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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일 공동저술 새 역사교재 ‘미래를‘ 출간

    한국·중국·일본의 양심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집필한 3국 통합 근현대사가 26일 출간됐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동기가 돼 사상 첫 3국 공동 역사서가 탄생한 것이다. 세 나라 역사학자와 시민사회 인사 등 54명이 참여해 3년여 동안 만든 새 역사책의 이름은 ‘미래를 여는 역사’.‘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출간기념회를 열고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명의의 공동취지문을 발표했다. 편찬위원회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합리화 하는 것은 이웃나라는 물론 일본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라면서 “불행한 과거를 넘어 3국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미래가 펼쳐지기 바란다.”고 밝혔다. ●일제의 침략과 강압정책 공식 인정 ‘미래를 여는 역사’는 16세기 중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3국 역사를 ▲개항 이전의 3국 ▲개항과 근대화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침략 전쟁과 민중의 피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등 6개 장으로 구성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다룬 2장과 3장.‘미래를 여는 역사’는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간섭, 군대해산, 언론탄압, 사법권 강탈 등에 나선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에서 축소되거나 왜곡됐던 대목이다. 후소샤는 대한제국 병합 과정을 ‘근대화’라고 미화했다. ‘미래를 위한 역사’는 또 “(일본이 주장한)대동아공영권은 식민지 지배를 치장하는 논리일 뿐이며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역시 후소샤 교과서에서 각국의 자주독립과 상호제휴에 의한 경제발전, 인종차별 철폐 등에 공헌했다고 미화했던 부분이다.‘미래를 위한 역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위안부로 끌려간 한국여성은 대부분 미혼의 10대 소녀들이었다.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로 동원된 각국 여성의 수는 최소 8만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공동 근현대사 탄생의 배경 한·중·일 3국 시민단체와 역사학자들은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후소샤 교과서가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반영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연대에 나섰다.2002년 3월 중국 난징국제학술대회에서 각국 중학생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현대사 교재를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며 한국 23명, 일본 14명, 중국 17명이 공동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씌어진 언어와 책의 판형은 다르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한·중·일을 오가며 11차례의 회의가 진행됐다. 공동교재 총괄 편집위원회에는 한국측에서 교과서운동본부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김성보 충북대 교수가 참여했다. 중국측에서 부핑(步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장, 우광이(吳廣義)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연구원, 일본측 오비나타 스미오(大日方純夫) 와세다대 교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어린이와교과서전국네트워크21 사무국장 등이 포함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독도에 호텔 설뻔 했다

    균열로 붕괴위험까지 드러났던 독도에 관광호텔이 들어설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던 것으로 9일 뒤늦게 밝혀졌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는 지난달 독도영유권 문제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실효적 지배와 이용·보전을 위한 독도관련법안 마련에 돌입했다. 법안심사소위는 여야가 제출한 3건을 병합심사했다. 이 과정에서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콘크리트 공사한 뒤 호텔을 짓자는 주장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엔 독도 균열 등 위험성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특히 숙박시설 건립을 주장하는 의원들의 입장이 완강해 초반 애를 먹었다. 그러나 막판 신중식 위원장의 설득 등으로 조율 과정에서 문구가 빠졌다. 신 위원장은 “막판까지 혼란이 있었다.”면서 “당시 격앙된 국민감정에 휩싸여 독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씨줄날줄] 얄타협정/이목희 논설위원

    1494년 토르데시야스조약은 강대국이 세계를 나눠먹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지원 아래 1492년 신대륙을 발견했다. 스페인과 해양제패를 다투던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을 작은 섬 정도로 생각하고 대서양상 마데이라군도의 부속령으로 삼으려 했다. 두 강국의 대립이 첨예하자 교황이 중재에 나섰다. 결국 양측은 아조레스섬과 카보베르데섬을 잇는 선의 서쪽 1100마일을 기준으로 세계를 양분했다.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우선권을 갖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조약에 따라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됐고, 나머지는 스페인 식민지가 됐다. 조약체결 당시에는 브라질 지역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합의였다. 현대사에서도 웃기는 땅따먹기는 계속되었다.2차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 수뇌가 크림반도 얄타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얄타협정으로 소련은 동유럽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독일 분할점령 구상을 구체화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일 “얄타협정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이라는 정의롭지 못한 전통을 답습했다.”고 비판했다.1939년 소련과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통해 폴란드를 분할점령하고, 발트해 3국은 소련이 병합키로 결정했다. 부시의 얄타협정 비난에는 수십년 동안 동구권을 독재국가에 넘겼다는 자책이 깔려 있다. 얄타의 그늘이 아직 짙게 남은 곳은 동북아다. 얄타협정 체결 당시 소련의 관심은 동유럽에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그릇된 정보 판단으로 극동의 상당부분을 소련에 넘겨주는 잘못을 저질렀다. 미국은 독일 패망 후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18개월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원자폭탄의 효능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만주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했다. 특히 얄타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가 언급됨으로써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만약 소련의 참전없이 일본이 항복했다면 북한정권의 탄생을 막을 수 있었고, 중국 공산화도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동북아에서는 북핵이 첨예한데다 타이완 독립논란까지 겹쳐 있다. 강대국간 나눠먹기가 언제든지 재현될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혁신 공기업 탐방] ⑥ 한준호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터뷰

    [혁신 공기업 탐방] ⑥ 한준호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터뷰

    한국전력공사(KEPCO)는 종종 ‘공룡’에 비교된다. 직원 수 및 자산 규모 등 외형적인 크기가 재벌기업 못지않게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룡은 제때 변화하지 못해 멸종됐다. 한준호 사장도 이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장은 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직내 벽을 없애지 않으면 변화에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 패거리 문화의 상징이었던 직군을 파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고 밝혔다. 공기업 최초로 ‘부조리 신고 포상제도’를 도입하는 등 윤리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범주다. 한전이 공기업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6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었다. 한 사장과 서울신문 오풍연 공공정책부장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다. 중점적으로 진행하는 혁신의 방향부터 설명해 달라. -어느 조직이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으면 강제적인 개편이 뒤따를 수 있다. 지난 2002년 4월 전력산업구조 개편에 따라 한전 조직이었던 발전부문이 6개 자회사로 떨어져 나갔다. 변화를 느끼지 못하면 도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대한 한전 조직을 유연한 조직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고 있다. 잭 웰치가 GE를 이끌면서 벽없는 조직을 만든 것처럼 한전 조직내 그래도 남아 있는 벽을 깨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전은 내부에 파벌과 패거리 문화가 있다고 들었다. -경영의 핵심은 올바른 인사에 있다. 인사제도의 혁신은 유연한 조직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보직인사 때 직군을 없앴다. 조직간 벽을 허물어 화합을 유도하려는 차원이다. 실제로 1직급 보직인사 때 사무·배전·송변전 등 직군에 관계없이 인사를 단행했다. 또 국제무대에서 세계적 기업들과 경쟁할 글로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2015년까지 세계 최고의 글로벌 종합에너지 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해 사업영역별·지역별·직무별 전문가집단을 양성하고 있다. 글로벌 인재를 총 인력의 10% 수준으로 양성할 계획이다. 우리의 시야를 국제무대로 넓히고 각자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자연스럽게 벽은 허물어지고 조직활력이 높아질 것이다. 공기업 이전 문제가 큰 이슈다. 모두들 한전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인데 복안이 있나. -한전이 먼저 어느 곳으로 이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정부 방침에 충실히 따르겠다.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복안을 짜고 있다. 공기업 최초로 ‘부조리신고 포상제도’를 만들었다. 이같은 윤리경영으로 부방위 청렴도 조사에서 최하위권에서 상위권으로 도약한 것 같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떤가. -윤리경영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요체다. 취임 이후 무엇보다도 윤리경영을 최우선과제로 추진했다. 그 결과 부방위 청렴도 평가에서 15개 공직 유관단체 중 4위를 차지했다. 지난 2003년까지 2년 연속 최하위에서 상위권으로 크게 도약한 것이다. 향상도면에서는 전체 조사대상 기관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부조리신고 포상제도를 신설했고, 전자공개 입찰제도를 확대했다. 청렴계약제도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 변화와 혁신은 전직원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한전은 규모가 커 직원들의 의식변화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작은 물은 쉽게 물길이 바뀌나 지속성이 없다. 반면 큰물은 그 물길이 더디게 바뀌나 한 번 방향을 잡으면 파급력이 대단하다. 규모가 큰 것이 단점이자 장점일 수 있다. 취임 후 가장 큰 성과는 ‘변화와 혁신’에 대한 직원들의 의식변화라고 할 수 있다.21세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고 우리 회사가 지속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한 변화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주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종전 계약관계에선 한전이 갑이었고, 하청업체가 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갑이 아닌 을의 자세에서 한전의 모든 제도와 절차를 개선하고 있다. 고객의 불편을 사전에 예방하고 민원사항을 적극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다. 공기업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6년 연속 1위를 차지했는데 비결은. -고객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값싸고 질 좋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1984년부터 최근까지 소비자물가는 153% 상승했지만 전기요금은 4.7% 인상하는 데 그쳤다.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저렴하다. 한국이 당 74.58원인 데 반해 일본 201원, 미국 79.02원, 영국 106.28원 등이다. 고급화·다양화하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서비스도 혁신했다. 이사하는 고객의 전기요금 계산을 24시간 인터넷을 통해 서비스하고 있다. 세금계산서·전기요금 납부증명서도 인터넷으로 발급하고 있다. 해외사업의 추진현황과 향후 계획을 설명해 달라. -국가간 장벽이 없어지고 있다. 전력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한전이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해서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중국의 전력 성장률은 연 10%에 달할 정도로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중국은 이같은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매년 3000만 이상의 발전설비의 확충을 추진하고 있다. 한전은 지난해 허난성에 10만 규모의 순환유동층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정리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한준호 사장은 한준호 사장은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섭섭한 에너지정책 전문가다. 동력자원부 자원개발·석유가스국장, 통상산업부 자원정책심의관·실장을 지낸 경력이 이를 말해준다. 공직생활 30여년 동안 에너지 분야에서만 20여년을 근무했다. 지난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중소기업청장과 한국생산성본부회장, 대통령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을 역임하며 중소기업 분야에서도 업무수완을 발휘했다. 한 사장은 등산 경영론자다. 국내 대부분의 산을 가봤을 정도로 산을 좋아한다. 특히 직원들과 함께 등산을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끈끈한 정을 나눈다. 지난 2월에는 임원들과 한라산을 등반하며 ‘산상 경영전략회의’를 가졌다. 그는 “산을 오를 때는 왼발과 오른발이 같이 움직여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거나 “나무와 바위, 계곡, 풀 등이 제자리에 있어야 산이 산답다.”고 강조한다. 모든 직원이 제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조직의 승패가 갈라진다는 얘기다. 2000년에는 경희대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활성화 요인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늦깎이’이기도 하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와 출입기자 등 동력자원부에 마지막까지 몸담았던 ‘막동회’ 회원들과 가끔 어울린다. ▲경북(60) ▲경북고·서울대 법학 ▲행시10회 ▲동자부 공보관 ▲산자부 기획관리실장 ▲중소기업청장 ▲중기특위 위원장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사업장별 267개 소규모 봉사회 구성 한국전력공사의 사회봉사활동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업무의 특성상 산골오지에 사는 어려운 주민까지 대하다 보니 봉사활동이 오래 전부터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한준호 사장의 취임과 함께 사회봉사활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사업장별로 이뤄지던 봉사활동을 조직적으로 이뤄지게 한 것이다. 한전은 지난해 5월 전국의 사업장에 있던 소규모 봉사회를 267개 봉사단으로 구성,‘사회봉사단’을 출범시켰다. 출범 당시의 봉사단원만 4033명에 달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봉사활동을 위한 성금도 자발적으로 거뒀다. 전체 직원 2만명 가운데 89%인 1만 7400명이 성금을 내 모두 8억 6000만원을 마련했다. 사측도 봉사단 활동에 적극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직원들이 거둔 성금에 해당하는 8억여원을 지원, 지난해에만 16억 6000만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봉사활동은 한전의 특성을 살렸다. 우선 저소득층에게 효율이 높은 조명기기를 무상으로 달아주는 사업을 했다. 지난해에만 5000가구에 고효율기기를 지원했다. 올해는 5만가구로 확대할 예정이다. 혹한기나 혹서기 동안 전기요금이 체납된 고객에 대해서는 단전을 유보하는 한편 저소득 가정에 대해서는 전기요금을 대신 내줬다.2437호 가정에 1억 2000여만원을 지원했다. 저소득 가정에 대한 전기요금은 봉사기금과 별도로 캠페인을 통해 마련했다. 지난해 9월부터 2개월 동안 한전 직원들이 ‘빛 한줄기 나눔 캠페인’을 통해 1억 5000여만원을 추가로 조성했다. 지난 1월에는 간부급도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부장급 이상으로 승진한 222명 전원이 일산홀트복지타운과 가평꽃동네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한전은 2일부터 시작되는 어린이주간에는 미아예방을 위해 전국 놀이동산 등에서 어린이들에게 ‘이름표 달아주기’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전 관계자는 “지난달 강원도에 큰 산불이 났을 때는 송전선로 보호를 위해 직원들이 산불진화에 나섰다.”면서 “앞으로도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한전의 특성을 살려 사회공헌활동을 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17대의원·1급이상 공직자 직무관련 주식 처분해야

    앞으로 1급 이상 공직자와 재정경제부 및 금융감독원 소속 공무원 가운데 대통령이 정하는 이들은 직무와 관련된 보유 주식를 팔거나 수탁기관에 관리·운용·처분을 위임해야 한다. 여야는 21일 국회 행정자치위 전체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주식백지신탁제’를 골자로 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개정안은 정부안과 한나라당안을 병합심의한 뒤 마련한 대안으로 법제사법위와 본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여야간 이견이 없어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에 따르면 신탁 주식의 하한선은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이 지닌 주식을 합해 10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안의 하한선인 ‘3000만원 이상 1억원 이하’ 보다 낮아진 것이다. 또 수탁기관은 60일 이내 위임받은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다만 공직자윤리위가 승인한 경우 처분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직무 관련성이 없는 주식은 신탁 대상이 아니기에 국회의원의 경우 상임위가 다르면 무방하고 장관도 부처와 관련 없는 주식은 보유가 가능하다. 개정안은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로부터 발효된다. 기존 재산공개 대상자는 법 시행일부터 1개월 이내에 직무관련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하고 이를 등록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따라서 17대 국회의원이나 현직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도 법의 적용을 받는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열린세상] 독도, 위기의 순간에 대비를/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일본 역사교과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문제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다. 한때 전향적인 교과서 서술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1995년 일본의 사회당 당수인 무라야마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정점으로 오히려 훨씬 심각한 극우화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나마 교과서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선택과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남긴다는 점에서 학술적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공민교과서로 옮겨 붙은 독도영유권 문제는 가부의 결단을 향해 치달아 나가는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안으로 모는 것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인 시마네현에의 편입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육전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바야흐로 동해에서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이미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어느 지점이든지 수시로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영토를 유린한 상태였다. 일본이 추천한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이 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침해당했다. 대한제국 국토 전체의 안위와 주권 자체가 유린된 위기의 상황에서 일본의 시마네현이라는 한 지방이 독도를 현에 소속시키는, 자기들만 아는 고시를 발하였다. 일본의 한 지방이 발한 고시가 무슨 국제적 외교적 의미를 지닐까마는 곧이어 진행된 외교권의 탈취와 보호국화, 그리고 일본의 한국병합에 의하여, 독도는 최초로 침탈당한 한국의 영토로서, 병합에 의한 전국토 탈취의 전초요, 상징이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담이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일본의 적극 반대로 우리나라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이 회의에서, 애초 연합국 측의 초안에 한국영토로 되어 있던 독도가 일본의 적극 로비로 인해 본안에서는 분명하게 명기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빌미로 독도영유권 분쟁을 야기했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뒤 6·25전쟁이 일어나고 전후복구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국토를 보살필 겨를이 없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30여년 동안 극심한 무역역조를 겪은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당했다. 이웃나라 한국의 위기에 대하여 일본 금융기관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장서서 투자액을 회수해 감으로써 위기를 부채질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본정부는 1965년 체결한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일본의 협조가 절실했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안을 받아들여 독도를 한·일간의 공동어업수역에 넣고 말았다. 어업협정이므로 영토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그로부터 이제 불과 6년여, 일본은 본격적으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한다. 미·일동맹의 강화가 그 배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그들 나라와의 영토분쟁을 위한 전초전과 같은 느낌도 주고 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계기로 국가의 재도약을 꾀하려는 일본으로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거센 반발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독도문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되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할지 모른다. 문제는 미래에 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북핵문제가 원만한 결론을 맺지 못하거나 또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의 위기이다. 상대의 위기를 기다리면서 치밀하게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는 일본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민교과서에 올린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모른다. 독도위기의 해법이 결국 한·일간의 교류와 상호이해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흐를 것을 뻔히 알고 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온축된 상호이해가 한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위기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이웃의 과거행적 때문이다. 나쁜 이웃과 함께 사는 게 불행이라는 한탄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대책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日 역사 ‘날조’] 역사왜곡내용 항목별 분석

    [日 역사 ‘날조’] 역사왜곡내용 항목별 분석

    중국의 일부로 역사가 시작된, 근본이 박약한 나라…고대 일본도 일찌감치 지배권을 가졌던 나라…그래서 이웃에서 맘대로 깔아뭉개도 거리낄 게 없는 나라….5일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왜곡교과서로 배울 경우, 일본 학생들은 ‘한국=뿌리부터 열등한 나라’라는 편견을 불가항력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만큼 2005년판 교과서의 왜곡 수준은 가히 가학적이다. 특히 후소샤를 비롯한 출판사와 일본 정부측은 현행 2001년판을 일부 개선시키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보다 교묘하고 지능적인 방법으로 왜곡을 가함으로써 ‘사기(詐欺)성’의 극치와 함께 개전의 정이 전무함을 보여줬다. ●대방군 항목 신설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는 2005년판에 ‘대방군은 중국의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현재의 서울 근처’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2001년판에는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방군을 황해도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방군이 서울 근처에 있었다는 것은 일본 학계 일부의 소수학설에 불과한 데도 이를 굳이 채택한 것이다. 결국 한국의 역사가 중국이 설치한 군현에서 시작했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전형적인 개악(改惡) 사례다. ●임나일본부설 유지 숱하게 논란이 돼 온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좀처럼 수정을 가하지 않는 후안무치가 또 반복됐다. 후소샤의 2005년판은 2001년판의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두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한 내용을 그대로 채용했다. 오히려 검정신청본에서는 ‘신라의 대두와 임나의 멸망’이란 제목으로 별도의 소항목을 새로 설정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을 보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문부과학성은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임나를 표기한 지도를 그대로 방치했다. 도쿄서적과 일본서적신사의 검정본에도 같은 지도가 있다. 일본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상 일본정부가 나서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대방군과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다면 한반도 북부는 중국이, 남부는 왜(倭)가 각각 지배한 역사로 학생들에게 각인될 우려가 높다. ●조선 자주성 격하 후소샤는 조선이 ‘중국의 복속국’이라는 표현을 2001년판에서 ‘중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하에 있었던’이란 문구로 약간 개선시켰었다. 이번에는 다시 ‘중국의 조공국’으로 개악했다. 조선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자국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이웃나라를 폄하하려는 파렴치한 유혹을 도저히 떨칠 수 없는 모양이다.2005년판에서는 곳곳에 조공이란 단어가 유달리 많이 나온다. 복속국이란 표현을 대체할 만한 단어가 조공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한반도 위협설 유지 후소샤의 2005년판은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 개의 팔뚝과 같이 조선반도가 돌출되어 있다.’고 기술한 2001년판의 ‘한반도 흉기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안전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해도 좋다는 역사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우려가 아주 높다. ●한일합방 미화 후소샤 2005년판은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라는 표현을 없앤 대신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별도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내용을 순화시키는 척하면서 대신 제목과 편집으로 더욱 큰 효과를 노리는 지능적인 수법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표현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을 수탈하고자 한 침략 의도를 왜곡하는 한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식민지화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역사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는 의도다. 또 후소샤는 물론 도쿄서적 등 모든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도 양심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독도 왜곡 2005년 공민교과서의 독도 관련 검정통과본은 2001년판에 비해서뿐 아니라,2005년 검정신청본에 비해서도 왜곡의 정도가 심한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극우적이라는 후소샤 교과서의 경우 신청본보다 검정본의 표현이 훨씬 강한 내용으로 드러나, 의혹을 부르고 있다. 그나마 양심적인 출판사로 평가되는 일본서적신사까지 지리교과서의 검정통과본에 독도를 일본의 영해로 명시한 지도를 실었다. 이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제도를 악용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임을 기술토록 민간에 요구했다고밖에 해석할 도리가 없다. 시마네현 독도 조례 제정에 대해 지방정부의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던 일본 정부의 논리가 거짓이었음이 사실상 확인된 셈이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이현세의 만화경] 독도가 우리 땅이라면

    [이현세의 만화경] 독도가 우리 땅이라면

    3·1절이 있는 이 달은 우리 민족에겐 의미가 남다른 달이다. 삼천리 강산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만세를 부른다고 목이 잘리고, 태극기 흔든다고 손목이 잘린 달이다. 하필이면 그런 3월에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일본이 억지 쓰는 탓에 이 나라 삼천리 강산은 다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제 땅도 못지키는 꼴이 되었을까…. 20년쯤 전이다. 일제 때 강제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된 위안부를 두고 강제동원이 아니라 돈을 받고 스스로 성전에 참여했다는 일본 우익들의 발언에 분노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나는 학도병 얘기를 그렸다. 그 만화가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였다. 그러나 며칠 봄철에 들불 일듯이 들끓던 극일의 목소리는 이내 잠잠해졌고 이 만화는 이웃국가를 필요이상으로 자극한다는 이유로 심의에서 관동군 막사에 일장기도 못 그리게 했다. 그리고 10여년쯤 전, 이번에는 일본이 교과서에 이 땅을 침략하고 수탈한 기록을 삭제 왜곡시키고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슬쩍 흘려서 우리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때는 나는 내 속의 불길을 감추지 못하고 ‘남벌’이라는 만화를 그렸다. 남쪽 일본을 벌한다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이 만화는 석유 자원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고 결국 북한과 손을 잡아 일본과 전면전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여론은 며칠 가지 못했고 정부나 정치인들의 대응도 국민 감정무마용 정도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 만화는 신문연재 시에 무슨 이유에선지 북한 잠수함의 인공기가 삭제되었고 지나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부채질한다고 S대 학생들과 모 평론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10년 뒤 오늘, 독도문제를 가지고 일본은 다시 돌아왔다. 일본의 망언은 묘하게도 10년의 주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도적인 일본의 공습이라고 본다. 독도는 분명 공습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본은 이 공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독도는 외로운 우리의 땅이다. 독도는 우리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한, 그래서 서글픈 땅이다. 신라시대 때 겨우 호적에 올려진 독도는 조선시대까지 홀로 무인고도로 버려져 있다가 한일병합때 그래도 자식이라는 죄로 같이 일본에 끌려갔다. 그러다 한·일수교때는 피해보상금을 받아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자국부모로부터 폭사당할 뻔했다. 세월이 흘러 잘 먹고 잘 살던 이 땅에 느닷없이 IMF가 왔을 때도 돈을 빌리기 위해 서로 사용하지 말자는 공창의 매춘부 꼴을 당했고, 그 뒤로는 제 나라 우표에 독도 그림을 넣는데도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제 땅인데도 함부로 못 가고 근처에서 고기도 잡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독도는 이렇게 애물단지였다. 제 자식을 이렇게 귀여워하지 않으니, 아시아의 동네 깡패 같은 일본은 이제 룸살롱 주인이 되어서 동네 명사가 되고 제 편을 끌어들여서, 독도는 제 딸이라고 마구 우기고 다닌다. 그러다 그 딸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다. 독도의 바다아래 엄청난 무공해 에너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일이 갈수록 태산이다. 일본은 과거 깡패시절에 대해서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고 없던 역사도 만들어서 족보에 올리며 자신도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서 원폭을 맞고 희생당했노라고 억지를 쓰고 다닌다. 동네 장터의 돈과 힘에 주눅이 들어 쉬쉬하던 못난 부모는 이제 와서 안달이 났다.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집이 없고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자식들의 미래가 없다. 도둑이 담을 넘어오면 피를 흘려서 싸움을 해야 한다. 기억하기도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몇 년 전에 집에 떼강도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목숨을 잃어가며 그 떼강도들을 막아주어서 우리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한 가정을 지키는 데도 이렇게 피와 땀이 필요하다. 영토도 마찬가지다. 피 흘리고 지키지 않으면 국경선은 언제나 바뀐다. 우리의 국경선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는 유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 속에는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킨 영광의 시대도 있고 독도를 포기한 더러운 시대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제 땅을 양보하고 세계화를 위해 역사 교과서를 던져버린 작금의 우리에겐 독도의 미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진리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일본의 역사왜곡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파문이 해결되기도 전에 일본이 한국 역사를 더욱 왜곡한 교과서를 펴낼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한·일 외교관계가 냉각되고 있다. 일본의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식민 통치를 미화한 역사 교과서는 우익계열의 출판사인 후쇼샤(扶桑社)가 검정을 신청했고 결과가 다음달 초 나올 예정이다. 일본 교과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사를 왜곡 기술해 왔는데 이번 교과서는 더욱 개악한 내용이다. 특히 새 교과서는 독도의 전경 사진을 추가하고 ‘한국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다케시마’라는 설명을 달고 있어 독도의 영유권까지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독도 문제와 더불어 국민들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강력히 대응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정·관계 채널을 통해 우려와 유감을 표시하고 일본 정부가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갖고 검정 작업을 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배경과 과정 일본은 패전 후 천황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일부 우익 지배층은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황국사관의 부활을 꿈꾸고 시도해 왔다. 황국사관이란 일본이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아시아 각국을 멸시하며 정복 정책을 펴 나가기 위한 바탕이 되는 사관이다. 왕이 태양신의 자손이고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의도적으로 조성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1955년 우익 보수 성향의 자민당이 영구적인 집권 체제를 갖춘 뒤 일본의 우익주의는 일부가 아닌 전 국민적인 일본 정권의 이념이 되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처음으로 역사 교과서 문제가 도마에 오른 것은 1982년 교과서 파동 때다. 한국과 중국 정부를 비롯한 각국은 강력하게 항의했고 일본은 일단 후퇴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의 우익 성향은 사라지지 않은 채 일본 사회를 계속 이끌고 있고 패권주의와 정복욕을 버리지 않았다.1990년대 들어 우경화·국수주의화 경향은 더 강해져 일본 제국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여론 몰이를 하게 됐다. 수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며 군국주의 부활에 앞장섰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 사례 일본의 교과서에서 이미 왜곡, 기술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고대 일본이 이미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고 갑오 농민 봉기나 혁명도 난리 폭동으로 비하했으며 러일 전쟁의 승리가 백인에 대한 승리로 아시아 민중을 위한 것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을사조약 강요를 완곡하게 표현했다. 또 한국 병합의 합법성을 강변했으며 한국인의 항일 투쟁을 축소 왜곡하고 일제의 징병, 징용과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을 축소 은폐했다. 전범 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했으며 침략 전쟁을 아시아 민족 해방 전쟁으로 정당화했다. 이와 함께 침략 전쟁에서 자행한 만행인 남경 학살 같은 중대 사실의 삭제하거나 축소했다. ●후쇼사 교과서의 왜곡 내용 1. 러일전쟁=러시아가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고 극동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일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술한 부분은 일본의 단정적 주장이며 근거가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본은 이번에도 러시아 위협론을 강조하며 개전의 책임을 러시아에 떠넘기고 전쟁을 시작하게 된 자국 내부 문제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2. 한국병합=‘병합 이후 근대화를 진행했다.’는 주체를 일본에서 조선총독부로 바꿔 구체화했다.2001년 신청본과 검정본에서 볼 수 없었던 ‘근대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조선 침략 사실을 노골적으로 미화했다. 3. 종군위안부 피해여성 =2001년판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를 부정해 신청본에서조차 싣지 않았다. 4. 강제동원=교과서는 2001년과 마찬가지로 ‘종군 위안부’ 사실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2001년도에 비해 일제 정책들의 강제성을 언급하지도 않았다.‘여러가지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하였다.’나 ‘창씨개명이 강제로 사용하게 됐다.’는 내용이 모두 빠져 있다. 5. 대방군=황해도 봉산지역에 있었다는 게 통설인 대방군을 ‘중국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 서울 근처’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사가 중국이 설치한 군현에서 시작됐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로 판단된다. 6. 임나일본부설=‘야마토 조정의 외교정책’ 아래 ‘조선반도의 동향과 일본’이라는 제목을 ‘야마토 조정과 동아시아’로 수정하고 소항목으로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를 설정해 일본의 임나 지배와 출병을 확실하게 서술했다. 7. 조선반도와 일본=2001년과 마찬가지로 조선을 ‘일본을 향하여 대륙으로부터 하나의 팔처럼 돌출된 반도’라고 기술했다. 또 ‘조선이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 방위가 곤란해 조선의 근대화를 원조했다.’는 기술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러시아로 떠넘기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일본의 이런 왜곡에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나서야 한다. 일본 정부에 역사 왜곡 사례를 정정해주도록 강력히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대일 추가 문화개방을 중단하고 진행 중인 협력 관계도 중단하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또 국제 회의를 통해 역사왜곡 사실을 알리고 세계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중국이나 북한과 연계해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 나아가 국내에서는 객관적인 사실(史實)에 대한 연구에 더욱 힘쓰면서 한편으로는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아, 우리가 즐겨써 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 조차도 큐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지난 10일. 일본 시마네현의회 총무위원회가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안을 가결시켰다. 대통령과 한국 외무부가 아무리 ‘내 마누라론’을 주장하고, 침묵으로 묵살하고, 소극으로 일관해도 일은 끝내 벌어진 것이다. 사실 흥분할 것도 없다. 사태는 예정된 수순을 따랐을 뿐이므로. 주한 일본대사의 당당한 영유권 주장, 아사히신문 경비행기의 독도 진입작전, 게다가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한 국내 극우인사들의 맞불작전까지, 돌이켜 보면 우연은 하나도 없다. 영토분쟁을 표면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가기 위한 일본 지도부의 야욕이 마각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19세기 에도막부, 홋카이도 식민화 ‘다케시마’ 주장은 망언이 아니며, 망언은 실제로 없으니 망언이란 말을 써서도 안된다. 체계적이며, 장기지속적인 심대한 해양정책에서 비롯된 국가의지의 또다른 표현일 뿐 결코 돌출발언은 아니다. 일본의 노골적인 행태는 가히 고삐 풀린 망아지 수준이되, 관·민 합동으로 질서정연하게 치고 빠지면서 주연·조연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등 화려한 연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시네마현의 조례 제정을 일본 정부가 만류했다고 하나 전혀 믿을 게 못된다. 양동작전일 뿐이다.‘식민지근대화론’의 미몽에 취해 선전·선동을 일삼던 지식인들을 비롯, 차제에 지난 수백년간 일본이 아시아 바다에 남긴 족적을 단계적으로 살펴 감고계금(鑑古戒今)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19세기에 에도(江戶) 막부는 ‘숲속의 사람들’ 아이누족의 영토였던 북해도, 즉 홋카이도를 식민화한다. 일단의 식민경영 세력이 ‘숲의 섬’을 치고 들어갔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 보호구역에 갇힌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아이누들은 박제화되어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2만여명의 혼혈아로 잔존할 따름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에 이어 사할린으로 손길을 뻗친다.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반환문제로 시끌벅적하지만, 사실 러시아도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없는 나라다. 차르 시절,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동진을 거듭해 사하·축치·에벤키·캄챠달 등이 살던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들 아닌가. 일본은 이어 남쪽의 류쿠(우리측 사료에는 유구로 기록됨)를 병합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붙인 이름이고 본래는 류쿠국이었다. 독립 왕국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과도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며 조공·중계무역에 힘써 문화가 크게 번성한 나라였다. 무역선 활동 범주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등 서남아시아까지 뻗친 해상국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 성립 6년째 되던 1609년 규슈 남부의 번주인 사쓰마한(薩摩藩)은 3000군사로 류쿠를 점령한다. 단, 정략적 입장을 취해 국제무역에서 엄청난 차익을 남기는 사탕수수 같은 경제적 수탈은 감행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수준에서 방관·조절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류쿠는 일면 일본에 수탈당하면서도 중국에 조공의 예를 갖추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다. 사실 사스마한의 점령 이전에도 류쿠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 왔으니, 류쿠와 일본의 악연은 해묵은 것이다. 그러던 일본은 1879년 드디어 ‘류쿠 처분’을 단행한다. 이로써 독립왕국 류쿠는 오키나와현으로 강등되어 일본에 병합된 이래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일본의 해양식민화 정책은 전략적 포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집요하게 기다리며 정확히 잡아먹을 시기를 노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日정부, 남양군도 침략행위 전면 부정 1874년 청·일전쟁의 전후 보상으로 타이완을 챙긴 것은 교과서에 나온 상식.‘대륙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긴 셈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길 자격이 있는지도 되물어야 한다. 타이완에는 푸젠(福建) 등 남부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도 많았지만 이른바 타이완 원주민인 토착 타이완족이 살고 있었다. 일본의 타이완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들의 운명 역시 아이누처럼 박제화되고 만다. 타이완총독부에서 갈고 닦은 식민경영의 노하우가 이후 고스란히 조선총독부로 전수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해양식민화가 홋카이도, 사할린, 류쿠, 타이완 같은 섬 정도에 그친 것은 아니다.1919년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본은 사이판, 괌 등이 속한 이른바 남양군도를 자치령으로 분배받는다. 세계열강의 태평양 분할정책에서 그 지분을 챙긴 것. 남양군도는 서태평양 적도 이북의 작은 섬인 미크로네시아의 동쪽 끝 카리바시와 서쪽의 괌을 제외한 엄청나게 드넓은 바다.19세기말 이래로 독일이 지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령이 되었고,1947∼1986년에는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은 미국의 태평양 신탁통치제도가 되었으니, 태평양은 태평과는 무관한 격동의 바다였다. 일본인들은 남양군도로 들어가 설탕, 술, 수산가공품 같은 사업을 펼쳤으며 한때 사이판의 일본인이 10만을 헤아리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패전 후 최초로 오는 6월 극우인사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대동하고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전몰자들을 추모할 계획이다. 남양군도에 대한 침략행위의 전면 부정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일왕이 선 격이다. 당연히 대표적 극우언론인 산케이는 일왕의 사이판 방문 소식에 ‘감격해 하며’ 이를 전면에 도배하는 충성을 과시했다.‘위령의 여행’으로 묘사하면서 ‘남양군도’를 지배하던 향수를 노골적으로 되살려 낸 것이다. 팔라우의 수도인 코로(Koror) 외곽으로 빠지다 보면 코발트빛 바다 위에 ‘아이고 브리지’가 떠있다. 머나먼 팔라우까지 징용왔던 한국인들이 기아와 고통 속에 ‘아이고’를 연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오죽하면 ‘아이고다리’로 명명되었겠는가. 정신대로 끌려온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하루에 수십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피를 토하고 죽어간 남양군도로 ‘신의 아들’이 ‘위령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한 즉,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격을 높여 다시 대양으로 진출하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이른바 태평양전쟁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듯 세계대전의 본질은 해양패권의 각축이다. 일본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사이판과 괌은 물론 필리핀, 팔라우, 티니안, 얍, 뉴기니 같은 섬, 그리고 서진을 거듭하여 인도네시와, 말레이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식탐을 과시했다. 우리의 인식은 대륙 지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해양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영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기다리다 덮치기… 집요한 日 해양정책 일본은 세계열강의 해양 재편성에 기초한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는 국제해양법 신질서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기왕에 문제가 되어온 조어도, 일명 센카쿠열도 문제로 중국과 심각한 해양분쟁을 일으킨지 오래다. 미래의 해양자원을 염두에 넣는다면 일본이 조어도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너무도 확실하다. 남쪽으로 눈을 돌려 손톱만 한 바위에 불과한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로 명명하고 자기 영토에 포함시켰다. 해양과학자들까지 동원해 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침대만 한 섬 하나에 290억엔을 퍼부었다. 이로써 자신의 영토(38만㎢)보다도 넓은 40만㎢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하게 된 것. 나아가서 태평양 복판에 떠있는 미나미도리까지 영토로 선포했다. 이렇듯 일본은 해양 영토에 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독도가 어찌 그들의 눈독에서 빠질 수 있었으랴. 이런 만행이 대중국 포위전략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가능할까. 미국 역시 ‘해양제국’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하는 단서가 마련되지만, 기실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해 섬 국가인 필리핀과 반도국가인 한반도를 ‘빅딜’하는 국제적 공모에 가담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태평양의 섬은 거의 없다. 태평양은 공해가 분명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대주주’행세를 하고 있다. 오키노도리시마와 미나미도리는 남양군도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일본이 만들어낸 ‘바다 땅따먹기’의 야심작이 아니겠는가. 근래 일본 정부는 해양권 확보에 노골적이다. 경제산업성, 외무성, 국토교통성 등이 주동이 된 연락회의가 공개적으로 열린다. 숨길 게 없다는 식이다. 독도 영유권까지 인정받는다면 일본은 전체적으로 405만㎢의 배타적 경제수역, 즉 일본 영토의 10배를 뛰어넘는 방대한 해양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제주도 한경면에는 일본군이 옥쇄를 대비해 만든 거미줄처럼 얽힌 가마오름땅굴이 있다. 버려졌던 이 땅굴은 한 개인의 희생적 노력으로 현재 평화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곳 이영근 관장은 “현재 공개된 굴은 극히 일부로, 모두 바다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땅굴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와 일본군 알트르비행장을 벗어난 송악산 해변에도 미군기를 겨냥했던 동굴들이 줄지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구체적인 해안진지가 한반도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평화’라도 韓·日 인식 달라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을 감행했던 규슈 남쪽 가고시마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란(指宿) 바닷가에도 같은 이름의 ‘평화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소년병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모정을 빙자한 최루성 역사 회고만 존재할 뿐 전쟁 자체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평화’를 거론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는 상상을 초월한다.‘제국의 바다’를 잊지 못하는 일본의 추억만들기가 계속되는 한 ‘현해탄’의 파고도 계속 높아질 것이다. 아, 우리가 즐겨 써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조차도 규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해방 60주년, 일본은 20세기형 제국의 바다를 21세기에 다시 ‘신장개업’했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우선 청와대와 외무부의 공식 입장 및 향후 일정부터 듣고 싶다. 또 ‘내 마누라타령’으로 일관하면서 질질 끌려다니다 끝내 국제사법재판소 법정마당까지 끌려가 내 영토를 약취당하고 말 것인가.
  • [일본교과서 왜곡 파장] 개악된 후소샤 교과서

    구체적 서술만 단편적으로 따지자면 2005년판 후소샤 교과서는 4년 전에 비해 개선된 곳도 있고 악화된 곳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찬찬히 뜯어보면 ‘나아졌다.’고 평가할 수가 없다. 나아졌다고 볼 만한 부분은 고대사 왜곡이 다소 줄었고 근·현대사에서 일부분이 빠졌다는 정도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전향적인 서술의 변화가 있었다기보다 분량을 조정하다 보니 그냥 줄거나 빠진 것에 불과한 측면이 크다. 오히려 일제 침략과 관련된 근현대사 부분은 근거자료가 보강되고 분량이 늘어나는 등 더 악화됐다. 부분적인 첨삭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제국주의 군국주의 일본의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기름기와 군살’만 뺐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2005년판 후소샤 교과서 내용이 알려지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다.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2002년 4월 일본 문부성이 개정한 ‘중학교 학습지도요령’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10년에 한번씩 개정되는 학습지도요령은 교과서 검정의 기준으로 쓰인다.2002년 개정 때는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문구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001년 후소샤 교과서 파문이 일어난 뒤 2002년에 개정된 학습지도요령에 추가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상 문부성이 일본우익진영의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을 수용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전체적인 역사교과서 편제의 변화도 의미심장하다. 주입식·암기식 공부를 지양하고 역사에 흥미를 가지도록 유도하라는 게 학습지도요령의 요구다. 이는 고등학교·대학교 때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으니 중학교 수준에서는 현재의 일본과 관련있는 사항을 위주로 서술하라는 의미다. 이 요구는 ▲대항목 소항목 통폐합을 통한 전체적인 역사교과서 분량의 축소 ▲고대사 부분 축소 및 근현대사 부분 강화 등으로 고스란히 반영됐다. 독도문제가 언급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이런 요소들이 2005년판 후소샤교과서에 어떻게 침투했는지는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의 분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반도는 대륙에서 일본으로 뻗어있는 팔뚝 같아서 위협적이라는 1903년 당시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의 ‘팔뚝론’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것은 조선 강제병합과 대동아전쟁은 어쩔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덕분에 근대화됐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는 꼭꼭 숨겨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쿠르드족 귀환 새정부 출범뒤 본격 논의”

    |바그다드 모술 연합|이라크 총선에서 승리한 유나이티드이라크연맹(UIA)은 오는 16일 개원할 제헌의회를 통해 쿠르드족 공동정당인 쿠르드동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10일 밝혔다. 이에 따라 키르쿠크를 쿠르드 자치지역에 편입시키는 문제와 후세인 시절 키르쿠크에서 강제추방당한 쿠르드족의 귀향 문제도 본격 논의될 예정이다. 시아파 정당 연합체인 UIA는 지난 총선에서 전체 275개 의석 중 146석을 차지해 다수당이 됐고, 쿠르드동맹은 77석을 얻어 제2당이 됐다.UIA는 총리를, 쿠르드동맹은 대통령 자리를 맡을 것이 확실시된다.UIA는 이브라힘 알 자파리 임시정부 부통령을 총리로, 쿠르드동맹은 쿠르드애국동맹(PUK) 총재인 잘랄 탈라바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예정이다. 양측 관리들은 새 정부 출범 뒤 1980년대 후세인 정권의 ‘아랍화’ 전략에 따라 북부 유전지대 키르쿠크에서 강제 추방당한 쿠르드인 10만명의 귀환문제가 본격 논의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쿠르드동맹 관계자는 “키르쿠크 문제는 2단계로 해결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면서 첫 단계는 우선 새로 구성되는 과도정부가 키르쿠크 상황을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두번째 단계는 키르쿠크를 쿠르드 자치지역(쿠르디스탄)에 병합하는 문제가 헌법 마련 과정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라크 북부 모술의 장례식장에서 10일(현지시간)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 최소 47명이 숨지고 80여명이 부상했다고 목격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밝혔다. 이번 자폭테러는 시아파-쿠르드족 연정 구성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다수파인 시아파를 겨냥해 발생한 것이어서 종파간 갈등을 고조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날 자폭 테러는 급진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모술 지역 대리인 히시마 알 아라지에 대한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던 한 건물에서 발생했다. 목격자는 “자살테러범이 장례식이 열리는 건물 안에서 폭탄을 터뜨렸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고 말했다.
  • [열린세상] 식민지근대화론의 커밍아웃/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 우익성향의 잡지에 “일제의 식민지배는 축복”이라는 논지의 글을 기고해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대부분의 네티즌, 언론, 시민단체가 그의 주장을 맹공하는 논평을 내놓고 있다. 그의 ‘식민지 미화론’은 소위 일본발 ‘망언’보다 훨씬 수위가 높고 표현과 논리도 거칠다. 각계의 대응도 거칠고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논란에 끼는 것은 유쾌하지 않지만, 파문이 일어난 뒤 오히려 “공론화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반응에서 보아 사회와 학계에 끼칠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돼 한마디 거들기로 한다. 식민지배 문제에 초점을 맞춘 여론의 질타와는 달리 한 교수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의 의미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치적 발판을 붕괴시키고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을 무력화해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꾀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학자다운 판단이지만 동시에 그가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지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구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론’으로 분식(粉飾)한 그에게, 노무현 정권의 탄생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이다. 극단적 수구냉전 사상에 젖어 있는 그는 노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을 좌파적·친북적인 것으로 보고, 일련의 민주개혁 입법을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격한다. 이처럼 그의 주장은 노무현 정권과 정책에 대한 증오감에서 기인한다. 노정권을 공격하고 박정희 독재권력을 옹호하는 연장선상에서,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근대화 찬양,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의한 병합의 불가피성을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역사의식은 일본 극우 인사들에게서 자주 나오고,‘수탈을 위한 개발론’이라는 학술적 주장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사회의 이른바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이 일제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보다도 크거나 작게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친일행위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옹호, 자랑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그의 경험적 인식은 아니겠지만 그가 옹호하는 집단을 대변한 효과는 충분하다. 민족을 억압하고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기득권층으로서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면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닌가. 기득권층의 경제력 독점에 의해 심각해진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독점했던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야 최소한 박정희 개발독재의 경제적 효과만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와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옳은지 그른지는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교수의 역사관과 세계관은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관점은 분명 아니다. 반공과 반북만이 모든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오늘의 상황을 자신이 자주 언급하는 국제정세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오직 냉전시대의 맹목적 반공주의에 매달리고 있다. 반공을 위해서는 민족의 희생도 감수한다. 나는 이번 파문을 보면서 그가 객관성·학문성을 들먹이면서도 주장 전체가 들뜬 적대적 감정에 충만해 있는 점이나, 그의 주장이 소위 망언의 종합판 같은 성격을 지닌 점보다도, 한국의 명망 있는 전문지식인이 친일행위 옹호의 금기를 과감하게 깼다는 점에 걱정이 앞선다. 사실 최근 학계에서는 탈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신학설인 양 주목받아 왔다. 식민지 경험 내지 파시즘을 근대화의 길로 인정하는 근대화론의 해묵은 이론을 가지고 일제 식민지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없었다고 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식민지 미화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극구 발뺌해 왔다. 그러나 이번 한 교수의 식민지 미화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커밍아웃’이 어떠한 모습일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학술적 형식을 띤 보다 충격적인 식민지 미화론의 출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日식민지배는 축복” 한국지식인의 망언

    “日식민지배는 축복” 한국지식인의 망언

    |도쿄 이춘규특파원|한승조(75)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극우 성향 잡지 기고문을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원망하기보다는 축복해야 하며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 물의를 빚고 있다. 한 교수는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 자매지인 월간 ‘정론(正論)’ 4월호에 기고한 ‘공산주의ㆍ좌파 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한일병합을 재평가하자’는 글에서 “당시 국제정세와 열강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한국이 러시아에 점거ㆍ병탄(倂呑)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며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는 양국의 인종적 또는 문화적인 뿌리가 같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 통치를 거쳐 더욱 성장하고 발전, 강화됐다.”며 “역사나 어학, 문학 등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도 일본인 학자와 그들의 제자 한국인이 아니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이런 의견에 대해 흥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여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이 정당한 학문의 자세”라며 “일제가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국어 사용과 연구를 금지했다고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난 후 한국어 문학이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견줘 “러시아나 미국, 영국 등의 지배를 받았더라면 문화적 뿌리가 너무 달라 민족문화 성장과 심화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한국의 좌파 세력이 적대시하는 대상은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 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보다는 크든 작든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었다.”며 “이들을 모두 친일파로 추궁해 정치적으로 무능화시키고 좌파 세력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성(性)도 혁명의 무기로 활용하자는 말이 있다.”면서 “전쟁 중 여성을 군인의 성적 위안물로 삼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며, 그것도 일시적이고 예외적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기고문이 보도된 후 “일본의 식민지배로 오히려 민족의식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며 소신에 따라 쓴 것임을 거듭 밝혔다. 그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으며 현재 ‘자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taein@seoul.co.kr
  •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이창위 지음

    2005년 을유년은 한민족에게 오욕과 환희의 역사가 오버랩되는 해다. 정확히 1세기 전인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본격화됐고,60년 전, 바로 전 을유년이었던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참혹한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수십년 만에 거대한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경제강국이란 지위에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역사적 죄악을 희석하는 망언을 툭툭 던지며 주변국들에 파시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여전히 불씨가 살아있는 듯한 일본 파시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일본 군부의 광기는 언제 어떻게 탄생했고,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이어졌을까.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 군국주의 태동 3·1절을 앞두고 일제 침탈과 파시즘, 을사조약, 친일문제 등을 재조명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중 침략전쟁의 뿌리인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과 파시즘의 형성과정, 일본군 특유의 정신문화와 병리적 군사문화 등을 분석한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흥망사’(이창위 지음, 궁리 펴냄)를 중심으로 신구 일본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1974년 일본 국민과 언론은 오노다 희로라는 육군 소위의 귀환에 열광했다. 그는 2차대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44년부터 30년간 필리핀 루손섬 정글에서 일본의 패망을 부인하며 유격전을 계속해온 인물이었다. 죽지 말고 데리러 올 때까지 버티라는 상관의 명령 하나만을 믿고 산속에서 30년을 버틴 그의 눈동자는 광채가 번득였고, 총검은 여전히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를 찾으려는 일본인들, 심지어는 가족의 모습까지 먼 발치에서 보았던 그는 일본의 패전을 믿지 않았고, 결국 30년 전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직접 투항명령서를 전달받고서야 1974년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무 완수를 위한 30년 전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뿐,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도리어 일본전쟁이 모두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듬해 브라질로 이주했다. ●진주만기습·가미카제등 상세히 소개 오노다 소위는 극단으로 치달았던 일본 군국주의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은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을 러일전쟁의 승리에서 찾는다. 그 이전에 이미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로 상당한 군사력을 갖고는 있었지만, 러일전쟁 승리 후 지나친 자신감과 착각에 빠졌으며, 그후 일본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가 되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은 조선병합,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통하여 군부 파쇼체제를 확립하고 대미 개전에 이르게 된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시바 료타로는 광신적 군부가 이끌고 우중이 지지한 일본을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달리는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책은 태평양전쟁의 주요 국면인 진주만 기습, 미드웨이 해전,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가미카제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다. 자결을 앞둔 일본군 장교들은 일왕에 대한 충성과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최후진술을 남겼는데, 비장함을 넘어 광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국력의 확연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무모한 항전 뒤엔 군인의 정신자세와 행동규범을 규정한 ‘군인칙유’‘전진훈’이 있었다. 특히 일왕이 발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명분 하에, 태평양 전쟁 도발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가 공포한 전진훈(戰陳訓)은 군인들이 금과옥조로 삼아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전진훈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 최고의 명예라고 강조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사고를 주입시켰고, 특히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제2장 제8조)는 조항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헛되이 죽어갔다. 생명을 경시하는 무모한 전술과 자결 각오 뒤엔 전진훈에서 강조한 도착적 군사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전진훈’ 통해 전체주의 사고 주입시켜 지은이는 책 말미에서 패전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정치적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현재의 일본은 패망한 일본의 밑그림 위에 덧칠된 그림이라고 본다. 그 밑그림이 다원화된 국제사회에서 다시 복원돼 서글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은이는 소망한다.1만 2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이경민 지음

    ‘기생’이 언제부터인가 문화적 ‘양념’을 넘어 주요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서는가 하면, 번듯한 전시를 빌려 생생한 사진과 평소 쓰던 잡동사니까지 내보이며 내밀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보는 사진과 문학, 영화속 기생들은 과연 실체적 진실을 담고 있을까?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글 이경민, 사진 중앙대DCRC, 사진아카이브연구소 펴냄)는 이런 의문을 배경으로 사진속 기생들의 실체를 찾고, 이를 통해 일제에 의해 강제된 ‘근대의 실험’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저자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은 기생의 표상일 뿐 기생 그 자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기생을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창출된 개념이라고 정의하고,‘기생만들기’에 참여한 여러 담론들을 추적한다. 그 담론들은 다름 아닌 성담론, 위생담론, 민속(풍속)학, 인종학, 우생학, 오리엔탈리즘이며, 결국 식민주의라는 거대담론으로 결합된다. 식민주의 담론의 주체는 물론 일제다. 책에 의하면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철저한 식민주의 준거틀 속에서 정치·경제·문화·예술 등에 대한 다양한 조사사업을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예외없이 일제가 의도한 이미지로 창출되는 것이다. 사진엽서나 신문, 잡지, 사진첩, 포스터 등에 ‘박제’된 기생들은 기품 있는 예기(藝妓)나 새로운 근대여성의 모습이 아닌 반강제적으로 연출된 억압적 포즈속에서 잠재적인 매춘의 조짐을 보여줄 뿐이다. 책은 다양한 인쇄 도구속에 수록된 기생사진들을 생산 맥락에 따라 정리하면서 기생의 이미지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핀다. 또 기생이 근대적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근대적 매춘제도와 연계돼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되었는지 고찰한다.2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한·일수교 40주년 ‘민족주의 정체성’ 심포지엄

    2005년은 여러 의미가 겹치는 해다. 한·일수교 40주년 광복 60주년 한일병합 100주년 등. 그러다 보니 올해에는 한국과 일본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지어 왔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활발하다. 16일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21세기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심포지엄은 한국의 정체성을 다루는 한국학이 어떤 내용이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기조발표에 나선 한림대 한영우 특임교수는 탈민족주의자들의 국사해체론을 반박했다. 그는 국사해체론의 뿌리를 일본 식민주의 역사가에서 찾은 뒤 “배타적·국수적 민족주의는 비판돼야 하지만 민족적 특수성을 거부하거나 민족의 실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의 새로운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앞으로 한국학 연구의 초점은 “왕조의 장기지속성이 보여주는 사회통합력과 신뢰구조에 대한 이해”여야 하고 그 핵심에는 “선비정신이 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한 특임교수의 주장이 마냥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만 집착해 스스로 국학으로 내려앉은 한국학의 시야를 동아시아로까지 틔워줘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한림대 사회학과 전상인 교수는 한국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기존 주장을 재검토하면서 “학문을 하는데 일종의 ‘운동’ 정서를 버려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서구의 근대화 과정이 절대선도 아닌데 서구 근대화의 틀에 맞게 한국사를 끼워 맞추려는 조급증을 지적한 것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 몸담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더 신랄하게 기존 한국학을 비판했다. 그는 기존 한국사 연구가 무비판적으로 서양의 역사발전론인 ‘고대-중세-근대’ 구분을 인용하고 있다면서 ▲비교사의 관점 ▲동아시아사의 관점 ▲중국사에 대한 이해 등을 통한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전 교수와 미야지마 교수의 이런 비판을 거꾸로 일본에 투영한 심포지엄도 열렸다. 앞서 15일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와 BK21일본연구팀이 함께 주최한 ‘일본의 발명과 근대’ 심포지엄이다. 초점은 ‘일왕제의 위력’에 맞춰졌다. 근대 초입 대다수 사람들이 일왕이 누군지도 모르던 일본은 20세기 초반 절대적 일왕제가 성립했다. 일왕제 폐지를 내걸었던, 그래서 가장 이단적이었던 일본 공산당원 대부분이 전향했다는 사실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공산당 최고 이론가 사노 마사부는 전향 뒤 아예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내세울 정도였다. 성균관대 정혜선 교수는 만주사변에 비판보다 열광을 보내는 일본 민중과의 괴리감 때문이었다고 해석했다. 이런 힘은 ‘일왕=일본역사=국가의 중심’이라는 도식에서 나온다. 이것은 아직도 연례행사 같은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잘 드러난다. 단순한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한양대 박규태 교수의 결론이다. 박 교수는 일본 근대화 초기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던 ‘신사 비종교론’으로 근대국가의 정교분리 원칙을 피해나간 뒤 신사와 일왕제가 결합하면서 사실상 국가종교화됐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의 정체성을 둘러싼 이런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민족주의적 정체성은 여전히 강한가. 경희대 허우성 교수는 아사바 미치아키의 ‘신체성’ 개념에서 그 답을 찾았다. 너무도 이기적이지만 자연스럽게 체화된 감정, 그것이 민족주의 정체성이다. 허 교수가 비판적 연구자들에게 “매국노로 비난받을 각오”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18∼19일 한국일본학회 주최로 고려대에서 열리는 ‘한·일수교 40주년 기념세미나’는 일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목표로 삼았다. 기획특집으로 ‘일본역사교과서와 역사인식 문제’도 다룰 예정이어서 기억에 대한 논의까지 함께 벌어질 예정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사]

    ■ 서울특별시 ◇서기관 승진△법무담당관 金榮成△혁신분권담당관 鄭和燮△시민협력과장 金光禮△교통지도단속반장 李相炫△상수도사업본부 경영부장 呂圭鎬△영등포수도사업소장 崔潤初△행정국 朴源大△공무원수련원장 許權寧△상수도연구소 총무과장 柳然泰△행정국 崔台奎△자치인력개발원 교육파견 李武寧△〃 姜漢洙△〃 丁連鎭◇서기관 전보△자치인력개발원 교육파견 崔鎬權△〃 崔昌濟△〃 尹景琡△〃 李鍾淳△〃 白虎△〃 鄭基完△〃 朴起用△〃 金大還△〃 金成中△〃 申漢撤△〃 孫炅廈◇사무관 승진△신현창△김상래△문유천△정진송△김명근 ◇사무관 전보△은평병원 류석양△재무국 이계헌△자치인력개발원 교육파견 성은희△〃 이상래△〃 이종하△〃 정운진△〃 윤영용△〃 이용우 △〃 이재덕△〃 김창년△〃 박대군△〃 송윤락△〃 이정화 ■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부장급△수소·연료전지연구부장 尹旺來△화석에너지·환경〃 金在浩△에너지신소재〃 安永洙△신재생에너지〃 姜龍爀△정책〃 金鍾郁△고분자연료전지연구단장 金昌洙◇과장급△전산관리과장 安商奎△인사〃 金重甫△자재〃 李英鎭△시설안전〃 車德成◇센터장급△수송에너지연구센터장 李英在△신연소시스템연구〃 崔尙一△미활용에너지연구〃 李永秀△친환경건물연구〃 趙秀△폐기물에너지연구〃 盧南善△배가스처리기술연구〃 文勝鉉△에너지재료연구〃 韓寅燮△고온태양열연구〃 趙德基△수소제조연구〃 裵基匡△수소시스템연구〃 李鎬泰△신연료전지연구〃 宋珞鉉△기술정책연구〃 尹龍鎭△산·학·연기술협력〃 河瑛鎭△창업보육·교육〃 李興周△전기·조명연구〃 韓秀彬△폐열이용연구〃 全源杓△열병합·보일러연구〃 金赫柱△연소배가스사업단〃 閔丙武△열공정연구〃 李載區△청정에너지연구〃 李昌根△분리공정연구〃 金鍾南△대기환경연구〃 李時熏△기능재료연구〃 金鴻守△촉매응용연구〃 宋光燮△센서소재연구〃 韓相道△에너지변환·저장연구〃 裵崗△저온태양열연구〃 李東源△태양전지연구〃 尹慶勳△태양광시스템연구〃 劉權鍾△풍력연구〃 慶南浩△바이오매스연구〃 李震石△지열·수력연구〃 李義駿△전환공정연구〃 鄭憲△수소분리·저장연구〃 金台煥△기술분석연구〃 洪鍾哲 ■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실)△논설실장 方元錫 ■ 동양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 韓尙洙△채권운용팀장 韓宰榮
  • 최순영 前신동아회장 법정구속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 전수안)는 25일 외화를 밀반출하고 부실 그룹 계열사에 1조 2000여억원을 불법대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에게 징역 7년과 추징금 2749억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에 따라 1999년 2월 구속됐다가 8개월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5년여 동안 불구속 재판을 받았던 최 씨는 보석이 취소돼 다시 수감됐다. 최씨는 96년 6월부터 수출서류를 위조해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가운데 1억 6000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리고 상환 능력이 없는 그룹 계열사에 1조 2000여억원을 불법 대출한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상고심에서 ‘자수를 이유로 감형한 것은 잘못’이라며 징역 3년에 추징금 2192억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최씨는 이와는 별도로 97년 8월 가공의 역외펀드를 설립해 1억달러를 유출한 혐의와 대한생명의 자금 172억원을 학원 재단에 기부한 혐의 등으로 추가 기소돼 2003년 11월 1심에서 법정구속없이 징역 5년에 추징금 1175억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재판부는 이날 두 사건을 병합해서 선고했다. 재판부는 “회사가 어려운데도 해외에 1억달러 이상을 불법 밀반출하고 처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원 등에 거액을 기부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은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쓰레기 태우고 100억원 수입까지

    경기도내 시·군에서 운영중인 소각시설이 연간 100억원대의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등 1석2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는 3일 수원 영통·용인 수지 등 도내 18개 생활폐기물 소각시설에서 쓰레기를 태우면서 발생한 소각열을 지역난방공사 및 발전소에 팔아 지난해 100억여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도 68억원보다 47% 늘어난 규모다. 재활용된 소각열은 무연탄 44만여t에서 발생하는 열량과 맞먹는다. 소각장에서 생산된 증기 여열은 배관을 타고 열병합발전소로 보내지며 발전소측은 이를 지역난방을 공급받는 시내 각 가정과 사무실 등지로 공급한다. 특히 소각장들은 수익을 주민복지사업에 환원함으로써 혐오시설 인식을 불식시키고 에너지 자원을 절약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 수원시 영통구 소각장의 경우 단지내 체육문화센터에 온수를 공급함으로써 민간시설보다 30∼40% 싼 가격에 수영장을 운영,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군포시 소각장은 쓰레기에서 나오는 고철을 수거, 지난 3년간 770여만 원의 판매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박신흥 도 환경국장은 “앞으로 건설될 소각시설은 설계단계에서부터 소각열 재활용과 주민복지사업 이용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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