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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주영칼럼] ‘황우석 재판’이 남긴 것

    [염주영칼럼] ‘황우석 재판’이 남긴 것

    수학자였던 갈릴레이는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의 별들을 관찰했다. 관찰을 통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천문대화’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일로 교황청에 소환돼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 재판에서 그 책의 내용을 부인하라는 자백을 강요받았다. 그는 파문돼 가택연금에 처해졌으며, 책은 금서처분을 당했다. ‘천문대화’는 그가 죽은 후 200년이 지나서야 금서에서 풀려났다. 갈릴레이가 완전복권을 받기까지는 이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무덤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가 재판장에서 풀려 나오는 날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633년에 있었던 ‘갈릴레이 재판’과 흡사한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MBC의 ‘황우석 재판’이다. 재판의 주재자는 교황청에서 MBC로 바뀌었고, 피고인석에는 갈릴레이 대신 황우석 교수와 그의 연구원들이 앉았다. 세월이 흘러 등장인물들은 바뀌었지만 재판의 본질은 동일했다. 과학을 비과학의 잣대로 검증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 재판에서는 성서와 당대 신학자들의 성서해석이 과학을 검증하는 잣대로 사용됐다. 그렇게 한 검증의 결과를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파문’의 협박이 가해졌다. 그리곤 자신의 연구결과물을 스스로 부인하도록 자백을 강요했다. MBC의 황우석 재판에서는 그 과학적 근거를 입증할 수 없는 악의적 제보가 검증의 잣대로 사용됐다. 황 교수의 연구원들에게 ‘구속’의 협박이 가해졌으며, 그들의 연구결과물인 사이언스 논문이 ‘페이크’(fake, 가짜)임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갈릴레이 재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황우석 재판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한 과학자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내용을 담은 논문을 비전문가들이 이리저리 재단하며 마치 ‘인민재판’을 하는 식으로 심판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400년 전으로 되돌아간 우리 사회의 과학문화의 후진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과학자들이 느꼈을 마음의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황우석 재판은 MBC PD 몇사람의 돈키호테적 만용에서 시작됐다. 돈키호테의 만용은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지만 언론기관의 만용은 사회적 흉기와 같은 것이다. 국내 과학자들은 과학의 문외한들이 세계 과학계를 상대로 ‘당신들이 틀렸다.’라고 외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PD 몇사람의 불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까. 과학에서 윤리문제를 감시하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 과학논문의 진위를 검증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과학논문의 검증은 과학자들이 할 일이다. 세계 생명공학의 대가들이 지금 황우석의 논문을 검증하는 중이다.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할 것이고 오류가 발견되면 새로운 논문으로, 혹은 보다 진전된 논문으로 이를 수정할 것이다. 과학적 절차를 무시한 황우석 재판은 과학에 대한 만행이며, 과학자들에 대한 테러다. 과학을 비과학적으로 검증할 때 과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이 400년 전의 갈릴레이 재판에서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그럼에도 PD들의 위험한 불장난을 제지하지 않았던 MBC의 경영진들은 1차적인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우리 사회의 낙후된 과학문화를 되돌아 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yeomj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정감록’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 기원은 실로 오래됐다. 신라 말 풍수예언의 대가 도선국사가 고려태조의 아버지에게 바쳤다는 ‘봉서’(封書)가 그것이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에서 왕이 배출될 줄을 미리 알았다. 그는 한 편의 예언서를 밀봉한 다음, 왕건의 아버지에게 바쳤다. 훗날 고려 태조는 예언서를 펼쳐 보고 자신에게 천명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려 초기 최유청이 지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도선이 전해준 ‘봉서’에 힘입어 왕건이 고려의 성립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역사상 왕건만큼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허균(許筠·1569~1618)과 유효립(柳孝立·1579~1628)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거사에 앞서 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예언을 조작해 널리 유포했다. 역사상의 야심가들이 예언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그들이 퍼뜨린 예언은 직접 간접으로 ‘정감록’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끈다. ●허균과 유효립 허균은 우참찬(정2품)이란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세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광해 10년(1618) 대간(臺諫)들이 허균을 탄핵할 때 나온 말이다. 상소문에는 허균이 평소에 저지른 온갖 악행이 고발되었다. 그는 상중(喪中)에도 창기를 끼고 놀았으며, 예언을 조작하고, 난리를 꾸미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는 비난이다. 과장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통용되던 도덕 기준을 가지고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긴 했다. 그는 본래 조정의 실권자 이이첨과 사이가 멀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이첨의 집엔 머리가 큰 뱀이 하나 있다 했다. 허균은 그 뱀이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풀이했다. 허균은 이이첨을 저주했던 것인데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七庶·7명의 서자)사건’이 일어나 자기의 처신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이첨에게 매달렸다. 허균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된 것은 변절의 대가였다. ‘칠서사건’에는 평소 허균이 가까이 하던 서울 양반의 서자들이 모두 관련되었다. 그들은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 달라고 호소했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다 경상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약탈한 사실이 적발돼 모두 사형을 당했다. 대북파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서인과 남인이 서자들을 앞세워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며 사건을 조작해 정적들을 처단했다.‘칠서’와 가까웠던 허균은 신변의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이이첨에게 붙었다. 허균의 벼슬길은 트였다. 그러나 선비들은 허균의 처사를 비루하게 여겨 틈만 나면 공격해댔다. 약점을 잡힌 허균은 늘 우울하게 지냈다(실록 광해 6년(1614) 10월10일 기축). 그러나 그만한 처지도 유효립과 같은 사람이 보기엔 부럽기 그지없었을 테다. 허균이 처단되고 한참 지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축출되고 그 아래서 최고 실권자로 행세하던 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일거에 숙청되었다. 유효립은 바로 그 유희분의 친조카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충청도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유효립은 인조반정 자체를 부당한 역적행위로 규정하고, 유배지에서 역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미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공(仁城君珙)을 새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대북파의 복권을 위해서였다. ●유효립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예로부터 야심가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언을 조작하곤 했다. 인조 초년에 발생한 유효립 역모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포된 예언 중에는 ‘정감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유효립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담화(曇華)라는 승려와 무척 친했다. 유효립의 사주를 받은 담화는 옛날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로 가서 “개해(戌年)와 돼지해(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한다. 그러면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절을 비석에 남몰래 새겨 넣었다. 인심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밖에도 담화는 예언서를 조작해 “쥐해(子年)와 소해(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 패한다.”라든가 “용해(辰年)와 뱀해(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는 대목을 삽입했다. 담화가 즐겨 이용한 편년체 예언방식은 18세기 이후 예언서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담화가 ‘인성´을 인성군 이공으로 해석하였던 관계로, 강원도 원주 지방 사람들은 머지않아 인성군이 즉위할 것으로 믿고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유효립과 담화 등이 퍼뜨린 예언 중에는 새 임금이 등극할 시기를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닐” 때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구절은 현재 ‘정감록´의 ‘감결’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 죽이 흰색으로 변한다. 거친 개펄에 조수가 일어 배가 다니며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일고 붉은 기운이 삼일 동안 감싼다.”는 구절이다.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징비록’에도 “진인이 남해에서 계룡으로 오면 창업을 알 수 있다. 말세가 되면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니며, 목멱산의 소나무가 붉게 변하고 삼각산의 모양이 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정감록’은 역사상 등장한 한국의 수많은 예언들이 모여서 이뤄진 호수다. 그 일부는 결과적으로 유효립 등이 목숨과 맞바꿔 조작한 예언들이다. 사실 계룡산의 돌이니, 개펄의 배 또는 용의 해 따위는 ‘정감록’ 가운데서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앞으로 세상이 바뀔 조짐을 보여주며, 마지막 것은 진인이 나오는 시기를 점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 ●허균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그의 반대파들이 보기에도 허균의 문재(文才)는 뛰어났다. 그는 붓만 손에 들면 수천 마디의 글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다. 특히 위서(僞書·가짜 책) 짓는데 취미가 있어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仙佛異迹·신선과 부처의 기이한 행적) 등을 멋대로 꾸몄다 한다. 허균의 위작은 그가 평상시 지은 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균은 ‘산수비기’(山水秘記)라는 예언서를 읽다가 거기에 본래 없던 내용을 보태 썼다. 조선의 첫째 수도는 한(漢), 둘째는 하(河), 셋째는 강(江), 넷째는 해(海)라고 조작해 넣었다 한다.‘한’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한양이었다. 그리고 ‘하’는 경기도 교하(交河)를 가리켰다.‘강’과 ‘해’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강’은 아마도 계룡산이 있는 금강을 뜻하지 않았을까.‘정감록’의 ‘감결’을 보더라도 한국의 수도는 한양, 계룡산, 가야산, 전주, 개성 등으로 몇 차례 더 바뀐다고 되어 있다. 허균은 예언서를 조작해 우선 인심을 뒤흔든 다음, 영창대군의 외척인 김제남과 공모해 서울을 교하로 옮기려 했다. 이것은 ‘칠서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그에게 씌워진 이런 혐의를 강력히 부정한다.‘산수비기’를 읽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법률상 엄격히 금지돼 있어 집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도성의 인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매일 밤 부하를 시켜 남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게 했다.“서쪽의 도적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 “유구(琉球)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 섬에 숨어 있다.”는 식이었다. 남북 양면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기세란 거짓 소문이었다. 특히 유구는 조선에 쌓인 원한이 있어 군대를 보내 섬 속에 숨겨둔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주장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허균은 조선을 멸망시킬 군대가 섬에 있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렸던 것인데,‘정감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오랑캐인지 왜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쳐들어 온다고도 했고, 새 나라를 일으킬 진인이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고도 했다. 그밖에도 그는 다른 예언을 지어 전파시켰다.“성은 들만 같지 못하고 들은 멀리 도망가는 것만 못하다.”는 식이었다. 이 역시 ‘정감록’ 에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활활(活活 또는 闊闊), 궁궁(弓弓), 밭(田) 또는 소나무(松)가 난세에 가장 유리하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허균은 부하들을 시켜 남산의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걸어 놓고 “살고 싶은 자는 피난을 가라.”고 소리쳤다 한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도성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졌고 실제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려는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한양 주민은 이미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허균이 조작한 외침 예언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아닌 게 아니라 광해 8년(1616)부터 북방이 어수선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일으켜 중국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건주까지 밀려들어 국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바로 그때 허균은 변방이 위급하다며 거짓 예언을 조작했고, 익명으로 된 글을 지어 어느 해 어느 곳에서 역적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등 실로 터무니없는 예언을 퍼뜨렸다. 반란에 관한 허균의 예언은 18세기 이후 ‘정감록’에 여러 차례 기록된 ‘삼국분국설’ 즉 특정한 시기에 나라가 세 토막이 나고 만다는 예언과 유사하다.‘분국설’의 기원이 허균에게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역자의 동지들 허균이든 유효립이든 그들이 일으킨 반역사건에는 다종다양한 여러 인사들이 관련되었다. 유효립 사건의 경우는 처형된 공범 수가 무려 50명을 헤아렸다. 그 가운데는 전 현직 관리는 물론 궁중의 내시와 화원(畵員)까지도 끼여 있었다. 이런 사건엔 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승려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 점에서는 허균의 역모사건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위에 말한 부류 외에도 무사와 하인들도 다수 가담했다. 허균의 경우엔 한두 가지 이색적인 취향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평소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현인(賢人)”이라 칭찬했다 한다.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희생된 고관이었다. 그는 명실 공히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공신이었으나 권력투쟁에서 실패해 역사에 오명을 남긴 불우한 인물이다. 허균은 바로 그 정도전을 사모해 ‘동인시문(東人詩文)’을 정리할 때 그의 시를 가장 먼저 실었다. 혹시 허균은 정도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허균은 재주가 비상한 서자들과 가까웠다. 특히 처조카인 서자 심우영(沈友英)을 몹시 아꼈다. 심우영과 함께 ‘칠서사건’의 주범이던 서양갑과도 무척 친했다. 허균은 서양갑에게 석선(石仙)이란 자를 지어 주기도 했는데, 전설에 등장하는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켰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평소 허균은 주장하기를,“오늘날 영웅은 서석선(徐石仙)뿐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균이 친하게 지냈던 서자들은 글재주가 탁월해 장안의 명망가로 통하던 인물들이었고, 서울의 양반들 중에는 그들 서자와 사귀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만 그들과 친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재주 있는 서자들, 그리고 비명에 죽은 정도전 같은 인물을 허균은 유달리 좋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허균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칠서사건’ 이후 서자들을 비롯한 비제도권 인사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광해군 때 승려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모의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허균이 꾸민 일이라고 비난했다. ●허균이 정말 반역을 꾀했을지는 의문 앞에서 예로 든 허균과 유효립은 서로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허균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생각이었다 한다. 그에 비해 유효립은 대북파의 재집권을 노렸다. 인조를 쫓아내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복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모자인 유효립은 자신의 ‘역모’가 정당하다고 굳게 믿었으므로, 체포된 뒤에도 떳떳했다. 그 태도에 놀란 조정 대신들은 “효립의 진술은 언사가 매우 흉악하고 버릇이 없어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먼저 목을 베게 하소서.”라고 우선 처형부터 하자고 인조를 졸라댔다. 왕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유효립이 펼친 주장이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두려워 “그가 진술한 내용을 불살라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허균의 역모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실록’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그가 은밀히 무사를 모은 것과 승군(僧軍)을 동원한 일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 당시 허균은 군사를 이끌고 인목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 먼저 대비를 제거한 다음 광해군에게 아뢸 계획이었다 한다. 왕도 이미 그 계획을 허락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때 갑자기 조정의 실권자인 삼창(三昌·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왕에게 허균이 반역을 꾀한다고 밀고했다. 대비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허균이 역모를 일으킬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 말에 놀란 인조는 사건을 엄히 조사하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다.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을 상대로 인목대비의 폐모를 누가 먼저 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을 벌였다. 이이첨은 공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꼈고, 허균에게 반역죄를 씌워 반전을 도모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실록 광해10년 8월21일 정축). 그때 허균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크게 조력한 이는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이었다. 기준격의 아버지 기자헌은 애초 허균의 친구였다. 그런데 인목대비에 관한 문제로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갔다. 허균은 기자헌을 죽이려 들었고, 분노한 기준격은 허균의 과거 언행 가운데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을 꼬투리 삼아 공격했다(광해 9년 12월26일 정사). ●예언을 통한 집권의 정당화는 오랜 전통 어쨌거나 허균과 유효립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언을 통해 기성의 정치세력에 반항하다 실패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사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는 빤하다. 때로 예언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예언을 바꾸는 경우는 더욱 많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지역아동센터 전세금 지원 내년부터 90억원 국고에서

    내년부터 지역아동센터를 만들 때 전세자금이 국고로 지원된다. 기획예산처는 각 지역에서 민간 자율로 운영되는 저소득층 대상의 지역아동센터에 내년부터 복권기금을 활용해 모두 90억원의 전세자금을 새로 지원하겠다고 5일 밝혔다. 지원을 받는 지역아동센터는 약 160개소로 서울의 경우 개소당 8000만원, 지방은 5000만원이 지원된다.또 월 200만원씩 운영비를 지원하는 아동센터 수를 올해 800개소에서 내년에 902개소로 늘릴 방침이다. 기획처 관계자는 “전국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아동센터가 1500개에서 2000개가량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이 가운데 일정 기준을 총족하는 아동센터에 전세자금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역아동센터는 현재 보건복지부 기준을 충족하는 곳만 전국에 902개소가 있으며 이를 2만 3000명이 이용하고 있다.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KLS대표 수십억 횡령혐의 포착

    로또 복권 시스템 사업자 선정 과정의 비리의혹을 수사해온 대검 중수부(부장 박영수)는 2일 ㈜코리아로터리서비스(KLS) 공동대표이사 남모(59)부회장이 회삿돈 수십억원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남씨가 횡령한 돈을 사업자 선정과 관련된 로비 등에 사용했는 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다음주 중 남씨를 소환해 횡령 혐의 등으로 사법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KLS 관계자는 “남 부회장이 KLS가 아니라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코스닥 등록업체인 C사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8·31대책 3개월 점검] 종부세 입법 난항…집값은 다시 ‘들썩’

    [8·31대책 3개월 점검] 종부세 입법 난항…집값은 다시 ‘들썩’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발표한 ‘8·31 종합대책’이 난관에 봉착했다.28일 국회 재정경제위는 조세법안 심사소위를 열어 종합부동산세법 등 부동산 관련 4개 법안을 논의했으나 핵심 쟁점에서 여야간 극명한 이견차를 드러냈다. 법안이 표류하거나 후퇴할 경우 부동산 시장이 다시 들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정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종부세 부과대상 놓고 여야간 힘겨루기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8·31 대책’에 한치의 흔들림이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종부세 부과 대상은 주택의 경우 9억원에서 6억원, 나대지는 6억원에서 3억원으로 낮추고 ‘개인별’로 합산하던 것도 ‘가구별’ 합산으로 전환하겠다는 당초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당론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종부세 부과 대상은 지금처럼 주택 9억원, 나대지 6억원으로 유지할 것과 가구별 합산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아울러 1주택만 보유한 노인 등에게는 종부세를 면제해 주는 ‘예외조항’의 마련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종부세 부과는 원칙에 따라 예외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당 일각에서는 고령층의 경우 집을 팔 때까지만 종부세 부과를 유예해 주자는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합의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표결로 처리하자는 주장도 없지 않다. ●당정, 양도세율 인하는 ‘8·31 입법’ 이후에나 검토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50%로 무겁게 물리자는 당·정의 방침에 한나라당은 지역구 사정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중산층이 집중된 서울 강남권을 지역구로 둔 한나라당 의원들은 양도세 중과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의원들은 양도세 중과에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이종구(서울 강남갑) 의원은 “소득세 중과에는 찬성하지만 불로소득인 로또 복권에 부과되는 소득세율 33%보다 더 높은 세금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도 내년에는 양도세 실가 과세가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보유세 과표의 현실화로 세금이 높아지기기 때문에 거래세인 양도세율을 현행 9∼36%에서 6∼24%로 낮춰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일단 8·31 대책이 효과를 거두고 세수에 결함이 없다고 판단되면 거래세 인하 차원에서 양도세율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면서 “8·31 대책 이전의 당정 협의 과정에서 양도세율 인하 문제가 거론됐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기본 뼈대는 바뀌지 않을 듯 국회 사정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부동산 입법 문제를 당론으로 정하지 않고 재경위 소위에 맡긴 점에 비춰 부동산 입법을 끝까지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핵심 쟁점은 그대로 가되, 고령층이나 정년퇴직자 등에 일부 예외조항을 두는 절충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생과 관련된 소주세율 등의 세법 개정안과 부동산 입법안 처리를 맞바꾼다는 일부 언론의 ‘빅딜’ 보도에는 전혀 성질이 다른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소주세율 등은 이미 청와대에서 유보의 입장을 밝혔기에 ‘협상의 대상’이 아니며 특히 한나라당이 소수 부자만을 위해 부동산 입법을 반대했다는 비난을 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쩡칭훙 가세… 中지도부 ‘3톱’ 체제로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4세대 지도부가 ‘후진타오·원자바오·쩡칭훙’의 트로이카 체제로 급속히 전환되는 분위기다. ‘후진타오(胡錦濤)주석-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투톱 시스템으로 짜여진 중국의 권력구도에 쩡칭훙(曾慶紅) 국가 부주석이 가세하면서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홍콩 언론들이 27일 보도했다. 당초 중국 4세대 지도부는 새롭게 떠오르는 후진타오 주석과 기득권을 쥔 장쩌민(江澤民) 전주석·상하이방(上海幇))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예상됐으나 출범후 지난 3년여동안 안정과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소식통들은 4세대 지도부의 권력 연착륙은 장 전주석의 심복이었던 쩡 부주석(권력 서열 5위)이 ‘변신’, 후 주석-원 총리 사이에서 3각 구도가 정착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타이완 탐캉(淡江)대학 린중빈(林中斌)교수는 “쩡칭훙이 장쩌민의 권력 약화와 후진타오 부상 판세를 읽고 후 주석과 제휴로 돌아섰다.”고 진단했다. 뉴욕타임스는 쩡 부주석이 후 주석과 공모해 장쩌민을 권좌에서 내몰았다는 ‘음모론’을 보도하기도 했다. 쩡 부주석은 후 주석과 타이완 국민당과의 제3차 국공합작 등 대외·정치 전략을 함께 짜는 등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후 주석의 ‘정치적 스승’인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 복권에 대해 황쥐(黃菊) 부총리 등 상하이방들의 반대에도 불구, 쩡 부주석은 후 주석을 지지했다. 후 주석은 시진핑(習近平) 저장성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중국 상무부장 등 쩡 부총리와 같은 계열인 태자당들을 중용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혁명 1세대 원로인 전 내정부장 쩡산(曾山)의 아들인 쩡 부주석은 태자당(太子黨)의 리더로 통한다. 현재 중국의 권력판도는 후 주석이 당·정·군을 총괄하고 원 총리가 국무원과 경제를 이끌며 쩡 부총리가 당과 조직을 맡는 ‘3각 분담’의 묵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홍콩언론들의 분석이다.oilman@seoul.co.kr
  • [아침을 먹자] 직장에서 아침밥 더 맛있어요

    [아침을 먹자] 직장에서 아침밥 더 맛있어요

    “우리님은 지난해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아 몸이 불편한데도 오전 7시에 구로구청 현장민원실 문을 엽니다. 새벽잠을 설치는 그에게 아침도시락을 선물해 주세요.” 결혼 15년차 주부 김애경(45)씨는 서울 구청 공무원인 남편 박효순(46) 주임을 위해 서울신문과 CJ㈜가 펼치는 ‘아침을 먹자’건강캠페인에 사연을 보내왔다. 남편 박씨는 지하철 7호선 온수역에 자리한 구로구청 현장 민원실에서 일한다. 바쁜 직장인들이 출·퇴근 길에 민원서류를 뗄 수 있도록 돕는 것. 책도 빌려주고, 인터넷이나 팩스, 복사도 무료로 사용토록 서비스한다. 근무시간은 오전 7시∼오후 8시. 공익근무요원인 정성진(23)씨와 함께 일하지만, 하루에 400∼500여명이 찾아 늘 분주하다. 2002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친 박씨는 지난해 13시간 동안 척추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 건강이 항상 걱정이다.“아침밥을 먹어야 약도 거르지 않는데, 새벽에는 입맛이 없다고 우유만 먹고 가네요.”24일 백설 햄스빌 베이컨으로 만든 아침도시락이 민원실에 도착했다.“아내에게 복권이라도 사라고 해야겠어요. 평생 뭔가에 당첨되긴 처음이거든요.”박씨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침을 굶었다는 공익요원 정씨와 마주 앉아 푸짐한 도시락을 열었다. 숙직실에서 3∼4시간 잠자고 오전 5시부터 일하던 지하철 직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줬다. 베이컨 배추덮밥과 베이컨 말이는 따끈따끈했다.“아침에 어떻게 고기를 먹지 싶었는데, 깔끔하고 맛깔스럽다.”고 평했다. 김치가 조금 부족한 게 아쉽단다. “여보, 아침밥 먹고 힘낼 게. 고마워.” 글 사진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신감각 ‘로미오와 줄리엣’

    경기 지역 14개 문예회관이 공동으로 제작한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이 25일 과천시민회관을 시작으로 내년 1월까지 순회공연을 갖는다. 이같은 공동제작방식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으로, 각 극장들이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제작사업을 추진하면서 부딪혀온 제작비 부담과 배급문제 등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마련됐다. 첫 프로젝트인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경기지역문화예술회관협의회(경문협)소속 8개 공연장이 각각 3000만원을 내고, 복권기금사업 지원금을 합해 총 예산 3억8000만원을 투입했다. ‘웃어라 무덤아’‘에쿠우스’등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 스타일을 고수해온 김광보 연출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선남선녀의 순애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들의 비극적 사랑을 잉태시킨 현대사회의 권력과 욕망에 칼끝을 겨눈다.‘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의 작곡가 김태근이 음악을 맡았다.(02)744-030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정대철씨 1년간 美연수… 정치재개설 일단 잠복

    정대철 전 열린우리당 고문이 앞으로 1년간 미국에 머무른다.지난 8·15 광복절에 사면 복권된 정 전 고문은 오는 27일 출국,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초청으로 객원연구원 생활을 할 예정이라고 한 측근이 전했다. 정 전 고문은 이달 초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유선호·문학진 의원 등 재야파 인사를 초청, 만찬을 주재했으며, 지난달 초에는 6일간 일정으로 방북, 황해도의 농장을 둘러봐 다양한 정치적 해석을 낳았다.하지만 정 전 고문의 외유로 사면 복권 이후 곧바로 정치를 재개할 것이라는 관측은 일단 수그러들게 됐다.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후야오방 복권 정치자유화 포석될까

    중국 정치 자유화의 신호탄인가, 아니면 권력투쟁의 전주곡인가. 지난 1986년 12월 실각이후 ‘금기의 인물’이 되어왔던 후야오방(胡耀邦)전 총서기의 복권이 가져다 줄 파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언론·집회의 자유, 사상 및 표현의 자유 등 과감한 자유주의적 정책을 펴다 낙마한 뒤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이 중국정부의 자유화 확대로 이어질지가 관심사다. 중국 당국은 20일 평전의 출판·판매를 허가하는 등 일단 후야오방 재평가의 확산을 허용하는 듯한 자세다. 그의 탄생 90주년 기념일인 이날 전국 각지의 국영 신화서점에선 공산당 산하의 인민출판사에서 발행한 ‘후야오방전’ 제1권이 일제히 판매되기 시작했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지난 18일 공산당 중앙지도부가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 좌담회를 연 데 이어 19일 후의 고향인 후난(湖南)성 류양(瀏陽)시에서도 후난성 공산당위원회 주최로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 후 전 총서기의 재평가가 민감한 이유는 그의 급진적 자유주의적 정책이 10년이 넘는 장쩌민(江澤民) 정권 내내 비판 받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사망 직후 재평가를 요구하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톈안먼(天安門)사태로 이어진 것도 그를 오랫동안 입에 올리기 불편한 ‘금기의 인물’로 만들었다. 일부에선 후야오방의 후광을 입은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이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통해 장쩌민 전 주석세력을 압박하려 한다는 해석도 있다. 따라서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 후속조치는 향후 중국 정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란 점에서 무게를 지닌다. 한편 이날 시판된 그의 평전 제1권은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76년까지의 생애를 그렸다. 그러나 보다 민감한 현실 문제들이 얽혀있는 2·3권의 판매가 허용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특히 3권에선 1986년 12월 대규모 학생시위 발발로 자기비판서를 쓰고 총서기직을 물러난 뒤 1989년 4월15일 사망할 때까지의 과정이 소개돼 있어 공개·판매될 경우 논란이 예상된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후야오방 ‘조용한 복권’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의 복권을 둘러싸고 중국의 권력 내부가 요동치고 있다.중국 공산당이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별관에서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고 신화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지난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지금까지 중국 당국은 그와 관련된 어떠한 행사 개최도 불허해왔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사실상 후야오방의 복권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중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아있는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후야오방의 명예회복을 외치는 시위에서 촉발됐다는 점에서 사안은 복잡하다. 자칫 그의 복권이 지난 1월 사망한 자오쯔양(趙紫陽) 전당총서기의 복권이나 톈안먼사태의 역사적 재평가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개혁세력들의 전면적인 정치 민주화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실적 권력구도 속에서 후야오방의 복권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장쩌민(江澤民)·상하이방(上海幇)과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후야오방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정치적 후견인이자 은사’였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대부로 통했던 후야오방은 후 주석을 공청단 서기로 추천하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후 주석이 톈안먼 뇌관을 안고 있는 후야오방의 복권을 강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장쩌민 전주석과 상하이방은 톈안먼사태를 ‘동란’으로 규정한 당시 권력의 중추였다. 후야오방의 복권으로 가장 타격을 받는 세력이다. 결국 후야오방 복권 기념식은 예상보다 ‘조용하고 조촐하게’ 치러졌다. 후진타오와 상하이방 간에 정치적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때문에 당초 18일 20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로 열릴 예정이었던 후야오방의 기념식은 350명 규모의 심포지엄 형식으로 격하됐다. 장쩌민·상하이방은 후야오방의 전면적 복권에 제동을 걸면서 건재를 과시했고 후 주석 역시 ‘조용한 복권’을 통해 당내 개혁·민주화 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중국 권력 특유의 ‘타협과 균형’의 정치가 후야오방의 복권에서도 적용됐다.oilman@seoul.co.kr
  • [파산자-재기의 두얼굴] 판사47% “파산급증은 카드정책 실패탓”

    [파산자-재기의 두얼굴] 판사47% “파산급증은 카드정책 실패탓”

    서울신문이 전국의 개인파산 담당판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은 파산자의 재기를 위해 완전면책을 운용하고 있다고 답변했다.2005년 10월 전국 법원의 평균 면책률은 99%에 이르고 있다. 파산만큼은 ‘파크타 준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ㆍ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라는 민법의 근본 원칙이 수정되고 있는 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무능력한 기업은 청산이 가능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는 국가의 인적 자본”이라고 말한다. ●오토매틱 스테이 도입 의견 다수 파산 판사의 47.4%는 파산을 신청하면 자동으로 채권추심을 중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21.1%는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10.5%는 ‘대안 입법이 필요하다.’이라고 말했다. 인권침해적인 채권추심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낸 것이다. 오토매틱 스테이(Automatic Stay)는 미국 제도로, 우리나라에서 내년 4월 실시하는 통합도산법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다만, 개인회생에 대해서만 법원의 재량으로 금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한 판사는 “부작용의 우려가 있어 통합도산법에 도입하지 않았다. 판사가 직접 채권추심을 중지하는 명령 등 대안 입법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체의 15.8%는 “채무자들이 추심당할 재산이 없어 필요치 않다.”“회사정리에 맞는 제도로 개인파산에는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금융권 특수기록 판사들도 논란 은행 및 신용정보기관 등 금융권이 7년 동안 보관하는 파산자의 ‘특수기록’은 판사마다 견해가 엇갈렸다. 그러나, 특수기록 때문에 면책자의 사회적 복귀가 제약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응답 판사의 42.1%는 ‘특수기록 보관’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A판사는 “면책을 받았어도 신용관리가 떨어지고 다시 변제를 못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채권자가 일정 기간 참고자료로 보존은 가능하다.”고 말했다.B판사는 “미국도 파산자의 기록을 갖고 신용관리를 하지만 금융거래는 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21.1%와 26.3%는 “문제가 된다.”,“사회적 합의나 입법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C판사는 “면책자의 경제활동을 금융기관이 차별하는 것은 파산제도의 취지에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D판사는 “복권이 돼 소멸될 기록을 금융기관이 활용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부 실책이 파산 급증 원인 파산 담당판사 10명 중 5명은 정부 카드정책의 실책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26.3%는 경제 시스템의 문제로,15.8%는 외환위기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이유로 들었다. 한 판사는 “금융기관의 무차별적인 신용카드 남발은 여전히 지속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판사는 “신용카드 남발, 고액의 주택 융자금 등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경제 시스템의 오류가 크게 작용했다.”고 풀이했다.47.4%는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가 크다고 한 반면,36.8%는 “문제삼을 수 없다.”고 응답했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파산자의 희망찾기] 21세에 신불자… ‘파산 대물림’

    [파산자의 희망찾기] 21세에 신불자… ‘파산 대물림’

    파산을 선고받더라도 면책이 안 되면 삶은 지옥이 된다. 고스란히 빚이 남은 이들에게 ‘빈곤 세습’은 자녀 세대의 파산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1998년 6월 파산한 윤만호(표·가명·47·서울 독산동)씨. 같은 해 12월 면책이 기각됐다. 국내 개인파산 초기만해도 법원은 엄격한 면책 요건을 적용했다. 보증금 20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딸과 생활하는 윤씨는 그 후 7년째 파산자라는 낙인만 찍힌 채 1830만원의 빚을 떠안고 있다. 딸 은영(가명·24)씨는 21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윤씨가 파산을 신청했을 때 채무자를 구제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파산 신청→면책 기각→파산 대물림’ 은영씨 역시 채무자다.1800만원의 카드빚은 중졸의 그녀에게 큰 고통이다. 배드뱅크에 매달 10만 1000원씩 8년 동안 갚기로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파산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18세. 은영씨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유방암을 앓던 어머니(45)의 치료비와 생활비도 그녀의 부담이었다. 택시운전을 했던 윤씨는 150만원의 수입을 병원비에 썼다. 윤씨의 아내는 지난 4월 가출한 뒤 소식을 끊었다. 윤씨마저 허리 디스크로 자리에 눕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버지의 면책이 기각되면서 소녀 가장이 된 은영씨. 아버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다 카드빚이 커졌다. 은영씨는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카드 회사의 추심은 심해져 갔고 추심을 피해 윤씨 부녀는 무려 33차례나 이사를 했다. 윤씨 부녀에게 빚은 이미 대물림되고 있다. 그 대물림의 끝은 또다시 파산일지도 모른다. ●일부면책 그 ‘두번의 파산’ 파산을 했지만 채무의 일정액을 정해진 기간 동안 갚아야 하는 일부면책자도 빚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빚을 다 갚고도 복권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두번의 파산’절차를 밟아야 한다. 경남 거창에 사는 한순애(가명·49·여)씨.2003년 12월 파산한 한씨는 이듬해 6월 일부면책을 받았다. 카드 빚이 6000만원이나 됐던 한씨는 채무의 40%에 해당하는 2400만원을 갚아야 했다. 한씨는 창원지방법원에 항고했지만 2005년 6월 채무의 20%인 1200만원을 갚으라는 결정을 받았다. 2000년 3월 결혼정보회사를 시작했다가 적자만 보던 남편은 2004년 초 사업을 한다며 중국으로 떠난 뒤 생활비는 단 한푼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씨는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카드빚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씨는 “법원에서는 2년 안에 남은 채무를 모두 갚으라고 했지만 지금도 빚내서 살아가는 처지라 빚 갚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복권 됐지만 “평생 숨어살고 싶다” 법원의 일부면책으로 남은 채무를 모두 갚고 파산만큼이나 복잡한 복권 절차를 밟는 김홍수(가명·35·고교 수학강사)씨.2002년 5월 파산한 김씨는 일부면책 결정을 받았다. 채무의 10%인 1600만원을 3년 안에 모두 갚았지만 빚 갚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씨의 채권기관은 김씨가 파산하자 채권을 모두 팔아넘겼다. 김씨는 20곳에 가까운 은행과 카드 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채권이 팔려 나간 곳을 하나씩 확인했다. 김씨는 지난 9월에야 남은 빚을 모두 갚았다. 파산만큼이나 복잡한 서류를 꾸며 법원에 복권 신청을 했다. 복권이 결정되면 그의 호적지신원증명서에 기재된 파산 기록은 삭제된다. 김씨는 파산과 일부면책, 복권 과정을 거치면서 평생 제도권 밖에서 숨어살겠다고 결심했다. 결혼도 사실상 포기했다. 그는 “파산을 했던 지난 시간을 아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면서 “괴로움과 고통, 지긋지긋한 채무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말했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파산자-복권되지 않은 인생들] ‘완전면책’ 30代 여성직장인과 은행 동행기

    파산 전문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김은실(34·여)씨. 그녀는 2003년 12월 파산을 선고받고 지난해 4월 완전면책을 받았다. 파산과 면책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변호사와 인연을 맺게 된 그녀는 지난해부터 파산자들을 돕는 상담원으로 일하게 됐다. 파산자에서 연봉 3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으로 재기에 성공했지만 김씨는 여전히 금융거래에 차별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씨는 지난 3일 연말소득공제를 받을 목적으로 서울 서초동 K은행 지점을 찾아 체크카드 발급을 신청했다. 은행에서는 통장도 새로 발급해주고 인터넷 뱅킹도 할 수 있게 해줬지만 체크카드 발급은 거부했다. ●면책전 카드빚으로 트집잡아 신용조회를 마친 은행 직원은 김씨가 내민 체크카드 발급 수수료 1000원을 되돌려주며 “고객님은 체크카드 발급 거부 대상자입니다.”라고 말했다. 통장에 있는 돈만큼만 대금을 결제할 수 있는 체크카드가 발급이 안 된다는 말에 김씨는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김씨는 2002년 K은행 카드에서 인출한 현금서비스 900만원과 대출금 2000만원을 갚지 못했다. 은행은 지난해 4월 완전면책을 받은 김씨의 채권을 다른 금융기관에 넘겼다. 김씨는 “그렇다면 은행에 자신의 채무가 남아있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해당 사항이 아니다.”라는 대답만 들었다. 창구 직원은 그녀에게 “정 필요하면 ‘금융감독원이 면책자에게 체크카드를 발급하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다음날부터 시행하니 다시 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은행을 한번 더 찾은 김씨. 여전히 ‘거래 불능 회원’으로 등록돼 체크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후불제 교통카드 기능있어 발급 거부” 은행측은 후불제 교통카드 기능이 장착된 체크카드를 발급하고 있기 때문에 면책자들에게는 발급해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2001년 한 건설회사의 경리로 근무하다 사장에게 카드를 빌려준 것이 화근이 돼 불과 3개월 만에 빚더미에 앉았다.6000만원의 빚은 김씨가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2년 동안 8000만원으로 불어났고 결국 2003년 12월 파산해야 했다. 김씨 역시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과정에서 채권기관의 추심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혼자 빚을 안고 죽겠다고 마음 먹고 수면제 100알을 갈아 소주와 한꺼번에 들이켰던 그녀였다. 하루 만에 깨어난 그녀는 여덟살, 일곱살 두 아들을 보고 살아야겠다며 파산을 결심했다. 김씨는 “지하철 요금을 떼먹고 달아날 것도 아니고 파산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교통카드 기능이 장착된 체크카드도 발급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씁쓸해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취업·재기 막는 ‘1201코드’ 낙인

    취업·재기 막는 ‘1201코드’ 낙인

    한번 실패한 사람의 재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시작도 있을 수 없다. 절망을 넘어 경제적 재기를 찾아 선택한 파산이라는 길. 개인파산 신청 1만명을 넘은 지난해 파산 실태를 탐사보도한 서울신문은 올해에는 파산 이후 재기를 어렵게 하는 장벽과 면책 이후에도 ‘불량 인생’의 굴레에 갇힌 파산자들의 ‘희망찾기’를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탐사보도팀은 1998년 초기 파산자 182명에 대한 7년 후의 현재를 추적,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또 전국 법원의 개인파산 담당판사와 면책자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방법과 대안을 모색해 봤다. “제 세대에 금융 전과자라는 낙인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재기의 기회마저 막는 건 너무 가혹합니다.”(41·면책된 중소업체 사장) “파산자 딱지가 붙은 사람은 은행도 갈 수 없습니다. 파산을 하기 전 세금을 내고 살았습니다. 나랏돈을 받고 싶지 않지만 뭘 하며 어떻게 살까요.”(39·모자가정 이혼 주부) “면책을 받았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은 불이익을 받지 않으면서 왜 개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낙인을 찍습니까.”(35·파산한 회사원) ‘주문, 파산자를 면책한다.’ 빚이 탕감된 면책자의 꿈은 ‘경제적 재기’이다. 그러나 한번 찍힌 불성실의 낙인은 이들을 빚에서만 벗어나게 할 뿐 파산자라는 굴레에 가두고 있다. 무일푼에서 시작한 새 출발은 면책 후 금융거래 소외, 직장마다 따라다니는 ‘파산 꼬리표’ 등 차별의 장벽 앞에 무너지기 일쑤다. 민주당 김효석 의원은 “기업주는 한번 망해도 재기를 하면 칭송을 받지만 일반 서민은 파산을 하고 면책이 되어도 일상적인 경제활동마저 막혀 재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떨어진다면 또다시 정부의 부담이 되는 만큼 정부와 금융권은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98세 노모와 자녀 등 6명의 가장인 최병진(42·가명·보험설계사)씨. 그는 올 1월 완전면책을 받고 희망의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5년동안 그를 눌러왔던 원금 5000만원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 8000만원이 사라졌다. 국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과 가족의 격려로 그는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면책 이후 1년이 다 돼가는 요즘 최씨는 자신이 면책신분임을 알리는 ‘1201’코드가 따라다니는 ‘금융전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 통장에서 내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직불카드마저 만들 수 없었다. 그가 상담한 은행만 4곳.1곳만 빼고 모두 “직불카드마저 자격이 안 된다.”는 답변만 듣고 돌아섰다. 최씨는 자기 이름으로 할부거래도 불가능하다. 통화료 할인 광고에 번호이동을 위해 이동통신사를 찾았지만 “파산자이시네요.”라는 답변만 들었다. ●주택금융공사 보증 있어야 전세대출 “고객님은 사망자이거나 파산자입니다.”(A은행에 기재된 특수기록) 작은 광고회사 직원이었던 유지영(가명·32·여)씨는 지난 9월 남편(31)과 함께 소액 전세자금 대출 1000만원을 신청하려다 눈물만 삼켰다. 그녀는 지난해 11월 사기로 진 빚 3000만원을 갚지 못해 면책을 받았다. 유씨 부부는 전세 700만원의 단칸방을 방 2개짜리 전세로 옮길 계획이었다. 연봉은 적어도 신용만큼은 깨끗한 남편의 대출은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A은행은 남편뿐만 아니라 유씨의 신용까지 확인했다. 모니터에‘1201’코드가 뜨자 1000만원 소액대출의 꿈은 사라졌다.1201코드는 금융기관에서 면책을 받은 파산자를 7년 동안 관리하는 일명 ‘특수기록’이다. 유씨는 “나 때문에 남편마저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앞이 캄캄했다.”면서 “시댁에서 알까 두렵다.”고 말했다. 중국집 요리사 박성수(가명·31)씨는 지난 6월 500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기 위해 B은행에 갔다가 “부인 때문에 어렵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아내는 올해 5월에 면책된 파산자. 이들에게 ‘신용 연좌제’는 미래마저 계획할 수 없는 장벽이다. A은행 관계자는 “전세자금은 주택금융공사가 신용보증서를 발행하지 않으면 대출이 불가능하다.”면서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신용도 참고하며 특수기록 보유자는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쫓아다니는 파산 꼬리표 반년 전만 해도 대기업 과장이었던 윤상구(가명·37)씨. 그는 지난 5월 면책 결정을 받고 복권됐지만 쓰라린 좌절을 맛보고 있다. 파산자라는 신분이 회사에 알려지면서 입사한 지 50일 만에 해고됐다.1993년 대기업에 입사한 윤씨는 금융자산관리사 자격증을 땄다.2002년 명예퇴직을 한 뒤 투자상담사가 됐다. 그러나 고객 20여명의 투자금 2억원이 3개월 만에 반토막이 나자 손실금만 떠안은 채 퇴사했다. 미처 갚지 못한 주택 융자금 6000만원은 돌려막기를 한 지 1년 반 만에 1억 500만원이 됐다. 면책 절차를 밟고 있던 중 희망이 생겼다. 대기업 재직 경력을 인정받아 올 3월 과장으로 동종 업체에 스카우트됐다. 입사 서류 어디에도 그의 ‘과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두달여가 지난 4월말. 인사팀에 그의 과거가 알려졌다. 윤씨는 인사팀에 경위서와 면책 결정문을 제출하며 호소했지만 해고는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취직을 하려고 해도 번번이 떨어지고 있다. 윤씨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박탈당한 느낌”이라고 착잡한 속내를 털어놨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파산자-복권되지 않은 인생들] 월평균수입 파산전 201만원 파산후 128만원

    서울신문이 면책자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파산자의 30.8%는 갚아야 할 빚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답했다. 이중 80.3%는 파산을 전후로 자신을 도와준 친지와 지인들에게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법원에서 완전면책 판결을 받으면 법원에 신고한 채무는 갚지 않아도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파산자의 상당수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빌린 빚이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씩 남아 있으며 이는 도의적으로 ‘떼어먹을 수 없는 돈’으로 생각하고 있다.‘인간관계’ 때문이다. ●31% “친지등에 갚을 빚 남아” 전체의 65.4%가 인간관계에 심각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대부분의 파산자가 자의든 타의든 돈 때문에 뒤틀린 인간관계를 바로잡고 싶은 이유이다. 사업 실패로 지난 1월 파산한 뒤 고향 김천을 떠난 김모(47)씨는 중소기업의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매월 10만∼20만원씩을 친구들에게 보내고 있다. 김씨는 “고향 친구들은 빌려준 돈을 안 갚아도 된다고 하지만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적은 액수지만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9월 파산한 권모(39)씨도 지인들에게 빌린 빚 2억원의 이자 200만원을 매월 갚고 있다. ●61% 비정규·일용직 신분 면책 이후 생활비를 쪼개 친지 및 지인의 빚을 갚는 파산자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전체의 61.7%는 비정규직·계약직·일용직 종사자로 고용상태가 불안하다. 파산 이후 수입도 크게 떨어졌다. 설문에 답한 파산자 200명의 한달 평균수입은 파산 전 201만원에서 128만원으로 줄었다.10명 가운데 7명은 “현재 수입으로 생활이 힘들며 빚을 갚거나 저축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 지난해 4월 파산한 현모(37·여)씨는 “무일푼으로 파산한 후 다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또 빚을 져야 했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파산 상황에 대한 인식은 남성과 여성이 다소 차이를 보였다. 남성은 파산이 경제 활동을 재개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반면 여성은 파산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남성의 78.3%, 여성의 56.5%가 파산 이후 사회 활동을 하는 데 냉대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파산 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느냐.’는 질문에는 여성 55.0%, 남성 36.1%가 ‘그렇다.’고 말해 타인의 시선에 여성이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파산자-복권되지 않은 인생들] 공무원·중개사등 152개직업 파산선고때 해고

    [파산자-복권되지 않은 인생들] 공무원·중개사등 152개직업 파산선고때 해고

    파산자에 대한 ‘직업 차별’은 삶의 기반조차 빼앗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현행법으로는 파산 선고를 받으면 공무원·변호사·공인중개사 등 152개의 직업을 가질 수 없다. 면책 선고를 받고 복권이 되더라도 한번 잃은 직업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업계에서 파산자라는 ‘꼬리표’는 지겹도록 따라다닌다. 지난 8일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직업차별 금지를 담은 ‘개인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임시특례법안’을 발의했으며, 민주노동당도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놓았다. ●5개월 6일 만에 무너진 가족의 꿈 82세의 노모와 아내, 두 아들의 가장인 최명중(46·가명)씨는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감리전문업체의 감리원인 그는 지난 6월 파산 선고를 받고 면책 절차를 밟고 있다. 지난달 회사는 최씨에게 건설기술관리법상 파산자는 감리원을 할 수 없다는 결격 규정을 들어 해고했다. 파산을 신청하고 새 인생을 꿈꾸며 취업한 지 5개월 6일 만이다. 최씨는 면책이 코앞에 있으니 두달만 해고를 유보해 달라고 사정도 했다. 하지만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파산자와 같이 근무할 수 없다.”는 냉정한 답변만 돌아왔다. 최씨의 가장 큰 고민은 면책을 받더라도 영원히 감리원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공사가 끝나기 전 정당한 사유없이 감리직을 관두면 벌점이 부과된다. 면책 이후 다른 감리업체에 취직을 하려고 해도 그의 경력에 벌점 기록과 함께 ‘파산’의 딱지가 따라 다닐 가능성이 높다. 최씨는 “변호사도 재기를 위해 취업에 힘쓰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 절망감만 든다.”고 눈물을 떨궜다. ●약사면허 지키려다 딸마저 파산 “약사 면허를 잃을까 버티다 버티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못난 아비 때문에 딸마저 파산해야 했다.” 약사인 박창식(가명·56)씨는 한숨만 남았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홀로 하숙을 한다. 불화 끝에 아내(52)와는 별거 중이고, 아들(29)과 딸(31)도 제각각 살고 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약사로 생활한 지도 3개월. 지방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잘 써주지도 않는다. 월 120만원으로 버티고 있지만 면허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파산을 주저했다. 그의 가슴 한 편에는 “3년전 빚이 더 늘기전 파산을 신청했어야 하는데….”라는 자책감이 남아 있다. 일부면책이 되면 복권이 될 때까지 약사를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에게 파산은 무모한 선택이었다. 면허를 지키려다 파산할 시기마저 놓쳤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개인회생을 신청할 수도 없다. 지금의 개인회생 변제계획으론 돈을 갚고 생활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결혼한 딸마저 함께 빚을 갚다가 지난해 파산하자 아내는 마음마저 완전히 돌아섰다. 그의 빚은 5억 1000만원.4년 전 2억원의 보증 채무를 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덫이었다. 약국은 건강보험공단에 압류됐고 박씨는 파산만은 피해보겠다고 버티며 아직도 빚만 늘리고 있다. ●자존심 버린 지 오래…“먹고 살 수만 있다면” 산부인과 의사인 강우진(가명·51)씨와 아내 전주영(가명·53)씨는 부부 파산자이다. 강씨의 빚은 원금만 5억 3000만원. 전씨는 1억 5000만원이다.10년 전 개업을 하면서 받은 대출이 원인이 됐다. 한 차례 의료사고로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재개업을 하면서 압박이 가중됐다. 매달 600만∼700만원씩 거의 3억원을 갚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병원은 내리막길을 걸었다.7년 전부터 돌려막기식 대출로 연체를 막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의사 면허를 박탈당할까 40대 후반을 꼬박 빚갚는 데 세월을 보낸 강씨는 지난해 11월 파산을 신청했다. 그때부터 닥친 것은 본격적인 생계난이었다. 강씨는 신용조회가 두려워 병원 취직은 포기했다.50대 초반의 중견 의사가 대타 진료를 뛰며 응급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파산이 선고된 5월부터 면책이 결정된 지난달까지 자격은 정지됐다. 강씨는 위법인 줄 알면서도 반년 동안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면허 진료 행위를 했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파산자-복권되지 않은 인생들] 법은 법 빚은 빚…면책후에도 끝없는 ‘추심 악몽’

    법원의 면책을 받고 한숨을 돌렸지만 ‘채권 추심’과의 질긴 악연은 끝나지 않는다. 서울신문이 면책자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67.4%는 파산 이후에도 추심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 파산전문 변호사는 “추심업체들이 변호사가 선임된 경우와 나홀로 파산소송을 한 사건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나홀로 소송을 한 파산자는 면책 후에도 추심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면책자 주위를 맴돌고 있는 ‘추심 악몽’의 실태를 추적했다. ●면책 받고도 3차례나 신용불량자 통보 지난 9일 이윤희(가명·26·여)씨는 ‘귀하의 신용정보에 변동이 발생했다.’는 한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씨는 올 2월 완전면책을 받은 파산자. 인터넷으로 문자 내용을 확인한 이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면책을 받았는데도 또 신용불량자로 등재된 것이다. 채권 추심과 사무실로 날아오는 압류 통지를 피하려고 직장을 옮긴 것만 세번째. 마지막 직장을 4개월전 그만둔 뒤 새 직장을 알아보던 참이었다. 이씨의 신불자 등재는 채무 재조정을 하는 배드뱅크인 ‘희망모아´가 올린 것이었다. 이씨는 “7월에도 우편물이 와 면책결정문을 보내고 상담원과 통화까지 한 뒤 신불 등재 해지를 확답받았다.”면서 “희망모아에서는 전산 오류라고 해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10월에 또 신불자로 올려졌다 항의 끝에 해지됐지만 11월9일 다시 신불자가 된 것이다. 이씨는 “항의할 때마다 전산오류라고 답변하지만 세번씩이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느냐.”면서 “취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번번이 신불 등재가 반복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3년간 대출금 1200만원 다갚아 “법은 법이고 돈은 돈이랍니다. 법원의 면책을 받고 이제 살았다 싶었는데 추심은 인정사정 없더군요.” 2000년 7월 완전면책을 받은 김은주(38·여)씨. 그녀는 2003년 5월 비로소 자유인이 됐다. 면책 이후에도 3년 동안 시달린 끝에 A은행의 대출금 1200만원을 모두 갚았다. 면책이 된 채무도 추심기관은 아랑곳 없었다.10여차례 면책 결정문을 보내고 담당자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전화는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남편과 면책선고 한달 전 이혼을 하고 모자가정의 지원을 받는 기간에도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124만원이 연체된 카드사는 한술 더 떴다.“젊은 나이에 몸은 뒀다 뭐하냐.”는 모욕에 악다구니로 맞서기도 했다. 김씨는 “면책까지 받았는데 무너지기엔 억울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다방에서 일했다. 매월 20만원씩, 수입이 좋을 때는 50만원씩 갚았다. 완납증을 받은 후에야 추심 독촉은 사라졌다. ●면책 후 5년간 오는 추심 편지 2000년 6월 완전면책을 받은 송병현(가명·55)씨와 부인(49)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날아오는 추심 우편물에 분통이 터진다. 추심 편지는 매월 4∼5통씩 거르지 않고 찾는 반갑지 않은 손님. 봉투 겉면에는 ‘민·형사소송 담당 ○○○’라고 적힌 무시무시한 붉은색 고무인 도장도 여전하다. 카드와 대출금 1800만원을 갚지 못해 99년 7월 나홀로 소송을 통해 파산을 선고받은 송씨 부부가 담당자에게 보낸 면책결정문 복사본만 20여장이 넘는다. 기자에게 우편물을 내보인 송씨는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결정문을 보내도 다음달이면 어김없이 추심 우편물이 온다.”면서 “아직도 우편물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송두율칼럼] 예술과 정치

    [송두율칼럼] 예술과 정치

    윤이상 선생의 타계 1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가 남과 북, 그리고 고인이 잠들고 있는 이곳 베를린에서도 있었다. 윤 선생이 영면하던 날 매섭게 몰아쳤던 그 찬 눈보라 대신에 찾아 온 결코 흔치 않은 쾌청한 늦가을 날씨는 마치 지난 10년 동안에 고인을 대하여 왔던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대신 전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국가 공권력의 고인에 가한 부당한 박해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나 복권조치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고인의 예술 그리고 이 예술이 고귀하게 승화시킨 그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폭 넓은 이해가 그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가 고인과 나눈 숱한 대화는 예술은 물론, 우리의 민족적 현실에 대한 내용이 그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물론 철학자와 예술가가 만나 민족문제를 논할 때 현실 정치인들끼리 만났을 때와는 다른 흐름이 대화의 기저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기저는 니체가 이야기했던 지배적 가치나 도덕체계, 나아가 현실정치의 질서를 파괴하는 철학자의 ‘지독한 귀족주의’나 안하무인격인 예술가의 ‘예술적 폭정(暴政)’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는 예술을 대신할 수 없지만, 예술은 정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서독의 초대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 (Th.Heuss)의 주장에 고인이나 필자도 공감했었다.‘정치의 심미화(審美化)’가 아니라 일종의 ‘심미적 체험의 정치화’에 대한 동의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 체험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신선한 심미적인 충격이 상상력이 결여된 지루하고 지저분한 정치의 혁파로 연결되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심미적 체험의 정치화’도 유럽에서처럼 개인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충격의 미학’이었기에 우리의 대화는 민족문제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민족문제를 예술과 정치를 매개로 해서 제기한다는 것은 곧 나치의 ‘정치의 심미화’로 오해되는 강한 분위기가 있었기에 고인의 ‘나의 땅, 나의 민족’이나 ‘광주여 영원히’같은 교향시(交響詩)가 일종의 정치적인 ‘프로그램 음악’으로 곡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령 스메타나의 ‘내 조국’이나 시베리우스의 ‘필란디아’도 민요, 민속춤, 설화와 같은 집단적 심미적 체험을 통해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고인에 대한 평가는 순전히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나치 독일의 ‘정치의 심미화’가 여전히 대표적 부정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지만, 오늘날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보여주는 정치의 상업화 내지 상징조작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대량소비사회나 정보사회에서는 정치도 상품이 되어야만 하고, 정치의 내용보다는 이의 포장기술이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라는 전통적인 예술의 코드보다는 이제는 어떤 분위기에 ‘어울린다.’ 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코드가 더 많이 작동을 하고 있고, 또 일상적인 모든 사물이 곧 예술로서 해석될 수 있는 예술적 코드의 인플레이션 현상도 바로 이러한 ‘정치의 심미화’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고인이 지향한 ‘심미적 체험의 정치화’는 그러한 상징 조작을 의미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또 미추(美醜)라는 예술의 전통적인 코드를 완전히 버린 전위적인 체험에 심취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고인의 ‘더 많은 인간성’이라는 예술적 코드는 심미적 체험과 정치를 독특하게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었다. 고인은 민족 분단으로 야기된 비인간적인 고통을 반추(反芻)하지 못하는 심미적 체험이야말로 실로 공허하고 무책임하기가 짝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도 서울과 평양에서 통일음악제를 열었다. 그때로부터 울려 펴진 남북의 화음은 정치적인 소음을 뚫고 아직도 우리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상상력이 메마르고 둔중(鈍重)하기만 한 우리의 정치세계에 던진 고인의 예술적 충격은 -흡사 창공에 흐르는 구름처럼 결코 똑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 깨우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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