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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티모르 실종병사 찾기 재개

    지난 2003년 3월 유엔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동티모르에 파병돼 운전병으로 근무하다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고 김정중 병장의 유해를 찾는 작업이 재개됐다.23일 국방부에 따르면 최근 문호준 동티모르 주재 한국대사가 유엔 통합임무단과 유엔국제경찰의 장비 지원을 받아 실종지역을 방문, 현지 주민대표와 언론사 관계자 등을 만나 유해를 찾기 위한 우리 정부의 의지를 설명하고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당부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얼굴잃은 해병 결혼사진’ 美 울렸다

    이라크 전쟁 때 얼굴을 잃은 예비역 해병 병장의 결혼식 사진 한 장이 미국을 울렸다. 니나 베르만의 이라크전 부상 군인 사진전에 공개된 전역 해병 타이 지겔(24)의 모습은 더할 나위가 없는 비운을 말해준다. 전시회는 지난 8일부터 뉴욕 맨해튼의 젠 베크만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순백색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레니 클라인(21)은 화사한 부케를 들고 서 있지만 웃음을 잃은 채 우울한 모습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 사진이 던져주는 충격이야말로 단연 압권이라고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들의 결혼식 사진에는 ‘해병의 결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름다운 신부 옆에서 ‘퍼플 하트’(purple heart·미국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 때부터 상이군인에게 주는 메달)를 비롯한 무공 훈장들로 장식된 군 예복을 입고 비스듬히 선 신랑. 그의 얼굴은 표정조차 읽히지 않을 정도로 차마 드러내기 어려운 모습이다. 창백하기만 한 얼굴은 차라리 마스크를 쓰고 섰다는 편이 어울린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지겔은 2년 전인 2005년 자살폭탄 테러 때 얼굴을 잃었다. 화염이 그가 탔던 트럭을 휘감고 얼굴을 할퀴었다. 그는 텍사스주 군병원에서 열아홉 차례나 수술을 거치고 부서진 두개골을 플라스틱 돔으로 대체한 뒤에야 겨우 현재의 모습이나마 갖췄다. 재생조직을 덮은 얼굴은 울퉁불퉁하고, 코와 귀가 있던 자리엔 구멍만 남았다.2003년부터 이라크전 참상을 앵글에 담아온 베르만은 사진을 묶어 2004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이달 말까지 열리는 사진전에는 사담 후세인 벽화가 그려진 담장 밑에 깔려 척추가 부러진 병사, 뇌와 시력을 잃은 병사 등 전쟁의 참상과 반전 메시지를 알리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관련 사진은 베르만의 웹사이트(www.jenbekman.com/artists/nina_berman/)에서 볼 수 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1) 해인사 홍제암 석장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1) 해인사 홍제암 석장비

    아무리 명품 청자나 백자라도 금이 가거나 수리한 흔적이 있으면 골동품시장에서 쳐주는 값은 크게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온전했을 때보다 깨진 뒤 더욱 높은 값어치가 매겨지는 옛 사람의 자취도 없지는 않습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비가 그렇습니다.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친 뒤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나타나지요. 예전에 해인사에서 홍제암에 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지만, 이제는 대형버스도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닦였습니다. 홍제암은 임진왜란 당시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없었던 나라를 구해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입적(入寂)한 곳입니다. 광해군은 대사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영정을 모신 영자전에는 홍제암(弘濟庵)이라는 편액을 내렸습니다. 대사를 기리는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는 홍제암 오른쪽의 부도밭에 세워져 있지요.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종 모양의 소박한 부도는 홍제암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세워진 석장비는 높이 3.15m의 당당한 모습이지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비석 한가운데가 열십자(十) 모양으로 쪼개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장비가 중요한 것은 사명대사의 일생을 어떤 기록보다 소상히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중의 책방에 나와 있는 사명대사 전기는 대부분 이 비문에 나타난 삶의 궤적을 뼈대로 약간의 문학적 상상력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이 교산 허균(1569∼1618)이라는 것도 석장비의 가치를 높입니다. 한글 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을 쓴 바로 그 사람이지요. 교산은 비문에서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산의 비문에는 당시 사명대사에 대한 뜻밖의 시선도 드러나 눈길을 끕니다.‘대사가 중생으로 하여금 혼돈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법의 수호자로 병장기를 잡아야 했던 사명대사의 고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 같습니다. 석장비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이었던 다케우라(竹浦)가 네동강냄으로써 역사적 가치는 오히려 극대화되었습니다. 일경은 이때 이고경 전 주지를 비롯해 해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17명의 항일불교인사를 체포하는데, 이른바 ‘해인사사건’입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알고 모두 노리고 있다.”고 일갈한 사명대사의 기개가 해인사에 ‘불온한’ 분위기를 조성한 주범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앞서 일경은 1942년 항일 불교청년운동 조직인 만당(卍黨)의 근거지이자,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창구였던 백산상회의 연락소였던 사천 다솔사를 급습했지요. 다케우라는 합천에 부임하기 직전 사천경찰서장이었다니 두 사건을 모두 일으킨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석장비는 1958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남았지만, 이 상처가 없었다면 석장비가 주는 감동은 조금 적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dcsuh@seoul.co.kr
  • [사회플러스] 여경 성폭행미수 미군에 징역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27일 여성 경찰관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성폭령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로 구속기소된 주한미군 B(22) 병장과 F(21) 일병에게 징역 3년6개월과 징역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B 병장은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로 범행했다고 주장하나 입증이 부족해 받아들일 수 없으며 F 일병은 부녀자를 추행한 지 얼마 안돼 또 범행을 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중하다.”고 밝혔다.B 병장은 올해 4월 서울 청담동의 한 건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사복 차림의 여성 경찰관 A씨를 넘어뜨려 어깨 등에 상처를 입히고 성폭행하려 한 혐의를,F 일병은 B 병장이 범행하는 동안 망을 본 혐의로 각각 구소기소됐다.
  • 원불교 군종장교 첫 탄생

    “원불교 교단의 오랜 숙원이 풀려 기쁩니다. 그동안 군대와 병영에서 인정받지 못한 소수종교의 허물을 벗고 장병들의 정신력과 인격 지도, 사고 예방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지난달 말 육군3사관학교에서 12주간의 훈련 끝에 임관,5일부터 육군 5사단에서 원불교 첫 군종 장교(대위)의 역할을 수행하는 문정석(33) 교무. 지난해 3월 원불교가 병적편입대상종교로 지정됨에 따라 군종장교로 선발, 처음으로 병영에서 원불교 종교활동을 지도하는 영예와 부담을 함께 안았다. “40년 만에 군 내에서 종교활동의 자유를 얻은 만큼 당당하게 제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교도들이 군 복무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가슴 벅찬 일이지요.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까요.” 1993년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입학,2003년 대학원을 마친 뒤 출가해 교무가 된 문 대위는 1997년 육군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병장 전역했으나 군종장교 임관을 위해 다시 입대하는 열정을 보였다. “원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종교의 신자들도 군(軍)에서 인권과 종교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장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장병들의 원만한 병영생활을 도울 수 있도록 ‘마음공부’ 같은 원불교 교리를 적극 접목시킬 계획입니다.” “현재 4500명가량의 원불교 교도가 병영생활을 하고 있다.”는 문 교무는 “군종장교로서의 장기 지원이 가능하다면 끝까지 군에 남아 장병들의 정신적인 힘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TV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는 외국인, 그는 홍콩 디즈니월드의 총책임자이다. 중국 국민들에 대해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디즈니월드는 꿈이 아닌 실망의 동산이 됐다.’는 한 부모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다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2006년 춘제(春節·설) 때의 일이다. 전년도에 개장한 홍콩 디즈니월드는 쏟아지는 행락객 앞에 어찌할 줄 몰랐다. 철문을 굳게 잠그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서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울먹이는 아이들, 분통을 터뜨리는 부모, 격렬하게 항의하는 손님들…. 달리 할 말도 없었다.“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만 되뇌일 뿐이었다. 이를 본 홍콩인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몇년전부터 홍콩 경제를 회복세로 되돌린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대륙의 관광객들이다. 총 관광객 수의 절반이다. 홍콩인 K씨는 “그러나 이렇게 몰려오는 걸 모두들 마뜩지 않아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내륙인 관광객이 ‘혼란’일 수 있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중국 정부는 이같은 홍콩인의 마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에 외국인보다 대륙인에 대해 더 엄격한 절차를 적용하며 매년 홍콩으로 들어가는 중국인 총수를 조절하고 있다. 홍콩에서 ‘대륙(大陸)’과 ‘대륙인’은 이처럼 두 얼굴이다. 과거 이 두 단어는 ‘메인랜드 차이나’를 폄하하거나 혐오하는 말로 쓰였다. 홍콩에서 중국인에게 ‘홍콩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하면,‘당신 대륙인 아니냐.’는 물음이 될 수 있다.1987년 이후 7년을 거주한 뒤에야 ‘영구 거주민’이 될 수 있으므로 홍콩인으로서는 ‘지저분하고 소양이 부족한 중국인’을 분리해 내는, 우회적인 질문인 셈이다. 그러던 홍콩인들이 지금은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표준어 열풍 때문에 홍콩인의 평균 영어실력이 줄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97년 금융위기와 2003년 사스 위기 때 적지 않은 홍콩인들은 대륙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예전에는 여행 가기조차 꺼려 했던 곳이다. 이제는 전대를 차고 값비싼 물건을 싹쓸이해 가는 대륙의 졸부 쇼핑족들에게 서툰 표준어로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과거와는 달리 일체감도 부쩍 늘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50대 프랜시스 팍.“스포츠 국가 대항전을 볼 때면 아이들이 자신이 중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전한다. 주변에서도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감에 따라 중국인임을 내세우는 홍콩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피폭사건으로 홍콩에서도 반미 시위가 일어난 일이나,2003년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의 홍콩 방문 때의 열렬했던 환영식도 그 한 예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인’은 ‘중국 공민’으로 거듭났는가. 지금도 홍콩 특별행정구 청사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함께 내걸린 홍콩기는 그들의 복잡한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준다.“이것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런저런 행사에서 오성홍기만 내걸면 홍콩인들은 대단히 불쾌해 한다.”고 현지의 한국인 관계자들은 전한다.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의 불분명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번영과 함께 영국인 국적과 코스모폴리탄 홍콩인에 안주하던 이들에게 홍콩 반환이 결정된 1984년 중·영 연합성명 발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해외로 떠나려던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영국에 들어가려면 이민관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정작 중국에서는 영국 영사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으로 지금의 ‘조국’ 중국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임을 단 한차례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72년 유엔 탈식민화위원회에서 홍콩과 마카오는 식민지 명단에서 빠졌다. 홍콩인들은 국제적으로도 ‘어정쩡한’ 신분 속에서 지내왔다는 얘기다. 홍콩 기본법은 홍콩인의 다른 나라 여권을 ‘여행 통행증’ 정도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홍콩인이 중국 공민의 정체성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중국은 반환받을 당시 ‘홍콩의 생활방식’을 50년간 보장했다. 당시 중국의 한 고위 관료는 “홍콩에서 말(경마)은 계속 뛰고 주식투자와 춤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생활방식이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홍콩 경마협회가 최근 ‘축구 도박’을 정식으로 허용했어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최근 홍콩에서의 몇가지 고고학적 발견들을 근거로 고대 홍콩에 한족(漢族)이 살았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홍콩에 대해 종족적·문화적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글 사진 홍콩 이지운특파원 jj@seoul.co.kr ■ ‘당신은 누구인가’ 설문조사 |홍콩 이지운특파원|“지금 ‘본토(本土)’라고 표현했나요.” 재차 확인을 했다. 스스로를 “차이니스 홍콩 피플”이라며 중국인임을 먼저 내세운 30대 천(陳)모씨. 그럼에도 그는 계속 홍콩을 본토라 표현했다. 홍콩인의 정체성에는 단순한 설문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혹자들은 “사람간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고 공식 언어가 다르며, 화폐가 다르면 유럽연합이나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안의 나라들보다 더 이질감이 큰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정체성 설문조사가 홍콩에서 유행한 것은, 중·영 연합성명이 발표된 이듬해인 1985년부터로 알려진다. 홍콩에서 정체성 문제는 그 역사가 길다. 홍콩 중원(中文) 대학의 2006년 조사로는 홍콩 시민들의 21.5%는 스스로를 ‘홍콩인’으로,18.6%는 ‘중국인’으로 여겼다. “홍콩인이지만 중국인이기도 하다.”는 38.1%,“중국인이지만 홍콩인이기도 하다.”는 21.2%였다. 이중적 정체성을 보인 답변은 중원대학이 1996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홍콩대가 1996년과 2006년 사이 홍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정체성 조사를 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자신을 ‘홍콩인’으로 생각하는 청소년은 10년 전보다 5.2%포인트 줄어든 28.7%에 그쳤다.‘홍콩인이지만 중국인도 된다.’는 정체성이 담긴 ‘홍콩 중국인(Hong Kong Chinese)’은 39.4%,‘중국인이지만 홍콩인도 된다.’는 생각이 담긴 ‘차이니스 홍콩인(Chinese Hongkonger)’은 22.3%였다. 티모시 웡(王家英) 중원대 교수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커질 수록 홍콩인들의 중국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것이 감정적인 동일체 의식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다.”고 분석했다. jj@seoul.co.kr ■ 대륙인의 지위 변화는 |홍콩 이지운특파원|1980년대 중반 개봉된 저우룬파(주윤발)·왕쭈셴(왕조현) 주연의 ‘에스케이프걸’은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홍콩으로 밀입국하는 대륙인의 모습을 다룬 영화다. 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49년부터 홍콩은 홍콩 땅만 ‘터치’하면 홍콩인으로 받아 주는 터치베이스(touch-base) 정책을 실시했다.(표 참조) 불법이주민의 지위 변화는 홍콩과 대륙과의 상관 관계를 보여 준다. 오늘날 홍콩의 심장부, 홍콩섬 금융거리 한복판에 유독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만을 내걸고 있는 ‘인민해방군 주홍콩 부대 빌딩’은 변화상의 결과물이다. 과거 영국 식민정부 청사로 쓰이던 곳이다. 현지인들은 “군인들이 아주 이따금씩 연병장에서 제식훈련 하는 모습이나 보일 뿐 공개적인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대륙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홍콩을 왕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보다 훨씬 까다로운 입경 심사를 받기도 한다. 49년까지 대륙과 홍콩은 국경 개념이 희박했다. 대륙인의 홍콩행은 7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과 78년 개방 때 급증했다. 홍콩이 80년대 말 터치베이스 정책을 폐지한 것은 경제 구조개편에 따라 더이상 값싼 노동력이 필요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jj@seoul.co.kr
  • 박노해 시인의 눈을 통해 본 레바논

    작명자의 권력은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그 대상의 본질을 규정해 버린다는 데 있다. 국제사회가 헤즈볼라를 ‘무장테러조직’이라 부르는 순간, 헤즈볼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평화의 파괴자로 굳어졌다. 레바논인들이 헤즈볼라를 ‘평화와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든, 조직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레바논의 체 게바라’로 평가하든 상관없다. 시인 박노해는 헤즈볼라를 다시 부른다. 헤즈볼라는 35명의 국회의원과 2명의 장관을 배출한 ‘합법정당’이고 ‘레바논 최대의 대중정당’이다. 일자리 창출과 국민 복지를 중시하는 정치가이고,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는 존경받는 기업의 경영자다. 성숙한 국제감각을 가진 레바논 ‘정부 안의 정부’이자 ‘레바논 유일의 정부’다. 지난해 7월13일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자국 병사 2명을 헤즈볼라가 납치했다는 이유였다. 박노해는 레바논으로 날아갔고, 폐허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울고 있는 레바논인들의 삶을 기록했다. 박노해의 글과 사진으로 꾸며진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펴냄)엔 한국 언론이 접근하지 못했던 헤즈볼라의 면면이 담겨 있다. 2006년 8월, 박노해가 물었다.“쿠리아가 UN평화유지군으로 레바논에 전투병 파병요청을 받고 있다.” 헤즈볼라 나와프 무사위 국제국장이 대답했다.“레바논 땅에서 레바논 민중과 헤즈볼라의 평화의지를 거스르며 무장해제를 시도한다면 그 어떤 군대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2007년 7월19일, 한국은 레바논으로 군대를 파병한다. 한국군 파병에 대한 헤즈볼라 지도부의 답변은 참혹한 회고이자 끔찍한 예견이다. 이라크에서 사망한 김선일씨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은 윤장호 병장을 회고하게 만들고, 또 다른 김선일과 윤장호를 예견하게 만든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 그 후’다. 고통과 슬픔은 전쟁 후부터 본격화되고, 죽은 자는 산 자의 가슴 속에서 매일매일 죽는다. 박노해는 “전쟁은 인간성의 좌표를 드러내고 우리의 인간성을 끊임없이 비춘다.”고 말한다. 레바논의 참혹함을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군대까지 보내는 잔혹한 ‘국가적’ 인간성은 ‘평화유지’란 이름으로 은폐되고 미화된다.“쿠리아 좌누비아?(남한) 쿠리아 샤말리아?(북한)”라 묻는 레바논인들에게, 박노해는 ‘좌누비아’라 답하며 그들의 눈을 마주보지 못한다. 전쟁은 불평등하고, 폭탄에도 눈이 있다. 박노해는 “이스라엘 폭탄은 참으로 정밀하게 기독교 마을과 부잣집들을 비껴갔다.”면서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것은 가난한 레바논 남부 무슬림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폭탄의 상흔 너머 보이는 부촌의 평화스러운 모습에 박노해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별적 자비인가, 레바논의 모순인가.”라며 자문한다. 열 살도 채 안 된 레바논 아이들의 입에서 ‘성전’‘순교’‘영원한 승리’란 말이 한국 아이들이 ‘스타크래프트’ 게임용어 읊듯 무심하게 흘러나오게 하는 전쟁. 박노해는 시로써 외친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1만 30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Seoul In] 독거노인 25명에 수의 전달

    양천구(구청장 추재엽) 양천구 자원봉사센터는 노인 주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동사무소 사회복지 담당자의 추천을 받아 독거노인 25명에게 지난 18일 수의를 전달했다. 수의는 전문 수의제작 기술을 익힌 양천구수의봉사단(단장 함간란) 단원 13명이 매주 4시간씩 1년간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해서 직접 만들었다. 한 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단원 1인당 6개월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의를 전달받은 마영식(84·신정1동) 할아버지는 “비용과 정성이 많이 드는 수의를 무료로 만들어 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센터 2644-4750.
  • 해병대 58년만에 1000기 전역식

    “필승! 신고합니다. 해병대 1000기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귀신 잡는 해병’이 58년 만에 1000기 전역자들을 배출했다. 경북 포항의 해병대 1사단은 20일 사단 연병장에서 가족과 친지, 해병대 예비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병 1000기 전역식을 가졌다. 이날 주인공들은 2005년 6월21일 입소, 혹독한 훈련을 받은 뒤 2년여간 국방의 의무를 다한 해병 1000기 358명 중 96명이다. 다른 262명도 김포, 백령도, 연평도 등 모두 6곳에서 탈락자 없이 건강한 얼굴로 전역식에 참가했다. 특히 이들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1000기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으로 평소보다 높은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빨간 명찰’을 달았다. 해병대 관계자는 “다른 기수보다 자부심과 전우애가 남달랐다.”고 전했다. 외할아버지와 친·외삼촌 등 가족 5명이 해병대 출신인 한국인(22) 병장은 “해병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뤄 기뻤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해 가슴 뿌듯하다.”면서 “사회에 나가서도 지난 2년간 동고동락한 해병 1000기 전우들과 함께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00명으로 1기를 탄생시킨 이후 이날 1000기를 탄생시켰다. 해병 예비역은 일반병 63만여명, 간부 20만여명 등 모두 83만여명이다. 현재는 1048기가 교육훈련단에 입소해 무적 해병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있다.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목포서 뱃길로 233㎞…서해 끝 ‘가거도’

    목포서 뱃길로 233㎞…서해 끝 ‘가거도’

    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 했다.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떠 있는 섬, 가거도(可居島). 일제강점기때는 ‘소흑산도’라 불렸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라는 어엿한 행정구역명을 갖고 있다. # 시원한 곳 따뜻한 곳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145㎞, 뱃길로는 233㎞ 떨어져 있는 절해의 고도. 쾌속선으로 내쳐 달려도 4시간 30분은 족히 걸린다. 가거도항 선착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성벽처럼 둘러쳐진 방파제다. 국내 항만공사 사상 최장기간인 28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공사비만도 1325억원. 쌓으면 부숴버리는 파도,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세운 대역사의 현장이다. 가거도에는 여름에 시원한 마을과 겨울이 따뜻한 마을이 있다.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민가는 물론, 학교와 상점, 숙박업소 등이 가거 1구에 밀집돼 있다. 망추개와 콩돌해변, 달뜬목 등 둘러볼 곳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름답기로는 역시 여름이 시원한 가거 2,3구가 한 수 위. 국내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성견여를 향해 헤엄쳐 가는 악어 모습의 가거 2구 풍경은 단연 압권이다. 분지형태의 섬등반도위로 황로, 백로가 염소들과 희롱하고, 섬 중턱의 폐교너머로 솟은 기암절벽에는 파도가 쉼없이 제 몸을 부순다. 찬탄을 금치 못할 절경이다. # 가거도 최고의 전망대 하늘별장 일주 도로는 없지만, 섬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는 등산로는 잘 개발돼 있다. 특히 2구에서 등대로 향하는 트레킹 코스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 물새들의 천국 구굴도와 성건여 등 가거도의 비경들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코스다.1구쪽에서는 망추개와 달뜬목 등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개발하고 있다. 섬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독실산(639m)에 올라야 한다. 산세가 우람해 오를수록 웅장한 느낌을 준다. 독실산 정상의 ‘하늘 별장’은 경찰 레이더 기지의 별칭이다.2005년 9월부터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맑은 날엔 제주도까지 관측되는 최고의 전망 포인트. # 사람만 사나? 물고기도 산다 사람이 살 만하다면 물고기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가거도에서 정서쪽으로 43㎞ 떨어진 ‘가거초’일대는 그야말로 황금어장을 이룬다. 물속에 숨겨져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가거도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맘때면 농어·돌돔, 여름과 가을엔 부시리, 겨울에는 감성돔 등 고급 어종들이 찾아든다.‘열기’라고도 불리는 불볼락은 무시로 잡힌다. 그래서 해마다 1만여명에 달하는 낚시꾼들이 가거도를 찾는다.1만 5000원에 낚싯대를 대여해 주는 곳도 생겨났다. # 선상관광도 해볼만 홍도 못지않다는 가거도 해안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역시 배를 타야한다. 가거항 선착장에서 회룡산과 장군바위 사이를 빠져 나가면 곧바로 기암괴석들이 줄을 선다. 군대 연병장에서 사열이라도 받는 듯하다. 녹섬, 돛단바위, 섬등반도, 납덕여, 망부석(모녀바위), 검은여(손가락바위), 개린여, 칼바위, 빈주암, 남문 등 작은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어선이나 낚싯배를 빌려타는데 1인당 2만∼3만원 정도 받는다.6∼10명 내외의 인원이모이면 출항한다. 글 사진 가거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만재도&가거도 이것만은 꼭 챙기세요!! # 가는 길 목포항 여객터미널에서 매일 아침 8시에 출항한다. 가거도까지 어른 4만 6550원, 어린이 2만 3300원. 만재도는 어른 4만 3050원, 어린이 2만 1550원. 여름철 성수기(7월 15일 예정)에는 10%의 특송료가 부과된다. 목포로 올 때는 여객터미널 이용료 1500원이 면제. 동양고속 www.ihongdo.co.kr(061)243-2111∼4. 남해고속 namhaegosok.co.kr(061)244-9915∼6. 만재도까지 곧장 가는 관광선도 있다. 최규환 만재도 이장(011-1774-8654)이 연결해 준다. 목포와 진도에서 각각 출발한다. # 잠잘 곳 가거도는 가거 1구에 숙박업소들이 몰려 있다. 방당 민박 2만 5000원, 여관 3만원선. 여름철 성수기엔 가격이 다소 오른다. 만재도 ‘만재콘도’는 총 4실 규모.4인기준 8만원.1인추가 1만원. 단체가 묵을 수 있는 노인회관도 개방할 예정. 가격미정. 낚시인들을 상대로 5가구에서 민박을 운영한다. # 먹거리 대부분 식당에서 회와 해산물을 주로 판다. 모두 자연산이라는 것이 강점.㎏당 1만∼2만원선. 가거항입구 둥구횟집(010-2929-4989) 등이 유명하다. 목포시 옥암동 ‘인동주마을’은 ‘인동주’와 홍어삼합, 꽃게장 백반으로 유명한 곳.4명이 먹을 수 있는 한상차림에 3만원. 홍어삼합은 무료로 추가.(061)284-4068. # 알아둘 만한 전화번호 신안군청(tour.sinan.go.kr) 문화관광과 (061)240-8360∼5. 흑산면사무소 가거도출장소 246-5400. 흑산면사무소 275-9300. 남성낚시 246-4070,(011)9415-0117. 경진낚시 246-4534,(010)4662-4534.
  • 월남에 올땐 아가씨 팬티를

    월남에 올땐 아가씨 팬티를

    <서울신문사 초청 파월 모범용사> 상병·김영빈(金榮彬·백마 28연대) 중사·김영수(金榮洙·공군지원단) 중사·안용수(安龍守·맹호기갑 12중대) 하사·이석열(李錫烈·청룡2201부대) 병장·탁정철(卓正哲·백구810함) 게스트·중령 여운건(呂運虔·주월사령부) 매복작전때 갈증 못참아 오줌에 코피 타 마셨더니 여=우리 모범용사 1백명을 금년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초청해준 서울신문사에 우선 감사의 뜻을 드리고-. 여러분들은 전부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유공장병들이니까 그간 월남에서 겪은 얘기가 많을텐데 이걸 한번 털어 놓으라 이 말씀인가 본데….(웃음) 안 =우리야 싸우는 군인이니까 전투 얘기 빼놓으면 말짱 헛것 아닙니까?(폭소) 우선 내가 겪었던 전투 경험담 하나를 털어놓지요. 번개1호작전 때 며칠을 매복,「베트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이거 통 나타나야지요. 날은 덥지요, 가져갔던 물은 다 떨어졌지요. 할 수 있읍니까? 오줌을 받아 가루「코피」를 타 마셨더니 맛이 찝질씁쓸한게 묘하더군요.(폭소) 「베트콩」몇놈을 꼭 잡아가야 체면이 서겠는데 이놈들이 떨었는지 영 나타나지 않더니 얼마후 그래도 재수가 좋으려고 1개중대가 쓱 나타나더군요. 숫적으로는 우리가 분대 병력인데 저쪽은 중대병력이니 터무니없이 모자라지만「베트콩」쯤이야. 그대로 갈겼더니『따이한이다』하면서 혼비백산 도망가더군요. 5명밖에 못 잡았어요. 이=저도 하나 얘기 하지요. 승룡12호 작전때 입니다.「고노이」섬 탈환을 위한 작전이었는데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앞만 보고 돌진하다가 엄폐물에 몸을 탁 의지하는 순간, 보니까 여자「베트콩」이 옆에 있지 뭡니까. 나도 모르게 그대로 갈겼지요. 한발 늦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얼굴도 삼삼하게 생겼더군요. 여=그런줄 알았으면 포로로 하지 그랬어?(폭소) 김수=도깨비작전 17호때 우리 소대원이 적 12명을 사살, 많은 장비를 노획했는데 장교놈 가방에서 비밀문서 한통을 발견, 펴 보았더니『한국군과는 되도록 전투를 하지말라. 한국군을 만나면 즉시 피해라』는 지령문서였어요. 여=그건 사실이야. 내가 상황실에서 오래 근무해서 잘 아는데 저놈들이 우리와 싸워 단 한번이라도 이겨본 일이 없으니까 되도록 우리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가는 얘기야. 탁=그런데 확실히 월남이 더운 지역이더군요. 우리배 갑판에 계란을 깨놓으면 금새「후라이」가 됩니다.(웃음) 이=거 불이 필요없어 좋겠군. 탁=한번은 우리가 배를 쥐고 웃은 일이 있읍니다. 고국에서 위문품이 왔는데 털장갑이 들었어요. 작년「크리스머스」때니까 아마 국민학교 어린이들 생각엔 월남의 군인아저씨도 겨울을 맞을줄 알았던가 보지요.『국군아저씨 추운데 얼마나 고생 하십니까』하는 편지와 함께 말입니다.(폭소) 몇달만에 본 서울 발전과 예뻐진 아가씨들에 놀라 여=이젠 우리 화제를 바꾸어「에피소드」같은거 얘기해 볼까요? 우선 나부터 하라면 무엇보다 월남에선 미군들이 우리 앞에서 꼼짝 못한다는 것인데 나와 같은 방에 있는 미군장교가『너희 한국군은 어쩌면 그리 강하냐?』고 하면서 이 친구, 외출때는 꼭 같이 나가자는거야. 왜냐고 했더니 한국군과 다니면 월남인들이 깔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웃음) 김빈=뭐니뭐니 해도 여자 또한 한국여자가 세계 제일입니다. 월남여자 말도 마세요. 비쩍 마른게 냄새는 어찌 그리 나는지 눈까지 피로하게 합니다.(폭소) 여=김상병은 이번 휴가에서 여자들만 쳐다보고 다녔겠군? 김빈=사실입니다. 쭉쭉 뻗은게 몇개월만에 와서 보니까 더 예뻐들 졌더군요.(웃음) 여=월남에 우리 위문단이 오면 정말 신나지. 한국노래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요. 이=지금 그말 하니까 생각 나는게 있는데 군인이 싸울때 여자「팬티」를 몸에 지니면 재수가 좋다고 하잖아? 그래서 우리 위문단 아가씨들 보고 속옷을 달라면 잘 주지요. (웃음) 앞으로 월남 위문 오는 아가씨들은 각별히「팬티」많이 가지고 오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여=이번엔 조국에 돌아와서 느낀 점을 얘기해볼까. 참 많이 달라졌지? 김빈=아이고, 말도 마세요. 우리도 잘 싸우지만 국민들도 놀라도록 발전을 이룩하고 있더군요. 아이구 건물들이 무척이나 섰더군요. 김수=나는 그것보다 말로만 듣던 청와대를 구경했으니 군대 와서 출세 톡톡이 한 셈입니다. 더구나 대통령각하와 악수까지 했으니 영광치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탁=나는 대통령께서 화려하게 사시는 편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청자아닌 신탄진 담배를 태우시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안=『이거 우리 국산담배인데 하나씩 태워봐 맛이 좋아』하시면서 담배를 권하시는데 대통령께선 국산품을 상당히 애용하시더군요. 여=보급품은 어떠냐? 애로는 없느냐? 요새 월남은 우기가 아니냐?는등 정말 자상하게 걱정을 해주시어서 고개가 숙어졌읍니다. 김수=또 전공담을 일일이 다 물으시면서 요새 국내 일부선「콜레라」병이 도니 음식에 각별히 주의 하라고 까지 당부하시더군요. 아버지 같은 인상이었어요. 김빈=머리가 많이 하얗게 새셨더군요. 아마 나랏살림에 걱정이 많으신 때문인가 보지요? 여=이 기회에 우리의 가족들이 월남에 가있는 우리 걱정이 대단할 텐데 실정을 솔직이 말해보지. 우리는 오히려 고국걱정 아가씨 편지 부탁합니다 안=자식은 그저 걱정덩어리인가 보지요? 배나 곯지 않느냐고 편지가 자주와요. 사실 음식이야 먹기싫어 안먹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웃음) 김수=고기엔 이제 신물이나 있는데 그걸 여기선 모르는가보지. 김빈=그리고 전쟁하는 곳이니까 위험한 곳인줄 아는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편히 있을때 죽지나 않았느냐는 식의 편지를 받을땐 도리어 죄송하기까지 하다니까요. 이=그저 바라고 싶은건, 아가씨들의 위문편지나 잔뜩 보내주었으면 제일 좋겠어요. (웃음) 여=사실 월남에 가 있는 우리가 고국 걱정이 더 한것 같아. 폭우다, 화재다, 하는「뉴스」를 들을 때마다 집안 걱정이 크잖아. 그저 국내에 있는 가족들이나 잘들있어주었으면 좋겠어. 탁=그건 사실입니다. 안=그런데 요새 월남에선「오토바이」도둑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여=그건 수입품에 갑자기 세금을 많이 올려「오토바이」없으면 다니지 못한다는 월남에서 값이 뛰어오르니 도둑이 늘 수밖에 없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없어지지. (웃음) 이=그러나 저러나 이번에 가면「베트콩」한 백명쯤 잡아 내년에 또 와야겠어요. 아 칙사대접 받는 기회를 놓칠수 있읍니까? 탁=이러다간「베트콩」많이 잡기내기 벌어 지겠는데요? (웃음) 여=이번에 돌아가면 모국의 발전상을 전우들에게 알리도록 하자. [선데이서울 70년 10월 4일호 제3권 40호 통권 제 105호]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때문에 양자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한, 조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8년(광해군 10)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함락시킨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병 여부를 둘러싼 갈등 명은 관응진(官應震) 등이 주장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에 따라 조선도 병력을 내어 후금을 공략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왕가수(汪可受)는 조선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병력을 뽑아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요청했다. 형식은 요청이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명의 통첩을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확연히 갈라졌다. 광해군은 파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먼저 조선의 군사적 역량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교시(敎示)에서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봤자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 수천명 정도를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사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국경 바깥으로 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명의 원정군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동안 후금 관련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자 판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 속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다시 생각하여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명에 보내는 서신에 명에 대해 ‘충고’의 성격을 담은 문구를 삽입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조선은 소방(小邦)이자 명의 번국(藩國)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저 명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또한 ‘명은 조선에 부모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 뻔했을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베풀었다.’며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자식’의 처지에서 ‘은혜를 베푼 부모’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려 노력해야 할 뿐, 자신의 강약(强弱)이나 처지를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조차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굴레가 돼버린 再造之恩 ‘명이 재조지은을 베풀었고, 조선은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 지배층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왜란 초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나라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한줄기 ‘복음’이었다. 더욱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가 역전되면서부터 ‘재조지은’은 조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지고(至高)의 은혜’로 굳어졌다. 아예 ‘임진왜란’을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인물조차 등장할 정도였다. 비록 명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조지은’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같은 분위기를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의 역할 덕분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역할은 평가절하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두개의 적과 맞서야 했다. 하나는 일본군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선조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수록,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선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제치고, 정곤수(鄭崑壽)를 1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책봉했다. 그가 명군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곽재우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조선군 영웅들의 위상은 낮아지고, 선조의 실추된 위상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조선 내부의 그 같은 분위기에 반색했다. 푸순성 함락 이후 등장한 ‘주요석획(籌遼碩)’에서 요동을 수복하는 데 조선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내세운 논리는 거의 똑같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변변찮은 조선을 도왔다.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신료와 명의 지식인을 막론하고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있던 분위기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에 ‘혈기를 갖고 있는 조선 백성은 누구라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문장을 잘 다듬을 것을 지시했다. 외교를 위해 겉으로라도 ‘재조지은’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되다 ‘재조지은에 보답하려면 출병하라.’는 안팎의 공세에 맞서 광해군은 외교적 ‘카드’를 총동원했다. 광해군은 먼저 조선에 출병하라고 요청한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문을 보낸 왕가수는 명의 신료일 뿐, 황제가 아니므로 번국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명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사신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보냈다. 황제에게 조선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조선은 아직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을 동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 조정은 후금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총괄할 경략(經略)으로 양호(楊鎬)를 낙점해 랴오양(遼陽)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조선 사정에 밝았다. 양호는 조선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신 왕래를 통해 요행을 바란다고 질책했다. 광해군은 양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파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양호는 조선 사신 박정길(朴鼎吉)에게 “북관과 연락하고 조선을 고무하라.(聯絡北關鼓舞朝鮮)”는 문구가 담긴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북관’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금에 밀리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양호는 또한 당시 요동지역에 ‘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3000명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을 들어 협박했다. 박정길 일행은 양호의 협박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 영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1618년 10월.‘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는 데 협조하고, 양호의 지휘를 받으라.’는 내용의 명 황제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광해군의 입장에 반대했던 비변사 신료들은 힘을 얻었고, 출병하라는 채근 또한 더 심해졌다.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된 처지에서 광해군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을 통해 떠오른 ‘재조지은’은 17세기 초에도 조선 정치와 외교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이젠 포스트 BRICs] (11) 태국(상)

    [이젠 포스트 BRICs] (11) 태국(상)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태국 방콕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수완나품 국제 신공항은 지난해 9월28일, 아시아 허브 공항을 꿈꾸며 문을 열었다. 터미널 내부 면적은 56만㎡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관제탑은 132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지난달 22일 도착한 공항은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고압선이 뒤엉킨 천장은 머리에 닿을 듯 낮고, 회색 콘크리트 벽에는 크고 작은 금이 가득했다. 면세점이 빼곡하게 들어선 터미널 복도는 너무 좁아서 오가는 사람과 부딪치기 일쑤였다. 연간 처리 승객 수가 4500만명이라는데 화장실에 대변기칸은 3∼4개뿐이다. 어린이 화장실이나 수유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몇 개월 만에 활주로와 유도로에 균열(100여곳)이 생겨 국내선 항공편은 40㎞ 떨어진 돈무앙 공항으로 옮겼다. 태국 국민들은 수완나품 공항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권력남용·부패의 상징”이라고 꼬집었다. ●수출·관광 등 대외부문이 성장 이끌어 인구 6423만명(세계경제 2005년)이 한반도 면적의 2.3배(51만 4000㎢)에 모여 사는 태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9월19일 18번째 군사 쿠데타가 발생, 손티 분야랏끌린 육군 총사령관이 부정부패와 국왕 모독 혐의로 탁신을 국외로 추방했다. 경제에도 짙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지난해 태국의 경제성장률은 5%.1분기는 6.1%로 출발이 좋았지만 5%(2분기),4.7%(3분기),4.2%(4분기)로 계속 떨어졌다. 게다가 연간 성장률도 2003년(6.7%),2004년(6.3%)에 비해 크게 둔화된 상태다. 올해는 3.8∼4.8%로 성장률이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국가경제사회개발원(NESDB)은 지난해 태국의 국내총생산(GDP)을 2061억달러,1인당 국민소득(GDP 기준)을 3179달러로 추정했다.“국내소비·투자 등 내수가 계속 부진한 상황에서 수출·관광 등 대외부문이 성장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외국인 투자규모 38.3% 감소 시장경제에 반하는 과도정부의 외환규제조치,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도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지난해 말 수라윳 쭐라논 과도정부가 밧화의 평가절상을 막겠다며 외국자본 규제책을 발표하자 외국자본 230억달러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증시가 15% 폭락했다. 놀란 정부는 규제책을 두 달 만에 폐지했다. 올 초에는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다. 외국인 투자자가 태국 주요 기업의 소유 지분이나 주주총회 의결권을 50%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제한 업종은 신문 TV 쌀농사 천연자원 부동산 법률 등이다. 개정안은 태국 의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다. 코트라(KOTRA) 주덕기 태국 무역관장은 “탁신 전 총리가 통신회사인 친코퍼레이션 지분 49.6%를 싱가포르 국영투자회사(테마섹 홀딩스)에 매각하자 국민들이 자국내 기반시설을 외국에 팔아넘겼다며 분노했다.”며 개정안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결국 지난해 외국인 투자 규모는 81억 1100만달러로 전년보다 38.3% 감소했다. ●국왕 중심의 삶… 월요일마다 노란 물결 월요일이면 방콕 거리는 노란 물결로 넘실거린다. 아이들도, 직장인들도 노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악마와 닮았다. 우리가 축구를 위해 붉은 옷을 입었다면, 그들은 푸미폰 아둔야뎃(80) 국왕을 위해 노란 옷을 선택했다. 지난해 즉위 60주년을 맞은 국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국왕을 존경하는 마음을 노란색에 담았다.16년간 태국에서 산 이민 1.5세대 박창수씨는 “국왕이 그려진 지폐를 꾸기지 않도록 교육받을 만큼 태국 국민은 국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국왕은 태국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에 국왕이 살아 있는 한 정치 불안이나 경제 둔화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경제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오히려 숨고르기가 끝나면 태국이 더 높게, 더 멀리 비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태국투자청(BOI)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은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태국의 ‘열린 경제’ 정책은 흔들림이 없다.”면서 “호주·일본에 이어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마무리해 동남아시아 수출·생산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국은 지난달 일본과 FTA를 공식 체결해 앞으로 10년 동안 태국은 철강, 자동차부품, 전기·전자제품 등의 관세를, 일본은 농수산품 등의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특히 태국은 자동차부품에 대한 관세를 5년 이내에 없애 ‘아시아 디트로이트’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갈 방침이다. 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매년 20∼25% 늘어나 180만대(세계 10위)에 육박한다. 수출이 40%를 차지, 수출액이 100억달러에 달한다.10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전혀 수출하지 못했던 이 나라가 호주, 아세안(ASEAN) 회원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자동차 수출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미국의 관세 25% 벽도 FTA 체결로 무너뜨릴 계획이다. 국가경제사회개발원 타닌 파엠 고문은 “올해는 정치 불안으로 경제가 다소 침체되겠지만, 내년부터는 자동차·정보통신·연구개발 등 고부가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jung@seoul.co.kr ■태국사람들 외국기업에 거부감 없어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태국 시장의 매력은 무엇인가. 국가경제사회개발원(NESDB) 타닌 파엠 고문과 태국투자청(BOI)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 코트라(KOTRA) 주덕기 태국 무역관장의 입을 통해 태국 시장의 특징을 살펴본다. 태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가운데 자유무역협정(FTA) 등 시장개방과 국제교역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다. 면적 450만㎢, 인구 5억 3000만명의 거대한 아세안 시장이 태국을 통해 무역개방의 길로 나가는 셈이다. 게다가 이 나라는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미개척 시장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주덕기 무역관장은 “외국 자본 유치에 막 눈을 뜬 주변 국가들이 태국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태국어를 비즈니스 언어로 사용하고, 태국통화인 밧화로 결제한다. 주변 6개국이 참여하는 ‘메콩강 유역 개발계획(GMS)’ 프로젝트에서 태국이 중심축을 맡고 있다. 국가경제사회개발원 타닌 파엠 고문은 “베트남·인도네시아에 비해 태국은 산업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1860년대부터 발을 내디딘 덕택에 선진적인 공항·도로·항만·철도·통신망이 도입됐다는 설명이다. 도로 25만㎞ 가운데 국제적인 고속도로가 40%를 웃돌고 방콕과 주변 도시를 잇는 내부순환도로도 225㎞에 달한다. 항구 122곳의 연간 처리실적은 450만TEU(1TEU는 20pt짜리 컨테이너 1개)이다. 방콕의 상습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20㎞)과 지상철(55㎞)도 놓았다. 지반이 약해 지하철 건설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해냈다. 국제학교와 의료시설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태국은 식사할 때 포크와 숟가락을 사용한다. 손으로 음식을 먹던 태국인들이 동·서양에서 필요한 식기류를 하나씩 받아들인 것이다. 태국투자청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은 “포크와 숟가락은 다른 문화를 포용하지만, 독자성을 잃지 않는 우리 문화를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1,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한 비결이기도 하다. 다른 것에 관대한 태국인들은 외국인, 외국 기업에 거부감이 없다. 일본이 태국을 동남아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한 이유다. 최근 프리미엄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독특한 문화 덕분이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데도 상류층은 맘껏 소비하고 서민층은 이를 지탄하지 않는다. ejung@seoul.co.kr ■크리륵크라이 지라파엣 상업장관 “편법경영 제동일 뿐 투자 배척 아니다”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은 태국의 뿌리를 지키려는 노력이다. 외국인 투자를 배척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지난달 24일 태국 수완나품 국제 신공항에서 만난 크리륵크라이 지라파엣 상업장관은 전쟁을 앞둔 장군처럼 결연했다. 과도정부에서 장관으로 승진한 그는 국내외 신망이 두터운 경제통이다.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무역기구(WTO)와 관광부 차관, 상업부 차관을 지내며 명성을 얻었다. 그런 크리륵크라이 장관이 올해 초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을 제안해 외국 투자가의 눈총을 받고 있다. 그는 “핵심은 만연한 불법행위를 바로잡는 것인데 언론이 ‘국수주의’라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태국 외국인 기업법은 외국인 참여 영역을 3개 그룹으로 분류한다.1그룹은 치안·환경·무기매매·광고·출판·신문·부동산 거래 등이며 외국인의 지분이 50%를 넘지 못한다.2그룹은 회계사·건축사·법률업 등 16개 전문직종으로 관련 부처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3그룹은 100% 외국인 지분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행, 편법적으로 외국인 투자가 모든 업종에서 이루어졌다. 외국인이 현지인을 고용해 기업을 설립하고 소유지분을 50% 미만으로 보유하는 대신 주주총회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을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크리륵크라이 장관이 이 편법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는 “더 이상의 불법은 허용하지 않는다.(개정안이 시행되면)소유 지분이 50%가 넘는 외국인 투자가는 1년 안에 주식을 매각해야 하고, 의결권이 50%를 넘는 외국인 투자가는 2년 안에 의결권을 그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50% 제한은 국가 안보나 천연자원, 태국 문화와 관련한 기업에만 국한된다.”면서 “이는 국제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개정안은 태국 의회의 심의를 거쳐 오는 12월쯤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태국은 다국적 기업과 공존해 왔다. 풍부한 노동력과 관대한 문화, 맛있는 음식이 태국 시장의 장점이다. 이 매력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jung@seoul.co.kr
  • 아프간 탈레반 최고위 사령관 사망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최고위 사령관인 물라 다둘라가 남부 지역에서 다국적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고 BBC방송 등 외신들이 13일 전했다. 물라(Mullah)는 이슬람권에서 ‘신성한 법칙을 가르치는 자’로 ‘스승’을 뜻하는 호칭이다. 다둘라 사령관은 탈레반 지도자 10명 안에 드는 최고위이자 2001년 탈레반 정권 붕괴 후 숨진 반군 지도자로도 최고위급이다.BBC는 다둘라 사령관이 전투 중 숨졌으며 그의 시신이 아프간 칸다하르시로 옮겨졌다고 전했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 미국이 수배중인 최고위 테러리스트 중 1명이다. 그에게는 지난 2월 다산부대 윤장호 병장이 숨진 미군 바그람 기지 폭탄테러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됐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서해교전 전사자 이름 차기고속정 함명 검토

    해군이 차기고속정(PKX) 1번함에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장병의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해군 관계자는 7일 “차기고속정 사업은 서해교전 때 침몰한 구형 고속정을 대체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당시 숨진 장병 6명의 이름을 붙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밝혔다.이 관계자는 그러나 “1번함에 고 박동혁 병장의 이름을 붙일지, 고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붙일지는 세부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해군은 이달 중순까지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다음달 진수되는 차기 고속정 1번함은 시험평가를 거쳐 내년쯤 실전 배치된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실종장병 유가족들 ‘눈물의 청와대오찬’

    실종장병 유가족들 ‘눈물의 청와대오찬’

    동티모르 실종장병의 가족이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정부의 무성의한 후속조치에 분통을 터뜨리며 오열했다. 노 대통령이 2일 군 작전과 해외파병 임무수행 중 순직한 장병의 유가족 22명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였다. 노 대통령은 “위로를 드리려고 모셨는데 너무 엄숙해서 말을 못하겠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이어 참석자 대표로 마이크를 잡은 동티모르 파병중 실종된 김정중 병장의 형 하중씨는 “대통령 내외분께 몇가지 묻고 싶다.”면서 “동생의 시신을 아직도 못찾고 있는데 시신을 찾고 있는 건지, 조치가 있는 건지 동생이 죽고 나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부모님은 명절만 되면 눈물로 지새우는데 국방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김씨는 “꼭 답변을 해달라. 미국은 돈을 들여 6·25 전사자 시신까지 찾는데 동생 시신을 찾지는 못할망정 이렇다 저렇다 말씀을 해 주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호소했다. 하중씨가 말을 잇는 동안 옆자리의 모친 장홍여씨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배석했던 김장수 국방장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침통한 표정 속에 김씨의 말을 메모한 노 대통령은 “유가족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예비군 ‘양심적 훈련거부’ 위헌 제청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형사처벌의 정당성을 판가름할 책임이 또다시 헌법재판소에 맡겨졌다. 울산지법 형사5단독 송승용 판사는 지난달 18일 종교적 양심에 따라 예비군 훈련에 불참한 혐의(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로 기소된 신모(24)씨 사건을 재판하면서 “예비역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형사처벌하는 법률 규정은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위헌 법률 심판을 제청했다고 1일 밝혔다. 신씨는 2005년 8월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어머니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신씨는 2006년 9월 예비군 훈련 통지서를 받고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훈련에 불참,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번에 위헌 제청된 향토예비군설치법 15조8항은 ‘정당한 사유없이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은 경우 1년 이하의 징역,2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송 판사는 “향토예비군설치법은 형사처벌이라는 제재를 통해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하고 있어 양심 실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말했다. 이어 “입법자가 병역의무의 이행을 강제하면서 사회적 소수자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갈등을 해소해 조화를 도모할 최소한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면서 “신씨와 같은 경우에는 국가 형벌권이 한 발 양보해 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보다 더 존중되고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헌재가 2004년 8월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호할 수 있는 대안 마련을 권고했는데도 2년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법적인 보완 노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라면서 “헌재는 더 이상 막연히 입법부의 노력을 권고하거나 기대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런 법률 조항에 대해 과감한 위헌 선언을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20&30] ‘3분의 위안’… 내 마음의 비타민

    [20&30] ‘3분의 위안’… 내 마음의 비타민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젊은 영혼들의 영원한 주제가다. 누구나 삶이 괴롭고 고단할 때, 혹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힘이 돼 주는 노래 한 곡쯤은 있다. 요즘 ‘20&30’들의 삶의 나침반을 끌어당기는 노래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노래는 고단한 삶의 동반자 최모(32·여)씨는 캐나다에 온 지 얼마 안 돼 오랜 연인과 이별했다. 최씨는 이민을 원했지만 남자친구는 한국에서 살기를 희망했던 것. 낯선 타향에서의 향수병과 이별의 고통까지 겹쳐 길고 춥기로 유명한 토론토의 겨울은 정말 길게 느껴졌다. 이때 우연히 한인 타운의 술집에서 들은 노래가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부른 ‘봄이 오면’이었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봄이 오면 연둣빛 고운 숲 속으로 어리고 단 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최씨는 “CD를 구해 듣고 또 들으면서 봄이 오면 나는 뭘 하고 싶은 지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 나갔죠. 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별의 아픔과 겨울의 시림, 외국 생활에서 오는 향수도 극복할 수 있었어요.”라면서 지금도 봄이 오면 이 노래를 즐겨 듣는다고 털어놓았다. 회사원 김모(27·여)씨의 동반자는 윤상의 3집 앨범에 실려 있는 ‘달리기’다. 어학연수 갔을 때 김씨는 한여름 집에서 역까지 30분 거리를 돈을 아끼기 위해 걸어 다녀야 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그늘도 없는 고통스러운 거리였지만 속으로 ‘달리기’를 흥얼거리면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1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이란 가사가 마치 인생의 진리처럼 느껴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대학생 장모(29)씨의 MP3에는 언제나 바뀌지 않는 노래가 있다.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이다. 장씨가 제대하고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한 평이 조금 넘는 고시원에 틀어 박혀 책과 씨름하던 2002년 주위는 온통 월드컵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당시 단과학원 선생님은 “너희가 지금은 맘 놓고 월드컵도 보지 못하는 재수생 신분이지만 4년 후에는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힘내라.”고 했지만 장씨에게는 되레 비수가 됐다. 군대에 가기 전인 98프랑스월드컵 때 다니던 재수학원 선생님이 같은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울적했던 장씨는 혼자 맥주를 마시며 손바닥만 한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이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이었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장씨는 “성난 파도 아래 깊은 곳에 한 번만이라도 이르기 위해 외롭게 헤엄치며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가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죠. 지금도 힘든 일을 마주할 때면 처음 ‘민물장어의 꿈’을 들으며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고 힘을 얻습니다.”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프로골퍼 허모(30)씨는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를 들으면 축 처진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이야/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란 가사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체육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골프를 늦게 시작한 그가 클럽을 내던지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노래를 듣고 힘을 냈다.“조금 늦었지만 결국에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이 생깁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놓은 노래 초등학교 교사인 강모(28)씨가 교직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영어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학생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줘 인기가 많았던 영어 선생님이 “너희는 공부를 왜 하니?”라며 ‘화두’를 던졌다. 이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강씨는 “그때야 그냥 남들이 하니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을 뿐이죠. 특별한 공부의 목표를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던 시절이니까요.”라고 떠올렸다. 그때 선생님은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he troubled water)’를 들려 주셨다. 강씨는 “선생님께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험한 물결 위의 다리처럼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을 도와 주기 위해 공부했고, 교사가 됐다.’면서 ‘너희들도 무슨 일을 하든 험한 물결 위의 다리처럼 되기 위해 공부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죠.”라고 회상했다. 결국 강씨는 교대에 입학했고 지금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인생의 징검다리를 놓아 주고 있다. 최모(29·회사원)씨가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찾아 듣는 노래는 천지인의 ‘청계천 8가’다. 대학 1학년 때 동아리 선배가 기타를 치며 가르쳐준 이 노래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민중가요였다.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로 시작해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로 끝을 맺는 가사는 세상에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줬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던 내 시야를 넓게 만들어준 셈이죠.”라고 최씨는 고백했다. 그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뱃심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어쩜 그리 내 상황과 똑 같은지’ 누구나 한 번쯤 유행가 가사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있을 법하다. 요즘 젊은 술꾼들에게 사랑을 받는 노래는 남성 듀엣 바이브의 ‘술이야’다. 시스템 통합(SI) 업체에 근무하는 김모(31)씨는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란 부분은 정말 딱 저랑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내 생활을 그대로 담은 노래 같아 좋아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장난처럼 불렀는데 점차 가사처럼 술에 찌들어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합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회사원 오모(30)씨는 싸이의 ‘연예인’ 덕분에 결혼까지 이르렀다. 지난해 여름 세 살 어린 신부를 맞이했는데 연애할 때부터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게요.’란 가사에 힘을 주어 불렀다고 한다. 오씨는 “지금도 내 마음은 그 노래 가사처럼 평생 아내를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도 가끔 둘이 같이 노래방에 가면 항상 이 노래를 불러 주곤 하는데 아내도 너무 좋아합니다.”라고 수줍게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광석 노래의 힘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최루가스에 녹다운된 대학생들은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를 부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먼지 구덩이 연병장을 구르던 이등병은 그의 노래 편지를 받고 찔끔거렸다. 어설픈 사랑에 가슴 찢어진 청춘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며 통곡했다. 고 김광석.‘서른 즈음’이던 32세의 나이로 먼 길 떠난 지 11년. 그의 이름 석 자와 그가 토해낸 노랫말을 사람들은 왜 아직도 잊지 못할까.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김광석의 이야기’ 회원들로부터 그의 노래에 대해 들어 봤다. 아이디 ‘msk204’는 “형의 노래는 삶이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의 노래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 삶 자체가 됐기 때문이다. 김광석처럼 사람들의 인생에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가수도 흔치 않다. 아이디 ‘09zzz’는 “대학 1학년 때 대학로 ‘학전’에서 처음 광석 오빠의 콘서트를 본 후 오빠가 떠나기 전까지 마치 중독처럼 콘서트를 다녔던 때가 늘 그립다. 마치 대화를 하는 듯한 작은 소극장 안에 웃음과 눈물이 가득 고일 때면 광석 오빠와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랑하는 이와 한 하늘 아래 살아 간다는 게 참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도 김광석이 떠난 뒤부터는 누구의 콘서트에도 가본 적이 없다. ‘햇살나무’는 군대 이등병 시절 훈련 복귀 도중 선임병이 노래를 시켰던 때를 기억했다.“고민하다가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1절을 부를 때는 혼자였는데,2절을 부를 때는 동행했던 선임병이 따라 불렀고,3절을 부를 때는 트럭 안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들이 같이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병사들 모두는 가슴에 품고 있던 초코파이를 하나씩 꺼내 내게 줬다.” 김광석이 살았다면 43세.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던 이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그의 노래를 들어도 눈물나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지만, 사람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보내지 못할 듯하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충남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는 가야산(677.6m)은 경남 합천 가야산(1430m)에 비해 높이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주변 열 고을을 거느리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 개심사·일락사·보원사지 등의 문화유산, 그리고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불리는 명당 남연군묘를 품고 있어 합천 가야산에 비해 무엇 하나 꿀릴 게 없는 명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 있다고 적고 있다. 내포란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지방과 태안·아산 일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포 지방이 배출한 인물에 주목했다.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충무공 이순신, 추사 김정희, 의병장 최익현,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개화당 김옥균,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걸출한 이 모든 인물들이 놀랍게도 내포 출신이다. 저자는 그들이 충청도 특유의 느리고 온화한 성품이 아니라 소위 ‘깡’이 센 사람들로 가야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분석했다. 가야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바다가 가까워 일단 능선에 붙으면 내륙의 1000m 넘는 산이 부럽지 않고, 석문봉에서 바라보는 서산 간척지 너머 서해안 일몰이 특별한 장관을 이룬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지천이고,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산행 후에는 덕산면의 온천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점도 큰 매력이다. 가야산 들머리는 크게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덕산 상가리를 들머리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가야산의 최고봉인 가사봉 정상은 각종 중계기지가 들어차 출입금지 지역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꾼들은 가야산의 실질적인 주봉인 석문봉에 올랐다가 가사봉에 들르지 않고 하산한다. 서산 운산면 용현계곡을 들머리로 하면 마애삼존불∼수정봉∼옥양봉∼석문봉∼상가리 혹은 보원사∼일락산∼석문봉∼상가리 종주산행을 즐길 수 있다. 상가리 가야산 주차장은 국립공원만큼 넓지만 주차비를 받지 않아 좋다. 이곳에 차를 세우면서 산행은 시작된다. 주말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주차장이 가득 찬다. 예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야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등산객은 중·장년층이 많은데, 산행이 어렵지 않고 산행 후에는 뜨끈한 온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에 이르는 약 7.5㎞ 코스는 3시간 30분이 걸리는 원점회귀 코스다. 가야산은 등산 시작 지점과 끝이 꼭 일치해 자가용을 이용해 접근할 경우 편리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석문봉은 가사봉에 비해 24.6m 낮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야산의 주봉 대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연군묘가 가사봉이 아닌 석문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었고, 지금은 가사봉이 출입통제 구역이라 역시 석문봉이 주봉이 되었다. 이영준 월간 MOUNTAIN기자 # 여행정보 운산면 용현계곡은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보 서산마애삼존불, 사적 보원사지 등이 대표적인데 예전에는 계곡 일대가 전부 보원사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당간지주,5층 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비가 남아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상가리 쪽에는 남연군묘를 빼놓을 수 없고, 주차장에서 오른쪽 길로 10분 걸리는 보덕사도 들러볼 만하다. 본래 남연군묘는 가야사의 자리였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 질러 스님들을 내쫓고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 훗날 이 사건에 마음이 불편했던 대원군은 보덕사를 지어주었다. 비구니 사찰로 소담한 분위기가 좋다.
  • [웃으며 삽시다] 삼척동자도 아는 즐겁게 사는 법

    [웃으며 삽시다] 삼척동자도 아는 즐겁게 사는 법

    작년의 일이다. 퇴근해서 들어오자마자 양말을 벗어 세탁바구니에 던졌다. 그런데 한방에 골인되는 것이 아닌가!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아내가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치면서 한마디 했다. “우와 대단하다. 자기 농구선수해도 되겠다.” 그 칭찬같지도 않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우쭐했던지 그 다음날도 일찍 퇴근해서 아내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양말을 세탁바구니에 던지며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칭찬을 기대했던 유치 뽕짝했던 기억이 난다. 결혼한 지 8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나는 아내를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잘 살고 있다. 결혼생활이 점점 무덤해지는 것 같아서 1년 전부터 아내에게 하루에 한 개씩 유머를 선물했다. 지금도 이 선물 증정식은 아침에 때론 밤에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바로 아내의 반응 때문이다. 재미있으면 혼자서 뒤집어지며 재미있다 하고 또 재미없어도 박수를 쳐준다. 나의 이 유머선물은 아내의 반응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머 때문에 나는 아내의 남편으로서 때론 가장으로서, 인생친구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이 그렇듯이 조금만 익숙해지면 삶도 그렇고 사람 관계도 무덤덤해진다. 이러한 돌파구를 이겨내고 더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방법이 바로 삼척동자도 아는 ‘3척 동자 이론’이다. 모든 관계의 문은 부부 관계의 문이 열려야 열린다. 먼저, ‘사랑하는 척’ 해보자. 한 아저씨가 ‘아내를 사랑하자’라는 세미나에 참석해서 너무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단다. 그래서 집에 가서 아내를 불러 앉혀놓고 눈을 쳐다보면서 “당신 눈은 호수 같구려. 사랑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 거였다. 망설이고 망설여 한마디 했는데,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내의 눈을 보고서 “당신 눈은 황소 눈깔 같아. 눈에 힘이나 빼” 라는 초특급 울트라 실언을 그만 해버렸다.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부부가 살면서 항상 사랑타령만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보자. 다정한 척, 친한 척 해보자. 신기하고 놀라운 건 그런 척만 해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이 부부다. 표현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영원히 진실이다. 작지만 사랑하는 척 표현해 보자. 그럼 사랑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두 번째로 ‘재미있는 척’ 해보자. 얼마 전에 아내에게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여보 우리 내일은 경복궁이나 가자” 아내는 갑작스럽게 왠 경복궁 타령이냐며 묻는다. “왜?” “아니, 별건 아니고 처갓집에 안 가본 지 오래됐잖아.” 물론 재미있는 유머이기도 하지만 이 유머가 더 재미있는 건 아내가 박수 치면서 웃어주었기 때문이다. 꼭 유머가 아니라도 좋다. 아내나 남편이 이야기를 하면 조금만 더 재미있는 척하는 표정이나 태도를 보여 보자. 부부는 무촌이다. 그래서 부부간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무관심이다. 관심 있는 척 하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된다. 조금만 더 재미있게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보자. 나에게 개인적으로 유머 코칭을 받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평소 부부가 대화가 없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어쩌다 나에게 유머를 배워서 아내에게 사용하면 무덤덤한 표정에 반응도 없어 오히려 자신감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와 한 가지 약속을 했는데 ‘재미있는 척’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약속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웃음뿐만이 아니라 대화의 문이 열렸다고 한다. 무관심을 이겨내는 힘. 바로 재미있는 척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척하면 정말 재미있어지는 것이 또한 놀라운 진실 중 하나이다. 세 번째로 ‘대단한 척’ 해보자.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단다. “여보 나처럼 예쁘고 지성적이고 또 애교도 넘치는 여자를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자화자찬” “그것 말고 한글 ‘ㄱ’자로 시작하는데….” 그러자 남편 왈, “응 과대망상” “아니, ‘금’자로 시작하는 말” “금시초문”… 아내는 ‘금상첨화’라는 말을 기대하고 했던 말이다. 얼마 전 연말 모임에서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갈수록 아내가 자기를 더 무시한다는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하면 자존심 상해서 하고 싶은 말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에게 물었다. 아내가 이야기하면 너는 잘 들어주냐고? 아내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부부는 거울과 같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부부가 똑같이 공명하게 되어 있다. 최근 《SQ 사회지능》이라는 책에서 다니엘 골맨은 더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작년에 한 백화점의 설문에 따르면, ‘어떤 칭찬을 제일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은 답변이 바로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대답이었다고 한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을 넘어 “당신 참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칭찬 한마디를 덧붙여 보자. 사람은 누구나 원래부터 잘했기 때문에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반복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해 줄 때, 더 재미있는 척, 더 대단한 척 칭찬해 주게 될 때 즐거워지고 관계의 문이 열리게 된다. 오늘부터 즐거움의 삼척동자가 돼보자. 하하하. - 최규상의 유머 발전소 글 최규상 한국유머전략연구소(www.nowsmile.co.kr) 소장(cutechoi@dreamwiz.com) 계급별 능력 이병: 능히 혼자서 한 명의 적을 이길 수 있다. 일병: 능히 혼자서 2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 상병: 능히 혼자서 3명의 적을 섬멸할 수 있다. … 병장: 네 명이 모여야 한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 이혼의 이유 한 부부가 이혼 조정 신청을 했다. 재판관: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거죠? 아내: 남편은 항상 일거리를 가져와 집안에서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재판관: 아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것이 어떻게 이혼 사유가 되나요? 그러자 아내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남편은 장의사거든요.” 그들의 여행길 천 원짜리 지폐와 만 원짜리 지폐가 만났다.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러자 만 원짜리가 대답했다. ”응. 카지노도 갔었고 유람선 여행도 하고 또 야구장에도 갔었어. 넌 어땠어?” 그러자 천 원짜리 왈 ”나야, 뭐… 늘 그렇지. 교회, 성당, 절 그리고 교회. 또 성당….” 돈으로 보는 사람 성격 재래식 화장실에서 실수로 * 10원짜리 동전을 빠뜨리면… 수수방관 * 오백 원짜리 동전을 빠뜨리면… 우왕좌왕 * 천 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안절부절 * 오천 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진퇴양난 * 만 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이판사판 * 십만 원짜리 수표가 빠지면… 일단잠수 … … … * 백만 원짜리 수표가 빠지면… 이런 젠장 한방에 보내버리는 유머 퀴즈 머리를 감을 때 제일 먼저 어디를 감을까요? - 눈을 먼저 감는다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무늬는? - 땡땡이 무늬 사오정이 졸업한 고등학교는? - 뭐라고 도둑이 훔친 돈은? - 슬그머니 콧구멍이 큰 여자는 무엇이 클까요? - 코딱지 고릴라의 콧구멍이 큰 이유는? - 손가락이 굵기 때문에     월간 <삶과꿈> 2007.02 구독문의:02-319-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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