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애꾸눈 누렁이/류근원
인삼밭을 다녀오신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대문 밖에서 무겁게 날아왔어요.
“어휴, 이놈의 산돼지들 때문에 고생고생 지은 인삼 농사 다 망치겠어.”
아버지는 대문 안 외양간의 누렁이를 한참동안 바라보셨어요.
“누렁아, 어쩔 수 없다. 네 운명이려니 생각하렴.”
이상한 일이에요. 아버지는 요즈음 누렁이만 보면 뜻 모를 말과 함께 혀까지 쯧쯧 차시거든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 누렁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환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언덕 너머 인삼밭으로 향했어요. 가시철조망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온 산돼지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거였어요.
“어휴, 이럴 수가? 정말 아버지 가슴속이 새까맣게 타고도 남겠다.”
환이는 타달타달 인삼밭을 뒤로 했어요. 근처 인삼밭을 지키는 사냥개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무섭게 터져 나왔어요.
“우리도 저런 사냥개가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
환이가 마악 대문을 들어설 때였어요. 안방에서 부모님이 주고받는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그래서 결정했소. 누렁이를 팔아서 인삼밭을 지킬 사냥개를 사기로.”
“그래도 정이 흠뻑 든 누렁이인데.”
“지금 팔아야 그나마 제값을 받을 수가 있다는구먼. 땀 흘려 가꾼 인삼밭을 지킬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순간 환이는 귀를 의심했어요. 잘 못 들었나 싶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한번 쑤셔도 보았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소. 인삼밭을 지키기 위해선……. 내일 소장수가 올거요.”
환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양간 앞에 섰어요. 누렁이가 얼굴을 흔들어 댔어요. 잘랑잘랑 워낭소리가 바람을 타고 집안을 날아다녔어요.
“아, 아버지의 어쩔수 없다는 말이 누렁이를 판다는 뜻이었구나. 누렁이, 불쌍해서 어쩌지?”
환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누렁이의 워낭 소리도 밤 이슥토록 잘랑잘랑 들려왔어요.
이튿날, 소장수가 누렁이를 보러왔어요.
소장수와 눈길이 마주치자, 누렁이는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쳐댔어요.
“허허, 겁이 꽤 많은 황소로군. 고개 좀 이리 돌려 보거라. 허허, 이리 돌려 보라니까.”
소장수는 누렁이의 코뚜레를 잡고, 인정사정없이 흔들다가 깜짝 놀랐어요.
“아니, 무슨 황소가 이래? 허허, 애꾸눈이잖아? 소장수 30년에 애꾸눈 황소는 첨 보네.”
소장수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어댔어요. 아버지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셨어요.
“하하, 애꾸눈이면 어떻습니까? 힘만 세면 최고지.”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힘이 좋아도 눈 하나론 논밭에서 제구실을 못하는 법이죠. 잘 아실 텐데?”
“그, 그, 그런 것은 못 느꼈는데요. 논밭을 다른 집 황소보다 몇 배 더 잘 갈아요. 이웃 마을에서도 누렁이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허허, 그렇게 시치미를 떼시면 흥정이 어렵겠는데요.”
환이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쾅쾅 뛰기 시작했어요. 제발 흥정이 깨지라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흥정이 어렵다는 소장수의 말에 아버지는 금세 한풀 꺾이고 말았어요.
“다른 황소보다 조금 낮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두 분 사이에 몇 번 실랑이가 오가는 듯하더니, 이내 만족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어요.
“잘 쳐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계약금으로 이걸 받으시고, 나머지 돈은 일주일 후 황소를 실어가는 날 드리도록 하지요.”
두 분은 연신 만족한 웃음을 흘리시며 대문 밖으로 나갔어요.
‘흑, 아무리 말을 못 알아듣는 동물이라지만. 누렁이 앞에서 그렇게 무서운 소릴 주고받으시다니.’
갑자기 아버지가 미워지는 환이에요. 그러나 잠시 뿐이었어요.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인걸 뭐.’
환이는 힘없이 외양간으로 들어갔어요. 그때까지도 누렁이는 외양간 모서리에 머리를 틀어박고 있는 거였어요.
“누렁아, 나야. 고개를 이리 돌려봐, 응? 다 내 탓이야, 미안해.”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누렁이는 막무가내였어요. 꿈쩍도 하질 않는 거예요.
환이는 뒷동산 언덕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2학년 때였어요.
텔레비전에서 먼 나라 용감한 투우사를 보게 되었어요. 멋진 칼을 찬 투우사가 소를 눕히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는 거였어요. 환이도 멋진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빨간 보자기를 준비하고, 지게작대기를 칼로 대신해서 송아지인 누렁이 앞에 섰어요.
“자, 누렁아. 덤벼, 덤벼 보라구. 어서!”
그러나 누렁이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오히려 환이를 이상스레 바라보는 거였어요. 지게작대기로 꾹꾹 찔러도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는 누렁이였어요. 그때 환이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게 있었어요.
‘그래, 누렁일 화나게 만들면 나에게 덤벼들 거야. 히히히.’
환이는 누렁이 꼬리에 성냥을 팍 그어댔어요.
“우우우! 우우우!”
누렁이는 무서운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어요. 뜨거움을 못 참고, 날뛰던 누렁이는 나뭇가지에 그만 오른쪽 눈을 찔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오른쪽 눈은 영원히 뜨질 못하게 되었어요. 환이는 너무나 무서워 영원한 비밀로 감추고 말았어요.
그 후로 누렁이는 이상스레 변하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나아갈 때는 얼굴을 이리저리 번갈아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었어요. 논밭을 갈 때도 행동이 굼뜨고 똑바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몰라요.
“미안해, 누렁아! 날 용서해줘!”
환이는 맞은 편 산에 대고 수없이 메아리를 날렸어요.
이튿날부터 환이는 누렁이를 데리고 산언덕으로 향했어요.
잘 드는 톱으로 누렁이의 코뚜레를 잘라냈어요.
시냇가에서 누렁이의 엉덩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똥딱지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어요.
하루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어요.
소장수가 누렁이를 데려가기로 약속한 하루 전날, 환이는 누렁이를 데리고 인삼밭으로 향했어요.
“누렁아, 미안해. 부모님 몰래 인삼을 캐서 널 줄게. 내 마지막 선물이야, 맛있게 먹었음 좋겠어.”
인삼밭이 환이의 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눈에 익은 울타리가 아니었어요.
“헉, 저, 저, 저럴 수가! 가시철조망이 주저앉아 버렸잖아!”
어미 산돼지와 새끼들이 가시철조망을 무너뜨리고, 인삼밭을 마구 파헤치고 있는 거였어요.
“야, 이 나쁜 놈들아. 저리 가지 못해!”
환이는 돌멩이들을 주워 산돼지들에게 쉬지 않고 던져댔어요. 갑자기 어미 산돼지가 몸을 휙 돌리는 것이었어요.
“아, 아, 안 돼! 아버지, 어머니!”
그때였어요. 환이 앞으로 무엇인가 휙 지나치더니 쿵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는 거였어요.
“음머어! 음머어!”
산자락 하나가 무너져 내릴 듯한 누렁이 울음소리가 터졌어요.
산돼지들은 숲 속으로 허둥지둥 꽁무니를 빼고 말았어요.
누렁이의 애꾸눈 밑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어요. 부딪칠 때, 산돼지의 송곳니에 찔린 게 분명했어요. 환이는 옷을 찢어 누렁이의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어요.
“누렁아, 고마워. 너 아니었음, 너 아니었음……. 미안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달려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마나 놀라셨는지 얼굴이 하얘졌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을이 내릴 때까지 가시철조망을 다시 일으켜 세웠어요.
“누렁아, 고맙구나. 많이 아팠겠다. 자, 가자.”
잘랑잘랑 워낭 소리가 환이의 귀에는 누렁이의 울음소리로 들려오는 거였어요. 서쪽하늘엔 누렁이의 핏빛 같은 노을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어요.
누렁이와의 마지막 밤이 되었어요. 환이의 방으로 달빛이 환하게 스며들었어요.
밤 이슥토록 누렁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어요. 이따금씩 워낭 소리가 잘랑잘랑 들려왔어요. 환이는 귀를 막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워낭 소리가 종소리보다 더 크게 환이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놓는 거였어요.
환이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외양간으로 향했어요. 마당으로 숨이 막힐 듯 쏟아져 내리는 달빛, 달빛. 누렁이는 하염없이 보름달만 쳐다보고 있는 거였어요.
“누렁아, 우린 내일이면 헤어져야 해. 사랑해!”
환이는 누렁이의 목을 끌어안고,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물었어요. 누렁이의 긴 혀가 환이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 쏟아져 나오는 꽃향기, 상큼한 풀잎 냄새…….
환이는 무엇엔가 쫓기는 모습으로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어요.
이튿날 누렁이를 싣고 갈 트럭이 왔어요. 환이는 팔려가는 누렁이를 차마 볼 수 없어 마당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 소장수의 웃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어요.
“자, 나머지 돈입니다. 누렁이를 싣고 가겠습니다.”
“저, 저, 미안합니다. 누렁이는 팔지 않겠어요. 계약 위반금을 달라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안 파신다니요? 누렁이 값을 잘 쳐드리는 건데, 이거야 어디 원 쩝쩝.”
한참 후, 트럭은 털털털 소릴 내며 돌아갔어요.
환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방문을 쾅 열어젖뜨렸어요. 누렁이에게 맨발로 달려갔어요.
“누렁아, 우리 아빠 최고지?”
누렁이가 음머어!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 잘랑잘랑 워낭 소리도 ‘그래그래’ 라고 들려오는 거였어요.
●작가의 말
애꾸눈 누렁이는 개구쟁이 시절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누렁이는 죽고 없지만, 아직까지도 제 가슴 속에 살아있답니다. 밤 이슥토록 잠 못 이룰 때에는 음머어 소리도 듣고, 잘랑잘랑 워낭 소리를 아직도 듣고 있답니다. 누렁이에게 미안한 마음, 아무리 퍼내도 샘물처럼 줄지 않고 있어요. 혹시 누렁이가 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밤하늘도 많이 쳐다본답니다.
●작가 약력
충북 충주 출생. 1984년 아동문학평론 동화 추천완료. 계몽아동문학상, 새벗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톨스토이 문학대제전 아동문학대상,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주요 동화집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 ‘눈자니 마을의 동화’ 등. 충남 보령 개화예술공원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 동화비가 세워져 있음. 현재 경기 화성시 비봉초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