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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하(금지문화금지인생이제야말한다:13)

    ◎암울한 ‘불의 시대’ 지나 이제는 감싸고 흐르는 ‘물의 시대’ 같은 느낌/약한자들 고통과 슬픔 외면못해 뛰어든 노동운동/이념에 갇혔던 ‘사노맹’ 합리적 진보운동 밑거름 기대/정직한 성찰과 반성만이 희망의 미래 열어갈것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9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지난 8·15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시골출신의 노동자로 시작해 급진 이데올로기의 핵으로 활약하다 사형구형까지 받아 7년간 격리된 뒤 준법서약서를 쓰고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인물이다.출감직후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노해씨를 만나 보았다. ­91년 구속될 때와 요즘 분위기의 차이는. ▲당시가 어두운 시절 불덩어리처럼 자기 몸을 던지는 ‘불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열정을 내면화시켜 물처럼 흘러가는 ‘물의 시대’같은 느낌이 든다. ­처녀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언제 쓴 것인가. ▲선린상고 야간 시절 체험한 공장의 불쌍한 삶과 군제대 후 함께 부대끼던 공장과 버스회사 동료들의 짓눌린 모습들을 가식없이 담은 것들이다.작업장과 기숙사 구석에서 작업장 일지 등에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자평한다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본다.사회의 모순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장 분위기를 솔직하게 담았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었다는데 노동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서울에 온 후 공장에 다니면서 계속되는 특근·철야잔업에서 동료들이 손을 잘리는 급박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노동운동 아닌 노동운동부터 시작한 셈이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집필활동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나만의 책상,나만의 펜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단 한순간도 편안히 앉아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원고 전달때도 항상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85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한뒤엔 급진 노동운동가로 바뀌고 노동해방문학에선 정치적인 색채까지 보이는데…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였다.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분신과 구속 시위 등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람이 불에타 죽는 상황에서 시만 쓴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을 부인하다 신동아 90년 12월호에 자전수기를 보내 신원을 밝힌 이유는. ▲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된 金모씨가 조사과정에서 내 본명을 실토했다.수사기관에서 전담반까지 구성해 추적하는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이 박노해로 몰려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수사기관에서 이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판단,이름을 밝혔다. ­사노맹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었나. ▲사노맹은 80년 당시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동해방을 온몸을 다바쳐서 밀고 나갔던 80년대 시대 정신의 절정이었고 시대의 최전선에서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사노맹의 실패 원인은. ▲시대변화에 너무 늦었고 실천과정에서 너무 조급한 게 한계였다.급진 사회주의에 갖혀 당시 정권을 여전히 군사독재로 규정한 채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노맹에 대한 생각은. ▲사노맹 사건은 500명이 구속되고 형량도 2,000년이 넘는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그동안 침묵 절필 삭발정진을 통해 책임을 지려했다.사노맹 관련자들 이 삶의 모범을 통해 극좌이념에 치우친 후배들을 진정하고 합리적인 진보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3년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어떻게 나왔나. ▲91년도 대법원 상고 이유서를 쓸때 이미 창비(창작과비평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었다.진보운동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늦춘 것이다. 극우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모두 돌멩이를 맞았다.합리적 진보쪽에선 올바른 변화라는 평을 얻었다. ­‘참된 시작’에서 사상 갈등과 자기반성이 두드러지는데 그 배경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절대폭압의 조건 속에선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붙든 게 사회주의였다.70∼80년대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살려내기 위해 야수처럼 싸웠다.그러나 사회주의 붕괴를 정직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3년 6월호 ‘사회평론’지에 낸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평에선 진보진영의 반성을 주장했는데… ▲철저하고 정직한 자기성찰과 책임 없이는 미래의 민주개혁과 진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새로운 진보이념과 비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목숨걸고 참구(參究)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계획된 작품은. ▲내년 여름쯤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올 겨울엔 6년만에 세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동양사상과 서구사상,사회적 실천과 내적 영성(靈性) 등 양극대립을 모두 담을 생각이다. ◎격별의 글들/“그래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처절한 노동현장 ‘시다의 꿈’/강렬한 저항·분노 ‘노동의 새벽’/격랑뒤의 깨달음 ‘사람만이…’ ‘시다의 꿈’(83년 시동인지 ‘시와경제’에 발표)에서 ‘사람만이 살길이다’(97년 해냄刊)까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활동하다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박노해씨의 글들은 험난했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다. 박노해란 이름을 처음 알린 ‘시다의 꿈’은 노동현장의 비극성을 그나마 우회적으로 들이민 처녀시였다.“…/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 박노해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8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로 자리매김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훨씬 거칠어진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칠은 땀방울 피눈물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어린이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모두 열악한 작업조건과 억눌린 사람들의 직설적인 고발이다. 그러나 옥중시 ‘참된 시작’과 지난해 발표한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살길이다’에선 사상의 갈등과 반성,그리고 새 생활에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마저 갖게 된다.“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건 앙상하고/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참된시작중 닭갈비)“희망찬 사람은 그자신이 희망이다/길찾는 사람은 그자신이 새길이다/참좋은 사람은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사람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사람만이 희망이다중 다시) 감옥에서 500여편의 작품을 구상했다는 박씨.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만날수 있는 시인으로 바뀌어 새 작품을 구상중이다.80년대 노동계와 시단을 뒤흔들었던 박씨의 새 작품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31년간 불효한 못난 자식 옥중에서 목놓아 웁니다”

    ◎재일 무기수 金嬉老씨/모친 장례식 못간 심정 눈물로 쓴 편지로 띄워 “오늘 아침 어머니께 편지를 쓰던중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장례식 시간에 맞춰 형무소에서나마 어머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어머니와 같이 가고 싶습니다” 지난 68년 일본 시미즈시에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1년째 복역중인 金嬉老씨(70)는 어머니 朴得淑씨(90)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자의 심정을 편지로 대신했다. 朴三中 스님은 5일 오전 11시30분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세레모니홀에서 열린 金씨의 어머니 장례식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중풍을 앓고 있던 金씨의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지난 3일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시립양로원에서 ‘희로야 희로야’를 외치며 눈을 감았다.
  • 부패척결과 국민의식/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로마문화의 위대성을 지적하는 의미다. 그런 로마가 망한 것이 무슨 이유인가.부정부패와 퇴폐·타락 때문이었다. 북송(北宋)의 왕안석은 신법(新法)을 통해 국가 부강을 제시했다.그중 주목되는 것은 부패척결이 선행되어야 나라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부정 공직자는 상하 구분없이 철저히 색출,엄벌하고 백성(국민)도 부정부패의 연결 소지를 근절해야 한다고 역설한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찬란했던 신라의 멸망이나 고려의 최후,조선조의 피침(被侵) 등도 따져보면 총체적 부정부패가 주요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결국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 나라가 최후를 맞았던 근본 이유중 부정부패가 그 으뜸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문제가 돼왔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부정부패를 어떻게 척결하여 대외적으로 한국의 신인도를 올릴 수 있을까. ○규제완화로 ‘관행’ 차단 첫째,각종 규제를 과감히 완화하여 원천적으로 국민들이 담당 공직자와 업무상 은밀한 교섭·거래를 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담당자가 칼자루를 쥐고 눈을 크게 뜨며 관련 서류를 몇번이고 다시 고쳐오게 한다든가 접수를 거부·지연시키는 등 공포적 분위기를 표출해서 ‘부정거래’를 유도하는 듯한 과거의 관행을 이제는 완전 차단해야 한다.각종 규제가 안 풀리기 때문에 공직자에게 아쉬운 거래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허가 등 업무를 민영화해서 중하위직과의 상담 자체를 제도적으로 격리할 필요도 있다.많은 규제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왕안석의 신법에서 지적됐듯이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를 적발하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일벌백계주의로 엄히 처벌하여 이런 부정한 일을 범하면 개인적으로 크나큰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자각심을 심어놓아야 한다.이 점은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지적한 바 있다. 부정부패 관련자들을 얼마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해서 회개케 하는 것도 중요하다.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로비에 천재이기 때문에 상하 담당자와 막후 교섭으로 잠시뒤 원상복귀하는 사례를 목격하곤 한다.기소유예·보석·가석방·주거제한 형식으로 일단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는 파렴치한들을 볼 수 있다.뇌물받은 것을 숨겼다가 복역하고 나와 다시 잘 살 수 있다는 삐뚤어진 생각이 이런 악순환을 연출시키는 것이다. ○일벌백계주의 처벌을 셋째,아무리 공직자가 청렴하게 양심적으로,법대로 하려 해도 국민이 공직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경향도 있다.뇌물을 주어야 일이 잘 되고 빨리 된다는 빗나간 이기주의를 갖고 있는 국민의 의식이 개혁되거나 발상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어느 정부이건 깨끗한 사회,맑고 명랑한 순리의 사회를 만들 수 없다.국민들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는 생각이 정착되어야 된다. 국민의 정부에서 마침 중하위 공직자에 대한 부패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매우 적절한 시기에 핵심적으로 착안한 것이다.위의 세가지 부정부패 척결 제안은 올바른 역사의식이 온 국민들에게 확산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12/‘녹화사업’ 의문사:하(정직한 역사 되찾기)

    ◎‘염세 자살’로 매도된 의문의 죽음들/이윤성­신검없이 징집… 제대 8일 앞두고 죽어/김두황­운동권 리더… ‘애인변심 자살’ 軍 강변/한영현­늑막염 앓아 軍면제 판정 불구 끌려가/최온순­가족 항의로 재수사해 자살 오명 벗어/한희철­새벽 4시 사망… 녹화사업중 고문 의혹 대학생들의 강제징집과 이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었던 녹화사업은 80년대초 연세대생 정성희를 비롯한 여섯명의 죽음과 결부되어 계속 거론되고 있다.대부분 염세 자살이라는 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들과 가족들은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의 강제순화·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 이들 의문사의 직간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다섯명의 의문사를 차례로 알아본다.(정성희는 10월15일자 녹화사업 첫회에 보도) ▷이윤성◁ 81년 성균관대 역사철학 계열에 입학한 이윤성은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사회·역사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었다고 한다.2학년 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동아리의 회장직을 맡았다.82년 11월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에 참가, 여러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됐다.조사 과정에서 동아리 회장이란 것이 밝혀져 11월7일 새벽 신체검사도 없이 군에 끌려갔다. 그는 부친이 60세가 넘은 고령인 3대 독자인데다 시력마저 나빠 상식대로 하자면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83년 1월10일쯤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면회갔을 때 이윤성은 건강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서 짬밥을 제일 잘 먹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뒤늦게 가정환경이 참작돼 5월말 의가사 제대가 결정되었다.제대가 8일밖에 남지 않은 5월4일 이윤성 부모는 아들이 이날 새벽 자살했다는 군당국의 통보를 받았다.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 자료에서 ‘이윤성은 군 수사기관의 조사기간 중에 사망했으나 이 조사는 학원소요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국감 자료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이윤성은 83년 4월19일 소속대 인근에서 북괴가 살포한 월북용 안전보장증 등 불온전단 2매를 습득,본인의 철학개론 책자 속에 보관하다가 4월30일 소속대대 보안담당관 중사에 의해 관물함에서 적발됐다.5월3일 당시 지역 보안부대 대공계장 상사가 월북 용의성 및 전단휴대 경위 등을 조사하고 취침에 들도록 했으나 4일 새벽 2시 반경 용변본다고 밖으로 나가 부대 정구장 심판대에 군화끈 및 요대를 사용해 목매 자살했다.가족 입회 아래 부검을 실시했으며 구타 등의 타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지금도 그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84년 국방장관의 국회보고와 마찬가지로 이 국감 자료도 이윤성이 자살할 당시 제대가 8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두황◁ 80년 고려대에 입학해 경제학과 과대표와 경제학 동아리 회장을 맡은 김두황은 학내활동의 활성화와 민주화를 주도한 고대 운동권 리더의 한명으로 알려졌다.4학년이 된 83년 3월초 학내 학회,동아리 회장들과 호국단 선거,4·19행사 등을 논의하던 중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1주일간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곧 부모와 함께 다시 경찰서로 불려온 뒤 어쩔 수 없이 자원입대서에 서명했으며 즉시 군대로 끌려갔다. 3월18일 입대한 김두황은 3개월 뒤인 6월18일 밤11시 30분 자살했다고 가족들에게 통보됐다.그간 외출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군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훈련 성적이 우수해 사단장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신은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군 당국은 가족들에게 “동료 2명과 경계 근무를 서던 중 ‘소변보러 간다’고 한 후 잠시 있다가 총성과 함께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군은 가족들에게 사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와 화장동의서를 받아낸 뒤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84년 국회에 보고할 때 국방부는 김두황의 사망 원인에 대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전방부대에 배치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내무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군복무에 염증을 느껴왔으며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고심하다가 자신의 소총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그의 고대 학우들은 김두황의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 등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관제’ 사망원인이라고 반박해 왔다. 같이 강제징집된 뒤 죽음의 공포감이 엄습하는 녹화사업을 겪었던 친구 양창욱씨는 “두황이가 고대 운동권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생각하면 나보다 훨씬 심한 녹화사업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영현◁ 81년 한양대 기계과에 입학한 한영현은 민속문화연구 동아리와 야학활동에 참가하던 중 83년 1월 부천 야학선배의 경찰조사 과정에서 이름이 나와 성동경찰서로 연행됐다.경찰서 조사후 4월1일 수원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늑막염으로 병종 판결,군대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그러나 이튿날 경찰서 출두명령을 받고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으며 보름 후 그의 옷이 집으로 우송되자 가족들은 비로소 강제로 군에 끌려간 것을 알았다. 그는 입대후 훈련소에 가지 않고 4월10일부터 18일까지 군 수사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고 뒤에 말했다.6월18일 포상휴가를 나왔는데 그의 팔에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한 피멍이 선명했다고 한다.휴가중 그는 “정신력으로 모든 환경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나 자신이 없다” “기관의 어느 사람을 만나면 의가사로 10월이면 제대가 가능할 수 있지만 죄책감이 너무 크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한다. 귀대한 지 얼마 안되는 7월2일 부대로부터 전보로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불침번 근무중에 분대장의 탄입대에서 실탄 1발을 절취한 뒤 2일 아침 9시 경계근무를 서다 M16 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국방부는 84년,88년 관련보고에서 모두 한영현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강조했다.‘한영현은 모친이 부동산투기로 가산을 탕진하여 부친이 사우디 취업중 귀국해 불화 끝에 모친을 토막살해한 죄로 무기형 복역중이고 형도 소아마비인 것을 고민해 세상을 비관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마치 그의 아버지 사건이 당시에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실은 3년 전인 고3 때의 일이며 한영현은 이 와중에서도 한대 기계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대학 학우들도 그의 학교생활이 아주 건강했다고 말한다. ▷최온순◁ 83년 동국대 사대 수학교육과 3학년이던 최온순은 시위예비 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돼 1주일 간 조사를 받은 후 3월29일 강제징집 되었다. 4개월이 조금 지난 8월14일 군에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로 가보니 그는 벌써 새벽 4시경 숨을 거둔 뒤였다.헌병대에서 나온 사람이 자살이라고 통보했으나 가족들이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강력히 항의하고 영안실의 사체를 며칠간 지키면서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했다고 한다.이에 군 수사대가 재수사를 하여 그 결과 고참병과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는 수정 통보를 얻어내 최온순은 자살이라는 오명을 벗고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공식 군 수사기록은 가족의 항의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철책선에서 같이 복초를 서던 고참 상병이 ‘최온순의 자살을 주장했으나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추궁하자 그의 우발적 살인 범행을 자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4년 국회 보고서는 ‘최온순은 복초근무중 잠을 자다가 고참인 상병이 주의를 주자 이에 반항해 소총으로 가해하려다 상병이 소총으로 위협한다는 것이 잘못돼 오발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강제징집된 뒤 최온순과 함께 훈련받았던같은 대학의 최석민씨는 “한대 때렸다고 해서 고참에게 총을 겨누기엔 그는 너무 밝은 성격이었다”고 아직도 못믿어 한다. ▷한희철◁ 빈한한 가정에서 79년 철도청 장학생으로 서울대 공대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으며 4학년말인 82년 12월1일 군에 자진입대했다.서울대 가톨릭학생회와 성남 대학생연합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등 운동권 성향을 보이자 지도교수가 장학금을 주지 않겠다고 해 일단 휴학을 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해 포상휴가를 두번이나 받았고 83년 10월14일 보름간의 첫 정기휴가를 나왔다.친구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의가사 제대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귀대한 지 한달 쯤 지난 12월11일 자살했다는 연락이 왔다.84년 국방부 사망원인에 따르면 ‘평소 가정빈곤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음을 비관했고 입대전 의식화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정기휴가 때 학원소요와 관련해 도피중인 친구의 주민등록 갱신을 위해 방위병인 다른 친구에게 용지를 훔칠 것을 부탁한 사실이 적발돼 조사를 받고 훈방된후 평소 불만과 주민등록증 절취모의 탄로로 고민하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사망 당시 군 당국의 설명에 의혹을 떨구지 못한 부친 한상훈씨가 끈질기게 알아본 결과 한희철은 12월6일 당시 보안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10일 귀대한 것으로 드러났다.부친은 이때 전기고문이 가해졌고 주민등록증 용지 건뿐 아니라 심한 녹화사업 취조가 행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그의 11일 새벽4시 사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아웅산폭파범 송환 추진/정부,미얀마에 강민철 신병 인도 요청

    정부는 지난 83년 10월9일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 사건의 범인인 북한 특수부대원 강민철(43)의 신병을 우리측으로 인도해주도록 미얀마 당국에 요청한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정부는 사건 직후 체포된 뒤 양곤(옛 랑군) 부근 인세인 교도소에서 15년째 복역중인 강민철이 최근 질병과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실명상태에 이른데다 실어증까지 걸려 미얀마 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의 사면을 검토함에 따라 그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 당국자는 말했다. 미얀마 정부는 그러나 최근 아웅산 수지 여사 등 재야인사 문제로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탄압 논란을 제기받는 등 국내 정치 사정 때문에 강민철의 한국 인도를 약속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 야쿠자 살해 30년째 복역/金嬉老씨 새달 석방될듯

    ◎‘金의 전쟁’ 30년만에 마감/김 대통령 방문계기 일 성의 지난 68년 한국인 차별에 격분,일본인 야쿠자 2명을 살해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0년째 복역중인 金嬉老씨(70)가 다음달초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가석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29일 “한·일 관계를 고려,金대통령의 방일 기간중 일본 법무성이 이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일본 법무성은 지난 8월 朴三中 스님(55·부산 자비사 주지)이 金씨의 가석방에 필요한 신원 인수보증서를 제출하자 현재 이를 심사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재일교포 金嬉老 석방 후원회’의 李在鉉 대표(52·서울 관악구 봉천 3동)는 지난 5월 金대통령 앞으로 金씨 석방 탄원서를 보낸데 이어 지난 16일에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나카무라 쇼지부로(中村正三郞) 법무성 장관에게도 탄원서를 송부했다.金씨가 석방되면 한국에서 살수 있도록 그의 일본의 친지와 부인 頓卿淑씨(51) 등이 인천 부평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해 놓았다. 金씨는 39세이던 지난 68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돼지 같은 조센진”이라고 자신을 모욕하던 이나카와 폭력단 소속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사살했다.이어 45㎞ 떨어진 후지미 여관으로 달아난 그는 20여명의 투숙객을 인질로 잡고 ‘재일한국인 차별대우 시정’을 요구하다 5일만에 기자로 변장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金씨는 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서 30년째 복역중이다.일본 최장기수인 金씨는 아직도 법정대리인과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된 채 지내고 있다. 金씨는 지난 80년 3월 頓씨와 옥중재혼했다. 사건 당시 金씨에게 “일본인에게 잡히느니 자결하라”고 권유했던 어머니 朴득순씨는 지금 95세의 고령으로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 도박중독으로 패가망신/鄭德珍씨 구속 뒷얘기

    ◎94년 출감후 내기골프·포커에 빠져/“하루 3시간 이상 안하면 손이 떨려” 22일 구속된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 鄭德珍씨(57)는 도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鄭씨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하루에 3시간 이상 포커나 마작을 하지 않으면 손이 떨릴 정도였다”고 털어놓았다. 鄭씨는 94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1년4개월동안 복역하고 풀려난 뒤 달리 할 일이 없자 도박골프와 포커 등에 손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내에서 카지노 허가 갱신이 불가능하게 되자 鄭씨는 필리핀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의 W여행사 대표 金모씨를 통해 필리핀에서 카지노 꿈을 키우기 위해 환치기 수법으로 9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455만달러(38억여원)를 빼돌렸다. 그러나 마닐라 슬라이스호텔 카지노 4층에 대한 임대가 여의치 않자 鄭씨는 빼돌린 돈으로 이른바 ‘갑오잡기’와 비슷한 ‘바카라’라는 도박에 빠졌다. 하루에 22만달러 정도를 따거나 잃었다. 한판에 거는 판돈만도 1,000달러에서 1만달러까지 다양했다. 검찰은 지난 5월 鄭씨의 범죄사실을 포착,수사에 착수했다. 혐의사실을 확인한 검찰은 鄭씨를 연행하려다 鄭씨의 맏딸 결혼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를 늦췄다. 鄭씨가 결혼식과 피로연을 모두 끝낸 지난 20일 저녁 무렵 연행한 것. 鄭씨는 검찰의 배려에 감사하며 혐의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는 후문이다.
  • 朴 법무­샤네 국제사면委 사무총장/‘韓國 인권상황’ 설전

    ◎샤네­“장기수·준법서약 유감”/박 법무­“양심자유 침해 아니다” 朴相千 법무부 장관은 10일 하오 집무실에서 피에르 샤네 국제사면위원회(AI·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사무총장과 만나 국가보안법 개정 등 국내 인권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음은 朴장관과 샤네 총장의 대화내용 요지이다. ▲샤네 총장=아직도 (한국에) 장기수가 남아 있는데 대해 유감이다.준법서약서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朴장관=법 준수를 약속할 수 있는가를 묻는 ‘준법서약제’는 사상이나 신념과는 무관한 것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수는 17명으로 대부분 남파간첩이다.우용각씨(69)가 38년으로 가장 오래 복역중이다.70세가 넘는 고령 장기수는 없다. ▲샤네 총장=국가보안법의 남용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많다.국가보안법을 개정할 용의는 없는가. △朴장관=국가보안법은 북에 동조해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완전 폐지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과 같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헌법재판소의위헌결정에 따라 과거의 독소조항을 많이 정리했지만 아직도 일부 모호한 규정이 남아 있다.언젠가는 모호한 내용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IMF 상황에서는 경제회복 문제가 보다 시급하다. 지금 국가보안법 개정을 논의하는 것은 갈등만 일으킨다. 법무부는 현재 과도적인 조치로서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막기 위해 법규정을 엄격히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감독하고 있다. ▲샤네 총장=한국정부가 추진중인 ‘국민인권위원회’의 설립에 민간단체 및 AI의 의견을 반영해주기 바란다. △朴장관=물론 참고할 것이다.오는 10월중 인권법을 국회에 제출,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일인 12월10일 공포할 계획이다. 대통령이 직접 공포할 예정이다.앞으로 인권문제는 정부기관이 아닌 독립된 법인인 ‘인권위원회’가 감시하게 된다. ▲샤네 총장=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강제출국,근로조건의 열악 등 인권침해가 많다.한국은 지금까지 한 사람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朴장관=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서는 검찰권을 행사,시정해나가고있다.인권법에서는 외국인도 내국인과 동일하게 보호받도록 규정할 방침이다.
  • 샤네 국제사면委 사무총장(인터뷰)

    ◎“韓國 인권 상황 나아졌다 보안법 애매한 조항 손질을”/국제감시단 접근 보장 北에 끈질기게 요구 “한국의 인권 상황이 나아지고 있지만 양심수와 사형제도 등 인권침해적 요소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방한중인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피에르 샤네 사무총장은 1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의 인권 개선 조치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샤네 총장은 “지난 9일 金대통령이 내게 멀지않아 개정하겠다고 말했지만 국가보안법의 애매모호한 조항은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기수 석방시 준법서약서를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중인 240명 가운데 40년째 옥살이를 하며 노환에 시달리고 있는 17명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金대통령도 자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들의 석방을 인도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다고 덧붙였다. 샤네 총장은 “金大中정부가 수구세력의 저항과 개혁의 당위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도 현 정부의 인권 개선 의지에 대해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북한의 인권 상황과 관련,국제 인권감시기관의 접근 보장과 유엔과의 협력 관계 구축 등 두가지 사항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세계 인권선언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인 인권선언 지지 서명식이 이날 하오 7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각계 인사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曺洋銀씨 24일 만기 출소/서울고법 원심 확정

    조직폭력 ‘양은이파’ 두목 曺洋銀씨(48)가 오는 24일 만기 출소한다. 曺씨는 교도소 복역중 조직원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 등으로 96년 8월24일 구속된 뒤 1·2심을 거쳐 살인 미수 등에 대해 무죄를 인정받고 징역 2년이 선고됐었다. 당시 대법원이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함에 따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金然泰 부장판사)는 21일 曺씨의 유죄부분에 대해 추가로 인정했으나 형량은 원심대로 확정됐다. 따라서 曺씨의 형기가 오는 23일로 끝나는 것이다.
  • 특사로 풀린 前 한총련 간부 3명/의경 묘소 찾아 뒤늦은 사죄

    ◎96년 연세대 사태 진압중 돌맞아 절명/“일생의 가장 큰짐” 21일 상오 10시30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지난 96년 8월20일 한총련의 연세대 점거농성 진압과정에서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숨진 金鍾熙 의경의 묘소 앞에서는 울부짖는 金의경의 어머니 朴귀임씨(46)와 아버지 金秀逸씨(49) 앞에서 젊은이 3명이 고개를 숙인채 사죄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金의경을 숨지게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해 오다 지난 15일 8·15 특사로 풀려 나온 李承宰씨(29·당시 한총련 정책위원)와 李允熙씨(24·당시 충청총련 의장),朴炳彦씨(25·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이들은 20일 金의경의 기일을 맞아 경기도 수원에 있는 金의경의 집을 찾아가 아버지 金씨를 만나 사죄한데 이어 이날 金의경 묘소에 참배를 하러 온 것. 전날 찾아온 이들에게 술을 사주면서 “그래도 교도소에서 풀려나자마자 찾아온 것이 고맙다”고 했다는 金씨는 숨진 외아들 묘소에 찾아와 엎드린 이들을 보고 모든게 허망한 듯 먼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朴씨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학생들을 애써 외면했다. “벌써 용서가 되겠어요,생떼같은 외아들을 앞세운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됐는데…” 李承宰씨는 “앞으로 내 일생의 가장 큰 짐이 될 것 같다”고 털어놨다.
  • 귀휴 시행규칙 개정령(법령공포)

    ◎배우자 직계존속 결혼·사망·위독때도 귀휴 허용 앞으로 수형자는 그 배우자의 직계존속이 결혼을 하거나,사망 또는 위독한 경우에도 귀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직계 존·비속의 사망이나 결혼때는 휴가를 갈 수 있었으나 배우자의 직계 존속에 대한 규정이 없어 성차별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귀휴 심사위원회에 민간인을 최고 2명까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현재는 공무원 5∼7명으로만 운영이 되어 왔다. 법무부는 17일 시대변화에 맞게 귀휴요건을 확대해 교정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같은 내용의 귀휴 시행규칙 개정령을 이날자로 공포,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귀휴’는 이른바 휴가로서 수형자가 자신의 형기 동안 3번을 갈 수 있으며 한번에 최고 7일까지 가능하다. 이 휴가를 갈 수 있는 수형자는 최소한 1년이상 복역한 수형자로 형기의 2분의 1을 지나야 하고 뉘우치는 빛이 뚜렷해야 한다. 귀휴심사위원회에 교정직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을 최고 2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한 것은 교정행정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와함께 훈련·시험 등과 관련한 귀휴 요건도 ‘직업훈련을 위해서나,기능경기 대회의 준비 및 참가를 위하여 필요한 때,자녀를 입양시키는 때’ 등으로 구체화시켰다.
  • 잔형면제­피선거권 제한/선고실효­실형 없던 일로/특별사면의 유형

    ◎가석방·출소­보호관찰 받아 이번 특별사면은 잔형 면제 및 복권,잔형 면제,형선고 실효 및 복권,형선고 실효,감형,복권,형집행 정지,가석방 및 가출소 등의 유형으로 단행됐다. 잔형 면제 및 복권은 가석방되거나 복역 중인 사람에 대해 남은 형기를 면제해주고 그동안 잃었던 선거권과 공무담임권 등을 회복해주는 조치다. 반면 잔형 면제는 형선고의 효력이 유효해 공무담임권과 피선거권은 제한받는다. 형선고 실효는 통상 집행 유예 또는 선고 유예를 받은 사람에게 형의 선고가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조치다.선고 자체의 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별도의 복권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다만 국가공무원법상 집행 유예기간이 끝나더라도 2년동안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란을 없애기 위해 복권 조치도 병행했다. 감형은 말 그대로 현재 복역중인 수형자의 형기를 단축해주는 것이다.복권은 실형의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 유예기간이 끝난 사람에 대해 공민권 등을 회복시켜주는 조치다. 형집행 정지는 수형자의 형 집행을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다.가석방 및 가출소는 징역·금고형을 받고 복역 중인 피고인을 형기 만료 전에 석방하는 것으로 통상 보호관찰을 받는다. ◎주요 경축 사면 일지 ▲48.9.27 정부수립 기념 일반사면 20,700명 ▲60.10.1 특별사면 14,429명 ▲63.12.16 민정이양 및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 일반 및 특별사면 62,014명 ▲67.7.1 제6대 대통령 취임 특별감형 1,476명 ▲71.7.1 제7대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 4,311명 ▲72.12.27 제8대 〃 6,220명 ▲78.12.27 제9대 〃 4,075명 ▲79.12.23 제10대 〃 592명 ▲80.9.1 제11대 〃 516명 ▲81.3.3 제12대 〃 3,239명 ▲88.2.27 제13대 〃 6,375명 ▲93.3.6 제14대 〃 41,886명 ▲98.3.13 제15대 〃 5,527,327명(행정처분 특별취소 조치 포함) ▲98.8.15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특별사면 7,007명
  • 8·15 사면 가족·각계 반응/“국민화합·제2 건국 계기로”

    ◎全·盧씨 “5·18 12·12 관련자 포함 잘된 일”/朴노해씨 부인 “8년 수발 짐 벗어 기뻐”/민가협 “양심수 360여명 대상 제외 유감” 모두 7,007명의 사면 대상자 명단이 발표된 14일 국민 대다수는 “사면을 계기로 화합을 다지고 제2의 건국을 맞는 계기로 삼자”면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張世東·鄭鎬溶·安賢泰씨 등 12·12 및 5·18 관련자와 全斗煥·盧泰愚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연루자 등 14명이 특사에 포함되자 두 전직 대통령측은 “잘된 일”이라며 환영. ○…權魯甲 전 의원은 복권사실이 발표되자 “대통령과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는 짤막한 소감만 밝혔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 朴노해씨(본명 朴基平)의 부인 金眞珠씨(43)는 사면 소식에 “지난 8년동안 옥바라지를 하면서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었다”면서 기뻐했다. 金씨는 “최근 면회 때 朴시인이 ‘그동안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국민의 정부는 한번 믿어볼 만한 정부’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친딸과 친인척을 상습적으로 폭행해온 남편을 청부살해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林順蘭씨(46)도 형기를 1년4개월 앞두고 15일 가석방된다. 林씨는 “부모 탓에 불행하게 자란 자식들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석방소감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인 사면 대상자 중 93년 5월 살인죄로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아미르 자밀씨(30) 등 파키스탄인 2명이 무기로 감형되는 데는 천주교인권위원회(위원장 金亨泰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한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정부가 대화합 차원에서 사면을 단행한다면서 455명의 양심수 가운데 최장기수 등 360여명을 사면대상에서 제외했다”면서 “헌정질서 파괴나 비리사범을 사면·복권한 조치는 광복절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반개혁적 행위”라고 주장.
  • 朴노해씨­사노맹 주역… 전향 자세보여/석방 인사 면면

    ◎金洛中씨­진보적 통일운동가 무기수/張玲子­2차례 수감… 건강 악화로 나와 이번 ‘8·15특사’에는 대형 공안사건 등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던 각종 사건의 주인공들이 다수 포함됐다. ◇權魯甲 전 의원=국정감사 선처 명목으로 한보그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2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5년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정치적 부담을 우려,지난 3·13 대통령 취임 사면에서는 제외됐었지만 이번에 잔형 면제와 복권조치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난 1월 지병인 당뇨병과 고혈압이 악화돼 검찰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서울 강북삼성병원으로 주거지를 제한받고 있었다. ◇朴基平(필명 박노해),白泰雄씨(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자생적 사회주의세력인 사노맹의 양대 주역으로 91년과 92년에 각각 검거돼 무기징역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朴씨는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에서 일약 ‘얼굴 없는 민중 시인’으로 떠오른 인물.수감 중이던 지난해 출간한 수상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시장경제 옹호론자가 아니지만 결코 사회주의자도 아니다”고 공언하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화제를 뿌렸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白씨는 제헌의회(CA)그룹의 좌파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운동권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렸다.지난해 ‘사노맹 결성은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全斗煥·盧泰愚정권에 대한 이념적 저항운동’이라며 사노맹 해체 및 재건 포기를 선언,金壽煥 추기경과 재야인사 등 141명이 사면·석방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黃仁五·仁郁 형제,金洛中씨(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북한의 ‘장관급’ 여간첩 李善實과 연계,남한내에 대규모 지하당 조직을 주도하다 92년 당국의 수사끝에 실체가 드러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핵심인물들이다. 전 민중당대표인 金씨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55년 월북,북한에 포섭된 뒤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민사협)고문 등을 맡으며 진보적 재야인사 및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 적발돼 무기수로 복역해 왔다.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적발된 黃仁五씨는 사북중 2년 중퇴가학력의 전부로 ,80년4월 사북사태를 주도한 뒤 같은해 6월 부산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기도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중부지역당 편집국장으로 적발된 동생 仁郁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서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했으며,87년1월 북한방송 청취내용을 운동권 최초로 교내 대자보로 부착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운동권 출신. 1심 재판 진행중이던 93년1월 서울대 교수들이 선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張玲子씨=건강악화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張씨는 82년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에 이어 94년에는 거액의 어음부도 사건을 일으켜 세간을 두번 놀래킨 큰 손.82년 당시 남편 李哲熙씨와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92년 잔형 5년여를 남기고 가석방됐으나 107억여원을 편취하고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2년여만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鄭守一씨(무함마드 깐수)=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암약한 고정간첩으로 96년 검거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이번에 감형됐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張世東·鄭鎬溶씨 사면 포함/朴 법무 대통령에 보고

    ◎金賢哲·洪仁吉씨 제외 법무부는 5일 오는 8·15 특별사면 대상에 12·12 및 5·18 사건으로 복역했던 張世東·鄭鎬溶씨 등을 포함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으로 도피한 朴熙道·張基梧씨는 제외할 것으로 전해졌다.金賢哲씨와 洪仁吉 전 의원도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이와 함께 일반사범 1,700여명과 소년원생 400여명 등 2,100여명을 가석방 및 가퇴원시킬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특별사면 대상자 결정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므로 아직까지 구체적인 대상과 인원은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오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사면대상을 의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朴相千 법무장관은 이날 하오 이같은 내용의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8·15 특별사면’ 계획을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 야쿠자 살해 30년째 복역/金嬉老씨 연내 풀릴듯

    ◎박삼중 스님이 신원 보증 【도쿄 연합】 지난 68년 한국인 차별에 격분,일본인 폭력배를 살해한 죄로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서 30년째 복역중인 재일동포 무기수 金嬉老씨(70)가 올해 안에 가석방 등 특별조치로 풀려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金씨의 석방을 위해 힘써 온 한국의 朴三中 스님은 최근 일본을 방문,구마모토 형무소장에게 金씨의 석방에 필요한 신원인수보증서를 제출하는 한편 金씨에게도 이같은 내용을 알리는 서한을 전달했다. 金씨의 신원인수를 위한 보증서가 제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金씨가 가석방 될 경우 관련법규에 따라 출소후 신원인수자인 朴스님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 공안사범 80명 준법서약 제출시한 8일까지 연장

    법무부는 2일 오는 8·15 사면과 관련,준법서약서를 내는 공안사범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서약서 제출시한을 당초 1일에서 오는 8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준법서약서를 제출한 공안사범은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중인 朴노해씨 등을 포함해 8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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