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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대생 미인이 왜 나빠”

    “여대생 미인이 왜 나빠”

    올해 「미스·코리어」진(眞)으로 뽑힌 유영애(劉永愛)양(20)이 재학중인 숙명여대(淑明女大)에서 제적(除籍)당할 운명에 놓여있다. 재학중에는 미인대회, TV 「탤런트」 또는 「모델」로 나가지 못한다는 학칙에 걸린 것. 미인다사(美人多事) 랄까? 지난 해엔 「미스」아닌 「미스·코리어」로 말썽이더니 올해엔 학칙이 말썽. 지난 4월 6일 「미스·코리어」본선대회에서 「미스·경기(京畿)」의 자격으로 출전한 유 양은 애교만점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께 부탁 드릴 일이 있어요. 딸을 낳으시거든 숙대(淑大)에 넣으시고 며느리는 꼭 숙대 출신을 고르셔요』 숙대재학생의 숙대PR에 관중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숙대PR가 아니었다. 바로 대회 2시간전. 「미스·코리어」에의 꿈에 부푼 유 양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출전 미녀들의 대기장소인 대원(大元)「호텔」에서 유 양은 화장을 하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나 숙대학생처장인데 유 양 본선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숙대는 더 다닐 생각 말아요. 아시겠죠? 그러니 유 양이 잘 알아서 처리해요』 전화는 끊겼다. 숙대쪽으로부터 유 양에게 이런 협박(?)이 있기는 이미 여러 차례. 그러니까 대회 2시간전 걸려온 전화는 최후통첩인 셈이었다. 전화가 끝나고 약 30분뒤 이번엔 숙대쪽이 보낸 공식 사절이 대원「호텔」에 나타났다. 이번 대회에 가짜 숙대생이 한명 있었으며, 「미스·경북(慶北)」으로 출전한 A양은 가명으로, 유 양은 본명으로 출전했다. 대원「호텔」에 나타난 숙대조교 역시 학생처장의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숙대쪽의 협박(?)보다는 미(美)의 정상을 향한 집념이 더 강했든지 유 양은 본선대회에 나갔고 끝내는 올해 「미스·코리어」진으로 뽑혔다. 새 「미스·코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4월 16일 유 양의 집에 다시 속달우편이 도착했다. 4월 18일까지 자퇴원을 내지 않으면 총장 재량으로 유 양을 제적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유 양과 함께 「미스·경북」으로 출전했던 A양은 이미 출석일수(出席日數) 미달이란 명목으로 숙대에서 제적 당했다. 유 양은 자퇴원을 쓰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막상 「펜」을 잡고 보니 『저 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살아오신 홀 어머님 생각이 나서』 자퇴원을 쓸 수가 없었다고. 「미스·코리어」 선발대회를 주관한 H사 쪽에서 유양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지난해 「미스·코리어」인 임현정양은 현재 숙대 영문과 3학년에 재학중. H사쪽은 숙대까지 「미스·코리어」 선발대회 출전을 막는 경우 「미스·코리어」 의 질적 저하를 들며 숙대쪽의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숙대쪽은 학업에 충실해야 할 여대생이 미의 여왕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대학재학생이 「미스·코리어」 선발대회 「스폰서」 기업체의 광고 「모델」 로 까지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볼수 없다고 팽팽히 맞서있다. 한편 『재학중에는 미인대회, TV「탤런트」 또는 「모델」등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학칙도 말썽거리. 숙대학칙엔 이런 명문(明文) 규정이 없다. 그러나 숙대쪽은 69년 9월부터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숙대의 공식태도를 밝혀 왔으니 불문율(不文律)이 돼있다는 주장. 그러나 유 양의 가족쪽은 『합법적인 입시를 통해 숙대에 들어간 이상 성적불량 혹은 출석일수미달등 학칙을 어기는 행위가 없는 이상 총장재량에 의한 제적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아버지 없는(6·25때 작고(作故)) 유 양을 8살때부터 고교졸업때까지 맡아 키운 유 양의 외조부(外祖父) 박종우(朴鍾禹)씨는 『어떻게 키운 외손년데 학교 못 다니게 하느냐?』면서 화를 벌컥 냈다. 『미인이라고 학교 못 다니게 하면 이 세상 미인은 모두 멍텅구리 되라는 말이냐? 지난 해에도 「미스·코리어」가 숙대에서 나왔다는데 그 아가씨는 학교 다니게 하고 우리 외손녀는 못 다니게 하다니 그런 법이 있느냐?』고. 유 양의 홀어머니 박정애(朴正曖)여사는 『학교에서 자퇴원 내라고 속달이 왔을때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어요.「미스·코리어」 된 뒤에 공부를 잘 못했다거나 결석을 많이 했다면 몰라도 .「미스·코리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학교를 못 다니게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해요』라고 학교당국의 재고를 바랐다. 당사자인 유 양은 『어떤 교수님은 자퇴할 필요가 없다. 또 어떤 교수님은 자퇴하라고 하니 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주위에서 어떤 분들은 딴 학교로 전학을 하라거나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2년 공부를 마치고 오라고 해요. 그러나 다니던 우리 학교를 두고 왜 딴학교로 옮겨야 하나요?』 유 양의 학교성적은 우수한 편. 1학년때 성적이 평균 B학점. 유 양의 희망은 대학졸업뒤 여고 무용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숙대1학년때 교직과목 4학점은 모두 A. 유 양의 말로는 『절 공부시키려고 어머님이 너무 애쓰시는것 같아 2학년때는 더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타려 했는데…』하며 말끝을 흐린다. 유 양은 「미스·코리어」가 되었다고 『절대로 학교 공부나 몸가짐이 전보다 소홀해 지지 않을 것이니 학업을 계속케 해달라』 고 호소. 유 양의 희망은 올여름 있을 「미스·유니버스」선발대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이번 한 학기만은 휴학계를 받아주었으면 하는것. 이런 유 양쪽의 주장에 대해 숙대쪽의 입장도 사뭇 강경하다. 숙대 윤(尹)학생처장은 『지난해 까지만 해도 숙대는 재학생의 「미스·코리어」출전을 허용해 왔어요. 그러나 이대(梨大)등 다른 여대가 모두 불허(不許)하고 있는 것을 숙대만 허용하고 있다고 학부형들의 비난이 많았어요. 게다가 학업에 전념해야 할 여대생이 「뷰티·콘테스트」에 나가고 신문광고에 오르내리는 걸 찬성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난 9월부터 여러차례 학생들에게「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경고해 두었어요. 이미 불문율이 되어 버렸죠』라고 공식태도를 밝혔다. 앞으로 이 문제는 숙대 교수회의의 의결을 거쳐 확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교수들이 유 양을 동정하고 있어 과연 제적이 되느냐는 두고 볼 문제. [선데이서울 70년 5월 3일호 제3권 18호 통권 제 83호]
  • 2집앨범 ‘팔로우 마이 솔’ 낸 바비 킴

    2집앨범 ‘팔로우 마이 솔’ 낸 바비 킴

    ‘힙합의 대부, 솔의 제왕으로 귀환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힙합의 대부´ 바비 킴(34·본명 김도균)이 2년여 만에 2집앨범을 들고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앨범 타이틀은 ‘팔로우 마이 솔(Follow my Soul)’. “제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음악들이 고스란히 담겨진 앨범입니다.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러나 저를 아껴 주시는 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솔을 바탕으로 리듬 앤드 블루스와 재즈 스윙,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섞었다. 그러나 ‘잡탕밥’쯤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1집앨범을 통해 “음반에 수록된 모든 트랙의 음악을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라는 대중음악계의 극찬을 이끌어 냈듯, 이번 앨범에서도 자신의 음악적 역량과 깊이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완성도 높은 앨범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2년여 작업을 하면서 50곡이 넘는 노래들을 작곡했는데, 주변사람들의 모니터링 등을 통해서 14곡을 선정해 이번 음반에 담았습니다. 대중성을 의식하긴 했어도, 유행이나 트렌드를 무조건 좇지는 않았고요. 노래에 조금이라도 가식이 있다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을 정도니까요.” 음반시장이 고사직전에 이른 요즘, 이처럼 품이 많이 들어간 앨범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무모하지만, 한편으론 기특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타이틀곡은 ‘파랑새’.1992년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겪은 그의 자전적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무척이나 사랑한 여자가 있었지만, 능력과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떠나 보냈다.”는 것이 그의 설명. 하모니카 주자 전제덕의 잔잔한 연주가 애절함을 더해준다. 트럼펫 주자인 아버지 김영근씨는 1집 ‘고래의 꿈’에 이어 이번 앨범에도 참여해, 아들의 목소리를 한층 빛내주고 있다. 다소 빠른 템포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최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깔끔하고 세련된 세션과 편곡이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이다.“나조차 이게 무슨 음악인지 모를 정도로 여러 장르가 뒤섞여, 원래는 앨범에서 빼려고 했던 노래예요. 하지만 작사를 한 주비 트레인이 강력 추천해서 수록했죠.” 듣기 좋은 노래가 하마터면 세상빛도 못본 채 사장될 뻔했다. 국내 정상급 뮤지션이 대거 참여한 것도 눈길을 끈다. 에픽하이의 타블로, 다이내믹듀오, 정인,J, 버블시스터즈의 아롬 등이 보컬로 참여해 그와 입을 맞췄다. 2집앨범 발매와 함께 오는 23일부터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콘서트를 여는 등 본격적으로 인기몰이에 나선다.“저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될 겁니다. 편안한 솔의 향취에 흠뻑 젖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글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409-1의 유별난 건물,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주변에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출적인 건물 외양이 색다르다.2002년 12월 들어선 뒤 대전의 명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이 민족종교 증산도의 핵심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정면에서 볼 때 왼편 시루(떡을 쪄서 익히는 질그릇) 형태의 태을궁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山´의 형상을 이룬 독특한 건물. 도조(道祖) 강증산(姜甑山·본명 一淳·1871~1909)의 이름자를 고스란히 건물로 형상화했다. 지금은 증산도 신도들의 교육장소로 쓰고 있지만 이른바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새 시대에 세상의 모든 일을 도모할 근본 터로 계획해 세운, 증산도의 중심이다. 세미나실과 교육장 6개, 사무동, 숙소동, 증산도 케이블방송국이 ‘山´자를 이루며 독특하게 포진해 있는 건물. 한꺼번에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증산도 교육센터이지만 건물 맨 오른쪽엔 서점과 북카페를 차려 일반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공간은 역시 시루 모양의 태을궁. 밖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원통형 시루 모양이 확연하다.1800석을 갖춘 실내의 조명과 음향, 영상 시스템은 국내 여느 대형 공연장 못지않은 수준. 무대 전면에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太母) 고수부, 태을천 상원군, 국조 단군왕검의 어진을 개사해 모신 신단이 눈길을 끈다. 도조 강증산은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시루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나 호를 시루 증(甑)자와 산(山)자를 써 증산이라 지었다고 한다. 증산이란 이름엔 출생지 시루산 말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다름 아닌 1200여년 전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세운 김제 금산사 미륵금상의 철수미좌 사연이다. 진표율사는 목숨을 건 망신참법의 수행을 통해 미륵불을 친견하고 미륵불의 계시에 따라 미륵금상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쇠로 된 밑 없는 시루(철수미좌)를 놓고 그 위에 미륵금상을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지금 미륵금상 아래의 철 시루는 시멘트로 봉쇄된 채 일반인들이 볼 수 없다). 증산도는 그로부터 1100여년 후 고부의 시루산 밑에서 탄생한 강증산이 진표율사와의 인연으로 금산사 미륵금상에 30여 년간 성령(聖靈)으로 있다가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여긴다.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道典)에 실려있는 탄생에 관한 내용이지만, 불교계에서 아직까지 미륵금상을 철수미좌에 받쳐 조성한 이유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김제 금산사 인근 모악산 기슭에는 지금도 증산 사상을 신앙으로 이어오고 있는 군소 종교단체가 40여개나 남아 있다. 강증산은 31세 때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간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통해 남북통일을 포함한 후천세상을 여는 프로그램(증산도에선 도수로 부름)을 짰다고 한다. 태을은 증산도에서 가장 중시하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에 등장하는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진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총본산의 주 공간에 가장 중요한 태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강증산이 태어난 시루산 아래 신송마을에는 입구에 ‘강증산성지’라 새겨진 나무 푯말만이 덩그맣게 섰을 뿐 생가를 비롯해 성지라 부를 만한 흔적이 별로 없다. 인근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은 도조 강증산의 맥을 이어받은 보천교 교단이 형성됐던 곳이다. 당시 이곳엔 본부 건물인 십일전을 비롯해 건물 30여동이 들어섰으며 신도 수가 수백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제시기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이곳 보천교를 통해 모금되었으며 그 때문에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원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선승 탄허 스님의 아버지인 김홍규도 보천교 핵심 간부였다. 보천교는 종교집단이었지만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일제는 집요한 와해공작을 벌여 1936년 마침내 보천교를 해체시켰으며 당시 보천교의 본당이었던 십일전 건물은 해체되어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옮겨졌다. 보천교 교단이 있던 대흥마을은 마을 전체가 보천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보천교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옛 건물 7채만 남아 있다. 보천교 와해 이후 지금의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강증산과 2대 도주 고수부의 종통을 이어 새롭게 이끈 것이 증산도. 증산도는 해방후 한때 신도가 70만명에 달했으나 6·25전쟁으로 교세가 주춤했다가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1970년대 다시 문을 열어 지금에 이른다.“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대전)에 꽂았느니라.”“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는 도조의 유언을 중시, 대전에 본부를 두었으며 태을궁은 그중에서도 핵심 공간인 셈이다. kimus@seoul.co.kr ■ 전국 250여 도장·신자100만명 둔 증산도는 강증산을 도조(道祖)로 모시며 상생(相生), 보은(報恩), 해원(解寃), 원시반본(原始返本),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핵심 종지(宗旨)로 삼는다. 전국에 250여개의 도장(道場)이 있으며 신자 수는 100여만명으로 추산. 도장은 수행, 교육, 포교 활동의 구심점으로 대전에 본부가 있다. 세계적으로 20개국 50여개 도시에 도장을 갖췄으며 최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7개 국어로 된 외국어 도전도 펴냈다. 신도들은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도장에서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 고수부, 천지신명에 정성을 드리는 정기 치성(致誠)을 봉행한다. 평상시에는 집에서 매일 아침·저녁 청수(淸水·정화수)를 올리고 태을주 수행을 한다. 기도는 하늘을 받들고 땅을 어루만지는 형상의 절법인 반천무지(攀天撫地)를 하는데, 인간이 천지의 은혜에 보은하는 것과 함께 인간이 우주의 주인임을 상징한다. 지금 시대는 우주에서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과도기이며 앞으로 올 가을기에 통합과 상생의 새 문명이 열린다는 미래관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단체에 비해 대학생 등 젊은 남자들이 신도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학교수, 의사, 한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적지 않다. 후천문명을 열 성직자 양성기관인 증산도대학교를 1984년부터 열고 있으며 전문 성직자를 기르는 성녀전사단 교육과정도 운영한다. 역사와 민족의 뿌리찾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군부대, 교도소, 마을문고, 학교도서관 등에 ‘상생의 책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사고] 서울신문 신춘문예 공모

    ■ 모집 부문 및 상금 ●단편소설(80장 안팎) 500만원 ●시(3편 이상) 300만원 ●시조(3편 이상) 200만원 ●희곡(90장 안팎) 250만원 ●문학평론(70장 안팎) 250만원 ●동화(30장 안팎) 150만원 ※장수는 200자 원고지 기준 ■ 마감 2006년12월12일 화요일(당일 우편 도착분까지 유효) ■ 보내실 곳 100-745 서울 중구 태평로1가 25 서울신문사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 당선작 발표 2007년1월1일자 서울신문 지면 ■ 응모 요령 응모작은 기존에 어떤 형태로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같은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투고하거나 표절로 인정될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는 반드시 A4용지로 출력해 우송하십시오. 팩스나 이메일 원고는 받지 않습니다. -겉봉투에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붉은 글씨로 쓰고, 원고 끝에 이름(필명인 경우는 본명), 주소, 연락처(집·직장 전화, 휴대전화)를 적어주십시오. ■ 문의 서울신문 문화부 (02)2000-9192∼6.
  • 탤런트 이찬-이민영 결혼

    동갑내기 탤런트 이찬-이민영(30) 커플이 10일 낮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개그맨 서경석이 사회로 진행된 결혼식에서 가수 김조한이 축가를 불렀다. 주례는 최치림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가 맡았다. 이들은 12일 인도네시아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이민영은 최근 끝난 SBS 주말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출연했다.‘사랑과 야망’은 이찬(본명 곽현식)의 아버지인 곽영범 PD가 연출한 작품이다. 이찬은 현재 SBS 월화드라마 ‘눈꽃’에 출연하고 있다.
  • 애즈원 따로 또 같이 서정을 읊다

    애즈원 따로 또 같이 서정을 읊다

    감미로운 하모니를 자랑하는 ‘R&B의 요정’ 애즈원(As oneㆍ이민, 크리스탈)이 긴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2년여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팬들에게 선사할 5집앨범 ‘이별이 남기는 12가지 눈물’을 들고서다. 애즈원의 이번 앨범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서정적인 감미로움. 하나하나의 색다른 이별이야기에 그들만의 목소리를 담아 한편의 시집을 연상케 한다.“조금 변화를 주긴 했지만, 예전의 목소리 색깔은 최대한 살리면서 여러가지 음악을 담으려 노력한 앨범이에요. 보사노바와 삼바에서부터 힙합 풍의 음색에 이르기까지 담다 보니, 예전보다 웅장해지고 스케일도 훨씬 커졌죠.” ‘이별이 남기는 12가지 눈물’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十二夜)’에서 영감을 얻었다. 제목에서 보듯 모두 열두곡으로 구성돼 있다. 크리스마스 날부터 열두 밤을 지새우면서 느꼈던 이별에 대한 노래들을 모았다. 특히 타이틀곡인 ‘십이야’는 애즈원만의 독특한 장르를 새롭게 펼쳐냈다. 묘한 가사와 소름이 돋을 만큼 애절한 목소리가 압권이다. 현재 벅스와 멜론, 도시락 등 온라인 음악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99년 1집 ‘데이 바이 데이’에서 동명 타이틀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민(28·본명 이민영)과 크리스탈(27·본명 크리스탈 채)은 데뷔전부터 알고 지내던 절친한 친구다.“팀 이름이 애즈원인 이유를 아세요?‘따로 또 같이’라는 말처럼 저희 둘은 하나라는 의미예요.24시간 내내 붙어 다니죠. 떨어져 있는 시간은 거의 없어요. 아마도 전생에 부부였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웃음)” 그래서 최근 팀 구성원들이 제각각 활동하는 최근의 풍토가 이해되지 않는단다.“애즈원의 목소리는 하나예요. 다른 가수와 공동으로 노래를 취입할 수는 있겠지만, 따로 녹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얼마전에는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로부터 ‘한국 팝음악 국제화의 기수’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우리만의 음악세계가 있다고 할까요.R&B나 힙합 같은 외국 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색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그걸 다른 나라의 음악팬들이 좋아하는 거죠.” 이종격투기의 팬이기도 한 이들이 노래 외에 해보고 싶은 것은 공부란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학업에 많은 미련이 남아 있어요. 일반인들처럼 직장생활도 해보고 싶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정통 캐럴 2곡과 창작 캐럴 1곡을 담은 디지털 싱글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다. 물론 R&B로 재해석했다.“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음악이 R&B예요. 지금도 제일 잘하는 음악이기도 하죠. 몸속에서 절로 우러나고 감정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노래를 부를 거예요. 오래 저희를 기다리신 만큼 많은 걸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사고] 서울신문 신춘문예 공모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가 한국 문학의 미래를 열어갈 참신한 문재(文才)를 찾습니다. 모집 부문은 단편소설·시·시조·희곡·문학평론·동화 등 6개이며, 문단의 권위와 공정성을 인정받는 전문가들이 부문별 심사를 맡아 문단의 샛별들을 가려낼 것입니다. 문학을 향한 열정과 패기로 가득찬 예비 문인들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 모집 부문 및 상금 ●단편소설(80장 안팎) 500만원 ●시(3편 이상) 300만원 ●시조(3편 이상) 200만원 ●희곡(90장 안팎) 250만원 ●문학평론(70장 안팎) 250만원 ●동화(30장 안팎) 150만원 ※장수는 200자 원고지 기준 ■ 마감 2006년12월8일 금요일.(당일 우편 도착분까지 유효) ■ 보내실 곳 100-745 서울 중구 태평로1가 25 서울신문사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 당선작 발표 2007년1월1일자 서울신문 지면 ■ 응모 요령 -응모작은 기존에 어떤 형태로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같은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투고하거나 표절로 인정될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는 반드시 A4용지로 출력해 우송하십시오. 팩스나 이메일 원고는 받지 않습니다. -겉봉투에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붉은 글씨로 쓰고, 원고 끝에 이름(필명인 경우는 본명), 주소, 연락처(집·직장 전화, 휴대전화)를 적어주십시오.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문의 서울신문 문화부 (02)2000-9192∼6.
  •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자신이 쓴 수기(手記)가 영화(映畵)로 기획되자 그 영화의 주연까지 맡게 되어 자신의 생활을 「스크린」위에서 재연하게 된 이색여심(女心)- . 『이 여인의 슬픔이』(전조명(田朝明)감독)의 원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김소연씨(金昭延·32·본명 김지연(金志延))『영화보다 더 슬프고 쓰라렸던 13년간의 결혼생활』을 영화 속에서 되뇌어 보려는- 이 한맺힌 여인의 사연을 들어보면- . 순결뺏은 선생님과 결혼…두아이 낳고 2년후 이혼 「이 여인의 슬픔」은 18세때, 춘천(春川)의 모 여고 3학년생이던 김여인이 그녀보다 13세 손위인 수학선생 한테 처녀를 빼앗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스승과 결혼해서 13년. 金여인은 세상 여자가 그렇듯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다만 다른 여인들처럼 평탄하게 살아오지 못한 데서 「드라머」가 형성된다. 13년간의 결혼생활은 2년간의 동거, 5년간의 별거 그리고 합의이혼 뒤 3년간의 독신생활, 다시 돌아온 남편과의 재결합, 그뒤 오늘까지의 아내의 위치가 기둥 줄거리로 구성된다. 『한 남편에 대한 집념이 여자를 얼마나 슬프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김여인은 자신의 과거가 「픽션」이상으로 「드라머틱」하다고 한숨지었다. 3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게 15살때. 그럴싸해서인지 김여인에게는 일본 여인에게서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지금도 30대여인으로는 볼 수 없게, 더구나 파란곡절을 겪은 여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게 애잔한 얼굴. 옷차림 역시 「스타」 지망생답게 화사하다. 여고 3년때의 그녀는 학교 안에서 손꼽히는 미녀였단다. 수학선생이 제자를 범한 이유인즉 『졸업하면 남에게 빼앗길것 같아서』. 예쁜게 탈인 소녀는 멋도 모르고 그 수학선생에게 몸을 바쳤단다. 그리고 임신. 졸업하기가 바쁘게 그 스승한테 시집을 갔다. 스승과 제자의 결합이 용납되질 않았다. 직장을 내놓은 남편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내를 찢어진 가난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돈을 벌자 2호, 3호를 얻어 들였다. 영화 속에서 김소연의 남편 역으로 등장하는 게 신영균(申榮均). 신영균은 지사(志士)적인 호탕함은 있으나 아내를 살뜰히 보살필 수 있는 자상한 남편은 아니었다. 하고싶은 일은 무책임할이만큼 늘어놓는 성미였다. 직장을 내던지고 제자와 사랑의 줄행랑을 놓을만큼 대담한 사랑이었지만 그것도 순간뿐. 사업을 벌여 돈이 생기자 2호, 3호를 얻어 들이고 어린 아내를 내동댕이쳤다. 2호는 「호스테스」, 3호는 여비서. 그 밖에 수많은 여자에게 아이를 잉태시켰다. 결혼 2년만에 두 아이를 낳은 김여인은 갓 스물살 때부터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의무적으로 살아야하는 여자가 됐다. 남편이 살림을 돌봐주지 않자 자신의 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을 파는 짓 이외는 안해본 게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남편에게 이혼당할 때. 그녀는 2백만원의 빚을 안고 헤어졌다. 유혹도 많았으나 9년만에 다시 만나 위자료 대신 남편의 빚더미를 짊어진 것이다. 집을 담보로 2백만원의 부채를 청산했을 때 김여인에게는 새로운 유혹이 뻗쳐왔다. 담보를 맡은 변호사(지금도 명사급 인사)가 동거생활을 요구해 왔다. 의젓하게 아내를 가진 신사였다. 자신의 불행은 고사하고 『또 한사람의 불행한 여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김여인은 그 변호사의 「프로포즈」를 뿌리쳤다. 또하나의 유혹- . 그것은 김여인이 음독자살을 꾀했을 때 죽음에서 구해준 한 착실한 청년(영화에서는 신성일(申星一))의 구혼이었다. 총각이었던 그 청년은 김여인의 과거를 고백받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사랑이 이런것인가』하고 처음으로 깨우쳐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구혼에도 고개를 저었다. 고통을 참고 외로움을 견디는 여성의 인고(忍苦). 그 때는 이미 법적으로 남이 되었지만 그녀는 언젠가 있을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남녀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애정보다는 인연의 결과입니다. 그 인연이 끊기지 않았던가 봐요. 여자로서의 자존심 같은건 문제가 아녜요』 2년 전에 남편은 방황을 끝내고 귀가했다. 별거부터 따지면 거의 9년만의 재결합이다. 지금은 행복하냐는 질문에 김여인은 『과거보다는- 』하고 소리를 죽였다. 수기를 쓰게 된 것은 『한 맺힌 과거를 스스로 정리해보려고』69년 봄부터 착수했다. 대학「노트」에 쓴 것을 2백자 원고지에 옮기니까 2천장 가량. 『지금도 더 쓰자면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 누구한테도 쏟아놓을 수 없던 괴로움을 독백하듯 수기로 엮었다는 것. 쓰고 나면 조금쯤은 속이 후련해졌단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쏟아 놓을 수 없던 이 여인의 슬픔은 엉뚱하게도 영화가 되어 만인 앞에 공개될 판이다. 노트에 적은 여자의 슬픔 우연한 인연으로 영화화 김여인의 친척뻘되는 사람이 우연히 이 수기를 읽고 소문을 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기획자인 박건태랑씨(朴健太郞·한때 전조명 감독의 조감독생활도 했다)는 김여인의 수기를 입수하자 이의 영화화를 서두르게 됐고 전조명 감독도 바짝 열을 올리게 됐다는 것. 전감독의 말은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끝까지 쏟는 무서운 여자의 집념』을 「픽션」아닌 실화로서 「리얼」하게 그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화는 허락했어도 출연까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김여인은 말했다. 김여인을 직접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는 박씨와 전감독이 김여인을 만난 순간에 떠 오른 것으로 『배우 못지 않은 「마스크」에 맘이 쏠렸다』는 것. 망설인 끝에 남편의 허락을 받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성공할 경우 어떻게 심경이 변할지는 몰라도 『출연은 이 작품 하나뿐이고 배우될 생각은 없다』는 게 金여인의 말. 「스크린」에서 자기의 과거를 실연(實演)할 김여인은 이를테면 수기로서 못다한 애증(愛憎)의 세계를 영화에서 털어 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13년간 견딘 슬픈 여인의 사연이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될 것인가가 남아 있는 문제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5일호 제3권 14호 통권 제 79호]
  • 원로가수 신카나리아 별세

    원로가수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가 24일 새벽 5시쯤 경기도 안산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94세. 1912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32년 조선예술단을 거쳐 시에론·빅타·콜롬비아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활동했다.40년대에는 신태양, 라미라,KPK 등 악극단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나는 열일곱살이에요’를 비롯해 ‘강남제비’ ‘에헤라 좋구나’ ‘아리랑선풍’ ‘노들강변’ 같은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1958년 한국무대예술원 중앙위원을 시작으로 가수협회 부회장과 원로연예인상록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문화포장(1998년)과 각종 공로상도 받았다. 장례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지고 유해는 전북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딸 이혜정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10시30분.(02)2072-2011.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정일근의 따뜻한 밥상] 여수낙지는 힘이 세다

    [정일근의 따뜻한 밥상] 여수낙지는 힘이 세다

    지난번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오징어를 낙지로, 낙지를 오징어로 부른다. 지난해 방북했을 때 백두산 향로봉 호텔에서 저녁 차림표에 낙지볶음이 있어 잔뜩 기대했는데 오징어가 나와 어리둥절했다. 낙지나 오징어는 다 같이 두족류인데 오징어는 십완목이고 낙지는 팔완목이다. 우리가 흔히 다리라 부르는 것이 오징어는 10개고 낙지는 8개라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십완목 오징어를 낙지라고 이름한다. 그건 분명 북측의 오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곳에 문의를 해봤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후배 손택수 시인이 쓴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아이세움)를 읽다 안 사실이 있다. 손 시인은 자산어보에 나오는 오징어는 갑오징어고 지금의 오징어는 예전에는 피둥어꼴뚜기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갑오징어가 피둥어꼴뚜기에게 ‘오징어’란 이름을 넘겨주었다고 하니 바다 생물의 족보를 찾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낙지를 ‘낙자’라고 즐겨 부른다. 산낙지가 우글거리는 강진만 뻘밭이 고향인 내 친구 최한선 남도대 교수는 “낙지를 낙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낙지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이다“고 주장한다. 전라도 사람들이 낙지를 낙자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에서 찾았다. 자산어보에 낙지는 본명이 ‘석거(石距)’고 속명이 ‘낙제어’다. 《동의보감》에는 낙지를 ‘소팔초어’(팔초어는 문어다. 즉 작은 문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속명을 ‘낙제’라고 기록돼 있다. ’낙제’라는 이름이 낙지도 되고 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낙자가 낙제에 가까운 발음이나 낙자라는 이름이 왠지 정겹고 맛있게 들린다. 목포는 전라도 ‘낙자’의 본향이다. 그런데 영산강하구언이 들어서고 뻘밭이 죽고 그 뻘밭에서 살던 힘 좋던 뻘낙지들도 사라졌다. 지난해 목포에 갔다가 세발낙지를 사려고 했더니 목포의 술친구들이 이젠 목포에도 중국낙지가 범람한다고, 오리지널 세발낙지 두어 마리가 소고기 한 근 값이나 된다고 걱정이었다. 영산강하구언이 다시 뚫리기 전에는 세(細)발낙지의 시대는 갔다는 경고였다. 자산어보 시절에도 낙지는 맛과 힘의 대명사였다. 정약전 선생은 낙지에 대해 “모양은 문어를 닮았다. 그러나 다리가 길다. 머리는 둥글고 길게 생겼다. 뻘 속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 고깃살의 빛깔은 희고 맛은 달콤하다. 회, 국, 포에 모두 좋고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 말라빠진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이면 곧 튼실해진다”라고 적었다. 정약전 선생이 낙지가 소를 구한다고 했으니 더위 먹고 쓰러진 소에게 산낙지 한 마리 먹이면 벌떡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남도사람들의 과장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정약전 선생의 아우이신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재지에서 쓴 시에서 그곳 사람들이 낙지국을 최고로 친다고 했다. 낙지는 산낙지를 회로 먹거나 볶음요리를 많이 먹는다. 낙지국에 대해 생소하게 생각할 독자가 많을 것이다. 목포에 가면 세발낙지를 넣어 끓이는 ‘낙지연포탕’이 있다. 시원하게도 얼큰하게도 먹을 수 있는데 국물 맛이 일품이다. 지난달에 여수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저녁 시간에 도착했는데 낙지를 준비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여수낙지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언젠가 목포친구가 낙지시장을 한 바퀴를 돌며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표피가 검은 것이 뻘에서 나는 목포낙지고 허연 것이 여수낙지라고 했다. 낙지는 뻘 속에서 나와야 제 맛이지 여수낙지처럼 허연 것은 크기만 하지 맛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 왈, 목포사람들은 여수낙지는 안 먹어!라고 했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의 고집을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나를 세뇌시켜 버렸다. 그런 나에게 여수사람들이 여수낙지를 권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거절할 수 없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여수낙지에 내가 음식에 주는 최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먹은 낙지요리는 육수에 미나리와 콩나물, 불고기를 가득 넣고 끓이다가 산낙지를 통째로 넣어 다시 끓이는 불낙(불고기낙지)과 연포탕이 혼합된 별미였다. 여수낙지가 얼마나 힘이 센지 냄비뚜껑을 두 손으로 잡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세발낙지에서 느낄 수 없는 바다의 힘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낙지는 살짝 익혀 내는데 입안에서 녹을 듯이 부드럽다. 낙지와 미나리, 콩나물 그리고 시원한 국물, 푸짐한 밥상이었다. 낙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초고추장에 찍어먹는데 초고추장 맛도 별미다. 그 식당 단골인 여수의 미식가 친구인 김정만 공인회계사는 집에서 담근 식초만 사용할 정도로 정성이 대단하다고 귀띔한다. 밑반찬으로 석화젓이 나왔는데 맛있게 삭은 것이 짜지 않고 별미다. 여수 석화(바다굴)의 전문가인 11번 경매인에게서 가장 좋은 석화를 구해서 전혀 소금을 치지 않고 1년간 자연숙성시킨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 밥상에 올리는 음식 하나하나에 주인의 정성이 그득하다. 여수낙지는 힘이 세다. 오랜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몸을 이내 회복시켜 준다. 다 먹고 난 뒤 푹 익힌 낙지머리를 디저트 삼아 먹는데 입안에 씹히는 먹물 맛도 참 달콤하다. 아무래도 올 겨울 여수를 자주 찾아올 것 같다. 글 · 사진 정일근 시인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치·사극 명해설 성우 김종성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치·사극 명해설 성우 김종성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온다. 억압된 영혼이 자유로워져 순간적인 쾌감을 준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이른바 ‘천(天)의 목소리’라고 한다. 정확한 발음과 깔끔하고 박력있는 목소리로 오감을 자극해 카타르시스를 팍팍 선사한다. 또한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생생하게 전달, 정치극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격동 50년’(MBC라디오)을 18년째 진행해오면서 청취자들의 귀를 역사의 현장으로 쏘옥 빠뜨린다. ●‘천의 목소리´로 안방극장에 생생한 해설 전달 어디 이뿐이랴. 얼마전 끝난 인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비롯, 요즘 주말에 상영되는 ‘연개소문’(SBS-TV) 등의 대하사극과 오락 프로그램 ‘스펀지’(KBS-2TV)에서 감칠맛나는 해설로 우리의 오감을 흥미진진하게 건드린다. 특히 딱딱할 것 같은 웬만한 다큐멘터리와 교양 프로그램에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시청자들을 편안하게 끌어당긴다. 성우 김종성(63)씨. 주말 저녁이면 목소리로 늘 만날 수 있는 친숙한 아저씨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얼굴 없는 배우’ 가운데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성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64년에 데뷔, 올해로 42년째이자 나이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원로이지만 여전히 열정적인 활약으로 ‘성우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통한다. 지난 16일 오후, 가을의 끝자락을 아쉬워하듯 쓸쓸하게 낙엽이 흩날리는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김씨를 만났다. 처음에는 “해줄 말도 없는데다 얼굴 없는 배우가 얼굴을 내밀어선 무엇하느냐.”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김씨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동안(童顔)이었다. 소설가 조정래씨와 시인 박제천씨가 동국대 국문과 동기이고 탤런트 김무생씨와는 동갑이라는 점에서도 얼른 비교가 된다. 젊어진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욕심도 없고 술, 담배도 안 한다.”며 빙그레 웃을 뿐이다. 나이보다 젊어 황당했던 일도 당연히 있을 터. 주차장에서 50대 경비 아저씨한테 “젊은 사람이 왜 그래?”하는 식의 야단을 자주 듣는가 하면 한 살 아래인 부인과 동행할 때 누나 동생 사이로 오해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너무 젊게 보여 수염을 길렀더니 오히려 ‘젊음의 끼’로 여겨 낭패(?)를 당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어려서는 노숙했고 나이들어서는 젊게 보인다고 하니 얼마나 복받은 삶일까 부러워진다. 김씨의 본명은 김기호, 아명(兒名)이 ‘종성’이다. 성우로 데뷔할 때 ‘금(金)종소리’라는 뜻에서 ‘鍾聲’으로 쓴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김종성(金鍾聲)으로 쓰고 있다.‘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로 유명한 라디오 스타 김기덕씨가 친동생이다. “원래 성우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먹고 살기 위해 대학 다닐 때 방송대본을 쓰게 되면서 엉뚱하게 성우의 세계로 빠진 셈이지요.” ●동아방송 사태로 실직 아픔… 복덕방 운영도 가난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가문에 대한 강박관념과 살림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대학 3학년때 입주 아르바이트 등 여러가지를 했지만 신통치 않아 방송국을 노크했다. 당시 MBC 라디오 제작2부장이었던 김범석씨를 만나 방송대본을 건네자 “성우가 낫지 않겠느냐.”며 성우학원 등록을 권유받았다. 이때가 1963년 6월. 그래서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한국예술학원에 두달 동안 다녔다. 그해 10월 동아방송 성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 적잖은 고민을 했고, 결국 이듬해 4월 TBC가 개국하면서 성우시험 공채 1기에 합격했다. 이와 관련, 김범석씨는 “당시 한국예술원에서 성우강의를 했는데 김종성씨는 성우에 자질을 크게 보였다.”면서 “지금도 방송해설 분야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장르를 개척했고 또한 그 분야를 순수하게 잘 이끌어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성우의 길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초창기 TBC 시절, 구조조정 등으로 노사분규가 발생했고 함께 입사한 동료 15명 중 7명이 퇴사하는 아픔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난다. 부인은 당진 출신으로 TBC에서 2년,MBC에서 3년 성우생활을 하다가 1970년 결혼하면서 성우활동을 그만두었다. “동아방송 사태가 나자 실직했지요.1976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 잠실에서 3년동안 가나안 복덕방을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돈 되는 걸 도무지 맞추질 못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주위에서 ‘반대로만 하면 된다.’고 할 정도였지요.” 이때 MBC에서 ‘그림자’ 방송을 담당하는 PD한테 연락을 받고 다시 복귀했다. 아울러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동아방송에서 ‘정계야화’라는 정치드라마를 맡으면서 사실상 본격적인 성우생활이 시작된다. 하지만 신군부에 의해 방송국이 통합되면서 또 한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KBS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현재 극단 산울림대표의 임영웅씨가 만든 ‘인물 한국사’의 해설을 맡으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지금의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격동 50년’을 하게 된 것은 지난 1988년 4월1일에 시작된 ‘격동 30년’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해 김씨는 “배우 사정이나 시국 분위기 등으로 처음에는 두달만 하자고 한 것이 벌써 18년이나 됐다.”면서 ‘전설따라 삼천리’보다 더 오래 장수한 유일한 라디오 드라마가 됐다고 의미 부여를 했다. “소리나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요. 사전대로 하면 안 맞습니다. 대중들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언어와 억양을 구사해야 친숙해집니다. 물론 잘못된 대중언어는 골라내지요. 그게 제가 40년 넘게 성우생활을 해온 고집이기도 합니다.” ●“말이란 형식미가 아니라 자연미여야” 가끔 후배들을 만나면 “성우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자유롭게 리얼하게 표현하면 된다.”고 당부한다. 또 작품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올바른 배역과 해설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씨 자신도 드라마든 다큐프로이든 항상 대본부터 꼼꼼히 읽는 습관을 가졌다. 목소리가 원래 좋았느냐고 묻자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옥루몽’이며 ‘삼국지’를 읽는 모습을 자주 봤다.”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누나들이 갖다 준 ‘무정’ 등의 소설책을 많이 읽었다고 대답했다. 또 성우생활을 하면서 AFKN방송의 해설을 눈여겨보면서 미래의 호흡과 템포를 익혔다고 부연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언젠가는’ 할 때 대부분 한꺼번에 읽지만 ‘우리는/언젠가는’식으로 호흡의 길이를 나름대로 정했다.“말이란 형식미가 아니라 자연미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술, 담배 안한 것도 맑은 소리를 제대로 서비스하기 위해 결단했던 것.”이라며 웃는다. “물러나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짧게는 2년 후 그만두려고 합니다. 후배들이 한 600여명이 있지만 영상매체의 발달로 성우라는 직업이 사양길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무대를 개척해야지요. 지금까지 방송의 배려로 살았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매년 몇백대1로 성우 지망생은 늘고 있거든요.” 김씨는 이에 대비해 몇년 전부터 ‘오디오북’을 준비해오고 있다. 이미 ‘백범일지’‘고전12마당’‘단편문학50권’ 등을 녹음했다. 앞으로는 후배들과 함께 특수효과를 넣은 오디오북 1000권 제작을 목표로 이에 전념할 계획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나 후배 성우들도 품위있게 은퇴를 하려면 이러한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김씨는 ‘불멸의 이순신’을 끝내면서 시청자들이 주는 상을 받았다. 네티즌들은 카페를 만들어 김씨의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후계자는 없나요.” 등의 많은 애정과 안타까움을 표시한다.“글쎄요.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후배들이 돈을 벌 수 없다며 기피한다.”며 멋쩍게 웃는다. km@seoul.co.kr
  • 日 북동부 파고 40㎝ ‘리틀 쓰나미’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안동환기자|일본 북부 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북방4개섬(일본명 북방영토·러시아명 쿠릴열도)의 하나인 에토로후섬 동북부 390㎞ 부근 해상에서 15일 오후 8시15분께 리히터 규모 8.1의 강진이 발생했다. 지진 발생 지역은 지난 수십년간 규모 8급의 강진이 반복해서 일어나 홋카이도 연안에 최대 2m 안팎의 지진해일(쓰나미)이 있었다. 일본 기상청은 지진발생 10여분 뒤 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동부(최대 1m)와 오호츠크해 연안부(2m)에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북동부의 네무로시와 구시로초를 비롯한 연안지역 주민들에게 즉각 높은 지대로 피난할 것을 권고하거나 지시, 적어도 수만가구의 주민들이 긴급피난했다. 경보나 주의보 뒤 네무로시 등에서 최고 40㎝의 쓰나미가 관측된 데 이어 16일 0시를 넘어서도 쓰나미경보가 발령된 연안에서는 파고 1∼2m의 쓰나미가 예상된다고 기상청은 밝혔다. 이날 진앙지에서 1000㎞ 이상 떨어진 도쿄남부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나 오가사와라제도 등 일본열도 동부 태평양연안의 광범위한 지역에 50㎝의 쓰나미 주의보가 내려져 주민들이 피난할 정도였다. 기상청은 이날 밤 쓰나미 경보를 해제했지만 지역에 따라 쓰나미의 파고가 예상보다 높을 수 있다며 16일 오전까지 주의하라고 당부했다.한편 미국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는 이날 러시아에도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taein@seoul.co.kr
  • [사고] 서울신문 신춘문예 공모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가 한국 문학의 미래를 열어갈 참신한 문재(文才)를 찾습니다. 모집 분야는 단편소설·시·시조·희곡·문학평론·동화 등 6개부문 입니다. 문학을 향한 열정과 패기로 가득찬 예비 문인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바랍니다. ■ 모집 부문 및 상금 ●단편소설(80장안팎) 500만원 ●시(3편이상) 300만원 ●시조(3편이상) 200만원 ●희곡(90장안팎) 250만원 ●문학평론(70장안팎) 250만원 ●동화(30장안팎) 150만원 ※장 수는 200자 원고지 기준 ■ 마감 2006년 12월12일 화요일(당일 우편 도착분까지 유효) ■ 보내실 곳 100-745 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 25 서울신문사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 당선작 발표 2007년 1월1일자 서울신문 지면 ■ 응모 요령 -응모작은 기존에 어떤 형태로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같은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투고하거나 표절로 인정될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는 반드시 A4용지로 출력해 우송하십시오. 팩스나 이메일 원고는 받지 않습니다. -겉봉투에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붉은 글씨로 쓰고, 원고 끝에 이름(필명인 경우는 본명), 주소, 연락처(집·직장 전화, 휴대전화)를 적어주십시오.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문의 서울신문 문화부 (02)2000-9192∼6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웨딩드레스’의 인텔리 가수 한상일(1)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웨딩드레스’의 인텔리 가수 한상일(1)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가수 한상일(64)씨가 1970년 2월에 발표한 노래 ‘웨딩드레스’다. 당시 아리따웠던 신부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 이 노래는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 이희우 작사, 정풍송 작곡으로 발표되자마자 당시 ‘하와이안 웨딩 송’과 더불어 결혼축가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흔히들 ‘노래엔 임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노래는 ‘신사의 멋’이 물씬 풍기는 가수 한상일씨의 분위기에 제격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 노래 ‘웨딩드레스’는 작곡가 길옥윤씨와 정풍송씨에 의해 각각 발표된 노래다. 말하자면 똑같은 가사에 멜로디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노래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작곡가의 각기 다른 노래는 모두 한상일씨에 의해 취입된다. “1주일 정도의 차이로 같은 가사의 노래를 각각 다른 멜로디로 연습해야 했어요. 그리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반이 각각 나왔지요. 때문에 방송국 측에서는 신청엽서를 받으면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 애먹었고 저 역시 무대에서 ‘웨딩드레스’를 요청받으면 무대에 따라 두 곡을 번갈아 부르기도 했지요.” 한상일씨의 회고다. 현재 제주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애모의 노래’ ‘오 천사여’ 등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70년대 말 전공인 건설 분야로 방향을 선회,20여년간 가요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인물로 작년에는 ‘손석우 노래 55주년 헌정음반’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등을 발표, 예전 그 음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1942년 1월18일, 개성에서 부친 한효경씨와 모친 진은주씨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개성 만월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 와 인천 서림초등학교, 인천중을 거쳐 서울 중동고를 졸업했다. 중2 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인천의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신문배달 등으로 고학했다. 어릴 때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진로를 바꿔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한다.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공부 잘하는 우등생인 동시에 노래 잘하는 재주꾼으로 통했던 그는 특히 대학시절, 마리오 란자, 앤디 윌리엄스, 프랭크 시내트라 등에 심취해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65년 대학 졸업 후 은사가 설립한 ‘김희춘 설계사무소’에 입사,1년여 동안 전공을 따라 설계기사로 일했지만 결국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 일을 접고 미8군 장교클럽인 ‘유썸클럽(Yusumclub)’에서 전속가수, 즉 하우스 싱어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팝송악보’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스탠더드 팝을 무려 300여 곡 정도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갖출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66년, 칸초네 ‘Carissimo Pinocchio(피노키오의 편지)’를 불러 KBS-TV 전속가수 1기생으로 발탁,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 등장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본명 ‘한제상(韓濟祥)’. 그러나 67년 데뷔곡 ‘내 마음의 왈츠’를 취입하며 ‘한상일(韓常一)’로 바꾼다. 이 이름은 작곡가 손석우씨가 지어준 것으로 ‘늘 어디서든 일등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면테스트까지 거친 TV 전속가수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노래는 물론 율동까지 소화해내야 했어요. 그러나 어린 시절 골수암으로 인해 오른쪽 발목을 잘라낼 위기까지 넘겼던 터라 다리가 불편해 무대에서의 율동을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지요.” 때문에 방송국 측 입장에서는 한편 난감했을 것이라 회고하는 그는 대신 ‘밤으로의 초대’ ‘장미의 화원‘같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 더욱 주력한다.(계속) sachilo@empal.com
  • 귀하신몸에 잘도 속더라

    귀하신몸에 잘도 속더라

    「세상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려고」 검사시보 행세를 하던 한 청년이 가짜 행각 9개월만에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 중학 2년 중퇴의 학력으로 사법대학원생을 사칭, 「배지」와 학생증을 사들인 이 가짜 검사시보는 서울시내 변호사들과 다방 「마담」경찰관들이 모두 『내 사기극에 잘도 속더라』면서 대견(?)해 했다. 3월 2일 서울 용산경찰서 남영동파출소에는 검은 「싱글」에 굵다란 「로이드」테 안경을 낀 20대 청년 한명이 파출소 하문수(河文洙)소장을 점잖게 찾았다. 이 청년이 河소장에게 내놓은 명함에는 「검사시보 손지열(孫智烈)」로 되어 있었다. 이 검사시보는 자신을 河소장에게 소개하고는 『창피한 일이지만 고향에 내려갈 차비 좀 부탁한다』고 귀띔했다. 河소장이 이를 거절하자 이 가짜 검사시보는 대뜸 『당신 비위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면서 공갈하더라는 것. 이때 관내 파출소순시를 위해 파출소에 나왔던 용산서 형사과 김장생(金長生)경위는 孫의 태도나 언동이 어딘가 서투른데 의심을 품고 일단 불심검문을 해봈다. 김경위는 첫마디에 이 검사시보가 가짜 임을 알아냈다. 孫의 본명은 박선균(朴先均)(24)·(서대문구 현저동 46). 그러나 김경위도 처음엔 朴의 공갈에 움찔했단다. 본명 이외에도 3가지의 이름을 사용해 온 朴은 불심검문하는 김경위에게 오히려 호통을 쳤다. 朴은 용산서로 연행된 뒤에도 형사과장을 데려오라고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큰소리 칠 정도로 대담했다. 朴이 사기행각을 하기 시작한것은 지난 해 영화 『소문난 잔치』를 보고나서부터. 그 영화의 주인공이 자기 처지와 비슷한데서 이 세상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려고 한것이 가짜 검사시보였다는 것. 朴은 경찰관이나 변호사들이 검사시보라면 곧 검사가 될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알고 가짜 검사시보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朴의 가짜 검사시보 행각을 위한 준비는 치밀했다. 사법대학원생 「배지」를 사들인 朴은 어느 술집에서 누가 술 값으로 맡겨 놓은 사법대학원생의 학생증을 술값 1천원을 갚고 찾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변조. 그 다음엔 헌 책방에 가서 민사소송법 한권, 「고시계」(69년 2월호)한권, 대법원 판례속보등을 샀다. 朴은 틈틈이 이 책들을 읽어 법률상식을 익히는 한편 사기행각의 「액세서리」로 들고 다니기도 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는 날 朴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속일 기회를 찾았다. 朴이 나타난 곳은 D극장 전무실. 처음엔 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 극장사무실에 들어간 朴은 사기극 연출을 무난히 할수 있었다. 『저는 이번 고시에 합격한 최연소자입니다』「텔레비전」에도 나갔다고 그럴 듯하게 늘어놨다. 집표주임 박종대(朴鐘大)씨(46)는 朴의 수작에 완전히 넘어갔다. 어린 나이에 참 칭찬할만한 일이라고 했다. 이 뒤로 이 장래가 촉망되는(?) 朴에게 D극장은 무상출입처가 됐다. 모다방 마담에게는 68년도 사법고시합격자중 최연소자라고 자칭, 정부가 자기에게 「코로나」 한대를 기증했는데 자기에게는 이 「코로나」가 필요없으니 45만원에 사라고 흥정, 계약금조로 25만원을 긁어냈다. 朴은 또 서울시내 유명한 변호사들까지 등쳐 먹을 정도로 지능적이었다. 朴의 사기술에 걸려든 변호사들도 박에게 용돈이나 하라고 2~3천원씩 대주었다는 것. 『사법대학원생이라면 사람들이 모두들 쩔쩔 매더군요』朴은 멀쩡한 눈을 고시파 학생으로 속이기 위해 싸구려 안경으로 변장했다. 朴은 관공서에 들어가선 사무원을 상대도 안했단다. 주로 과장이나 국장만을 골라 법률책만 끼고 그럴듯한 말만 하면 모두 속아 넘어가더라고 털어놓았다. 지난 2월 모극장 전무는 朴이 금년도에 사법대학원을 졸업, 검사로 발령받게 된다는 말에 졸업식장으로 달려가는 「쇼」도 벌였단다. 朴은 경찰심문에도 『내가 어찌 말단 형사에게 조서를 받겠느냐』면서 서울시내 판검사들은 거의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곧 나오게 된다고 문초형사를 을러댔다. 朴은 학력을 모대학 법과를 나와 68연도에 고시 예비고사에 합격, 사법고시 1차까지 합격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기및 관명사칭혐의로 구속된 朴은 식모살이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겨우 중학 2년밖에 못다닌 불우한 청년임이 밝혀졌다. 경찰조사에서 나타난 朴의 행각은 주로 극장등 유흥가와 관공서, 일선 파출소만을 골라 한두차례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눈 다음 어느 정도 얼굴이 익혀지면 부정을 눈감아 준다는 등 공갈을 하면서 2~3천원씩 뜯었다는 것이다. 朴이 잡히던 날도 이 재미로 또다시 나타났다가 쇠고랑을 차게된 것이다. 경찰이 朴을 유치장에 넣으려 하자 朴은 또 기세 좋게도 판사의 구속영장을 보여 주기전엔 유치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티었다. 김계장이 영장을 보여주자 그때서야 누그러진 朴은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가면서-『사기한 나도 잘못이지만 내 엉터리 사기극에 쩔쩔매던 관리들도 형편없는 친구더라』고 내뱉었다. [선데이서울 70년 3월 15일호 제3권 11호 통권 제 76호]
  • [책꽂이]

    ●인디아 코드 22(김봉훈 지음, 해냄 펴냄) 인도의 기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1868년 잠셋지 타타가 설립한 타타 그룹이다. 인도 북동부 자르카트 주에 있는 잠셋푸르에는 타타 그룹 100주년 기념관이 있어 그 역사를 엿보게 한다. 타타 그룹은 인도의 인재를 만드는 산실이다. 불가촉천민으로 처음 대통령 자리에 오른 코체릴 라만 나르야난 전 대통령도 ‘타타 장학생’이었다. 민간기업으로는 특이하게 그 첫 번째 윤리강령으로 ‘국가이익’을 내세우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포스코경영연구소 인도전문 연구위원인 저자가 세계경제의 뉴 아이콘으로 떠오른 인도를 소개한 책.1만원.●중국 처세의 성인 증국번의 인생조종법(증도 지음, 지세화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지도자이자 서유럽으로부터 근대기술을 도입해 청나라의 자강(自强)을 시도한 양무운동의 추진자 증국번. 마오쩌둥은 “근대의 사람 중 오로지 증국번에게만 탄복할 뿐이다.”라고 칭송했고, 마오쩌둥의 라이벌 장개석은 증국번의 문집과 유작집을 읽고 난 뒤 “각고에 찬 마음과 강한 의지력은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며 그의 언행을 책으로 엮어 황포군관학교의 교재로 썼다. 후세 사람들은 증국번을 ‘완인(完人)’, 즉 완전한 사람이라 불렀다. 증국번의 ‘나를 다스리는 법´이 담긴 인생교본.1만 3000원.●김산 평전(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평북 용천 태생인 비운의 독립투사 김산(본명 장지락) 전기. 김산은 상해로 가 안창호·이광수 밑에서 ‘독립신문’ 식자공으로 일했으며 테러리스트 오성륜과 약산 김원봉, 유자명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가 됐다. 공산주의를 조국 독립의 방편으로 삼은 그는 비범한 이론가이자 조직가, 선동가였으며 시인, 소설가, 번역가의 면모도 보여줬다.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에서 님 웨일스(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를 만나 자신의 투쟁과 조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증언을 한 김산은 일제 첩자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당했다.1983년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를 복권시켰다.1만 5000원.●스위스 예술기행(이수영 지음, 시공아트 펴냄) 새로운 현대미술의 메카로 떠오른 스위스 문화탐방기. 스위스는 근·현대 미술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바스티옹 광장과 생피에르 성당 그리고 풍경화가 호들러로 유명한 문화도시 제네바. 포도밭과 레만호수가 정겨운 로잔의 에르미타주재단 미술관, 정신병자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목조건물의 아르브뤼 미술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폴 클레 미술관 등 풍성한 볼거리를 소개한다.1만 5000원.●실록 열국지(좌구명·사마광·사마천 지음, 신동준 엮어옮김, 살림 펴냄)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 이 시대는 제자백가가 출현해 난세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 학문과 사상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의 연수(淵藪)가 된 공자와 맹자, 순자, 한비자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활약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3대 역사서 ‘춘추좌전’‘자치통감’‘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를 편년체 방식으로 되살렸다. 전3권 각권 2만 3000원.
  • 탤런트 이찬·이민영 12월 웨딩마치

    탤런트 이민영(사진 오른쪽·30)이 동갑내기 연기자 이찬(왼쪽)과 결혼한다.KBS2TV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 함께 출연하며 2월부터 교제해온 이들은 12월10일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에서 백년가약을 맺는다.1999년 MBC 드라마 ‘하나뿐인 당신’을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은 “친구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사랑을 이어가겠다.”고 결혼 소감을 전했다.이민영은 현재 이찬(본명 곽현식)의 아버지인 곽영범 PD가 연출하는 SBS 주말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출연 중이며, 이찬은 20일 첫 방송되는 SBS 월화드라마 ‘눈꽃’에 캐스팅됐다.
  • [책꽂이]

    ●석초시집(신석초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충남 서천 태생인 신석초(본명 신응식)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에 가입했으나 카프의 도식주의적 창작방법에 실망, 박영희의 전향선언과 때를 같이해 탈퇴한다. 그후 이육사와 알게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다. 그의 첫 시집 ‘석초시집’을 60년 만에 복간했다.‘비취단장’‘규녀(閨女)’‘가야금별장(別章)’‘사비수(泗水)’‘낙와(落瓦)의 부(賦)’ 등의 시가 실렸다.9000원.●36인의 아틀라스(샘 본 지음, 노진선 옮김, 황금부엉이 펴냄) 유대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이 세계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의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36인의 감추어진 의인들이 있다. 그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다른 인간들을 위해 선행을 베푼다. 그들의 선행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은 종교스릴러. 유대교의 신비주의 종파인 하시디즘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을 엿볼 수 있다. 아틀라스는 그리스 신화의 거인신으로, 호메로스의 작품에선 하늘과 땅 사이를 받치는 기둥을 버티고 있는 존재로 나온다.1만 2000원.●닐스의 신기한 여행(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배인섭 옮김, 오즈북스 펴냄) 1909년 여성 최초이자 스웨덴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자의 성장소설. 스웨덴 남부 스코네에 살고 있는 열네 살의 심술궂은 소년이 엄지손가락만큼 작아져 거위 등을 타고 기러기들과 함께 스웨덴 전역을 여행, 온갖 모험과 견문을 쌓으며 어진 마음을 지닌 소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스웨덴의 20크로나짜리 화폐에는 저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한 판타지 문학의 고전. 전3권 각권 9000원.●루시퍼의 눈물(마이클 코디 지음, 공보경 옮김, 노블마인 펴냄) ‘신의 유전자’ ‘크라임 제로’ 등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상상력을 버무린 지적 스릴러로 주목받는 작가의 장편소설. 종교지도자들과 과학자들이 광컴퓨터로 죽은 이의 영혼을 추적해 사후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루시퍼는 꼭 사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빛을 가져오는 자’를 뜻한다. 악마 루시퍼를 그동안 종교계에서 해석해온 것과 달리 인간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로 설정해 눈길을 끈다. 전2권 8800원.
  • 천성산 터널공사 업무 방해 혐의 지율스님 징역6월·집유2년 선고

    울산지법 형사3부는 1일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 현장에서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내원사 소속 지율(知律·48·본명 조경숙) 스님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날 재판은 피고인인 지율 스님이 출석하지 않아 불출석 재판으로 진행됐다.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범행기간·횟수·피해정도·범죄후 정황 등에 비추어 책임이 가볍다고 볼 수 없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개인 이익을 위한 범행이 아닌데다 초범인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밝혔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학사꿈 이룬 윤정희(尹靜姬)

    학사꿈 이룬 윤정희(尹靜姬)

    문학사(文學士) 윤정희(尹靜姬). 2월 27일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 문리과 대학(文理科大學) 사학과(史學科)를 졸업한 스타 윤정희양 (본명 손미자(孫美子))은 꽃다발과 졸업장을 안은채 어머니 朴「헤레나」 여사의 품에 안겨들었다. 『저의 두번째 소망이 이뤄졌어요』 떨리듯 감회서린 목소리가 尹양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까만 「가운」에 학사모를 쓴 윤정희(尹靜姬)양 모습은 이 날 따라 유달리 예뻐 보였다. 수많은 졸업생 속에서 유달리 환하게 돋보이는 얼굴. 화장기가 거의 없는대로 청초하고 맑은 자태가 과연 「스타」 다 싶다. 이런 차림은 尹양이 몇번인가 「스크린」 속의 꿈이 현실로 옮겨진 실증일까? 영화속에서 미리 해둔 예행연습 때문인지 윤양의 차림새나 동작은 조금도 어색치 않아서 좋았다. 뿐만 아니다. 윤양은 같은 과의 졸업생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스타」라는 선입관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다. 이것은 이름만 걸어놓고 졸업장이나 받으러 가는 다른 배우학생들의 경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겹치기 출연에 바쁜 윤정희(尹靜姬)가 어느 틈에 학교생활에 익숙할 겨를이 있었던가? 그녀는 말했다. 『촬영도중에라도 필요한 강의는 꼭 들었어요. 시험도 빼지 않고 다 치뤘고. 학점은 다 땄지만 성적은 시원치 않다나요』 「노트」 필기는 주로 「클라스·메이트」朴모양과 金모양의 협조를 받았다는 얘기. 전남여고(全南女高)를 나온 윤정희(尹靜姬)는 68년 우석대(友石大)3학년에 편입학했다. 여고를 나온 뒤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영문과(英文科)에 입학했지만 가정사정으로 중퇴(中退). 그때만 해도 『까만「가운」에 학사모를 쓰는게 가장 정실한 소망이었어요』 이 「가장 절실한 소망」이 두번째의 소망으로 후퇴한 것은 3년전 그녀가 「스타돔」 에의 발돋움을 시작하면서다. 윤양은 66년 합동(合同)영화사가 실시한 신인배우 현상모집에서 유일의 당선자로 뽑혔고 「데뷔」작 『청춘극장(靑春劇場)』은 67년 신정 「프로」에서 20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 뒤 전속사와의 의견대립으로 윤양은 5,6개월간 작품을 못 잡고 당황하던 때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 나온 문희(文姬), 남정임(南貞姙), 고은아(高銀兒) 세 신인 「스타」의 인기가 날로 충천하고 있을 무렵. 어떻게 보면 윤정희(尹靜姬)가 발을 들여놓을 여지가 없을 것 같은 형편이었다. 「스타」가 될 것이냐, 못될 것이냐, 이런 고민을 뚫고 불과 2년만에 윤정희(尹靜姬)는 정상의 「스타」가 됐다. 「톱·스타」가 된다는 가장 큰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제2단계의 소망인 학사모를 마침내 쓰게 된 것. 차곡차곡 뜻을 이뤄 나가는 알토란 같은 아가씨다. 얼마전 각 신문은 윤정희(尹靜姬)혼자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대학원(大學院)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학교 당국자는 윤정희(尹靜姬)의 입학이 「보아줘서」가 아니고 당당한 실력대결이었다고 보장했다. 『특히 영어성적이 퍽 좋았다』는 것. 전남여고(全南女高)의 우등생이었다는 그녀는 『여고때의 기초가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이날의 졸업식에는 윤정희(尹靜姬)의 다섯 동생, 3男2女가 모두 모여 윤정희(尹靜姬) 6남매(男妹)의 우애를 자랑했다. 큰 동생 미애(美愛)양은 올해 숙대(淑大) 음악과를 졸업했고 21세짜리 남동생은 경기고(京機高)를 나와 서울大에 입학했다. 세째 동생(19)은 중앙고교(中央高校)에, 네째 동생(13)은 배문중(培文中)에, 그리고 막내동생(7)은 경희(慶熙)국민학교에 입학. 이들의 학비만도 月10여만원. 어머니 박여사가 이를 위해 통닭집 「姬의집」 을 경영하고 있지만 대부분 맏딸인 윤정희(尹靜姬)양의 수입이 원천을 이룬다. 윤양의 세번째 소망은 『동생들이 모두 훌륭하게 되는 것』이라고. [선데이서울 70년 3월 8일호 제3권 10호 통권 제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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