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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직원 개인기부 회사서 지원”

    “개인 기부문화의 확산을 통해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새롭게 변화해야 합니다.” 구학서(60) 신세계 사장은 올해 경영의 ‘키워드’로 기부를 제시했다. 지난해에는 ‘신세계 페이(Shinsegae Pay·자신몫 자신이 내기)’를 화두로 던져 윤리경영 시스템을 안착시켰던 구 사장은 최근 신세계유통연수원에서 열린 ‘윤리경영 임원 워크숍’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해 시작된 신세계 페이는 사내 임직원과 6000여 협력업체가 참여,‘좋은 게 좋다.’는 온정주의를 극복하고 경영 투명성을 강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 사장은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개인 차원의 기부문화로 승화시킨다는 복안을 밝혔다. 기업의 수익금을 사회단체 등에 쏟아붓는 형식에서 한 차원 높이자는 뜻이다. 구 사장은 “외국에서는 개인의 기부가 80%를 차지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기업이 거꾸로 80% 이상을 기부하고 있다.”며 “회사 이름으로 50억∼60억원을 기부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임직원들에게 나눠줘 자발적으로 기부하게 하는 게 효과가 크다.”고 주장했다. 기부 문화의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신세계는 3월부터 개인기부 문화의 확산을 위해 외부 공익단체와 연계한 ‘매칭 그랜트’ 방식의 기부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이는 임직원이 기부 대상을 정해 개인 계좌를 만들어 이를 통해 매월 일정액을 기부하면, 회사측도 그와 똑같은 액수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프로그램 참여 여부는 임직원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른다. 신세계의 일부 점포에서 이미 운영하고 있다. 구 사장은 이어 “기업이 사회공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이윤 추구나 고용 창출, 세금 납부, 주주들에 대한 공헌 등 기업의 본질적인 목적이 변질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황교수만 주저앉히면 되나/박강문 대진대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황교수만 주저앉히면 된다.” 이것이 목표였던 사람들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 같다. 철저히 부서진 황우석 교수가 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과 관련하여 작년 12월부터 달포 이어진 논란, 즉 문화방송 ‘PD수첩’ 1∼4편, 그 사이의 노성일 미즈메디 이사장의 폭로 기자회견,YTN의 보도, 황우석 교수의 기자회견,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 숱한 보도기사들, 다시 12일 황우석 교수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실망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 배를 탔던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에서 더욱 그러했다. 특히, 공동저자로 들어가 한때 영광을 함께 누린 사람들 일부가 표변하여, 몰리는 황 교수의 등에 비수를 꽂는 것은 볼썽사나웠다. 난자 채취 과정이나 논문 데이터의 부적절한 처리보다, 이것이 더 큰 윤리적 파탄이라고 생각된다. 논문의 과오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나, 함께 연구한 동료에 대한 인신공격과 감정 실린 폄하는 인간관계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영광은 함께 하되 불명예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이기심을 학자들에게서 보았다. 논란의 과정에서 또 느끼는 것은 ‘거칠다’는 것이다. 황 교수를 몰아대는 쪽의 태도에서 크게 느껴졌다. 국제 특허와 상업적 이익 등에 대한 주도권 다툼, 인간 배아 연구에 대한 생명윤리 문제 등 복잡하게 얽혀 있을 이 미묘한 사건을 다룰 때는 좀더 신중해야 했다.‘조작’을 폭로한다는 ‘PD수첩’의 보도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조작’이 폭로당하기도 했다. 네티즌이 만든 ‘동네수첩’의 등장은 기성 언론매체의 ‘거’에 대한 저항이다. 난자 기증 동의서를 텔레비전 화면에 내보일 때 일부만 보여줌으로써 마치 연구원의 난자 채취를 강요하려고 쓴 문서처럼 보이게 한 속임수는 네티즌이 문서 양식을 통째로 보여줌으로써 들통났다. 황 교수 농장의 쇠고기 회식을 무슨 거창한 잔치처럼 보여준 것은 본질하고는 상관없는 인신공격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우석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던 매체들이, 김선종 연구원에게 입원비와 귀국비용으로 쓰라고 황 교수가 보내준 3만달러(3000만원)를 거액 회유 비용이나 되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거’은 서울대 조사위원회 정명희 위원장의 발표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황 교수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보고서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마저 가치를 축소하여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는 정확하지도 않고 진중하지도 못한 부분들이 있었다. 뉴캐슬 대학 언급 부분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문제의 초점은 황 교수가 이룩한 원천기술 존재 유무와 황 교수가 주장하는 배아줄기세포 바꿔치기 여부인데, 서울대 조사위는 뒤의 문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까지 진행된 상황으로 보면 문제는 미즈메디와 연결된 부분에서 일어났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수인데도 조사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자체 조사의 한계일 것이다. 검찰은 황 교수가 요청한 김선종 연구원 등에 의한 바꿔치기 수사를 즉각 시작하지 않고 서울대 조사위 결과를 지켜 본 다음에야 수사를 시작했으나,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해서는 이와 관계없이 서둘러 증거 확보를 위한 압수 수색을 했어야 옳았다. 이제까지 ‘조작’을 폭로하거나 조사하는 과정에서는 ‘무엇이 보호되어야 하느냐.’를 소홀히 한 것으로 보인다. 과오는 철저히 찾아 징벌해야 하지만 이것에만 쏠려, 반드시 보호되어야만 할 가치를 함께 불에 싸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 나머지 진상 규명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의혹을 모두 털어내면서도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신중하고도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황 교수만 주저앉히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황 교수와 함께 주저앉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박강문 대진대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 [열린세상] 사학법 반대는 시대착오/홍덕률 대구대 사회학 교수

    2003년 3월이었다. 대구 인근의 경산에 4년제 대학 하나가 문을 열었다. 아시아대학교다.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지어진 채로 신입생을 받았다.2002년 12월에 교육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은 직후였다. 지역 여론은 대부분 의아해했다. 입학정원 미달 사태가 속출하고 대학위기론이 파다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2005년 5월이었다. 그 아시아대학교가 뉴스에 등장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서였다. 설립자 겸 총장과 전 부총장을 구속 기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2001년 6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교수 지원자 40여명으로부터 40여억원을 받았다고 했다. 대학 문을 열기 전부터 교수직을 팔아 뒷돈을 챙겼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다시 몇 달이 지난 2006년 1월3일, 그러니까 며칠 전이었다. 이번엔 교육부가 종합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아시아대학교에 폐쇄계고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내용도 상상을 초월했다. 교직원을 채용하면서 57억여원을 챙겼고 교비 횡령액도 6억 7000만원에 달했다고 했다. 대학 설립 때에도 허위 재산출연 증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신입생 등록률을 부풀리기 위해 175명을 허위 등록시켰고 교직원 급여 체불도 65억원에 달했다고 했다. 대학 문을 열게 하고 닫게 하는 것이 마치 동네 구멍가게처럼 한다. 문제는 학생들이다. 이 학생들이 입은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중국에서 유학온 학생들도 여럿 있다는데, 그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하고 그들에게 끼친 나라 망신은 또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당연히 교육부의 책임은 없는지 짚어봐야 한다. 입학 정원을 줄이라고 몰아치면서 동시에 이런 대학의 설립을 인가해 준 교육부의 자가당착과 부실 행정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 설립 인가 과정에서 설립자의 품성과 대학 경영 능력을 최소한이라도 검증한 것인지, 아니면 서류만 보고 도장을 찍었는지, 누군가의 로비를 받고 안되는 일을 승인한 건지 철저하게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부패와 비리가 사립학교 현장에서 얼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각종 비리와 전횡과 반교육적 행태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인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무 죄도 없는 학생과 학부모다. 국가적 손실도 말할 수 없이 크다. 당연히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사립학교법 개정이 그 중 하나다. 교육당국의 감독권 행사 외에 최소한의 시민적 견제, 교육 관계자의 공적 견제가 작동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 경영을 좀더 투명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영리기업의 경영도 투명할 것을 요구받는 시대다. 하물며 교육은 본질적으로 공적 기능이다. 사립학교의 경우도 국가 예산이 적지 않게 투입된다. 중고등학교 경우는 국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재단의 전횡과 부패와 비리로 인한 폐해는 사회적으로 너무나 크고 심각하다. 그것들은 마땅히 미연에 방지되어야 한다. 학교 경영자의 양심에만 맡겨둘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 때 처벌하자고 하는 것 역시 무책임한 발상이다. 또한 개방과 참여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반발을 사고 있는 개방형 이사제는 시대를 읽는 학교 경영자라면 먼저 나서서 시행했어야 할 일이었다. 시대착오적인 사립학교법 공방으로 날을 지샐 때가 아니다. 색깔론으로 선동하는 것,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학생을 볼모로 삼는 것 모두 반(反)교육일 뿐이다. 학생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교육현장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이다. 홍덕률 대구대 사회학 교수
  • [코드로 읽는책]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전쟁/마크 가브리엘 지음

    이른바 세계종교라 불리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다. 이슬람은 강고한 유일신 신앙과 종말론 사상 때문에 기독교의 한 파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제종교’는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 왔다. 그것은 두 종교의 신학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이슬람은 예수가 무함마드 이전 시대에 마지막으로 부름받은 위대한 예언자이자 치유자임도 인정한다. 하지만 예수를 신의 아들이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메시아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원죄의 개념을 모르는 만큼 대속(代贖)의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두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 대 이슬람,2000년간의 전쟁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독실한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 학자 마크 가브리엘이 쓴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전쟁’(김명신 옮김, 퉁크 펴냄)은 이같은 난제에 성의있는 답변을 시도한다. 서구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슬람만큼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종교도 없다. 서양에서의 이슬람상(像)은 적잖이 왜곡돼 왔다. 이슬람은 흔히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란 얘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 이스탄불로 개칭한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을 종교적인 국제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패전국의 기독교문화까지도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학자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를 들기도 한다. 이슬람과 기독교, 이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에 더욱 더 싸우는 것일까. 두 종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온 한 신부는 아직도 ‘반(反)코란적인 광견병’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성경과 코란이 너무도 흡사함에 놀랄지도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 노아와 홍수, 롯과 악의 도시, 이집트의 모세에 대한 상세한 설명 등 코란에 나오는 성경 이야기는 한둘이 아니다. 모름지기 종교란 본질이 다를 수 없다. 악을 가르치는 종교는 없고, 악을 뿌리뽑기 위해 악을 행하라고 명하는 종교 또한 없다. 종교는 죄가 없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혹자는 오늘날 이슬람과 서방세계의 갈등을 문명충돌론이나 선과 악이 대결하는 성전으로 몰고가기도 한다. 테러와 전쟁의 원인은 석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물론 일면적인 고찰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명쾌한 답변을 유보한다. 다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결코 다른 명제를 추구하지 않음을 강조할 뿐이다. 아랍에는 “커가면서 제 아비를 닮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어차피 환경의 산물이다. 이슬람도 기독교도 숙명적으로 자신의 옹색한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어쩌면 성경에도 나오듯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만이 진실인지 모른다. 이 책의 결론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발언대] 軍 자살 예방,사회가 함께 풀어야/이정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그동안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군내 자살 사건이, 얼마 전 입대한 조카의 자살시도로 인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오랫동안의 호주 생활로 한국 사회에 적응이 쉽지 않은데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순한 심성으로 각박한 사회 생활 적응을 걱정하던 부모는 자식을 ‘사람 만들어 주는’ 대한민국의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초기단계부터 군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던 조카는 간부의 감동스러울 정도의 관심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휴가를 받고 자대 복귀 중에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였다. 자살 실패로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지고 자대로 복귀한 조카는 이제 밝은 모습으로 군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입대하는 신병들을 보듬어 주고 있다. 최근 우리 군은 종전보다도 더 큰 사회적 짐을 떠안고 있으며, 전투력 강화라는 본질적 관심보다는 병사들의 자살 방지와 병영생활 적응에 더욱 안간 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급격한 사회 구조의 변화로 가정해체 등 사회병리 현상이 심각해지고, 가정이나 학교에서조차 인성교육이나 시민교육이 포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은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힘겨운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자살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여지없이 군을 질타하는 언론이나 국민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군에서의 자살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1997년 이후 인구 10만명당 우리나라 20대 남성의 자살자 수는 14.1명(1997년)에서 17명(2004)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중 육군 병사의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12.8명에서 8.8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지난해에는 GP 총격사건과 JSA 익사사건에도 불구하고, 육군 자살자 및 사망자 수는 2004년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우리 육군의 자살률은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 육군의 2분의 1, 일본 육상자위대의 3분의 1, 주한미군의 3분의 2 수준에 해당된다. 군은 군내 자살률이 사회보다 낮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현재와 같이 군 간부의 열정이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살을 예방하거나 강한 군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직도 대다수의 병사들이 내무반에서 칼잠을 자고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열악한 병영 환경에서는 병사간 존중과 배려를 기대하거나 병사의 인권이나 자존감을 보장해 주기는 어렵다. 이러한 대책은 군의 노력만으로는 실현되기 어려우며 국민의 적극적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과감한 투자와 함께 상호 힘을 실어줄 때만이 가능하다. 이정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 [광역단체장 새해설계] 박광태 광주시장

    [광역단체장 새해설계] 박광태 광주시장

    “새해는 ‘1등 광주’ 건설의 기반 구축과 일자리 창출의 원년으로 삼겠습니다.” 박광태 광주시장은 12일 “지난해 투자유치와 사상 최대 규모의 국비 확보 등을 통해 거둔 결실을 토대로 ‘1등 광주’ 건설의 기틀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첨단산업 육성 등 10대 추진전략 과제를 선정하고, 모두 1조 3233억원을 투자한다. 박 시장은 “자립형 산업도시 기반 구축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전략산업 육성 박 시장은 “자동차·디지털 가전·광산업 등 3대 주력산업의 규모를 획기적으로 키워나갈 것”이라며 “지역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겠다.”고 말했다. 오는 2010년까지 자동차는 현재 연간 35만대에서 80만대로 생산능력을 높인다. 광주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가전제품 매출액도 3조 6000억원에서 13조원대로, 광산업은 1조 2000억원에서 7조여원으로 각각 늘려 나간다는 복안이다. 또 첨단부품 소재, 디자인, 문화콘텐츠, 신에너지 분야를 4대 전략산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이밖에 홈오토메이션을 앞당기게 될 광가입자망(FTTH), 반도체 광원(LED)등 ‘5대 신기술 응용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박 시장은 이같은 산업기반 확충을 통해 “오는 2010년까지 매년 2만개씩 모두 1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문화 중심도시 조성 박 시장은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착공을 계기로 관련산업을 육성하고, 도시공간의 문화적 리모델링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문화로 밥먹고 사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이 사업의 본질”이라며 “100만평 규모의 문화산업단지 조성사업도 꾸준히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안정적인 사업을 위해서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여·야의원 발의로 마련된 이 특별법은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다. 광주비엔날레 등 문화예술 축제의 경쟁력 강화와 어등산 관광단지 개발, 광주호 주변 생태공원 조성사업 등도 추진된다. 이밖에 사회복지시설 확충과 1000만그루 나무심기, 폐선부지 푸른길 조성 등 도심 녹화사업도 펼친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1등 도시 건설’ 꿈꾸는 광주 광주시의 올 시정 캐치프레이즈는 ‘1등 광주 건설’이다. 박광태 시장은 “이는 향후 10년 동안 ‘잘사는 도시, 부자 광주’를 실현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도시개발 축의 이동과 전남도청 이전에 따른 행정 중심기능의 약화 등으로 도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그동안 자원유입형 거점성장 모델을 지향했으나, 이를 혁신창조형 네트워크 허브 개념으로 바꿨다. 자동차 등 핵심 전략산업 이외에 가전로봇, 우주항공, 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육성, 강력한 도시 성장엔진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광주시는 그동안 이뤄낸 ‘경제 살리기’ 효과를 근거로 든다. 사상 최초로 최근 3분기 연속 제조업 생산증가율 전국 1위를 달성했다. 지난 2001년에 비해 수출액 22억달러, 취업 인구 4만 7000명, 제조업체수 60개 등이 각각 증가했다. 이같은 자신감에다 최근 국책사업으로 추진중인 ‘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이 도시성장을 선도하고 있다. 정부와 시는 오는 2023년까지 2조원 이상을 투입, 도시구조 전체를 기능별로 리모델링한다. 제2 순환도로, 지하철 1호선 등의 완전개통과 공동혁신도시 건설 등도 도시발전의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시는 2015년까지 ‘광주의 미래상’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1등 도시’를 꿈꾸고 있다. 이때까지 인구는 현재 141만명에서 180만명,1인당 생산액(GRDP)은 9232달러에서 2만 5000달러, 제조업 비중은 20%에서 35%로 각각 높아질 것으로 분석됐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열린세상] 과학과 정치의 만남은 잘못인가/김병식 동국대 생명화학공학 부총장

    과학이라는 주제가 온 국민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이 주제가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과도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것도 또한 사실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과학은 ‘자연에서의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학은 냉철한 객관성이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주관적 가치판단이나 선동적이고 당위적인 명제는 발붙이기 어려운 영역이다. 반면, 정치란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굳이 말하자면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에는 다양한 가치와 당위적 판단이 혼재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 속에서 갈등은 자연히 표출되고, 그 갈등을 토론과 합법적 투쟁으로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정치이고 민주주의인 것이다.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과 주관적 다양성이 본질인 정치는 어찌 보면 참 어울릴 수 없는 두 영역일 것 같지만, 이 시대는 이 두 영역이 함께 하길 원한다. 세계 모든 국가가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한 요즘, 한 국가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선도하는 기술로 국부를 계속 창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선도 기술의 대부분은 과학적 연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각국의 정부는 과학을 국가적 어젠다로 설정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면서 국부의 원천을 만들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과 정치는 만나게 된다. 국가적 어젠다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가치판단과 ‘과학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충돌하게 된다.‘난자와 체세포만으로 줄기세포를 배양할 수 있겠는가?’라는 순수한 과학적 탐구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난자와 체세포로 줄기세포가 배양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국민은 무의식적으로 이에 동감하고 지지하며, 차가운 머리로 바라보아야 할 과학을 뜨거운 가슴으로 바라보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논문이 과학자의 실수, 또는 의도된 잘못으로 수정, 철회되는 일이 있어온 점을 감안하면, 최근 나라 전체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로 떠들썩했던 이유는 그것이 과학의 정치화가 빚어낸 일종의 정치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정치가 만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정치는 조심해서 만나야 한다. 국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과학에 국가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 시대의 요청이며, 또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객관적인 영역과 주관적인 정치의 영역이 만날 때에는 우리에게 중용의 미학이 필요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들어갈 때에도 객관적으로 보호되고 중립적으로 놓아두어야 할 영역에서는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이런 중용을 간과한다면, 황우석 사건과 유사한 혼란은 언제든지 또 생길 수 있다. 차기 과학부총리가 내정되었다. 복지부 장관 내정 관련 파문과 사학법 논쟁 때문에, 또 한편 황 교수 사건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과학부총리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다. 과학부총리는 과학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을 설정하고 조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지휘자이다. 또한 그는 국가적으로 확실히 장려되어야 할 부분과 객관적 진리탐구의 영역으로서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될 부분을 구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이기도 하다. 과학과 정치를 조화시키는 예술적 수준의 중용의 미덕을 차기 과학부총리에게 절실히 기대해본다. 취임 일성이 기다려진다. 김병식 동국대 생명화학공학 부총장
  • 노대통령 탈당 언급 충격에 빠진 우리당

    11일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새해 만찬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당·청 갈등이 표면화된 이후 가진 자리라 더욱 그랬다. 저녁 6시30분부터 8시55분까지 진행된 만찬은 당·청 간의 인식 차이와 소통의 부족함을 인정한 자리였다. 당에서는 유재건 의장을 비롯, 상임고문과 집행위원 등 지도부 17명이 참석했다. 1·2개각, 차세대 지도자 양성론, 불법당원 가입 및 당비 대납 사건, 양극화 해소와 경제 성장 등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현안들은 대부분 거론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인사말에서 “대화로 풀 건 풀자.”고 운을 뗐고, 유 의장은 “당과 청은 연인관계”라고 연대 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만찬후 노 대통령이 과거지사지만 탈당도 검토했었다는 얘기가 전해자자 당 일각에선 아연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한 당직자는 “대통령이 정계개편가지 염두에 두고 당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반면 당의 다른 관계자는 “노 대통령과 당은 관계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서로가 존중하고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좁혀 나가야 한다.”며 최근의 갈등양상이 봉합되기를 기대했다. ●당·정·청 관계연구 TF가동 따라서 당의 서명파와 ‘친노’그룹간에 노출된 본질적 갈등과 앙금이 쉽게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김영춘 의원은 “말로만 해결이 되나.”라고 반문하면서 “실행 과정에서 당의 주도적인 자세와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청와대 비서실과 총리실, 당이 중심이 돼 구성키로 결론을 내린 ‘당·정·청 관계 연구 태스크 포스(TF)’에 대해 당측에서도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종이 당원 문제에 강력 경고 배기선 사무총장은 기간당원제와 관련된 허위 당원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 “창당 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당이 천명한 대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주문했다. 깨끗한 경선 문화에 대한 당부도 곁들였다. 노 대통령은 당과 정부의 관계에 있어 당에 힘을 실어줬다. 노 대통령은 “당정 협의를 통해 당이 주도해 나가는 관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정부는 당을 존중하면서 행정을 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1·2 개각 논란’과 관련,“당정간에 인사 문제는 상호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정세균 의장의 입각 문제는 다소 소통의 문제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유 의장은 한나라당이 거리투쟁을 중지하고 인사청문회에 합류토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유시민 입각 관련,“과민말라” 노 대통령은 유시민 의원의 입각을 둘러싼 ‘차세대 지도자 양성론’ 논란도 해명했다. 차세대 지도자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의 공식 선거에서 선출된 공인된 과정을 기준으로 그 정도 수준에 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발탁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나름의 충정에서 했던 말인데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박홍기 박찬구 황장석기자 hkpark@seoul.co.kr
  • 상품권업체 “졸속행정” 반발

    문화관광부가 경품용 상품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1일 발표한 불법 사행성 게임장 근절대책에 매우 조심스럽게 경품용 상품권 폐지를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문화부에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경품용 상품권 인증제가 도입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폐지를 거론함으로써 일고 있는 ‘졸속행정’ 여론이다. 일부 언론에서 게임장의 사행성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자 충분한 검토 없이 폐지를 거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미 어렵게 문화부 산하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의 인증을 받아 상품권을 발행하고 있는 업체들과 1만 5000여개에 달하는 게임장 업주들은 생존을 걱정하게 됐다. 한 상품권 총판업자는 “부작용이 드러났다고 불과 6개월 만에 폐지를 거론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다.”며 “게임장, 경품용 상품권 업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십만명의 목을 죄는 행위”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행성 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곁가지인 상품권만 매도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원래 경품용 상품권은 유사 상품권 남발로 인한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고, 문화상품권 유통을 통해 문화산업을 진흥시킨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지난 8월부터 총 10개 업체가 발행한 상품권이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의 인증을 받아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게임장에서 상품권 사용을 양성화시키자 그 유통이 크게 늘면서 피해자가 속출했고,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문화산업 현장에서의 소비보다는 게임장 유통량만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행성 문제는 게임물 자체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속칭 ‘메달게임’ 등 강력한 사행성을 갖춘 게임이 영등위의 등급분류를 통과함으로써 문제가 싹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행성 게임물을 철저히 걸러내고, 게임기 불법 개·변조 행위를 밀착 감시하면, 상품권 자체의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문화부도 일부 이같은 점을 시인한다. 한 관계자는 “상품권이 사행성의 핵심 원인은 아니다.”면서 “워낙 유통량이 많은 데다, 일부 언론이 연이어 사행성 원인으로 상품권을 지목하는 바람에 난감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2)이기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

    지난주에 인간의 지능은 동물의 본능을 대신하는 기능을 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동물의 본능은 생존의 방법을 기막히게 가르쳐 준다. 작년에 남아시아의 쓰나미 사건 때에 사람들은 15만명가량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동물은 오직 고양이 한 마리가 죽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만큼 동물은 거의 본능적으로 생존의 길을 찾는다. 동물의 본능은 거의 신기에 가까울 정도다. 그런 신기에 가까운 동물적 생존 본능의 능력이 희미한 인간은 본능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에게 지능이라는 도구적 능력을 대신 주었다. 여기서 잠깐 동물적 본능과 인간의 지능을 비교해 보자. 둘 다 살아가는 생존술(生存術)을 공급해 주는 원천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본능과 지능은 상이하다. 본능의 기능은 선천적이고 예지적이지만, 닫혀진 기능이다. 본능은 태어날 때에 이미 그런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능력은 대단히 예지적이어서 천재지변의 위기를 미리 감지하여 대피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본능적 생존술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본능의 능력은 닫힌 체계에서 갇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인간의 지능은 우선 후천적 학습에 의하여 내용을 채워 나간다. 그리고 위기를 미리 예감하는 예지력이 부족하여 학습에서 익힌 과학적 데이터에 의존해서 미래를 다만 예측할 뿐이다. 인간의 지능은 동물의 본능에 비하여 대단히 부정확하고 생존술도 간접적이다. 동물의 생존술은 거의 틀림없고 단도직입적이다. 그런데 인간의 지능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는 특성이 있다. 부정확하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지만, 열려 있어서 동물처럼 주어진 본능의 능력 테두리가 정해져 있지 않고 거의 무한한 변수에 대해서도 대응할 자세를 갖춘 것이 지능이다. 본능은 자연적인데, 지능은 인공적이다. 자연적 본능은 자의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나, 인공적 지능은 자기중심적인 계산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지능이 본능과 유사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다 자기 생명의 생존에 필요한 이익을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자기중심적 계산으로 이익을 찾는 지능은 강한 자의식을 동반한다. 자기중심주의와 자의식은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자의식은 동물의 본능만큼 강렬한 충동이다. 그러나 동물에겐 자아가 없다. 인간은 지능적이고 강인한 자의식에 의하여 동물로부터 분리되었고, 자연에서부터 문명을 일으켰다. 문명생활은 자의식의 소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동물의 본능은 바로 그 본성과 같다. 포식동물인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고, 말똥구리가 말똥이나 쇠똥을 잘 굴려서 거기서 새끼를 기르고 식량으로 쓰는 것은 자의식 없는 본능의 자발적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거기에는 도덕적 선악이 없다. 그냥 본능의 기제(機制)에 따라 본성상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본능과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 다 공통적인 것은 인간에게도 본성이 본능처럼 선악의 구분 이전의 자연적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본능의 생존술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어떤 일에 심취했을 때에 나타난다. 손재주가 대단한 이가 무엇을 만들 때나, 야생 생태계의 사진촬영작가는 자기의 이기적 이익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일에 매진한다. 그 순간 그는 (선/악)도,(손/익)도 계산하지 않는다. 본성의 기호(嗜好)는 그냥 좋아서 무심으로 일할 뿐이다. 여기서 약간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도 동물의 본능처럼 무의식적으로 일에 매진한다. 그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본능은 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생존력에 관심을 쏟지만, 본성은 정신적이다. 본성은 자연적인 자기 기호에 따라 정신적인 자기성취를 이루려는 자발성과 같다. 그러나 인간이 생존을 위해 본능에서 지능으로 방향전환을 이룩한 이상, 지능의 이기적 방향과 본성의 자연적 무목적의 방향은 갈라진다. 본성의 무목적적 방향이란 본성이 어떤 일을 인위적 목적의식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에 자연적으로 깃들어 있는 성향이 좋아하는 것을 그냥 따르는 것을 말한다. 지능은 인간의 개인적 또는 종족적 생존에 도움이 되는 기술지식이나 경제력과 무력을 소유하려 한다. 지능은 철두철미 사회적이고 소유적이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경쟁적이라는 것과 동의어고, 소유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인 지배와 같은 뜻이다. 지능은 이기적 경쟁과 배타적 소유욕을 본질로서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 사회가 기술경제력에서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고, 놀랄 만큼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본능과 본성은 다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인 성향인데, 지능은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활동의 결과다. 그래서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의식이 모든 가치창출의 보고인 양 그 의식을 자랑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외쳤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이런 이기배타적인 지능의 작용 이외에 사회도덕적 요구를 지니고 있다. 이기적 행각을 미워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보다는 사회공동체의 선의지를 더 중요시하고, 반이기적 도덕적 판단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식의 자기 반성이 일어난다. 이기적 생존이 본능의 사회적 연장이라면, 반이기적 도덕사회적 공동체의 선의지는 본능과 다른 본성의 정신적 요구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도덕심은 본성보다 훨씬 투쟁적이고 적대적이다. 본성은 자연적(자발적)인데, 도덕적 선의지는 본능처럼 강인한 지능의 이기심과 싸우기 위하여 강력한 당위적 요청을 내세운다. 동서고금의 모든 도덕률이 다 반이기적이고 당위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도덕적 양심에 맞기 때문이다)라는 도덕률은 다 당위성을 앞세운다. 동서고금의 이상주의자들이 대개 이런 경향을 가지고 세계를 혁명해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선의 세상을 만들려는 위대한 꿈으로 이상적 도덕주의자들이 부풀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다 실패했다. 요순사회를 재현하겠다는 조선조의 선비들의 도학혁명도 실패했고, 중국 청대 말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의 혁명도 실패했고, 마르크스와 마오(毛)의 사회주의 혁명도 실패했다. 이기적 지능의 경제주의적 논리는 편리의 문명을 실제로 가져왔고, 동물적 본능을 대신한 만큼 끈질기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이기심을 이기기가 어렵다.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은 도덕적 선의지가 세상을 지배하기를 바라면서 이기심과 투쟁했다. 그러나 도덕적 당위의 투쟁은 결코 이기심을 뿌리 뽑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기심이 비록 자기중심적 의식의 소산이지만, 그 뿌리는 본능적인 무의식의 생존욕에 맞닿아 있으므로 도덕의식의 주장만으로 무의식의 소유욕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 도덕주의는 늘 의식상 명분적 주장의 영역만을 점령하여 사회생활에서 공소한 이름만을 불렀다. 이것이 선전도구의 이념이다. 세상을 반이기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모든 이상적 혁명이 실패한 까닭은 세상이 의식의 당위로 바꿔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헌집 수리하듯이 그렇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수리하고 고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지붕이 낡았으면 다시 고치고, 기둥이 썩었으면 다시 바꾸면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안된다. 세상은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있는 화면과 같다. 즉 세상은 인간의 무의식이 그리고 있는 사이버(cyber) 화면과 같다. 무의식의 본능적 욕망이 역시 무의식의 본성적 욕망으로 자리바꿈을 하지 않고서는, 세상이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성은 본능의 소유욕과 달리 우리가 어떤 일에 몰입했을 때에 생기는 무심한 마음이라는 것을 앞에서 지적했다. 그 무심한 마음이 왜 욕망일까? 본능은 생존을 위한 소유욕이지만, 본성은 자기의 특성을 그냥 꽃피우고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다. 우리는 이런 욕망을 존재론적 욕망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자기 특성을 꽃피우려는 마음은 자기의 존재를 충만케 하여 그 존재의 열매를 만인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그런 희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본성의 희망이 왜 사회생활에서 잘 솟아오르지 않을까? 인간의 본능은 지능으로 사회생활화됐지만, 본성의 정신적 요구는 쉽게 사회생활화가 안된다. 본성의 정신적 요구는 인간의 마음이 고요하고 출렁거리지 않고 안온할 때에, 소리없이 내 마음에 솟아 오른다. 도덕적 선의지는 사회생활에서 이기심과 싸우고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도덕주의도 역시 현실적 경제주의에 못지않게 소유적이다. 도덕의지가 명분적이나마 세상을 지배하기 위하여 권력의지로 쉽게 미끄러진다. 현실적 경제주의나 이상적 도덕주의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곳에서는 본성의 정신적 희망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성의 희망은 소유적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생활에서는 주눅이 들어 무의식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성의 희망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떠들고, 악 쓰고, 잘난 체하면서 미쳐 날뛰는 곳에서는 수줍은 듯이 잠복해 버린다. 돈에 눈이 멀어 미쳐 날뛰고, 혁명한다고 흥분해서 선의 진군 나팔을 불어대는 곳에 본성의 고요한 말은 들리지 않는다. 본성의 회복을 희망하는 이들이 고요한 산이나 숲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자기 자신과의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은 시끄러운 소음의 흥분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겠다.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좋은 복락(福樂)의 사회로 가는 길은 우리가 미쳐 열광하여 막말하면서 자기 주장으로 상대방을 미워하는 펄펄 끓는 감정 사회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되살아나게끔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진정시키는 정신문화의 생활화에 있다. 자연적 본능을 약하게 하는 길은 역시 자연적 본성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이상적 도덕주의는 그런 일을 못한다. 고요해지면, 우리는 다 쓸모가 있는 존재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도약 2006 우리는 이렇게 뛴다](4)KT 남중수 사장

    [도약 2006 우리는 이렇게 뛴다](4)KT 남중수 사장

    “바람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담을 쌓진 않겠다. 그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리겠다.” 지난해 송년 간담회에서 남중수 KT 사장이 던진 말이다. 그의 말에는 통신시장에 다가선 새로운 환경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새로운 바람은 곧 상용화를 앞둔 차세대 서비스인 와이브로(휴대인터넷), 인터넷TV(IP미디어) 등 신성장 동력이다. 이는 남 사장의 ‘어슬렁거리기’가 끝났음도 뜻한다. 그가 취미라고 밝힌 어슬렁거리기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냉철한 관망·분석·판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엔 먹이를 낚아채기 위한 맹수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남 사장은 “올해는 외형 위주의 성장을 지양하고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을 준비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규 사업의 발굴도 의미가 있지만 성장 사업으로 선정된 와이브로·IP미디어 상용 서비스, 이를 지원하는 각종 콘텐츠 발굴 등 미래 사업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그는 KT의 미래 성장 모멘텀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남 사장은 “와이브로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다는 점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고,IP미디어는 또 통신·방송 컨버전스 시대에서의 또다른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며 “이를 통해 KT의 위상을 높이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중·장기 성장을 위한 투자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에 비해 20% 이상 증가한 3조원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와이브로에 5000억원,IP미디어에 3000억원, 콘텐츠 분야에 770억원이 투자된다. 이 같은 투자는 민영화 이후 최대 규모다. 남 사장은 또 긴 호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본질 경영’이 요체다. 이를 위해 더욱 진화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에 맞는 콘텐츠와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이를 운영할 전문인력도 양성할 방침이다. 이러한 성장 모멘텀이 가시화되면 올해 KT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될 것으로 자신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원더 경영’을 올해도 힘차게 밀고 나갈 생각이다. 원더 경영은 열린 마음으로 모든 고객을 바라보고 고객과 함께 이루고 공유하는 ‘상생’과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으로 요약된다. 남 사장은 올해 CEO 신년사에서도 직원들에게 ‘고객감동 실천’을 거듭 강조했다.KT의 현재 서비스 수준이 고객감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며 긴장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전국민의 80%를 고객으로 모시고 있지만 고객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남 사장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고객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어떠한 첨단 서비스도 무의미하다.”면서 공급자 관점에서의 마케팅 단절을 요구했다. 진정한 고객 중심 기업이 되기 위한 본질적인 체질 혁신을 펼칠 방침이다. ‘상생의 경영’도 실천하기로 했다. 협력 회사의 경쟁력이 곧 나의 경쟁력이라는 시각에서 협력 회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것이다.“노사관계의 안정을 통해 상생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협력사와의 성과 공유를 통한 윈-윈 구도를 정착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존 전략의 요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위한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연간 500억원대의 중소기업 지원 펀드를 조성하고 중소기업 대가 지급을 100% 현금 결제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남 사장은 “잭 웰치의 말처럼 기업 활동도 하나의 게임”이라며 “기꺼이 즐기는 자세로 일하겠다.”고 밝혔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사설] 신입생 거부는 사학재단 권한 아니다

    개정된 사학법에 반대해 신입생 거부, 학교 폐쇄 등을 공언해 온 사학재단들이 드디어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전국에서 처음 신입생 배정에 나선 제주도에서 제주시내 5개 사립고교가 교육청이 배정한 신입생 명단 수령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5개교에 배정 받은 신입생 1292명과 그 가족들은 고교 진학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에 떠는 나날을 보내게 됐다. 사학재단이 제 뜻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학생을 볼모 삼아 이 사회와 정부를 위협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학교가 학생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사학재단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차례 밝힌 바 있듯이 일단 학교를 설립했으면 그 운영은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정책이 맘에 안 든다거나 기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재단 멋대로 학생을 받고 말고 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입생 배정을 거부하는 것은 사학재단 권한 밖의 일임을 분명히 지적하며, 사학재단들에 극단적인 행동을 철회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 제주시에서 신입생 배정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청와대는 어제 대책회의를 갖고 이를 헌법적 기본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법 질서 유지 차원에서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이 대응방안에는 일부 사학의 교사채용 비리를 비롯한 부패·비리 구조를 전면 조사해 공공성·투명성을 담보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이 기회에 사학재단의 옥석이 가려진다면 그 또한 교육 발전을 앞당기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청와대 발표에 덧붙여 교육부는 제주시 5개 고교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시정명령-교장 해임 요구-임시이사 파견 등의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는다고 공표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사학재단들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학습권을 결정적으로 침해한다면 이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 [사학비리 전면조사] “사학 협박한 여권이 헌법질서 훼손”

    한나라당은 6일 청와대가 일부 사학의 신입생 배정 거부 움직임을 헌법적 기본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법적 대응과 사학 비리 수사에 착수하기로 한 것과 관련,“헌법질서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쪽은 노 대통령과 정부·여당”이라며 강력 성토했다. 박근혜 대표는 이날 강동갑 당원협의회 신년인사회 및 사학법 반대 투쟁 보고대회에 참석하기 전 기자들에게 “(사학의 신입생 배정 거부는) 여권이 초래한 문제로 이미 예고된 일”이라며 “여권은 지금이라도 재개정 논의를 해야 하며, 재개정을 거부하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계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노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사학에 대해 엄청난 협박을 하는 것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며 “이번 사태는 충분히 예고됐던 일인데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뻔히 예상된 사태를 날치기까지 해가면서 자초하고 재촉했다.”고 비판했다. 사학법 반대 투쟁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전여옥 의원은 “노 대통령이 ‘1·2개각’에 이어 사학에 대해서도 가장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칼을 뽑아들겠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노무현 정권의 속내이자 허구”라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종교계·시민단체·학부모모임 등과 연대해 사학법 반대 투쟁의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가기로 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靑 “사학비리 전면 조사”

    청와대는 6일 사학들의 신입생 배정 거부를 비롯, 사학법인들의 사학법 반대 움직임이 현실화된 것과 관련,“헌법적 기본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 법 질서 수호 차원에서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청와대는 일부 사학들의 교사채용 비리를 포함, 부패 비리구조 등 사학비리에 대해 전면 조사에 나서도록 법무부·교육인적자원부·행정자치부 등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 지난해 12월9일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지속된 한나라당과 사학법인의 사학법 반대투쟁에 청와대가 초강경 대응방침을 정함으로써 사학법을 둘러싼 마찰이 심화, 확대될 전망이다. 청와대는 이날 이병완 비서실장 주재로 관계 대책회의를 열고 이같은 입장을 정리했다고 김만수 대변인이 발표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청와대의 강경 대응 방침과 관련, 당장이라도 사학법 재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서 여야의 대치전선이 더욱 첨예해졌다. 열린우리당 유재건 신임의장은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대통령령이 부족하면 의원입법으로 보완하는 방안도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 대책회의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 비서실장으로부터 일부 사학의 신입생 배정 거부 방침을 보고받은 뒤 “이번 사태에 철저히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함에 따라 이뤄졌다. 김 대변인은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학생들의 학습권이 보장되고 학사 일정이 차질없이 이뤄져 학부모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면서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행정적·사법적 절차를 단호하고 신속하게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의 법 집행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거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사태를 교사하고 지휘한 지휘부 등에도 엄격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변인은 “앞으로 일부 사학의 교사 채용 비리를 비롯한 부패 비리 구조에 대해서는 성역없이 조사에 착수해 모범적이고 건전한 사학 수준으로 공공성과 투명성이 갖춰지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면서 “교육부를 중심으로 사학 비리 전면 조사에 착수하고 필요한 감사 인력을 보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사학비리 전면조사] “학습권 침해 불용” 모든 칼 뽑았다

    청와대는 사학의 신입생 배정 거부를 헌법의 기본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헌법에 규정된 학습권에 대한 침해를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판단인 셈이다. 제주도에서 신입생 배정 거부 움직임이 현실로 나타나자 결국 청와대가 나서 초강경 대응책을 내놓은 형국이다. 무엇보다 우선 신입생 배정 거부에 대해 임원취임 승인 취소와 임시 이사 파견 등 행정적·사법적 모든 절차를 밟기로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제주도 이외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특히 일부 사학의 부패 및 비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의도도 보이고 있다. 사학의 교사 채용 비리를 포함한 부패 비리 구조에 대해 성역없이 합동 조사토록 지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사학의 건전성과 투명성 확보라는 사학법 개정안의 취지를 다시금 내세웠다. 사학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격이다. 실제 청와대는 지난달 9일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한 이래 사학측과 한나라당의 반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당 부처인 교육부에 전적으로 맡겨놓은 판이었다. 더욱이 사학법인측이 사학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을 때만 해도 정부측은 헌재의 결정에 따르자는 분위기였다. 사학법 자체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학법인측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더 거세졌다. 사학법 철회를 위한 10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데다 신입생 배정거부, 수업거부, 학교폐쇄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들고 나왔다. 특히 한나라당은 지난달 16일 이후 장외투쟁에 나서고 있다. 사학법 재개정이나 철회 이외에 다른 대안없이 정부를 압박해 왔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사학측의 주장이 옳다는 식으로 여론이 돌아가는 조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이나 사학법인측이 헌재의 결정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며 신입생 거부가 현실화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최후 통첩성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이 때문에 최근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장관 내정으로 당·청간 갈등과 맞물려 노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는 상황에서의 정치적 결단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책꽂이]

    ●전기(傳奇)(배형 지음, 최진아 풀어씀, 푸른숲 펴냄) 전기란 기괴하고 신기한 일을 다룬 이야기를 말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는 어느 왕조보다도 일상을 벗어난 ‘기(奇)’에 관심이 많던 시대였다. 중국 각지의 민담과 설화를 채록한 이 책엔 원숭이 아내, 물고기가 둔갑한 미인, 바다속 신선국, 동굴 속 낙원 등 기이한 소재의 이야기 31편이 실렸다.1만 5000원.●하늘 아래 기와집을 거닐다(박선주 지음, 다른세상 펴냄) 한국 전통 건축을 전공한 저자(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전국 한옥 22곳을 둘러보며 느낀 단상을 담은 에세이집. 담양 소쇄원, 영천 매산종택, 예산 추사고택, 양동 관가정, 논산 윤증 고택, 안동 학봉 종택, 구례 운조루, 상주 양진당, 함양 정여창 고택 등이 소개된다.9800원.●불량정권(재스퍼 베커 지음, 김구섭·권영근 옮김, 기파랑 펴냄) 김정일과 북한 정권의 본질을 분석한 연구서. 영국 BBC방송 중국 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북한을 ‘죽음의 수용소 군도’‘마르크스주의 절대왕조 국가’로 규정한다.1만원.●조선의 화가 조희룡(이성혜 지음, 한길아트 펴냄) 조선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비화가 매수(梅) 조희룡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평전. 조희룡의 문학론과 화론, 예술론을 다뤘다. 저자(경성대 교수)는 조희룡의 문학예술은 19세기 여항문화의 대미이자 20세기 새로운 문화예술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1만 5000원.●인도를 읽는다(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등 지음, 정택상 옮김, 황금나침반 펴냄) “코끼리는 움직임이 굼뜨다. 그러나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큰 걸음에 가속도가 붙어 아주 빠르다.” 맘모한 싱 인도 총리가 최근 인도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한 말이다.‘잠자던 코끼리’ 인도가 깨어나 달리기 시작했다.‘아시아의 거인’ 인도 진출을 위한 전략이 담겼다.1만 2000원.●천지가 다정하니 풍월은 끝이 없네(마에노 나오아키 지음, 윤철규 옮김, 학고재 펴냄) 중국 고전 속에 나타난 자연에 관한 이야기들을 묶었다. 당·송대의 시가와 소설, 신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연과 인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원제는 송나라 시인 소식의 ‘적벽부’에서 유래한 ‘풍월무진(風月無盡)’.1만원.●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이레 펴냄) 미국 정신사의 두 영웅인 소로우와 에머슨의 25년에 걸친 비밀스러운 우정 이야기. 소로우보다 열네 살 위로 언제나 멘토의 역할을 자임했던 에머슨이 소로우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시선을 끈다.1만 2000원.●마음이 머무는 풍경(최진연 지움, 대산출판사 펴냄) 문화재신문 기자인 저자가 20여년간 그리운 풍경, 우리 옛것을 찾아다니며 사진과 글로 남긴 기록을 묶었다.1만8000원.●수첩 속의 풍경2(중앙 일간지 여행전문기자 지음, 한국관광공사 펴냄)경가도 여주 해여림식물원, 제주도 동거문오름 등 전국 유명 여행지 39곳의 독특한 색깔과 사연을 원색 사진과 함께 실었다.1만원.
  • [2006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심사평

    [2006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심사평

    응모된 작품을 읽으면서 두가지 아쉬움을 느꼈다. 첫째, 기승전결 이야기의 골격은 제대로 갖췄으나 동화로서의 의미창출에까지 이른 작품은 드물었다는 것. 이것은 작품을 빚는 기본기(伎)는 익혔으나 동화문학의 본질을 터득한 응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둘째, 소재나 기법면에서 현실 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 많았다는 것. 이것은 창작문학으로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현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동화가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줄거리도 중요하고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이 가미되어 동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기성, 순수성, 그리고 가슴 따뜻한 정감이 살아나야 하는데 그 점을 놓친 응모작이 많아 안타까웠다. 최종심까지 남아 논의가 된 작품은 다음 3편이었다. 박경희의 ‘한송이, 꽃이 되다!’. 사춘기 소녀의 초경(初經) 체험을 그린 이 작품은 소재가 신선하고 심리묘사도 뛰어났지만 뚜렷한 줄거리 구조를 갖추지 못해 전반적으로 산만성을 면하기 어려웠다. 김정숙의 ‘12월에 핀 민들레꽃’. 화단에서 천대받던 민들레가 아파트 경비원의 눈에 띄어 한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이 이야기는 짜임새도 안정되어 있고, 늦둥이 아기의 탄생과 민들레의 개화를 결부시킨 결말처리에서 작가의 숨은 재치도 엿볼 수 있었으나 과거에 이미 이런 소재와 유형의 동화가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최지운의 ‘아빠의 워드프로세서 3급 자격증’. 컴맹인 아빠가 직장에서 겪는 애로를 어린 딸의 눈을 통해 그린 이 작품은 소재 자체는 평범하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의 문제를 동화로 포착해 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컴퓨터 세대인 딸과 만년필 세대인 아빠 사이의 미소로운 갈등이 뒷부분에서 반전되는 묘미도 이 작가의 역량을 짐작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러한 미덕이 타 작품을 압도해 별 이견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조대현 김용택
  • 문화부, 사행성 논란 ‘경품용 상품권’ 폐지 검토

    문화관광부가 사행성 성인용 게임물 대책의 하나로 오락실에서 상품으로 지급하는 ‘경품용 상품권´의 폐지를 검토 중인 것으로 3일 알려졌다. 폐지가 확정되면 상품권 발행업체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전국적으로 약 80조원(업계 추정)에 달하는 경품용 상품권 시장에 일대 파란이 예상된다. 문화부 관계자는 “상품권 사용으로 인한 소비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정부가 인증한 상품권만을 게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나, 사행성 논란이 끊이지 않아 인증제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상품권 인증제 도입 이후 문화부 산하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은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총 11개 업체의 상품권을 경품용으로 인증해 줬다. 이 관계자는 “성인 오락실의 사행성 문제는 본질적으로 상품권 때문이 아니라 슬롯머신이나 스크린 경마 등 사행성이 큰 게임이 오락으로 분류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며 “이를 외면하고 상품권을 핵심 원인으로 거론하는 통에 인증제의 취지만 퇴색했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부는 당초 4일 오전 ‘업소용 상품권 폐지 검토’를 포함한 사행성 게임물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3일 저녁 돌연 “보완 후 브리핑하겠다.”며 보류,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책꽂이]

    ●딴 동네 교회(문승용 지음, 평단펴냄) 네 컷 만화속에 개신교의 현 세태에 대한 풍자를 담은 책. 지난 6년간 ‘기독신문’에 ‘문고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신앙만화를 엮은 것으로, 사치와 권위에 젖어 있는 목사들과 교회 문밖으로만 나서면 딴 사람으로 변하는 교인들을 비판한다.1만원.●한국사회 어디로 가나?(조대엽·박길성 등 지음, 굿인포메이션 펴냄) 대전환기를 맞은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권위의 패러다임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축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권위구조에 대한 합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담았다.1만 5000원.●아폴로도로스 신화집(아폴로도로스 지음, 강대진 옮김, 민음사 펴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휘기누스의 ‘신화집’과 함께 그리스 원전 3대 신화집으로 꼽히는 책. 티탄들의 반란과 전쟁부터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이야기까지 고대문학 작품들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1만 8000원.●에로스와 타나토스(조용훈 지음, 살림 펴냄) 서양미술에 나타난 사랑의 미학을 표현한 책. 샤갈, 뭉크, 클림트, 모딜리아니, 루벤스, 미켈란젤로 등이 남긴 불멸의 회화들을 통해 사랑과 유혹, 죽음에 새겨진 미의 본질을 들여다본다.1만 5000원.●현대 우주론을 만든 위대한 발견들(찰스 세이프 지음, 안인희 옮김, 소소 펴냄) 신화에서 최근의 빅 스플랫 이론까지, 현대의 우주론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책. 코페르니쿠스 혁명, 허블의 혁명, 초신성 우주론 등 3가지 혁명을 통해 우주의 비밀에 다가간다.1만 2000원.●미래(수전 그린필드 지음, 전대호 옮김, 지호 펴냄) 21세기 과학기술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를 그려본 책. 저자는 첨단 과학기술이 미래의 일상적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사고의 방식, 타인과 관계하는 방식까지 바꿀 것이라고 예측한다.1만 5000원.●예수, 선을 말하다(케네스 링 펴냄, 진현종 옮김, 지식의 숲 펴냄) 성공회 신자이자 선사인 저자가 기독교·불교·도교에 대한 탄탄한 지식과 다년간의 선 수행을 바탕으로 기독교와 선불교의 소통과 열린 대화를 시도한다. 또 갈등을 겪고 있는 종교간 공존의 방법도 모색한다.2만 2000원.●바이칼에서 찾는 우리민족의 기원(이홍규 엮음, 정신세계원 펴냄) 우리 민족 형성의 뿌리를 한반도의 북방 시베리아 바이칼호 지역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담았다. 이홍규 박사 등 한국바이칼포럼 학자들이 지난 2002년의 북방 답사와 유전학·언어학·고고학 자료들을 바탕으로 엮었다.2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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