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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생 100주년 方定煥선생 장남 云容옹이 본 아버지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합니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1899-1931)의 장남 운용(云容·81)옹(翁)은 임종 순간까지 어린이들을 걱정한 아버지의 유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항상 어린이들만 생각하셨어요.어린 마음에 서운하기도 했지요” 운용옹은 3·1 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옹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귀가시간은 거의 매일 밤 11시가 넘었다. 방정환 선생은 특히 어린 새싹을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독립에 대한 열정때문이었다.어른들이 무능력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만큼 미래에 대비해 어린이를 슬기롭게 키우자는 각오였다.‘10년 후를 보자”는 말을 버릇처럼 되풀이했다.운용옹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말을 잘했다.보성전문에 다닐 때는 ‘담론부(談論部)’ 리더를 맡았다.동화구연에 특히 소질이 있었다. 한번은 개벽에 쓴 글이 문제가 돼 서울형무소에 들어갔다.미결수로 있으면서 잡범들과 한 방을 쓰게 됐는데 방정환선생은 이들에게 동화구연을 해줬다.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면서 죄수들은웃고 울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선생은 운용옹이 14세 때 세상을 떠났다.남은가족은 어머니 손용화(孫溶嬅·91년 작고)씨가 하숙을 쳐서 버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운용옹은 교동국민학교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나왔지만 백화점 직원,건설 현장 노동자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지금은 광명시 철산동에서 부인(72),손주들과 함께 말년을 보내고 있다.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운용옹은 4일보성전문 법과 3년을 중퇴한 아버지를 대신해 고려대에서 명예 학사학위를받았다.
  • 독자의 창-영농현장 안전불감증 심각

    안전사고가 날 때마다 우리는 과연 내주변은 안전한지,잠시 살펴보곤 하지만 그때뿐 금새 무신경해지곤 한다. 지난 여름 중부지방을 할퀴고 간 수마의 흔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악몽같던 지난 여름을 떠올릴 때면 우리가 조금만 더 재해예방과 안전에 신경을 썼더라면 피해를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텐데 후회하곤 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도 안타깝지만 더욱 딱한 것은 각종 설비의 안전시스템 관리부재와 무감각한 안전의식으로 빚어지는 사고들이 아닌가 싶다.특히 여름철엔 그런 사고들이 자주 일어난다.비도 자주 내리고 몸이 땀에젖을 경우도 많은 탓에 감전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최근 들어선 다른 에너지보다 편리하고 값싼 농사용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영농주들이 늘어나면서 영농현장에 방치된 불량 전기설비로 인한 감전사고가 잇따르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부주의한 전기사용이나 불량 전기설비로 인한 화재 등으로 순식간에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잃는 경우도 적지않다. 이런 재해가 반복되는 까닭은 사람들의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다.인재임을 잘 알면서도 정작 예방대책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알고 보면 잠재된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는 길이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각종 전기설비와 안전장치를 규격에 맞게 설치,사용하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등 적절한 예방책을 마련해 시행하면 된다. 우리 모두 밝고 건강한 사회는 ‘안전문화 정착’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김정남[한국전력 보성지점]
  • [출판가] 잡지 ‘진보평론’ 8월 창간

    국내 진보세력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오는 8월 전문잡지 ‘진보평론’을 창간할 예정이다. 진보성향의 학계·실천운동가 100여 명은 지난 17일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진보평론’ 발간모임 발족식과 함께 ‘현시기 한국의 사회운동과 이론활동’이라는 주제의 창립기념 심포지엄을 가졌다. ‘진보평론’ 창간호를 위해 김진균 서울대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교수(정치학) 최갑수 서울대교수(서양사학)가 공동대표를 맡고 편집위원장에는김세균 서울대교수(정치학)가 선임됐다. 창간호는 특집으로 ‘마르크시즘의 오늘과 내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밖에 코소보사태,‘제3의길’ 비판,최근 프랑스의 사상·지성 흐름의 전환 등에 관한 글도 실을 예정이다.
  • 부대끼는 삶의 모습 섬세하게 형상화…구본주 조각전

    “내게 조각은 자연스런 생활의 연속일 뿐입니다.삶의 본능 또는 존재이유 같은 것이죠.나무를 깎고 쇠를 두드릴 때 가장 큰 자유를 느낍니다” 한국 조각계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구본주(32).특유의 뚝심과 장인 기질로 주목받는 그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원서갤러리와 갤러리 사비나에는 ‘기(氣)’가 넘쳐난다.하지만 그가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이 시대 ‘존재의 위기’에 부대끼는 가장(家長),샐러리맨,노숙자 등을 형상화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런 그의 조각품에서 참된 기운이 솟구치는 것은 왜일까.“IMF 탓이겠지만 모두들 어렵다고만 합니다.그럴수록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 일이 중요하죠.현실의 절벽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구원을 얻자는 것입니다.전시의 주제를 가족으로 잡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터프 가이형의 외모와는 달리 구본주는 무척이나 섬세한 스타일리스트로 통한다.‘나무와 철,동(銅)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조각가’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다양한 재료구사와 공간을 장악하면서 뻗어나가는 구성도 눈길을 줄만하다.이번 작업에서 그는 주조방식보다는 ‘방짜기법’등 잔손이 많이 가는 쪽을 택했다.꽹과리나 놋그릇을 만들 때처럼 주물을 뜨지 않고 두드려 만드는 조형법이 바로 방짜기법이다.“내 작품은 90% 이상이 복제할 수 없는것들입니다.‘원작주의’ 혹은 ‘진품주의’라고나 할까요.조각의 정체성과진정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26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크기가 3∼8m에 이르는 대작에서 30∼40㎝정도의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색의 작품 23점이 나와 있다.천정높이나 관람동선 등 전시공간의 구조적 특성을 한껏 살린 것도 이 전시의 특징.특히 원서갤러리는 전시 공간을 현관과 거실 등 우리의 주거환경과 비슷하게배치해 일상의 현실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한다. 구본주가 조각가로서 평생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어떻게 참된 리얼리즘의조각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지금까지 리얼리즘 논의는 참으로 무성했습니다.그러나 그동안의 경직된 논의구조 속에서 생산된작품은 천편일률적인 경향을 보였어요.당면한 현실을 열린 사고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그것이바로 리얼리즘이 아닐까요” 구본주는 80년대적 진보성을 경험한 이른바 ‘386세대’다.그런 만큼 자신과 또래들의 청신한 감각이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갈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지난 92년부터 경기도 포천에 축사를 개조해 만든 작업장에서 조각작품과 씨름해 오고 있다.
  • 섬진강 은모래… 진달래…“남도 순환열차 타보세요”

    ‘남도 순환열차를 타보세요’ 서울과 대전에서 출발하는 이 열차는 운행도중 전라선인 곡성군 압록역에서 2시간,경전선인 보성군 득량역에서 30분가량 멈춰선다. 이 때 관광객들은 섬진강변의 은모래와 대나무 숲,진달래·개나리 꽃,구름다리,실개천을 감상할 수 있다. 곡성군은 이들에게 동동주와 산악용 자전거를 무료로 제공하고 먹거리 장터에서는 섬진강 명물인 은어튀김 등 남도 먹거리를 만끽하도록 하고 있다. 좌도농악과 설장고,길쌈짜기 시연 등 남도문화 진수도 보여준다.득량역에서는 활짝 핀 벚꽃과 보성 특산품인 녹차를 만날 수 있다. 이 열차는 서울역과 대전역에서 아침 6시55분,8시45분에 각각 출발한다.경부선∼호남선∼전라선∼경전선∼호남선∼경전선을 거쳐 밤 10시11분 서울역에 도착한다. 지난 4·5일 운행 때 800여명이 이용한 데 이어 서울역에서 11·18일,대전역에서 10·17일 두차례씩 더 운행된다. 高玄錫 곡성군수는 “아름다운 고장 곡성의 산수와 때묻지 않은 인심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 (주)부영 주총서 李重根회장 연임

    중견 건설업체인 (주)부영은 최근 주주총회를 열고 李重根 대표이사 회장을연임시키고,柳鍾섭 전 외환신용카드사장과 方鍾源 전 보성주택 사장을 대표이사로 각각 선임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崔麟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대법정.법정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그의 나이 71세,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지 5일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중의 한 사람으로,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徐成達)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죄명: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 참의),3항(칙임관이상의 고관),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범죄사실: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음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 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이어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창씨명 佳山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해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같은중인 출신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1909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7.17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귀 등은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 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 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그가 나중에‘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간접사격으로…일을 꾸미자면…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귀절이 보인다.‘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10.19)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이번에 최린군을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있습니다… ’(1921년 12월 25일자,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서 입수)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이 무렵이었다.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 부터다.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외쳤다. 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 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직전인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해방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심지어 그는 “민족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정운현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두드럭조개-기수갈고둥, 금강-진동만 집단 서식

    멸종 위기에 처한 두드럭조개와 환경부가 보호야생동물로 지정한 기수갈고둥의 집단 서식지가 발견됐다. 11일 환경부에 따르면 최근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崔炳來 교수팀의 생태조사 결과 두드럭조개는 충북 영동군 금강의 거친 자갈 틈,기수갈고둥은 경남 창원군 진동만(灣)에서 집단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두드럭조개는 지금까지 한강과대동강에서 집단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최근에는 지난해 9월 전남 곡성군 보성강에서 몇 개가 발견됐을 뿐 한강에서는 자취를 감춰 멸종 위기에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본,중국 남부에 분포하는 기수갈고둥은 민물이 흐르는 갯벌과 자갈이 섞여 있는 까다로운 환경에서만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는 전남 장흥군 수문포에서만 발견됐었다.
  • 精文硏 ‘한국인물대사전’빠진 사람 많고 서술 부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 한상진)이 최근 내놓은 ‘한국인물대사전’(전2권)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이유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수록됐어야 할 인물들이 대거 누락돼 있고 서술도 부실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97년부터 전문가 800여 명을 동원,민족의 시조 단군에서부터 지난 해 작고한 최종현 전 선경 회장,시인 박두진 선생에 이르기까지 작고 인물 총1만6,000명을 담은 이 사전은 규모로는 단연 국내 최대다.또 ‘부록편’에 수록된단군 이후 조선 순종까지의 왕실가계도,유명인물의 자(字)·호(號)일람표,또 상고시대 이후 1910년대까지의 관직·기구·법제 등에 대한 용어해설 등에는 편집진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문연측은 “기존 인물사전은 영웅주의에 빠져 공적은 강조한 반면 허물은 감추어 한 인물의 객관적 면모를 이해하는데 미흡했다”고 지적하고 “총체적인 시각과 객관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실로 90년 만에 제대로 된 인물사전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특히 정문연측은 이번 ‘사전’에서 친일경력자와 현대인물 가운데월북·납북자,북한의 인물까지도 망라해서 수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전’을 직접 들춰 보면 정문연측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한 것임이 금새 드러난다. 우선 친일경력자 언급문제.‘김활란상’제정 문제로 최근 논란이 됐던 김활란의 경우 여성교육자로서의 화려한 행적을 장황히 언급한 후 맨 마지막에가서 겨우 ‘최근에 와서 친일행적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정도로언급한 것이 전부다.또 정문연의 초대원장을 지낸 이선근의 경우 그가 만주에서 친일단체인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간부를 지낸 사실은 전혀 언급돼있지 않다.또 정문연측은 ‘국군·경찰의 창설및 발전에 특기할만한 업적을남긴 인물’을 포함시켰다고 해 놓고도 ‘민족경찰’로 불렸던 최능진은 빼놓았다.또한 ‘상훈을 받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된 인물’이라면 포함시켰다는 설명과는 달리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4년형을 언도받은 장재성도 누락시켰다.4·19후 민주당 정부는 장재성에 대해 건국훈장 추서를 계획했으나 5·16후 박정권은 장씨가해방후 월북했다며 이를 취소한 바 있다. 이밖에 일제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평가는 차치하고 아예명단조차 들어있지 않다.또 북한 현대사의 인물로는 김일성·최용건(부주석역임)정도를 다루는데 그쳤다.벽초 홍명희의 장남이자 국어학자인 홍기문,역사학자 김석형은 물론 초창기 북한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김책·최현·오진우 등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물선정에 있어 종래의 보수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이에 대해 韓원장은 “이것이 우리 정신사의 현주소”라며 “정문연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거액의 정부예산을 들여 만든 사전이 종래의구태를 재연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이는 정문연의 현주소를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혹평했다. 한편 800여명에 이르는 이번 사전의집필진 중에는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韓원장은 물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연구의 전문가인 姜萬吉 전 고려대 교수,현대사 전공의 徐仲錫 성균관대교수 등이 빠져있어 필자 선정도 편향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생태계 훼손 심각

    ●강원도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에 걸쳐 있는 태백산●대구시 달성군의 비슬산●인천시 강화도 남단 갯벌●전남 순천시, 보성군, 고흥군 일원의 순천만●경남 창녕군 우포늪 및 화왕산 등 5곳이 국립공원으로 추가 지정될 전망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사장 嚴大羽)은 이들 5곳을 국립공원으로 추가 지정해줄 것을 환경부에 요청해 놓고 있다.공단측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지 않고방치할 경우 자연 훼손이 가속화될 것이라며,체계적 관리를 위해 반드시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비슬산 근처 주민들이 국립공원추진위원회를 자발적으로 구성해 활발한활동을 펼치는 등 대상지역 주민들의 호응도 높다고 밝히고 있다. ●태백산 백두대간의 중심으로 천제단,장군봉,문수봉,당골·백단사·백천계곡,용연동굴 등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다.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인 용정,구문소 등이 있다.단군의 영정을 모신 단군 성전,단종 비각,장군단 등 문화자원도 풍부하다. 또 야생동물 및 희귀식물이 다수 서식하는 원시생태계의 보고(寶庫)로 국가 차원의 관리가 절실하다는 것이 공단의 설명이다.공단은 강원도 태백시 탄광촌에 카지노가 생기면 탐방객이 크게 늘어 훼손이 심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비슬산 천혜의 계곡과 능선,폭포,기암,자연동굴 등 수려한 경관과 울창한수림 등 다양한 동·식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대견봉,조화봉,용연사 계곡,유가사 계곡,제1폭포,제2폭포,도통굴 등이 있다.용연사 석조계단은 보물 539호,대견사지 3층 석탑은 유형문화재 42호, 용봉동 석불 입상은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돼 있다.와우산성과 30만평에 이르는 참꽃 군락지도 볼 만하다. 포유류 32종,조류 104종,파충류 및 양서류 15종 등 151종의 야생동물과 소나무,전나무,자작나무 등 396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공단은 생태계의 지속적 보전 및 관리가 필요하며 국립공원 후보지로 손색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강화도 갯벌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공단은다양한 생물 종(種)과 철새 도래지로서의 중요성 등을 들어 국립공원 지정을 요구하고있다. 개맛,고랑따개비,갯가재,칠게,갈게,세스랑게,농게 등 희귀한 무척추동물,전어,참서대,풀망둑,말뚝망둥어,왜풀망둑,참돛양태,웅어 등 물고기,흰뺨검둥오리,묽은어깨도요,왕눈물^^새 등 철새들이 관찰되고 있다. 보물 161호로 지정된 정수사 법당을 비롯해 참성단,전등사,보문사,강화산성,덕지진,초지진 등 주변에 유적도 많다. ●순천만 우리나라 갯벌 가운데 염습지가 남아 있는 유일한 갯벌.바다와 맞닿은 곳에 염생식물의 하나인 칠면초 군락이 형성돼 있다.생태계 다양성과서식지 다양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흑두루미,재두루미,저어새,황새,검은머리갈매기 등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적 희귀조를 포함해 검은머리물떼새,큰고니,잿빛개구리매,황조롱이,말똥가리 등 천연기념물,혹부리도요,민물도요,검은머리갈매기 등이 찾는다.겨울철에는 시베리아∼중국∼한국을 오가는 140종이 넘는 조류가 관찰되고 있다. ●우포늪·화왕산 우리나라 전체 식물 종(種)의 약 10%인 375종이 자생하고있다.환경부가 특정식물로 지정한 자라풀,통발,가시연꽃도 있다.흰뺨검둥오리,황조롱이,붉은머리오목눈이 등 20종의 텃새,중대백로,파랑새,덤불해오라기 등 17종의 여름철새,큰고니,청둥오리 등 25종의 겨울철새가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화왕산,관룡산,옥천계곡,배바위,병풍바위 등 자연자원과 화왕산성,목마산성,관룡사 등 문화자원도 많다.
  • 전남 시·군들 ‘이상한 人事’

    지방행정 구조조정을 위해 40년생까지 연령 대기를 지시한 정부방침을 전남도내 일선 시·군 대부분이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5일 전남도에 따르면 도내 22개 시·군 가운데 완도군을 제외한 21개 시·군이 41년 이후 출생한,상대적으로 젊은 간부들을 무더기로 대기발령하고 38∼40년생의 고령 간부직원들에게 보직을 주고 있다. 도내 22개 시·군의 38∼40년생 사무관급 이상 고령 공무원 142명 가운데연령 대기를 받은 사람은 77명에 지나지 않고 65명은 과장 이상의 보직을 받고 있다. 반면 41년 이후 출생 간부 공무원 가운데 보직이 없는 사람이 55명이나 된다. 순천시의 경우 41년 이후 출생 대기발령자가 4명인 데 반해 38년생 1명 39·40년생 각 2명 등 고령자 5명에게 보직을 주고 있다. 목포시도 39년생 2명 40년생 6명 등 8명이 현직을 지키고 있고,여수시 4명나주시 6명 무안군 6명 영암군 5명 등이 고령임에도 주요 보직에 앉아 있다. 장성·장흥군도 각각 4명의 고령자에게 과장급 주요 보직을 주고 있고 보성·화순·진도·신안군등도 각각 3명씩의 고령자가 보직을 차지하고 있다. 41년생 이후 젊은 간부가 보직을 받지 못한 경우는 여수시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광양시 6명,순천시와 무안군이 각 4명,구례·고흥·장성·진도군이 3명씩이다. 이에 대해 도 관계자는 “자치단체별로 특수한 사정이 있겠지만 정부에서지방행정구조조정을 위해 40년생 이전 간부 공무원들을 우선 대기발령할 것을 지시했고 시·군간 형평성도 있는 만큼 고령자 대기발령 지침을 지켜줄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 ‘독립선언서’ 100종 넘는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선언하노라…”. 흔히 ‘3·1독립선언서’ 또는 ‘기미(己未)독립선언서’로 불리는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이다.그러나 이 선언문의 원제(原題)는 그냥 ‘선언서(宣言書)’다.‘3·1’ 또는 ‘기미’ 등의 수식어는 다른 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위해 후에 붙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외 독립진영이나 개인이 선포한 각종 항일선언·격문(檄文)·포고문(布告文) 등은 100여 종이 넘는다.그 가운데 형식과 내용면에서 격식을 갖춘 ‘선언서’는 대략 17종 정도다.[표 참조] 이 가운데 흔히 알려진 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이 결성한 재일본청년독립단 명의로 선포된 ‘선언문’(일명 ‘2·8독립선언문’)이다.이 선언문은 한 달 뒤인 3월 1일 국내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서의 모태가 됐다.가장 늦게 선포된 것은 1922년 3월 1일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의 李鍾一사장과 종업원 일동 명의로 선포된 ‘자주독립선언서’로 흔히 ‘제2의 독립선언서’로 불린다.한편 독립선언서 선포시기는전체 17건중 14건이 1919년(기미년) 3월에 집중돼 있다.이는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선언서가 선포된 후 만세의거가 확산돼 각계에서 선언서 선포가잇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선포지역은 만주·노령(露領,러시아령) 일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일본에서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각각 선언서를 선포한 바있고,국내에서는 경남 하동(河東)과 함북 경성(鏡城) 등 지방에서도 선언서를 선포했다. 또 독립선언서 작성·선포 주체별로 보면,3·1독립선언서처럼 민족대표·지도자 명의로 선포된 것이 9건,종교집단 3건,여성계 1건,청년단체 2건,노동계 1건,지방유지 1건 등이다.이 가운데 선언서 기초자나 작성자가 알려진 것은 대한독립선언서(趙素昻),2·8독립선언서(李光洙),3·1독립선언서(崔南善)등 3건뿐이다. 또 대부분의 독립선언서는 순한문 혹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고 있으나 1920년 2월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유일하게 순한글로 작성됐다.이는 한자에 익숙치 않은 여성들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에 표기된 기년(紀年) 가운데는 ‘단기(檀紀)’를 사용한 것이 9건,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준으로 한 ‘대한민국 기원’이 4건,그리고 ‘서기(西紀)’로 된 것이 2건,기타 기년 표기가 없는 것도 2건이나된다.
  • 「3·1운동-臨政수립 80돌」주요 기념행사

    오는 3월 1일은 일제에 맞서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지 80년이 되는 날.이날을 맞아 정부 및 자치단체,관련 단체·기관들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3·1정신을 되살려 제2의 건국운동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이날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 전국의 고궁(창덕궁 제외)과 능·원,현충사,칠백의총 등이 무료로 개방된다.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3부 요인,광복회원 및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시민대표 및 청소년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린다. 상오 11시 서울 남산 국립국장 입구 공원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 및 3. 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m(1919년 상징)의 기념탑이 제막된다.이어 33인 유족대표와 광복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희생선열 합동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서울시는 낮 12시 서울 종로구 종로2가 보신각에서 3·1운동의 주역이었던독립유공자 대표와 후손 등을 초청,타종행사를 갖는다. 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를 비롯,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0개 시·도15개 지역별로 3월1일부터 4월까지 80년전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에 맞춰 펼쳐진다.독립운동서 낭독,햇불시위,봉수제,봉화제 등의 행사는 물론 길놀이,마당굿,대동놀이 등 민속행사가 함께 펼쳐져 애국심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될 전망이다. 특히 80년전 ‘조선독립만세’를 앞장서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은 2월부터 8월까지를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기간’으로 정하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우선 3월1일 80주년 기념식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히 꾸민다.각 종단 관계자들은 견지동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 장충단등에서부터 가두행진을 하며 종로3가탑골공원에 집결,오전 11시 팔각정 앞에서 기념식을 갖는다.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과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날 정오 전국의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 가두홍보대를 설치,3월 1일을 전후한 3∼4일 동안 대국민 알림운동을 전개한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또 3·1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제작,오는 27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 보성사(普成社) 터에서 제막식을 갖는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 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도서 간행,3·1정신 현창미술전시회 등의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이어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맞아 4월 13일 서울 및중국 상해,중경에서는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 등이 열린다. 4월11일∼17일 7박8일간의 일정으로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국내로 초청,기념식 및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 수출대금 미회수 수법 48억 중국으로 빼돌려…2명 수배

    부산경남본부세관은 18일 중국에 회사를 차려둔 뒤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않는 방법으로 거액의 외화를 빼돌린 부산 사상구 감전동 ㈜두원제일 전 대표李善雨씨(54)와 이 회사의 중국 현지 투자법인인 중국 보성제화 대련유한공사 사장 丁仁壽씨(51)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각각 수배했다. 李씨는 지난 96년 11월2일부터 97년 10월8일까지 ㈜두원제일에서 중국 보성제화 대련유한공사에 465차례에 걸쳐 신발 원부자재 556만2,000여달러(한화48억8,000여만원)를 수출한 뒤 수입회사로부터 수출대금을 회수하지 않는 수법으로 재산을 국외로 밀반출한 혐의를 받고있다.丁씨는 李씨가 투자해 설립한 현지법인의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李씨가 수출한 신발 원부자재의 수출대금을 국내에 전혀 송금해주지 않은 혐의다. 부산 l 李基喆 chuli@
  • 전남 原電후보지 6곳 토지 용도변경 ‘지지부진’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를 크게 제약해온 전남도내 6개 원전 후보지 해제지역에 대한 국토이용계획 변경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12일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81·82년 여수시 화양면 이목리,고흥군 도양읍 장계리,보성군 득량면 비봉리,장흥군 대덕읍 신리,해남군 황산면 외립리,신안군 압해면 송공리 등 17.01㎢를 원전 건설 후보지로 지정,관리해오다 지난해 12월 30일 후보지에서 해제하고 다른 적정 용도지역으로 국토이용계획을 변경하도록 했다.전남도도 이들 6개 지역을 적정 용도지역으로 재지정하도록 지난 3일과 지난달 12일 지시했다. 이에 대해 해당 시·군들은 원전 후보지의 용도지역을 바꾸기 위한 예산을올 추경예산에서나 확보할 수 있다며 국토이용계획 변경을 미루고 있다.올상반기에 예산을 확보하더라도 적정 용도지역 지정은 연말쯤에야 마무리된다는 게 시·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도내 원전후보 해제지역 1,088가구 3,400여명의 주민들은 “지난 18년동안주민들이 겪은 피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정부가 용역비를지원해 조기에 국토이용계획 변경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인터뷰-싱가포르에 소개되는‘여성시대’ 정찬형 PD

    여성프로는 흔히 시야가 좁고 소비지향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MBC라디오 ‘여성시대 손숙 김승현입니다’는 여성프로의 새로운 포맷을 보여준다.여성에게 사회의식을 일깨워주고 참여를 유도한다.IMF상황에서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도 한다.대표적인 양질의 프로로 평가받는 이 프로를 연출하는 정찬형PD(41).그는 여성들이 선뜻 가슴시린 사연을 털어놓게 한다. ‘여성시대’는 최근 국내의 성가를 해외로까지 확대하고 있다.지난해 11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ABU(아시아태평양방송연합)총회에서 특집 ‘벼랑끝에서 하늘을 보다’로 라디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오는 3월9일 싱가포르TV(TCS)의 시사전문채널 ‘채널 뉴스아시아’에서도 30분동안 소개될 예정이다. “경제사정을 피부로 느끼는 여성들의 육성을 통해 경제위기의 실체를 직접 알렸고,또 이를 희망적인 시각으로 봤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같은 외환위기를 겪는 동남아시아로서 감정이 서로 통한 것이겠지요” ‘벼랑끝에서 하늘을 보다’는 책으로도 출간됐다.시대의 아픔과 희망을감동적으로 담아냈고 수익금은 실직가정을 위해 쓰일 계획이다. 정PD는 그러나 자신의 라디오프로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에 오히려 섭섭함을 느낀다.세간의 이같은 관심이 라디오에 대한 ‘그간의 소홀‘을 반영한다는 생각에서다.그는 “라디오야말로 익명성을 보장,자신을 솔직하게 열어보일수 있게 하고,현장을 즉각 연결하는 속보성을 갖춘 뛰어난 매체”라고 말한다.정PD는 지난 82년 MBC에 입사,오락프로에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담아 라디오저널리즘의 방향찾기를 시도해왔다.앞으로는 IMF에 쓰러졌던 가정들이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지나간 과거사’를 털어놓는 프로를 만들고 싶다고밝혔다.
  • 종교인들 ‘제2의 3·1운동’ 펼친다

    80년전 3.1절에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듯이 종교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3·1운동 80주년을 맞아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보성사(普成社)기념조형물 건립계획을 확정,발표했다. 종교지도자협의회 지덕(池德) 대표회장은 1일 “3·1 독립선언서는 2천만우리겨레의 염원과 시대정신을 함축한 민족의 성전(聖典)”이라면서 “우리는 33인 민족대표들이 제시한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보성사(普成社) 터에 기념조형물을 세우기로 하고 이미 터닦기작업과 함께조형물 제작에 들어갔으며 27일 제막식을 갖는다. 서울시립대 정대현교수가 제작중인 조형물은 높이 6.3m에 가로 세로 2m크기로 세 사람이 태극을 받들고 있는 형상의 청동구조물.기단의 바닥크기는 3·1운동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가로 세로 각각 3.1m로 했다.기단부의석재 조형물 둘레에는 보성사의 옛모습과 만세 부르는 광경,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 전문과 불교와 개신교,천도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민족종교및 문화관광부의 세움말이 새겨진다. 종교지도자협의회 관계자는 이 조형물을 “민족의 웅지를 상징하는 추상미술조각”이라고 설명하고 “21세기를 앞두고 3·1정신이 흐려져 있는 것이안타까워 종교지도자들이 조형물을 세우고 80년전 그때처럼 3·1정신 회복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성사 기념물 건립사업은 지난해 4월 천도교 김광욱(金光旭)교령이 취임하면서 추진됐다. 현재 연합뉴스와 조계사 사이 보성학교 뒷마당에 자리잡았던 보성사는 천도교 3세교조인 孫秉熙선생이 1910년말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운영권이 천도교로 넘어갔다.보성사는 천도교가 운영하던 창신사(彰新社)에 합병된 당시의 최대 인쇄소이다.1919년 2월27일 극비리에 2만1천부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냄으로써 역사의 현장이 됐으나 그해 6월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전소됐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내달 1일 3·1운동 80주년 기념식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하게 꾸미기로 했다.각 종단의 관계자들이 견지동 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장충단 등에서 가두행진으로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에 집결,기념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또 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와함께 전국의 각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이날 정오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로 가두홍보대를 설치,3·1절을 전후한 3∼4일간 대국민 알림운동에 나선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 도서 간행,3·1정신 현창 미술전시회 등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朴燦 parkchan@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연출가 임진택씨

    삶이 뜻하지 않은 쪽으로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갈 때 ‘팔자’란 단어를 떠올린다.70년대 이후 줄곧 우리 놀이판을 지켜온 광대 임진택의 세상살이도이 ‘운명’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집안의 기대 속에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를 들어갔을 때만해도그저 수업시간에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거나 오락시간을 주도하던 괴짜 모범생에 불과했다.어디에서도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거나 불법·불순(?)공연을 주도할 싹은 보이지 않았다. “인생항로를 바꾼 발단은 낭만과 저항이 함께 녹아있던 문리대 정신이었고 불씨를 지핀 건 유신정권때 반항의 요람이던 연극반이었죠”. 연극반 시절 ‘오적’의 김지하와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상화 등과 만나면서 임진택의 세계관은 현실로 내려온다.점화된 정치의식은 당국의 감시와싸우며 연극운동으로 이어진다.그러나 합법적인 장에선 대부분 불발되었다.공연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제일교회(박형규·권호경목사가 주도)나 이화여대 큰 마당에서 현실을 풍자했다. “살벌한 분위기였죠.예를 들어 이근삼의 ‘대왕이 죽었다’라는 공연도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목이 이상하다며 금지할 정도였으니까요”. 당국과 술래잡기 하듯 벌이던 연극은 마당극의 단초를 발견하면서 더 넓은판으로 도약한다.‘교내공연 X’판정을 받은 김지하의 두 단막극 ‘구리 이순신’‘나폴레옹 꼬냑’을 71년 교련반대시위 도중 밤샘농성장(강의실)에서 시험공연한 것.무대도 없고 설비도 없는 공간에서 관중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연습 수준의 공연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관객과 주고받으며 상승하는 역동성을 발견했죠.마당극의 단초를 보았습니다”. 얼핏 보인 가능성은 70년대 중반 활기를 띤 탈춤과 접목되면서 맘껏 꽃핀다.옛날 것이란 이유로 당국에서도 권장한 탈춤에서 임진택은 역설적으로 열린 공간과 기동성이란 장점을 보았던 것. “연극의 내용과 탈춤의 형식을 결합한 거죠.날카로운 주제를 무대·대사에 의존하는 연극 형식보다는 관중과 어우러지며 신명을 우려내는 마당판의 역동성이 더 진보적으로 다가왔죠”. 물을 만난 광대는 73년 원주에서 김지하가 추진하던 ‘농촌협업운동’홍보를 위해 탈춤과 판소리가 섞인 ‘진오귀’순회공연을 계획한다.운동의 무산으로 공연은 빛을 보지 못했으나 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哭)’이란 제목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 탈춤의 재창조에 나선다.74년 소리굿 ‘아구’를 국립극장 소극장에올렸다.‘이종구 신곡 발표회’라는 합법적 이름을 빌렸다.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도피중이던 김지하가 연습장에 몰래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종구 이애주 김민기 김영동 채희완 김석만이 참가했다. “4월 긴급조치 2호 직전의 살벌한 상황에서 합법공간을 빌려 터트린 쾌거였습니다.공연이 시작된 뒤 지하형은 조명실에서 몰래 구경했죠”. 임진택은 가부키 분장으로 ‘마라데쓰’란 노래를 불러 화제를 일으켰다.이 곡은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 탈춤공연의 단골노래로 자리잡았다. 숨가쁜 ‘금지 인생’에도 휴식기간이 있었다.긴급조치로 인한 감옥살이뒤홀어머니를 모신 ‘무능한 가장’은 교수추천으로 대한항공에 들어간 것.반골의 몸짓은 멈추지 않고 ‘유신헌법 찬반투표’에 대한 시민 불복종운동의한 방법으로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공연을 준비했다.공연 3일전 전원이 연행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이 일로 당국의 눈총을 의식한 회사와 마찰을 빚고 6개월만에 사표를 던진다. 이어진 TBC의 PD생활에서도 한직으로 내몰리자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보성소리’ 승계자 정권진선생을 사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번째 전환점인 판소리 시대를 열면서 ‘금지’행로는 되살아난다.85년 올린 ‘똥바다’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는 반대했지만 대학가에선 불티났다. “저지선을 뚫고 두루마기 입고 철조망을 넘어가 공연하면 1,000∼2,000명이 몰렸죠.민중성이란 알맹이를 대중화하는 길을 보았죠.소수의 강경노선 목소리만 크고 다수의 민주운동진영이 소진상태에 있던 터라 대중화가 시급했죠.예술적 흡인력으로 대중성이란 힘을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직생활에서 막혔던 ‘끼’를 본인의 말 그대로 ‘포효’하기 시작한 것이다.판소리의 자진모리 장단이 퍼붓는 통쾌함에 한국의 부패세력을 비꼬는 사설은 5공화국의 질식할듯한 시대상황을 배설해준 활로였다.빨라진 걸음은 90년 ‘5월광주’를 낳는다.광주민주화 항쟁 10주년 기념으로 항쟁의 상징인윤상원에 대한 기념비적 소리를 남기고 싶었다. “상원이완 이전에 두번 만난 적이 있어요.황석영 형의 제의로 광주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상원이가 독학한 저의 ‘소리내력’을 외워서 부르더라구요”.월계동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윤상원에 대한 기억을 보듬으며 연습에 몰두하던 시절을 “상원이가 나오는 마지막 날 밤 얘기를 푸는데 눈물이 줄줄 납디다”라고 회상한다.사회와 예술을 아우르는 행보는 93년 절창 ‘오적’으로이어진다.정권진선생을 찾아가 두루마리에 적힌 담시 ‘오적’을 보여주며‘선생님 이것을 소리로 한번 담고 싶습니다’라고 배움을 청했던 소망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전국민족극협의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97년,98년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임진택의 문화실천이 갖는 미덕은 과거의 공간에서 박제화되지 않고 현재형으로 살아있다는 데 있다.‘금지’와 친화력이 생긴걸까,최근엔 마당극잔치를 주관하려는 과천시의 ‘얼굴을 달리한 금지문화’와 싸우느라 바쁘다.李鍾壽 vielee@
  • ■金昌國 차기 변협회장 후보

    “아픔을 견디며 환부를 도려낸다는 각오로 변호사 전체의 명운을 걸고 법조계 내부의 불법 활동을 뿌리뽑겠습니다” 제40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후보로 지명된 金昌國변호사(59·고시13회)는“축제의 한마당이 되어야 할 총회의 분위기가 불안한 장래와 추락한 자존심으로 너무도 암울했다”면서 “구겨진 자존심을 되찾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변호사가 범법자로 비쳐지고 변호사 단체는 개혁대상에 올라있다”면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협회의 미래를 위해 법조계 원로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21세기 변협위원회’를 창설,대안과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또 부실변론 보상을 위한 기금 마련과 ‘변론 체크리스트’ 작성,무료 변론 확대,인권침해 진상조사활동 강화,집단소송법과 공익소송법 제정 건의 등다양한 활동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변호사들에게 고율의 표준소득률이 책정된 부가세를 물리고 변호사 단체를 임의 단체화하려는 정부의 규제 개혁안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金변호사는목포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며 81년 광주지검 부장검사를 끝으로 개업해 진보성향의 변호사 모임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했다.87년 金槿泰씨 고문사건의 공소유지 담당 변호사(특별검사)를맡기도 했다. 93∼95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시절 당직 변호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법조계의 개혁작업을 진두 지휘했고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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