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병합
    2026-07-14
    검색기록 지우기
  • 공천
    2026-07-14
    검색기록 지우기
  • 정부3.0
    2026-07-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528
  • 年 8조원규모 韓國 전력시장 공략

    ‘한국 전력시장을 잡아라’ 내년부터 본격화될 발전부문 민영화를 앞두고 외국 대형 에너지회사들의 국내 진출이 가속화하고 있다.연간 8조원대에 이르는 국내 전력시장이 민간에넘어갈 경우 최대의 ‘황금시장’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엔론·제너럴일렉트릭·AES(이상 미국),달키아·사이드(이상 프랑스),트랙터벨(벨기에),파워젠(영국) 등 외국의 대형 전력 및 전력장비 회사들이국내기업과 합작이나 지사·사무소 등 형태로 한국에 진출했다. 오는 25일 치러질 안양·부천 열병합발전소의 최종 입찰이 그 첫 격돌장이어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이 두 곳의 발전소는 한전이 처음으로 매각하는발전사업 부문이다. 외국회사들은 단독,혹은 국내기업과의 컨소시엄 형태로 입찰 참여를 추진중이다.최종 입찰에서는 지난달 1차 입찰을 통과한 4개 업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일 전망이다. 엔론은 올초 SK와 가스판매 전문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이번에 SK㈜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한다. 영국의 브리티시 가스도 대성산업과 공동으로 입찰에 나서고,프랑스 최대의 에너지회사인 비벤디그룹의 달키아와 사이드는 LG정유 자회사인 극동도시가스와 손을 잡았다.AES는 거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단독으로 입찰할 계획이다. 이들은 각기 자국에서 수위를 다투는 대형회사들로 막강한 자금력과 기술력·영업력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이들이 입찰에 열을 올리는 것은 연간 60만t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사용하는 두 발전소가 발전부문은 물론,향후 가스공사 민영화 과정에서도 유리한 고지가 될 것이란 계산에서다. SK㈜ 관계자는 “세계 대형 에너지회사들이 거의 포화상태에 달한 자국내시장보다는 아시아쪽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라면서 “특히 국내 발전부문은 시장규모가 크기 때문에 민영화 진행 과정에서 이들의 치열한 각축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연세대 이영욱 교수팀“은하수 탄생 비밀 규명”

    지구가 속해 있는 우리 은하가 외부의 은하와의 충돌과 병합을 거쳐 생성됐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은하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연세대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 이영욱(李榮旭·38)교수팀은 태양계에서 1만5,000광년 떨어진 ‘오메가 센타우리(ω-Centauri)’천체가 지금까지 알려졌던 대로 구상성단으로 불리는 나이많은 별들의 집합이 아니라 100억년전우리 은하와 충돌,현재 중심 핵만 남은 파괴된 은하라는 사실을 최초로 규명했다고 4일 밝혔다. 우리 은하(은하수)의 형성에 이같은 위성 은하들의 충돌과 합병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규명한 획기적인 연구결과로 영국과학저널 ‘네이처’는 최신호(4일자)에서 주요 논문으로 채택,세계적인 천문학 권위자인 시드니반덴버그박사의 해설논문(review)과 함께 게재했다. 은하간 충돌에 의한 우리 은하 형성을 뒷받침하는 외부은하 발견은 지난 94년 7만8,000광년 떨어진 궁수자리 왜소은하를 발견한 영국 천문학자들에 이어 2번째지만 ‘오메가 센타우리’가 발견되면서 이제까지발견된 은하 중지구와 가장 가까운 은하라는 점이 확인됐다.지금까지 우리 은하는 우주공간성간물질이 중력에 의해 수축되면서 형성됐다는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나이번 연구결과는 우리 은하가 작은 은하들과 충돌하면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은하 형성이론의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이 교수는“이번 성과는 뛰어난 관측결과와 새로운 디지털영상처리기법,이를 해석할 수 있는 확고한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 가능했다”고 말했다. 함혜리기자 lotus@
  • [의열 독립투쟁] (10)田明雲·張仁煥 의사

    국권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운 1908년 3월23일 이른 아침.미국 샌프란시스코페어몬트호텔 앞에서 한 한국 청년이 몸을 숨기고 호텔 안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이 시각 한 대의 승용차가 호텔 정문에 정차하자 일본인 관리로 보이는,실크 모자를 쓴 두 사나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더니 트렁크 몇개를 들고나와 승용차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이 한국인 청년은 급히 인근 페리 정거장으로 향하였다.그는 오전 9시30분 정각에 발차하는 미국 대륙횡단열차와 관련해 ‘볼 일’이 있는 듯했다.이윽고 9시 15분경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역 구내 한 쪽에 모인 일본인 무리에서 ‘반자이(만세)’ ‘반자이’하는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그들은 한 미국인의 전송차 나온 일행들이었다. 함성소리에 싸여 한 미국인이 탄 승용차가 정거장 앞에 멈추어서자 샌프란시스토 주재 일본총영사 고이게 조소(小池張造)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뒤따라 내린 미국인은 얼굴에 상처투성이였다.9시20분 개찰이 시작되자 승객들이역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미국인도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서자 이때 철탑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국인 청년이 품에서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첫 발은 불발이었다.다시 두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 역시 ‘찰칵’소리만 날 뿐 불발이었다.자신의 권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한국인 청년은 권총을 거꾸로 고쳐잡고 차에 오르려는 미국인을 맹타하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미국인이 몸을 피해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첫 발은 한국인 청년의 오른쪽 어깨를 빗맞고 지나갔고 두번째,세번째 탄환은 미국인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쓰러진 미국인은 친일파 스티븐스과 한국 청년 전명운(田明雲·1884∼1947)의사였다.총을 쏜 사람은 또다른 한국 청년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사였다.이른바 ‘스티븐스 처단의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의 애국청년들이이국 땅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전명운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일찍 양친을 여의고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가업인 포목전을경영하던 장형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전 의사는 약관 20세인 1904년 2년제 신식학교인 한성학원을 수료하면서 시국과 개화에 눈뜨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맹투사로 소문나 있던 전 의사는노상에서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모욕하는 일본인들을 응징한 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신부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다시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 화물선 스타피시호의 취사장 인부로 고용된 전 의사는 대만·일본 등을 거쳐 그해 9월 하와이에 도착했다.이곳에서 1년간 농장 인부로 일하던 전 의사는 이듬해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철로공사장 노동자,채소 행상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민노동자와 몇몇 유학생,우국 망명가들이 모여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기관지 ‘공립신보’를 통해 교민들의 세력을 규합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전 의사 역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3월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이자 친일파인 미국인 스티븐스가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다는 정보가 교민사회에 입수되었다.스티븐스의 귀국은 대외적으로는 일제가 다년간의 공로를 인정,특별휴가를 준 것으로 돼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띤 귀국이었다.당시 미국 내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격운동이격화돼 미 의회에서 관련 법 제정을 추진하자 일제가 그를 긴급 파견,미 국회의원과 유력자들을 만나 법안 제출·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3일 요코하마를 출발해 귀국 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선상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3월20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등 친일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내용은 미국 신문에 보도돼 재미교포 독립운동가들의 격분을 샀다. 공립협회 회원들은 스티븐스가 머문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발언내용 취소를 요구하며항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응징했다.이날 저녁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은 스티븐스 구타 경과보고를 겸한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는데 이자리에서 전 의사는 자신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장인환 의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전·장 두 의사는 23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가는 대륙철도를 타려던 스티븐스에게 세 발의 탄환을 날렸다.피격 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긴급 치료를 받았으나이틀 뒤인 25일 복부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3월27일 전 의사는 병상에 누운 채 살인미수 혐의로,장 의사는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교민사회에서는 두 의사의 무죄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호소하는 한편 변호사 비용 등 경비 모금에 나섰다.공립협회 회원이자 두 의사 후원회 임시서기인 송종익(宋鍾翊)은 현지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의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이라고 밝히고 재판 과정을 독립전쟁의과정으로 인식해줄 것을재판부에 호소하였다. 3차에 걸친 예심을 마치고 6월27일 전 의사는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장 의사는 8개월 동안의 재판 끝에 12월23일 ‘애국적인 발광(發狂) 환상에의한 2급 살인죄’로 판정,극형은 면하고 이듬해 1월2일 열린 언도공판에서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장 의사는 1919년 1월17일 가출옥으로 석방됐으며1924년에는 자유의 몸이 됐다. 전 의사보다 8세 연상인 장인환 의사는 1876년 평양 출신으로 장 의사 역시 조실부모하고 청소년기를 불우하게 보냈다.각지를 전전하며 상점점원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잡화상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평양에 살면서 청일전쟁을직접 체험하였다.1904년 하와이로 이민,사탕수수 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 1906년 캘리포니아로 옮겨 노동자생활을 하던 장 의사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국권을 박탈하자 ‘대동보국회’ 가입을 계기로 항일 대열에동참하였다. 한편 전·장 두 의사의 의거는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의 성과로기록되고 있다.우선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국내 민족진영에활기를 불어넣어 일시 수세에 있던 의병투쟁을 공세로 전환시켰다.또 두 의사의 의거·재판을 모두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국내외에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의거 이후 전 의사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현지에서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교유한 적이 있는데 전 의사의 의거 이듬해인 1909년 안 의사의 이토(伊藤博文) 처단은 전 의사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미국인 친일파를 처단,한국 청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두 의사는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의거 후 재판에서 무죄 석방된 전 의사는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의 압박감에서 이름마저 ‘맥 필드’로 바꾸고 9월 연해주로 일시 망명했다가 191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그때 부인과 양자로 입양한 조카를 만났으나 두 사람 모두 1927년 사망해 두 딸을 어렵게 길렀다.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노년까지 항일활동을 하던 전 의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7년 11월18일 63세로 LA 노인아파트에서 타계해 갤버리 천주교묘지에묻혔다. 94년 전 의사의 유해는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 의사는 전 의사보다 비극적인 노년을 보냈다.1919년 1월 가석방된 후 실의와 병고를 이기지 못한 장 의사는 1930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묻혔던 장 의사의 유해는 75년 국립묘지로 이장돼 사후 45년 만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됐다.두 의사는 모두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田·張의사가 처단 스티븐스는... 전명운·장인환 두 한국 청년이 처단한 미국인 스티븐스는 어떤 인물인가. 처단될 당시 일제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는 1852년 미국 오하이오 태생으로 19세때 오버린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학 법리과·외교학과를 졸업했다.처음 미 국무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1년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 인연을맺게 됐다. 이듬해 이곳을 사직한 그는 주미 일본영사관의 서기관으로 변신하였고 이듬해 다시 일본 외무성고문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일제의 침략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그가 한·일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2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체결때이다.일본측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따라 내한한 그는 이노우에를 뒤에서 자문한 공로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드 강화조약에서 일본이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4년 한·일간 체결된 ‘외국인 고문에 관한 규정’에 근거,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초빙됐다. 그는 ‘몸’은 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일본을 위하는 자였다.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는 물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이후 그는 한국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고 전·장 두 의사에게 처단될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한 그의 사체는 4월2일 이 병원을 출발,6일 워싱턴에 도착됐다.장례는 8일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워싱턴 온비루묘지에 묻혔다.이튿날 거행된 추도식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조화와 일황의 조전 및 조화,그리고 200여명의 조문객이 참여한가운데 거행됐다. 일본 정부는 장례식에서 스티븐스에게 훈1등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족에게조의금으로 15만원을 전달했다.사후 발견된 그의 예금통장에는 2만6,000여원의 거금이 입금돼 있었는데 이 돈은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친일 대가로 받은것이었다. [정운현기자]
  • 올 외국인투자 100억弗 돌파

    한해 외국인 국내투자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산업자원부는 2일 “올 1∼10월 외국인투자유치 규모가 지난해 같은 기간의 55억2,000만달러보다 85.3% 많은 102억4,900만달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62년 외자도입을 허용한 이후 연간 외국인 투자유치가 100억달러를 넘어서기는 처음이다. 연간 외국인투자유치 규모가 100억달러를 넘은 나라는 18개국에 불과해 한국은 올해 세계 20대 외국인투자유치국 대열에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외국인투자유치 규모가 늘어난 것은 외국인투자촉진법 제정,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투자박람회 개최 등 다양한 외국인 투자유치 노력이 이루어졌기때문이라고 산자부는 설명했다. 올해 외국인투자는 지역별로 유럽연합(EU)이 51억2,100만달러로 가장 많았고 미국 20억3,800만달러,일본 10억7,300만달러 등이었다.박봉규(朴鳳圭)무역투자심의관은 “5억∼6억달러 규모의 안양·부천 열병합발전소 등 1억달러 이상의 대형 외자유치건이 아직 30∼50건 남아있어 올해 목표 150억달러 달성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의열 독립투쟁](8)김익상 의사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10분경.일제의 조선 통치의 거점인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현 중구 예장동 일대)의 조선총독부 청사(구 한국통감부 청사)2층에서 굉음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터진 이 사건으로 일제가 초긴장함은 물론 경성(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다.일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않았다. 일제로서도 이 사건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총독부 관리나 고용원이 아니면 임의로 출입을 못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인물이,그것도 벌건 대낮에 총독부 청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사건의 진상은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육중한 몸체의배 한 척이 상하이 부두에 입항하였다.상하이는 국제도시인 만큼 평소에도중국인·조선인·서양인·인도인·일본인 등 여러나라 사람들이 들끓었다.특히 이 날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상하이에 들르기로 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후에 수상 역임)를 맞기 위해 중국의 고관,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직원,각국 신문기자,일본거류민이 부둣가로 몰려나와 더욱 혼잡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나카는 출영나온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중국인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세 발의총성이 울리자 총을 든 청년은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그러나불행하게도 총탄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총탄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다나카 앞을 급히 지나던 젊은 서양 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청년은 다나카가 맞은 줄 알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놀란 다나카일행은 황급히 달아났다.그런데 이번엔 양복을 입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달아나는 다나카를 권총을 쏘고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이 총탄도 역시 다나카에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도 불발되고 말았다.다나카는 두번의 피습을 용케피했고 두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중국 옷을 입은청년은 오성륜(吳成崙·본명 李正龍)이었고,양복을 입은 청년은 김익상(金益相)이었다.6개월전에 일어난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은 김익상 의사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김 의사의 의거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상하이에서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의사는 당시 28세로 아내와 딸 하나를 조국에 두고 온 몸이었다. 서울 태생인 김의사는 15세때부터 서울 용산역 철도노동자,용산전기회사,황해도 수안의 광업회사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일본인 밑에서 일한 까닭에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인들의 습관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어 거사에 나섰을때 능숙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 곳곳의 일경들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김익상 의사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장차 비행사가 돼 폭탄을 싣고 일본을 향해 투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유년시절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멸시·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김 의사도 일본인밑에서 냉대와 학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김 의사는 이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고통이란 사실을자각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국을 떠나,1921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만난 뒤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조국독립을 위해 일제 통치거점에 폭탄을 안기자는 의열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의사는 거사를 자청했다.1921년 9월10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개와 권총 1정,탄환 100발 및 현금 200원을 받아 베이징을 출발했다.김원봉 이하 동지들이 베이징역두에 나와 장도에 오르는 김 의사를 전송하였다.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壯士一去兮 不復還일세(壯士가 한번 가면,돌아오지 못하는구나)”하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김 의사는 “쓸데없는 소리 말게.이제 1주일이면 내 넉넉히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잘 차려놓고 기다리게”하고 껄껄 웃으면서 화답하였다. 그처럼 담대했던 김 의사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경계망을 돌파한 뒤 서울로 들어와,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구내로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후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홀연히 김의사는 청사를 빠져 나왔다. 다나카 저격직후 체포된 김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됐고 1923년 11월 6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황태자(후에 昭和천황이 됨)의 결혼식으로 일제로부터 은사(恩赦)를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또 1932년 2월에는 만주국 독립기념 명목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1942년 김 의사는 30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래 20년만에 50대 중노인이 돼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왔다.서울로 돌아온 김의사는 해방직전한 일본인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그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재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있었던 자리 인근(현 예장동 숭의여자대학 입구)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이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 하나만외롭게 서 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 -金의사 투탄 조선총독부는…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광화문 청사가 아니라 남산에 있던 초기 청사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일제는 한국통치기관으로 한국통감부를 만들었다. 청사는 남산 중턱에 있던구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했다.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찬탈한 일제는 남산 통감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간판을 내걸고 이 건물을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1926년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까지 16년동안 이곳은 일제 조선통치의 본거지였다. 김익상 의사는 바로 이곳에 전기수리공으로 변장,잠입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 6월 2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되어 10년만인 1926년 10월 1일 ‘시정(始政)기념일’을 맞아 준공하였다.일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만엔을 들여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을 조선의 영구통치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다.그러나 신청사 준공 19년만에 패퇴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림교회 터키서 선교활동 나선다

    한국의 광림교회(담임목사 김선도)가 개신교 발원지이자 현재 이슬람권인터키 안디옥에 첫 교회를 마련,본격적인 선교에 나선다. 광림교회는 지난 95년부터 이방선교를 위해 터키 안디옥 지방에 교회를 짓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하던중 전 프랑스대사관이었던 건물을 최근 매입,내년 상반기중 예배당과 신학교 등으로 운영한다고 15일 밝혔다.지하1층,지상2층인 이 건물은 원래 터키 중앙은행으로 쓰이다 수년전 프랑스에 팔려 대사관으로 활용됐다.프랑스는 그러나 3년전부터 이 건물을 비워놓고 있다.이 건물은 터키문화재여서 광림교회측은 건물외벽은 그대로 둔채 내부만 교회 등으로 개조해 쓰게 된다. 안디옥 지방은 1939년까지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소독립 공화국(하타이공확국)으로 발족했으나 6개월뒤 터키 공화국에 병합된 곳.터키인을 중심으로쿠르드인 아랍인 수리아인 유대인 등 30여만명이 살고 있으며 인구의 85%가회교를 믿어 개신교가 쉽게 발붙일 수 없는 이슬람권이다. 안디옥은 로마의 수리아 속주의 수도이자 로마제국에서 세번째 큰 도시였는데 사도바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써 최초의 이방선교를 시작한 지역으로 전해진다.사도바울이 세웠던 동굴교회는 광림교회가 건립할교회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해 서기1세기까지 존재했으나 회교도가 장악하면서 교회는 사라지고 지금은 관광지화 됐다. 김성호기자
  • [21세기 초일류 전문기업] SK(주)

    국내 최대의 에너지·화학업체 SK㈜는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유공’의후신이다.지난 80년 당시 선경그룹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 이 회사의 주력은 단연 에너지사업이다.지난해 11조원의 총 매출액중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화학 등이 나머지 20%를 점하고 있다. 김한경(金翰經)사장은 “에너지사업 가운데 SK㈜는 정유와 LPG 부문에서 국내 시장점유율이 각각 37%,44%를 차지,정상을 지키고 있다”면서 “단일시설로는 세계 최대규모인 울산 정유시설(하루 81만배럴 처리)은 세계에 내놔도하나도 손색이 없는 업체”라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김 사장은 “매출액 중심의 기업이 생존하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2000대 초 에너지·화학은 물론 첨단업종을 망라한 기업가치 위주의 일류기업으로탈바꿈하는 게 전략적 목표”라고 강조했다. ?수직계열화 생산체제 SK㈜는 에너지 회사로는 드물게 유전(油田)개발에서합성수지까지 수직계열화된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지난 83년부터 시작,예멘의 마리브 광구 등 23개국 48개 광구에 지분을 참여했다.국내업체중 가장 많은 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으며 올해 배당으로 받는 원유는 1,000억원어치에 이를 전망이다. 윤활유부문은 세계시장에서의 선전이 기대된다.지난 95년 윤활유의 원료인윤활기유 ‘YUBASE’를 국내 최초로 생산,화제가 됐다.고보상(高輔相) 윤활유 사업담당 상무는 “이 윤활기유는 최고등급을 받아 세계 윤활유시장에서기존 기유를 대체할 유망제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내수위주의 정유사업과는 달리 유화제품은 총 매출액의 70% 안팎을 수출이차지한다.아스팔트 제품의 경우 중국이 수입하는 외국제품 가운데 최대 점유율(27%)을 기록하고 있으며 분해성 플라스틱 등 기능성 합성수지 분야는 미국,유럽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새로운 도전과 대응 그러나 SK㈜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에너지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들어가면서 수익률이 떨어지고 에너지 시장개방에 따른 세계적인 메이저 업체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은 기존 사업과의 연계속에서 진행되고 있다.에너지 분야의 경우 액화천연가스(LNG)와 발전부문으로 확대할 계획이다.지난 1월 미국의 최대 가스업체인 엔론사와 합작,SK-엔론을 출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LNG를 독점수입,공급하는 한국가스공사 인수전에 참여할 계획이다.또 한국전력이 매각을 추진중인 안양·부천 열병합발전소 입찰에도 응찰했다. ?21세기 정밀화학 도약 제약,생명공학 등 정밀화학으로의 진출은 기존 석유화학의 연구능력을 토대로 한 것이다.지난 5월 간질치료제 개발에 성공,계약금 3,900만달러와 약품 판매액의 일정비율을 로열티로 받기로 하고 미국 제약회사 존슨 앤 존슨에 팔았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분야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e(electronic)-SK’라는이름으로 추진중인 이 사업은 사이버몰,여행,부동산,교육 등 9개분야 별로사이버 거래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동운(鄭東運) 종합기획실장(상무)은 “시장환경의 변화에 따라 비즈니스영역을 첨단업종으로 확대하고 마케팅 중심의 회사로 변모하기 위한 혁신작업을 진행중”이라고 설명했다. 김환용기자 dragonk@ *21세기 일류가 되려면 제약,생명공학분야는 이제 초기단계다.90년을 전후해 연구를 시작했고 연구개발 투자도 활발하다곤 하지만 거액의 투자에 비해 성공률이 높지 않다.한솔창업투자 조병식(趙炳植) 상무는 “SK㈜가 ‘확률의 게임’인 이 분야에서 성공가능성이 높은 주제를 얼마나 순발력있게 선정,벤처성격의 투자패턴을소화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이라고 전망했다. SK㈜가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액화천연가스(LNG)나 발전분야 진출에성공해야 한다.그러나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정부의 한국가스공사,한전민영화 작업이 일정대로 추진될 지 아직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전자상거래 분야도 아직은 국내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기존 고객정보를 활용할 수 있고 국내 업체로는 선발주자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초기투자부담을 어떻게 이겨나가느냐는 것이 과제다.
  • 발전소등 주요시설 지진에 완전 무방비

    군산·영월 화력발전소와 송유관공사의 송유관로에 내진설계가 전혀 돼있지않은 등 주요 시설들이 지진피해 예방에 취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회의 김명규(金明圭)의원은 29일 국감 질의자료에서 산업자원부 산하기관에 대한 지진 안전대책 점검 결과,한국전력의 군산·영월 화력발전소는내진설계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송유관공사의 남북송유관 1003㎞,경인송유관 55㎞ 등 땅속에 묻힌 송유관로1,058㎞도 내진설계가 아예 되지 않았다. 가스안전공사의 가스배관 9만3,000㎞도 지진이 발생하면 건축물의 파괴에따른 배관의 파손으로 화재·폭발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에너지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대전 3·4공단 열병합발전소 열수송배관 19㎞도 내진설계가안된 것으로 조사됐다. 수력발전소들은 대부분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6 이하를 기준으로 설계됐으며 특히 보성강댐,화천댐,괴산댐,무주양수댐,강릉댐 등은 진도4 이하로 설계됐다. 박선화기자 psh@
  • 진주名所에 ‘친일파 이름’ 눈살

    ‘진주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시 옥봉동 뒤벼리 인근 암벽 위에 새겨진 친일파 3명의 이름 각자(刻字)처리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 추경화(秋慶和·48·진주시 신안동)씨는 최근 “진주시 뒤벼리 일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재각(李載覺)·이재현(李載現)·성기운(成岐運) 등은 모두 친일파들의 이름”이라며 “이같은 일제잔재가 해방 54년이 되도록 존치돼 왔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했다. 암벽은 행인들의 눈에 쉽게 띄는 도로변에 위치해있으나 그동안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암벽에 새겨진 글씨는 한자체로,크기는 가로 세로 80㎝ 정도. 이들 중 이재각·이재현은 친형제로 모두 왕족출신이다.이재각은 대한제국관리출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후 특명일본국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한일병합’ 후 이완용과 같은 급의 후작(侯爵)작위를 받았다.이재현은 경상남도 관찰사와 비서원경을 역임한 자로 ‘을사조약’ 후 의병토벌에 앞장섰던 인물.성기운은 1904년 이후 경남·충북·경기도 관찰사를역임하고 ‘을사조약’ 후에는 농공상부 대신·중추원 부의장·장례원경 등을 역임했으며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암벽 처리문제를 놓고 추씨는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그곳에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 관계자들은 “바위를 깨고 이름을 지울 경우 안전사고 등의 문제가 예상된다”면서 신중한 자세다.한 독립운동가는 “단지 이름만을 새긴 것이라면 사료로서는 별 가치가 없다”며 지워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정부보유 포철株 국내서 판다

    정부는 산업은행이 보유한 2조원 규모의 포항제철 잔여지분을 당초 방침과달리 해외가 아닌 국내시장에 매각키로 했다.특히 공모주 청약(인수공모)이나 시세매각 등 주식시장을 통해 오는 11월부터 일반에 매각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키로 해 주목된다. 산업자원부 고위관계자는 15일 “포철의 외국인 보유지분이 44%로 상한선인 50%에 다다른 상황이어서 정부의 잔여지분 12.84%는 대부분 국내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매각방식으로 경쟁입찰과 주식시장을 통해 일반에 매각하는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시장상황에 따라 해외 DR(주식예탁증서)발행과이들 방식을 병행하는 방안도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포철 주식은 현재 1주당 16만∼17만원의 시세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15일 진념(陳념) 기획예산처 장관 주재로 공기업 민영화추진위원회 5차 회의를 열어 한국전력공사와 한국통신,한국중공업 등 8개 공기업의 하반기 민영화 일정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가스공사가 빠르면 다음달 증시 상장과 함께 주식공모를통해 1,500억∼2,000억원의 증자를 추진한다.또 올해 안에 500억∼1,000억원의 해외DR를 발행한다. 한국전력공사도 연내에 안양·부천 열병합발전소를 매각하는 한편 최근 분리한 6개 발전 자회사 가운데 1곳의 매각을 추진한다. 기획예산처는 지난해 7월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한 뒤로 5조5,791억원의 매각수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진경호기자 jade@
  • 강서구, 火葬場 건립 강력 반발

    “소음 때문에 살던 주민들도 이주시키는 마당에 조상을 모시는 숭조(崇祖)공원을 짓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강서구가 들끓고 있다.서울시가 김포공항 옆 오곡동에 제2 시립화장장과 납골당을 갖춘 숭조공원을 지으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구청과 구의회,주민이 혼연일체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펴고 있다. 주민들은 최근 범구민대책위원회를 결성,대규모 항의궐기대회를 갖고 주민17만여명이 서명한 반대서명록을 시에 전달했다.대책위는 이어 시의 입장불변에 대비한 2차서명 및 항의집회 준비로 분주하다.격앙된 주민정서를 반증하듯 구청장과 구의회 의원,지역출신 시의원과 국회의원 모두 이 일에 사활을 걸다시피 뛰고 있다. 강서지역이 이처럼 벌집을 쑤신듯 끓고 있는 것은 시의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누적된 불신과 피해의식 때문이다. 시는 오는 2002년까지 917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3,000평 규모의 화장장과각 1,000평 규모의 납골당,장례식장 등을 갖춘 연면적 5,300평 규모의 숭조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김포공항 옆 오곡동 일대를 유력후보지의 하나로지목했다.이곳 화장장은 20기의 화장로를 설치,매일 60구를 처리할 수 있는규모로 계획돼 있다. 강서 주민들은 시의 이같은 계획을 ‘특정지역 말살정책’이라며 극력 반발하고 있다. 金仁煥 대책위원장은 “하수처리장과 오니처리장,광역소각장,음식물 하수병합시설,광역 건식사료화시설,분뇨처리시설 등 온갖 혐오시설이 몰려있는 곳에 화장장마저 밀어넣겠다는 발상은 특정지역을 황폐화시키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이 특히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이곳이 적지가 아님에도 행정편의에의해 포함됐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구의회 김상현(金相鉉) 의원은 “오곡동 일대는 하루 600여대의 항공기가이착륙하는 공항과 맞닿은 1종 소음피해지역인데다 올해도 5일동안이나 물바다를 이룬 상습 침수지역”이라며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공항과 분뇨·하수처리장밖에 없는 허허벌판 논바닥에 화장장과 숭조공원을 짓는 것은망자를 산으로 모시는 우리 국민정서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의원은 “이같은 지역적 특성을 도외시한채 건립을 강행하려는 것은 이미 주민 이주가 끝나고 토지도 상당부분 매입돼 있는데다 평지라서 개발이 쉽다는 점만을 고려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의 극치”라며 시에 적지선정을 위한 시민토론회와 공청회를 제의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이호조 이사장은 “후보지로 선정한 3곳중최종결정은 주민여론 등을 감안해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사설] 東티모르 독립 보장돼야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동(東)티모르인들의 의지는 단호하고도 확고해 보인다.지난달 30일 실시된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여부를 묻는 역사적인주민투표에서 동티모르인들은 투표율 99%에,78.5%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독립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엔(UN)이 투표관리를 했고 인도네시아 정부의 약속아래 투표가 실시됐음에도 동티모르의 독립에는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그것은 장차 독립 동티모르의 대통령으로 유력시 되고있는 사나나 구스마오씨가 개표결과가 나온 직후 동티모르에서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위해서는유엔평화유지군이 즉각 투입돼야 한다고 촉구한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 동티모르의 치안문제는 대단히 우려할만 하다.독립을 반대해온 동티모르내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은 투표전부터 공공연히 “티모르 주민들이 독립의 길을 선택하면 불바다를 만들어 놓겠다”고 공언해 왔고 ‘치안유지’를 위해이곳에 와 있는 인도네시아군도 언제 티모르인에 총을 겨눌지 모르는 상황인것이다. 오는 11월,인도네시아 의회가 동티모르를 병합키로 한 76년의 결정을 폐기하는 헌법수정안을 승인해줄 것인가도 불안의 한 요소다.인도네시아 의회에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 유엔의 태도도 아직까지 불분명하다.평화유지군을 보내야하고 최소한 3∼5년동안 동티모르 전 독립과정을 주관해야할 유엔이“아직은 직접 개입해야할 근거가 없다”는 어정쩡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취약성도 문제다.동티모르는 주민의 90%가 절대 빈곤층이다.인구의반은 문맹이다. 25만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인들이 떠나게 되면 동티모르는 당분간 경제적 암흑지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천연자원이 풍부하나 이를 효율적으로 개발하자면 최소 10년은 소요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는 독립해야되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동티모르인의 강력한 독립의지가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강제적으로 통합된 국가는결국 독립되고 만다는 확실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주민의 선택을 존중하고 수용할 것임을 약속한다”는 인도네시아 B J 하비비 대통령의 국제적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또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원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에서의 살육전은 계속 될 것이다.확실한 보장이 없음에도 전인구의 3분의 1을 희생해 가며 독립투쟁을 해왔던 동티모르는 남은 인구의 반을 더 잃더라도 독립투쟁을 결코 포기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청와대 政財界 간담] 대화 요지

    25일 청와대에서 가진 김대중대통령과 5대그룹 총수들의 간담회 요지는 다음과 같다. ■김대통령 (대우 김우중 회장에게)최근 구조조정 계획에 따른 계열사의 분리와 매각 등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우측의 수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 계획이 국내외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앞으로는 시장의 신뢰회복을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실천 가능한 구조조정계획마련이 불가피했다고 본다. 김회장은 대우의 책임자로서 국민이 기대하는 구조조정을 잘해서 진정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해주길 바란다.앞으로의 구조조정 계획과 각오,신념을 말해달라. ■김우중 회장 국가적으로 어려운 때 회사 문제로 대통령과 국가에 심려와부담을 끼쳐 면목이 없다. 나는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 않다.일부 언론보도나 시중의 루머와는 달리대우의 소유권이나 경영권에 마음을 비운지 오래다.국가 경제가 입은 피해를최소화하고 금융기관들에게도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는 생각 뿐이다. 구조조정과 관련 큰 어려움이 있다.계열사들의 정상적 영업과 공장 가동이 어렵고관련 협력업체들도 정상적이지 못하다.대우에 100% 의존하는 1만8,000여개의협력업체들이 어음할인도 안되는 등 어려움이 크다. 국가경제에 대한 타격이최소화 되도록 직원들의 고용안정 문제에 대해 정부기관들의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다. ■김대통령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지난 상반기에 삼성이 자산을 매각,부채비율을 목표 비율 200%로 낮추는 것을 달성해 다른 그룹보다 앞서간 것을 평가한다.자동차회사의 처리 과정에서 기업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도 평가 받을만하다.앞으로 반도체와 전자 산업의 전망,투자계획과 기술개발 계획에 대해 말해달라. ■이건희 회장 PC수요가 20% 느는 등 수요가 확충됐다.대만의 정전사고로 공급이 적어진 것도 한 요인이고 세계적으로 반도체 가격이 안정돼있다.64메가D램의 경우 4달러 50센트에서 7달러 50센트로 올랐고 반도체 수출이 연간 185억 달러인데 그중 삼성이 30%인 55억 달러를 수출하고 있다.앞으로 반도체분야에 3조 5,000억원을 투자,메모리 반도체 부분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반도체 강국으로서 한국이 자리잡도록 노력하겠다. ■김대통령 국가 경쟁력을 위해 기술개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현대는 지난해 기아자동차 등을 인수하는 등 재무구조가 악화될 것이란우려의 시각도 있다. 그러나 상반기 중 현대의 재무구조 개선실적을 보면 그런 우려가 해소되는 것 같다. ■정몽구 현대그룹공동회장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호전시킨 대통령과 정부의 노고에 거듭 감사한다.현재 구조조정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고 구조조정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있다.더욱 노력해서 연말까지 부채비율을 200%이하로 내리는데 차질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김대통령 부채비율 개선에 특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LG그룹 구본무 회장에게)LG는 반도체 빅딜 매각 대금을 정보통신 디지털에 집중 투자했는데구체적인 상황과 디지털 사업에서의 국제경쟁력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하고있는가. ■구본무 회장 LG는 통신 인터넷 디지털 TDX CDMA 등 4대 업무를 특화시켜종합사업을 추진하고 있다.CDMA 경험을 살려 앞으로 미래산업인 인터넷그리고 디지털과 CDMA 기술을 발전,가전과 디지털 TV 등의 사업을 병합,발전시키겠다.여기에 매년 2조원 이상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당초 계획대로 구조조정과 재무개선을 차질 없이 이행할 것이며 비주력 업종을 과감히 정리하겠다. ■김대통령 기업들이 주력사업을 통해서 세계 일류기업으로 나가야 한다.(SK 손길승회장에게)SK그룹은 타그룹보다 앞서 핵심 역량기업으로 계열사가 독립경영체제를 지향하고 있는데 앞으로 계획은. ■손길승 회장 SK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데 감사드린다.우리는 에너지 화학 정보 통신 등에 투자를 확대할 예정이다.중국과는 통신 에너지 분야에서의협력을 강화할 예정이다.남미와는 에너지 화학 분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다. ■김대통령 재계와 금융계 정부가 지난 1년반 동안 국가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협력해서 이룬 성과와 공로가 크다.세계가 놀라는 경제회복을 이룩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합의를 했고 이 합의는 높이 평가될 만하다.국내외가 오늘의 합의를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금융 기업 공공 노동 4대분야 개혁을 줄기차게 추진해서 외환위기를 겪은국가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나라라는 평가를 받게됐다.그 덕택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금리 주가 물가 모든 것이 안정 돼 있다.우리는 올해 2%의성장을 기대했는데 2·4분기에 9.8%의 성장을 이뤘다.실업도 2월 178만명에서 135만명으로 줄었다.지난해 중소기업이 2만3,000개가 도산했지만 최근엔하루에 100개 이상씩 창업되고 있다.대기업 구조개혁도 이미 지적한 5대원칙을 실천하고 있고 빅딜도 대체로 잘 되고 있다.반가운 것은 상장사들의 순이익이 올해 3조 1,000억원으로 작년 4조5,000억원 적자에 비해 약 8조원 정도가 이익으로 전환됐다.사상 최대의 흑자라는 보도들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같은 순이익 증가는 기업들이 체질개선을 하고 경쟁력을 향상시킨데 (원인이)있다.저금리 저물가와 임금안정,정리해고 실현,환율안정,외국인 투자확대 그리고 64조원에 달하는 공적 투자확대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이제 재벌들은 핵심 역량을 집중,과감하게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오늘 합의된 사항이 잘 이행이 돼야한다. 근본적인 개혁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위기의 떨어질지 모른다.국민과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국민들은 고통속에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주시하고 있다.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세계의 비판적 시각을 정확히 주시해야 한다.우리가 바라는 것은경쟁력을 갖고 세계적으로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하라고 하는 것이다.이것 이외에 요구사항은 없다.크게 보면 정부와 재벌의 이해는 같다.일부에서 재벌과 정부가 대립되는 시각에서 보거나 재벌해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선단식 경영이 종식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도와야 한다.중소기업에 대기업이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 거의 상식이 돼있다.대만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등을 보면 중소기업이 잘돼야 나라 경제가 튼튼함을 증명하고 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다.비상 시기에 직·간접적인 개입은 불가피하다.80년대 미국의 불황시대와 같은 분위기다.올펀슨 세계은행 총재등도 비상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정부간섭을 축소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이뤄지도록 하겠다. 앞으로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문경영인들을 많이 육성해야 한다.오너 여러분들이 전문경영인 배출에 많은 역할을 해달라.이번 계기로 새로운 기업문화를 펴나가자. 앞으로 채권은행이 주도적으로 재벌 구조조정 이행을 점검해서 철저한 여신 심사를 해달라.금융기관도 부당한 대출 청탁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정부가 바로서야 재계나 금융기관이 바로선다.정부가 솔선해서 깨끗한 정부가 돼어야 하겠다. 정리 오일만기자 oilman@
  • 현직공무원이 음란물 판매 ‘부업’

    현직 시청 계장이 포함된 음란 비디오 테이프와 음란 CD,무허가 성(性)보조기구 등을 불법 복제,판매한 업자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서울경찰청 형사과는 16일 변정훈씨(41) 등 39명을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과 약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부천시청 하수행정과 강모(39)계장 등 169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변씨는 지난 3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사무실에서 음란비디오 5,000여개를복사해 판매업자에게 한개에 3,000원씩 7,000여만원어치를 판 혐의를 받고있다. 강계장은 지난달 초부터 근무를 마친 뒤 부천시 원미구 열병합발전소 앞에베스타승합차를 세워놓고 무허가 성 보조기구를 판매하다 적발됐다. 경찰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와 청계8가,용산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서울 주변에서 7일부터 일주일간 단속했다. 경찰은 음란테이프 2,670여개,음란 CD 307개,음란도서 70개,성 보조기구 3,000여개,불법 성인용 의약품 1,400여개 등을 압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값싼 CD 복제기의 등장으로 불법 음란물 복제가 성행하고있다”면서 “특히 청소년상대 판매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조현석기자 hyun68@
  • 서울銀에 새달 공적자금 4조투입

    정부는 다음달중 서울은행에 4조∼5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경영정상화를시킨 뒤 해외 매각협상을 진행키로 했다.서울은행 자본금은 5대 1 선에서 감자(減資) 조치된다. 12일 금융감독원과 서울은행에 따르면 금감원은 지난 9일부터 서울은행에대한 자산·부채 실사작업에 착수했으며 오는 17일까지 마무리지은 뒤 늦어도 다음달 중순까지 공적자금을 투입키로 했다. 정부는 서울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0%로 맞출 계획인데 이를 위해 자본금 확충과 부실채권 매입용으로 모두 4조원의 공적자금투입이 예상된다.여기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새로운 자산건전성분류기준인 미래상환능력까지 감안할 경우 5조원까지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지난달 9일 2차 공적자금을 투입한 제일은행의 경우처럼 서울은행의 정부지분(1조5,000억원)을 주식병합 형태로 5대 1 정도로 감자하고,나머지소액주주지분(1,000억원)에 대해서는 전액 유상소각키로 했다.주식매수 청구권 행사가격은 주당 800원선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한편 서울은행의 해외 매각은 협상주체인 금감위와 홍콩상하이은행(HSBC)모두 제일은행의 매각 여부를 봐가며 결정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상당 기간 지연이 불가피하게 됐다.서울은행은 지난해 1월 1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받았으나 이후 매각협상이 지연되면서 자본금을 까먹어 현재대출과 유가증권 투자업무 등 은행업무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박은호기자 unopark@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교보증권 미발행 예비株券 유통

    교보증권의 미발행예비주권이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어 투자자들의 피해가예상된다. 교보증권은 12일 자사의 미발행예비주권이 불법 유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투자자들이 장외거래를 할 때 주의해줄 것을 당부했다. 교보증권은 자사의 전 총무부 직원이 비상장 교보증권의 미발행예비주권 1만주권 30장(총 30만주)을 몰래 빼내 불법유통시킨 사실을 확인,이 직원을검찰에 고발했다.또 미발행예비주권에 대해 점유이전금지 및 처분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예비증권은 유가증권의 발행회사가 주주 또는 사채권자로부터 증권의 분할,병합의 청구 등을 이유로 재발행 청구에 대비,보유하고 있는 증권이다. 교보증권의 발행주식은 총 3,000만주이며 이중 퇴직직원에 교부된 주식 294만4,991주중의 일부가 현재 장외시장에서 9,000원 안팎에 유통되고 있다. 교보증권 주식거래에 대한 문의는 교보증권 총무부(02-3771-9149)로 하면된다. 김균미기자 kmkim@
  • 서울시 연말부터 음식물쓰레기 하수처리장서 병합처리

    지금까지 매립되거나 소각되던 음식물쓰레기가 하수처리장으로 보내져 하수찌꺼기(汚泥)와 함께 처리된다. 서울시는 12일 음식물쓰레기의 안정적인 처리를 위해 사료화나 퇴비화가 되지 않는 음식물쓰레기를 하수처리장으로 보내 하수 오니와 병합처리하기로했다고 밝혔다. 시는 이에 따라 올해 10억원의 예산을 반영했고,200만t 처리용량의 가양하수처리장에서 올해말부터 하루 20t씩 병합처리할 방침이다. 이 방식은 퇴비화나 사료화가 되지 않는 음식물쓰레기를 파쇄·선별해 2차례의 처리과정을 거쳐 탈수 케이크로 만드는 것으로,외국에서는 이미 널리활용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하수관거가 정비되지 않아 도입하지 못했었다. 조덕현기자 hyoun@
  • 서울시, 공무원·시민 市政제안 12건 선정 포상

    ‘시정 발전에 기여하고,상금도 타고’ 서울시는 6일 올 상반기 공무원 제안 및 시민 창안을 심사한 결과 응모한 113건 가운데 12건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는 채택된 안건을 시정에 반영하고 200만∼10만원의 상금도 줄 계획이다. 금상은 없고 은상 2건,동상 3건,장려상 3건,노력상 4건이다. 시 폐기물관리과 심화식씨(화공6급) 등 3명은 음식물쓰레기를 매립이나 소각으로 처리하는 대신 기존 하수처리시설을 활용해 대단위로 병합처리할 것을 제안해 은상과 함께 2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시 도로운영과 최만식씨(토목7급) 등 2명은 제설작업을 초기에 할 수 있도록 서울과 인접한 인천 및 강화 등지의 기상관측소에서 기상상황을 통보받아 대처하자고 제안,은상을 받았다. 기술심사담당관실의 최동필씨(토목6급) 등 2명은 물가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을 쉽게 할 수 있는 ‘물가변동용 전산프로그램’을 제안해 동상을 받았고,광진구 민원봉사과 이응희씨(행정6급) 등 2명은 지하철 이용객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환승역에 자연의 소리 등 특수음을 넣자고 제안,장려상을 받았다. 조덕현기자 hyoun@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