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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속의 짝 찾아 바다 건넌 소녀 평생해로 부부 역사가 된 사랑

    꿈속의 짝 찾아 바다 건넌 소녀 평생해로 부부 역사가 된 사랑

    얼추 2000년 전쯤이다.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의 공주가 극동의 작은 나라 가락국을 찾아 긴 항해를 시작한다. 하늘이 정해준 피앙세, 김수로왕을 찾아 나선 길이다. 공주의 이름은 허황옥. 16세(추정) 가녀린 소녀가 벌인 대항해의 여정은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소녀의 여정이 이제 테마길로 태어날 예정이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알알이 맺힌 ‘허황옥 신행길’이다. 부산과 경남 창원(옛 진해)을 거쳐 김해에 닿은 소녀의 여정을 따라가 봤다.  옛 가락국의 수도, 김해에 들면 물고기 조각상이 종종 눈에 띈다. 이른바 신어(神魚) 신앙을 상징하는 조각들이다. 수로왕릉 정문의 문설주에도 두 마리 신어가 조각돼 있다. 물고기는 인도 드라비다어로 ‘가야’, ‘가라’ 등으로 불린다고 한다. 500년 동안이나 실재했으나 역사 속에선 완벽하게 사라진 나라 가야의 국호 또한 이 단어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 신어 신앙의 중심에 허황옥이 있다. 우리나라 첫 국제결혼·연상연하 커플  허황옥의 고향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유타국이란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아유타에선 쌍어문장(雙魚紋章)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경찰 계급장, 택시 번호판 등에도 쌍어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 이 신어 사상이 허황옥을 통해 가락국에 전파됐다는 것이다.  먼저 김수로와 허황옥 사랑이야기의 얼개를 살피자.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이니 이야깃거리도 많을 터. 그 내용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허황옥의 아버지, 그러니까 인도 아유타국의 왕이 꿈을 꾼다. 천제가 나타나 배를 타고 동쪽 끝까지 올라가 닿는 나라에 딸의 배필이 있다고 알려준다. 왕은 곧바로 허황옥을 배에 태워 보낸다. 서기 48년께 일이다. 이때 동행하는 인물이 오라버니 장유화상이다. 현 김해 장유신도시 명칭도 장유화상 이름에서 따왔다.  이때부터 16세 소녀의 대항해가 시작된다. 허황옥은 ‘돌배’ 위에 파도를 잠재운다는 ‘파사석’을 싣고 가락국으로 향한다. 같은 시기, 가락국의 왕 김수로도 비슷한 꿈을 꾼다. 수로왕은 꿈에서 자신의 배필이 멀리서 배를 타고 올 것이라는 천제의 가르침을 듣는다. 수로왕은 신하 유천간을 망산도로 보내 피앙세를 맞는 한편, 자신은 명월사 인근에 행궁을 차리고 허황옥 일행을 기다린다. 그 명월사가 있던 곳이 현 명월산 자락의 흥국사(명월사 터가 따로 있다는 주장도 있다)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이때 수로왕의 나이 6세. 무려 2000년 가까이 앞서 요즘 ‘대세’라는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 탄생한 셈이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는다. 이 가운데 첫째 아들은 2대 거등왕에 오르고, 둘째와 셋째는 허왕후의 요청에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된다. 여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장유화상을 따라 승려가 된다. 그곳이 바로 경남 하동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칠불사다. 두 딸 중 첫째는 신라 석씨 왕의 시조가 되고, 둘째 딸은 일본국 초대 천황의 모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둘의 러브 스토리는 여기서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제 그들의 실제 흔적을 좇을 차례다. 들머리는 망산도다. 허황옥 일행이 첫발을 디뎠다는 섬이다. 망산도는 경남 창원과 부산의 경계에 걸쳐 있다. 현재 대부분의 검색 사이트에서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는 부산 강서구 송정동에 속한다. 그러니까 망산도를 둘러싼 땅은 창원, 망산도와 주변 바다는 부산으로 보면 틀림없겠다.  망산도는 작은 섬이다. 주변 땅이 간척되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신화의 시대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이었을 게다. 망산도는 흘낏 봐선 진면목을 알 수 없다. 섬 안에 들어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특히 바다 쪽에서 보는 망산도의 바위들은 정말 독특하다. 하나같이 거북의 등껍질처럼 쫙쫙 갈라졌다. 필경 풍화작용이 진행 중일 터. 돌로 태어나 2000년 전 신화 시대의 아득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한 뒤, 먼지가 되어 홀연히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유주암, 유주비각 등 설화와 관련된 유적들도 망산도 주변에 산재해 있다.  망산도 앞의 정자 유주정에 앉아 있자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곧잘 눈에 띈다. 결혼 이민으로 꾸려진 다문화 가정 또한 부산 서쪽과 김해 일대에 펵 많다고 한다. 이 지역은 2000년 전에도 ‘국제적 항구’였으니 허황후 이야기는 결국 ‘오래된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허황옥이 실제 인도 아유타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유주비각에 새겨진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이란 문구는 이 같은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이와 관련해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의 해석이 명쾌하다. 김 교수는 저서 ‘허황옥 루트’를 통해 허황옥이 몰락한 아유타 왕국의 후손이고, 그들이 정착한 곳이 중국 보주, 현 쓰촨성 안웨현(安岳縣)이란 견해를 편다. 보주는 신어신앙을 가진 소수민족이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 당시 허황옥의 선조들이 다스렸던 아유타 왕국이 정정불안으로 붕괴됐고, 유민으로 전락한 지배층이 보주 지역으로 흘러들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라면 허황옥의 인도 공주설과 중국 출신설 등 상충되는 두 난제가 자연스레 해소된다. 첫날밤 보낸 명월사의 후신 흥국사  긴 항해 끝에 뭍에 닿은 소녀는 하늘이 점지한 피앙세를 만나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 산 넘고 물 건넌 허황옥은 이윽고 부산 지사동의 명월산에 닿는다. 허황옥은 자신의 옛것을 버린다는 뜻에서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산신령께 폐백을 올린 뒤 수로왕과 첫날밤을 보낸다. 수로왕은 허황옥의 빼어난 자태를 달에 비유해 산 이름을 명월산이라 짓고, 첫날밤을 보낸 자리에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명월사도 짓는다. 그 명월사의 후신으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흥국사다.  흥국사 극락전엔 명월사 석탑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단 면석이 남아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펴낸 ‘명월사지(현 흥국사) 현장조사 보고서’는 “석탑 기단 면석에 조각된 보살상 옆으로 천의(天衣)자락이 위로 날고 있는 모습으로 미뤄볼 때 9세기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고 있다. 기단 면석이 허황옥의 인도 도래설을 뒷받침하는 인도 남부의 사왕석(蛇王石) 문화라는 일부의 주장을 부정하는 결과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명월사가 실재했다는 근거로도 인식된다. 가락국 태평성대 이룬 봉황대  이튿날, 수로왕과 허황옥은 현 김해 응달동 태정마을을 거쳐 가락국의 수도 김해로 환궁한다. 현재의 봉황대로 추정되는 곳에 정착한 이들은 평생 해로하며 가락국을 태평성대로 이끈다. 수로왕과 허왕후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던 만큼, 김해엔 강력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글로벌 국가 가야’의 위상을 새길 만한 유적지가 많다. 수로왕릉(사적 제73호)과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이 첫손 꼽힌다. 특히 수로왕비릉이 인상적이다. 수로왕릉에 견줘 규모는 작지만 무게감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허왕후릉 바로 앞에 전시돼 있다.  수로왕비릉 옆은 구지봉이다. 6개의 알에서 태어난 가야의 왕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김수로왕의 건국신화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라는 고대가요 ‘구지가’가 불리워진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 ‘달마야 놀자’의 주무대였던 은하사도 볼만하다.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절집으로, 대웅전 수미단에 쌍어문양이 남아 있다. 아울러 가락국 외부를 둘러쳤던 분산성과 성벽 안쪽의 해은사,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신선을 초대해 국정을 논했다는 초선대, 가락국 왕자들의 탯줄을 묻었다는 태정마을 등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들이다. 글 사진 부산·창원·김해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남해고속도로 서김해으로 나와 금관대로, 분성로를 따라 가면 김해 민속박물관이다. 박물관 주변에 구지봉과 수로왕비릉 등이 몰려 있다. 김수로왕릉과 봉황대 등은 예서 각각 한 블록씩 떨어져 있다. 경전철로 한 정거장 거리다. 망산도를 먼저 보려면 남해고속도로 가락 나들목으로 나와야 한다. 부산 신항 방면으로 가다 창원의 용원버스정류장을 찾아가면 된다. 서울에서 하루 세 차례 고속버스도 오간다. 흥국사는 망산도에서 12㎞ 정도 떨어져 있다. 산속에 있어 걷거나 승용차로 가야 한다. 맛집: 김해 구산동 쪽에 보리밥집 골목이 있다. 김해 문화의 전당 옆 내외동 먹자골목에선 돼지뒷고기를 맛볼 수 있다. 동상동 전통시장 음식단지엔 칼국수로 이름을 날리는 집들이 여럿 늘어서 있다. 수로왕릉 옆 김해 한옥체험관에서 맛보는 한정식도 좋다.
  •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우리 전통 화법 중에 ‘낙화’(畵)라는 것이 있다. 화선지, 나무, 천, 가죽 등의 재료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글씨와 문양을 그려 넣는다. 붓이 아닌 인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화와 공예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서 일반인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낙화를 그리려면 고도의 수련과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따라서 끊임없는 장인정신으로 달궈진 예술 혼이 아니면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끊임없는 정진이 요구된다. 지난 13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25번 국도를 따라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가 누청삼거리 부근에 버섯 모양의 집 두 동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한 집은 ‘청목화랑’이고 다른 한 집은 ‘낙화 체험장’이다. 먼저 ‘청목화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8m 길이의 12폭 병풍 ‘낙화강산무진도’(畵江山無盡圖)가 떡하니 진열돼 있었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를 전통 낙화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정조, 순조 때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인 ‘강산무진도’는 조선 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대 걸작 중의 하나다. ‘어떻게 이런 대작을 인두로 다 그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몇 발자국 옮기자 종이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낙화산수도, 사군자, 연과 버들 등 여러 그림들이 앙증맞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합해서 모두 100여점이다. 김영조(64)씨는 국내 유일의 전통 낙화장인(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22세 때 낙화에 입문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전통 낙화의 맥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42년째 낙화 인생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일까. 그가 오는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해 한국 낙화의 전통미를 한껏 알릴 예정이다. 그토록 소망했던 우리의 전통 낙화가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하여 김씨는 어느 때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화랑 옆에 있는 작업실에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예술도시 아솔로에서 5월 한 달간 열립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조직위원회에서 초청하는 전문작가들만 참가한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낙화가 그들과 함께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애지중지 여기는 작품 7점을 엄선해 전시할 예정이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낙화 기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까지 시연할 예정이다. 그가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지난해 9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탈리아 작가와 에이전시들이 전시된 낙화와 대작을 시연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그를 초청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그려도 타지 않고, 특유의 원근법으로 살아 있는 산수화를 잘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낙화는 중국과 한국에만 있는데 특히 한국의 낙화를 더 알아줍니다. 예술성이 높아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번 아솔로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인 낙화 예술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겠습니다.” 낙화 전수자인 그의 딸 유진씨도 동행해 비엔날레 현장에서 함께 시연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낙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면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에 낙화와 관련해 1598년에 태어난 정부인 장씨를 언급하고 있어 문헌상으로는 400년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822년쯤 밀양 박씨 박창규가 임금님 앞에 가서 시연할 정도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장안 양반집에 낙화 그림이 한 점씩은 대부분 있었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김씨의 스승은 일제강점기 때 활발히 활동했던 운포 백학기와 설봉 최성수의 계보를 잇는 전원 전창진이다. 전원은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한국낙화연구소를 차려 낙화를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출판업으로 전향했다. 당시 전원의 제자가 여러 명 있었으나 김씨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다. 김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충북의 천도교 책임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정치에 관심이 많아 27세 때 부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을 졌다. 이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씨 가족은 서울 뚝섬 쪽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당시 서울시가 무허가촌에 살고 있는 시민을 강제로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장남인 김씨가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원래 김씨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곧바로 종이를 사다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를 도와 바느질도 곧잘 했다. 지금의 예능적 끼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중학교 때에는 동양화를 좋아해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런 김씨를 보고 미술 선생도 미술분야로 진로를 정해 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알아보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낙화연구생 모집’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됐다. 이게 뭘까. 그때만 해도 낙화라는 말이 생소했다. 그러나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내용에 곧바로 모집광고를 낸 종로에 있는 한국낙화연구소로 달려갔다. “그때 장교빌딩 5층에 학원(낙화연구소)이 있었지요. 30여명의 수강생들에게 낙화를 가르치는 전창진 선생님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마음이 금방 끌리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는 집이 성남이라 낙화연구소에서 기숙하며 열심히 배웠다. 스승이 그려준 낙화를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렸다. 낙화의 소재는 주로 동양화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사군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꽃과 새, 산수, 인물 등을 배워 나갔다. 잠 잘 시간을 줄여가며 낙화에 몰두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낙화연구소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30명이 넘던 수강생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아 있는 낙화연구소 수강생 5명과 함께 종로2가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합숙을 하며 낙화를 연습했다. 나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작과 판매를 하며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혼자 남게 된 그는 기념품을 제작해 전국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던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 100여점을 풀어놨는데 10여점이 팔렸다. 이어 속리산 입구에 기념품 상점을 열었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기념품을 팔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소망했던 일, 즉 자신의 공방을 열어 본격적으로 전통 낙화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가서 전통회화를 감상하고 연구를 했다. 회화와 도록에 나와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무에 낙()을 하는 기술과 종이에 낙을 하는 기술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두의 온도가 적당하고 손놀림이 빨라야 종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두의 열로 그림과 선의 음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반복된 노력 끝에 마음대로 종이에 낙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게 됐다. 그는 2007년부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10여 차례 수상을 하게 됐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김씨의 낙화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을 권했다. 결국 심사과정을 거쳐 2010년 10월에 지정됐다. 그동안 그린 낙화는 수천점에 이른다.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산수화와 마애불이 특히 인기가 높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을 국내외에 꾸준히 선보이고 후진 양성에 진력해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영조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낙화에 입문했다.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79년 청목화랑을 개원했다. 2010년에 충북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한국 낙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외 활동 이력으로는 일본 궁기현(宮岐縣) 낙화전(2003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워크숍 참가(2012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통공예작가 워크숍 참가(2013년) 등이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선(200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입선(200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2009년) 등이다.
  • [서동철의 시시콜콜]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

    [서동철의 시시콜콜]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서 도둑이 훔쳐 국내로 들여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당초 조성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절은 충남 서산의 부석사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더욱 유명한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는 다른 절이다. 하지만 관음사의 문화재 안내판조차 불상의 고향을 영주 부석사로 잘못 표기하고 있을 만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한자 이름도 같은 두 부석사(浮石寺)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창건 설화는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의상의 뱃길을 선묘라는 낭자가 바다의 용이 되어 보살폈다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조촐한 서산 부석사에도 677년 의상대사 창건설이 전하는데, 창건 설화도 영주 부석사와 같은 선묘 설화라는 것이 흥미롭다. 실제로 두 절은 닮은꼴이다. 우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부처를 주존으로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주는 무량수전, 서산은 극락전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다르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주존인 무량수무량광불(無量壽無量光佛)은 극락전의 주존인 아미타부처를 뜻한다. 그러니 무량수전이 극락전이고, 극락전이 무량수전이다. 서산 부석사는 무량수각을 별도로 지었다. 두 절은 전망 좋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는 소백산맥 연봉이 바라보이는 안양루가 자리잡았다. 서산 부석사에도 천수만 일대 간척지와 부남호, 그 너머 안면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역시 안양루가 세워졌다. 관음보살이 서산 부석사에서 조성됐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확인됐다. 불상 내부에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음’을 주조한 내용을 담은 ‘결연문’이 들어 있었다. 서주(瑞州)는 고려시대 서산의 지명이다. 불상을 조성한 천력 3년은 충선왕 즉위년인 1330년으로, 천력(天曆)은 원나라 문종의 연호이다. ‘당주(堂主) 관음’이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불상은 높이 50.5㎝ 정도지만, 독립된 법당의 당당한 주존이었다는 뜻이다. 과거 서산 부석사의 큰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관음보살이 주인인 원통전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서산 부석사에는 ‘충남도지’에 나오는 또 하나의 창건설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이 망국의 한을 품고 은거하다 세상을 떠나자 승려 적감이 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창건 설화가 좀 더 사실에 근접했다고 보면, 의상대사와 연결시켜 아미타도량으로 만든 것은 절의 역사를 좀 더 빛나게 하겠다는 후대의 노력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상의 지위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적어도 외국의 작은 절에 선물로 줄 만큼 미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한·일 관계는 어려워지겠지만, ‘왜구의 약탈설’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문화재는 제 자리 있을 때 최고의 가치” “저자세 외교 버리고 문화주권 행사를”

    “문화재는 제 자리 있을 때 최고의 가치” “저자세 외교 버리고 문화주권 행사를”

    지난해 10월 일본 대마도에서 국내 반입된 서산 부석사관세음보살좌상 등 국보급 불상 2점의 환수를 촉구하는 토론회가 30일 오후 ‘서산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봉안위원회’(봉안위) 주최로 한국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이들 문화재 환수를 둘러싼 양국 국민 감정이 악화되면서 반환이 답보상태라는 사실에 착안, 실효성 있는 반환 운동에 나설 것을 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주제발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한다. ●주경 스님(조계종 기획실장)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를 드러내고 종교적으로도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을 갖고 세상의 모든 구석진 곳을 다 살피는 자비의 화신이다. 700년전 서산 부석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주조하고 극락전에 모셨던 조상들도 똑같은 발원을 했다는 사실이 일본에 남아있는 복장기에 분명하게 기록돼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훈과도 같은 그 발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서산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은 본 자리인 서산부석사로 돌아와야 한다. ●김원웅 봉안위 공동대표(전 국회의원) 1965년 박정희 정부 당시 체결된 한일조약에 따라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를 일본 소유로 인정했다.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 불평등한 한일조약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찾기가 한일조약을 재체결하기 위한 국민운동에 시동을 거는 문화운동의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일본 측이 부석사 불상의 정당한 소장경위를 밝히지 못한다면 되돌려줄 수 없다. 우리 정부도 저자세 외교를 버리고 당당하게 문화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김경임 중원대 교수(전 튀니지 대사) 부석사 불상 문제는 오래전 약탈된 문화재가 절도라는 범죄를 통해 원 소유국에 돌아온 국제적으로도 희소한 케이스다. 원만한 해결에 도달해 국제적으로 전범을 세울 필요가 있다. 약탈이 증명된 경우 불법 문화재를 일본 문화재로 등록해 소유한 데 대해 피약탈국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불상 반환에 조건을 붙이는 등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약탈 문화재임을 증명하지 못한 경우에도 이 불상 반환에 앞서 일본정부에 대해 출처를 정식 요구할 수 있다.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교수 현재 대마도에 있는 조선 불상은 거의 화상을 입은 것이고 화상을 입지 않은 것은 당시 고가품으로 교토나 오사카로 방출된 것이라는 데 연구자들은 일치하고 있다. 화상을 입은 것은 왜구의 약탈품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한·일 양국의 교류품은 기증 시기와 주체와 관련한 문헌이 있다. 반면 화상 입은 불상은 아무 증거가 없다. 왜구가 방화하고 약탈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지운 스님(수덕사 주지) 일본 대마도에서 불상이 돌아온 후 도처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일본인들은 반한시위를 하는 등 몰상식한 행위까지 한다. 우리는 불투도(不偸盜)를 계율로 삼는 수행자로 범죄행위에 단호해야 하지만 불망언(不妄言)을 일삼는 행위에도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봉안위 조사에 따르면 일본엔 불상이 방치되고 대세자보살은 불두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표기조차 잘못돼 있다. 현재 나타난 결과만 따져도 참회가 우선일 것이다. ●이명수 새누리당 국회의원 19대 국회와 새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현 시점에서 전 국민적 공감을 높이고 미래 담론 형성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문화재환수국회포럼’을 결성할 것을 제안한다. 18대 국회에서 추진했던 ‘약탈문화재환수특별위원회’ 구성도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 특위가 구성되면 민간단체, 지자체, 교민 등의 자발적인 활동 결집에 용이할 것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vs 양의 탈 쓴 미학자… 야나기 작품전

    “반항하는 그들보다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1919년 3월 2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는 낯선 글이 실렸다. 전날 조선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모두 5차례나 이어졌다.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도 실렸다. “조선과 조선민족에게 느끼는, 누를 수 없는 애정은 예술에서 받은 충동에 의한 것”이란 고백이었다. 글쓴이는 30대의 젊은 미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조선의 공예를 조선인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운 뒤 시야를 가린다며 광화문을 없애려 하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해 철거를 막았고,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세상을 떠난 그에게 한국정부는 1984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야나기에 대한 평가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갈렸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냐, ‘양의 탈을 쓴 일제의 조력자’이냐의 논란이다. 1940년을 전후해 일제에 협력하는 그의 글과 행동이 잇따랐던 탓이다. 그의 아버지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중장 출신. 작고한 최하림 시인은 야나기를 가리켜 “(조선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그 애정을 올바르게 활용할 사상은 없었다”고 꼬집었다. 조선인을 수동적인 민족으로 도식화하고,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부른 것을 놓고도 비판했다. 지난 25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막 올린 ‘야나기 무네요시’전은 이런 점에서 다분히 ‘논쟁적’인 전시다. 아베 총리 등 일본 지도층의 식민침략을 정당화하는 언행이 잇따르는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큰 기획전이다. 류지연 덕수궁관 학예연구사는 “야나기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수년째 기획만 하다가 숙제처럼 미뤄놓은 일을 펼쳐 놨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작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가 수집한 공예품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오는 7월 21일까지 계속된다. ‘논쟁적’ 예술가의 수집품을 얼마나 깊이, 어떤 시각으로 감상하느냐는 관람객의 몫이 됐다. ‘민예(民藝)’를 미술 장르로 끌어올린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조선 공예와 미술, 문학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미학자. 그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건 분명하다. 1부 ‘서유럽 근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선 도예가 버나드 리치와 교류하며 시야를 넓힌 그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에 심취하고 종합예술지 ‘시라카바’를 창간해 조선예술계에 영향을 주던 당시 야나기의 수집품이 공개된다. 2부 ‘조선과의 만남’은 소박한 조선 공예품들로 채워졌다. 개다리소반과 담배상자, 화각화문빗, 철사운죽문항아리 등이 나왔다. 조선의 막사발을 두고 ‘무기교의 기교’라 부르던 야나기가 소장했던 조선백자들이 볼 만하다. 야나기는 27세 때 처음 떠난 조선여행에서 백자를 접한 뒤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너왔다. 3부 ‘주변에 대한 관심과 민예’에선 일본 오키나와, 중국, 만주로 확장된 작가의 관심 영역을 엿볼 수 있다. 민예론 정립의 단초가 된 일본의 목조불상 허공장보살상과 오키나와 지방의 직물 문양 등이 전시된다. 야나기는 ‘일상 공예품에서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예품을 수집해 왔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가 일본 도쿄에 설립한 일본민예관에서 옮겨온 139점이 선보인다. 한국 관련 전시물은 30점 안팎. 야나기는 평생 2만여점의 작품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 2000여점이 한국 관련 작품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자비의 정신 품은 화불, 지친 인성의 쉼터될 것”

    “자비의 정신 품은 화불, 지친 인성의 쉼터될 것”

    “화불(畵佛)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인성의 쉼터가 돼 주는 하나의 경전입니다.” 고려 불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 40여년간 붓을 잡아온 강원 속초시 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혜담 스님은 2일 예술의 전당 V갤러리에서 개막한 ‘고려화불 대전’에 즈음해 화불의 가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스님은 “화불에는 불교의 장점인 자비와 포용의 정신이 표현돼 있다”며 “화불을 대하는 사람들이 이를 느끼고 작은 신심을 일으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고려 불화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고려시대에 발달한 종교미술 장르로, 비단에 색색 돌가루 안료인 석채(石彩)를 이용해 부처나 보살상 등을 그린 것이다. 화려한 색상,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며 특히 옷감의 실 한 올 한 올까지 표현하는 초정밀화로 고려 회화의 정수로 꼽힌다. 하지만 상당수 작품들이 전란으로 소실됐거나 해외로 반출돼 국내에는 그 명맥이 희미한 상태다. 스님의 불화 작업은 출가 이전인 유년기 때부터 시작됐다. 스님은 “뭔지도 모르면서 불화를 그리다 부모님께 꾸중을 듣기도 했다”며 “전생의 습성이 현생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출가 이후 본격적인 작업에 나선 스님은 국내는 물론 해외 곳곳을 돌며 고려 불화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고증을 병행하며 작업을 했다. 그렇게 그가 일생 동안 완성한 작품은 300여점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열 번째 개인전으로 그가 지난 세월 동안 그린 작품 중 고려 불화의 전통을 착실히 이은 화불, 변상도 등 50여점을 전시했다. 특히 백미는 그가 3년에 걸쳐 완성한 5m 크기의 ‘수월관세음보살도’로 고려 불화가 가진 장엄함과 생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스님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고 여기다 제 견해를 담아 표현한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3일까지 이어진다. 스님은 불화 작업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반적인 ‘불화’라는 표현 대신 이를 ‘화불’이라고 표현한다. 스님은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하는 간화선(看話禪)에 화두 삼매(三昧)가 있듯 화불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길”이라며 “작업을 하면서도 부처님의 자비에 머리가 땅밑까지 숙여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앞으로 스님은 전시는 물론 해외 학술대회 등을 통해 고려 불화 알리기에 계속 힘쓸 계획이다. 그는 “화불은 우리의 망각된 역사와 기억을 상기시키는 매체”라며 “조선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로 우리 스스로 버린 화불이라는 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 Ladakh 신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절경을 한곳에 모두 모아놓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추위와 폭설, 분쟁 등의 이유로 긴 세월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 년에 고작 3개월 정도만 여행자들의 자유로운 방황이 허락되는 곳.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는 수식어를 겸허히 인정하게 되는 그곳,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김수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인도정부관광청 www.incredibleindia.co.kr 1 카르길-스리나가르 이동 구간에는 유목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드넓은 자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그들은 소박하지만 실로 위대하다 2 레-카르길 이동 구간에는 웅장한 사막, 협곡, 바위산의 절경이 이어진다 3 꼬마아이부터 10대, 80대까지, 라다크 여행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승려들을 만나게 된다 4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촉’이 무미건조한 라다크 지역에 화려한 색감을 더해 준다 5 라마유르 곰파 축제를 찾은 라다키 할머니들. 잠시 졸기도 하지만 정성을 다해 불교 의식을 참관하고 있다 인도지만 인도가 아닌, 라다크 뉴델리공항에 도착해 새벽녘 몇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낸 후, 인도 국내선을 타고 라다크로 향하는 길. 비행기 안에서 눈을 붙이고 피곤함을 달랠 계획이었다. 하지만 라다크의 레Leh 공항까지 창밖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풍경에 잠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 만년설로 뒤덮인 황홀한 산맥들이 손에 닿을 듯 발바닥을 간질이는가 하면, 벌거벗은 모래산, 바위산이 자신만만하게 요염한 자태를 드러낸다. 게다가 도무지 생명체라고는 존재할 수 없을 듯한 메마른 땅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미지의 초록세상. 이제껏 그 어느 비행기 안에서 봤던 영화보다 한층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거짓말 같은 풍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즈음, 산 위를 배회하던 비행기는 3,500m 높이의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진부하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인 듯하다)과 코를 감치고 드는 알싸한 바람이 반갑게 맞이한다. 인도어를 모르는 가이드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는 중국, 티베트,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여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74년경에야 외부에 개방됐다. 그나마도 1년 중 라다크 여행이 가능한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 정도.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인한 도로 통제 때문에 일반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길어야 고작 3~4달 정도가 전부다. 라다크는 인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하나, 단지 행정구역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라다크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인도와는 내적, 외적으로 참 다른 모습을 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라다크는 아주 오래 전에는 티베트의 일부였으며 10세기경에는 9백년 정도 독립된 왕국을 유지했다. 그러다 19세기 무렵 힌두 도그라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라다크는 인도 라다크라기보다 그냥 라다크다. 역사적이니 행정적이니 하는 복잡한 내용보다는 직접적으로 라다크의 상황을 깨닫게 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게 낫겠다. 우리 팀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라다키(라다크 사람)였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신나는 인도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하도 흥겨워서 “이거 무슨 내용이에요” 하고 물으니 “인도 가수가 인도어로 노래하는 거라 저도 모르겠어요” 한다. 공식적으로 인도에는 14개의 공용어가 있고 영어가 상용어이며 수백 개에 달하는 지역 언어가 있다. 인도어는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주에 속해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갔을 때도 라다크 사람인 가이드가 그들과 언어가 전혀 달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가이드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이방인인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인도 사람들끼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한국인이 그들의 소통을 도와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언어뿐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인도는 힌두교도가 80%가 넘고 이슬람교도가 13% 정도에 달하며 불교도는 1% 정도다. 최근에는 불교도가 기독교도보다도 숫자가 적어진 상황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는 다르다. 카르길Kargil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라다키들이 티베트 불교도이며, 곳곳에 ‘곰파’라고 불리는 불교사원이 가득하다. 1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의 손.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이어가는 라다키들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2 고지대에 위치한 곰파들은 하늘과 맞닿아 더욱 신성하게 느껴진다 3 곰파를 방문하면 마니차(겉에는 만트라가, 안에는 경문이 들어 있는 통으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를 돌리는 경험은 필수. 꼭 곰파만이 아니라 라다크 곳곳에서 마니차를 만나게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라다크의 ‘조용한 곳’ 곰파에 가다 라다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곰파를 둘러보는 것. 해발 약 3,500m 높이에 위치한 레는 라다크의 수도로 예전에는 히말라야 설산을 지나는 대상들이 머물렀던 실크로드 요충지이자 인도에서 불교가 전파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시대 혜초 스님과 <대당서역기>를 남긴 중국 당나라 현장 스님 역시 인도로 가던 길에 이 지역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반증하듯 라다크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곰파가 많다. 그래서 라다크에서 곰파 탐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여행 코스.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이 지역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스폿들이기 때문이다. 곰파는 티베트어로 ‘조용한 곳’을 뜻하는데, 그에 걸맞게 다소 외떨어진 산 위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라다크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헤미스 곰파Hemis Gompa에 이르는 길 역시 만만치 않다. 헤미스 곰파는 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멀리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거의 입구까지 가야지만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사원으로의 접근이 어려울수록 참된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다. 헤미스 곰파는 1630년 남걀 왕조 때 건립됐으며 매년 6월 열리는 ‘헤미스 축제’가 유명하다. 특히 12년에 한 번씩 원숭이 해마다 특별한 ‘탕카(티베트 탱화)’가 공개되는데, 이때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레에서 남쪽으로 17km 떨어진 틱세 곰파Tiksey Gompa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엽서 같은 풍경이 멀리서 봐도 눈에 띈다. 라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파로 손꼽히는데,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그리스 산토리니 같은 분위기도 얼핏 풍긴다. 언덕에 펼쳐진 곰파 자체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내다보는 전망 또한 기가 막히다. 잠시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히말라야 산맥의 운치를 즐겨 봐도 좋다. 라다크에서 가장 큰 20m 높이의 미륵불이 모셔진 전각도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곰파 중에 드물게 평지에 위치한 알치 곰파Alchi Gompa도 인상적이다.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곰파 중 하나로 카슈미르 양식이 티베트 양식과 결합된 유일한 사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독특한 건축 양식은 물론, 내부의 프레스코화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내부는 어둡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벽화와 불상들은 입장객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특히 독특한 3층 건물로 이뤄진 숨첵Sumtsek 전은 꼭 들러 보자. 관세음보살상과 1,000여 개에 달하는 소형 좌불상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스리나가르 고속도로 인근에 위치한 라마유루 곰파Lamayuru Gompa를 찾았을 때는 운이 좋게도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라마유루 승려들이 모두 모여 가면춤을 추는 축제로 어떻게 알고들 모였는지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부터, 동네 꼬맹이들과 할머니들까지,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건하고도 흥겨운 축제 한판이 벌어진다. 승무복의 화려한 빛깔은 색이 바랬어도 공들인 손짓 몸짓 하나하나는 눈부시기 그지없다. 하늘과 가까워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 아래서, 그들의 정성 어린 춤사위를 바라보면서 라다키들에게 종교와 곰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에 만나는 그림은 또 다르다. 이제껏 라다크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푸르른 초원이 등장하며 곳곳에는 꽃까지 피어 있고 멀리로는 만년설의 모자를 쓴 산들이 덤덤하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라다크로 가는 3개의 관문 곰파 여행과 함께 라다크 여행의 핵심은 레-스리나가르Srinagar 이동 구간이다. 라다크 여행은 주로 스리나가르나 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육로가 아닌 항공으로 라다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스리나가르 공항이나 레 공항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의 주도이며, 레는 라다크의 수도이다. 잠무카슈미르 주는 라다크 지역, 잠무 지역, 카슈미르 지역으로 이뤄지는데, 3개 지역 모두 문화와 언어, 생활방식이 다르다. 레와 스리나가르만 방문하더라도 그 차이는 확연하다. 고산지대에 형성된 레는 라다크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돌로 지어진 9층짜리 레 왕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박한 시내에는 작은 상점들과 시장이 들어서 있다. 시장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잊게 해주는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가득하고 불교 관련 용품과 히말라야 지역의 특산품들이 많이 보인다. 또한 티베트 망명자 시장과 네팔 시장 등 소규모 특색 있는 시장들은 라다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황량하고 험준한 땅에 삶의 터전을 꾸려낸 이들이라 그런지 레에서 만나는 라다키들은 당차고도 위대해 보인다. 레와 스리나가르를 잇는 도로는 총 434km 정도로 오가는 데 이틀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레에서 출발하든 스리나가르에서 출발하든 보통 하룻밤은 카르길Kargil 마을에서 묵게 된다. 카르길은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라다크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구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시간이 된다면 카르길 시장에 가보길 권한다. 레의 시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승복을 입은 라마승이나 라다크 전통 복장을 한 여성들 대신 히잡을 쓴 여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곰파와 타르촉(불교 경전 등을 적어 놓은 갖가지 색의 깃발), 라마승들이 가득하던 라다크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한편, 카슈미르 지역 해발고도 1,585m에 위치한 스리나가르는 풍경, 언어, 풍습, 종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라다크와 완전히 다르다. 고도가 레와는 약 2,000m 정도 차이가 나니 풍경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도로 티베트 불교문화가 전반에 깔려 있는 레와는 생활 문화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라다크가 회색빛 천지라면 스리나가르는 초록이 반기는 곳이다. 어둠이 깔릴 무렵 스리나가르에 도착했을 때, 달 호수Dal Lake는 풍선을 든 아이들, 노천카페, 야시장 등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막 라다크를 떠나온 사람이라면 물이 풍성한 호수의 풍경도, 여름밤 호수 주변으로 펼쳐지는 유원지 같은 풍경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고산병 방지를 위한 고도 적응 측면으로 본다면 스리나가르로 들어가 레로 이동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으나 기후, 문화 적응 측면에서 본다면 레로 들어가 스리나가르를 거쳐 델리로 가는 게 나을 듯하다. 레에서 바로 델리나 서울로 간다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몸은 힘들고, 번잡한 도시 풍경에 마음은 답답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레보다는 덥고 델리나 서울보다 시원한 기후에, 레보다는 번잡하지만 델리나 서울보다는 한가로와 어찌 보면 도시인의 라다크 여행에 완충지 같은 역할을 해준다. 1 스리나가르는 라다크와 인접해 있지만 종교도 사는 모습도 아주 다르다. 라다크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인상적이다. 이른 아침, 노를 저어 어디론가 향하는 여자들의 자태가 한 폭의 그림 같다 2 달 호수에서 노를 저어 가는 노인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3 카르길 시장의 이발소 풍경 4 시장의 과일 가게. 푸근한 주인아저씨의 미소가 넉넉하다 ▶travie info 스리나가르 여행의 백미, 하우스보트와 시카라 스리나가르에는 달 호수 등 3개의 유명한 호수가 있어, 물 위에서 즐길거리 또한 다양하다. 그중 하우스보트 체험은 꼭 한번 해봐야 한다. 하우스보트는 이름처럼 배를 집으로 사용하는 공간. 과거 식민지 시대에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물 위에서 배를 집 삼아 살았던 것인데, 지금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많다. 일반 호텔처럼 모던하고 깔끔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고택에 머무는 기분을 낼 수 있다. 물 위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갖가지 보트 상점들을 만나게 된다. 음료수와 과자 등을 실은 매점 같은 작은 배부터, 기념품, 꽃 등을 파는 배들이 오가는 풍경이 정겹기 그지없다. 또, ‘시카라’라고 불리는 작지만 화려한 배를 타고 달 호수를 떠다니는 경험도 멋지다. 1 높은 낭떠러지 길을 지나는 양떼들.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데 양들은 의외로 여유로워 보인다. 양치기 아저씨에 업혀 가는 녀석은 말썽을 핀 걸까, 아픈 걸까? 2 카르길-스리나가르 구간에서는 양떼, 산양떼, 말떼 등 다양한 가축들의 이동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3 도로 양 옆으로 높이 쌓여 있는 만년설이 위용을 뽐낸다 길에서 만나는 최고의 여행 Every Moment, Best Memory 세계적인 명산인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을 끼고 위치한 라다크는 어찌 보면 여행 목적지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고로 목적지를 향한 이동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다. 어디를 향해 가든 여정의 모든 순간이 최고의 여행이 된다. 장시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나도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에서 레로 여행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는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이동했다. 하루는 레에서 카르길까지 234km를, 또 하루는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까지 204km를 이동했다. 이따금씩 쭉 뻗은 도로를 달리기도 했으나 주로 좁고 험한 길을 내처 달렸다. 울퉁불퉁, 덜컹덜컹, 꼬불꼬불, 아슬아슬 달리는 길, 어질어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고지대에서 일어나는 고산병이나 아찔한 질주로 인한 불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지칠 줄 모르고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는 절경이 어지럼증을 배가시킨다. 레에서 카르길로 향하는 첫째 날, 고산지대 사막과 오아시스, 바위산, 협곡 등 거칠고도 웅장한 풍경이 이어졌다. 어느 하나 놓치기 아쉽지만, 특히 포투 라Fotu La(스리나가르-레 고속도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산길로 해발 4,108m)와 나미카 라Namika La(해발 3,700m 높이의 산길)에서는 반드시 차를 세우고 대자연과 교감해야 한다. 그곳에 서면 누구나 마음 속 잡념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자연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튿날, 가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향했다. 초원을 지나 얼마를 달리다 보면 거짓말처럼 빙하가 코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추운 지역, 드라스Drass’라는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길의 클라이맥스는 조지 라Zoji La. 산을 따라 꼬불꼬불 나 있는 이 도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산길이 해발 약 3,528m까지 이어진다. 차창으로 아래를 쳐다보면 끝없는 낭떠러지다. 물론, 안전 펜스 같은 것도 없다. 육로로 스리나가르와 레를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설사 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여행자들이 이 길을 택할 만큼 이 길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길 위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웅장한 자태와 멀리서 바라보는 조지 라 패스, 그 길의 신비로운 그림은 일생에 한번 마주할까말까 한 위대한 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 마음은 수백 번 요동쳤다. ‘바그다드 카페’가 홀홀히 나타날 듯한 풍요롭고(사막은 보통 황량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라다크의 사막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단단한 사막을 만나는 순간, 철퍼덕 주저앉아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콜링 유Calling You’를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봤음 직한 층층이 쌓인 단층과 위용 있는 바위산과 절벽을 불쑥 마주했을 때는 그대로 그 자리에 몇 시간이고 서서 마냥 바라보고 싶었으며, 설산을 배경으로 꽃향기 가득한 푸른 초원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마구 들판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어디 그뿐이랴. 산악빙하를 만지는 순간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버릴 정도로 감동에 벅찼다. 사막, 바위산, 협곡, 초원, 빙하를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접하면서, 눈에 와 닿는 시각적인 풍경에 더해,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 경이로운 질감 때문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1 카르길 마을에서 만난 행복한 여인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머리에 인 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맨발의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 2 카르길 시장 치킨집 앞에서 만난 그녀는 델리대학교에 재학 중이란다. ‘이 집 닭이 정말 맛있다’며 꼭 먹어 보라고 추천한다 3 라다크에서 차들은 모두 과격하게 달린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해맑은 표정의 순수한 사람들 4 라다크로 가족여행 온 시크교 아이들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아찔할 정도로 찬란한 풍광만으로도 감흥은 충분했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여행의 순간을 감동으로 만들었다.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슴에 계속 새겼던 말은 ‘동정금물’. 현대문명사회의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을 감히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질 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나 자신이 물질이라는 잣대로 그들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실수를 범할까 두려웠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덜 가졌다고 해서, 덜 행복하다 그 누가 얘기할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곳 중에 세계에서 시베리아 툰드라 다음으로 춥다는 라다크 지역에서 유목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을 때, 가슴이 울컥했다. 그들은 안락한 보호막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강인하고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초원을 배경으로 한 유목민들의 삶의 모습은 이방인의 ‘철없는’ 시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론 초원을 벗어나자마자 찾아오는 빙하 지역의 풍경은 그들의 혹독한 겨울을 상기시켜 주었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혹독한 겨울을 반증하듯 볼이 발그스레하게 튼 꼬맹이 승려부터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까지…. 자줏빛의 승복 하나로 고귀해 보이던 라마승들.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던 라다키들의 순순한 눈망울. 라다키 전통 복장을 입고 총총히 걸어가던 할머니들. 카르길에서 아기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맨발로 지나던 한 무리의 여성들. 그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보기엔 물질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척박하고 혹독한 터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모두들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라다크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 서울 거리의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들. 그 순간, 라다크를 세계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travie info 라다크 스타일 운전에 익숙해지기 경적을 울려주세요! 처음 라다크에서 차를 타면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트럭이나 버스의 후면에는 ‘Horn Please’, ‘Horn OK Please’, ‘Blow Horn’ 등의 글자가 붙어 있다. ‘please’라는 단어까지 붙여 가며 경적을 울려 달라고 하는 이유는 좁은 길 때문에 아예 왼쪽 사이드미러를 닫고 다니는 차들을 많기 때문이다. 연신 이어지는 경적소리와 추월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다니면서 사고가 발생하거나 시비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Speed thrills but kills 라다크 산길을 달리다 보면 기발한 교통 표지판이 눈에 띈다. ‘스피드는 짜릿하지만, 목숨을 앗아갑니다Speed thrills but kills.’, ‘인생은 짧습니다. 워낙에도 짧은 인생을 더 짧게 만들지 마세요Life is short. Don’t make it shorter.’,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하지만 당신의 목숨은 단 하나A cat has nine lives. But you have one only.’, ‘서두르지 않으면 걱정도 없습니다.No hurry, no worry.’ 등 재치 넘치는 문구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다크 가는 길에 델리 서울에서 라다크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델리Delhi에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인도를 바라보다 인디아 게이트 뉴델리의 중심도로인 라즈파트Raj Path를 따라 한쪽으로는 대통령관저가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 전쟁기념물인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가 자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인도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로,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9만명에 달하는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아픔과 환희를 품고 있는 곳 붉은성 붉은 사암으로 지은 높은 벽 때문에 ‘붉은 성Red Fort’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무굴 제국의 샤 자한 황제가 아그라 성에서의 천도를 목적으로 공들여 지었던 건축물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치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군에 의해 크게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초대 총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곳도 여기다. 시장과 어우러지는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 델리 최대의 이슬람 사원. 사원 주변으로 ‘찬드니 초크Chandni Chowk’라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돼 있는데, 번잡한 시장과 성스러운 모스크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건축 형태로,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역사 꾸뜹 미나르 델리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높이 5층 규모(72.5m)의 웅장한 탑이다. 인도 최초 이슬람 왕조의 술탄이었던 꾸뜹우드딘 에이백이 세운 승전탑이라 꾸뜹 미나르Qutb Minar(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의미 있는 유적지. 승전탑 외에도 모스크 등 여러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흔적만 남았다. 흔적만 남은 유적군을 돌아보더라도 이슬람 왕조의 번성기를 상상할 수 있다. 원래는 탑 꼭대기 전망대까지 입장이 가능했으나 1970년대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내부 관람은 금지된 상태다. 델리에서 만나는 타지마할 후마윤 무덤 후마윤 무덤을 보면 누구나 타지마할을 떠올린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제로 타지마할은 후마윤 무덤Humayun’s Tomb을 모델로 지은 건축물이다. 무굴 제국 왕비 하지 베굼이 남편이자 2대 황제였던 후마윤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묘 건축물로, 페르시아 양식이 곁들여진 무굴 제국 건축물의 초기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된 건물에 흰색 대리석 돔이 어우러진 풍경이 세련미가 넘친다. 건물 안에는 후마윤 무덤 외 150여 명의 무덤이 함께 안치돼 있다. 델리 시민들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정원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건물 안은 대리석으로 된 묘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경건하면서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인도 라다크 여행자를 위한 ★★★★★ Travie writer 김수진의 ‘주관적인’ 여행 정보 Ladakh 1 레의 따뜻한 인심이 느껴지는 휴식처 라피카 호텔Hotel Rafica ★★★☆ 단아하고 정겨운 표정이 레와 잘 어울린다. 작은 정원까지 있어 마치 집 같은 느낌이다. 사장을 비롯해 직원들도 친절하고 정감 있다. 여행 중 궁금하거나 필요한 사항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면 정성껏 응대해 준다. 틀에 박힌 도시 호텔의 서비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이 넘쳐난다. 레의 주요 시장 거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여서, 걸어서 시내를 둘러보기도 좋다. 주소 Fort Road Leh-Ladakh 문의 +91 1982 252258 www.hotelraficaluh.com Ladakh 2 소박한 식당, 화려한 전망 니란자나 호텔 레스토랑Hotel Niranjana Restaurant ★★★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 이름은 호텔이지만 게스트하우스 같은 느낌이다. 간소한 스타일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 라마유르 곰파를 방문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인도 음식과 티베트 음식 등을 판매하며, 점심은 뷔페식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소박한 가게지만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예술이다. 위치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 문의 +91 1982 224555 가격대 1인 기준, Rs.70 정도 Delhi 럭셔리한 궁전에서의 하룻밤 릴라 호텔The Leela Palace New Delhi ★★★★ 40도를 넘는 델리의 한여름 폭염을 피해 릴라 팰리스 호텔에 들어서자 딴 세상이 펼쳐진다. 폭염을 잊게 해주는 시원한 환경과 델리 도심의 소음을 잊게 해주는 고즈넉한 분위기. 인테리어에서 인도 정통 양식을 살린 품격 있는 모던함이 묻어난다. 고급스럽고도 시크한 레스토랑과 바도 유명하다. 인도풍 정원과 전망 좋은 야외 인피니티 풀은 보너스. 주소 Chanakyapuri, Diplomatic Enclave New Delhi 문의 +91 (11) 3933 1234 www.theleela.com Srinagar 호수 위에 떠 있는 특별한 호텔 빌루 하우스보트Habib-Ullah Billoo & Sons ★★★☆ 스리나가르 달 호수에는 꽤나 많은 하우스보트들이 모여 있는데, 여러 업체들이 운영하고 있어 저마다 이름도 다르고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다. 이곳은 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하우스보트로, 내부에서 그 역사를 느껴 볼 수 있다. 달 호수 선착장에서 시카라를 타고 들어가게 되며 보트 안에서 아침,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보트 안에 주방이 따로 마련돼 있어 직원이 즉석에서 식사를 만들어 내놓는다. 하우스보트 특성상 습하고 다소 꿉꿉한 느낌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이므로 놓치지 말자. 주소 Nehru Park, Dal Lake, Srinagar 문의 +91 9858070475 라다크 가는 길 라다크로 들어가는 방법은 항공과 육로 중 선택해야 한다. 델리에서 레로 가는 항공편은 매일 이용이 가능하며 에어인디아, 제트에어웨이즈, 킹피셔에어라인이 운항된다. 스리나가르-레 항공편도 일주일에 1~2회 운항 중이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마날리로 들어가 버스나 지프로 레까지 이동한다. 단,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버스는 6월에서 9월 정도까지만 운행되는데 그나마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전에 확인하고 이용해야 한다. 24시간 정도 소요. 고산병 라다크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여행 전 고산병에 대비해야 한다. 항공편으로 레에 도착하면 첫날은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고도에 적응하는 것이 좋다. 여행시에도 뛰거나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는 행동은 금물. 항상 여유를 갖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고산병 예방약이나 1회용 산소를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주의사항 라다크는 오지이기 때문에 전기, 수도 사정이 좋지 않다. 호텔에서도 가끔 정전이 되거나 수압이 약할 때가 있다. 인도 정부 관광청 Indiatourism 주소 Tokyo Isei Building,7~8Fl.1-8-17,Ginza,Chuo-ku,Tokyo,Japan 문의 +81-3-3561-0651/52 www.incredibleindia.org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리처드 기어 “깨달음은 우리 모두의 몫… 평화롭게 살았으면”

    리처드 기어 “깨달음은 우리 모두의 몫… 평화롭게 살았으면”

    21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가 들썩거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벽안의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 사진전 ‘순례자의 길’ 홍보차 전날 방한한 미국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62)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아내, 아들과 함께 조계사를 방문한 기어는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도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계사에는 50여명의 취재진과 신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하치 이야기 대본 보고 아기처럼 울어” 기어는 대웅전에 들어가 절을 하고 향을 피운 뒤 서원을 적는 원적부에 “세계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썼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도 만나 환담했다. 기어는 티베트에서 찍은 사진을, 자승 스님은 도자기 향로 3개와 염주 등을 각각 선물했다. 기어는 염주를 팔목에 끼며 “염주알이 몇 개냐.”고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화제는 기어가 주연한 영화 ‘하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 갔다. 자승 스님이 “불교의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하자, 기어는 “‘하치 이야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놀라워하면서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너무 감동적이어서 아기처럼 울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어 “뭔가를 기다리는 하치의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을 느끼려 한다.”면서 “스님들이 선방에서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사실 깨달음은 온전히 그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족과 잠실구장서 야구 응원도 탁본 체험에도 나선 기어는 “예전에 한국을 경유한 적은 있지만, 머문 것은 처음”이라면서 “한국 불교가 오래된 전통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힘을 갖고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금동관음보살상을 보고서는 “뷰티풀”을 외쳤다.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이 11세기 최초로 만들어진 대장경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처음이 맞느냐.”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국, 티베트 탱화와 한국 탱화가 다르다고 들었는데 어떤 점이 다르냐.”는 등 질문도 쏟아냈다. 기어는 이날 저녁 가족과 함께 서울 잠실구장을 방문해 LG와 넥센의 경기를 관람했다. 홈 구단인 LG가 증정한 모자를 쓰고 빨간 막대 풍선을 흔들며 응원전도 펼쳤다. ●새달 24일까지 ‘순례자의 길’ 사진전 기어는 22일 기자회견에 이어 23일 경남 양산 통도사와 대구 동화사 등을 방문한 뒤 25일 출국할 예정이다. 그가 티베트 등지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전시한 ‘순례자의 길’은 다음 달 24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기어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삼아 30여년간 불교 수행자의 길을 걸어 왔으며 티베트 독립 지원, 에이즈 예방·퇴치 운동에 앞장서 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대혜보각선사서’ 등 보물로

    ‘대혜보각선사서’ 등 보물로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25일 조선시대 강원(講院)의 학습교재였던 ‘대혜보각선사서’를 비롯해 34건의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대혜보각선사서’는 현존 유일의 고려본으로 조선본의 모본(母本)이 됐던 귀중한 판본이다. 불교학 연구와 서지학 분야 고판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다. 법장(法藏·643~712) 스님이 편찬한 ‘대승기신론의기’는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의 영향을 받아 쓴 것으로,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 간행돼 널리 유통되고 있지만 국내에선 이 책이 고려 말에 간행된 유일본으로 알려졌다. 세종대왕 때 간행된 ‘묘법연화경’은 7권 끄트머리에 명필로 유명한 안평대군이 손수 쓴 발문(跋文)이 수록돼 안평대군의 서법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이다. 지장보살상, 도명존자, 무독귀왕 등 3개의 상으로 이뤄진 경북 봉화군 청량사의 ‘봉화 청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도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진관동 석보살입상 유형문화재로 지정

    진관동 석보살입상 유형문화재로 지정

    서울시는 16일 은평구 진관동 ‘석(石) 보살입상(立像)’을 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10~11세기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석 보살입상은 4등신의 신체 비례와 균일하게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등이 고려 전기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시는 이런 석상은 충청도와 강원도에 주로 분포하며, 서울 지역에서는 드물어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석상 주변에서 ‘청담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이곳이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 언급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터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시는 30일간의 예고를 거쳐 9월 시 유형문화재로 정식 지정하는 한편, 입상의 매몰된 발목 아래 부분을 발굴하고 보호각을 세울 계획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데스크 시각] 법정스님과 ‘기도 세리머니’ 논란/안미현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법정스님과 ‘기도 세리머니’ 논란/안미현 문화부장

    법정 스님의 초재(初齋)가 치러지는 날이다. 떠나면 후한 평을 내놓는 우리네 관행을 걷어내고 보더라도 스님의 생전 언행(言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난(蘭) 얘기만 해도 그렇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봉선사로 갔다. 그 길로 허둥지둥 돌아왔다. 뜨거운 햇볕에 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스님에게 ‘무소유’의 깨달음을 처음 안겨준 일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 일화를 다시 접하며 ‘아, 그랬었지.’ 한다. 버리는 연습을 해서가 아니라, 천성이 게으른 주인 탓에 잎이 축 늘어져 있는 우리집 난들을 떠올리며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를 생각한다. 실없는 생각 끝에 또 한 생각이 따라 나온다. ‘기도 세리머니’ 논란과 봉은사 직영사찰 갈등이다. 조계종은 스님 입적 일주일쯤 전에 대한축구협회에 공문을 보냈다.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은 뒤 기도하는 자축 세리머니를 자제토록 교육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축구협회는 ‘대략난감’, 기독교는 “오지랖 넓은 간섭”이라며 발끈했다. 큰스님을 잃은 슬픔 앞에 논란은 유야무야 덮였다. 불가의 심정이 전혀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넷심’을 좌지우지하는 유명 스타들의 영향력과 상대적 홀대를 느끼게 하는 현 정권의 행보를 보며 착잡함이 쌓였을 법도 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조계종 주장대로 ‘선수 개개인의 종교 못지않게 시청하는 사람의 종교도 존중’하자면 성호를 긋고 빙판장에 들어서는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도 ‘교육 대상’이다. 지난 연말 방송사 연예대상 시상식 때 “(앞에 상 받은) 모든 분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는데 저는 제 마음속에 자리잡고 계신 부처님께 감사드린다.”고 남우조연상 수상소감을 밝힌 탤런트 최준용도 마찬가지다. 수적(數的) 다수가 기독교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법정 스님 말씀대로라면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는 것”이니 공문까지 보내가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할 일은 아니다. 환희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불끈 쥐어지는 두 손을 교육으로 펼 수는 없지 않은가. 신흥종교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톰 크루즈라는 미국 할리우드 대스타를 신자로 만나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렸듯이 차세대 스타 중에 불자(佛子)가 숨어 있을지 또 모를 일 아닌가. 스님은 누구보다 종교 간 벽 허물기에 앞장선 이다. 길상사 관음보살상을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에게 맡겼고, 개원 법회 때는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했다. 그 화답으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스님이 ‘기도 세리머니’ 논란을 접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쓸데없는 일을 했다.”며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쳤을 것이다. 봉은사는 또 어떤가. 일방적으로 직영사찰 전환을 결정한 총무원이나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결사항전하는 봉은사나 ‘돈’ 문제가 중간에 끼여 있어 볼썽사납다. 정치적 배경 의혹까지 가세하는 형국이어서 더 어지럽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한다…맑은 가난은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는 법정 스님의 창건 법문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불교 바깥에서는 스님의 사인(死因)을 놓고도 입방아를 찧는 모양이다. 담배도 안 피우고 청정한 산골에서 산 스님이 웬 폐암이냐는 냉소다. 스님의 세속 조카이자 절집 조카인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이 네 살 때 세속의 아버님이 폐질환으로 돌아가신 집안내력이 있다.”며 불필요한 입길을 차단했다. 단순한 궁금증의 발로인지, 불교를 깎아내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섞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훌륭한 종교는 나눔이요,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는 이해”라고 했던 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일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있다면 스님이 강론(講論)을 마칠 때마다 끝맺음으로 썼던 “나머지는 바람과 풀에 물어볼 일”이다. hyun@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필요한 것들의 소유’를 거부했다. 형식적인 장례 절차를 일절 마련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스님이 숨을 거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11일 조촐한 분향소만 마련됐다. ●길상사 추모·조의 발길 이어져 스님의 투병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지긴 했으나, 최근 안정을 찾았다는 소식이 나왔던 터라 스님의 입적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입적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길상사에는 각지에서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불자들은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의 안내에 따라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설법전(說法殿)에서 삼배를 올리며 조의를 표했다. 스님의 법구가 모셔져 있는 행지실(行持室)에는 일부 스님들을 제외하고 접근이 제한됐다. 길상사에는 산문 밖으로까지 이어진 조문객들의 줄이 밤늦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신도들은 더러 통곡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묵언’ 안내에 따라 침묵 속에 조의를 표했다. 분향소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도올 김용옥씨 등 각계 인사들과 불자들이 찾아왔다. 생전에 길상사에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었다는 진여정(50·여·서울 도곡동)씨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야 하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분향소는 길상사 외에도 스님의 출가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도 마련됐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한편 법정 스님은 종교 간의 담을 허물었을 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 문화 예술계의 많은 인사와 교류했다. 2000년 법정 스님의 부탁으로 길상사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을 조각해 큰 화제를 낳았던 원로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는 “스님은 글재주가 특별나 말보다는 글로 선교를 하시고 신선한 스님의 향기를 만천하에 전파했다.”면서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때는 ‘세상을 향한 원이 있는데 몸이 이렇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녀 ‘봉순이’ 그림을 그린 박항률 화백은 ‘봉순이’ 그림에 얽힌 일화를 전했다. 그는 “스님께 작은 소년을 그려 드렸더니 스님이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소녀가 더 좋아.’라고 하셔서 소녀 그림을 다시 그려 드렸다.”고 회상했다. ●MB 조전… “비우는 삶 소중함 보여주셔” 이명박 대통령은 11일 법정 스님 입적과 관련, 조전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대통령은 조전에서 “법정 큰스님은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오셨다.”면서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 주셨다.”고 추모했다. 이 대통령은 “큰스님께서는 원적에 드셨지만, 수많은 저서와 설법을 통해 남겨진 맑고 향기로운 지혜와 마음은 우리 가슴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면서 “부디 서방정토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김성수 윤창수 강병철기자 geo@seoul.co.kr
  • 연산군때 불상 뱃속에 고려인삼

    연산군때 불상 뱃속에 고려인삼

    현존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11세기 전후 고려시대 인삼이 보살상 안에서 나왔다. 한국전통문화학교(총장 배기동) 부설 전통문화연수원은 2008년부터 보존처리 및 복원 중이던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에서 고려시대 인삼을 비롯해 보석, 곡물, 직물, 유리제품 등 47종의 복장유물(腹臟遺物·불상의 배 안에 넣어둔 유물)을 발견했다고 23일 발표했다. 이 중 인삼은 탄소연대 측정 결과 1060±80년(980~1140년) 것으로 나타나 지금까지 알려진 인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인삼은 전통적인 복장 유물인 오약(五藥·다섯 가지 약재) 중 하나로, 지금까지 조선시대 것은 많이 나왔으나 고려시대 인삼은 전례가 없었다. 불상이 조성된 연대인 연산군 8년(1502년)보다도 400년가량 앞서는 것이다. 이관섭 전통문화연수원 교수는 “당시에도 인삼이 귀해 기존 다른 불상에 복장해 전해진 인삼을 다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인삼이 나온 목조보살좌상은 애초 평안도 천성산 관음사에 모셔졌던 상으로, 최근까지 부산 원광사(주지 도진 스님)에 있었다. 높이는 67㎝. 몸체는 1335년쯤 육송으로, 팔·다리는 1440년쯤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교수는 “후대에 팔·다리를 다시 붙였을 가능성도 있고, 보살상을 만들 때 재활용 목재를 모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복장유물은 원광사 주지 스님의 의뢰로 보살상의 보관(寶冠·보살상 머리에 쓴 관) 및 대좌(臺座·불상이 앉은 자리) 복원을 위해 전통문화학교에서 상태를 확인하던 중 발견됐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긴머리의 北스님들 월급받고 출퇴근

    긴머리의 北스님들 월급받고 출퇴근

    북한과 남한 스님들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바로 남한 스님들은 절에서 ‘수행’을 하지만 북한 스님들은 절에서 ‘근무’를 한다는 점이다. 북한 승려들은 절에 상주하는 수도자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재 관리인·안내인이다. 대부분 결혼을 한 대처승이고 머리도 일반인처럼 기른다. 물론 출퇴근을 한다.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데, 일반 4년제 대학졸업자보다 대우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통일 이후 남북 스님들이 한데 모인다면 이러한 차이 때문에 서로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오랜 분단과 이념의 차이가 우리 역사의 뿌리 가까이에 있는 불교에서마저 차이의 골을 만든 것이다. 대한불교진흥원이 펴낸 ‘북한의 사찰’은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북한 불교와 사찰문화의 실상을 소개한 책이다. 그동안 남북불교 교류 결과 모인 자료를 바탕으로 장용철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과 서유석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집필했다. 이들이 전하는 북한 불교는 우선 규모면에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도량에 불보살상이 안치돼 있고, 최소한의 성직자와 신도들이 왕래하는 곳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북한의 현존 사찰은 64개가 고작이다. 양강도 같은 경우는 도내에 사찰이 중흥사(重興寺) 한 곳뿐이다. 조계종 사찰만 2500여곳(2008년말 기준)에 달하는 남한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북한 불교는 1990년 이후 공식 승려수가 300명, 신도도 1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미니 종교’다. “종교는 인민의 마약”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교관을 북한이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신’이라는 핍박 속에 왜곡되면서도 북한 불교는 끈질지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문화재 영역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북한 불교도 남한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북한은 민족문화 보존과 전통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사찰 자체를 ‘국보문화유물’로 포괄 지정하고 있는데, 전체 국보 중 불교문화재가 42%를 차지한다. 사찰 복구·보수 불사도 활발하다. 주체성·인민성·현대성·역사주의라는 이념에 기초한 4원칙이 있긴 하지만, 조선불교도연맹은 물론 개개 사찰 차원의 불사도 있다. 최근에는 원효 대사 등 고승에 대해서도 재조명 활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2000년 이전까지는 원효에 대해 “자주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비난 일색이었으나 최근에는 논리학이나 철학 등 일부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 연맹 차원의 불교 현대화 사업, 포교 및 역경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사찰’은 1993년 사찰문화연구원에서 펴냈던 ‘북한 사찰 연구’를 개정한 것이다. 남한에도 알려진 고찰은 물론 최근 생긴 현존 사찰들의 현황과 역사, 남북 분단 이후 북한불교의 변화 등도 최신 자료를 통해 다시 짚어내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장안사 등 유명 사찰들의 모습과 유점사 53불 등 북한 유명 불교 문화재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불교가 전해지던 초기에 세워진 광법사 등 유서 깊은 사찰들도 만날 수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3대 기도도량중 하나 ‘보리암’

    3대 기도도량중 하나 ‘보리암’

    경남 남해 금산은 기도 도량 보리암으로도 유명하다. 보리암은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정상 턱밑의 탁 트인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좌우로 금산 38경이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한려수도가 시원하게 펼쳐진 명당이다. 보리암은 2가지 창건설이 전해진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하나다. 또 하나는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짓고 이 산을 보광산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후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1660년(현종 1년) 왕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고 전한다. 보리암은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하고 1969년 중건했다. 문화재로는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과 보리암 앞쪽에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 등이 있다.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으며 삼층석탑도 수로왕 부인이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온 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사학자들은 보리암 3층 석탑은 재질과 양식 등으로 미뤄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이 3층 석탑은 기단 위에 나침반을 놓으면 방위를 가리키는 바늘이 제 맘대로 움직이는 자기난리(磁氣離)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탑 옆에는 1977년에 남해를 향해 세운 해수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보리암은 한 가지 소원은 이루게 해 준다는 영험을 받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일년 내내 중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남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도시와 산] (37) 경주 남산

    [도시와 산] (37) 경주 남산

    천년 고도 경북 경주에서 남산을 올라보지 않았다면 경주를 봤다고 할 수 없다. 남산이 신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곳이 남산 서쪽 기슭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 있는 나정이다. 진한의 6부촌장이 신라를 건국하기 위해회의를 한 곳도 나정이다. 신라의 종말을 가져온 포석정도 남산에 깃들어 있다. 신라 55대 경애왕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다 불시에 쳐들어온 후백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고 천년 신라는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석정이 유흥 장소로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주장이 있다.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57) 소장은 “포석정은 제례의식을 행한 곳이다. 경애왕이 술 마시고 놀다가 죽은 게 아니라 신라의 장래를 위해 하늘에 기도를 드리다 변을 당했다. 화랑세기에도 이런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남산 연구를 위해 1999년 공직을 박차고 나왔다. ●신라의 시작·끝 역사 산기슭에 고스란히 남산만큼 자연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룬 곳은 드물다. 신라 화랑들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혼이 깃들었다고 이곳에 불국토를 세우려 했다. 이를 증명하듯 골짜기마다 석불과 석탑이, 봉우리마다 절터가 있다. 절터 150곳과 석불·마애불 129기, 탑 99기, 석등 22기, 왕릉 13기, 고분 37기 등 모두 694개에 이른다. 산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재다. 2005년 바위절벽 불상이 발견되는 등 지금도 계속 문화유적이 나타나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흔적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남산을 일컬어 ‘산속의 노천박물관’이라 한다. 이 때문에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1985년에는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됐다. 2000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주시가 2052년까지 54년 계획으로 1200억원을 들여 남산을 살리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도 이 산이 품은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커서다. ●불상 대부분 8세기 중반 이후 세워져 남산에 왜 문화유적이 많은 걸까. 왕족과 귀족들이 불국사, 천황사, 황룡사 등 큰 절집에서 예불을 올릴 때 민초들은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의 불상은 대부분 이름 없는 석공들이 무딘 정을 들고 마음을 새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석굴암처럼 완벽하고 잘생긴 석불은 그리 많지 않다. 미완의 작품이 많다. 불상의 뒷모습 처리도 깔끔하지 않다. 동네 아저씨 같은 서글서글한 부처상이나 옆집 아줌마 같은 넉넉한 보살상, 깊이 새기지 못하고 절벽에 윤곽만 새겨놓은 선각불 등이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그래서 정일근 시인은 경주 남산이란 시에서 남산을 ‘신라인의 마음을 싣고 흘러가는 한척의 배’라고 표현했다.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향토사학자 고(故) 윤경렬 선생은 “남산을 보지 않고서는 신라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소장은 “남산의 불상은 대부분 8세기 중반 이후 새겨졌다. 이전에는 왕권이 안정돼 백성들이 남산에서 불상을 새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후 국가통제가 약화되면서 남산의 불상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남산 불상을 백성들만 새겼다고 볼 수 없다. 먹고사는 데 여유가 있어야 불상 새길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귀족들도 남산을 찾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망산의 남산 향한 절개 고속도로가 끊어 남산은 돌산이다. 동서로 4㎞, 남북으로 8㎞로 뻗은 이 산에는 2개 봉우리가 오롯이 마주 보고 있다. 금오봉(해발 468m)과 고위봉(494m)이다. ‘고위’는 주변 봉우리보다 높다고, ‘금오’는 황금빛 거북 모양의 봉우리라고 해 붙여졌다. 남산은 어느 동네에나 다 있다. 경주 남산도 임금이 있는 반월성의 남쪽에 있다고 붙여졌다. 남산은 재미난 탄생 비화가 있다. 옛날 부부신이 경주에 내려왔다. 이들은 경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사랑을 속삭였다. 이때 빨래를 하던 동네 아낙네들이 거대한 부부신을 보고 “산봐라.”라고 외쳤다. 깜짝 놀란 부부신은 그 자리에 굳어서 남신은 남산이, 여신은 망산이 됐다고 한다. 망산은 주변 많은 산의 유혹에도 끄떡없이 남산만 바라보는 지조를 지켰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망산의 상당 부분이 잘려나가 남산에 대한 일편단심은 지킬 수 없게 됐다. ●남산의 주봉은 금오봉 남산의 등산로는 다양하다. 이 중 가장 많이 오르는 코스가 삼릉에서 냉골계곡으로 오르는 코스다. 삼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을 지칭한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여름에도 찬바람이 분다는 냉골계곡을 따라 오르면, 상선암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제법 경사지지만 길지는 않다. 상선암 위에는 몸통뿐인 마가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능선을 따라가면 고위봉보다 높이는 낮지만 주봉인 금오봉에 도착한다.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오른쪽 용장골로 내려서는 길. 벼랑 끄트머리엔 산 전체를 기단 삼아 세워진 용장사지 3층석탑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래쪽 등성이에는 황남빵을 쌓아놓은 듯 삼륜대석불좌상이 있고, 옆쪽 바위벽엔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용장사지는 옛 영화를 상징하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진 채 적막하다. 산대나무 터널을 지나 용장계곡을 통해 하산한다. 가족들과 함께 남산을 찾은 정모(47·대구 수성구 지산동)씨는 “남산에 10번째 왔는데 알면 알수록 풍성한 느낌이 드는 명산”이라고 말했다. 연간 남산 탐방객은 60만명에 이른다. 법정탐방로는 7개이지만 샛길이 100여개라 탐방객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공원 경주사무소는 지난달 30일 동남산과 삼릉 등 2개 지점에 뒤늦게 전자계측기를 비치했으나 어림도 없다. 법정탐방로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남산에 드리운 조선 그림자 경북 경주 남산이 신라의 문화유적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조선의 그림자도 드리워 있다. 남산에서 가장 큰 절집 용장사다. 지금은 안내판만 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책을 다 불사른 뒤 평생을 유랑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생육신인 김시습은 이 절에서 30세 때부터 7년간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창작했다. 금오신화는 설화를 소설형식으로 이끌어 올린 것인데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만복사의 저포 놀이’, ‘이생이 담너머를 엿보다’,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 ‘남염부주 이야기’, ‘용궁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 등이다. 이 소설은 귀신과의 사랑, 염라왕과의 토론, 용궁에서의 생활 등을 다뤘다. 김시습은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자 ‘설잠’이라는 이름으로 중이 돼 방랑의 길을 떠났다. 10년간 떠돌아다니다가 세조 10년(1465) 경주에 도착, 용장사에 정착한다. 매월당도 용장사 앞에 매화가 있어 지은 이름이라 한다. 세조가 김시습의 거처를 알고 데리고 오도록 했으나 응하지 않으려고 용장사 건너편 골짜기로 몸을 숨겼다. 그래서 이 골짜기를 은적골이라고 한다. 37세 때에 경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뒤 성종 12년(1481) 47세 때 환속해 안씨와 결혼했다. 성종 24년(1493) 충남 홍산에 있는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치니 59세였다. 용장사 위쪽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군데군데 깨진 삼층석탑은 자체로야 별다를 게 없지만, 바위에 올라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탑의 모습은 병풍처럼 펼쳐진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며 위엄을 갖추고 있다. 삼층석탑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란다.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모든 석탑은 하층 기단이 있는데 이 삼층석탑만은 암봉에다 바로 앉혀 놓았다. 따라서 암봉이 하층 기단인 셈이다. 암봉이 해발 350m는 되니 세계 최고의 석탑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경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도시와 산] (33) 포천 명성산

    [도시와 산] (33) 포천 명성산

    명성산은 경기 포천 산정호수를 품에 안고 강원 철원까지 내닫는다. 해발 923m로 울음산이라고도 불린다. 산행 도중 한눈에 들어오는 호수의 전경이 넋을 놓게 한다. 봉우리가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른 새벽이면 하얀 물안개가 인근 사찰과 폭포와 어우러져 전설처럼 피어오른다. 밤에는 호숫가 산책로에 수은등이 켜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드라마 태조 왕건으로 유명세를 치른 명성산을 주민들은 울음산이라고 부른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왕건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고 패주하며 산과 함께 울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다 멈춰 서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도 있다.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해 명성산(鳴聲山)이 됐다. ●궁예가 눈물 뿌린 산 명성산은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84㎞ 떨어져 있다. 암릉과 암벽으로 이뤄졌어도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다. 덕분에 정상에서 바라다보이는 동편 분지에는 억새가 무성해 가을이면 억새꽃축제가 열린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12봉 능선과 북쪽으로 오성산, 동북쪽으로 대성산, 백암산, 동쪽으로 광덕산, 동남쪽으로 백운산과 국망봉을 모두 볼 수 있다. 이 산의 남서쪽 기슭에 산정호수가, 북쪽에 용화저수지가 있다. 산행은 등룡폭포 입구 매점과 식당 앞을 출발,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밭~삼각봉~정상~산안고개~산정호수로 나오는 6시간 코스와 가든식당~비선, 등룡폭포~억새밭~삼각봉까지만 갔다가 자인사로 하산하는 3시간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된다. 등룡폭포계곡 코스는 자인사 기점 코스보다 30~40분이 더 걸린다. 책바위 암릉 코스는 자인사 기점 코스와 소요시간이 거의 같지만 산세가 가팔라 체력소모가 많은 편이다. 산정호수 인근에서 시작되는 산행은 초입부터 좌판을 벌인 막걸리와 파전에 한눈팔기 십상이다. 음식점들 뒤로는 유럽풍 펜션이 들어차 있다. 가족단위 등산객들이 주말이면 진을 친다. 음식점 골목을 벗어나면 왼쪽 비탈길을 따라 책바위로 오르는 난코스와,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는 직진코스로 길이 나뉜다. 억새가 무성한 팔각전망대에서 모두 만나지만 책바위 산행은 가파른 암벽이 곳곳에 있어 안전로프를 잡아야 하는 구간이 많다. 노약자나 여성 등산객들이 등반을 포기하고 뒤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아 주의해야 한다. 산정호수를 내려다보려면 책바위를 올라야 한다. 암벽에 설치된 철계단에서 내려다보는 호수 전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책바위까지는 1시간가량이 소요되며 급경사가 많다. 팔각전망대까지는 1시간30분가량 더 가야 한다. 대부분 등산객은 책바위보다 계곡 산행을 선호한다. 경사가 완만한 데다 단풍이 선명하고 비선폭포와 등룡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온통 단풍과 숨겨진 폭포의 연속이다.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줄곧 계곡길로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다. 명성산의 단풍은 유난히 붉은 것으로 정평이 났다. 폭포는 물빛을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비취’, ‘벽록’이라고 표현하는 게 이해가 간다. 평평하면서도 돌 사이로 군데군데 철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한다. 지압로도 있고 운동시설과 피크닉장이 조성됐다. 2시간쯤 오르면 명성산 동편 억새밭이다. 10월이면 절정에 이른 억새꽃이 이 일대를 하얀 솜털로 덮는다. 서리 몇번 내리면 금세 떨어지는 게 억새꽃이라고 하지만 매년 열리는 억새축제에는 8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린다. 명성산을 찾은 이들이 다 억새를 보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새 산행은 삼각봉까지 오른 뒤 올라간 길로 되돌아오는 코스와 자인사로 향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데 자인사 등산로는 다소 힘든 편이다. 등룡폭포 상부인 안덕재는 군부대 사격훈련장이어서 일부 등산로가 폐쇄되기도 한다. 산정호수 매표소(031-531-6103)에 전화해 입산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게 좋다. ●하산이 즐거운 산정호수 급경사를 지나 하산길에 만나는 자인사는 왜소한 대웅전보다 턱없이 큰 석불이 웃음을 자아낸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에 오른 후 자신의 시호를 따서 세운 조그만 암자다. 산불로 소실돼 충렬왕 3년(1227년)에 재건됐고,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4년에 다시 지었다. 관세음보살상과 석탑이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았고 경내 샘물은 맛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곧이어 산정호수가 지친 등산객을 맞는다. 이름 그대로 산속의 우물이다. 주변의 높은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호수와 조화를 이룬 수도권 최고의 호수다. 호수를 빙 둘러가는 5㎞ 산책로는 1시간정도 소요된다. 바닥이 대부분 돌길이어서 비 오는 날에도 질퍽거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산정호수 밤 경치를 보고 하룻밤을 묵은 다음 명성산과 자인사를 다녀오는 1박2일 코스가 인기다. 명성산은 서울 상봉·수유·동서울터미널에서 신철원, 동송, 운천행 버스를 이용해 운천에서 하차, 산정호수행 버스를 타면 등산로 입구까지 15분가량 소요된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억새냐 갈대냐 명성산의 고민 억새와 갈대는 구별이 쉽지 않다. 경기 포천 명성산 팔각정에서 억새밭을 보고 “갈대다.”라고 외치는 등산객이 심심찮게 있을 정도다. 생김새는 물론 꽃피고 지는 시기까지 비슷해서다. 같은 벼과의 1년생 풀이지만 다르다. 가장 쉬운 구분법은 억새는 산이나 비탈에, 갈대는 물가에 무리를 이룬다는 점이다. 갈대는 산에서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물가에서 자라는 물억새는 있다. 억새는 뿌리가 굵고 옆으로 퍼져 나가는 데 비해 갈대는 뿌리 옆에 수염 같은 잔뿌리가 많다. 억새의 열매는 익어도 반쯤 고개를 숙이지만 갈대는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키도 차이가 있다. 억새는 대부분 120㎝ 내외로 갈대보다 작다. 갈대는 2m 이상 큰다. 그러나 억새도 일조량이 풍부하거나 영양 상태가 좋으면 갈대보다 더 크기도 한다. 색깔로도 구분한다.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을 띤다. 가끔 얼룩무늬가 있는 게 있다. 억새는 억새아재비, 털개억새, 개억새, 가는잎 억새, 얼룩억새 등 종류에 따라 색깔이 다소 다르다.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을 띠고 있다. 구별이 쉽지 않아 억새와 갈대는 역사적으로 혼동돼 쓰이기도 한다. 전남 장성의 갈재는 갈대가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노령(嶺)이라고도 부르지만 실은 억새다. 억새는 종류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10여종 이상 서식한다. 자주억새가 많다. 흰색꽃을 피우며 잎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거치가 있어 스치면 피부가 베일 정도다. 억새는 으악새라고도 불린다. 억새꽃은 그 생김이 백발과 비슷해 쓸쓸한 정서로 와닫는다. 그래서 황혼과 잘 어울린다. 억새꽃을 가장 멋지게 감상하려면 해질 무렵 해를 마주하고 봐야 한다. 억새 명소로는 명성산과 정선 민둥산, 밀양 사자평 등이 있고 갈대는 충남 서천 한산면 신성리, 해남 고천암 갈대밭 드라이브, 충주 비내섬 등이 있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최동호 오솔길 산책] 국립중앙박물관 예찬

    [최동호 오솔길 산책] 국립중앙박물관 예찬

    개관 100주년을 맞이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은 나의 오랜 취미 중 하나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박물관에 갔다든가 화가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이상적 여성의 모델을 이집트 고분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외국 여행지에서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다. 이번 개관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역사의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요 미래의 문화를 창조하는 영감의 산실로 탄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뿌리를 순종 황제가 1909년 설립한 ‘제실박물관’에서 찾았다는 것도 박물관의 역사적 정통성을 찾았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발상이다. 박물관을 죽어 있는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유구한 영속성을 생각하지 않는 단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대표적인 명품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소장지인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관람객이 붐비고 있었다. 수많은 국보적 명품들이 눈길을 끌었지만 진본을 볼 수 있는 천마총의 ‘천마도’ 앞에 서자 흥분과 감회가 교차하여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첨단장비에 의해 투시된 ‘천마도’를 종전과 달리 새롭게 볼 수 있어 더욱 반가웠다. 박물관이 이제 국민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느껴져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어느 날 당시 경복궁 자리에 있던 중앙박물관에 갔더니 일본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말소리가 점령군처럼 복도에 가득 차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올해 초 발굴된 미륵사지 ‘석탑사리구’나 미국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수월관음도’의 우아한 보살상은 물론 이중섭의 동자 그림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청자상감포도무늬동채주자’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중섭 그림의 원천이 우리의 청자상감의 그림에 있었다는 점을 지나쳐 가기 어려웠다. 1966년 석가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나왔던 ‘무구정광다라니경’도 관심을 끌었는데 여기서 한국적 서체의 고대적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한국 고유의 서체는 압도적으로 중국필법의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그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복천오부인 86세 초상’도 선이나 색감 그리고 표정이 생동감을 주었다. 250여년 전 한국 여성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유명한 청자나 금으로 만든 왕관 못지않게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삶이 묻어나는 유물들이 우리들의 영감을 실제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20세기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경험했고 그런 까닭에 전통과 과거를 부정하고 밖에서 역사적 난관을 극복하는 동력을 찾고자 했다. 역사의 단절을 극단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한국 고유의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한국은 언제나 남을 뒤쫓는 문화적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선인들의 창조적 지혜를 배워 여기에 첨단 기술을 응용하는 능력을 발휘할 때 한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선진국이 될 것이다. 최근 외국 대사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관람하는 장면을 지면에서 보았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분명히 다른 예술적 형상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거기서 오늘날 한국의 디지털적 탈근대 첨단산업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뿌리 깊은 문화적 전통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박물관에 가 보라. 거기에 있는 과거의 유산이 죽어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문화적 명품이 여러분을 맞이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늘은 물론 내일의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 [도시와 산] (29) 전주 고덕산

    [도시와 산] (29) 전주 고덕산

    고덕산(高德山·603.2m)은 ‘천년고도’ 전북 전주시를 지켜온 산이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과 대성동,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 등에 걸쳐 있다. 전주시가지의 높은 건물이나 막힘이 없는 곳에서 보면 남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정상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시내에서 가깝지만 교통이 약간 불편해 가까우면서 먼 산처럼 느껴진다. 사람 발길이 뜸한 만큼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고 남고산성, 관성묘, 남고사 등 문화유적과 명승지가 많아 전주시민들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있다. 가을이면 활엽수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단풍이 빼어나고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고덕산은 덕이 높은 산이란 뜻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대산(孤大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高德山) 또는 고달산(高達山)으로 기록돼 시대마다 달랐다. 고달이란 최고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높다리기’라고도 불렸다. 산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기품이 있어 “덕이 높다.”라는 고덕이 어울리지만 유래는 알 수 없다. 높다라기산에서 차음됐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비롯해 전란이 닥칠 때마다 고덕산과 그 줄기에 있는 남고산성은 전주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고덕산 줄기에는 둘러볼 만한 유적들이 많다. 관성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을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관성묘는 고종 32년(1865)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이 제안해 각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양쪽 벽에 ‘삼국지연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다. 남고진 사적비에는 남고산성의 내력이 담겨 있다.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각 봉우리에서는 한옥마을을 비롯한 전주시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만경대에는 고려 말기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1337~1392년)가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돌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몽주는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년)가 전승 기념으로 전주 오목대에서 큰 잔치를 베풀면서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하자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 올라 기울어가는 고려를 걱정해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전해내려온다. ●문화유적의 보고 남고산성 고덕산에 오르다 보면 남고산성(사적 제294호)을 거치게 된다.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고덕산 줄기인 남고산(220m) 정상을 중심으로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 쌓았다. 남고산성은 문화유적의 보고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867~935년)이 쌓았다. 이 때문에 견훤산성 또는 고덕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견훤은 전주의 동서남북을 제압하기 위해 산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각각 사찰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고산성은 폭 3.4m 높이 1.2m, 길이 5.3㎞로 축성됐으나 현재 3㎞ 구간만 밝혀졌다. 전주에서 남원, 순창으로 통하는 교통상 요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곳에서 끝까지 대항했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당시 전주 부윤 이정란이 왜군을 막을 때 쌓았다. 1811년(순조 11년) 관찰사 이상황이 증축, 이듬해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해 완공했다. 전주시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108억원을 들여 성곽길이 2950m 가운데 1546m를 복원했다. 이 산성은 조선 순조 때 수축해 남고진을 두었고 효종 때 설치한 중진영, 숙종 때 쌓은 위봉산성과 함께 전주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산성 안의 남고사 앞쪽에 남장대, 뒤편에 북장대를 두었다. 남장대 아래 계곡에 군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고 산성별장 1명이 22명의 지휘관과 1400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주둔했다. ●사방 탁 트인 조망권 장관 고덕산은 전주시내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산코스로 유명하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3~4시간이면 정상을 밟는다. 남고산성 성벽 위를 걷기도 하지만 정상에 이르는 길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코스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동서학동 좁은목 약수터 방향, 평화동 흑석골 방향, 전주교육대학 뒤쪽 등이다. 예전에는 약수터를 경유하는 코스를 많이 선택했지만 평화동에 아파트 밀집지역이 형성되면서 학산 쪽에서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아졌다. 문화유적탐방을 나서는 등산객들은 아직도 전주교대 뒤쪽길을 선택한다. 어느 코스든 비교적 길이 평탄하고 볼거리가 많아 지루하지 않다. 초입부터 중턱까지 구간은 소나무숲이 우거져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여성 등산객들이 선호한다. 비교적 경사가 급하지 않던 산행길은 남고산성 북동쪽 성곽 뒤로 올라서면서 급격하게 고도를 높인다. 성곽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는 전주시가지가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고덕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지막 정상부근 오름은 만만치 않다. 아마추어 등산가들은 10여분 정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짝 힘을 써야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압권이다. 북서쪽으로는 발 아래 전주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지고 익산시까지 내려다보인다. 동쪽으로는 기린봉, 치명자산 너머 진안 마이산이 가물거린다. 남동쪽으로는 아득히 지리산 연봉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모악산의 자태를 살펴볼 수 있다. 고덕산은 최근 들어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등산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적한 산행을 즐기려는 등산객과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아졌다. 남쪽 기슭에는 전원생활을 추구하는 동호인들의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남고사도 가보세요 남고사(南固寺)는 전주시민들에게 친근한 사찰이다. 역사적 의미가 큰 남고산성 안에 있는 절로 전주 사람들은 초·중·고 시절 한두 번쯤은 소풍을 간 경험이 있다. 예로부터 해질녘에 들리는 남고사의 종소리를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전주시내 남쪽에 위치한 작은 사찰로 접근성이 좋아 주민들이 산행할 때 자주 찾는다. 산 아래 주차를 하고 20분 정도 걸어 오르면 도달한다 남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보덕의 제자 명덕화상이 668년 창건했다. 보덕이 고덕산 남쪽에 경복사를 창건해 열반종의 근본 도량으로 정했는데, 명덕화상이 남고사를 창건해 그 말사의 자격으로 열반종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때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라고 불렸다. 남고연국사가 남고사로 표기된 것은 견훤이 산성을 쌓고 사고(四固) 사찰을 지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까지는 교종 계통의 사찰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선·교 양종을 통합하면서 정한 48개 사찰에 들어가지 못해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임진왜란 이후 선종이 크게 신장되면서 선종계 사찰이 됐다. 1680년(숙종 6년)에 관음전이 들어서고 1881년(고종 18년)에 중건했다. 1981년 대웅전, 1984년 삼성각, 1985년 관음전을 중건했다. 1992년 관음전과 요사가 불에 탔고 1995년 관음전을 인법당으로 복원하고 1996년 목조관음보살상을 모셨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삼성각, 사천왕문 등이 있다. 관음전은 1680년 창건돼 1992년 10월7일 불에 탄 것을 1995년 복원했다. 사천왕문에는 다른 절에서처럼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고 사천왕을 그린 탱화만 둔 점이 특이하다. 옛 절터 남고사지는 현재 대웅전 오른쪽 앞 건물자리다. 도 기념물 제72호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제모습 찾은 낙산사 베일벗다

    제모습 찾은 낙산사 베일벗다

    2005년 4월5일 강한 바람을 등에 업고 강원도 일대를 삼킨 화마(火魔)는 천년고찰조차도 피해갈 수 없었다. 1300여년 전 의상대사의 원력이 서린 강원 양양 낙산사는 그렇게 산불 앞에 모든 걸 내어주고 말았다. 불이 지나고 경내에 남은 것이라고는 사천왕문과 대성문의 일부, 그리고 불길 속에서 스님들이 안고 뛰어나온 ‘건칠관음보살상’뿐이었다. 그후 이어진 4년간의 복원불사. 잿더미 속에서 낙산사는 사부대중의 염원을 모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7년 1차 복원불사에 이어, 2차 복원불사 회향식을 앞두고 6일 찾아간 낙산사는 고졸함과 신생의 탄력을 두루 갖춘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정념 주지스님 “사람·자연·문화의 조화” “낙산사는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8번이나 대화재가 났습니다. 특히 13세기 몽고침략 시기와 6·25전쟁 때 많은 건물들이 소실됐죠. 하지만 부분부분 이뤄진 전각 복원은 체계성이 없었습니다.” 낙산사 주지 정념(47) 스님은 “기존 건물이 밀집돼 있고 바람길을 막아 불이 쉽게 번졌던 것”이라고 했다. 이에 복원불사는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길, 바람길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지형을 따르다 보니 ‘ㄱ, ㄷ’자가 아닌 형태의 전각이 나오기도 하고, 요사채들은 서로 거리를 넓혀 숨통을 텄다. “사람과 자연, 문화가 하나 되는 사찰을 만들고 싶다.”는 주지 스님의 바람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복원불사는 우선 국립문화재연구소의 2년여에 걸친 발굴조사로 시작됐다. 조사를 통해 2005년 화재는 물론 6·25전쟁으로 소실되기 이전까지의 흔적도 찾아냈다. 이에 주법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은 조선초기의 모습을 따랐고, 유구의 흔적이 일관적이지 않은 다른 전각들은 18세기 김홍도가 그린 ‘낙산사도(山寺圖)’를 바탕으로 그대로 복원을 했다. 160억원 가량이 들어간 대규모 불사. 주지 스님은 “화마의 아픈 기억이 있는 만큼 화재 대책도 단단히 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원통보전 등 주요 건물에는 수막시설을 설치하고 사찰 곳곳에 10여대의 방수총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 건물마다 방화사 및 방화수, 소화기를 설치하고, 건물 주변에는 화재에 강한 나무들을 식수했다. ●새로운 수행분위기·지역사회와의 소통 힘써 새로 태어난 낙산사는 옛 모습을 찾아가는 것 외에도 새로 수행 분위기를 만들고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심검당’ 등 정진 공간을 만드는 한편, 지역아동센터·유치원 등도 함께 지어 운영하고 있다. 사찰 무료입장, 커피·국수 무료 제공도 오래전부터 해온 일. 또 이번에 끝난 2차 불사에 이어 부속·편의시설을 짓는 3차 불사를 진행, 템플스테이체험관 등도 지을 예정이다. 그리고 정념 스님은 낙산사의 역사 보전을 위한 ‘특별한 준비’도 했다고 한다. 낙산사의 역사와 함께 복원 불사에 관한 기록을 담은 타임캡슐. 여기에는 언젠가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꼭 불사에만 써달라는 당부와 함께 금과 불사비용을 함께 넣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걸 원통보전 보살상 밑에 묻었다.”고 귀띔하면서 “그걸 열 일은 앞으로 절대 없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양양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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