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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예슬, 신인여우상 수상 “채찍질이라고 생각”

    한예슬, 신인여우상 수상 “채찍질이라고 생각”

    한예슬이 제45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26일 오후 8시 50분부터 서울 삼성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 45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용의주도 미스 신’의 한예슬은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용의주도 미스 신’을 통해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미스신 역으로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치른 한예슬은 “지금 너무 행복해서 목소리가 떨린다. 어떤 소감을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행복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어 한예슬은 “이 상은 마냥 행복해야만 하는 상이 아니라 배우로서 노력하라고 주는 채찍질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수상의 영광을 안기 전, 신인감독상 시상자로 나선 한예슬은 “어제 밤에 고양이가 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꿈을 뀠다.”며 “품에서 자꾸 고양이가 나가 신인여우상을 수상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수상을 앞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최기환 아나운서와 김아중의 진행으로 열린 제 45회 대종상 시상식은 지난해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 30편이 본심에 올라 치열한 심사를 거쳤다. 사진 = 조민우 기자 서울신문 NTN 정유진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올해 대종상 ‘추격자’ 누가 쫓을까?

    올해 대종상 ‘추격자’ 누가 쫓을까?

    제 45회 대종상 시상식이 오늘(27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 홀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최기환 아나운서와 작년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김아중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시상식은 SBS와 각종 포털사이트를 통해 생중계 된다. 시상식에는 텔 미 열풍을 일으켰던 인기 그룹 원더걸스와 옥주현, 최정원 등 뮤지컬 ‘시카고’ 팀의 축하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시상식에는 ‘밀양’ ‘세븐데이즈’ ‘추격자’ ‘행복’ ‘즐거운 인생’이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놓고 뜨거운 경합을 벌인다. 특히 올해 영화는 스릴러물이 강세였던 만큼 원신연 감독의 ‘세븐 데이즈’와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남우주연상에는 송강호(밀양), 임창정(스카우트), 김윤석(추격자), 하정우(추격자), 황정민(행복)이 올랐고 여우주연상에는 전도연(밀양), 김윤진(세븐데이즈), 임수정(행복), 박진희(궁녀), 김해숙(경축 우리사랑)이 후보에 올랐다. 특히 영화 ‘추격자’는 작품상을 비롯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신인감독상 등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돼 올해 최대 화제작임을 보여줬다. ‘세븐데이즈’가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10개 부문에, ‘궁녀’가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8개 부문에 올라 그 뒤를 이었다. 또한 저예산 영화인 ‘경축! 우리사랑’은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시나리오상 등 6개 부문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올해 대종상 영화제는 20개 부분에 걸쳐 시상이 이뤄지며 총 56편의 작품이 출품작 중 본심에 오른 30편의 작품을 전문 심사위원과 일반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심사해 시상식에서 결과를 발표한다. 사진 = ‘세븐 데이즈’. ‘추격자’ 서울신문 NTN 정유진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끝까지 청을 기미(羈)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람들은 대체로 척화파의 논의가 높고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높고 깨끗한 논의’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준비 없이 갈림길에 서다 당시 ‘명분’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명 감군 황손무(黃孫茂)였다. 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은 하늘이 준 것이니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과 총포 등을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청 역시 마지막까지 조선의 본심을 떠보려고 시도했다. 역관 박인범(朴仁範) 등이 들어갔을 때, 용골대는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자신들에게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넘겨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박인범 등은 반발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왕자와 척화신만 보내주면 청군이 비록 압록강에 이르더라도 침략을 당장 중지하고 두 나라가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제의했다. 박인범 등이 ‘예의의 나라로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또 전달할 수 없는 말’이라고 거듭 반발하자 용골대 등은 돌아갔다.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홍타이지, 침략 결심을 하늘에 고하다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들을 열거했다.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1621년 이후 자신들이 요동을 차지했을 때 도망하는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는 공유덕과 경중명 일행을 공격했던 것, 명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도 그것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운운 한 것 등이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불만이 모두 나열되었다.‘청의 힘과 역량이 명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점이었다.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명에만 병선을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이 특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타이지는 곧이어 누르하치의 신주를 모신 태묘(太廟)에도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홍타이지는 11월29일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유시문을 내렸다.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강조했다. 위에서 언급한 ‘허물’에 더하여 조선이 청에서 보낸 국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도 추가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버일러들이 내민 편지를 퇴짜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도 ‘유시문’을 보냈다.‘조선이 패만하고 무례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병’들에게 조선에서의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 것, 대군이 통과하는 지역의 사묘(寺廟)를 파괴하지 말 것,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 것, 항복한 자를 죽이지 말고 치발(髮)할 것, 망명해 오는 자를 받아들여 보호할 것, 사로잡은 백성들의 가족을 서로 이산시키지 말 것, 부녀를 폭행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었다. 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홍타이지는 이날,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濟爾哈朗)에게 심양에 남아 도성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아지게(阿濟格)를 우장(牛莊)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조선을 공격하는 와중에 혹시라도 명군이 배후에서 역습해 오는 상황을 우려한 조처였다. 우장은 압록강과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당시 청은 명이 수군을 이용하여 발해만으로 들어와 내지에 상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도 여전히 명의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三拜九頭禮)를 행했다. 당자는 까치를 신성시하는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물이었다. 이어 팔기의 깃발들을 도열해 놓고 주악을 울리며 다시 배천례(拜天禮)를 행했다. 홍타이지는 이어 도도(多鐸)와 마부대 등에게 병력 1300명을 따로 주었다. 그들 가운데 300명은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그들을 신속히 서울로 진격시켜 궁궐을 포위하려는 깜냥이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홍타이지의 생각이었다. ●무너진 통신체계 조선 침략에는 만주와 몽골군뿐 아니라 명에서 귀순한 한족 출신 장졸(-漢軍)들도 대거 동참했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嘉喜)를 비롯하여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 한군 지휘관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청은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만몽한(滿蒙漢)의 모든 역량을 사실상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군들은 특히 홍이포(紅夷砲),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한 중화기의 운용과 운반을 맡았다. 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은 질풍같이 내달렸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鐵騎)와 야전에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주로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군이 대비하고 있는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울로 돌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사실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도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로에서 적 기병을 차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봉화마저 제때 올리지 않았고, 평안도 각지에서 올린 변보(邊報)는 청군 기마대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다. 압록강 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싸울 경우, 설사 패하더라도 피해의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 또한 운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관들이 들고일어나 최명길을 처벌하라고 외쳤다. ●尹煌과 鄭蘊의 결전론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파의 거두 윤황(尹煌)이나 정온(鄭蘊)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대사간 윤황은 1636년 8월에 올린 상소에서 인조에게 척화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백성과 장졸들을 분기(奮起)시키려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요구했다. ‘임금과 종사(宗社)를 안전한 곳에 모신 뒤에야 국사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인심이 흩어져 나라가 망할 위기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황은 강화도에 배치한 병력을 모두 평안도로 보내고, 강화도에 지어놓은 행궁(行宮)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정온은 윤황보다 더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인조에게 결전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도원수를 의주로 보내 압록강을 방어하고, 의주에서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는 용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실시하여 결사대를 뽑고, 인조도 개성에 진주하여 장졸들을 진두지휘하라고 촉구했다. 정온은 결전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까지 제시했다. 그는 조선의 사수(射手)와 화포병(火砲兵)을 ‘천하 무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을 활용하면 후금군 기병의 돌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가 벌어질 곳에 먼저 진을 칠 장소를 정합니다. 포수 4000명을 4대로 나눠 2000명은 앞에 진을 치고,2000명은 지형을 살펴 좌우에 진을 칩니다. 포수 뒤에는 사수를, 그 뒤에는 살수(殺手)를, 그 뒤에는 편곤군(鞭棍軍)과 기사병(騎射兵)을 각각 배치합니다.(중략) 적이 학익진(鶴翼陣) 형태로 공격해 오면 아군의 전대(前隊) 1000명이 먼저 조총을 쏩니다. 쏜 뒤에는 앉아 화약을 장전하고 후대 1000명이 다시 쏩니다. 적이 만약 장사진(長蛇陣)으로 공격해 오면 좌군(左軍)이 전대가 했던 방식처럼 먼저 쏘고, 적이 40∼50보 안에 들어오면 사수들이 포수가 쏘던 방식대로 화살을 발사합니다. 그러면 포성이 그치지 않고, 화살은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이니 비록 저들의 견갑철마(堅甲鐵馬)라 할지라도 어찌 궤멸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계책은 병자호란 무렵 제기된 결전론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청군에 지레 겁을 먹고 ‘천하 무적’의 궁수와 포수들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이 이들과 다른 점은 ‘결전에 돌입하기 전에 한번 더 심양으로 사람을 보내 청의 속내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제 최명길의 주장이 나온 직후인 1636년 9월8일, 비변사는 심양으로 역관 권인록(權仁祿) 등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자고 주청했다.‘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나라 감군 황손무(黃孫茂)의 충고도 비변사의 주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갈팡질팡하는 인조 인조는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였다.‘결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자 수찬 오달제(吳達濟)와 헌납 이일상(李一相) 등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황손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며 인조가 ‘우리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사자(使者)가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황손무에게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일상 등은 더 나아가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위로는 명을 배반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대부분의 삼사 소속 언관(言官)들이 비변사를 비난하는 와중에 사간 정태화(鄭太和)는 소신을 내세웠다.‘옛날부터 교전(交戰) 중이라도 사자를 왕래시키고 국서를 교환했다.’며 비변사의 주청은 일리가 있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조는 정태화의 주장에 힘을 얻은 듯 비변사의 반간책(反間策)을 받아들였다. 역관 박인범(朴仁範)과 권인록을 심양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자 인조와 비변사는 다시 동요했다. 박인범 등에게 압록강을 건너지 말고 일단 의주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언관들과의 논의가 아직 결말을 맺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보다못해 다시 나섰다. 그는 먼저 연소한 언관들이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개탄한 뒤, 정묘호란 때 일부 언관들이 ‘야간에 적을 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앞으로는 국가를 위한 대사를 대신과 밀의(密議)하여 결정하되 승지와 내관들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인조가 비변사 중심의 주화론과 언관 중심의 척화론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공격의 화살은 최명길에게로 날아들었다. 오달제는 최명길이 기필코 중론(衆論)을 배척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조빈은 더 강경했다. 그는 ‘우리의 국시(國是)는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인데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며 인조반정의 명분까지 거론했다. 그러면서 ‘청에 다시 사자를 보내면 반란을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실을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사실상 인조에 대한 협박이었다.‘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아낸다.’고 했던 인조반정 당시의 명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조의 입장을 자극하는 주장이었다. ●‘秦檜보다 나쁜 최명길’ 1636년 9월27일 사간원의 언관들은, 최명길이 중론을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밀실에서 추진하려 했다며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언관들을 비난하고 최명길을 두둔했지만 11월6일, 최명길은 판윤(判尹)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11월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최명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임진년에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신종(神宗) 황제의 구원 덕분에 조선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며 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내세워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나라를 망치려 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1090∼1155)보다도 나쁜 자라고 매도했다. 진회는 남송(南宋)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금(金)과의 화의를 주도하여 세폐를 바치고 명장 악비(岳飛)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이후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간신의 전형’이자 ‘매국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인물이었다.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자고 주장했던 최명길은 이제 관인으로서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와 비변사는 논란 끝에 역관들을 심양으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선 역관들을 퇴짜 놓았다. 심양을 정탐하고 돌아온 역관 일행은 청의 분위기를 보고했다.‘군대를 일으키려는 기미도 보이지만 우리와 꼭 절교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헷갈리는 내용이었다. 비변사는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다. 삼사의 언관들은 저들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다시 반대했다. 1636년 12월 초, 인조는 다시 사신을 출발시켰다. 사신이 심양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귀환시킬 것을 요구하는 언관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그러나 이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는 11월 25일, 신료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을 고하는 제사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시론] 이대통령 訪中, 감동외교 펼쳐야/김승채 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중국정치학 박사

    [시론] 이대통령 訪中, 감동외교 펼쳐야/김승채 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중국정치학 박사

    실용외교를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음주 대규모 재계 대표들과 함께 취임 후 세 번째 순방국인 중국을 방문한다. 한·미관계 강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중국 홀대론’의 우려, 남북관계 교착 상태라는 외교적 난기류 속에서 이 대통령이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중(訪中)이다. 중국은 군사대국화, 경제대국화, 중화주의로 구성된 ‘중국위협론’을 대국책임론, 화평굴기(和平起), 조화세계(和諧世界) 이론으로 순화시키면서 강대국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1조 6800억달러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 중국은 달러 약세로 경제침체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에는 위안화 절상과 인권 개선 등으로 비위를 맞추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잃어버린 10년’에서 회생하기 시작한 일본을 10년 만에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가 방문하여 추위를 녹인 뒤 꽃을 활짝 피우듯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은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제1의 강대국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본심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면서도 유소작위(有所作爲)는 가려서 한다는 말이다. 능력을 갖출 때까지 힘을 키우며 입지를 다지라는 도광양회와 참고 있다가 기회가 올 때 적극적인 역할을 하라는 유소작위 정책은 1980년대 초반부터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少平)에 의해 대외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은 한국을 과거보다는 쉽게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몇 년전 반미를 외치면서 21세기 가장 중요한 동반국가로 중국을 지목했다가 동북공정으로 뭇매를 맞고서야 정신이 든 적이 있다. 중국은 우리가 한·미동맹을 떠나서, 자기들에게 너무 가깝게 오는 것을 꺼리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자극, 괜한 오해를 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중국에 우리는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 대규모 재계 인사 동행을 통한 경제외교, 자원외교, 한국기업의 집합지역 방문만으로 실용외교가 성공할 수 없다.500만달러라는 막대한 규모의 지진 피해 구호품을 중국에 전달한다고 중국이 선뜻 한국에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이 대통령은 이번 방중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중국의 인민들을 위로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쓰촨성 청두에라도 구호물품을 싣고 가 피해주민과 중국국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한·중간의 현안을 해결하고 한·중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 어떤 외교활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 까닭이다. 이것이 실용외교요,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다. 한·중 관계에서 향후 여러가지 걸림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선 더 중요할 수 있다. 신뢰를 쌓고 마음을 얻고 친구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당장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외교가 아닌,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뢰에 바탕을 둔 외교, 감동을 주는 외교, 그리고 인도주의 등 올바른 원칙에 근거한 실용주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 그것만이 상인(商人)정신에 투철한, 초강대국으로 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상생할 수 있는 진정한 실용외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채 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중국정치학 박사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대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인조의 유시문(諭示文)을 조선 영토 안에서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운영 체계에 나사가 풀려 있다는 방증이었다. 반면 조선의 ‘본심’을 간파한 홍타이지는 느긋하게 조선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1636년 홍타이지,帝位에 오르다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정묘년에 부득이 하여 강화를 맺은 것도 부끄러운데 지금 그들이 황제를 칭하려 하니 존망을 돌보지 않고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다. 팔도의 관찰사들은 이 소식을 들으면 죽기를 맹서하고 싸워 원수를 갚을지어다. 각처의 백성들에게도 알려 용사들을 격려시키고 서로 도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용골대가 가져온 인조의 유시문을 보았을 때 후금의 여러 버일러들은 당장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섬멸하자며 흥분했다. 홍타이지는 차분했다. 그는 버일러들을 만류하며 먼저 조선에 사람을 보내 속내를 떠보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1636년 4월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의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홍타이지는 대신들과 함께 제단에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홍타이지가 북쪽을 향해 꿇어 앉은 상태에서 제관이 축문을 읽었다. ‘유세차 병자년 4월11일, 만주국 황제 신(臣) 홍타이지는 황천후토신(皇天后土臣)에게 고하나이다…. 제가 대위(大位)를 이은 지 10년, 하늘의 도움으로 조부의 기업(基業)을 어깨에 메고 조선을 정복하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었습니다…. 이제 내외 신민의 추대를 받아 천자(天子)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 연호를 고쳐 숭덕(崇德) 원년으로 삼았음을 삼가 아뢰옵니다.’ 연호를 천총(天聰)에서 숭덕으로 고치고 대청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만 ‘조선을 정복’ 운운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직 병자호란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조선은 명분상 분명 형제국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을 정복’했다고 한 것은 당시 조선이 이미 자신들의 수중에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들에게 도무지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는 조선에 대해 그만큼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사신, 황제즉위식서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다 천지에 고하는 의식을 마친 뒤 천단 동편에 즉위 식장이 꾸려졌다. 홍타이지는 단상에 놓인 금 의자로 올라가 앉았고 여러 버일러들과 대신들은 좌우로 줄을 지어 늘어섰다. 이윽고 찬례관(贊禮官)의 외침에 따라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은 일제히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꿇어 앉았다. 곧이어 만주, 몽골, 한인들을 대표하는 신료들이 각각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된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받들고 단(壇)의 동쪽에 섰다. 여러 무리들을 향해 표문의 내용이 낭독되었다.‘우리 황상께서는 하늘의 뜻과 백성의 여망을 따르고, 덕을 닦아 조선을 복종시키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으셨다…. 큰 이름과 업적이 천하에 드날리니 한마음으로 추대하여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낭독이 끝나자 신료들은 다시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기립했다. 여기서도 ‘조선을 정복’했다는 내용이 반복되었다.‘관대하고 따뜻하며 어질고 성스러운’ 황제의 조선 출병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당시 식장에는 조선에서 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 “째째하게 사신죽이지 않겠다” 같이 도열해 있던 청의 신료들이 발끈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을 죽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만류했다. 그는 ‘이 일은 조선 국왕이 양국 사이에 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다. 내가 만일 사신들을 죽이면 조선 국왕은 내가 맹약을 어겼다고 할 것이다. 나는 한 때의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신료들을 다독였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은 나덕헌과 이확의 용기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던 홍타이지의 외교적 안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두 사신이 귀국할 때 인조에게 선사하는 초피(貂皮)를 비롯하여 은과 인삼 등을 들려 보냈다. 의외였다. 군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예의를 차리려는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확과 나덕헌에게 들려준 국서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 갔을 때, 조선이 몽골 출신 버일러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갔던 사람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은 두 나라 사이에 틈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두 나라 사이에는 본래 원한이 없었는데 1619년 조선이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했던 것, 이후 명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식량을 준 것 때문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또 정묘호란 당시 가짜 왕제(王弟)를 진짜인 것처럼 속여 볼모로 보낸 것, 자신이 강홍립과 함께 돌려 보낸 한인들을 명으로 압송해 버린 것, 맹약을 맺은 이후에는 명나라 사람들을 조선 영토로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것을 어긴 것 등등. 홍타이지의 불만은 이어졌다. ●“인조 자제 볼모로 안 보내면 공격하겠다” 홍타이지가 특히 맹렬히 비난한 것은 공유덕, 경중명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들이 귀순해 올 때 조선이 명을 도와 그들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전쟁의 단초를 여는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었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을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 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작심한 듯한 홍타이지의 발언은 이어졌다.‘왕은 지금 덕과 의리를 닦지 않고 해도(海島)의 험준함만 믿고 있으며 서생들의 말을 듣고 형제의 화호를 깨뜨리고 있다.’ 홍타이지는 훈계를 늘어 놓았다.‘몽골의 차하르(察哈爾) 한도 덕을 닦지 않고 간신들의 말에 따라 내게 전쟁을 걸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고, 끝내는 신료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이어 조선이 ‘후금을 원수’라고 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가겠다고 협박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군대를 움직이는 날짜까지 명시했다.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었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요구대로 볼모를 보내지 않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말고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던 조선, 그나마 그 계획조차 이미 청에 읽혀 버린 조선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다.42세, 아까운 나이의 죽음은 애처로웠지만 인열왕후는 정확히 1년 뒤 조선으로 밀어닥쳤던 전란의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금이 그녀의 상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문상(問喪)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끝내 파탄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상한 조문 사절단 국상(國喪)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636년(인조 14), 연초부터 흉흉한 소식들이 보고되었다.1월, 대구에서는 황새들이 서로 패를 갈라 진을 치고 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월 초에는 안산에서 황당한 보고가 올라왔다. 바다 속에 있던 바위 세 개가 저절로 움직여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지나온 곳에 거의 40여 보(步)나 되는 길까지 만들어졌다고 했다. 2월8일과 10일, 대사헌 윤황(尹煌)은 연달아 인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나라가 망하려면 요상한 변고(요변·妖變)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나라 상황은 망하기 직전’이라며 인조에게 자세를 낮추고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요변’의 경고가 맞아들어가는 것이었을까? 2월16일,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조선의 국상에 조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사절단의 구성이 이상했다. 후금의 여진족 말고도 서달(西 )이라 불리던 몽골인 지휘관들이 77인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의주부윤 이준(李浚)에게 용골대는 까닭을 설명했다.‘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몽골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한(汗)에게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조선과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대원을 획득했다는 것은 후금이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옥새는 바로 차하르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의 옥새를 말하는 것이다. 대호를 올린다는 것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준의 보고를 들은 조정 신료들은 경악했다. 사간 조경(趙絅)은 몽골인들을 국문(國門)으로 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통해 인조를 통박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정묘년에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르는 바람에 지금 저들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고 덤비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용골대 일행을 처단하여 그 목을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 신료들도 서달을,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속히 의주의 감옥에 가둬 상경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골을 복속시킨 후금의 자신감 후금이 용골대 일행을 조선에 조문사로 보내면서 몽골인들까지 대동시킨 것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1634년 6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명을 공략하는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공격 목표는 주로 선부(宣府)와 대동(大同) 지역이었다.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하는 선부와, 산시성(山西省)에 속하는 대동은 모두 몽골로부터 북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 요충이자 중진(重鎭)이었다. 홍타이지는 당시 명을 공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부와 대동 주변의 차하르 몽골 부락들을 초무(招撫)했다. 후금이 일찍이 1632년 차하르 몽골을 공격했을 때, 릭단 한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차하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634년 5월, 원정 출발에 앞서 홍타이지는 명 변경에서 유목하고 있던 차하르 몽골 부락들에 유시문(諭示文)을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촉구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몇몇 성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던 사이 후금군은 주변 지역을 자유자재로 유린, 약탈했다. 당시 홍타이지의 원정에는 후금에 우호적인 코르친(科爾沁), 나이만(柰曼) 몽골 등이 동참했다. 선부와 대동 주변 차하르 몽골의 잔당들도 원정 기간 동안 속속 투항해 왔다. 더욱이 1634년 윤 8월, 도주했던 릭단 한이 사망했고 이후 그 아들들과 대신들이 나머지 국인(國人)들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해 왔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사실상 몽골을 평정했다.1634년 12월, 원정군이 개선했던 직후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의 사당을 찾아 자신의 승첩 사실을 고했다. 그는 직접 읽은 축문에서 ‘누르하치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자신이 차하르를 비롯한 몽골 부락들을 모두 복속시켰다.’고 보고했다. 또 ‘조선도 과거에는 성의를 보이지 않다가 이제 아우를 칭하며 납공(納貢)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남은 적은 이제 명나라뿐이라고 했다. 13세기 이래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던 몽골을 정복하게 되면서 후금의 자신감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더욱이 1635년에는 ‘칭기즈칸의 정통 후계자’였던 릭단 한의 옥새를 손에 넣었고, 요양(遼陽)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금불상까지 획득했다. 불상은 쿠빌라이 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릭단 한에게 돌아갔고, 다시 홍타이지의 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여길 법도 했다. 실제 금불상을 얻은 직후,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안료(顔料)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사찰을 새로 지어 불상을 봉안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홍타이지의 오판 후금의 넘치는 자신감은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635년 11월, 홍타이지는 릭단 한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은근히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다. 청 측 기록에는 조선 사신 박로가 옥새를 보고 ‘진정 하늘이 내린 보물’이라고 감탄했다고 되어 있다.1636년 1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하늘의 돌보심으로 우리 대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공경(孔耿)이 귀순했으며, 차하르 몽골이 복속하여 주변이 모두 우리 소유가 되었다.’고 과시했다. 홍타이지는 그런데도 조선은 자신들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이윽고 1636년 2월, 후금의 여러 패륵(貝勒)들은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상주(上奏)하기로 의결했다. 그들은 ‘차하르 한의 아들이 투항해 오고, 대대로 전해오던 몽골의 국새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진 것’이라며 속히 황제가 되어 신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신료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아직 대업(大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강조하고, 그런 상황에서 먼저 황제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타이지가 고사하자 여러 패륵들을 비롯하여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이 모두 나서서 속히 대호(大號)를 정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의 강청은 이틀 동안 계속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홍타이지의 친형인 대패륵(大貝勒) 다이샨(代善)까지 나섰다. 그는 여러 패륵들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맹서했다. 고사와 강청이 거듭되는 와중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거론했다.‘만몽한 출신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권하니 거부하기 어렵다. 조선도 형제의 나라이니 마땅히 같이 의논해야 한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에 앞서 조선의 동의를 받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용골대 일행에게 몽골인들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판이었다.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선의 추대를 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순진했던 것일까? 조선이 무모했던 것일까? 양국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열린세상] 한 치 혀의 설화(舌禍)/강미은 숙명여대 언론정보학 교수

    [열린세상] 한 치 혀의 설화(舌禍)/강미은 숙명여대 언론정보학 교수

    글을 잘못 써서 화를 당하는 것은 필화, 혀를 잘못 놀려서 화를 당하는 것은 설화다. 말을 잘못 해서 실수가 되기도 하고,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쓸데없이 여론의 분노를 사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해야 할 말은 안 하고, 안 해도 될 말은 해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 사례는 많다. 본심과는 다른 말이 실수로 튀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마음 속에 있던 본심이 튀어 나와서 설화로 번지기도 한다. 공직자의 말실수는 한번 엎질러진 물처럼 되담을 길이 없다. 그 말은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공인의 말실수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급속도로 전달되면서 파장이 커진다. 전후좌우 상황을 다 떼어내고,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버린다. 공인일수록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은 조심해야 한다. 일만 잘하면 되지, 말 한마디 가지고 사람을 매도해서야 되겠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은 냉정하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얼마나 충실한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대중에게 알려진 말 한마디를 가지고 평가하기도 한다. 대중의 인식이란 ‘이미지’와의 싸움이다.‘현실’과의 싸움이 아니다. 예전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 도중에 “우리는 미국을 해치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실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 백악관 대변인은 “가장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도 부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런 말실수는 단순한 말실수라는 것이 누가 봐도 분명했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부시 대통령이 ‘또’ 실수를 했다는 어록 하나를 덧붙인 정도였다. 하지만 백악관 대변인이 그 후로도 계속 대통령의 말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부시 대통령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광주학살은 중국 천안문 사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동영 전 대표가 예전 선거에서 “노인들은 투표 안 하시고 집에 계셔도 된다.”는 실언을 해서 국민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어느 국회의원은 기자회견에서 변명을 하느라고 “술이 취해서 식당 여주인인 줄 알았다.”고 해서, 전국의 식당 여주인들이 다 분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실수는 5년동안 거의 매일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인사를 둘러싸고 ‘나와서는 안 될 말’들이 줄이어 나왔다. 공직을 맡을 사람들이 여론에 대해서 저렇게 감각이 없을까 싶은 말들이었다. 일단 고위 공직에 오르면 사적인 자리는 없다.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해야만 기사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삿거리가 된다. 어떤 발언도 미디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말실수를 한 내용도 그렇고, 말실수에 대한 반응까지도 그대로 동영상에 담겨져서 여과 없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다매체 시대가 될수록, 예전처럼 공식적인 내용만 걸러주는 친절함은 점점 기대하기 어렵다. 거르거나 정화하지 않고 생생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인기를 끌다 보니 말실수 장면도 인기다. 일단 말실수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솔직한 사과가 상책이다. 섣부른 해명이나 어설픈 발뺌, 또는 남 탓을 하게 되면 1차 스캔들로 끝날 수 있던 일도 2차 스캔들로 확산된다. 말실수라는 죄명으로 끝날 일에 거짓말이라는 죄명이 붙으면, 스캔들은 더욱 커져 치명적인 사태로 번진다. 말실수로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되면 국민 앞에 솔직하고 겸허하게 자기반성과 사과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상을 엎어도, 엎은 상을 자신이 치우는 겸허한 태도를 보여주면 여론은 한번쯤 용서받을 기회를 준다. 그런 태도가 안 보일 때 여론은 가차없이 돌아선다. 강미은 숙명여대 언론정보학 교수
  • [씨줄날줄] 박주선의 부활/ 오풍연 논설위원

    어느 사회이든지 이단자(異端者)가 있다. 좋은 의미보다는 좋지 않은 뜻으로 많이 쓰인다. 이른바 아웃사이더(outsider)로 불린다. 그래서 다들 ‘왕따’당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반면 풍운아(風雲兒)는 훨씬 관대한 편이다. 좋은 기운을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단자로 취급당하기보다는 풍운아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본심 아닐까. 이번 18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에 출마한 민주당 박주선(59)씨가 88.7%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2위인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88.6%보다 0.1%포인트 높았다. 박씨는 지금까지 세 번 구속됐다가 세 번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명예회복을, 그것도 1등으로 한 셈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필자는 그와 20년 가까운 인연을 갖고 있다. 그가 해남지청장을 마치고 올라온 1990년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막소주잔을 기울이면서도 낭만이 있었다. 토속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 4월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다. 앞서 옷로비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그가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필자는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형! 꼭 출마해. 당선될 거야.”얼마 뒤 연락이 왔다.“동생! 고마워. 열심히 할게.” 그 뒤에도 두 번의 옥고를 더 치른다. 운명이랄까. 하지만 친정인 검찰의 기소 사건이 법정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아 누명을 벗게 된다. 그래도 그는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모두 용서했다고 한다. 그의 진면목은 여러 곳에서 읽혀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주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6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그는 초임시절부터 검찰총장감으로 지목됐다. 김성호 국정원장 등이 그의 동기다. 한 선배가 “자네 청와대 들어가면 검찰총장 못하네.”라고 충고했단다. 이에 “무슨 말입니까. 검찰로 돌아와야지요.”라고 답했던 그도 친정복귀는 무산됐다. 이제 정치인으로 두 번째 의정활동을 하게 된다. 정치권의 풍운아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란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北 서해 미사일 발사] 靑 “확대해석 경계해야”

    북한이 28일 오전 서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에 대해 청와대는 일단 “통상적인 훈련”이라고 분석하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통상적인 훈련으로 보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북한도 남북관계의 경색을 바라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사일 발사 사실을 회의 도중 메모로 보고받았으나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미사일 발사와 지난 27일 개성의 남북교류협력협의사무소 내 남측 요원 철수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 한나라당의 조윤선 대변인은 “북한이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총선을 앞두고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면서 “앞으로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북한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면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논평했다. 유 대변인은 북과 정부를 동시에 겨냥해 “정부는 대북 화해·협력 기조를 분명히 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해야 한다.”면서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자유선진당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신은경 대변인은 “북한 미사일 발사는 명백한 도발 행위”라면서 “북한이 아직도 남침 야욕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검은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신 대변인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 정책에 대한 원칙과 철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라고 청와대를 공격했다. 나길회 윤설영기자 kkirina@seoul.co.kr
  • 이상득 “이명박이 내 말 들을 X 같아?”

    이상득 “이명박이 내 말 들을 X 같아?”

    “나도 한번 발길로 확 차버릴까?” 한나라당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 당내의 잇따른 사퇴 요구에 ‘농담을 가장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 부의장은 후보등록을 하루 앞둔 24일 낮 포항시 죽도시장의 한 곰탕집에서 동석한 기자들에게 “나도 화 좀 낼까?”라며 말문을 열었다.그는 이날 때론 농담하듯,때론 진담인듯 복잡다단한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인간들이 그렇게 갈 수 있다는 걸 몰랐다.뒤로는 본의가 아니라고 하고….”라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이 부의장은 거듭된 사퇴 요구에 마음이 흔들렸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도 사람인데 고민 안된다면 거짓말이지….나도 한번 발길로 확 차버릴까?”라는 본심을 말하기도 했다. 그는 25일부터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당내 문제에 개입할 시간이 없고,개입할 처지도 못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부의장은 “내가 만약 허튼 짓을 했으면 박근혜 전 대표 쪽에서 (나를) 내보내라고 했을 것이다.공천 망친 사람이 누군데 공천 가지고 나한테 얘기하나.”라며 사퇴요구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공천심사에 대해 “당도 모르는 외부교수들이 와서 (심사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라고 평한뒤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려 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거취 문제를 의논해보았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를 그렇게 유치하게 보지 말라.우리는 그렇게 유치한 형제가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어 자신을 ‘이상득 부의장’이 아닌 ‘대통령의 형’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솔직히 부담스럽다.하지만 (우리형제는)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했지 (서로)도움 받은 적 없다.”고 말했다. 이 부의장은 “내가 국회의원 선거 나온다고 할 때도 (이 대통령과) 의논한 적 없고, 동생이 대통령 나온다고 할 때도 (나와) 의논한 적 없다.”며 “심지어 ‘서로 친형제가 아니냐’는 반문도 나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명박이 내말을 들을 X 같아?”라며 항간에 떠도는 ‘형님공천’논란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 부의장은 식사 도중 자신을 응원하는 시민들에게 “나올라꼬 왔자나.”라며 출마의지를 강력히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공유덕과 경중명 일당의 후금 귀순은 조선에 치명적이었다. 조선은 명의 강요 때문에 ‘공경 사건’을 놓고 벌어진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공경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후금으로부터 원망만 사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통해 조선의 ‘본심’을 확인했다. 조선이 결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후금의 조선에 대한 공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다만 ‘조선 정벌’은 우선순위에서 잠시 비껴나 있었을 뿐이었다. ●‘공경 사건’의 파장 ‘공경 사건’ 때문에 조선은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았다. 당장 명의 추격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조선군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龍川),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공경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은 후금과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명의 강요에 떠밀려 병력을 보내 공경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공경 일당에게 식량을 공급해달라.’는 후금의 요구도 거부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1634년 무렵까지 홍타이지를 비롯한 후금 지휘부는 ‘조선 정벌’을 우선적인 과제로 꼽지 않았다. 명과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벌하는 것이 먼저였다. 조선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공경 사건’을 계기로 후금의 조선 침략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 사건’ 이후 조선과 가도( 島)를 ‘손 안의 물건(掌中之物)’으로 여겼다. 이미 수군을 확보한 상황인데다, 공유덕 등이 가도의 배후 기지 격인 여러 섬의 주민들을 대거 데리고 온 터라 가도의 역량이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조선과 가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겼고, 우선적인 정벌 대상에서 잠시 뺐던 것이다. 그렇다고 홍타이지가,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 했던 조선에 대한 ‘원한’을 결코 접은 것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했던 것’을 병자호란을 도발하는 주요한 명분의 하나로 분명히 제시했다. ●‘호랑이’가 나타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선은 ‘공경 사건’의 의미와 그 파장의 끝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읽어냈어야 했다. 조선은,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했던 것(심하전역·深河戰役 참전) 때문에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는 명분을 제공했던 점을 교훈으로 삼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조선은, 후금이 ‘공경 사건’에 조선이 개입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조선은 후금의 ‘수군 보유’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후금은 이미 1631년(인조 9) 5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조선은 우리가 쳐들어가면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는 내용으로 조롱한 바 있었다. 사실 조선은 후금의 침략이 있을 경우,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후금이 수군을 보유함으로써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의 의미가 없어질 판이었다. 당연히 대책이 필요했다.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고, 청북 일대의 성지(城池)를 정비하고, 강화도의 해방(海防)을 확고히 하는 것이 시급했다. 재정이 문제였다. 하지만 ‘늑대를 피하고 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했던가. 방어 대책 마련을 위해 몰두했어야 할 1634년(인조 12) 3월, 명으로부터 ‘호랑이’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숭정제가 환관 노유녕(盧維寧)을 조선에 보낸 것이다. 그가 서울로 오는 명목은 ‘왕세자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조선행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책봉 조사(詔使)로 낙점되기 위해 이곳저곳에 뇌물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바짝 긴장했다. 왕세자 책봉은 인조의 왕통(王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더없이 절실했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더욱이 인조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노유녕이 청렴하지 않다.’는 소문이었다.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노골적으로 ‘한 밑천 잡겠다.’고 조선까지 오는 그를 어떻게 대접할지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인조와 비변사 신료들의 우려와 푸념은 한결같았다.‘왜 하필 국고가 바닥난 지금 오느냐?’는 것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과거에 왔던 조사들을 접대하는 데 들어갔던 비용을 물었다. 노유녕은 보나마나 과거 조사들이 받았던 액수보다 더 많은 은화를 요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1610년(광해군 2), 왕세자 책봉을 위해 왔던 염등(登)은 4만 냥을,1625년(인조 3), 인조 책봉을 주관하러 왔던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는 물경 13만 냥을 뜯어갔다. 전례를 보면 노유녕도 최소한 10만 냥 이상의 액수를 요구할 것이 명확했다. 비변사는 백성들에게 토지 3결마다 포(布) 1필씩을 거두고, 왕실에 바치는 방물(方物) 값을 모두 쓰자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은화 5만 냥도 마련할 수 없었다. 조사가 달라고 할 것이 뻔한 인삼과 잡물(雜物)까지 마련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비변사는 지방의 관원들에게 은과 포를 할당하고, 호남의 수군들에게 군역을 면제해주고 그 대가로 포를 받아들여 비용을 대자고 했다.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후금 사신도 인삼값 받아내려 서울로 노유녕은 예상했던 대로 만만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그의 목표는 왕민정과 호양보가 받은 액수를 채우는 것’이라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벽제(碧蹄)까지 이르렀지만 은과 인삼이 적다는 이유로 이틀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책봉례를 행할 때 은 2000냥을 더 주겠다고 하자 비로소 서울로 들어왔다.1634년 6월20일의 일이었다. 노유녕은 결국 왕세자 책봉례를 마칠 때까지 10만 냥 이상의 은을 뜯어냈다. 노유녕이 서울에 머물며 은 징색에 광분하고 있던 6월26일, 평안병사의 장계가 날아들었다.‘후금 사신(胡差) 마부대(馬夫臺) 일행이 인삼 값을 받아가기 위해 서울로 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유녕과의 조우를 우려한 조정은 그들을 만류하라고 지시했지만 마부대 일행은 안주까지 남하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마부대 일행이 안주로 오자 이번에는 가도의 총병 심지상(沈志祥)이란 자가 조선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심지상은 노유녕에게 무공(武功)을 과시할 목적으로 마부대 일행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마부대 일행 역시 심지상과 일전을 벌일 태세였다. 심지상을 만류하자니 ‘오랑캐를 편들어 중국을 배신하려 한다.’는 힐책이, 마부대 일행을 설득하자니 ‘한인들을 끌어들여 후금 사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비난이 따를 판이었다. 조정은 서둘러 마부대 일행이 요구한 인삼 값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을 빨리 귀환시켜 심지상과의 충돌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조선은 겨우 또 한 고비를 넘겼지만 악순환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후금의 침략을 피하려면 조선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노유녕에게 끌려다니는 것에서 보이듯이 명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병자호란을 코앞에 둔 1634년, 조선은 느긋한 후금과 초조한 명 사이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 가벼운 산 이선애 (전남 순천시 조례동 동신아파트) ■소설 우유 의식 홍희정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1동 민영루이스아파트) ■희곡 별방 이양구 (서울 종로구 동숭동) ■평론 ‘여수’에서 식물성의 세계로… 주지영 (서울시 관악구 봉천11동) ■동화 꼬르륵 이성율 (인천시 남동구 유신주공아파트) ■시조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임채성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 한라비발디아파트) ●심사위원 시 본심 오세영 최동호 예심 유성호 이재무 소설 본심 송기원 윤대녕 예심 한강 백지연 평론 황현산 문흥술 희곡 손진책 이윤택 동화 조대현 김서정 시조 이근배 한분순 ●시상식:18일(금) 오전 11시 본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 잇단 정답시비… 수능 신뢰도 추락

    “더 이상 수능을 믿지 못하겠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신뢰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수능 물리Ⅱ 11번 문제의 ‘복수정답’을 인정하면서 물리Ⅱ 이외의 과학탐구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들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화학Ⅰ에서도 정답 시비 논란이 일고 있어 수능과 교육당국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것 같다. 복수정답 인정에 따른 재채점 결과 물리Ⅱ 등급이 상향 조정된 수험생은 모두 1016명이고,1등급으로 조정된 수험생은 52명이다. 물리Ⅱ 과목 1등급 수험생 비율이 재채점 이전 5.06%에서 5.32%로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하향 조정된 수험생이 없기 때문에 다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어 수시전형처럼 정시전형에서도 ‘정원외 합격’으로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고려대 박유성 입학처장은 25일 “물리Ⅱ 외의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이 불합격하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원외 합격을 인정해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날 서남수 차관 주재로 대책회의를 열고 “선의의 피해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정원외 합격은 수용할 뜻이 없다.”고 못박았다. 평가원의 이의신청 심사 과정이 가진 구조적 폐쇄성이 이번 논란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평가원은 수능 문항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면 이의심사 실무위원회가 1차 심사를 하고 심층 점검이 필요할 경우 학회 등 외부 전문가들에게 본심사를 의뢰한다. 하지만 실무위원회에 평가원 내부 인원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외부 의견이 개입되기 힘든 구조인 데다 실무위원회가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면 본심사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이번 물리 과목 실무위원회도 11명 가운데 외부인은 1명뿐이다. 이런 구조를 깨트리지 않으면 재채점 사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험생들 사이에 화학Ⅰ 5번 문제도 에 명확지 않은 표현이 있다는 주장이 번지고 있다.5번은 헬륨으로 채운 기체측정관과 수은으로 채운 깔때기가 고무관으로 연결된 그림을 놓고 헬륨의 운동속도를 묻는 문제다. 헬륨과 수은 높이를 비교한 (가),(나) 2가지 그림을 제시하고 의 ㄱ∼ㄷ 3개 항 가운데 수은 깔때기를 내려 수은의 높이와 헬륨의 높이가 같게 됐을 때에 대한 옳은 설명을 모두 고르도록 했다. 문제는 ‘(나)에서 콕을 열어 두어도 수은의 높이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돼 있는 ‘ㄷ’에 있다. 수험생들은 ㄷ의 ‘콕을 열어두어도’란 표현에서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이라는 전제가 빠져 있어 ‘ㄷ’이 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한화학회원인 경북대 화학교육과 이무상 교수는 “콕을 열면 수면이 변했다가 시간이 흘러 유지되는 게 맞기 때문에 학생들의 주장대로 에 중간과정이 빠져 있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이재훈 이경원기자 nomad@seoul.co.kr
  • [문화마당] 가슴에 별과 나무 심어주는 ‘숲체원’/ 윤보영 시인

    “별들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려요.”,“발에 차이는 별 때문에 넘어질 뻔했어요”,“가슴에 들어온 하늘에도 별이 있어요.” 놀이기구도 없는 산에 가서 무엇 하겠냐며 불만을 품었던 아이들이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청태산 기슭에 있는 ‘숲체원’에 왔다가 남긴 말들이다. 나무와 별들이 많은 곳, 며칠 전 숲과 산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한 번 가보아야 한다는 숲체원을 찾아갔을 때 겨울로 들어서던 나무들이 입구에서 수줍은 미소로 반겨 주었다. 숲은 새순이 돋는 봄이나 나뭇잎이 짙푸른 여름에 찾아와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지만 청태산의 풍경은 재치 있는 나무들의 맵시로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숲체원은 녹색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시설로 ‘숲을 체험하는 최고의 공간’을 의미한다. 가족캠프, 청소년수련활동, 기업연수가 가능하며 숲탐방로, 등산로, 식물원 등 자연생태학습장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곳은 연간 2만명의 탐방객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지난 9월23일 개원한 이래 이미 3만2000여명이 다녀갔다. 숲체원 곳곳에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들이 나무처럼 질서정연하게, 또 때로는 나뭇잎처럼 자유롭게 흩어져 있다. 청태산 중턱에 자리잡은 숲체원은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룬 채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숲을 그대로 활용해 건물들을 나무처럼 심어놓았고 나무로 만든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내가 나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찾아 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마음까지 보여 줄 수 있는데 나무도, 그 나무가 모여 있는 숲도, 숲을 담고 있는 산도 편안하게 생각할 수밖에. 이곳에는 TV가 없다. 깊은 산속이라 노래방이나 슈퍼마켓을 찾아 시내로 나갈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무와 숲과 별과 얘기하며 지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재미는 이런 것 때문에 더해진다. 어쩔 수 없이 참가한 체험행사라 해도 나무의 쓰임새나 이름을 알아맞히는 사이 호감을 갖게 되고, 나무를 응용한 다양한 놀거리에 심취해 있다가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얘기하는 법을 배운다. 나무들은 낯선 옷, 낯선 말투, 낯선 표정들 때문에 처음에는 경계심을 보이다가 아이들의 본심을 확인하고 마음을 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금방 친해지게 되고 심지어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 달라며 귓속말까지 하는 나무도 있다. 낮이 나무와 숲의 이해였다면 밤은 자연의 일원이 되는 체험이다. 숲 속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어둠을 밟고 산책을 나서면 별들을 만나게 되고 서서히 별들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하늘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서는 미움과 증오, 오해나 심지어 부러움마저 없는 곳, 그동안 미워했던 친구도 부모님에 대한 거부감이나 잔소리에 대한 반항심도 물소리처럼 녹아내린다. 대전에서 온 김혜영(중3)양은 “학원, 학교, 과외에 매일 쫓기느라 하늘을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별을 보았고 내 가슴에 비쳐진 하늘의 참모습을 보았어요.”라고 말했다. “와! 정말 별이 많다. 저것은 북두칠성, 저것은 은하수” 이곳에 온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별을 보고 신기해서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별처럼 하늘에 박힌 눈동자들! 저 하늘 일부를 떼어 내 서울에 붙이고 별을 잊고 사는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 안 될까? 문제지 몇 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이 낭비되고 밀린 학원 숙제 때문에 걱정은 되겠지만 별까지 잊고 사는 아이들이 꿈과 별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숲체원에 보내자. 아이들은 이곳에서 가슴 가득 나무를 심고 나무처럼 곧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詩)를 읊을 수 있는 감성을 찾을 것이다. 윤보영 시인
  • 작가에게 들어본 신춘문예 ‘오해와 진실’

    작가에게 들어본 신춘문예 ‘오해와 진실’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프로 작가를 꿈꾸는 문학청년들은 이맘 때면 으레 설렘과 기대, 허탈과 좌절의 ‘열병’을 치른다. 서울신문(14일)을 비롯, 대부분 언론사들의 신춘문예는 이달 중 공모를 마감한다. 지난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경우 시·소설·동화·희곡·시조·평론 등 6개 부문에 모두 3500여편이 응모했다. 응모자 1383명 가운데 6개 부문에서 6명의 당선자를 배출했으니 경쟁률은 무려 230대1이 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학청년들 중에는 신춘문예에 대해 몇 가지 ‘오해 아닌 오해’도 갖고 있다.‘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작가의 길이 활짝 열린다.’라든가 ‘신춘문예용 작품이 따로 있다.’는 등. 신춘문예에만 당선되면 작가의 길이 탄탄대로일까.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살’로 당선된 김이설씨는 “일단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는 무척 기뻤다.”며 “그러나 등단 이후 원고청탁 등의 ‘러브콜’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안돼 심적 부담을 느꼈다.”고 밝혔다. 김씨는 특히 “등단하기 전에는 오로지 당선에만 신경을 쓰면 됐는데, 등단하고 나니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인 데다 채워야 할 부분도 많아 더 힘들다.”고 털어놨다. 1991년 서울신문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하응백씨도 “신춘문예 당선은 일종의 작가의 면허장과 같은 것인 만큼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신춘문예 당선이 꼭 작가로서 성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가 첫발을 내디디는 것에 불과한 셈이다. 이른바 ‘신춘문예용 작품’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 신춘문예 지망자들은 종종 ‘신춘문예용 작품’이 정형화돼 있는 것으로 믿는다. 예컨대 단편소설의 경우 ‘첫 문장을 짧게 써라.’,‘첫 페이지가 재미없으면 심사위원들이 읽어보질 않는다.’는 등의 얘기들이 ‘미신’처럼 떠돈다. 이에 대한 대답도 ‘글쎄요.’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한결같이 “신춘문예용 작품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1998년 ‘8월의 식사’로 당선된 강영숙씨는 “신춘문예 공모용 작품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며 “일단 읽혀야 하니까 기본이 돼 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밝혔다. 하응백씨는 “비문(非文)·오문(誤文)이 들어가면 바로 탈락하는 만큼 기본 문장 테크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풀’로 당선된 하성란씨는 “예전에는 본심 심사위원의 취향을 고려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다.”며 “기성의 냄새를 풍기는 안정적인 작품보다 새로운 실험성 강한 작품이 보다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붉은 닻’으로 등단한 한강씨는 “한편으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만큼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며 “무엇보다 글에 글쓴이의 에너지나 치열함이 느껴져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춘문예를 지망하는 문학청년들은 기성 작가의 ‘예쁜 모방품’보다 아마추어로서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치열한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활약 덕분에 후금군을 물리치고 조선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옛날처럼 ‘해외 천자’,‘밀수 왕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드러나기 시작하는 모문룡의 본질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가 동강진(東江鎭)을 건설했던 해가 1622년이므로 정묘호란이 끝날 무렵이면 햇수로 5년이 지난 셈이 된다. 모문룡은 그동안 ‘요동 수복’을 외치며 엄청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소모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간혹 배를 타고 서해에서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봉황성(鳳凰城) 등지에 출몰하여 후금군과 소소한 규모의 전투를 벌였지만 그것은 ‘요동 수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후금을 자극하여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일찍부터 모문룡의 활동과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1622년 12월, 명의 어사(御史) 하지령(夏之齡)은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모문룡을 본토로 철수시키라고 건의했다. 모문룡이 고립된 병력을 이끌고 바다 바깥의 조선 땅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를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대학사(大學士) 섭향고(葉向高) 또한 당시 어려웠던 명의 재정 형편을 내세워 하지령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당시 희종(熹宗) 황제는 모문룡을 적극 옹호하며 섭향고 등의 건의를 일축했다. 희종 황제가 제위에 있는 동안은 모문룡의 ‘안전’에 별 문제가 없었다. 환관 위충현이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문룡 또한 위충현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려 그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피해 갔다. 그는 위충현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가도의 동강진에 위충현을 조각한 석상(石像)을 세웠을 정도였다. 명 조정에서 조선으로 사신이 올 때마다 그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사신들이 조선을 왕래하려면 반드시 동강진에 들러야 하는데 행여 그들을 통해 자신의 본질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1626년 윤 6월, 조선 방문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던 한림원 편수(編修) 강왈광(姜曰廣)이 동강진에 들렀을 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흥미롭다. 모문룡은 만주 지도를 꺼내 놓고 강왈광에게 자신의 작전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강왈광이 관심을 보이며 “이제 장군이 공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맞장구를 치자 모문룡은 본심을 드러냈다.‘공을 세우고 싶지만 군량이 없다.’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강왈광도 물러서지 않았다.‘군량이 부족하면 정예병만을 추려내서 싸우면 된다.’고 충고했다. 강왈광은 더 나아가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계속 뜯어내려 한다면 조선이 필시 딴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미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의 피폐한 실상을 파악했기 때문에 했던 충고였다. ●모문룡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 모문룡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1626년 5월, 총독 염명태(閻鳴泰)는 ‘바다 바깥에 병력을 배치한 것은 적의 배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인데 모문룡은 오히려 후금에 견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며 그를 속히 여순(旅順)으로 철수시키라고 촉구했다. 원임 등래순무(登萊巡撫) 무지망(武之望)도 ‘모문룡은 후금군이 두려워 물러나려고만 하고 조선 군신들과 갈등을 일으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바야흐로 ‘모문룡 문제’가 정쟁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순간이었다. 모문룡의 문제점을 들어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이어졌음에도 명 조정이 그와 동강진을 계속 유지시키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희종 황제와 위충현이 모문룡을 비호했던 것이 중요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이 지닌 효용 가치를 다른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조선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626년 주문욱(周文旭)은 황제에게 올린 게첩(揭帖)에서 모문룡이 후금을 제대로 견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진영을 여순으로 옮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이 후금에게 시달리면서도 명을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문룡이 철산에 머물면서 견제하기 때문’이라며 모문룡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했다. 풍성후(豊城侯) 이승조(李承祚)도 비슷한 의견을 폈다. 그는 ‘모문룡의 진영을 옮기자마자 조선이 후금에 병탄될 것이고, 그러면 후금은 더욱 거리낌 없이 명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문룡의 진을 옮기는 대신 감독관을 보내 군량을 감독하고 그에게 전진하도록 명령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문룡에 대한 감사(監査)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정묘호란 이후 모문룡이 보인 태도는 가관이었다. 거짓말로 가득 찬 보고서를 올렸음에도 환관들의 비호 덕분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자 그는 더 대담해졌다. 그는 호란 이후 후금 측과 사절을 왕래하면서 사실상 내통하고 있었다. 양측의 사절들이 창성(昌城)을 경유하여 심양을 왕래하는 것은 조선의 수령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목격되었다.1627년 12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도 양측이 ‘화친’ 운운하면서 사절을 서로 왕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그러면서도 정작 조선에 대해서는 딴 이야기를 했다. 그는 12월26일 조정에 도착한 서한에서 조선이 후금과 화친한 것을 질책한 뒤,‘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일망타진할 것이니 조선도 두려워하지 말고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언동이었다. ●원숭환, 모문룡에게 쌍도로 오라고 명령 정묘호란 이후에도 ‘감시의 사각 지대’에 머물며 희희낙락했던 모문룡에게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문룡에게 종말을 가져다 준 당사자는 다름 아닌 원숭환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가 가도에 ‘퍼질러 앉아’ 군량만 축내며 정작 후금군에 대한 공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숭환의 반감은, 모문룡을 싫어하는 조정 신료들의 ‘관념적인’ 반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으로서, 최전선인 영원성에서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무장으로서 그가 모문룡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훨씬 구체적이고 엄중한 것이었다. 백기종(柏起宗)의 ‘동강시말(東江始末)’에 따르면 원숭환은 일찍부터 모문룡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마다 매번 ‘모문룡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문관을 파견하여 모문룡을 견제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가도에 대해 해금(海禁) 조치를 취하려 했다. 여순을 차단하여 모문룡의 진영으로 장정들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한편, 명으로 오는 조선 사신들이 가도에 들른 이후에는 반드시 영원성을 거치도록 했다. 모두 모문룡을 견제하려는 조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희종 황제, 그리고 그와 연결된 위충현의 비호 때문이었다.1627년 7월, 희종이 세상을 떠났다. 희종의 죽음은 위충현의 종말을 의미했다. 모문룡에게도 불길한 소식이었다. 이윽고 1629년(崇禎 2) 5월22일, 원숭환은 가도로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요동 경략 원숭환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쌍도(雙島)로 오라고 명령했다. 쌍도는 여순에서 육로로 80리, 해로로 4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5월25일, 동북풍이 불자 모문룡은 쌍도를 향해 출발했다.‘해외 천자’의 마지막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오는 백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정봉수는 죽어 가고 있는 평안도 백성들을 살릴 진휼(賑恤) 대책을 속히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북 백성들의 비극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조정에서 버림받은 채 후금군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그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후금군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해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들어간 섬 안에 식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후금군을 겨우 피했지만 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가 맺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서북 백성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고을을 가든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로 넘쳐났다.‘황해도의 마을들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고, 평양성 안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압록강 부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처참했다. 후금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금군은, 투신을 막으려고 포로들을 결박하고 배에다 울타리를 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압록강이 시체로 뒤덮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초기, 평안도 백성들 가운데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모문룡 휘하의 명군(모병:毛兵)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 모병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민폐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지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모병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곽산, 구성, 삭주, 선천, 창성, 철산, 의주 등 모병의 주둔지 부근에 살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까지 모병들에 살해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모병들의 살육과 약탈은 극에 이르렀다.1627년 4월19일 무렵, 모문룡의 부하 모유후(毛有厚)는 안주에 정박해 있던 조선 선박 3척을 나포했다. 조선 피란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었다. 모유후는 배들을 기습하여 건장한 남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을 남겨 끌고 갔다.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이란 자는 조선 조정이 황해도 장연의 선박들을 쇄환하려는데 불만을 품고 조선인 역관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귀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서북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모병들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정묘호란 중의 모문룡 후금의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공격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틈을 이용하여 청북(淸北)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지역의 조선 의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골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중군 이립(李)과 품관 장희범(張希範)은 자신들이 벤 후금군의 수급(首級-머리)을 모문룡에게 가져다 바쳤다. 용천(龍川)의 군관 김여의(金汝義)는 수급뿐 아니라 후금군에서 노획한 말을 바쳤다. 모문룡은 그들에게 은이나 식량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적과 싸워 군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던 서북 지역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상으로 주는 식량 등이 아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에게 수급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의 머리를 후금군의 것으로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그렇게 얻은 수급을, 마치 자신이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명 조정에 군공으로 보고했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력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 조정은 강화가 성립된 후 모문룡에게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1627년 4월27일, 문안사 신달도(申達道)는 모문룡을 면담했다. 신달도가 “수로와 육로가 모두 막혀 이제야 노야(老爺)를 찾아 뵙게 되었다.”고 공손히 안부의 인사를 전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신달도가 가져간 자문(咨文)의 내용이었다. 자문 속에는 ‘귀하의 진영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한 무리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문을 읽은 뒤 모문룡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조선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명군을 도살했고,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후금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그들을 방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달도가 ‘강화를 체결한 것은 조선의 본심이 아니며 적을 기미(羈-어르고 달래는 것)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모문룡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부하들을 단속해 달라.’는 신달도의 요청도 묵살했다.‘조선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한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모문룡에 미곡 5만석·은 10만냥 하사 4월28일, 정묘호란의 전말을 명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고 있던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가도에 도착했다. 주문사 일행은 모문룡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모문룡은 부하들을 시켜 조선의 주문사 일행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저지하도록 했다. 주문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정묘호란 중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아예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 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이 크게 패하여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天啓帝)는 모문룡의 사기 행각에 완전히 넘어갔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太監) 유응곤(劉應坤)은 정묘호란과 모문룡에 관련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설’이었다.‘오랑캐 군사 6만이 조선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이 기책(奇策)을 내어 제압하여 그들이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모문룡은 다른 경로로 올린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세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이 보전되었다.’고 허풍을 치는가 하면 ‘조선이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에 불만을 품고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무고까지 했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 평소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을 뇌물로 ‘구워 삶았던’ 모문룡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환관과 간신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있던 명의 앞날이 어떤 모습일지 예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도봉구 9개분야 인허가 미리심사

    도봉구는 다음달부터 사전심사청구제를 시행한다고 16일 밝혔다. 사전심사청구제란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개발행위 허가 등 민원과 관련, 민원인이 약식 구비서류를 갖춰 해당기관에 사전심사를 청구하면, 정해진 기간 내에 인·허가에 대한 가부를 결정해 통보해주는 제도다. 청구대상은 ▲고압가스 제조·판매·저장소 설치 허가(변경)신청 ▲액화석유가스의 충전·집단공급·판매·저장소 설치 허가(변경)신청 ▲대규모 점포 개설 등록(변경) 신청 ▲폐수배출시설 설치 허가 ▲재래시장 조합설립(변경) 인가 ▲보육시설 인가, 주택건설사업계획승인 ▲자동차관리사업(부분정비업) 신규등록 ▲지정정비사업자 지정신청 등 9개 분야다. 각종 인허가 가능 여부를 사전에 판단할 수 있어 사업비 절약뿐만 아니라 정식민원 처리과정에서도 불필요한 시간을 최대한 줄여준다. 실제 일반인의 관심도가 높은 주택건설사업계획승인은 사전심사를 거치면 처리기간이 60일에서 40일까지 크게 단축된다. 또 사전 심사 청구를 통과한 민원을 정식 접수할 때 이미 제출한 구비서류는 추가로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구 관계자는 “사전심의와 본심의 결과가 달라질 경우 행정소송 등의 적잖은 분쟁 요소가 될 수 있는 만큼 사전심의 단계에서 최대한 신중한 심사를 유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손학규 “신당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돼” 발언

    손학규 “신당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돼” 발언

    범여권 대선 주자들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손학규 전 지사의 독특한 해석에 일제히 손 전 지사를 공격하고 나섰다. 손 전 지사는 3일 광주에서 “신당이 말로는 미래세력이라면서 아직도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 된다.”며 “광주정신은 광주를 털어버리고 대한민국, 세계를 향해 뻗어갈 때 더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의 이같은 발언은 광주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자신의 약점에 대한 예상되는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손 전 지사는 80년 광주민주화 운동시절 영국 유학 중이었다. 범여권 대선주자들은 손 전 지사 발언을 강력 비판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측은 “그동안 광주정신에서 벗어나 살아온 사람에게는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며 “광주정신이 담고 있는 정의, 인권, 평화 정신은 21세기에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광주정신에 대한 폄하·왜곡은 광주와 민주개혁세력을 모욕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천정배 의원도 공격의 날을 세웠다. 천 의원은 논평에서 “일전에 ‘광주정신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말장난으로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광주를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발언으로 본심을 드러냈다.”고 비판한 뒤 “정말 털어버리고 싶은 것은 지난 14년간 수구·기득권세력의 하수인이 돼 광주를 공격했던 자신의 과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측도 “얼마전까지만해도 ‘5·18당시 몸은 영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광주에 있었다.’고 하던 분 아니냐.”면서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음을 폭로하는 것으로,IMF 사태 때 정권에 몸 담았던 사람이 광주정신을 일자리와 묶어서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비난대열에 동참했다. 이에 대해 손 전 지사측 배종호 대변인은 “광주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미래로 세계로 나가자는 뜻”일 뿐이라며 “의도적으로 의미를 왜곡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고 공세를 일축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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