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보살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주소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음주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뉴욕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미국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15
  • [사설] 탈북자 대거입국 종합대책 세워라

    동남아 국가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 460여명이 대거 입국할 것으로 알려졌다.그동안 많게는 십여명 단위로 입국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 입국은 처음이다.정부는 그동안 탈북자들에 대해,겉으로 불거진 경우에 대해서만 조용히 처리하는 정책을 취해왔다.하지만 이제 제2,제3의 대거입국 사태 가능성도 배재하기 힘들게 됐다.정부의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본다. 정부는 중국을 비롯한 관계국들의 입장을 고려해,가급적 조용한 입국을 선호해온 게 사실이다.그런 가운데 지난 10여년 사이 입국한 탈북자가 4900명에 이르고 최근에는 매년 1000여명씩 들어온다.이는 조용한 탈북자 정책이 일면 효과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문제는 현재 중국,동남아 등지에 떠도는 탈북자수가 10만에서 많게는 30만명에 달해,기존 정책으로는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다. 이번 입국자들의 경우,중국으로 넘어간 뒤,수천 ㎞를 남하해 동남아 국가로 숨어든 사람들이다.중국 공안의 눈을 피하며 끊임없이 강제북송의 공포에 떨었을 것이고,그 과정에서 겪었을 경제적,육체적 고통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동남아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로 쫓겨나기 직전이었다고 하지 않는가.정부가 적극적으로 이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해야 한다고 본다. 입국한 뒤의 정착지원도 달라져야 한다.탈북자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의 수용규모는 400명으로 이미 포화상태고,탈북 청소년 교육,정착금 지원,주거지원 등도 아직 일과성 수준이다.지난주 탈북자들의 정착지원 제도개선방안이 서둘러 발표됐지만 미흡하기 짝이 없다.탈북자들을 입국에서부터 정착,새 체제에 동화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보살피고 지원하는 근본적인 종합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 중국 황제/앤 팔루던 지음

    고대 중국에서 황제는 ‘신’이나 다름없었다.천명을 받은 도덕적 통치자였으며 지상과 하늘을 중재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중국의 황제는 마치 해와 달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존재로 사회에 녹아들었다.중국 역사상 전통시대의 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기운과 흐름이 있었지만,황제제도 그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는 없었다.장제스나 마오쩌둥,덩샤오핑 같은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시대의 통치자들조차 ‘황제형’ 권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영국의 중국문제 전문가인 앤 팔루던이 쓴 ‘중국 황제’(이동진·윤미경 옮김,갑인공방 펴냄)는 역대 황제들의 면면을 통해 살펴본 중국 제국 2000여년의 문명사다.중국의 황제제도는 기원 전 221년 진나라 시황제가 즉위하면서 시작돼 1912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2000여년 동안 지속됐다. 이 책은 그 기간 지존의 자리에 올랐던 중국 황제 157명의 내밀한 삶을 들춰낸다.황제를 중심에 놓고 중국의 역사를 통관하는 방식은 정사의 체제를 따른 것.그런 점에서 황제들의 연대기,즉 ‘황제 본기(本紀)’인 셈이다. ●황제 157명 통해 살펴본 중국 2000년史 중국에 황제가 157명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중국 황제의 수에 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분열의 시대’에 어느 왕조를 정통 왕조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또한 정통 역사서에선 단명한 황제는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누구를 황제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이 책은 중국의 정통 사서에서 황제로 인정받는 남북조 시대 북조 왕조인 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그리고 요와 금의 황제들은 다루지 않는다.반면 정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신 왕조를 세운 왕망에 대해선 소상하게 밝힌다.전한 말의 정치가인 왕망은 뛰어난 인재들을 중용한 유능한 행정가로,부자와 지주의 특권을 견제하는 야심찬 개혁에 나섰다.모든 금을 경화로 교환하도록 했다.왕망이 죽었을 때 국고엔 당시 중세 유럽의 전체 공급량보다 많은 14만㎏의 금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그러나 부유층을 소외시킨 왕망은 끝까지 개혁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9년 동안 즉위한 왕망은 결국 평민 사병에게 죽음을 당했다. ●너무 뚱뚱해서 혼자 움직이지 못했던 만력제 중국 황제들의 삶은 그들의 거대한 권력만큼이나 다채롭고 신비스러웠다.책에 따르면 명나라 만력제는 너무 뚱뚱해 누군가의 도움 없인 일어서지도 못했다.양나라 무제는 틈만 나면 왕궁을 빠져나와 불교사원으로 달려간 은둔형 황제였으며,화가 황제인 북송의 휘종은 눈멀고 귀먹은 채 불행한 삶을 살다 갔다.금욕적인 인물로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없었던 수나라 문제,신분을 숨기고 매음굴을 찾아가 양성애를 즐겼던 청나라의 허수아비 황제 동치제,평민으로 태어나 가난을 딛고 천자에 오른 전한의 선제 등에 관한 이야기도 관심을 끈다. ●스스로를 聖母라고 칭한 측천무후 여성으로서 중국의 권력지도를 좌우한 인물론 단연 당 태종과 고종의 후궁인 측천무후와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가 꼽힌다.측천무후의 권력 장악 과정은 피로 얼룩졌다.고종의 황후 왕씨와 후궁 소씨의 사지를 절단한 뒤 몸통을 술통에 던져 죽게 했는가 하면,밀정을 둬 공포정치를 일삼았다.측천무후는 후궁이면서도 특이하게 자기 일족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측천무후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유가와는 달리 여성의 중요성을 인정한 불교를 적극 지원하고 활용했다.673년 룽먼 석굴에 자신의 모습을 본떠 거대한 미륵보살 석상을 세우게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측천무후는 스스로를 ‘성모(聖母)’라고 불렀다.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이 돼 국정을 농단한 서태후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대신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권력을 유지했다.쾌활한 성격의 서태후는 다른 만주족 여성들처럼 손톱을 길러 기분이 나쁘면 궁녀들의 얼굴을 할퀴었다고 한다. ●중국인들 자부심, 황제제도와 연관 저자는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중국(中國·중심국가)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황제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유사 이래 중국인의 삶은 황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황제정치는 2000여년 만에 별다른 투쟁도 없이 붕괴됐다.제정(帝政)은 중국의 가장 성공적인 정치제도 가운데 하나였지만,근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황제정치의 이데올로기가 유연성을 잃게 된 것이다. 황제의 역사는 ‘위로부터의 역사’다.하지만 중국의 황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 사회를 관통한 질서의 축이란 점에서 그를 통해 중국사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이 책의 미덕은 거기에 있다.이번에 출간된 ‘중국 황제’는 본격 대중역사서를 표방한 갑인 크로니클 총서 중 첫권.출판사측은 앞으로 ‘로마 공화정’‘로마 황제’‘교황’ 등을 차례로 펴낼 예정이다.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국보 78·83호… 중앙박물관 경복궁시대 마감 이벤트

    지난 21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1층 불교조각실.80평 규모의 넓은 방 한 가운데 달랑 반가사유상 두 점만이 반가부좌를 튼 채 깊은 사념에 잠겨있었다.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나란히 앉은 반가사유상 주변에는 삼삼오오,혹은 홀로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두 반가사유상의 심오한 사념의 맥을 함께 찾으려는 듯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모여들었다. 전시 이틀째인 21일까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줄잡아 1000여명.국립중앙박물관의 경복궁 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전시란 점 말고도 두 국보급의 귀한 불상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인 만큼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일본 국보 제1호인 쿄토 코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높이 125㎝)의 모태가 된 반가상을 들여다보려는 일본인들의 발길도 적지 않다. 전시장 왼쪽의 높이 93.5㎝인 83호 반가사유상은 7세기초 백제 신라 또는 통일신라에서,높이 83.2㎝인 78호 반가사유상은 6세기말 고구려 또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이가운데 국보 83호 불상은 바로 옆 반가사유상실에,78호는 지하 수장고에 있던 것으로 한국불교미술의 기념비적 양대 걸작이다.지금까지는 대체로 한 점씩 교대로 전시되곤 했으나,경복궁 시대 폐막과 용산시대 개막이라는 교차시점에서 마지막 특별 이벤트로 동시전시가 결정됐다.두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전시된 것은 1986년 8월∼1988년 4월 중앙박물관의 중앙청 이관 기념전시전이 열린 이후 처음이다.반가사유상이 전시되고 있는 불교조각실은 원래 대형불상이 전시됐던 공간으로,이들 유물은 새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준비를 위해 지난 6월 용산으로 모두 옮겨졌다.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손가락을 볼에 대고 생각에 잠긴 모습의 보살상.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회의를 느끼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를 이을 부처 미륵(彌勒)으로 간주된다.전시는 10월17일까지.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아토피’ 조기유학생 노린다

    조기유학 바람에다 여름방학을 맞아 어학연수까지 가세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출국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교육인적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해외 유학생이 16만명에 이르며,단기 어학연수와 배낭여행까지 포함,줄잡아 30여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먹거리 등 생활환경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아토피 피부염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권에서 벗어나면서 고칼로리의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인데다 환경변화에 공부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아토피 피부염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조기 귀국하는 사례까지 생기고 있다. 실제로 서울의 H한의원이 지난해 9월부터 지난달까지 이곳에서 치료받은 초진 환자 9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7%인 63명이 유학이나 어학연수로 아토피피부염이 발병했거나 심해져 치료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큰 맘 먹고 떠난 유학과 어학연수의 함정인 아토피 피부염,어떻게 다뤄야 할까. ●문제 아토피 피부염은 예민하거나 소화기가 약한 데서 기인한 체질적 요인,음식과 스트레스 등 생활습관적 요인,공해와 오염 등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병한다.조기유학생이나 어학연수생의 경우 부모가 보살필 수 없는 환경에다 전혀 다른 음식과 스트레스까지 겹쳐 없던 증세가 생기거나 경미한 증세를 키우는 사례가 많으며,그나마 외국에서는 치료조차 쉽지 않아 현지 적응을 더욱 어렵게 하기도 한다. ●원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음식.아토피의 원인이기도 한 서구식 인스턴트식품과 패스트푸드를 먹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결정적으로 병증을 키우게 된다.미국의 경우 주식인 패스트푸드류의 60%가 지방 등 고칼로리 성분이며,1회 분량 또한 한국인의 평균 섭취량보다 많아 문제가 된다.홈스테이를 하더라도 냉동식품 의존도가 높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실제로 표준 한식의 경우 평균 열량이 600㎉ 안팎인 반면 햄버거,시리얼,샌드위치 등 서양식은 대부분 700∼800㎉에 이르며,영양불균형도 심해 피부가려움증을 심하게 하기도 한다.더러는 이때 식습관이 바뀌어 귀국해서 비만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또다른 문제는 스트레스.현지 적응과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부담이 국내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이런 스트레스는 가려움증을 심하게 하거나 아토피를 악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게다가 가려움증과 피부 짓무름으로 주변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거나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병폐를 낳기도 한다. 피부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아토피는 피부를 청결하고 건조하지 않게 유지해야 하는데,혼자 생활하다 보면 청결은 물론 보습에 소홀하게 되며,강한 자외선과 잦은 선텐 역시 아토피를 악화하는 주요인이 된다. 한국인이 몰리는 해외 유학 선호지역은 대부분 주거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일사량이 많고,개발에 따른 환경오염이 심해 아토피 피부염뿐 아니라 습진,진균증 같은 피부질환 감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비용을 아끼기 위해 선택한 열악한 주거,카펫이 깔린 입식생활도 아토피 발병 인자가 된다. ●준비 앞서 열거한 원인을 알고 착실히 준비하면 된다.유학이나 연수지역을 선택할 때는 건조하거나 일사량이 많은 곳,대도시를 피하는 것이 좋다.유학의 특성상 이런 제약을 극복하기 어렵다면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미리 체질과 영양상태,아토피지수 등을 파악해 자신에게 맞는 약제,의복,목욕용품,보습제는 물론 누룽지 미숫가루 생식,햇반,죽 등 레토르트식품이 포함된 대용식과 현지 대체식단 등을 준비해야 한다.현지에 가서도 1∼2개월 동안은 한식을 먹되 규칙적인 운동과 식사로 적응력을 높이며,잦은 파티에서도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도움말 혜원한의원 권기영 원장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숫자 100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숫자 100

    숫자 100은 예사 숫자가 아니다.요즘이야 쉽게 백살까지 사시라는 말을 하지만 흔히 말하는 ‘백수(白壽)’라는 단어는 일백 백(百)자에서 한일(一)자를 빼 99세를 의미할 정도로 옛날 사람들은 숫자 100 앞에 겸손했다.그런 숫자 100을 감히 서울신문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100년전 구한말 올곧은 목소리로 민족을 일깨웠던 대한매일신보를 이어받은 민족정론지이기 때문이다. 올해가 100주년인 것은 서울신문((옛 대한매일신보) 창간만은 아니다.올해는 저항시인 이육사(陸史)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의열단 활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인 수인번호 ‘64’를 호로 사용한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청포도’와 ‘광야’ 등의 시로 민족의 자존심과 양심을 온몸으로 노래한 시인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1904년에 태어나 1940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울시민 중 2004년 1월 현재 100살인 사람은 여자 73명,남자 9명으로 모두 82명.10만명에 한명 정도가 서울신문과 함께 격동의 한세기를 보낸 셈이다. 국보 제100호인 남계원 7층석탑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다.원래 신라탑의 전형을 계승·발전한 고려시대 탑으로 개성에 있던 것을 1915년에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경복궁 경내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남계원 7층석탑과 함께 일제 식민지배 5년을 기념하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때 전국 각지에서 옮겨진 것이다.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화 보문사지장보살도이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는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 온온사(穩穩舍)이다. 대중교통체계가 바뀐 7월부터 운행되는 100번 버스는 도봉산역∼종로3가를 운행한다.경기 성남시 소속 100번 버스는 성남시∼잠실역을 운행하고 있다.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축구선수 김태영씨는 국가대표급간 경기인 A매치 100경기 출장자들을 일컫는 ‘센추리클럽’에 한국선수로는 5번째로 이름을 올렸다.현재 센추리클럽에는 차범근,황선홍,홍명보,유상철 등이 가입한 상태다. 한편 100의 고지를 넘기 직전의 사람들도 있다.내년 한국야구도입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야구위원회는 올해 말 해외파 선수들을 불러들여 여는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국민감독’ 임권택씨도 생애 100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숫자 100

    숫자 100은 예사 숫자가 아니다.요즘이야 쉽게 백살까지 사시라는 말을 하지만 흔히 말하는 ‘백수(白壽)’라는 단어는 일백 백(百)자에서 한일(一)자를 빼 99세를 의미할 정도로 옛날 사람들은 숫자 100 앞에 겸손했다.그런 숫자 100을 감히 서울신문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100년전 구한말 올곧은 목소리로 민족을 일깨웠던 대한매일신보를 이어받은 민족정론지이기 때문이다. 올해가 100주년인 것은 서울신문((옛 대한매일신보) 창간만은 아니다.올해는 저항시인 이육사(陸史)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의열단 활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인 수인번호 ‘64’를 호로 사용한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청포도’와 ‘광야’ 등의 시로 민족의 자존심과 양심을 온몸으로 노래한 시인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1904년에 태어나 1940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울시민 중 2004년 1월 현재 100살인 사람은 여자 73명,남자 9명으로 모두 82명.10만명에 한명 정도가 서울신문과 함께 격동의 한세기를 보낸 셈이다. 국보 제100호인 남계원 7층석탑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다.원래 신라탑의 전형을 계승·발전한 고려시대 탑으로 개성에 있던 것을 1915년에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경복궁 경내에 있는 대부분의 석탑이 남계원 7층석탑과 함께 일제 식민지배 5년을 기념하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때 전국 각지에서 옮겨진 것이다.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화 보문사지장보살도이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는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 온온사(穩穩舍)이다. 대중교통체계가 바뀐 7월부터 운행되는 100번 버스는 도봉산역∼종로3가를 운행한다.경기 성남시 소속 100번 버스는 성남시∼잠실역을 운행하고 있다.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축구선수 김태영씨는 국가대표급간 경기인 A매치 100경기 출장자들을 일컫는 ‘센추리클럽’에 한국선수로는 5번째로 이름을 올렸다.현재 센추리클럽에는 차범근,황선홍,홍명보,유상철 등이 가입한 상태다. 한편 100의 고지를 넘기 직전의 사람들도 있다.내년 한국야구도입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야구위원회는 올해 말 해외파 선수들을 불러들여 여는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국민감독’ 임권택씨도 생애 100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김후년의 클럽하우스] 방학과 골프대회

    비가 잦다.태풍과 장마 탓에 궂은 날이 이어지고 있다.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벌써 산과 바다로 향하고 있다.방학과 휴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콩나물시루처럼 북적대던 교실에서 벗어나 시골의 할아버지 댁을 찾아 그늘진 원두막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수박을 먹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학이지만 새벽부터 별밤까지 학원을 드나들어야 하고 해외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야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설렘을 기대할 수는 없다. 주니어 골프선수도 방학의 기쁨을 접어야 하긴 마찬가지다.평소보다 더 바쁘다.한달 보름 정도의 짧은 기간 중에 대한골프협회와 협회 산하 단체가 개최할 대회는 무려 10개가 넘는다.수업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선수들은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강행군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선수에게 대회 출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대한골프협회에 등록한 주니어 선수는 2000명에 육박한다.지난해 출범한 이후 오는 8월 2개의 공식 대회를 개최하는 초등학교골프연맹도 등록 선수가 200명이 넘는다.대회마다 예선전을 거치거나 유자격자 출전 제한이 불가피하다. 주니어 선수가 이처럼 많이 늘어난 것은 타이거 우즈(미국)와 박세리의 성공 신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돈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다.’는 희망은 고사리 손에 골프채를 쥐게 했다.공만 잘 치면 상급학교 진학 혜택과 국가대표 선발은 물론 우즈나 박세리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는 한 달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용도 아낌없이 쏟아 붓게 했다.심지어 생업도 내팽개친 채 자식 뒷바라지에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넘치면 부족함보다 못한 것.부모의 기대는 때론 실망으로 이어지고 아이에 대한 손찌검으로 나타나곤 한다.안타까운 일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더불어 아이의 손에 골프채를 쥐어준 부모는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학교 울타리 안에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사랑과 애정으로 보살펴야 한다.대회가 열리는 7∼8월의 골프장은 어린 선수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삶의 현장이다.9홀만 돌아도 숨이 턱턱 막히고 갈증에 목이 타는 뙤약볕의 벌판에 서 있는 어린 선수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어린 선수들이 출전하는 골프대회는 축제이자 신명나는 잔치여야 한다.잘 맞은 샷에 기뻐하고 실수를 안타까워하는,웃고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어린 선수들이 우승 경쟁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우승을 목표로 신중하게 경기해야 하는 것은 어른이 돼서 해도 늦지 않다.지금은 배우는 시기의 어린 아이들일 뿐이다. 골프 칼럼니스트 golf21@golf21.com˝
  • [Seoulites] ‘생보자’ 가족처럼 돌보는 도봉구 지적과 김오숙씨

    “봉사,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도봉구청 지적과에 근무하는 김오숙(41·여)씨는 이번 달 월급에서도 3만원을 떼놓는다.이 돈은 도봉구 창5동에 사는 ‘또 한분의 아버지’ 강현욱(67·가명)씨의 몫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강씨를 만난 것은 지난 1998년 IMF로 모두가 어려울 때였다.처음으로 사회복지 업무를 맡아 지역내 생활보호대상자를 담당하게 된 김씨는 우연히 강씨를 만나 돕게 됐다. 당시 강씨는 교도소에서 세번째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직후였다. 가족 하나없이 전과 3범이라는 이유로 외면받던 강씨는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었다. 게다가 뚜렷한 직업도 없어 간신히 마련한 월세방에서조차 내몰리게 됐다. 상담 과정 중에 강씨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김씨는 자신의 돈 100만원을 내어 강씨가 새로 구한 집의 전세금에 보탰다. 그 후 매달 3만원씩을 전기·수도세 등을 낼 수 있게 강씨에게 송금한다.매주 안부전화도 잊지 않는다. 김씨의 지원에 힘입어 강씨도 요즘은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사회복지 업무를 맡기 전에는 어떤 봉사를 해야할지 잘 몰랐다.”는 김씨는 “소년소녀가장 등 청소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소외받는 노인을 보살피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한달에 한번 지인들과 서울의 한 재활원에서 지체장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도 앞장선다는 김씨는 “봉사활동은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전부”라며 미소지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Seoulites] ‘생보자’ 가족처럼 돌보는 도봉구 지적과 김오숙씨

    [Seoulites] ‘생보자’ 가족처럼 돌보는 도봉구 지적과 김오숙씨

    “봉사,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도봉구청 지적과에 근무하는 김오숙(41·여)씨는 이번 달 월급에서도 3만원을 떼놓는다.이 돈은 도봉구 창5동에 사는 ‘또 한분의 아버지’ 강현욱(67·가명)씨의 몫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강씨를 만난 것은 지난 1998년 IMF로 모두가 어려울 때였다.처음으로 사회복지 업무를 맡아 지역내 생활보호대상자를 담당하게 된 김씨는 우연히 강씨를 만나 돕게 됐다. 당시 강씨는 교도소에서 세번째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직후였다. 가족 하나없이 전과 3범이라는 이유로 외면받던 강씨는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었다. 게다가 뚜렷한 직업도 없어 간신히 마련한 월세방에서조차 내몰리게 됐다. 상담 과정 중에 강씨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김씨는 자신의 돈 100만원을 내어 강씨가 새로 구한 집의 전세금에 보탰다. 그 후 매달 3만원씩을 전기·수도세 등을 낼 수 있게 강씨에게 송금한다.매주 안부전화도 잊지 않는다. 김씨의 지원에 힘입어 강씨도 요즘은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사회복지 업무를 맡기 전에는 어떤 봉사를 해야할지 잘 몰랐다.”는 김씨는 “소년소녀가장 등 청소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소외받는 노인을 보살피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한달에 한번 지인들과 서울의 한 재활원에서 지체장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도 앞장선다는 김씨는 “봉사활동은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전부”라며 미소지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에듀 in]영어캠프를 다녀오더니…

    [에듀 in]영어캠프를 다녀오더니…

    경기도 포천의 초등학교 5학년인 김현우 어린이는 올 여름방학에도 영어 캠프에 가기로 했다.지난해 여름 그리고 겨울방학에 이어 세번째다. 어머니를 졸라 벌써 영어 캠프에 등록을 마쳤다.원래 성격이 활달한 현우는 새로운 또래들을 만나 함께 뒹굴며 뛰어 노는 게 그저 재미있다고 했다. 현우네는 현우만 영어 캠프 예찬론자인게 아니다.올해 중학생이 된 형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지난해 여름과 겨울방학에 연거푸 캠프를 다녀왔다.초등학생이면서 중학생 형들과 같은 반에 편성되어 생활하면서 동갑내기들에게서 보고 듣지 못했던 생각이나 행동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 이미혜씨는 아들들이 영어 캠프를 다녀오면 영어 자체를 편안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일상 생활 영어라면 금방이라도 구사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을 보인다는 것이다.시골이라서 영어 학원조차 보내지 못하는 빈자리를 영어 캠프가 메워 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현준이와 현우를 영어 캠프에 안내한 것은 어머니였다.지난해 이맘때 쯤 ‘MBC 영어캠프’에 딸 아이를 보냈던 이웃의 소개를 받았다.영어 공부는 제쳐두고,어려서부터 조금은 지나치리만큼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펴 주던 아들들이라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힘을 조금은 길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캠프 참가비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캠프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영어 노래를 틀어 놓고,캠프에서 알게 된 친구나 형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면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캠프 생활을 통해 조금씩 응석받이 티를 벗어나는 모습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고 했다.
  • [에듀 in]영어캠프를 다녀오더니…

    경기도 포천의 초등학교 5학년인 김현우 어린이는 올 여름방학에도 영어 캠프에 가기로 했다.지난해 여름 그리고 겨울방학에 이어 세번째다. 어머니를 졸라 벌써 영어 캠프에 등록을 마쳤다.원래 성격이 활달한 현우는 새로운 또래들을 만나 함께 뒹굴며 뛰어 노는 게 그저 재미있다고 했다. 현우네는 현우만 영어 캠프 예찬론자인게 아니다.올해 중학생이 된 형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지난해 여름과 겨울방학에 연거푸 캠프를 다녀왔다.초등학생이면서 중학생 형들과 같은 반에 편성되어 생활하면서 동갑내기들에게서 보고 듣지 못했던 생각이나 행동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 이미혜씨는 아들들이 영어 캠프를 다녀오면 영어 자체를 편안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일상 생활 영어라면 금방이라도 구사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을 보인다는 것이다.시골이라서 영어 학원조차 보내지 못하는 빈자리를 영어 캠프가 메워 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현준이와 현우를 영어 캠프에 안내한 것은 어머니였다.지난해 이맘때 쯤 ‘MBC 영어캠프’에 딸 아이를 보냈던 이웃의 소개를 받았다.영어 공부는 제쳐두고,어려서부터 조금은 지나치리만큼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펴 주던 아들들이라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힘을 조금은 길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캠프 참가비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캠프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영어 노래를 틀어 놓고,캠프에서 알게 된 친구나 형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면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캠프 생활을 통해 조금씩 응석받이 티를 벗어나는 모습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고 했다.˝
  • [책꽂이]

    ●하디 보이즈(매트 하디 등 지음,성민수 옮김,은행나무 펴냄) 프로레슬링의 본산인 미국에서 한해 4억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며 매주 1800만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있는 WWE.이 프로레슬링은 ‘로’와 ‘스맥다운’이란 양대 프로그램으로 레슬마니아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고 있다.오프 시즌 없이 1년 내내 13개 언어로 100개국 이상에 방영되는 WWE는 이제 전세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현상이 됐다.이 책은 지상에서 가장 세련된 폭력의 예술가란 평을 들은 전설의 태그팀 ‘하디 보이즈’의 이야기를 통해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1만 2800원. ●억눌려온 자들의 존재증명(간호윤 지음,이회 펴냄) 한국 고소설 비평에 관한 단상을 담았다.고소설은 언패(諺稗)로도 불린다.언패는 언문으로 된 패관소설이라는 뜻으로, 특히 국문소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국문학자인 저자는 고소설은 조선시대 내내 괴이하고 불경스럽다는 뜻의 괴탄불경지서(怪誕不經之書)로 박대당하고 오라지워져 왔다고 주장한다.9500원. ●길이 멀어 못갈 곳 없네(이동식 지음,어진소리 펴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는 중국 곳곳에서 우리 선조들의 활약상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다.고선지,혜초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은 물론 지장보살의 화신 김교각,산동의 패자 이정기,흥교사의 원측법사 등 일반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선조들도 적지 않다.이 책은 그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인의 역사관과 민족관과 국가관도 면밀히 살핀다.제목은 신라 최치원의 “무릇 길이 멀다 해도 못가는 곳 없고,나라가 다르다고 못 갈 나라가 없다.”라는 문장에서 따왔다.1만원. ●미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세력에 대한 보고서(김지석 지음,교양인 펴냄) 미국 강경 보수세력의 몸체를 이루는 기독교 근본주의,즉 기독교 우파와 네오콘의 실체를 밝혔다.네오콘은 1960∼70년대 이후 전통적인 보수파를 비판하면서 부상한 새로운 보수파.이들은 자신을 “문화적 전통주의와 민주적 자본주의,미국의 이익을 전세계에 확산시키는 대외정책을 추구한다.”고 말한다.기독교 우파는 미국 특유의 정치 사회 세력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복음주의자,특히 회심 개신교도가 주도 세력이다.국제문제 전문기자인 저자는 “네오콘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여론조작에 능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1만 4000원.˝
  • [그곳에 가고싶다] 이천 도드람산

    도드람산(349m)이 ‘이천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것은 기암괴석이 많아서일 것이다.이천시 중심가에서 8km 떨어진 마장면에 있는 산으로,중부고속도로 하행선 이천휴게소에서 보면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에 솟아 있는 돌산이다.산은 높지 않으나 평지에 솟아 있어 조망이 좋고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어 매력적인 산이다. 연일 삼십도가 넘는 찜통 더위가 계속되는 초여름 오후,밤나무 꽃향이 짙은 영보사 오름 길로 들어섰다.SK연수원 담장에 흐드러진 장미는 밤나무 숲 그늘에서 쉬고 있다. 산 속의 민가 같은 영보사를 돌아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니 곧 전망이 트인다.전망좋은 바위는 몇 걸음마다 있어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뾰족뾰족한 돌들을 쌓아 놓은 듯한 제1봉에 섰다.조망이 기막히다.굉음을 내며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일개미들 같다.고속도로 건너 설봉산이 지척이다.차들은 이천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이어진 암릉은 우회로가 나 있으나 그대로 암릉을 타기로 했다.제2봉에 그림 같은 소나무가 있다.봉우리 위의 넓은 바위는 십여명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의 평상 모양이다.칼날 같은 제3봉을 지나니 정상이다. 소나무 숲에 나무 의자 세 개를 만들어 놓았다.검은 돌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도드람산 猪鳴山 349m, 1994.4.10,이천 늘푸른산악회’. 도드람산이란 이름은 두 가지 유래가 구전된다.하나는 마고(麻姑,산신의 하나)할멈이 이 산을 한양 삼각산으로 옮기려고 갖고 갔다가 거기는 이미 다 차 있으므로 도로 가지고 온 산이라 해서 도드람산(되돌아 온 산)이라고 불렸다는 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옛날 이 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효자가 있었다.이 산에서만 나는 석이버섯이 좋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석이버섯을 따다 드렸다.과연 눈에 띄게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줄을 타고 바위의 버섯을 따는데 돼지 울음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니 돼지는 없고 외줄이 바위에 닳아서 끊어질 지경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효자를 가상히 여긴 산신령이 돼지를 보내 효자를 구했다 해서 ‘돋(돼지)울음산’이라 불렸다 한다.돋울음산이 세월이 흘러 도드름산으로 변한 것이다.한자로는 저명산(猪鳴山)이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에 효자문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돼지굴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있다.험한 길이다.계단이 없었다면 함부로 내려가기 어려웠겠다.지리산 천황봉의 천황문을 닮은 바위문이다. 철계단이 끝나고 밧줄을 매 놓았다.여성 등산객이 밧줄을 잡고 내려오고 있다.“아,맨발로 등산을 하십니까? ” 맨발로 등산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예,발에 땀나는 것이 싫어서요.” 핫 팬츠 차림의 여성 등산객은 더 말붙일 시간도 없이 휑하니 가버린다.뒷모습 왼쪽으로 석이버섯이 날 것 같은 바위벽이 병풍을 치고 있다.간간이 바위굴이 있어 돼지도 있을 법하고.바위벽이 끝나는 안부의 쉼터에는 의자마다 한 사람씩 누워서 바람을 맞고 있다. 하산길은 전망대로 올라가서 되돌아가기로 했다.철계단을 수직으로 돌아 올라간 그곳은 과연 전망대답다.북쪽으로 양자산·용문산·천마산 등이 하늘을 받치고 있고,서쪽으로 수많은 구릉들이 널브러져 있다.동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가로지른 저곳과 남쪽으로 영동고속도로로 나뉘어 있는 저 넓은 벌판이 경기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이천쌀’의 본고장이다. 흰바위의 백미를 보는 듯한 암릉을 올라간다.강철로 만든 손잡이와 발디딤이 있어 안전을 돕고 있으나 아무래도 자연미는 느끼기 어렵다.다시 정상에 섰다.모두들 내려 가버린 정상의 쉼터 의자에 안내산악회의 광고지만이 흔들거리고 있다.멀거니 내려다보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돼지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서둘러 자동차가 기다리는 도로공사장을 향했다.굴참나무가 빼곡한 산비탈이 ‘휘익휘익’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산악문학인 안재홍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나들목을 나와 서이천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 SK연수원이 나온다.연수원 담을 따라 오르는 길이 도드람산 들머리다.이천에서 42번 국도로 마장면 표교리까지 간 후,설서교차로에서 표교초등학교 방향으로 1km 가면 된다.용인행 버스가 수시로 있다. ●볼거리·먹을거리 이천은 쌀과 도자기의 고장이다.이천시립박물관과 도자기전시관이 볼 만하다.태평흥국명미애보살좌상이 서이천 삼거리를 지나서 왼쪽에 있다.도드람산 들머리에 있는 도드람산식당의 이천쌀밥정식 1만원,산채비빔밥 6000원(031-636-9774).˝
  • [그곳에 가고싶다] 이천 도드람산

    [그곳에 가고싶다] 이천 도드람산

    도드람산(349m)이 ‘이천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것은 기암괴석이 많아서일 것이다.이천시 중심가에서 8km 떨어진 마장면에 있는 산으로,중부고속도로 하행선 이천휴게소에서 보면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에 솟아 있는 돌산이다.산은 높지 않으나 평지에 솟아 있어 조망이 좋고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어 매력적인 산이다. 연일 삼십도가 넘는 찜통 더위가 계속되는 초여름 오후,밤나무 꽃향이 짙은 영보사 오름 길로 들어섰다.SK연수원 담장에 흐드러진 장미는 밤나무 숲 그늘에서 쉬고 있다. 산 속의 민가 같은 영보사를 돌아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니 곧 전망이 트인다.전망좋은 바위는 몇 걸음마다 있어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뾰족뾰족한 돌들을 쌓아 놓은 듯한 제1봉에 섰다.조망이 기막히다.굉음을 내며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일개미들 같다.고속도로 건너 설봉산이 지척이다.차들은 이천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이어진 암릉은 우회로가 나 있으나 그대로 암릉을 타기로 했다.제2봉에 그림 같은 소나무가 있다.봉우리 위의 넓은 바위는 십여명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의 평상 모양이다.칼날 같은 제3봉을 지나니 정상이다. 소나무 숲에 나무 의자 세 개를 만들어 놓았다.검은 돌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도드람산 猪鳴山 349m, 1994.4.10,이천 늘푸른산악회’. 도드람산이란 이름은 두 가지 유래가 구전된다.하나는 마고(麻姑,산신의 하나)할멈이 이 산을 한양 삼각산으로 옮기려고 갖고 갔다가 거기는 이미 다 차 있으므로 도로 가지고 온 산이라 해서 도드람산(되돌아 온 산)이라고 불렸다는 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옛날 이 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효자가 있었다.이 산에서만 나는 석이버섯이 좋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석이버섯을 따다 드렸다.과연 눈에 띄게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줄을 타고 바위의 버섯을 따는데 돼지 울음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니 돼지는 없고 외줄이 바위에 닳아서 끊어질 지경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효자를 가상히 여긴 산신령이 돼지를 보내 효자를 구했다 해서 ‘돋(돼지)울음산’이라 불렸다 한다.돋울음산이 세월이 흘러 도드름산으로 변한 것이다.한자로는 저명산(猪鳴山)이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에 효자문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돼지굴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있다.험한 길이다.계단이 없었다면 함부로 내려가기 어려웠겠다.지리산 천황봉의 천황문을 닮은 바위문이다. 철계단이 끝나고 밧줄을 매 놓았다.여성 등산객이 밧줄을 잡고 내려오고 있다.“아,맨발로 등산을 하십니까? ” 맨발로 등산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예,발에 땀나는 것이 싫어서요.” 핫 팬츠 차림의 여성 등산객은 더 말붙일 시간도 없이 휑하니 가버린다.뒷모습 왼쪽으로 석이버섯이 날 것 같은 바위벽이 병풍을 치고 있다.간간이 바위굴이 있어 돼지도 있을 법하고.바위벽이 끝나는 안부의 쉼터에는 의자마다 한 사람씩 누워서 바람을 맞고 있다. 하산길은 전망대로 올라가서 되돌아가기로 했다.철계단을 수직으로 돌아 올라간 그곳은 과연 전망대답다.북쪽으로 양자산·용문산·천마산 등이 하늘을 받치고 있고,서쪽으로 수많은 구릉들이 널브러져 있다.동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가로지른 저곳과 남쪽으로 영동고속도로로 나뉘어 있는 저 넓은 벌판이 경기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이천쌀’의 본고장이다. 흰바위의 백미를 보는 듯한 암릉을 올라간다.강철로 만든 손잡이와 발디딤이 있어 안전을 돕고 있으나 아무래도 자연미는 느끼기 어렵다.다시 정상에 섰다.모두들 내려 가버린 정상의 쉼터 의자에 안내산악회의 광고지만이 흔들거리고 있다.멀거니 내려다보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돼지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서둘러 자동차가 기다리는 도로공사장을 향했다.굴참나무가 빼곡한 산비탈이 ‘휘익휘익’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산악문학인 안재홍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나들목을 나와 서이천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 SK연수원이 나온다.연수원 담을 따라 오르는 길이 도드람산 들머리다.이천에서 42번 국도로 마장면 표교리까지 간 후,설서교차로에서 표교초등학교 방향으로 1km 가면 된다.용인행 버스가 수시로 있다. ●볼거리·먹을거리 이천은 쌀과 도자기의 고장이다.이천시립박물관과 도자기전시관이 볼 만하다.태평흥국명미애보살좌상이 서이천 삼거리를 지나서 왼쪽에 있다.도드람산 들머리에 있는 도드람산식당의 이천쌀밥정식 1만원,산채비빔밥 6000원(031-636-977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8) 남한산성에 숨겨진 이야기

    경기도 광주 땅에 있는 남한산(南漢山)의 남한산성은 오늘날 서울 사람들에게는 다소 흥청거리는 유원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주로 군대생활 중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는 뜻으로 ‘남한산성 간다.’는 말이 졸병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도 있었다.실제로 서울 사람들은 휴일이나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여러 종류의 모임을 갖거나 특별한 만남을 위하여 남한산성 일대에 들어 서 있는 유흥 음식점을 많이 이용한다. 울창한 숲,사방으로 툭 트인 주변 풍광과 높다란 성벽 아래로 이어진 산길,군데군데 남아 있는 사찰들,천주교도 박해 현장,숲속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봄철의 연록색 숲과 가을철의 불타는 단풍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남한산은 서울분지를 끼고 동쪽 지맥인 수락산 불암산과 동남으로 이어져 있고,서울의 북쪽 북한산과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형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천연요새지에 성을 쌓아왔기 때문에 산성(山城)의 산으로 잘 알려져 왔는데,신라가 백제 정복 후인 672년 기존하던 산성을 손보아 주장산성(晝長山城)이라 불렀다.이것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밑그림인 셈이다.본격적인 군사요새로서 서울의 임금까지 피신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기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624년(인조2)부터 2년 동안 대대적인 성벽 공사를 하고 난 뒤부터였다. ●1626년 日·청 침략대비 위해 축성 1626년(인조4)에 전혀 새로운 산성으로 완성된 남한산성은,1592년부터 7년여 동안이나 혹독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때늦은 반성과 북쪽에서 무섭게 확장되고 있는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따라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쌓은 어떤 성보다 국가가 위급할 때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되리라는 판단에 따라서 쌓은 요새였다. 이같이 중요한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조선 정부는 그 책임을 엉뚱하게도 당시의 군인이나 전문가들이 아닌 승려들에게 떠맡겼다.승려들이 사찰에서 종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요새를 만드는 중노동판에 끌려나와서 노예처럼 돌을 나르고 성벽을 쌓았다는 사실은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이자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낳은 종교탄압의 역사였다.이런 사실에 대하여 ‘인조실록’과 ‘정조실록’은 매우 상세하게 당시 사정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인조(仁祖) 임금은 남한산성을 쌓기 위하여 승려들을 강제 동원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을 따랐다.정부의 모든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유생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서울 방위를 맞게 될 남한산성을 새로 쌓아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유생들 자신과 그들 자식들을 성 쌓는 일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군인과 승려들을 동원시키되 비용을 줄이고 불평을 없애기 위해서는 군인보다 승려들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군인을 내보낼 경우에는 필요한 양식과 자재를 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모두 국가에서 책임져야 했다.또한 군인 중에는 양반 사대부와 끈이 닿는 사람도 있어서 온갖 청탁과 압력이 들어오게 마련이어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승려들이라면 문제는 간단했다.불교와 승려는 유교 이념인 충(忠)과 효(孝)를 부정하는 중죄인이기 때문에 승려들은 아무리 학대하고 짓밟아도 괜찮다고 판단했다.승려들을 강제동원시키면서 각자 먹을 식량을 스스로 마련하게 하고,성 쌓는 데 드는 장비와 비용도 알아서 준비하도록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그 무엇보다 유생들의 관심을 끈 것은 성쌓기에 동원된 승려들이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혼신을 기울여 일을 하기 때문에 작업 능률이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승려들은 어느 곳에서든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불교 계율을 위배하지 않는 한 중생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곧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이며 자기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어차피 먹는 일은 하루 두 끼니면 족한 것이 승려의 계율이었다.아침에는 죽을 조금만 먹고,정오 무렵에는 허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먹으면 족했다.오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옷과 잠자리는 수행에 지장이 되고,세상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한 괜찮았다.넝마 조각을 걸쳐도 되고,칼날 위에서 자도 괜찮았다.이런 배경으로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승려들을 지휘하여 성벽 쌓는 일을 총책임지도록 하는 인물이 필요했다.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각성(覺性·1575∼1660)이라는 승려였다.인조는 각성에게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란 직위를 주면서 조선의 모든 승려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총섭’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위기를 구한 서산대사에게 선조 임금이 승군의 총지휘를 부탁하면서 내렸던 데 기원을 둔 것이다. 남한산성 쌓는 공사가 시작되자 8도도총섭에 임명된 각성은 각 도마다 승려 숫자를 배정하고 정해진 날짜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각 도의 관찰사에게 보냈다.그러자 유생들이 즉각 반발했다.감히 승려 따위가 유생인 관찰사에게 명령하듯 한다는 것이었다.승려와 불교에 대한 차별의식과 유생의 자존심 때문이었다.유생들의 거듭되는 반대 앞에서 인조는 괴로워했다.언제는 승려들에게 책임을 맡기자고 하더니,이제 와서는 승려들은 노동만 하고 지휘는 유생들이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이렇듯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증오심과 승려들을 탄압하려는 지속적인 편견 속에서 남한산성 공사는 강행되었다. 전국의 승려들은 말없이 공사를 해나갔다.만약 승려들이 이를 거부하면 농민들이 대신 끌려나와야 할 것이고,그리되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더 커질 것임은 분명했다.승려들은 이같은 미래의 일들까지 고려하면서 묵묵히 성 쌓는 일로 수행을 대신했다. ●유생들 불교 증오… 승려탄압 계속 성 안에는 장차 산성수비에 필요한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9개의 사찰도 지었다.망월사,옥정사,개원사,한흥사,국청사,장경사,천주사,동림사,영원사였는데,개원사는 도총섭이 머무는 지휘소였고 나머지는 전국에서 온 승군들 숙소로 썼다. 2년 동안의 쉼 없는 공사 끝에 성이 완성되었다.그동안 공사에 나온 승려들 중에는 질병과 배고픔 또는 사고 등으로 죽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다.남한산성 곳곳에서는 죽은 승려들의 주검을 화장시키는 연기가 피어올랐고,비참하게 죽은 도반의 기구한 생애를 슬퍼하는 승려들의 염불 목탁소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왔다.그렇게 성이 완공되고 나자 다시 문제가 생겼다.남한산성을 지키는 일이었다.유생들은 다시 승려들에게 남한산성 수비를 맡기자고 했다.그러면서 수비에 임하는 승려들로 하여금 수비에 필요한 식량,의복,땔감,의약품 등을 승려들의 책임으로 떠맡겨 버리자고 했다.결국 조선의 정치를 완전히 장악한 유생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식량은 군인들에게 먹이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것을 나눠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불교탄압 정책을 밀어 붙여온 강경파 유생들은 그것마저도 나눠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결국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해 승군(僧軍)이 조직되었다.각 도마다 승군으로 나갈 승려 숫자가 배당되었다.일 년에 여섯 차례씩 교대해야 하는 승려들은 식량,옷,약 등 생활비 전액을 승려 자신이 마련해서 두 달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러야 했다.남한산성에 나가는 일을 번상(番上)한다고 불렀다. 큰 절은 4∼5명,작은 절은 1∼2명 씩의 승려를 내보내야 했다.한 명의 행장을 꾸리는 데 약 100금(金)이 들었다.결국 한 사찰에서 해마다 400∼500금의 비용을 책임지게 되자 그 폐단은 점점 커졌다.폐단이 커지자 승군이 직접 서울로 오는 대신 한 사람마다 돈 16냥을 내고,정부는 그 돈으로 사람을 사서 성을 지키도록 하는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이란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2년공사… 城곳곳에 승려 火葬 연기 그러나 이 돈 역시 극단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사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이었다.승려들에게는 심각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뒷날 북한산성까지 승려들을 수탈하여 수비부담을 지우게 되자 전국의 사찰은 차츰 폐허로 변해갔다.의승방번전 부담을 견디다 못해 사찰의 재산을 처분하면서까지 의무를 다했지만 갈수록 중압감이 커지자 승려들은 머리를 기르고 환속해 버렸다. 이같은 제도는 결국 불교를 쇠퇴하게 하고 승려들을 세속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그런데도 1626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면서 승려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고,조선에서 불교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한 유생들의 종교탄압이었다.그후 조선 유생들은 조선이 일본의 노예국이 되는 데 앞장을 섰고 일본은 조선 불교를 철저하게 파괴했다.남한산성의 저 짙은 녹음 속에는 270여년간 계속된 종교탄압 정책 아래서 신음하던 승려들의,인간이 인간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외침이 묻어 있을 것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8) 남한산성에 숨겨진 이야기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8) 남한산성에 숨겨진 이야기

    경기도 광주 땅에 있는 남한산(南漢山)의 남한산성은 오늘날 서울 사람들에게는 다소 흥청거리는 유원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에는 주로 군대생활 중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는 뜻으로 ‘남한산성 간다.’는 말이 졸병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도 있었다.실제로 서울 사람들은 휴일이나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여러 종류의 모임을 갖거나 특별한 만남을 위하여 남한산성 일대에 들어 서 있는 유흥 음식점을 많이 이용한다. 울창한 숲,사방으로 툭 트인 주변 풍광과 높다란 성벽 아래로 이어진 산길,군데군데 남아 있는 사찰들,천주교도 박해 현장,숲속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봄철의 연록색 숲과 가을철의 불타는 단풍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남한산은 서울분지를 끼고 동쪽 지맥인 수락산 불암산과 동남으로 이어져 있고,서울의 북쪽 북한산과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형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천연요새지에 성을 쌓아왔기 때문에 산성(山城)의 산으로 잘 알려져 왔는데,신라가 백제 정복 후인 672년 기존하던 산성을 손보아 주장산성(晝長山城)이라 불렀다.이것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밑그림인 셈이다.본격적인 군사요새로서 서울의 임금까지 피신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기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624년(인조2)부터 2년 동안 대대적인 성벽 공사를 하고 난 뒤부터였다. ●1626년 日·청 침략대비 위해 축성 1626년(인조4)에 전혀 새로운 산성으로 완성된 남한산성은,1592년부터 7년여 동안이나 혹독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때늦은 반성과 북쪽에서 무섭게 확장되고 있는 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따라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쌓은 어떤 성보다 국가가 위급할 때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되리라는 판단에 따라서 쌓은 요새였다. 이같이 중요한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조선 정부는 그 책임을 엉뚱하게도 당시의 군인이나 전문가들이 아닌 승려들에게 떠맡겼다.승려들이 사찰에서 종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요새를 만드는 중노동판에 끌려나와서 노예처럼 돌을 나르고 성벽을 쌓았다는 사실은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이자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낳은 종교탄압의 역사였다.이런 사실에 대하여 ‘인조실록’과 ‘정조실록’은 매우 상세하게 당시 사정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인조(仁祖) 임금은 남한산성을 쌓기 위하여 승려들을 강제 동원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을 따랐다.정부의 모든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유생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서울 방위를 맞게 될 남한산성을 새로 쌓아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유생들 자신과 그들 자식들을 성 쌓는 일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군인과 승려들을 동원시키되 비용을 줄이고 불평을 없애기 위해서는 군인보다 승려들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군인을 내보낼 경우에는 필요한 양식과 자재를 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모두 국가에서 책임져야 했다.또한 군인 중에는 양반 사대부와 끈이 닿는 사람도 있어서 온갖 청탁과 압력이 들어오게 마련이어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승려들이라면 문제는 간단했다.불교와 승려는 유교 이념인 충(忠)과 효(孝)를 부정하는 중죄인이기 때문에 승려들은 아무리 학대하고 짓밟아도 괜찮다고 판단했다.승려들을 강제동원시키면서 각자 먹을 식량을 스스로 마련하게 하고,성 쌓는 데 드는 장비와 비용도 알아서 준비하도록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그 무엇보다 유생들의 관심을 끈 것은 성쌓기에 동원된 승려들이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혼신을 기울여 일을 하기 때문에 작업 능률이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승려들은 어느 곳에서든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불교 계율을 위배하지 않는 한 중생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곧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이며 자기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어차피 먹는 일은 하루 두 끼니면 족한 것이 승려의 계율이었다.아침에는 죽을 조금만 먹고,정오 무렵에는 허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먹으면 족했다.오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옷과 잠자리는 수행에 지장이 되고,세상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한 괜찮았다.넝마 조각을 걸쳐도 되고,칼날 위에서 자도 괜찮았다.이런 배경으로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승려들을 지휘하여 성벽 쌓는 일을 총책임지도록 하는 인물이 필요했다.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각성(覺性·1575∼1660)이라는 승려였다.인조는 각성에게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란 직위를 주면서 조선의 모든 승려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총섭’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위기를 구한 서산대사에게 선조 임금이 승군의 총지휘를 부탁하면서 내렸던 데 기원을 둔 것이다. 남한산성 쌓는 공사가 시작되자 8도도총섭에 임명된 각성은 각 도마다 승려 숫자를 배정하고 정해진 날짜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각 도의 관찰사에게 보냈다.그러자 유생들이 즉각 반발했다.감히 승려 따위가 유생인 관찰사에게 명령하듯 한다는 것이었다.승려와 불교에 대한 차별의식과 유생의 자존심 때문이었다.유생들의 거듭되는 반대 앞에서 인조는 괴로워했다.언제는 승려들에게 책임을 맡기자고 하더니,이제 와서는 승려들은 노동만 하고 지휘는 유생들이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이렇듯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증오심과 승려들을 탄압하려는 지속적인 편견 속에서 남한산성 공사는 강행되었다. 전국의 승려들은 말없이 공사를 해나갔다.만약 승려들이 이를 거부하면 농민들이 대신 끌려나와야 할 것이고,그리되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더 커질 것임은 분명했다.승려들은 이같은 미래의 일들까지 고려하면서 묵묵히 성 쌓는 일로 수행을 대신했다. ●유생들 불교 증오… 승려탄압 계속 성 안에는 장차 산성수비에 필요한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9개의 사찰도 지었다.망월사,옥정사,개원사,한흥사,국청사,장경사,천주사,동림사,영원사였는데,개원사는 도총섭이 머무는 지휘소였고 나머지는 전국에서 온 승군들 숙소로 썼다. 2년 동안의 쉼 없는 공사 끝에 성이 완성되었다.그동안 공사에 나온 승려들 중에는 질병과 배고픔 또는 사고 등으로 죽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다.남한산성 곳곳에서는 죽은 승려들의 주검을 화장시키는 연기가 피어올랐고,비참하게 죽은 도반의 기구한 생애를 슬퍼하는 승려들의 염불 목탁소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왔다.그렇게 성이 완공되고 나자 다시 문제가 생겼다.남한산성을 지키는 일이었다.유생들은 다시 승려들에게 남한산성 수비를 맡기자고 했다.그러면서 수비에 임하는 승려들로 하여금 수비에 필요한 식량,의복,땔감,의약품 등을 승려들의 책임으로 떠맡겨 버리자고 했다.결국 조선의 정치를 완전히 장악한 유생들의 뜻대로 결정되었다.식량은 군인들에게 먹이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것을 나눠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불교탄압 정책을 밀어 붙여온 강경파 유생들은 그것마저도 나눠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결국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해 승군(僧軍)이 조직되었다.각 도마다 승군으로 나갈 승려 숫자가 배당되었다.일 년에 여섯 차례씩 교대해야 하는 승려들은 식량,옷,약 등 생활비 전액을 승려 자신이 마련해서 두 달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러야 했다.남한산성에 나가는 일을 번상(番上)한다고 불렀다. 큰 절은 4∼5명,작은 절은 1∼2명 씩의 승려를 내보내야 했다.한 명의 행장을 꾸리는 데 약 100금(金)이 들었다.결국 한 사찰에서 해마다 400∼500금의 비용을 책임지게 되자 그 폐단은 점점 커졌다.폐단이 커지자 승군이 직접 서울로 오는 대신 한 사람마다 돈 16냥을 내고,정부는 그 돈으로 사람을 사서 성을 지키도록 하는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이란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2년공사… 城곳곳에 승려 火葬 연기 그러나 이 돈 역시 극단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사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이었다.승려들에게는 심각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뒷날 북한산성까지 승려들을 수탈하여 수비부담을 지우게 되자 전국의 사찰은 차츰 폐허로 변해갔다.의승방번전 부담을 견디다 못해 사찰의 재산을 처분하면서까지 의무를 다했지만 갈수록 중압감이 커지자 승려들은 머리를 기르고 환속해 버렸다. 이같은 제도는 결국 불교를 쇠퇴하게 하고 승려들을 세속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그런데도 1626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면서 승려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고,조선에서 불교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한 유생들의 종교탄압이었다.그후 조선 유생들은 조선이 일본의 노예국이 되는 데 앞장을 섰고 일본은 조선 불교를 철저하게 파괴했다.남한산성의 저 짙은 녹음 속에는 270여년간 계속된 종교탄압 정책 아래서 신음하던 승려들의,인간이 인간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외침이 묻어 있을 것이다.
  • [토요일 아침에] 음식은 몸과 영혼을 지키는 일/여연 스님

    동다정에 올라 산밑을 내려다보다 보면 맑은 하늘의 바람이 산골짜기를 따라 슬금슬금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먼 대양의 어느 한 곳 깊은 심해에서 시작해 동해바다의 어느 해변까지 우렁차게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쏴아와 소리를 내며 나뭇잎들이 거칠게 울어댄다.때로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처럼 장중하게,때로는 베토벤의 ‘합창’처럼 완벽한 협주곡을 스스로 연주해내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탁 터진 3평 남짓한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고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자연의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천상에서 가릉빈가가 내려와 연주하는 음악보다 더 깊고 오묘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간다.그러면 세상의 강물이 긴긴 역사의 회랑을 돌아 굽이치고 저 넓디넓은 창공의 별밭에 은구슬보다 많은 별꽃들이 으스러지고 다시 피어나듯 생의 환희가 가닥가닥 그리움의 물살로 내 깊은 곳까지 엉켜든다.그런 점에서 삶은 화엄(華嚴)의 바다요,세계일화(世界一花)의 바다에서 흩날리는 유영(遊泳)같은 것이다. 우리 암자에는 아주 특별한 신도가 몇분 있다.몇십리길을 버스를 두 번 타고 내려서 깊은 산골짜기 중턱까지 무명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노보살들이다.산비탈을 올라오느라 쉴 법도 하지만 그냥 쉬는 법이 없다.그 노보살들은 암자에 오자마자 보따리째 부처님 앞에 바친다.“부처님 내가 약도 안 치고 계분(자연산 닭똥)을 듬뿍 먹여 키운 무공해 채송께 잘 잡수시오 잉.그럼 부처님이 자신 줄 알고 얼릉 찬을 맹글어 우리 스님께 올릴라요.” 옷을 걷어붙이고 요사채 앞마당 수곽에 굽은 허리를 디밀고 보따리를 푼다.검게 익은 곱디고운 흙들이 점점이 묻어있는 연푸른 빛깔이 도는 고추,상추,배추가 쏟아져 나온다. 얼갈이 애기배추는 참기름과 태양초 고춧가루 들깨를 듬뿍 묻혀 겉절이를 만들고,푸르다 못한 맑고 투명한 연한 무 잎사귀와 총각무는 유천(乳泉)의 맑은 물과 함께 시원한 백물김치가 된다.방구들에 푹 익혀담은 된장과 함께 올라온 풋고추는 보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정도다.“씨님 싸게 드시지요.” 나에게 직접 만든 점심을 권하는 그들을 보노라면 마치 깊은 산속에 자리를 펴고 하늘빛과 광휘하는 금싸라기들을 보듬은 지고지순한 관세음보살을 보는 듯하다.그런 점에서 그들은 종종 나에게 화엄의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생의 환희를 제공한다. 지금 세간에는 ‘먹을거리’에 대한 것이 중요한 화두중 하나인 것 같다.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먹을거리에 인간의 몸을 황폐화시키는 못 먹는 것들을 집어넣은 것이다.문제가 발생한 ‘만두소’나 ‘공업용 고춧가루’파동 문제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됐던 식품유통 문제중 하나다.1000만원 미만의 벌금을 물고 14억원이란 큰 돈을 만지기 위해 버젓이 상행위를 하는 기업주들에게 단 한점의 ‘양심’이 남아있지 않다. 음식은 자신의 영혼과 몸을 지키는 중요한 일 중 하나다.가공음식을 파는 기업주도 문제겠지만 인스턴트음식을 사먹는 사람들도 문제다.자신을 가꾸는 소중한 일을 기계나 남에게 대신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하고 속도주의에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음식 만들 재료를 직접 고르고 정성을 다해 만들 때 존재의 무한한 기쁨을 확인할 수 있다.우리 일상생활에 음식을 만들어 먹는 기본속에서 우리는 그속에 숨겨진 생의 진리와 그 가치에 대한 광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속에서 정말로 멋스럽고 품격있는 생의 여유와 한적을 즐기고 있다는 아름다운 생의 자부심,그리고 먹을거리의 진정한 공유를 통해 이세상 가득가득 넘쳐난 맛깔스러운 생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여연 스님 대흥사 일지암 주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3)흙사람이 보낸 편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4848-16,옛 김해평야의 낙동강 기슭 한 언저리에 소담재(小潭齋)라는 작은 전시실을 겸한 찻집.그 곁 창고같이 허름하고 귀신냄새가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 같은 어두컴컴한 안쪽에는 뜻밖에도 한국인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아프고 서러운 배고픔의 역사가 눈 뜨고 서 있다. ●‘소담재’에서 만난 ‘역사’ 배고픔만이 아니다.여자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차별받고 부대끼면서도 죽는날까지 참아야만 했던 한국의 어머니들이 모두 모여 서 계신다.모두가 일하는 모습이다.흔히 노동이라고 표현하는,육체를 수고롭게 움직여 식구들과 이웃의 삶을 보살피고 있는 동작은,멈춘 상태로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긴장감이 짙게 느껴진다.얼핏 1900년 무렵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외세와의 갈등과 시련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한국인들의 생활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한국인을 인간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껴안고,업고,다독여 오늘까지 데려오신 어머니 모습이다. 이같은 어머니 모습을 빚고 있는 허경혜씨도 여성이다.우연한 기회에 그의 작품전을 알리는 작은 신문기사를 읽고나서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그런지 몇 해를 지나서 또 우연히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퍽 인상적이었다.그는 그의 작품을 토우(土偶)라 불렀는데,나는 토우라는 이름보다 ‘흙사람’이라는 말이 더 좋겠다고 했다.토우와 흙사람은 좀 다른 세계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한국인의 역사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한 미술양식이다.따라서 토우,토용(土俑),명기(名器)라고도 부르는 것들과 다르게 보아야 할 것 같다.중국,한국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되어온 토우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세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또한 희랍 로마에서 발달한 테라코타(Terra-cotta)나 일본 문화인 하니와(埴輪)와도 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토우’와는 다른 ‘흙사람’의 세계 이른바 토우는 사람 모습을 갖춘 것과 여러 가지 동물,생활용구 등 모든 표상물들로서 주술적인 우상,무덤에 껴묻기 위한 부장용(副葬用)으로 만든 것들이다.특히 한국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토우는 인간이 죽은 뒤의 세계와 영혼의 미래를 상징하는 신앙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종관계를 전제로 하여 지배자의 시체와 함께 노비나 하인을 산 채로 파묻던 고대 국가의 습속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이 때 토우에 나타난 인물상들은 여성의 성적 특징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다산신앙과 풍요를 나타내거나 공예적으로 두드러진 기법을 이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우주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그런 연유로 토우의 외형이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하지만 이 토우가 주술적 우상성과 주종관계를 위한 제물로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몰인간성 이념을 유지한 채 현대사회의 한 미술형식으로 재현,혹은 답습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무의미한 낭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이런 전통사회에서 있어 온 토우들과는 선명하게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흙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움인데 그런 점에서 전통시대의 나한신앙(羅漢信仰)이 지닌 특징들과 일정한 소통관계를 지니고 있다.한국인들이 꿈꾼 자유로움이 나한신앙에 잘 나타나 있는데,이들 나한상은 다른 불상과 달리 엄격한 도상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바위 위에 앉거나 팔을 괴고 쉬는 자세,기분 좋게 서있는 자세 등으로 표현되는데 표정도 가지각색이다.눈을 내리뜨고 참선하는 얼굴,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거나 빙긋이 미소짓는 모습,찡그린 얼굴 등 다양한 인간의 표정을 보여준다.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성격과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적절하게 융화시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그렇게 볼 때 흙사람은 유장한 한국인의 전통신앙체계를 근간으로 삼되 종교적으로 의존하거나 이미지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전통의 힘과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사랑과 믿음,갈등과 불안을 담백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는 점은 흙사람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소백산맥 이남의 흙 중에서 산화철 성분이 적고 흙 알갱이가 굵으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이용하여 인간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점도 좋아보인다. ●노예노동보다 고통스러웠던 보릿고개 그가 집중하고 있는 20세기 초 중반 무렵의 한국 농촌의 여성상은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로 표현되어온 기존의 미술적 혹은 역사적 평가와도 조금은 궤적을 달리해야 할 것 같은 문화다.가난과 질곡으로 압축되는 20세기 초중엽 농촌 사회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무거운 노동과 정신적 중압감을 받으며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과 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도맡아해 낸 것은 어머니였다.양반 사대부 가정과 달리 민중의 삶은 여성들의 희생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였다.의료시설과 의약품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여러 명의 자식을 생기는 대로 낳아 기르는 일은 죽음에 가까운 위험하고도 무모한 생존 그 자체였다. 식량부족은 곧 산모와 여성들에게 영양결핍을 고질적인 일상으로 만들었고 대가족의 빨래와 식단차리기 등은 견디기 힘든 노예노동에 견줄 만했다.그 어떤 어려움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보릿고개로 불려온,긴 긴 봄날의 굶주림이었다.토지 부족과 식량 부족이 일상화된 가운데서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는 특히 젖먹이를 키우거나 임신중인 어머니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천형과도 같았다. 그런 질곡의 세월은 적어도 보리농사가 시작된 18세기 무렵 이후부터 더욱 극심해진 한국 농촌의 비극이었다.한국 농민들이 하루 세 끼니의 식사를 하게 된 것이 1960년대 이후부터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보릿고개 시절에는 하루 한 끼니조차도 제대로 거치기가 쉽지 않았었다.굶주림과 고난중에도 어머니는 임신을 해야 하고 자식을 낳고 길러야만 집안과 사회가 이루어진다. 똑같이 굶으면서도 임신하고,젖 먹이고,어린 자식 품어 키워내야 하는 역할은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다.따라서 한국 어머니는 한국 역사의 절반이 아닌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온 몸으로 도맡아왔다.그런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역사 바깥이나 다름없는 홀대와 차별의 불길 속에 서서 살아왔다.그러다가 현대사회라는 이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까지 와버렸다.전통적 가치와의 충돌로 생기는 늙으신 농촌 어머니의 고독,깊은 상실감,소외와 박탈감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백록을 쓰듯이 어머니의 수난사를 흙으로 표현하게 된 것 같다. ●‘강철문명’과 맞서는 흙의 힘 콘크리트와 강철 등 인공적 조형과 냉혈한 금속성,생명의 단절과 괴리를 멈추지 못하는 도시문명 속에서 허경혜씨가 들고나온 것은 흙이다.흙의 부드러움과 온유함,자연성과 생명성을 상징하는 흙 한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한국여성사의 한 단면을 조형해내는 그의 작업은 분명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어머니 마음으로 읽혀진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임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흙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우리가 걸어왔고 지향하고 있는 목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3)흙사람이 보낸 편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4848-16,옛 김해평야의 낙동강 기슭 한 언저리에 소담재(小潭齋)라는 작은 전시실을 겸한 찻집.그 곁 창고같이 허름하고 귀신냄새가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 같은 어두컴컴한 안쪽에는 뜻밖에도 한국인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아프고 서러운 배고픔의 역사가 눈 뜨고 서 있다. ●‘소담재’에서 만난 ‘역사’ 배고픔만이 아니다.여자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차별받고 부대끼면서도 죽는날까지 참아야만 했던 한국의 어머니들이 모두 모여 서 계신다.모두가 일하는 모습이다.흔히 노동이라고 표현하는,육체를 수고롭게 움직여 식구들과 이웃의 삶을 보살피고 있는 동작은,멈춘 상태로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긴장감이 짙게 느껴진다.얼핏 1900년 무렵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외세와의 갈등과 시련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한국인들의 생활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한국인을 인간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껴안고,업고,다독여 오늘까지 데려오신 어머니 모습이다. 이같은 어머니 모습을 빚고 있는 허경혜씨도 여성이다.우연한 기회에 그의 작품전을 알리는 작은 신문기사를 읽고나서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그런지 몇 해를 지나서 또 우연히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퍽 인상적이었다.그는 그의 작품을 토우(土偶)라 불렀는데,나는 토우라는 이름보다 ‘흙사람’이라는 말이 더 좋겠다고 했다.토우와 흙사람은 좀 다른 세계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한국인의 역사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한 미술양식이다.따라서 토우,토용(土俑),명기(名器)라고도 부르는 것들과 다르게 보아야 할 것 같다.중국,한국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되어온 토우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세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또한 희랍 로마에서 발달한 테라코타(Terra-cotta)나 일본 문화인 하니와(埴輪)와도 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토우’와는 다른 ‘흙사람’의 세계 이른바 토우는 사람 모습을 갖춘 것과 여러 가지 동물,생활용구 등 모든 표상물들로서 주술적인 우상,무덤에 껴묻기 위한 부장용(副葬用)으로 만든 것들이다.특히 한국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토우는 인간이 죽은 뒤의 세계와 영혼의 미래를 상징하는 신앙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종관계를 전제로 하여 지배자의 시체와 함께 노비나 하인을 산 채로 파묻던 고대 국가의 습속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이 때 토우에 나타난 인물상들은 여성의 성적 특징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다산신앙과 풍요를 나타내거나 공예적으로 두드러진 기법을 이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우주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그런 연유로 토우의 외형이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하지만 이 토우가 주술적 우상성과 주종관계를 위한 제물로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몰인간성 이념을 유지한 채 현대사회의 한 미술형식으로 재현,혹은 답습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무의미한 낭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경혜씨의 ‘흙사람’은 이런 전통사회에서 있어 온 토우들과는 선명하게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흙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움인데 그런 점에서 전통시대의 나한신앙(羅漢信仰)이 지닌 특징들과 일정한 소통관계를 지니고 있다.한국인들이 꿈꾼 자유로움이 나한신앙에 잘 나타나 있는데,이들 나한상은 다른 불상과 달리 엄격한 도상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바위 위에 앉거나 팔을 괴고 쉬는 자세,기분 좋게 서있는 자세 등으로 표현되는데 표정도 가지각색이다.눈을 내리뜨고 참선하는 얼굴,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거나 빙긋이 미소짓는 모습,찡그린 얼굴 등 다양한 인간의 표정을 보여준다.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성격과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적절하게 융화시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그렇게 볼 때 흙사람은 유장한 한국인의 전통신앙체계를 근간으로 삼되 종교적으로 의존하거나 이미지를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전통의 힘과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사랑과 믿음,갈등과 불안을 담백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는 점은 흙사람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소백산맥 이남의 흙 중에서 산화철 성분이 적고 흙 알갱이가 굵으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이용하여 인간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점도 좋아보인다. ●노예노동보다 고통스러웠던 보릿고개 그가 집중하고 있는 20세기 초 중반 무렵의 한국 농촌의 여성상은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로 표현되어온 기존의 미술적 혹은 역사적 평가와도 조금은 궤적을 달리해야 할 것 같은 문화다.가난과 질곡으로 압축되는 20세기 초중엽 농촌 사회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무거운 노동과 정신적 중압감을 받으며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과 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도맡아해 낸 것은 어머니였다.양반 사대부 가정과 달리 민중의 삶은 여성들의 희생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였다.의료시설과 의약품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여러 명의 자식을 생기는 대로 낳아 기르는 일은 죽음에 가까운 위험하고도 무모한 생존 그 자체였다. 식량부족은 곧 산모와 여성들에게 영양결핍을 고질적인 일상으로 만들었고 대가족의 빨래와 식단차리기 등은 견디기 힘든 노예노동에 견줄 만했다.그 어떤 어려움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보릿고개로 불려온,긴 긴 봄날의 굶주림이었다.토지 부족과 식량 부족이 일상화된 가운데서 해마다 반복되는 보릿고개는 특히 젖먹이를 키우거나 임신중인 어머니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천형과도 같았다. 그런 질곡의 세월은 적어도 보리농사가 시작된 18세기 무렵 이후부터 더욱 극심해진 한국 농촌의 비극이었다.한국 농민들이 하루 세 끼니의 식사를 하게 된 것이 1960년대 이후부터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보릿고개 시절에는 하루 한 끼니조차도 제대로 거치기가 쉽지 않았었다.굶주림과 고난중에도 어머니는 임신을 해야 하고 자식을 낳고 길러야만 집안과 사회가 이루어진다. 똑같이 굶으면서도 임신하고,젖 먹이고,어린 자식 품어 키워내야 하는 역할은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다.따라서 한국 어머니는 한국 역사의 절반이 아닌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온 몸으로 도맡아왔다.그런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역사 바깥이나 다름없는 홀대와 차별의 불길 속에 서서 살아왔다.그러다가 현대사회라는 이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까지 와버렸다.전통적 가치와의 충돌로 생기는 늙으신 농촌 어머니의 고독,깊은 상실감,소외와 박탈감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백록을 쓰듯이 어머니의 수난사를 흙으로 표현하게 된 것 같다. ●‘강철문명’과 맞서는 흙의 힘 콘크리트와 강철 등 인공적 조형과 냉혈한 금속성,생명의 단절과 괴리를 멈추지 못하는 도시문명 속에서 허경혜씨가 들고나온 것은 흙이다.흙의 부드러움과 온유함,자연성과 생명성을 상징하는 흙 한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한국여성사의 한 단면을 조형해내는 그의 작업은 분명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어머니 마음으로 읽혀진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임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흙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우리가 걸어왔고 지향하고 있는 목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언론의 자유’ 막는 자유연설지역

    |워싱턴 백문일특파원|‘자유연설지역(free speech area)’.얼핏 보면 미 헌법 1조에 따라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상징처럼 보인다.그러나 실제로는 부시 행정부 들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 사는 빌 닐(66)은 정부 요인을 경호하는 비밀경호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퇴직한 철강 근로자인 그는 헌법이 보장한 ‘의사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고 자신을 불법적으로 구금했다고 주장했다. 닐은 2002년 9월 미국의 노동절인 ‘레이버 데이(Labor Day)’를 맞아 거리로 나섰다.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피츠버그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여동생과 함께 “가난한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일 작정이었다. 대규모 시위도 아니고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닌데다 정부 정책에 대한 의사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부시 대통령이 지나가는 도로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지역 경찰이 그들을 제지하고 거리에서 1.6㎞나 떨어진,철사로 엮은 울타리 안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울타리 옆에는 ‘자유연설지역’이라는 푯말이 있었다. 울타리에 갇힌 많은 사람들은 철사를 잡고 아우성을 쳤지만 부시 대통령이 지나가는 거리에 미치지 못했고 보이지도 않았다.닐은 수용소 캠프 같은 생각이 든데다 미국 전역에서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됐다는 확신에 경찰의 요구를 거부했다.경찰은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항의하는 여동생까지 함께 구금했다.미시민자유연합(ACLU)은 이같은 사례들을 모아 닐과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를 지지하거나 비판을 할 기본권이 경호국의 지시에 따라 침해됐고 대통령이 지나가는 장소에 반대의 목소리가 있는 점을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논리다.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지하지 않고 대통령을 환호하게 한 것은 차별정책이라고 했다. 당시 지역경찰의 부서장인 폴 울프는 법정에서 비밀경호국의 지시에 따라 자유연설지역에 시위자들을 가두게 했다고 증언했다.이같은 사례는 부시 대통령이나 딕 체니 부통령이 차량 행렬을 벌인 오리건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플로리다 등 미 전역에 걸쳐 30건 이상이 접수됐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브레트 버시라는 사람은 경찰의 지시를 어겨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됐다가 법원으로부터 기각됐다.그러나 연방법 위반 혐의로 당국에 의해 다시 기소돼 징역 6개월 형과 벌금 5000달러에 직면했다.의회가 법무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했으나 계류중이다.그는 피켓을 버리거나 자유연설지역에 갈 것을 모두 거절했다. 백악관과 비밀경호국은 이같은 인권침해 주장에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