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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시동생 교사­10대 애정행각/불륜의 성애영화 “봇물”

    ◎「어린연인」이어 외화 「위험한 질주」「데미지」 대기/우리정서와 거리감… 전통윤리 파괴 등 악영향 우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불륜,10대 여고생과 의붓아버지 그리고 스승과의 삼각관계,형수와 시동생간의 비정상적 애정놀음,심지어 시체를 능욕하는 변태성욕에 이르기까지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가 봇물을 이루고 있어 영화계 전반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동안 이미 두차례에 걸친 공륜 수입심의에서 부결된 영화 「데미지」가 지난달 28일 1년여만에 재심의에서 전격 통과됨에 따라 관심을 끌게된 이들 「성파탄영화」는 12월 24일경 개봉될 「데미지」외에도 현재 상영중인 「어린 연인」「나이트 가드」,19일 개봉될 「위험한 질주」등 4∼5편.특히 이 영화들은 충격적인 성애장면도 문제지만 기존 윤리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부정의 눈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악영향이 우려된다. 줄리에트 비노시 주연의 「데미지」는 아들의 연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 파멸해가는 예비 시아버지의 비극을 그린 에로티시즘 영화.『패륜적 소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긴 하지만 「중요장면 7군데 삭제」라는 조건으로 작품성을 훼손시키면서까지 굳이 반사회적인 영화를 상영할 당위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데미지」의 루이말 감독은 이 작품의 한국상영을 위해 지난해 8월 직접 내한, 관계자들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수 필름의 「어린 연인」 역시 지극히 위험하고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17세 여고생(우희진)과 남자교사(이경영)의 눈먼 사랑,여기에 영혼이 병든 의붓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이라는 인화성 강한 이야기까지 여과없이 덧칠된다.『10대여,위선의 가면을 벗고 너의 사랑에 당당하라』고 부추기는 것같은 이 영화는 한 사춘기 소녀의 통과의례로 보기엔 지나치게 광기어린 성숙의 아픔을 묘사하고 있어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최근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고교교사」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만큼 일본 특유의 음습하고 왜곡된 성문화가 곳곳에서 느껴져 개운찮은 뒷맛을남긴다. 지난 88년「정복자 펠레」이후 오랜만에 선보인 덴마크영화「나이트 가드」는 병원 영안실을 배경으로 한 컬트호러 영화.94년 카느영화제 프랑스비평가협회 초청작품인 이 영화는 시체를 능욕하는 변태성욕자를 쫓는 사건을 다룬 것으로 선정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시체실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법대생과 담당형사가 벌이는 숨막히는 대결이 잠시 눈길을 끌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나 히치콕류의 드릴과는 거리가 있는 거친 영화다. 이밖에 「위험한 질주」는 형수와 시동생 그리고 시동생 친구가 번갈아 가며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미국영화로 우리 정서로는 납득하기 어렵다.X세대 영화를 표방했던 「헤더스」나 「트루 로맨스」에서와는 또다르게 전개되는 대책없는 본능적 삶이 전망부재의 요즘 젊은이들을 나쁜 방향으로 자극할까 우려된다. 최근 금기시됐던 영화들이 속속 수입되거나 제작되는 것은 웬만한 성묘사에는 미동도 하지않게된 관객들의 충격영상에 대한 수요와 영화관계자들의 상업적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스크린은 언제나 압박받는 것의 분출구 역할을 해왔다.하지만 스크린속의 성묘사가 최근들어 갈데까지 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윤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것은 영화의 사회심리적 기능과는 별개로 대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일이란 지적이 높다.
  • 장례 못치른 2명 기막힌 사연/학원강사 유진휘씨·비인 아이다씨

    ◎“죽어도 아들곁에” 노모 빈소 안떠나/“불법체류자” 시신 모국운반 기다려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32명 가운데 25일 현재 30명은 장례를 마쳤으나 나머지 유진휘씨(42·학원강사)와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씨(40·여) 등 2명은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딱한 사정이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순천향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유씨의 빈소에는 홀어머니 이기순씨(63)가 문상객조차 알아보지 못할정도로 탈진한 채 누워 있다.이씨는 『죽어도 아들옆에 있겠다』면서 빈소를 떠나지 않아 가족들이 장례 얘기조차 꺼낼 수 없는 형편이다.이씨는 아들이 숨졌다는 사실을 전혀 받아 들이지 않고 계속 『그럴리가 없어…』라는 말만 되뇌어 주위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이씨는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20대 초반에 홀몸이 됐고 평생을 유복자인 아들 하나를 위해 행상·공사장 잡부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길렀다.효심이 지극했던 유씨는 열심히 공부해 당시 명문인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입학,학비를 벌어가며 학업을 마쳤다. 유씨는『평생 고생만 해온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며 수입이 좋은 학원가로 뛰어들었고 6년전에는 서울로 진출했다.3년전에 조그만 연립주택을 사서 집없는 설움에서도 벗어나 부인(37)과 딸(12)·아들(8)등 다섯식구가 행복하게 살다 참변을 당했다. 한편 아이다씨는 지난 90년6월 입국,불법체류하면서 남의집 가정부로 일하다 변을 당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그녀의 빈소에는 꽃다발 몇송이가 놓여 있을뿐 문상객도 없다.당국은 다음달 초 그의 아들 마이클군(15)이 입국하면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해 가도록 최대한 협조할 방침이다.
  • 백제를 다시본다를 마치고/전문가 좌담

    ◎“문화·사회사적 접근… 백제사 인식 새롭게”/금동향로서 보듯 수입문화를 자기화/학자 동원 알기쉽게 풀이… 독자이해 도와/풍납동토성·아치산성 보존대책 시급/문헌자료 부족… 역사분야 공백에 아쉬움/「백제문화권 개발」은 완벽한 역사 복원위해 학술조사 선행돼야 ▷참석자◁ 김기웅 문화재전문위원·고고학 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최몽용 서울대교수·고고학 서울신문이 10개월여에 걸쳐 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백제를 다시본다」가 30회를 끝으로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세기적 보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출현과 더불어 시작했던 이 기획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의 백제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갈채를 보내온 독자 여러분의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더 충족시켜주기 위해 관계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마련했다.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내려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기웅박사=지금까지 백제에 대한 인식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백제를 다시본다」는 일반독자들이 그동안 전문가가 독점했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백제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여기에는 참여한 학자들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써 일반독자들의 백제역사를 이해하는데 한 몫을 했지요.「백제를 다시본다」는 한마디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백제연구의 총 결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한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두운 것이 현실이었어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결과를 모아놓고 보니 백제역사의 대강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백제연구의 총결산 ▲최몽용교수=사실 이런 유의 기획은 과거 TV에서도 여러차례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TV가 지닌 한계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그런 점에서도 「백제를 다시본다」는 좋은기획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욕심이겠지만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가야·고구려도 다루었으면 해요.「백제를 다시본다」에서 보듯 한 지역문화를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이 시리즈는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지요.이 향로는 한때 무령왕릉 발굴로 바짝 달아올랐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침체되어 가는 마당에 출토되어 백제를 다시 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최=향로가 나온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그동안 이 향로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불교·도교,혹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연관시키는 등 여러가지로 논의됐습니다.여기에 악기와 의복 기타 미술사적인 연구도 활발했지요.물론 뒤에 총체적인 해석이 나오겠지만 이 향로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다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백제문화의 진수입니다. ▲김=이 향로는 결국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역량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백제는 외국문화를 수입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향로에서 보듯 절대 그대로 수용치 않고 자기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공주 벽돌무덤을 보면 중국의 묘제를 받아들였지만 연꽃모양의 벽화를 그려넣는 등 백제화 시켰습니다.당시 무덤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요.묘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집권자의 상징을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비슷한 예는 석촌동 2·4호고분과 이번에 익명의 일본사람이 기증한 3백77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백제귀고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귀고리서도 발견 ▲이=문화분야의 경우 그래도 물질자료가 상당히 출토되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합니다.그러나 문헌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역사분야는 자료의 혜택을 거의 못받아 연구상의 공백도 많습니다.아시다시피 국내 자료라고는 「삼국사기」가 거의 전부이고 「삼국유사」가 약간 보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삼국사기」도 그나마 연대기적인 간단한 자료지요.그런데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동안 백제와의 교섭을 다룬 자료가 풍부합니다.어떤 시기는 일본의 국내 사정보다 분량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그 때문인지이마니시(금서 용)라는 일본학자가 쓴 「백제사 연구」라는 책을 보면 백제는 외교만 한 나라같은 인상입니다.여기에 해방 이후 우리연구자들도 백제의 국가사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중앙관제·지방통제기구·관제·중국과의 교섭사 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연구가 정치사와 외교사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지요.그런데 백제 자체의 성격을 알려면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바람직합니다.최근 젊은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사고를 일부 동원하면서 백제사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종래 정치사에서는 백제는 지배층이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계가 서남쪽의 마한계 토착세력을 정복한 왕조로 지배세력과 토착세력의 이중성으로 심한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백제 멸망도 사회구조의 이중성에서 오는 갈등에서 연유했으리라는 추측이었지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이중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흡수통일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최=토착세력은 고구려계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나머지 공백지대는 백제에 쉽사리 동화되었지요.마한세력이 확실히 남아있었으면 이중적인 구조가 됐겠지만 이미 남하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서기 369년께에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도 이 남하세력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일본서기」에는 그들 남하세력을 「남만」이라고 썼어요.굉장히 경멸하는 표현이지요.이질적인 문화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런데 이 「남만」은 바로 백제에서 부르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름에서 보듯 백제의 남쪽이지 일본에서는 서쪽이니까요. ▲최=고구려까지 패배시킨 근초고왕의 힘이 아니었으면 남쪽까지 정벌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이 세력은 처음에는 직산이 본거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지요. ▲김=백제의 마한정벌 이후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 대안리의 백제고분을 보면 백제가 정벌 이후 행정관을 파견해 지배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백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백제의 내부관계를 알 수 있는 한 예가 되겠지요.이제 문화재 보존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일본서기 기록 많아 ▲최=백제는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한성시대,서기 538년까지 웅진시대,이후 서기 660년 멸망 때 까지 사비시대로 나눌수 있습니다.이 가운데 공주와 부여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유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정부의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조사가 착수되면 유물·유적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유물·유적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보존대책을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그런 생각을 미리 안해 실패한 예가 바로 한성백제입니다.올림픽경기장이 주위에 있는 석촌동 3·4호분과 몽촌토성은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납동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방치되어 황폐화한 상태입니다.전장이 3.5㎞에 이르는 풍납동토성은 지금 5백m만 복원 되었을 뿐 대부분 길이나는 등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강 건너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이 두 곳에 가보면 우리에게 문화정책이라는게 과연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올해가 조선을 기준으로 서울 정도 6백년이라지만 더욱 중요한 백제시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이 두 곳은 유적보존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역사관광지로 만 신경을 써도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올해가 「한국방문의 해」라지만 하다못해 문화유적을 관광수입과 연결시키는 정책만이라도 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풍납동토성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풍납동토성은 기원전 18년 백제의 기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몽촌토성은 4세기 정도로 연구되고 있지요.풍납동토성이 하북위례성,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많아요.강 대안의 고구려 성이 불안해서 도성을 쌓은 것이 몽촌토성으로 보는 거지요. ○단순 관광지 안돼야 ▲김=석촌동고분군을 발굴하니까 적석총 아래에 토광묘군이 나왔습니다.두 묘제는 전혀 이질적이에요.정복자와 피정복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이 지역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이=조금전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계획이 지역개발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그렇습니다.백제권개발계획이 이미 확정은 됐습니다만 착공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학술적 조사를 충실히 하고 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행정당국의 백제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자세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이=유적정비도 중요하고 관광휴양단지도 중요하지만 백제역사의 복원이 그 사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내실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연구원을 대폭 보강해야 하는 것인데 부여문화재연구소를 활성화시키는 일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연구소를 세워놓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그 중요한 부여에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을 합쳐 현장에 나가 발굴하고 보고서를 쓸 수 있는 학예직원은 소장·관장까지 포함해 합쳐 10명이 있을 뿐 입니다.일본의 경우 특별사적이 있는 나라에는 이보다 1백배가 넘는 연구인력이 있습니다.문화재 정책이 1백년 앞을 내다보려면 늦더라도 연구인력을 키워야 합니다.공주에도 박물관이 있고 공주대 사학과가 있지만 연구인력은 몇명이나 됩니까.유적·유물이 모두 사라지고나서 도굴됐다느니 매몰됐다느니 그래봐야 이유가 안됩니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문화재 보존·보호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 입니다.
  • 학교기물 파손/학생에 배상요구/교육부/“질서교육 대폭강화” 지시

    교육부는 15일 전국 15개 시·도교육감에게 보낸 공한에서 정부의 국가기강 확립을 위해 학생들에 대한 질서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교육부는 이 공한에서 전국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퇴폐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용모를 단정히 하라며 80년대 자유화된 두발및 교복자유화 조치에 제동을 걸고나서 일선교사들로부터 시류에 어긋나는 지시라고 반발을 사고 있다. 교육부는 이와함께 전국의 2백41개교 불량 학생서클 4백19개를 관할경찰서에 통보,특별지도하도록 당부했다. 특히 교육부는 최근의 급속한 사회변화와 민주화 추세에 편승한 일부학생들의 등교거부와 집단시위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고 학교기물을 파손한 학생에 대해서는 중징계와 함께 구상권을 발동해 손해를 청구하도록 했다.
  • 하늘의 문 1·2·3/이윤기 지음(화제의 소설)

    ◎3대 유복자 통해 역사흐름 풀이 유복자 이유복의 3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장편소설. 일제시대 태어나 해방되던해 일본에서 살해당하는 이유복의 아버지와 해방동이로 태어나 6·25와 월남전을 통해 미국을 체험하는 이유복,외가에 입적돼 미국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의 아들 한마로 등 3대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로 펼쳐진다. 이유복과 그의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행적을 더듬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흐름. 역사와 종교,인간구원과 신등 이야기를 떠받치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열린책들 각권 5천원.
  • 현대정유 정몽혁부사장은 어떤 사람

    ◎공격적 경영… 재벌가의 “젊은 강골”/정명예회장 조카… 「주유소 분쟁」 주인공/과감한 인사단행… “후광업은 독주” 비판도 젊은 사람의 특징은 패기이다.젊은 경영자의 과감한 공격적 경영도 패기에서 나온다. 현대정유의 정몽혁 대표이사 부사장(33).지난 해 6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극동정유의 경영권을 장악,부사장에 취임하며 상호를 현대정유로 바꾼 그는 최근 설립 이후 32년간 유공과만 거래하던 미륭상사와 전격적으로 대리점 계약을 체결,40여개 주유소를 쟁취함으로써 정유업계를 경악시켰다. 정부사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4째 동생인 고 정신영씨의 유복자로,정명예회장의 조카이다.명예회장은 5명의 동생 중 특히 신영씨를 아꼈던지라,유복자인 그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다.오래 전부터 그를 청운동 자택으로 불러,늘 아침을 같이 하며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을 정도다. 경복국민학교와 청운중학교를 거쳐 80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89년 UCLA 수리경제학과를 마쳤다. 고교 졸업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체육(승마)특기생으로 원서를 냈으나 재벌의 가족이 특혜 입학을 노린다는 중앙일보 보도로 좌절됐다.특기자 자격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당시 명예회장은 『애비 없이 자란 녀석이 큰 아버지 때문에 학교도 마음대로 못 간다』며 가슴 아파했다. 정 명예 회장이 대노하자 현대그룹은 중앙일보의 모그룹인 삼성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앙일보는 연이어 현대의 사업을 비판하는 사태로까지 진전됐다.국내 정상 재벌의 싸움은 재계에서 고 이병철 회장과 정 명예회장의 화해를 주선한 끝에 진정됐다.정부사장에 대한 명예회장의 애정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주변에선 그의 성격이 무척 강하다고 말한다.현대정유의 경영권을 장악한 뒤 기존의 인원 상당수를 정리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현대정유의 전오너는 그의 어머니 장정자 여사의 동생 장홍선씨로,그의 외삼촌이다. 명예회장은 일찍이 정부사장을 현대정유의 전신인 극동정유의 이사로 임명,경영수업을 시켰으나 장사장 등 당시의 경영진이 그를 의도적으로 따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문제가 되는 미륭상사의 박승주 사장(32)과는 동네 친구이다.정부사장의 집은 성북동 330의344이고,박사장은 한 집 건너인 297의2이다.이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으며,미국에서도 자주 만났다.박사장이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 & 클라크 대학을 다녀 LA와 상당히 멀었음에도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사장은 미륭상사와의 전격 계약과 관련,『단순한 상거래를 너무 확대 보도한다』며 『상도의나 기업윤리 문제만 지나치게 부각시킨다』고 불만을 표시했다.하지만 그는 지난 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사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 주유소 확보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유통시장의 질서는 흩뜨리지 않겠다』고 밝혔었다.식언인 셈이다. 현대정유의 경영은 자금이나 주유소 확보 등에서 현대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정유는 증설을 위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일산 20만배럴 정도의 중고 정제설비를 들여올 계획이다.새 공장 대신 기존 설비를 도입하려는 것은 경제성 때문이란 설명이다.하지만 하나 하나 단계적으로 쌓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것을 쉽게 가지려는 성향이 드러난다.미륭상사 파문도 비슷한 것 같다. 정유업계에선 젊은 그의 패기를 높게 평가하지만,계열사의 지원이나 명예 회장의 후광 없이 독자적으로 회사를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아직 확답을 유보한다.
  • 중복 부여된 주민등록번호/10월말까지 일제 정정

    오는 10월말까지 중복해서 부여된 개인별 주민등록번호가 일제히 다시 부여된다.주민등록번호가 중복돼 있는 경우는 전국민의 1%선을 웃돌고 있다. 내무부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한국전산원 6층 회의실에서 일선 시·도 주민등록담당관 회의를 갖고 「오류주민등록번호 정리지침」을 시달했다. 내무부는 『7월부터 첫시행된 주민등록 등·초본 온라인발급을 위한 주민등록상황 전산화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 중복부여사례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내무부는 이와관련,『지난 68년 12자리의 일련번호로 매겼던 주민등록번호를 75년 생년월일을 반영시켜 13자리 숫자의 새로운 번호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중복해서 주민번호를 부여하는 행정착오가 생겼다』고 밝혔다. 내무부는 이날 회의에서 일선 읍·면동은 주민등록번호 중복자에게 모두 새 번호를 부여하고 이를 개인별로 통보토록 했다.
  • 도시마다 다른 산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18)

    ◎“비엘라는 직물”… 지역 고유산업 특화/비제바노=구두·카메라=대리석 대표적/원자재 염가 공동구입·정보교류 이점/다품종 소량생산체제… 한분야 타격 받아도 국가전체엔 연향 없어 국내에서 구두 상표로 유명한 「비제바노」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도시 이름이다.하얀 대리석으로 불리는 「카라라」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이며 유리의 대명사 「무라노」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15㎞ 떨어진 섬의 이름이다. 패션 상표 「밀란」「제노비아」등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제노바에서 따 온 말이고 조개 껍데기에 로마인들을 조각한 「카메오」는 로마의 특산물로 이탈리아 관광 기념품 1호로 통한다.피렌체에서 예술과 문학을 모르면 「정복자」 로마 사람들도 업심을 당한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처럼 제각각의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패션·자동차·기계·유리·직물 등 공업 분야일 수도 있고 관광·문화·휴양 등 비공업 부문일 수도 있다.한 두개의 거대 도시가 나라 전체의 경제권을 거머쥔 「기형」이 아니라 지역별로 발육이 골고루 잘된 「초우량아」인 셈이다. ○제각각 자랑거리 북부 경제의 중심지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비엘라는 직물로 유명하다.지난 17세기부터 모·면·실크 등 모든 종류의 옷감을 다뤄왔다.세탁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물이 많은 계곡에 공장을 세웠다.가내 수공업으로 운영되다 지난 50년대 들어 근대식 공장으로 성장했다.지금은 크고 작은 업체가 2천개를 헤아린다.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프라토도 직물 도시다.비엘라보다 출발은 앞섰으나 패션의 중심이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옮아가면서 1위 자리를 비엘라에 넘겨줬다.질이 비엘라에 뒤처지나 옛 영화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도 1천개가 넘는 업체가 여전히 베틀을 돌리고 있다. 지난 50년 원사·원단 공장을 세워 피렌체 의류 업체에 납품해 온 피키사의 바론첼리 옥타비아노 사장은 『모·면·마 등 원사의 90%는 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중국 등 외국에서 수입하지만 옷감을 짜는 방식은 1백% 전통 기술에 따르고 있다』며 『이 곳은 직물업체만 모여 있는 일종의 직물 공단』이라고 말했다. 밀라노는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도시다.지아니 베르사체·지안 프랑코 페레·조르조 아르마니·구치·젠니·미소니 등 쟁쟁한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부티크가 즐비하다.지난 50년대 파리의 영향권에서 독립,단순하면서도 실험성이 강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여성 패션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이탈리아 패션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피렌체는 남성복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다소 보수적 경향이 짙은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명예 회복에 나서 디자인 전문학교인 「폴리모다」를 세우는 등 「밀라노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메다는 가구도시 밀라노에서 40㎞ 북서쪽에 위치한 메다는 가구 도시다.전통가구업체인 메데아사는 가족 이름을 회사명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도시 이름을 빌렸다.이 곳에는 장인들만 3천명이 넘고 가구업체는 1천개를 웃돈다.7대째 가업을 잇는 업체도 수십개에 달하며 대가 끊기면 다른 업체에서 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기술의 단절은 없다. 지중해 연안의 카라라와 마사는 대리석이 유명한 곳이다.로마군이 원정을 떠날 때 이 곳 돌로 길을 닦았으며 중세때의 천재 미켈란 젤로는 아예 이곳에 눌러 앉아 조각을 했다고 한다.지역명인 카라라가 대리석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2천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돌을 캐는 석공은 줄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공법을 더하고 첨단 기계로 무장,기술을 한층 발전시켰다.돌을 가공하는 코제마사의 비토리오 멜란더 사장은 『일단 산업이 특화된 지역에서는 다른 분야에 한눈을 팔지 않고 철저히 분업의 원칙을 지킨다』며 『섬유산업의 경기가 나빠지면 직물·패션 도시만 불황을 겪을 뿐 다른 도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토리노는 시 전체가 자동차 왕국이며 코모는 원단에 색을 넣는 염색업체 일색이다.베네치아 북쪽의 벨루나는 안경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지역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베네치아는 무라노의 유리를 바탕으로 조명기구를 발달 시켰다.비제바노는 2백년이 넘는 구두 업체가 수백개에 이른다.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3위에 랭크된 공작기계는 바레세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웅지를 틀었고 주방기구·가방 등도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집적이익」 효과 지역적 특화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크게 두가지.원·부자재의 공동 구입으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과 업체간 정보 교류로 기술 발전의 시너지(상승)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른바 「집적이익」이다. 기계업체인 카르나기사의 아드리아노 카르나기 영업담당은 『한 곳에 수백개의 동종 업체가 몰려 있어 기술 전파가 엄청나게 빠르다』며 『새로운 기술이 외국에 전달되는 데 1년이 걸린다면 이 곳에서는 한 달을 못 넘긴다』고 말했다.경기의 좋고 나쁨에 따라 도시마다 부침이 확연히 드러나는 폐단이 있지만 국가산업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이다. 알베르토 만페라리 섬유연합회 대외담당은 『가내 수공업을 바탕으로 한 지역적 특화가 이탈리아 경제의 원동력』이라고 전제,『이탈리아 기업은 수세기 동안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의 가내 공업에서 출발,독특한 기술을 축적했다』고 말했다.대규모 공장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에 적격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바그다드·암만/고도 바그다드(아랍서 지중해까지:4)

    ◎라시드가엔 압바스왕조 체취 “물씬”/“세계최초 대학” 무스탄시리아 흑벽돌 건물은 정적속에 잠자는듯 「한번 티그리스 강물을 마신 사람은 다시 티그리스로 돌아오게 된다」 바그다드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이것은 그동안 이 도시를 침탈한 많은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권토중래를 호언하는 뜻으로 퍼뜨린 말인지,혹은 단순히 바그다드의 매력만을 강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바그다드에는 많은 침입자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다.125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압바스왕조의 화려했던 수도 바그다드는 모조리 불타버렸고 1393년엔 다시 티무르 세력에 의해,1534년엔 오스만 터키군단에 의해 파괴당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바그다드에 와서 압바스왕조의 화려한 문화를 고스란히 만나겠다는 사람은 분명 실망할 것이다.그러나 바그다드 중심부에 자리잡은 라시드거리에 가보면 압바스시대의 다양한 흔적을 만날수가 있다. 라시드거리는 압바스시대의 건물들과 풍물이 비교적 잘 보존된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1359년 건축된 대상숙(대상숙)칸 마르잔,세계최초의대학이라 일컬어지는 무스탄시리아대학건물,구리 주전자등 전통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몰려있는 바자,그밖에 민속박물관과 14세기에 건축된 모스크도 있다. ○침입자들에 파손 대상숙 칸 마르잔은 1935년 복구되어 한때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고급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었다.마침 점심때라 이왕이면 유서깊은 식당의 분위기와 맛을 음미하자는 생각으로 칸 마르잔을 찾아 들어갔다.침침한 계단을 내려가니 거대한 극장같은 홀 내부가 나왔다.마치 오늘의 극장식당 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식탁은 많은데 손님은 두세팀 뿐이고 머리에 하얀 캡을 쓴 종업원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메뉴를 청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그러나 종업원은 친절했고 인내심있게 기다려 주문을 받아갔다.이 식당은 바그다드 명물로 알려져 고위층들사이에는 외국의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그런데 식탁에 오른 까밥과 코르사,채소 샐러드의 맛에는 심오한 역사의 풍취같은 것은 없고 서민들 식당에서맛본 음식들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다만 식당내부의 풍경에는 볼거리가 많았다.캐러밴의 숙소이자 거래처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1층에 방이 스물두개,2층에 스물세개나 있었다고 한다.악사들이 연주하는 무대도 별도로 있는데 지금도 큰 연회가 있을때에는 음악이 연주된다.이 건물의 역사를 보관하고 알려주는 방이 한쪽 구석에 두개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 대상들이 사용하던 카펫,구리로 만든 촛대와 주전자,복장등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러나 대부분 복제품이 분명했다. ○음식점으로 사용 식사를 끝내고 종업원들의 정중한 전송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는데 햇빛이 유난히 뜨거웠다.칸 마르잔에서는 아마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 귀빈대우를 해주는 모양이다.어쨌거나 기분은 좋았다.식당에서 몇걸음 걷지않았는데 검은 차드르를 둘러 쓴 노파가 앞길을 막고 앉아 두손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이런 모습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중심가의 큰거리에서는 볼수 없지만 시장골목에서는 구걸하는 사람과 흔히 마주치곤 했다.대부분 여인들이다.이들은 차드르를 썼지만 형식일 뿐 얼굴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처음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구걸이 허용되나하는 의문을 느꼈다.그러나 차츰 생각이 바뀌었다.그래도 구걸의 자유가 허용되는걸 보면 아직 이 사회에는 따뜻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상오에 호텔에서 나올때 아리따운 가이드 아가씨가 시내관광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여행사 가이드가 아니고 물론 문화부소속 직원이다. 『보여줘야 할 곳과 보여줄 수 없는 곳』이 그들에겐 분명있는 모양이다.보여줄 수 없는 것이 뭘까? 그런 궁금증을 느꼈는데 그 의문 한가지가 풀린 것 같았다.그 아가씨는 차에 좌석이 모자라 동행을 포기하고 말았었다. 시장골목에서 슈하다 다리쪽으로 걸어나오면 유명한 무스탄시리아대학 건물이 있다.입구에는 터번을 쓴 노인이 책상 하나를 놓고 지키고 있었다.이곳은 유료관람으로 입장권을 팔았다.그러나 넓지 않은 뜰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고 아치형 출입구가 유난히 많은 흙벽돌건물은 정적속에 잠자고 있었다.이 대학은 압바스왕조 37대 칼리프인 알 무스탄시르 빌라(1226∼1242년)에 의해 세워졌는데 당시엔 코란을 강의하는 신학대학이었으나 지금은 같은 이름으로 이라크 제일의 종합대학이 되어있다.건물도 물론 별도로 지어 사용하고 이곳은 다만 유적으로 남겨놓았을 뿐이었다.바그다드에 처음 왔을때 호텔에서 만났던 전직 주한대사 가잘씨는 동행했던 딸 로라가 바로 유서깊은 무스탄시리아 대학생이라고 우리에게 자랑했다.로라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아가씨였다.그녀는 예쁘고 특히 머리가 우수했는데 내가봤던 누구보다 로라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라시드거리의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다.시장은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고 현대식 전자제품 가게에서 전통 향료 가게까지 그 구색도 아주 다양했다.곡물가게에는 쌀과 밀이 가득 쌓여있고 특히 대추야자 열매를 비롯,이름도 알수 없는 여러종류의 열매를 팔고 있는게 흥미로웠다. ○상점엔 손님없어 구두가게의 구두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뿐인데 품질은 썩 좋지 않았다.옷가게에 걸린 옷들도 가짓수는 많지만 여행자의 눈을 끌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그러나 일차 생활용품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있다는 사실은 조금은 뜻밖이었다.황금사원이 있는 바그다드 북부지역 거리에는 금은방과 고급 잡화점들이 즐비하다.거기에도 금과 은,각종 가죽제품과 안경,의류들이 풍부하게 있었다.특히 금이 많았고 가격도 싼 편이었다.이라크 관리들은 경제봉쇄 4년째 접어들어 경제가 말이 아니라고 침통하게 말했었다.그것은 외교용 엄살이었을까? 시장에 가득 쌓인 곡식과 잡화를 보고 이런 의문을 느꼈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게와 상인은 많은데 손님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걸 알 수가 있다.검은옷과 차드르를 두른 여인들이 드문드문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물건을 흥정하거나 사는 모습은 보기어렵다.돈이 없는 것이다.이라크는 인플레가 한창인데 그렇다면 그많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 그걸 당장 알수 없지만 서민들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증거는 여러곳에서 확인되었다.바빌론 가는 길에 우리를 안내했던 카셉은 자기봉급이 4백20디나르라고 말해줬다.이것은 1달러 조금 넘는 돈이다. 그런가하면 마수르호텔의 나이트클럽에는 3달러짜리 입장권을 여러장 사서 친구와 걸프랜드까지 데려와 1달러짜리 맥주를 맘껏 마셔가며 새벽까지 춤을 추는 젊은이들도 있었다.그들의 거침없고 분방한 행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유한 자제들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계급은 어디에나 있다는걸 여기서도 실감할수 있었다. ○이교도 입장 막아 황금사원은 바그다드에 많이 남아있는 여러 모스크가운데서도 독특한 건축양식과 두명의 이맘(회교 고승)이 묻힌 시아파의 성지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바그다드 북부에 있는 이 사원의 금빛 찬란한 두개의 돔과 네개의 첨탑은 멀리서도 잘 바라다보인다.1515년에 세워진 이 사원에는 무사 알 가딤과 무하마드 알 자와드,이 두명의 이맘의 무덤을 찾는 참배객이 늘 그치지 않는다.우리가 찾아갔던 저녁나절에도 사원입구가 있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입장전에 입구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 들어가는 열성파도 눈에 띄었다.아무나 들어가는줄만 알고 입구로 다가서는데 흰 터번을 쓴 건장한 중년이 널찍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막아버린다.이런저런 시비끝에 이교도는 입장사절이란 취지를 전달받았다.회교,특히 시아파가 매우 배타적이란 말은 들었지만 막상 입구에서 거절당하자 그들과 우리사이에 건너 뛸수 없는 높은벽이 가로놓여 있는걸 실감했다.바그다드 주요 일간지인 줄부리아신문의 기자는 호텔로 와서 인터뷰를 청하면서 다짜고짜 물었었다.『바그다드에 오신 목적이 뭡니까?』라고.그때 답변이 궁해 한참 망설였던 기억이 떠올랐다.종교적 일체감을 확인하기 위해? 정치적 동지의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다만 관광만을 즐기려는 목적으로? 그 어느쪽도 물론 아니다.답변은 자연 길어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입장을 거부당하고 황금사원을 떠나면서 내 마음은 다시 그때처럼 착잡해졌다.
  • 6·25때 순직 아버지 그리는 40대부부

    ◎“호국영령 추모” 휴전선 횡단행군/「보훈의 날」 155마일 장도에 오르는 서울 유대지·이순필씨/「사모곡」 부르며 9박10일 주먹밥 끼니/철의삼각지선 산화한 선열 명복빌고/16일 강원도 고성군서 출발… 서해 백령도까지 「동부전선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에서 서부전선 끝간데인 경기도 옹진군 백령도까지­」보훈의 달을 맞아 한 부부가 구비구비 이어진 1백55마일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따라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9박10일간의 도보횡단에 나선다. 유대지(45·서울 강남구 개포2동 512)·이순필씨(46)부부는 오는 16일 새벽4시 명호리를 출발,인제·양구·화천·철원등 휴전선에 인접한 10개군을 걸어서 통과한뒤 25일 새벽4시,44년전 포성이 울린 바로 그 시각에 서부전선 옹진군 백령도에 도착한다. 올해로서 44주년이 되는 6·25가 전후세대들의 기억속에서는 자취를 감춰가고 있건만 유씨부부에게는 6월이 되면 눈자위를 적시는 마음의 생채기로 저며온다. 유씨는 이번 도보행진을 결심한데 대해 『조국산하를 지키다 전사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사무쳐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호국영령들의 뜻을 기리고자 이번 행사를 계획하게 됐다』며 취지를 밝혔다. 아버지가 순직한 뒤 8개월후 유복자로 태어난 유씨로서는 사진 한장 남기지 않은 아버지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그런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친다. 유씨의 아버지 유귀용경사(당시 27세)는 6·25가 발발하기 직전인 49년 3월 경북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근무하던중 무장공비의 습격을 받고 교전끝에 순직,지금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충혼탑에 안장돼 있다. 도보행진 내내 주먹밥으로만 끼니를 이어가며 「사부곡」을 원없이 부를 것이라는 유씨부부는 행진도중 당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철의 삼각지에서는 이곳서 산화한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추모제도 가질 계획이다. 또 동해와 서해에서 각각 떠온 바다물은 행진을 마치는 25일 동작동 국립묘지 충혼탑앞에 모셔 아버지의 제수로 쓰겠다고 말한다. 유씨는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끝에 고교를 졸업,85년 원호대상자로 수원에 있는 국가보훈관리공단에 근무하며 딸만 넷을 둔 단란한 가장이 됐다. 처가 역시 큰처남이 6·25 상이용사인 국가유공자 가정이어서 부인도 이번 도보행진에 선뜻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1년여전부터 체력다지기와 정신력배양에 막바지 힘을 쏟았다는 유씨부부는 그동안 국방부·내무부·경찰청등 각계 요로에 행사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유씨는 『처음에는 휴전선에서 가장 근접한 남방군사한계선을 따라 도보행진을 하려 했지만 국방부에서 녹음이 우거져가는 계절이라 곤란하다는 공식통보를 받아 남방한계선에 가장 가까운 지방도로로 코스를 수정했다』며 『정부의 지원이 없더라도 반드시 이번 도보행진을 성사시킬 것』이라며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아버님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다.
  • 뒤늦은 국가체제 정비(백제를 다시본다:14)

    ◎5세기말에야 마한 완전 통합/부여족 남진정복… 토착세력과 갈등/방·군·성 지방행정망 갖춰 중앙통치/남북으로 긴 영토 사회통합 장애… 군정적 지배 의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은 자못 다르다.주지하듯 백제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온 부여주의 일파가 마한사회의 북방인 현재의 서울시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립한 일종의 정복국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족의 이동 정주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백제국가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한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어 발전 도상에 있던 백제 소국을 부여족이 정복한 것인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그것은 어쨌든 백제국이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건국사정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집단 간의 이중성이랄까 괴리현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백제의 정치·사회사는 바로 이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그 지형적인 특수성이었다.마한의 영역은 서해안을 끼고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차령산맥과 노영산맥이 달리고 서해로는 금강과 영산강이,남해로는 섬진강과 탐진강이 각기 흐르고 있어 여러개의 고립된 지형구를 형성하였다.그 결과 마한사회는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진한·변한사회에 비하면 현저하게 지역적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더욱이 서해안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마한의 50여개 소국들은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중국군현인 낙낭군이나 대방군과 자유로이 접촉했다.이는 백제 주도하의 마한세력 통합을 장기간 방해했다.신라가 진한 12개국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폐적인 자연환경에 힘입은 바 컸었다.그런데 마한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지역성을 고집하는 다양한 지역사회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다원적인 지역적 구성이 백제의 정복자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 한몫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마한정복을 시조 온조왕 27년(AD9년)때의 일인양 기술했으나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마한의 최북방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에서 국가형성에 성공한 백제가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사회 전체를 호령하게 된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 근소고왕 때의 일로 짐작된다.다만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백제가 곧바로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에까지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최근 전남지방의 고분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측해 볼 때,백제가 이 지방의 마한세력을 명실공히 통합하여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백년쯤 뒤인 5세기 후반,즉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년)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사실 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유역까지는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으며,그대신 이곳에는 옹관묘(독무덤)가 여전히 유행했다.이 지역에서 옹관묘가 석실분으로 바뀌는 시기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마한영역을 통합한 뒤 백제조정이 들고 나온 통치철학은 중국의 고전인 「주례」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 느낌이 든다.이 「주례」는 중국전국시대 말기에 장차 출현하게 될 대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위한 일대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기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통일적·체계적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비(부여)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바위 뒤에 두었다가 얼마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는 금강 대안의 규암면 울성산성 밑 호엽사터의 바위를 정사암 혹은 천정대라고 하는데 이 「천정」이란 말 자체가 「주례」에서 나온 것이다.즉 이 책의 천관 가재조에 의하면 천관은 3백60관을 총섭하는 최고의 관직이다.그러니까 천정대란 바로 그같은 천관의 정사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주례」의 통치철학 백제의 중앙정치제도를 보면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 중에는 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적지않다.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 하관 사마조의 「이좌왕,평방국」(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이라 한데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 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매우 우아한 한식으로 되어 있다.이는 토착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구려·신라의 관등 이름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편 지방통치조직은 국가권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차츰 정비되어 갔다.한성시대만 해도 전국의 각 지역세력의 대표자를 통해 성과 읍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근초고왕의 대정복사업이 성공리에 완수된 뒤 백제는 전국을 22개의 행정구역(당노)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보내어 통치했다.이같은 담로체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더욱 충실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백제가 정연한 통치망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538년 부여로 천도한 뒤의 일이다.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다.이 사비시대에 백제는 고사성(전북 고부)을 중방으로 하여 전국을 크게 5개 방으로 구획하고 37개 군을 두어 2백개 내지 2백50여개에 달하는 성을 장악했다.이 성은 후일의 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중 가장 취약 이같은 방·군·성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권력은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침투할 수 있었다.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현저하게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민정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대체로 보아 군정적 지배로 일관한 듯하다.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백제사회의 구성이 본디 이중성을 띠고 있는 데다가 지역공동체의 세력이 너무나 강고하여 국가권력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쨌든 이는 고구려나 특히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때 백제의 커다란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신라는 지역사회의 말단인 촌에까지 도사와 같은 행정관을 파견한다거나 혹은 지방세력가인 촌주에게 관등(이른바 외위)을 준다거나 하여 이들을 최대로 지배망에 포섭한 기반 위에서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원인을 통치체제 면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패망후의 마한/나주지역 중심 지방호족 할거/고유의 독무덤·금동관 출토가 증거 백제가 마한사회를 통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가 비록 정복국가의 기틀을 잡았을지라도 토착세력을 쉽사리 편입시키지 못했다.이같은 정황은 오늘날 전남북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고대묘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독무덤떼(옹관묘군)가운데 하나인 제9호분이다.마한의 전통묘제이기도 한 5∼6세기경의 이 무덤에서는 큰고리칼(환두대도),금동관,금동제신발(김동식리)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금동관은 9호분 안에 묻힌 8개의 독 가운데 가장 큰 이음독(합구식옹관)머리부분에서 나왔다.맞새김의 초화무늬 솟을장식(입식)을 단 외관안에 모자가 붙은 수준급 금동관으로 평가되었다. 이같은 유물은 5∼6세기경 까지도 영산강유역에는 막강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면 나주지역 중심의 당시 영산강유역은백제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한 가운데 지방호족들이 어느정도 할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따라서 기층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묘제 역시 마한고유의 독무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나주지역에 백제의 묘제가 수용되는 시기는 6세기말∼7세기초다.이 시기는 사비시대에 해당하는데,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난다.지난 1978년 당시 전남대 최몽용교수(현 서울대)가 발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 제3호분이 이 시기의 백제계통 무덤이다.돌방과 널길(선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긴목항아리(장경호),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은장도조각,금실,쇠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서남해안에 가까운 마한지역에는 백제의 발길이 더디게 미쳤다.
  • “역시 쇼트트랙” 휴일새벽의 환호/채지훈·전이경선수 가족표정

    ◎할아버지 등 17명 “2관왕” 밤샘응원/전 선수집/“지구력 뛰어나 금메달 딸줄 믿었다”/채 선수집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에 막판 금메달 2개를 안겨준 쇼트트랙의 채지훈·전리경 선수가족들은 27일 새벽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아들·딸의 이름을 외치며 감격에 겨워 했다. 또 이날 휴일의 단잠을 설쳐가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선수들이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내자 『역시 쇼트트랙 밖에 없구나』라며 밤샘 피로도 잊은 듯 즐거워 했다. ○…극적인 막판 스퍼트로 금메달을 거머쥔 아들 채지훈군(20)을 밤새 마음을 졸이며 응원하던 아버지 채수민씨(53·무역업·서울 종로구 청운동 벽산빌라 5동502호)는 딸 지나양(18)과 함께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채씨는 『지난 23일 1천m에서 2위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으나 이번에 금메달을 따내 한없이 기쁘다』면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아들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채씨는 『지난해 10월 왼쪽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훈련도중 으스러져 올림픽참가조차 불투명했었는데 금메달까지 따게돼 뭐라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현지에 가 있는 아내가 열심히 응원했고 아들이 평소 체력과 지구력이 뛰어나 어느 정도 우승을 예상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지난 23일 쇼트트랙 여자 3천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딴데 이어 여자 1천m에서도 금메달을 획득,2관왕이 된 전이경양(18) 가족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아버지 전우성씨(48·서울 종로구 평창동 금강빌라)와 시골에서 올라온 전양의 할아버지 전창구씨(72) 등 가족과 친인척 17명은 밤새 응원하다 전양이 맨먼저 결승점을 통과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어머니 최복자씨(45)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하기를 빌었지만 2관왕에 오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며 『성원해 주신 국민과,딸에게 스케이트 날을 사주는 등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김기훈 선수의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최씨는 『딸이 8강전에서 캐나다 대글선수의 반칙으로 넘어져 탈락하는 줄만 알았다』며 『다행히 대글선수의 반칙이 인정돼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면서 내심 금메달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 “드디어 해냈다” 가족들 눈물/쇼트트랙서 금메달 2개 따던날

    ◎새벽 TV보던 국민도 환호 릴레함메르의 쾌거를 밤잠을 설치며 꼭두새벽부터 TV를 통해 지켜보던 국민들은 『드디어 해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특히 나이어린 여자쇼트트랙선수들에게 감탄과 찬사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상큼한 기분으로 출근한 직장인들도 직장에서 온종일 금메달소식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두번째 금메달소식을 전해준 쇼트트랙 여자3천m계주대표팀의 맏이인 김소희양의 대구시 남구 대명10동 개나리맨션 아파트 나동 909호 집에서는 아버지 승태씨(45·건설업)와 어머니 김귀순씨(45)등 가족들이 밤을 새우며 TV를 지켜보다 딸이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는 순간 『금메달이다』를 외치며 감격의 눈물. ○‥소희양과 함께 대표팀의 큰 언니역할을 해온 전리경양의 어머니 최복자씨(45·종로구 평창동 금강빌라)도 『메달을 딸 것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금메달을 거머쥘 것이라고는 생각못했다』며 환호. ○…막내둥이로 세계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된 김윤미양의 어머니 이문순씨(43)는 초조하게 딸의 경기모습을 지켜보다 금메달이확정되는 순간 『딸의 경기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노르웨이까지 간 남편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며 울먹이기도. ○…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 이어 첫메달을 안겨준 김기훈선수의 서울 성동구 자양2동 679의 34집에서는 어머니 박문숙여사(52)와 이모 박성애씨(42)가 『금메달 소식을 집근처의 절에서 불공을 드리다 알았다』면서 축하전화를 해오는 팬들과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감사. ○…은메달을 획득한 채지훈선수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벽산빌라 5동 502호 집에서 경기를 지켜본 아버지 수민씨(53·무역업)는 『처녀출전한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 대견스럽다』며 『27일 열릴 5백m경기에서도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기대.
  • 「고 버지니아 켈리」/이경형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클린턴 미대통령은 연말휴가 동안인 지난해 12월 28일 고향인 아칸소주의 핫스프링에서 그의 어머니와 피자파티를 즐겼다.불과 1주일전이었지만 이것이 두사람간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당시 부인 힐러리여사,딸 첼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네번째 남편인 딕 켈리 또 그의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 4명이 자리를 같이했다.피자를 먹고난 다음 클린턴이 『다음 뭘할까』고 묻자 한 친구가 『볼링을 하러가자』고 말했다.클린턴과 친구들은 일제히 올해 70세인 켈리여사를 쳐다보면서 「승낙」을 간청했다.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눈동자만 굴렸다.클린턴의 유년시절 늘 보아왔던 『승낙을 표시하는 장난끼어린 화난 표정』이었다. 인간 클린턴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은 바로 소설같이 파란만장한 그의 어머니 버지니아였다.그녀는 남편을 3번이나 사별한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다.그녀의 첫 남편이자 클린턴의 생부인 윌리엄 브라이드는 자동차부품 외판원으로 임신중인 부인을 시카고의 새 보금자리로 데려가려고 아칸소로 오다가 빗길 교통사고로 숨졌다.3개월뒤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났다.그녀는 아들의 장래뒷바라지를 위해 젖먹이를 친정에 맡기고 마취학을 공부했다. 마취사자격을 딴뒤 자동차세일즈맨인 로저 클린턴과 두번째 결혼을 했고 아이에겐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며 아들에게 양부의 성을 따르도록 했다.그러나 주벽에다 손찌검까지 심한 그와 이혼했다가 이혼후 거의 매일 집현관앞에서 쭈그리고 있는 그를 불쌍히 여겨 재결합했으나 얼마후 암으로 사망했다. 세번째 결혼은 이발사 제프 드와이어와 이뤄졌으나 얼마후 병사했고 13년전 식료품 중개상인 지금의 남편과 살아왔었다. 8일 켈리여사의 장례식을 앞두고 클린턴의 친구들은 클린턴의 정치적 인내력과 불굴의 투지는 바로 그의 어머니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유복자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집념,거듭된 남편과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않는 진취적 생활자세가 오늘의 미국대통령을 만든 것이다. 유방암 절제수술을 받은지 닷새만에 클린턴의 유세현장으로 뛰어드는 켈리여사의 투지는 「훌륭한 자식을 키우는 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미국민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 원주민 차별·나프타 부작용서 발단/멕시코 농민폭동 왜 일어났나

    ◎4일째 1백여명 사망… 장기화 조짐/농산물 수입땐 영세농 몰락 위기감 새해 첫날 일어나 4일째 계속되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주 농민폭동은 4일 일단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장기화될 전망이다. 이 폭동으로 현재까지 정부군과 폭동에 가담한 농민등 모두 1백여명이 숨졌고 치아파스주내 일부 시청사등 공공건물·상가 수십여채가 불에 탄 것으로 집계됐다.일부 도시에서는 토지분규로 수감돼 있던 원주민 죄수들이 탈옥하는등 무정부상태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원주민 농민들은 한때 주내 6개도시를 점령했었으나 현재는 라스 마르가리타스시·차날시등 3개도시를 장악하며 정부군에 맞서고 있다. 자칭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주도로 이뤄진 이번 봉기는 멕시코정부의 오랜 대원주민 차별정책과 빈곤에다 1일 발효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가 불을댕겨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즉 빈곤속에 푸대접을 받아온 원주민들이 나프타의 발효로「공동체해체」라는 위기감이 증폭돼 일어난 것이다. 폭동농민들은 지난1일자로 된 성명에서 『멕시코정부가원주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저항해 봉기했다』고 밝힐 정도로 각종 정책에서의 소외감을 지적했다.한편으로 농민들은 값싼 농산물이 밀려오면 소규모 영세농인 자신들이 어디든 쫓겨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이『나프타는 남부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라며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폭동이 일어난 치아파스주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토착종교와 카톨릭간의 종교,인종갈등이 깊은 지역.과테말라와 함께 마야문명을 꽃피운 곳이어서 전체주민 2백만명가운데 절반가량이 원주민 인디오들이다.토착민들은 산악과 정글이 많은 탓으로 경작할 땅을 놓고도 종족간의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가운데 25%는 아직 스페인어대신 토착어를 쓰고 있고 약 30%가 문맹자로 파악되고 있으며 걸핏하면 「박해」「차별」을 이유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왔다. 폭동을 주도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규모는 2천여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도의 훈련을 받은데다 정규군이상의 무장을 하고 있어짧은 시간안에 진압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대부분 치아파스주의 젊은 원주민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름에서 보듯 이들은 멕시코의 혁명영웅이며 농민군지도자였던「사파타」의 이념을 따르고 있는데 에밀리오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에 참가,빈농과 공동체 농민에 대해 토지재분배를 규정한 「아야라계획」을 멕시코헌법정신에 관철한 인물이다.따라서 이들이 최대요구사항은「토지의 무상분배」로 요약해볼 수 있다. 16세기 초반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 이후 4세기간 반복되고 있는「정복자」와「원주민」사이의 반목의 역사청산은 나프타이후 멕시코정부의 경제성공여부에 달려있으나 쉽게 이뤄지기 힘들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 경쟁력 지닌 기술확보가 관건/마르골랭(해외석학 3인의 조언)

    ◎한국의 국제화 선진화/재도약위한 국민공감대 확보 선행돼야 프랑스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수십년간 생소한 것이었다.서울 올림픽-그리고 한국산 전자상품의 프랑스 시장 대거 진출-이 있기 전까지는 프랑스인들은 독재와 잦은 소요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나라의 성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그 반면에 한국에서는 빠른 성장의 지속과 혜택에 대한 약간은 맹신적인 면도 있지만 자신감을 갖게 된 시대였다.그런데 오늘날에는 경제위기와 실업증가에 짓눌려 있는 프랑스인들이 아시아의 「작은 용」 특히 한국의 경제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한국인들이 프랑스의 산업을 망치고 있다고 지나친 방식으로 고발했다.사실은 전체적으로 산업고용의 3% 상실에 대한 책임밖에는 없을 정도다.그러나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공의 실상과 특히 전망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듯 하다. ○경제성숙의 고통기 이 비관론은 유라시아의 다른 한끝에서 볼 때 이상한 것이다.연평균 5%의 성장을 하고 있는 나라,실업이 없다시피 한 나라가 어떻게 비관론자가 된단말인가.1인당 국민소득이 자이르와 비교되다가 30여년만에 세계 시장의 정복자가 되고 TGV의 구매자가 되기에 이른 것은 얼마나 현란한 성공인가.이는 확실한 증거지만 한국의 위상에 대한 총체적이고 균형잡힌 평가는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한국인들의 우려는 세겹의 광학적 조시를 교정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그 논리의 하나는 선진적이고 다양하며 복잡한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어린 나라가 더 쉽게 발전한다는 것을 많은 나라들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권위주의 체제하에 존재했으나 거론해서는 안됐던 수많은 장애를 민주화가 걷어냈다는 것이다.실상을 돌아본다는 것은 매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결국 한국인의 우려는 한국인 자신이 변했으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데서 나오는 것이다.경제성공과 웬만큼의 부를 거둔 뒤로는 희생과 좌절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채비를 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더욱 균형있는 성장과 덜 권위주의적인 노동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매우정상적인 것이고(이는 한국인들이 다른 국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다)근본적으로 건전한 것이다.그러나 대신 「순수한」 성장은 덜 매력적인 것이 된다.따라서 성장은 관리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거의 불가피하게 느려지게 된다. 이를 접어놓고라도 한국이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들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저개발의 얼룩보다 일부 경제적 성숙에 도달한 결실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서양의 최근 경험으로 보면 한국은 발전도 민주정치도 국민적 연대감마저도 여태까지 확실하게 얻지 못했다.낮은 임금과 취약한 기술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너무 앞서 나가 있는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나라들과 실질적으로 경쟁할만큼 성숙하지는 않았다.내수시장의 증대가 이제까지 충분한 의지처가 됐고 실업률도 낮았다.길게 보면 위험한 요소가 엄청나게 많다.조치도 필요하고 상상력과 창의성도 필요하다.경제자유화로도 해결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교와 가정과 사회 내부의 억압적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해결해야 할 것들이다. 이 말은 국가의 모든 개입이나 한국 사회의 결속적인 전통을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다.경제와 사회의 격변은 새로운 해결책을 요구한다.그러나 발전의 첫 단계때는 집중화와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에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듯하다.정치야 어찌됐든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장률이 세계 최고가 됨에 따라 기적처럼 믿어졌다.오늘날 한국민은-프랑스도 마찬가지지만-군살빼고 재정의되고 재편된 국가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결핍은 모든 차원에서 「정글의 법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정글의 법칙」은 더 강하고 더 추잡하다. ○고통분담 노력 필요 한국은 가장 성공적인 민주화의 승리자로서 세계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확고한 민주주의는 권리만큼 의무를 의식하는 시민에게 머무르는 것이다.또한 난관과 위험에 대한 지체없는 폭로가 있어야 오는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려는 집단적 노력이 있어야 오는 것이기도 하다.『다스린다는 것은 예견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전총리 피에르 망데스­프랑스의 말이다.
  • 유일한 교민 이성씨 일가의 삶과 애환

    ◎“나는 레바논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상사주재원 첫발… 정부구매 알선업 성공/외교관 피랍·대사관 철수 등 어려움 목격 『죽어서 땅에 묻히면 그 묻힌 땅 한평이라도 우리땅 되는것 아닙니까』 내전이 가장 치열했던 지난 17년동안 많은 사람들이 레바논을 떠났어도 피란 한번 가지않고 베이루트를 제2의 고향으로 지켜온 유일한 교민 이성씨(51)의 탈조국관이다. 레바논 정부물품의 구매를 알선해주는 「MEC트레이딩 컨설팅」의 사장으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는 이씨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그의 레바논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다. 『저마저 떠난다면 레바논에 한국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이민을 가면 그 땅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살아야지 언젠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전력투구가 어렵습니다』 군산태생으로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이씨가 국제적인 장사에 눈을 뜨게된 것은 1965년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가면서부터.그는 제대후 베트남에서 사업을 배웠다. 그가 레바논과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국제상사 주재원으로 베이루트에 가서 종횡무진 뛰었다.당시는 레바논에 막 내전이 시작된 시기였다.전쟁터인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레바논에서 큰 도움이 되어 3년 후에는 독립할수 있었다.정부물품 구매를 알선하면서 자연히 레바논내 실력자들과도 친밀해졌다.그래서 그는 드루즈파 지도자인 줌블라트와도 친분이 생겼고 PLO본부가 서베이루트에 있을 때는 아라파트의장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자연히 그는 당시 레바논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노릇도 톡톡히 해냈다.그러나 그는 78년 시리아침공,82년 이스라엘침공,86년 도재승서기관 피랍과 우리 대사관의 철수등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한국인의 대명사로 베이루트를 지켜왔다. 『중동에서의 장사는 특히 인맥이 중요합니다.사람만 잘 만나면 잘 살수 있습니다』라고 경험을 밝힌 이씨는 『레바논 사람들은 천재적인 장사기질이 있으며 중동에서 외국인에 가장 호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진출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이씨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분야는 최신통신시설,우편분류기계,공항의 금속탐지기,마약밀수 방지를 위한 공군·해군력 증강등이다.그는 편리하고 앞선 시설등을 레바논 정부인사들에게 소개,정부예산에 반영시킴으로써 구매케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70년 수출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씨는 『장사는 우직하게 해야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꾀만 갖고 하려한다』고 지적하면서 『밤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자면서 다닐때에 비하면 요즈음 출장자들은 일급호텔만 다니는 초호화판』이라고 회상했다.지게지고 뛸때가 자동차타고 다닐 때보다 더 강했다는 것. 오랜 외국생활로 이씨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족들이다.부인 김복자씨(48)와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중학교 다니는 딸등 모두 네식구.집안에 포탄이 뚫고 들어오고 하루 3∼4시간의 제한송전등 온갖 불편들을 용케도 잘 참아주었다.이같은 미안함 때문에 지난 여름휴가때 자동차로 온가족이 베를린까지 유럽여행을 다녀오는등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최근에는 동베이루트에 새로 개장한 아베체백화점에 부인 김씨에게 조그마한 한국특산물점을 내주었다.인삼등 잘 안팔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레바논 부유층들이 건강식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인삼이나 인삼화장품등이 없어서 못팔 정도라는 것.그는 조그만 사업이지만 특산물을 통해 한국을 알린다는 자부심 또한 소득 못지않게 크다고 말했다. 현재 레바논에는 우리공관이 없어 이씨가 한국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는 서울의 친척이 정기구독 시켜줘 한달에 두번씩 오는 한국신문과 잡지가 전부다. 그는 기사내용은 물론 광고까지도 빼놓지 않고 볼 정도다. 그러나 이씨는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체전에 초청받지 못한 것을 서운하다고 말했다.단 한가정이지만 레바논의 유일한 교포인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소망에서다. 이씨는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도 레바논에서 뿌리를 내려주기를 바란다.그를 위해서라도 그는 베이루트에 세계적 체인점을 내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 독 츠바이크「천재와광기」·일 가나모리「예술가의 사생활」번역서 나와

    ◎“예술가의 전재성 광기서 나왔다”/발자크·니체 등 행적통해 명작의 비밀 규명 세를 풍미한 예술가들은 천재인가 광인인가.인류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은 천부적인 광기에 시달렸으며 광기로부터 창작의 원동력을 얻어 인구에 회자되는 명작을 남겼음을 증언하는 흥미로운 2권의 책이 서점에 나왔다. 독일의 인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천재와 광기」(예하간)와 일본 기록문학가 가나모리 세이야(김삼성야)의 「예술가의 사생활」(한국문화사간)은 각각 9명,16명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와 이들의 천재성을 밝히는 고뇌의 실체탐구를 통해 그들의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천재와 광기」는 뛰어난 소설가이면서 전기작가로 명성을 떨친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적 전기집.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에서 지은이는 발자크,디킨스,도스토예프스키,휠더린,클라이스트,니체,카사노바,스탕달,톨스토이의 예술가적 삶을 「광기」라는 측면에서 예리한 감수성으로 기술하고 있다. 발자크의 삶과 디킨스의 삶,클라이스트와 니체의 삶은 저마다다르지만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것은 그들 내부에 살아 숨쉬는 열정,참되고 강렬한 삶에의 욕구,그리고 형상화의 창조적 열망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하고 있다.『발자크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끝없이 불만스럽다.각자가 한결같이 세계정복자이자 변혁자,아나키스트이자 동시에 폭군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 역시 열성적이고 또한 망아적이다.…디킨스는 최초로 일상의 나날을 시적인 것으로 굴절시켰다』 츠바이크가 이 전기집에서 시도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나 기록의 재생이 아니라 천재적 예술가를 사로잡은 「광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체를 이룬다.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병과 광기,그리고 천재와 인내심의 관계에서,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대자연과 농부들과의 관계에서,그리고 휠더린과 클라이스트는 광기와의 투쟁에서 천재성이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니체는 병과 고통을 가장 잘 참아내는 자가 「천재」이자 「초인」이라고 부르짖었으며,톨스토이는 82세의 노령에도 말을 타고 15마일이나 질주하고 들판에서 농주를 마시며 신을 우러렀다.휠더린은 하늘의 소리를 지상에 전달하기 위해 피뢰침의 역할을 했다.클라이스트는 밀려오는 광기때문에 언제나 극단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한 여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천재와 광기」에는 이같은 이야기가 원당희,이기식,장영은등 3명의 젊은 독문학전공자들의 세심한 번역에 의해 펼쳐진다. 일본의 기록문학연구가 가나모리 세이야의 「예술가의 사생활」은 제목에서 풍기는 흥미위주의 스캔들 캐내기가 아니다.「이솝우화」의 저자인 이솝은 아주 못생긴 노예였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외교상 큰 공적을 세운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또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가족에게 남긴 유산은 침대와 가구뿐이었다는 사실이나,베토벤은 보기 드문 구두쇠였으며 출연료나 식대문제에 있어 잔소리가 심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공개된다.또 노름에 미친 도스토예프스키,마더콤플렉스에 빠져 동성연애자가 된 프루스트,복잡한 여자관계로 유명한 피카소등의 기행과 사생활을 통해 이들 천재들을 시달리게한 고뇌의 정체가 창작에 얽힌 비밀을 푸는 열쇠임을 알려준다. 홍경호교수(한양대·독어독문학과)는 「천재와 광기」해설에서 『이들 광기의 천재들은 어떻게 세계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펼쳤고,그 의지의 오만불손한 형제인 충동과 욕망을 어떻게 삶의 투쟁속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으로 형상화했는지,그리고 영혼의 위기와 충격뒤의 저 비극적 이완이 어떤 결실로 잉태되고 후세에까지 정신의 거대한 음영을 남길 수 있었는가를 이 책은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 반 개혁세력 극복자신/바티칸추기경에 밝혀/김 대통령

    김영삼대통령은 22일 방한중인 애드문드 캐시미어 쇼카추기경(교황청 재무심의처장)을 접견,한국의 개혁을 지지한다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구두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교황은 『김대통령의 개혁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개혁을 지지하고 성공을 기원하다』면서 『개혁은 항상 어렵고,도전이 많게 마련이지만 신앙과 믿음으로 계속 추진해 꼭 성공하길 빌며 김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고 쇼카추기경이 전했다. 김대통령은 『우리의 개혁에 조직적인 저항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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