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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광숙 칼럼] 빨간 마후라와 켈로부대/대기자

    [최광숙 칼럼] 빨간 마후라와 켈로부대/대기자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 무대인 강릉 공군기지는 6·25 전쟁 당시 공군의 최전방 기지였다. 북한군의 군수물자 수송 요충지인 평양의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 등 7800여회나 되는 작전이 수행된 곳이다. 필자는 이곳이 고향이지만 부끄럽게도 2년 전 모교 동창회장을 지낸 80대 후반의 지금은 고인이 된 김미자 선배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당시 강릉여고 1학년이던 그 선배님은 “친구들과 선배들은 수업하다가도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나가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서 8㎞쯤 되는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걸어 강릉비행장까지 가서 출격하거나 귀환하는 조종사들을 환송하고 환영했다”고 회고했다. 겨울에는 꽃이 없어 미농지(꽃 만드는 흰 종이)로 꽃을 접었다고 한다. 그는 “전투기 1개 편대 4대가 출격했다가 4대 모두 돌아오면 펄쩍 뛰며 기뻐했지만 가끔 3대만 돌아오는 날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시 국어 시간은 위문 편지를 쓰는 시간이고, 음악 시간은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꿈 많은 여고생들의 일상에 전쟁의 상흔이 파고들었지만, 꽃다발을 주다가 조종사들과 눈이 맞아 나중에 결혼한 동창생들도 꽤 있다며 전장의 로맨스도 소개했다. 빨간 마후라들은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여고생들의 꽃다발과 노래 속에 출격했지만, 전쟁통에 군번도 계급도 없이 국가에 헌신한 이름 없는 용사들도 많다. 북파돼 첩보전을 수행했던 KLO부대(켈로부대)가 그랬다. 첩보활동을 하다 숨진 이들이 많지만 미군 소속인 데다 서로 이름도 모를 정도로 비밀스럽게 활동하다 보니 신원 파악이 안 돼 지난 1993년 뒤늦게 일부 부대원이 정부로부터 참전용사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그러다 최근 켈로부대 출신 이창건(94) 전 한국원자력학회장이 청와대 오찬과 정부 주최 ‘6·25 전쟁 기념행사’에 처음 초청받았다. “KLO가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못 돌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노병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그가 행사에 초대되지 않았다면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숨은 영웅들의 처절한 이야기가 알려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새삼 느꼈다는 이들이 꽤 있다. 탈원전과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정책 등 전 정권 정책의 궤도 수정뿐 아니라 순국선열 등 영웅을 대하는 정부 태도가 180도 달라진 데서 정권 교체를 실감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충원 안장을 거부당했던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재단이 세워지고, 천안함의 최원일 전 함장이 한 단체로부터 ‘호국영웅상’을 받은 것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생활고를 겪던 80대 후반 6·25 참전용사가 부산의 한 마트에서 일곱 차례 반찬 8만원어치를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현재 참전용사 정부 수당은 불과 월 38만원이다. 올해 병장 월급이 100만원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을 정도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당시 보훈처 사무관이던 전직 고위 인사의 얘기다. 박 전 대통령은 참전용사 수당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쌀 한 가마니 값이 얼마냐”고 묻고 “쌀값에 맞춰 더 인상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수당이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지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훈처가 설립 62년 만에 지난달 보훈부로 승격했다.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다. 부처의 위상 강화보다 더 중요한 건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다. 영웅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대접’하는 나라로 가야 한다.
  • [핫이슈] “이놈의 인기”…‘잠적설’ 푸틴, 쿠데타 후 첫 외출에 신났나 (영상)

    [핫이슈] “이놈의 인기”…‘잠적설’ 푸틴, 쿠데타 후 첫 외출에 신났나 (영상)

    러시아 민간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1일 쿠데타’ 이후 잠적설에 휘말렸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처음으로 외출해 시민들과 만났다.  영국 가디언의 29일(이하 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8일 러시아 남서부 다게스탄공화국에 있는 데르벤트를 방문해 공식 연설을 가졌다. 데르벤트는 모스크바에서 약 2000㎞ 떨어진 유서깊은 역사도시이며 인종 구성이 매우 다양해 러시아인이 소수민족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 대통령은 관광 촉진을 위해 해당 도시를 방문하고 공식 연설을 진행했다. 연설이 끝난 뒤에는 시민들과 만나 악수를 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푸틴 대통령을 만난 데르벤트 시민들은 함께 ‘인증샷’을 찍기 위해 앞다퉈 몰려드는 모양새였다. 러시아 국영TV는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둘러싸인 푸틴 대통령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이 거리에서 시민들과 직접 만나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일으킨 뒤 암살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한화로 수천 억 원의 경호비를 쓰는 등 주로 폐쇄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일각에서는 푸틴의 이러한 행보가 ‘지지받는 지도자’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푸틴은 ‘드물게’ 사람들과 대화하고 악수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세르게이 멜리코프 다게스탄 공화국 정부 수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프리고진의 쿠데타를 언급한 뒤 “다게스탄과 전 러시아에 걸쳐 어떤 반응이 나올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 국민이 바그너그룹과 프리고진의 편에 서지 않고, 자신과 러시아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난 24일, 바그너 그룹 수장인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 병사들이 러시아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는 모습이 전 세계로 중계됐는데,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주민들의 환영을 받은 일을 염두하고 자신을 향한 지지를 과시하기 위한 행보로 다게스탄 일정을 소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왜 하필 다게스탄공화국일까? 푸틴 대통령이 잠적설 이후 첫 공식 행보 장소로 다게스탄공화국의 데르벤트를 선택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렸다.  데르벤트는 전략적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과거 페르시아와 아랍, 몽골 등이 번갈아 점령했던 도시다. 인종 구성이 다양한 이유 역시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1일 쿠데타’ 이후 본격적인 통합 행보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에서 새 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28일 확보한 민간 위성업체 ‘미디어랩’의 위성사진에는 벨라루스군 465 미사일 여단의 연병장으로 쓰이던 곳에 대형 텐트촌이 지어진 모습이 확인됐다.  해당 지역은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와 130㎞ 떨어져 있으며, 연병장은 이달 중순까지 비어있다가 26일 처음으로 텐트가 지어졌다.  26일은 바그너그룹이 모스크바 입성을 200㎞ 앞두고 회군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며, 이동 시간 등을 고려했을 때 바그너 그룹 용병들이 벨라루스에 도착한 시점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역시 27일 현지 언론에 “바그너 그룹 용병들에게 버려진 군사기지 하나를 캠프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울타리 등 모든 것이 있으니 텐트만 치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 사졸보다 앞장서 일당백… 왜군 떨게 한 ‘노원평 전투’ 승리 이끌었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사졸보다 앞장서 일당백… 왜군 떨게 한 ‘노원평 전투’ 승리 이끌었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고언백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전투의 밀양부사 박진, 이치전투의 동복현감 황진, 구미포전투의 강원도조방장 원호 장군과 함께 육전(陸戰) 4대 명장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행주대첩 이후 왜적은 한양도성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군량미가 떨어지면 경기도 일대로 노략질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양주목사 고언백은 불암산과 북한산 일대를 거점으로 왜군이 도성 밖으로 몰려나올 때마다 타격을 가했다. 왜적이 결국 도성을 포기하고 남쪽 해안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의 하나도 보급이 철저히 차단됐기 때문이다. 고언백은 선조가 총애하는 무장(武將)이기도 했는데, 양주 일대에 몰려 있는 조선 왕릉들을 수호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차례로 휩쓸며 5월 3일 도성을 점령했다. 경상도는 왜적의 상륙지이자 북상의 통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경상도 동쪽 지역은 왜적의 침입을 피한 고을도 적지 않았다. 1593년 6월 조정은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전국의 피해 상황을 집계하게 되는데, 그 결과 경상도 지역 67개 고을 가운데 피해를 입지 않은 고을이 22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기도는 37개 고을 가운데 섬 지역인 강화와 교동을 제외한 35개 고을이 왜적의 말발굽에 휩쓸렸다. 고언백은 가장 수난이 컸던 경기도를 대표하는 장수다.●선조가 총애… 왕릉 수호 결정적 역할 고언백(高彦伯·?~1608)은 경기도 교동현이 고향이다. 무덤도 이곳에 있다. 지금은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이 된 교동도에는 2014년 연륙교가 놓였다. 고언백은 교동의 향리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1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니 향리 집안에서 일어선 무관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강화도 서쪽 교동도는 국방의 요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29년(인조 7)에는 남양만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군절도사영이 교동도로 옮겨 가면서 현에서 부로 승격하기도 했다. 경기수사가 교동부사를 겸임하는 체제였다. 개전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발대가 파죽지세로 북상할 때 고언백은 도순변사 신립의 척후장(斥候將)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 나섰다. 7000명에 이르는 조선정규군이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자 선조가 서둘러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고언백이 이끈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하면서 왜적의 머리 40급 남짓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고언백은 양주 일대에서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 유격전을 펼쳤다. 의병사에서도 고언백을 경기의병장의 한 사람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가 됐다. 선조실록에 고언백은 5월 28일자 ‘대신이 대탄(大灘) 방비에 대해 아뢰다’라는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대탄은 한탄강이다. ‘대탄의 방비는 임진의 방비와 비교할 때 훨씬 허술하고 제장(諸將)의 명칭 또한 정해지지 않았으니 대응책에 미진한 점이 있을까 염려된다’면서 ‘고언백은 조방장(助防將)이란 칭호를 주어 전선 수비에 협력하게 하면 이익이 될 듯하다’고 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이미 무너진 줄 모르고 상류의 한탄강 방어를 논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고언백에 대한 조정의 신뢰는 높았다. 조정은 이때 고언백을 평양으로 부른 듯하다. 선조가 평양성을 버린 이후 고언백은 밤중에 대동강 건너의 적진을 기습해 수백 명을 쏘아 죽이고 300필 남짓한 말을 빼앗아 오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자 선조는 고언백을 당상관인 양주목사로 승진시켜 왕릉을 비롯한 동교(東郊) 방비의 책임을 맡긴다. 당시는 양주 온릉은 물론 서울 정릉·태릉·강릉·의릉, 구리 동구릉, 남양주 광릉·사릉·흥릉·유릉이 모두 양주땅이었다.●실록에도 “위엄·명성 서울까지 퍼져” 9월 12일자 선조실록은 ‘경기감사 심대의 장계를 보니 ‘양주목사 고언백은 한 달 사이에 세 차례나 싸움에 이겨 위엄스러움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왕왕 멀리서 호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백성은 한 사람도 창의(倡義)한 자가 없었는데 김향린 등이 이번에 군기(軍器)를 바쳐 왔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성 안에서 마음을 다해 내응한 자와 왜적의 목을 베어 군문에 가져오는 자는 모두 전일의 죄를 속해 주고 많은 상을 내리겠다는 뜻을 성안에 알려 백성들로 하여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라 적었다. 고언백의 연승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성 내부 백성 사이에 왜적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월 들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과 양주목사 고언백을 평양성 수복에 투입하라는 선조의 명이 내려진다. 대신들은 ‘도성 백성이 오로지 고언백을 의지하고 있으며 양주 이북을 지킬 만한 장수도 없다’며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비변사가 ‘고언백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있으며, 도성 백성들이 모의해서 내응한 것도 그의 힘이다. 평양에 와서 다른 장수의 지휘를 받게 하면 그저 한 사람의 용장(勇將)에 불과할 뿐이니 양주에 남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고언백은 12월 종2품 경기도방어사에 오른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무덤인 강릉과 중종비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을 파헤치려는 왜적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고언백에게 가의대부를 가자(加資)하는 내용을 다룬 선조실록에는 사관(史官)의 견해가 적혀 있다. ‘언백은 궁마(弓馬)를 잘 다루었는데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애써 힘을 내 공격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적으로 하여금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했다. 또 적의 형세를 잘 염탐해 한밤에 기습하거나 숲속에서 저격했는데 자신이 사졸(士卒)들보다 앞서서 싸웠으며 그가 쏜 화살이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후해 머리를 벤 것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으므로 왜적이 매우 두려워했다.’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았다. 2월에는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은 도성을 탈환하고자 경기지역에 출몰하는 왜적을 소탕하는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3월 26~27일 마들평야를 내려다보는 삼각산(북한산)과 수락산·불암산 일대에 매복한 조선군은 약탈에 나선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공격한다. 도원수 김명원, 황해도방어사 이시언, 평안도좌방어사 정희립, 순변사 이빈, 평안도조방장 박명현, 의승장 사명대사 유정의 연합군이었다. 노원평(蘆原平) 전투다. 주역은 당연히 불암산성을 고쳐쌓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고언백이었다. 노원평 싸움을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견줄 만하다’라고 했다. 그만큼 큰 승리였다. 도성 외곽에서 조선군이 선전하자 왜군은 활동 범위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4월 20일 한성에서 물러난다.●임해군 내통죄 몰려 고문 끝 사망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왜군이 한강을 건너자 조선군은 이들을 추격하고자 했지만 방해가 시작됐다. 명군은 행주대첩의 영웅 전라감사 권율을 압송해 한강을 건너간 이유를 따져 물었다. 순변사 이빈과 방어사 고언백은 급보로 ‘명군이 강변에 늘어서 군사가 진격하지 못하도록 했고, 순변사의 중위선봉장 변양준의 목에 칼을 씌워 끌고 가는 바람에 상처가 심해 피를 토했다’고 조정에 알리기도 했다. 고언백의 군대도 명나라 사대수 총병의 20명 남짓한 하인들이 줄지어 서서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힐책하며 억류한 채 놓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에도 고언백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와 경상도방어사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에서 무공을 쌓았다. 선조는 1597년 1월 21일 그를 불러들인 자리에서 “그동안 몇 곳의 변장(邊將)을 지냈는가” 하고 물었다. 고언백은 “처음에는 북병사의 군관, 다음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되었고 사신을 따라 북경에도 여덟 차례 갔다. 이후 청성만호를 거쳐 선공감 주부가 됐다. 임진년에 신립을 따라 갔다가 달천에서 패하자 신이 외로운 군사 50명과 양주와 연천 사이를 출입하면서 장정을 불러모으고 있을 때 왜구는 이미 경성에 들어왔다”고 했다. 스스로 밝힌 이력이다.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년 임해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 끝에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 하나금융그룹, 해병대 장학재단에 1억 5000만원 기부

    하나금융그룹, 해병대 장학재단에 1억 5000만원 기부

    하나금융그룹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명동사옥에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최전선에서 헌신하고 있는 해병대 장병과 순직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고 25일 밝혔다. 하나금융그룹에 따르면 이번 전달식을 통해 1억 5000만원이 해병대덕산장학재단에 전달됐으며 해병대 장병 및 순직자 자녀들의 학업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에 정진하는 해병대 장병과 국가수호를 위해 희생한 순직자 자녀들의 학업을 지원함으로써 하나금융그룹의 미션인 ‘함께 성장하며 행복을 나누는 금융’을 적극 실천하려는 취지라고 하나금융그룹은 설명했다. 이번 전달식에는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과 이은형 하나금융그룹 부회장,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하나금융그룹이 해병대덕산장학재단에 기탁한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승수 해병대 예비역 병장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승수 예비역 병장은 “해병대 훈련도중 어깨를 다쳐 수술 후 의병제대를 하게 돼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지만 하나금융그룹의 장학금이 큰 힘이 됐다”면서 “도움을 받은 당사자가 실제 느끼게 되는 도움의 소중함은 더욱 크다. 이 소중함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학업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함 회장은 “해병대의 자부심을 가지고 국가 최전선에서 헌신하고 있는 장병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마중물 역할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해병대와의 협력을 통해 좋은 인연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밝혔다. 하나금융그룹은 2013년부터 대한민국 해병대와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연평도에 하나회관을 건립해 기부한 바 있으며 2017년부터는 해병대덕산장학재단을 통해 해병대 장병 및 순직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다. 또한 하나금융그룹은 장병내일준비적금 등을 통한 해병대 장병들의 자산형성지원, 군 간부를 위한 군인 생활안정자금 대출과 노후를 대비한 자산관리 세미나 등도 지원하기로 했다.
  • [서울광장] 역사의 들머리에 오해가 끼어들면/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역사의 들머리에 오해가 끼어들면/서동철 논설위원

    임진왜란 당시 웅천현감이었던 허일은 ‘조선왕조실록’에 딱 두 차례 등장한다. 개전 초기 일방적으로 왜적에 밀리던 상황을 다룬 1592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이 첫 번째다. 경상감사 김수가 올린 일종의 긴급 상황보고서를 전재한 것이다. 치계(馳啓)는 이랬다. ‘거제현령 김준민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죽음으로 기약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웅천현감 허일은 적이 경내를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도주했고, 성주판관 고현은 젊은 무부(武夫)로 홀로 먼저 도피했으며, 개령현감 이희급, 선산부사 정경달, 상주목사 김해와 상주판관 권길, 문경현감 신길원 등은 모두 도망가 숨어 버려 적이 가는지 머무는지를 일절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다음날인 6월 29일이다. 비변사의 상주 내용으로 허일을 언급한 전날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사근 찰방 김종민을 추가했다. ‘적의 무리가 그 지역을 지나가자 도망하여 숨었으니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않다’고 비판했다. 조선이 왜적 침입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고, 또한 실제 전쟁이 일어나자 관료들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읽히곤 한다. 불명예스럽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에게는 치욕이다. 물론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기에 급급해 숨어 버렸다면 어떤 비판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웅천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이 됐다. 당시 일본에서 인기 높았던 분청과 백자 가마가 밀집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국제무역이 활발한 고을이었다. 왜군이 침범하자 그들의 상륙지가 됐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다음에는 왜성을 쌓고 버틴 곳이 또한 웅천이다. 하지만 웅천현의 군사는 수백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수만 명 단위로 몰려든 왜적을 막아 내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허일은 실제로는 이런 인물이었다. 초기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다음 삼포수방사 겸 웅천현감으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그러고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다섯 아들과 출전해 최경회 의병장과 합세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왜적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자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고, 두 아들은 한산도해전에서 전사했다. 허일뿐만이 아니다. 고현은 성주 의병으로 활약해 훗날 병조참의가 증직됐다. 정경달은 선산을 떠나지 않고 유격전을 펼쳤고 이순신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김해는 의병을 규합해 정기룡 장군과 상주성 탈환에 힘을 보태다 순절했다. 권길은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했다. ‘김종민’을 ‘징비록’에서는 ‘김종무’라 적었다. 그 역시 북천에서 순국했다. 신길원은 충주로 몰려가는 왜적의 조총을 맞고 포로가 됐다. 왜장이 항복을 권유했음에도 꾸짖다 팔다리를 모두 절단당했다. 평가는 후하지 않지만, 경상감사 김수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인물이다. 왜란을 앞두고도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김수는 해안 지역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는 데 힘썼다. 축성 작업 인원을 확보하고자 반발을 무릅쓰고 지역 사족까지 동원했으니 홍의장군 곽재우와 갈등을 빚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왜적 침입은 기정사실이었고 위기의식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다. 김수는 진주성에서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었다. 이후 경상도 서부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왜적이 휩쓸고 지나간 고을 수령이 감사의 행방을 쫓아 보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풍문에 의지한 치계일지언정 수령들이 ‘정위치’를 지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 김수의 보고를 거짓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임진왜란 첫머리를 이렇게 적으면서 오늘날까지도 ‘부끄러운 전쟁’으로 인상 지운 것은 유감스럽다. 그 결과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은가.
  • 6·25 최전선서 조국 수호 영웅 6명… 70여년 만에 영면

    6·25 최전선서 조국 수호 영웅 6명… 70여년 만에 영면

    6·25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조국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호국 영웅 6명을 기리는 합동 안장식이 22일 열렸다. 육군은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유해 6구의 합동 안장식을 엄수했다고 22일 밝혔다. 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합동 안장식은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이, 대전현충원 안장식은 고현석 육군참모차장이 각각 주관했다. 서울현충원에는 고 이승옥 이등중사(현 계급 병장)와 전복희·고영기 하사(현 계급 상병)를, 대전현충원에는 고 오문교 이등중사, 최봉근·태재명 일병을 모셨다. 박 총장은 조사에서 “지금의 자유롭고 번영한 대한민국은 선배님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며 “육군 전 장병은 영웅들의 위대한 군인정신과 애국심을 본받아 그 숭고한 사명을 계속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국가보훈부는 이날부터 오는 28일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유엔 참전용사 후손 교류 캠프를 진행한다. 올해로 14년째인 후손 교류 캠프는 ‘자유를 향해 걸어온 여정,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주제로 국내외 대학에 재학 중인 유엔 참전용사의 후손과 한국 대학생 등 18개국 140여명이 참여한다. 참전용사 후손들은 비무장지대(DMZ)·공동경비구역(JSA) 견학, 전쟁기념관 방문, 부산 유엔기념공원 참배 등에 참가한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후손 교류 캠프는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통해 맺어진 참전국들과의 인연을 이어 나가기 위한 핵심 사업”이라며 “참전국과 자유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교류사업을 내실 있게 이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B컷 용산] 제복 영웅과의 한주 보낸 尹 대통령... 연일 보훈 행보

    [B컷 용산] 제복 영웅과의 한주 보낸 尹 대통령... 연일 보훈 행보

    기사 작성과 수정 과정에서 제외된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들이 있습니다. ‘B컷 용산’은 ‘A컷’ 지면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용산 대통령실 현장 이야기를 온라인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모두가 기억하는 결과인 A컷에서 벗어나, 과정 이야기와 풍성한 사진을 담아 B컷을 보여드립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각종 행사에서 호국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고 이들에 대한 기억을 약속했다.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과 함께하겠다”며 정치를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은 향후 행보에서도 영웅 예우에 대한 강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윤 대통령은 우선 지난 13일 국무회의 회의 모두발언 시작과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이 자유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보훈의 달 6월”이라고 운을 뗐다. 윤 대통령은 “국가의 품격은 어떠한 인재를 배출하느냐보다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있다”면서 국가 영웅에 대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기억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발언은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도 언급했던 대목이다. 윤 대통령은 앞서 지난 11일 ‘호국영령 위령대재’에 보낸 조전에서 “정부는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면서 “호국영웅들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尹, “제복 입은 영웅·가족 예우 받는 문화 확산시켜야” 윤 대통령은 지난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을 진행하면서 영웅에 대한 예우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오찬사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신 분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이 나라의 주인이고,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복 입은 영웅, 그리고 그 가족들이 국민으로부터 존중받고 예우받는 보훈 문화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오찬 특별초청 대상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직접 언급하며 “국민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서해수호 55용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는 ‘롤콜’(roll-call) 예우가 떠오르는 방식이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는 1968년 1·21사태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을 저지하다 전사한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자녀 최민석 님과 1999년 6월 15일 휴전 이후 처음 발생한 남북 간 해상 교전에서 크게 승리한 제1연평해전의 주역 안지영 해군 대령과 허욱 해군 대령, 제2연평해전 이희완 대령과 이해영 예비역 원사, 천안함 피격사건 최원일 함장과 전준영 예비역 병장, 이성우 유족회장님과 윤청자님, 또 연평도 포격전 최주호 예비역 병장과 유족대표 김오복 님께서 함께하고 계신다”고 소개했다. 윤 대통령은 또 “지난 3월 김제시 주택화재 현장에서 인명구조 활동을 하다 순직하신 故 성공일 소방교의 부친 성용묵 님, 호국영웅을 기억하기 위한 보훈의 상징으로 관포 태극기 배지를 디자인한 광운대 이종혁 교수님도 함께하고 계신다”고 했다.윤 대통령은 오찬에서 제1·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 참전 장병 및 유가족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윤 대통령의 옆 좌석에는 최원일 전 천안함장이 김건희 여사 옆 자리에는 천안함 피격으로 전사한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착석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남북 대화를 이유로 서해수호 장병들에 주목하지 못했던 문재인 정부와 다른 예우라는 평이 제기된다. 오찬 자리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국군전사자 12만 1879명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121879 태극기 배지’를 디자인한 이종혁 광운대 교수도 참석했다. 이 교수는 “호국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국민이 실천해야하는 책무”라면서 “이를 위한 보훈 상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배지를 디자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오찬에서 제공된 음식도 6·25 전쟁 당시 주요 격전지 특산물로 만들어져 눈길을 끌었다. 색다른 기억 방법이라는 평가다. 메뉴로는 상륙작전이 펼쳐졌던 인천의 갯벌 장어로 만든 구이, 화살고지 전투 현장인 철원 오대쌀 비빔밥, 용문산 더덕구이 등이 상에 올랐다. 尹, 페이스북·공식 석상 등에서 “영웅 잊지 않겠다” 거듭 말해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오전에는 제1연평해전 승전 24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전투에 나섰던 우리 해군 장병들은 북한 경비함정들을 제압하고 북방한계선(NLL)을 지켰다”고 썼다. 이어 그는 “이 순간에도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헌신하신 영웅들을 잊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15일 오후 ‘2023 연합 합동 화력격멸 훈련’에서 윤 대통령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군인의 본분에 충실한 이들이 있기에 우리 국민이 늘 자유롭고 안전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며 호국 영웅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신혼여행을 미룬 장교 이승원 대위, 전역을 1개월 이상 연기한 김용호 병장, 6·25전쟁 참전용사의 손자인 미군 장병들을 언급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尹,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영웅들에 공 들여 윤 대통령은 특히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영웅들에 대한 대우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지난 14일 보훈 행사 관련 보도자료에서 “제1연평해전의 주역 안지영 해군 대령(당시 참수리 325호 정장)과 허욱 해군 대령(당시 참수리 357호정 기관장)이 역대 정부 오찬 행사 최초로 초청되어 이번 오찬을 더욱 의미 있는 자리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을 마치고 42년 만에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을 방문한 바 있다”고 부연하기도 했다.윤 대통령은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에도 보훈 메시지와 함께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021년 6월 기자회견문에서 “천안함 청년 전준영은 분노하고 있었다. K-9 청년 이찬호는 억울해서가 아니라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책을 썼다”면서 “저 윤석열은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킨 영웅들과 함께 하겠다”라고 말했다.
  • [세종로의 아침] 모병제를 다시 생각한다/강국진 정치부 차장

    [세종로의 아침] 모병제를 다시 생각한다/강국진 정치부 차장

    이민환이라는 사람이 있다. 160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친 그는 1619년 도원수 강홍립을 보좌해 청나라를 공격하는 조·명 연합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청나라 군대 공격에 1만 3000명 가운데 7000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포로가 된 이민환은 17개월 동안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야 했다. 추위와 굶주림, 학대 끝에 고국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3000명에 불과했다.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민환은 포로 시절 경험을 담아 ‘책중일록’(柵中日錄)을 저술했다. 깔끔한 한글 번역본으로 나와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자신이 목격한 청나라 군대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한 대목이다. 장차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을 직감한 그는 청나라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대안도 제시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위주로 군대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한 요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일종의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것을 국가방위정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민환은 농민군을 주축으로 하고 산성방위에 특화된 군대로는 ‘전쟁기계’나 다름없는 청나라 팔기군을 결코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수백년 이어 온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이민환은 훗날 병자호란 때도 참전했는데,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참담한 기분을 느꼈을까 싶다. 물론 징병제에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근대적 징병제를 최초로 도입한 프랑스는 신분제에 기초한 다른 유럽 군대를 모조리 박살 내며 국민군대의 장점을 제대로 보여 줬다. 한국 역시 징병제가 없었다면 국가 존립을 장담하기 쉽지 않은 시기를 겪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징병제는 국민통합 측면에서도 꽤나 훌륭한 제도다.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이 총을 어떻게 쏘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안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국방 측면에서 엄청난 장점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조준을 한답시고 개머리판에 눈을 갖다 대는 일 같은 코미디는 여간해선 볼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것 또한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흔히 인구 감소 문제를 강조하지만 인구 감소가 아니더라도 모병제 개혁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돼 버렸다. 무엇보다 전쟁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 아니, 이미 상당히 바뀌었다. 당장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드론(무인기)이 어떤 활약을 하는지만 봐도 옛날처럼 ‘한 손엔 소총 다른 손엔 곡괭이’ 들던 짬밥으로 굴러가던 군대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우리에겐 머릿수가 아니라 전문성으로 승부하는 군대가 절실해졌다. ‘병장 급여 200만원 시대’가 된다는데 이 정도면 사실 9급 공무원 수준이다. 충분한 급여와 출퇴근 등 노동 조건을 보장하는 모병제로 전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직업군인에 더해 예비군을 제대로 운영해 정예화하는 방식을 조합한다면 ‘한반도가 처한 특수성’에 대한 답변도 될 듯싶다. 현역 장교들이 모병제 개혁을 지지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일부에서는 모병제가 도입되면 ‘흙수저 집합소’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생각을 좀 달리해 충분한 대우만 해 준다면 군대가 흙수저들에게 ‘기회의 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혁은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 2045년, 우리는 ‘불멸’을 선택하게 될까

    2045년, 우리는 ‘불멸’을 선택하게 될까

    ‘노화 저지 캠페인’ 벌인 두 공학자“죽음은 선택” 불멸의 시대 예고의료AI 등 과학적 성과로 짚어내“7년 젊어질 땐 경제효과 7조억弗질병 분류 땐 인구문제도 달라져”장밋빛 ‘장수 혁명’ 현실성은 의문 최근 생명공학계에서 ‘수명 탈출 속도’라는 개념이 떠오르고 있다. 이는 인간의 기대수명이 수명이 경과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연장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난 수천년간 거의 늘지 않았던 기대수명은 19세기 이후 늘어나기 시작해 선진국의 기대수명은 매년 3개월씩 증가하고 있고, 오는 2029년까지 수명 탈출 속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생물의학자 오브리 드 그레이는 ‘인류가 사고나 타살에 의해서만 사망하게 되는 미래의 순간’을 ‘므두셀라리티’(거의 1000년을 산 것으로 기술된 성경 속 인물 ‘므두셀라’의 이름을 딴)라는 용어로 대중화했다.국제적인 ‘노화 저지 캠페인’을 벌이는 두 공학자가 펴낸 ‘죽음의 죽음’(DEATH OF DEATH)은 도발적이다. 저자들은 “지금 우리는 마지막 필멸(必滅)의 세대와 인류의 첫 번째 불멸의 세대 사이에 살고 있으며, 이르면 2045년 ‘죽음’이 선택사항이 된다”고 주장한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두 학자는 최신 과학기술을 통해 촘촘하게 노화와 죽음을 늦추고 멈추는 문제를 탐구한다. 1951년 10월 4일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한 헨리에타 랙스는 2023년 현재도 ‘불멸의 삶’을 이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는 건 그녀의 몸에서 채취한 암세포다. 체외 배양된 보통의 암세포는 수일 만에 죽지만 ‘헬라 세포’로 명명된 랙스의 암세포는 70년이 지나도 배양된다.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결정적 공을 세운 헬라 세포는 전 세계 실험실에서 파킨슨병과 각종 암 치료제 연구에 사용된다. 인간 유전자 지도(게놈 염기서열 해독) 완성, 줄기세포와 유전자 치료법 개발, 수명 연장과 관련된 염색체 물질인 ‘텔로미어’와 복원 효소 ‘텔로머레이스’ 발견, 의료형 인공지능(AI)의 출현 등 기하급수적인 발전으로 생명 연장 기술은 더이상 ‘유사 과학’으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나아가 저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치료법을 찾는 데 엄청난 자금을 투입 중인 심혈관 질환이나 암과 같이,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하자고 한다. 노화가 질병으로 인식되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 사회의 양상도 바뀔 수 있다. 책은 노화 관련 질환의 발병을 7년 정도 지연시킬 경우 각종 의료비와 건강보험 지출 급감, 노동력 보존에 따른 생산성 제고 등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오는 2060년까지 7조 1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이른바 ‘장수 배당금’이라는 새로운 부의 창출도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근’(近) 미래에 닥칠 인류의 ‘장수 혁명’의 실현 가능성을 놀라운 과학적 성과로 짚어내고 있지만 다소 ‘장밋빛 전망’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현재 가장 촉망받고 있는 노화 치료제 혹은 방지제조차도 여전히 인간 임상시험이 난망한 현실에 비춰보면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회 체제에서 ‘무병장수’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혼란과 다양한 사회 문제의 발생은 결과적으로 ‘미지의 영역’이다.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이 43.4%(2018년 기준)인 우리나라 현실에 비춰봐도 ‘가난한 100세 시대’는 축복 아닌 재앙이 된다는 불안과 공포가 팽배해 있다. 그럼에도 죽음에 죽음을 선고하고 나선 과학기술의 혁신과 이에 따른 윤리적, 경제적 논거를 세밀하게 제시하는 건 이 책의 강점이다.
  • ‘독립 정신 잊지말자’…화성시 지역 독립운동가 7명 발굴,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

    ‘독립 정신 잊지말자’…화성시 지역 독립운동가 7명 발굴,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

    경기 화성시가 독립운동에 대한 근거 자료 부족으로 지금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지역 독립운동가 7명을 발굴해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신청했다. 12일 화성시에 따르면 이번에 서훈 신청된 인물은 안춘경, 김정두, 노근우, 김병준, 이순일, 진순익, 홍열후 지사 등 7명이다. 화성시 진안동 출신인 안춘경 지사는 1907년 의병 봉기 때 의병장 정주원의 권유로 의병에 투신, 정주원 체포 후엔 의병장이 되어 경기, 충청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안 지사는 항일 무력 투쟁 중 지금의 병점 지역에서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송산면 출신 김정두 지사는 일본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중 신간회, 재일조선청년동맹,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등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1931년 5월 교토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지사와 일본에서 함께 활동한 조옥현, 정휘세 지사는 앞서 2005년과 2006년에 각각 애족장, 애국장이 추서된 바 있다. 노근우, 김병준, 이순일, 진순익, 홍열후 지사는 송산 3·1 운동에 참여했으나 지금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화성시는 지난해부터 판결문, 민적부, 범죄인 명부, 신문조서, 신문 기사, 보고 문건 등 인물별 독립운동 행적 관련 자료를 조사해 7명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을 확보했다. 화성시 관계자는 “미서훈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을 통해 그들의 행적과 정신을 후대에 전승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도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역사의 그늘에 묻히는 일이 없도록 발굴 사업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화성시는 서훈을 받지 못한 지역 내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통해 2014년부터 15명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도록 했다.
  • ‘남해대교 건너면 무병장수’...개통 50주년 기념해 개통당시 걷기 재현

    ‘남해대교 건너면 무병장수’...개통 50주년 기념해 개통당시 걷기 재현

    경남 남해군은 남해대교 개통 50주년을 맞아 오는 22일 남해대교와 인근 남해각 일원에서 ‘무병장수 걷기 재현’ 등 기념행사를 한다고 12일 밝혔다.남해대교는 1968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해 1973년 6월 개통됐다. 섬 지역인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육지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왕복 2차선 연륙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다. 동양최대 규모 현수교로 개통된 뒤 오랫동안 국민관광지로도 인기가 높았다. 남해군이 관광도시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교량으로 남해군민을 비롯해 전국 관광객들로 부터 사랑을 받았다. 남해군은 남해대교 개통 50주년 기념행사로 남해대교 개통 당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진행됐던 걷기를 재현하는 행사를 한다. 개통당시 남해대교는 ‘다리를 한번 건너면 무병장수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 다리위와 주변이 인파로 넘쳐났다.22일 오전 팝페라 등 식전 공연에 이어 공군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남해대교 남해쪽에서 하동쪽까지 걸어서 건너는 걷기행사가 진행된다. 남해군은 남해대교 걷기 행사는 안전을 위해 행사 전까지 사전접수를 한 신청자를 대상으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참여를 희망하면 QR 마크를 통해 신청하거나 남해군청 관광개발팀(055-860-8613~5)으로 문의해 신청하면 된다. 기념행사 당일 남해대교 주변 설천면 노량상가번영회에서 ‘남해대교 50주년 생일’을 기념하는 ‘미역국 DAY’ 행사를 마련해 노량상가번영회 식당에서 고객들에게 미역국을 반찬으로 제공할 계획이다.김원태 노량상가번영회 회장은 “남해대교와 50년 동안 고락을 함께한 설천면 지역 주민들은 남해대교 생일날을 국민들이 오래 기억하고 자주 방문해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남해군과 국토교통부는 개통된지 수십년이 지나 오래되고 통행량이 많은 남해대교 대체교량으로 근처에 노량대교를 건설해 2018년 9월 개통했다. 남해군과 국토부는 190여억원을 들여 남해대교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남해군은 관광자원화 사업이 마무리되는 2025년 이후 부터는 사람만 다니는 보도 전용 관광 교량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 공간과 공간 잇는 미술관 마당… 시공의 경계 잊은 무형 미술관[건축 오디세이]

    공간과 공간 잇는 미술관 마당… 시공의 경계 잊은 무형 미술관[건축 오디세이]

    종친부·옛 기무사 터에 새 미술관 건축물 형상보다 사이 공간 확장중립적 마당 중심의 사회적 소통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 어울림1전시실 제외한 모든 공간 지하화관람객에게 능동적인 관람 이끌어마당엔 대형 야외 설치작업 선보여 서울 종로의 삼청로를 걷는다는 것은 한국 문화예술의 혈관을 타고 서울을 탐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삼청동, 사간동, 소격동, 가회동까지 이어지는 골목 곳곳에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삼청로 30, 서울관)은 이 혈관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에 해당한다. 옛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터에 들어선 서울관이 2013년 11월 문을 열었으니 어느덧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아직도 낯선 것과 달리 서울관은 마치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울 도심의 풍경으로 자리잡았다.국립현대미술관 사무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기무사 건물, 전시동, 교육동 건물들은 나지막하니 조화롭다. 궁궐터에서 170년 시간을 보낸 비슬나무 세 그루가 여전히 푸르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니 지나가는 사람도, 보는 이의 마음도 편안하다. 미술관 건물들이 에워싼 마당을 지나 2021년 국가 보물로 승격된 종친부(宗親府) 건물에서 북촌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시공의 경계가 없는 공원처럼 방문객들에게 휴식의 시간을 선사한다. 종친부 건물을 등지고 바라보니 왼쪽으로는 붉은 벽돌로 된 옛 기무사 건물이, 오른쪽에는 밝은 베이지색의 테라코타를 두른 미술관 건물이 정겹게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로 경복궁 담장이 보이고 저 멀리 인왕산의 산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설립 초엔 디자인이 너무 밋밋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건축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평가를 해야 할 것 같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건축가 민현준(건축사사무소 엠피아트 대표)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서울관은 처음부터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DDP처럼 오브제적인 미술관이 아닌 ‘무형의 미술관’(Shapeless Museum)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무형의 미술관이란 건축물의 형상보다는 건축물 사이 공간인 ‘마당’이 미술관의 공간 시스템을 정의하며, 미술관이 작동하는 중심이면서 이웃과 공유하는 공간이 되는 곳이다. 민 교수는 “건축물 자체의 아이디어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터에 현대미술관이라는 거대한 기능을 안착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면서 “미술관도, 문화재도, 이웃도 아닌 중립적인 마당을 중심에 둔 배치는 사회적 소통의 프로세스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서울관의 구조와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술관이 위치한 대지의 지리적·역사적 조건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2008년 소격동에 있던 기무사가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그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조성’ 계획을 밝혔다. 등록문화재인 옛 기무사 건물은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의 외래진찰소로 개원해 1932~1933년 증축했고 광복 후에는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과 육군통합병원으로 쓰이다 1971년부터 기무사가 사용했다. 기무사 터 안에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강당 등 건물 11개 동과 테니스장, 연병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격동의 역사를 버텨 낸 이 땅에 미술관을 짓기 위한 공모전이 2009년 12월부터 진행됐다. ‘경복궁 옆, 기무사 터’라는 땅의 특이성에 기반한 아이디어 공모에는 국내외에서 113개 팀이 참가했다. 여기에서 선발된 다섯 팀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미술관 면적과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2차 공모전이 진행됐다. 이 무렵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한다. 1981년 신군부에 의해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던 종친부 건물을 제 위치로 복원하기로 하면서 공모전의 핵심은 ‘종친부 터 미술관’으로 바뀐다. “과거지향적인 종친부와 마주하게 되는 현대미술관의 자세를 재정립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종친부의 모습이 기록된 화첩 ‘숙천제아도’의 종친부 그림을 미술관 대지에 콜라주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위에 옛 기무사 건물과 계획 중이던 미술관 건물을 겹쳐 봤습니다.”종친부와 옛 기무사의 팽팽한 긴장 관계 사이에 새 미술관이 자리를 차지하자 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지면서 기존의 도시와 결합한다. 바다에 섬들이 떠 있듯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물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을 배치한 ‘군도(群島)형 미술관’이 그려졌다. 민 교수는 서울관의 전체적인 배치가 결정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민 교수가 대표로 있는 엠피아트 컨소시엄은 1차 공모에서 내걸었던 ‘무형의 미술관’ 개념을 발전시킨 ‘장소 특정적 미술관’을 제안해 최종 당선했다. 서울관 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게 법규가 얽힌 곳이었다. 경복궁, 종친부와 옛 기무사가 각각 독립적인 문화재이다 보니 건폐율, 용적률 및 높이 제한 등의 일반적 건축 법규 외에 지구단위계획과 도시계획법, 문화재법이 적용된다. 문화재 분야에선 종친부 터에 현대미술관을 짓는다는 것 자체에 반감을 드러냈고 이웃한 동네마다 다른 민원을 제기했다. “당시 우리 미술계에는 동시대 미술 전시에 적절한 전시환경을 가지고 있는 서울 도심의 미술관이 꼭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의미 있는 결과물을 이뤄 내기 위해선 우리의 제안을 주장하기보다는 수많은 의견과 요구를 존중하면서 퍼즐처럼 엉켜 있는 상호 모순적인 제한과 문제들을 3차원 공간 안에서 풀어 나갔습니다.”동시대 미술을 품을 수 있는 서울관의 전시 공간은 1관을 제외하고 모두 지하에 배치돼 있다. 지상은 문화재와의 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 있지만 지하는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하를 중심으로 미술관에 필수적인 시설들을 설계했다. 서울관은 4차례의 문화재 심의와 17개 도시 및 건축심의 등 총 34번의 심의를 통과한 끝에 완성됐다. 미술관 마당으로 향하는 낮은 띠창이 있는 장방형 로비 공간의 수평 통로는 예술로 진입하는 시퀀스 역할을 한다. 긴 통로를 지나면 오른쪽에 1전시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높이 9m의 전시 공간인 ‘서울박스’와 지하의 2~7전시실로 연결된다. 하늘로 열려 있는 ‘전시 마당’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서울박스와 지하공간을 채워 준다. 전시실은 전통적인 벽 중심의 화이트큐브형(1전시실), 설치미술을 위한 공간 중심의 매직 박스형(2~7전시실), 다원 예술을 위한 블랙박스형(다원 공간)의 세 가지 타입이 있다. 1전시실은 로비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관의 대표적인 전시실로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1전시실과 지하의 2전시실은 수직으로 연결된다.서울박스와 전시박스 사이의 4~6전시실은 현대미술을 위한 전시실로 기둥이 없고 층고가 상대적으로 높다. 7전시실은 뉴 미디어, 비디오 아트 등 첨단예술을 위한 공간이다. 전시실 밖의 ‘역공간’도 독특한 기능을 갖는다. 2~5전시실이 에워싸면서 만들어진 서울박스, 서울박스와 전시마당을 연결해 주는 색동홀이 대표적인 역공간이다. 색동홀은 중요한 동선 공간으로 관람객들이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다가 설치된 작품을 만나는 의외의 예술적 경험이 가능하다. 미술관 마당도 역공간이다. 마당에서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등 대형 야외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민 교수는 “고전적 미술관에서는 연대기순으로 작품을 배열함으로써 강요적이고 수동적인 선형 관람 동선이 주를 이루지만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고 주제별 전시를 하는 경우는 이런 동선이 적절치 않다”며 “서울관은 전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능동적으로 전시를 선택하고 자율적으로 이용해 작품을 감상하는 ‘네트워크 동선’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주인공은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과 예술가들입니다. 한번 보고 다시 찾아가지 않는 곳이 아니라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관에 익숙해지고 동네처럼 친근해지는 미술관, 공원 같은 미술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계와 완공까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분이 의도했던 대로 운영되고 있어서 방문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는 민 교수는 서울관의 설계과정을 담은 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건축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는 10년 정도 사용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개관 당시에는 건축 외적인 정치적·사회적 요인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건축 자체로만 볼 수 있는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함혜리 건축 칼럼니스트
  • ‘벌써 병장?’ 피오, 늠름·날렵해진 근황

    ‘벌써 병장?’ 피오, 늠름·날렵해진 근황

    그룹 블락비의 멤버 피오(30·본명 표지훈)가 해병대 입대 후 더욱 성숙해진 근황이 전해졌다. 9일 유튜브 ‘국방 NEWS’에 ‘표지훈 병장 편…내가 해병 1280기를 택한 이유’라는 제목의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에서 피오는 더욱 늠름해지고 날렵해진 턱선을 뽐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먼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에서 군 복무 중인 병장 표지훈 인사드리겠다. 필승”이라며 인사했다. 피오는 해병대를 가게 된 이유에 대해 “어머니께서 제가 멋있는 곳에서 복무하기를 원하셨는데 이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입대를 결심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피오는 해병대 지원에 수 차례 떨어져 4년의 도전 끝에 입대 꿈을 이루게 됐다고 밝혔다. 피오는 “27살 때 처음 해병대 지원을 했다. 27살부터 29살까지 세 번 모두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고 신체 등급도 1등급이 나왔는데 왜 떨어졌을까’ 싶었다”면서 “알고 보니 제가 고등학교 때 데뷔해서 고등학교 출석 일수가 부족해서 떨어진 거였다. 어떻게 하면 해병대에 입대할 수 있을까 하다가 해병대 사령부에서 군악대 시험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해병대 4수 경험을 공개했다.피오는 자신에게 해병대는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면서 “훈련병 때는 더 힘들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꼭 한 번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병대 입대 후 제 자신에게 ‘잘 이겨냈다, 버텼다’라고 말했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졌고 마음가짐도 많이 달라졌다”라고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 뿌듯함을 보였다. 끝으로 “배우로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고, 가수로서 예능인으로서 많은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풋풋한 느낌이었는데 해병대를 다녀오니 남자다운 느낌까지 생겼구나’라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라는 바람도 전했다.피오는 2011년 블락비로 데뷔 후 tvN ‘놀라운 토요일’, ‘신서유기’ 등 다수의 예능프로그램과 ‘호텔 델루나’, ‘남자친구’, ‘마우스’, JTBC의 ‘경우의 수’ 등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는 지난해 3월 해병대에 입대했으며 오는 9월 전역한다.
  • MZ 의대생 75% “월급 200만원 공보의 싫어, 현역 갈래”

    MZ 의대생 75% “월급 200만원 공보의 싫어, 현역 갈래”

    의대생·레지던트 등 젊은 MZ세대 예비 의사와 의사 10명 가운데 7명은 공중보건의(공보의)·군의관 대신 현역 병사로 입대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급도 턱없이 적은데 3년이 넘는 공보의·군의관 복무 기간에 부담을 느낀다는 이유에서다.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대공협)·대한전공의협의회와 젊은의사협의체 권익위원회는 지난 5월 18~31일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전국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과 전공의(인턴·레지던트) 13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7일 밝혔다. 74.7%(1042명)가 일반 병사로 입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들 응답자 중 89.5%는 “공보의·군의관 복무 기간에 매우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92.2%는 주변에 현역으로 입대한 의료인이 있다고 답했다. ‘후배에게 현역 복무를 권할 의사가 있느냐’에 85.6%가 “그렇다”고 했다. 응답자들은 일반 병 입대 선호 이유(복수응답 가능)로 ‘장기간 복무에 대한 부담’(98.2%)을 가장 많이 꼽았다. 개선되지 않는 처우(65.4%), 불합리한 병역 분류(30.7%)가 뒤를 이었다. 일반 병의 복무 기간은 18개월까지 줄어든 데 비해 공보의는 1979년부터 변화 없이 복무 기간이 37개월이다. 대공협 측은 “젊은 의료인 사이에 일반 병 선호 현상이 급격하게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정부에서부터 일반 병사의 처우가 개선될 동안 공보의 환경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일반 병사 월급이 130만원(육군 병장 기준)인데 공보의는 206만원(일반의 기본급 기준)으로 차이도 크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2025년까지 병사 월급(지원금 포함)을 205만원으로 올릴 계획이라 차이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신정환 대공협 회장은 “의료 사각지대를 메우는 공보의·군의관 지원자를 늘리려면 복무기간 단축, 처우 개선 등을 조속히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보의, 특히 의과 신규 공보의는 매년 줄면서 2017년 814명이던 인원이 올해는 450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 갓은 젖혀 쓰는 게 맛… 조선 양반들의 ‘멋 자랑, 돈 자랑’

    갓은 젖혀 쓰는 게 맛… 조선 양반들의 ‘멋 자랑, 돈 자랑’

    절제된 생활과 예를 중시하고 수신과 극기를 통해 욕망을 억제하라는 성리학 이념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이 말년 병장처럼 갓을 뒤로 젖혀 쓰거나 삐뚜름하게 썼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조선시대 복식사를 연구하는 이민주 박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담談’ 6월호의 ‘조선의 멋쟁이’라는 소논문에서 조선시대 양반가 남성들의 패션 욕망에 관해 설명했다. 조선의 남성들은 10대 중후반에 관례를 치른 뒤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후 탕건을 썼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갓을 착용하는데 바로 이 갓이 유행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총모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졌고 챙에 해당하는 양태는 어깨를 넘을 만큼 커졌다. 또 머리가 총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정이 좁아지다 보니 갓을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얹어 놓는 수준으로 옆으로 기울어지게 쓰든지 뒤로 젖혀 쓰게 됐다. 갓을 얹어 놓다 보니 갓에 붙어 있는 끈이 없으면 갓이 뒤로 넘어가거나 옆으로 쓰러지는 일이 많았다. 여기에 멋 좀 낸다고 하는 조선 후기 패셔니스타들은 가슴 밑까지 길게 패영을 내려뜨렸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갓끈 외에 목걸이처럼 갓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부속물이 패영이다. 패영은 멋과 재력을 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수정, 마노, 유리, 상아 등으로 만들어져 값이 만만치 않았다. 사대부 남성들 사이에서 패영 장식 경쟁이 벌어지다시피 해 패영의 비용은 수백냥이 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맵시꾼들은 갓뿐만 아니라 상투를 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동여매는 일종의 헤어밴드인 망건에도 신경을 썼다. 멋쟁이들은 망건을 단단히 잡아맨 탓에 망건을 풀고 나면 이마 위아래가 0.3㎝ 정도 파여 자국이 남았을 뿐 아니라 상처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꽉 매다 보니 편두통에 시달리는 이도 많았다. 이들을 위해 대나무나 동물의 뿔 같은 것으로 만든 ‘살쩍밀이’라는 도구까지 있었다. 살쩍밀이는 관자놀이 주변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망건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용도였지만 편두통이 왔을 때 살쩍밀이를 망건 속으로 넣어 슬쩍 들어 올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엄격한 성리학 시대에 여성이 옷의 색이나 스타일로 욕망을 표출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면 남성들에게는 갓과 망건이 그런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갓은 젖혀 쓰는 게 멋?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갓은 젖혀 쓰는 게 멋?

    절제된 생활과 예를 중시하고 수신과 극기를 통해 욕망을 억제하라는 성리학 이념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이 말년 병장처럼 갓을 뒤로 젖혀 쓰거나 삐뚜름하게 썼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조선시대 복식사를 연구하는 이민주 박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담談’ 6월호의 ‘조선의 멋쟁이’라는 소논문에서 조선시대 양반가 남성들의 패션 욕망에 관해 설명했다. 조선의 남성들은 10대 중후반에 관례를 치른 뒤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후 탕건을 썼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갓을 착용하는데 바로 이 갓이 유행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총모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졌고 챙에 해당하는 양태는 어깨를 넘을 만큼 커졌다. 또 머리가 총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정이 좁아지다 보니 갓을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얹어 놓는 수준으로 옆으로 기울어지게 쓰든지 뒤로 젖혀 쓰게 됐다. 갓을 얹어 놓다 보니 갓에 붙어 있는 끈이 없으면 갓이 뒤로 넘어가거나 옆으로 쓰러지는 일이 많았다.여기에 멋 좀 낸다고 하는 조선 후기 패셔니스타들은 가슴 밑까지 길게 패영을 내려뜨렸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갓끈 외에 목걸이처럼 갓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부속물이 패영이다. 패영은 멋과 재력을 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수정, 마노, 유리, 상아 등으로 만들어져 값이 만만치 않았다. 사대부 남성들 사이에서 패영 장식 경쟁이 벌어지다시피 해 패영의 비용은 수백냥이 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맵시꾼들은 갓뿐만 아니라 상투를 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동여매는 일종의 헤어밴드인 망건에도 신경을 썼다. 멋쟁이들은 망건을 단단히 잡아맨 탓에 망건을 풀고 나면 이마 위아래가 0.3㎝ 정도 파여 자국이 남았을 뿐 아니라 상처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꽉 매다 보니 편두통에 시달리는 이도 많았다.이들을 위해 대나무나 동물의 뿔 같은 것으로 만든 ‘살쩍밀이’라는 도구까지 있었다. 살쩍밀이는 관자놀이 주변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망건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용도였지만 편두통이 왔을 때 살쩍밀이를 망건 속으로 넣어 슬쩍 들어 올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엄격한 성리학 시대에 여성이 옷의 색이나 스타일로 욕망을 표출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면 남성들에게는 갓과 망건이 그런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 “실물 보니 못생겼다” 장교 모욕한 병장, 2심도 무죄

    “실물 보니 못생겼다” 장교 모욕한 병장, 2심도 무죄

    군 복무 시절 같은 부대 상관을 모욕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20대가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제1형사부(부장 김평호)는 상관모욕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22)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A씨는 병장 복무 당시인 2021년 6월 11일 부대 생활관에서 저녁 점호 준비를 하던 중 동료 병사들에게 여성 장교 B씨를 모욕하는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A씨는 B씨를 지칭해 “사진과 목소리는 이뻐서 기대했는데 실제로 보면 개못생겼다”라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순수한 사적 대화에서 이뤄진 의견 표명이나 경멸적 표현에 대해서까지 상관모욕죄를 적용할 경우 헌법상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가 과도하게 제한되는 결과가 발생할 우려가 있고, 이는 군인복무규율을 따르는 군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상관모욕죄의 ‘공연한 방법’은 사적인 대화를 통해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상관모욕죄가 적용되려면 문서·도화 또는 우상을 공시하거나 연설하는 것에 준해 군 조직의 질서·통수 체계에 영향을 미칠 만한 방법으로 표현되는 경우에 한정된다는 설명이다. 1심은 “A씨는 동기인 병장과 대화하던 가운데 공소사실과 같은 발언을 했는데, 이는 일과시간 밖의 사적 대화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면서 “발언 내용 자체도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경멸적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당시 병사 3명이 생활관에 함께 있었으나 고발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 2명 모두 조사 과정에서 A씨의 발언 내용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는 등 이들이 A씨와 동기의 대화 내용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심 재판부 역시 “A씨의 발언은 객관적으로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한 것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면서 검사의 법리오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 반곡 난중일기의 恨… 왜적 토벌보다 ‘명군 접대’ 굴욕이 더 아팠다 [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반곡 난중일기의 恨… 왜적 토벌보다 ‘명군 접대’ 굴욕이 더 아팠다 [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선산읍성 점령당하자 반격 준비흩어졌던 군사 모아 왜적 괴롭혀수백명 베고 군막 없애는 공적 세워명나라 군사 접대 역할도 맡아수차례 곤욕 끝에 낙향 선택해 오늘날의 경북 구미시는 조선시대 선산도호부와 인동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산군 구미읍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면서 급격히 산업도시로 탈바꿈하며 1978년 구미시로 승격한다. 1995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하면서 구미시는 현재와 같은 범위가 됐다. 선산군의 흔적은 이제 선산읍으로 남았다. 영남대로에 자리잡은 선산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였다. 영남대로는 서울을 출발해 충주에서 새재를 넘어 경상도에 들어서면 상주~선산~인동~대구~경산~청도~밀양~동래로 이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왜군 선발대 역시 부산포에 상륙한 다음 바로 이 루트를 이용해 북상했다.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1542~1602)은 선조 3년(1570) 대과에 급제한 문관이다. 종6품 가평현감과 정5품 형조정랑에 머물던 그는 1591년 6월 종3품 선산도호부사에 임명됐다.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고속 승진한 이순신을 연상시킨다. 반곡을 추천한 사람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좌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이었다. 왜군 선발대가 선산읍성을 휩쓴 것이 1592년 4월 24일이다. 왜군은 4월 25일 상주 북천,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각각 조선 최고의 장수로 일컬어지던 순변사 이일과 도순변사 신립이 이끄는 관군을 궤멸시켰다. 정경달이 소수 병력으로 선산관아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줄곧 선산부에 머물며 왜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수년 동안 일거수일투족 기록돼 당시 정경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5일부터 1595년 11월 25일까지, 1597년 1월 1일부터 1602년 12월 17일까지 적은 기록이 ‘반곡난중일기’로 남아 있다. 반곡은 왜군 선단이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몰려왔다는 사실을 이틀 뒤 알았다. 그는 조선의 왜적 방어 전략인 제승방략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부산을 향해 남하하지만 동래읍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22일 선산으로 돌아온다. 왜적이 선산읍성을 점령하자 정경달은 동생 정경영과 산봉우리로 피신하는데 “한 걸음 딛고는 열 번이나 넘어졌다”고 할 만큼 급박한 피란길이었다. 하지만 반곡은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 반격을 준비한다. 5월 17일 일기는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라 1000명 군사를 모아 금오산 아래 진을 쳤다’고 했다. 왜군의 주력 부대가 북상한 상황에서 선산 관아에는 수백 명의 왜적이 주둔하고 있었다. 반곡의 선산 군사는 잇따라 읍성 내부로 쳐들어가 왜적을 괴롭혔다. 이 시기부터 일기에는 거의 날마다 왜적의 머리를 베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경달의 군사 운용법은 6월 2일자 일기에 적혀 있다. ‘동채와 해평채는 (낙동)강의 동쪽이고 서채와 남채는 서쪽인데, 왜적이 중간을 막고 있고 강물도 엄청나게 불어서 군채 사이에 호령이 통하지 않았다. 경계를 넷으로 나누어 4개의 도청(都廳)을 세우고 각각 장령 1명, 향소 1명, 복병장 6명, 유격장 18명을 두었다. 각기 군사를 거느려 왜적이 오면 피하고 돌아가면 진을 치며 혹은 논밭의 곡식을 수습하고 혹은 왜적 낙오병을 포획하게 했다.’ 군사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 기습공격하는 전술이다. 11월 1일은 ‘남채 복병장을 강나루에 매복시켰는데, 많은 왜적이 건너고 후미가 막 강물로 들어가려는 찰나 크게 소리를 지르며 공격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탄 붉은 갓을 쓴 자가 기마병 3명과 군졸 3명을 거느리고 건너다 낭패를 당했는데, 모두 베고 1명은 생포했다’고 적었다. ‘정씨 집안 문서’(丁氏家乘)에는 ‘반곡난중일기’의 내용을 헤아려 선산 군사의 전공을 한데 모았는데 ‘공의 휘하에서 왜적을 죽인 것이 165명, 활 쏘아 죽인 것이 94명, 쏘아 맞힌 것이 260명이었고 왜적의 군막을 태워 없앤 것이 300칸 남짓’이라고 했다. 왜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군량미 확보에 발군의 능력 보여 정경달은 이듬해 4월 23일 천병접대도차사원(天兵接待都差使員)에 임명된다. 한성에서 밀려난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뒤따라간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을 공급하고 장수들을 접대하는 역할이었다. 앞서 반곡은 왜란에 대비하는 과정에서도 군량을 확보하는 데 발군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전쟁 직전 선산부가 군량미 12만석을 확보했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개전 초기인 4월 20일 경상감사 김수가 반곡을 참퇴장(斬退將) 겸 운량사(運粮使)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글자 그대로 참퇴장은 도망가는 군사를 군율로 처단하고, 운량사는 군량미를 공급하는 역할이다. 정경달은 군량미 일부를 금오산 도선굴(道詵窟)에 비축했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금오산은 해발 976m의 요새였다. 반곡은 이곳에 면포와 소금 간장도 비축했으니 유격전을 펼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하지만 1593년 봄부터는 몸이 아프다는 기록이 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명나라 장수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 접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반곡은 7월 3일 류성룡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청했다. 결국 정경달은 9월 10일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 요양을 시작한다. 그런데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이 반곡의 귀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렇게 1594년 2월 26일 그는 통제사의 종사관으로 한산도에 부임하게 된다. 그에게는 소속 연해 고을을 순찰하면서 수군을 관리하는 동시에 군량 조달을 위한 둔전(屯田) 경영의 소임이 주어졌다. 반곡의 표현대로 ‘한산도의 수군과 격군은 굶주린 지 이미 오래여서 얼굴에 핏기가 없어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을 것이며, 지난해 사망한 병졸의 해골이 해변에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반곡은 여수 돌산도, 고흥 절이도, 완도 고이도, 해남 황원목장에 둔전을 만들어 삼도 수군의 군량을 충당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정경달은 하지만 일년도 되지 않은 1595년 2월 남원부사로 옮겨 간다. 남원은 호남 방어의 중심으로 영남과 남해안을 잇는 중간 기착지여서 명나라 대군이 주둔해 있었다. 이번에도 정경달의 역할은 지방관보다는 명군 접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반곡은 ‘명나라 참장 유유번(劉維藩)과 도사 담종인(譚宗仁)이 온갖 폐단을 일으켜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남원부사로 재임했던 11월까지가 반곡에게는 고뇌의 시간이었다. 정경달은 1597년 3월 군직(軍職)인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된다. 그런데 4월 19일 고향을 출발해 30일 한강을 건너자마자 이미 해직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명나라 군사를 접대하는 접반사(接伴使)에 다시 기용됐는데, 9월 17일 타고 가던 역마를 명나라 장수도 아닌 병졸에게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결국 정경달은 앓아눕게 된다. 이후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98년 4월 6일에야 그는 장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곡은 6월 3일 다시 청주목사로 발령받았다. 당상관으로 승진한 것이지만 임무는 역시 명나라 군사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11월 6일자 일기에는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의 행차가 충주에 도착했는데, 관용 마필(刷馬)을 준비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곤장을 맞고 밤새 곤욕을 치렀다’고 적었다. 정경달의 울화는 쌓이고 쌓였다.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12월 30일 반곡은 ‘봄에는 가족으로 근심했고 여름에는 청주에서 곤욕을 치렀고 겨울에 이르러서도 충주에서 곤욕을 당하였으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불행한 해였다’고 적었다. 왜적과 맞설 때보다 명군을 상대하면서 훨씬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얻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정약용이 ‘반곡난중일기’ 다듬어 오늘날 전하는 ‘반곡난중일기’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다듬어 1817년 펴낸 것이다. 다산은 ‘벼슬이 낮은 이는 상관이 명령하는 바가 나를 함정이나 덫에 넣는다 하더라도 머리를 숙이고 받들 수 있다면 실패를 감수할 뿐이고, 멀리 사는 이는 마음에 품은 바가 천지(天地)를 바꾸고 일월(日月)을 굴릴 수 있다 하더라도 침묵할 수 있다면 분수를 지킬 뿐이니 유분(幽憤)이라 한다. 유분을 품은 이는 당세에 쓰이지 못하더라도 오직 필묵에다가 발설하여 후세에는 펼쳐지기를 바랄 뿐이니 고심(苦心)이라고 한다’고 했다. 다산의 깊은 뜻을 모두 알기는 어렵지만 반곡의 일기는 후세가 경계로 삼기를 바랐던 고심의 산물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 300㎏ 농기계에 깔린 70대 농민 구조한 해병대원

    300㎏ 농기계에 깔린 70대 농민 구조한 해병대원

    해병대 1사단 장병들이 농번기 대민 지원 중 농기계에 깔린 농민을 구조하는 데 힘을 보탰다. 24일 해병대 1사단에 따르면 전날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한 논에서 갑자기 이앙기가 비탈길로 떨어지면서 장비를 몰던 70대 농민이 깔렸다. 농번기를 맞아 인근 논에 대민 지원에 나섰던 해병대 1사단 이해찬 병장과 윤수영 일병은 이 장면을 보고 즉시 달려갔다. 이들은 이앙기가 300㎏에 이르러 농민을 당장 빼내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이앙기를 들어 올려 압박을 줄였다. 또 119에 신고한 뒤 호흡이 가빠오는 농민 옷을 풀어주고 정신을 유지하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3분이 지나지 않아 도착한 구조·구급대원들이 확인한 결과 농민은 어깨가 탈골된 상태로 곧바로 빼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구조·구급대원들은 농기계를 일부 절단해 농민을 구조한 뒤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 농민은 큰 외상 없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 2명의 해병대원은 농민이 병원으로 이송된 것을 확인한 뒤 부대로 복귀했다.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현장 해병대원들이 침착하게 초동조처해 소중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부대는 이 병장과 윤 일병 사례를 전파해 장병들에게 본보기로 삼고 지휘관 표창을 주기로 했다. 이해찬 병장은 “다행히 할아버지 옆에 우리가 있어서 신속히 조치할 수 있었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니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윤수영 일병은 “국민의 군대라는 해병대에 입대할 때만큼이나 큰 보람을 느낀 하루였고 할아버지가 금방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인구 감소로 떠오른 모병제… “월급, 최소 중소기업 수준 돼야 지원”[인구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인구 감소로 떠오른 모병제… “월급, 최소 중소기업 수준 돼야 지원”[인구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인구 감소라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은 병역 제도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병역 의무를 가진 20세 남성 인구는 2020년 33만 4000명에서 2025년 23만 6000명으로 5년 만에 29.5%가 줄어들고, 2040년대에는 현재의 절반 수준(12만 6000명)까지 급감할 전망이다. 지금과 같은 징병제로는 50만명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군대를 정예화·과학화하는 흐름과 맞물리면서 모병제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국회와 군, 전문가들 사이에서 모병제 논의가 한창이다. 서울신문은 18일 모병제 논의에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인구집단인 20~30대 청년층들에게 ‘모병제 성공의 조건’을 들어봤다. 청년층이 가장 강조한 것은 처우 문제였다. “최소 중소기업 규모 이상”이 되지 않는다면 지원자를 구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또 최소한 정부가 추진하는 ‘병장 월급 200만원’보다는 높은 수준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군대가 저소득층 출신들로만 채워지는, 이른바 ‘흙수저 집합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다. 2013년 군 복무를 마친 안정훈(32)씨는 “인구 절벽과 (2025년까지 병장) 월급 200만원을 생각하면 모병제로 전환하고 전문 군인으로 육성한다는 발상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월급이 중소기업 수준도 안 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각각 2018년과 2021년 병장으로 제대한 장윤석(27)씨와 서민석(25)씨는 “최소한 9급 공무원이 수당을 포함해 받는 임금 수준으로는 올려야 한다. 그다음 복지나 생활환경 같은 처우 개선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며 “간부 월급 역시 병사들 월급 인상률만큼은 올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021년 병장으로 전역한 윤담(26)씨는 “(이등병 기준) 최저 시급으로 하루 8시간 정도 임금을 책정한다면 최소 200만원 정도 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모병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서도 “사람들이 군대에 자발적으로 가고 싶게 만들려면 300만원 정도는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병제 전환에 부정적인 이들 역시 그 이유는 급여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2012년 제대한 이민규(31)씨는 “훈련병, 예비군 처우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는데 예산상 바로 모병제를 시행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며 “부사관 월급을 올려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전환을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핵심으로 꼽는 목소리도 있었다. 2013년 제대한 김제림(32)씨는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나 싶다”며 “군인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입대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2021년 하사로 전역한 박주헌(24)씨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는 것과 같은 인식이 생겨야 한다. 그 인식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병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군 간부들 사이에서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현역 군 간부 A씨는 “주변 간부들끼리 얘기를 해 봐도 모병제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별로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 B씨는 “병사들을 싼값에 동원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제값 주고 제대로 훈련시키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 C씨도 “사병 월급 200만원 시대라는데 먹이고 입히는 돈까지 계산하면 월급 300만원 수준은 된다. 그 정도면 이미 공무원 못지않다”고 말했다. 그런 속에서도 이들이 생각하는 ‘모병제의 조건’ 역시 첫 번째는 처우 문제였다. 월급뿐 아니라 직업 안정성을 지적하는 간부도 많았다. 군 간부 D씨는 “장기근무를 하더라도 진급 경쟁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전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45세에 불과한 소령 계급정년을 연장하는 과제라도 먼저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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