. 화훼영모화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사물들이 지닌 의미에 빗대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어는 등용문을 뜻하니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라는 뜻을, 모란은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등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김홍도의 ‘황묘농접’(黃猫蝶·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은 화창한 봄날 뜰에 있던 주황빛 고양이가 패랭이꽃을 보고 날아든 검푸른 제비나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일흔, 여든이 되도록 청춘을 누리며 뜻하는 대로 이뤄지소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02)2153-0608.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간송문화재단 동식물 소재 동양화 걸작 선보인다

    간송문화재단 동식물 소재 동양화 걸작 선보인다

     ‘내 지금 생물을 바라보며 하늘의 마음을 보았노라.’(我今觀物見天心)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장가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을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인식했다. 보고, 기르고, 나아가 글과 그림으로 옮겨 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성정을 함양하고자 했다.  간송문화재단이 수장 작품 중에서 동식물을 소재로 한 전통 회화작품들을 시기별로 선별해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을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고 있다. 화훼영모(花卉翎毛)란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킨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년에 두번씩 열던 소장품전을 DDP 개관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여온 뒤 여는 다섯 번째 기획전으로, 그림을 통해 시대 정신과 기법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오세창 선생이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던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이양도’(二羊圖)부터 조선왕조 말기의 이도영(1884~1933)이 그린 ‘백령식록’(百齡食祿)까지 550년의 기간 동안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 90여점이 출품됐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백인산 연구실장은 “선조들은 동식물들을 통해 도덕적 이상과 더불어 무병장수나 입신출세, 부귀영화 등과 같은 현세적 욕망을 담아내곤 했다”며 “시대별 화법의 변화와 각 소재들이 담고 있는 상징, 문화적 코드를 맞춰 가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 말 조선 초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정착 시기에는 중국 남방 화풍의 강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김안로의 막내아들 김시(1524~1593)가 그린 ‘야우한와’(野牛閒臥)에서 보듯이 배경은 우리 산수지만 소는 남중국의 물소다. 주자와 송설이 남중국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선성리학을 이뤄내면서 그림에도 진경산수화가 출현하고 화훼영모화의 소재로 우리 주변의 동식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화훼영모화는 진경시대에 이르러 겸재 정선(1676~1759)에 의해 독자적 사생 기법이 완성되고 현재 심사정(1707~1769)이 시도한 조선남종화풍으로의 반전을 거쳐 조선 고유색이 다양한 형태로 극대화된다. 패랭이꽃이 피어 있고 참개구리와 나비가 모여든 한여름의 오이밭 풍경을 담은 ‘과전전계’(瓜田田鷄·오이밭의 참개구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70대 후반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풍의 사생 기법을 계승한 변상벽(1730~1775), 김홍도(1745~1806), 김득신(1754~1822)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표암 강세황(1713~1791),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청조문인화풍의 함축된 생략 기법을 화훼영모에 도입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문화 노쇠 현상과 맞물려 사생력이 후퇴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옛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화사한 꽃을 피우는 연을 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군자를 떠올렸다.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높았던 강세황의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은 두 포기의 연으로 청정한 자태를 담아냈다. 화훼영모화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사물들이 지닌 의미에 빗대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어는 등용문을 뜻하니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라는 뜻을, 모란은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등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김홍도의 ‘황묘농접’(黃猫弄蝶·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은 화창한 봄날 뜰에 있던 주황빛 고양이가 패랭이꽃을 보고 날아든 검푸른 제비나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일흔, 여든이 되도록 청춘을 누리며 뜻하는 대로 이뤄지소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02)2153-0608.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65년째 ‘고향없는 추석’… 쌓이는 이산 세월에 그리움만 켜켜이

    65년째 ‘고향없는 추석’… 쌓이는 이산 세월에 그리움만 켜켜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의 명절은 늘 반가움보다 그리움이 먼저다. 북한 원산 출신인 원로 소설가 이호철(83)씨도 지난 65년간 고향 없는 추석 명절을 지내왔다. 10월 20~26일로 예정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앞두고 이씨가 가족과 고향을 향한 애끓는 심경을 글로 썼다. 예술원 회원인 이씨는 2000년 8월 첫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여동생을 만났다. 나는 1950년 12월, 북한의 원산에서 18세 어린 나이로 가족 곁을 떠나 혼자 부산에 닿았다. 그렇게 부두 노동, 제면소 직공, 미군기관 경비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1955년부터 작단에 데뷔, 소설가로 60년을 살아오면서 83세가 되기까지 그동안 어느 한순간도 고향 쪽을 잊은 일은 없었다. 하여 2000년 첫 이산가족 상봉 때, 누이동생 생일이 동짓달 초아흐레이고 남동생 생일이 3월 초엿새임을 말하자, 50년 만에 만났던 누이동생도 엄청 놀라던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50년 넘어 줄곧 고향 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8세에 홀로 北가족 떠나 부산서 생활 특히 추석날이면 더 싱숭생숭하여 하숙방에 혼자 벌렁 누워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나들과 남동생, 여동생을 한 분 한 분 차곡차곡 그리며 혼자 눈물 섞어 망향에 잠기곤 했었다. 그렇게 더러는 이미 10년 전에 고인이 된 후배 소설가 한남철이 일부러 추석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찾아와, 같이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었다. 적선동, 사직동, 청운동 하숙 시절에 그랬었다. 하지만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면, 조금 묘해지기도 하였다. 실은 내가 북에서 어렸을 때는 추석보다는, 봄날 한식날을 더 귀히 여겨 그네 놀이나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하였었는데, 이 남쪽에서는 한식보다는 추석날을 더 명일로 치지를 않는가. 하지만 실제로 나 같은 사람으로서 망향에 잠기기에는 양명한 봄날인 한식날보다, 낙엽도 우수수 떨어지는 추석 때가 한결 더 어울려 보이기는 하였었다. 더구나 내 고향 원산은, 흔히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으뜸으로 꼽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주, 세 번째는 평안도 박천…. 이것이 언제부터 내려오는 속설인지는 모르지만, 이 밖에도 주택가로 가장 좋은 곳으로는 강원도 강릉과 황해도 해주, 그리고 함경도의 함흥을 친다고 한다. 실제로 원산은 동해 바다를 끼고 있고, 바로 남쪽으로는 안변 평야가 자리해 있어 질 좋은 쌀과 사과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가까이 약수터가 있는 석왕사와 금강산, 총석정 등 주위에 명승지가 많고, 태백산맥의 시작인 황룡산도 둥그렇게 솟아 있고, 명사십리와 송도원 해수욕장도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살기 좋고 질 좋은 쌀·사과로 유명한 내고향 원산에서 동해안 남쪽으로 고성까지가 300리, 다시 그 고성에서 강릉까지가 300리, 그 600리 해안이 기가 막힌 명승지였음은 옛날부터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그 고성도 남북 분단의 휴전선 안으로 들어 있어 황량한 풀밭으로 변해져 있을 뿐이지만.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두만강 끝머리까지의 동해안도 절경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 해산물들은 일단 원산으로 모아져서 서울과 평양으로 기차 편으로 운송이 되어, 품팔이 일꾼들도 원산의 인심이 후하다며 원산을 유독 좋아들 하였었다. 그 무렵에는 주문진이나 강릉, 삼척 등의 해산물도 원산과 양양까지 통하던 동해선 기차를 통해 일단은 원산에 모였었다. ●1949년 가봤던 연천… 지금도 그대로 1949년 초여름이던가, 나는 북에서 고 2 때 38선 근처 연천의 한탄강 유역 농촌을 열흘 정도 돌면서 벌인 행사에 동원되어 시 낭독도 하고 노래도 불렀었는데 그 어느 날 저녁은 밤중에 전곡의 한탄강 경계선까지 콩밭 속을 살금살금 다가갔다가 강 건너 남쪽의 국방군이 쏘아대는 ‘딱 궁’ 하는 총소리도 들어 보고, 이튿날 낮에는 전곡 읍내의 인민군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삼엄한 분위기도 엿보았었다. 이번에 그 근처를 모처럼 돌아보았더니 그 근처 농촌 모습은 그 옛날과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고, 연천 읍내의 사진관 앞에서 동료 학생 하나와 사진을 찍었던 자리 근처도 그대로였음을 확인했지만 그때 같이 사진을 찍었던 그 동료 학생은 그 뒤 월남하지 못했음을 아쉬움 섞어 쓰디쓰게 되씹었다. 서울에서 원산까지의 거리는 220㎞, 우리네 이수(里數)로는 550리이다. 그러니까 서울서 전주까지의 거리, 서울서 영동까지의 거리다. 바로 요만한 거리임에도 지난 65년 동안 한 번 가 볼 엄두나마 내기는커녕,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으니 사람살이 한평생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 65년째 ‘고향없는 추석’…쌓이는 이산 세월에 그리움만 켜켜이

    65년째 ‘고향없는 추석’…쌓이는 이산 세월에 그리움만 켜켜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의 명절은 늘 반가움보다 그리움이 먼저다. 북한 원산 출신인 원로 소설가 이호철(83)씨도 지난 65년간 고향 없는 추석 명절을 지내왔다. 10월 20~26일로 예정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앞두고 이씨가 가족과 고향을 향한 애끓는 심경을 글로 썼다. 예술원 회원인 이씨는 2000년 8월 첫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여동생을 만났다. 나는 1950년 12월, 북한의 원산에서 18세 어린 나이로 가족 곁을 떠나 혼자 부산에 닿았다. 그렇게 부두 노동, 제면소 직공, 미군기관 경비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1955년부터 작단에 데뷔, 소설가로 60년을 살아오면서 83세가 되기까지 그동안 어느 한순간도 고향 쪽을 잊은 일은 없었다. 하여 2000년 첫 이산가족 상봉 때, 누이동생 생일이 동짓달 초아흐레이고 남동생 생일이 3월 초엿새임을 말하자, 50년 만에 만났던 누이동생도 엄청 놀라던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50년 넘어 줄곧 고향 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8세에 홀로 北가족 떠나 부산서 생활 특히 추석날이면 더 싱숭생숭하여 하숙방에 혼자 벌렁 누워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나들과 남동생, 여동생을 한 분 한 분 차곡차곡 그리며 혼자 눈물 섞어 망향에 잠기곤 했었다. 그렇게 더러는 이미 10년 전에 고인이 된 후배 소설가 한남철이 일부러 추석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찾아와, 같이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었다. 적선동, 사직동, 청운동 하숙 시절에 그랬었다. 하지만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면, 조금 묘해지기도 하였다. 실은 내가 북에서 어렸을 때는 추석보다는, 봄날 한식날을 더 귀히 여겨 그네 놀이나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하였었는데, 이 남쪽에서는 한식보다는 추석날을 더 명일로 치지를 않는가. 하지만 실제로 나 같은 사람으로서 망향에 잠기기에는 양명한 봄날인 한식날보다, 낙엽도 우수수 떨어지는 추석 때가 한결 더 어울려 보이기는 하였었다. 더구나 내 고향 원산은, 흔히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으뜸으로 꼽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주, 세 번째는 평안도 박천…. 이것이 언제부터 내려오는 속설인지는 모르지만, 이 밖에도 주택가로 가장 좋은 곳으로는 강원도 강릉과 황해도 해주, 그리고 함경도의 함흥을 친다고 한다. 실제로 원산은 동해 바다를 끼고 있고, 바로 남쪽으로는 안변 평야가 자리해 있어 질 좋은 쌀과 사과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가까이 약수터가 있는 석왕사와 금강산, 총석정 등 주위에 명승지가 많고, 태백산맥의 시작인 황룡산도 둥그렇게 솟아 있고, 명사십리와 송도원 해수욕장도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살기 좋고 질 좋은 쌀·사과로 유명한 내고향 원산에서 동해안 남쪽으로 고성까지가 300리, 다시 그 고성에서 강릉까지가 300리, 그 600리 해안이 기가 막힌 명승지였음은 옛날부터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그 고성도 남북 분단의 휴전선 안으로 들어 있어 황량한 풀밭으로 변해져 있을 뿐이지만.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두만강 끝머리까지의 동해안도 절경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 해산물들은 일단 원산으로 모아져서 서울과 평양으로 기차 편으로 운송이 되어, 품팔이 일꾼들도 원산의 인심이 후하다며 원산을 유독 좋아들 하였었다. 그 무렵에는 주문진이나 강릉, 삼척 등의 해산물도 원산과 양양까지 통하던 동해선 기차를 통해 일단은 원산에 모였었다. ●1949년 가봤던 연천… 지금도 그대로 1949년 초여름이던가, 나는 북에서 고 2 때 38선 근처 연천의 한탄강 유역 농촌을 열흘 정도 돌면서 벌인 행사에 동원되어 시 낭독도 하고 노래도 불렀었는데 그 어느 날 저녁은 밤중에 전곡의 한탄강 경계선까지 콩밭 속을 살금살금 다가갔다가 강 건너 남쪽의 국방군이 쏘아대는 ‘딱 궁’ 하는 총소리도 들어 보고, 이튿날 낮에는 전곡 읍내의 인민군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삼엄한 분위기도 엿보았었다. 이번에 그 근처를 모처럼 돌아보았더니 그 근처 농촌 모습은 그 옛날과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고, 연천 읍내의 사진관 앞에서 동료 학생 하나와 사진을 찍었던 자리 근처도 그대로였음을 확인했지만 그때 같이 사진을 찍었던 그 동료 학생은 그 뒤 월남하지 못했음을 아쉬움 섞어 쓰디쓰게 되씹었다. 서울에서 원산까지의 거리는 220㎞, 우리네 이수(里數)로는 550리이다. 그러니까 서울서 전주까지의 거리, 서울서 영동까지의 거리다. 바로 요만한 거리임에도 지난 65년 동안 한 번 가 볼 엄두나마 내기는커녕,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으니 사람살이 한평생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 [이주일의 어린이 책] 못생긴 얼굴 커다란 몸집 난 외톨이죠… 착한 내 마음 당신 눈에도 언젠가 보이겠죠?

    [이주일의 어린이 책] 못생긴 얼굴 커다란 몸집 난 외톨이죠… 착한 내 마음 당신 눈에도 언젠가 보이겠죠?

    친절한 거인/마이클 모퍼고 지음/마이클 포맨 그림/김서정 옮김/문학과지성사/32쪽/1만 2000원 옛날 은빛 호수 한가운데 조그마한 섬에 한 젊은이가 살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줄곧 혼자 지냈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게 너무 슬펐다. 심성이 정말 착한데도 거인처럼 몸집이 크고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아무도 곁에 오려 하지 않았다. 젊은이는 날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 발리로치 마을에서 보릿짚 이엉으로 집과 외양간과 헛간의 지붕을 잇는 일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사람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야수라고 부르며 함부로 대했다. 아이들에게까지 미친 야수를 조심하라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어느 봄날 아침 창문을 연 젊은이는 밀짚모자를 쓴 젊은 아가씨가 호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을 봤다. 갑자기 배가 기울더니 비명소리와 함께 아가씨가 물 밑으로 사라졌다. 젊은이는 곧장 호수에 뛰어들어 아가씨를 구했다. 아가씨는 말했다. “당신은 야수가 아니에요. 눈에 이렇게 친절한 빛이 가득한걸요. 내 이름은 미란다예요. 내가 영원한 친구가 되어 줄게요.” 둘은 그날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젊은이는 오후 늦게 그녀를 마을로 데려다줬다. 몹시 슬펐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 하지만 미란다의 아버지는 딸이 야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내며 딸을 방에 가뒀다. 다음날 젊은이는 미란다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밤에는 거센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아침이 되자 폭풍은 가라앉았다. 젊은이는 여전히 섬 기슭에 서서 기다렸지만 미란다는 오지 않았다.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책은 추한 외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던 한 야수가 욕심에 눈이 멀어 위기에 처하게 된 마을을 구해 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야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소외시키는 차별과 편견,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멸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이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한 개인을 판단하는 잣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초등 저학년.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바다만 비추기엔 아쉽더라

    바다만 비추기엔 아쉽더라

    한국의 등대가 불을 밝힌 지도 100년을 훌쩍 넘겼다. 풍차, 젖병 등 다양한 형태의 등대가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오래된 등대가 주는 세월의 깊이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한국관광공사가 ‘불 밝힌지 100년 이상 된 등대여행’을 주제로 9월의 가볼 만한 곳을 7곳 선정했다. 초가을 바람 맞으며 다녀오기 맞춤한 곳들이다. ■인천 팔미도 등대 - 우리나라 최초로 불 밝힌 ‘원조’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다. 1903년 4월 조성돼 같은 해 6월 1일 첫 불을 켰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팔미도까지 약 45분 걸린다. 선착장에서 등대가 있는 정상까지 10여분. 섬 정상에는 등대가 두 개다. 왼편에 보이는 작은 등대가 ‘원조’ 팔미도 등대다. 옛 등대 뒤로 새 등대가 있다. 새 등대에는 팔미도 등대 탈환 당시 상황과 인천 상륙작전을 재현한 디오라마 영상관, 실미도와 무의도, 영종도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됐다. 울창한 소사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인천시 관광진흥과 (032)440-4045. ■부산 가덕도 등대 - 오얏꽃 문양에 새겨진 100년의 역사 1909년 12월 처음 점등한 가덕도 등대는 2002년 새 등대가 세워질 때까지 인근 해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희망의 빛이었다. 단층 구조에 우아한 외관이 돋보이는 등대 출입구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졌다. 등대 건물은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아 2003년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됐다. 등대 아래쪽의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등대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 가덕도 등대 외길을 따라 나오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외양포마을에 닿는다. 일제강점기에 마을 전체가 군사기지로 사용됐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지난 6월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의 구름 산책로도 걸어 보자. 가덕도 등대 (051)971-9710. ■충남 태안 옹도 등대 - 고래 혹은 옹기 닮은 등대섬 옹도는 태안 서쪽 신진도 앞바다에 뜬 섬이다. 1907년에 세워진 옹도 등대 때문에 등대섬으로 불린다. 2007년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등대 16경’에 포함되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반에 개방된 건 2013년부터다. 옹도 가는 배는 안흥 외항에서 출발한다. 가는 길은 30여분 걸린다. 섬에 체류하는 1시간을 포함해 총 2시간 40분 여정이다. 옹도는 동백꽃이 많아 봄날에 붉고 여름날에 짙푸르다. 안흥 외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독립문바위, 사자바위, 코바위 등 특이한 바위섬이 해상 유람의 즐거움을 안긴다. 신진도 안흥유람선 (041)675-1603, 674-1603. ■울산 울기 등대 구 등탑 - 송림과 기암 사이 빼어난 자태 울산의 대왕암 송림은 거제 해금강에 버금가는 절경으로 꼽힌다.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만 50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기암괴석과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울기 등대는 이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해안 산책로 끝자락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울기 등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등대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3월에 처음 불을 밝혀 1987년 12월까지 80여년간 사용했다. 2004년엔 구 등탑이 등록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다. 울기 등대 옆은 장생포 고래문화특구다. 울산을 대표하는 벽화 마을인 신화마을도 가까이에 있다. 울산시 관광진흥과 (052)229-3893. ■경북 울진 죽변 등대 - 용의 꼬리를 밝히는 100년의 빛 울진 죽변곶은 포항 호미곶처럼 뭍이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다. 용의 꼬리를 닮아 ‘용추곶’이라고도 한다. 1910년 점등을 시작한 죽변 등대는 100년이 넘도록 용의 꼬리와 그 앞바다를 밝혀 왔다. 팔각형 구조로 새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죽변 등대의 높이는 약 16m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선형으로 이어진 철계단이 나온다. 등탑에 올라서면 죽변항과 마을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울진 금강송의 자태를 감상하려면 전문 가이드와 함께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어 보자. 자연 용출하는 덕구온천에서 개운한 온천욕을 즐기고, 2억 5000만년 세월을 간직한 성류굴에서 석회동굴의 신비로움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죽변 등대 (054)783-7104. ■전남 진도 하조도 등대 - 다도해를 지키는 ‘거룩한 빛’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에 있는 진도 하조도 등대는 수려한 풍광이 멋스럽다. 바다와 연결된 등대 주변은 온통 기암괴석이다. 절벽 위에 세워진 등대의 높이는 해수면 기점 48m, 등탑 14m에 이른다.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조도군도 일대의 섬들이 절벽 바위와 어우러져 아득한 모습을 펼쳐 낸다. 하조도 등대는 1909년 처음 점등됐다. 진도와 조도 일대는 서남 해안에서 조류가 빠른 곳 중 하나로, 등대는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항로의 분기점을 밝히고 있다. 하조도는 조도군도의 ‘어미새’ 같은 섬이다. 하조도와 연결된 상조도의 도리산전망대에 오르면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진도군 관광문화과 (061)540-3408. ■전북 군산 어청도 등대 - 일제강점기의 아픔 담긴 문화유산 어청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이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세웠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하얀 등대는 입구에 삼각형 지붕을 얹은 문을 달고, 등탑 윗부분에는 전통 한옥의 서까래를 모티브로 장식해 조형미가 돋보인다. 어청도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 있다. 어청도 포구와 주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길이다. 주봉인 당산(198m) 정상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마을 중앙에는 중국의 전횡을 모시는 사당인 치동묘가 있다. 전횡은 어청도란 이름을 지은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어청도 항로표지관리소 (063)466-4411.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주변 경관 맞게 지하 3층·지상 5층… ‘열린·모둠·전통’ 문화 자부심 판다

    경복궁과 인사동, 광화문과 북촌을 ‘X’자로 잇는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일대에 3만 6642㎡(1만 1000여평) 규모의 ‘한국문화체험공간’이 들어선다. 이 땅의 주인인 대한항공은 18일 송현동 부지를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 등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는 복합문화공간이자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그룹의 숙원 사업이었던 7성급 한옥 호텔 건립은 계획에서 빠졌다. 대한항공은 이날 “송현동에 숙박시설을 짓는 것은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할 때 추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숙박시설을 제외한 복합문화공간 건립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학교 반경 200m 이내에 관광호텔을 세울 수 없다’는 현행법을 바꾸기 어려운 데다 정부가 국가 차원의 문화융성 추진 계획에 참여하도록 압박하는 상황에서 대한항공이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한항공이 발표한 송현동 복합문화공간 건립 계획에 따르면 신축 건물은 주변 경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지하 3층, 지상 5층을 택했다. 또 기와지붕 등 한국 건축 특유의 분위기를 강조할 예정이다. 방문객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공간’,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모둠공간’, 송현동의 지역적 특색을 드러낼 수 있는 ‘전통공간’ 등으로 구성된다. 열린공간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등을 설치하고 통로는 봄날 꽃길, 스케이트길 등 계절별 다양한 테마로 꾸밀 예정이다. 인사동과 문화센터, 북촌을 연결하는 다리도 놓는다. 특히 전통 공간에서는 전통 장인들의 작품 제작 과정을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있게 만든다. 단순한 상점가가 아닌 우리 전통 문화의 자부심을 심어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게 대한항공의 목표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개방성, 다양성, 압축성이 세계적인 문화센터들의 트렌드”라면서 “(송현동 문화융합센터도) 한번에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압축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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