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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시장경제체제 전환」의 신호/「공장사유화 허용」배경과 의미

    ◎「토지 국가소유」포기 이은 획기적 조치/사회주의「원칙」 부정… 이념논쟁 따를듯 소련 최고회의는 6일 소규모 공장등 생산수단의 개인소유와 이를 기초로 설립된 개인 기업체가 임금노동자를 고용할수 있도록 한 소유권법안을 채택함으로써 지금까지 사회주의 경제의 근간이 돼온 중요한 두가지 원칙을 포기했다. 최고회의의 이번 결정사항이 법률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아직 인민대표회의의 최종 의결절차를 남겨두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법안내용이 바뀔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의 가장 큰 명분은 토지와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갖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토지와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로 이어졌다. 소연방 헌법 제11조와 12조는 토지ㆍ지하자원ㆍ삼림과 건설ㆍ농업ㆍ운송ㆍ통신 등의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독점 소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토지및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는 임금노동의 고용금지와 함께 소련경제의 근간을 이루어온 원칙이었다. 소련 최고회의가 지난달 28일 토지를 개인에게 영구임대하는 형식으로토지 국가소유제 포기를 결정한 데 이어 이번에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까지를 허용함으로써 소련국민들은 이제 국가로 부터 영구임대된 토지에다 개인소유의 기업체ㆍ농장 등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86년 제27차 당대회 이후 추진돼온 소련 경제개혁정책의 핵심 중 하나는 개인의 경제활동 영역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소정부는 그동안 부분적이나마 국가재산을 개인에게 임대해 주고 농업ㆍ서비스 등의 소규모 생산단위에 가족단위의 개인기업을 허용해왔다. 86년 11월에는 개인노동법이 제정돼 가족단위의 개인생산 활동을 제도화 시켰고,88년 5월에는 코페라티브(협동조합)법을 제정,그동안 국가가 통제해오던 협동조합의 경영권을 실질적으로 개인에게 넘겨주었다. 이에따라 수리업ㆍ소비재생산ㆍ식당 등 소규모 협동조합식 기업체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개인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지하경제식 개인업체도 크게 늘어났다. 이번 소유권법안에서 임금 노동자의 고용이 허용됨으로써 앞으로 대규모 전국단위 생산업체의 경영에도 개인의 참여가보장되게 됐다. 이는 소련경제 개혁의 핵심과제인 시장경제 체제로의 이행에 큰 걸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번 법안이 「이념」면에서 갖는 의미는 보다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인의 생산수단 소유와 임금 노동자 고용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이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 혁명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소외」와 「착취」개념은 바로 자본가의 생산수단 사유화와 임금노동자를 통한 잉여가치의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가 존재하는 한 혁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찬반토론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법안상정 당시 원안에 들어있던 「개인이 소유재산을 타인에 대한 착취목적으로 악용할 경우 제재를 가한다」는 단서조항을 포함시키는 선에서 조정이 된 듯하나 앞으로 이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계속 논쟁거리로 남게 될것으로 보인다. 이 법안과 상충되는 연방헌법 11,12조 등의 개정문제도 앞으로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번 법안의 취지는 통신망ㆍ정보ㆍ에너지 및 방위부문 등 국가기간산업만 국가소유로 두고 그 외에는 과감하게 개인에게 넘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빚어질 이념면에서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 민자당의 개혁지수/임춘웅 국제부장(서울칼럼)

    국회가 열리고 있다. 국회는 언제나 중요한 것이지만 이번 국회는 몇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1백48회 임시국회는 3당통합 이후 처음 열리는 국회다.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으로 양분된 정국이 과연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가 궁금한 일이다. 이번 국회는 새로운 정국의 운영 패턴을 보여줄 것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거대여당이 주도하는 국회가 무슨 일을 해낼 것인가가 초점이다. 문자 그대로 거대여당인 민자당은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헌법개정에서부터 모든 법률을 개ㆍ폐할 수 있고 어떤 법이라도 새로 만들 수 있다. 민자당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잘된 공로도 스스로 차지하게 됐지만 잘못되는 책임도 홀로 져야 하는 외로운 입장이다. 국민들은 지금 민자당이 그 거대한 힘을 어디에 쓰게 될 것인가에 큰 관심을 갖고있다. 그 힘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잘 쓰일 경우 이 나라의 역사발전에 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잘못 쓰일 때는 아주파괴적일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권당의 거대화가 제6공화국의 개혁의지를 가속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지연시킬 것인지의 상관관계이다. 지난 26일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은 국회에서의 대표연설을 통해 『비민주적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심도있게 부단히 실행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민자당의 지도적 인사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혁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3당통합이 6공의 개혁의지를 희석시킬 소지가 있는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3당통합이 풍기는 어떤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힘이 커지게 되면 자연 안이해지는 것도 사람의 속성이다. 6공의 정통성은 뭐니뭐니해도 개혁에 있다. 「6ㆍ29」라는 의식의 대전환을 통한 자기개혁이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동안 난산에 난산을 거듭하던 토지공개념 관계법이 1일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국회의 일부에서는 시행도 해보기 전에 벌써부터 일부세율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개정작업을 운위하고 있다. 세율은 그대도 두되 과표 계급을 조정하여 세부담을 줄이는 방법도 검토되고 있다. 토지초과이득세법의 경우 오는 8월쯤 발표될 전국의 공시지가에 따라 세율의 실제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내년 1월 시행을 목표로 추진되는 금융실명제도 흔들리고 있다. 이유야 많겠지만 조순부총리의 28일 회견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내년 실시는 어려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번 국회에서 개정될 국가보안법과 안전기획부법도 개정 내용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보안법을 심의하고 있는 민자당의 공안관계법 심사소위에서는 반국가단체범위 문제와 고무찬양의 한계를 두고 민주계와 민정ㆍ공화계간에 이견이 심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공안관계법이 적용범위 규정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화창한 봄날 무거운 겨울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감각이 뒤떨어져 있다. 우리의 북방정책,나아가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역사의 흐름에 맞춰 개정되고 보완돼야 할 성질의 것이다. 어떤 사람은 토지공개념 도입을 헌법 위반이라 하고 어떤 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어기는 일이라 강변한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자본주의는 약육강식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공평한 자유경쟁을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자본주의는 선거제도를 통해 끊임없이 견제되고 스스로 자제하는 속에서 발전해왔다. 학자에 따라서는 현대자본주의의 특징을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돈은 본질적으로 축재의 성향을 갖고 있지만 그 과정이 도덕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절제와 윤리적 기초가 없으면 자본주의도 자본가도 흔들리게 된다.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보수」라는 것도 그렇다. 과연 우리에게 보수할 것이 있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당장 6공도 「5공청산」에서부터 시작됐다. 찢기고 훼손된 헌정사에서 무엇을 지키는가. 보수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유민주주의,그것뿐이다. 우리가 진실로 보수해야 될 것은 민자당이 이제부터 쌓아가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작업,경제적 민주화작업을 통해서이다. 3당이 통합된 후 각종 여론조사는 통합이 잘된 일이라는 쪽에 보다많은 점수를 주고 있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것을 보면 조사대상의 49%가 잘한 일로,38%는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다른 조사들도 대충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역당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4당체제로는 안되겠다는 각성이,정국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국민 심리가 잘 반영돼 있다. 그러나 3당통합이 진실로 잘 됐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민자당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거대한 민자당의 힘이 개혁과 발전으로 이어지면 통합은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고 일부 기득권층의 방파제 역할이나 하게 되면 실패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헌정사는 여당이 작을 때보다 지나치게 커졌을 때 정치적 위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ㆍ19」가 있었던 4대 국회 때 자유당이 그러했고 극심한 정치적 혼란 끝에 「10ㆍ26」으로 이어진 70년대말 10대 국회에서의 여당 의석수가 그러했다. 지금 국민들은 민자당이 우리의 역사 속에 빛나는 족적을 남겨주기를 기원하고 있다.
  • 벼랑에선 공산주의/변혁물결 집중탐구:4ㆍ끝

    ◎“역사발전에 비약이란 없다” 교훈 일깨워/노동윤리 타락이 공산사회 붕괴 부채질/자본축적 안된 체제의 「성장한계」 드러내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은 중세의 종교개혁과도 같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소련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혁과 개방) 정책을 기점으로 해서 시작되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주의권의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는 그렇게 단순하게 출발된 것이 아니다. ○비정상혁명의 소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련은 1917년 10월혁명의 성공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은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이나 공황,실업과 같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이 아니었고 오히려 러시아제국의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반봉건적 상태와 서구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의 경제적 지배와 정치적 간섭이 증대되어지는 반식민지적 상태속에서 이루어진 탈봉건ㆍ탈식민지적 혁명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당시 재정러시아의 반봉건적이고 반식민지적 사회구조속에서 만연되어 있던 부정ㆍ부패ㆍ비리ㆍ빈부격차ㆍ착취ㆍ억압 등과 같은 사회변혁의 절대적 조건들이 성숙되어 있었을때 사회주의적 이념과 이상을 가진 볼셰비키당원들이 사회주의적 제도혁명으로 전환시켜 버린 비정상적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환언하면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해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주의적 사회를 혁명적으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주의적 혁명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는 오늘날 소련사회주의권의 변혁배경을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회주의혁명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오늘날 세계 양대강국중의 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제도와 체제의 도입 때문에 얻어진 결실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사회주의혁명의 결과오늘날의 소련은 혁명전 국민들 대다수의 문맹상태를 완전히 탈피한 문명국가가 되었고 모든 국민들에게 의료비와 교육비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실직자들까지도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지국가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만 가지고는 오늘날의 소련이 사회주의적 물적토대를 완성해 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소련사회주의가 선진 자본주의보다도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중요한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기술수준이나 생산력 발전수준ㆍ생활수준ㆍ사회보장수준ㆍ사회환경 보전수준 등이 소련을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 국내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어서 체제적 우월성을 입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에 와서는 소련경제는 성장이 둔화ㆍ정체되었으며 경제발전에 대한 제동현상까지 나타나서 경제가 침체상태에 빠져 버려 있는 실정이었다. 생산효율이 떨어지고 제품의 질이 하락하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지연되고 있었으며 고도의 기술과 첨단기술의 개발이정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에 따라서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서 소비한다는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적용할 만큼의 사회적 생산력 발전수준이나 의식수준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적용하게 된 결과,생산에 투입된 노동에 있어서도 능력만큼 노동을 하지 않고 소비만은 필요한 만큼을 요구하게 되는 타락한 비사회주의적 노동윤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윤리가 만연된 상황하에서는 노동생산성은 저하되기 마련이며 필연적으로 경제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솔선해서 일하며 노동의욕이 고조되고 노동생산성이 제고되어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월등하게 높은 경제성장과 발전이 가능하게 된다는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노동윤리의 타락현상(비사회주의적 노동윤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노동의욕 자극방책을 도입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이러한 방책들 때문에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에 물들게 되어 사회주의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사회의식의 타락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알코올중독ㆍ마약중독ㆍ범죄증가ㆍ저속한 취미와 향락풍조ㆍ노동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기생충적 태도 등이 만연되었고 관리들의 뇌물수수ㆍ부정ㆍ부패 등이 보편화되는 위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 80년대 초까지의 소련 사회와 경제였던 것이다. ○동구의 공통적 현상 이러한 소련 사회주의권의 위기적 상황을 혁명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의 목적은 기술의 진보와 경제의 효율성 증대를 촉진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 경제구조를 전환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적 요소를 활성화해서 사회주의 사회의 도덕적ㆍ심리적 의식을 혁신하겠다는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정책은 생산력 발전수준이 저급한 단계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된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2차대전후 자체 혁명도 거치지 않고 소련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들에 있어서는 물적 토대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건설의 주체세력까지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 유지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체제변혁까지도 요구하고 나오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부분이 자체혁명을 거치지 않은 나라들이라는 것에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명적 변혁과정속에서 한국 경제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될 것인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혁명적 변혁과정에서 우리가 역사발전의 비약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한 것처럼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있어서도 결코 비약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인식해야 될 것이다.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서이건 강압에 의해서이건 간에 물질적 생산력 발전에 근거하지 않고 이루어진 사회체제는 자본주의체제든 사회주의체제든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적 성립 발전과정도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성립 발전과정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내재적인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함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탄생된 정상적인 자본주의 성립 발전과정이 아닌 것이다. 전통적 사회의 폐쇄성이 깨어지면서 자본주의화의 물결이 강압적으로 밀어닥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한 자본주의적 피지배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191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화를 위한 기초적 조건인 본원적 축적과정을 일본에게 찬탈당했다. ○의존관계 극복단계 그 결과 근대적 자본주의 성립의 선행조건이 결여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가 끝난 1945년이후의 한국경제는 다시 미국에 의해서 자본주의체제로의 강제적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자본주의적 발전의 선행조건인 자본축적이 결여된 상태에서 자본주의체제로의 강제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자본유입을 초래하게되었고 그것은 결국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와 미국경제에 대한 의존관계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조건들은 1960년대와 70년대,80년대의 기적적인 경제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무역수지의 흑자발생,외채감소,국제경쟁력을 갖춘 거대기업들의 등장 등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로 극복되어지고 있는 과정에 놓여있지만 아직도 미국의 한국시장개방압력을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노동조합의 건전한 육성조차도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실정이어서 오늘의 한국경제는 종속으로부터의 탈출이냐,아니면 종속의 심화냐라는 갈림길에서 서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경제는 일제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경제의 경제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자본주의의 자본축적과정의 변화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경제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양적인 지표만을 가지고 현상적으로만 이해해 왔던 것이다. 한국경제를 양적인 지표로만 보면 1인당국민총생산액이 4천달러를 넘어섰고 무역고가 1천억달러를 넘어섰으며 무역수지흑자가 발생하면서부터 외채잔고가 감소하여 외채문제가 해결되고 있기 때문에 전후에 가장 성공한 제3세계 자본주의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은 곧 생산력발전이라는 물적토대 없이도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동구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축적 없이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정에는 절대로 비약이 있을 수 없다. 발전의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발전을 추구하게 되면 항상 폭력과 억압,그리고 강제가 따르기 마련이며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혁과정에서 보았듯이 유혈적인 투쟁이 발발하게 되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불가능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파탄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제문제를 발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경제의 자주적 재생산구조를 갖추기 위한 일대변혁이 일어나야 될 것이며지금까지 지배적 자본주의 국가들(미국과 일본)의 발전단계에 따라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거절할 수 없었던 전반적인 경제구조를 개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구조개편이 결코 사회주의적 경제구조로의 강제적 개편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동구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한국경제의 물적 토대가 아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조차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어떻게 무역수지흑자와 개선된 국제적 신용도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자체기술을 개발하고 국제경쟁력을 제고하여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만 될 것이다. 역사발전 과정에는 영원한 종속관계도 영원한 지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역사발전의 주체적 역량들이 주어진 조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변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서 종속이 될 수도 있고 지배가 될 수도 있는것이다. 한국경제의 장래도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변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서 종속경제의 심화도 될 수 있고 자주자립 경제의 구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약력 박영호 ■고려대학교ㆍ대학원 경제학과 졸 ■서독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박사 ■저서=▲한국경제론 ■논문=▲한국의 식민지 자본주의화 과정에 관한 연구등
  • 소「민주사회주의 새 깃발」 올리다/고르바초프「도박」의 의미와 전망

    ◎정치개혁과 경제발전 연계 포석/재야흡수,온건진보정당 결성 가능성도/서유럽서 극동까지 대폭 군비축소 시도 1백40년 전에 카를 마르크스가 근로대중의 자기임금 되찾기 운동으로 제시한 공산주의 이념은 그로부터 70년후 소련땅에 현실로 적용됐다. 그런데 누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의해 분배받는 공산주의 이념이 소련땅에 적용된지 정확히 73년이 지난 1990년,올해의 벽두에 그만 공산주의의 깃발을 내리게 됐다. 소련은 소수 민족자치령을 국가체제로 연합하면서 유럽국가중 후발대 국가로 형성된 제정러시아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됐다. 국민의 9할 이상이 저소득계층으로 구성된 농경사회였던 제정 러시아를 1917년 소수파인 볼셰비키가 과격 공산혁명으로 무너뜨렸다. 그후 토지 자본국가공영제,중앙계획경제와 통제배급제를 실시하고 서방세계와는 중공업위주의 군수산업으로 군비경쟁을 하면서 냉전구도를 이룩해 왔다. 레닌이 심장ㆍ뇌졸질환으로 조기에 사망하자 오히려 극단적 소수파로서 민주사회주의를 건국하려던 도덕성에서 정반대의 궤를그린 사회주의 파시즘을 만들었다. 마르크스가 역사발전의 맥락에서 가설적으로 제시한 근로자의 기대임금과 실질임금의 차액을 소수 자본가가 착취함으로써 빈부격차가 극대화된 자본주의가 성숙된 사회에 공산혁명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 논리는 소련에서는 해당될수 없는 그 당시 상황이었다. 즉,극소수 상업가ㆍ지주 외에는 성숙된 자본주의사회의 지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산계층이나 활발한 상업활동이 소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정체된 후진사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신축적인 경제활성화와 생필품위주의 산업발전 대신에 군수산업 위주의 중공업 육성에 정책선택의 최우선권을 부여했다. 스탈린의 명령없이는 전 사회가 움직이지 않았으며 하부구조 구성원의 창의성은 본질적으로 봉쇄됐다. 이와같은 자기모순의 공포사회가 스탈린 이후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공산당 서기장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말하자면 성숙된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었던 후진국 러시아의 풍토속에서 다원적 공산주의 이상은 스탈린 이후의전체주의 지배자들에 의해 침묵과 복종만을 강조하는 관료적 동원체제를 구사해온 것이 핸재의 소련사회이다. 현재의 소련사회는 순발력없는 저능 거인이며 실질적 파산선고를 내린 회사와 같다. 중지한 부실기업이며 저능거인은 기초운동과 기초이론 학습부터 시작하여 거듭 태어나야 하고,부실파산회사는 처음부터 새로운 경영진에 의해 구조적으로 재조직ㆍ관리돼야 한다. 바로 여기서 개혁,재조직(Perestroika)과 만인에게의 공개성(Glasnost)을 강조하면서 정규교육을 받은 스탈린 후기세대의 대표주자로 새로운 사고를 가진 고르바초프가 통치권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주도되는 소련사회의 변혁은 미시적으로 볼때 원초적으로 빈곤했던 소련이 군사대국 유지로 인해 더욱 피폐된 생필품 절대빈곤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장경제원리 도입,사유재산의 인정으로 민중봉기 일보직전의 긴박한 경제빈곤의 고리를 풀자는데 있다. 그런데 그같은 경제빈곤 해결은 주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국민전체가 새로운 생산기풍을 진작하는 자발적 노력의지가보여야 하는데 국민은 두려움과 의심의 눈초리로,그리고 지성인을 비롯한 여론주도계층에서는 공산당 통치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황에서 그같은 노력은 아무리 신사고를 가진 개혁의지에 불타는 개혁주의자가 있다고 해도 개혁은 무위로 끝날수 있다. 인구증가와 같이 서서히 로가리즘적으로 누적되어온 소련의 사회경제침체는 아무리 자유와 개방ㆍ개혁이 뒷받침돼도 하루 이틀에 성취될 일이 아니다. 여기에 고르바초프는 정치 개혁을 통해 국민의 자발적 총의를 민생문제 해결 위주의 경제발전에 연계하려는 전략포석으로 이미 동구에서 시행돼 오고 있으며 고르바초프가 원거리에서 보호해준 바 있는 다당제 도입ㆍ자유경선ㆍ시장경제 원리도입,그리고 국가원수의 직선제 등을 도입하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로서는 그의 정치적 주사위인 대통령 직선제에 출마하여 국민의 직접 신임을 얻음으로써 지속적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90년 초인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85년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가 개혁의 신호탄을 올린 시기라면 90년대는 개혁의 실적을 경제사회적으로 보이는 행동단계라고 보겠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응하든 않든 서유럽에서 이제는 극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군비축소를 국내정치맥락에서 자의적으로 실시할 것이다. 또한 조만간 28차 당대회를 치르고 난후 그는 공산당을 해체하거나 구조적으로 당의 체질을 개선하여 이에 걸맞은 당명 또한 새로이 변경하면서 어쩌면 수면위에 부상하는 재야조직을 흡수하여 의외의 인물로 충원하는 새로운 온건진보정당을 조직할지도 모른다. 볼셰비키 소수 급진공산당이 해체된다고 해서 공산당 통치의 러시아 역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 사회가 소수민족의 자치도 인정하면서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에 눈돌릴 수 없는 내치의 민주화ㆍ경제활성화에 당분간,적어도 2000년 이후까지 정책집행에 우선권을 유지하는 역사의 긍정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노력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인 정치국원이나 참모들은 과거 공산당의 보수적 당관료가 아닌데 그들의 전직은 해외근무 특파원,대외경제 전문가,기타 국내 각분야에서 개혁에 불타던 깨끗한 도덕정치를 표방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당면문제를 다룰때 소련 역사의 방향을 다원화된 민주사회주의 국가로 그 키를 돌리는 역사의 견인차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믿고있다. 혹한기를 피할수 있으며 대서양과 발트해를 접하고 있는 정치ㆍ상업ㆍ관광도시인 레닌그라드의 옛 이름은 성 페테르스부르크시였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공산혁명의 진원지가 된 이후로 레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레닌그라드(레닌시)라고 명명하였는데 이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치가 90년에 정착돼 2000년이 되면 레닌그라드도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본따 고르비그라드(고르비시)로 부를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또 이렇게 예상하는 서방인에게 소련인은 처음으로 빙그레 웃음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 김재순 국회의장(국회의장ㆍ대법원장ㆍ4당대표 신년사)

    ◎반목 청산,위대한 세기를 열자 지금 우리는 나라 안팎으로 엄청난 변화와 격동의 소용돌이에 처해 있다. 대립과 반목,분열의 과거를 청산하고 90년대는 창조와 발전,화합의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해 위대한 우리 세기를 여는 데 튼튼한 초석을 놓는 일이 가장 절실하다. 이러한 일의 시작은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미래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식을 함께하는 데서 가능하며 공동체의 기본가치는 인간화와 도덕성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존엄확보와 도덕성회복의 바탕 위에서 합심해 「강한 나라」를 만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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