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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黃秉泰·金佑錫씨 막판 사면 제외”/朴 법무 일문일답

    ◎金賢哲씨 아직 형 확정안돼 대상 아니다/준법서약 안쓰고 풀려난 사람은 없어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14일 사면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초 洪仁吉 전 의원은 물론 黃秉泰 전 의원,金佑錫 전 건설부장관도 사면 대상에 포함돼 있었으나 최근 새로운 범죄사실이 드러나 사면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에 대한 사면이 한때 거론됐는데. ▲金大中 대통령이 賢哲씨에 대해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사면을 지시한 적은 없다.賢哲씨의 경우,본인과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서 불복이유에 대해 심리 중에 있다.형이 확정되지 않은 만큼 사면대상이 아니다.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사면된 공안사범이 있는가. ▲한명도 없다.준법서약서 제출 사범 104명 가운데 103명이 석방 및 감형됐다.나머지 한 명은 상습 절도범으로 엄밀히 말해 공안사범이 아니어서 빠졌다. ­12·12 및 5·18사건 관련자들의 복권과 관련,국민 정서상 이르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미 같은 사건으로 사면복권된 全斗煥·盧泰愚 전대통령과의 법적 형평성을 고려했다.열린 마음으로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대화합의 취지로 이해해 달라. ­미전향 장기수 17명에 대한 후속조치가 있는가. ▲17명은 남파간첩들이다.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으며 행형성적도 좋지 않다.가까운 시일내에 이들에 대한 조치는 없다. ­이번 사면에 이른바 ‘양심수’가 포함됐나. ▲법무부는 양심수 대신 공안사범이나 공안관련사범이라는 용어를 쓴다.사면된 공안사범 중 외부에서 말하는 양심수가 있을 수 있다.
  • 잔형면제­피선거권 제한/선고실효­실형 없던 일로/특별사면의 유형

    ◎가석방·출소­보호관찰 받아 이번 특별사면은 잔형 면제 및 복권,잔형 면제,형선고 실효 및 복권,형선고 실효,감형,복권,형집행 정지,가석방 및 가출소 등의 유형으로 단행됐다. 잔형 면제 및 복권은 가석방되거나 복역 중인 사람에 대해 남은 형기를 면제해주고 그동안 잃었던 선거권과 공무담임권 등을 회복해주는 조치다. 반면 잔형 면제는 형선고의 효력이 유효해 공무담임권과 피선거권은 제한받는다. 형선고 실효는 통상 집행 유예 또는 선고 유예를 받은 사람에게 형의 선고가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조치다.선고 자체의 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별도의 복권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다만 국가공무원법상 집행 유예기간이 끝나더라도 2년동안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란을 없애기 위해 복권 조치도 병행했다. 감형은 말 그대로 현재 복역중인 수형자의 형기를 단축해주는 것이다.복권은 실형의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 유예기간이 끝난 사람에 대해 공민권 등을 회복시켜주는 조치다. 형집행 정지는 수형자의 형 집행을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다.가석방 및 가출소는 징역·금고형을 받고 복역 중인 피고인을 형기 만료 전에 석방하는 것으로 통상 보호관찰을 받는다. ◎주요 경축 사면 일지 ▲48.9.27 정부수립 기념 일반사면 20,700명 ▲60.10.1 특별사면 14,429명 ▲63.12.16 민정이양 및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 일반 및 특별사면 62,014명 ▲67.7.1 제6대 대통령 취임 특별감형 1,476명 ▲71.7.1 제7대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 4,311명 ▲72.12.27 제8대 〃 6,220명 ▲78.12.27 제9대 〃 4,075명 ▲79.12.23 제10대 〃 592명 ▲80.9.1 제11대 〃 516명 ▲81.3.3 제12대 〃 3,239명 ▲88.2.27 제13대 〃 6,375명 ▲93.3.6 제14대 〃 41,886명 ▲98.3.13 제15대 〃 5,527,327명(행정처분 특별취소 조치 포함) ▲98.8.15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특별사면 7,007명
  • 8·15 사면 가족·각계 반응/“국민화합·제2 건국 계기로”

    ◎全·盧씨 “5·18 12·12 관련자 포함 잘된 일”/朴노해씨 부인 “8년 수발 짐 벗어 기뻐”/민가협 “양심수 360여명 대상 제외 유감” 모두 7,007명의 사면 대상자 명단이 발표된 14일 국민 대다수는 “사면을 계기로 화합을 다지고 제2의 건국을 맞는 계기로 삼자”면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張世東·鄭鎬溶·安賢泰씨 등 12·12 및 5·18 관련자와 全斗煥·盧泰愚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연루자 등 14명이 특사에 포함되자 두 전직 대통령측은 “잘된 일”이라며 환영. ○…權魯甲 전 의원은 복권사실이 발표되자 “대통령과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는 짤막한 소감만 밝혔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 朴노해씨(본명 朴基平)의 부인 金眞珠씨(43)는 사면 소식에 “지난 8년동안 옥바라지를 하면서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었다”면서 기뻐했다. 金씨는 “최근 면회 때 朴시인이 ‘그동안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국민의 정부는 한번 믿어볼 만한 정부’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친딸과 친인척을 상습적으로 폭행해온 남편을 청부살해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林順蘭씨(46)도 형기를 1년4개월 앞두고 15일 가석방된다. 林씨는 “부모 탓에 불행하게 자란 자식들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석방소감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인 사면 대상자 중 93년 5월 살인죄로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아미르 자밀씨(30) 등 파키스탄인 2명이 무기로 감형되는 데는 천주교인권위원회(위원장 金亨泰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한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정부가 대화합 차원에서 사면을 단행한다면서 455명의 양심수 가운데 최장기수 등 360여명을 사면대상에서 제외했다”면서 “헌정질서 파괴나 비리사범을 사면·복권한 조치는 광복절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반개혁적 행위”라고 주장.
  • 7,007명 8·15 대사면

    ◎공안사범 103명­권노갑·정호용씨 포함 정부는 건국 50주년을 경축해 權魯甲 전 의원과 노동운동가 朴노해씨(41·본명 朴基平) 등 7,007명에 대해 특별사면·복권,가석방 등의 조치를 15일자로 단행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사면으로 석방되는 2,174명은 15일 상오 10시 전국 교도소에서 일제히 풀려난다. 사면대상은 ▲잔형 집행면제 및 복권 2명 ▲형 선고실효 및 복권 3,404명 ▲잔형 면제 8명 ▲형 선고실효 10명 ▲복권 1,402명 ▲감형 13명 ▲형 집행정지 103명 ▲가석방·가출소 2,065명 등이다. 이에 따라 사노맹 사건의 朴노해씨와 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와 金洛中씨,구미유학생 사건의 梁東華·金聖萬씨,남파간첩 咸柱明씨 등이 형 집행정지 및 가석방 등으로 풀려난다. 남파간첩 ‘깐수’로 알려진 전 단국대 교수 鄭守一씨가 잔여형기의 2분의1을 감형받는 등 모두 103명의 공안사범에 대해 형 집행정지 및 감형 조치가 내려졌다. 한보비리 사건과 관련된 權魯甲 전 의원을비롯,鄭在哲 崔斗煥 鄭泰榮 河根壽 朴熙富 전 의원이 잔형 집행면제와 형 선고실효 및 복권 혜택을 받았다. 지난 94년 어음부도 사건으로 재수감된 뒤 질병을 앓아 온 張玲子씨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다. 金基玉 전 서울 동작구청장,崔仙吉 전 노원구청장,李彰承 전 전주시장 등이 형 선고실효를 받거나 복권되는 등 95년 6·27 지방선거 이전의 선거사범 1,626명 중 상습 선거사범 222명을 제외한 1,404명이 사면됐다. 12·12 및 5·18사건에 연루된 鄭鎬溶 張世東 許和平 黃永時 車圭憲 許三守 李鶴捧 崔世昌씨 등 12명과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의 安賢泰 李賢雨 전 청와대 경호실장도 사면·복권됐다. 그러나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와 새 범죄사실로 수사를 받고 있는 黃秉泰·洪仁吉 전 의원,金佑錫 전 건설부장관,鄭泰守 한보그룹 총회장과 李喆洙·申光湜 전 제일은행장 등은 특사에서 제외됐다.
  • 내일 7,000명 특사/오늘 閣議 의결

    법무부는 13일 8·15 특별사면 및 복권,가석방 대상은 모두 7,000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번 사면은 14일 상오 8시 임시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오 10시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면에서는 준법서약서를 제출한 공안사범 103명,95년 6·27 지방선거 등 선거사범 1,500여명,외국인 수감자 100여명,조직폭력 등 민생침해사범을 제외한 일반 형사사범 등 모두 7,000여명이 복권·가석방·형집행정지 등의 혜택을 받게될 전망이다. 사노맹 사건의 朴노해씨(41·본명 朴基平),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 회장),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등도 풀려난다.
  • 서울국제연극제 참가작 확정/국내외·해외동포 30여편 출품

    ◎수준높은 연극 감상의 기회 오는 31일부터 10월15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과 학전블루소극장에서 열리는 ‘98서울국제연극제’ 참가작품과 행사내용이 12일 확정됐다. 22회째를 맞는 이번 연극제는 공식공연과 특별공연,자유참가공연으로 나눠 진행된다. 공식공연작품은 해외초청작 3편과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친 국내작 8편. 해외초청작 가운데 프랑스 예술극단의 ‘롱드르 기자의 지구촌 보고’는 신문기자 알베르 롱드르의 여행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격동의 인류사를 더듬어본 작품.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다리오 포가 극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이탈리아 로마현대극단의 ‘와장창’은 복권과 TV쇼에 중독된 사람들,컴퓨터세대 등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을 익살맞게 풀어낸다. 슬로베니아 류블리아나 국립극장의 ‘인생의 꿈’은 저주받은 왕국의 예언 때문에 출생직후 감옥에 갇힌 비운의 폴란드 왕자 세지스문도의 이야기를 무대로 옮겨낸 최신작이다. 국내작은 남사당패의 삶을 그린 극단 아리랑의 ‘유랑의 노래’(김명곤 작·연출)와 극단미추의 ‘뙤약볕’,극단 성좌의 ‘아카시아 흰꽃은 바람에 날리고’등 3편이 초연된다. 또 극단 즐거운사람들의 ‘천상시인의 노래’와 ‘탑꼴’(춘추),‘느낌,극락같은’(연희단거리패),‘김치국씨 환장하다’(연우무대),‘땅 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신화) 등이 무대에 오른다. 특별공연으로는 1930년대 강제 이주한 카자흐스탄 교민들의 애환을 담은 카자흐스탄 동포극단인 고려극장의 ‘기억’(연출 이 올레그)과 일본에 귀화했다 말기에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재일교포 마루세 따로씨(한국명 김균봉)의 1인극 ‘진흙의 창’이 공연된다. 자유참가공연에는 극단 학전의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과 극단 민·광·대의 ‘아가씨와 건달들’ 등 국내작 25편이 참가한다.
  • 8·15 특사 3,600명선/14일 발표

    ◎준법서약 공안사범 등 포함 법무부는 8·15 특별사면 및 복권,가석방 대상자를 오는 14일 상오 발표키로 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11일 “이번 사면은 14일 상오 9시 임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오 11시 발표할 계획”이라면서 “가석방 등은 15일 상오 10시 전국 교도소별로 일제히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사 대상은 국민회의가 사면·복권을 건의한 1,650명과 가석방 2,000여명 등 3,600여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가석방 사범 중에는 준법서약서를 제출한 공안사범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법무부는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는 특별사면 검토대상이 아니라고 공식 발표했다.
  • 黨에 사면복권심사위 설치/與,대통령에 직접 건의키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5일 주요 경축일을 즈음해 단행되는 대통령사면·복권 과정에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당내에‘사면·복권 심사위원회’를 설치,대통령에게 사면·복권 대상자를 직접 건의하기로 했다. 여권의 이같은 방침은 사면·복권 대상자 건의를 법무장관이 맡고,당은 단순히 여론을 전달하는 현행 방식 때문에 그 대상자가 제대로 선별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국민회의 鄭均桓 사무총장은“사면·복권 대상자에 대한 당의 의견을 법무부장관을 통해 간접 건의하는 현행 방식에 폐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6)

    ◎“홀로섬” 사랑이 韓·日 외교에 희생/꼬마부터 노인까지 불러 국민가요 대접/日 교과서 파동에 감정악화 우려 판금/문공부차관에 간청… 넉달만에 ‘복권’ “울릉도 동남쪽/뱃길따라 이백리/외로운 섬하나/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자기네 땅이라 우겨도/독도는 우리 땅”(독도는 우리 땅) 지난 80년대 초반,어눌한 말투와 친근한 인상으로 ‘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세를 탔던 가수 鄭光泰(43)씨. 개그 노래를 처음 소개하며 연예인 생활을 시작해 ‘독도는 우리땅’으로 일약 스타가 됐던 인물이다. 노래명이 전국의 음식점 간판에 즐비하게 등장할 정도로 폭 넓게 불려지던 노래 덕분에 인기의 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얽힌 끈에 매여 살고 있다. 동네 꼬마부터 칠순 노인까지 부담없이 따라부르던 국민가요가 한 순간 금지곡으로 묶인 충격 탓에 적지않은 좌절을 느껴야만 했다. 1983년 7월말.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좋은 노래를 불러 감사한다”는 뜻의 감사패를 받고 한창 들떠 있을 때였다. 방송에서도 앞다투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내보냈고 鄭씨도 방송 출연 섭외를 감당못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독도 가수’ 鄭光泰는 그 날도 어김없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 나타났다. 지난해 1월 ‘독도는 우리 땅’ 레코드 취입후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방송에 깊숙이 빠져살 만큼 방송국 일은 그야말로 신바람 그자체였다. 녹화에 앞서 담당PD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던 순간 사무실 입구 게시판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인기절정이던 노래 ‘독도는 우리땅’이 금지곡 명단 맨 꼭대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면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도 없던 시절. 방송에서 일단 금지곡 지정이 되면 항의조차 할 수 없이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가사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누구나 부담없이 입에 올리던 노래를 갑자기 부를 수 없게 될 때정작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느끼는 좌절감이란…” 그 길로 방송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10년전 연예인이 되고 싶어 명동의 한 카페에서 시작한 자신의 연예계 생활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과 맺어지게 된 것은 10년전인 73년 고교졸업후 명지대 입학전 명동 르시랑스 카페를 찾은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 평론가 李白天씨가 운영하던 이 카페는 가수 宋昌植 어니언스 李秀滿 蔡恩玉씨 등이 고정적으로 출연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던 곳. 아마추어 무대가 매일 마련됐는데 여기서 토크송 ‘한심이’를 불렀다. 李章熙씨의 노래 ‘겨울 이야기’를 우스꽝스런 가사로 바꿔 부른 노래였는데 李白天씨의 눈에 띄어 주1회씩 사회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방송가에 알려지게 돼 최초의 개그프로인 TBC ‘살짜기 웃어예’에 토크송과 개그를 선보였고 78년 새로 만들어진 KBS 개그프로 ‘유머1번지’에서 본격적인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林河龍 張斗碩 金正植과 함께 포졸 옷을 입고 KBS 朴仁浩 프로듀서가곡을 쓰고 직접 만든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던 것. 방송에서 인기를 끌자 대성음반 徐喜德 사장이 레코드 취입을 의뢰해 왔다. 코미디 프로에 함께 출연했던 林씨 등 4명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徐씨가 늦는 바람에 鄭씨 혼자 기다려 결국 鄭씨만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게 됐다. 레코드가 나오면서 이 노래는 계속 상승세를 타 전국에서 불려졌고 鄭씨는 83년 KBS TV ‘젊음의 행진’ 프로에서 독무대를 맡기까지 됐다.. 鄭씨가 금지사유를 알게 된 것은 해금이 되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비록 83년 7월말부터 그해 11월말까지 4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지의 삶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사연을 알고난뒤 허탈감까지 느껴야만 했다. 82년 일본 열도와 한국의 정계·학계를 발칵 뒤집은 일본 중고교 교과서 파동이 그 발단이었다. 84년부터 새로 사용될 교과서에서 한·일 과거사 왜곡이 문제되자 83년 6월,문제발생 1년만에 왜곡 내용을 고친다면서 한국에 시정내용을 알려와 양국간에 긴장감이 돌았다. 국내에서도 이 개선시안을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이 일었다. 이와 맞물려 83년 8월29일 제12차 한·일 정기각료회담,9월6일 한·일 의원연맹 제11차 합동총회가 예정돼 있어 당국에서 반일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이 되자마자 鄭씨는 자연스럽게 방송에서 퇴출당했고 그 때부터 방송국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독도는 우리 땅’이 다시 불려지게 된 것은 83년 11월말쯤이었다. 느닷없이 방송국 간부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許文道 당시 문공부차관이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귀띔이었다. 용기를 내서 문공부로 許차관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許차관이 “평소 독도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격려했고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로부터 1주일뒤 각 방송매체에선 ‘독도는 우리땅’이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독도는 우리땅’은 그렇게 부활했다. 그해 연말 KBS 방송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역시 KBS 가사대상에서동상을 탔다. 96년 鄭씨는 또 한번 ‘독도는 우리 땅’과 연을 맺게 된다. 이번에는 독도 분쟁이 첨예하게 불거졌다. 1960년부터 6년동안 친구가 운영하던 샌프란시스코 한인방송인 ‘한미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국내 선후배와 레코드사들이 귀국해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을 해왔다. 방송을 중단하기가 힘들었지만 서둘러 돌아왔다. DJ DOC과 함께 옛 ‘독도는 우리 땅’ 리메이크곡을 취입했다.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지만 83년 금지곡 사건 때의 악몽이 어느정도 씻어진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사연들/“독도의 가치 희석” 주장도/‘대마도는 일본 땅’은 잘못/“바꿔 불러라” 항의 받기도 개그 가수 鄭光泰씨가 털어놓는 독도관련 사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뒤부터 스타가 된뒤 독도 명예군수 위촉, 느닷없는 금지곡 판정으로 인한 실망, 해금후 신인상 수상, 미국생활중 귀국 등 연쇄적으로 겪은 일들이 극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국민가요’로까지 인식되며 애창되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으로 전락한 것이나 문공부장관이 금지곡 가수를 직접 만나 해금을 약속한 것이 아이러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 크게 유행하자 이 노래에 대한 평도 갖가지였다. 팬 레터가 답지하더니 가사를 문제삼은 편지·전화공세가 이어졌다. 광복회와 향토사학자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왜 노래를 불러 독도의 가치를 희석시키냐”“역사적으로 볼 때 대마도도 우리 땅인데 왜 일본 땅이라고 하느냐” 등 강도높은 항변이 쏟아졌다. 어느 향토사학자는 서울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관련자료를 제시하며 鄭씨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鄭씨는 96년 귀국해 리메이크한 노래에서 “하와이는 미국 땅,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바꿔 불렀다.(원래 가사는 “…/대마도는 일본 땅/…”)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현실비판적으로 불려진 ‘독도는 우리 땅’ 개사곡도 적지 않아 이 개사곡들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일본의 교과서 파동으로인한 반일감정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꼬집은 것들. “…일제 패망 이후 임자없는 땅이라고 공짜로 삼키면 정말 곤란해…한반도는 우리 땅”“꼴뚜기가 뛰면은 망둥이도 뛴다고 군국주의 역사왜곡 패망지름길 미국신경 쓰다보니 일본신경 못쓰네 조선사람 조심해”“대한민국 노동자 부지런한 노동자 조출에 잔업에 특근에 철야 장시간 노동에 기아임금 받으며 선진조국 좋아하네…”. 모두 당시 사회상과 정치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길 ▲55년 서울 출생. ▲74년 서라벌고 졸업. 명지대 무역학과 입학. 명동 르시랑스 카페에서 토크송으로 주목받기 시작. TBC TV ‘살짜기 웃어예’ 출현. ▲78년 KBS TV ‘유머1번지’ 출현. ▲82년 대성음반서‘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독도는 우리 땅 수록) 취입. ▲83년 ‘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 지정·해금. KBS 신인가수상 수상. ▲84년 KBS 가사대상 동상 수상. ▲88년 무용가 김일현씨와 결혼. ▲90년 한미라디오 방송 진행맡아 도미. ▲96년 귀국.‘독도는 우리 땅’리메이크. ▲현재 댄스그룹 ‘벅’ 매니저로 활동.
  • “좌익사범 不容” 이념 경계 명확히/朴 법무 특사 기준제시 안팎

    ◎“준법서약은 사상 떠나 국민 의무”/좌우익논쟁 따른 국론분열 차단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24일 준법서약서를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상전향서 대신 제출토록 한 ‘준법서약서’도 거부하는 미전향 장기수에게는 사면·복권·가석방 등 어떤 혜택도 주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좌익사범에 대한 ‘정서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정부의 이념적인 선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준법서약서제도 도입방침을 발표한 이후 우익단체 등에서는 이념 혼란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일부 재야단체에서는 준법서약서도 사상전향서나 다름없다면서 미전향 장기수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고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은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민의 정부를 ‘좌우익 논쟁’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서둘러 공안사범에 대한 선처기준을 공표한 것으로 해석된다. 朴 장관은 이날 “우리 국민이 우리 국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지적,재야의 요구를 일축했다.
  • 양심수에 햇볕을(金三雄 칼럼)

    제 2건국을 표방하는 金大中정부가 8·15 건국 50돌을 맞아 단행할 특별사면과 복권에 많은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전히 8·15는 우리에게 억압과 굴레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출발로 다가온다. 그런 뜻에서 국민정부 출범의 의미를 함께하지 못한 양심수들에게 뒤늦게나마 사면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양심수’를 거론하면 용공으로 몰렸다. 정권교체로 이런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지만 아직도 사회 일각에는 양심수의 사면 복권을 색깔론과 연계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불행한 우리 정치사는 좌우 이념대결과 함께 독재와 반독재의 정치대립이 오랫동안 지속돼왔다. 양심수는 바로 이런 대결과 대립 과정에서 생긴 ‘아웃사이더’들이다. 앰네스티가 정의한대로 “신념 종교 성별에 상관없이 비폭력 수단으로 자신의 사상과 의사를 표현하다 실정법에 의해 탄압받는”사람이 양심수다. 우리의 특수환경과 관련,국내 인권단체들은 “정의 평화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라 말한다. 군사독재시절 金대통령도 ‘양심수’였고 새정부에는 상당수 양심수 출신이 요직에 앉았다. 따라서 정부는 누구보다 양심수와 그 가족의 아픔을 헤아릴 처지다. ○우리 체제 우월성으로 포용 보도에 따르면 법무부 관계자는 한국에 한명의 양심수도 없다고 한다. 어느 시대 관리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구정권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지난 2월 앰네스티는 한국내 양심수 명단 100여명을 대통령직인수위에 전달한 바 있고, 민가협 등에서는 지난 3월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때 전체 양심수 478명 가운데 15%에 불과한 74명만 석방되었다고 국민정부에 불만을 토로했다. 인권단체들의 조사로는 현재 437명의 양심수가 수감중이란 주장이다. 양심수 석방을 둘러싸고 시각차이가 있을 수 있다. 국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나 대남파괴 활동을 벌인 간첩까지 양심수로 부르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여전히 분단과 무력대치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지금 햇볕론을 통해 대북포용정책을 펴고 있다. 북쪽을 포용하면서 남쪽의 반체제를 배제한다면 그건 모순이다. 해외 반체제 망명객들도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는가. 전향제 폐지와 함께 우리 체제에서 수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여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이것은 金대통령 햇볕론의 정신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전향제 폐지와 함께 ‘준법서약’을 둘러싼 불필요한 공방으로 햇볕정책을 방해하려는 세력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된다. 일부 수구세력은 반공을 독점하는 체하면서, 필요하면 적과도 내통하고 개혁세력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려 든다. 정부의 전향제 폐지 조처도 이들에게는 다시없는 색깔론의 대상이다. ○과격한 요구 일 그르쳐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엄격한 ‘준법서약’을 통해 우리 체제에 흡수하고 순수한 양심수는 과감한 사면 복권조치로 해방의 기쁨을 안겨줘야 한다. 준법서약제는 ‘서약’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서 정부나 양심수측이 너무 극단적 고집을 부려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총련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현재 가장 많은 구속자가 바로 한총련 관계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대학생인 한총련 수감자들은 이번 기회에 가정과 학원으로 복귀돼야 한다. 다만 탈냉전의 물결에 휩쓸려버린 사회주의의 허상, 굶주림의 동토로 변해버린 주체왕국의 실상을 꿰뚫는 인식의 전환이 따라야 한다. 젊은이들이 지난 우리 역사가 남긴 모순구조와 현실의 부조리로 자칫 극단의 모험주의 관념과 허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허망과 절망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정부와 기성세대의 포용력이 필요하다. 다시는 이땅에 양심수가 존재하지 않도록 화해 정의 평화 인권 같은 보편가치가 더욱 신장돼야 한다. 개혁은 바로 이런 가치구현을 위해 필요하다.
  • 사면복권 과감히 단행/金 대통령 지시

    金大中 대통령은 1일 “8·15 광복절은 정부수립 50주년인 만큼 과감히 사면과 복권을 하라”고 朴相千 법무부장관에게 지시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법무부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朴장관으로 부터 업무보고를 받은뒤 이같이 말하고 “그러나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사회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며,(미전향 장기수의 경우) 준법서약을 거절할 경우 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고 朴智元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어 李海瓚 교육부장관으로부터 국정과제 추진상황을 보고받고 올해안에 교육개혁이 틀을 완성,내년부터 개혁을 본격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 다시 주목받는 權魯甲 전 의원

    ◎특사 앞두고 정치적 무게 감안 초미 관심사 동교동계의 ‘맏형’ 權魯甲 전 의원이 다시 정가의 주목을 받고 있다.특별사면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시점은 광복절 특사때다. 형집행 정지중인 그는 현재 자택에 칩거중이다.찾아오는 손님만 만난다.그는 사면·복권되더라고 당장은 정치활동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당 안팎의 관측이다.한 측근은 “당장은 뭘 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한보사건에 휘말렸던 ‘과거’때문이다.개혁의 와중에 전면에 나설 경우 대통령과 당에 누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당에 ‘DJ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무게’를 갖고 있다.정치 재개의 시기는 내년 5월 이후 이뤄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최근 金대통령이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을 만나 전당대회를 내년 5월까지로 미루도록했다.權전의원을 염두에 둔 배려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당의 한 인사는 “당분간 호흡 조절을 하며 기다리면 재기의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전면에 나설때까지는 당내외 문제를 막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총체적 개혁’의 조정·조율에 적지않은 ‘훈수’를 둘 것이라는 전망이다.당내에서는 “權의원이 있었으면 원외 의원들의 지역구 정리문제,야당의원 영입문제가 지금처럼 늦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애기도 들린다.
  • “구조조정 정부 개입해야” 59%/국민회의 여론조사

    ◎공직자 사정 세무­경찰분야 “가장 시급”/월드컵 패인 실력­정신력부족 등 꼽아 국민들은 공직자 사정은 세무공무원과 경찰공무원 등의 순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또 개혁의 기준으로는 고비용 저효율 구도의 타파를 첫번째로 꼽았다. 이는 국민회의 정세분석위원회(위원장 金榮煥)가 최근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700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공직자 사정의 가장 시급한 대상을 묻는 질문에 세무공무원(20%),경찰(18.2%),중앙공무원(17.6%),지방공무원(11.4%),교육공무원(10%)순으로 대답했다. 개혁의 기준으로는 고비용 저효율 구도 타파(24%),지역구도 타파(22.1%), 21세기 비젼 제시(15.4%),민주화(9.9%)순으로 대답했다. 또 각종 비리관련자의 명단공개여부와 관련해서는 응답자의 86.6%가 공개에 찬성한다고 대답했다.반대는 5.5%였다. 기업의 구조조정때 정부의 개입여부에 대해서는 58.8%가 찬성했고 20.5%는 반대했다.계층별로는 화이트칼라는 68%,주부는 49.3%가 각각 찬성,가장의 실직에 대한 주부의 불안을 반영했다. 실업대책 재원확보 방안에 대해서는 ‘정부의 과감한 적자재정 편성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27.6%),이어 고용세 신설(22.2%),실업복권 발행(13.1%),소비세 신설(11.8%) 등을 꼽았다. 한편 한국축구팀이 월드컵에서 저조한 성적을 낸데 대해서는 △39.3%가 실력부족 △21.2%가 선수들의 투지부족 △12.6%가 감독의 지도력 부족을 꼽아 흥미를 끌었다.
  • 이강백 연극제 피날레 ‘영월행 일기’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500년 동안의 사랑’/고서적 연구가·권력자의 아내/남녀하인 되어 떠난 여행 재현 ‘은행나무 침대’의 한석규­진희경,‘환생’의 케네스 브래너­엠마 톰슨… 못다한 사랑을 접지 못해 다시 태어나서까지 서로 꽁무니를 쫓아다닌 역할로 인상에 남아 있다.죽음도 못말리는 이런 집념의 커플이 또 한쌍 출현했다.이강백 연극제 피날레격인 ‘영월행 일기’에서 조당전·김시향 커플로나선 연극배우 김민수(35)­정수영(27).둘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비좁은 곳에 유폐된 채 500년을 등 거리로 서성거린 서글픈 한쌍을 살아내느라 땀목욕을 하고 있다. 95년작 ‘영월행 일기’는 극작가 이강백씨 모처럼의 사랑이야기.워낙 기질이 관념적 작가인지라 사랑도 감정만으로 해결되지 않고,따질 이유들이 구구하다.고서적 연구가 조당전이 입수한 ‘영월행 일기’는 세조때 단종 동태를 살피라는 명에 따라 한명회 여자종과 함께 영월에 세번 다녀온 신죽주 하인의 기행문.이 허구의 책은 단종이 점차 내면의 자유를 얻어가자 그 ‘자유’자체로 권력에 위협이 돼 죽임을 당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조당전은 책을 되찾으러 온 권력자의 아내 김시향과 각각 남자종,여자종이 돼 액자 형식의 여행을 재현한다.그러면서 점차 500년 전에 못 이룬 그 둘이 재회한 것임을 드러낸다.“이강백의 인물들은 다면적이예요.동전으로 복권 벗기듯 갈수록 예기치못했던 면모를 드러내지요”(정수영) 극중 시향 역할은 특히 그렇다.권력자의 처로 한없이 조심스럽다가도 일단 계집종으로 변신하면 희롱하고 싶은 발랄함을 폴폴 풍겨대야 한다.정수영은 연극 출연 세번째인 새내기치곤 난역(難役)을 풋풋하게 소화,큰 박수를 받고 있다. 한편 사내종은 처음엔 명령따라 멋모르고 길을 떠나지만 여정이 거듭될수록 단종 명운이 자기 말에 달렸다는 책임감을 자각한다.무지에서 깨어나면서 자유를 느끼고,전율하다,갈구하게 되지만 그 때문에 그 자유와 사랑까지 목숨과 맞바꾸는 처지.이 인물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 주려면 끝까지 갈망을 눌러 담는 절제 연기가 필수.‘명성황후’의 홍계훈 등 ‘즐거운’뮤지컬 연기로 이미 팬이 많은 김민수에겐 이 변신이 적잖은 부담이었을 듯.하지만 그는 “갈수록 계속 메울 곳을 보이는 이런 인물은 배우생활 10여년 동안 드물었다”면서도 끝까지 안정된 연기로 극을 떠받치고 있다. 연출자 채윤일씨는 이번 무대에서 ‘선소리’들을 싹 걷어치웠다.무대장치도 별로 없이 조명만 명멸한다.철 골격에 노끈을 엮어 입힌 당나귀 한필을 끌며 타며,가상의 강물에 몸을 적시며,배우들은 육신만으로 그 빈터를 채워야 한다. 14일까지 화∼목 하오 7시30분,금·토 하오 3시·7시30분,일 하오 3시.745­8497.
  • 元均 복권론 부당성 해부/이조영編 ‘李舜臣과 王朝實錄’

    ◎“단독전투서 단 한번도 승리못해/狀啓문제로 이순신과 평생 원한”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챘다.그런 만큼 원균은 재평가돼야 한다” 조선 선조때의 무신 원균에 대한 복권론이 무성한 가운데 이를 강력하게 반박하는 책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외국어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인 이조영씨가 펴낸 ‘이순신과 조선왕조실록’(대성문화사).이씨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원균 복권론의 부당성을 낱낱이 지적한다. 원균 복권 운동은 80년대에 시작됐다.원균의 억울함을 밝히는 논문형태의 ‘원균론’이 발표됐고,‘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소설이 나왔으며,원주(原州)원씨 종친회에서는 진정서와 담화문을 내기도 했다.“이순신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1614년 즉 광해 6년에 사망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선조실록’을 보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기록에 혼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살펴 보면 임란 초기의 원균은 무군장(無軍將)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순신이 전라 좌수영 수군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치러 경상도 당포 앞바다로 나갔을 때 원균은 단한 척의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이순신 함대를 찾아 왔다.이순신이 옥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 바로 이 때의 일로,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릴 참이었다. 원균은 이 장계에 자신의 이름도 함께 넣어 주길 원했지만 이순신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평생 원한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원균은 이순신과의 연합함대가 아닌 단독전투에서는 단 한번도 왜적에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반면 이순신은 비록 적장이긴 하지만 일본 수군까지도 군신(軍神)으로 섬겼다.그들은 충무공 영정을 모셔 놓고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른 뒤 전장에 나갈 정도였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충무공에 대한 기록을 발췌한 것으로 되어 있다.대의명분을 밝혀 세워 춘추필법의 정신을 되새기도록 한다는 게 이 책의 의도다.
  • 한국 역사속의 여성 위인/여성개발원 책자 발간

    이순신,김유신,세종대왕… 위인전의 주인공들은 이처럼 거의 남자다.어쩌다 끼어드는 신사임당 등도 업적보다는 현모양처란 점에서 각광받는다. 한국여성개발원이 펴낸 ‘한국역사속의 여성인물’은 여성차별 유교문화 아래 역사의 주류에서 철저히 소외돼온 여성들을 발굴,복권하는 책. 70여명의 여성위인을 상·하권에 나눠 소개한 그 상권이 나왔으며 하권은 올 하반기 출간예정.상권에는 고대부터 개화기까지,하권에는 일제시대 인물을 실었다.여성개발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내용을 볼 수 있다.주소는 http://kwoninet.or.kr이다.356­0070.
  • 나치 법원 유죄 판결 50만건 무효화/獨 하원

    ◎강제불임수술 받은 35만명 복권 【베를린 연합】 독일 하원 법사위원회는 27일 나치 법원의 유죄판결 수십만건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28일 본회의에 상정,통과될 예정인 이 법안은 지난 33∼45년 제3제국 법원이 정치,군사,인종,종교적 이유로 내린 20만∼50만건의 유죄판결을 무효화하는 한편 나치 치하에서 강제불임수술을 받은 약 35만명을 복권시키게 된다.불임수술 피해자중 약 5만명은 아직 생존해 있다. 또 탈영,동성연애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진 사건들은 법안통과와 관련된 의회의 별도성명을 통해 무효 처리될 예정이다. 탈영병과 동성연애자 문제는 이들을 법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녹색당과 이에 반대하는 기민·기사(CDU/CSU) 연합의 입장이 맞서 이같은 절충안으로 처리키로 했다. 나치 시절 제3제국에 대한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국민법원’은 지난 44∼45년 아돌프 히틀러의 흉상이 내려다보는 재판정에서 쉴 새 없이 사형선고를 내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형장으로 보냈다.
  • 5·18을 어떻게 볼 것인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특별기고)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1980년 5·18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항쟁이 광주폭동이라는 누명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뒤 ‘5·18사태’라고 했다가 ‘5·18광주항쟁’을 거쳐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평가와 함께 용어가 정립되었고,관련인사가 범죄자에서 민주투사로 그 본연의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더우기 그들은 엄청난 ‘폭동’‘반란’‘변란’‘내란음모죄’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사면복권과 함께 그 처절함,고통,수모,학대,인고의 세례로부터 축복받는 광명 영광 환희의 광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경과하였다.이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이의 실마리는 군사정권의 군사독재와 특정지역 때리기 및 낙후방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현역 소장 출신의 박정권이 18년만인 79년 10·26사태로 종말을 고하면서 또 현역 육군소장 전두환이 그 시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신군부의 정치세력이 싹트게 됐다.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취된 것이다.12·12 하극상 사건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동지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관망하며 혼란 소요를 키워오다가 이를 수습한다는 명분속에 느닷없이 5·17비상계엄을 선포,혼란을 수습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봄을 만끽한 3김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로써 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러나 12·12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의 ‘은밀히 계획된 정치일정’은 자신들이 일선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그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국 휴교령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일부와 빛고을 광주의 대학생들이 섞인 민주인사들이 그 다음날인 5월18일 무장 군인과 결전을 전개하면서 5·18은 터졌다.처절한 살육 전시회가 낭자한 피로 얼룩진 가운데 전개됐다.대치국면은 광주와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무고한 시민만 죽임을 당한 역사상 매우 잔혹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게된 것이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군의 결전은 곧 광주의 민주화투쟁 이었으며 이는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이었다.마치 동학혁명(1894­5)이 이곳에서 일어나 북상,반봉건 반제국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과 같다.또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농민,노동자의 투쟁(소작쟁의,노동쟁의)도 광주 나주 완도 하의도 등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타도의 애국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5·18 역시 서울의 5·17 민주화 투쟁이 광주에서 성숙되어 전국으로 물결져 간 것이다.따라서 5·18은 광주 전남만의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것이다.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곧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민간 억압 책동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높였고 동참의식을 도출해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그러나 당시 광주는 폭동 소요 탈취 암흑의 광장으로 신군부와 권력지향적 철새 정객들에 의해 선동되었고 그에따라 그 지역에 대한 혐오감,증오심을 증폭케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떨어져도 매점매석하지 않았고 자체조직으로 질서를 잡았다.식량이 떨어진 이웃에 온정을 베풀었으며 부녀자들은 따뜻한 음료수와 끼니로 시위대의 사기를 돋구어 민주화 의지,신념을 달성케 하였다.의사,간호사가 구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금융,정부기관을 지켰으며 헌혈에 온시민이 동참하였다.비록 신망의 정치인인 金大中이 ‘내란음모사건’이란 누명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불타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인을 위하기보다 민주화는 필연적 과제였기 때문이다.이제 그 분은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되어 바웬사 사하로프 만델라와 함께 민주의 투사요 지구 인권의 파수꾼으로 손꼽히는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불의,부정을 배격한 동학정신이 팽배한 이 지역의 5·18은 곧 우리 모두의 민주화운동이다.6·10항쟁,6·29선언(1987)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영원히 저주받을 지역감정,지방색의 차별화 등은 망각의 저 여울속으로 보내야 한다.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정부,신명나는 국민으로 거듭나서 화합의 대열로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또 복받은 대한민국이 달성되어 통일조국 대한민국 건국의 50주년을 환희와 벅찬 희망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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