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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이름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사람들은 한양이라 불렀다. 한양은 북한산 남녘과 한강 북쪽 사이에 자리 잡은 양지바른 터전이라는 뜻이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경기도에 소속시켜 위상을 낮추었다. 서울을 일본의 오사카나 교토와 같은 지방 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935년에는 44만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25% 남짓이 일본인이었다. 식민지 도시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이남에는 본정통(오늘날 충무로), 명치정(지금의 명동)에서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남촌이 생겼다. 진고개 중심의 남촌 상가는 근대의 상품과 화려한 건물, ‘현대인의 신경’인 네온사인으로 덮였다. 카페, 우동집, 빙수집, 찻집이 즐비했다. 남촌은 ‘경성 속의 일본’이었다. 오늘날 명동 부근인 진고개는 본디 변두리 마을이었다.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작은 도쿄’를 세우고 주인으로 들어앉았다. 백화점과 카페, 당구장, 극장 같은 근대 유흥시설이 남촌에 몰려 있었다. 청계천 이북에는 조선인 상가가 많았던 종로통을 중심으로 북촌이 되었다. 북촌 지역은 전통 한옥과 나지막한 상점들이 있었으며 밤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식민 도시의 ‘원주민 상가’였던 종로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종로의 밤거리에는 온갖 ‘싸구려’ 물건을 파는 야시가 열렸다. “극도의 생활난에 빠진 빈궁한 사람들이 혹시나 입에 풀칠이나 할까 하는 눈물겨운 생각”으로 야시에서 물건을 팔았다. 경성은 식민지 지배층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하이칼라 경성’과 식민지 빈곤층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실업 경성’의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쾌락 추구 ‘모던 보이’ 1920년대가 되면서 양복 입은 남자와 양장한 여성이 늘어갔다. 옷과 장신구 등은 유행 바람을 탔다. 헤어스타일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를 하는 것을 ‘신식’으로 가는 길처럼 여겼다. 그럼에도 여자 단발은 아직 문제가 되었다. 단발한 여인들은 ‘단발미인’이라 하여 뭇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몇몇 여인이 단발했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단발이 크게 번졌다. 일부 여성은 단발에 ‘물결을 일으키는’ 파마도 했다. 겉모습만이 아니다. 생각과 취향이 남다른 사람이 생겨났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들을 일컬어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고 불렀다. 모던 세대들은 사랑법도 새로웠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바랐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누구인지를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모던 세대란 도시와 서구 또는 일본문화를 즐기며 근대를 적극 받아들인 신세대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개 이들은 식민지 현실이나 사회모순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모던’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화가 문화 영역에서 터를 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배우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대중음악 시장이 커졌다. 1930년대 초반 ‘레코드의 홍수, 유성기의 천하’라는 말이 떠돌았다. 모던 보이는 근대적 유흥공간을 찾아 여가와 유흥도 즐겼다. ‘거리의 오아시스’ 다방에서 근대의 상징처럼 커피를 마시며 서양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 무렵 다방은 하나의 문화공간이기도 하고 ‘도시인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페는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분위기를 좇던 모던 보이를 ‘에로’의 길로 안내한 것이 바로 카페였기 때문이다. 카페란 여급이 술시중을 드는 곳에서 비싸게 술을 먹는 곳이었다. 여급에게 팁도 주어야 했다. 카페는 ‘퇴폐적 취미’를 발산하는 곳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카페를 ‘에로의 신전’ 또는 ‘향락 제작소’라고 불렀다. 모던 보이들은 백화점 가기를 좋아했다. 1930년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이 문을 연 뒤 잇달아 히라다·조지야·미나카이·화신백화점 등이 문을 열었다.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는 ‘시각의 쾌락’을 맛보게 한다. 최첨단 기기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들어선다. 갖가지 물건을 쓰임새에 따라 가지런하게 분류해 놓은 백화점은 ‘과학적’이다. 매장 앞에는 ‘어여쁜 숍걸’이 매우 상냥하다. 어디 그뿐인가. 백화점은 호화로운 식당과 전람회를 열 수 있는 전시공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모던 보이들은 ‘도시의 심장’인 백화점에서 도시의 감각과 유행의 물결을 느꼈다. 모던 보이는 갑자기 닥쳐온 근대 도시의 습속을 하루라도 먼저 몸에 익혀야 했다. 그러한 모던 보이에게 경성은 근대의 훈련장이자 여가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흥의 도시였다. 그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근대가 ‘혼종의 근대’ 또는 ‘식민지 근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식민 도시를 거닐고 근대를 소비했다. ●이재유의 경성 1936년 12월 25일이었다. 농사꾼,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 등으로 변장한 32명의 경찰이 ‘검거 중대’를 만들어 창동 남쪽에서 시골 농민 차림인 30대 초반의 한 남자를 체포했다. 일제에 맞서 비합법 혁명운동에 몸을 던졌던 이재유였다. 이재유는 식민지 조선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불온’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해방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새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 이재유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굳게 믿었다. 이재유의 정세 판단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낙관주의 없이 어떻게 온몸을 던질 수 있겠는가. 1930년대는 대공황이 닥쳐와 자본주의가 큰 위기에 빠졌다. 숨통을 연장하려는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을 더욱 수탈했다. 이에 맞서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은 아직 공장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농민투쟁도 기껏해야 군단위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툭툭 불거지는 여러 투쟁을 한데 묶어 한꺼번에 타오르는 들불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재유는 1920년대 노동조합·농민조합과는 다른 혁명적 노동조합·혁명적 농민조합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 조직은 선진 활동가들의 비합법 모임이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만으로 혁명운동을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재유가 보기에 혁명운동을 앞장서 이끌 혁명가들의 조직인 ‘조선공산당’이 없으면, 혁명이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공황을 벗어나려고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 뛰어드는 형국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려 해도 당은 꼭 있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재유는 1920년대처럼 전국적인 당 조직을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역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장하는 당 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는 운동의 근거지를 경성으로 삼았다.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이순금, 정태식 등 수많은 동지가 그와 함께했다. 이재유 수사기록에는 “요즈음 경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의 모든 공산주의운동의 흑막으로 이재유가 활동함으로써 수많은 청년 남녀가 해를 입었다.”고 적었다.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재유 조직에는 학생과 노동자, 농민도 많았다. 이재유는 피검과 고문, 옥살이, 탈옥, 재검거를 되풀이했다. 일제 탄압으로 조직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서 굽힘 없이 혁명운동을 했다. 이재유는 1932년에서 1936년 말까지 ‘경성 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었다. 이재유에게 경성은 혁명운동의 근거지이자 그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발판이었다. ●모던 보이의 ‘핑크’ vs 이재유의 ‘적색’ 1930년대 일본에서 ‘에로’가 유행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공황과 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 청년들은 일본의 긴자거리를 배회하며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핑크’가 되거나 진지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 되어 ‘아카(red)’가 되는 것, 둘 가운데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도 이와 비슷했다. 식민지 조선의 모던 보이는 경성의 혼마치(지금의 충무로)부근을 서성였다. 이 ‘핑크’들은 카페와 기생집을 드나들며 향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와 상반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도 조선에 있었다. 1920년대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크게 유행하여,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졌다.”고 했다. 이 새 세대를 일컬어 조선에서도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신문과 잡지에는 거의 빠짐없이 사회주의 관련 글이 실렸고,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비롯해 주요 사회주의 글도 번역됐다. “사회주의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다른 문제요,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안 되는 것도 다른 문제다. 다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행세를 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형편이다.”는 책 광고까지 있었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예전의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 1905년에 태어난 이재유도 ‘마르크스 보이’였다. 개성 송도고보에 다닐 때부터 ‘마르크스 보이’가 된 이재유는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그는 여러 단체에서 실천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재유는 1932년 ‘경성트로이카’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적색’ 혁명가가 되었다. ‘트로이카’란 “몇몇 지도부가 먼저 당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모두가 저마다 자유롭게 선전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재유는 “일생을 혁명가로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 대우 개선’ 등의 투쟁을 했다. 이재유는 형이 다 끝나고도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주보호교도소에 갇혔다. ‘핑크’의 모던 보이가 ‘메이크업’한 경성을 누빌 때 지하에서 혁명운동을 했던 이재유, 그는 1944년 10월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비합법 혁명운동사에서 최고의 기록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했다. 최규진(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 [사설] 원전 스톱 전력대란 대비책 빈틈없이 세워라

    부품보증서 위조 파문으로 영광 원전 5·6호기(발전량 200만㎾)가 발전을 중단하면서 올겨울 전력대란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기상청은 기후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크게 줄어들면서 올겨울에는 혹독한 한파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더위가 맹위를 떨쳤던 지난 여름 보조금 지급과 절전 캠페인 등 총수요관리로 전력위기를 극복했던 우리로서는 예기치 못한 사태로 몹시 힘든 겨울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과거 전력사용량을 보면 겨울 성수기가 여름 성수기보다 100만㎾가량 많다. 발전이 중단된 영광 원전 2기가 올해 안으로 가동되지 않으면 내년 1~2월의 예비 전력은 30만㎾대로 곤두박질친다고 한다. 지난해 ‘9·15 정전사태’ 당시 예비 전력이 24만㎾였던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중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력당국은 초고강도 전력수급 종합계획을 세워 이달 중순부터 조기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에너지 사용량 강제 감축 할당량 부과, 공공기관 비상발전기 의무 가동, 열병합발전소 조기 준공 등 공급과 수요 양 측면에서 총동원령이 내려질 것 같다. 당국에서는 터키에서 15만㎾급 발전선 4기를 임차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경험했듯이 대규모 정전사태(블랙 아웃)는 국가경제에 천문학적인 손실을 초래하는 만큼 빈틈없는 대책 강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민들도 ‘네 탓’하기에 앞서 위기극복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내복입기 등 에너지 절약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이참에 생산원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요금을 현실화하는 등 근본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유류세제는 높게, 전기값은 낮게 책정한 탓에 전기 쏠림현상을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송전탑 하나 세우는 데 7년이나 걸리는 현실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선후보들은 에너지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바란다.
  • 포스코건설, 폴란드 플랜트 수주

    포스코건설, 폴란드 플랜트 수주

    포스코건설은 1일 폴란드 크라쿠프시가 발주한 2억 5000만 달러(약 2727억원) 규모의 생활폐기물 에너지화 발전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생활폐기물 에너지화 발전은 폐기물 소각 과정에서 버려지는 에너지를 활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친환경 발전사업이다. 계약서명식에는 야첵 마이흐로프스키 크라쿠프 시장, 아네타 빌마인스카 폴란드 환경부 차관, 정동화(가운데) 포스코건설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 프로젝트는 소각로 2기와 열병합 발전설비를 건설해 하루 680t, 연간 22만t의 생활폐기물을 처리하고 소각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연간 9만 5000㎿의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단체장 발언대] 염태영 수원시장, ‘독도 우리땅’ 유물·자료 한평생 사운 이종학 선생을 아십니까

    [단체장 발언대] 염태영 수원시장, ‘독도 우리땅’ 유물·자료 한평생 사운 이종학 선생을 아십니까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역사왜곡과 망언을 일삼고 있으며,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자신의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치열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자 한평생 정열을 불태운 분이 있다. 바로 수원 출신 사운(史芸) 이종학(1927~2002) 선생이다. 지금 수원박물관에서는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특별기획전을 14일까지 연다. 이종학 선생은 “역사가 대대로 누릴 정신의 옥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를 김매기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를 사운이라 짓고, 우리 역사와 영토분쟁에 관한 기록을 찾는 일을 운명이라 여겼다. 이 선생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과 자료 수집을 시작으로, 일제의 대륙침략 야욕과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일본의 도서관과 자료보관소에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해 세상에 공개했다. 또, 독도가 우리의 땅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 스스로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자료를 모으는 데 헌신했다. 이렇게 선생이 평생 모은 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1997년 울릉도에 독도박물관을 개관했고, 선생은 초대 관장으로 활동했다. 그 소임을 다한 뒤에는 ‘한 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런 뜻을 기리기 위해 2002년 독도박물관 앞에는 선생의 묘비를 세우기도 했다. 선생은 평생 방대한 역사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자료는 ‘꼭 필요한 곳에 보내 활용케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뜻에 따라 독도박물관, 독립기념관, 현충사에 관련 자료를 기증했고, 2004년에는 수원시에 유물과 자료를 무려 2만여점이나 기증했다. 11월이면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주년이 된다. 그래서 수원박물관에서는 선생이 기증한 자료를 독도박물관, 독립기념관, 현충사에서 다시 옮겨와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수집한 독도와 조선해 자료, 잃어버린 땅 간도와 일제침략 자료, 화성과 충·효 자료 등 유물 150여점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중에는 독도 분쟁의 진실을 알려주는 ‘삼국접양지도’도 있다. 1785년 일본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이 지도에는 ‘독도는 조선이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을 일본인 스스로 명확히 밝힌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선생이 일생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수집한 유물과 자료는 그저 박제된 전시품이 아니라 우리 가슴과 심장을 뛰게 하는 북소리가 돼 살아 꿈틀대고 있다. 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수원시는 앞으로도 우리 역사 바로알기와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식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키워야만 총성 없는 역사전쟁에서 우리 땅을 굳건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취약계층 환경고민 해결사 ‘에코벨’ 울린다

    취약계층 환경고민 해결사 ‘에코벨’ 울린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헌법(환경권)에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열악한 생활환경에 노출돼 환경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국립환경과학원은 생활주변 환경 문제에 대한 불편·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에코벨(Eco-Bell)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에코벨은 취약계층의 생활 환경과 관련된 고민거리를 접수해 발생 원인과 피해 정도를 조사하고 컨설팅, 교육 등을 지원하는 제도다. 전국 16개 시도 보건환경연구원과 함께 환경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사전 예방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다. 에코벨을 통해 해결한 고충 사례와 제도 이용 방법을 소개한다. 올해 5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에코벨에는 다양한 환경 고민거리들이 접수되고 있다. 과학원은 에코벨에 제기된 민원처리를 위해 전담팀을 구성하고, 전담팀 10명을 전진 배치했다. 제기된 민원 가운데는 민감·취약 계층인 노인과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복지관의 열악한 시설과 가축사육 시설의 악취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내용이 가장 많다. 접수된 고민 해결을 위해 해당 전문가를 현장에 파견, 정밀 조사와 함께 컨설팅까지 해주고 있어 민원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시설이 노후돼 환경개선 불만을 제기한 복지시설에 대해서는 유해물질 측정 등 기초 조사를 거친 뒤, 환기구 마련 등 개선을 통해 쾌적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에코벨 박정민 연구관(팀장)은 “축사시설 악취로 고통을 호소한 충북 음성군 삼성면 농촌마을 주민들이 제기한 민원을 처리할 때 애를 먹었다.”고 토로했다. 이 지역은 대규모로 가축을 사육하는 농가와 폐기물 처리시설이 밀집돼 있어 끊임없이 민원이 제기돼 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전문가들이 현장에 출동해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오염 배출 농장주와 주민들 간 불화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결국 관련 시설들이 너무 낙후돼 보수가 필요하다는 진단과 함께 관할 지자체에 수시 관리·감독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에코벨에 고민 해결을 의뢰했던 지역 주민은 “몇 년을 호소해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환경과학원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군청에 문제점을 얘기해준 것에 감사하다.”면서 “그동안 과학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는데 기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현재 시행되는 법에 대한 불만 사례도 접수해 세부 시행령을 개정하는 성과도 올렸다. 불만 사례로는 가정용 난로나 보일러, 열병합발전소의 연료로 많이 사용되는 목재 펠릿의 경우 현행 ‘대기환경보전법’에 사용시설에 대한 정확한 연료 분류가 없어 업체들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민원이었다. 따라서 먼지나 질소산화물의 배출량 산정시 일반 목재로 분류돼 펠릿을 가공하는 소규모 업체들은 오염물질 배출을 많이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과학원은 세 차례에 걸쳐 현장 조사를 벌인 뒤 배출량 측정 후 배출계수에 대한 고시(환경과학원 고시 제2012-10호)를 개정했다. 에코벨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다양하다. 먼저 취약·민감 계층을 대상으로 실내공기질 측정과 시설 개선 컨설팅을 해 준다. 대상은 소규모(연면적 430㎡ 이하) 보육시설·양로원·고아원 등이다. 주택의 실내공기질(라돈)에 대해서도 정밀 진단을 해 준다. 30명 이상이 소속된 단체에서 원할 경우 방문 교육도 해 준다. 저주파 소음, 동물 소음, 실내 진동 등에 대한 측정과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법적 관리대상이 아닌 악취 배출시설 주변에 대한 정밀조사도 벌인다. 이 밖에 현장 조사나 진단이 필요한 경우 언제든 전문가들이 현장에 출동해 정밀 진단과 함께 대안도 제시해 준다. 에코벨 제도를 이용하려면 전화나 국립환경과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에코벨 코너에 환경과 관련된 고민거리를 접수시키면 된다. 접수된 민원은 담당과에서 내용을 검토한 후 민원을 제출한 당사자와 상담을 진행한다. 이후 현장 조사를 통해 시료를 채취하고 오염 원인 파악에 나서게 된다. 1~2주간 시료 분석 과정을 거쳐 관련 자료를 송부해 준다. 단순히 분석 결과만 통보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과에 대한 만족 여부를 확인한 후 서비스를 종료한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홀로서기 나선 금호석화 “공격경영”

    홀로서기 나선 금호석화 “공격경영”

    금호석유화학이 서울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본관을 떠나 중구 수표동 시그니처타워에 새 둥지를 틀었다.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과 갈등을 겪으며 독자노선을 걷던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은 이제 외형적으로 그룹과 분리돼 독립경영에 나서게 됐다. 하지만 아직도 박찬구 회장이 원하는 ‘완전한 계열분리’까지는 해결할 과제가 적지 않다. 12일 금호석화에 따르면 이달 초 석유화학 관련 계열사인 금호피앤비화학, 금호폴리켐, 금호미쓰이화학, 금호개발상사, 금호항만운영 등과 함께 시그니처타워로 사옥을 옮겼다. 회사 측은 사무공간 부족 등을 이유로 들지만, 재계에서는 박찬구 회장이 그룹 내 갈등을 마무리짓기 위해 서둘러 독자경영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박 회장은 사옥을 이전한 뒤 가진 긴급 계열사 임원 확대회의에서 “더는 금호석화가 그룹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면서 “이제는 홀로서야 하며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 뒤부터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어 왔고, 금호석화도 2009년 12월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과 기업개선작업 자율협약을 맺었다. 금호석화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재무구조가 좋아져 올해 말 자율협약을 졸업할 전망이다. 지난해 매출은 6조 4574억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고, 영업이익도 8422억원으로 본 궤도에 올랐다. 부채비율도 2010년 361.4%에서 2011년 202.8%로 낮아져 지난 5월 한국신용평가로부터 역대 최고 등급인 ‘A-’(안정적) 신용등급 평가를 받았다. 금호석화를 금호아시아나에서 분리시킨 박찬구 회장은 본격적인 공격경영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우선 울산공장과 여수 제2공장 등에 새 생산라인을 짓고, 2015년 말까지 4300억원을 투자해 여수에 열병합발전소도 증설한다. 신성장 동력인 탄소나노소재 생산라인도 하반기에 완공해 ‘미래 먹거리’ 찾기에도 나서고, 중국에 편중된 해외 판로도 다각화해 유럽연합(EU)과 미국, 중동 등으로 수출 지역을 다변화할 계획이다. 하지만 금호석화가 완전한 계열분리를 통해 지난해부터 추진해 온 ‘탈(脫)금호아시아나’에 성공한다 해도 몇몇 과제는 남아 있다. 우선 박찬구 회장은 작고한 부친(박인천 금호 창업자)과 회사의 역사가 깃든 ‘금호’ 사명을 계속 쓰겠다는 생각이지만, 금호아시아나 측과 상호에 대한 로열티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금호석화가 보유한 아시아나항공 지분 12.6%를 언제 매각할지도 관심사다. 공정거래법상 금호석화가 아시아나항공의 보유 지분을 3% 미만으로 줄여야만 법적으로 계열 분리가 돼 완전한 독립경영이 가능하다. 금호석화 관계자는 “최근 아시아나항공의 주가가 떨어져 당분간 주식을 처분할 계획이 없다.”고 설명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만화와 글로 쉽게 풀어낸 한국사

    앞선 철기문화를 지닌 가야는 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됐을까.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온 정치부 기자 출신의 저자가 국력이 엇비슷한 소국들이 연합체를 이룬 가야의 정치적 배경과 신라와 백제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지정학적 구도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한국통사가 역사 교육 강화라는 목표 아래 초등학교 5학년으로 내려온 것을 감안해 ‘한국사버스’(박찬구 지음, 니케주니어 펴냄)는 역사 속 한국의 주요한 장면 40개를 만화와 글로 쉽게 풀어 엮었다. 마치 버스를 타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듯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하남시, 열병합 발전소 건립 암묵적 동의?

    경기 하남시가 미사보금자리지구 내 열병합발전소 건립 추진에 앞서 지식경제부가 요청한 두 차례의 주민의견 수렴과정에서 반대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교범 시장이 뒤늦게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주민의 강력 반발에 따른 표를 의식한 행위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6일 하남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하남직할사업단에 따르면 사업시행자인 코원에너지서비스는 미사지구 남쪽 풍산동 4만 4973㎡ 부지에 열병합발전소를 올 상반기에 착공해 2014년 6월 완공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민의 반대로 사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초 발전소는 미사지구 북쪽 선동 부지 2만㎥에 들어설 예정이었으며,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에 있는 기존 시설의 보조시설로 설계됐었다. 그러나 강동구 주민들이 “강동구에서 생산한 열을 미사지구에 공급해야 하느냐.”며 반대하자 코원은 3㎞ 정도 떨어진 미사지구 남쪽 풍산동에 별도의 발전소를 건립키로 하고, 지난해 7월 지식경제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지경부는 하남시에 여론수렴을 요청했고, 시는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만 했을 뿐 위치 변경이나 열병합발전소 건립에 대한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업자 코원은 열원시설 이전배치 계획 변경을 신청했다. 국토해양부도 지난해 11월 미사지구 개발계획 변경 승인을 추진하면서 하남시에 여론수렴을 요청했다. 하지만 시는 의견수렴 기간인 12월 11일까지 반대의견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열병합발전소는 지금의 풍산동에 설립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됐다. 이런 사실을 안 주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자 하남시는 1월 26일 “아파트 가격 하락 등 주민들의 민원이 발생하고 있어 민원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계획된 입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달라.”는 추가 의견서만 국토부에 전달하고, 위치 변경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현재 LH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사업을 이제 와서 변경할 수 없다.”며 사업강행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사업부지조차 매입하지 못하는 등 사업에 난항을 겪고있다. 시는 주민들이 반발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초 입장과 달리 반대 입장에 편승했다. 시 관계자는 “여론수렴 과정에서 에너지에 대한 부분만 검토하다 보니 위치와 관련된 사안은 간과했었다.”고 해명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야스쿠니 신사는 침략의 상징…참배 없을 때까지 반대할 것

    야스쿠니 신사는 침략의 상징…참배 없을 때까지 반대할 것

    “야스쿠니(靖國)는 청산해야 할 침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거나 찬성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계속 활동할 겁니다.” 한일병합조약 102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야스쿠니신사 문제위원회의 즈시 미노루(62) 위원은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가했다. 그는 1970년부터 야스쿠니신사의 모순과 부당성을 지적해 온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운동가다. 그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제병합에 대해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역사”라며 운을 뗐다. 즈시는 “강제병합 후 일본이 조선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마구 죽였던 역사를 알게 됐다.”면서 “그때 받은 충격으로 신사를 연구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기간 신사와 관련된 사료를 모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 한국은 물론 타이완과 싱가포르에 있는 신사 터를 찾아다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해 왔다. 지난 23일 방한해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즈시는 전남 여수와 순천 일대의 옛 신사 터를 찾아 현장조사를 마쳤다. 1980년부터 10회가 넘게 우리나라를 찾아 곳곳에 잔재로 남아 있는 신사 터를 조사했다. 그는 야스쿠니가 단순한 신사가 아닌 ‘침략 신사’라는 신념을 갖고 있으며 2003년에는 이 제목으로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즈시는 “일본이 침략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나 같은 일본인이 신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제병합 후 조선에 지어진 신사가 1000여개라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남한에서 확인된 것만 80개 정도 된다.”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증언과 자료를 모으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역사고증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일본이 신사에 대한 망상을 떨치고, 과거의 잘못을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07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유족과 생존자가 일본 법원에 낸 취소소송에 대해서도 “그들이 승소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돕겠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함께 연대해 활동한다면 더 좋겠다.”고 말했다. 이범수기자 bulse46@seoul.co.kr
  • [씨줄날줄] 전범 DNA/육철수 논설위원

    세계적 유전공학자인 일본의 무라카미 가즈오 교수는 마음가짐에 따라 유전자(DNA)의 좋은 형질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저서 ‘유전자 혁명’에서 인간에겐 30억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이 가운데 5~10%만 작동되고 나머지는 잠자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유전자의 ‘ON/OFF 가설’이다. 마음이 신체에 명령해서 실행을 하려면 유전자의 작동이 필요한데, 이때 좋은 유전자를 켜고(ON) 나쁜 유전자를 끄면(OFF) 일을 활력 있고 순조롭게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유전자를 주고받은 부모·자식이 서로 성격·기질·지능·행동이 다른 이유는, 환경과 마음자세에 따라 ‘ON’ ‘OFF’ 하는 유전자의 작동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또 잠자고 있는 90~95%의 유전자를 깨우면 인생이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고 설파한다. 요즘 일본정부와 일부 신진 우익 정치인들의 독도·위안부 발언을 보면 그들 몸 속에 잠자던 나쁜 유전자들이 또 발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미래 총리감으로 꼽히는 하시모토 도루(43) 오사카 시장은 며칠 전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면서 “있다면 한국이 내놓으면 좋겠다.”고 망발했다. 그러면서 “위안부제도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제도일지도 모른다.”며 “한국 측 주장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꼬리를 내리기도 했다. 그제는 일본 극우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울 한복판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과 ‘동북아역사재단’ 건물 입구에 ‘독도는 일본 땅이다. 위안부 거짓말 중단하라.’는 내용을 쓴 나무말뚝을 세워놓아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삼국시대부터 우리를 숱하게 괴롭혔다. 임진왜란(1592년)과 한일강제병합(1910년)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지난 세기엔 러일전쟁·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명백한 전범(戰犯) 국가다. 그 오명은 진정한 반성이 없는 한, 두고두고 씻을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일부 정치인과 국수주의 세력은 틈만 나면 온갖 망언으로 피해국 국민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다.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전범 DNA’가 여전히 ‘ON’ 상태인 모양이다. 무라카미 교수님! 유전 공학의 발달로 특정 유전자를 찾아 콕 집어내거나, 일부분만을 없애는 게 가능해졌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전범 DNA 같은 나쁜 유전자들을 없애거나 변형시켜 그 기능을 영원히 ‘OFF’시킬 방도는 정녕 없는 걸까요?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102년 만에 되찾는다 원형 남은 유일한 대한제국 공관

    102년 만에 되찾는다 원형 남은 유일한 대한제국 공관

    대한제국이 주미공사관으로 1891년부터 1905년까지 사용했던 미국 워싱턴 소재 건물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되사들였다고 21일 밝혔다. 대한제국 외국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건물로 일제 강점기 과정에서 강제 매각된 소유권을 102년 만에 되찾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재미교포들이 2003년부터 이민 1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매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건물이라는 점에서 이번 매입은 큰 의미를 지닌다. 1877년 건립된 이 건물은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로간서클 역사지구(Logan Circle Historic District)에 소재하고, 지하 1층·지상 3층의 빅토리아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1891년 11월 당시 거금 2만 5000달러에 매입했고,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11월까지 주미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공사관은 ‘대조선주차 미국화성돈 공사관’(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이라 불렀다. 주차는 ‘주재’를 의미하고, 화성돈은 워싱턴의 한자 표기다. 그러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관리권이 일제로 넘어갔고,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2개월 앞둔 1910년 6월 단돈 5달러에 건물의 소유권이 주미 일본공사 우치다에게 넘어갔다. 3개월 뒤인 9월 1일 미국인에게 10달러에 재매각됐다. 현 소유주가 매입한 것은 1977년 9월이다. 문화재청은 “우리 정부와 재미교포 단체의 숙원사업 중 하나가 해결됐다.”면서 “재미교포 사회는 1997년 이후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2003년, 2005년, 2007년 등 매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문화체육관광부도 2010년 매입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올 2월 문화재 긴급매입 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매입을 결정하고 민간에 이를 위탁했다. 이 건물의 가격은 한때 600만 달러(약 68억원)까지 치솟고 건물주가 매각을 거부해 협상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CBRE코리아 부동산 에이전트가 맹활약해 결국 성사됐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매입가격은 350만 달러(약 39억 5600만원)로 많이 깎았고, 계약금 35만 달러를 걸어놓아 앞으로 법적인 절차를 잘 밟아나가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매일신보’ ‘한성순보’ 문화재 된다

    ‘대한매일신보’ ‘한성순보’ 문화재 된다

    문화재청은 영문·한글판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위·서울신문 전신)와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등을 문화재로 20일 등록 예고했다. 또한 최초의 근대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 등 신문 5건과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 등 잡지 2건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영국 언론인 베델이 영문·한글판으로 발간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창간돼 한·일 강제병합 전날인 1910년 8월 28일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상을 세계에 고발했다. 1883년 10월 31일 창간된 ‘한성순보’는 통리아문 박문국이 열흘에 한 번씩 세계 정세와 외국 문물·제도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아 1884년 10월 9일까지 발행됐다. 한글 전용인 독립신문은 서재필(1864~1951)이 1896년 4월 7일 창간해 격일로 제작하다 1898년 7월 1일 일간지로 전환했다.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가 발행한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 상하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내외에 알린 ‘독립신문 상하이판’(아래)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 밖에 대조선 일본인 유학생 친목회가 일본에서 창간한 계간지 ‘친목회 회보’와 근대문명과 과학지식을 소개한 격주간지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 역시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충성도 아닌 성과따라 임원연봉 결정돼야”

    ‘경제민주화’ 바람이 확산되면서 재벌 총수 등 상장사 임원의 개별적인 보수를 공시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상장사들은 사업보고서를 통해 등기임원들의 전체 보수액만 공시하고 있어 임원 개개인에게 얼마씩 지급됐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재벌총수 등 지배주주가 이사회를 장악하는데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 때문에 여야는 임원의 개별보수를 공시하자는 제도 도입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은 ‘부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 등을 고려해 제도 도입을 꺼리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일정도 이 제도의 연내도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재계 반발에 번번이 무산…이번은 다를까 국내에서 상장사 임원의 개별 보수를 공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2003년께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2006년 17대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의원과 열린우리당 임종인 전 의원 등 10명이 임원의 개별공시를 골자로 하는 ‘증권거래법’ 개정안을 국회 재정경제위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논란 끝에 17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됐다. 18대 국회에서는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이정희 전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아 비슷한 내용의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2009년 대표 발의했으나 역시 재계와 금융계의 반발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가 12월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이번 19대 국회는 뭔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확산하고 있다. 임원의 개별보수를 공시하는 것은 재벌 총수 등 지배주주의 이사회 장악을 차단하는 의미가 있다. 임원들의 보수가 최고경영자나 총수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기업의 성과에 연동해 결정되도록 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19대 국회에서도 민주통합당 이목희 의원 등 10명이 6월 말 비슷한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국회 정무위에 제출해 놓았다. 경제개혁연대 강정민 연구원은 “자본시장 선진화 측면에서 볼 때 이 방안은 경제민주화의 또 다른 길”이라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이기웅 간사도 “합리성과 투명성 차원에서 임원의 보수가 공개된다면 주주로서의 피드백이 가능해 경제 민주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야는 임원의 개별 보수공시를 경제 민주화 차원에서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강석훈 의원은 “선진국에서 개별 공시를 한다면 우리도 그런 방안에 대해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박근혜 경선캠프’의 핵심 경제 브레인 중 한 명이다. 금융당국도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위화감 조성이나 (임원들이) 질시의 대상이 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다”면서도 “투명성 확보란 측면에서는 필요한 제도”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가 자본시장의 대대적인 개혁을 바라며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국회 정무위에 제출해 놓은 것도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다. 정무위가 같은 법을 대상으로 한 개정안을 병합심사하는 과정에서 임원의 개별 보수 공시 방안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 연내처리 가능할까 경제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임원 보수 개정 내용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촉박한 정치일정이다. 8월 임시국회는 ‘방탄국회’ 논란 속에 개점휴업 상태에 놓여 있고, 여야는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특검 범위 등에서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예산 결산 심사와 헌법재판관 청문회 등 현안이 쌓여 있는 만큼 내주에는 국회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9월부터는 정치권이 대선에 ‘올인’하면서 진지한 논의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무위 관계자는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은 결국 정무위서 할 수밖에 없는데 결산심사부터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국정감사인데 법안 심사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결국 10∼11월쯤은 돼야 하는데 대선판에 심도 있게 법안을 심사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선 이후 경제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일부 여권 인사들은 재벌 총수의 횡령ㆍ배임에 대한 집행유예 금지, 신규순환출자 금지 등 경제민주화 움직임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 경선캠프’의 최경환 총괄본부장은 “본선에서는 경제민주화를 폐기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돼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최 총괄본부장은 이에 대해 “복지나 경제민주화라는 두 화두만 갖고 대선을 끌고 갈 수 없고 일자리 담론, 미래비전도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측에서도 크게 힘을 실어주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정무위 야권 관계자는 “말로는 그런 법안까지 다 중점적으로 추진한다고 할 수 있지만 대기업ㆍ재벌 지배구조 개편 등에 비해 중요도에서 밀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이목희 의원이 정무위가 아닌 보건복지위 야당간사로 선임되면서 추진 동력이 상당 부분 상실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연합뉴스
  • “친일 할아버지 ‘무사유의 죄’… 15일 또 그 죄 짓고 있지 않나”

    “친일 할아버지 ‘무사유의 죄’… 15일 또 그 죄 짓고 있지 않나”

    밝은 미래 찾기는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 가능하다. 일제시대 지방 군수를 지낸 친일파의 손자가 광복 67주년을 맞아 서울신문 독자와 국민들에게 조부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글을 보내 왔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반발하는 후손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이 같은 고백은 진정한 광복 정신의 표현과 다름없어 보인다. 다음은 1년 전 친일인명사전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발견한 윤석윤(55)씨가 14일 보내온 편지다. 윤씨는 현재 경기도 군포시에 거주하며 독서토론 강사 및 기업체 근로자 교육강사 등으로 일하고 있다. 8월 15일이 왔습니다. 광복절입니다. 올해는 저도 이날에 대한 감회가 새롭습니다. 1년 전, 행적을 몰랐던 할아버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에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담당할 인재를 키우고자 1895년 제1회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된 양반 자제 200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일본 도쿄의 게이오의숙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귀국하여 1900년에 농상공부에서 관리로 공직을 시작했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군수로 일하다 1926년 50세에 퇴직하였고, 195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를 찾게 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덕분입니다. 일제강점기 군수를 했다고 하기에 ‘혹시’ 하고 찾아봤는데 그곳에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삶을 알게 된 기쁨과 내가 미워했던 친일파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교차해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제의 앞잡이였다니. 할아버지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할 때 왜 관리를 그만두지 못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 답을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해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찾았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담당했던 아이히만의 죄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철저한 무사유(無思惟)’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조직이 요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친일파들도 역시 조직에 순응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무사유의 죄’를 지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죄도 바로 그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관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식민지 관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무사유의 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방해하고 무력화시켰습니다. 오히려 많은 친일 인사들을 관료로 등용하였습니다.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며,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자리에서 생활하는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던 분들의 후손들은 못 배우고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실 앞에 누가 나라를 믿고 목숨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역사 청산의 문제는 나라 안팎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이 한·일 간의 외교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독도 문제는 단순히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입니다. 안에서는 일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의 땅을 찾기 위해 국가와 소송을 벌이고, 조상의 잘못을 덮고 공적비나 동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는 등 후안무치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사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조선의 대학자인 정약용 선생은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리 판단 기준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를 따지는 기준이고, 또 하나는 이로움과 해로움, 즉 이해(利害)를 따지는 기준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시비가 이해보다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 주는 죄를 짓게 됩니다.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8·15를 맞이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들과 순국선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친일파의 손자가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내내 평안하십시오. 경기 군포시 거주 윤석윤 씀
  • 하남 열병합발전소 추진에도 반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경기 하남시 미사보금자리주택지구에 에너지 공급을 위한 열병합발전소 건립을 추진하자 인근 서울 강동구와 하남 시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둘 다 보금자리주택을 위해 기존 주민들이 희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로 인해 저소득층의 주거 안정을 위해 3만 7000여 가구 규모로 조성 중인 미사지구가 기반시설 구축 계획부터 흔들리게 됐다. 10일 시에 따르면 LH는 하남시 풍산동 일대에 4만 400㎡ 규모의 열병합발전소를 설치, 오는 2015년 완공되는 미사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강동구 주민들이 반발했다. 당초 LH는 기존의 강동구 열병합발전소를 일부 증설한 후 하남 미사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미사지구엔 보조열원시설만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민의견 수렴 과정에서 강동구 주민들의 집단 반대에 부딪혀 강동발전소 증설이 무산됐다. 이에 따라 LH는 망월동 일대에 보조열원시설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변경, 풍산동 부지로 열병합발전소를 이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번엔 하남시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발전소 건립 위치가 서울에서 하남시로 진입하는 관문인 동시에 시의 중심지라 기피시설 설치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특히 인근 주민뿐만 아니라 전 시민이 동참하는 범시민대책위원회까지 구성, 집단행동을 벌이는 등 강력 반대하고 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4대강 공사로 낙동강 역류… 구미산단 증기 누출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강과 인접한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 1단지 지하에 매설된 증기관에 물이 스며들어 대규모 증기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구미열병합발전소는 낙동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지하로 스며든 물이 지하에 매설된 고압 증기관에 닿아 대규모 증기 누출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10일 밝혔다. 이에 따라 구미국가산업단지 58개 업체에 증기를 공급하는 구미열병합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특히 210도와 20㎏/㎤의 고압 증기관이 낙동강에서 유입된 지하수와 반응하고 있어 증기 누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증기관은 1988~1989년 매설돼 이미 노후한 상태다. 구미국가산업단지 남쪽에 있는 낙동강 칠곡보에 물을 채우기 시작한 6월 말부터 구미1단지 지하에 매설된 일부 증기관에 물이 스며들었다. 구미국가산업단지 1단지는 낙동강 서쪽에 연접해 있으며 칠곡보에서 8㎞ 정도 떨어져 있다. 발전소 측은 지하수를 펌프로 빼내며 수증기가 유출되는 지역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또 구미공단 내 기업체들에 ‘열 수송관의 침수로 증기 공급이 중단될 수 있어 피해 최소화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이달 초에는 4대강 사업 발주처인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 긴급 수습 방안과 공사비 지급 등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구미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한글도 언어일 뿐 대중 요구 따라야

    ‘한자를 쓰면 안 되고 한글만 써야 한다.’ ‘외래어는 모두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자.’ 우리 사회엔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집착과 일방의 구호가 난무해 왔다. 이런 한글 지상주의는 한글과 한국어를 동일시한 인식에 바탕을 둔다. 최근 들어 ‘한글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는 것도 그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한글 민주주의’(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펴냄)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차원의 한글 우월주의에 반기를 들어 ‘열린 한글 사용’을 정색하고 주장한 책이다. 우리 말의 역사와 미래를 천착해 온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지론이 담긴 역작이다. 저자의 메스는 우선 역사적 경험과 상처를 겨냥한다. 말이란 생득적이지만 문자는 선택의 대상이며 그러한 선택은 언제나 역사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세종대왕은 새 문자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한문’에 대비해 ‘언문’이라고 불렀다. 이후 근대화가 되어 민족과 국가의 의미가 새로워지면서 ‘속되다.’라는 뜻을 품은 언문이란 표현을 용납할 수 없었고 대신 ‘국문’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국가가 일본에 병합되고 국문과 국어가 일문과 일본어를 뜻하는 이름이 되자, 조선인들은 ‘국문’을 대신할 이름을 찾았고 대한제국의 글, 또는 문자란 뜻으로 사용되던 ‘한문’을 풀어쓴 ‘한글’이 탄생한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자 ‘민족 얼’의 상징이기도 했다.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 말을 지키는 길이었던 상황에서 말과 글을 구분함은 무의미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를 걷어내자고 거듭 강조한다. ‘한글이 없어진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인식에 대한 의문 제기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은 “한글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 대신 우리 삶에서 언어와 문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향한다. 물론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선택에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편리성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의 몫이며 어문정책은 대중의 요구를 반영해서 발전 방향을 정해야 한다.” 1만 3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특파원 칼럼] 오바마 대통령께/김상연 워싱턴특파원

    [특파원 칼럼] 오바마 대통령께/김상연 워싱턴특파원

    독일은 과거사를 무릎 꿇고 사죄했는데 일본은 왜 제대로 사과하지 않을까. 일본인의 천성이 용렬한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전후 처리에 그 원인이 있다. 일본의 항복을 홀로 받은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인 ‘천황제’를 존속시켰고 그에 따라 일본 기득권층은 거의 온전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 일왕을 위시한 정치권 주류가 제국주의 일본을 이끌던 자들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이들은 “과거가 잘못됐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독일에 총통제가 존속해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총통으로, 나치의 자손들이 정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결국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를 제대로 청소하지 않았기에 일본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느라 많은 피를 흘린 미국은 왜 복수심을 접고 일본의 ‘앙시앵 레짐’(옛 체제)을 존속시켰을까.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사고하는 미국 특유의 실리주의 때문이다. 공산국가 소련의 세력 팽창을 우려한 미국은 일본을 뒤집어엎어 카오스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는 말 잘 듣는 일왕을 수족 삼아 일본을 대(對)소련 방어기지로 활용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지난해 ‘아랍의 봄’에 직면한 미국이 절친했던 중동 독재자들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머뭇거리다 뒤늦게 반군 편에 선 모습에서 60여년 전 일본에 대한 미국의 계산법을 읽을 수 있다. 주어진 구도를 가급적 유지한 채 최소의 비용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미국의 정책적 전통은 지금 동북아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미국 정부가 일본의 핵무장 우려가 나오는 데 대해서는 수수방관이고 ‘집단적 자위권’ 얘기가 나와도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러니 과거 소련 때문에 일본을 키웠던 미국이 지금은 중국 때문에 다시 일본을 키우려 한다는 진단이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처지가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우방인 호주는 중국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고, 한국은 북한 핵·미사일 개발 억제 명분에다 중국을 직접 자극할 수 있고 반미세력의 반발 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본진(本陣)으로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적당히 근접한 데다 미국의 글로벌 전쟁에 늘 아낌없이 돈을 퍼주는 나라라는 점에서 국방예산 삭감으로 지갑이 빈 미국으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미국은 한국을 최전선으로, 일본을 본진으로 삼는 한·미·일 3자동맹으로 동북아에서 중국을 봉쇄하는 그림을 그렸고, 최근 논란이 된 한·일정보협정은 그 첫 단추다. 한·일정보협정이 무산된 뒤 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들리는 구시렁거림은 “한국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 정보의 질이 훨씬 높기 때문에 협정을 체결하면 한국이 더 득을 볼 텐데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게 답답하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눈엔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일 강제병합뿐 아니라 그 전의 임진왜란, 또 그 전의 숱한 왜구 침략으로 한국인의 DNA 깊숙이 박혀 있는 일본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을 “과거지향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폄하할 수는 없다. 섬나라 일본의 사이코패스적 호전성에 대한 한국의 경계심은 ‘유전공학적’이고, 그래서 과학적이다. 수천년 동안 일본의 ‘과거’는 늘 한국에 ‘미래’의 위험으로 반복돼 온 역사를 미국은 공부해야 한다. 방심하고 있다가 진주만을 얻어맞은 미국의 예지력이 한국인보다 우월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미국이 한·미·일 3자동맹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일본에 과거사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보일 것을 먼저 요구하는 게 순서다. 지구상에서 그 일을 강제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의 항복을 홀로 받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밖에 없다.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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