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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국정농단 외척·임금에도 비판의 칼…격동 구한말 ‘붓끝 의병’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국정농단 외척·임금에도 비판의 칼…격동 구한말 ‘붓끝 의병’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시대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상층과 하층의 다양한 지층들이 충돌하는 지각변동의 시기였다. 1876년의 개항에서부터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을사늑약, 한일합병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변역(變易)과 위망(危亡)의 시대’였다. 그 질풍노도 속에서 매천은 어떻게 해야 지식인으로서의 시대 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격변의 구한말을 예리한 눈으로 기록하고 비판하며 개혁하려 했던 그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 시대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 보자.#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는 되고 싶지 않다 전남 광양의 시골 청년 매천은 약관의 나이에 대학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강위(姜瑋), 김택영(金澤榮), 이건창(李建昌)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시재(詩才)를 인정받았고 이후 전국적으로 문명을 떨쳤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들이 판치는 요지경 속이었다. “초시(初試)를 매매하던 당초에는 그 가격이 200냥 혹은 300냥으로 일정치 않다가 갑오년 직전의 몇 차례 식년시(式年試)에는 천여 냥씩 해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고, 회시(會試)의 경우는 대충 만여 냥씩 하였다./ 임금은 군수를 임명함에 있어 자주 팔면 돈이 많이 생긴다 여겨 1년도 못 되어 금방 교체시켰다. 돈을 바치고 임명을 받은 자들은 그런 사실을 이미 알아서 부임하자마자 즉시 수탈을 일삼았다.”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 무엇보다 공정해야 할 과거시험과 관직 임용이 검은돈으로 거래되고 어처구니없게도 임금이 그 일에 앞장을 서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 자제들을 합격시켜 주기 위한 시험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종친이면 촌수를 안 가리고 무조건 합격시켰다. 이런 현실을 목도한 매천은 마침내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는 되고 싶지 않다”며 미련 없이 낙향했다. #매화는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지난해 봄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담도 치지 않고 울타리도 하지 않았으며 대나무를 쪼개 창문을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세 칸의 집을 완성하고는 동쪽 방을 책 읽는 서실로 삼았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면 겨울에는 구들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대자리가 시원하였다. 나는 비좁다거나 누추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충분히 편안하게 지낼 만한 곳으로 여겼다.” ‘매천집’ 권6에 나오는 ‘구안실기’(苟安室記)의 한 대목이다. 전남 구례의 산골 만수동으로 들어간 매천은 작은 집을 짓고 직접 농사지으면서 책도 읽고 여행도 하며 은둔자로 살았다. 이른바 ‘소확행’을 즐겼던 셈인데, 그때가 그에게는 “세상 근심 잊어서 꿈이 담박하고 가난을 먹고살아 시가 고상하던”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 없다 그러나 때때로 들려오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 소식에 언제까지 초연할 수는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매천은 여러 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통곡만 하였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지사들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눈물로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그 숭고한 뜻을 기렸다.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우국시를 쓰고, 의병장들을 애도하는 시를 짓고,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워 신교육에 나섰으며, 또 보고들은 바를 토대로 계속 ‘매천야록’을 집필해 갔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이번에 올 때 300만 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주어 조약을 성사시키고자 도모하였다. 적신(賊臣) 중 약삭빠른 자는 그 돈으로 넓은 장원(莊園)을 구입하고 귀향하여 편안하게 지냈는데, 권중현 같은 자가 그러했다. 이근택과 박제순 또한 이 때문에 갑자기 거부가 되었다./ 7월 14일,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용원은 성묘를 간다 핑계 대고 앞서 출발하여 대전까지 가서 이등박문을 전송하였다.” ‘매천야록’ 권4(1905)와 권6(1909)의 기록이다. 당시의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의 간교한 술수를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그 직필(直筆)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국정을 농단하던 권세가와 외척들, 무능한 위정자들, 심지어 임금과 왕비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왕(황)후는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는데, 정치에 간여한 20여 년 동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는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하였다”고 평했다. ‘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는 말이 실감 난다. #사진을 보며 55년의 인생을 돌아보다 “일찍이 세상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비분강개를 토하는 지사도 못 되었네. 책 읽기 즐겼으나 문원에도 못 끼고 먼 유람 좋아해도 발해를 못 건넌 채, 그저 옛사람들만 들먹이고 있나니, 묻노라, 한평생 그대 무슨 회한을 지녔는가.” (‘매천집’ 권7 ‘오십오세소영자찬’(五十五歲小影自贊)) 1909년 가을, 매천은 상해에서 잠시 귀국한 친구 김택영을 보려고 상경했으나 그가 출국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귀향하던 길에 천연당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고 시를 짓게 되는데, 위의 사진과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매천이 자결하기 한 해 전에 썼고 사진과 함께 남아 있어 그 의미가 더해진다. 상념에 잠긴 모습과 55년을 회고하는 시를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최후를 준비하는 듯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되니 바람 앞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집’ 권5 ‘절명시’(絶命詩)) 매천이 자결하기 직전에 쓴 ‘절명시’ 가운데 두 수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조약이 공표되고, 나라를 양보한다는 조서(詔書)가 구례에 도착한 날, 매천은 조서를 절반도 읽지 못하고 기둥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9월 9일 새벽 4경, 문을 닫아걸고 앉아서 절명시 네 수와 자제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다음 조용히 음독 자결을 시도하였다. 얼마 뒤에 급히 연락을 받고 온 동생 황원이 아이 오줌과 생강즙을 올리자, 그릇을 밀쳐 엎어버리고는 “세상일이 이리 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지더니 9월 10일 새벽닭이 두 번째 울 때 운명하였다. 내일, 29일이 한일합병의 치욕이 있었던 날이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로서 죽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며 매천이 자결한 뒤, 절의를 가슴에 새긴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투쟁과 헌신으로 어렵게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로 시끄러운 현실을 볼 때, 비애를 금할 길이 없다. 이제 다시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다 함께 결연히 매천의 정신을 되새겨 보고 어떻게 해야 각자의 시대 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 고민할 때이다.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문헌번역실장■ ‘매천집’은 일제 검열 피해 유고는 상해로 원집은 매천이 서거한 이듬해에, 속집은 1913년 중국 난퉁(南通)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간행되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상해의 김택영에게 유고가 보내졌고, 그의 편정(編定)을 거쳐 간행한 뒤 비밀리에 국내에 보급하였다. 이렇듯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문집이 간행된 것은 매천의 동생과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고 그 뜻에 호응한 영호남의 인사들이 정성을 합한 결과였다. ‘매천집’의 번역은 그의 성인(成仁)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0년에 네 권으로 펴냈다. 강위, 김택영, 이건창과 더불어 한말 사대가로 평가받는 매천은 맑고 강건한 시와 예리한 필치의 산문을 다수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매천야록’은 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빛나는 불후의 명저이다.
  • ‘관’(棺)에 쓰인 나무, 가구 제작용으로 재판매…中서 논란

    ‘관’(棺)에 쓰인 나무, 가구 제작용으로 재판매…中서 논란

    장례식에 쓰기 위해 만들어졌던 관이 목공소에 재판매 돼 가구 제작용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중국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건네고 관을 수거하는 ‘화장(火葬)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노인이 집 안에 관을 보관해 둘 경우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믿는 풍습이 있다. 한국에서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수의를 미리 사서 보관하는 풍습과 유사하다. 중국 당국은 이미 몇 해 전부터 토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매장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화장을 권장해왔고, 이에 따라 관을 수거하고 돈으로 보상하는 화장 캠페인을 진행해왔다. 이에 따라 미리 준비해 둔 관을 쓸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목재소를 통해 관을 재판매하고, 이것이 가구제작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현지 언론에 의해 알려졌다. 지난주 장쑤성(省) 난징시(市)의 한 지역 방송국 프로그램에 따르면 장쑤성 쑤첸시(市)의 일부 목재소는 주민들로부터 수거한 관을 부수어 쌓아놓은 뒤, 이를 다른 지역의 가구업체에 재판매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지의 한 목공업자는 기존의 관을 잘게 부수고 분리해 가구제작업체에 재판매하며, 이를 사는 가구제작업체는 자신들이 사는 것이 본래는 관에 쓰인 나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일각에서는 소비자들이 구입한 가구가 관으로 쓰인 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매우 불쾌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가운데, 사람들이 관을 내다팔게 하도록 만든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근 중국 정부는 환경보호를 이유로 들며 관뿐만 아니라 장례식 때 태우는 종이돈 등의 사용도 제한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따라 헤이룽장성(省) 하얼빈시(市)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장례식에 쓰이는 종이돈과 관 등 장례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시장을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지역당국은 “문명적이고 건강하며, 환경적이고 안전한 장례식 전통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네티즌들은 “이러한 장례전통은 대대로 내려져 오는 신앙과 같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친척과 일가족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불법이 될 수 있나”라며 비난했다. 자신이 사망했을 때 쓸 관을 보관하고 있던 시민들도 관을 압수당하고, 그 관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며 분노와 반발을 드러내기도 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파병 떠난 아빠와 똑 닮은 인형 본 아들의 반응 (영상)

    파병 떠난 아빠와 똑 닮은 인형 본 아들의 반응 (영상)

    파병 간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한 엄마는 아들에게 아빠 인형을 만들어주었고, 그 인형을 무척 좋아하게 된 아들의 사랑스러운 반응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1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ABC, CBS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 육군 병장인 아빠 체이스 브리스코는 아들 나단이 태어난 지 약 3달 정도 됐을 때, 폴란드로 해외 파병을 가게 됐다. 엄마 디에나는 “남편이 파병을 가기 전, 매일 밤 나단을 재웠다. 그런데 아빠가 떠나고 난 후 아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꽤 오랜 시간 아빠를 보지 못할 나단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바로 군인인 아빠를 닮은 봉제 인형을 만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목소리를 녹음한 장난감 ‘대디 돌’(Daddy Doll)을 만들어 나단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아빠를 복제한 인형을 본 아들의 반응을 영상으로 남겼다. 영상에는 나단이 처음 아빠 인형을 힐끗 보고 난 뒤, 인형에게 곧바로 사로잡힌 모습이 담겨있었다. 인형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차린 듯, 나단은 놀라움과 환한 미소를 띠며 인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몸으로 아빠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했다. 엄마 디에나는 “비록 인형이지만 나단이 잠드는 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단,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금방 들어갈게’라는 메시지에 나단은 아주 좋아했다”고 전했다. 이어 “나단이 심통을 부릴 때 인형을 가져다주면 영상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매일 밤 아들 침대에 아빠 인형을 둔다”면서 “덕분에 아빠와 아들은 한시도 떨어질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해당 영상은 디에나의 페이스 북에서만 2만 건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다. 나단의 영상을 아내에게 전달 받은 아빠 체이스는 “오, 맙소사! 나단이 나를 알아보네?”라며 감격했다. 끝으로 엄마는 “남편이 미 텍사스주 킬린에 있는 부대로 돌아올 예정이지만 군대의 사정을 잘 모르겠다”면서 “그때까지 나단은 아빠가 얼마나 멀리 있든 아빠 인형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페이스북(디에나 브리스코)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독립운동가 11명 배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상룡…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등 수백억 기부한 이회영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독립운동가 11명 배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상룡…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등 수백억 기부한 이회영

    독립운동 명문가는 대표적으로 ‘5대 항일 가문’을 꼽는다. 안중근 의사, 석주 이상룡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 등이다.안중근 의사 가문은 직계, 방계를 포함해 총 15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삼촌인 안태순 선생을 비롯해 안 의사와 동생 정근·공근, 사촌동생 명근·경근·홍근, 조카 원생·낙생·춘생·봉생·우생 등이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와 여동생 성녀, 조카 미생, 조카며느리 조순옥·오항선 등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지금의 대통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은 고성 이씨 종손 집안으로 경북 안동의 99칸 종택 ‘임청각’으로 상징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집안”이라고 언급한 가문이다. 3000석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 이 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배출되자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아예 임청각을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문중과 안동 시민들이 반발하자 집 일부를 허물고 마당 한가운데 철길을 내버렸다. 직계 및 방계를 포함해 총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석주 선생의 당숙 이승화 선생을 비롯해 상동·봉희 형제, 아들 주형, 손자 병화, 조카 형국·운형·광민, 매부 박경종, 처남 김대락, 처제 김락 등이다.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일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다. 전 재산 40만원(1969년 물가 기준 600억원대)을 처분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짓는 등 항일투쟁 전선에 바쳤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등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김대중 정부 때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손자들이다.●대법원장 지낸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은 왕산 4형제들(허훈·허신·허겸·허위)과 직계 후손들, 왕산의 사촌인 허형 선생의 형제들과 후손들, 항일 시인 이육사 선생의 집안까지 아울러 10여명이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낸 허위 선생은 1908년 1월엔 전국 13도 연합 의병부대 군사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하며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허위 선생은 같은 해 6월 일제에 체포돼 경성감옥(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연해주에 살던 허위 선생의 후손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옮겨졌다. 선생의 6대손이자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인 한 대니스(8)군이 지난 13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 역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일송 선생을 비롯해 숙부뻘인 김대락 선생, 아우 동만, 형 장식, 사돈 이원일 등 총 5명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다. ●하와이 청년 운동가 강영각 등 속속 공개 새로운 명문가도 속속 공개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와이 한인 사회의 청년 운동가였던 강영각(1896~1946) 애국지사 가문도 독립유공자를 6명이나 배출했다. 강영각 지사의 부친인 강명화 지사와 손위 형들인 영대·영소·영문·영상 지사도 모두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명화 지사 부자(父子) 6명은 모두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포상을 받았다. 강영각 지사의 누나인 강영실의 남편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장을 지낸 양우조 지사다. 두 집안이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강영각 지사의 딸인 수잔 강 여사는 지난 13일 1920~30년대 강영각 지사와 하와이 한인 청년 단체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첩 2권과 그가 발행한 영자 신문인 ‘더 영 코리안’(The Young Korean), ‘디 아메리칸 코리안’(The American Korean)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며 부친의 미국에서의 항일 운동을 공개했다. jrlee@seoul.co.kr
  • 휴가 나온 해병대원, 시민 가방 빼앗아 달아나다가 체포

    휴가 나온 해병대원, 시민 가방 빼앗아 달아나다가 체포

    휴가를 나온 현역 해병대 병사가 지나가는 시민의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8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해병대 A(22) 병장은 전날 밤 11시 50분쯤 용산구 한남동 인근 길가에서 행인 B(43)씨를 뒤따라가 밀어 넘어뜨린 뒤 가죽 클러치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당시 B씨의 가방에는 휴대전화와 현금 50만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가방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넘어져 코뼈가 부러지고 무릎 등에 타박상을 입었다. 경찰은 A 병장의 동선을 추적, 이날 오전 3시 10분쯤 사건 장소로부터 1㎞가량 떨어진 길가에서 긴급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A 병장의 신병을 이미 군 헌병대에 인계했기 때문에 자세한 조사는 군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월급 320만원’ 유가족 위해 내놓은 공군 병장

    ‘월급 320만원’ 유가족 위해 내놓은 공군 병장

    “칠곡 전투기 사고 조종사와 생전 인연… 제 작은 정성, 가족들에게 위로되기를”“제 작은 정성이 조국을 수호하려 노력한 조종사의 희생을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공군은 7일 손유승 병장(22)이 군 복무 중 모은 월급 320만원을 ‘하늘사랑 장학재단’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손 병장은 기부를 결심한 계기에 대해 지난 4월 경북 칠곡에서 추락한 F15K 전투기 사고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사고에서 순직한 조종사는 평소 제게 인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던 따뜻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오는 21일 전역하는 손 병장은 공군 제11전투비행단 102 전투비행대대의 작전지원병이다. 하늘사랑 장학재단은 1982년 사고로 순직한 조종사의 부모가 28년간 모은 1억원의 유족연금, 조종사 2700여명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2억여원의 성금을 기반으로 2010년 9월에 창립됐다. 2012년부터 매해 비행임무 중 순직한 공군 조종사의 유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손 병장은 이곳에 기부한 첫 번째 사병이며 공군은 손 병장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 선생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러자 선생은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곧 사형이 집행됐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나이 53세였다.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였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국치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죄수들과 도성(都城)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다. 박상진은 하얀 천으로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상주인 장남 허학을 비롯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회유하는 이완용에게 “넌 죽일 것” 호통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던 선생은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에게 거사 밀명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었다. 강제로 퇴위당하기 직전인 1907년 4월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쓰인 의대조(衣帶詔·옷 속에 넣어 비밀리에 전하는 임금의 편지)가 선생에게 전달됐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인영도 다시 뛰어들었다. 이인영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1907년 12월 각도의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토록 했다. 경기도에서 거병한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의병 총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1908년 1월 연합의병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화승총에 짚신을 신은 의병은 애초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울 진공 계획을 알아챈 일제는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선생은 선발대 격인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지휘해 선두에 서서 서울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도 뒤이어 1월 28일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인영에게 부친의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이인영은 후사를 허위에게 맡기고 급히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은 부대별로 흩어져 유격전에 들어갔다. 선생은 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덮쳐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의 의병들이 수많은 전과를 올리자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 내부대신 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선생은 “너(이완용)는 반드시 죽일 것이로되 심부름 온 놈이야 죽여서 뭐하겠느냐”고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 있던 선생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생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아카시가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자 선생은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선생에게 존경을 표했다. 또 선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데라우치 통감에게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선생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월위대장군 성위만병수)라는 글을 지을 만큼 한학에 능통했다. 관직에 나선 것은 44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평리원 재판장(지금의 대법원장 격),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의 본관과 고향은 김해다. 임은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에서 서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허위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에 정착했다고 한다. 임은동은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과 붙어 있다. 드넓던 평야는 구미산업공단으로 바뀌었고 공단 아래쪽 허씨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은 빌라와 주택이 들어서 고가(古家)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추서… 서울시 ‘왕산로’ 명명 다행히 생가터는 남아 있었다. 선생의 장손 허경성(91·둘째아들 허영의 장남)씨가 자신은 전세를 살면서도 큰돈을 대출받아 1990㎡의 터를 사들여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생가 건물은 자료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건너 쪽 야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유허비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세워졌다. 김교홍 기념관장은 “선생의 집안은 논 3000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쓰는 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묘소 옆에 위패를 모실 사당 경인사(敬仁祠)가 조성되고 있지만, 예산 편성이 미뤄져 공사가 답보 상태다. 기념관 아래에 선생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가 있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시론] 손흥민의 병역 문제로 보는 헌법 정신/박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태웅)

    [시론] 손흥민의 병역 문제로 보는 헌법 정신/박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태웅)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었던 것은 바로 군역의 부담이었다.양반과 노비를 제외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누구도 병역의 의무를 피할 수 없었다. 일견 공평하고 괜찮은 제도인 것 같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징집을 해대고 전쟁터로 끌고 가니 도무지 농사를 지어야 할 장정이 남아나지 않았다. 결국 세수를 확보하는 데 비상이 걸린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일종의 ‘직업 군인’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전쟁이 나면 직접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던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들은 군대의 경비로 쓰일 군포(軍布) 2필을 나라에 바치는 것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됐다. 고을별로 할당된 군포를 징수해 중앙정부에 납부하고 또 이 기회에 자신들도 한몫 챙겨 둬야 했던 지방 관리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 군적에 올리고, 심지어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 되는 아기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징수했다. 바로 그 유명한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다.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군포를 마련하지 못해 야반도주라도 하면 그 이웃이나 친척이 도망간 사람이 내야 할 몫까지 떠안아야 했다. 토지에 부과된 조세는 일단 농사를 지으면 설사 흉년이 들어 쭉정이만 남더라도 최소한 그거라도 나라에 바칠 수나 있었다. 그런데 군포는 이와 달랐다. 일년 내내 고생해 농사를 지어 봤자 그 태반을 ‘대동미’(大同米)다, ‘환곡미’(還穀米)다 해서 나라에 뜯긴 농민들에게 군포 2필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몸으로 때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된 농민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는 길을 택하거나 가혹한 수탈이 없는 곳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허울뿐인 양민으로 사느니 차라리 노비가 되거나 조국을 등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이유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 주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병역의 의무는 “신성하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그 병역의무가 ‘다수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누군가의 꿈을 꺾어 버리고, 또 누군가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라면 이것은 더이상 신성할 수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희생 위에서 행복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 속담에 “좋은 쇠는 부수어 못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법령이 정하는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예술·체육 분야의 특기자는 병역법에 따라 예술ㆍ체육 요원으로 편입함으로써 병역의무를 대체하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병역특례 제도다. 병역법 시행령은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을 획득하거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때에 한해 병역특례를 제공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음악인은 입상하면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 국제·국내 대회가 무려 29개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16개, 피아노 부문에서는 15개 대회에서 입상하면 병역특례가 주어지도록 규정돼 있다. 무용(12개 대회)이나 국악 분야의 예술(7개 대회) 분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술(서예, 공예, 한국화 등) 분야에서는 병역특례를 적용받을 수 있는 대회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 한 군데에 불과하지만, 이 대회는 개최 주기가 1년이다. 필자는 손흥민 선수가 총칼을 들고 지키는 나라에 살고 싶지는 않다. 길어야 5년 정도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프로축구 선수에게 ‘신성한’ 병역의무의 이행을 위해 2년간 공을 차지 말라는 것은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발상으로 비춰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자유로운 공기가 전 세계 그라운드를 누벼야 할 손흥민의 소중한 꿈을 꺾어 버리고,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커리어를 한 번에 허물어뜨려야 유지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헌법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엄연히 보장하고 있고, 프로 스포츠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명백하다. 20대의 운동선수에게 그라운드가 아닌 연병장을 뛰도록 강요하는 것이 과연 헌법 정신에 합치되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병력 축소로 민간일자리 2만 1000개 창출… 입대 연기 소폭 늘 듯

    병력 축소로 민간일자리 2만 1000개 창출… 입대 연기 소폭 늘 듯

    국방부, 비전투분야 민간 인력으로 대체 軍전문성 필요 직위엔 예비역 우선 채용국방부가 지난 27일 ‘국방개혁2.0’을 발표한 뒤, 2022년까지 진행되는 국방분야의 변화로 나타날 기대 효과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병력 감축에 따른 대체 민간 일자리 증가, 군 복무기간 축소에 따른 군대 연기 경향 등이 대표적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29일 “현역 병력이 축소되기 때문에 현재 3만 4000명 정도인 군무원과 민간 근로자를 2022년까지 5만 5000명 정도로 늘릴 계획”이라며 “따라서 2만 1000개 정도의 민간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이번 국방개혁안에서 현역 수를 61만 8000명에서 50만명으로 11만 8000명(19.1%) 줄이고, 대신 비전투분야를 민간 인력으로 대체키로 했다. 하지만 2만 1000개 모두를 순수 민간 일자리로 보기는 힘들다. 군사적 전문성을 요하는 직위의 경우 예비역이 우선 채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향후 줄어들 현역 병력이 주로 군 장병들이기 때문에 민간 일자리 창출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날 것으로 국방부는 기대하고 있다. 2022년부터 군 복무기간도 육군·해병대·의무경찰은 21개월에서 18개월로, 해군·의무소방원은 23개월에서 20개월로, 공군은 24개월에서 22개월로 준다. 육군을 기준으로 지난 1월 3일에 입대한 장병부터, 입대 일을 2주씩 늦출수록 하루씩 군 복무 기간이 더 줄어든다. 노무현 정부의 군 복무기간 감축 때는 3주에 하루씩 복무기간을 줄였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군 입대 예정자들이 입대 시기를 늦추면서 국방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7월 31일 입대자는 군 복무 단축기간이 42일이지만 내년 같은 날 입대자는 68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입대를 1년 미뤄야 복무를 26일 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규모로 입대 일을 늦추는 식의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40만 6000원인 병장 월급은 2022년까지 67만 6000원으로 인상된다. 436명인 군 장성 수를 2022년까지 360명으로 감축기로 한 부분에 대해서는 군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군 관계자는 “현역 수가 줄어드니 군 장성도 줄이는 게 맞지만 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고위직 승진의 문이 사실상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반면 장성 감소 비율이 전체 병력의 감축 비율에 못 미친다는 분석도 나온다. 2022년까지 현역 수는 19.1% 감소하지만 군 장성 수는 17.4% 줄어들게 된다. 현역 군인 수가 크게 줄면서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사의 수로 싸우는 백병전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며 “특히 상비병력만으로 싸우는 체계가 아니라 동원전력에도 의지를 많이 한다. 예비전력 강화 계획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외 여군 간부 비중을 지난해 5.5%(1만 97명)에서 2022년 8.8%(1만 7043명)로 확대키로 했다. 하지만 여군 간부 비중을 늘리는 동시에 군 내부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난달에만 4명의 군 장성이 성범죄 연루 의혹으로 보직 해임됐기 때문이다. 한편, 방위사업청은 30일 열릴 계획이던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국방부장관 일정 관계로 다음달로 연기했다고 밝혔다. 개발은 완료됐지만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그간 미뤄온 중거리 대공유도무기 ‘철매-Ⅱ’의 양산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Q&A로 알아본 ‘국방개혁 2.0’…장병생활 무엇이 달라지나

    Q&A로 알아본 ‘국방개혁 2.0’…장병생활 무엇이 달라지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7일 국방부의 ‘국방개혁 2.0’ 기본방향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개혁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군 구조 일부 분야와 국군기무사령부 개혁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 구조와 국방 운영, 병영 문화, 방위사업 분야에 대한 개혁안 수립을 완료하게 됐다. ‘국방개혁 2.0’ 진행에 따라 군 장병들의 복무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Q&A 형식’으로 짚어봤다. Q. 문재인 정부 임기 내 군 복무기간 18개월로 단축은 어떻게 시행되나? A. 병 복무기간 단축은 오는 10월 1일 전역자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지난해 1월 3일 입대자부터 적용돼 현재 군 복무중인 현역병도 혜택을 받는다. 복무기간은 2022년까지 각 군별로 3개월씩 단축된다. 이에 따라 육군·해병대는 기존 21개월에서 18개월로, 해군은 23개월에서 20개월로 줄어든다. 다만, 공군은 2004년 지원율 저조로 이미 1개월을 단축했기 때문에 24개월에서 22개월로 2개월만 단축된다. 또 사회복무요원은 24개월에서 21개월로, 보충역에서 편입된 산업기능요원은 26개월에서 23개월로 각각 단축될 예정이다. 국방부는 입대시기에 따라 복무기간에 큰 차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2주(14일) 단위로 1일씩 단계적으로 복무기간을 단축할 예정이다. 육군병 입대일 기준 2020년 6월 15일 입대자가 2021년 12월 14일 전역하면서 복무기간 단축은 완료된다. 국방부와 병무청은 세부 입대 일자별 전역일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한편, 다음달 1일부터 입대일을 입력하면 전역일을 계산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병 복무기간 단축은 국회 국방위원회 보고 및 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승인을 거쳐 시행되게 된다. Q. 병장 월급은 얼마로 인상되나? A. 올해 병장 기준 40만 6000원인 장병 월급은 2020년까지 병장 기준 67만 6000원으로 인상할 계획이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장병 복지를 증진을 통해 2020년 기준 장병 1인당 월 병영생활비를 28만원 수준으로 유지해 전역시 저축 목표액을 400만원까지, 2022년 기준 월 병영생활비를 30만원으로 유지해 전역시 저축 목표액을 600만원으로 상향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민간 전문상담관에 의한 1:1 진로상담을 올해 기준 350개 부대에서 2020년까지 2000개 부대로 확대해 장병 취업 상담도 올해 5000명에서 2020년 3만명까지 확대한다. 군 경력과 사회 경력 간 연계를 강화해 취업 맞춤형 기술 특기병을 확대하고 군 경력 증명서를 발급해 취업 및 자격증 취득시 활용해 군 장병의 사회정착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취업 지원도 강화하겠다는 게 국방부의 목표다. Q. 폐쇄적인 복무 환경, 군 의료체계 개선은? A. 국방부는 ‘장병이 스스로 가고 싶고, 부모가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병영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병영문화 제도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 현재 국방부 직할부대 4곳에서만 시범 운영하고 있는 ‘일과 후 병사 휴대폰 사용’은 8~9월 중 각군 시범부대 운영을 확대해 연말 이전까지 최종 시행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또 부대별 여건을 고려한 ‘평일 일과 이후 외출 활성화’도 추진된다. 병사들이 간부의 동행 없이 대중교통 등을 이용해 군병원을 방문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외진 제도도 검토·추진할 계획이다. 대중교통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부대나 간부 동행이 필요한 병사를 위한 기존 외진버스 등은 현행대로 운행한다. 특히 병사의 24시간을 관리 및 통제 대상으로 인식하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일과 종료 후 병영내 출·퇴근 개념을 확대하고, 일과 후 또는 휴일에는 간부들의 병영생활관 출입 관련 행동수칙을 제정해 장병들의 개인 생활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런 개선책에 대해 군 일각에선 야전부대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라는 비판도 제기되는 만큼 향후 현실적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방부는 군 의료체계 개선을 위해 우선 전방지역은 사단급 이하 부대의 의무시설 개선과 군의관 및 응급구조사 등 의료 인력 보강하고 의무후송전용헬기 8대를 배치하는 등 응급조치 능력 강화에 나설 방침이다. 후방지역은 권역별 4개 병원을 중심으로 군 의료역량을 집중하고 국군외상센터를 설립하고 민간과의 의료협력을 통해 군 의료수준을 민간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Q. 군 복지회관·군 마트(PX) 현역병 사라지나? A. 국방부는 전방 일반전초(GOP) 부대 및 도서지역 등 여건이 제한된 지역을 제외한 군 복지회관 현역병 294명을 내년부터 민간인력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또 군 마트(PX) 현역병 1577명도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민간 인력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이다. 민간인력 대체가 제외되는 지역은 12개 접경지역과 2개 도서지역이다. 또 군 장병들의 사이버지식정보방 사용 여건 개선을 위해 올해 노후 컴퓨터 3만 5000대도 교체할 예정이다. 현재 61만 8000여명인 병력 기준으로 8명당 1대 기준인 컴퓨터 수량도 군 병력이 50만명 수준으로 줄어드는 2022년에는 5명당 1대 기준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국방부는 사적 목적의 장병 운용 및 지시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징계 등이 가능하도록 하는 부대 관리 훈령을 구체적으로 개정할 방침이다. 2018년을 ‘병영문화혁신 도약의 해’로 선정해 지속적인 현장 지도를 통해 불합리한 관행·부조리 척결에도 나선다. 국방부 주관 매년 전·후반기 ‘불합리한 관행 및 부조리 척결’ 우수부대를 선발 포상하고 차후 우수 선발부대 및 포상금의 단계적 확대도 추진한다. 그러나 일각에선 군 장병의 자율과 창의 보장이라는 이유로 사적 생활영역 권리 보장 등에만 주안점을 둘 경우 야전부대에서 군 지휘관의 지휘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는 만큼 부대별 여건을 고려한 검토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道 튼 도봉산, 김수영 시비 앞에선 더위도 ‘풀’처럼 눕는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道 튼 도봉산, 김수영 시비 앞에선 더위도 ‘풀’처럼 눕는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도봉(창포원의 붓꽃) 편이 지난 14일 서울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 자락에서 진행됐다.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도심을 떠나 도봉산 속으로 본격 피서를 떠난 셈이다. 울울창창한 도봉산의 녹음과 계곡 길을 걸으며 ‘풀’처럼 눕는 김수영의 시와 28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조선 최대 ‘러브 어페어’ 유희경과 이매창의 ‘이화우’ 스토리에 흠뻑 빠졌다.참가자들은 이날 도봉산역 2번 출구에서 만나 서울 창포원~평화문화진지~도봉구 희망목재문화체험장~도봉유원지~산악박물관~도봉서원 터와 김수영 시비까지 쉬엄쉬엄 걸었다. 다락원 체육공원과 도봉숲속마을, 광륜사, 북한산 생태탐방원 코스는 그냥 지나쳤다. 창포원과 도봉산 계곡 나무 그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창포원 붓꽃이 절정을 넘긴 게 아쉬웠다. 지난해 가을 문을 연 평화문화진지는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와 창작의 공간으로 변신해 눈길을 끌었으나 때마침 내부 공사 중이어서 전망대에서 도봉산의 비경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해설을 맡은 박정아 서울미래유산지도사는 센스 넘치는 해설과 즉석 시 낭송회로 참가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설문조사에서 참석자들은 “김수영 시비 앞에서 마련한 시 낭송 무대를 통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삼각산(북한산)이 서울을 600년 수도로 영속하게 한 으뜸 산이라면 도봉산은 버금 산이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서울의 뒤를 병풍처럼 두르고, 떠받치고, 지키는 양대 수호산이다. 삼각산이 영기를 머금은 ‘세 개의 거대한 뿔’ 형상인 데 반해 도봉산은 ‘붓을 꽂은 듯, 홀(笏)을 떠받친 듯’ 우뚝 선 화강암이 산 전체를 ‘바위길’(道峰)로 보이게 한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지명 사전’ 등에 따르면 도봉이란 지명 속에는 조선왕조 개국의 길을 닦았다는 뜻과 유생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의미가 이중으로 담겼다고 풀이하고 있다. 도봉이라는 지명은 고려 광종 때인 971년 도봉원(도봉사)을 고려의 ‘3대 부동’(不動)사원으로 선정한 데 이어, 1010년 거란의 침입 때 고려 현종이 도봉사로 몸을 피했다는 기록에 등장한다. 부동사원이란 국사 및 왕사가 머무는 선종사찰이다. 인왕산이라는 산 이름이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나온 것처럼 대개 사찰의 이름을 산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관례에 따라 도봉사가 있는 산을 도봉산이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이후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도봉산 영국사’(寧國寺)라는 산과 사찰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도봉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 중기 들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는 도봉사의 후신으로 동일 사찰로 추정되며, 사림의 영수 정암 조광조를 모신 사액서원 도봉서원이 들어서면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도봉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를 조선 성리학의 도학(道學)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도학은 고려의 불교식 풍습과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사대부의 학풍은 물론 가풍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따르게 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하지 않은 완고한 유학이다. 중기 이후 조선의 풍습과 학풍을 바꿔놨다. 도학사상의 주창자이자 개혁가인 조광조가 유독 도봉산을 좋아했고 즐겨 찾았으며, 도봉사에서 도학사상을 정립했기에 도봉이라는 지명이 살아났다는 추정이다. 도봉산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1573년 도봉서원이 폐사한 영국사 터에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또 1694년 도봉서원에서 강학을 하고 바위글씨를 남긴 우암 송시열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면서 조선 후기 도학의 산실이자 집권 노론세력의 상징적인 서원이 됐다. 도봉이라는 지명처럼 서울·경기지역 유생들이 독서하고, 강학하며, 수신하는 학문공간이 됐다. 정암의 도학사상 정립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가 탄생했다. 이에 보답하듯 이이는 정암을 김굉필·정여창·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칭했다. 송시열의 ‘도봉동문’(道峰洞門)을 비롯 당대 명인 재사들이 새겨놓은 바위 글씨 14개가 증언하듯 조선후기 도봉서원은 성균관에 필적하는 위상을 자랑했다.도봉산은 유희경과 매창의 연애현장이 아니다. 천민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낸 문인 유희경이 도봉산에 침류대라는 거처를 짓고 살면서 부안에서 만난 기생 매창과 시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도봉서원은 정선의 ‘도봉추색도’와 ‘도봉서원도’, 김석신의 ‘도봉첩’, 심사정의 ‘도봉서원’ 서화로 남았다. 또 이이는 ‘도봉서원기’에 도봉서원의 상황과 건물배치까지 세세하게 남겼고, 서거정과 이항복도 도봉산 영국사와 관련된 시를 남겼다. 그러나 홀연히 사라졌던 영국사는 실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누구도 의심치 않던 도봉서원 터에서 지난 2012년 영국사의 기단과 금강령(금동 요령)과 금강저(금동 곤봉) 등 희귀한 고려시대 불교 금속공예품 79점이 쏟아져 나왔다. 기록에만 존재하던 영국사의 존재가 1000여년 만에 확인된 것이다. 청동 걸이향로와 청동 향 그릇에서는 ‘도봉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고의적으로 파묻어 놓은 듯 이곳이 도봉사의 소유물이며, 도봉사와 영국사는 같은 사찰의 다른 이름임을 나타냈다. 영국사 터에 도봉서원이 들어선 것은 시대의 전환을 뜻한다.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이 숙수사 터에, 경주 옥산서원이 정혜사 터에 자리잡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퇴락한 사찰 부지와 기단을 활용해 유교시설로 탈바꿈한 셈이다. 오늘이 내일의 역사가 되듯 고려 불교의 성지가 조선 성리학의 성지가 됐다. 영국사의 도봉서원 전환은 유교와 불교 양 종교의 상생이다. 60여개의 사찰이 깃든 도봉산에 서울 유일의 서원 하나쯤 남아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누원(다락원)을 통해 고려 개경과 조선 한양을 오가는 물류와 문화의 교류지점이던 도봉산은 이제 고려 불교문화와 조선 유교문화의 만남이라는 희귀한 향기를 내뿜는 공간이 됐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강남야행(청담동에서 압구정동까지) 일시: 7월 28일(토) 오후 6~8시 집결장소: 지하철 7호선 청담역 1번 출구
  • “아빠다!” 아이 외침에 눈물바다 된 해병대 헬기추락 순직장병 영결식

    “아빠다!” 아이 외침에 눈물바다 된 해병대 헬기추락 순직장병 영결식

    해병대 마린온 헬기 사고로 순직한 해병대 장병 5명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23일 경북 포항 해병대1사단 도솔관에서 해병대장(葬)으로 열렸다. 순직 장병은 고 김정일 대령, 고 노동환 중령, 고 김진화 상사, 고 김세영 중사, 고 박재우 병장으로 지난 17일 포항공항에서 상륙기동헬기 정비를 마치고 정비 상태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비행을 하던 중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함께 탄 김모 상사는 중태에 빠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영결식에는 유가족, 친지, 송영무 국방부장관,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해병대 장병, 군 주요 지휘관, 육·해·공군 장병과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해 고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유해 입장 때부터 도솔관 로비는 유족의 울음바다가 됐다. 순직장병들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든든한 아버지였으며, 사랑하는 남편이었다.장의위원장인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은 조사에서 “전우를 지켜주지 못한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해병대에 더 안전하고 튼튼한 날개를 달고 해병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순직 장병의 희생을 기렸다. 순직한 장병 동기들은 추도사마다 울음을 터뜨리거나 흐느끼며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추모영상 속 아빠의 사진을 본 아이는 반가움에 ‘아빠’를 외쳤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 유족뿐만 아니라 영결식에 참석한 많은 장병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함을 나타냈다. 이 모습은 MBC 중계카메라에 포착돼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순직 장병들의 영현은 고인들의 해병대 정신이 깃들고 꿈을 키웠던 항공대 등 주둔지를 돌아본 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져 오후 6시 30분께 안장된다. 순직 장병들이 가는 마지막 길에는 사단 장병들이 도열해 동료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갖춘 경례로 배웅했다 국방부와 해병대는 순직 장병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계급 진급을 추서했다. 해병대는 민·관·군 합동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한편 순직 장병을 기억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해병의 희생,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해병의 희생,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김정일 대령, 노동환 중령, 김진화 상사, 김세영 중사, 박재우 병장, 이제 편히 쉬소서. 우리는 여러분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17일 경북 포항공항에서 상륙기동헬기인 마린온(MUH1) 정비를 마치고 시험비행을 하다 추락 사고로 순직한 해병대 장병 5명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23일 포항 해병 1사단 강당 도솔관에서 해병대장(葬)으로 엄숙하게 열렸다. 유가족, 친지, 송영무 국방부 장관,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등 1300여명이 참석해 고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먼저 장의위원장인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이 조사 낭독에 앞서 순직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영결식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전 사령관은 조사에서 “5명의 해병을 뼛속에 새기고 뇌리에 각인하겠다”며 넋을 기렸다. 이어 추도사에 나선 순직 장병 동기들은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흐느끼며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 글을 통해 “안타까운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해병대 사령부는 이들의 시신 화장을 마치고 수습한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했다. 해병대는 순직 장병에 대해 1계급 특별 진급을 추서하고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했다. 또 민·관·군 합동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추락 사고 유일한 생존자인 김용순(43) 상사는 이날 오전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울산대병원에서 10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김 상사는 갈비뼈 10여곳에 골절상과 폐 손상을 입었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마린온 헬기 사고 유족의 오열…송영무 ‘유족들 의전 문제에 짜증’ 발언 사과

    마린온 헬기 사고 유족의 오열…송영무 ‘유족들 의전 문제에 짜증’ 발언 사과

    22일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김대식관에 마련된 ‘마린온’ 헬기 사고 순직 장병 합동분향소에서 박재우 병장의 유품을 돌려받은 유족이 오열하고 있다. 한편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지난 21일 분향소를 방문해 “유족들께서 의전 문제에 있어 흡족하지 못해 짜증이 나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 국회 법사위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포항 연합뉴스
  • 카자흐 ‘한인 피겨 영웅’ 데니스 텐 장례식에 5천명 넘는 인파

    카자흐 ‘한인 피겨 영웅’ 데니스 텐 장례식에 5천명 넘는 인파

    카자흐스탄의 한국계 피겨스케이트 영웅으로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사망한 데니스 텐의 장례식이 지난 21일 5000명이 넘는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시민장으로 거행됐다.인테르팍스통신 등에 따르면 비극적인 사건 현장인 알마티에 있는 발라샥 스포츠센터에서 이날 카자흐스탄의 국민적인 영웅인 텐의 시민장이 엄수됐다.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이 늘어서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건 텐의 영전에 조화 등을 바치며 애도했으며 카자흐스탄 출신의 세계적인 프로복서 게나디 골로프킨이 미국에서 달려오는 등 동료 선수와 시민, 문화체육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아르스탄벡 무하메디울 문화체육장관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세계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며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노보스티통신은 알마티에서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에 수도 아스타나의 스포츠센터에서도 수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별도의 시민장이 개최됐다고 전했다. 장례식 후 고인은 알마티 인근 공동묘지인 ‘우정의 마을’에 묻혔다. 앞서 텐은 지난 19일 알마티에서 자동차 백미러를 훔치려는 남성 2명과 다투다가 흉기에 찔렸다. 그는 행인에 의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과다출혈로 끝내 숨졌다. 한국계 후손인 텐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이던 민긍호(1865~1908) 선생의 외고손자다. 의병장 후손으로 이름을 알린 텐은 국내에서 개최된 아이스쇼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텐은 2014년 소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2015년 4대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으며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하기도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포토] ‘해병대 전역하기(사고없이)’ 체크 못한 고 박재우 병장 수첩

    [포토] ‘해병대 전역하기(사고없이)’ 체크 못한 고 박재우 병장 수첩

    22일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김대식관에 마련된 마린온 헬기 사고 순직 장병 합동분향소에서 유족이 돌려받은 고 박재우 병장 수첩 유품. 수첩에 쓰인 글 가운데 ‘헬기 타보기’에는 체크가 돼 있고 ‘해병대 전역하기(사고없이)’라고 쓰인 글씨에는 체크가 돼 있지 않다. 연합뉴스
  • [영상]예견된 참사였나?... 헬기 사고 부대 전역병 “잦은 결함으로 매일 정비”

    [영상]예견된 참사였나?... 헬기 사고 부대 전역병 “잦은 결함으로 매일 정비”

    “예견된 사고였나?.”지난 17일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추락사고로 해병 5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한 가운데 해당 헬기의 기체 결함 문제가 심각했던 것을 추정할만한 증언이 나왔다. 사고 헬기 소속 해병대 1사단 항공대에서 근무하다가 최근 전역한 병사가 헬기 결함 문제로 운행을 거의 못했고 거의 매일 정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 달 전 만기 전역한 이 병사(예비역 병장·21)는 “2호기(사고헬기)는 결함 때문에 못 나가고 1호기가 대신 나가곤 했다”며 “2호기는 거의 뜬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20일 전했다. 그는 “해병대 헬기 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봤을 때 2호기라고 바로 생각했다”며 “덜덜 떨리는 문제(진동)가 있었는데 간부들끼리 ‘언젠간 사고 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 병사는 해병대 1사단 항공대에서 헬기 이착륙 시간을 상급부대에 보고하는 업무를 한 것으로 연합뉴스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2호기는 가끔 운행할 때도 있었지만 거의 뜨지 못했고, 정비사가 거의 매일 정비에 매달렸다”고 전했다. 이 병사는 항공대에 근무하면서 이번 마린온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박모(20) 상병(병장 추서)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항공대는 작은 부대이기 때문에 생활관이 4개밖에 없었다”며 “(병사들이) 가족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피겨선수 데니스 텐 사고현장 CCTV…용의자들 생명 빼앗고도 뻔뻔

    피겨선수 데니스 텐 사고현장 CCTV…용의자들 생명 빼앗고도 뻔뻔

    카자흐스탄 피켜스케이팅 선수 데니스 텐(25)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카진포름 등 현지매체는 데니스 텐이 알마티에서 괴한에게 피습당해 19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데니스 텐은 이날 오후 3시 자신의 승용차 백미러를 훔치는 범인 두 명과 난투극을 벌이다 흉기에 찔려 약 23분 만에 구급차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약 3ℓ의 출혈이 있었다. 예르잔 쿠트고진 중앙병원 부원장은 텐의 사망 경위에 대해 “우측 상부 세 번째 갈비뼈 부근의 자상이 깊어 온갖 응급조치에도 끝내 사망했다”고 밝혔다. 카자흐스탄 언론이 사고 직후 공개한 CCTV 영상에는 데니스 텐의 살해 용의자 2명이 환한 대낮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유유히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담겼다. 목격자 중 한 사람인 세르게이는 구급차에 실려 갈 당시 데니스 텐의 한쪽 다리에 혈흔이 낭자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용의자 2명을 수배하고 있다.데니스 텐은 구한말 의병장인 민긍호 선생의 고손자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선수 이력에 ‘한국 민긍호 장군의 후손’이라고 표기했고, 한국 역사책을 읽으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2013년 ISU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남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카자흐스탄 사상 첫 메이저 국제대회 피겨 메달을 획득했고,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며 카자흐스탄 피겨 영웅이 됐다. 소치올림픽이 끝난 뒤 김연아의 소속사인 올댓스포츠와 올해까지 4년간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인대 부상에도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출전해 참가만으로도 감격스럽다며 웃었던 그였지만 평창올림픽이 열린 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연아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너무 충격적이다. 정말 성실하고 피겨스케이팅을 너무 사랑했던 선수였다. 가장 열정적이고 훌륭한 스케이터를 잃어 너무나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추모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데니스 텐과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며 추모했고, 알마티시민들은 사건 현장인 쿠르만가지-바이세이토바에 꽃을 놓으며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25세 짧은 삶 데니스 텐 마지막 인터뷰 “난 진짜 운 좋았다”

    25세 짧은 삶 데니스 텐 마지막 인터뷰 “난 진짜 운 좋았다”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지난 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자신의 승용차 미러를 훔치려던 두 괴한에게 흉기로 피습당한 지 3시간 만에 병원에서 25세 짧은 삶을 마감한 피겨 스타 데니스 텐에 대해 미국 피겨 스타 애덤 리펀이 안타까워했다. 조선 말 의병장 민긍호의 외고손으로 더 널리 알려진 데니스 텐은 두 차례 피겨세계선수권 메달을 따냈고 소치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동메달을 따내는 등 세 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2015년 사대륙선수권을 우승한 뒤 잇단 부상 후유증으로 마지막이 된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27위에 그쳤다. 공식적으로 은퇴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몇달 경제학 공부에 몰두하고 나중에 영화 각본을 집필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지난해 9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홈페이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과 별개로 난 대단한 커리어를 닦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았건 나빴건, 메달을 땄건 실망을 안겼건, 좋은 기억이건 그렇지 않은 기억이건, 독특한 종목과 대회에서 모든 일이, 많은 마술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돌아본 뒤 “어느 순간 매우 충일한 스포츠 인생을 산 진짜 운좋은 인간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리펀은 트위터에 “그는 모두에게 친절했고 나와 수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어줬다“며 “데니스, 우리에게 어떻게 챔피언이 되는지 보여줘 고맙다.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고 애도했다. 소치 은메달리스트인 패트릭 챈(캐나다)은 “얼음 위에서 그와 함께 한 것은 영예롭고 감사한 일이었다”고 돌아본 뒤 “최고로 아름다운 스케이터 중 한 명이 우리 빙상 종목을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할 유족들과 마음으로 함께 하고자 한다”고 위로했다. ISU도 텐의 죽음에 “깊이 상심했다”고 애도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그의 빼어난 업적은 우리 조국을 영광스럽게 만들었고 젊은이들 사이에 빙상이 인기를 끄는 데 도움을 줬다. 데니스는 세계 많은 나라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부러움을 산 빼어난 선수였을 뿐만아니라 개성도 빼어나고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돌아봤다. 아리스탄벡 무캄디울리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 장관은 “고인은 놀라운 피겨 스타였고 우리 스포츠의 레전드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라며 “생각할 수조차 없는 비극이며 치유할 수 없는 손실”이라고 추모했다. 한편 카자흐스탄 경찰은 20일 살해 용의자 둘 중의 한 명인 누랄리 키야소프(24)를 체포해 변호사 앞에서 범행을 자백 받았으며 다른 한 명의 신원도 밝혀내고 추적하고 있다고 AFP통신과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카자흐스탄 국민들은 대낮 살인극에 큰 충격을 받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칼무한벳 카시모프 내무장관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울광장] 군 선택복무제 도입하면 어떤가/임창용 논설위원

    [서울광장] 군 선택복무제 도입하면 어떤가/임창용 논설위원

    30여년 전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 복무 중이던 대학 친구를 면회 갔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미군과 마찬가지로 카투사들은 침대가 놓인 널찍한 공간에 거주하고 있었고, 책과 잡지, 연예인 사진 등 갖가지 사물이 개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많은 병사가 외출·외박을 나간 탓에 부대는 한산했다. 친구는 면회온 날 부대 내 식당에 데려가 난생 처음 보는 스파게티를 사 줬다. “여기 군대 맞아?” 부러움 가득한 내 물음에 친구가 말했다. “그러게 줄을 잘 서야지.”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 40여명의 소대원이 한 막사에서 바글거리며 거주하고, 개인생활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내무생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졌던 구타와 얼차려…. 친구와 똑같이 30개월 동안 의무 복무를 했지만, 복무 강도는 참 달랐다. 대한민국에서 병역 문제만큼 민감한 이슈는 드물다. 건강한 남성이면 예외 없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공고하고, 헌법과 법률이 이를 강제하고 있다. 그래서 그 어떤 분야보다 공정성이 강조되고, 병역 기피자에 대해선 거센 비난과 중한 처벌이 따른다. 가수 유승준은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 면제를 받았다가 16년째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가수 싸이는 산업기능요원 부실 근무가 탄로 나 결국 현역으로 다시 복무했다. 병역 의무는 그만큼 엄정하다. 우리 병역제도는 이미 단단한 틀로 굳어져 많은 사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군이나 부대마다 보직에 따라 복무 강도가 천차만별인데 왜 복무 기간은 별 차이가 없는 걸까. 차이가 없는게 외려 불공정한 것은 아닐까. 똑같이 의무 복무를 하는데 왜 장교는 공무원 월급을 받고 병사는 용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아야 하나. 현역 자원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면서 공익 판정자들은 왜 여전히 많은 걸까. 급식이나 운전, 의료지원 등 훈련이나 전투와 관계없는 업무는 공익요원들에게 맡기면 안 될까 등등. 우리 군도 많이 개선돼 30여년 전의 야만적인 군생활은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부대나 보직에 따라 복무 여건에 큰 차이가 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단순히 줄서기나 추첨에서의 ‘운발’ 탓으로 돌리고 감수해야 할까. 똑같이 하룻밤을 보내더라도 여관보다 호텔비가 훨씬 비싸듯 군 복무 기간도 복무 강도에 따라 차이를 두는 게 합리적이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병역 공정성은 싸이나 유승준의 예에서 보듯 병역 기피나 면제, 특례 문제에 초점을 맞춰 왔다. 반면 복무 공정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수석의 의경 아들 ‘꽃보직’ 논란 같은 보직 특혜 문제가 간혹 불거졌지만, 단순 개인 문제로 치부됐을 뿐이다. 만일 경찰청장 운전병은 안전하고 편하니 시위 동원 의경보다 3개월 더 근무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꽃보직 논란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5월 육군은 전방과 전투부대는 18개월, 후방 근무는 현행대로 21개월을 유지하는 차등 선택 복무제를 제안한 적이 있다. 단순히 전·후방이란 잣대로만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근무 강도나 여건에 따라 복무 기간에 차등을 두겠다는 것은 진일보한 아이디어다. 이미 우리 군은 육군 21개월, 해군 23개월, 공군 24개월, 공익요원 24개월로 부분적이나마 복무 기간에 차이를 두고 있다. 부대 특성이나 보직에 따른 복무 강도, 부대 위치와 편의시설 등 근무환경 등을 세밀하게 조사해 복무 기간에 차등을 둔다면 군 복무의 공정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육군은 한국국방연구원에 선택복무를 위한 실행 방안 연구를 맡겼다. 국방부 일각에선 특정 보직이나 부대로의 자원 쏠림 등을 우려한다. 하지만 시스템을 세밀하게 설계하면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육군뿐만 아니라 해·공군, 나아가 사회복무요원 등 현역과 대체복무를 포괄한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만약 현역에도 집총이나 훈련을 배제한 보직이 생긴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핵소고지’에서 집총 거부 병사가 목숨을 걸고 수많은 동료들을 구해 내던 감동적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병역 시스템은 공정하면서도 병사가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복무 기간도 그에 맞춰 정해지는 게 순리다. 합리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군복무 개선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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