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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의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에서의열독립투쟁을 전개한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1883∼1921)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3년 충남예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남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으로참여했고 경술국치이후 충청지역 동지들을 모아 부여를 방문하는 조선총독암살계획을 모의했다. 선생은 1917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의열투쟁이 여의치 않자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충청도지부장을 맡아 조직 확대,군자금 모금,악덕지주 및 친일부호배 처단 등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대한광복회 조직이 적발되면서 충청도지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1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1921년 7월28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효봉스님은 판사 아니었다

    ‘일제 초기 최초의 조선인 판사로 알려진 효봉(曉峰·1888∼1966) 스님은판사가 아니었다’ 경기도 이천 지족암에 한거하고 있는 혜봉(慧峰) 스님은 최근 발간한 ‘종정열전’(가람기획)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효봉 스님의 판사이력을 부정,주목을 끈다. 효봉 스님은 한국인 최초의 판사로 임용돼 평양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 재직하다가 사직서도 쓰지않고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연보와 그에 관한 기록엔 빠짐없이 판사이력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혜봉 스님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직원록’ 등 관련문헌을 훑어봤지만 효봉(속명 이찬형) 스님이 판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혜봉스님은 ‘한국법관사’(1981년 법원행정처)의 법관 명단,‘조선총독부직원록’(1911∼1925년 조선총독부)을 샅샅히 훑었지만 효봉 스님의 속명인이찬형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 온 일본인 판사가 함께 판사로 활동했던 이홍종을 효봉 스님과 착각했거나 스님의 연보 등 문헌이 처음부터 잘못됐을것이라는게 혜봉스님의 주장이다. 김성호기자
  • [정직한 역사 되찾기 34] 친일의 군상

    친일파 가운데는 부자,형제,부부,사돈간 등 일가족이 집단으로 친일대열에섰던 경우가 더러 있다. 부자간에 친일을 했던 인물로는 ‘조선어 전폐론’을 폈던 현영섭과 그의 부친 현헌(중추원 참의),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용구와 그의 아들 이석규,그리고 부자가 모두 일제하 고급관리를 지낸 손지현-손영목 부자가 대표적인 예다. 형제로는 고급관리 출신의 송문화-송문헌 형제,‘밀정형제’로 유명한 선우순-선우갑 형제 등이 있으며 부부간에는 만주에서 일본군 밀정을 지낸 이종형-이취성 부부와 초기 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변절,밀정을 지낸 오현주-강낙원 부부가 유명하다. 또 사돈간에 친일을 한 집안으로는 매국노 송병준과 을미사변의 주역으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구연수가 서로 사돈간이며 구연수의 아들 구용서는 일제하의 은행원 출신으로 해방후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을사5적’의 하나인 이하영은 한일병합후 중추원 고문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이종찬은 일본육사 49기생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부자간에 친일을 한 경우로는 민병석-민복기(전 대법원장) 부자도 빼놓을수 없다.민병석(閔丙奭·1858∼1940)은 여흥 민씨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척족이다.좌찬성 민영휘의 손자이며 민경식의 아들로 충남 회덕에서 태어났다.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오른 그는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호위한 공로로 척족 가운데서는 일찍부터 권력의 핵심에 든 사람이다. 1884년 성균관 대사성에 이어 승정원 도승지,예조참판,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9년 11월 평안감사로 임명돼 1894년까지 재직하였는데 이때 당오전 발행을 남발,민중들로부터 원성을 샀다.평양시절 그는 대원군 계열로 몰려 당시 평남 순천에 유배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알게 돼 그를 장위영 영관으로 천거하였다.우범선은 나중에 친일훈련대 대대장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즉 ‘을미사변’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이 민씨 집안의 척족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1895년 일본 낭인집단의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민씨 척족의 정치세력은 급격히 쇠퇴하였다.그러나 그만은 여전히 지위를 보전하였다.이듬해2월 그는 정2품 궁내부 특진관(칙3)에 임명됐으며,1898년 이후 농공상부·궁내부·학부·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거쳤다.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친일·친러정권을 넘나들며 승승장구하였다.이런 그를 두고 고종은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내치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민병석의 대표적인 친일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서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에 앞장선 사실이다.‘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앞서 그는 조정의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伊藤博文)를 초빙해왔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공로로 그는 육군부장·표훈원총재·시종원경 내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1909년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자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정부측 조문사절로 도일,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912년에는이강공(李堈公)을 수행하여 일왕 메이지(明治)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있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직에 있었다.당시 청와대 경호실장격인 시종원경은 낙선재 윤비(순종의 황후)의 백부 윤덕영(尹德榮)이었는데 이 둘은 이완용(李完用)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병합반대론’을 무마,조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이 둘은 궁중담당이었다.‘한일병합’의 1등공신인 이들은 병합후 모두 일왕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으로 매국공채를하사받았다.이때 민병석은 훈1등 자작(子爵)과 매국공채 10만엔(현 시가 10억원 정도)을 받았다. 일제치하 1911∼19년까지 이왕직 장관을 지낸 그는 1925년 7월부터 14년 3개월동안 중추원 고문을 지내다가 1939년에 중추원 부의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사망 직전까지 그는 일생을 친일로 일관했다.공직 이외에 그는 틈틈이 친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중일전쟁 직후 귀족·고급관리 부인들의금비녀 수집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하기도 했고,조선사편수회 고문·왕공족심의회 심의관·조선귀족세습재산 심의회원을 지내기도 했다.또 서예,특히 행서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선전(鮮展)의 심사위원도 지냈다.사망 직전 종2위 훈1등까지 올랐던 그는 1940년 8월 6일 도쿄 스가모(巢鴨)의 강락(康樂)병원에서 설암(舌癌)으로 사망하였다.그의 나이 82세 때였다.그의 자작 작위는 동년 11월15일 장남 민홍기(閔弘基)가 습작하였다. 역대 정권에서 법무차관·장관,검찰총장,대법원 판사,대법원장(5·6대 연임)을 지낸 민복기(閔復基·창씨명 岩本復基·1913∼생존)는 민홍기의 동생이다.1937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38년 3월 사법관 시보로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이후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해방 직전인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승진하였다.평소 얘기할때 입가에 거품이 생겨 ‘민(閔)사이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해방전후를 통틀어 법조계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법조계 내외에서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의 소지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사법부의 수장(首長)으로서는 그의 말대로 ‘제삿상의 대추·밤’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대에 걸친 친일집안은 이제 역사속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이 집안이 명문가로 불리는 것이 마땅한지는 후세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 「대쪽판사」부친 이어 학계서 두각/「이수성 총리 4형제」 스토리

    ◎동경대수석졸업 외삼촌 영향 “학문의 길”/모두 서울대 출신… 세동생부인도 강단에 이수성 국무총리 내정자는 명문가 출신으로 4형제 모두 그 맥을 잇고 있다.맏아들로 서울대 총장출신인 그에 이어 수인(54)수윤(52)씨는 교수로,수억씨(50)는 언론인으로 재직하고 있다. 부친 이충영씨(6·25때 납북·작고)는 일제 때 동경제대를 나온 법조인 출신.일제때 평양 복심법원 판사로 재직중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판사직을 내던지는 등 「대쪽 판사」로 명성을 날렸다. 어머니 강금복여사(85)도 일본 여자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재원이다.외삼촌 강정택씨 역시 제일고보(현 경기고)를 거쳐 동경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경대 강단에 섰던 인물이다.이총리 내정자 가족들이 학문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외삼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4형제는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이총리 내정자는 법대,수인씨는 경제학과를 나와 정치학과로 학사편입,수윤씨는 문리대 철학과를 나와 정치학과로 학사편입,수억씨는 정치학과 출신이다.이총리 내정자와 수인·수윤씨는 서울고 동문이고,수억씨는 경기고를 나왔다. 이총리 내정자 집안은 대부분이 교수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그에 이어 수인씨는 영남대 정외과,수윤씨는 교원대 철학과 교수다.또 수인씨의 부인 김인자씨는 영문학,수윤씨의 부인 권희경씨는 음악전공으로 대학강단에 서고 있으며 수억씨의 부인 전수용교수도 경희대 영문과 교수로 있다. 하지만 4형제가 걸어온 길은 저마다 다르다.형법학자로 지난 72년 이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해 온 이총리 내정자는 지난 1월 직선 최다득표로 서울대 총장에 선출되는 등 교수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영남대 교수인 둘째 수인씨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청맥회」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수인씨는 젊은 재야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정치연구회」회장을 지내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이때의 인연으로 국민회의 김대중총재에게 발탁돼 지난 90년 밀입북혐의로 구속된 서경원의원이 내놓은 전남 함평·영광지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영남사람임에도 당선돼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셋째 수윤씨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온 두 형과는 달리 학문에만 몰두해 왔다.지금은 교원대 교수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있다.서울고 시절에는 「교내 제일의 주먹」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넷째 수억씨는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고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가 SBS출범 때 언론계에 몸담았다.
  • “개혁 성향”… 강직한 성품의 법학자/새 총리 이수성은 누구인가

    ◎서울대 두번째 직선총장… 학생에 인기/신군부에 고초… 「3형제 교수」로 명망 15일 국무총리에 내정된 이수성 서울대총장은 신의와 도덕성을 중시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법학자로 통한다. 주위에서는 이총장의 이러한 성품이 평가받아 국무총리에 전격 발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총리 내정자는 학문적 업적 뿐만 아니라 보직 교수 시절 많은 일화를 남겨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80년 5월 서울 전역에서 시위가 한창일때 서울대 학생처장으로 서울역에 모인 시내 28개대 학생대표들과 대화를 갖고 「일단 해산및 안전귀가」를 약속한 뒤 당시 김종환 내무장관과 담판,이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또 집회를 마친 학생들에게 먹을 것은 주어야 한다고 주장,서울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준비케 해 5천명의 학생들에게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돼 수사기관에 끌려가 8일동안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지난 2월 교수·학생·교직원 등 전체 대학 구성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아 서울대의 두번째 직선총장으로선출됐다.이보다 앞서 88년에는 첫 직선제 법대학장으로 뽑혀 임기 2년을 채웠었다. 취임 이후 3월에는 제38대 총학생회 발대식에 참석해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84년 총학생회 부활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총리 내정자는 일제하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재직중 창씨개명을 거부,쫓겨난 고 이충영 변호사의 장남이다.그 밑의 동생 두명도 교수로 재직중이다.아버지 이변호사는 그 뒤 납북됐으며 어머니가 8남매를 키웠다. 영남대교수인 수인씨(54)는 경북 칠곡 출신이면서도 90년 평민당 공천으로 전남 영광·함평지역 보궐선거에 출마,당선된 이색전력을 갖고 있다.수인씨는 당시 공천결정 18일만에 국회의원이 돼 지역감정해소에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한국교원대교수인 수윤씨(52)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활발한 저서활동을 벌이고 있다.「사회사상사」「역사철학」「서양철학사」등의 저서를 냈다. 이총리 내정자는 특히 형사법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한국형사정책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피해자학회 부회장·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이사로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이사로 참여한 것은 서울대법대 동기로 절친한 친구인 정해창 전법무부장관의 권유에 의해서이다.그동안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에도 여러번 물망에 올랐었다. 국교동창생인 부인 김경순씨(57)와 1남 1녀가 있다.아마 4단의 탄탄한 바둑 실력을 갖고 있다.
  • 「기록… 광복 50년전」 개막/희귀문서·사진 5백여점 전시

    ◎서울신문 후원/오늘부터 12월10일가지 총무처서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이 10일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층에서 개막된다. 이에 앞서 총무처는 9일 이홍구 총리 박영식 교육부장관 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 김기재 총무처장관 손주환 서울신문사장 김광일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조용직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가졌다. 총무처가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의 후원을 얻어 오는 12월10일까지 3개월간 개최하는 이번 전시회에는 문서와 사진등 5백여점의 자료가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특히 ▲고 백범 김구선생 장의에 관한 건등 정부수립 직후의 국무회의록 ▲4·19혁명때 비상계엄 선포및 공민권 제한 심사기록 ▲62년 1월6일 공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철 ▲포항종합제철 건설 관련문서가 포함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일제시대 자료 가운데는 ▲1922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1920년대의 서울(경성) 전도 ▲1932년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1930년대말 조선총독부의 군 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미곡·면화 공출문서 ▲일본 후생성에서 수집한 것을 지난해 외무부가 이관받은 징용자명부 ▲194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작성한 수양동우회 판결문 등 희귀자료가 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갑오개혁 직후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내려진 판결문을 「국권회복운동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본으로 발간했다. 전시회가 열리는 정부기록보존소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 117 경복궁 서문(영추문) 맞은편에 있으며,전화는 (02)720­4415이다.
  •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 10일 개막

    ◎징용자 명부 등 희귀자료 5백여점 전시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긍심 함양,기록보존문화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기 위해 오는 10일부터 12월10일까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을 개최한다. 총무처가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 후원으로 개최하는 이 전시회에는 문서와 사진등 5백여점의 자료가 멀티슬라이드와 멀티미디어등 첨단 영상기법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전시된다. 특히 ▲고 백범 김구선생 장의에 관한 건등 정부수립 직후의 국무회의록 ▲4·19혁명 때 비상계엄 선포및 공민권 제한 심사기록 ▲62년 1월6일 공표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철」 ▲포항종합제철 건설 관련문서등 처음 공개되는 문서가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일제시대의 자료 가운데는 ▲1922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1920년대의 서울(경성)전도 ▲1932년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1930년대말 조선총독부의 군 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미곡·면화 공출문서 ▲일본 후생성에서 수집한 것을 지난해 외무부가 이관받은 「징용자명부」 ▲194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작성한 수양동우회 판결문등 희귀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총무처는 이와 함께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갑오개혁 직후부터 국권상실 직후까지 내려진 판결문을 「국권회복운동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영인본으로 발간했다. 이번 전시회는 「건국의 여명」 「조선조의 사고(사고)」등 6군데의 특별코너와 「시련에 선 왕조」 「광복의 환희」등 11군데의 일반코너및 시청각실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조선조의 사고」에는 국보 제151­2호인 태백산본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본등 자료를 조선시대의 사고 사진과 함께 전시해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기록보존문화를 과시하고 있으며,북한에서 발행한 번역본인 「이조실록」까지 전시해 흥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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