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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이용사 민병주씨가 맞는 6·25아침(이사람)

    ◎“통일보탬 된다면 누구라도 용서”/18살때 입대… 결혼15일만에 두다리잃어/유아원서 새싹 키우며 「베푸는 삶」실천/전몰군경 유가족돕기 13년째… “이런 비극 다시 없길” 『가끔 철모르는 아이들이 「할아버지 다리가 어디 갔느냐」고 물을때면 「멀리 하늘로 보냈다」고 웃으며 말합니다.그러나 자라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우리가 겪었던 그 아픔이 다시 있어서는 안됩니다』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서울시립 하정유아원 원감 민병주씨(60). 그는 6·25때 두다리를 조국에 바친 상이용사다.그러면서도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제는 이 나라의 새싹들을 돌보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그리고 그의 얼굴에선 언제나 인자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18살 어린나이로 서울공업중학교 4학년(현 서울공고 1학년)재학중 국민방위군 소위로 입대한뒤 53년 7월 정식 육군소위로 임관돼 미해병 제1연대를 거쳐 제1343 야전공병대에 배속됐다. 이때는 휴전협상이 한창이던 때라 유엔군측에서는 「현재의 전선에서 더이상 전진도 후퇴도 하지말라」는 이른바 미국방성의 「캔자스라인」전략이 수행되고 있었다.그러나 공산군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최후의 공세를 취해왔다.이에 맞선 미군들과 함께 민씨는 강원도 인제 동북방에서 파상공세를 취해오는 적으로부터 전선을 지키기 위한 보급수송로 가교설치작업을 하고 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공병대 주변에만 하루에 3백∼5백발씩의 포탄이 쏟아질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때마침 이 지역에는 비까지 억수같이 퍼부어 가교대신 부교를 놓아야 했다.민씨는 이 작업을 하다 날아온 적의 포탄 파편에 맞았다. 『병원에서 눈을 떠보니 오른쪽 다리는 잘려 나갔고 왼쪽 다리마저 심한 골절로 쓸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결혼한지 보름도 채 안된 때라 아픔이 더욱 컸지요』 갓 시집온 부인에게 짐이 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고 썩어가는 왼쪽 다리의 수술조차 거부하고 비탄에 빠져들었다.그러나 부인 이상옥씨(58)의 간절한 간호와 설득에 힘입어 5차례에 걸쳐 두다리를 모두 수술받은뒤 59년 4월 휠체어를 타고 소령으로 전역했다. 두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사회에 나온 민씨에게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또하나의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된 것이 가슴아파 늘 「돈을 벌어 기숙학교를 세우겠다」던 꿈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우선은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불구의 몸인 민씨로서는 부인의 음식장사나 삯바느질에 생계를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부인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변두리의 거의 버려진 땅을 헐값에 사들이곤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74년에 이르러 충남 천안군 성남면 신덕리에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1만5천평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두다리를 못쓰는 몸을 이끌고 황무지를 일궈내기 시작했다. 부인과 함께 돌을 골라내고 땅을 뒤엎어갈기를 또 몇해.마침내 어엿한 과수원을 소유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생활의 여유를 되찾게 된 민씨부부는 자신들이 겪었던 비참한 생활을 돌이켜보며 장학사업을 벌이고 전쟁희생자 유족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지난 79년부터 「하정장학회」를 설립,불우학생이나 소방관·경찰관·미화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해마다 3천만∼4천만원씩 내놓았다. 또 달마다 수원에 있는 「보훈원」을 찾아 전쟁으로 희생된 전몰군경의 미망인이나 자녀들을 보살폈다. 민씨는 이때의 심정을 『상이군인은 모두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자립할 수있고 남을 도울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민씨 부부는 보다 뜻깊은 일을 해보려는 생각으로 지난 87년 현재의 유아원을 경영하게 됐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곱고 바르게 키우는 것 또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유아원 운영에 남은 여생을 바치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아원 운영에 모든 정성을 다했다. 아이들을 위한 각종 놀이시설이나 학습교재는 물론 컴퓨터 시설까지 갖추는등 40년전부터 꿈에 그리던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이제는 원생이 1백10여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지고 다른 유아원에서줄을 이어 견학올 정도가 됐다. 개구쟁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민씨의 얼굴에는 이제 지난날의 쓰라린 흔적은 씻은듯이 가시고 없다. 그리고 그는 『비록 나를 불구로 만든 전쟁이었지만 진정 통일의 길로 함께 갈수만 있다면 누구든 모든 것을 용서할수 있다』고 말했다.
  • “통일위해 안보태세 더 굳건히”/노 대통령 강조

    ◎북에 도발기회 줘선 안돼 노태우대통령은 22일 하오 서울신문사가 초대한 제29회 국군모범용사 부부 1백30여명을 청와대로 초청,다과를 함께하며 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자리에서 『지난 4년간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민족의 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결과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에 우뚝서게 됐다』면서 『통일의 그날까지 안보태세를 더욱 튼튼히 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에게 도발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전투력을 훌륭하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사관들이 부대를 잘 뒷받침해주어야 하며 누구보다 상하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모범용사 여러분이 솔선수범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모범용사들은 상오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최세창 국방부장관에게 신고한 뒤 신우식서울신문사장 초청오찬에 이어 서울신문사를 방문,신문제작과정을 돌아봤다. 이들은 하오에는 이해원서울시장을 예방한데 이어 민경배국가보훈처장 초청만찬에 참석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쳤다. 이들은 23일에는 국가안전기획부와 국회의사당을 방문하고 24일부터 지방일정에 들어가 27일까지 독립기념관 방문,전남도청 방문,대구직할시청 방문,포항제철 견학 등의 행사를 갖는다.
  • 모범 국가유공자 20명 포상

    정부는 18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역경을 딛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봉사해온 모범국가유공자 20명을 포상했다. 이날 상오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에서 민경배보훈처장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박용실씨(67·서울 강남구 대치동503 우성1차아파트1동405호·인터뷰15면) 등은 역경을 이겨내고 자활자립에 성공,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해온 사람들이다. 대통령표창 이상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국민훈장(동백장) ▲박용실(대방동 재활용사촌회장) ◇〃(목련장) ▲유승호(68·전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 ◇국민포장 ▲구양숙(65·여·미망인회 서울지부장) ▲임광서(65·성애목장대표) ▲오금손(64·여·호국안보강연 강사) ◇대통령표창▲김태동(48·창훈실업과장) ▲도동환(54·대동흥업대표) ▲변승기(47·경남은행지점장) ▲김도환(64·농업) ▲정정호(47·상이군경 대구지부사무국장) ▲박춘화(55·여·미망인회 전남지부장)
  • 보훈단체 임원 초청/노 대통령,위로 격려

    노태우대통령은 18일 하오 금년도 정부포상을 받은 보훈가족과 광복회등 9개 보훈단체 임원등 1백38명을 청와대로 초청,다과를 함께하며 노고를 위로·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남은 임기동안 경제의 안정기조를 굳건히 지키면서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여 나가는데 역점을 두어 선진국 진입의 공고한 기반을 다져 다음 정부에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 주유소 휘발유 도로 유출/유조차등 4대 불타

    【인천=조덕현기자】 주유소의 휘발유가 넘쳐 흘러 도로변으로 유출되면서 불이나 행인 1명이 화상을 입고 2개 점포와 4대의 차량이 불타는등 주유소 대형화재를 일으킬 뻔한 사고가 발생했다. 14일 낮12시45분쯤 인천시 북구 부평동194 세진주유소(대표 김동진·41)에서 인천8다2327호 8t유조차 운전사 이양복씨(39)가 지하 기름탱크에 휘발유를 넣다가 휘발유가 기름탱크 공기구멍으로 넘쳐 흘러 인근 도로변 1백여m 지점까지 유출되면서 불이 나 길가던 양재숙씨(25·여·인천시 북구 삼산동205)가 두다리에 2도화상을 입었다. 또 국제스포츠 용품점(대표 한기수·42)과 보훈카센터 등 도로변의 2개 점포가 불타고 길가에 서 있던 한씨의 인천1나4519호 르망승용차와 주유소에 있던 유조차등 모두 4대의 차량이 불탔다.
  • 효자·효부상 18명 시상(단신패트롤)

    ◇대한전몰군경유족회(회장 박경수)는 10일 상오 여의도 보훈회관에서 민경배보훈처장등과 유족회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5회 효자·효부상 시상식을 가졌다. 이날 전몰군경유족인 95세의 부친과 중풍환자로 고생하는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김영희씨(43·서울 구로구 시흥동 230의2)등 18명이 효자·효부상을 받았다.
  • 국가유공자·가족 대상/국내항공료 50% 할인(단신패트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월부터 7월15일까지 국가유공자와 유공자 가족에 대해 국내선 항공료의 50%를 할인해 주기로 했다. 할인혜택을 받으려면 본인의 경우 국가유공자 증서 또는 사본을,가족은 주민등록등본이나 의료보험증 사본을 제시하면 된다.
  • 과기·환경 중시 국제호류 대응/정부조직 대대적 개편 추진

    ◎당정,법개정안 빠르면 9월정기국회서 처리방침/환경·과기·보훈·법제·총무·공보처,부로 승격/「강한 정부」위한 「새 국가경영전략」 마련/민자당총재직 김대표에 8월 이양 검토 정부와 민자당은 과학기술및 환경분야가 중시되는 국제흐름에 맞춘 대대적으로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이를 위해 당정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조직개편방향의 골자는 환경처·과학기술처·보훈처·법제처·총무처·공보처등 6개 「처」를 모두 「부」로 승격시킨다는 것이다. 당정은 이들 6개 「처」를 「부」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환경처·과학기술처의 인력및 예산도 대폭 확충함으로써 21세기의 새로운 국가경영전략에 맞는 행정체제를 갖춰 나가기로 했다. 당정은 또 환경처·과학기술처 뿐만 아니라 상공·동자부 등 경제부처에 일반 기업에의 기술제공등을 원활히 하기 위한 실무부서를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당정은 구체적 실무검토를 거쳐 이같은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마련,빠르면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고 10월부터 조직개편작업을 본격화한다는 방침이다. 환경처와 과학기술처의 승격은 국제사회의 국력경쟁이 군사력에서 기술로,특히 최근에는 환경을 둘러싼 기술의 확보문제로 옮겨감에 따라 이 부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이다. 또 법제처와 보훈처장관은 현행 정부조직법상 정식 국무위원이 될 수 없어 국무회의의 활성화 등을 고려해 부처의 승격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처」가 「부」로 승격될 경우 정책조정권만 갖던 업무범위가 정책수립과 예산의 집행까지 가능해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된다. 당정은 지난주 김영삼대표와 정원식총리가 참석한 고위당정회의를 통해 조직개편에 대한 의견을 교환,상당부분 진전이 이루어져 실무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민자당의 한 고위정책 관계자는 『환경처·보훈처등 모든 정부 「처」기관을 「부」로 승격시키는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하고 빠르면 『오는 9월의 정기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을 개정,10월안에 조직개편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전망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정세의 흐름이 기술과 환경문제로 옮겨가는 등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어 정부조직도 능동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처」의 경우 장관이 실제로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데도 정부조직법상 일부 「처」장관은 국무위원으로 규정되지 않는등 불합리한 점이 노출돼 관계법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당의 한 정책관계자는 『일부 부처의 격상으로 필요한 추가 인력은 다른 부처의 불요불급한 조직·인원으로 충원하면 되므로 국제조류에 맞춘 정부조직개편은 결국 김영삼대표가 주창한 「작고 강한 정부」구상과도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자당은 이번 정부조직 개편작업과 함께 당지도체제와 김후보 비서실진영도 대폭 개편,김후보 중심의 대선체제로 전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민자당은 당총재직을 오는 8월쯤 김대표가 맡는 방안과 현행 체제를 유지하되 당총재→김대표→최고위원→사무총장으로 이어지는 단일지도체제 등으로 운영하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
  • 현충일에(사설)

    『사람마다 한번의 죽음은 있다』고 사마천은 입을 연다.그는 다시 『그러나 그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울 때가 있고 홍모보다 가벼울 때도 있다.어떠한 죽음이냐에 따라 그 의의가 달라지는 것이다』고 그 말을 잇는다.이 말뜻을 곰곰 곱씹어 보게 하는 오늘이 현충일이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대의 앞에 순하는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이승을 사는 사람 누구나가 아끼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비굴해지기도 하는 귀한 목숨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가.그러므로 나라가 침탈당했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운 선렬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고 지키기 위해 싸운 호국의 영령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기려야 한다.국립묘지에서 울려 퍼지는 진혼나팔 소리를 들으며 숙연한 마음으로 나라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다.영욕이 교차된 과거위에 오늘은 있다.오늘의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만큼 발전을 이룩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오늘까지의 역정에는 피땀 어린 과거가 있다.그중에서도 잊을수 없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핏자국이다.나라와 겨레의 영광을 위해 일신을 버린 그 희생정신 위에 오늘의 번영은 꽃피어 있다.그러기에 오늘이 영광되고 행복하면 할수록 잊지 않아야 할 일이 그 희생정신이다. 역사는 흐른다.흐르는 역사 따라 세상은 변전한다.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갖은 핍박을 가했던 나라와 다시 수교를 하고 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던 북녘의 사람들과도 한핏줄로서의 맥을 이으려는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다.그뿐이 아니다.북녘의 야욕을 부추기고 도왔으며 고무·격려했던 적성의 나라들과도 공존공영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국제사회를 사는 냉엄한 현실일뿐,순국선열이나 호국영령의 위업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다.또 비록 역사의 흐름이 그렇다 하더라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용서와 망각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달고 묵념을 올리는 가운데 지하의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면서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하루로 삼았으면 한다.우선 그들의 희생정신부터 배우는 자세가 소망스러워진다.끝없는 이기의 패각에 묻혀 이타를 외면한 채 자기중심으로만 치닫는 삶부터 성찰해 봐야겠다.오늘의 모든 사회악과 부도덕의 근원이 여기 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한발짝씩 물러날 줄을 알고 제 목소리를 낮추면서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게되어야겠다.이런 심성들이 큰 줄기를 이루면서 물질 못지 않게 정신이 더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그것이 선열·영령들에게 보답하는 길로 될 것이다. 포성은 멎었건만 아직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충일을 맞는 마음이 착잡해진다.전국의 보훈병원에서는 6·25 전상자가 아직도 적잖이 심신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특히 화염병 들던 젊은이들이 꽃다발 들고 그들을 위문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지는 현충일의 심경이다.
  • 국가유공자에 존경을/김원홍 사회2부 차장(오늘의 눈)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유공자들은 국민적인 존경을 받으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나라일수록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도 높다. 영국 사람들은 현충일에 전국민이 빨간 양귀비꽃을 달고 런던 수상관저앞에서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장중한 추념식을 갖는다.프랑스에서도 현충일엔 파리 개선문앞 무명용사비에 하루종일 헌화가 계속되며 샹젤리제거리에는 낡은 훈장을 단 참전용사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국가유공자들은 광복이전 독립운동가와 6·25전쟁 수훈자등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해방전에 독립운동을 하기란 그야말로 태풍속에서 촛불을 켜는것 만큼이나 어려워 수십만이 희생됐으며 광복이후 6·25전쟁 때에는 수백만명의 동족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수많은 미망인과 전쟁고아,상이용사들이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연금을 받고 있는 상이군경은 4만7천64명,유족은 7만3천9백29명,독립유공자및 후손은 6만3천7백66명 등 17만5천3백35명으로 가족까지포함하면 보훈인구가 1백만명 가까이 된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연금은 월 27만4천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유공자들에게 사업자금 학자금 영농자금 주택자금 자립자금 등을 지원하고 그외 취업알선,의료지원 등을 하고 있으나 유공자 대부분은 노령과 불편한 몸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6·25전상자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65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상처부위의 재발로 고통스러운 특별생활을 하고 있다. 보훈의 달인 이달들어 국가유공자들이 입원중인 병원과 상이용사촌엔 각계각층의 위문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위문이 일년에 한번씩하는 의례적인 행사같이 느껴져 안쓰럽다. 평소 유공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그들이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보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 오늘 제37회 현충일/상오 10시 국립묘지·시도서 추념식

    6일은 제37회 현충일. 정부는 이날 상오10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정원식국무총리 박준규국회의장 김덕주대법원장 등 3부요인과 보훈단체장,전몰군경유족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념식을 갖는다. 이날 각 시·도에서도 자체적으로 추념식을 가지며 국민들은 상오10시 정각 사이렌 소리에 맞춰 1분동안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린다. 국가보훈처는 전국 각 가정과 사무실은 이날 조기를 게양하고 가무·음주를 삼가줄 것을 당부했다.
  • 국립묘지 현충탑 참배/노 대통령

    노태우대통령은 현충일을 앞두고 4일상오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현충탑에 참배하고 애국지사 묘역과 경찰 충혼탑에 헌화 분향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서울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을 방문,병실을 돌며 입원환자와 가족들을 위로 격려했다.
  • YS­백골부대 장병 「안보대화」 내용

    ◎「통일무드」에도 흔들림없는 임전태세 당부/“군 처우개선등 애로타개 최선” 약속/북한무장침투 격퇴 장병들 위로도 민자당의 김영삼대통령후보는 4일 중부전선 육군 백골부대를 방문,지난달 22일 발생한 북한군 3인조 무장침투사건의 작전개요를 보고받고 이들의 전공을 치하했다. 김후보의 이날 백골부대 방문은 집권여당 대통령후보로서의 첫공식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날 방문에는 합참작전본부장인 이병대중장이 당사 출발 때부터 직접 안내를 맡아 김후보의 위상을 뒷받침했다. 이날 김후보의 전방방문에는 김복동·박세직·정동호·민태구·윤태균·곽영달의원과 철원·화천지역의원인 김재순전국회의장·박희태대변인·조부영부총장·신경식비서실장등 주요당직자 10여명이 수행했다. ○…김후보는 이날 이합참작전본부장의 안내로 낮 12시25분쯤 백골부대 ○○전초대대에 도착,지간로 멸공관측소를 방문,이곳에서 사단장 구태도소장으로 부터 적전동향과 부대배치현황을 보고받고 이어 GP연대장으로부터 지난달 발생한 무장침투사건작전개요를 브리핑받았다. 이날 김후보가 방문한 멸공관측소는 6·25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중앙에 위치해 있다는것이 부대장의 설명. 김후보는 이자리에서 『북한5군단 예하25사단과 대치하고있는 백골부대는 한국동란당시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한 부대로 그날을 기념해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것으로 알고있다』며 이 부대에 대한 높은 관심을 표시. 김후보는 GP연대장이 DMZ(비무장지대)쪽의 지형상황을 보고하자 관측경을 통해 북한적정상황을 직접 살피기도. 김후보는 20분간의 브리핑이 끝난뒤 구사단장에게 격려금과 20인치 컬러TV 10대를 위문품으로 전달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 ○…관측소 방문을 마친 김후보는 휴전선 최북방의 전초대대로 내려와 지난번 무장침투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와 당시 상황사진을 둘러보고 장병들과 함께 사병식당에서 점심식사. 김후보는 식사후 『백골부대는 최전방인 철의 삼각지대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부대로 그 빛나는 전통과 긍지를 갖고있다』면서 『호국보훈의달인 6월에 장병 여러분들을 대하니 먼저가신 영령들의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고 인사. 김후보는 이어 『최근들어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남북회담의 개최에 따라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것처럼 성급한 추측도 하고있으나 이럴때 일수록 더욱 더 흔들림없이 유비무환의 자세로 임해달라』고 임전태세를 당부. 김후보는 특히 이날 장병과의 식사자리에서 『앞으로 장병 여러분의 처우개선등 애로사항을 해결하기위해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배려하겠다』면서 『오늘의 식사도 겨우 7백원의 부식비로 충당되고있는 만큼 앞으로는 군이 본연의 임무에 전념할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할 생각』이라고 장병들의 사기를 독려.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백골부대를 방문한 김후보는 떠나기에 앞서 부대간부및 사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으며 부대원과 함께 단체기념촬영도 했다.
  • 전몰군경미망인 18명 시상(단신패트롤)

    ◇대한전몰군경미망인회(회장 양순임)는 3일 상오 호국및 보훈의 달을 맞아 자녀교육등에 남다른 모범을 보인 박연숙씨(61·종로구 숭인동 삼일아파트7동 307호)등 전몰미망인 18명에게 「장한어머니 상」을 시상했다.
  • 「보훈의 달」의미 되새기는 「호국 할머니」오금손여사(이사람)

    ◎「반공강연」 22년간 4천61차례/독립군 유복녀… 「군번없는 간호장교」로 6·25 참전/“「무조건 통일」 주장하는 젊은이들 안타까워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우리들입니다.더욱이 북한의 집요한 남침위협속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참혹상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독립군 유복녀로 태어나 광복군생활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오금손여사(62·대전시 중구 산성동 우성아파트 107동 910호)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거리낌 없이 나부끼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무조건 「통일」「통일」하는데 저들을 잘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다.하기야 국민의 70%가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북한공산당의 잔학상이나 기만성을 알 리가 없겠죠』 그래서 그런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아침 일찍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 집을 나서는 오여사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게만 보인다.오여사가 젊은 가슴을 향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3월 대한상이군경회로부터 호국의식계도 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오여사는 호국강연을 그때부터 22년동안 모두 4천61회나 했다. 『저는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유복녀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오흥삼)는 제가 태어나던 해 왜놈들에게 체포돼 행방불명 되셨고 어머니(이봉녀)는 저를 낳은지 1주일만에 왜경들에게 끌려간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저는 14살때까지 중국군 장군의 수양딸로 자라다 15살때인 1944년3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덕씨를 따라 독립군본부에 들어가 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오여사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그러나 서울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던가 봅니다.당시 청진동에서 순천병원을 개업한 양근섭씨가 오갈데 없는 저를 양녀로 삼아 1년후에 개성간호전문학교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스무살이 되던 1949년3월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오여사는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안가서 하늘과 땅이 통곡한 6·25가 터졌다. 『그때 저를 비롯해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24명이 모두 간호장교(소위)로 자원입대했습니다.군번은 없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팔뚝에 배치부대이름인 「백골부대」란 문신을 새겼습니다』 야전병원엔 연일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의약품이라곤 다이아진과 압박대 뿐이었다. 휴전무렵 금화지구전투에서 오여사와 친구 한명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인민군부대에는 1백50여명의 양민들이 불잡혀 있었다.인민군들은 한 여학교 교사를 국방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면도칼로 가죽을 벗겨 살해했다.오여사의 친구는 국방군의 위치를 대지 않는다고 젖무덤을 도려내 살해했다.붙잡힌 양민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갔다.오여사도 손톱과 발톱 이빨을 모두 뽑혔다. 오여사는 54년봄에 서울로 왔다.냉차장사·화장품장사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돈이 조금 모이길래 윤락여성과 탈선청소년들의 선도일에도 간여했다. 오여사는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 82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내려갔다.그곳에 「독립군 정양원」을 건립,상이군경과 독립유공자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90년 11월 호국영령들이 묻힌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온 오여사는 지난해 7월엔 중국을 방문,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3개월간 호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거의 매일 강연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영령들이어 고이 잠드소서』 호국강연을 하기위해 발길을 돌리는 오여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외언내언

    3당의 대통령 후보를 낳아놓고 떠나가는 5월.6월로 바통을 건넨다.『보리밭 넘어온 6월 아침은/우리집 헌 바자에 웃고 머뭅니다』(모윤숙의 「6월 아침」첫연에서).헌 바자 발목께에서는 창포·장미에 수련이 반겼던 거겠지.◆5월이 6월에 넘기는 바통은 무더위.하지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동산간지방에는 눈이 내렸다.25일부터 내린 눈은 27일에도 내려 설악산의 대청봉은 23㎝의 적설량을 보였을 정도.5월 하순의 눈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산간지방 아닌 곳 여기저기에는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도.천둥·벼락에 소나기도 많았던 5월의 날씨이다.은근히 여름 기상을 걱정하게도 한다.◆뒷산 뻐꾸기도 이젠 목이 쉬었을 법하다.그래도 그치지 않고 운다.어쨌거나 여름은 시작되었다.해바라기와 접시꽃나무가 키크기 내기를 하는 가운데 태양은 나날이 열기를 더해 간다.들판의 모도 자라고 그 위를 한가로이 백로가 나는 계절.언제부턴가 매미도 울기 시작하는 것이리라.도시 사람들은 휴가계획에 달뜨기도 하고.5일이 단오고 21일이 하지.덥다해도 절전에 협력하는 마음만은 잊지 않아야겠다.◆6월은 호국보훈의 달.『해마다 잊을 수 없는/6·25의 아침이 오면/싸늘한 비석마다/꽃 한송이씩 안고/태극기 한 송이씩 안고/우리 하는일/지켜보느니라/우리 하는 생각/꿰뚫어 보느니라』(박성용의 「그들은 꽃처럼 떨어져 갔느니라」에서).조국의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하는 달 6월.6월이 통곡하게 살아선 안된다.6월의 핏자국을 영예롭게 하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반드시 현충일이 아니라도 좋다.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국립묘지를 찾아가 보도록 권유한다.건강에도 유념하면서 이 여름을 슬기롭게 나도록 하자.
  • 6월 문화인물에 유성룡선생/「징비록」국역등 기념사업 다채

    「6월의 문화인물」에 조선시대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학자인 서애 유성용선생(1542∼1607)이 선정됐다. 문화부는 임진왜란 발발 4백주년이 되는 6월을 맞아 뛰어난 정치역량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오늘에 재조명하기위해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한 6월을 맞아 문화부는 서애선생을 기리며 호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자주국방의식을 새롭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국가보훈처,경상북도와 공동으로 추진한다. 서애선생은 21세부터 이퇴계문하에서 성리에 관한 실천적 학문을 탐구하면서 26세에 문과에 급제,중요관직을 두루역임한 뒤 임란중에는 영의정으로 관서도체찰사와 삼남도체찰사를 겸하며 외교·군무·민정 등에서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임란직전에는 외교와 통상을 통해 일본을 회유하는 한편 이순신·권률 등의 명장을 천거하고 성곽의 축조등 군비확충을 통해 대비했으며 임란이 일어나자 국민을 결집시켜 민관합동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가 전쟁중에 겪은 승패의 자취를 반성·고찰해 집필한 「징▦록」은 임란에 관한 가장 가치있는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외에 「신종록」「영모록」「관화록」등과 문집 10여권이 있다. 주요 기념행사는 다음과 같다. ▲특별전시회 16일∼7월5일 국립중앙박물관 ▲서애사상강연회 국립중앙박물관 ▲유적지답사 27,28일 안동하회마을·영주 병산서원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서애선생 임란당시 활동 특강 14일 안동 하회별신굿전수회관 ▲세미나 20일 프레스센터 ▲징비록국역사업 93년발간 서애선생 기념사업회등
  • 고엽제피해자 국가유공자 대우/국방부/의료기등록등 토대 심사착수

    ◎월남참전 1천여명 신고 국방부는 25일 월남전 당시 미군이 밀림제거를 위해 살포한 고엽제(고엽제)의 피해자들을 국가유공자에 포함시키기로 하고 피해자 신고접수및 심사작업에 착수했다. 국방부는 이를 위해 현재 민원실을 통해 피해자 신고를 받고 있으며 신고자의 명단을 출신 군별로 분류,각군본부의 「전공상심의위원회」에 넘겨 심사토록 하는 한편 조만간 이들의 정확한 피해실태 파악을 위해 역학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국방부는 고엽제피해자로 신고된 월남전 참전자들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제출한 병적및 참전기록,피해증상,의료기록등과 각군의 관련자료를 토대로 심사하되 필요할 경우 국군통합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해 고엽제피해 여부를 가리도록 했다. 각군본부의 전공상심의위원회는 고엽제피해자로 판단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 요건해당 사실확인서」를 작성,국가보훈처에 통보하게 되며 보훈처는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신체검사등 보훈심의를 실시,상이등급을 최종 결정하게 된다. 고엽제문제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등 다른 참전국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참전자들이 호흡장애·기억상실·기형아출산등의 후유증을 호소,피해자(20여만명추산)에 대한 보상조치를 마련했으나 국내에서는 지난 90년에야 월남전참전 민간단체들의 진정으로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대한파월유공전우회등 관련단체가 올해초 피해자 신고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신고한 사람은 모두 1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 6·25 월남전/일반참전자도 의료혜택

    ◎생계곤란자등 의료비 30% 감면/새달부터 접수… 7월 실시/보훈처 국가예산 부족으로 그동안 보훈대상에서 제외돼왔던 6·25 및 월남전 참전자들에게 올 하반기부터 의료혜택이 주어진다. 국가보훈처는 22일 전쟁 참전자와 장기복무 제대군인들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의료보호대상에 한국전 및 월남전 참전자를 처음으로 포함시켜 65세이상의 고령자 또는 월소득 50만원이하(4인가족)의 생계 곤란자들에 대해서는 보훈병원 이용시 30%의 의료비 감면혜택을 부여토록 했다. 보훈처는 이와함께 전쟁중 부상을 입고 제대했으나 상이등급 구분 신체검사에서 등급판정을 받지 못해 보훈혜택대상에서 빠졌던 「등급외」경(경)상이 제대군인(1만여명)에 대해서도 진료비 전액을 국고에서 부담키로 했다. 보훈처는 오는 6월1일부터 각 지방보훈청및 보훈지청별로 전쟁참전자 등을 대상으로 등록신청을 받아 7월1일부터 이같은 내용의 의료혜택을 제공한다.6·25참전자중 생존자는 40여만명,월남전 참전자는 30여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조치가 시행되면 고엽제휴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월남전 참전자들도 부분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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