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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술국치 100년] 이태진 교수는

    [경술국치 100년] 이태진 교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사학자다.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은 뒤 장서 35만권을 정리하던 중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 하나는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반환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는 한·일병합 불성립론이다. 그는 한·일 조약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 나갔다. 그의 작업이 일본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에서 진행된 일본 학자와의 논쟁이다. ‘한·일병합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머지 조약이나 협약은 문제가 없다.’는 일본 학자들과 집요하게 논쟁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2004년 일본 도쿄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도 하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전선’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의 또 다른 연구 주제는 다소 엉뚱해 보인다. 17세기를 중심으로 한 외계 충돌설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자연재해와 당쟁이 유난히 심했고, 서양에서는 페스트(흑사병)와 마녀사냥이 성행했다는 점에 주목, 전 세계적인 소(小)빙하기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유교’라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무리수를 둬야 했던 것도 조선 유교 문명의 힘이었다는 게 그의 반론이다.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나왔다. 1977년 서울대 강단에 선 이래 역사학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장, 서울대 인문대학장 등을 지냈다. 현 학술원 회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 ‘과거 100년’ 학계 돌아보다

    [경술국치 100년] ‘과거 100년’ 학계 돌아보다

    학계가 요즘 씨름하고 있는 주제도 경술국치 100년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지사 현창(顯彰) 어떻게 할 것인가-역사의 경험에서 배운다’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연 데 이어 한국역사연구회(‘강제병합 100년에 되돌아보는 일본의 한국침략과 식민통치 체제의 수립’), 한국근현대사학회(‘20세기 한국·한국인의 역사와 기억의 변용’), 동북아역사재단(‘1910년 한국강제병합, 그 역사와 과제’) 등도 잇따라 세미나를 열었다. 학술지들도 가세하고 나섰다. ‘역사비평’ 가을호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승렬(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연세대 연구교수의 글을 실었다. 이 교수는 일본의 유명 역사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언덕 위의 구름’에서 침략자인 ‘메이지 일본’을 순진무구한 소년의 이미지로 포장하는 모습을 지적한 뒤 “올바른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는 성장에서 공공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 명예교수도 100년 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편입됨)론을 주장한 일본이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동아시아 공동체로 돌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는 독립운동가 12명을 다뤘다. 한글학계의 거두로 상해임시정부에도 몸담았으나 광복 뒤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냈다가 연안파 숙청 때 제거돼 남북 양쪽에서 모두 지워진 김두봉,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으나 월북해 남한에서는 잊혀진 김원봉 등도 포함시켰다. “이들에게 이념이란 광복을 위한 것이었을 뿐인데, 후대 사람들이 이념의 잣대로 폄하하고 있다.”는 주장이 이채롭다. 계간지 황해문화에 실린 ‘식민지 100년:제국·식민의 기억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특집도 눈에 띈다. 뉴라이트 진영이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진이 내세웠던 ‘탈근대론’(좁은 의미의 근대비판주의)이 실은 친일옹호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대목이 특히 시선을 붙잡는다. 우선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연된 정의-두 개의 보고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기둥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수탈을 약탈로 제한한 뒤 식민지 수탈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이 교수는 일본이 돈 한 푼 안 주고 조선의 물건을 빼앗아간 것은 아니니 수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 대통령까지 나서 비판하는 것이 대기업의 납품가 후려치기다. 이영훈식 논리에 따르면 대기업 역시 돈을 아예 안 준 것은 아니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파 윤치호를 옹호한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에 대해서도 따끔한 질문을 던진다. “한 인간이 택한 정치적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라는 실천적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음에도 굳이 친일행위에 대해서만은 판단을 유보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 연구원은 “행위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있는데 이를 (박 교수 주장처럼) 구조의 문제로 돌리면 우리는 역사와 사회 앞에서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꼬집었다. 탈근대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치열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근대 자체가 식민주의를 잉태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 다시 말해 근본적인 책임을 묻는 작업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탈근대론이 책임회피론으로 이용되는 것일까. 하정일 원광대 국문과 교수의 ‘탈근대주의의 과잉 식민성 혹은 신실증주의’란 글에 해답이 숨어 있다. 하 교수는 탈근대론을 일종의 ‘신실증주의’라 부른다. 그는 “탈근대론자들의 신실증주의는 판단 중지 상태에서의 해석을 특징으로 한다.”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비평적 행위는 쓸모없는 일이고 남는 건 해석뿐”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판단을 중지하는 이유는 일제 치하 등과 같은 비상상황이기 때문이다. 탈근대론이라는 서구 최신 모델을 들여와 그럴듯하게 치장했지만 한풀 벗기고 나면 ‘식민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그럼 그 시절에 일본에 세금 낸 사람은 모두 친일파란 얘기냐.’라는 식의 어거지로 흐르는 이유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 한·일 시민단체 의기투합 ‘미래 100년’ 물꼬 트다

    [경술국치 100년] 한·일 시민단체 의기투합 ‘미래 100년’ 물꼬 트다

    #장면1 지난 5월10일 오전 11시30분 한국의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와 일본 도쿄 일본교육회관은 각각 취재기자들과 방송 카메라로 북적댔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대표들은 “100년 전 한국과 일본이 맺은 병합조약은 불의부당한 만큼 무효다.”라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낭독했다. 한국에서 109명, 일본에서 105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후 서명에 참여한 두 나라 지식인 숫자는 1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불법’이라는 표현 앞에 망설이던 일본 지식인들도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무효 선언과 사과 담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간 나오토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 #장면2 지식인 공동선언문이 나오기 몇 달 전, 언론에서는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의미심장한 시민단체가 만들어졌다.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 실행위원회’다. 결성은 일본 시민들이 먼저였다. 올 1월31일 도쿄 와세다 봉사원에서 창립행사를 가졌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왜곡된 과거사 인식, 식민주의 극복을 위한 일본 시민들의 역할 등을 둘러싸고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이후 ‘일본 실행위원회’는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수차례 벌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3월 ‘한국 실행위원회’가 꾸려졌다. 부끄러운 과거’ 100년을 반성하고 ‘발전적인 미래’ 100년을 모색하기 위한 한·일 두 나라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식인들이 주로 전자(前者)를 책임지고 있다면 후자를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시민단체의 대표 격인 한·일 실행위원회는 을사늑약 체결일인 지난 22일부터 선포일인 29일까지를 ‘강제병합 100년 한·일 시민대회’ 기간으로 정했다. 22일 도쿄에서 개막식을 가졌고, 29일 서울에서 폐막식을 갖는다. 박한용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 실행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은 “폐막식에서 식민지배 자체가 반인륜적 범죄임을 국제적으로 천명할 방침”이라며 “한·일 시민 공동선언문 외에 부속문서로서 한·일 시민행동 계획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는 한·일 시민 공동선언을 기초로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 공동선언을 끌어내는 한편 국제행동프로그램을 만들어 동아시아 시민연대조직도 구성할 작정이다. 해외에서도 동참한다. 일본이 벌인 전쟁에 강제 동원된 러시아 사할린 한인의 후예들은 29일 사할린에 모여 강제병합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집회를 갖는다. 전쟁 뒤 방치한 일본의 법적·역사적 책임을 묻고 강제 동원에 대한 사과와 배상도 요구할 계획이다. 시민대회 기간 국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고찰하는 국제학술대회 등이 열렸다. 백범 김구 선생 유적지를 좇아 전국 1470㎞를 자전거로 순례하기도 했다. 국내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이하 100추위)는 아시아 차세대 평화 리더들을 위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100추위는 지난해 4월 30여개 단체로 출발해 116개 단체로 세를 불렸다. 12주 과정의 강좌는 두 나라 역사에 대한 실체적 접근과 함께 역사 속 평화의 의미, 시민들의 역할을 조명한다. 청소년들과의 공유도 모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얼마 전에는 ‘100년 전의 한국사’라는 책도 펴냈다.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원했다는데 사실일까?’ ‘갑오개혁 주인공들이 돌에 맞아 죽은 까닭은?’ ‘일본에 병합을 요청한 조선인은 누구인가?’ 등 지난 100년의 역사를 쉽고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문답식으로 풀어 썼다. 일반인은 물론 청소년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교육현장의 역사 교사와 역사학자, 대학 교수 등이 함께 중요 질문을 발췌해 만들었다. 100추위는 지난해 8월 일본·타이완 등의 시민단체와 국제 합동워크숍을 가진 이래 ‘전쟁 없는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주제로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서울, 도쿄, 오사카, 교토를 거쳐 중국 난징, 미국 워싱턴, 뉴욕, LA, 독일 베를린 등에서 전시를 가졌다.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지식인들의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시민들부터 진정한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가 간 화해, 나아가 새로운 동아시아 공동체 질서의 출발점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 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간도 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한·일 강제병합 잊지 말자”

    3·1운동이 시작된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 행사가 열린다. 보훈처는 29일 오전 10시 광복회가 주최하는 한·일 강제병합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행사가 열린다고 27일 밝혔다. ‘그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라는 주제로 탑골공원 독립선언기념비 앞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광복회원, 학생,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장의 약사보고, 광복회장의 개식사, 국가보훈처장의 식사, 기념공연 및 결의문 낭독 순으로 진행된다. 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가 1995년부터 해마다 경술국치일에 추모제를 개최해왔지만 대규모 한·일 강제병합 행사가 기획된 것은 처음이다. 행사에는 1910년 8월29일 국권 침탈 소식을 듣고 자결한 열사들의 후손들도 초청되며 행사가 끝난 후 광복회원 등은 일본대사관으로 이동해 대사관 앞에서 ‘불법적인 한·일강제병합 조약 원천 무효’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 韓·日 이원 생방송

    ‘경술국치 100년’ 韓·日 이원 생방송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날이다. 이에 맞춰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28일과 30일 이틀 동안 일본 도쿄에 위치한 ‘도쿄 FM 스튜디오’와 서울 MBC 라디오 스튜디오를 잇는 이원 생방송 프로그램 ‘새로운 100년을 묻는다’를 진행한다. 100년 전인 1910년 8월29일 일본의 데라우치 조선통감과 조선의 이완용 총리대신은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했다. 이후 광복 65년, 국교 정상화 45년을 거쳤지만 한·일 관계에 드리운 그늘은 짙다. 강제징용자들, 위안부들 문제뿐 아니라 독도나 역사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진행자 손석희의 장기를 살려, 28일에는 야노 히데키 한·일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 도쿄조선중고급학교 교사 및 학생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야노 국장에게는 간 나오토 총리의 사과 담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 또 일본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짚어본다. 교사·학생 인터뷰에서는 해방 이후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들어본다. 30일에는 요코미치 다카히로 중의원 의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사이토 미즈키 코리아엔터테인먼트저널 기자를 만난다. 요코미치 의장과는 정부 각료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기로 결정한 배경, 조선왕실 의궤반환의 향후 절차와 일정, 아직도 풀리지 않은 과거사 문제 해결법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와다 교수에게서는 한·일 양국 지식인 1000여명이 함께한 ‘한·일 강제병합조약 무효 선언’이 어떻게 이뤄졌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들어본다. 한류 문제를 집중 취재하고 있는 사이토 기자와 한·일 문화교류 확대 가능성도 짚어본다. 재일 한국인 문제가 더 궁금하다면 27일 오후 10시55분 방영되는 ‘MBC 스페셜’을 챙겨볼 만하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자이니치(在日)’는 모두 60만명. 이들은 광복 뒤 분단으로 조선이 불구가 되자 일본에 남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MBC 스페셜’은 3명의 축구선수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정대세, 그리고 이충성과 박강조다. 이충성은 한국 대표로 뛰고 싶었으나 한국인의 냉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일본으로 귀화해 ‘리 다다나리’라 불리는 선수. 그러나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산다. 일본 이름에 ‘리’라는 성을 남겨둔 것이 그 증거다. 박강조는 일본에서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J리그(일본 프로축구리그)를 거쳐 성남 일화, 그리고 한국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이들을 통해 자이니치에 대한 생각을 들어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을사늑약 ‘비운의 역사현장’ 시민 품으로

    을사늑약 ‘비운의 역사현장’ 시민 품으로

    #1. 1905년 11월17일 일본군들이 고종 황제의 집무실인 경운궁(현 덕수궁) 중명전을 에워쌌다. 긴박한 분위기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종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일본 정부의 신협약안(新協約案)을 끝내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헌병 수십명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가 8명의 대신을 위협, 이중 5명의 찬성을 얻어낸 뒤 일방적으로 조약에 날인했다. 18일 새벽 1시쯤이었다. #2. 1907년 6월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을 은밀히 중명전으로 불렀다. 고종은 이들에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을 지시하며 친서를 전달했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구한 말 격동의 역사 현장이었던 덕수궁 중명전이 원형 복원돼 한·일 강제병합 꼭 100년이 되는 29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1897년 건립… 일제땐 서양인 클럽으로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중명전(당시 수옥헌)은 일제 강점기엔 서양인 클럽으로 사용됐다. 1976년 민간에 매각됐다가 문화재청이 2006년 소유권을 인수해 이듬해 12월부터 복원 공사를 했다. 26일 언론에 공개된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사바친(1860~1921)이 설계한 원형대로 아치형 문과 1·2층 회랑 공간을 되살렸다. 흰색으로 칠했던 건물 외벽도 붉은 벽돌의 제 모습을 찾았다. 다만 여러 개의 별실로 구성된 지하층은 용도가 불분명해 복원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근대 역사교육·체험 공간으로 꾸며 문화재청은 이곳을 근대 역사 교육과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1층은 중명전의 연혁을 정리한 ‘중명전의 탄생’, 을사늑약의 현장을 보여주는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을사늑약 후 고종과 대한제국의 노력을 담은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헤이그 특사의 활동을 조명한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4개 전시실로 구성됐다. 을사늑약 현장이 어느 방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1층 왼쪽 방일 가능성이 높아 이곳에 을사늑약 체결일지, 현장 상상도, 한규설 참정대신·모건 미국 공사 등 을사늑약 목격자의 증언을 담은 자료들을 전시했다. 2층에는 고종의 집무 공간을 재현한 ‘고종과 중명전’ 전시가 마련됐다. 문화재청은 27일 오후 4시 중명전 현판식과 전시 개막행사를 연다. 중명전 관람은 1일 6회, 회당 25명으로 제한했다. 20명은 덕수궁 홈페이지(www.deoksugung.go.kr)를 통해 사전예약으로 받고, 5명은 현장에서 신청받는다. 관람료는 무료다. 매주 월요일 휴관. (02)732-7524.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모닝 토크] 기옥 금호산업 사장 “채권단 박삼구회장 복귀 공감”

    [모닝 토크] 기옥 금호산업 사장 “채권단 박삼구회장 복귀 공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경영 복귀가 머잖아 보인다. 기옥 금호산업 대표이사 사장은 25일 기자간담회에서 “7월 이후 회장직이 공석인 상태로 계열사 간 시너지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구심적 역할이 필요하다.”면서 “채권단에서도 조속한 경영정상화를 위해 (박 명예회장의) 복귀가 선결돼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룹 전체의 리더십이 필요한데 박 명예회장이 나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한 뒤 “금호산업의 100대1 감자로 경영의 책임은 어느정도 졌다고 보고 있다.”고 밝혀 박 명예회장의 복귀를 시사했다. 금호산업은 이날 이사회에서 박 명예회장이 보유한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100대1로 병합하고, 소액주주와 채권금융기관은 6주를 1주로 감자했다. 12월말까지 개인주주들의 출자전환이 끝나면 서울터미널 등 추가 자산 매각에 나서는 등 유동성 확보를 통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기 사장은 1976년 금호실업 자금부 사원으로 입사해 주로 재무 분야를 담당해온 그룹 내 몇 안 되는 재무통이다. 기 사장은 ‘CEO가 직업’이라고 불릴 만큼 그룹내 계열사 대표이사 사장만 이번이 다섯 번 째다. 그는 대표이사를 지내는 동안 회사를 세계 1위에 올려놓거나(금호폴리켐),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놓기도(아시아나컨트리클럽) 했다. 그가 금호산업의 대표이사에 선임된 것도 금호산업을 위기에서 건져낼 구원투수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 아시아나항공의 재무부문 상무를 맡아 당시 사장이었던 박 명예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기 사장은 취임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조 40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 정리에 착수했다. 그는 “미착공 사업장 18곳 가운데 6곳은 사업을 진행하고, 나머지 지방사업 중심의 7~8곳은 매각, 3~4곳은 일단 보류한 뒤 정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프로젝트별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늦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PF사업 정리를 끝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 사장은 또 “환경·발전분야를 미래의 신성장동력으로 삼기 위해 사업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물산업, 원자력발전, 바이오가스 등을 신성장 동력으로 적극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호산업은 올해 경영목표를 수주 2조 8000억원, 매출 2조 100억원으로 잡았다. 금호산업의 텃밭인 베트남에서 올해 1억 5000만달러, 내년까지 5억 달러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日,한국 문화재 추가반환 없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무상이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도서 외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2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오카다 외무상은 24일 민주당 정책조사회의 외교부문 회의에 출석해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 담화에서 밝힌 조선왕실의궤 등의 ‘인도’와 관련 “이 것으로 일단락 짓고 싶다.”고 말했다. 오카다 외무상의 발언은 한국에 돌려줄 문화재를 조선총독부를 통해 입수한 문화재에 한정하고 그 외의 문화재 반환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라는 게 신문의 해석이다. 한국 측에서는 조선총독부 시절 이전의 문화재에 대해서도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오카다 외무상은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는 이미 해결됐다.”고 말한 것으로 신문은 보도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인도 대상 문화재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한국 측은 조선왕실의궤 외에 제실도서, 경연 등의 반환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오카다 외무상은 도쿄 일본외국특파원협회(FCCJ)에서 열린 오찬 강연회에서 한·일기본조약 보완·개정 필요성과 관련해 “(양국) 정부간에 논의를 하더라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다만 전문가나 연구자 등 민간 차원에서 의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이종락특파원 도쿄이야기] 산케이신문의 견강부회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체결이 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한·일 양국은 과거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 신문의 최근 사설만 봐도 ‘한·일의 미래를 위해 연계를 심화시키자’(니혼게이자이 21일자), ‘간 총리 담화, 새로운 한·일 협동의 초석으로’(아사히신문 11일자) ‘미래 지향의 한·일 관계에 탄력을’(요미우리 11일자) 등 미래를 얘기하는 제목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보수신문인 산케이신문만 유독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에 연일 흠집을 내며 한·일 관계에 부정적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신문은 24일 양국 관계의 첨예한 현안인 독도문제를 느닷없이 끌고 나왔다. 인터넷판에 최근 고베시립박물관이 17~18세기 조선시대 목판인쇄 고지도인 ‘강원도도(江原道圖)’를 보관 중인 사실이 밝혀졌는데 울릉도의 남쪽에 ‘자산(子山·독도의 옛 이름)’이라는 섬이 그려져 있어 독도가 한국땅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기사다. 독도가 실제로는 울릉도의 동남쪽 92㎞ 지점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안용복이 1696년 일본에 건너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받은 ‘자산’은 독도와는 다른 섬일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지도야말로 조선이 독도를 강원도에 속한 자기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고 해석한다. 당시는 방향이나 거리가 부정확했는데도 강원도도(圖)에 독도를 가리키는 자산도를 그려넣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라는 설명이다. 산케이신문도 이런 사실을 뒤늦게 간파했는지 이 기사를 정작 본지에는 게재하지 않았다. 산케이의 견강부회가 낳은 해프닝인 셈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시론] 광화문, 이제 광장으로 역할하게 하라/김홍식 명지대 교수·한국건축문화연구소장

    [시론] 광화문, 이제 광장으로 역할하게 하라/김홍식 명지대 교수·한국건축문화연구소장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3궐(闕)의 석축 홍예문을 가진 중층 누마루 집이 서울의 복판에 복원되었다. 그 규모는 중국의 천안문보다 조금 작지만 백악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일제의 길에 맞춰 틀어 두었던 건물을 굳이 헐어내고 제자리를 찾아 복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의 상징물로서,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가 버티고 서 있는 것보다는 훨씬 우아하지 않은가? 광화문이란 무슨 뜻인가? 제갈량이 선조의 남긴 덕을 빛낸다는 말에서 나온(光以先帝之遺德) 바 훌륭한 말이다.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데, 그에 앞서 광복절에 광화문을 공개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비록 나무가 덜 말라서 단청을 다시 해야 하는 하자가 발생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비용이 조금 더 추가될 따름이다. 고종 때도 1867년 5월17일에 착공하여 9월18일에는 문루의 입주(立柱)를 하고, 같은 해 10월11일에는 상루(上樓)하여 완공했다고 하니, 무서운 속도가 아닌가? 일제도 총독부 앞에 눈엣가시 같은 조선의 상징물을 철거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기는 데 2년 이상을 소요하면서, 우리의 기록과 비교해 보고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는 2007년 5월에 기존 건물을 철거해서, 비록 발굴조사를 한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2009년 11월27일에는 상량식을 했으며 이후 9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비지정문화재이므로 3개월 정도 앞당겨도 별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만 좀 늘렸을 뿐 야간작업도 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또 다른 상징물인 숭례문(남대문)이 수리공사를 하고 있는데, 지정문화재 국보 1호이고 보물 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다. 만일 비지정문화재에 등록번호가 주어진다면 1호는 틀림없이 광화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육축(석축) 이상은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복원도 콘크리트로 외형만 본떴기 때문에 지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지정이 되지 않아서 문화재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따름이다. 한편, 광화문 앞에 설치되어 있던 월대(기단 아래 있는 축대)를 복원하지 못한 점이 광화문을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다른 원인일 것이다. 교통의 흐름을 막는다는 이유로 복원하지 못했는데, 원래는 길이가 52m이고 그 앞 35m 지점에 해태상이 있었다. 이를 길이 10m로 줄이고 그 끝에 해태 상을 놓겠다니,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보일 수밖에…. 더구나 월대의 높이는 원래 75㎝ 정도였는데 지금은 광화문 광장 높이가 이것보다 높게 되었다. 얼마 전 광화문 광장을 발굴해 봤는데 조선 초기 지반은 지금보다 2.5m 정도 아래 있었고 매년 조금씩 토사가 쌓여서 고종 때 지반은 대략 80㎝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시각상 광화문을 받쳐주고 있던 육조거리, 곧 광화문광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 광장을 만든다고 차선을 과감히 줄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조경설계사를 부르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는데도 결론은 겨우 이 정도다. 광장(마당)이란 무엇인가? 정말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 있음으로 해서 필요하다면 무엇이라도 담는 마당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의 심장부를 거닐어 보기도 하고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대중 집회를 열기도 하며, 어떤 때는 최익현 같은 분이 도끼를 베고 앉아 나라님께 직소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울리던 곳이지 않던가? 촛불집회를 하면 무엇이 두려운가? 어울리지도 않은 세종대왕도 앉아 계시고 이순신장군도 노려보고 있으며, 분수·화분 등 너저분한 것이 많아서 진정한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시민들은 넓지도 않은 시청 앞 광장을 개방해 달라고 안달을 할까?
  • MBC 라이프 다큐 ‘고종의 꿈’

    다큐멘터리 케이블 채널 MBC 라이프는 27~28일 오후 10시 한·일강제병합 100년 특집 2부작 다큐멘터리 ‘고종의 꿈, 대한제국’을 방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 미국,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고종의 비자금과 밀사의 행로를 추적해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MBC 대하사극 ‘동이’에 인현왕후로 출연 중인 배우 박하선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1부 ‘황제의 비자금, 500억의 비밀’에서는 상하이 독일은행에 숨겨진 고종 황제 비자금 500억원의 실체를 알아본다. 2부 ‘마지막 승부수, 밀사를 파견하라’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들에게 맡긴 두 가지 의무를 알아본다.
  • 일제 한국병탄 불법성 조목조목 지적

    일제 한국병탄 불법성 조목조목 지적

    22일이 체결일이고 29일이 공포일이니 이번 한 주는 사실상 ‘경술국치 100년 주간’이다. 100년 주간을 맞아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이 주최하는 ‘1910년 한국강제병합, 그 역사와 과제’ 국제학술대회가 24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다. ●“식민주의를 반평화적 범죄로 규정해야” 학술대회에 앞서 23일 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무샤코지 긴히데 오사카경법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은 기조 연설을 통해 “일본의 식민주의 범죄 또한 ‘반평화적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뉘른베르크 재판 등을 통해 반평화적 범죄로 단죄됐지만, 일본의 전범재판인 도쿄재판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샤코지 교수는 “따라서 한일병합은 ‘실제로 존재하는 법(lex lata)’이 아니라 ‘법적 정의에 따라 있어야 할 법(lex ferenda)’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면서 “일본인들이 식민지 범죄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런 측면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병합조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이끈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선언 이후 비슷한 선언이 이어지는 등 물꼬가 터졌고, 여기에는 전문역사가들도 많이 참여했다.”면서 “이제 ‘상류’의 물줄기가 바뀌었으니 ‘하류’로 내려가는 과정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고종황제 독살설’ 입증 자료 내놓아 재단이 주최한 이번 국제 학술대회에는 한·중·일 3국뿐 아니라 타이완, 미국, 독일 등의 33명의 연구자들이 참가한다. 식민지화 과정을 실질적으로 규명하는 데 앞장서온 원로학자들뿐 아니라 식민시대의 일상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킨 젊은 소장 학자들까지 두루 포함됐다. 또 병합의 불법성을 규명해 온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고종 황제 독살설에 대한 주장을 내놓는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 후배인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1905년 11월의 보호조약이 유효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서를 덕수궁의 이태왕(고종 황제)에게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독살하라.”는 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방자 여사의 수기와 일본 궁내청 관리 구라토미 유자부로의 수기를 토대로 이런 주장을 하면서 “이는 용서받기 어려운 문제로 일본인들의 자성으로 치유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27일까지 국회서 강제병합 기록 전시회 재단은 또 학술대회 외에도 27일까지 국회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 조약자료 전시회’를 연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부터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양국이 체결한 조약 관련 74개의 사진자료 등을 통해 한국 병탄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당시 고종 황제가 한·일 병합을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는 허위기사를 통해 조선이 합병에 순순히 동의했다고 여론을 조작한 일본의 행태도 상세히 밝힌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자립형 지역공동체사업-지역경제 활로 찾는다] (7)에너지마을 후보 공주 월암리

    [자립형 지역공동체사업-지역경제 활로 찾는다] (7)에너지마을 후보 공주 월암리

    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의 한 축으로 녹색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자원화하고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는 마을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에너지 확보와 환경적인 측면이 동시에 고려됐다.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미래의 대체 에너지 개발이 시급한 데다 유기성폐자원(가축분뇨, 음식물폐수, 하수슬러지 등)의 해양투기가 런던협약에 따라오는 2012년부터 금지되기 때문이다.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이미 저탄소 녹색마을이 일반화 단계에 접어 들고 있다. 일본의 경우 올해 말까지 무려 300개의 바이오매스 타운이 조성될 예정이다. 우리는 현재 행정안전부가 도농복합형 녹색 에너지 자립 마을 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환경부는 도시형,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형, 산림청은 산촌형 녹색마을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내년까지 부처별로 각각 2개씩의 시범마을을 조성한 후 지역별로 적합한 녹색마을 수를 늘려 오는 2020년까지 600개의 녹색마을을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이 가운데 행안부는 2020년까지 358개 마을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부처별로 사업방식이나 규모에는 차이가 있지만 큰 맥락으로 보면 폐자원 및 바이오 매스를 활용해 생활에너지를 충당(40% 이상)하고 각종 생활 부산물을 자체 처리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행안부가 주도하는 녹색마을 조성사업의 시범지역인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를 찾아 추진과정과 방향 등을 살펴봤다. 우리나라 최초의 에너지 자립마을 후보지로 선정된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는 교통이 편리하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공주 나들목에서 11㎞가량 떨어진 곳에 있어 차량으로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마을 앞에는 국도 23호선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마을 뒤쪽은 주민들이 계룡산 자락으로 여기는 나지막한 야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포근함을 더한다. ●왜 월암리인가 월암리에는 반경 1.6㎢ 내에 219가구 5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 같지 않게 주택들은 깔끔하게 잘 정돈돼 있다. 주민들 가운데는 공주와 천안 등지를 출퇴근하는 도시 근로자들도 함께 거주하는 도농복합형 마을이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월암리의 가구형태는 에너지 자립마을 후보지로 선정된 이유가 됐다. 최인수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농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구가 밀집해 있다는 것은 생산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사업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반경 5㎞ 이내에 대규모 축산시설과 대기업의 식품가공공장과 농장 등이 위치해 있어 바이오매스 활용자원이 풍부하다. 23번 국도는 운송을 쉽게 하고 사업장 진입 시 마을 경유를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에너지 생산시설이 들어설 예정지는 마을에서 500여m 떨어져 있는 데다 23번 국도가 가로질러 있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악취 및 소음발생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떻게 조성되고 뭘 기대할 수 있나 행정안전부는 이 마을에 모두 48억원(자치단체 50%)을 들여 바이오 가스 플랜트와 열병합발전시설, 지역난방 보조시설, 교육·홍보관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유입 바이오 매스량은 가축분뇨 1일 35t, 음식물 폐수 10t, 식품슬러지 5t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500t 규모의 소화조 2개를 설치하고 일일 생산 예정량 50t 규모의 액비(액체비료) 저장조도 설치할 예정이다. 이 같은 시설을 갖추면 월암리는 시간당 150㎾의 전략과 하루 47t의 액비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연간 1만 8000여t으로 예상되는 액비는 총 400여㏊의 논·밭에 살포할 수 있는 물량이다. 이는 주민들에게 연간 8000만~9000만원의 전기료 절감과 가구당 350여만원 정도의 난방비 절감 혜택을 주는 등 마을 전체적으로는 연간 2억~3억원 정도의 소득 증대 효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공주시와 행안부는 예상하고 있다. 황의배 공주시 지역경제과 담당은 “시설 설치후 발생하는 연간 수익금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법인체를 만들어 주민복지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악취발생은 없을까 월암리가 녹색 에너지 자립마을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지난해 12월18일이다. 입지적인 장점과 자치단체의 추진의지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친 주민설명회 등을 통해 사업의 안전성과 타당성 등을 알리며 다음달이나 10월쯤에는 착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악취 및 소음발생 등을 우려하는 주민들이 관련 시설물의 설치를 반대하고 있어 사업추진이 다소 주춤거리고 있다. 축산분뇨나 음식물 쓰레기 및 폐수 등의 유입 과 유출 과정에서 완전한 밀폐화가 사실상 불가능해 악취 발생 가능성은 예상된다. 현재 주민들의 20~30% 정도는 사업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상태다. 박해담(50) 자립마을 조성 추진위원장은 “주민들이 외부의 폐기물 유입과 이에 따른 악취 발생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사업의 타당성이나 안전성을 홍보하는 데 정부나 지자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안부는 월암리의 녹색에너지 시설은 바이오 필터(생물학적 탈취법)와 흡착법을 이용한 최신기술이 적용될 예정인 데다 시설 예정지가 마을과 격리돼 있는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서철모 행안부 지역녹색성장과장은 “녹색 에너지 자립마을 조성사업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여부가 성공의 관건이 된다.”면서 “현재 우려되는 악취와 소음발생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책과 기술지원이 가능한 만큼 사업 추진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공동기획 서울신문·행정안전부
  •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1917년 최초의 신문 1면 소설 한국에서 근대 백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무정’이다. 26살의 청년 이광수는 생애 두 번째 일본 유학을 하던 1917년, 조국의 ‘매일신보’에 자신의 원고를 보냈다. 바야흐로 을사조약 후 12년이 지났고, 삼일운동을 2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새해 벽두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대 독서대중을 쥐락펴락하며 그해 6월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된다. 최초의 신문 1면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일일연속극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광수는 일약 조선의 문사이자 조선의 스승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정’은 해방 이후에도 줄기차게 간행되어 그 판본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05년에는 일어로, 2006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과연 이 작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작품의 주인공인 일본 유학생 출신 이형식의 속물근성, 그를 중심으로 기생 박영채와 여학생 김선형이 만드는 애정의 삼각관계, 폐쇄적 공간 안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동성애 코드, 공원 데이트와 고백에 이르는 신식 자유연애의 문법, 청나라를 신봉하던 박진사와 그 딸의 퇴행적 삶, 오로지 미국만 외쳐대는 얼개화꾼 목사의 허영까지, ‘무정’은 그 자체로 전통과 근대를 넘나드는 일상의 박물지였다. 독자들은 당장이라도 경성과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주인공들의 행동과 말솜씨에 열광했다. 그러나 ‘무정’은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게 된 식민지의 현실 안에서 지사와 학생들은 우왕좌왕했다. ‘난세(世)의 시대,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하나?’ 와세다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광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이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무정’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명하다. 청년들이여 무정하라! 과연 무엇에 대해? 또 어떻게? ‘무정’을 관통하는 것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이다.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버린 첫사랑 영채. 그리고 이제 막 ABC 받아쓰기를 시작했지만 반드시 미국 대학 졸업생과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는 속물 선형. 영채는 낡았고, 선형은 타락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두 여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형식은 선형의 집안이 밀어줄 학력과 금력을 원했지만, 보잘 것 없는 고아였던 자신을 돌봐준 영채 가족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봉건적 인습으로 얽힌 아내를 버릴 수도 없고, 자유연애로 사랑을 키운 엘리트 애인을 어찌하지도 못하는 조선의 ‘찌질남’! 그들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형식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무정’에는 사랑과 출세의 화신인 형식이 무정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대목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살하러 평양에 간 영채를 형식이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돌아오면서다. 형식에게는 순결을 잃고 평양으로 도망친 영채의 죽음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불결한 과거와는 굳이 손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형식은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며 선형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1917년의 독자들은 영채를 자살시키지 말아달라고 떼를 쓰는 투서를 연일 신문사로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독자들은 무정한 형식과 무정한 사회를 비난했다. 두 번째 변신이 이루어지는 건 삼랑진 수해의 국면에서다. 살아 돌아온 영채는 자신을 구해준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형식과 선형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형식, 선형, 영채, 세 사람은 운명처럼(!) 조우한다. 허나, 이 돌발적 조우 때문에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의를 완전히 잃게 된다. 무정했던 세상을 핑계로 영채에게 등을 돌렸던 형식이 다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선형은 난데없는 영채의 등장으로 비로소 질투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고, 형식의 무정함이 야속했던 영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삼랑진에 엄청난 수해가 닥친다. 강물 위로 돼지가 떠내려가고 , 곧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는 산모는 물 위에서 정신을 잃을 찰나였다. 이를 본 형식은 갑자기 영채와 선형에 대한 사랑이 사소하게 생각되고, 정신없이 수해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는 사명감에 몸서리치면서 자신의 미래를 재정립하게 된다. 영채와 선형의 연인(lover)이 아니라 민족의 스승, 민족의 지사이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수해의 폭력은 순식간에 형식의 사적 열정을 쓸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날 형식은 결국 기차 안 젊은 예술가들과 정치인들을 독려해 수해 복구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에게 감화된 영채와 선형은 서로 화해하고 각자의 길을 축복한다. 작품을 관통하던 세 남녀의 각종 정념이 수해와 함께 모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세 사람은 사랑도 미움도 없는 동지애를 느끼며 ‘조선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민족을 향해서는 달콤하게, 자신의 연인에게는 살벌하게! 근대적 문명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조국과 민족의 운명부터 생각할지어다! 이것이 ‘무정’의 무정하고도 숭고한 결말이다. ●민족지사여 무정한 세상을 살라! 삼랑진 수해 앞에서 보이는 이형식의 돌연한 결단과 확신에 찬 행동은 지금 읽어도 강렬하다. 근대적 개인, 개성과 자율을 자랑하는 독아적(獨我的) 주체들이 사회를 장악한 시대에 이처럼 민족을 생각하는 헌신적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이라면 마땅히 대의를 위해, 역사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백년을 관통한 ‘무정’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형식을 향한 사랑 대신에 민족애를 거머쥐게 된 선형은 행복할까? 자신을 배신한 형식이 조선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채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정말로 형식은 여인에 대한 육체적 욕망을 다 버리고 계속 계몽운동만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민족 지사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까? ‘무정’의 주인공들은 끝내 가난한 고향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들처럼 방황하게 될 자식도 낳지 않았다. ‘무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춘의 에너지, 그 모든 의욕을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흡수했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줄기찬 의심, 미래를 향한 당돌함, 자신의 맨몸에만 기대는 패기! 이 모든 방황이 조선을 위할 때에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뜨겁던 청춘은 실종되었다. 각양각색의 청년들은 사라지고, 민족지사만 남게 되었다. 무정한 세상을 무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만 살게 된 것이다. 오선민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 “강제병합 불법성 인정·보상” 日시민단체 등 1500여명 촉구

    일본의 시민단체 회원 등 1500여명이 22일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도쿄 도시마 공회당에서 ‘일한(日韓)시민공동선언대회’를 열고 일본 정부에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해 사죄·보상하라고 촉구했다. 이 행사의 일본측 실행위원회 공동대표인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 명예교수는 “간 나오토 총리가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지만 ‘병합조약이 국제법에 반하는 불법·부당한 것이므로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간 총리가 ‘식민지지배가 한국인들에게 가져다준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밝혔지만 병합조약의 강제성과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허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측 상임대표인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간 총리의 담화는 병합의 불법성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원폭 피해자 등 현안의 진상규명과 배상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이들 문제를 입법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사표명도 없었던 만큼 실제 아무것도 진전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체결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과거처럼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도쿄신문은 이날 자 기사에서 “경제가 호조세를 보이는 등 한국민들의 자신감이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반일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하고 “다만 다음 달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한 방위백서가 나올 경우 일·한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산케이신문도 “양국은 한·일 병합조약을 둘러싸고 견해차가 크지만 간 총리의 담화를 전면 부정하는 목소리는 적다.”면서 향후 한·일 관계에 대해 전향적으로 전망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굿모닝 닥터]금연은 후두암 예방 첫걸음

    메이저리그의 살아 있는 전설 베이브 루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밴드 비틀스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지독한 흡연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둘 모두 후두암 환자들이었다. 이들은 한 가지 사실만 알았더라면 그 명성을 더 오래 지속했을 것이다. 바로 금연. 후두암을 예방하는 데는 담배를 끊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흡연은 후두암 발암의 가장 확실한 위험인자라고 알려져 있다. 흡연자가 후두암에 걸릴 확률은 흡연량과 흡연기간에 비례한다. 오랜 기간 담배 연기에 노출되면 후두점막세포에 점진적인 분자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암세포로 변해 정상 체세포와는 달리 무한정 분열돼 종물(혹)을 형성하게 된다. 후두암 전암단계의 세포변화는 가역적이다. 그래서 흡연을 중지하면 암 발생률도 현저하게 줄어든다. 하지만 치료 후 흡연을 다시 하면 후두암은 재발한다. 만약 이들이 과도한 음주까지 했다면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격’이다. 흡연과 과도한 음주를 같이 하는 사람은 암 발생에 상승효과를 가져와 흡연과 음주 중 한 가지만을 즐기는 사람에 비해 2~3배 높은 후두암 발병률을 보인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2주 이상 쉰 목소리가 지속되거나, 음식을 삼킬 때 불편함과 통증이 있거나, 목에 혹이 만져지는 경우 반드시 병원을 찾아 진찰 받아야 한다. 다행인 것은 후두암의 예후가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는 것이다. 후두암은 다른 악성종양에 비해 치료결과가 양호하다. 조기 발견 시 치료방법에 상관없이 80~90% 정도의 높은 완치율을 보인다. 진행암인 경우에는 수술 후 방사선치료를 한다. 최근에는 수술을 하지 않고 항암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병합해 후두를 보존하면서 치료하는 방법도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후두는 목소리를 통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표현수단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흡연과 과다한 음주로 인해 후두암에 걸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금기창 연세대 의대 방사선종양학 교수
  • [열린세상] 일본의 잠수함 능력/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 교수

    [열린세상] 일본의 잠수함 능력/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 교수

    일본은 1976년부터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잠수함 16척 체제를 유지해 왔다. 16척 체제지만 매년 1척씩 퇴역시키고 1척을 새로이 건조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든 첨단 기술을 적용하며 아시아 최강의 잠수함 국가로 발전했다. 한국이 보유한 잠수함 중 가장 큰 것은 1800t인데 일본은 4100t이다. 잠수함의 형태를 눈물방울형에서 담배모양의 형태로 바꾸면서 상대방의 음향추적을 피하기 위한 음향흡수장치를 외관에 붙여 ‘음향스텔스 잠수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북한의 천안함 공격을 계기로 16척 체제에서 18척 체제로 군사전략을 수정하려 한다. 이번에도 북한이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돕고 있는 것이다. 통한의 식민지배를 당한 지 100년이 되는 해에 북한은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도록 빌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실험을 구실 삼아 일본은 미사일방어체제(MD)를 미국과 마련했고 첩보위성 4기 체제로 인공위성을 군사용으로 사용하는 길을 마련했다. 자위대와 군사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헌법 제 9조 때문에 엄두도 못 낼 일들이었다. 일본이 18척이라고 하지만 퇴역한 잠수함을 연습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계상하기 쉽지 않다. 일본의 잠수함 전력을 아시아 최강이라고 평가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오래된 풍부한 경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잠수함 운용 경험이 많은 일본은 미국과 함께 동북아 해저에서 활동하는 상대방 잠수함의 음문(音紋)을 거의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음문이란 사람의 지문(指紋)처럼 잠수함마다 제각기 내는 소리의 특성이 있는데 이 데이터를 오랜 역사를 통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잠수함에 상대방 잠수함이 발각되면 어느 국가의 어떤 종류의 잠수함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섬나라인 일본은 오래 전부터 바다 밑 방어를 위해 해군력을 착실하게 증강시켜 왔다. 그러기에 상대방 잠수함 식별 능력뿐 아니라 대한해협, 동북아 해역, 동지나해, 남지나해까지 해군 능력을 키워 왔다. 연전에 중국 잠수함이 일본 영해에 들어가려다 발각된 것도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그리고 일본 자체의 대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공작선이 일본 영해에 침투하려다 발각되는 것도 일본의 해양감시 그리고 그들의 해상교통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들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잠수함 킬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대잠초계기 P3-C를 한국은 10여기 갖고 있는데 일본은 100여기를 보유하고 있다. 때로는 대잠 초계기가 잠수함 추적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되는 지역에 여러 대를 한꺼번에 투입하여 탐색에 나서는데 세계에서 작전 영역에 비해 가장 많은 대잠 초계기를 갖고 있는 이유를 알 만하다. 잠수함 전력은 군사전력 중에서 최후의 군사력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은밀하기 때문이다. 수심 100m가 주 활동 무대이지만 해저 400m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는 잠수함이기 때문에 바다 밑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어 상대방에 몰래 접근해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공포의 군사전력이 잠수함 전력이다. 천안함 사태가 잠수함 공격의 공포스러움을 실감하게 했다. 북한보다 한참 뒤진 한국의 잠수함 전력은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유비무환의 대비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불행을 자초할지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 밑 방어에 대해 소홀했던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월26일 천안함에서 46인의 아까운 희생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방어태세에 대한 장비의 도입과 작전개발 등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가장 걱정스러웠던 점은 국민의 안보불감증이었는데 천안함 사태로 안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만큼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에 돌아보는 한국의 안보는 여전히 불안하다. 국력을 높이는 일에 온 국민이 노력할 때 역사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망국의 치욕 감내했던 흥복헌… 슬픈 역사만 오롯이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망국의 치욕 감내했던 흥복헌… 슬픈 역사만 오롯이

    2010년 8월20일, 여름의 한복판. 창덕궁의 하늘은 한없이 파랬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은 말 그대로 구중심처, 깊숙하기만 했다. 돈화문으로 들어선 뒤 몇 개의 문을 지나 선정전, 희정당을 거치며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줄곧 훔쳐내고서야 대조전 흥복헌에 이를 수 있다. 왕비가 거처했던 공간인 대조전은 연못과 정자, 넓은 숲 등이 아름답게 갖춰진 후원 바로 앞쪽에 있다. 흥복헌은 대조전 왼쪽에 있는 작은 방. 그러나 100년 전 망국의 치욕을 묵묵히 감내했던 이곳은 그때의 흥복헌이 아니다. 1917년 큰 화재로 불탄 뒤 1920년 중건된 곳이다. 흥복헌의 문은 굳게 닫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저 창덕궁 직원 임동수씨의 몇몇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다. 1910년 8월22일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던 날 병풍 뒤쪽에 앉아 있던 순정효황후가 강제 합병을 슬퍼하며 국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이야기, 1910년 그날 이후 1917년 불이 나기 전까지 왕실의 이발소로 사용했다는 이야기, 1926년 4월26일 순종이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 등을 심상히 듣기에는 100년 전의 슬픈 역사도, 무더운 날씨도, 내밀했을 이 공간도 모두 심상하지 않다. 그날 오후 4시에 채 못 미쳤을 시간, 어전회의를 박차고 나섰을 이완용의 걸음을 좇았다. ‘일한합방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손에 쥐고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함께 마차에 오른 이완용은 한시라도 바삐 ‘기쁜 소식’을 전하고픈 마음에 마부를 재촉했다.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있는 관저까지는 4~5㎞ 되는 거리이니 내처 달리면 20분 남짓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오후 4시께 도착해서 불과 1시간 만에 일본에 나라를 넘기는 형식적 절차를 마친 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서울 예장동 2의1번지, 서울유스호스텔이 들어선 곳 어귀 즈음 오른쪽에 벤치 네다섯 개가 덜렁 놓여있는 작은 잔디밭 공원이 있다. 통감 관저가 있었던 곳이다. 기념할 만한 어떤 표지도 없다. 도로의 가장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다. 그저 옛날 사진 속과 마찬가지로 진입로 왼쪽 편에 어른 세 명이 팔을 둘러도 닿지 않을 만큼 굵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만 여전히 남아 일제강점기 조선 백성들의 수탈과 핍박의 총지휘관이 살았던 곳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은행나무 옆을 자세히 살펴보면 큰 돌로 된 벤치 같은 것이 놓여 있다. 통감부 설치 이전, 일제 강점의 기초작업을 한 공을 기려 1936년 세워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동상 좌대 판석이다. 다행히 서울시는 오는 10월 이곳에 연혁과 함께 한·일 강제병합조약 체결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문안 등을 담아 ‘녹천정 터’라는 표지석을 설치할 예정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치욕의 역사는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계언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순종의 유언… “병합인준은 역신의 무리가 제멋대로 선포”

    20일부터 국회도서관에서 열리는 ‘한국병탄 100년에 다시 보는 국권 탈취 강제 조약들’ 전시에는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순종이 1926년 4월26일 숨지기 직전 궁내부대신 조정구에게 내린 유조(遺詔·임금의 유언) 내용이다. 이 유조는 교민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그해 7월8일자에 실렸다.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해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일본을 일컬음)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이요, 다 내가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위협하고 견제함)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요.” 이 유조는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된 바 있다. 전시회는 오는 2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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