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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대책/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주민 3명이 또다시 한국에 귀순해왔다.13일 북한군 중좌출신 심신복씨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경유,망명한 뒤를 이어 14일에는 북한군 남자 장교 1명과 여자 하사관 1명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함께 귀순했다. 49년 이후 탈북자는 이번 3명을 포함,모두 926명이며 90년 이후 현재까지 319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지금까지 탈북자의 90% 이상은 ‘자유와 빵’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에는 지난 50년동안 북한 정치사에서 권력의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고위 엘리트계층까지 잇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고 있어 북한정권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주체사상의 철옹성 속에서 일사불란하게만 여겨졌던 북한체제에서 사상적 일탈현상과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 군대가 총만 쏘지 않는다면 6개월 이내에 북한주민의 4분의 1이 탈출할 수 밖에 없다는 보고서 내용은 북한체제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못하다는 점에서 북한에 주는 타격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북한 주민들의극심한 생활고와 열악한 인권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 주민들의 탈북현상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더욱이 현재 탈북자 가운데 234명이 직업이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밝혀져 이들에 대한 생활안정 대책이 시급하다. 탈북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한 갈등 속에서 범법자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분단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민국에서 인간적 행복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가 탈북자들에 대한 정착금 지원을 2배로 상향조정하는 것을 비롯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시행령을 연내 개정키로 한 것은 시의 적절한 대책으로 평가된다.탈북자 대책은 정착금 지원이라는 일회성 지원방법보다는 이들이 한국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나 사회적응훈련 같은 항구적인 생활안정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탈북자를 위한 정부의 효율적 대책과 함께 국민적 관심,특히 그들이 한국인으로 살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박영효의 귀거래(秘錄 南柯夢:25)

    ◎고종 “日本있는 박영효 불러들여라”/갑오경장으로 쫓겨났다가 하루 아침에 ‘구국재상’ 귀국/장안 환영물결 가시기도전에 며칠만에 日로 줄행랑/3년뒤엔 친일파되어…/‘헤이그’에 허찔린 이토 분통속에 잠 못이루다 이완용 내각 음모세우고/대책 고심하던 황제는 “꿩대신 닭격… 그래도 매국노보다 역적이 낫겠다”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지자 서울 남산아래 있던 통감부에서 야단이 났다.을사오조약을 늑약(勒約)하고 스스로 통감자리에 앉아 청주잔을 기울이던 이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여간첩 배정자(裵貞子)와 양아버지라 하면서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하던 이토는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 대책을 구상하는데 급급하였다. 고종황제에게 또다시 급소를 찔린 것이니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고종은 본시 을사오조약을 무효로 봤기 때문에 외교권은 아직 황제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을사오조약을 강제체결한 이토로서는 헤이그사건 하나로 자신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는 판이었다.명치유신의 원로로서 후배에게 무안할 뿐 아니라 일왕 명치에게는 더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역습의 호기로 이용하기로 했다.이토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민 것이다.일단계 조치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을 해산하고 말 잘듣는,이완용(李完用)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는 일이었다.박제순보다 이완용이 훨씬 더 적극적인 매국노였기 때문에 그를 시켜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음모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었다.이토의 음모를 예상하고 이것을 미연에 막을 인물이 누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금능위 박영효의 이름이 떠올랐다.박영효(朴泳孝)는 철종의 부마(사위)였으나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심취,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친일 개화당의 거두였다. 그는 갑신정변후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한 뒤 12년동안 돌아오지 못한 유랑객이었다.그러나 1907년 5월 어느날 박영효의 부하 신철희(申哲熙)가 정환덕에게 접근,복권운동을 벌였다.요즈음 같으면 각종 정치범이 미국으로 도주하지만 그때는일본으로 도주하여 기회를 노렸다.그런 인물이 일본에는 우굴우굴했다.박영효 역시 그런 기회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신철희는 문경사람이다.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때 아문주사(衙門主事)로 있다가 박영효의 덕분에 문경군수로 임명받았던 사람이다.그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으나 각부 대신들은 작록만 탐내고 자리를 지키는데만 연연합니다.이럴 때 일본에 망명해있는 금능위(錦陵尉)박영효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바라건대 대감께서 황상께 아뢰 그를 소환해 귀국토록 하시고 내각을 다시 조직해 국가증흥을 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고 했다.이에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황상께 아뢰니 “금능위에게 빨리 전보를 쳐 귀국토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박영효같은 인물에게 매달리게 되었을까.재위 44년만에 아무도 믿을 놈이 없게 됐기 때문이다.충신은 죽고 측근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거리니 박영효는 꿩 대신 닭격이었다. 황상께서 직접 전화를 거시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났는데 박영효에게서 온 전화였다.부르심을 받은 박영효는 급히 행장을 정돈한 뒤 윤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부두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그를 환영했는데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서울역 대합실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안부를 물은 뒤 박영효를 앞뒤에서 가려주듯 동행하여 회퇴루(回退樓)에 들어갔다.이때가 밤12시였다.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반을 든 뒤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승후방(承候房)에서 대령하였다 박영효는 과거에 두차례나 역모를 꾸민 인물이다.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해 갑신오역(甲申五逆)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망명하였고 10년 뒤 돌아와서 다시 갑오경장(1894년)에 가담,역모에 몰려 두번째로 일본에 망명했다.그후 12년만인 1907년에 귀국하였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부산에 도착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고종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고종으로서는 비록 박영효가 과거에 역적이라 하더라도 이완용같은 매국노와 다르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궁내부 대신으로 맞아들였으니 황실을 보호하는데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따라서 고종황제와 박영효는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상감부자분께서 아침 수라진지를 드시고 난 뒤 박영효를 부르니 오전 11시경이었다.문안인사가 끝난 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해를 해외에서 풍상을 겪었으니 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어떻게 감내 하였소”라고 물으셨다.이에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은총이 융성하시어 이와같이 다시 해를 우러러보게 되오니 참으로 황송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릅니다”고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년이래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우선 경이 내각을 조직해 정치가 잘되고 백성이 화평하게 되면 나라의 위세가 만회될 것이니 이것이 일본의 ‘유신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하시었다.박영효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황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음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는 특별히 비취옥술잔(翡翠玉圈) 남색전포(藍色戰袍) 도홍띠(桃紅帶) 오사모(烏紗帽) 분홍조복(粉紅朝服)등을 각각 한벌씩 하사해 입게 하시므로 그 경황이 찬란하였다 역적 박영효가 하루아침에 구국의 재상으로 돌변한 것도 그렇거니와 장안 사람들이 그가 대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지화자를 부른 것도 괴이한 일이었다. 박영효가 마침내 황제에게 사은숙배하고 물러 나와 장안 대로상을 걸어가는데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갈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모두들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한관(漢官=옛 관료)의 위의(威儀)가 되살아났다”고 격찬하였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산두박첨지(山頭朴僉知)’라는 희극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늦어도 한참 늦었다.그런데도 1907년 6월30일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박영효 환영대회가 열렸다.장소는 북서(北署) 농상소(農桑所)였는데 왕년의 개화당 동지들이 부부동반하여 모여들었다.환영회장 유성준,위원 정운복이 축사를 낭독하고 연회에 들어가려 할때 돌연 총성이 울렸다. 알고 보니 정재홍(鄭在洪)이라는 분이 권총자살을 시도한 것인데,원래 이토가 모임에 나타나면 그 권총으로 사살하려 했던 것이다.박영효가 이날 환영회에 병을 핑계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토도 나타날 리가 없었다.정재홍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때 혼미한 가운데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품었던 우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그러나 대감(박영효)은 더욱 분발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그는 또 유서를 남기고 노래를 지었다.“살아서 욕되니 죽어서 영화를 보자”(生辱死榮)는 제목의 노래였다.그러나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하고 궁내부 대신이 된지 며칠만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고 3년 뒤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한국근대사에는 이렇게 지조없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지금도 그 후배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며칠을 지나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면서 박영효는 제주도 유람길에 올랐으나 실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개각(改閣) 따위의 얘기는 풀이 우거진 울타리가에 버려두고 도망을 갈 것이다.옛말에 “운이 가면 영웅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運去英雄不自由)는 말이 있으니 개탄한들 무얼 하겠는가.
  • 24년만에 모교 강단에 선 임헌영씨

    ◎“비제도권문학 적극 수용/기성문학 보수화 막아야” “비제도권문학을 제도화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절실한 문학적 과제입니다.재야문학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기성문학’ 자체가 보수화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올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24년만에 복권된 문학평론가 임헌영씨(57)는 요즘 모교인 중앙대의 겸임교수로 새로운 문학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임씨는 74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소설가 이호철씨 등과 함께 구속됐다. 그 뒤 집행유예로 잠시 풀려났던 그는 79년 남민전 사건에 또다시 연루,5년형을 받고 83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이후 줄곧 미복권 상태로 있다가 이번에 복권돼 중앙대 대학원과 학부에서 ‘문학연구 방법론 실습’‘현대 문제작 탐구’ 등의 강좌를 각각 맡게 된 것이다. 임씨는 67년 ‘현대문학’에 ‘니힐과 반항’등이 추천돼 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평론집 ‘창조와 변혁’‘분단시대의 문학’등 2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참여문학­민족문학­사실주의문학­민중문학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통일문학입니다.남북문화의 이질화는 위험수위를 넘고 있어요.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 차원의 대책이 시급한 때입니다” 대학의 문학교수로서 임씨는 새삼 아카데미즘에 빠져 무력증을 앓고 있는 우리 비평계를 안타까워한다.“창작의 홍수 속에 비평의 둑이 무너졌다고 할까요.적절한 비평적 통제가 없다면 우리문학은 무정부상태로 나아갈지도 몰라요.2,000년대를 향한 새로운 미학적 제방을 쌓는 일이 필요합니다” 비평전문계간지 ‘한국문학평론’ 주간도 맡고 있는 그는 현재 ‘근·현대 소설 사회사’‘문학운동사’(가제) 등의 책을 준비중이다.
  • 楊尙昆 前 中 국가주석 사망

    ◎天安門 시위 무력진압 장본인… 92년 실각 【베이징 AFP 연합】 중국 공산혁명의 원로인 양상쿤(楊尙昆) 전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향년 92세로 숨졌다고 신화(新華) 통신이 보도했다. 양 전 주석은 베이징(北京)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통신은 전했으나 구체적인 병명은 밝히지 않았다. 중국 건국에 공이 큰 8명의 원로중 한명인 양 전 주석은 지난 88년 국가주석직에 취임한 뒤 다음해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92년 권력투쟁에서 밀려 실각했다. 지난 1907년 쓰촨(四川)성에서 태어난 양 전 주석은 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3년간의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34∼35년의 대장정에도 참가했다. 양 전 주석은 지난 49년 중국 건국 이후 요직을 거쳤으나 66년 문화대혁명 기간중 반혁명 공상주의자로 몰려 숙청돼 12년간 권력에서 축출됐다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78년 복권됐었다.
  • 30대 회사원 7억 횡재/복권 당첨 국내 최고액(조약돌)

    ○…국내 복권 사상 최고 당첨금액인 7억원짜리 복권 당첨자가 탄생. 행운의 주인공은 주택은행이 발행한 또또복권 제38회 2차 추첨에서 1등을 차지한 전주에 사는 金모씨(38·회사원).金씨는 전주 시내에서 연번으로 구입한 또또복권 5장이 지난달 16일 치러진 2차 추첨에서 1등,2등,3등에 모조리 당첨됨에 따라 당첨금 7억원을 거머쥐게 됐다. 부업으로 축산업을 하고 있는 金씨는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복권을 3∼5장씩 구입해 왔으며,그동안 몇번의 사업실패와 최근 소값 파동으로 빚더미에 앉았는데 이번 당첨으로 고민을 말끔히 해소했다고.
  • 2002년 월드컵 준비 세미나 주제발표

    ◎마케팅 현황과 대응전략/“마케팅권한 FIFA서 독점 협상과정 수익극대화를”/金容鏶 월드컵조직위 사업국장 월드컵축구대회는 4년마다 개최되는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축제이다. 경기를 주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회원국 202개국,약 3년에 걸친 지역예선 및 1개월간의 본선경기,전세계 TV시청 연인원 약 410억명. 월드컵대회는 단일 경기종목임에도 그 내용면에서는 올림픽대회를 압도한다. 유치시 대외적으로 국가이미지는 물론 수출증대 등 경제적 파급 효과는 엄청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예로 프랑스는 98년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올해는 3%의 GDP 성장이 예상되며 스페인은 82년 월드컵이후 매년 2%대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월드컵대회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최근 국내에서는 스포츠마케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스포츠마케팅은 기업이 재정이나 서비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나 주관단체를 이용하여 자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마케팅 활동을 말한다. 80년대 들어 시장규모는 급격히 확대되어 현재 약 1,420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처럼 스포츠마케팅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이유는 상이한 문화 관습 종교 국경을 초월하는 인류공동의 언어로 인류화합에 기여하고 기업은 스포츠를 통해 소비자에게 긍적적인 이미지를 전달,광고효과를 배가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유수기업들은 이윤극대화를 위해 이를 경영전략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올림픽과 달리 월드컵대회의 마케팅권한은 원칙적으로 FIFA가 독점하고 있으며 ISL사를 마케팅대행사로 선정,사업권을 위탁해놓았다. 따라서 조직위원회는 FIFA,ISL과 월드컵의 상업적 활동에 관한 요구조건 및 지침을 규정하는 마케팅 협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조직위는 FIFA와 협상과정에서 수익극대화를 도모하여야 하며 한·일 공조가 가능한 부분은 최대한 공동보조를 취하되 사안의 특성에 따른 개별 협상 방안도 마련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국내외 마케팅전문가,고문변호사,변리사 등 전문가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며 마케팅전문위원회를구성,운영하는 방법도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협상체결후 조직위는 대회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기념주화 복권 기념우표 입장권을 발행하며 광고를 통해 축제분위기를 만들고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복권은 발행중이며 그 수익은 약 500억원이 될 것이다. 2002년 월드컵대회는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IMF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무대에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조직위원회는 체계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여 제한된 월드컵 마케팅 구조속에서 최대한의 수입도모에 노력하는 한편 다양한 자체 수익사업을 적극 개발,국고지원없이 범세계적 규모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치르기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발전적 의의·파급효과/“국가위상·국민통합 강화 지역 균형발전에도 한몫”/盧基星 한국개발硏 지역환경팀장 우리나라는 일본과 공동으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개최하게 됐다. 최근 대내외 경제여건의 급변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무형의 부가가치 창출,국민통합 강화 등 월드컵대회의 국가발전적 의의는 일반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물론 기업에 대한 홍보를 극대화하여 국제적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 약 3년간에 걸쳐 본·예선경기가 치러짐으로써 이 기간중 세계의 이목이 우리나라에 집중될 것이므로 홍보효과는 올림픽대회의 경우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한·일공동 개최로 중남미 유럽 등 축구 애호국가와의 긴밀한 이해·협력증진으로 외교전략의 다변화를 꾀할 뿐만아니라 두나라간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제정치 외교 스포츠계 인사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적 파급효과도 단독개최 때보다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하겠다.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경기장 및 숙박시설의 증축 또는 추가 건설이 필요하다. 개막식을 비롯한 32개 게임을 준비,운영하는데 있어서 소비지출과 대회기간 중관광수입 증대로 약 8조원의 생산,24만명을 초과하는 고용,3조 7,000억원의 부가가치가 유발되는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우리나라의 대외적 이미지가 제고됨으로써 수출대상지역이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월드컵대회는 국민통합을 제고시키리라 판단된다. 프랑스월드컵대회 예선전에서 보여준 단합된 국민의 성원과 고양된 국민의 사기와 자신감으로 볼때 국민통합효과는 실로 계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특히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정도 극복될 즈음에 개최됨으로해서 재도약과 재결속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대회가 여러도시에서 분산,개최되므로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있다. 월드컵대회와 같은 국제적 행사를 유치함으로써 지방의 개방화 및 세계화 마인드의 고양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스포츠·문화의 국제교류를 확대시킨다. 국내적으로도 월드컵대회의 개최는 축구발전을 토대로 한 스포츠진흥과 국민체육복지의 증진,스포츠관련 산업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월드컵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스포츠마케팅의 활용해야 한다. 최근 국제스포츠대회의 광고대행사로서 수익을 올리는 기업도 있다. 스포츠산업도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부가가치를 유발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월드컵축구대회는 아시아대륙에는 단 한차례도 개최된 바가 없다. 따라서 이 지역 축구의 범세계화에 기여하고 우리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 87년과 98년 DJ의 光州 방문(청와대 취재수첩)

    지난 87년 가을쯤이다. 당시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 선생’으로 더 가깝게 다가왔던 金大中 대통령이 사면·복권돼 광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기자는 당시 사회부 ‘햇병아리 기자’로 金대통령을 수행 취재했다. 金대통령이 광주역에 내리자 역광장은 인파의 바다를 이루었다. 주변 건물 옥상과 창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었다. “김대중” “김대중”을 외치는 연호소리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역광장 한쪽 귀퉁이에 준비된 조그마한 단상은 군중들의 ‘파도’로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떼밀리듯이 金대통령은 가까스로 단상에 올랐다. 그가 마이크 앞에 서는 순간,사위는 갑자기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여러분,여러분의 김대중이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인사를 드립니다” 광장 안은 일순 울먹이는 소리로 뒤덮였고,모르는 옆사람을 무작정 껴안고서 환호했다. ‘5·18 내란음모 배후조종 혐의’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들의 ‘김대중 선생’은 한(恨)의 동일체였고,희망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그의 사면·복권을 우리 현대사의 아픔인 ‘5·18’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시작으로 읽고서 토해낸 기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자는 그때 金대통령으로부터 ‘지역갈등 해소와 사회통합의 의지’를 봤고,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의 지론인 ‘춘향이의 한은 이도령을 만나는 것으로 풀어지고,심청의 한은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으로 풀리고…’처럼. 金대통령 내외는 엊그제 고향인 목포와 광주를 다녀왔다. 金대통령 내외의 행보를 보면 ‘통합’이 화두(話頭)였던 것 같다. 가는 곳마다 지역갈등 해소를 호소하면서 그것의 청산을 약속했다. ‘역대 독재정권의 악마의 주술과도 같은 국민분열과 지역주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李姬鎬 여사도 광주 여성계 인사와의 오찬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청와대 앞뜰에 전국 시·도의 상징꽃을 심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좋은 아이디어네요. 당장 그렇게 하죠”라고 대답했다. 광주도 달라지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열기와 환호가 줄어서만이 아니다. 택시기사나 시민들은 꼭 짚어 이유를 밝히진 못했으나 정치인과 이 지역 의원들,그리고 경제개혁에 대한 답답함과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치적 꿈’은 실현됐으나,국민들은 물론 대통령에게도 IMF의 먹구름이 너무나도 깊은 때문인지 모르겠다.
  • 평가와 전망(金 대통령 취임 6개월:上)

    ◎경제개혁·세일즈 외교 순탄한 ‘출항’/외환보유고 급증… 환율·금리 안정/총체적 국정개혁 숨가쁘게 추진/실업자 증가·정치권 개혁 미진한게 흠 金大中 대통령이 25일로 취임 6개월을 맞는다. 미증유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속에서 출발한 ‘국민의 정부’ 6개월은 환란(換亂) 극복과 IMF체제 탈출을 위한 총체적 국정개혁 추진으로 요약된다. 특히 여야간 정권교체는 ‘개혁세력’의 제도적 진입을 의미하는 것으로,기업·금융·정부·노동시장 등 4대 개혁을 숨가쁘게 추진해온 게 사실이다. 金대통령이 제창한 ‘제2의 건국’은 바로 이같은 국정개혁과 의식혁명을 통해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자는 종합적인 국정 청사진인 셈이다. 당선자 시절부터 숱한 외국 투자자들을 만나온 金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미국과 유럽 등을 상대로 이른바 ‘세일즈외교’를 펼쳤다. 발등의 불인 우리의 대외신인도 제고와 ‘외환보유고’ 확대를 위해서였다. 그 결과,지난해말 39억달러에 불과했던 가용 외환보유고가 8월에는 사상 최대규모인 410억달러에이름으로써 일단 환란의 위기를 넘겼다. 엔저(円低) 등 국제적 장애요인에도 불구,환율·금리·물가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고,경상수지 적자 또한 올 상반기중 224억달러의 흑자로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또 상호지급보증 금지 등 5대 원칙에 입각한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5개 은행 퇴출,정부조직 개편 및 공기업 민영화 등의 경영혁신 노력은 낡은 경제구조의 대수술로 이해되고 있다. 朴智元 청와대대변인은 “난마처럼 얽힌 경제분야에서 속도를 잃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 자체가 절반은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국정운영의 시스템 변화.‘뉴리더십’으로 표현되는 金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국무회의 등 각종 회의를 활성화시키고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참여민주주의의 폭도 크게 넓혔다. 절차와 증거를 중시,인치(人治)가 아닌 법치의 리더십도 꾸준히 구축해왔고,비선(秘線)이 아닌 공식창구를 활용함으로써 정책결정의 투명성도 제고했다는 평가이다. 정경분리 원칙하의 대북정책도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고 있다. 북한의 잠수정 침투사건으로 ‘햇볕론’이 도마위에 오르긴 했으나 상황에 따라 냉·온탕을 거듭하던 전정권의 대북정책과 대별된다. 다만 실업자 문제와 수출,정치권 개혁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개혁주체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점도 우려하는 이가 많다. 취임초 야대(野大)에 발목이 잡혀 정치권 개혁은 물론 개혁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또 정리해고에 정치적 논리로 접근,재계와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어 일각에서 정책의 우선순위에 회의적인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金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6대 국정과제의 틀 안에서 정치권의 개혁방향을 제시하고,실업자 대책의 기본골격을 밝힌 것도 이를 감안한 것이다. 특히 제2건국 운동을 범시민단체와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추진,전 국민을 개혁주체로 삼으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성과의 가시화이다. ◎與野 엇갈린 평가/“혼신의 힘으로 국가부도 막았다”/“독단과 독선 과거 권위주의 능가”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DJ정부는 6개월동안,정치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DJ정부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국민회의 鄭東泳 대변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도위기에 몰렸던 한국호를 살려냈다”며 집권 6개월을 집약했다. 정권교체 당시 38억달러에 불과한 외환보유고가 400억달러를 넘어섰고 환율과 금리도 안정세로 돌아섰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반면 한나라당 李會昌 명예총재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능가할 만큼 독단과 독선이 횡행했다”며 평가절하했다. 여권의 독주와 정책 난조가 정치불안과 경제악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다. ‘정치개혁 미흡’에 대해선 여야 모두 같은 시각이다. 반면 그 원인을 놓고 책임전가 공방이 한창이다.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은 “수적 우세를 앞세워 야당이 개혁작업을 가로막고 있다”고 질책했지만 한나라당 李基澤 총재대행은 “의회주의를 무시한 金大中 대통령의 힘의 정치가 여야의 대치정국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여야의 시각차에도 불구,DJ정권은 정치권 구조조정,즉 정치개혁을 최우선 당면과제로 설정했다. 여권은 내년 상반기까지 21세기 정치모델을 제시하면서 국회·정당·선거제도의 구조조정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정계개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나라당 8·31 전당대회 이후 20명선의 야당의원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여대야소 구도 정착이다. 장기적으로 동야서여(東野西與) 구도 허물기와 지역분할의 타파로 잡았다. ‘정치권 사정’과 경제청문회를 정치개혁의 필수조건으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경제청문회를 통해 정경유착의 실상을 공개하고 구여권 비리인사들을 압박하겠다는 복안이다. ◎경제 이렇게 달라졌다/환란극복·관치체질 개선/연초 20% 웃돌던 시중금리 10% 밑돌고 부실금융·기업퇴출… 공기업 과감히 축소 새 정부의 6개월간 실적은 우선 외환위기 극복과 함께 경제부문의 개혁추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면한 외환부족사태를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으로 해결하면서 그동안 외환위기를 초래한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에 중점을 두어왔다. 바닥이 보이던 외환보유고(작년말 89억달러)가 8월 중순 400억달러를 넘고 대(對) 달러 환율은 도리어 내려가 적어도 외환위기는 한숨 돌린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20%를 웃돌던 시중금리 역시 10%를 밑돌고 있다. 물가도 안정세이며 무역은 상반기까지 흑자를 보였다. 새 정부는 적어도 외형상 외환과 금융시장의 안정이라는 성공을 거두었다고할 수 있다. 정부는 또 금융,기업,노동시장과 공공부문 개혁을 추진,‘관치경제’의 체질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부실한 은행,증권사 등 금융기관과 기업의 퇴출이 이뤄졌다. 근로자 해고,공기업 축소도 동시에 진행돼 왔다. 재벌의 구조개혁도 추진돼 재벌간에 경쟁력없는 대규모 사업의 교환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정부의 압박도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고위당국자가 실토하듯 ‘새 정부가 가장 예상치 못한 것이 바로 실업자 급증과 실물경제의 급격한 하락’이다. 정부가 앞으로 직면할 가장 큰 현안은 실물경기의 하락. 내수경기가 극도의 침체를 겪고 있으며 수출 역시 흑자행진 속에서도 지난 5월부터 전년대비 감소세로 돌아서 최근에는 두자릿수 낙폭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수출까지 감소할 경우 외채부담을 덜 수 있는 길도 막막해진다. 지금까지 정부는 ‘무엇보다 구조조정이 우선’이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9월말까지 매듭짓고 대기업의 구조조정도 마무리되면 올 4분기에는 경기가 살아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섣부른 실물경기 부양으로 구조조정의 고삐를 늦출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새 정부가 풀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실업. 6월말 현재 7%의 실업률,150만명의 실업자는 앞으로 더 늘 전망이다. 자칫 경제불안이 사회불안으로 이어질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金 대통령 취임 6개월 일지 ▲98. 2.25=제15대 대통령 취임. ▲2.28=정부조직법 공포. ▲3.3=高建 총리 제청으로 조각. ▲3.30∼4.5=ASEM참석 위한 영국 방문. ▲4.20=경제 6단체장과의 오찬,5대 개혁과제의 충실한 이행 등6개항에 합의. ▲4.30=朱良子 보건복지부장관을 경질,金慕妊 신임장관 임명. ▲5.10=‘국민과의 TV대화’ ▲5.18=李康來 정무 임명 등 청와대 수석 일부를 교체. ▲6. 4=지방선거 ▲6. 5=취임 100일 회견. ▲6.6∼14=미국 국빈 방문. ▲6.16=鄭周永 현대명예회장,소 500마리 몰고 방북. ▲6.18=55개 퇴출기업 명단 발표. ▲6.22=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발생. ▲6.29=5개 퇴출은행 및 7개 조건부승인 은행 명단 발표. ▲7.31=전직 대통령 부부 청와대로 초청 만찬. ▲8. 4=朴定洙 외교통상부장관 경질,洪淳瑛 신임장관 임명. ▲8.15=건국 50주년 경축식에서 제2의 건국운동 주창. 7,700명 특별사면,복권,가석방. ▲8.17=金鍾泌 총리 국회 인준.
  • 7,007명 8·15 대사면

    ◎공안사범 103명­권노갑·정호용씨 포함 정부는 건국 50주년을 경축해 權魯甲 전 의원과 노동운동가 朴노해씨(41·본명 朴基平) 등 7,007명에 대해 특별사면·복권,가석방 등의 조치를 15일자로 단행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사면으로 석방되는 2,174명은 15일 상오 10시 전국 교도소에서 일제히 풀려난다. 사면대상은 ▲잔형 집행면제 및 복권 2명 ▲형 선고실효 및 복권 3,404명 ▲잔형 면제 8명 ▲형 선고실효 10명 ▲복권 1,402명 ▲감형 13명 ▲형 집행정지 103명 ▲가석방·가출소 2,065명 등이다. 이에 따라 사노맹 사건의 朴노해씨와 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와 金洛中씨,구미유학생 사건의 梁東華·金聖萬씨,남파간첩 咸柱明씨 등이 형 집행정지 및 가석방 등으로 풀려난다. 남파간첩 ‘깐수’로 알려진 전 단국대 교수 鄭守一씨가 잔여형기의 2분의1을 감형받는 등 모두 103명의 공안사범에 대해 형 집행정지 및 감형 조치가 내려졌다. 한보비리 사건과 관련된 權魯甲 전 의원을비롯,鄭在哲 崔斗煥 鄭泰榮 河根壽 朴熙富 전 의원이 잔형 집행면제와 형 선고실효 및 복권 혜택을 받았다. 지난 94년 어음부도 사건으로 재수감된 뒤 질병을 앓아 온 張玲子씨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다. 金基玉 전 서울 동작구청장,崔仙吉 전 노원구청장,李彰承 전 전주시장 등이 형 선고실효를 받거나 복권되는 등 95년 6·27 지방선거 이전의 선거사범 1,626명 중 상습 선거사범 222명을 제외한 1,404명이 사면됐다. 12·12 및 5·18사건에 연루된 鄭鎬溶 張世東 許和平 黃永時 車圭憲 許三守 李鶴捧 崔世昌씨 등 12명과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의 安賢泰 李賢雨 전 청와대 경호실장도 사면·복권됐다. 그러나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와 새 범죄사실로 수사를 받고 있는 黃秉泰·洪仁吉 전 의원,金佑錫 전 건설부장관,鄭泰守 한보그룹 총회장과 李喆洙·申光湜 전 제일은행장 등은 특사에서 제외됐다.
  • “黃秉泰·金佑錫씨 막판 사면 제외”/朴 법무 일문일답

    ◎金賢哲씨 아직 형 확정안돼 대상 아니다/준법서약 안쓰고 풀려난 사람은 없어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14일 사면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초 洪仁吉 전 의원은 물론 黃秉泰 전 의원,金佑錫 전 건설부장관도 사면 대상에 포함돼 있었으나 최근 새로운 범죄사실이 드러나 사면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에 대한 사면이 한때 거론됐는데. ▲金大中 대통령이 賢哲씨에 대해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사면을 지시한 적은 없다.賢哲씨의 경우,본인과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서 불복이유에 대해 심리 중에 있다.형이 확정되지 않은 만큼 사면대상이 아니다.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사면된 공안사범이 있는가. ▲한명도 없다.준법서약서 제출 사범 104명 가운데 103명이 석방 및 감형됐다.나머지 한 명은 상습 절도범으로 엄밀히 말해 공안사범이 아니어서 빠졌다. ­12·12 및 5·18사건 관련자들의 복권과 관련,국민 정서상 이르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미 같은 사건으로 사면복권된 全斗煥·盧泰愚 전대통령과의 법적 형평성을 고려했다.열린 마음으로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대화합의 취지로 이해해 달라. ­미전향 장기수 17명에 대한 후속조치가 있는가. ▲17명은 남파간첩들이다.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으며 행형성적도 좋지 않다.가까운 시일내에 이들에 대한 조치는 없다. ­이번 사면에 이른바 ‘양심수’가 포함됐나. ▲법무부는 양심수 대신 공안사범이나 공안관련사범이라는 용어를 쓴다.사면된 공안사범 중 외부에서 말하는 양심수가 있을 수 있다.
  • 잔형면제­피선거권 제한/선고실효­실형 없던 일로/특별사면의 유형

    ◎가석방·출소­보호관찰 받아 이번 특별사면은 잔형 면제 및 복권,잔형 면제,형선고 실효 및 복권,형선고 실효,감형,복권,형집행 정지,가석방 및 가출소 등의 유형으로 단행됐다. 잔형 면제 및 복권은 가석방되거나 복역 중인 사람에 대해 남은 형기를 면제해주고 그동안 잃었던 선거권과 공무담임권 등을 회복해주는 조치다. 반면 잔형 면제는 형선고의 효력이 유효해 공무담임권과 피선거권은 제한받는다. 형선고 실효는 통상 집행 유예 또는 선고 유예를 받은 사람에게 형의 선고가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조치다.선고 자체의 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별도의 복권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다만 국가공무원법상 집행 유예기간이 끝나더라도 2년동안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란을 없애기 위해 복권 조치도 병행했다. 감형은 말 그대로 현재 복역중인 수형자의 형기를 단축해주는 것이다.복권은 실형의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 유예기간이 끝난 사람에 대해 공민권 등을 회복시켜주는 조치다. 형집행 정지는 수형자의 형 집행을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다.가석방 및 가출소는 징역·금고형을 받고 복역 중인 피고인을 형기 만료 전에 석방하는 것으로 통상 보호관찰을 받는다. ◎주요 경축 사면 일지 ▲48.9.27 정부수립 기념 일반사면 20,700명 ▲60.10.1 특별사면 14,429명 ▲63.12.16 민정이양 및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 일반 및 특별사면 62,014명 ▲67.7.1 제6대 대통령 취임 특별감형 1,476명 ▲71.7.1 제7대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 4,311명 ▲72.12.27 제8대 〃 6,220명 ▲78.12.27 제9대 〃 4,075명 ▲79.12.23 제10대 〃 592명 ▲80.9.1 제11대 〃 516명 ▲81.3.3 제12대 〃 3,239명 ▲88.2.27 제13대 〃 6,375명 ▲93.3.6 제14대 〃 41,886명 ▲98.3.13 제15대 〃 5,527,327명(행정처분 특별취소 조치 포함) ▲98.8.15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특별사면 7,007명
  • 8·15 사면 가족·각계 반응/“국민화합·제2 건국 계기로”

    ◎全·盧씨 “5·18 12·12 관련자 포함 잘된 일”/朴노해씨 부인 “8년 수발 짐 벗어 기뻐”/민가협 “양심수 360여명 대상 제외 유감” 모두 7,007명의 사면 대상자 명단이 발표된 14일 국민 대다수는 “사면을 계기로 화합을 다지고 제2의 건국을 맞는 계기로 삼자”면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張世東·鄭鎬溶·安賢泰씨 등 12·12 및 5·18 관련자와 全斗煥·盧泰愚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연루자 등 14명이 특사에 포함되자 두 전직 대통령측은 “잘된 일”이라며 환영. ○…權魯甲 전 의원은 복권사실이 발표되자 “대통령과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는 짤막한 소감만 밝혔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 朴노해씨(본명 朴基平)의 부인 金眞珠씨(43)는 사면 소식에 “지난 8년동안 옥바라지를 하면서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었다”면서 기뻐했다. 金씨는 “최근 면회 때 朴시인이 ‘그동안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국민의 정부는 한번 믿어볼 만한 정부’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친딸과 친인척을 상습적으로 폭행해온 남편을 청부살해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林順蘭씨(46)도 형기를 1년4개월 앞두고 15일 가석방된다. 林씨는 “부모 탓에 불행하게 자란 자식들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석방소감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인 사면 대상자 중 93년 5월 살인죄로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아미르 자밀씨(30) 등 파키스탄인 2명이 무기로 감형되는 데는 천주교인권위원회(위원장 金亨泰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한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정부가 대화합 차원에서 사면을 단행한다면서 455명의 양심수 가운데 최장기수 등 360여명을 사면대상에서 제외했다”면서 “헌정질서 파괴나 비리사범을 사면·복권한 조치는 광복절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반개혁적 행위”라고 주장.
  • 朴노해씨­사노맹 주역… 전향 자세보여/석방 인사 면면

    ◎金洛中씨­진보적 통일운동가 무기수/張玲子­2차례 수감… 건강 악화로 나와 이번 ‘8·15특사’에는 대형 공안사건 등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던 각종 사건의 주인공들이 다수 포함됐다. ◇權魯甲 전 의원=국정감사 선처 명목으로 한보그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2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5년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정치적 부담을 우려,지난 3·13 대통령 취임 사면에서는 제외됐었지만 이번에 잔형 면제와 복권조치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난 1월 지병인 당뇨병과 고혈압이 악화돼 검찰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서울 강북삼성병원으로 주거지를 제한받고 있었다. ◇朴基平(필명 박노해),白泰雄씨(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자생적 사회주의세력인 사노맹의 양대 주역으로 91년과 92년에 각각 검거돼 무기징역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朴씨는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에서 일약 ‘얼굴 없는 민중 시인’으로 떠오른 인물.수감 중이던 지난해 출간한 수상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시장경제 옹호론자가 아니지만 결코 사회주의자도 아니다”고 공언하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화제를 뿌렸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白씨는 제헌의회(CA)그룹의 좌파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운동권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렸다.지난해 ‘사노맹 결성은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全斗煥·盧泰愚정권에 대한 이념적 저항운동’이라며 사노맹 해체 및 재건 포기를 선언,金壽煥 추기경과 재야인사 등 141명이 사면·석방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黃仁五·仁郁 형제,金洛中씨(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북한의 ‘장관급’ 여간첩 李善實과 연계,남한내에 대규모 지하당 조직을 주도하다 92년 당국의 수사끝에 실체가 드러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핵심인물들이다. 전 민중당대표인 金씨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55년 월북,북한에 포섭된 뒤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민사협)고문 등을 맡으며 진보적 재야인사 및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 적발돼 무기수로 복역해 왔다.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적발된 黃仁五씨는 사북중 2년 중퇴가학력의 전부로 ,80년4월 사북사태를 주도한 뒤 같은해 6월 부산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기도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중부지역당 편집국장으로 적발된 동생 仁郁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서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했으며,87년1월 북한방송 청취내용을 운동권 최초로 교내 대자보로 부착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운동권 출신. 1심 재판 진행중이던 93년1월 서울대 교수들이 선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張玲子씨=건강악화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張씨는 82년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에 이어 94년에는 거액의 어음부도 사건을 일으켜 세간을 두번 놀래킨 큰 손.82년 당시 남편 李哲熙씨와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92년 잔형 5년여를 남기고 가석방됐으나 107억여원을 편취하고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2년여만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鄭守一씨(무함마드 깐수)=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암약한 고정간첩으로 96년 검거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이번에 감형됐다.
  • 故 金始顯 선생 외아들 峰年씨의 착잡한 ‘8·15’

    ◎3代 걸쳐 항일투쟁/훈장없는 독립투사/金九 암살배후 李承晩 지목… 저격 미수/‘나라 위한 외길’ 불구 유공자 지정 못받아 □金始顯 선생 공적 독립군 군자금 조성 5차례 16년간 투옥 상해서 의열단 조직 비밀군관학교 설립 “3대가 독립운동을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부친의 단호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8·15 광복절 쉰세돌을 맞는 金峰年씨(76·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감회는 착잡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인 金씨의 일가족 가운데 모친 權愛羅씨(작고)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자신과 부친 金始顯선생(1883∼1966)은 아직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일가의 이력은 조부인 金澤東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맹렬하게 활동했다. 金始顯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이처럼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17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체포되면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었다. 1920년에는 군자금을 조성하려다 붙잡히는 등 일제 치하에서 모두 5차례에 걸쳐 16년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어떠한 탄압도 선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부인 權씨는 192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항쟁을 주도하다 만났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세계 약소민족대표자대회’에 임시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 독립운동의 평생 반려자로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선생은 1923년에는 폭탄 밀반입사건(일명 黃鈺 사건),1925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비밀군관학교를 설립,독립군을 양성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외아들 金씨는 1942년 상하이에서 독립군에 편성돼 무장항쟁에 참여했다. 金씨는 “만주에서 모친과 함께 비밀 감옥소에 수용됐을 때 ‘봉년아 잘 있느냐. 어미도 잘 있다’는 모친의 친필을 화장실 기둥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부친 金始顯 선생은 그러나 2대 민의원(안동)을 지낼 때 金九 선생의 암살배후자로 李承晩 대통령을 지목,6·25 발발 얼마 후 李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52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4·19혁명으로 석방되면서 복권돼 5대 민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金씨는 “저격 미수 전력 때문에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金九 선생의 암살로부터 나라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게 부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 양심수 석방… 이념 갈등 씻는다/8·15 대사면에 담긴 뜻

    ◎국민역량 결집­대화합 의지/12·12 법적으로 완전 정리 정부가 14일 단행한 건국 50주년 기념 8·15 특별사면의 가장 큰 특징은 ‘양심수’로 불린 공안사범의 대거 사회복귀를 꼽을 수 있다.지난 번 3·13 사면에 이어 ‘구시대의 이념갈등을 씻고 국난극복을 위한 국민 대화합’을 이루겠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 이를 위해 ‘양심수’ 사면의 전제조건이었던 ‘사상전향제’를 폐지하고 ‘준법(遵法)서약제’를 도입한 점은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법무부는 ‘대한민국의 국법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준법서약서를 낸 공안사범 103명의 행형자료와 검사의 면담 자료 등을 종합 검토해 모두에게 사면 혜택을 줬다.사노맹 사건의 朴노해·白泰雄씨,중부지역당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 등이 이 과정을 거쳐 사면됐다.남파간첩인 전 단국대교수 鄭一守씨(일명 깐수)도 같은 절차를 밟아 잔여형기의 2분의 1을 감형받았다. 하지만 일부 재야단체로부터는 ‘또다른 사상전향제’,일부 우익단체에게서는 ‘안보의 허점’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는진통을 겪기도 했다. 사면 사상 유례 없이 선거사범 1,404명에게 혜택을 준 것도 두드러진다.95년 6·27 지방선거를 포함,6·27 이전의 선거사범이 대상이었다.상습적인 선거브로커와 벌금미납자 222명과 재판이 진행 중인 4·11 총선 사범은 제외됐다.앞으로 1년6개월동안 선거가 없고 이들을 검증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정부의 공명선거 정착 의지가 약해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IMF의 경제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한보그룹 鄭泰洙 총회장,李喆壽·申光湜 전 제일은행장 등은 사면대상에서 제외됐지만 權魯甲 전 의원 등 한보사건 연루 정치인들은 대부분 사면됐다. 12·12 및 5·18사건과 관련,지난 해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사면복권된 데 이어 張世東·黃永時 등 12명이 이번에 복권됐다.이에 따라 이 사건은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정리됐다. 거액 어음사기의 주범이었던 ‘큰손’ 張玲子씨가 건강상의 이유로 형집행정지 혜택을 받은 것도 주목거리다.
  • 서울국제연극제 참가작 확정/국내외·해외동포 30여편 출품

    ◎수준높은 연극 감상의 기회 오는 31일부터 10월15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과 학전블루소극장에서 열리는 ‘98서울국제연극제’ 참가작품과 행사내용이 12일 확정됐다. 22회째를 맞는 이번 연극제는 공식공연과 특별공연,자유참가공연으로 나눠 진행된다. 공식공연작품은 해외초청작 3편과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친 국내작 8편. 해외초청작 가운데 프랑스 예술극단의 ‘롱드르 기자의 지구촌 보고’는 신문기자 알베르 롱드르의 여행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격동의 인류사를 더듬어본 작품.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다리오 포가 극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이탈리아 로마현대극단의 ‘와장창’은 복권과 TV쇼에 중독된 사람들,컴퓨터세대 등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을 익살맞게 풀어낸다. 슬로베니아 류블리아나 국립극장의 ‘인생의 꿈’은 저주받은 왕국의 예언 때문에 출생직후 감옥에 갇힌 비운의 폴란드 왕자 세지스문도의 이야기를 무대로 옮겨낸 최신작이다. 국내작은 남사당패의 삶을 그린 극단 아리랑의 ‘유랑의 노래’(김명곤 작·연출)와 극단미추의 ‘뙤약볕’,극단 성좌의 ‘아카시아 흰꽃은 바람에 날리고’등 3편이 초연된다. 또 극단 즐거운사람들의 ‘천상시인의 노래’와 ‘탑꼴’(춘추),‘느낌,극락같은’(연희단거리패),‘김치국씨 환장하다’(연우무대),‘땅 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신화) 등이 무대에 오른다. 특별공연으로는 1930년대 강제 이주한 카자흐스탄 교민들의 애환을 담은 카자흐스탄 동포극단인 고려극장의 ‘기억’(연출 이 올레그)과 일본에 귀화했다 말기에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재일교포 마루세 따로씨(한국명 김균봉)의 1인극 ‘진흙의 창’이 공연된다. 자유참가공연에는 극단 학전의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과 극단 민·광·대의 ‘아가씨와 건달들’ 등 국내작 25편이 참가한다.
  • 내일 7,000명 특사/오늘 閣議 의결

    법무부는 13일 8·15 특별사면 및 복권,가석방 대상은 모두 7,000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번 사면은 14일 상오 8시 임시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오 10시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면에서는 준법서약서를 제출한 공안사범 103명,95년 6·27 지방선거 등 선거사범 1,500여명,외국인 수감자 100여명,조직폭력 등 민생침해사범을 제외한 일반 형사사범 등 모두 7,000여명이 복권·가석방·형집행정지 등의 혜택을 받게될 전망이다. 사노맹 사건의 朴노해씨(41·본명 朴基平),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 회장),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등도 풀려난다.
  • 8·15 특사 3,600명선/14일 발표

    ◎준법서약 공안사범 등 포함 법무부는 8·15 특별사면 및 복권,가석방 대상자를 오는 14일 상오 발표키로 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11일 “이번 사면은 14일 상오 9시 임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오 11시 발표할 계획”이라면서 “가석방 등은 15일 상오 10시 전국 교도소별로 일제히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사 대상은 국민회의가 사면·복권을 건의한 1,650명과 가석방 2,000여명 등 3,600여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가석방 사범 중에는 준법서약서를 제출한 공안사범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법무부는 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賢哲씨는 특별사면 검토대상이 아니라고 공식 발표했다.
  • 黨에 사면복권심사위 설치/與,대통령에 직접 건의키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5일 주요 경축일을 즈음해 단행되는 대통령사면·복권 과정에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당내에‘사면·복권 심사위원회’를 설치,대통령에게 사면·복권 대상자를 직접 건의하기로 했다. 여권의 이같은 방침은 사면·복권 대상자 건의를 법무장관이 맡고,당은 단순히 여론을 전달하는 현행 방식 때문에 그 대상자가 제대로 선별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국민회의 鄭均桓 사무총장은“사면·복권 대상자에 대한 당의 의견을 법무부장관을 통해 간접 건의하는 현행 방식에 폐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6)

    ◎“홀로섬” 사랑이 韓·日 외교에 희생/꼬마부터 노인까지 불러 국민가요 대접/日 교과서 파동에 감정악화 우려 판금/문공부차관에 간청… 넉달만에 ‘복권’ “울릉도 동남쪽/뱃길따라 이백리/외로운 섬하나/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자기네 땅이라 우겨도/독도는 우리 땅”(독도는 우리 땅) 지난 80년대 초반,어눌한 말투와 친근한 인상으로 ‘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세를 탔던 가수 鄭光泰(43)씨. 개그 노래를 처음 소개하며 연예인 생활을 시작해 ‘독도는 우리땅’으로 일약 스타가 됐던 인물이다. 노래명이 전국의 음식점 간판에 즐비하게 등장할 정도로 폭 넓게 불려지던 노래 덕분에 인기의 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얽힌 끈에 매여 살고 있다. 동네 꼬마부터 칠순 노인까지 부담없이 따라부르던 국민가요가 한 순간 금지곡으로 묶인 충격 탓에 적지않은 좌절을 느껴야만 했다. 1983년 7월말.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좋은 노래를 불러 감사한다”는 뜻의 감사패를 받고 한창 들떠 있을 때였다. 방송에서도 앞다투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내보냈고 鄭씨도 방송 출연 섭외를 감당못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독도 가수’ 鄭光泰는 그 날도 어김없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 나타났다. 지난해 1월 ‘독도는 우리 땅’ 레코드 취입후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방송에 깊숙이 빠져살 만큼 방송국 일은 그야말로 신바람 그자체였다. 녹화에 앞서 담당PD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던 순간 사무실 입구 게시판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인기절정이던 노래 ‘독도는 우리땅’이 금지곡 명단 맨 꼭대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면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도 없던 시절. 방송에서 일단 금지곡 지정이 되면 항의조차 할 수 없이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가사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누구나 부담없이 입에 올리던 노래를 갑자기 부를 수 없게 될 때정작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느끼는 좌절감이란…” 그 길로 방송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10년전 연예인이 되고 싶어 명동의 한 카페에서 시작한 자신의 연예계 생활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과 맺어지게 된 것은 10년전인 73년 고교졸업후 명지대 입학전 명동 르시랑스 카페를 찾은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 평론가 李白天씨가 운영하던 이 카페는 가수 宋昌植 어니언스 李秀滿 蔡恩玉씨 등이 고정적으로 출연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던 곳. 아마추어 무대가 매일 마련됐는데 여기서 토크송 ‘한심이’를 불렀다. 李章熙씨의 노래 ‘겨울 이야기’를 우스꽝스런 가사로 바꿔 부른 노래였는데 李白天씨의 눈에 띄어 주1회씩 사회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방송가에 알려지게 돼 최초의 개그프로인 TBC ‘살짜기 웃어예’에 토크송과 개그를 선보였고 78년 새로 만들어진 KBS 개그프로 ‘유머1번지’에서 본격적인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林河龍 張斗碩 金正植과 함께 포졸 옷을 입고 KBS 朴仁浩 프로듀서가곡을 쓰고 직접 만든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던 것. 방송에서 인기를 끌자 대성음반 徐喜德 사장이 레코드 취입을 의뢰해 왔다. 코미디 프로에 함께 출연했던 林씨 등 4명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徐씨가 늦는 바람에 鄭씨 혼자 기다려 결국 鄭씨만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게 됐다. 레코드가 나오면서 이 노래는 계속 상승세를 타 전국에서 불려졌고 鄭씨는 83년 KBS TV ‘젊음의 행진’ 프로에서 독무대를 맡기까지 됐다.. 鄭씨가 금지사유를 알게 된 것은 해금이 되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비록 83년 7월말부터 그해 11월말까지 4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지의 삶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사연을 알고난뒤 허탈감까지 느껴야만 했다. 82년 일본 열도와 한국의 정계·학계를 발칵 뒤집은 일본 중고교 교과서 파동이 그 발단이었다. 84년부터 새로 사용될 교과서에서 한·일 과거사 왜곡이 문제되자 83년 6월,문제발생 1년만에 왜곡 내용을 고친다면서 한국에 시정내용을 알려와 양국간에 긴장감이 돌았다. 국내에서도 이 개선시안을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이 일었다. 이와 맞물려 83년 8월29일 제12차 한·일 정기각료회담,9월6일 한·일 의원연맹 제11차 합동총회가 예정돼 있어 당국에서 반일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이 되자마자 鄭씨는 자연스럽게 방송에서 퇴출당했고 그 때부터 방송국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독도는 우리 땅’이 다시 불려지게 된 것은 83년 11월말쯤이었다. 느닷없이 방송국 간부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許文道 당시 문공부차관이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귀띔이었다. 용기를 내서 문공부로 許차관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許차관이 “평소 독도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격려했고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로부터 1주일뒤 각 방송매체에선 ‘독도는 우리땅’이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독도는 우리땅’은 그렇게 부활했다. 그해 연말 KBS 방송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역시 KBS 가사대상에서동상을 탔다. 96년 鄭씨는 또 한번 ‘독도는 우리 땅’과 연을 맺게 된다. 이번에는 독도 분쟁이 첨예하게 불거졌다. 1960년부터 6년동안 친구가 운영하던 샌프란시스코 한인방송인 ‘한미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국내 선후배와 레코드사들이 귀국해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을 해왔다. 방송을 중단하기가 힘들었지만 서둘러 돌아왔다. DJ DOC과 함께 옛 ‘독도는 우리 땅’ 리메이크곡을 취입했다.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지만 83년 금지곡 사건 때의 악몽이 어느정도 씻어진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사연들/“독도의 가치 희석” 주장도/‘대마도는 일본 땅’은 잘못/“바꿔 불러라” 항의 받기도 개그 가수 鄭光泰씨가 털어놓는 독도관련 사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뒤부터 스타가 된뒤 독도 명예군수 위촉, 느닷없는 금지곡 판정으로 인한 실망, 해금후 신인상 수상, 미국생활중 귀국 등 연쇄적으로 겪은 일들이 극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국민가요’로까지 인식되며 애창되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으로 전락한 것이나 문공부장관이 금지곡 가수를 직접 만나 해금을 약속한 것이 아이러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 크게 유행하자 이 노래에 대한 평도 갖가지였다. 팬 레터가 답지하더니 가사를 문제삼은 편지·전화공세가 이어졌다. 광복회와 향토사학자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왜 노래를 불러 독도의 가치를 희석시키냐”“역사적으로 볼 때 대마도도 우리 땅인데 왜 일본 땅이라고 하느냐” 등 강도높은 항변이 쏟아졌다. 어느 향토사학자는 서울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관련자료를 제시하며 鄭씨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鄭씨는 96년 귀국해 리메이크한 노래에서 “하와이는 미국 땅,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바꿔 불렀다.(원래 가사는 “…/대마도는 일본 땅/…”)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현실비판적으로 불려진 ‘독도는 우리 땅’ 개사곡도 적지 않아 이 개사곡들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일본의 교과서 파동으로인한 반일감정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꼬집은 것들. “…일제 패망 이후 임자없는 땅이라고 공짜로 삼키면 정말 곤란해…한반도는 우리 땅”“꼴뚜기가 뛰면은 망둥이도 뛴다고 군국주의 역사왜곡 패망지름길 미국신경 쓰다보니 일본신경 못쓰네 조선사람 조심해”“대한민국 노동자 부지런한 노동자 조출에 잔업에 특근에 철야 장시간 노동에 기아임금 받으며 선진조국 좋아하네…”. 모두 당시 사회상과 정치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길 ▲55년 서울 출생. ▲74년 서라벌고 졸업. 명지대 무역학과 입학. 명동 르시랑스 카페에서 토크송으로 주목받기 시작. TBC TV ‘살짜기 웃어예’ 출현. ▲78년 KBS TV ‘유머1번지’ 출현. ▲82년 대성음반서‘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독도는 우리 땅 수록) 취입. ▲83년 ‘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 지정·해금. KBS 신인가수상 수상. ▲84년 KBS 가사대상 동상 수상. ▲88년 무용가 김일현씨와 결혼. ▲90년 한미라디오 방송 진행맡아 도미. ▲96년 귀국.‘독도는 우리 땅’리메이크. ▲현재 댄스그룹 ‘벅’ 매니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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