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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 작가 귄터 그라스 새 장편소설 「광활한 지평」

    ◎“지루하고 읽기 힘들다” 평단서 혹평/베를린장벽 붕괴와 독일통일이 주요 배경/부정적 평가 불구 공식출간전 10만부 팔려 독일의 생존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귄터 그라스(67)의 신작 장편소설의 출간을 놓고 비평가들의 혹평이 독일 언론을 휩쓸고 있다. 「양철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라스의 7백81쪽에 이르는 신작 「광활한 지평」(Ein Weites Feld)은 독일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2백46번째 생일인 28일 출간됐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세기의 소설」이라고 광고됐던 이 책의 출간이 임박하면서 출간일이 괴테의 생일과 같을 뿐,지루하고 읽기가 힘든 작품이라며 일제히 부정적 논평을 내놓았다. 독일의 가장 유명한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시사주간지 슈피겔 최근호 (21일자)에서 그라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신작소설을 「완전한 실패」라고 단정함으로써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 주말에는 울리히 바론이 카톨릭 주간지 「라이니쉐 메르쿠어」에 기고한 글에서 『이 작품은 정말 짜증나게 하며 장황하고 지루하며 구식 훈계로 가득차 있다』고 혹평했으며 욘 루푸스도 주간신문 「벨트 암 존탁」을 통해 『3분의 1은 재미있고 3분의 2는 지루하다』며 이에 동조했다. 「광활한 지평」의 주요 배경은 베를린장벽 붕괴와 독일통일이며 중심인물은 동독국영기업의 민영화 관장기구 「트로이한트 안슈탈트」에서 일하는 동독출신 사환 테오부트케(폰티)이다. 부정적 비평이 압도적인 가운데 헤어베어트 글로스너는 주간신문 「존탁스블라트」에서 신작에 대해 『그라스는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 이래 가장 개성있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소수의 비평가가 이에 동조했다. 그라스 자신이 주인공 폰티와 같이 19세기 독일 소설가 테오도르 폰타네의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라이히­라니츠키는 그라스가 폰타네의 스타일을 지나치게 모방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바론도 『그라스가 폰타네의 옷속에 갇혀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라스는 비평가들의 집중 포화에 아직 공개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주말 언론을 휩쓴 비평가들의 강타는 역설적으로 신간의 판촉효과를 가져와 미처 공식 출간 되기도 전에 이미 10만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 불 핵실험 재검토 가능성/오 외무 회견서 밝혀

    【본 AFP 연합】 프랑스는 남태평양상 무루로아섬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했던 8차례의 핵실험 계획을 재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프강 쉬셀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독일 DPA 통신과의 회견에서 17일 밝혔다. 쉬셀 장관은 프랑스가 핵실험 계획을 「어떻게든」 수정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고,그러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세계적인 핵실험 계획 항의에도 불구 여전히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 “「백악관 수난」 원인 불투명”/잇따른 총격… 전문가들 대책 부심

    ◎“모방범죄 재발 가능성… 일반인 통제”/“정부에 대한 적개심 표출” 의견 눈길 미국 백악관 주변서 잇따라 발생한 총격사건으로 보안문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나 이를 설명할 뚜렷한 행동양태가 발견되지 않아 사태 재발을 막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범죄 전문가들이 토로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마빈 볼프강 범죄학교수는 20일 백악관 정문밖에서 주거부정의 한 남자가 칼을 휘두르자 경찰이 발포하는 소동이 벌어진뒤 『다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상징적 제스처를 취할 현실적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볼프강교수는 이같은 모방 폭력의 위험성 때문에 일시적이나마 백악관 부근 펜실베이니아가 일부에 대한 일반인들의 접근을 봉쇄할 필요가 있다고 제의했다. 그를 비롯한 범죄 전문가들은 백악관 주변서 지난 9월이후 4번째 발생한 보안위반 사건의 성격을 딱부러지게 하나로 규정하지 못해 당혹스러워 하고있다.이들은 그러나 백악관이 문제인물이나 적개심 있는 사람들의 분명한 목표물이 되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사회학자인 리처드 원더리치는 이에대해 『지금은 혼란한 시기다.정부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말했다. 미국 공원 경비경찰은 20일 마르첼리노 코니엘(33)로 밝혀진 주거부정자에게 2발의 총을 쏘았으며 그는 인근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에도 위독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보안소동의 발단은 지난 9월 12일 소형 비행기 한대가 백악관 뜰에 불시착하면서 조종사가 숨진 사건. 또 지난 10월29일에는 백악관밖 펜실베이니아가 보도에서 한 남자가 29발의 반자동소총을 난사했다.범인 마틴 듀런은 그후 대통령 암살미수죄등 15가지 죄로 기소됐다. 지난 17일 이른 아침에도 백악관 남쪽뜰 밖에서 총탄이 발사돼 백악관 건물에 맞았으나 범인을 잡지 못했다.
  • 「트라비」의 설움(통독 4년의 명암:4)

    ◎동독출신/정신병 25%/「첨단」 까막눈/자본주의·경쟁 적응못해 정신질환 급증/“폐쇄 북한주민 통일후유증 더 심각할것” 「트라비」는 통일후 동독출신 독일인의 설움을 상징하는 동독산 소형차 「트라반트」의 애칭이다.작센주에서 생산되던 이 동독의 유일한 승용차 트라비는 이제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통일후 동독출신마저 앞을 다퉈 서독제 벤츠와 BMW·폴크스바겐,그리고 일본차나 한국차를 구입했지 수준이하인 트라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스타일의 이 조잡한 2기통엔진 트라비 생산라인은 2년전 폴크스바겐 조립공장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또 동독지역 길거리에 아직 굴러다니는 매연 뿜는 트라비는 서독 부자들이 취미로 수집하는 값싼 골동품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식으로 「용도폐기」돼버린 동독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구나 적정인원보다 30∼50%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던 동독의 국영회사들이고 보면 신탁청(트로이한트)의 생산·효율성 점검을 거치면서 실업률 15%(재교육자 포함하면 25%추정)의무더기 실직사태를 빚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동독 같은 사회주의국가에는 실업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 콤비나트에 적만 걸어놓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았다). 30∼40년대에 제작된 낡은 기계로 자동차를 생산하던 동독기술자가 느닷없이 컴퓨터화된 최신기계를 마주하게 되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젊은이들은 그나마 재교육으로 기술을 습득,재취업을 하지만 40∼50대는 실직연금신세를 지는 낙오자가 돼버리기 일쑤다. 『갑자기 「돈이 최고」 「돈 가진 자가 권력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동베를린 신문이었으나 통일후 서독자본가가 인수한 일간 베를리너 차이퉁(32만부 간행)의 국제정치담당 데스크 볼프강 게오르그씨는 일생을 사회주의아래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로 머리를 바꿀 수가 있겠느냐며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전에는 공산당중앙위의 지시와 보도통제를 받았지만 그대로 따르면 됐어요.통일이 되고 서독에서 새 사주가 오더니 「뭐든지 써도 좋다.다만 신문이 팔려야 한다」고 하더군요.경쟁을 하다보니 신문은 선정적이 되고 일은 서너배 늘고 또 동료와의 인간적이던 관계는 소원해졌습니다.35%의 기자가 능력부족으로 잘리고 서독출신들이 보충됐어요.옛날엔 자재부족·흉년 같은 기사도 사회불안을 초래한다며 보도통제하는 답답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불평은 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 사장이 마치 왕 같아서 불만을 말하면 집에 가라고 합니다』 생소한 자본주의·경쟁사회에 적응하느라 아직도 애를 먹고 있는 눈치였다.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에서 열차로 30분거리에 있는 할레시의 루터교 사회봉사단체소속의 조그만 병원을 찾아갔다.정신분석 및 치료의 권위자인 한스 요아힘 마즈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동독지역 주민의 25%가 갖가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죠.정밀조사는 안돼 있지만 동독당시 권력상층부나 그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자가 됐는데 그들 가운데 「서독삶과 비교해 동독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내가 일생동안 추구한 것이 무엇이냐.물거품이로다」하는 극도의 상실감·불안·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 동독시절 반체제·민주인사로 탄압을 받은 마즈 박사는 『요즘 동독사람들 가운데는 부모의 과보호를 받던 어린이가 갑자기 부모를 잃을 경우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정신질환(패닉·정서불안·무기력증)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권위주의적 정권이 시키는대로만 살다가 갑자기 울타리가 없어지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게 되니까 세상이 무섭고 불안해진 것이지요』 마즈 박사는 반대로 자본주의 민주사회에 지나친 환상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정신병증세가 적잖이 발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물질적 부유가 곧 행복이 아닌 현실 때문에 갈등하다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분야별로 적잖은 교류가 있던 동서독과는 달리 완전폐쇄된 북한주민이 통일후 어떤 증세를 보이게 될 것으로 진단하느냐는 질문에 마즈 박사는 다만 『심각한 증세일 것』이라고만 했다.
  • 「모범적 사회주의」의 유산(통독4년의 명암:2)

    ◎동독은 환경오염·빚만 남겼다/통일후 정화시설에 자금 쏟아붓기 바빠/사유화기업 적자보전 1백20조원 투입 동독지역 남부의 작센주 수도 드레스덴은 「엘베강변의 플로렌스」로 불리던 인구 48만명의 아름다운 문화도시.19세기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2차대전때 폭격으로 일부 파괴돼 복구)를 비롯,바로크시대의 공예품 전시로 세계적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그뤼네 게뵐베,주정부 청사등 유서깊은 건축물들이 시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줄곧 부슬부슬 비를 뿌리는 독일의 회색빛 겨울날씨까지 겹쳐 드레스덴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특히 대부분 건물들이 새까만 석탄 그을음에 찌들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공해때문이죠.그을음을 잘 흡수하는 샌드 스톤을 건자재로 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난 40년간 유황 함유율이 높은 갈탄을 아무런 공기오염 방지시설없이 공장과 주택의 연료로 써온 결과입니다』 드레스덴 토박이라는 50대의 시내관광버스 운전사는 서독지역에 비해 동독지역이 눈에 띄게 검게 찌든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얘기를 듣고보니 서독쪽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같이 상업·공업화한 도시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석탄 타는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통일덕에 95년말까지면 모두 청정연료인 도시가스로 전환될 것이란 부연설명이었다. 동독지역도 그랬지만 동구의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이 재원마련의 어려움과 인식부족으로 환경오염에 무방비상태였다고 한다.연방정부 통계에 따르면 동독은 유황을 많이 함유한 갈탄을 해마다 5백만∼6백만t(서독 1백만t)이나 사용,세계최대의 이산화탄소 방출국으로 꼽혔으며 산업폐수의 95%를 그대로 방류했었다.하수도시설의 60∼70%가 손상돼 있었고 정화된 수돗물을 공급받는 주민은 36%에 불과했다는 집계다. 이 때문에 오는 2000년까지의 통일비용 소요액 추정치 가운데 환경정화시설투자가 2천억 마르크(한화 1백조원)로 동독기업들의 사유화에 따른 적자보전비용 2천5백억 마르크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일후 연방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동독지역엔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급증,도로 항만 주택 등각종 공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마치 새로운 개척지모양 곳곳에 타워 크레인의 숲이 형성되는 등 온통 공사장 투성이였다. 드레스덴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공해에 찌든 건물들의 때벗기기 및 보수공사,서독지역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차도 및 인도의 재포장,연립주택 보수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도 통일이 되면 같은 경험을 하게 될텐데 통일후 우리는 동독에 남은 것들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그래도 동유럽의 선두에 있던 나라인데 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국제적인 빚만 남아 있더라구요』 지난11월 평양에 다녀온 바 있는 외무부 동아시아과장 코르넬리우스 좀머박사의 사회주의국가의 실상에 대한 개탄이었다. 통일후 동독기업들의 사유화작업을 맡아온 「트로이한트」(신탁청)의 국제담당국장인 볼프강 베스박사는 한국에서도 같은 문제를 겪게 될 것이라며 사회주의국가의 생산성의 문제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유시장경제의 생존경쟁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들을 자본주의체제속의 기업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생수를 생산하는 국가운영의 대형 콤비나트의 경우를 예로 듭시다.이 회사는 생수뿐 아니라 이를 담는 병도 생산하고 또 병을 만드는 기계까지 제작하고 있었습니다.그뿐이 아니죠.병뚜껑을 만들고 상표를 인쇄하고 거기다 상표를 찍는 인쇄기까지 만들고 하는 식이었으니 경쟁이니,효율성이니 하는 것은 애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신탁청은 이런 생수회사같은 생산성없는 콤비나트를 해체하는등 동독내 8천5백개의 제조업체와 2만2천개의 서비스회사를 모두 1만4천개로 통폐합하여 매각,사유화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년말로 문을 닫는 신탁청은 그동안 1만3천9백개의 기업을 매각한 결과(1백개는 미처분) 2천5백억 마르크(한화 1백25조원)의 빚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다.사회주의의 선두주자 동독은 결국 빚투성이의 부도국가였던 셈이다.
  • 통일의 그늘(통독4년의 명암:1)

    ◎황병선정치2부장의 현장취재/통일 「신이 준 완성품」 아니었다/임금·생활수준 큰 차… 동,「2등시민」 설움/「동」실업률 15%… 「서」의 갑절/임금75%·생산성40% 불과/한해 75조원 투자… 15년 지나야 같은 수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5년,그리고 분단 45년에 역사적 종지부를 찍은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지 만4년.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신이 완성품으로 내려준 선물은 아니었다. 오는 2000년 수도로 「복위」케 돼있는 베를린과 아직 수도기능을 하고 있는 본,그리고 구서독지역의 쾰른 프랑크푸르트 뮌헨,구동독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등 통독 4년의 현장을 2주간 취재하며 자연스레 얻은 결론은 통일이 90년 10월 3일 완성형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었다.통일이 선포된 그날은 다만 동구의 와해라는 세계사의 물결에 따라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열리면서 시작된 독일 통일장정의 공식 출발을 알린 날이었다. 그후 4년,8천만 독일국민은 예상됐던,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예기치 못했던 과업들과 씨름해가며 통일을 완성시켜 나가느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그들은 통일직후의 환희와 낙관,혼란의 시기가 지나면서 마주치기 시작한 「통일의 그늘과 부작용」에 실망하고 있었다. 불만을 토로하는데는 동서독 출신의 구분이 없었다. 연방정부 관리와 주의회 관계자·언론인·전문가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종합할 때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체제아래 살아온 지난 반세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완성시키기까지 게르만민족의 고달픈 장정은 십수년은 더 계속될 전망이었다.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과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지만 통일은 확고한 궤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다.89년 10월 동독인들의 자유와 풍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이 10만 군중의 「월요시위」로 폭발,한달후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 중심가 카를 마르크스광장.이제는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란 동독공산당정권 이전의 옛이름과 평화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광장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유서깊은 음악당 게반트하우스에선 연말 정기 교향곡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객석에는 주로 노부부들의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고 공연장은 무덤덤 할뿐 음악을 즐기는 활기에 넘친 분위기는 아니었다.특히 생기없는 얼굴표정들 때문인듯 했다.또 음악당밖 분수대 곁의 침침한 가로등 아래선 청년 3∼4명이 가슴에 맺힌 불만의 표출인양 지나는 행인들을 향해 간간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시청의 볼프강 프링켈씨(시장 비서실장)는 동독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편인 라이프치히의 이런 어두운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각해보세요.새로운 정치체제 그리고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향상이란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동독지역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갑자기 2등국민이 돼버렸다는 실망감이었습니다.좋은 상품이 있으면 뭘합니까.직장과 돈이 없는데.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습니다.상대적 좌절감이 그들을 매우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프링켈씨는 무엇보다 예기치 못했던 「살인적」실업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동독지역 전체로 보면 대략 9백90만의 일자리가 6백10만으로 줄어 3백8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94년 7월 현재 공식 실업률은 15.1%로 서독지역(7%선)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돼있다(연방 재무부통계). 특히 실업은 경험이 없는 청년층,그리고 여성과 노년층에 집중돼 이들 세그룹은 「통일의 희생자들」로 지칭된다. 더구나 통일직전 동서독간에 합의를 본 협약의 「생산성 원칙」에 따라 동독지역 근로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서독지역 동료들의 75∼80%에 해당하는 차별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이것도 4년전 60%에서 시작해 그동안 해마다 상향조정된 결과다. 라이프치히 거리는 도로포장 건물신축·보수공사등으로 외견상 대단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그 바닥에는 음악당에서 엿볼 수 있었던 노인 청년 여성층의 어두운 비애,2등시민의 서러움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서독출신들이 통일이후 더 잘살게 된 것도,더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다.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외신담당 에디터 피터 스툼씨는 공무원들과는 달리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동독출신들은 우리의 75%밖에 임금을 받지못한다며 불만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일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의 생산성은 사실 그 수준에도 못미칩니다.그들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계속 불만을 말합니다.동서독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직 분리돼있는 상태죠.한 15년후면 비슷한 수준이 될까요?』(연방정부의 93년말 현재 동독지역 생산성 공식집계는 서독의 40.2%다) 스툼씨는 서독지역 주민들 소득세에 통일세 성격의 「솔리대리티 택스」 7.5%가 추가돼 『아,동독용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동독지역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외에 서독지역은 통일에 따른 엄청난 재정·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고 있었다. 연방 재무부의 크리스티안 웅거씨는 94년 한해에만도 건설·설비부문에서 1천5백억 마르크(한화 약75조원상당,한국의 95년도 총예산은 54조 8천여억원)가 보내지는 등 지난 4년간 모두 5천8백억 마르크가 동독지역으로 보내졌으며 이는 통일후 해마다 연방예산의 4분의 1이 투자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결국 서독지역 주민의 어깨에 25%의 짐이 얹혀진 셈이니 서독지역주민에게도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한 여론조사결과(디 자이트 신문이 94년 9월 9백80명을 대상으로 조사)에서도 나타났듯 동독지역 주민의 대다수인 69%가 통일후의 생활형편에 대체로 만족을 표하고 있다.(22%가 불만,8%가 매우 불만이라고 응답)그리고 장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민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는 현지 언론인의 설명은 통일 독일의 밝은 장래를 점치게 해준다.
  • 유태인학살 부인 극우지도자에/독 법원,무죄선고 판결 파문

    【베를린 연합】 독일의 한 지방법원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부인한 극우파지도자에게 집행유예 처분과 함께 사실상 무죄선고나 다름없는 판결문을 작성,큰 파문이 일고 있다. 독일 만하임 지방법원은 지난 6월 『2차대전중 나치독일이 유태인 수백만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는 것은 물리적·기술적으로 볼때 불가능한 일』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작성,공개발표한 혐의로 기소된 극우독일민족주의당(NPD)당수 귄터 데케르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재판을 담당했던 만하임 법원의 볼프강 뮐러 재판장(59)은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데케르트를 양식있는 인사로 묘사하는 등 사실상 무죄선고나 다름없는 판결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뮐러는 이와함께 데케르트가 유태인 학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독일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반증을 찾기 위해 노력해온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이라며 오히려 그를 두둔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을 부인하는 것은 형법적으로 범죄를 구성한다」는 독일법률규정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으로 이 판결이 나오자 유력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등 언론의 비난이 쏟아졌으며 그동안 사법부의 판결에 언급을 자제해온 정부나 야당에서도 이례적으로 만하임법원의 판결을 비판하고 나섰다.
  • 꿀벌/춤과 소리로 의사소통

    ◎미서 로봇 실험… 먹이­위험물 발견땐 신호보내/주파수 높낮이로 식별… 먹이 접근땐 격렬한 춤 즐겁게 춤을 춤으로써 의사를 전달하는 동물은? 정답은 제비가 아니라 꿀벌이다. 꿀벌은 윙윙거리며 꽃주위를 그냥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꿀이 있는 위치,주변의 위험물 등을 정확한 「스텝」을 밟음으로써 동료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최근호는 꿀벌들의 이러한 하이테크 춤사위가 어떻게 정보를 전달하는 지에 대한 해석을 싣고 있다. 꿀벌의 춤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지난 40년대 독일 뮌헨대학의 카를 폰 프리시교수에 의해서 처음 알려졌다.그후로 60년대에 들어와서 꿀벌의 의사소통이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윙윙거리는 소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구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그전까지 과학자들은 벌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꿀벌이 춤과 소리의 절묘한 배합에 의해 의사를 소통한다는 이론은 현대의 첨단과학에 의해 한층 더 확실해졌다.미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볼프강키르히너교수팀은 꿀벌과 똑같은 움직임과 소리를 내는 로봇을 만들어 실험을 했다.그 결과 꿀벌이 그 로봇에 다른 벌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실을 알아냈다.다음 문제는 꿀벌의 춤의 어느 부분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빗사위가 되는가이다. 일단 한마리의 꿀벌이 먹이에 접근하면 아주 낮은 주파수를 가진 소리를 발산한다.그러면 같은 벌집에 사는 벌들이 그 소리를 감지해 우르르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꿀벌이 먹이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 격렬하고 빠르게 춤을 춘다는 사실이다.이런 움직임과 이로 인한 소리를 감지하는 부분은 꿀벌의 안테나 안쪽에 위치한 「잔스턴 조직」이라는 부분이다.이 조직은 양방향으로 되어 있어 좌우에서 오는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다. 이렇게 꿀벌들은 좌우에 도달하는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가진 소리를 분석,먹이를 발견한 꿀벌이 어디에 있는 지,먹이는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일단 이런 신호를 받은 뒤에 쫓아오는 꿀벌들은 날개를 파닥거려 멈추라는 회신을 보낸다.이런 식으로 앞서가던 벌과 뒤에 남은 무리가 만나 먹이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키르히너박사는 『이런 연구가 계속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꿀벌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의사소통방법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서독,동독정치범 “사들였다”/통일에 앞서 「거래 선례」를 보면

    ◎현물 등 34억마르크 들여 3만명 구해/양측 변호사 중개… 종교단체 등 적극 협조 79년 북한에 강제납치됐던 고상문씨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음이 국제사면위 발표를 통해 확인됨으로써 강제납북된 4백41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아울러 과거 동·서독이 서로 정치범을 교환했던 전례가 이들 납북자 송환에 원용될수 없을지 시선이 모아진다. 물론 분단상태라 해도 왕래와 교류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던 동·서독과 휴전선을 가운데 놓고 접촉이 전혀 불가능한 남·북한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그러나 과거 서독의 경우 이미 통일 오래전부터 동독내 정치범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등 이들의 전례에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이 적지 않다. 동·서독간의 정치범 석방은 한마디로 서독이 내세운 「인도주의에 입각한 분단고통의 완화」와 동독이 필요로 한 「돈」간에 서로 이해가 맞아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이같은 노력에 대해 일각에서 「인신매매」라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그러나 그것이 분단상태의 동·서독을 묶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한 것만은 통일이 이뤄진 지금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단 초기의 동·서독은 동·서 베를린간 왕래가 허용되는 등 완전 분단의 상태는 아니었다.이같은 상황속에서 서독은 50년대초 동독측과 계속 접촉을 갖고 있던 서독의 사회단체들을 동원,동독내의 정치범 현황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실향민단체,적십자 등 사회구호복지단체,노조,동베를린에 지부를 둔 정당및 서독으로 탈출한 피란민들이 정보를 제공했다. 서독 내독부에 설치된 「법률보호실」은 55년 이렇게 수집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정치적 박해자 명단을 만들었다.정치범들의 구속사유,형량 등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매겨 작성된 명단은 석방요구서와 함께 동독측에 전달됐다. 이때 서독의 종교단체들이 인도적 견지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정치범을 석방시키는 노력을 개시했다.그러나 당시의 냉전상황에서 적대국일 수 있는 동독에 자금을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는 문제점등이 제기돼 이 사업은 자연스럽게 서독정부로 이관됐다. 서로를 적대시하던 동·서독정부가 정치범 석방을 위한 접촉을 갖도록 하기위해선 중개창구가 필요했다.이같은 중개창구 역할은 동·서독의 변호사들이 맡았다.동독에선 볼프강 포겔이,서독에선 위르겐 스탕게변호사가 각각 양측을 대표하는 중개인으로서 접촉을 가졌다.스탕게로부터 동독내 정치범들을 석방해주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는 서독정부의 의사를 전해받은 동독은 이를 비밀에 부친다는 조건하에 1천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기로 했다. 이같은 합의는 서독이 이를 선전전에 이용하지 않을까하는 동독측의 의구심으로 인해 실행단계에서 숱한 장애에 부닥친다.동독은 당초 1천명이었던 석방대상을 5백명으로,또 1백명,50명으로 단계적으로 줄여 최종적으로는 8명까지 깎아내렸다.그러나 서독이 사업계속 보장을 전제로 동독측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정치범석방은 성사될 수 있었다. 서독은 63년 8명의 정치범 석방 대가로 32만마르크를 동독에 지불했다.이후 90년 통일이 이뤄지기까지 27년간 서독은 34억6천만마르크를 동독에지불한 대가로 3만3천7백55명이나 되는 동독내 정치범을 석방시켰고 25만의 이산가족을 상봉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실제로 동서독간에 현금이 오간 것은 63년 첫 석방때 32만마르크가 지불된것 한번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물을 동독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결제가 이뤄졌다.서독내 교회들이 동독의 교회들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물자제공이 이뤄졌던 것이다.초기에는 동독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버터 등 생필품이 제공됐으나 나중에는 산업원자재들이 주종이 됐다.돈과 물자가 동원된 정치범 석방 사업에 대해선 아직도 비판적 시각이 남아있다.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결과적으로 통일을 앞당기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는 긍정적 견해가 다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 “질서문란 의원 징계 강화해야”/「의회운영 개선」 학술회의 중계

    ◎미선 청문회·조사활동등 연중운영/독,국가기밀누설엔 면책 인정안해 의회정치연구소(이사장 오세응국회문공위원장)가 1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의 의회전문가를 초청해 개최한 「의회운영및 제도개선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는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의 국회법 개정을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열렸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입법부의 권위=프랑스·영국·독일에서는 의회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질서문란의원들에 대한 징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나 미국은 의회의 활동이 국민에게 잘 알려지게 함으로써 의원들이 질 높은 활동을 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 프랑스의 크리스토프 팔레 하원법사위전문위원은 『의장이 질서유지를 위반하는 의원에 대해 한달급여를 박탈당하는 견책을 제안할 수 있다』면서 『견책을 받은 뒤에도 위반을 하거나 국회의장·대통령·총리·장관에게 위협을 가하고 동료의원을 구타한 의원은 15일동안 의회에서 축출되고 2달간의 급여를 박탈당하게 된다』고 밝혔다. 영국의 존 스위트만박사는 『특정의원이 불복종할 때,의장은 거명할 수 있고 해당의원은 일정기간 의회에서 정직된다』고 소개했다.독일의 볼프강 체연방의회사무총장은 『독일의회에서는 의장의 질서유지권한·원로협의회제도·의사규칙위원회제도가 있다』고 말했다. ▲본회의와 상임위=볼프강 체사무총장은 『독일의회는 본회의에서의 엄격한 발언시간제한과 의석비율에 따른 정당간의 발언시간 배분을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아이오와대의 김종림교수는 『미국의회는 청문회·조사활동등 위원회와 소위원회를 연중 운영한다』면서 『미국의회에는 3만여명의 입법보조직원이 근무하며 이 비용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점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보위원회=『독일정보위는 회의개회시간이나 장소,회의안건을 비공개로 하고있다.정보위와 행정부의 관계는 상호신뢰에 기초하고 있다.독일형법의 국가기밀누설죄는 의원에게도 적용된다』(볼프강 사무총장).『프랑스에는 정보위가 없다.국방담당상임위가 정보기관을 관할하고 있다.해당의원들은 국가안보나 국방비밀로 분류되지 않은 문서에 대해 열람권을 갖는다』(팔레전문위원). 『미국의 정보기관은 의회가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의회는 정보기관이 정보를 충실히 제공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등 서로의 관계는 상당히 불편하다』(김교수).『영국은 상하원 의원 9인으로 구성되는 정보및 보안위원회를 창설했다.그러나 이 위원회는 의회가 아니라 총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있어 정부위원회로 취급되기도 한다』(스위트만박사).
  • “모짜르트 사인은 무지한 의술”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미 학자 연구결과 보도/폭음으로 머리 자주다쳐 두개골안에 혈종/손발마비 나타나자 정맥 피뽑아 죽음 재촉 「음악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35세로 요절한지 2백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사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그의 라이벌인 오스트리아 궁정 악장이었던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결핵·열병 감염설,류머티스 발병설,프리 메이슨 단원의 피살설등 설만 난무할 뿐 과학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과학전문지 「디스커버」지는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정밀 분석한 미의학자의 연구 결과를 인용,그의 사인은 뇌혈관질환의 일종인 경막하혈종(경모하혈종)과 18세기 의술의 무지함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미오하이오 주립대 마일즈 드레이크박사는 동위원소 검사를 이용해 모차르트의 두개골 왼쪽 부위에서 사망 전인 1791년 초에 생긴 골절을 발견했다.모차르트는 평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폭음하는 버릇이 있어 술에 취해 자주 부딪쳤으며 이로 인해 머리 외상을 입고 두개골에 골절이 생겼다는 것이다.뇌는 바깥쪽 부터 경막,지주막,연막의 3층 막으로 싸여 있다.머리에 금이 갈 정도로 두부 외상을 당하면 경막과 지주막사이에 있는 정맥이 손상을 받아 출혈,혈종(핏덩어리)을 만들게 된다.만성 경막하혈종으로 불리는 이 뇌혈관질환은 혈종에 의해 뇌가 압박을 받기 때문에 손발 마비,두통,우울증,치매등의 증세를 보인다.머리 외상을 입은지 1∼2개월 뒤에 증세가 나타나지만 만취한 사람의 경우 뒹굴다가 머리를 다친 사실을 기억 못하는 수가 많다.또 뇌의 왼쪽 부위에 혈종이 생기면 오른쪽 손발이 마비되는등 뇌 손상부위와 마비부위는 정 반대로 나타난다.드레이크박사는 모차르트가 죽기전 혼자 옷 조차 입지 못할 정도로 오른팔이 마비됐음을 지적,『이는 뇌 왼쪽에 생긴 경막하혈종 때문』이라면서 『모차르트가 경막하혈종으로 만성 우울증과 두통에 시달린 흔적이 죽기전에 쓴 여러통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드레이크박사는 모차르트의 사망원인은 경막하혈종과 함께 18세기 의사들이 질병치유 수단으로 환자의 정맥에서 피를 뽑아내는 이른바 「사혈법」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뇌정맥 출혈로 가뜩이나 피가 부족한 그에게 피를 보충해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사혈법을 씀으로써 죽음을 앞당겼다는 지적이다. 현대의학으로 경막하혈종은 머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혈종을 빨아 들이면 간단히 치료된다.결국 모차르트는 18세기 무지한 의술의 희생물이 된 셈이다.
  • 미 오케스트라 주름잡는 독인/마수르·사발리슈등 5대악단중 3곳지휘

    아르투르 니키시,구스타프 말러,레오폴트 발터 담로슈,윌리엄 슈타인버그,유진 올만디,프리츠 라이너,게오르그 솔티. 세계적인 지휘자인 이들의 공통점은 지난 1백년동안 미국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명성을 날린 독일출신 음악인이라는 것이다(뒤의 세명은 헝가리출신이지만 음악적 기질·기법으로 봐 독일풍의 소유자들이다). 뿐만아니라 현재도 미국의 5대오케스트라 가운데 3개 악단이 독일인 지휘자의 「지휘」아래 있다.뉴욕 필하모니의 쿠르트 마수르(라이프치히 출신),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크리스토프 폰 도내니(함부르크),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볼프강 사발리슈(뮌헨)등이 그들이며 휴스턴의 크리스토프 에셴바흐(함부르크)등도 유명세를 물고 있는 독일인 지휘자다. 시카고 교향악단의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태생으로 이스라엘에서 자랐지만 독일풍·독일정서로 가득차 있다. 19세기말 시카고 교향악단을 맡았던 독일인 테오도어 토마스가 미국땅에 교향악을 심어준 이후 이렇듯 많은 독일인 음악가가 미국에서 「판」을 친 이유는 뭘까.독일인이 음악적으로 뛰어나서? 아니면 미국인이 음악적으로 처져서인가? 미국인의 유럽인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인가,우연의 일치인가. 물론 독일인 지휘자들은 미국인이 가져볼 수 없는 튜튼주의 강한 악센트,프러시아풍의 강한 규율,베토벤 형상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뉴욕 필의 데보라 보르다회장은 『이들 지휘자가 선택된 것은 개인적인 능력과 예술적인 감각 때문』이라고 말한다.휴스턴의 데이비드 왁스음악감독도 『특별히 유럽인을 찾지는 않았다.최고의 지휘자를 선택하다보니 독일인이 뽑힌 것』이라며 독일지휘자 선호경향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의 음악인들은 이에 대해 미국태생의 훌륭한 지휘자들도 많은데 『하필 비미국인이냐』며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세인트루이스의 레너드 슬라트킨,시애틀의 거라드 슈왈츠,볼티모어의 데이비드 진만, 뿐만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제임스 콜론(콜로냐),켄트 나가노(리용·런던)같은 이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현재의 음악과 지난 1백년동안의 미국음악 모두에 있어서 독일 고전음악을 자연스레 선호,알게 모르게 유럽의 문화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활동중인 독일인 지휘자라 하더라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잘하는 사람은 잘하지만 가까스로 현상유지정도로 버티는 이도 없는 게 아니다. 뉴욕 필의 마수르는 까다로운 앙상블을 잘 해내기로 유명하다.피아니스트로 시작한 에셴바흐는 휴스턴 교향악단을 잘 이끌어 무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뒤를 이어 워싱턴 국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내정된 상태다. 미국에서 활동중인 대부분의 독일지휘자들은 미국의 음악도들이 유럽인들보다 훨씬 악보보는 속도가 빠르고 정확하며 더 강도높은 훈련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물론 대학수준의 음악교육도 마찬가지로 유럽보다 우수하다고 말한다.
  • 독 난민규제개헌 합의/여야/EC·제네바협정국서의 망명 금지

    ◎뮌헨 등 60곳 극우폭력 항의시위 【본 로이터 연합】 독일 정부와 야당인 사민당은 독일내 외국난민들의 망명허용자수를 크게 줄이는 내용의 새로운 타협안을 체결했다. 집권 기민당의 볼프강 쇼이블레 의원은 이날 야당지도자들과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타협안은 독일 헌법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망명권을 보장하는 기본조항은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협정에 따르면 다른 EC국가들이나 제네바 난민협정 서명국가들로부터 독일로 들어온 난민들은 독일내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쇼이블레 의원은 또한 EC국가들및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국가들로부터 들어오는 망명신청은 요건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 여야는 극우파의 난민들에 대한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몇달째 망명법 수정문제로 논란을 벌여왔으며 이날 협상타결은 3일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뮌헨 AP 로이터 연합】독일의 뮌헨에서 6일 35만명의 시민이 외국인들에 대한 극우파의 공격에 항의하는 대규모 야간 시가행진을 벌인 것을 비롯,바이에른주의 60여개 도시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지난달 베를린 시위에 이어 최대규모인 이날 항의시위에서 시위참가자들은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촛불과 등불을 들고 40㎞에 걸쳐 40여분간 시가지를 행진했으며 바이에른주의 다른 60여개 도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등불행진」이 있었다. 「뮌헨­한 도시는 NO라고 말한다」는 구호아래 민간단체들이 주도한 이 시위에는 일반인과 학생들을 비롯해 연예인및 스포츠 스타들이 참가해 잇따라 벌어지고 있는 극우파의 외국인들에 대한 공격에 항의했다.
  • 작곡가 강석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

    ◎고정된 틀 거부하는 “현대음악의 대명사”/끝없는 혁신·실험정신으로 첨단음악 개발/“지나치게 난해·비약” 평가받고 한때 좌절·실의/한국·서구리듬 조화시켜 음악세계 대변환 하얀 턱시도를 입은 연주가가 피아노 앞에 자리잡는다.곧 연주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청중은 숨죽이고 연주자는 침묵,장내는 물뿌린듯 피아노연주를 기대하지만 연주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그리곤 얼마후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뒤로 퇴장해버린다.객석은 어리둥절한채 술렁거리는 분위기다. 그다음 장면에선 장막뒤에서 두 사람의 벌거벗은 다리가 걸어나오고 무대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쪽으로 접근하는가 했더니 네개의 다리가 건반위에 뒤엉켜 춤을 추기 시작한다.청중은 경악을 금치못해 당황하고 아연한다. 69년9월7일 작곡가 강석희씨가 주관한 제1회 국제음악제 풍경이다. 피아노 앞에서의 침묵연주는 미국의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창작곡이고 네 다리의 피아노 연주는 당시 비디오 뮤직으로 뉴욕에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던 백남준의 「컴포지션(Composition)」이다. 「컴포지션」은 「섹스뮤직」이란 논란과 함께 공연윤위에 고발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으나 젊은 작곡가의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차원에서 쉽사리 무마될수 있었다. 다음해 강석희씨는 독일 하노버대로 유학,71년 제2회 음악제를 열기위해 현지에서 위촉 작곡된 새로운 레퍼토리를 들고 일시 귀국한다. 그러나 2년전의 사건때문에 국립극장을 빌리지 못하자 피치못하게 이대 대강당을 연주회장으로 택하게 되었다. ○파격적 새 음악 시도 「컨템포러리」란 단어조차 생소하기만 했던 그 시절,1백여명이나 모일까 말까하는 마당에 4천석이 넘는 강당이란 여간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 강석희의 무모함과 파격적 시도는 음악계 일원에서 비웃음과 빈정거림이 되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치않고 신문사·방송사를 찾아다니고 길거리에다 전단을 뿌려댔다. 「끈질김」이란,정말 강석희씨에게서 끈기와 인내를 빼고는 그를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그의 음악도 이 끈질긴 노력과 실험정신끝에 이루어진 결과임을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보이는 행동으로알수 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데도 지치지않아 매스컴의 음악담당자들에게 「현대음악이란 무엇인가」,「세계 현대음악의 오늘」,「왜 현대음악이 이 시점에서 한국에 필요한가」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설명해주었다. 「현대음악은 해프닝이나 쇼가 아니며 백남준의 「컴포지션」은 퍼포먼스의 한 형태일뿐 모차르트도 그 시대에선 이런 의혹과 냉대,시련을 거쳐 오늘의 고전이 되었음」을 강변했다. 그럼에도 두번째 시도되는 이번 음악제만은 그로서도 도무지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이 알고있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예술세계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왜 한낱 객기로 외면당해야 하는가.음악회 한시간전쯤 연주회장으로 향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음악회라도 청중이 없다면 무의미 할뿐」이라고 그는 의기소침해질수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이대입구에는 사람들이 넘쳐 있었고 「이 근처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열리나 보다」고 그는 구름같은 인파를 부러운듯 바라봤다. 한데 바로 이들이 그가 주관하는 현대음악제에 모여드는 청중이 아닌가. 4천여 좌석은 삽시에 매진되었고 그날의 연주자인 독일 피아니스트 클라우스 빌링도 「내 생애를 통해 이렇게 많은 청중앞에서의 연주는 처음」이라고 했고 신문들도 전례없이 「우리에게 낯설기만했던 새로운 음악의 경이」,「세계적 거장들의 음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예리한 통찰력」,「유감없이 새 기량이 표현된 명연주」등의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카겔이나 쇤베르크 리게티와 베리오 스톡하우젠과 존 케이지는 더이상 우리생활에서 생소한 이름은 아니었다. 스트라빈스키음악을 전위적으로 연주하기 위해선 악기를 때려부수거나 분해하는 정도로만 알았던 우리에게 세계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를 이땅에 정착시킨 강석희를 「현대음악의 대명사」「선두주자」로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그후 베를린대에 유학하는 동안을 빼고는 해마다 거르지않고 이 음악제를 강행하여 지난 10월 제20회를 기록했다. 그는 서울대음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음악에 관한한 전혀 문외한이었음을 주저없이 고백한다.단지 누구나 그런것처럼 한때는 세계문학전집에 심취하여 비바람만 쳐도 가슴을 설래고 다음단계에선 수학과 과학에 몰두하여 공학도를 꿈꾸다가 교회에서 익힌 피아노연주가 작곡과를 지망하게 된 동기라고 했다. ○국내 첫 전자음악 연주 그러나 대학졸업후 간경화증에 시달리는 4년동안 그는 어둡고 외롭고 참담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때 병석에서 읽은 외지(외지)에서의 전자음악기사에 흥미를 느껴 이 시대에 걸맞는 첨단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뒤늦게 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음의 향연」연주로 음악계에 데뷔했으나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기엔 지나치게 난해하고 비약된 분위기란 평을 받고 다시 한번 긴 좌절,실의의 늪에 빠져있을 때 윤이상씨와의 극적 조우(조우)가 그를 변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소위 동백림사건과 관련되어 병보석으로 서울대병원에 머물고 있던 윤이상씨에게 그는 1주일에 두번 개인 레슨을 허락받게 되었다. 만일 그때 윤이상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뉴욕에서 그를 끊임없이 유혹하던 백남준을 따라 지금쯤 백남준과 함께 멀티미디어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후 「한국적 리듬과 서구적 리듬을 조화시켜 세계언어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표아래 일본 오사카 엑스포70의 「예불」과 「생성」을 창작했고 독일에서의 6년을 총정리하여 응결시킨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카테나(사슬)」는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 사고속에 구성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순서울토박이로 종로구 충신동에서 7남매중 장남으로 출생,깔끔하고 고집이 센 편이지만 마음을 정하기에 따라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교적인 일면도 있다. 그의 음악제에 단골로 초청되는 존 케이지 스톡하우젠외에 독일작곡가 볼프강 바더등 국내외의 각 분야 인물들과 화려한 교분을 트고있으나 가정적으로는 같은 작곡가이자 생활의 반려였던 오랜 친구와 헤어졌고 76년 실험영화 감독인 한옥희씨를 만나 다음해 4월 공간극장 개관 기념으로 두 사람이 음악과 영화로 공연한 믹스미디어 「무제」는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예술계에서 손꼽힌다. ○문제성 제시 주목받아 그는 다작은 아니지만 정부 위촉 작품외에도 크고 작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고 그때마다 「문제성 제시」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지난 8월 예술의 전당서 열린 광복절 경축음악제에서 KBS와 펜데레스키 지휘로 연주된 「햇빛 쏟아지는 푸른 지구의 평화」는 그날밤의 청중을 환호와 열기로 몰아넣은 대작으로,음악평론가 이상만씨는 이는 「작가의 절대음악의 완성」이라고 호평했다. 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절약하면서 청중을 숨막히게 긴장시키는 절묘한 피아니시모,단음에서 점차 세분화되고 또다시 반음계 시스템으로 이동하면서 미분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후의 한계점,유성이 충돌하는듯한 장렬한 환희를 표현하는등 음표와 음표의 음군(음군)들은 새떼가 날듯 바람결에 비구름이 몰리듯 악보 한장한장마다가 마치 추상수채화를 연상케하는 복잡다단한 구성이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의 예술가라기보다 피나게 추구하고 치열하게 노력하여 자신을 이룩한 작곡가라는 편이 옳다. 그러나그의 작품중 「한국적 이미지를 담아달라」는 부탁으로 위촉된 「□□」는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해서 끝까지 애정을 갖지못한다. 요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점인 그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그래서 외로운 편이기도 하다. 그의 겉모습에선 예술가적 광기나 번뜩이는 기지,연연한 낭만이나 감성적 섬약성은 찾아볼 수 없다.오히려 너무나 세련된 나머지 세련이 탈색된데서 온 메마름이 도포되어있다.또는 부당함에 대하여 단호하게 「NO!」라는 벽을 쌓고 있기때문에 더한층 이기심으로 비치는지도 모른다. 제자교육도 마찬가지다.스스로 깨우치도록 철저하게 방치해두었다가 당사자가 어떤 변화나 각오를 보일때만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작곡기법과 작품구축,악곡의 논리성을 쏟아붓는다. 시대는 천재가 만들고 천재는 시대를 이끌어 간다.그런 천재중에는 타고난 천재도 있겠지만 스스로 연마하여 천재를 이룬 천재도 있을 것이다. 남들이 상상치도 못하는 기상천외한 초현실성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해가는 강석희씨는 스스로를 연마해가는 천재일 수도 있다. 지금 그는 현대음악이라는 긴 암중모색을 끝내고 우리 음악사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뚜렷하고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그리고 그의 노력의 결정과 결실과 함께 새시대의 지평을 여는 영원한 선두주자로 앞장서고 있다. □연보 ▲1934년 10월22일 서울출생 ▲60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69년이후 범음악제 음악감독(92년 10월 제20회 연주) ▲70∼71년 서독 하노버 음대 수학 ▲71∼75년 서독 베를린 음대 및 공대 수학 ▲80∼82년 DAAD(독일국제학술교류처)예술가프로그램초청 독 일 체류 ▲80∼82년 베를린 실험음악제 「인벤치오넨(Invention en)」공동주관 ▲85∼90년 ISCM(국제현대음악협회)부회장 ▲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감독 ▲82∼현재 서울대 음대 교수 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발표 오사카 EXPO70 위촉 「예불」 「원음」 「생성」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농」 「변용」 「반사」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카테나」 「대화」 칸타타 「용비」 「청동시대」 대관현악을 위한「□□」「청동시대」영화음악 「화려한 외출」 컴퓨터음악 「불사조」 88서울올림픽 성화음악 「프로메테우스 오다」 칸타타 「햇빛 쏟아지는 푸른지구의 성화」 「세계음악의 현장을 찾아서」(고려원간) 대한민국 작곡상·올해의 음악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
  • “선진국 기술보호주의 시정돼야”

    ◎노 대통령,21세기위 초청 외국학자와 대화/“경제블록화 추세 큰 우려”/“과학 자립에 우선 투자를” 노태우대통령은 24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자문기구인 21세기위원회가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던 미·일·영·불·독등 5개국 미래학자 8명을 접견했다.대담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대통령=미국과 캐나다의 21세기 연구현황및 연구결과 활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피터 애크로이드(미국 21세기연구소 이사장)=미국 21세기 연구소에서는 21세기에 대비한 많은 연구가 진행됐는데 그 연구결과는 미국과 캐나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국제적 협력과제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등 55개 과제를 집중 연구하고 있습니다. ○횡적 교류 기대 ▲노대통령=외국의 21세기 연구와 우리나라의 연구가 횡적인 교류를 통해 연구성과가 높아지기를 기대합니다.현재 한일간에는 무역불균형·첨단기술이전등 현안문제가 적지 않은데 이의 개선을 위한 대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가 도루(방하 철·일본 동경대교수)=단기적해결책은 아직 미흡하나 장기적으로는 문화·청년등의 교류를 통해 이해관계를 넓혀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21세기를 맞이하여 한일간 협력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노대통령=한일협력에 관한 원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나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가시적인 노력이 미흡한 실정입니다.앞으로 다가올 태평양시대에 대비,한일 새협력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상호보완적 차원에서 협력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노스코트 박사는 산업및 기술발전에 조예가 깊은줄 알고 있는데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의 향후 산업발전과 관련,어떤 문제가 예견되는지? ▲짐 노스코트(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연구위원)=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영국에서 보다는 훌륭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한국에서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대통령=21세기는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며 정보화·지식화가 가속화될 전망입니다.이와관련,최근 일부 기술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기술보호주의경향이 심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노스코트=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기술의 개방화·세계화 추세에 부응하려면 극단적인 보호주의는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한국은 현재와 같이 유럽·미국등과 접근하여 기술협력을 추구하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청년교류 넓혀야 ▲노대통령=인류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선후진국간 기술에 관한 협력·공조·분업체제가 효율적으로 정립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현재 세계경제는 북미·일본·EC등 3각체제로 불록화되어가는 추세에 있습니다.이에대한 우려와 기대가 상반되고 있는데 이에대한 견해는 어떠십니까. ▲볼프강 미샬스키(독일 OECD 미래연구포룸 연구관)=대통령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지금 세계경제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혼재되어 있습니다.G7국가를 설득하여 지역화를 통한 다극화를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노대통령=같은 지역내 국가들간에 경제권을 형성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하겠지만 경제블록상호간 이해대립으로 인하여 자유무역이 퇴보하지 않도록 여러분과 같은 학자들의 영향력 발휘를 기대합니다. ▲울라프 슈벵커(독일 문화정책협회회장)=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가는 기초과학에 투자를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가능한한 타국에 기술의존을 줄이고 과학의 자립화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공영 노력 절실 ▲노대통령=이제 21세기에는 「냉전」의 위협이 점차 감소되어 갈 것이 확실시되며 그대신 과학·기술·정보·통신·무역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갈 전망입니다.인류가 다가오는 21세기에 거는 소박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평화속에 자유와 복지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와관련,기술·경제의 최첨단 선진국들은 국가이기주의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배타적 패권을 추구해서는 안되며 지구촌의 모든 인류와 함께 번영을 구가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독일/고르비 지원 확대/미국/「2원정책」을 추진

    ◎워싱턴의 새 대소 전략은/연방통제권 약화… 공화국과 밀착 시도/“발트 3국 조기독립 바람직” 조심스런 변화 시사 모스크바에서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이 권좌에 복귀했음에도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소련내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의 대소정책 변화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3일 천하로 끝난 소련의 불발 쿠데타가 워싱턴에 대해 정책 재검토를 촉구한 것은 분명하다. 워싱턴의 대소정책에 변화를 재촉하고 있는 주요 동인은 소련내 세력균형의 변화다.그동안 미국은 소련에서 중앙정부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만을 유일하게 지지했지만 앞으론 크렘린과 각 공화국을 동시 상대하는 2원정책으로 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크렘린으로 복귀한 고르바초프가 쿠데타 주동자들이 무산을 기도했던 새 연방조약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불확실한 것으로 알려졌다.소련내 16개 공화국 가운데 9개공화국과 고르바초프간에 기본합의가 이뤄져 이른바 「9+1」연방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각 공화국에 보다 큰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부시 미행정부는 소련권력의 중심이 고르바초프로부터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같은 독립지향적인 공화국 지도자들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뚜렷한 조짐과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2원접근 정책의 채택을 회피했다.그러나 이젠 크렘린이 각 공화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정책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대소정책 변화는 발틱 3국문제에서 먼저 나타났다.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22일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독립이 조속히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그는 『최근의 소련 사태가 발틱 3국의 독립을 앞당기게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를 위한 『대화의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된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부시의 이 발언은 발틱 3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최초의 적극적인 지지표명으로서,소련의 쿠데타 실패와 새 연방조약이 발틱 3국의 탈소 독립운동을 가열시켜 결국 이들에게 독립을 가져다줄것이라는 새로운 상황 판단과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발틱3국 독립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은 소련의 발틱3국 병합을 인정한 일이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 왔으며,부시는 만일 이 3나라가 평화적인 연방이탈 협상을 통해 독립을 할 경우 이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대규모 식량원조설 이날 부시대통령은 쿠데타 발생과 더불어 소련에 대해 취했던 경제지원 중단조치를 해제했다.또한 부시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고르바초프가 보다 확실한 개혁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한 미국의 대소지원정책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워싱턴은 고르바초프에게 경제개혁 추진에 박차를 가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고르바초프가 강경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고르바초프에게 압력을 가하는 문제에 신중을 기해왔다. 그러나 이젠 개혁을 가로막았던 강경파들이 내각에서 사라진 이상 고르바초프의 개혁추진이훨씬 수월해졌으며,따라서 이번 쿠데타는 워싱턴이 모스크바에 대해 돈줄을 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주장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21일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부시 행정부가 고르바초프 정권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련에 대규모 식량원조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전문가들은 미국이 경제지원을 통해 고르바초프의 국내 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대신 국제 무대에서 소련의 보조적인 역할을 정립하는 쪽으로 양국 관계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고르비 포기는 안해 부시는 소련내 공화국에 대한 지지강도를 둘러싸고 의회와 실랑이를 벌이게 될지 모른다.미의회에선 『고르바초프의 시대가 끝나고 옐친과 소련 국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리가 높지만 부시는 고르바초프를 포기하지 않을 것같다. 부시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고르바초프가 쿠데타로 약화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소련의 군사외교를 통제하고 중앙정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라고 말했다.고르바초프는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대소 협상창구라는 것이다. 쿠데타에 과감히 도전,강경파를 패퇴시키고 영웅으로 부상한 옐친은 정치적 기반을 더욱 강화,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지금 모스크바의 선두주자가 옐친이라는 것은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워싱턴은 싫든 좋든 옐친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따라서 옐친이나 다른 공화국지도자에 대한 미국의 공개적 지지가 고르바초프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에 대해선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워싱턴은 믿고 있다. 부시와 미 의회는 옐친을 비롯한 소련내 공화국 지도자들이 그들의 중앙통제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고무하면서 이들과 새로운 협조 관계를 모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의 「정변이후」대응/“쿠데타는 경제난 때문에 비롯” 판단/식품수출 확대… EC등과 추가경원 적극 추진 독일정부와 각 정파는 소련의 쿠데타기도가 진정된뒤 소련에서 확고한 위치를 되찾은 개혁파들을 집중적이고도 다양하게 지원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특히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쿠데타기도이후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서구국들로부터의 재정적인 지원이 강화되어야 하며 그동안 대소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서구국들에게 대소지원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기로 했다. 겐셔외무장관은 22일 의회에서 서구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하며 그동안 대소재정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서구국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하도록 촉구하겠다고 말했다.수상실의 루돌프 자이터스장관은 독일은 그동안 소련에 대한 지원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나 독일로서는 더이상의 재정지원을 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자이터스장관은 서구국들은 이제 소련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을 해야한다고 말했으며 겐셔외무장관은 『독일은 능력의 극한점에 이르기 까지 소련을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이터스장관은 본정부가 89년이래 소련에 60억마르크(40억달러)를 지원했다고 밝히고 이같은 액수는 독일이 소련을 도울수 있는 상한선임을 회상시키고 이제는 미국·일본 등 런던 G7정상회담에서 소극적인 대소지원 자세를 보였던 국가들이 독일과 함께 경제지원에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사회당의 볼프강 로츠는 쿠데타기도이후 소련에 대한 국제적인 재정지원의 강화를 유도하기위해 콜총리가 미국·일본을 방문할 것을 요구했다. 독일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뒤 대소지원에 가장 협조적이었으며 이번의 소련쿠데타사건은 소련의 어려운 국내경제상황에 반발하고 있는 보수파가 일으킨만큼 경제지원이 가장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소련의 쿠데타기도이후 본과 파리·로마 등 유럽국가들은 대소경제지원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으나 미국·일본·영국 등은 아직도 소련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독일은 소련의 안정이 유럽의 안보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는 구동구권국가들의 안정에도 필수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이때문에 독일은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소련이 기존의 국제조약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독일주둔 소련군이 예정대로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EC·NATO관계장관회담에서도 소련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해 고르바초프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모처럼 맞이한 「유럽의 봄」이 다시 냉전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했다.소련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번 사건이 소련의 경제적인 딜레마로 야기된 것이라는 분석을 하고 소련에 대한 재정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나 독일 단독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EC·NATO 등 회원국들과의 협조강화에 노력한다는 방침이다.독일은 이와함께 소련사태이후 가장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이 빠른 시기에 시장경제의 틀을 확립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EC가 약속한 경제적 지원을 예정대로 하며 정세가 불안한 리투아니아 등 발트공화국들에 대한 지원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독일은 의회의 토론결과를 바탕으로 대소지원책을 추가로 마련,소련상품의 수입을 확대하고 소련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며 식료품수출을 늘리기로 했으며 국제적인 대소지원의 필요성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조만간 EC정상회담을 열어 소련지원의 구체적인 방안을 촉구할 방침이다.
  • 이기백특파원 현지보고(통일이후의 독일:12)

    ◎“입지유리”… 구서독공장 동쪽행 러시/“싼 임금에 감세 혜택”… 이전업체 줄이어/실업 두려운 서쪽 주민,실력저지 조짐 독일통일이후 서쪽지역에서 평화롭게 운영되던 공장들이 최근 구동독지역으로 속속 이전하고 있어 안정된 생활을 하던 서쪽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되는 뜻밖의 부작용이 일고있다. 구서독의 카이저스라우테른시에서 1백29년동안 운영되어온 파프재봉틀회사는 때로는 불황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호황을 맞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경영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이회사는 그동안 이지역경제에 도움을 주며 주민들과 평화롭게 지내왔으나 이러한 평화는 지난 5월17일 무너지고 말았다.이날 상오10시 구동독지역으로의 공장이전을 반대하는 분노한 근로자 2천여명은 그들의 생활터전인 공장 출입문을 봉쇄했다.종업원들은 생산기계의 구동독지역으로의 운송을 방해했으나 지금까지 이 공장을 동쪽지역으로 이전한다는 회사측의 당초 계획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 회사뿐만아니라 많은 서쪽생산업체들이 통일이후 동쪽지역에서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회사에 이익이 된다는 계산에 따라 생산시설이전을 검토하고 있으며 일부공장들은 이미 기계를 옮겼거나 이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들이 기존의 공장을 동쪽지역으로 옮기는 이유는 이지역의 인건비가 구서독보다 낮고 공장부지값이 싸다는 이유도 있지만 정부가 서쪽자본의 동쪽지역투자를 장려하기위해 지급하는 보조금과 세금혜택이 크기 때문이다. 서쪽주민들은 정부의 지원아래 공장들이 동쪽지역으로 이전해 구서독이 피해를 입게되는 현상이 가속화되자 정부의 동부지역 집중개발정책을 격렬히 비난하고 있다.『우리가 구동독에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쪽지역의 일자리를 줄이지 말라는 것입니다』카이저스라우테른시 금속노조간부인 볼프강뮈러씨는 신규투자는 몰라도 기존의 서쪽공장의 이전에는 정부가 해택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생산시설의 동쪽이전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나 이전공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서쪽주민들의 단결력은 커지고 분노한 주민들의 집단행동은 늘어나고있다.시계조립면허를 받은뒤 29년동안 멜크린장난감제조 회사에서 근무하며 노조운영위원의 일을 맡고있는 아니타슈카르트씨(여)는 『살갗은 외투보다 내복을 더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냐』며 그녀가 지켜온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위해 1백20명의 동료 여성근로자들과 공동노력을 하고 있다.1천7백2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연 1억7천만마르크의 매상고를 올리고있는 이회사의 경영진은 주형공장은 구동독의 그뮌드시로,플라스틱 장난감자동차공장은 튀링겐주로 이전할 계획이다. 구서독지역에서 동쪽지역으로 생산시설을 옮기려는 회사들은 근로자들과 노동조합들에게 공장이전에 따른 종업원들의 직장이전을 제의하는등 주민들의 생활보호책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들은 이마저 거부하고 공장이전계획의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오펠자동차회사는 카이저스라우테른공장에서 나사류제작공정만을 분리시켜 구동독지역에 별도의 공장을 세우려는 계획아래 종업원들에게 새로세워지는 구동독공장의 취업이나 다른 공장으로의 전업을 제의하고 있으나 종업원들은 일치단결하여 『기계하나만이라도 옮기면 전종업원이 공장을 떠나가겠다』고 맞서고 있다. 카이저스라우테른시의 경우는 설상가상격으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내년까지 철수하기 때문에 2만여명의 일자리가 사라질 상황인데다 기존의 생산공장마저 구동독지역으로 옮겨가고있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곳 유지들도 이같은 사태를 막기위해 정치인들과 협조해 낡고 비좁은 재봉틀 공장부지와 넓고 교통이 편리한 공장부지를 교환하는 문제를 회사측에 제안했으나 이 제의가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미지수이다.재봉틀공장에 제공하겠다고 지역사회가 약속한 부지는 하이델베르크의 한 인쇄회사가 새로운 공장을 짓기위해 확보해두었던 땅이지만 환경보호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공장건설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쇄회사는 결국 새로운 공장부지를 찾아 5억마르크(2천1백억원)를 투자,공장을 세웠는데 그 위치는 역시 구동독지역이었다. 통일후 구동독지역의 조속한 개발을 목적으로 마련한 투자지원정책과 세제혜택이 이같이 예상밖의부작용을 가져오자 정부내에서도 구동독개발지원방법을 구서독주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 이질성 극복의 몸부림…이기백특파원 현지보고(통일 이후의 독일:8)

    ◎구동독 주민,일자리 찾아 “서부 대이동”/통일 1년 만에 1백만명 이주 추정/동쪽 인구 격감… 서쪽은 주택난 심화 일자리와 행복을 찾아 동부 독일에서 서부 독일로 이주하는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통일 후 계속되고 있다. 구동독지역의 산업이 자본주의 체제로 개편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공장들이 속속 문을 닫자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과 더 좋은 보수를 바라는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챙겨 아예 서부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구동독 도시지역에선 공동화현상의 조짐이 나타나고 구서독지역에선 주택난이 가중되고 있다. 통일 후 구서독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전자제품등속의 공산품들이 동쪽 지역에서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나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은 농산물을 제외하고는 가격·품질면에서 경쟁력을 잃어 구동독지역의 생산량이 지난해에 비해 20%나 감소됐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구동독기업들이 심한 불황을 겪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구서독기업들은 호황을 구가,구동독 근로자들의 임금이 서부에 비해 70%밖에 안되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구동독 5개주에서 서부로 이주한 주민들은 33만여 명이며 올 1,2월중에만 베를린으로 주거를 옮긴 주민들 숫자가 1만3천5백여 명으로 집계됐다. 구동독 작센주의 경우 한달 1만여 명씩이 서부지역으로 전출하고 있으며 작센안할트주는 5천여 명씩 빠져나가고 있다고 주 당국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주신고를 하지 않거나 살던 집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는 사람들도 상당수여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주민들이 서부로 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동독으로부터의 이같은 엑서더스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돼 올해에만 60여 만 명이 주거지를 옮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취업을 위한 민족이동뿐 아니라 출퇴근 인구의 이동 또한 대단하다.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에서만 5만여 명이 매일 베를린으로 출퇴근하고 있으며 전국적인 숫자는 30여 만 명에 이르고 있다. 1년전 라이프치히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베를린으로 온 수도·전기기술자 스테펜귄터군(21)은 『고향에 있는 고교동창생들이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찌감치 이곳에 와 일찍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시작한 우리가 현명했던 것 같다』며 『늦게 오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속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더욱 뼈아프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테펜군은 고향친구와 함께 셋집을 얻어 한침대에서 같이 자며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안정된 직장과 전망이 있어 불만이 없다고 했다. 구동독기업들은 국가관리 아래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자의 천국」을 약속했지만 동독 출신 근로자들은 통일과 더불어 그들이 아닌 구서독 근로자들이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마르크화가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겠지만 마르크화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마르크화를 쫓아 가겠다』는 식으로 「마르크화대행진」 대열에 동참,구서독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서부지역으로 몰리고 있다. 서부지역으로 이주하는 연령층은 대부분 20대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동쪽지역에는 노년층과 여성층의 구성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노동력의 질적 저하,생산성 저하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베를린 사화과학연구소 인구조사팀 수석연구원인 지그프리드 구룬트만씨에 따르면 89년 9월부터 90년 9월까지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18∼25세의 청년층이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25∼35세 계층이 30%로 전체 이주자의 75%가 노동력이 가장 왕성한 계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룬트만 수석연구원은 『패전 이후 청·장년들이 전선에서 사망,노인들과 부녀자들이 폐허속에서 쓸만한 벽돌을 가려냈듯이 동독이 소멸한 뒤 노인과 부인들만이 동부지역에 남아 사회주의 잔해를 청소해야 할 형편』이라며 『갈탄과 쓰레기더미가 수북히 쌓인 오데르­나이세강을 띠로 해서 미래와 젊은이들이 없는 위험지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동독 청·장년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함께 이주결심을 하는 주된 이유는 물론 안정된 취업과 2∼3배 되는 수입을 바라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시에 살던 볼프강 그리제씨(44)부부의 경우를 보자. 그리제씨는 지난해 4월 전기기사로 근무하던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실직한 데다 부인 모니카(43)마저 슈퍼마켓 점원을 그만두게 돼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처지가 됐다. 그리제씨는 신설 화물자동차 회사의 운전사로 취직했으나 이 회사마저 2개월 후 문을 닫게 되자 두 딸과 함께 전가족이 통일 후 베를린으로 이주,운송회사에 취직했다. 그의 보수는 동부에 있을 때에 비해 2배이며 회사에서 월세 1천6백마르크짜리 셋집을 마련해줘 행복한 가정을 다시 꾸려나갈 수 있게 됐다. 그리제씨는 『실직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새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며 자신의 결단이 현명했음을 강조했다. 최근 주민들의 감소현상이 일자 구동독 5개주 주지사들은 이같은 현상을 막기 위해 물가안정과 동서기업간의 임금격차조정,동쪽기업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건의하고 있으나 당분간 구동독 주민들의 이주현상이 멈출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 드 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스파이 혐의로 각료 사임

    【본 로이터 연합】 구동독 공산정권의 비밀경찰 슈타시에서 스파이 역할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로타르 드 메지에르 전동독 총리는 17일 독일 내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드 메지에르는 또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CDU)의 부총재직도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볼프강 쇼이블레 내무장관과 데르 슈피겔지가 보도한 일부 인사들의 스파이혐의 문제에 대한 회의를 마친 후 이같이 발표했다.
  • 국경 넘나드는 전파가 통독앞당겼다/양독기자들이 본 통독과 언론역할

    『독일통일과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한 세미나가 23일 하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한국언론연구원(원장 한동원)주최의 이날 세미나에는 통독 이전 서독과 동독에서 각각 기자생활을 경험한 게르하르트 담프만씨(마인즈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 TV저널리즘교수·전 서독ZDF방송 동아시아특파원)와 볼프강 크라인베흐터씨(라이프치히 칼 마르크스대 국제커뮤니케이션학교수·전 동독 드레스덴신문기자)가 주제발표를 맡았다. 동서독의 통일과정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우리의 통일문제와 관련,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들의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소개한다. ◎동독국민 80%가 서독TV 즐겨/당 통제받는 방송에 염증… “시청률 5%” 89년 가을까지 동독의 대중정보현황은 첫째,완전히 빗나간 동독의 정보정책과 둘째,서독의 대중정보수단,그중에서도 특히 라디오와 TV의 동독에서의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동독정부의 정보정책은 완전히 중앙의 통제하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며 중앙당의 정보담당서기의 결정하에 어떤 내용이 어떻게 언제 알려질 것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비판적인 내용이나 분석은 있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문제점들,예를 들자면 비능률적인 경제제도,자연오염현상,인권침해 등은 삭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도되었다. 서방세계에 대한 보도는 일률적이고 적대감정을 유발시키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러한 보도들을 믿지 않았다. 당의 직접지휘하에 제작되는 뉴스인 「악투 엘레 카메라」(시사뉴스)가 5%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정책은 객관적인 정보전달이나 국민의 관심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처럼 국민의 관심사와 정보정책의 차이에서 빚어진 공백을 서독의 언론이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적인 조건때문에 동독국민들은 서독의 수많은 라디오·TV방송을 쉽게 시청할 수 있었다. 서독의 국영방송인 ARD와 ZDF는 약 80%의 동독국민이 시청할 수 있었다. 서독 TV뉴스프로는 동독에서 평균 시청률이 50%이상 이었다. 이때문에 동독주민들은 동서독이나 유럽등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헝가리의 국경개방과 프라하·부다페스트의 서독대사관에 동독인 대량진입 등이 동독국민들에게 알려졌고,이것은 동독내 저항운동세력의 힘을 북돋워주었으며 89년 가을 마침내 동독의 스탈린주의적인 제도의 붕괴를 가져왔다. 동독의 사회변혁과 함께 언론체제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 변혁과정은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①변혁의 시초기:89년 가을부터 90년 3월18일 선거까지로 이 기간중에 국민의회에서 의사표현,정보·언론의 자유를 결의해서 당과 무관한 독자기업으로 변신했고 옛간부들이 퇴진,젊은 기자들도 새 편집체제를 구성했다. ②전환기:선거이후 10월3일 통일까지의 시기로 서독언론체제로의 전환기였다. 서독출판사들이 동독으로 진출하고 방송에 광고가 등장했으며 경제적인 측면의 경쟁체제가 등장했다. ③통합시기:10월3일의 통독으로 형식적인 통합은 이뤘으나 물질적·정신적인 실질통합까지는 많은 과정이 남아있다. 동서독 언론이 함께 경쟁하는 상황에서 동독의 조그마한 도시의 지방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동·서독 사회모습 거짓없이 전달/72년 동독에 특파원 상주뒤 실상보도 어떤 다른 정보전달매체도 TV만큼 독일통일에 중요한 역할은 하지 못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떤 다른 매체도 TV만큼 동독공산당(SED)에 위협적인 것은 없었다. 동독과 서독간의 긴 국경선은 서독의 TV방송전파에 유리했다. 또 서베를린은 동독의 한 가운데 섬처럼 놓여있어 TV방송은 사방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특히 정치 엘리트와 인문과학자 및 예술가들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동베를린으로 TV전파가 쉽게 발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독공산당정권은 정치적 선전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동독TV에 비해 진실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서독TV의 위험성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독공산당은 처음에는 서독전파의 수신을 방해했었다. 심지어는 과격한 젊은이들을 내세워 서쪽으로 세워진 안테나를 철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갔다. 동독사람들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공급처로서 서독TV수신을 위해 평화적이면서도 꾸준한 투쟁을 계속했다. 드디어 동독공산당은 전파방해를 단념하고 방해공작을 포기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대립이 위험수위를 넘도록 증폭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동독인들이 서독TV에 이렇게 큰 관심과 신뢰를 보인 것은 이들 프로그램이 동독인들을 위해 특별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동독인들이 서독TV방송에서 보는 것은 서독인들을 위한 보통의 정규TV 방송프로였다. 이들 프로들은 국가적인 선전에 의해 조작되거나 의도적인 해설이 담겨있지 않았다. 공산당 선전에 염증을 느낀 동독인들이 서독의 TV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아주 다양하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이는 동시에 살아움직이고 있는 복합적인 사회,그리고 논쟁이 가능한 민주주의의 모습이었다. 서독특파원들이 동독에 상주(72년말)하게된 이후 서독언론의 동독에 대한 보도는 질적 양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서독특파원 상주사실을 안 동독인들이 편지나 전화로 개인적인 압박과 핍박으로부터 체제에 반감을 갖고 저항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왔다. 동독의 지식인 작가들과도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독TV는 동독시민들에게 동독상황의 참모습을 자세하게 전해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TV방송은 장벽을 넘어 서독의 밝고 어두운 모든 면들을 동독에 보여주었고 동독 매체들과는 달리 동독의 점진적인 몰락을 동독내에 거짓없이 전파했다. 따라서 동독공산당 지도부가 동독과 관련한 국민감정을 형성하지 못한데에는 서독TV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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