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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조선시대 초상화의 얼을 되새기며/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한 형태로 깊숙이 자리잡은 이른바 ‘거짓말하는 풍토병’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날로 심화되어 가는 ‘가난한 자’와 ‘가진 자’간의 경제적 양극화 현상보다 더 심각하며,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거짓 언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기꾼은 물론 온갖 거짓말을 해대는 정치인을 많이 보아와서인지, 이제 우리는 거짓말을 정치인의 ‘직업병’ 정도로 생각하고 너그러이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타인의 사기 행각도 비교적 너그러이 넘어가고,‘내 자신’의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염려스럽다. 요즈음 끊임없이 회자되는 황우석 사건에 얽히고 설킨 ‘거짓말 신드롬’을 보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크고 작은 거짓 행태나 각종 부정부패가 정치·경제계만의 ‘특산물’이 아니라 종교계나 교육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에 일고 있어 참으로 부끄럽다. 도대체 이러한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과연 우리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 해법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일까? 조선시대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역사 기록물만 보더라도 그 시대에는 거짓 행위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사회 풍토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 관련 기록물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 따른 몇 가지 공통점을 보면, 왕가나 양반 계층에서만 보편화되었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연구 대상으로서의 비교군으로 볼 때 장점이 많다. 또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일관된 화법에 의해 초상화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숙종 14년(1688년) 3월7일자 승정원일기에 화인(畵人)이 초상화를 그리면서 “옛 선비가 이르대, 털 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조금이라도 혹 차이가 나고 다르면 곧 다른 사람이라 함은 바꿀 수 없는 정론입니다.”라고 기술된 사실에서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낙향하여 보내다 타계 직전 조정에서 보낸 화인이 조정의 하사품으로 초상화 즉 영정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죽음의 병리 증상과 함께 여러 피부 증상들을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부과학을 전공하는 본인으로서는 실로 연구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그 한 예가 숙종·영조 때 높은 관직을 지낸 오명항(1673∼1729) 선생의 초상화이다. 선생의 피부색이 누런 황달을 넘어 말기 간암 증상인 흑달 단계로 검게 그려져 있어 사인으로 간암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만연된 천연두를 앓은 ‘곰보’ 자국도 선명히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초상화가 한두 점이 아니다. 초상화 작업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 아버님을 조금 예쁘게 그려달라.”는 후손들의 청이 있었을 법도 한데 수많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분식(粉飾)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상화는 예쁘지도 않으며, 일본이나 중국의 것에 비해 권위적이지도 않으면서 그저 정직 담백하기만 하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오늘날의 부정부패 현상은 적어도 조선시대 이후 나타난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민족정신 유전자’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읽을 수 있는 정직 담백함이 당시 선비 정신이라면, 우리가 그 거울을 보면서 오늘의 문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6)세계의 음다풍습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6)세계의 음다풍습

    새해다. 아직도 앞산인 달마산은 눈을 모자삼아 구름을 목도리 삼아 유유자적 하늘과 세월을 떠받치고 있다. 새해들어 눈 덮인 골짜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인사를 하러 온 차인들도 많지만 일반 등산객들의 발길도 늘어가고 있다. 하얀 입김을 푸우 푸우 내뿜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해남의 명산인 두륜산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두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큰절인 대흥사를 지나 일지암을 지나는 코스와 진불암을 지나는 코스가 있다.200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지암을 찾는 등산객들은 매우 드물었다. 마치 사시사철 선방처럼 한적한 곳이 바로 일지암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큰 절의 수련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등산객까지 일지암을 찾는 발걸음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른바 웰빙음료로 각광받고 있는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인 것 같다.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중 가끔씩 차를 청하는 분들이 있다. 일지암에는 좀 독특한 차 풍습이 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닌, 청하는 손님이 차를 직접 우려내서 마시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당황해 한다. 차를 어떻게 내야 합니까.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형식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쉽게 생각하세요. 직장생활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마시듯 편안하게 차를 끓여 드시면 됩니다. 우선 유천에서 물을 떠와 차를 끓이는 주전자에 넣고 사람 수에 맞게 잔과 차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물이 끓으면 차 주전자에 물을 붓고 마시면 되는 것이지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편안하게 따르고 마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차를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안타까워 다시 권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차는 형식과 관념 속에서 머무는 뜬 구름이 아니라 존재와 현실의 내적 욕망을 갈무리하는 청적(淸寂)이 머무는 마음의 공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차는 그 자체로 이미 편안함이며 실용적이며 삶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장자의 이야기다.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당대최고의 목수인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물었다.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 사람의 찌꺼기군요.”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인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깎아야 할 수레바퀴의 정확한 치수는 있기는 있습니다만 소신은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 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 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환공과 윤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형식인 말은 결코 그속에 담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차도 마찬가지다. 차는 거창한 삶의 형식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차의 본뜻은 삶의 실용속에서 자신을 발견해가는 작은 기쁨에서 시작되는 일상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구를 갖출 수 있고 차를 마시는 최소한의 지혜를 갖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차는 내 일상의 삶속에서 천연스럽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차는 곧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는 삶의 존재로서 우리에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구촌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형태든 차를 마신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은 어디일까.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티베트다. 그것은 높은 고원지대의 기후 탓이다. 티베트인들은 인체에 필요한 비타민과 미네랄 같은 영양성분을 차로 보충한다. 그들이 마시는 수유차와 수유차를 만들 수 있는 통모, 그리고 차담은 티베트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으로 만들고 있다. 티베트인들의 음다풍속은 매우 자연스럽다. 형식과 격식이 없이 앉는 곳이 바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의 찻자리는 그런 점에서 매우 자유롭고 평안하다. 아마도 형식과 격식을 갖추지 않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차가 하나가 되는 찻자리를 펼치는 유일한 민족이 바로 티베트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생산현장에서,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회의장에서도, 높은 산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차를 마신다. 자세히 들여다면 그들의 일상은 이미 차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는 그들의 모든 삶을 씨줄과 날줄로 이어준다. 척박한 문화속에는 아주 조용한 삶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종교적 성지인 라사의 포탈라궁을 가기 위해 온 가족이 7개월 동안 삼보일배를 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차문화 공동체는 우리가 향후 지향해야 할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해줄 귀중한 것들이라고 보여진다. 중국 신강 위구르족의 밀크티와 향차(香茶)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위구르족의 밀크티와 향차는 한가한 여가시간보다는 식사와 함께 먹는다는 게 특징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식사를 한 뒤나 편안한 시간을 따로내어 차를 마시는 반면 위구르족은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다. 위구르족은 북쪽의 민족들은 밀크티를 마시고 남쪽에 사는 민족들은 향차를 마신다. 위구르족의 밀크티는 매우 독특하다. 벽돌차로 불리는 전차를 쪼개 덩어리를 철제주전자나 알루미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차가 적당하게 푹 우러나면 신선한 우유 혹은 양젖을 넣고 다시 소량의 소금을 넣은 뒤 더 끓인다. 그리고 몇분이 지난 뒤 찻잔에 따른후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신다. 향차 역시 마찬가지다. 주전자를 사용해 차와 함께 후추나 계피 정향 등 향로가루를 넣고 서서히 물을 부은 뒤 불위에 얹어 4∼5분가량 끓인다. 차 찌꺼기나 향료가루를 찻잔에 함께 나오지 않도록 걸러 마시며 보통 아침 점심 저녁식사와 더불어 차를 마신다. 몽골인들에게도 밀크티가 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는 삼차일반(三茶一飯)의 음다풍습이 있다. 하루에 3번정도 차를 마시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뒤 가족들과 함께 한번의 식사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운남지방에서도 독특한 음다풍습이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음다풍습은 염파차(炎波茶)와 용호투차(龍虎鬪茶)다. 염파차는 차 덩어리를 부숴 작은 토기그릇에 넣은 뒤 토관을 불위에 얹어 찻잎이 “퍽 퍽”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구운 다음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5분정도 끓인다. 그런 후 다시 소금덩어리를 다탕에 넣고 끓여서 짠맛이 나면 화로에서 꺼내어 따른 뒤 각자의 기호에 따라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마신다. 운남에서는 염파차를 마실 때 옥수수떡을 함께 먹는 습관도 있다. 용호투차는 밀림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감기치료에 이용하는 비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먼저 진하게 우려낸 뜨거운 차를 알코올 도수 높은 술이 담긴 술잔에 부으면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형상을 나타낸다. 감기에 걸렸을 때 마시면 땀이 나고 잠을 잘 자게 되고 몸이 가벼워져 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인들은 티베트인 다음으로 차를 가장 많이 마시는 민족이다. 연간 1인당 차소비량이 약 4.5㎏이 될 정도로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영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습관은 매우 독특하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선 차를 한 잔 마신다. 그리고 아침 식사때 한 잔을 마시며,11시쯤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하며 또 차를 한 잔 마신다. 점심식사때 한 잔, 오후 1시부터 4시사이에 한 잔, 잠을 자기 직전에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영국인들의 다시(茶時)다. 영국인들이 세계적으로 차 소비량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에서는 또 ‘5시 차’라는 음다풍습이 있다. 18세기 중엽 베드포드 공작부인인 안나가 고안해낸 방법으로 오후 5시에 많은 사람을 초청해 차와 과자 등을 제공하는 통상적인 차회를 말한다.5시 차회에서는 크래커 과일 등을 바구니에 담아 차와 함께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은 차가운 차인 ‘아이스티’를 즐겨 먹는다. 차는 통상적으로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신다는 통념을 미국인들은 깨고 있는 것이다. 아이스티는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국제박람회에서 영국인 차업자인 리처드에 의해서 보급됐다. 차를 선전하기 위해 박람회에 온 리처드는 7월이라는 뜨거운 날씨 탓에 아무도 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자 홍차에 얼음을 넣어 차게 한 다음 차가운 홍차라고 권유했다. 차가운 홍차인 아이스티는 뜻밖에도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았고 전세계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사막의 나라 모로코에서는 박하차를 마신다. 박하차는 차를 넣고 먼저 끓이다 설탕과 함께 박하잎을 넣어 마신다. 차와 설탕 박하가 어우러져 상쾌한 기분을 전해주는 것이 바로 모로코의 박하차이다. 이밖에도 차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그 지역의 기후와 문화적 풍습에 알맞게 음용되고 있다. 차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유 설탕, 심지어 박하와 소금까지도 함께 섞어서 음용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차는 형식과 관념의 문제가 아닌 현실 삶의 존재조건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차가 함께 하는 매개고리로써 중요한 매체이기도 한 것이다. 일지암 암주 ■ 티베트의 수유차 ‘하루 양식은 없어도 되지만 차 없이는 못산다.’는 민족이 바로 티베트다. 그들은 하루 일과를 차로 시작해 차로 끝낸다. 최소 20∼30잔에서 100잔을 넘게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티베트에 가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명물이 바로 ‘통모’라고 부르는 차통이다. 보통 지름이 15∼18㎝이고 길이는 150㎝가량이며 왕대나무를 잘라 차통으로 만든 후 겉에는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다. 차통에는 피스톤 같이 생긴 막대가 끼여 있다. 통모에 야크의 젖으로 만든 버터를 빚어넣고 그위에 끓는 차를 붓는다. 소금과 입맛에 맞는 향로를 또 넣고 피스톤처럼 생긴 자루를 두손으로 잡고 절구질하듯 아래 위로 밀어 넣었다 뺐다 하며 골고루 섞는다. 절구질을 많이 할수록 차는 부드럽고 맛깔이 난다. 수유차라 불리는 이 차는 단백질과 지방질 풍부한 비타민과 카페인이 함유된 버터차가 된다. 쌀뜨물처럼 진한 게 탁한 우유맛이 난다. 수유차를 만들 수 있는 통모는 티베트 사람들의 빈부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신분적 가치를 지닌다. 통모의 겉이나 절구질을 할 수 있는 막대기의 손잡이인 ‘자나’에 부자들은 아주 귀한 보석으로 치장한다. 수천만원이 넘는 귀한 통모가 티베트에는 존재한다. 수유차를 담을 수 있는 보온통인 ‘차담’도 매우 중요한 차 도구 중 하나다. 티베트 사람들은 집집마다 최소한 2∼3개의 통모와 4∼5개 정도의 차담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찻자리가 따로없다. 찻상을 차리거나 차를 마시는 격식 없이 시장바닥이건 회의장에서건 앉는 곳이 바로 찻자리다. 어떤 자리든 앉으면 바로 차가 나오기 때문이다. 티베트 풍습상 손님으로 차를 접대받을 때 찻잔의 차를 모두 마셔서는 안 된다. 차를 모두 마셔버리면 차를 더 이상 마실 의향이 없다는 것으로 알고 더 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를 더 마시기 위해서는 찻잔에 차를 약간 남겨두어야 한다. 차가 일상화되어 있는 티베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1인당 연간 소비량이 15㎏가량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유승훈 지음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유승훈 지음

    “경자년 봄에 촉석루에서 떠들썩하게 악기를 연주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심 비장과 함께 저포(樗蒲) 노름을 하여 3천 전을 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벌써 19년이 지났는데도 어제의 일처럼 역력합니다.” 1799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있던 다산 정약용이 절도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천하의 학자이자 ‘목민심서’를 통해 관리의 청렴을 강조한 다산이 기생들과 노름을 벌이고 3000전이라는 거금을 뿌렸다니…. 하지만 이것은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다산은 이후 수차례 도박의 중독성과 폐해를 경고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노름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다산은 저포 노름을 양반과 기생이 함께 즐기는 흥겨운 놀이의 하나로 여긴 듯하다.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유승훈 지음, 살림 펴냄)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박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회상을 추적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도박사(賭博史)다. 다산과 연암이라는 조선의 대학자를 내세운 데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노름’이라는 놀이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준다. 저포는 백제시대부터 유행한 놀이로 주사위 같은 것을 던져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다. 조선시대 저포는 도박 일반을 뜻하기도 했고 쌍륙 놀이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다산의 편지에 나오는 저포 노름은 쌍륙 놀이를 가리킨다. 쌍륙은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의 놀이문화를 주도했다. 양반이 기녀들과 누린 풍류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쌍륙 놀이다. 혜원 신윤복의 ‘쌍륙삼매’나 기산 김준근의 ‘쌍륙 치는 모습’ 같은 풍속화를 보면 쌍륙이 얼마나 풍류남아의 주된 놀잇감이었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연암 박지원이 쌍륙 놀이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도 이해할 만하다. 연암은 편지를 쓰다가 문장이 막히면 혼자서 쌍륙을 쳤다고 한다. 왼손과 오른손을 양 편으로 삼아 자기 혼자 대국을 벌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보다 우리 역사 속의 진정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찾아냈다는 데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로 정의, 모든 문화가 놀이로부터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 역사와 일상 또한 놀이를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위론 왕에서 아래론 평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호모 루덴스들이 있어 문화를 살찌웠다. ‘놀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려시대 임금 의종이다. 무인 성향이 짙었던 의종은 격구중독자였다. 말 위에서 긴 장대를 가지고 공을 골대로 쳐넣는 격구는 오늘날의 경마와 같은 스포츠 도박, 즉 내기성 놀이다.‘격구왕’이라 할 정도로 격구를 좋아한 의종은 이틀 동안 격구를 구경한 적도 있고, 대궐에서 국사를 논한 다음 내처 격구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 역시 고려 말 가장 출중한 격구선수였다. 격구는 고려시대 크게 흥행했지만 임진왜란을 거친 조선 후기에 들어 명맥이 끊겼다. 책은 풍류로서의 도박뿐만 아니라 악질적인 도박 사례도 소개한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이지용은 희대의 ‘화투대왕’이었다. 그는 나라를 판 돈으로 한꺼번에 수만원씩의 판돈을 걸었다고 한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질 당시 조선의 국세총액이 1300만원이었으니 그의 노름돈을 합하면 나라를 살렸을 정도다.1931년 일제가 ‘골패세령’이란 법령을 통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거둬 식민지 경영에 사용한 사실도 우리로선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저자(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도박이라는 비주류의 문화를 구체적인 예화를 통해 흥미롭게 다룬다. 최근 생활사나 미시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도박과 같은 음지의 역사는 여전히 관심권 밖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차승원 새영화 촬영현장 가보니

    차승원 새영화 촬영현장 가보니

    개인기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차승원. 그의 개인기에 의존한 또 한편의 영화가 제작중이다. 이미 ‘장미와 콩나물´로 TV에선 스타PD로 이름난 안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국경의 남쪽´. 그는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망가지려 하고 있다. 8:2 가르마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 제대로 부를 리 만무한 호른과 3개월간 씨름하고... 그러나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건 북한 혁명가극 재연을 위해 제작비의 10%를 쏟아붓는 장면이 전주에서 촬영 중이란다. 4월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국경의 남쪽´ 촬영 현장을 찾아가 봤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여기저기 나부끼는 불온한 플래카드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도 나란히 걸려 있다.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김일성배지를 자랑스레 달았다. 무대 위에서 올려진 공연 제목은 ‘당의 참된 딸’. 북한이 꼽는 5대 혁명가극 가운데 하나다. 거기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인민복 차림에다 어떤 사람은 무공훈장을 왼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이만하면 경칠 일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쿡쿡쿡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4월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국경의 남쪽’(감독 안판석·제작 싸이더스FNH) 주연 차승원의 개인기 때문이다. 이날 촬영분의 포인트는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북한공연+탈북 직전의 긴장감’. 그런데도 잠깐잠깐 쉬는 사이 취재진이 몰려오면, 그는 설익은 깜짝 호른 연주에 농익은 너스레를 섞어 촬영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워낙 진지한 장면이라 많이 자제하고는 있다고 한다. #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려고요.” 차승원의 역할은 평양만수예술단의 호른 연주자 ‘선호’. 북한에 연인(조이진 역)을 놔두고 탈북한 뒤 남한에서 새로운 사랑(심혜진 역)을 만난다. 그러나 북의 연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갈등하는 역할이다.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제껏 많았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는 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황에서 오는 자잘한 에피소드들과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채워나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채울까.“이념의 상처를 안은 사랑이었다면 안 했을 겁니다. 그냥 지금 시대의 사랑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배경에만 분단이라는 상황이 놓여 있다뿐이지 보편적인 사랑을 다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코믹한 요소도 있다.“코미디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데서 오는 그런 정서의 차이, 그 정도가 되겠지요.” 그렇기에 호른 연주와 북한말을 배우는데 공을 들였을 뿐 별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다 한다. 눈에 띄는 차이라면 포마드 바른 8대2가르마의 머리 정도라는 말이다.“비워놓고 흘러가는 대로” 연기하고 있다는 말은 이제 코믹흥행배우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로도 들린다. # “신혼여행 가는 기분인데요.” 이번이 첫 데뷔작인 안판석 감독은 원래 MBC 드라마왕국에 힘을 보탠 스타PD. 그래서인지 “신인 감독일수록 대형장면 때 너무 초조해하는데 안 감독은 아주 여유있게 컨트롤한다.”(차승재 싸이더스FNH 대표)는 칭찬이 쏟아진다.‘짝’,‘장미와 콩나물’,‘아줌마’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에 뛰어든 것도 원래 관심있던 차에 친분있던 유하 감독(‘말죽거리 잔혹사’), 김성수 감독(‘아라한장풍대작전’)의 강권(?)도 힘을 보탰다. 차승원은 물론, 촬영분량이 적은 남쪽 연인 역에 심혜진이 선뜻 나선 것도 PD시절 맺어둔 친분 덕분이다. 이런 점들을 보면 ‘초짜’감독치고는 나름대로 순탄한 길을 걸었는데도 안 감독은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드라마 찍을 때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하는 걸로 핑계삼았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그런 핑계를 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인지 하루하루가 더 긴장됩니다. 다 찍은 뒤 어떤 작품이 나올지 저조차도 떨립니다. 신혼여행 직전인 것 같아요.” # 제작비의 10%가 투입된 초호화 장면 촬영장소는 전주에 위치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 한석규 주연 ‘주홍글씨’,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 등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평양대극장으로 설정됐다. 제작진은 원래 북한 현지 로케까지 생각했지만 성사되지 않아, 철저한 고증 끝에 모악당을 평양 제1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이를 위해 북한군복 등 의상은 중국에서 실어왔고 각종 배지나 휘장, 플래카드도 준비했다. 또 1·2층 관객석을 가득 채울 평양시민과 군장성, 당간부를 위해 130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이 동원됐다. 여기에다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칠 북한 가극단은 뮤지컬 ‘명성황후팀’이, 무대 바로 아래에서 연주할 평양만수예술단은 ‘전주시립교향악단’이 맡았다. 북한 가극의 원형을 되살리되 저작권 문제 등이 생기지 않도록 곡과 안무는 새롭게 다듬었다. 이러니 순제작비 50억원 가운데 10%인 5억원을 쏟아부었다는 말이 헛되게 들리지 않는다. 전주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신연숙칼럼] 사학, 숫자부터 줄여야 한다

    [신연숙칼럼] 사학, 숫자부터 줄여야 한다

    엄동설한에 야당이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 겉돌고 중·고교 신입생 배정을 받느니 안 받느니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사학법 사태를 보면서 의아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학교가 사유재산이라는 사학 관계자들의 발언이 우선 놀랍다. 학교 이사회 개방이 사유재산침해라면 교육사업을 개인기업쯤으로 알았던 것 아닌가 한다. 비리사학을 감사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자 몇시간 만에 신입생배정 거부를 철회한 것도 그렇다. 사학 속을 알길없는 일반인들로서는 구린 게 많긴 많은가보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학생을 안 받겠다는 사학들의 엄포도 황당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특정 사학에 강제로 특정 학생들을 받으라고 떠다미는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닌 듯싶다. 무엇이 문제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혼란스러운 느낌과 함께 몇년 전 미국에서 사립중·고교 6곳을 차례로 돌아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사학이 너무 많고, 사학다운 사학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사학에도 잘못이 있지만 국가에도 책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맡아야 할 보편교육의 태반을 사학에 떠다미는 양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사립의존율은 2005년 학생수 기준으로 중학교 18.9%, 고등학교 49.3%에 이른다. 전문대는 96.2%, 대학은 77.4%다. 대학까지가 국공립 체제인 유럽 국가들의 경우는 예외라 치고, 중·고교 교육의 사립 의존율은 우리나라의 경우 비정상적으로 크다. 사학은 기원으로 볼 때 공교육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갖지만 근대국가 형성 이후 선진국들은 공교육체제 완성과 함께 중·고교 학생의 90% 이상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지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미국 사립학교들의 경우 오랜 역사의 학교들도 공교육이 좋아지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 여학교는 기숙학생과 일반학생을 혼합해 운영하다 최근에는 남녀공학으로 형태를 변경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한 학급당 10명 내외의 밀착식 수업, 다양한 체육·과외·봉사활동 기회부여, 종교교육 등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버금가는 비싼 등록금과 공교육 품질의 향상으로 학생수가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북부의 최상급학교와 최근 한국 등 아시아권 조기유학생들이 몰려드는 학교는 다르지만 적어도 중고교 공교육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있는 게 선진국의 교육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학에 보편교육을 떠맡기고 있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의 사학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도와 1974년 고교평준화제도 도입, 유별난 교육열로 인한 교육수요 폭발에 맞추기 위해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비정상적인 팽창을 가져왔다. 정부지원금을 바라보며 너도나도 학교를 만들다 보니 운영은 부실해지고 정부의 규제로 건학이념이라곤 온데간데 없는 사학의 공립화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이번 기회에 공교육체제의 강화와 사학의 정비를 권고하고 싶다. 사학들이 원하는 대로 전면감사를 실시하여 부실사학은 정부가 과감히 인수하자. 정부지원을 받으며 투명하게 운영할 사학은 그것대로 키우되 다양한 교육 욕구에 부응해 특색있는 교육을 할 자립형 사립고도 과감하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 혁신형 국공립이든, 자립형 사립고든 특성화 교육을 한다며 성적순 선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단서다. 입시교육, 학벌폐해가 심각한 한국적 현실과 우수학생과 우수교사 등이 모두 빠져 나가는 공교육 공동화 현상을 고려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yshin@seoul.co.kr
  • [열린세상] 과학과 정치의 만남은 잘못인가/김병식 동국대 생명화학공학 부총장

    과학이라는 주제가 온 국민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이 주제가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과도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것도 또한 사실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과학은 ‘자연에서의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학은 냉철한 객관성이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주관적 가치판단이나 선동적이고 당위적인 명제는 발붙이기 어려운 영역이다. 반면, 정치란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굳이 말하자면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에는 다양한 가치와 당위적 판단이 혼재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 속에서 갈등은 자연히 표출되고, 그 갈등을 토론과 합법적 투쟁으로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정치이고 민주주의인 것이다.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과 주관적 다양성이 본질인 정치는 어찌 보면 참 어울릴 수 없는 두 영역일 것 같지만, 이 시대는 이 두 영역이 함께 하길 원한다. 세계 모든 국가가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한 요즘, 한 국가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선도하는 기술로 국부를 계속 창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선도 기술의 대부분은 과학적 연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각국의 정부는 과학을 국가적 어젠다로 설정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면서 국부의 원천을 만들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과 정치는 만나게 된다. 국가적 어젠다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가치판단과 ‘과학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충돌하게 된다.‘난자와 체세포만으로 줄기세포를 배양할 수 있겠는가?’라는 순수한 과학적 탐구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난자와 체세포로 줄기세포가 배양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국민은 무의식적으로 이에 동감하고 지지하며, 차가운 머리로 바라보아야 할 과학을 뜨거운 가슴으로 바라보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논문이 과학자의 실수, 또는 의도된 잘못으로 수정, 철회되는 일이 있어온 점을 감안하면, 최근 나라 전체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로 떠들썩했던 이유는 그것이 과학의 정치화가 빚어낸 일종의 정치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정치가 만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정치는 조심해서 만나야 한다. 국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과학에 국가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 시대의 요청이며, 또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객관적인 영역과 주관적인 정치의 영역이 만날 때에는 우리에게 중용의 미학이 필요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들어갈 때에도 객관적으로 보호되고 중립적으로 놓아두어야 할 영역에서는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이런 중용을 간과한다면, 황우석 사건과 유사한 혼란은 언제든지 또 생길 수 있다. 차기 과학부총리가 내정되었다. 복지부 장관 내정 관련 파문과 사학법 논쟁 때문에, 또 한편 황 교수 사건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과학부총리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다. 과학부총리는 과학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을 설정하고 조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지휘자이다. 또한 그는 국가적으로 확실히 장려되어야 할 부분과 객관적 진리탐구의 영역으로서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될 부분을 구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이기도 하다. 과학과 정치를 조화시키는 예술적 수준의 중용의 미덕을 차기 과학부총리에게 절실히 기대해본다. 취임 일성이 기다려진다. 김병식 동국대 생명화학공학 부총장
  • 한나라, 이종석통일장관내정자 ‘장외청문회’

    “북한 연구에 있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부정하고,‘아전인수´격으로 북한 옹호를 시도하는 북한 체제 중심의 연구 논리다.”(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10일 주최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과 내재적 접근법을 넘어´ 세미나에서 이종석 통일장관 내정자의 북한연구 방법론인 ‘내재적-비판적 접근법´ 등이 도마에 올랐다. 한나라당이 사학법 무효화 장외투쟁을 이어 가느라 ‘1·2 개각´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열린 이날 세미나는 일종의 첫 ‘장외 청문회´ 성격이 강해 주목받았다. 통외통위 소속 박성범·김문수·홍준표 의원을 비롯, 김무성·고흥길·황진하·송영선·유기준 의원 등이 열띤 토론에 참석했다. 발제에 나선 홍관희 소장은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차용,‘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이해한다.´고 주장하고 친북·반미 사상을 보유한 이종석 내정자의 등장으로 한국의 통일·외교 노선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고는 이 내정자의 방법론에 바탕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핵·인권·대북 지원 등 분야별로 나눠 비판했다. 홍 소장은 이어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자주·평화·통일이란 슬로건 측면에서 북한의 대남 전략에 협조하고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제성호 중앙대교수는 “‘내재적 접근´은 객관성·공정성 대신에 아주 교묘하게 주관성·편파성(친북성), 특정 사실의 왜곡·미화성을 드러낼 경우 비학문적인 것을 학문적인 것으로 호도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여옥 의원은 “전문가의 시각으로 참여정부 실질적 통일외교정책의 밑그림을 그려온 이 내정자의 대북 인식과 정책을 점검하고 한계 및 극복점을 진단하고자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관객 잡고 흥행 쭈~욱 뮤지컬도 싸~게 본다

    관객 잡고 흥행 쭈~욱 뮤지컬도 싸~게 본다

    대학로에서 장기공연 중인 뮤지컬 ‘헤드윅’ 제작사 쇼노트는 지난해 11월 앙코르 공연을 시작하면서 색다른 이벤트를 도입했다. 일명 ‘10 for 1 free’행사. 커피 전문점의 서비스 쿠폰처럼 열번 보면 열한번째는 공짜로 관람할 수 있는 쿠폰을 만들었다. 초연 당시 서너번씩 되풀이해 보는 마니아 관객층이 많았던 데서 얻은 아이디어다. 처음엔 다들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과연 열번씩 볼 관객이 있겠느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두 달간 이 쿠폰의 혜택을 누린 관객은 무려 134명. 제작사조차 기대 못한 대박이다. 쇼노트의 송한샘 이사는 “팬 서비스 차원에서 도입했지만 결과적으로 마케팅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뮤지컬이 공연계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면서 팬서비스와 마케팅을 겸한 할인 이벤트도 다양해지고 있다. 뮤지컬 티켓가격은 R석 기준으로 대극장이 10만∼15만원, 중극장 7만원, 소극장 3만∼5만원 선. 한 달에 1편 이상 관람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가장 일반적인 할인 혜택은 단체 할인과 조기 예매, 프리뷰 할인. 보통 30%까지 싸게 볼 수 있다. 주말에 비해 관객이 적은 주중 낮 공연도 싼값에 표를 살 수 있다. 신용카드사와 연계한 할인도 보편적이다. 장기 공연에서는 ‘헤드윅’과 같은 팬서비스 성격의 할인이 인기다.‘아이러브유’는 지난해 두번째 보는 관객에게는 10%, 세번째 보는 관객에게는 20%를 할인해 주는 행사를 열어 호평을 얻었다.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아이다’는 지난 3일부터 한번 본 티켓을 가져가면 20%를 깎아주는 ‘보고 또 보고’ 이벤트를 열고 있다. 또 관람 당일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극장에서 현장 예매하는 관객을 대상으로 20% 할인된 가격의 ‘러시 티켓’을 판다.‘아이다’ 제작사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정소애 실장은 “커플 할인, 수험생 할인 등 특색있는 아이디어를 위해 제작사마다 골머리를 앓는다.”고 말했다. 할인 형태가 다양해짐에 따라 부작용도 늘고 있다. 각종 할인 혜택 덕에 제값 내고 영화 보는 관객이 거의 없는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관객들도 정가 티켓을 사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 일부 뮤지컬 동호회는 일반 관객보다 훨씬 싼 가격의 티켓을 노골적으로 제작사에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여기엔 무분별하게 할인 이벤트를 펼치는 몇몇 제작사들의 책임이 크다. 최근 모 공연은 아예 정가를 높이 책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값에 티켓을 팔아 물의를 빚었다. 송한샘 이사는 “단 몇석이라도 팔아서 수익을 보전하려는 제작사들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이같은 할인 이벤트의 남발은 장기적으로 공연 제작사와 관객 모두에게 악영항을 미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양주혜의 ‘바코드’ 설치미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설치미술 작가인 양주혜 초대전 ‘양주혜:길 끝의 길’을 서울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에서 열고 있다.2월11일까지. 점과 선이라는 보편적인 조형의 요소를 가지고 작가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작품 전반을 보여주는 동시에 최근의 ‘바코드’ 설치작업을 새로운 각도로 접근해 선보인다.(02)7604-724.
  • 이종기 KNT대표, 태국 5만가구 건설공사 수주

    국내 중견 건설업체 대표가 태국에 서민주택 5만가구를 짓기로 해 관심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KNT그룹 이종기(43) 대표로 태국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60만가구 주택공급건설 계획의 파트너로 결정돼 올해 5만가구의 서민용 주택을 짓기로 했다. 이 대표는 온라인 동시통역시스템과 전자결재시스템 등을 개발, 정보통신 업계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IT전문가.90년대 중반에는 경기도 이천 등에서 아파트 개발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KNT그룹이 짓는 주택은 우리나라 아파트와 달리 저렴한 건축비로 지을 수 있는 압축판넬 공동주택으로 건축 현장 조립식 사무실과 같은 형태다. 공사비는 210억바트(5000억원)규모다. 태국 서민주택 5만가구 건설사업은 당초 태국 업체들이 모두 추진키로 했다가 공사일정 및 시공능력 한계로 태국 정부가 해외기업을 찾던 중 공사완성과 건설기술 이전 등을 제시한 KNT그룹과 연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 정부의 서민주택 건설 계획은 IMF 외환위기로 중단되다가 지난 2004년 하반기부터 연간 10만가구씩 6년에 걸쳐 완공시킴으로써 서민주택난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대표는 “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민주택 60만가구 건설 계획 중 단일 규모 최대 사업인 5만가구를 수주한 태국 쿤탓그룹과 공동 파트너십을 구성키로 합의했다.”면서 “현지 법인을 만들어 건설 공사를 공동 진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KNT는 쿤탓그룹과 현지법인(SKS & KNT)을 세우고 태국 주택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SKS & KNT는 공기단축을 위해 태국내 보편적 주택건설 공법인 콘크리트 타설 공법 대신 조립식 압축판넬로 집을 짓기로 했다. 이 대표는 “첫 사업이 비록 값싼 서민주택을 짓는 공사지만 1년 이상 공들여 외국 업체와 경쟁해 따낸 공사”라며 “올해 하반기 발주될 중산층 아파트 공사 수주에 한발 다가설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오늘의 눈] 제2·제3의 ‘태권V’가 필요하다/ 장세훈 공공정책부 기자

    ‘우주소년 아톰’이나 ‘마징가 Z’,‘건담’,‘철인 28호’같은 만화 영화를 보며 꿈을 키운 세대가 있다. 훗날, 어린 시절을 지배한 로봇의 대부분이 ‘메이드 인 재팬’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은 컸다. 자존심을 지켜준 건 ‘로봇 태권V’였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용 로봇은 자동차·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세계로봇연맹(IFR)에 따르면 2002년 기준 우리나라의 로봇 보유대수는 일본, 미국, 독일, 이탈리아 다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많은 로봇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만큼의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보다는 한수 아래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모터와 감속기 등 핵심부품을 대부분 일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970∼80년대 만화 영화를 수입했던 것처럼…. 산업용에 이어 지능형 로봇마저 일본에 종속될 수는 없다. 지능형 로봇시장 규모는 2020년쯤 자동차시장을 추월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능형 로봇으로 가장 앞섰다는 ‘아시모’(ASIMO)에 일본 혼다자동차는 1986년 이후 14년동안 3000억원을 쏟아부었다. 지난 2004년말 공개된 한국 최초의 인간형 로봇 ‘휴보’(HUBO)는 아시모보다 종합적인 기능은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3년동안 불과 10억원이 투입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훨씬 경쟁력이 있다. 지능형 로봇은 인간과의 상호작용 등 ‘소프트 웨어’가 강조된다. 우리의 앞선 정보통신(IT) 기술은 지능형 로봇시장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로봇 시대의 미래를 활짝 열어갈 청소년들의 상상력이다. 제2, 제3의 태권V가 쏟아져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은 곧 지능형 로봇산업 육성정책의 시작일 수 있다. 장세훈 공공정책부 기자 shjang@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농산물에도 이력서 만든다

    경북도가 농산물 원산지 위·변조 등을 막기 위해 농작물의 파종에서부터 수확까지의 이력을 소비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농산물 이력관리 시스템’을 전국 처음으로 도입한다. 2일 도에 따르면 오는 2월 중순 군위 하나로마트, 대구백화점, 동아백화점에서 ‘농산물 이력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농산물을 판매할 계획이다. 이 시스템은 전자태그(RFID)를 이용한 것으로 소형 반도체칩을 이용해 농산물의 정보를 무선 식별하는 것이다. 그동안 바코드를 이용한 농산물 이력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사례는 있었으나 전자태그방식은 국내 처음이다. 도는 한국후지쓰 등 3개 기업과 함께 지난해 5월부터 이 시스템 구축작업을 해왔다. 농산물 이력관리 시스템은 생산자와 생산방법, 포장업자, 유통과정 등의 정보를 수록한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는 인터넷 등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상품에 하자가 생겼을 경우 생산과 유통과정을 역추적해 반품처리하는 등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해당 농산물은 쌀과 사과, 포도, 딸기, 완숙토마토, 방울토마토, 일반포도, 거봉포도, 참외, 마 등 9종에 우선 도입됐다. 여기에는 도내 친환경농산물 작목반 11군데가 참여했다. 상주 상생쌀작목반, 청송 주왕산사과마을, 의성 단촌시설원예작목반과 청암공동체작목반·꿈동이사과작목반, 성주 월항유기농작목반, 군위 가나안포도원과 친환경농조합법인, 영천 친환경포도연구회, 김천 오룡작목반, 고령 알림원영농조합법인 등이다. 도는 앞으로 이 시스템이 도입된 농산물 판매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참여 작목반과 농작물도 늘리기로 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이 시스템이 정착되면 의성마늘 등 전국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도내 농산물의 원산지 위·변조를 차단하게 된다,”며 “현재 가격이 비싼 전자태그가 수년 이내에 보편화되면 개별 농산물에도 모두 부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실전논술] 한국인의 사고하는 태도 문제점과 해결책

    ●다음 글을 읽고, 한국인이 사고하는 태도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며 1600자 내외(±200자)로 쓸 것.) 사고는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 이성의 엄격하고 보편적인 법칙을 따라서 어떤 사실·사태·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자 그대로의 ‘이치(理致)’의 추구력을 말한다. 진리와 오류는 반드시 증명되어야만 한다. 증명하려는 불 같은 의욕이 없는 사고는 있을 수 없으며 이성을 등한히 하는 사고는 사고의 죽음과 마찬가지다. 참된 사고에는 엄청난 지적 긴장이 수반돼 피땀나는 지적 노력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결론만을 찾으려는 가지가지 유혹이 사고하는 과정 속에 항상 따르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한국인의 사고의 빈곤은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독창적인 이론이 하나도 한국에서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되거니와 학계나 문화계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학자, 지식인들의 태도 혹은 경향 속에서 한국의 사고가 얼마만큼 자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인의 사고하는 태도에서 대략 세 가지 경향을 들 수 있다. 첫째, 사대주의이다. 멀쩡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신문, 잡지에는 그런 말 대신 알 수도 없는 외국어를 쓰려는 경향이 근래 심해지고 있다. 빌려 쓴 외국어가 흔히 잘못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습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경향은 잠재적이나마 외국어 숭배의 심리를 반증한다. 사대 심리는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외국 문학의 인기, 무조건적인 외국인 학자에 대한 엄청난 관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용상으로 볼 때, 별로, 아니 전혀 관계도 없는 기사나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의 것이라고, 외국의 것이라고, 무조건 대대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되고 실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위주의는 일종의 사대주의이다. 왜냐하면 사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외국 문화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 사고의 권위주의에서 일종의 사대 사상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대단치도 않은 학술론·잡문에도 필자의 학술적 양심·유식을 보이려는 듯이 흔히 외국 문서의 참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면, 필요도 없는데 공연히 외국어를 원문대로 삽입한다. 그뿐 아니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에 앞서 이미 권위 있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의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그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은근한 압력이 많다. 그러나 사고는 권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참다운 사고는 우선 권위를 일단 비평적으로 대하는 데서만 출발한다. 어떠한 사실 혹은 주장은 권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서 옳아지는 게 아니다. 어떤 사실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사실이 정말이기 때문이요, 어떤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에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대주의의 반동으로 나타나는 국수주의이다. 이 경향은 첫째의 경향에 비해서 약하지만 무시 못할 경향이다. 국수주의적 사고는 ‘옳고’,‘그름’의 기준, 가치의 기준을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념 혹은 감정에 두고 있는 사고 방식이다. 한 이론이나 주장은 그것이 동양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고, 한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한국인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좋아진다. 사대 사상? 열등 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양적인 것, 한국의 것을 무조건 무시하는 자학을 해서는 안 됨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애국심이나 어떤 감정에 좌우되어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택함은 사고하는 태도가 아니라 사고의 자위 행위이다. 자위 행위가 건전한 기쁨을 가져오지 않음을 물론이거니와 그런 행위를 하는 본인에게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로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적 사고의 특색은 냉소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냉소주의자들은 전혀 사고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어떤 우연이나 딴 이유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 즉 학자·교수·문화인이란 명칭을 받게 된 사람들이거나 혹은 사고할 능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고하기를 중지한 게으름뱅이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고인의 범주 속에 넣고 있고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삼사십이 못 되어 이미 ‘도(道)’에 통해서 우주적 고차원에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눈에는 무엇을 더 알고 따지고 캐 보려는 모든 지적 노력이 철없는 짓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열심히 수학을 따지고 예술을 논하며 정의를 찾으려는 사고가 유치한 것으로 보이고, 참다운 사고는 그러한 작은 사고의 테두리를 넘어서 주말이면 낚싯대나 잡고 바라보는 구름 속에서만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사고의 죽음을 의미한다. 냉소주의자들은 사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고를 부정하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박이문 <한국인> ●지문의 분석 이 글은 한국인에게 사고의 자립이 필요한 이유와 그 방안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먼저 한국인의 사고하는 태도를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있는 글이다. 먼저 자립성이 없는 한국인의 사고로 이성적 활동이 빈약하고, 이성을 등한시하는 한국인의 사고는 빈곤하다고 보고 있다. 참된 사고에는 지적 긴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한국인이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외국어 숭배 등의 사대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숭배하는 사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사고의 권위주의는 일종의 사대 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고의 자위 행위로써의 국수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국수주의는 이념과 감정 등에 가치의 기준을 두는 사고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고의 자학 행위, 자위 행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사고를 부정하는 패배자의 자세인 냉소주의도 지적하고 있다. 학문적 진리를 따지고 천착하려 하기보다는 현실을 벗어나 자연에서 소요하는 행위가 참다운 사고라고 보는 관점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태도는 사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냉소주의적 사고 방식은 사고를 부정하는 패배자의 모습이라고 여기고 있다. ●출제의도와 생각하기 이 문제는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단점이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한 뒤에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다. 즉, 나 개인이 아닌 우리 민족의 모습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면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한국인이 자립적인 사고를 갖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이 논술에서 찾고자 하는 사고의 자립을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제 해결을 위한 정신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 보도록 하는 데 중요한 출제 의도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사고의 자립을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두 가지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논술 문제는 애초에 분량상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내용을 마구 늘어놓으면 논리적인 서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사고 방식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머문다든지 너무 주관적인 색채가 가미되면 문제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을 진단한 다음에 그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 교육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중 하나로 사물에 대한 올바른 비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문제 해결 방안으로 이러한 문제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게 되면 자립성이 있는 사고를 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수업 현장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토론이 일반화되는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은 논술의 기본적인 성격에서 벗어나는 태도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어떻게 쓸까 우선 주제의 방향은 논제에서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사고의 자립을 위한 방안’ 정도로 정리하면 된다. 이와 관련된 주제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주성과 독립을 위해서 사고의 독립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서론 부분에서는 우리의 사고 과정이라든지 사고 방식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고의 자립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 비판하는 정도에서 논의를 도입하면 될 것이다. 이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방향이 분명히 제시되면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본론 부분에서는 사고의 자립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면 된다. 먼저 본론의 처음 부분에서는 사고의 자립을 위한 교육적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사고의 자립과 관련된 우리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개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특징들인데, 예를 들면 주입식 교육의 수업이 지닌 폐해를 생각해 그러한 점을 지양하고 비평적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 둘째 부분에서는 한국적 사고의 자립을 위한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정신이 요구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는 앞서 논의한 내용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사고의 독립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없다는 점을 논의의 전제로 하여 한국인에게 사고의 자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면 된다.
  • [문화마당] 너는 나다/김용택 교사·시인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수능시험 때 학생들이 휴대전화로 커닝을 했다고 해서 세상이 ‘놀란 척’할 때가 있었다. 교수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나서서 우려하고 걱정하고 진단하고 처방하는 화려한 말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사태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 정말 놀란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땅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치고 커닝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이 땅에서 각종 강습을 받은 사람들 치고 커닝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관리가 되고 정치가가 되고, 공무원이 되고, 교육자가 되고 사업을 하고 교수가 된 사람들 치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어디 한번 손들고 ‘나와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정말이지 진짜로 말해보자. 다들 놀란 게 아니지 않은가.‘놀란 척’한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는 진즉 부정과 비리는 보편화 조직화 상식화 구조화 일상화 권력화되었다. 군인들이 나랏일을 차지한 이후 이 나라 곳곳에 스며든 군사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조폭문화’로 화려하게 변신을 해왔다. 장군이 뜨면, 무슨 장관이 뜨면, 무슨 국장이 뜨면, 국회의원이 뜨면 보아라. 완전히 조폭 두목이 뜬 것과 꼭 같은 풍경이 벌어진다.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이만하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코미디 같은 이야기들이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학교수가 된 사람들은 다 안다. 자기를 지도하는 교수 눈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사람의 장래는 끝이다. 다 알지 않는가. 지성의 본산인 그 곳뿐인가. 우리 사회 어디나 다 그와 같은 ‘조폭적 조직’이 이미 ‘일반화’된 지가 옛날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황우석 사태를 보고 놀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교사에서 승진을 꿈꾸려면 여러 가지 사례나 연구논문들을 내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들 속에서 오래 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연구한 논문을 제출한 교사를 단 한 분도 보지 못했다. 내가 언젠가 적어도 교사는 다른 사람들의 연구논문을 제목과 숫자만 바꾸어 제출하면 안 된다고 했다가 정말 혼난 적이 있었다. 무슨 소리냐, 남의 글이라도 이렇게 안 베낀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고 되레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아연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글로 점수를 따고 승진을 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기에 우리 사회는 늘 ‘좋은 게 좋다.’는 비겁하고 더러운 개똥철학이 굳어졌는가. 배아줄기가 한 개면 어떻고 두 개면 어떤가. 이 놀라운 말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다. 어떤 젊은 연구원이 황우석 교수의 지시에 감히 거절, 거부, 반항할 수 있었겠는가. 그뿐인가. 중앙 정부와 그 주변을 닮은 부정과 비리는 이제 지방 구석구석까지 새끼를 치며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선거를 앞둔 이 나라는 지금 선심성 장밋빛 언어들이 작은 고을들을 화려하게 뒤덮고 있다. 부패한 국가적 개발독재는 이제 지역으로 그 뿌리를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고 물린 이 더러운 부정과 비리의 고리들이 우리 사회를 부패시켜왔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 그들의 잘못을 탓하고 고발하면 고자질한 놈으로 찍혀 이 땅 어느 조직에서도 견디기 힘들다. 조직의 쓴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민주 사회인가. 이게 민주화가 어느 정도 되었단 말인가. 말이 나온 김에 말해 둘 게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을 감시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돈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자치단체 조직들을 누가 감시하는가. 황우석교수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황우석 사태’야말로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국가의 총체적인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지성의 본산인 대학과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정부와 언론이 이 사태를 제대로 보고 역전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은 한 이번 일은 또 금방 잊혀질 것이다. 왜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가.‘너는 나’이기 때문이다. 김용택 교사·시인
  • [사설]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 수용하라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한 것은 고뇌 끝에 내린 결정으로 여겨진다. 인권위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의 보호범위 안에 있으며, 양심의 자유는 국가 비상사태에서도 유보될 수 없는 최상급의 기본권”이라고 규정했다. 대체복무제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독일과 타이완 등 외국도 안보위협이 있는 시기에 대체복무를 도입했고, 병력감축 등이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안보환경이 대체복무제 도입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동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아직 철책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인 데다 젊은이들의 병역 기피 풍조 심화 등 부작용이 크게 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사법부도 양심의 자유보다 국가 안보를 우선시한 판결을 내려왔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는 어디에도 양보할 수 없는 보편적 권리이자 기본권이다. 각종 병역 특례 등 대체복무의 형태가 존재하면서도 유독 종교 등 양심적 이유에 의한 병역 거부자는 전과자가 돼야만 하는 현행 제도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그러기에 헌재도 병역법 합헌 결정을 하면서도 대체복무제 입법을 권고하지 않았는가. 이제 인권위가 대체복무제 도입을 국회와 국방부에 권고한 만큼 해당 기관은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다만 ‘양심’의 기준 수립이 쉽지 않고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으므로 병역의무를 대신할 대체복무제는 최대한 무거울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이미 많은 대안들이 제시됐다.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 [이젠 친환경 주택시대] (2)자원 재활용 아파트설계

    [이젠 친환경 주택시대] (2)자원 재활용 아파트설계

    친환경 주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원재활용 아파트 건설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에 따르면 하루에 나오는 건설폐기물은 15t트럭 1만대 분량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분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 재활용 기회를 잃고 단순 매립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건축 폐기물 재활용 시범사업이 추진되는 등 친환경 주택개발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건설 폐기물 재활용 시범 사업 추진 건설폐기물 가운데 65%는 폐콘크리트인데 주공은 이를 분리, 불순물을 떼어내고 깨끗하게 씻은 순환골재를 일산 고양지구 아파트 건설 현장에 시범 적용키로 했다. 아직 본 구조체에는 직접 적용하지 않고 포장용 등으로만 사용하는 걸음마 단계지만,28개 기관과 손잡고 추진 중인 순환골재 분리 장치가 개발되면 골재 재활용은 훨씬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국내에서 쓰이는 모래의 10% 정도는 천연모래가 아닌 재활용품이다. 돌산에서 자갈을 만들고 남은 돌가루를 다시 가공해 콘크리트용 모래를 재활용하고 있다. 돌가루 모래 사용기술은 주택도시연구원이 개발, 주공 아파트 건설 시방서를 바꾸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일반 건설사나 소비자들 모두 외면했다. 하지만 주공은 90년 중반 이후 돌가루 모래를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민간 업체로 파급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골재가 됐다. 주공은 화력발전소에서 타고 남은 부산물(플라이애시)도 콘크리트용 혼화재료로 사용하는 기술적 백그라운드와 재활용 기준을 제정, 시멘트 산업 현장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있다. ●건축물 해체 기술 개발 건축물 해체 기술은 자원재활용률을 높이는 전제조건. 현재 자원재활용 수준은 해체 작업의 효율성만 강조, 무조건 헐어낸 뒤 이중 일부 쓸 만한 물건을 골라가는 원시적인 단계다. 자원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先)분리-후(後)해체’기술이 개발돼야 한다. 건물 해체에 앞서 재활용 계획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 주택도시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는 ‘분별해체요령’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주공은 해체 현장에서 소음·분진 등의 환경위해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국책연구개발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주택도시연구원 이도헌 연구위원은 “환경보존과 자원재활용을 위한 기술개발이 속속 이뤄지고 있는 반면 인식이 안돼 확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면서 “재활용 자재 성능 개선 연구를 이어가고, 재활용 자재를 사용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합구조시스템’ 리모델링 쉬워 처음부터 리모델링이 가능한 설계를 도입하는 것 또한 자원 재활용을 높이는 길이다. 그동안 벽식구조(벽 자체가 하중을 받도록 설계된 구조물)는 시공이 간편하고 공사비가 싸다는 이유로 아파트 구조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벽식구조는 리모델링이 어렵고 다양한 평면을 원하는 수요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단점을 지녔다. 폐콘크리트 발생량을 늘리는 원인도 제공하고 있다. 주공이 최근 개발한 ‘복합구조시스템’은 리모델링이 쉽고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는 친환경 아파트 설계로 평가받고 있다. 아파트 내부 콘크리트벽 대신 기둥과 경량건식(가볍고 마른자재)벽체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한 아파트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놀면서 배운다’ 에듀테인먼트 5부작 다큐

    ‘에듀테인먼트’를 아시나요? 국내에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개념 문화콘텐츠로 부각되고 있다.‘블루 오션’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런데 지난 봄 한국교육정보진흥협회에서 학부모와 교사 6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학부모 가운데 85%와 교사 가운데 31%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아직 보편화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에듀테인먼트는 에듀케이션(교육)과 엔터테인먼트(오락)의 합성어. 쉽게 이야기하면 놀면서 배우자는 의미이고, 점잖게 말하면 지식에 쉽게 접근하자는 뜻이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그 범위를 굳이 온라인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넓게 보면 노래 부르며 영어를 배우는 것도 에듀테인먼트이고, 어린이 프로그램인 ‘텔레토비’,‘세서미 스트리트’,‘토마스’ 등도 이에 다름 아니다. 케이블 게임쇼채널 퀴니가 26일부터 5일 동안 매일 오전 11시(재방 오후 10시30분)에 국내외 에듀테인먼트 산업을 조명해보는 5부작 다큐멘터리 ‘놀면서 배운다!’(연출 윤군석)를 제작, 방영한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함께 만들었다. 1부 ‘세계를 사로잡은 에듀테인먼트’(26일)에서는 에듀테인먼트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는 미국과 영국을 찾아간다.‘세서미 스트리트’를 만든 미국의 세서미 워크숍과,‘텔레토비’를 제작한 영국 HIT엔터테인먼트를 직접 방문해 노하우를 들어본다. 미국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2개뿐이던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이 지금은 무려 30개에 달하고 있다. 2부 ‘캐릭터, 마음을 사로잡다’(27일)를 통해서는 EBS ‘방귀대장 뿡뿡이’에 나오는 ‘뿡뿡이’와 ‘뽀롱뽀롱 뽀로로’의 ‘뽀로로’ 등을 놓고 캐릭터 인지도와 학습효과가 비례하는 현상을 분석하며 캐릭터 산업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3부 ‘신나는 공부, 만화로 배우자!’(28일)는 ‘마법의 천자문’,‘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 신화’ 등을 살펴보며 만화, 애니메이션과 교육이 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가늠해본다. 4부 ‘게임으로 공부한다!’(29일)는 게임과 교육의 결합이 소개된다.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가우엑스’, 영어 온라인 대전 게임 ‘토익넷’, 역사를 배우는 ‘바람의 나라’ 등이 그 사례다.5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에듀테인먼트 세계’(30일)의 주제는 국내 에듀테인먼트 시장의 활성화.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새로 개설된 ‘어린이 박물관’과 온라인 연수프로그램 ‘백두대간’, 놀이 동산과 동화책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에버랜드의 이솝빌리지’ 등 재미와 교육을 접목시킨 사례들을 가지고 다양한 콘텐츠 확보에 대한 방향을 모색해본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무슨 영화 볼까]

    [무슨 영화 볼까]

    ●작업의 정석 장르/등급 코믹멜로/15세 감독/배우 오기환/손예진·송일국 줄거리 ‘작업’에 관한 한 선수급인 남녀의 엎치락 뒤치락 사랑만들기. 20자평 청순가련형 손예진의 ‘내숭 탈출’ 코믹연기가 포인트. 특별히 새로울 것없는 로맨스. ●해리포터와 불의 잔 장르/등급 팬터지/12세 감독/배우 마이크 뉴웰/다니엘 래드클리프·엠마 왓슨 줄거리 해리 포터가 트리위저드 대회에 출전, 부활한 악의 축 볼드모트와 대결하다. 20자평 새 감독, 새 스토리, 화려한 비주얼, 풋풋한 로맨스. 한층 업그레이드된 재미요소들. ●광식이 동생 광태 장르/등급 코믹 멜로/15세 감독/배우 김현석/김주혁·봉태규·이요원·김아중 줄거리 ‘소심남’ 광식과 ‘작업맨’ 동생 광태의 극과극 사랑방정식. 20자평 핑크빛 환상이 아닌 현실적 캐릭터·상황전개에 공감이 절로. ●킹콩 장르/등급 SF액션/15세 감독/배우 피터 잭슨/나오미 왓츠·애드리언 브로디 줄거리 미녀를 사랑한 킹콩의 슬픈 러브스토리. 20자평 할리우드 SF 화제작들의 장점을 조합한 듯한 ‘블록버스터 갈라 쇼’. 참신함은 없지만, 끝내주는 볼거리. ●태풍 장르/등급 SF액션/15세 감독/배우 곽경택/장동건·이정재·이미연 줄거리 부초처럼 이국을 떠돈 탈북자의 슬픈 가족사, 그를 쫓는 남한 해군대위의 숙명적 대결. 20자평 한국액션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 스펙터클. 그러나 규모에 짓눌려 맥을 못 추는 드라마. ●파랑주의보 장르/등급 멜로/12세 감독/배우 전윤수/차태현·송혜교 줄거리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인생의 의미와 인연에 대해 생각케 하는 ‘어른스런’ 순애보. 20자평 스르륵 팔짱을 풀게 만드는 수채화처럼 예쁜 화면. 지나친 순수지향형에 자꾸만 딴 생각이 ●이터널 선샤인 장르/등급 드라마/15세 감독/배우 미셸 공드리/짐 캐리·케이트 윈즐릿 줄거리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을 컴퓨터로 삭제하는 과정에서 찾는 참사랑의 의미. 20자평 갖가지 에피소드 나열 없이도 보편적인 사랑의 의미를 관객이 충분히 공감.
  • [열린세상] 지역축제에서 챙겨야 할 본전들/이해준 공주대 교수

    한국의 지역축제는 오랜 전통과 역사적 필요성을 배경으로 생성되고, 변천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전통적 축제는 전통사회의 붕괴, 그리고 일제시기와 서구적 가치관의 보편화를 거치면서 급격히 해체 왜곡되는 운명을 맞았다. 한국고대사에 있어 공동체적 제의 행사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단순한 음주 가무나 추수감사제적 성격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통합되는 공동의 장이었고, 외피를 불교적 행사로 치장했던 고려시기의 팔관회나 연등회도 실상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역축제였다. 각 지역의 토착 지배세력들은 이런 군현단위 축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오늘날까지 유제가 전해지는 지역의 인격신을 제사하는 성황제나 산신제 등이 대부분 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며, 성격상 오늘날의 지역축제가 구도하는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측면으로는 가장 근접한 모습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역축제는 성리학의 보급과정에서 소위 ‘음사(淫祀)’나 무속으로 매도돼 통제 대상이 되기도 하나, 조선후기 농민의식의 발전과 함께 마을 단위의 농민문화로 다시 한번 다양하게 꽃피게 된다. 마을 굿이나 동제(당제)와 관련되는 줄다리기나 농악과 같은 각종의 민속놀이, 혹은 두레패와 관련된 생산민속들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각 지역 축제에서 재생, 동원되는 민속놀이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조선후기의 민속놀이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지역축제라기보다는 마을단위의 공동체적 생활문화였다. 다음으로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지역축제의 또 다른 전통은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역로의 중심점이나 큰 시장, 큰 포구, 군사주둔지 등에서 벌어지는 별신굿류의 축제들이다. 탈춤이나 광대류 놀이판이 바로 이와 관련되는 종합 문화판이었던 셈인데, 공동체적 동질성은 많이 퇴조하였으나, 경제적인 지원과 흥행이 가미됨으로써 지역축제로서의 색다른 발전을 보여주는데, 요즈음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축제들이 이러한 이벤트화된 상업적 축제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일제시기에 들어와서 우리의 전통적 지역축제는 또 한번의 심한 굴절을 경험하게 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대하는 지역축제는, 이러한 전통계승과는 다르게 일제가 그들의 지배정책과 결부시켜 재생시킨 ‘군민체육대회’류의 지역 축제로 그 외형이 변화된다. 일제는 고유의 지역적 전통성과 동질성에 바탕을 둔 지역축제에 대한 지역민들의 기대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체육대회 형태의 축제를 마련함으로써, 화합과 일체감보다는 대결과 승부의 장으로 대체시켰던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를 우리는 줄다리기에서 본다. 모든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줄다리기는 전통적으로 기풍(祈豊)행사였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줄다리기가 오로지 단결과 승패의 놀이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과거의 줄다리기는 공동체의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행사였던 것이나, 심판의 부정이나, 참여자의 수를 따지는 너무나 천박한 경쟁의 문화로 전락된 것임을 아쉬워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가 이제 또 각 지역마다 축제행사를 복원하거나 조직해 ‘돈벌이’와 ‘홀리기’에 혈안이다. 가히 축제의 나라라고 칭할 만큼 온 나라가 축제판을 벌여놓고 경쟁을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발전의 상징이고, 지역의 브랜드 창출과 발전에 일정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통 지역축제들은 오히려 지역의 공동체 의식과 동질성을 확인해주었던 의미 깊은 민속제의였고 전통의 재생산, 계승의 장, 나아가 후세대의 교육장이었음에 보다 주목해야 하겠다. 나아가 요즈음 전통문화의 뿌리인 지역문화가 해체될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질을 바로 보면, 우리의 노력과 의식에 따라 바로 지역축제들이 이러한 위기를 대처하고 극복할 대안이라고도 생각된다. 이해준 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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