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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교월드컵’ 20여개국 한자리

    세계 각국의 종교지도자들이 서울에 모여 종교간 화합과 세계평화를 위한 뜻을 모은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가 8일 개막식(서울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을 시작으로 14일까지 13차례에 걸쳐 진행하는 종교지도자 회의와 ‘종교와 평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따라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한 자리로 중국, 인도, 미얀마, 이라크 등 20여개국 종교지도자 30여명과 국내 종교지도자 200여명, 각계 인사 500여명 등 700여명이 참가한다. 주제는 ‘21세기 세계 평화와 지속 가능성을 위한 종교의 역할’. 행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참석자들의 면면. 스리랑카 대표인 시리세나 반다 헤티아랏치(자웨와테나푸라대학) 교수는 프랑스·스페인·유네스코 대사를 역임했고, 미얀마 대표 타엣 사야도 바단타케사라 대승정은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수행해온 선승으로 현재 미얀마 국립불교승가회의장을 맡고 있다. 중국의 유·불·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의 차세대 불교대표인 스융신(釋永信) 소림사 방장은 1981년 출가해 소림사를 브랜드화한 데 이어 최근 쿵푸 최고수들을 영화계에 진출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해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또 유교 대표인 쿵더반(孔德班) 산둥성 취푸(曲阜)시 상공회 전 주석은 공자의 77대 직계 후손으로 눈길을 끈다. ‘종교화합’이라는 대회의 화두에 따라 테러·전쟁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세션도 이채롭다. 여기에는 나와즈 칸 마르와트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유대교 대표인 예후다 스톨브 예루살렘 종교간협의회(IEA)소장, 모사 바샤 미국 이슬람연합 의장, 힌두교와 시크교를 각각 대표하는 인도의 TD 싱과 모힌데르 싱 등이 주제발표와 토론에 나설 예정이다. 이밖에 루스산트세렌 겔에잠스 몽골 불교연구소장, 성휘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판 아나메데 타이불교도우회 회장과 프라 뎁소폰 세계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등이 처음으로 한국에 온다. 참석자들은 행사 기간 중 조계사를 비롯한 사찰과 명동성당, 순복음교회 등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시설을 차례로 순례할 예정이다. 한편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 정부에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주최 측에 보내온 메시지를 통해 “전통은 세계 평화의 진정한 바탕인 내적 평화로 이르는 길”이라면서 “이런 선물을 잘 간직해 평화를 위한 소망으로 후세에 전할 것인지, 아니면 후세의 미래를 위협하는 무기로 바꿀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종교간 화합을 강조했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깨미동과 떠나는 생각여행](13)영화속 학교 폭력, 무엇이 현실과 다른가?

    ■ 생각열기 영화 ‘싸움의 기술’,‘말죽거리 잔혹사’,‘방과후 옥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혹시, 주인공이 멋있게 느껴졌는가? 약자였던 주인공이 악당 같은 학생을 응징할 때 쾌감을 느꼈는가?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곧 불편해져야 한다. 먼저, 이러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학교를 배경으로 폭력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학교 옥상에서 싸움을 많이 한다. 둘째, 집단폭력과 따돌림을 자행하는 못된 학생들이 있다. 이런 학생들은 대부분 끝이 안 좋다. 주인공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셋째, 그 학생들에게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주인공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멋지게 응징하면서 마무리된다. 넷째,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나머지 학생들은 구경을 하고 있다. 집단따돌림이 벌어지거나 싸움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한다. 영화속 학생들은 누가 싸움에서 이길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다섯째, 싸움이 벌어질 때 선생님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로 싸움이 완전히 끝난 뒤 뒤늦게 수습하러 온다. ■ 생각에 날개달기 학교폭력을 다루는 영화는 현실 세계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영화에서는 갈등의 정점에서 단판의 싸움으로 모든 것이 해소되지만 실제로는 더 큰 폭력을 불러오거나 깊은 상처를 가져온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았을 때 영화에서는 해피엔딩이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증오와 보복이 반복될 수 있다. 영화에서는 폭력이 영상 미학과 결합되어 주먹과 다리를 한대 날려도 멋지게 날리고, 승리의 결과만을 나타내지만, 맞는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히 생략해버린다. 영화에서는 싸우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로 나누어진다. 싸우게 되면 당연히 패배자와 승리자가 생긴다. 영화에서는 약자였던 주인공이 어찌어찌해서 강한 상대방을 이긴다. 승리자와 패배자는 과연 누구인가?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패배자는 싸움을 구경했던 학생들이다. 이들은 마치 무술의 달인들 중 누가 최강자인가를 생각하면서 K1을 즐기듯, 학교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구경한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누구 하나 싸움을 말리는 이들은 없다. 폭력 자체가 우발적으로 벌어졌다고 해도 구경하는 학생들은 그 싸움을 말려야 했다. 말릴 용기가 없었다면 적어도 교무실로 달려가거나, 몰래 나가 경찰서에 휴대전화로 신고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속에서 그런 용기있는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비겁한 고자질이 아니다. 폭력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극히 인권적인 행동이다. 폭력은 그것을 용인하는 구성원들의 문화와 가치에 의해 발생되기 때문이다. 폭력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확고한 개인적 신념이 있다면 폭력의 싹이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 영화는 폭력 이후의 결과에 대해 현실과 큰 차이를 나타낸다. 영화에서는 폭력을 손쉽게 사용하고, 결말을 맺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폭력의 결과로 법적·경제적·사회적·교육적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즉, 싸움 잘했다고 사람들이 박수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법에 의하면 단순폭행죄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과료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집단폭력을 행했거나 무기를 들고 싸운 경우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며, 상습적인 경우 처벌이 가중된다. 학교폭력대책 예방법도 가해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 사과, 학급교체, 전학, 학교에서의 봉사, 사회봉사, 학내외 전문가에 의한 특별교육이수 또는 심리치료, 출석정지, 퇴학처분까지 감수해야 한다. 지금 학교폭력문제는 검찰과 경찰, 국가청소년위원회, 교육부와 교육청, 언론, 국회 등에서 대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따라서 갈수록 가해자와 가해자 부모에게 법적·경제적·사회적 책임을 묻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크게 다쳐 길에 쓰러졌는데,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모른 체하였다. 그런데 당시 하층민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주었다. 이 법은 누군가가 위해를 입거나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 구조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하자는 것이다.‘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의하면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처벌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 법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이 법을 시행하고 있다. 영화처럼 폭력이 얼마 뒤 발생될 것을 알고, 교실에서 집단따돌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방관하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비추어볼 때 구경꾼과 방관자들에게도 가해자처럼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지 모른다. 비록 이러한 가상의 법이 아니어도, 우리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의 늪으로 친구들이 빠져들지 않도록 어떤 식으로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근래 들어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 교내에 CCTV를 설치했지만 그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결국 학생들 한명 한명이 폭력을 예방하고 감시하는 인간 CCTV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주먹이 아닌 합리적 대화로 풀어나가는 사람이다. 또한, 더 큰 승리자는 싸움에 이긴 자가 아니라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이다. ■ 생각 주머니 넓히기 1. 착한 사마리아인법 개정에 대해서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2.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3가지 이상 찾아보자. 3. 매스미디어가 학교 폭력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자신과 친구들의 경험을 나누어보자. 김성천 깨끗한 미디어를 위한 교사운동 안양충훈고 교사
  • [토요일 아침에] 헤링 신부님/이동익 신부 가톨릭대 교수

    어느덧 계절은 한 해의 복판을 지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여 푸름은 날로 더해가고 새들도 저마다 다르게 노래 부른다. 해마다 이즈음이 되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마음도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아름다운 5월,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많은 사랑의 날들을 지내면서 사랑의 기억과 함께 나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바쁜 일상이지만 내게도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한 번 꼭 뵙고 싶은 분들도 있지만 긴 세월을 핑계대면서 그냥 추억 속에 묻어두고 있으니,5월에는 이 때문에 늘 부끄러운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오늘은 로마 유학 시절 은사이신 헤링 신부님을 기억하고 싶다.1949년부터 40년 동안 로마의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가르치셨던 헤링 신부님과의 만남은 교수와 학생의 평범한 관계에서 이루어졌지만 내 일생을 통틀어 매우 운이 좋은 일 중의 하나였다. 그 만남은 어설픈 유학생이던 나에게 작은 충격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부터 그분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만나본 그분은 언제나 포근한 마음씨의 할아버지셨다. 윤리신학계의 세계적인 거장이셨지만 그분의 강의에서는 어떤 박식함도, 예리함도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게 여겨질 정도의 복음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계적인 학자의 강의치고는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부님의 마지막 은퇴 강연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강의는 물론, 신부님의 삶 전체를 아주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강연은 신부님께서 한결같이 강조하셨던 윤리신학이라는 학문에서 가져야 할 복음주의적 시각에 관한 내용이었고, 신부님의 다음 말씀은 내게 매우 생생한 감명을 주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매우 큰 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지구 전체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핵무기로 무장된 물리적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와는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증오와 반목, 전쟁과 미움을 사랑과 우정으로 한꺼번에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힘입니다. 지금은 핵무기에 의한 물리적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복음의 힘이 이 세상을 이기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 변화가 바로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일생동안 헤링 신부님께서는 강단에서, 그리고 수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아주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닮음’을 가르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 복음적 사랑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희망을 심고, 나아가 어두움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 헤링 신부님께서는 ‘박식함’이나 ‘예리함’도 ‘단순함’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참된 지혜를 가르치셨다. 복음의 단순함을 몸소 학생들에게 보여주셨고, 또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단순하고 포근한 모습에 참된 위대함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학기말에 신부님 과목의 시험을 치르러 갔던 때의 일이다. 시험은 모두 구술시험이었고, 낯선 타국에서의 첫 학기 시험에 잔뜩 긴장하고 앉아 있던 나에게 신부님께서는 “어제 차붐이 한 골 넣었는데, 그 축구 경기를 보셨나요?”하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시험 시간의 반은 축구 이야기로 지나갔고, 나머지 시간도 거의 신부님께서 혼자 말씀하셨으니 시험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별로 없었다. 시험 시간이 끝나고 방을 나서는 나에게 신부님께서는 “아주 잘했습니다. 다음 시험도 편안하게 잘 준비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단순함을 몸소 내게 보여주신 신부님, 언제나 포근한 마음씨의 할아버지, 예상했던 성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든 나는 아마 그때부터 헤링 신부님을 존경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동익 신부 가톨릭대 교수
  • [책꽂이]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일레인 페이절스 지음, 하연희 옮김, 루비박스 펴냄) 1945년 이집트의 한 농부가 발견한 초창기 기독교 분파의 성서인 영지주의 복음서 ‘나그함마디’에 대해 설명. 영지주의는 정통파와 달리 창조주 하느님의 속성에 부권 이외에 모권도 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정통파는 예수가 인간으로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의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영지주의는 예수는 신성의 모습을 지녔기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받았지만 그 고통은 보통 사람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이단과 정통파 사이의 갈등을 단순히 교리해석상의 차이에서 생긴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1만 800원.●중국 산서성 고건축 기행(김홍식·조유전 지음, 고즈윈 펴냄) 중국 불교 4대성지인 오대산 주변엔 중국 3대 석굴 가운데 하나인 운강석굴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인 남선사 대전(782년)이 있다. 또 현존하는 목탑 중 가장 오래되고 높은 응현목탑과 화엄사 등 요·금 시기의 절들이 많이 있다. 오대산은 화엄경에 의해 성립된 문수신앙의 중심지로, 우리나라 오대산의 문수신앙도 이를 모방해 시작됐다. 이 때문에 이곳엔 우리나라 고승들도 많이 다녀갔다. 신라의 혜초가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이곳 건원보리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오대산에서 운강석굴까지 낱낱이 답사.1만 2500원.●나를 숲으로 초대한 새들(V N 쉬니트니코흐 지음, 이경아 옮김, 다른세상 펴냄) 러시아의 동물학자인 저자가 60여년 동안 자연 속에서 마음으로 보고, 사랑으로 관찰한 새 이야기. 성대모사의 고수 흰점찌르레기, 사냥의 고수 벌잡이새,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유럽쏙독새(일명 염소젖 짜는 새)와 쇠부리물떼새, 모성으로 충만한 서방갈까마귀·솜깃털오리 등 진귀한 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사람에 대한 동물의 태도는 사람이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1만 2000원.●호랑이(스티븐 밀스 지음, 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200만년전 중국 북부 또는 시베리아 동부에 처음 등장한 후, 눈 덮인 고산지대부터 말레이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빽빽한 열대우림에 이르기까지 한대·열대 기후에 모두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살아온 호랑이. 지상 최고의 카리스마를 뽐내는 호랑이의 생태와 습성을 밝힌다.2만 3000원. ●이토록 행복한 하루(이종승 지음, 예담 펴냄) 도심속 열린 공간 길상사의 사계를 담은 포토명상집. 길상사에는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문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표정의 사천왕이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온화한 자태의 관세음보살상이 반긴다.300점의 사진이 화합과 평화가 공존하는 길상사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전해준다.1만원.
  • [씨줄날줄] 내셔널 지오그래픽/임태순 논설위원

    중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화장해 다리 위에 뿌려달라는 유서와 함께 빛바랜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남기고 죽는다. 프란체스카는 독신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매디슨 카운티 다리에서 우연히 만나 3일간의 짧은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취재지인 프랑스 파리로 함께 떠나자는 킨케이드의 제안을 뿌리치고 가정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있다. 지리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100년 넘은 유서 깊은 잡지다. 미국 지리학회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는 1888년 워싱턴DC에서 비영리단체로 설립돼 ‘인류의 지리 지식 증진과 확산을 위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발간해 왔다.2대 회장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영상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자가 줄었지만 현재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29개국에서 월 800만부를 발행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사진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큐물을 제작·송출하는 방송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2000년 설립됐다. 최근 유다복음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다큐물로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회사 브라이언 스미스 수석 부사장 등이 엊그제 내한해 한국에 관한 다큐물 제작 사업설명회를 가졌다.‘세계로 가는 한국’이라는 주제로 만들 다큐물은 한국이 보는 과학기술의 관점, 현대적인 대형 건물이 건축되는 과정, 야생 동식물 세계에 관한 연구, 발전 현장의 목소리 등 4편이다. 다큐물 제작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과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3억원씩 모두 6억원이 지원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얼마전 18∼24살 사이의 미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지리 지식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90%가 북한이 지도상에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핵이니 지구촌이니 떠들지만 구미인들의 지리적 문맹은 예상외로 심각하다. 한국에 관한 다큐물이 완성되면 세계 163개국에 27가지 언어로 방송된다고 한다. 영화 ‘매디슨’처럼 우리를 세계인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다큐물이 제작되기를 기원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0) 한국철학과 그 교육의 필요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0) 한국철학과 그 교육의 필요성

    지난주의 글(19회) 말미에 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철학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번뇌가 보리를 찾는다는 불가의 말처럼, 현실의 어려움이 철학의 길을 가게 한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철학과 보리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철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한국인이 마음의 풍토병을 깊이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철학은 의술도 아닌데 마음의 풍토병을 고칠 수 있나? 이 병은 약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병은 한국인의 마음의 역사가 공동운명처럼 남긴 흠결이고 습기를 말한다. 그 역사는 국사학자들이 말하는 연대기적인 역사기술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이 표출한 구체적 욕망들이 공동의 무의식적 성향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지난주에 다루어진 열광의식과 추상의 정신도 한국적 풍토병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앞사람들이 쌓은 업적과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다 무시하고 허물어 버리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정치에서도 앞 정권이 해놓은 것은 다 부정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제2의 건국’ 등과 같이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일소하고 새롭게 건국하자고 역설한다. 개인적으로 학자들이 선대의 덕을 안 보고 혼자 자수성가한 것처럼 떠드는 경향이 있다. 자수성가의 위험성은 독불장군(獨不將軍)의 태도와 같다. 한국인들은 독불장군의 행세를 하는 일반적 풍토병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는 장군이 안 되는데, 혼자서 장군이라고 하며 크게 떠들지만 힘이 없다. 해외에서도 어떤 장사로 재미를 보면 다 같이 그 장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모두 망하게 된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렇게 돈을 벌게 하고 나는 다른 방식으로 길을 찾지 않는다. 또 해외 한인들의 약점을 잡아 가장 괴롭히는 것이 같은 동포라는 말을 나는 들었다. 한국인들이 적수공권의 찌든 가난에서 출발하여 지금 세계 11대 무역국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 나라에 대한 긍지를 못 갖고 틈만 나면 해외 선진국으로 이민 가고픈 마음을, 그것도 중산층 이상에서 내는가? 한국은 세계사에서 드물게 종합적으로 성공한 나라다. 과거를 뭉개는 풍토병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속물주의자들은 자기 개인의 이기적 출세밖엔 관심이 없고, 급진주의자들은 단박에 완벽한 사회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해서 우리가 쌓은 업적은 눈에 안 보인다. 세상에 한꺼번에 다 달성되는 사회가 어디에 있는가? 왜 한국인들은 정이 많으면서 모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불친절한가? 마치 예절이 없는 것처럼. 애국심은 있으나 애국의 구체적 방법을 모르는 것 같고, 인정은 풍부하나 다른 이들을 구체적으로 친절하게 배려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끼리 서로 흑백심리로 이전투구를 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와 대처할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없다고 못하겠다. 마음의 병은 마음이 알아야 고쳐진다. 마음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온다. 무명은 무지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마음의 병을 모르고 날뛴다. 각자가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어리석은 마음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복음(23:34)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하는 짓이 얼마나 탐욕과 화의 독성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스타일이 너무 자연스러우므로 자기 체취를 모르듯이 자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처럼 무명이 가장 커다란 마음의 병이다. 자기를 모르는 무명은 자기의 성격에 대하여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다. 의식의 모든 활동은 이 성격의 무의식적 스타일을 통하여 표출되기에 인간은 자기의 성격이 지닌 흠결과 습기를 모른다. 이것이 무의식적 업장이다. 그 업장은 같은 역사적 환경에서 산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형성된 공동습기와 같으므로 이것을 하이데거는 공동운명(destiny)이라고 불렀다. 각자는 다 개성을 띠고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의 창문과 그 틀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판단하므로 그 공통 성격은 한국인의 의식 활동을 제약시키는 집단무의식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 이것을 불교에서 공동업(共同業)이라 부른다. 이 공동업은 한국인의 의식활동을 움직이게 하는 습기의 경향과 같고 저장된 심적 기질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공동업의 장애를 반성해서 씻어내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기획과 구상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의 공사에 불과하겠다. 한국철학은 한국인의 공동업의 무명을 깊이 자성케 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공동업이 풍토병이 되어 우리를 부자유스럽고 불행케 한다. 그것이 한국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어떤 색깔로 채색한다. 그 동안 나는 철학자로서 책을 통해 익힌 철학이론과 한국인으로서 삶에서 느낀 경험과의 어긋남으로 철학적 초점 불일치를 겪어 왔었다. 이론으로 익힌 철학일반의 논리적 보편성과 한국적 삶의 경험이 말하는 실존적 특수성과의 괴리로 늘 자신 없이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나는 방황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때로는 주자학의 용어대로 종본이언(從本而言=본질에 따라 말하기)으로 철학의 보편적 본질을 우선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종사이언(從事而言=사실을 먼저 생각해서 말하기)으로 한국적 사실의 인식을 먼저 사유의 중심으로 잡기도 했다. 그러나 종사이언으로 철학을 전개하면, 나는 어딘지 모르게 보편적 철학의 엄청난 권위의 무게에 눌려 목소리가 자신 없이 기어 들어가는 형국을 안 느낄 수 없었다. 나의 대학시절 은사인 박종홍(朴鍾鴻)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철학은 한국인의 행복을 구가케 하는 길을 보여주는 정신의 작업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내가 한국인의 행복을 구가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적 길닦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나는 나의 몰입이 보편적 이론의 승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늘 유치한 감상주의적 주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부에서 나는 극적인 전환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서양 해체철학의 도움으로 불교와 노장사상의 철학적 진수를 알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늘 이론적으로만 타당하다고 여겼던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보편적 理는 氣의 작용으로 특화됨)의 사상(13회 글)을 이제 내가 나의 진리로 계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불교와 노장사상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마음의 철학을 이통기국화(理通氣局化)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옛날처럼 철학적 진리의 논리적 보편성과 주어진 한국적 사실로부터 철학하기와의 사이에 어떤 괴리도 느끼지 않는다. 철학은 결국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길을 닦아가는 것이고, 그 마음의 병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어떤 차이도 없고 결국 시공적 인연의 차이에서 생긴 다양한 마음의 병들이 실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 마음의 무의식적인 공동운명의 무명을 자각케 하는 ‘길닦기’(opening-way)와 같다는 것이다.‘길닦기’는 하이데거 후기철학의 용어로서, 그것은 고향인 존재의 본성이 사는 마을로 되돌아가는 마음의 길을 닦는 것을 뜻한다. 심적인 습기로 응어리진 병은 가장 급선무로 무명의 자각과 함께 본성에의 길로 나아가는 ‘길닦기’에서 치료가 시작된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마음의 무의식적 병은 그 병을 자각하는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병은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해서 생긴 환상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악몽이 우리를 괴롭히듯이 환상이라 하여 힘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 환상의 자각은 남이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뼈저리게 부자유와 불행의 공동질곡을 참회하면서 일어나는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성의 길닦기로 우리가 회심하게 된다. 공동업은 즉 한국인의 마음의 공동습관과 같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역사 속에서 인연 따라 지은 반복적인 마음의 경향이므로, 그것을 지우는 것은 그 업을 깊이 인식하면서 참회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불교의 유식학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고요히 우리를 깊이 반조(返照)하게 하는 철학교육이 급선무다. 무엇이 철학이고, 어떻게 철학교육을? 동서고금의 제 철학이론의 진열이 철학인가? 철학은 어떤 특정한 정치이념의 주입이 결단코 아니다. 이것은 인간을 어떤 특정한 가치관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제 철학이론의 진열이 자료로는 좋으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살(13회 글)이 느끼는 실존적 아픔을 풀어주지 않는 이론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국사학은 있었지만, 한국사에서 한국인이 반복적으로 느낀 마음의 현재완료적 업을 진솔하게 말해 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우리의 숙업(宿業)을 위선적 가식없이 구체적 사실로서 솔직히 숙고해 보려고 하지 않고, 명분상 추상적 가치관의 캐치 프레이즈로서 정치권력을 등장시킨다. 그래서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한바탕 한(恨)의 칼바람이 일어난다. 이것이 다 공동업의 멍에가 되어서 우리를 짓누른다. 한의 칼바람 앞에서 피고가 되지 않으려고 정치투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안 가린다. 한국철학은 먼저 반복되는 한국인의 공동업을 깨뜨리도록 마음의 자각과 ‘길닦기’를 하는 학문이고, 그 교육은 마음에서 참회와 ‘길닦기’를 실행하는 데에 있겠다. 그러기 위하여 역사적 무명의 자각과 그 자각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도록 마음의 격정을 다스리는 평정의 지혜를 초등생부터 점진적으로 내면화시켜 나가는 데 있겠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자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편년체적인 역사학(Historie)과 역사적인 공동운명의 자각으로서의 역사학(Geschichte)을 엄밀히 구별했다. 한국철학도 한국인의 공동운명의 업이 우리를 억누르는 질곡이 아니라, 우리를 향상시키는 비약의 근거로 작용케 하는 ‘길닦기’가 되어야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신부 뺏기고 감방가고…” 노총각 슬픈 사연

    “휴,신부는 생다지로 빼앗기고 예단비(지참금)도 날려버리고,게다가 감방까지 가야 하다니….어떻게 이렇게 까지 재수가 없습니까?” 중국 대륙에 20대 후반의 한 남성이 나이 어린 여자와 결혼했다가 중매장이가 예단비를 갖고 튀는 바람에 신부를 빼앗긴 데 이어,지불한 예단비마저 날려버리고 미성년자 강간한 혐의로 감방까지 가야 하는 ‘정말 더럽게 재수없는’ 처지에 놓여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7일 중국신문(中國新聞)망에 따르면 이처럼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의 장본인은 중국 중북부 산시(山西)성 장(絳)현 헝수이(橫水)진 쉬관디(徐灌底)촌에 살고 있는 차오훙웨이(曹紅衛·29)씨이다. 차오씨는 얼굴이 그다지 호남형이지 못한 탓에 선을 보기만 하면 퇴짜를 맞는 바람에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지난 10년 가까이 결혼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허사였다 그러던 지난해 4월초 마치 ‘복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같은 현의 취훙싱(屈紅星)이라는 결혼 중매쟁이로부터 결혼 예단비만 조금 마련할 수 있으면 장가가게 해준다는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을 들은 것이다. 흔쾌히 예단비를 주기로 약속하고 차오씨는 선을 봤다.그의 ‘아내’가 될 사람은 구이저우(貴州)성의 아주 편벽한 시골에 사는 겨우 12살의 리(李)모양.하늘 아래 첫동네에 사는 신부 집은 조상 대대로 빚이 대추 나무에 연걸리듯 해 리양은 돈에 팔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오씨는 곧바로 중매인 취씨를 통해 1만 4000위안(약 182만원)의 예단비 명목으로 신부댁으로 보냈다.이어 4월16일 리모양과 결혼식을 올린 뒤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결혼한지 1년여가 지난 이달 초 장인어른인 리모씨가 갑작스레 헝수이파출소에 사기죄로 차오씨를 고소했다.장인 리씨는 중매쟁이인 취씨가 예단비를 갖고 날라버려 아직까지 예단비를 받지 못했다며 딸 리씨를 데려가야 겠다고 요구했다. 차오씨는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며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당신의 딸을 되돌려보낼 수 없다며 완강히 버텼다.이에 파출소측은 이번 일에 대해 수사를 하는 동안 일단 차오씨를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붙잡아 유치장에 넣었다.신부 리양은 아버지 리씨를 따라 고향인 구이저우성으로 되돌아가버렸다.차오씨는 장가 한번 가려다가 바보만 된 정말 안타까운 처지가 됐다. 온라인뉴스부
  • [교정대상 수상자] 본상 수상자 명단

    ■ 교화상 성노수 천안소년교도소 교위 78년 교도관으로 임용돼 28년 4개월간 장기근속하면서 출소예정자 사회적응훈련과 무의탁수용자 지원 및 교육대 운영을 통한 문제수용자 심성순화 등 수용자 재사회화에 열정을 기울여 왔다. 82년 대전교도소에서 수용자가 쇠창살을 자르고 도주하려는 것을 방지했다. 2001년부터 2년간 조직폭력사범, 징벌수용자 등을 대상으로 1200회의 심층상담을 실시,‘천안사랑회’를 조직해 무연고수용자의 영치금 등을 지원하고 사회독지가와 자매결연을 주선하는 등 안정된 수용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 공로상 송희순 영등포교도소 교화위원 서울 고척동에서 대중음식점을 운영하면서 84년 영등포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위촉돼 22년 동안 불우수용자 돕기 등 수용자 교화활동에 참여해왔다. 지금까지 104차례에 걸쳐 무의탁 수용자 780명에게 영치금 1600만원을 지원하는 등 무의탁 수용자들에 대한 경제적 도움으로 갱생의욕을 고취시키고 사회로부터 소외감에서 벗어나 안정된 수형생활을 하는데 기여했다. 95년부터 84명의 무연고 출소자를 취업시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보살펴 줌으로써 재범방지에 기여하기도 했다. ■ 창의상 홍성직 성동구치소 교위 77년 교도관에 임명돼 28년 11개월간 장기근속하면서 사명감과 창의적인 업무로 교정사고 방지 및 무의탁자 상담 등 수용자 교화선도에 기여했다. 89년부터 3년간 보안행정과에 근무하면서 교정시설 방호업무의 기틀을 마련했고 2004년 4월과 9월 장애수형자 및 환자수형자 좌담회를 열어 그들의 고충사항을 적극적으로 처리했다. 또 파키스탄인 등 외국인수용자 57명에게 외국인 수용자 무료법률상담을 실시하는 등 수용자 처우 개선에 기여했다. ■ 자애상 맹세영 대전교도소 종교위원 대전교구청 대전·공주교정사목부 담당 신부로 11년 동안 수용자 신앙지도, 자매상담 및 교회사업지원 등 수용자 교정교화에 참여해왔다. 95년부터 현재까지 250여회 4만 5500명의 수용자들에게 천주교 미사 집전을 했고 2003년 성모상 축성식을 시행하는 등 수용자들이 종교적 믿음을 통해 안정적인 수용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통해 기여해왔다. 2003년 12월에는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운 수용자 가족 50여명에게 200만원 상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 성실상 오상봉 청송 제2교도소 교위 81년 교도관에 임용돼 24년 5개월간 장기근속하면서 탁월한 업무능력과 각종 교정사고 방지, 수용자의 교정교화 및 교정행정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84년 작업훈련을 거부하는 문제수용자와 지속적인 상담으로 직업훈련에 전념케 해 2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하는 등 수용자 교정교화에 기여했다.98년 관구교위로 근무하면서 문제수용자 교정교화를 위해 수용자 1인 1종교 갖기 운동을 전개하고 불우수용자에게 120만원의 영치금을 지원하는 등 수용자 교정교화에 기여했다. ■ 자비상 이천식 강릉교도소 종교위원 강릉시 등명락가사 주지로 86년부터 강릉교도소 종교위원에 위촉돼 19년동안 수용자 종교지도, 정신교육, 불우수용자 생활지원 등 수용자 교정교화 사업에 진력해 왔다.86년부터 지금까지 수용자 2930명에게 정신교육을 실시, 심성순화 및 의식개혁을 도왔고 석가탄신일 수용자 위문 법회 15회 실시,730만원 상당의 위문품을 지원했다. **/ 신앙심 교취를 통한심성교화에 노력했다. 했다. ■ 면려상 서평래 광주교도소 교위 77년 교도관으로 임용돼 29년 4개월 동안 장기 근속하면서 수용자 문맹퇴치, 영치금 지원, 출소자 취업 알선 등 수용자 교정교화에 헌신적으로 기여해 왔다.1998년 소년수용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고운말 쓰기, 서로 돕기, 책 읽기 등 3대 의식개혁운동을 실시하는 등 청소년 교화선도에 기여했다.2004년에는 쓰레기 분리수거 운동을 펼쳐 재활용 자원 10만여㎏을 수집, 판매대금으로 직원침실용 에어컨과 수용자교화용 기자재 빔프로젝터를 구입·설치해 국가예산 610만원을 절감했다. ■ 박애상 백승억 홍성교도소 종교위원 서산 순복음교회 목사로 86년부터 20년 넘게 종교교회 및 신앙지도, 불우수용자 지원, 교화기자재 기증 등 수용자 교정교화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90년 10월부터 불우수용자 450명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치금 등을 126번에 걸쳐 980만원 상당을 지원했다. 2003년에는 자신의 사재 1000만원 등 교정위원 및 참여인사들과 힘을 합쳐 6000만원을 후원해 가족만남의 집을 설립해 86명의 수용자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기여했다.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4)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4)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정동제일교회(서울 중구 정동34·사적 제256호).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자 신자 수 150만명에 달하는 한국 감리교의 요람이 바로 ‘벧엘예배당’이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펴나간 ‘하나님의 집’(벧엘). 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건물 안에는 교회사에 남을 숱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서울시청 건너편 덕수궁 돌담 길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면 정동극장과 이화여고, 시립미술관에 둘러싸인 아담한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크지 않지만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교회 안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게 벧엘예배당. 지금은 주변의 높은 빌딩들에 가려 왜소해 보이지만 1898년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통적인 라틴십자형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을 때만 해도 이 ‘언덕 위의 신식 건물’은 단연 장안의 명물이었다. 하나님 신앙을 상징하는 중앙의 높은 천장지붕과 양측 측랑의 삼랑식(三廊式)에, 출입구에서부터 제단까지 장방형의 긴 수평선을 갖추고 있다. 중앙의 높은 수직과 장방형 긴 수평방향의 내부공간이 유럽 전통의 고딕양식을 띠고 있지만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천장높이의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전통 고딕양식에서 탈피한 느낌이다. 삼각형의 박공 지붕형태가 고딕 교회에서 흔한 뾰족첨탑을 대신하는 게 독특하다. 기둥은 처음 지어질 땐 없었지만 증축과정에서 생겨난 것.4각 또는 원형의 석조기둥이 중앙 신랑과 양측 측랑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 내부 기둥을 통해 가운데 신랑과 양쪽 측랑이 구분되어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창문의 첨두아치와 격자무늬 장식창은 일반적인 고딕형태보다 단순화된 형태로, 나중에 교회창문의 모형이 됐다. 제단은 내부 전면에 4각의 형태로 외부에 약간 돌출되어 있고 내부의 반원형 아치는 전통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들어 들여온 강단 성구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것으로 이후 모든 교회들이 같은 형태의 성구를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1885년 부활절에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서울 정동구역에 일군 역사는 곳곳에 스며 있지만 이 벧엘예배당은 그중에서도 핵심.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의 책임을 부여받아 한국에 파송돼 온 선교사 아펜젤러 일행이 처음 치중했던 것은 선교가 아닌 교육사업이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가 처음부터 선교를 강행하기엔 무리였다. 아펜젤러를 비롯해 당시 선교를 위해 함께 한국에 들어온 일행이 고종으로부터 허락받은 것도 교육과 의료사업에 국한됐다. 그래서 1887년 시작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그같은 분위기에서 본격적인 선교에 앞서 탄생한 한국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벧엘예배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뒤 정동의 조선인 집을 사들여 내실 한 방을 지성소로 꾸며 첫 예배처로 삼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정동예배처’. 한국 감리교와 정동제일교회의 태동지로, 이곳에서 한국선교회가 창시됐으며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남자들은 교회이자 학교인 아펜젤러의 집에서 모였고 여자는 함께 파송된 스크랜튼 여사의 집과 이화학당에서 모였다.1885년 10월11일 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한 한국개신교 최초의 성찬예배가 드려졌는데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창립일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여전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펜젤러는 우선 일본 공관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이 모임이 성장해 서울연합교회로 발전했으며 초대 담임목사로 아펜젤러가 선임됐다. 그러다가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하사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복음선교사업도 본격화되었다. 이같은 흐름을 타고 세워진 게 바로 벧엘예배당이다. 예배당 건립비용(8048.29원, 조선인 모금액 693.03원)은 미국 선교부가 대부분 충당했고 한국의 교인들도 헌금을 했지만 극히 일부분이었다. 건립 당시의 예배당 규모는 길이 70자, 너비 40자, 높이 25자,115평. 지붕은 함석으로 꾸몄고 사방으로 유리창을 내어 자연채광을 하였다.1897년 6월 거의 완공됐을 무렵 배재학당 방학식을 먼저 치렀고, 헌당예배는 그해 12월26일 성탄절에 드렸지만 실제 건물이 완공된 것은 이듬해인 1898년 10월이었다. 2년 반에 걸친 공사 끝에 세워진 벽돌예배당은 단연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당시만 해도 검은 기와나 초가지붕에 흙으로 쌓은 집 일색이었으므로 당연히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이 건물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처음 보는 십자가 모양 예배당 형태 자체는 물론, 남쪽 귀퉁이에 솟은 종탑은 퍽 이색적인 것이었다.“교회당에 지붕을 올린 후 8개월 동안 고종황제를 비롯해 시골에서 온 농부들까지도 교회당의 구조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고 구경하러 왔다. 교인들과 외국인들도 감격에 겨워 교회당 주변을 맴돌았다.”(1897년 아펜젤러 연례보고서) 예배당이 처음 건립됐을 때만 해도 의자 없이 마룻바닥에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았으며 남녀석 가운데에는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다. 예배 때면 창문을 통해 예배 모습을 들여다보는 구경꾼들로 혼잡을 빚곤 했다.“주로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와 찬송소리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창문은 구경꾼들로 메워졌고 제단에 나와 남녀 교인들이 나란히 무릎꿇고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먹고 마시는 그 거룩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혼례도 이곳에서 열렸다. 예배당이 건립된 이듬해인 1899년 7월14일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 두쌍이 합동결혼식을 가진 것으로 이후 이른바 ‘신식결혼’‘연애결혼’이 확산되었다. 벧엘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정동거리는 당시 문학예술인들의 중요 활동처. 나도향 전영택 등이 작품활동을 하며 후진을 양성했고 창조, 백조 등의 주요 문학동인지가 탄생했는가 하면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일제치하 벧엘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정동교회 역시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감리교 대표가 9명으로 이 가운데 정동교회 교인 2명이 옥고를 치렀다. 특히 2만 5000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서울 중심부에 몰려들면서 정동교회 주변에 살던 신자들이 성밖으로 밀려나 예배 참석자가 사뭇 줄었고 1912년 한 해에만도 교인 54명이 상하이, 만주로 망명하거나 이민을 간 것으로 정동교회측은 밝히고 있다. 벧엘예배당은 1916년 북편을 증축한 데 이어 1926년 1500명 수용 규모로 60평을 증축하면서 원래의 라틴십자가형에서 지금의 사각형으로 변해 원형을 잃은 아쉬움이 있다. 6·25전쟁 중엔 폭격을 받아 예배당의 절반가량이 무너져 내렸으며 이때 예배당에 있던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도 부서졌다.1977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문화재 예배당’으로 불려 왔으며 1987년 화재로 소실된 내부 보수와 1990년 종탑 보수,2001년 건물붕괴 우려에 따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kimus@seoul.co.kr
  • 터키 2000년전으로의 여행

    터키 2000년전으로의 여행

    무너져 내린 돌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에 손을 대어보자. 느껴지는가,2000년 전의 그들의 외침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터키 디딤의 아폴로 신전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었던 대표적인 ‘신탁’의 성지였다. 무채색의 올리브 나무, 파란 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듯한 바다와 하늘의 절묘한 조화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해안 도시로의 여행은 낯선 이방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 그리고 지중해 사이에 기묘한 모양으로 떠있는 나라, 터키 여행은 보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또한 지중해를 따라 가득 들어선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들과 아폴로 신전, 고대 기독교 문화의 에페소 등 세계 문명의 흔적들이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시계를 2000년 전으로 맞추어 놓고 코발트빛 바다가 펼쳐진 지중해를 따라 터키를 돌아보자. 글 사진 터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터키 서남부 해안을 달리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좁다란 해안도로가 뻗어 있는 터키의 서남부 해안을 버스로 달렸다. 따스한 봄바람에 실려오는 싱그러운 바다 내음에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로마와 그리스의 위대한 문화를 칭송하듯 하얀 포말을 토해내는 파도의 노랫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시작했다. # 진짜 코발트 블루, 이런 색이야 터키의 지중해 여행은 안탈리아에서 시작한다. 이스탄블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지중해 해안 도시로 터키 관광의 중심으로 불릴 정도로 최고급 호텔과 빌라 등 여행자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편의시설이 많다. 또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탈리아에서 주변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버스투어’는 유럽인들에게는 인기. 첫번째 목적지인 올림포스까진 이름 모를 크고 작은 해변들을 끼고 달렸다. 끝없이 펼쳐지는 파란 하늘과 바다가 하나인 수평선을 보고 있노라니 ‘김형영씨 시’가 생각난다.‘하늘과 바다가 내통하더니/넘을 수 없는 선을 하나 그었구나/나 이제 어디서 널 그리워하지.’ 낯선 땅이라서일까, 슬픔을 간직한 색 ‘블루’때문일까. 뜻모를 슬픔이 가슴을 메운다. 파란 도화지에 흰점 같은 버스는 하얀 선을 그리며 달리고 또 달린다. 올림포스 해변은 로마시대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으며 아직도 해안 절벽 위에는 집터들이 남아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면 도굴되어 겉모양만 남아 있는 AD2세기 오데모스 장군의 묘,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 흔적과 담장 등이 기다린다. 또한 올림포스는 레포츠의 천국으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산과 바다, 계곡이 잘 어우러져 캠핑이나 산장에서 머물며 트레킹, 카약, 스쿠버다이빙, 암벽 등반 등을 즐긴다. 많은 산장 중에 트리하우스가 유명하다. 산타클로스로 유명한 성니콜라스 교회와 바위절벽에 굴을 파 만든 암굴 묘가 있는 미라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 게코바가 있다. 비잔틴 시대의 아름다웠던 도시가 수차례 지진으로 인해 물에 잠겼다. 그래서 지금은 산 정상에 있는 리키아인들의 무덤만 슬픔 역사를 조린다. 하지만 에메랄드빛 바다 속에는 당시의 아름다운 도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했다면 이젠 로마와 그리스의 거대한 문화에 취해보자. # 아폴로 신을 만나다 ‘아폴로 신전’이 터키에도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게코바에서 버스로 2시간을 달리면 디딤이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곳 역시 그리스와 로마시대 번영을 누렸던 항구도시다. 그러나 지금 남겨진 것은 아폴로 신전이 유일하다. 아폴로 신전으로는 그리스 델포이 신전이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터키에도 디딤을 비롯한 아폴로 신전이 두개나 있다. 디딤의 아폴로 신전은 규모 면에서는 그리스 델포이보다 크다. 그러나 온전히 서 있는 기둥이 3개에 불과해 세상에 덜 알려졌다. 디딤의 아폴로 신전에 발을 디뎠다. 인간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신들의 영역은 지금 몇 번의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신전 앞에 뒹굴며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몇 아름도 넘는 기둥에 눈을 감고 손을 대어보았다. 혹시 아폴로 신을 만날까 하고 말이다. BC6세기경에 지어진 이 신전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고위 사제만이 신전 안으로 들어가 하늘의 계시를 듣고 그 내용을 밖에 있는 왕이나 백성들에게 전하는 그런 곳이었다. # 황홀한 로마의 도시 에게해 해안 도시 이즈미르는 오디세이로 유명한 호메로스의 고향으로 터키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셀주크에는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에페소가 기다린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명하며 로마시대에는 25만 명이 살던 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 에페소로 들어서자 기다리는 것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신전의 기둥, 나뒹구는 대리석, 허물어진 건물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기둥 하나, 돌멩이는 모두 로마의 역사다. 특히 에페소는 기독교인이면 꼭 한번 들러보는 성지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갖은 핍박을 받으며 전도를 했던 곳이며 옥중에서 에페소 교인들에게 보냈던 편지가 바로 신약성서의 ‘에베소서’이다. 또한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머물며 요한복음을 썼던 기독교 역사상 아주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에는 없는 것이 없다. 여러 신전은 물론이고 대중들을 위한 목욕탕, 돈을 받고 운영했다는 화장실, 평민과 귀족들의 공간을 나누었던 헤라클래스가 새겨진 기둥문, 병원을 상징하는 조각, 대리석에 새겨진 ‘발’보다 작으면 미성년자로 취급해 들어 갈 수 없었던 창녀의 집, 도서관, 각종 하수도 시설 등 정말 고대 로마의 발달한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원형극장도 두개다. 귀족들이 회의를 했던 작은 것과 무려 2만 5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대중을 위한 원형극장도 재미나다. 과학적인 설계로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뒤쪽까지 잘 들린다. 에페소에서 가장 멋있는 건물은 단연 켈수스 도서관이다. 비록 거의 다 무너져 내려 앞쪽만 간신히 건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건물의 높이가 16m나 되고 1만 2000권의 책을 가지고 있던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대체 2000여년전 기계도 하나 없던 그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대한 신전과 건물들을 오직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따사로운 봄햇살이 내리쬐는 켈수스 도서관 앞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잠시 발을 멈춘다. 한쪽에서 3인조 오케스트라가 관광객을 위해 음악을 선물한다. 정말 2000년 전 그들의 삶이 스치듯 지나간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인근 셀주크 박물관이나 에페소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 터키 여행정보 인천∼이스탄불 직항편은 터키항공(02-777-7055)이 월·목·토요일 1주일에 3차례 뜬다. 현재 전세기를 띄우고 있는 대한항공(1588-2001)도 조만간 주 3회 정식 취항할 예정.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는 약 12시간 걸린다. 시차는 한국보다 6시간 늦다. 통화는 터키 리라인 에테르(YTL)를 쓴다. 1달러에 1.25 YTL 정도.1유로는 1.45YTL. 우리 돈으로 720원 정도. 달러와 유로 모두 통용된다. 미리 달러로 환전을 해서 출국하는 편이 좋다.
  • 복지부동… 삼성공화국…박정희가 남긴 것들

    복지부동… 삼성공화국…박정희가 남긴 것들

    지난해 10월 출간된 ‘유신과 중화학공업-박정희의 양날의 선택’(김형아 지음·일조각 펴냄)은 꽤 주목받았다.‘산업화는 했는데 민주화는 못했다.’라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서이다. 주된 논지는 유신은 중화학공업 추진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는 것인데, 단순히 말해 그 정도 성장하려면 사람 좀 잡아다 족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박정희 시대를 찬미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같은 얘기긴 한데, 그들이 한가지 놓친 점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동력으로 저자는 미국에서 자유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온 경제기획원 관료가 아니라, 오원철 경제수석 같은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를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박정희 시대 성장의 비결은 ‘자유’와 ‘시장’이 아니라 ‘명령·지시’와 ‘충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은 이 대목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오원철 같은 개개인의 증언에 치중하다보니 그 논리에 함몰됐기 때문이다.‘그 땐 그랬지.’하는 선에서 딱 멈춰서버려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남기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후발 산업화와 국가의 동학’(서울대출판부 펴냄)은 주목되는 책이다. 저자 하용출 서울대 교수는 오원철 같은 구체적 인물보다 아예 ‘상공부’라는 부처의 작동방식을 관료제라는 개념틀로 분석한 뒤 이를 국가-사회론으로까지 연결짓는다. 그러다보니 ‘박정희 시대 찬반’이라는 2차원적인 틀에서 벗어나 ‘박정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라는 3차원적 접근이 돋보인다. ●박정희는 관료제를 파괴했다 ‘공무원=복지부동’. 한국의 상식이다. 그래서 관련 정책의 핵심에는 ‘철밥통 깨기’가 놓여져 있다. 그러나 하 교수는 외려 “지금 필요한 건 관료들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주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왜? 지나치게 관료화돼서(나태해져서) 복지부동한다는 것은 서구의 얘기고 우리는 관료제 자체가 파괴돼 불안해서 복지부동한다는 것. 이는 박정희시대에서 비롯됐다. 당시 국가는 오직 ‘초고속 성장’에만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박정희라는 최고 권력자가 구체적인 인사·정책·예산·법령에까지 다 개입했다. 여기다 ‘맨땅에 헤딩’식의 성장법에는 무리수가 따르게 마련. 돌발변수가 속출하고, 여기에 따라 계획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업무계통이 없고 임기응변식 대응만이 살아남는다. 모든 조치가 임의적·자의적·편의적으로 이뤄진다.‘가장 능률적’이기도 하지만, 법과 절차에 따르는 ‘형식적 합리주의’ 원칙이 작동하는 관료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이 틈을 메우는 게 바로 연고주의다. 충성이 강조되다보니 자연스레 지연·혈연·학연을 찾게 된다. 문제는 가장 힘있는 정부가 연고주의에 휩쓸리다보니, 그 떡고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기업 등 여타 사회조직도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것. 이게 지역감정의 시초다. 이 문제는 또 하나의 교훈도 남긴다.“가장 급진적 변화를 추구할수록 그 방법은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입니다.” 구습을 경멸하던 박정희가 결국 구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칭 ‘개혁가’들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국가 이용해먹기’ 변하지 않은 기업의 멘털리티 하 교수는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흔히 박정희시대 국가와 기업에 대해서는 ‘까라면 까.’의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꺼풀만 들춰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하 교수의 설명이다. 국가가 그렇게 요구는 했지만, 그런 요구를 한 국가 자체가 결국에는 기업의 성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기업으로서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물밑으로는 ‘딜’을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들의 ‘불장난’이 시작된다. 하 교수는 당시 관료·기업인들 인터뷰를 통해 60년대 경제개발 초기부터 이런 행태가 시작됐고,70∼80년대에는 공공연히 저질러지고,90년대 이후에는 기업이 정부를 사실상 컨트롤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최근 ‘삼성공화국’ 논란을 대입해보면 의미심장하다. 하 교수는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진단한다.“지금은 그래도 저임금으로 착취했다는 죄의식이 대기업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런 생각은 희미해질 겁니다. 이게 계속 진행되면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느냐, 한국 ‘사회’의 존재 자체가 문제될 겁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리더십이 지금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이런 대기업의 죄의식을 탕감해주면서, 그 대가로 사회적 에너지를 얻어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공동화(空洞化)된 한국 하 교수의 문제의식은 결국 “한국 사회에는 중심이 없다.”는 데 있다.“정권은 5년마다 사라지고, 관료제는 해체됐고, 기업은 국가를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모두 국가·민족 운운하지만 정말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학계는 어떨까. 실명까지 거론하는 거침없는 비판이 나왔다. 좌파지식인에 대해서는 “행동의 필요성 때문에 기계적으로 서구 이론만 적용한 과거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지적했고, 우파지식인에 대해서는 “현 정부만 비난하는 편협한 칼럼이나 신문에 쓰면 지식인 역할 다 한 줄 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구체적 분석 없이 고상한 얘기만 한다는 점에서는 좌·우파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한국 사회과학계에는 ‘지성사’만 있고 ‘사회과학사’는 없다.”,“우리 현실을 치밀하게 파고든 이론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지적들은 꽤 뼈아프다. 사실 이번 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도 한국적 현실에 맞춰 서구이론을 추려내는 과정과 한국 관료와 기업인들에 대한 실증적 자료들이다.10여년 동안 ‘산업화가 한국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그래서일까,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 정리한 종합판은 미국 학계의 눈길을 끌어 코넬대와 워싱턴대에서 영문판으로 먼저 나올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식민시기와 박정희시대 재평가 논란에 대해 물었다.“자의적 권력행사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자의적’이기에 별스럽지 않은 일도 정치문제가 됩니다. 차이가 있다면, 일제는 자기 필요에 따라 움직이니 일관성이 없었고, 박정희는 그나마 우리나라 사람이라 일관성은 있다는 겁니다.” 후속작을 기대케 하는 말이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한국 부흥사계 대부’ 신현균 목사

    신현균 서울 방배동 성민교회 원로목사가 7일 오전 8시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79세. 황해도 수안 출신인 고인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집회 250여 차례, 국내 부흥회 5300여 차례를 인도하는 등 평생 부흥사역에 매진하면서 ‘한국 부흥사계의 대부’로 불렸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준비위원장,88복음화 대성회 대표 대회장,92세계성령화 대성회 대표회장,97민족통일복음화성령 대성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유족은 부인 이태연(78)씨와 영준(50)·광준(48ㆍ이상 목사)씨 등 2남2녀.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예배는 11일 오전 11시.(02)3410-6912.
  • 가롯 유다는 배신자 아닌 희생자?

    ‘가롯 유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일까.?’최근 천주교·기독교계에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소설에 이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는 ‘다빈치 코드’도 있겠으나, 지난 6일 전 세계에 공개된 ‘유다의 복음서(유다복음)’도 빼놓을 수 없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거쳐 진본으로 결론지어진 유다복음에는 예수가 가롯 유다에게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빌려 이 땅에 온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기술되어 있는 등 예수의 요구에 의해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케이블·위성 다큐멘터리 전문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은 21일 밤 12시 ‘유다의 복음서, 진실 혹은 거짓?’을 방영한다. 유다의 복음서가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됐다가 사라진 이후 골동품상에 의해 다시 발견되고 진위 판별→문서 복원→번역 과정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다.1978년 한 농부가 고대 무덤으로 사용됐던 이집트 나일강변 동굴에서 파피루스를 발견했다. 이집트 골동품 시장에 팔려 나간 이 고문서는 종적을 감췄다가 1983년 고대 유물 시장에 다시 등장하지만 판매가 이뤄지지 않아 뉴욕 대여금고에 방치된다. 2000년 스위스 골동품상 프리다 차코스 누스베르게가 이 고문서를 스위스 메세나 고미술재단에 넘기며 비로소 진위 확인과 복원 작업에 들어갔고,5년여 세월을 거쳐 세상에 전격 공개됐다. 이 고문서는 서기 300년쯤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으며 2세기쯤 그리스어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유다복음 원본을 이집트 콥트어로 옮긴 번역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 기존 성서 내용과 분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재연하며 시청자 이해를 돕고 있다. 또 고대 원서, 신학 전문가 등을 인터뷰하며 유다복음에 대한 진솔한 의견도 들어보게 된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 로마네스크 걸작 성공회 서울대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 로마네스크 걸작 성공회 서울대성당

    ‘신을 영접하는 난공불락의 성채’‘거대한 블록으로 짜맞춘 십자가’.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인 서울대성당(서울 중구 정동 3번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비쳐지는 특이한 건물이다.‘한국 유일의 로마네스크 건물’이자 88서울올림픽때 100명의 건축가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지정했던 십자가 형상의 건물. 비슷한 시기의 모든 교회 건물이 천편일률적으로 고딕양식을 따랐던 것과는 달리 로마네스크 양식을 택해 교회 건축의 새 물꼬를 튼 성당이다. 수궁을 낀 서울의 정동은 개항기 열강의 공관들이 앞다투어 자리잡아 ‘한국 서구화의 1번지’로 불렸던 곳.1883년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1885년 러시아 공사관이 차례로 들어서 치열한 외교전을 폈으며 이후 1920년때까지 근대식 학교며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가 덕수궁 북측, 영국대사관 동측에 터를 잡은 것도 이같은 흐름에 편승해서다. 대한성공회의 전신인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의 초대 주교였던 코프(C.John Corfe 1843-1921)주교가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890년 9월29일. 코프 주교는 영국대사관에 인접한 지금의 정동 대성당 자리와 낙동(명동 대연각 호텔근처) 등 두 곳에 성당 터를 마련했다. 일본인은 낙동, 영국인과 한국인은 정동에서 따로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이가운데 정동의 것은 1890년 12월21일 기존 한옥에 십자가를 달아 장림성당으로 이름붙여졌는데 이듬해 11월1일부터 정기적인 미사를 드리기 시작, 공식적인 교회로 출발했다. 대한성공회는 이날을 교회 창립일로 삼는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공회 교회에서 한국인은 아주 홀대받는 처지에 있었던 것 같다. 영어로 진행되는 미사는 외국인들의 차지였고 한국인들은 바깥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한국인은 한참 후에야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장림성당은 1892년에 한옥성당으로 신축되어 1926년 현재의 대성당이 세워질 때까지 대한성공회의 중심성당이었다.‘따로 따로 예배’를 청산하기 위한 새 성당이 축성된 것은 1911년에 부임한 제3대 트롤로프(M.N.Trollope 1862-1930) 주교 때. 트롤로프는 ‘십자가의 승리를 증거할’웅대한 고딕 대성당을 바랐지만 설계자인 아서 딕슨(A.Dixon 1856-1929)의 주장을 따라 로마네스크 건물을 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서 딕슨은 옥스퍼드 출신의 건축 전문가로 “고딕보다는 덕수궁 터의 스카이라인에 잘 어울리고 서양 초대교회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담지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축 경비는 전액 영국에서 모금해 들여왔는데 설계자 딕슨은 건축비는 물론 십자가를 비롯한 모든 성물을 영국으로부터 봉헌받아 일일이 검열해 성당에 안치했다고 한다.1922년 3월에 착공하여 건물이 축성된 것은 1926년 5월2일. 비로소 한 지붕안에 세 가족(한국인, 영국인, 일본인)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국으로부터의 재원조달이 어렵게 되고 일제의 물자동원령에 따라 자재조달이 막혀 원 설계와는 달리 십자가의 좌우 날개부분과 회중석 4개의 공간을 갖추지 못한 채 1자형의 완전치 못한 건물로 마감해야 했다. 성당 헌당식 당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영국 각지의 성당에서 일제히 기념예배가 올려졌지만 정작 한국에선 순종의 국장 중이어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후 1993년 원 설계도를 발견,1996년 증축완성때까지 이 성당은 70년간 ‘미완의 건물’로 남아 있었다. ‘로마풍’이라는 뜻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8세기말∼13세기초 유럽에서 발달한 건축양식. 십자가를 눕혀놓은 듯한 장축형 평면이 기본골격으로,‘뾰족탑’을 연상시키는 고딕식과는 사뭇 다르다. 딕슨의 뜻대로 이 성당은 웅장한 서양 건축과 한국의 전통건축 기법이 맞닿아 있다. 화강암 축조를 비롯해 처마 끝부분 처리, 대성당의 창, 지붕의 한식기와, 그리고 덕수궁의 팔작지붕과 어울리는 사각종탑 등 한국의 전통건축 요소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원만한 경사지에 동쪽 제단과 서측 출입구 정면을 둔 십자형의 1층 대성당은 7개의 큰 공간을 가진 외진과 교차부, 내진, 그리고 배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우 익랑에는 각각 부제단이 놓여 있는데 북측이 성모마리아 제단, 남측이 성십자가 제단. 영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다. 성당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으나 증축공사때 화강석을 깔았다. 외벽은 강화도산 화강석과 적벽돌의 조적구조. 탑은 중앙탑과 인접한 2개의 작은 종탑, 그리고 각 날개 모서리의 소탑 8개가 세워져 있다.성당으로 들어서면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이 성단 끝의 모자이크 제단. 윗부분 반(半)돔에 예수 그리스도가 화려한 색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왼손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적힌 책을 펴보이고 있고 바른손은 위로 향한채 세 손가락을 편 모습이다.아래 중앙에는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왼쪽에는 순교자 스테판과 이사야, 오른쪽에는 요한과 성 니콜라 주교가 각각 독립된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화강암 대제단과 그 중앙의 십자가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주교 14명이 초대교구장 코프 주교를 기념해 기증했다고 한다. 성당 왼쪽에 설치된 파이프 1450개의 파이프오르간도 볼거리.1층 대성당 북쪽 종탑의 계단실과 지하홀을 통해 지하 소성당으로 들어가면 한가운데에 대성당을 건립한 트롤로프 주교의 묘비 황동판이 눈에 들어온다. 황동판 아래에 트롤로프 주교의 영구가 안치되어 있다. 트롤로프는 1930년 영국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일본 고베항에서 배사고를 당해 사망한 비운의 인물.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서의 매장이 금지됐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당시 영국 총영사와 성공회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공회의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서울대성당 건립이 중단되는 불운을 겪은데 이어 일제 강점기 주교가 영국으로 추방되고 해방때까지 일본인에게 교회가 맡겨졌던 것은 아픔으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제4대 주교였던 구세실 주교가 공산군에 납치되었고 선교사와 주임사제, 수녀가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 퇴각하던 공산군이 성당에 따발총을 난사해 지금도 성당의 동쪽 제대 외벽에는 총탄자국들이 선명하다.1970년대 군사정권 아래에선 사제들이 잇따라 연행, 감시를 당했고 예배까지 방해를 받았다.1987년 6월10일 이른바 ‘6월민주항쟁’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가 열려 민주화운동의 횃불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전국 신자 5만명, 사제수 200명에 불과한 ‘작은 교회’ 성공회. 서울 한 복판에서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온 ‘성공회의 얼굴’서울대성당은 시민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려 한다.2년 전부터 매주 수요일 ’주먹밥 콘서트’를 주선해온데 이어 성당 앞쪽 국세청 별관과 성당 사무실을 헐어 시민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서울대성당 보좌사제인 정길섭(48)신부는 “한국 성공회는 신앙과 일반생활을 구분하지 않는 나눔운동과 사회선교에 치중해 왔으며 그 본당인 서울대성당은 닫힌 종교영역에 머물지 않고 지역인들과 공존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kimus@seoul.co.kr 사진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 70년만에 완공된 로마풍 건물 1926년 부분건립이후 ‘미완의 건물’로 남아 있던 성공회 대성당을 원 설계대로 완성하는 것은 성공회의 숙원이었다. 원래의 ‘서울주교좌성당’완공을 위한 건축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93년 4월 대한성공회 관구가 설립되고 초대 관구장으로 김성수 주교가 취임하면서부터. 그런데 자료부족과 함께, 문화재 변경을 문제삼은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의 반대가 문제였다. 남아 있는 자료라곤 대성당 축소모형을 찍은 사진 4장이 전부였고, 특히 서울시 문화재위원회가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인 만큼 성당건물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럴 즈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사에 참석한 한 영국인 관광객이 자신이 근무하는 영국의 런던 교외 렉싱턴 도서관에 성당 건축도면이 보관되어 있다는 복음같은 말을 전한 것이었다. 당시 대성당 증축 설계책임자가 현지로 날아가 원 도면을 찾아냈고 서울시측도 마침내 입장을 바꿔 증축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공사과정도 간단치 않았다. 원래의 벽재와 벽돌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고갈된 강화도산 화강암 석재와 흡사한 중국 칭다오산을 다듬어 들여오고 주황색 벽돌도 경기도 화성에서 흙을 찾아 재래식 노(爐)에 넣어 원래 형태로 일일이 구워내야 했다.6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십자가 양 날개와 아래부분을 증축하고 사제실·세미나룸 교육관의 지하3층을 새로 들여 완공한 것은 1996년 5월2일. 정확히 70년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이다. 서울대성당 김한승(40)신부는 “증축 완공된 서울대성당은 양식은 물론 구조물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을 지키기 위해 공을 들인 초기 건물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5) 소유에서 존재로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5) 소유에서 존재로

    지금까지 독자들은 이 연재를 통하여 소유와 존재라는 낱말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이 두 낱말의 의미는 이 연재를 관통하는 핵심적 철학용어 중의 하나인데, 소유라는 개념은 쉽게 와닿지만, 존재라는 낱말은 다소 어려운 의미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존재론적 사유라고 하면 더 아득해서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그런 말이겠다. 실제로 존재와 존재론적 사유는 쉽게 파악이 안 되는 그런 용어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자. 우리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죽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막상 인생과 죽음과 내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의하기가 어려워진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안다. 그런데 그것들을 내가 소유하려고 하며 또 소유할 수도 있다. 내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들을 남들에게 자랑삼아 으쓱대면서 제시하거나 전시할 것이다. 물론 제시나 전시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일 수 있다. 그런데 인생과 죽음과 나를 물으면, 나는 그것들을 남들에게 소유물로서 제시하거나 전시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의 소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는 인생의 존재를 딛고 서서, 그리고 나를 근거로 삼아서, 죽음의 이전에서만 가능하다. 죽음은 인생에서의 모든 소유의 한계를 뜻한다. 죽음의 너머로 인간은 이승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인간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죽음은 소유의 무상함을 철저히 가르쳐 준다. 죽음은 존재하나 그 누구도 죽음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죽음은 소유의 탐욕을 철저히 고쳐줄 수 있는 존재의 약이기도 하다. 소유는 미술전시회처럼 전시가능한 것, 제시가능한 것을 일컫는다. 또 소유는 명사처럼 분명히 구획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구획짓기가 불가능한 모호한 것은 소유의 싸움을 일으킨다. 돈의 구획이 불분명하고, 권력과 명예가 선명하게 그어지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분쟁이 일어난다. 지식과 도덕도 소유의 영역에 속한다. 지식도 인간이 배워서 소유한 능력이고, 도덕도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공공(公共)의 원리가 되기를 사람들이 원한다. 이 말은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이 도덕을 공통으로 소유하여 그 힘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생이나 나와 죽음 등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나 나는 소유를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되고, 죽음은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한계상황이다. 철학에서 이런 것을 존재라고 명명한다. 인생이나 내가 있기에 소유가 가능해진다. 인생과 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소유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쓸 것인가? 그러나 인생과 나의 구획은 명확하지 않고 대단히 모호하다. 내 인생의 폭과 반경이 얼마나 될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의식을 갖고 있으나, 그 자아의 경계가 얼마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아는 넓게는 하늘의 허공만큼 광대할 수 있고, 작게는 바늘구멍만큼 미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는 구획불가능하고, 그 경계가 모호하다. 또 존재는 전시되거나 제시될 수 없다. 인생과 자아를 전시하거나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내 인생을 보여달라고 하면, 나는 비밀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그것을 전시하거나 제시할 수 없으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나의 인생을 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편을 우리는 현시나 계시라고 부른다. 소유는 전시(展示)나 제시(提示)가 가능하지만, 존재는 오직 현시(現示)하거나 계시(啓示)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유와 존재의 두 번째 차이다. 모든 소유는 대상화가 가능하다. 대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객관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대상화가 가능하기에 내가 그것을 취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그런 대상화가 불가능하다. 인생과 나라는 것은 모든 대상화를 가능케 해주는 근거이지 스스로 대상화가 안 된다. 나의 인생을 대상화해도 그것을 다시 대상화하는 다른 나 자신이 뒤로 물러나 있기에 결국 나의 인생은 대상화가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유는 형이하학적인 물질의 영역에서 기술의 대상이거나 경제적 영역으로서 상품가치를 지닌다. 또 다른 한편으로 소유는 형이상학적 정신의 영역에서 사회생활을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소유해야 할 정신적·도덕적 가치로서 제시될 수도 있다. 이처럼 소유는 가치와 동격의 의미를 지닌다.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람들은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려는 사상은 결국 인생에서 비싼 소유를 많이 지닐수록 더 값나가는 이치와 같다 하겠다(9회 글). 결국 나의 인생은 가치를 소유하게끔 해주는 근거의 역할을 하지, 그 자체가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다. 존재는 명사적 개념으로 쉽게 구획되지 않고 모호하며, 오직 사실을 사실 그대로 현시하거나 계시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고, 또 대상화가 안 되고, 경제기술적 가치나 도덕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본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는 자의식처럼 나의 존재를 근거로 하여 소유가 생기게 되는 그런 근거와 같다고 언급되었다. 즉 존재는 소유의 근거와 같지만, 존재 자체는 철저히 비소유적이다. 그런데 ‘나’나 또는 ‘우리’라는 자의식이 강렬하면 할수록, 소유는 그런 자의식의 강도에 비례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유의식이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이유는 경제성과 도덕성에 있다. 즉 경제성은 자아의 이기심이 좋아하는 이익과 연관되어 있고, 도덕성은 공동체적 우리의식의 공공적 정의가 옳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있다. 경제적 자아의식이든 도덕적 공동체의식이든 다 예리한 자의식활동을 전제한다. 그런 점에서 소유의 가치론인 경제기술학과 사회도덕학은 다 의식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다(2회 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은 가치를 만들고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요청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경제성과 도덕성의 가치창조에 몰입되어 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서 가치창조를 넘어서는 무위법을 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의 현실세상에 맞지 않는 둔세적 사유라고 하여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과거의 서양철학에서도 존재론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철학적으로 존재(Being)를 존재자(beings)로 오독한 철학의 과오라고 지적한 이가 바로 독일의 하이데거다. 과거의 전통 철학은 존재를 존재자로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존재자로 해석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소론이다. 존재자는 존재를 명사적 개념으로 구획가능한 어떤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취급하여,‘신이 존재한다.’,‘사람이 존재한다.’,‘산과 구름이 존재한다.’에서와 같이 주어의 명사들이 바로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개념적 주체와 같은 것으로 보는 그런 철학이 재래의 존재론이다. 이런 철학을 하이데거는 존재자적(ontic)인 사고방식의 철학으로 여겨 존재론적(ontological) 사유와 엄격히 구분했다. 엄밀히 말하여 존재자적인 사고의 철학은 존재론이 아니고 소유론인 셈이다. 왜냐하면 존재자학은 의식이 써먹으려는 소유적 가치의 관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이데거는 포착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사유를 주장하는가? 인생과 세상은 인간이 능위적으로 창조한 경제기술적 가치와 사회도덕적 가치로 황폐화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그 가치들에 의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으로 둘러싸여 세상을 여여하게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으로 꽉 찬 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아집에 먹힌 경제기술적 가치는 탐욕을 부르고, 법집의 분노에 젖은 사회도덕적 가치는 독선의 독기를 세상에 뿌린다. 존재론적 사유는 ‘신/사람/산/구름’ 등의 구분없이 일체의 존재를 명사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존재하다.’의 동사적 방식으로서 읽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서로 연계되어 연기법적으로 얽혀 있어서 우주가 모두 한 몸임을 알게되고, 신약(마태복음 6:25-3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무위적으로 먹이를 먹고 옷을 입는 사실을 대우주의 필연적 존재방식의 선물로서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새와 백합화에게도 그런 존재의 선물을 주는데, 하물며 지혜를 가진 인간에게 어찌 존재하기에 필요한 경제와 도덕의 선물을 주지 않겠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상주의적 공상이 아니다. 이상주의는 이성이 꾸미는 꿈이다. 이것은 그런 꿈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필연법(하느님)의 사실이다. 자연은 필요한 것을 다 보시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이 돈의 탐욕으로 환장하거나 정의의 분노로 흥분하지 않으면, 자리이타하는 본성을 준다. 이것이 또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이겠다.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의 의식이 잘난 체하지 않고 고요히 쉬면, 깊은 마음에서 본성(本性)과 신성(神性)이 다 함께 공명하는 경제성과 도덕성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도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그렇게 살기를 기약하는 지혜닦기에 다름 아니다.14세기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인 에카르트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준 하나의 큰 활용이고, 인간 모두가 다 작은 그리스도라고 언명했다. 석가모니가 용대(用大)로 마음의 활용법을 크게 가르쳐 준 화신불(化身佛)이라고 인도 고승 아슈바고샤(1세기)가 말했듯이(11회 글),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마음의 활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화(肉化)하였다는 것이 에카르트의 가르침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씨줄날줄] 유다와 다빈치/이용원 논설위원

    기독교계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지난 2000년간 신앙의 근간을 이뤄온 메시아, 예수의 정체성에 잇따라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21세기 들어 소설로 발간된 ‘다빈치 코드’이고 또 하나는 서기 3∼4세기에 만들어져 이집트 사막에서 잠자다 발굴돼 최근 공개된 ‘유다 복음’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다루는 것은 일종의 음모론이다.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딸을 낳았고 그 딸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후손을 퍼뜨린다, 이 예수의 후손을 보호하는 조직이 시온수도회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유럽의 역대 지성들이 이 조직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지키고자 ‘예수의 후손’을 부인하고 말살하려 한다는 것이다. ‘유다 복음’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더욱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가롯 유다가 배반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라 밀고한 것이며 따라서 유다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한 유일한 제자라는 주장이다. 이는 부활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는 데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를 초대 수장으로 해 연면히 이어져 온 가톨릭 교회의 토대를 뒤흔들 수 있는 내용이다. ‘다빈치 코드’와 ‘유다 복음’에는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초기 기독교의 한 교파인 영지주의파(그노시스파)에서 나온 자료이거나 이를 토대로 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믿음보다 앎(그노시스)을 중시했다. 믿음은 현상에 관심을 두고 앎은 이면의 실체를 꿰뚫어 본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현재의 기독교 체제가 완성되면서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유다 복음’이 출현하고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끈다고 해서 기독교가 위기에 처하게 될까. 그러지 않으리라 본다. 가령 예수에게 후손이 있다손 쳐도, 유다의 밀고가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해도 예수의 신성이 깎이거나 그를 통한 구원이 외면 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2000년 역사에도 변하지 않는 예수에의 관심을 붓다나 공자가 부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부고]

    ●이성복(대한항공 상무)영복(미국 거주)재호(캐나다 〃)씨 부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9일 오전 7시30분 (02)3010-2293●장태남(한국메이코 전무이사)씨 모친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9일 오전 9시 (02)3410-6920●강군창(전 외환은행 압구정지점장)씨 별세 상욱(글로마케팅 사원)상준(대우건설 과장)씨 부친상 홍지범(부산예문여고 교사)씨 빙부상 7일 서울대병원, 발인 9일 오전 9시 (02)2072-2011●한광세(변호사)광인(사업)광호(〃)씨 부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9일 오전 9시 (02)3010-2265●황지연(사업)성연(신흥동물병원 원장)두연(사업)씨 모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 (02)3010-2295●이윤식(창원인베스트 전무이사)길정(정보통신부 지식정보센터)씨 모친상 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8일 오전 11시 (02)3010-2292●김진식(미리내출판사 대표)진하(현대백화점 상무)진현(장포축산)씨 모친상 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8일 오전 10시 (02)3010-2230●김성범(국방대 서기관)성주(현대자원 이사)씨 부친상 박경서(동양해운 전무)권오갑(복음교회 목사)씨 빙부상 6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8일 오전 10시 (02)392-0699●이태원(지에프씨 인터내셔널 대표)묘원 혜원(고대안암병원 마취과 교수)순원 향원씨 부친상 장혜영(숙명여대 비서실장)씨 시부상 허육(국방대 교수)김덕재(미국 거주)진승환(온라인인터내셔널 대표)박진석(홍익대 강사)씨 빙부상 7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9일 오전 7시 (02)921-3299●양치종(전 제주도교육감)씨 상배 구하(세진 대표)정수(YC통상 〃)창수(서울대 법대 교수)상호(탐라대 교무처장)씨 모친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9일 오전 9시 (02)3410-6919●성기철(인터내셔널패스앤커머스 대표)씨 모친상 7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1일 오전 5시30분 (02)590-2135●나종태(폴리텍 이사)윤태(알루메탈테크 대표)경순 규태(삼성전자 부장)씨 부친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9일 오전 7시 (02)3410-6915●조정규(마포구청 주임)동규(엘아이지화재)씨 부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 (02)3010-2238●임영순(전 강동우체국장)씨 별세 찬빈(다래부동산 대표)준빈(법무법인 한길 실장)현빈(도봉구청 공무원)혜빈(들국화식품 대표)명빈씨 부친상 김완규(글로벌PMCO 이사)씨 빙부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 (02)3010-2261●최종선(바이더앤닷컴 대표)종인(특허청 정보심사팀장)씨 부친상 조선행(기독교음악통신대학)노희천(엔아이정보통신)씨 빙부상 7일 대전 을지대학병원, 발인 10일 오전 6시30분 (042)471-1651●박태근(전 제주은행 감사)씨 상배 박영선(삼성전기 과장)씨 모친상 오상준(한국전력 과장)씨 빙모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 (02)3410-3151●이용희(충북대 의과대 조교수) 은경(삼성종합기술원 전문연구원) 상희(미국 INTEL 연구원)씨 모친상 이창호(삼성전기 차장)씨 빙모상 이희성(우리마을 수련원 원장)씨 상배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 (02)3010-2263
  • “유다 배신은 예수의 지시”

    예수와 제자 가롯 유다의 관계를 기술한 고문서 ‘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의 일부 내용이 공개됐다.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가 6일(현지시간) 처음 공개한 복음서는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등 기존 4대 복음서와 다르게 유다의 배반을 해석하고 있다. 유다가 예언을 실현하려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배신했다는 것이다.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월절을 축하하기 3일 전 유다와 1주일 동안 나눈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기술로 시작된다. “너는 오랫동안 저주를 받게 될 것이지만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너는 모두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너는 인간의 형상인 나를 희생시킬 것이다.” 논란이 되는 복음서 주요 내용들이다. 예수가 유다에게 직접 건넨 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도록 ‘선택받은 제자’라는 점이다. 마가복음에는 유다가 자살한 것으로 돼 있지만 유다복음에는 예수의 용서를 받은 유다가 사막으로 고행을 떠난 것으로 기술됐다. 유다복음 주석서를 쓴 로돌프 카서 교수는 “예수는 자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적보다는 친구를 고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레이그 에번스 교수는 “예수와 유다가 나눈 사적인 대화여서 예수의 공개발언만 기록한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에는 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 카이로의 ‘와타니’ 편집자인 유세프 시드홈은 “이 문서가 유다를 배반자로 보는 기독교의 중심 생각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다복음은 서기 300년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970년대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뒤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법에 따라 진본임이 확인됐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파피루스에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로 적힌 26쪽 분량을 번역,9일 영어·불어·독어 등 세 언어로 출간한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교황 바오로2세 추모사진전 개막

    교황 바오로2세 추모사진전 개막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주관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1주기 추모 사진전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부제 ‘생명 사랑 평화의 순례’)가 4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프레스센터 1층 서울갤러리 전관에서 성황리에 개막됐다. 개막식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사제단, 채수삼 서울신문사 사장, 천주교 생명위원회 위원장인 염수정 주교와 박정우 사무국장, 스테파노 주한교황대사 대리,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인 김홍 KBS 부사장, 평화방송·평화신문사장 오지영 신부, 사진작가 김경상씨, 천주교 생명위원회 홍보대사 JK김동욱씨를 비롯한 천주교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셨던 교황님의 덕을 기리기 위해 준비한 이 사진전이 많은 이들에게 인간생명과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은 “국민들의 기쁨 속에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에게 경하를 드린다.”며 “이번 전시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테레사 수녀의 삶과 뜻, 그 발자취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전시는 교황 생전의 모습과 교황의 고향 폴란드 주민들의 추모 미사 등을 담은 사진 48점과 테레사 수녀의 봉사현장 사진 42점이 출품돼 오는 16일까지 계속된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

    1898년 서울 목멱 자락인 종현(鐘峴)에 우뚝 세워진 ‘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중구 명동 2가1, 사적 제258호).60대 후반을 넘긴 세대에겐 지금도 ‘언덕 위의 뾰족집’으로 통한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45년 해방 후부터였고 원래 이름은 당시의 지명을 딴 ‘종현성당’.1900년 이전 세워진 건물 중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것이면서 가장 순수한 고딕양식의 이 성당은 ‘뾰족집’이란 별명에 걸맞게 전형적인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고딕은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로마교황의 권력이 증대하고 그리스도교가 융성하던 12세기 프랑스에서 완성된 건축양식. 교회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한 앙천(仰天)의 구조가 특징이다. 명동성당 역시 경사지 구릉의 산봉우리를 깎은 정상부에 자리잡아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고 진입로와 성당의 높이가 약 13m의 고도차를 가져 확연히 드러나는 위용을 갖추고 있다. 뾰족한 아치와 궁륭천장, 기둥에 의해 구획되는 6칸의 회중석 공간과 교차부, 두 칸의 익랑(翼廊), 두 칸의 성단(聖壇) 구조의 삼랑(三廊)식 라틴십자형 내부공간이 고딕양식의 전형이라면 단순한 외관과 견고한 벽체의 구조체계와 공법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다. 대부분의 중세 유럽 성당이 서쪽 입구를 둔 동서배치였던 데 비해 정북에서 30.5도 서쪽으로 기울어진 북북서쪽 입구를 가진 남북배치형태는 파격이다. 규모는 건축면적 427.14평, 연면적 612.65평에 외곽길이 68.25m, 외곽 폭 29.02m, 건물높이 23.48m, 종탑높이 46.70m. 그런데 명동성당은 왜 하필 이곳에 세워졌을까. 그것은 성당을 건립한 선교사들이 당시 높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전통을 고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인근 명례방이 한국 최초의 순교자를 낸 천주교회의 태동지임을 의식해서였다. 흔히 한국천주교의 특징은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자생적 신앙’으로 요약된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게 1784년. 한국천주교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이승훈은 현재의 명동 부근인 수표교 근방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베풀고 신앙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이 신앙공동체가 성장해 당시 명동일대인 명례방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신앙집회가 열렸지만,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는 형벌과 고문끝에 1786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이후 100여년간 한국 천주교는 신도 1만여명과 성직자 10여명이 순교하는 고초를 겪었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종현(鐘峴)은 이처럼 한국 최초 교회의 발상지이며 최초의 순교자였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옆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조정에서는 성당터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성당터가 조선왕궁을 내려다보고 있고 특히 조선조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주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정과의 부지 소유권 분쟁이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결국 교회가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아 성당 건립이 이루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천주교를 적대적으로 대했던 정부가 차꼬를 푼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많은 종교시설들이 들어서게 된다. 1898년 축성후 다섯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쳤으며 지금은 외벽공사가 한창이다. 성당 내에는 제구, 가구를 포함하여 많은 고정구조물이 있는데 성당 축성과 함께 마련된 대리석 주제대와 벽돌조의 부제대, 성상과 14처 등을 제외한 모든 게 완공 이후 제작 설치됐다.1920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성성 25주년 기념으로 제작 설치된 강대부분은 해체되어 독서대와 목조제단으로 조립되어 사용되고 있다. 닫집은 강대와 같이 철거되어 주교좌 상부에 설치되었다. 파이프 오르간 역시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25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의 신자들이 모금한 성금 2만원으로 설치됐지만 미국제 전자식 파이프오르간으로 대체된 뒤 현재의 독일 보슈사 파이프 오르간으로 재설치되었다. 복자제대와 79위 복자상본은 1925년 복자시복 때 시설된 것이다. 건립 당초의 14처는 1963년 무렵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었으며 원래의 것은 수유리성당에 보관되고 있다. 바닥도 원래 마루바닥에 의자가 없었지만 1950년대 말 장궤의자가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와 정부수립, 전란기를 거치며 현대사의 중심 공간 역할을 했던 명동성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군사정권에 맞선 ‘해방구’가 되어 1987년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명동성당은 다시 태어나려 한다.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사제들 사이에 “본연의 신앙 터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주변의 문화시설을 아우르는 문화특구 지정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이창영(45·가톨릭신문사사장)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심장이랄 수 있는 명동성당은 교회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치·사회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다.”며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기 위해 초기 교회의 신앙을 바탕으로 생명존중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 명동성당은 어떻게 건립됐나 최초의 순교자를 낸 명례방을 중심으로 창설된 이 땅의 신앙공동체는 처음 북경교구에 소속됐다가 1831년 로마교황청에 의해 조선교구로 설정됐고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이 신설교구의 전교를 맡겼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성당 부지매입에 나섰고 1887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된 뒤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작업이 시작됐다. 조정과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기공식은 1892년 5월8일에 가서야 있게 된다.6년간에 걸친 공사 비용은 성당 축성 직후의 독립신문 등 기사를 볼 때 당시 돈으로 약 6만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비는 부지 매수비용을 포함해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에 의한 것이었으나 신도들의 노력봉사와 성금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은 대부분 조선 정부에서 기와를 굽고 있던, 진흙땅이 있던 용산 한강통 연와소에서 제작해 조달했고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는 청나라에서 초빙했다. 완공까지에는 인부들의 잇딴 사상과 자금난에, 블랑주교와 설계자인 코스트 신부의 사망까지 겹쳐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다.1890년부터 1932년까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기록한 일기에선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읽혀진다. 마침내 성당이 위용을 드러낸 것은 1898년 5월29일. 주한외교사절과 조선 정부의 고위관리들,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 한국 신부들과 신자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축성식이 열렸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글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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